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이 오피스텔에는 큰 정이 없었다. 차정한이 원하는 대로 나는 대부분 모든 시간을 차정한의 집에서 지냈고, 여기는 정말 짐을 보관하고, 가끔 청소를 하러 와서 쉬는 ‘차정한이 마련해 준 오피스텔’일 뿐이었다.
“…….”
그렇게 정이 없기에 쉽게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이곳을 떠나려니 많지는 않았어도 평생 잊을 수는 없을 기억들이 나를 당겼다.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차정한의 모습과 저 방, 침대에서 차정한과 섹스했던 기억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나를 바라보던 그 눈과 내 몸 위를 뒤덮던 온기, 죽을 것처럼 부끄러우면서도 그를 당겨 안을 수밖에 없던 떨림. 서로가 낯선 모습을 처음 마주했던 그 순간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나는 불이 꺼지고 냉기만 남은 침실을 현관에 선 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어느 하나도 나쁜 기억이 아니었다. 나에게 차정한은 그랬다. 이곳에서 있었던 모든 그와의 기억이 내게는 소중했다.
“…….”
조금 더 있다가는 아예 침실로 한 번 더 들어가고 싶어질 것 같아 얼른 집을 나섰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데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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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안 방은 그리 넓지는 않지만, 혼자 지내기에는 충분했다. 짐을 풀 여력이 없어 캐리어를 안으로 들이고, 한쪽에 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당분간 누나 대신 일에만 집중하며 지내고 싶었다. 바쁘게 살다 보면 차정한을 떠올릴 일도 줄어들 거고, 밤에 쓰러지듯 누워 쉽게 잠들 수 있을 것이었다.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고 쌓이다 보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싶었다.
내일은 실장님을 저녁에 뵙기로 했다. 대충 동윤 형에게 들어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직접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말씀에 카페 오후 아르바이트생이 오면 잠깐 뵙는 거로 약속을 정했다. 완전히 그만두겠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을 것 같아 벌써 걱정이었다.
집을 비웠다고 차정한에게 말을 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그가 알아서 알 때까지 가만히 있는 게 좋을지 고민하다가 밀려드는 두통에 생각을 미루며 침대에 몸을 기대었다.
차정한과 정말 멀어진 것 같은 첫 번째 밤이었다.
* * *
“유현아,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보자.”
실장님은 내게 사정했다. 그냥 매니저라면 얼마든지 새로 구할 수 있겠지만, 차정한을 말리고, 달랠 수 있는, 또 차정한이 기댈 수 있는 매니저를 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며 그만두고 싶다는 나를 만류했다.
“솔직히 나보다 네가 더 정한이 잘 알 거야. 자존심이 세서 절대 티를 안 내서 그렇지 뭐가 그렇게 속상한지 잘 흔들리잖아.”
“…….”
“정한이 처음 우리 소속사 들어오고 활동 시작했을 때, 정말 힘들어했어. 마음 둘 곳이 없어 보이더라고. 또래 매니저도 붙여 보고, 형처럼 의지하라고 동윤이보다 나이 많은 매니저도 붙였는데 소용이 없었어. 뭔가 불안해 보이고, 안정이 안 된 느낌?”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차정한이 배우 생활을 시작하고 나를 찾아와 같이 있어 달라고 하기 전까지 나는 차정한의 시간을 알지 못했다. 많이 힘들었겠다는 추측만 할 뿐 얼마나 힘들었고, 얼마나 아팠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하루는 불러다가 물었어. 그만두고 싶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래. 한번 결정하고 시작한 일 이렇게 끝내고 싶지는 않다는 거야.”
“…….”
“그럼 어떻게 해야 집중해서 잘할 수 있겠냐고 물었더니 친구가 한 명 있다는 거야.”
“…….”
“그래, 너. 고등학생 때부터 친구였는데 그 친구가 있어야 될 것 같다고, 그 친구가 없으니까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다고 하는데 이걸 어쩌나 싶은 거지, 난. 그 친구도 자기 인생 살고 있을 텐데 내가 데려다가 정한이 케어 좀 해 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
“…….”
“그래서 내가 재주껏 데려오기만 하라고 했어. 어떻게든 데려만 오라고. 며칠 뒤에 널 데리고 온 거고.”
집 앞으로 찾아와 나를 세 시간이나 무작정 기다렸다는 차정한이 떠올랐다.
