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이어진 인사에 마음이 놓였다. 차정한이 잘 찾아뵙지도 않고 하지만, 늘 차정한을 걱정하시는 그의 조부모님께 인사를 잊지 않아 정말 다행이었다.
<마지막으로….>
조금 전 인사가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 차정한은 한 번 더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앞을 보며 걸을 수 있게 오랜 시간 동안 늘 저와 같이 걸어주는 제 친구 유현이에게 정말 고맙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화면 속에서 나를 보고 웃은 차정한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영상은 끝났지만, 나는 새카매진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보지 않는 게 더 좋았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제 이걸 봤다면… 이 소리를 들었다면, 차정한에게 자고 싶다는 말은 충동적으로라도 꺼내지 않았을 것이었다.
어제 이걸 보지 않은 게 문제인 걸까. 지금 이걸 본 게 문제인 걸까. 뭔가 후회스럽기는 한데 뭐가 후회스러운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하나 확실한 것은 이렇게 내내 흔들리며 끌고 갈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보기를 하고 싶은 마음을 누른 채 노트북을 덮었다.
다섯 시쯤 곧 끝날 것 같다고 메시지를 보낸 차정한은 다섯 시 반에 출발한다고 전화했다. 그리고 여섯 시가 조금 넘어 곧 주차장으로 들어가니 내려오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처음 그가 메시지를 보낼 때부터 나갈 준비를 하고 있던 터라 나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한 번 본 뒤에 집을 나섰다.
아래로 내려가자 밴이 들어와 앞으로 섰다. 차정한은 밴에서 내려 동윤 형과 인사했다. 나를 걱정하는 눈으로 보는 동윤 형에게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하고 차를 보냈다. 차정한은 키를 꺼내 이 오피스텔 주차장에 만일에 대비해 늘 세워 두는 차 문을 열고, 나를 보았다.
“가자.”
“응.”
차정한은 차에 타 시동을 걸며 나를 바라보았다. 안전벨트 버클이 맞물리는 소리가 정적 속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좀 쉬었어?”
“…응.”
“다행이다.”
꽤 어색한 대화였다. 다행이라는 그의 말을 끝으로 차가 움직였다. 차정한은 저번에 내가 고백한 곳이 아닌 다른 레스토랑으로 차를 몰았다. 그 호텔도 마찬가지로 VVIP 담당자가 미리 나와 차정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레스토랑 안 아주 조용하고 야경이 좋은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위기를 풀기 위해 담당자가 수상을 축하한다는 인사와 한 해를 잘 보내고, 또 잘 맞이하라는 덕담 같은 것을 말할 때만 차정한이 짧게 대답했다.
장소는 다르지만, 지난번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코트를 받아 주는 직원에게 인사를 하고 앉아 능숙하게 주문하는 차정한을 바라보았다. 오늘 모든 것을 정리한다고 해도 나는 살며 차정한을 계속 보게 될 것이었다. 버스정류장에서도 볼 거고, 드라마, 광고, 잡지 같은 곳에서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그를 마주하게 될 것이었다. 잊으려는 노력에는 불행이겠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생각하면 참 다행이었다.
“재녹음은 어땠어?”
“마음 같아서는 한마디 하려고 했는데 다들 너무 미안해하고, 고마워하고 해서 그냥 좋게 다시 잘했어. 저번보다 더 잘한 것 같아.”
“잘했어. 진짜 이제 너 나 없어도 이렇게 다 잘할 수 있어.”
“그 말이 하고 싶어서 물은 거야? 너 없어도 나 이제 잘하니까 친구고 뭐고 다 끝내자고? 앉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그렇게 그 말이 급해?”
차정한의 말이 맞았다. 여기 들어와 앉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이제 음식 주문이 들어간 상태였다. 이런 말은 조금 더 돌리고 돌려 분위기가 지금보다 풀어졌을 때 하는 게 더 좋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마음이 급했다. 내 마음이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걸 지난 새벽부터 여기 오기 전까지 너무나도 정확하게 알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 난 좀 급해. 난 너랑 이렇게 있으면 내 마음… 정리 못 할 것 같아. 혼자 정리하고 또 정리하던 게 너랑 마주하면 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널 사랑하는 마음밖에 안 남아.”
“날 그냥 계속 사랑하면 되잖아. 왜 자꾸 일어나지도 않은 나중을 걱정해. 어떻게 되든 그건 그때 우리가 다시 얘기하면 되는 거잖아.”
