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43)

“…….”

“…….”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피할 수도 없게 마주친 시선과 장난기가 가시고 진지해진 차정한의 얼굴에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매번 이랬다.

“어떻게 예뻐해 줄 거야?”

닿고 싶었다. 이번에는 내가 차정한에게 닿고 싶었다. 나는 조금 더 얼굴을 가까이 움직여 차정한의 입술 위에 내 입술을 대었다. 따뜻한 입술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너무 가까이 마주하는 눈에 죽을 것처럼 심장이 뛰어 얼른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물기 없는 입술이 맞물렸다가 풀리고, 또 조금 더 깊게 맞물렸다가 풀렸다. 점점 더 맞물려 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입술이 벌어졌다. 뜨거운 혀끝이 닿는 순간 어깨가 움찔거리며 몸이 반사적으로 뒤로 빠졌다. 차정한은 그런 내 허리를 팔로 감아 앞으로 확 당겼다. 다시 맞붙은 몸은 몹시 뜨거웠다.

“아… 음…….”

입술과 머릿속을 채운 생각, 마음을 타고 흐르는 감정까지 모든 것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나는 이불자락을 쥐고 있던 손을 들어 차정한의 얼굴을 만졌다. 내 손이 뺨을 매만지자 입술을 맞물린 채로 차정한이 웃었다. 나는 그의 웃음을 받아 목 뒤로 넘기며 내 위로 올라오는 차정한을 바라보았다.

“…하아…….”

“처음, 하…. 연기하느라 카메라 앞에 섰을 때보다 널 볼 때가 더 떨려.”

“…….”

“네가 너무 떠니까 나까지 떠는 거 보이면 안 될 것 같아서 안 그런 척했지만 나도 너 보면 미친 듯이 떨려.”

“…안 보여 줘서 몰랐잖아. 난 네가 늘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서 절대 사랑… 같은 감정은 아닌 줄 알았어.”

“멋있어 보이려고 그랬지.”

“응?”

내 위로 몸을 납작하게 내린 차정한이 장난스럽게 씩 웃고는 다시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간지러운 소리가 몇 번이나 울린 뒤에야 입술이 떨어졌다.

“지금까지 내가 너한테 기대기만 했잖아.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리드도 하고, 떨지도 않고 멋있게 보여야지 했는데… 아, 역효과만 나고.”

“넌 뭘 해도 멋있어.”

“…….”

“배우 차정한으로도 멋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으로도 그래.”

차정한은 내가 하는 말을 바라보는 것처럼 가만히 나를 보기만 했다. 그 어떤 반응도 없이 따뜻한 고요 속에서 시선만 닿자 조금 부끄러워져 입술만 꾹꾹 깨물었다.

“…왜 보기만 해?”

“예뻐서.”

“…….”

“나 너 볼 때마다 내 안에 있는 게 다 막 무너지는 것 같아.”

“…….”

“이거 왜 그러는 거야? 마음이 막 너한테 다 쏟아지는 것 같아. 그래서 가만히 못 있겠어. 지금도 막 미치겠는데… 좋아하면 이런 거야? 너도 그랬어?”

마음이 쏟아지고 또 쏟아져 그게 차정한의 발끝이라도 적실까 봐 나는 마음이 쏟아지지 않도록 늘 중심을 잡아야 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을 흘려도 차정한이 알기 전에 흔적도 없이 얼른 닦았고, 혼자 있을 때만 쏟아지는 마음을 막지 않고 놔두었다. 내내 쏟아져 흠뻑 무언가를 적시고 싶던 마음은 나를 완전히 적시며 머리끝까지 잠기게 했다.

“나도 그랬어. 내 마음이 내 거가 아니었어.”

“많이 아팠어?”

“…아니. 그래도 좋았어.”

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본 차정한이 무너지는 것 같은 숨을 내쉬며 나를 끌어안았다. 내 몸 위에 가득한 그의 무게와 체온에 지난 나의 사랑을 떠올리는 게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앞으로 내가 진짜 좋게 해 줄게. 네가 나 좋아한 시간 후회 안 하게 할 거야.”

다짐하듯 말하는 차정한의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한참이나 토닥였다. 차정한은 조금 운 것 같은 눈으로 한참 뒤에야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유현아.”

“응.”

“집으로 다시 들어오면 안 될까.”

“…….”

“전처럼 왔다 갔다 하지 말고, 같이… 같이 살고 싶어. 너 여기 있는 것도 마음 안 편하고, 나도 일하고, 너도 일하고 들어와서 집에서 보면 좋잖아. 헤어지지 않아도 되고.”

“…….”

“나랑 같이 있는 거 싫어? 나 전처럼 안 할게. 네 말도 더 잘 듣고, 절대 아무도 못 오게 할게. 거기 싫으면 이사 갈까?”