‘나 너 없이 안 되겠어.’
나는 그 말을 듣기 전부터 차정한의 모든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멀어진 것 같던 그가 내 앞에 있다는 사실로도 충분했다.
‘너 없으니까 불안해.’
‘…….’
‘나 너 없이 못 살잖아. 혼자 아무것도 못 하고.’
‘…….’
‘나랑 같이 있어 줘.’
그 말들 안에 얼마나 많은 외로움과 불안감이 담겨 있는지 그때는 깊게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저 차정한에게 내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 그것 하나만 떠올리기에도 마음이 너무 좁았다.
“그래, 이해는 해. 유현이 너도 언제까지 정한이 뒷바라지만 할 수는 없지. 정한이 전에 비하면 정말 많이 단단해졌고, 요즘은 너 힘들다고 동윤이랑 잘 다닌다며.”
“…네.”
“매일은 아니더라도 한 번씩 정한이가 필요할 때, 너 아니면 안 될 때만이라도 도와줄 수 없을까?”
“…….”
“혹시 정한이랑 싸운 거야? 나쁘게 다신 안 볼 사이 되고 그런 거야?”
말문이 잠시 막혔다. 싸우기도 했고, 어쩌면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는 것을 실장님께 말씀드려야 하나 고민했지만, 역시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우리 사이의 일을 타인이 깊게 알 필요는 없었다.
“아…. 싸우고 그런 거는 아니고…. 이제 정한이 저 없어도 동윤 형이랑 잘 다니고 하니까 이제 이 일은 그만둬도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 더 늦기 전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러면 겸업한다고 생각하고, 유현이 너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정한이가 진짜 필요할 때, 한 번씩이라도 도와주라. 이거 정한이랑도 얘기 다 끝난 거야?”
“…알기는 아는데 아직 제가 이렇게 실장님 뵙는 건 모릅니다.”
“뭔가 있긴 있네. 정한이가 서운하게 했어?”
“…정한이가 아니라 제가 정한이를 서운하게 하고 있는 거겠죠.”
“큰일이네. 내가 유현이 너 따로 만나서 이런 얘기하고 있는 거 알면 나한테도 난리 칠 텐데. 난 분명히 지금 너 잡고 있다? 내가 너 자르고 그런 거 아니다? 나중에 정한이가 물으면 난 아니라고 해야 돼.”
“…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실장님이 다시 한번 매일은 아니더라도 한 번씩 정말 차정한의 멘탈 케어가 필요할 때만이라도 도와줄 수는 없겠냐고 부탁했다. 나는 실장님의 말씀을 결국, 거절하지 못했다. 실장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차정한을 위해서였다. 처음부터 내가 이 일을 하겠다고 결정했고, 지금까지 그 일을 해 온 만큼 최소한의 책임은 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장님은 내가 말을 바꿀까 싶어 몇 번이나 확인을 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배웅하는 실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소속사를 나섰다. 한층 더 매서워진 1월의 밤바람이 얼굴을 덮었다.
* * *
카페로 돌아가 마감 시간 아르바이트를 하는 직원과 같이 청소를 하고 정리를 마쳤다. 에이프런을 벗어 정리하고 나온 직원은 내게 조심스럽게 내일부터는 나오기 힘들 것 같다는 말을 전했다. 갑작스러운 말에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점심시간도 아니고 마감 시간 정도는 내가 혼자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냥 알겠다고 답했다.
주변이 전부 회사라 퇴근 시간이 지나면 확실히 손님이 줄어들어 이 근처 카페들은 대부분 일찍 문을 닫았다. 누나의 카페도 밤 아홉 시면 문을 닫기 때문에 그 정도는 내가 커버할 수 있을 것이었다. 전에 일할 때도 보면 퇴근 시간 후에는 몇 팀 사람이 오지 않아 꽤 한산했었다.
내게 죄송하다고 몇 번이나 사과한 직원을 보내고 따뜻한 차 한잔을 만들어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열 시인데 종일 일을 하고, 또 실장님까지 만나고 와서 그런지 조금 피곤했다. 매일 이렇게 바쁘게 지내다 보면 차정한을 떠올릴 틈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 있었다.
잘된 일이라 생각하며 차 한 모금을 마셨다. 향긋하고 따뜻해 꼭 차정한 같았다.
