소설리스트

20화 (20/43)

“흣, 흐읍… 으응…….”

뒤엉키는 혀에서 퍼지는 찌릿찌릿하게 간지러운 감각과 아래에서 치고 오르는 몸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거센 쾌감이 뒤섞여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울고 싶기도 하고,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너무 쾌감이 강해서 좋다는 생각조차 뒤덮어 완전히 모든 것이 끈적끈적한 쾌감으로 변해 버렸다.

차정한은 혀가 풀리면 다시 얽고, 또 풀리면 다시 깊게 얽으며 나를 완전히 극으로 몰아갔다. 어떻게 해도 그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는 기분에 혀가 내 혀를 감기만 해도 머리 꼭대기에서 쾌감이 온몸을 타고 줄줄 흐르는 것 같았다.

“아…. 읏, 끝이라느니 다시는 안 본다느니 그런 말, 하…. 다시는 하지 마. 네가 전화도 안 받고, 자꾸 그렇게 말할 때마다… 아……. 나 진짜 불안해. 미칠 것 같아.”

“정한아… 이제, 이제 그, 그만… 하으, 으응!”

“너 때문에… 죽고 싶어, 아…….”

허리부터 시작해 온몸이 쫙 펴지는 느낌이 났다. 발끝까지 쾌감이 퍼져 잠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분이 좋아 온몸이 다 바들바들 떨렸다. 나는 엉망으로 터져 나오는 숨을 고르지도 못한 채 그가 당기는 대로 몸을 기울였다. 차정한은 그런 나의 등을 끌어안고 아까처럼 눕히고 다시 다리를 벌렸다. 나는 힘이 빠진 손을 들어 그의 팔을 겨우 잡았다.

“나, 더는 못 해…. 정한아, 나… 더는…… 하으….”

“힘들지, 미안해…. 유현아, 나 못 멈추겠어.”

이번에도 사과와는 다른 움직임이었다. 차정한은 다시 내 안으로 단숨에 파고들어 빠르게 깊은 곳을 찔러댔다. 힘들어 축 처진 몸이 차정한의 움직임 몇 번으로 다시 쾌감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반응할 수밖에 없는 곳을 계속 자극하자 내 앞에 다시 힘이 들어가는 느낌이 났다. 이제는 정말 이러다 큰일 날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저었지만, 차정한은 애를 달래는 것처럼 괜찮다고 속삭이며 허리 짓을 멈추지 않았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가 새까맣게 흔들렸다. 새빨간 색 안에 갇혀 몸이 떨리고, 다시 시야가 새하얗게 변했다. 이렇게까지 기분이 좋아도 될까 싶은 감각이 내가 떠올릴 수 없는 곳에서부터 빠르게 퍼져 온몸을 감쌌다.

아랫배가 조여들며 감각이 한 방울씩 고여 들었다. 팔과 다리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힘이 빠진 채 흔들리고, 겨우 혀만 조금씩 움직여 입 맞추는 그의 혀끝을 마주 머금고 문질렀다. 차정한이 움직일 때마다 미칠 것 같은 느낌이 머리끝까지 치고 올랐다. 힘든데 너무 좋아서 눈물이 다 났다.

“우는 것도… 아, 왜 이렇게 예뻐.”

“나, 정한아… 이제 진짜, 흣, 이상해… 거기, 거기 이제 하면… 으응, 아….”

차정한이 누르는 곳이 정말 이상했다. 같은 쾌감인데 뭔가 이번에는 달랐다. 고이는 느낌도 조금 다르고, 밀려드는 사정감도 아까와는 달랐다.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게 있어 얼른 차정한을 밀어냈지만, 그는 자신이 한 말을 철저히 지키며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아…. 괜찮아. 괜찮아.”

“하으… 아니, 아니야…. 안 괜찮은 것… 으응, 같아… 그, 그만… 아, 안 돼…. 싫어, 진짜, 정, 정한아… 하으읏!”

있는 힘껏 깊은 어디인가를 그가 빠르게 자극한 순간 말도 안 되는 사정감과 함께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쾌감이 너무 강해 큰 소리조차 목 뒤로 넘어가고 터져 나오지 못했다. 온몸이 쾌감으로 절여졌다가 그대로 녹아 물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눈을 겨우 감자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다. 그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느낌조차 쾌감과 뒤섞여 녹아내렸다.