“난 그렇게 쉽지가 않아. 친구라는 내 위치를 끝까지 지키지 못한 것도 미안하고, 내가 폭탄을 던졌는데 화도 안 내고, 오히려 나를 이해하면서 옆에 있으라는 너를 볼 때마다 죄책감이 들어 미치겠어.”
“친구 아니어도 돼.”
차정한의 말은 조금 충격이었다. 우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나라는 친구의 존재를 의지하던 그가 친구가 아니어도 된다는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나는 하려던 말을 다 잊은 채 그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46
?
?
“그래. 네 말대로 섹스하는 친구가 어디 있어. 자고 싶다고 말하는 친구도, 그걸 듣고 그래, 자자고 하는 친구도 없겠지. 그래서 친구가 더 이상 될 수 없다면…. 그래, 친구 아니어도 돼. 그냥 내 옆에 있기만 해.”
“…….”
“내가 막무가내로 우기고, 조르고 그런다고 생각하겠지만, 나 진지해. 어느 때보다도 진지해.”
“…….”
“생사의 기로에 선 기분이야.”
“…….”
“그때도 그랬어. 부모님이랑 사람들 때문에 죽고만 싶은데 고등학교는 또 가야 한다니까 가서 다 귀찮고, 생각도 없고 시간만 죽이고 있는데 한번 말도 안 해 본 반장이 와서 내 이름을 부르는 거야.”
“…….”
“정한아.”
“…….”
“야, 차정한도 아니고 정한아.”
“…….”
“선물을 주는 것도 아니고, 뭘 같이 하자는 것도 아니고 참가서를 달래. 별말도 아닌데 그냥 그 평범한 말, 나 빼고 다 적응했을 일상의 그 말을 네가 나한테 처음 했어.”
그때 그의 상황에 대해 아는 것도 하나 없고, 그저 잘생겨서 인기가 아주 많지만, 그런 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애…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도 차정한의 등을 보고 있으면 참 많이 외로워 보였던 기억이 났다. 다들 차정한의 눈치를 보고,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었다.
“그 한마디에 너는 믿어도 될 것 같았어. 믿고 싶고, 친해지고 싶었어. 너랑 있으면 상처 같은 거 안 받고 좋을 것 같았어.”
“…….”
“너랑 친구가 되고 싶었어.”
“…….”
“지금도 그래. 내 생각은 그대로야. 내가 믿는 건 너 하나고,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도 너밖에 없어. 왜 네가 고백을 하고, 나랑 자고 싶다고 하는데도 화를 안 내고 받아만 주냐고?”
“…….”
“네가 날 사랑하는 건 나한테 상처가 될 일이 아니니까.”
그의 말을 끊지 않고 다 들은 뒤에야 왜 그가 나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알았다. 내가 차정한에게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우정’을 지키고 싶어 뭐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친구를 위해, 13년 동안 자신과 함께였던 친구를 위해 지금 차정한은 넓은 마음으로 이해를 하고, 배려를 하며, 내 요구가 무엇이든 들어주려고 애쓰고 있었다. 내가 차정한을 사랑하는데 왜 우리의 우정이 끝나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정한아.”
“응.”
“날 사랑해?”
“…….”
차정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당황한 것 같기도 하고,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예상한 반응이라 상처는 받지 않았다.
“날 좋아해?”
“…좋아해.”
“사랑해?”
“…….”
차정한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몇 번을 물어도 차정한은 대답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사랑을 알지 못했다.
“친구로 나를 믿고 의지한 너를 배신한 건 나야. 거짓말을 한 것도 나고, 그 믿음을 저버리고 나한테 그런 말을 들은 너한테 자고 싶다는 말까지 해서… 완전히 친구라는 말을 산산조각낸 것도 나야.”
“…….”
“난 널 사랑해. 지금까지는 널 위해 숨길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숨길 자신이 없어. 내가 숨기고, 네가 아무렇지 않게 전처럼 대한다고 해도… 우린 이미 다 알고 있잖아. 그렇게 이어가는 관계가 언제까지 갈까.”
“사랑…. 그래. 난 네가 말하는 사랑이 뭔지 잘 몰라. 내가 널 좋아하는 거랑 네가 날 사랑하는 거랑 뭐가 그렇게 다른지도 잘 모르겠어. 사랑이라는 게 존재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있다고 해도 영원할 거라는 생각도 안 해. 그런 사랑을 본 적이 없으니까.”