“…….”
차정한을 떠올릴 틈이 없어 다행이라는 생각 뒤에 바로 떠올린 생각이 차정한이라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노랗게 예쁜 빛으로 물들인 차를 바라보았다.
‘차는 솔직히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어. 커피는 카페인 맛이라도 있지.’
‘자기 전에 그냥 따뜻하게 마시면 좋잖아. 이거 마시면 잠도 더 잘 온다던데.’
‘난 너 보고 있으면 잠 잘 오던데.’
‘뭐야. 내가 그렇게 재미없어?’
‘널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져. 기분이 좋아지니까 마음도 편해지고, 마음이 편해지니까 잠도 오고.’
촬영으로 시차가 바뀌어 피곤한데 잠을 못 자는 차정한에게 매일 이 카모마일 차를 만들어 줬었다. 물을 끓이고 차를 우리는 내게 차정한은 늘 소파에 기대어 말을 걸었다. 나는 그와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그 차를 우리는 시간이 너무나 좋았다.
“…….”
13년이었다. 13년을 함께하는 동안 차정한은 내 모든 곳에 묻어 있었다. 어디를 가든 또 무엇을 하든 차정한과 분리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차를 마시다가 갑자기 울 것 같아 방에 있는 텔레비전을 틀었다. 그냥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빠르게 움직이는 화면이나 보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채널을 돌리는데 내가 버스정류장에서 보며 앉아 있는 차정한의 커피 광고가 나왔다.
“…….”
녹음이 우거진 창밖이 보이는 큰 창틀에 올라앉아 커피를 마시는 그 포근하고 부드러운 모습에 또 져 버렸다.
‘고등학생 때부터 친구였는데 그 친구가 있어야 될 것 같다고, 그 친구가 없으니까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다고 하는데….’
미소 짓는 얼굴을 보는데 실장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내가 없으니까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다고 말하던 그때 차정한의 마음이 떠올라 속상했다. 차정한의 마음을 알면서, 그가 나에게 얼마나 의지하는지 알면서 이런 일을 저지른 내가 너무 싫었다.
“…….”
너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혼자인 시간에 많이 외로울까. 내가 널 버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차정한이 어떤 생각을 하고, 또 어떤 원망을 해도 그건 전부 내가 받아들일 나의 몫이었다. 외로움을 알면서도, 그 마음을 다 알면서도 일을 저질렀으니까.
“…….”
나는 이미 광고가 끝나고 다른 장면이 나오는 화면을 보면서도 내내 사라지지 않는 차정한의 잔상을 마주했다. 도대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너무 답답해 텔레비전도 끄려는데 진동이 울렸다. 반사적으로 침대 위에 놓인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화면에 쓰인 ‘정한’이라는 이름에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화면을 바라보았다.
실장님의 연락을 받은 걸까. 아니면 오피스텔을 비우고 나온 걸 안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할 말이 있어서 그러는 걸까. 궁금했지만, 받을 수는 없었다. 나는 끝없이 울리는 진동을 애써 외면했다.
부재중 전화가 16통 찍힌 뒤에야 진동이 멈추었다. 이렇게 많이 전화를 거는 걸 보면 분명 내가 집을 나온 걸 확인한 것 같았다. 들키면 안 되는 것을 들킨 마음에 진동이 멈춘 휴대폰을 드는데 짧은 진동이 한 번 더 울렸다.
[정한 : 전화 받아]
그 뒤로 전화가 다섯 번 더 왔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차정한은 그 뒤로 전화를 하지도, 메시지를 보내지도 않았다. 나는 진동이 완전히 멈춘 휴대폰을 보며 조금 포기하고, 조금 속상해서… 아주 조금 울었다.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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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 정도가 지난 뒤에야 일이 손에 붙었다. 카페에서 일을 여러 번 해 본 적도 있고, 덤벙대는 성격도 아니라 어느 정도 흉내를 내며 할 수는 있었지만, 누나를 도와서 일을 할 때와 내가 누나의 자리에 서서 일을 할 때는 확실히 달랐다.
카운터를 봤다가 음료를 만들었다가 정신없이 점심시간을 보내고 나면 전쟁에서 이긴 것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도 점심시간만 지나면 꽤 여유롭게 보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점심 때 같이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이 가고 나면 카페에는 오롯이 혼자 남았다. 처음에는 그게 조금 낯설고 내가 실수를 하면 어쩌나 조금 겁이 나기도 했지만, 그것 역시 닷새 만에 적응했다. 이제는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손님들의 소리 사이에서 혼자 머무는 게 더 편했다.