아무래도 실수를 한 것 같았다. 분명 사정감이었지만, 앞에 느낀 것과는 달랐었다. 정액이 아니라면, 분명 내가 실수를 한 게 맞는 것 같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뻗어 이불자락을 당겨 얼굴 위로 가져왔다. 차정한은 내 얼굴을 덮은 이불을 너무나도 쉽게 걷어 버리고 나와 눈을 맞췄다. 그 눈을 마주하자 너무 수치스러워 눈물이 마구 터져 나왔다.

“하…. 왜, 왜 울어. 어디 아파? 유현아.”

울고 싶지 않은데 차정한의 얼굴을 볼 낯이 없어 울음소리까지 흘러나왔다. 차정한은 우는 나를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내려 보며 손만 이리저리 움직였다.

“유현아. 왜 그래, 응? 그만하라고 그랬는데 내가 또 해서 그래?”

“…그래. 내가 이제 못 한다고 했잖아. 못 한다는데 네가 해서… 내가 실수나 하고…….”

“실수? 무슨 실수.”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고 잠시 생각하던 차정한이 젖은 손을 들어 올렸다. 물에 젖은 그의 손을 보는데 이대로 기억을 잃고 기절하고 싶었다.

“혹시 이거 때문에? 이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는 아닌 것 같은데.”

“…….”

“진짜야. 이거 네가 실수한 거 아니고, 아마 좋아서… 터진…….”

“마, 말하지 마….”

뒷말까지 다 들으면 정말 고개를 들 수 없을 것 같아 얼른 그의 손목을 잡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내리고, 말도 하지 못하게 했다. 실수가 아니라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했다.

“알았어. 안 할게. 그러니까 울지 마. 실수한 거 아니야.”

“…어떻게 알아.”

“아, 이거 전에 의학 드라마 찍을 때, 공부하다가 봤어.”

“…….”

전에 차정한이 했던 드라마 중에 의사로 나왔던 적이 있었다. 그중 감초 역할로 나온 친구와 남자의 이런 전립선 기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때 알게 된 사실인 모양이었다. 알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실수가 아니어도 부끄러워 차정한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건 똑같았다.

내 안에서 빠져나온 차정한이 침대 옆에 있는 티슈를 뽑아 내 아래를 살짝 닦아 주었다. 어쩐지 간지러운 분위기에 얼른 이불을 끌어 올려 얼굴까지 덮고 몸을 옆으로 돌렸다. 차정한이 이불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에 몸을 돌려 보니 그런 나를 본 그가 씩 웃었다.

“…여기서 잘 거야?”

“그럼 집에 가? 지금 거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됐어.”

“……그럼 내가 나가서 잘게. 너 여기서 자.”

몸을 일으키는데 차정한이 내 몸을 잡아 쉽게 다시 내가 누워 있던 자리로 눕혔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얼굴에 묻어 있던 장난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랑 같은 침대에서 처음 자 봐? 서운하게 왜 그래, 갑자기.”

“…처음은 아니지만, 그때랑 지금이랑 같아?”

“다르지.”

“그래, 달라. 다르니까 이래.”

“다른 거 나도 아는데, 그래도 난 너 지금 혼자 못 두겠어.”

“…….”

“그리고 나도 혼자 있기 싫어.”

혼자 못 두겠다는 말보다 혼자 있기 싫다는 그 말이 더 마음 아팠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것을 알기에 그동안 늘 마음이 쓰였고, 외로움을 친구인 내가 채워 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나랑 자고 싶다며.”

“…….”

“이렇게 자는 건 싫어?”

진지한 얼굴 위로 소년 같은 장난기 어린 웃음이 살짝 퍼졌다. 그 얼굴을 보는데 언제라도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다정하고 따뜻한 너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아, 이제 졸리다.”

옆으로 누운 차정한이 내 어깨 위로 이불을 끌어 올려 덮었다. 그리고 침대 옆 버튼을 눌러 완전히 불을 껐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어둠과 마주하자 꼭 조금 전까지 있었던 모든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잘 자.”

“…너도.”

“유현아.”

“…응?”

“나 좀 안아 주라.”

“…….”

“잠깐이라도 좋아.”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잘 보이지 않는 그의 팔을 잡아 살짝 당기자 차정한이 기다렸다는 듯 내게 다가왔다. 나는 내 품으로 안겨 드는 차정한의 어깨를 조금 머뭇대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안았다. 나를 뒤덮는다는 게 더 어울릴 만큼 나보다 큰 몸이 내게 닿아 온몸을 데웠다.