덤덤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를… 이런 순간에도 안아 주고 싶었다. 사랑을 해 본 적이 없고, 받아 본 적이 없어 알지 못하는 건 차정한의 잘못이 아니니까.
“부정적인 생각인 것도 맞아. 그런데 네가 하는 사랑은 다르겠지.”
“…….”
“다를 거야. 좋은 걸 거야, 그건.”
“…….”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네가 날 사랑한다는 건 좋았어. 나한테 전혀 배신감도 상처도 아니야. 너니까.”
“…다행이다.”
“뭐가.”
“오랫동안 걱정했어. 언젠가 네가 알게 되면 내 감정이 너한테 상처가 될까 봐. 그래서 숨겼어. 그만두려고도 했었는데 매번 잘 안 되고…. 네가 알면 정말 안 될 것 같아서 숨기는 수밖에 없었어.”
차정한에게 고마웠다. 13년 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이 감정이 그에게 상처와 배신감이 아니라고 소리 내 줘서 정말 고마웠다.
“그럼 된 거잖아. 나한테 상처도 아니고, 배신감도 아닌데…. 나 또 똑같은 얘기 하네. 알았어. 당분간 이렇게라도 있자. 집에 오라는 말 안 할게. 하루에 한 번이라도… 아니, 사흘에 한 번이라도 이렇게 봐. 보기만 해.”
“…….”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대화의 가운데를 자르며 주문한 음식들이 놓였다. 이번에도 대화가 끊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면서 디저트만 빼고 다 한 번에 세팅해 달라는 차정한의 요청으로 음식이 전부 한 번에 테이블을 가득 채우며 놓였다.
“일단 먹어. 네 생일 그렇게 보내고 내내 마음이 안 좋았어. 늦었지만, 이렇게라도 맛있는 거 먹이고 싶었어.”
굳게 마음을 먹고 나왔는데 차정한이 너무 다정해서 자꾸 단단한 마음이 녹아내렸다. 눈빛과 목소리, 그리고 나를 향한 배려와 마음까지 늘 그랬던 것처럼 너무나도 다정했다.
“네가 다정해서 너무 좋아.”
“…….”
“그리고 너무 아파.”
“…….”
“…나 때문에 너무 그렇게 노력하지 마.”
“지유현. 너 진짜 잔인해. 네 마음은 화가 안 나는데 나 피하려는 네 그 태도는 화가 나서 미치겠어. 돌아버릴 것 같아. 마음 같아서는 너 잡아다가 그냥 집에 가두고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만들어 버리고 싶어.”
화가 묻은 목소리에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나는 차정한이 내가 있어야만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그 어릴 때의 생각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솔직히 그렇게 할 수도 있어. 자꾸 화나게 하지 마. 내가 어떻게 하면 돼. 또 자면 돼? 할 수 있어. 네가 하자는 대로 나 다 할 수 있다고.”
“어제 어땠어?”
“뭐?”
“나랑 자면서 어땠어? 좋았어? 어땠길래 또 할 수 있다고 하는지 궁금해서 그래.”
내가 이런 것을 물을 줄 몰랐다는 듯 조금 당황한 눈으로 나를 보던 차정한이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좋았어. 솔직히 나도 막 덤빈 게 없지 않아 있었는데 결론적으로 기분 좋았어. 내가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떨리지는 않았어?”
“…….”
“날 볼 때 어땠어? 난 널 보면서 너무 떨렸어, 정한아.”
“…….”
“네 눈만 봐도 막 도망가서 숨고 싶을 만큼 너무 떨리고 설레고… 부끄러웠어.”
차정한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뭔가 꼭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아마 그는 나와 섹스하는 동안 내가 머금은 감정들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었다. 친구와 섹스가 가능하다는 게 신기했을 거고, 또 한편 다행이었을 것이었다. 자자고 대답했는데 이어 갈 수 없게 발기가 되지 않거나 전혀 감흥이 없다면 곤란했을 테니까.
나의 벗은 몸을 보고 거부감이 들지 않아 안도했을 거고, 생각했던 것, 걱정했던 것보다 기분이 좋아 자신이 한 대답에 책임을 질 수 있어 안도와 만족을 느꼈을 것이었다.
“너는?”
“…….”
“너는 날 보면서 어땠어?”