저녁 여덟 시쯤 되자 저녁을 먹고 온 손님들이 몇 팀 들어와 카페를 채웠다. 날이 추워 그런지 대부분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진동벨 호출을 모두 마치고, 자리에 앉는데 에이프런 앞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꺼내 보니 ‘정한’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나는 카운터 옆으로 놓인 의자에 앉으며 내내 화면에 뜬 차정한의 이름을 바라보았다.
“…….”
차정한은 벌써 닷새 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내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처음에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타이밍을 놓쳐 이제는 진짜 받을 수가 없었다. 쏟아질 차정한의 원망을 마주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한 통, 두 통…. 그렇게 다섯 번째 다시 걸려오는 전화에 한숨이 저절로 흘렀다. 나는 그 진동 사이로 들리는 문 열리는 소리에 얼른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주머니로 넣었다. 그리고 카운터 앞으로 와 선 손님을 바라보았다.
“주문…….”
“전화가 오면 보기는 보네. 다섯 번을 걸어도 다섯 번 다 보고도 안 받는 거였어.”
“…정한아…….”
눈앞에 선 차정한은 너무 현실감이 없었다. 카운터 가까이 선 그에게서 찬 기운이 느껴졌다. 차정한을 나를 빤히 보며 귀에 대고 있던 휴대폰을 내렸다.
“전화 왜 안 받아.”
“…….”
“왜 나 피해.”
“…….”
“말 한마디 없이 집은 싹 비우고 나가서 전화를 안 받아?”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쪽을 바라보는 느낌이 났다. 누군가는 연예인인가? 묻기도 하고, 어디에선가는 차정한의 이름까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있다가는 차정한과 내 사이에 있는 일들을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알게 될 거고, 아주 빠르게 세상으로 퍼질 것이었다. 게다가 새로 들어온 손님이 차정한의 뒤에 줄까지 서서 더 곤란하게 됐다.
“…아홉 시 반에 끝나니까 그때 문 닫고 얘기하자. 한 시간이면 돼.”
“싫은데.”
“…….”
“너는 너 나가고 싶을 때 나가고, 받기 싫으면 전화도 몇백 통을 씹고 마음대로 다 하면서 나한테는 지금 말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부탁이야. 손님도 있고, 누가 듣기라도 하면 안 되잖아.”
주문을 하는 것 같지 않아 보였는지 차정한의 뒤에 선 남자 손님이 앞으로 슬쩍 고개를 빼 상황을 살폈다. 그 기척에 차정한이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치자 뒤에 선 남자가 깜짝 놀라며 차정한에게 어색하게 인사했다. 차정한 역시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정한아, 제발.”
“그래. 좋아. 기다리라면 기다려야지. 여기까지 너 찾아서 보러 온 내가 질 수밖에 없지.”
그대로 뒤돌아 사람들이 없는 쪽으로 가서 앉은 차정한이 카운터를 보며 긴 다리를 꼬고 앉았다.
차정한의 뒤에 서서 기다리던 사람과 카페에 앉은 몇몇 사람들의 시선은 이제 모두 차정한에게 닿아 있었다. 얼굴을 가리지도 않고, 너무나도 당당하게 앉아 있는 그를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
“…….”
시선이 느껴져 그쪽을 슬쩍 보면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나를 보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애꿎은 시간만 확인했다. 이렇게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나는 얼른 마음 안정에 좋은 라벤더 티를 한 잔 우려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차정한은 내가 움직이는 것을 그대로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이거 마셔. 라벤더 티인데 그때 향 좋다고 했었던 거 기억나?”
“기억 안 나.”
“…….”
“오피스텔 앞에서 기다리는데 사람이 촉이라는 게 있잖아. 뭔가 영영 안 올 것 같은 거야. 그래서 문을 열어 봤더니 춥더라.”
“…….”
“집에 온기가 없어.”
“…….”
“단순히 집을 비워 놔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아무도 안 사는 집 같은 거야. 여기 네가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넌 따뜻하니까.”
낮은 그의 목소리가 크지 않게 울렸다. 차정한은 앞에 놓인 차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내내 나만을 바라보았다.