이 잠깐의 시간이 얼마나 유지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차정한과 함께라서 좋았다. 날이 밝으면 다시 마음을 정리하고, 이제 정말 끝나 버린 친구의 흔적을 보며 그리워하게 되겠지만, 아직은… 그래, 아직은 이렇게 닿아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직 서로에게 이렇게 같은 온도의 체온에 묻어 있으니까. 채 가시지 않은 열기와 너무도 생생하게 퍼졌던 감각들이 기억 속에 달라붙어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내 품으로 더 파고드는 차정한을 조금 더 꼭 끌어안았다. 닿는 것이 허락된 마지막 시간이라는 것을 알기에.

#44

?

?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차정한을 안고 잠들었는데 눈을 떠 보니 내가 차정한에게 안겨 있었다. 게다가 먼저 깨서 나를 보고 있던 건지 차정한과 눈이 마주쳐 더 놀라 몸을 서둘러 떼어냈다. 차정한은 그런 나를 보며 서운한 얼굴을 했다. 밀어내도 모자랄 판에 저렇게 서운한 얼굴을 하는 것을 보니 조금 기가 찼다.

“너무 매몰차게 떨어지는 거 아냐?”

“…놀라서.”

“네가 나한테 막 파고들어서 나도 너 안아 준 거야. 잘 때는 네가 나 안아 줬으니까.”

“…내가 너한테 막 그랬다고?”

확실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차정한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솔직히 믿기 힘들었지만, 가만히 있는 나를 안을 이유가 차정한에게는 없기에 결국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나 때문에 불편했겠다. 얼른 집에 가서 푹 쉬어.”

“유현아.”

“…….”

“그러지 마.”

“…….”

“나한테 선 긋지 마.”

나는 감상에 빠져 사는 사람도 아니고, 불가능한 것을 꿈꾸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도 아니었다. 뜨겁고 따뜻했던 새벽은 지났고, 이 시간은 어제 동창들과 가진 술자리와 이어지는 시간이었다. 꿈과 같았던 새벽의 감상에 젖어 차정한을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선을 긋는 게 아니라… 현실로 돌아왔을 뿐이야.”

“이게 현실이면 새벽에 우리가 한 건? 그건 뭔데.”

“꿈 같은… 현실.”

“그래, 꿈 같든 아니든 현실은 현실이야. 그 일을 거쳐서 지금, 이 시간이 된 거라고. 왜 그 일은 없던 것처럼 다시 이렇게 차갑게 굴어.”

“난 너랑 자고 싶다고 했고, 넌 나랑 자 줬어. 그 시간은 끝났고, 난 상황 파악을 한 거야. 거기에….”

“거기에?”

“주제 파악까지 한 거고.”

주제 파악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차정한이 짧은 숨을 탁 내뱉었다. 나는 닿아 오는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주제 파악? 진짜 미치겠네. 너 나 도는 꼴 기어이 볼래?”

“정한아. 화낸다고 해결될 일 아니야. 너도 알잖아.”

“그래. 화낸다고 해결될 일 아니지. 그럼 어떻게 할까. 내가 너 집에 끌고 가서 어디 방에 가두기라도 할까? 어쩔 수 없잖아. 난 너 없으면 안 되고, 넌 자꾸 이렇게 나한테 선 긋고.”

화가 난 차정한의 말이 빠르게 흘러나왔다. 그 사이로 울리는 진동에 나는 바닥으로 떨어진 차정한의 코트를 바라보았다. 차정한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신경질적으로 코트를 들어 휴대폰을 꺼냈다.

“어, 형. 무슨 일이야?”

동윤 형에게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무슨 내용인지 가만히 내용을 듣던 차정한의 얼굴이 짜증으로 물들었다.

“그걸 지들이 날려 먹고 왜 나한테 다시 녹음하래. 못 한다고 해. 아니, 이미 내가 한다고 홍보를 했든 안 했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난 하기로 한 거 다 했고, 날려 먹은 건 자기들이면서 왜 내가 지금 가서 그걸 다시 해야 되는데, 왜.”

뭔가 일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차정한은 화를 억누르는 듯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내가 지금 이 기분에 가서 펭귄 어쩌고 하게 생겼어? 그리고 형, 나 지금 못 가. 해결할 일도 있고, 펭귄이 어떻게 되든 내가 지금 그걸 생각할 여유가 없어.”