“…….”
“다행이었지? 거부감이 들지 않아서. 끝까지 할 수 있게 몸이 반응해서 안도했지. 거기에 기분까지 좋아서 더 다행이었을 거야.”
“…….”
“자고 싶다는 내 말에 자자고 했는데 끝까지 못 하면 나한테 상처 줄 것 같아서 걱정한 거잖아. 그 퀘스트를 깨야 나한테 한 번 더 이런 말을 할 명분이 생기니까.”
내 입으로 이런 말까지는 정말 하고 싶지 않았다. 듣는 차정한에게도 또 말하는 나에게도 상처가 될 걸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면돌파를 할 수밖에 없었다. 돌리고 또 돌려서 말을 해도 차정한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고집을 꺾을 능력이 없고, 늘 질 수밖에 없었다.
“너 원망하는 거 아니야. 당연한 거잖아.”
“그렇게 느껴졌어?”
“…….”
“그런 나를 보면서도 떨리고… 설��다고?”
“너니까.”
“…….”
“정한이 너라서 난 정말 좋았어.”
괴로운 것처럼 바라보던 차정한이 몸을 테이블 쪽으로 기울이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울고 싶을 줄 알았는데 눈물은 나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를 보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어둑한 창에 비친 차정한의 모습이었다.
“배고프다. 우리 이거 먹자.”
나는 일부러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썰었다. 조금도 입맛이 없었지만, 나까지 괴로워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내 생일을 그냥 지난 게 마음에 걸렸다며 마련한 차정한의 이 마음을 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맛있다.”
체하지 않도록 조금씩 전부 맛을 보았다. 얼굴을 덮고 있던 손을 내린 차정한이 의자 뒤로 몸을 기댄 채 고개를 숙였다. 자신도 정리가 되지 않아 미처 마주하지 못했을 사실을 내게 들어 생각이 많아졌을 것이었다.
“정한아…. 갈까?”
내 물음에도 조금 더 고개를 숙이고 있던 차정한이 기대고 있던 등을 떼며 나를 바라보았다.
“먹고 가자.”
“…….”
“같이 저녁 먹으러 온 거잖아, 우리.”
생각이 많아지거나 조금이라도 불편한 자리에서는 무엇도 제대로 먹지 않는 차정한이라는 것을 알기에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나도 차정한과 관련된 일이라면 지나치게 걱정하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기에 지금은 조금 내려놓기로 했다. 차정한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같이 저녁을 먹으러 온 거고, 그저 맛있게 식사를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이 저녁을 먹었다. 지난번 먹지 못한 저녁을 대신하기도 하고, 내 생일에 아무것도 같이 하지 못한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또 우리의 모든 것을 담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이기도 하니까.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아주 조용하고, 또 아주… 근사한 저녁이었다.
#47
?
?
음식을 다 비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손대지 못한 지난번과는 달리 같이 식사를 했다고 말할 정도는 됐다. 디저트가 남아 있었지만, 우리는 레스토랑을 나섰다. 차정한은 조용히 생각에 잠긴 채 나를 오피스텔까지 데려다주었다. 조심해서 가라고 말을 하고 내리면 되는데 그 말이 입가에 맴돌며 나오지가 않았다.
“네 말이 다 틀렸어.”
“…….”
“잘못 짚었어. 오해야. 날 도대체 어떻게 생각했으면 그렇게 말을 해. 난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
“계속 이렇게 말하고 싶어. 아니라고 하고 싶은데 전부 아니지는 않아서 말을 못 해. 다 맞다고 하기에는 아닌 것도 있어서 억울하기도 해.”
덤덤한 목소리 사이로 한 번씩 감정이 뒤섞였다. 차정한은 내내 앞을 보며 말했다. 나는 그런 차정한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따위로 구는 나를 보면서도 떨리고 설레는 게 사랑이야?”
“…….”
“…사랑이 비참해도 좋은 거야? 그런 생각이 들어도 나를 안고, 마주할 수 있는 게 사랑이야?”
“…….”
“진짜 난 사랑이 뭔지 모르겠어. 뭘 어떻게 해야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건지 난 진짜 모르겠다. 네가 이해가 안 되기까지 해.”
“사람마다 다 달라서 그런 거야. 이해 못 할 수도 있어.”
“그런 너한테 조르고, 매달리기나 했다니. 쪽팔려 미치겠어.”