“…튈 생각이나 하는 거 뭐가 예쁘다고.”
“…….”
“저리 가. 아홉 시 반 되면 문 닫고 와. 지금 계속 말하다가 소리 지를 것 같아.”
빈 트레이를 들고 다시 카운터로 와 앉았다.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는데, 정말 시간이 너무 더디게 흘렀다. 여전히 내게 닿는 시선을 느끼며 아홉 시가 넘자 카페를 나서는 손님들에게 인사하고 자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정확히 아홉 시 반에 카페 문 쪽에 있는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 블라인드까지 전부 내린 뒤에야 차정한에게 다가가 맞은편에 앉았다.
“마실 거… 다시 가지고 올까?”
“필요 없어.”
“…….”
“대답이나 해. 전화 왜 안 받아.”
“받으면 안 될 것 같았어.”
“왜.”
“…받으면 만나게 될 거고, 만나면 저번처럼 너한테 또 속상한 말 하게 되니까. 또……. 네가 화났을 것 같아서 받기 무서운 것도 있었어.”
“화난 건 알아?”
“…알아.”
자세를 고쳐 앉아 테이블 위로 고개를 숙였다가 든 차정한이 눈을 맞췄다. 영업이 끝났다는 것을 알리려고 매장 안에 있는 조명도 반쯤 껐더니 조금 어둑하게 느껴졌다.
“난 누가 날 거부하는 거에 익숙해. 어릴 때부터 겪었으니까. 그래서 그런 쪽으로 자존심이 세.”
“…….”
“내 앞에서 나 데려가기 싫다고 서로 미루고 싸우던 부모도 그 뒤로 한 번 찾은 적이 없어. 왜 찾아. 나 싫다고 갔는데. 날 두고 갔으면 끝인 거야. 누가 날 버리면, 나도 버려. 구차하게 매달리고, 왜 버렸냐고 묻고, 울고 짜고… 그딴 거 진짜 싫어. 구질구질하잖아. 나도 버리면 그만이지. 꼭 그 사람이 나한테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
“그런데 왜 난 너한테는 그게 안 될까.”
차정한은 말하는 게 괴로운 것처럼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목이 답답하고, 말문이 막혔다.
“텅 빈 오피스텔 보는데 진짜 화나서 죽을 것 같더라. 너한테 막 화내고 싶었어. 그래도 그래, 네 상황이면 그럴 수도 있겠지. 나한테 알리면 내가 못 가게 할 거 아니까 그런 거겠지. 이해하려고 누르고, 또 누르고 있는데 실장님한테 전화가 왔네.”
“…….”
“그만둔다는 거 겨우 잡아는 놨다는데…. 와, 진짜 지유현이 나한테서 완전히 사라지려고 작정을 했구나 싶더라.”
“…….”
“전화해도 안 받고, 이러다 진짜 죽을 것 같아서 아까 촬영하다가 점심때쯤 유주 누나한테 전화했더니 너 카페에 있다고, 몰랐냐고 하는데 내가 뭐 할 말이 있어야지. 네가 전화 안 받아서 누나 유럽 간 줄도 모르고 자는데 전화했잖아.”
지금쯤이면 누나도 우리의 관계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었다. 내 생일 때부터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차정한이 건 전화로 확신했을 게 분명했다.
“널 사랑하는 것 같다고 말하고 달래는 게 사실 제일 편한 거 알아. 네가 그 말에 제일 흔들릴 것도 알고. 아는데 그것도 내가 뭘 알아야 하지. 난 어떻게 해야 사랑할 수 있는지도 모르고, 사랑할 때 어떤 마음인지도 몰라. 그래서 너한테 그런 척도 못 해.”
“…….”
“그러니까 사랑한다고 노력한다는 말은 안 할게. 뭘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런 말 한 자체가 문제였어.”
“…….”
“같이 있어 달라고 너한테 매달리지도 않고, 가지 말라고 너 괴롭히지도 않을 거야.”
보지 못한 사이에 차정한은 완전히 어른이 된 것 같았다. 그동안 했던 말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내게 하고 있었다. 그 생각들은 그동안 차정한이 접근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다가가야 마주할 수 있는 답이기에 더 놀라웠다. 나는 곧 그가 말할 끝을 기다렸다. 말할 때도 힘들었지만, 듣는 것은 더 힘들었다. 다리 위에서 마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덜덜 떨렸다.