펭귄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니 저번에 녹음한 다큐멘터리 음성 파일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차정한이 말하는 해결할 일이 나와의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어 조금 몸을 움직여 차정한에게 다가갔다.

“녹음 파일에 문제 생긴 거야?”

내 물음에 차정한이 잔뜩 짜증이 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예민한 얼굴이지만, 내게 닿는 목소리는 짜증을 섞지 않으려 노력하는 듯 억눌려 있었다.

“어, 날렸다고 지금 급히 좀 와서 해 달래.”

“방송 며칠 안 남았잖아. 그거 유명한 다큐라 사람들 기대도 크고, 네가 한다고 이미 홍보도 다 됐고…. 너한테 득이 더 커. 나중에 이런 일이 있었는데 흔쾌히 재녹음을 해 줬고, 더 잘했다 이런 말 뒤에서 분명히 나올 거야. 네 이미지에도 좋고. 방송국에서 그런 말 얼마나 빨리 도는데.”

“내가 지금 이 기분에 가서 펭귄 타령 하게 생겼어?”

“기분… 어떻게 하면 풀리는데?”

“…….”

“응? 정한아.”

조금 누그러진 눈으로 나를 본 차정한이 조금 생각하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저녁 같이 먹어.”

“…….”

“저번에 너 그렇게 가서 같이 못 먹었고, 네 생일도 그렇게 보냈잖아. 그리고 오늘 올해 마지막 날이기도 하고.”

“…저녁….”

“어려운 일이야? 너한테는 벌써 나랑 밥 먹는 게 그렇게 고민까지 할 일이야?”

“아니야. 알았어. 같이 먹자.”

내 대답을 들은 차정한이 침대에 눌러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고 있던 휴대폰을 들어 다시 귀에 댔다. 준비하고 가겠다는 말을 하는 차정한을 보니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이제 됐지. 아, 너 때문에 한다고 하긴 했는데…. 그거 진짜 얼마나 힘든지 알아?”

“알지…. 그래도 하기를 잘한 거야. 분명히 너한테 좋은 일로 돌아올 거야.”

침대에서 일어난 차정한이 나를 내려 보았다. 괜히 이불을 끌어 몸을 조금 가리자 짧게 숨을 내뱉은 그가 탄식하듯 말했다.

“난 너랑 너무 당연하게 같이 있던 그 시간이 돌아오면 좋겠어.”

“…….”

“진짜 나한테 필요한 건 방송국에 도는 내 미담도 아니고, 좋은 이미지도 아니야.”

“…….”

“너야.”

“…….”

“모른다고는 하지 마. 너도 아니까 날 아직도 달래서 다시 녹음 보내는 거겠지.”

욕실로 들어가는 그를 보다가 이불을 끌어모아 그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태어나 가장 충동적인 일을 두 가지나 해서 그런지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하지만 그 복잡한 머릿속에서도 결국, 중심이 되는 것은 딱 하나였다. 차정한.

“…….”

지금이야 13년 동안 함께해 온 습관 같은 날들이 너무 단단히 그에게 존재하기에 내가 없으면 안 될 거라고 생각할 것이었다. 외로움을 내게 기대고,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내게 말하며 차정한은 나를 완벽하게 신뢰했다. 자기 자신보다 나를 더 좋아한다고 말할 만큼 절대적인 믿음을 주었다.

그런 나에게 배신감을 느껴야 마땅한데도 그는 배신감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다 해 주겠다고 말하며 곁에 있으라고만 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게는 좋은 일처럼 들리지만, 그렇게 이어지는 관계는 결코 오래갈 수 없었다.

섹스까지 해 버린 13년 지기 친구는 더 이상 친구라는 이름을 가질 수가 없었다. 당연히 일방적인 사랑으로 연인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도 없고, 우리는 결국, 아주 친한, 너무 친해 섹스까지 한 배우와 매니저로 남게 될 것이었다.

차정한은 나를 처음에는 전처럼 편하게 친구로 대할 거고, 나도 그러려고 애쓸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알아 버린 이상 우리의 시간 안에 그 감정은 언제고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차정한이 그 감정을 철저히 모른 척해도 나는 상처 받을 거고, 그가 적절하게 내 마음을 받아 주는 배려를 해도 나는 결국, 상처 받을 것이었다. 차정한은 그런 나를 보며 눈치를 보게 될 거고, 말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대화가 줄어들고, 둘의 시간이 줄어들면 함께 있을 필요 역시 없게 될 것이었다. 나는 그런 과정을 거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고백한 순간부터 우리의 친구라는 이름에는 금이 갔고, 그 금이 간 조각이 부서지지 않게 들고 내게 다가온 차정한과 섹스한 새벽… 그 조각은 다시 붙일 수 없게 흩어져 버렸다.