핸들을 잡은 채 이마를 대었다가 뗀 차정한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가 차정한의 마음을 대신 소리 내어 말한 뒤로 처음 마주하는 시선이었다.
“다시 생각할게.”
“…….”
“너랑 같이 있을 수 있다면 사랑도 다시 생각하고, 배울게.”
“…그러지 마. 정한아. 날 사랑 안 해도 돼. 너 힘들게 그럴 거 없어. 나 때문에 네가 떠올리기 아픈 일 상기하면서 힘든 거 싫어.”
“…….”
“이렇게 된 건 내가 너한테 가지면 안 될 감정을 가졌기 때문이지 네가 사랑을 몰라서도, 믿지 않아서도… 날 사랑하지 않아서도 아니야.”
“…….”
“넌 아무 잘못도 없어. 그러니까 천천히 멀어지자. 이렇게 갑자기 하루아침에 안 보는 사이가 될 수 없다는 거 알아. 너한테 내가 진짜 필요할 때는 내가 같이 있을게. 나 없어도 너 이제 잘하고, 천천히 이렇게 지내다 보면 이게 익숙해질 거야. 그리고 그때는 그게 당연한 일이 될 거고.”
차정한은 괴로운 숨을 내쉬며 다시 핸들 위로 이마를 대고 얼굴을 묻은 채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가.”
“…정한아.”
“익숙해져? 당연한 일이 돼? 천천히 멀어지자고? 내가 너 매일 필요하다고 하면 어쩔 건데. 적선하듯 와서 정신병자 같은 나 달래 주고, 일하는 거 보고, 집까지 데려다주고 갈 거야?”
차 안으로 조금 큰 소리가 울렸다. 화가 나 거친 말을 하는 차정한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지 마.”
“왜, 너는 끝내자, 멀어지자, 친구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도 되고, 나는 이렇게 말하면 안 돼? 노력한다잖아! 네 마음, 네 사랑이 뭔지 내가 알 때까지 노력한다잖아!”
“그게 노력으로 돼?”
참으려고 했는데 노력이라는 말에 내내 억누르고 있던 말이 터져 나왔다. 똑같이 소리를 높여서 해결될 게 없다는 걸 알지만, 정말 더는 누르기가 힘들었다.
“사랑하지 않으려고는 노력할 수 있어. 잊으려고는 노력할 수 있어! 노력으로 다른 생각 할 수도 있다고! 나는 그 노력에도 널 못 잊어서, 사랑하는 그 마음이 안 없어져서 지금 너랑 이렇게 평행선 같은 말 하면서 서로 상처 주고 있지만! 그건 노력하면, 노력해서 시간이라도 지나면 무뎌질 수라도 있어.”
“…….”
“그런데 사랑을 노력으로 해? 어떻게 노력할 건데. 잘 때 괜찮았으니까 그걸로 노력할 거야? 나한테 맞추고, 내 마음 배려하고 그러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 싶어서 일단 같이 있자고 그러는 거잖아.”
“그래, 그러면 안 돼? 같이 있으면서 생각하고, 널 보면서 달라질 수도 있잖아.”
“해 봤는데 안 되면?”
“…….”
“같이 있으면서 노력에 노력을 다 했는데, 그래도 너한테는 내가 그저 친구면? 나한테 떨리지가 않고, 설레지도 않고 그러면 그땐 어떻게 할 거야?”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차정한을 보니 머릿속에서 아주 날카로운 것이 내려와 마음까지 한 번에 확 긋고 내려갔다. 노력해도 나를 사랑할 수 없는 차정한을 굳이 떠올려야 하는 이 상황이 너무 싫었다.
“그땐 솔직하게 말할 거야?”
“…….”
“노력해 봤는데 안 된다고?”
“…….”
“아니면 내가 상처 받을까 봐 숨길 거야? 계속 노력하는 중이니까 조금 더 기다리라고?”
“…….”
“그럼 그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난 널 더 사랑하게 됐을 텐데, 널 조금도 벗어날 수가 없을 만큼 그렇게 사랑하게 됐을 텐데 그때 나는 어떻게 해.”
시야가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나는 손을 들어 아무렇게나 눈가를 문지르고 몸을 가로지른 안전벨트를 풀어냈다.
“나 그걸 마주하기가 무서워서 미리 도망치는 거야.”
“…….”
“…도망가는 거야, 정한아.”
“…….”