“내가 너랑 같이 있을 거야.”
“…어?”
“나랑 있어 달라고 떼 그만 쓰고, 내가 너한테 가서 있을 거라고. 그동안 난 늘 너한테 와 달라 그러고, 있어 달라 그랬잖아. 지금부터는 내가 있을게. 내가 움직이고, 내가 너한테 갈게.”
“…….”
“그러니까 넌 거기에만 있어. 그만 좀 도망가. 너 어디 가든 난 너 계속 찾을 거거든. 그러니까 서로 힘 빼지 말자.”
차정한은 늘 내가 생각하지 못한 말을 했다. 당연히 끝을 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생각하지도 못한 방향의 시작을 말하는 차정한을 보니 바보처럼 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차정한 앞에서 할 말을 찾지 못할 때가 많았다.
“우리 같은 시간을 함께 보냈잖아. 너 혼자만 아는 시간이 아니고, 나도 너랑 똑같은 시간을 함께했어.”
“…….”
“우리가 함께 보낸 그 똑같은 시간이 너한테는 사랑인데 나한테는 단순한 감정일 리가 없어. 네가 나 볼 때, 나도 널 봤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모르고 있는 게 있을 것 같아. 알고 싶어.”
“…….”
“널 보면서.”
급히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것은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내게는 차정한을 향한 내 사랑을 감추기 위해 마지막에 급히 쌓아 올린 내 마음이 그랬다. 13년을 차곡차곡 무너지지 않게 잘 쌓다가 허둥대며 너무 놀라 덮은 곳을 또 덮고, 그 위를 또 덮으며 결국, 단단하게 쌓아 둔 것까지 다 무너지게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차정한에게 고백한 뒤 끝을 향해 혼자 다가가는 게 무서워 괜찮은 척을 하며 쌓아 올린 나의 담담함이 그의 훌쩍 커 버린 말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나는 엉망이 된 내 마음 안에서 여전히 빛을 발하는 내 사랑과 다시 마주했다.
너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화내는 것도 그새 잊은 건지 나를 보고 미소 짓는 그 얼굴을 보며 나는 또 바보처럼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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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정한은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할 때까지 나를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성격이 느긋한 편은 아니라 많이 답답할 텐데도 초조한 얼굴을 드러냈다 숨기는 것을 반복하면서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더는 그를 고문해서는 안 될 것 같아 아직 생각이 뒤죽박죽인데도 입을 열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솔직히…. 그런 생각 할 줄 몰랐어.”
“나도 몰랐는데 네가 그랬잖아. 노력해도 안 되면 어쩔 거냐고. 그 말을 듣는데…. 좀 충격이었어. 그런 것까지는 생각 못 했거든. 알잖아. 나 뭐 하나에 꽂히면 다른 건 안 보는 거.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려고 하고. 결국,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해야 직성이 풀리잖아.”
“…….”
“이번에는 그게 네 마음 돌려놓기였던 것 같아. 돌려놓고야 만다, 난 할 수 있다. 뭐 그런 생각이 중심에 있으니까 막무가내로 밀고 나간 거지. 넌 내가 밀고 가면 같이 밀려가 줬으니까.”
“밀려가 준 거 아니야. 네 말이 맞으니까… 같이 간 거지.”
팔꿈치를 테이블에 대고 한 손으로 턱을 괸 차정한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네가 그러니까 내가 너를 못 놓지.”
“…….”
“고집 세다 그러고 막무가내라 그러고 철 좀 들라고 하는데 너는 내 말도 맞는 말이라고 들어 주잖아.”
“…네가 이유 없이 그럴 사람 아닌 거 아니까.”
“그래, 남들은 그 이유를 알려고도 안 하는데 넌 내가 말 안 해도 다 알잖아.”
“…….”
“지금도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너한테 계속 찾아오는 이유.”
장난기가 사라진 진지한 얼굴에 눈을 맞추고 있기가 조금 부끄러워 슬쩍 시선을 내렸다. 맞은편에 있던 차정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에 있는 의자로 옮겨 앉는 게 보였다. 진지함을 무너뜨리고 소년 같은 얼굴로 씩 웃은 그가 고개를 숙인 내 얼굴 아래로 자신의 얼굴을 기울여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