“…….”

우리는 이제 친구가 아니었다.

씻고 나온 차정한을 마주하면 또 조금 민망할 것 같아 아예 이불 안으로 들어가 자는 척을 했다. 모든 일에 거리낌이 없고, 늘 당당한 차정한은 이 아침에조차 전과 다른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차정한을 편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이렇게 벗은 채 같은 방에 있다는 자체로도 정신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자?”

등 뒤에서 차정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눈을 감은 채 조금 버텼다. 차정한이 다가와 이불을 끌어 올려 내 어깨 위까지 덮어 주었다. 안 자는 것을 안다는 듯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헤집으며 만진 차정한이 침대에서 멀어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몸을 더 웅크려 이불 안으로 완전히 파고들었다. 조금 더 편하고 싶어 숨은 이불 안에서는 차정한 냄새가 났다. 새벽까지 내게 온통 묻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던 그 따뜻하고 가슴이 뛰는 냄새가.

“유현아.”

“…응.”

내가 안 잔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그에게 계속 자는 척을 하는 게 더 민망해 대답하자 차정한이 다시 가까워지는 소리가 났다. 그가 침대에 걸터앉는 느낌에 마음도 따라 덜컥였다.

“중간에 대충 몇 시에 끝날지 알려 줄게. 출발할 때도 전화하고.”

“알았어.”

“나 갈 테니까 편하게 쉬어. 점심 먹을 거 사다 주고 갈까?”

“…안 그래도 돼. 알아서 먹을게.”

“그래. 꼭 먹어.”

다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차정한이 일어나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드라이어 소리가 나고, 옷을 갈아입는 소리도 났다. 사부작사부작 그가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꼭 이게 일상인 것만 같았다.

“다녀올게. 이따 보자.”

“…응.”

방을 나가고, 조금 뒤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난 뒤에야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이 빠졌다. 완벽한 정적과 마주하자 생각이 몰려들며 무거워진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45

?

?

혼자 남은 뒤에야 새벽의 일들이 여러 감정과 함께 밀려들었지만,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긴 생각을 하고 또 해도 결국,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난 너랑 너무 당연하게 같이 있던 그 시간이 돌아오면 좋겠어.’

오랜 친구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듣고, 너와 자고 싶다는 말까지 들었는데 차정한은 여전히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새벽에 친구라면 할 수 없는 섹스까지 했는데도 전혀 변화가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흔들리지 않는 차정한의 그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한편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진짜 나한테 필요한 건 방송국에 도는 내 미담도 아니고, 좋은 이미지도 아니야.’

그동안 사람들이 우리 둘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만큼 유난이라고 했던 이유를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친구 사이에 일어날 수 없고, 일어나면 당연히 그 친구라는 이름이 깨져 버릴 일이 연달아 일어났는데도 나를 잃을 수 없다는 차정한의 말은 분명 평범한 반응과는 달랐다.

‘너야.’

나는 어쩌면 차정한의 부모 자리를 대신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의 삶에 있어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던 친구인 나를 잃는다는 게 굉장히 무서운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차정한에게 더 미안하고, 더 죄스러웠다. 그래서 그의 말에 자꾸 휘둘려 충동적인 말을 내뱉는 내가 너무 싫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차라리 자는 게 좋을 것 같아 눈을 감았다. 복잡한 생각들이 하나둘 머릿속 여기저기를 두드리며 돌아다녀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몇 번이나 뒤척이고, 결국은 침구에 가득한 그의 체취에 몸을 일으켰다.

오지도 않는 잠을 청하고 있느니 정신을 차리고 뭔가를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몸을 완전히 일으키자 낯선 묘한 통증이 몸 곳곳에서 느껴졌다. 특히 다리 사이 깊은 곳이 조금 화끈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애써 모른 척하고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어냈다. 따뜻한 물이 닿을 때마다 차정한이 내 몸을 덮고, 여기저기 입을 맞추며 파고들었던 게 떠올라 한 번씩 멍해졌다.