이대로 여기 있다가는 더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다 보일 것만 같아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숨이 흘러나오며 턱이 다 덜덜 떨렸다.
“…운전 조심해.”
“…….”
“잘 가.”
그대로 차에서 내려 도망치듯 걸었다. 주차장을 벗어나 엘리베이터에 올라 겨우 내가 가야 할 층을 누르고 등을 기대었다. 온몸이 다 떨리고 식은땀이 났다.
차정한과 알게 된 뒤로 이렇게 큰 소리를 내며 다툰 적이 없었다. 투닥투닥 말다툼 정도를 한 적은 있지만, 몇 분도 이어지지 않았고, 늘 웃으며 그 자리에서 풀어지고는 했었다.
물론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이 정도가 뭐 싸운 거냐고 하겠지만, 우리는 이 정도도 목소리를 높인 적이 없었기에 조금은 참담했다.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인 일이 내 사랑이라 더 그랬다.
어둠이 드리운 집으로 들어가 침대로 아무렇게나 몸을 뉘었다. 눈을 감자 내가 차정한에게 했던 모든 말이 흉기가 되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내 말에 나도 상처 받을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다.
‘네 마음, 네 사랑이 뭔지 내가 알 때까지 노력한다잖아!’
차정한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끊임없이 울렸다. 나는 몸을 웅크린 채 완전히 엉망으로 끝나버린 오늘에서 도망치려 애썼다. 오늘이 가기 전에, 한 해가 지나기 전에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자정이 넘고, 새로운 해가 시작될 때까지 차정한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 * *
새해가 며칠 지나도록 차정한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집으로 찾아오지도 않고, 메시지를 보내는 일도 없었다. 나한테 완전히 질려 버렸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누나의 카페로 들고 갈 수 있는 짐만 추려 캐리어 두 개에 정리하고, 나머지 보관해야 할 것들은 전부 보관할 수 있는 창고로 옮겼다. 짐이 그리 많지 않아 그것들을 다 빼내고 옮기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차정한이 들인 가구와 원래 있었던 것들만 남은 집을 보니 어쩐지 차정한의 마음을 보는 것 같아 자꾸 눈가가 화끈거렸다.
누나가 있을 때 카페 방 안으로 짐을 옮기면 원래 살던 집은 어쩌고 왔는지 물을 거고, 그 과정에서 차정한과 나 사이에 뭔가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챌 것 같아 짐은 누나가 출국한 뒤에 옮기기로 했다. 당장 내일 아침이면 출국이니 오늘 카페 마감 시간에 짐을 옮기면 될 것이었다.
출국을 앞두고 잔뜩 설레는 얼굴을 한 누나에게 카페 일을 할 때 꼭 알아야 하는 몇 가지와 중요한 것들을 배웠다. 도와서 일을 한 적이 꽤 많기에 대부분 자신 있었지만, 몇 가지 음료를 만들 때 헷갈리지 말아야 할 점이 있어 그 부분을 집중해서 들었다. 누나는 정말 고맙다며 몇 번이나 내게 인사했다.
누나를 도와 낮에 같이 일을 하고, 준비할 게 많을 것 같아 먼저 들여보냈다. 누나는 가기 전 나를 끌어안고 등과 어깨를 토닥이며 잠시 머물렀다. 나는 그런 누나의 손길에서 조금 위로받았다.
마감하는 아르바이트생을 먼저 들여보내고, 혼자 남아 카페 문을 닫았다. 누나가 아침에 카페에 들를 일이 없기에 얼른 오피스텔로 가서 방에 덩그러니 놓인 캐리어 두 개를 끌고 현관으로 나왔다. 신발을 신고 이제 나가기만 하면 되는데…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기는 그냥 네 창고야, 창고. 너 여기서 잘 지내라고 내가 산 게 아니라 짐 보관하고, 가끔, 나 없을 때 와서 언제든 쉬라고 있는 집이야. 알았지? 네 집은 여기가 아니라 나 있는 집, 거기가 네 집이야. 잊으면 안 돼.’
차정한은 이 오피스텔을 산 뒤에 내가 여기에 정을 붙일까 봐 날마다 여기는 그냥 창고일 뿐이라고 말하며 나를 자신의 집으로 이끌었다. 가끔 이곳으로 와서 잠을 자거나 머물 때면 늘 전화를 해 어디인지 묻고 아픈 척이라도 해서 나를 나가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