씻는 동안 뭔가가 다리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느낌에 놀라 보니 차정한의 정액이었다. 솔직히 이런 뒤처리에 대해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어 그런지 잠시 멈춰 손에 묻은 것만 한참을 바라보았다. 다시 새벽으로 돌아가 온몸을 뒤덮었던 차정한의 온기와 움직임 끝에 몇 번이나 내 안에 사정했던 게 떠올라 그제야 뒤처리를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안에 있는 것들을 전부 빼냈다. 내가 내 안으로 손가락을 넣는다는 건 굉장히 어렵고 힘든 일이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씻고 나서는 침대 시트와 이불, 베개 커버를 전부 벗겨내 세탁기 안에 넣었다. 창도 활짝 열고, 블라인드도 전부 걷어 집 안으로 쏟아지는 빛과 마주했다. 빛이 내 겉을 비추는 게 아니라 엉망인 속을 전부 비추는 것 같았다. 잘 보라고, 보이면서 모르는 척 충동에 휩쓸리는 너를 이렇게 환하게 한번 보라고 꾸짖는 것 같아 그곳에도 오래 머물지 못했다.

늦게 들어오고, 또 새벽에 그런 일까지 있어서 조금만 움직여도 금세 피로감이 느껴졌다. 창을 닫고 소파에 앉아 멍하니 새까만 텔레비전 화면을 보는데 문득 식당에서 봤던 차정한의 수상 장면이 떠올랐다. 안 그래도 집에 가서 그 장면을 제대로 다시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차정한과 마주하는 바람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는 얼른 노트북을 가져와 포털 사이트에 접속해 차정한의 이름을 검색했다.

엄청난 조회 수와 함께 차정한의 수상 장면이 클립으로 올라와 있었다. 이 드라마를 찍을 때 차정한이 유독 많은 고민을 했던 게 떠올라서 그런지 상을 받은 걸 다 알고 누르는데도 긴장이 됐다.

최우수상 남자 후보의 인상 깊은 드라마 장면들이 지나가고, 전년도 최우수상 수상자가 차정한의 이름을 크게 호명했다. 많은 사람이 일어나 차정한의 수상을 축하하고, 기뻐했다. 웃는 얼굴로 당당히 무대 위로 올라가 트로피와 꽃다발을 받는 모습이 멋져 몇 번이나 돌려보았다.

<감사합니다.>

스탠드 마이크 앞에 선 차정한이 트로피를 한 번 보고, 앞을 바라보았다. 감사하다고 말하는 그 얼굴은 어제 소음이 심한 식당 안에서 유일하게 반짝였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이 작품을 하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연기를 시작했고, 운이 좋아 꾸중보다는 칭찬을 많이 받으며 연기를 해 왔습니다. 열심히 했으니까 그런 칭찬을 받는 거라고 생각도 했었는데요. 이 작품을 하며 내가 잘나서 칭찬받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지한 얼굴과 낮은 목소리에 차정한의 진심이 느껴졌다. 현장에서 보지 못한 게 미련이 남을 만큼 멋있어서 자꾸 아쉬움이 따라붙었다.

<나 혼자만 노력하고,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곳,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늘 열심히 뛰시는 많은 스태프분들이 계시기에 구석구석 모든 면에서 매끄러운 훌륭한 작품이 완성된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달았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시작한 차정한이 이렇게 모두의 인정을 받는 멋진 배우가 되기까지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게 떠올라 마음이 울렁였다. 참기 힘든 순간도 분명 많았을 텐데도 참고 견뎌줘서 정말 다행이고 고마웠다.

<작품을 위해 불철주야 고생하신 스태프 여러분들, 그리고 작품을 시청해 주신 시청자 여러분들에게 이 영광을 바치겠습니다. 자만하는 배우가 아니라 모든 분들과 소통하고, 어울리며 연기할 수 있는 배우가 되겠습니다.>

혼자 저렇게 잘 말하는 차정한을 보니 이제 진짜 내가 없어도 될 것 같았다. 차정한이 배우라는 걸 이미 알고 있고, 참 오래 봤는데도 이렇게 한 번씩 멀게, 정말 배우 차정한으로 느껴질 때가 있었다.

<제가 연기를 마음 편히 즐기면서 할 수 있게 늘 도와주는 소속사 분들, 늘 고생하는 매니저 동윤 형 늘 고맙습니다. 소식 듣고 기뻐하실 할아버지, 할머니께도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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