“…생각해 볼게.”

“아니, 길게 생각하지 말고 지금, 딱 지금 네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듣고 싶어. 이런 건 좀 충동적으로 결정하고 그래야지 깊게 생각하면 안 돼.”

내가 단칼에 안 된다고 할 것 같은지 차정한은 내게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순간에도 부정적인 답이 나올 것 같다는 불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면 너 집 구하면 내가 거기 들어갈게.”

“뭐?”

“난 어디 살든 상관없어. 네가 여기 살겠다고 하면 내가 이 방으로 들어올게.”

“…이 방에서 나랑 같이 살 수 있겠어?”

“당연히 있지.”

“이렇게 좁고, 답답하고… 욕실도 없어서 건물 위에 올라가야 씻을 수 있고 한데도?”

“뭐… 좀 답답하긴 하겠지? 나 얼굴 팔려서 그런 샤워실 쓰기도 좀 그렇긴 한데… 뭐 그래도 괜찮아. 너 있잖아. 네가 여기 있는데 당연히 나도 여기 있을 수 있어. 너랑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나 뭐든 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 진지한 얼굴로 답하는 차정한을 보니 귀여워 웃음이 났다. 차정한은 웃는 나를 내려보며 더 진지한 얼굴을 했다.

“진짜야.”

“알아, 진짠 거.”

“…….”

“네가 진지하다는 거 나도 알아. 알지만… 나도 정한이 너한테 사랑이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고, 그걸 내가 말한다고 네가 날 사랑하게 되는 건 아니니까… 아직은 조금 불안하기도 해. 그래서 혹시 같이 지내다가… 정말 만에 하나라도…….”

“좋아하는 거랑 사랑은 또 달라서 그런 거지? 내가 널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사랑인 건 아니니까.”

“…….”

“나도 알아. 내가 욕심이 많아서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져야 직성이 풀리잖아. 그런 것처럼 널 가지고 싶은 걸지도 몰라. 당연히 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내 옆에서 멀어진다고 하니까 돌아서 이러는 걸지도 모르지. 알아, 모든 가능성은 다 존재한다는 거.”

차정한의 진지한 눈동자에 마음이 저릿했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까 봐 따라붙는 불안감이나 속상함 때문이 아니라 그 말을 내게 하는 차정한의 눈동자가 일렁이기 때문이었다.

“다 알고, 이해하는데…. 나…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좀 서운해.”

“…정한아.”

“그래도 밉지가 않아. 네가 너무 예뻐.”

“…….”

“같이 있어 줘. 아, 이게 사랑이구나…. 불현듯 깨달을 때 내가 언제든 너한테 고백할 수 있게.”

마음이 벅차올랐다. 꼭 사랑이 아니어도 지금 이 순간 차정한의 이 말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좋았다. 내가 사랑하는 차정한의 눈이 나를 향하고, 그의 무게가 온전히 나를 누르는 이 순간의 고백이면 충분했다.

“…알았어.”

“…….”

“우리 같이 살자.”

지극히 충동적인 대답이었다. 차정한이 말한 것처럼 오래 생각하지 않고, 지금의 생각만 말하기로 했다. 지금 내 대답은 몇 번을 묻고 또 물어도 똑같았다.

나도 차정한과 함께 있고 싶다는 것. 그리고 존재할지도 모르고,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의 고백을 기다리며 두근대고 싶다는 것. 그게 전부였다.

#61

?

?

좁은 침대에서 몸을 붙인 채 잠든 새벽은 이 카페에 온 뒤로 처음 맛본 포근함이었다. 차정한이 자꾸 옷 속으로 손을 넣으려고 해서 곤란하기는 했지만, 여기가 누나의 카페고, 누나도 쓰는 방인데 죽어도 여기에서는 할 수 없다는 내 말에 차정한은 순순히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5분 뒤에 그냥 하고 이 방을 누나가 오기 전에 싹 다 리모델링해 주겠다며 나를 설득하다가 팔을 한 대 맞았다.

아침에는 모닝커피와 파니니를 먹으며 굳이 현우와 인사를 하고 가겠다고 버티다가 쫓겨나듯 나갔다. 현우에게 자신의 존재를 강하게 어필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다는 말을 너무 진지하게 해서 순간 나도 정말 그래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새벽에 그치기는 했다지만, 밤새 내린 눈 때문에 세상이 온통 하얗고 밝았다. 차정한은 마감할 때 온다는 말 대신 퇴근할 때 온다며 내게 인사했다. 내가 더는 여기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정한은 이제 시작한 하루가 빨리 저물었으면 좋겠는 마음이 들 만큼 근사한 웃음을 지으며 택시에 올랐다. 나는 소복하게 쌓인 눈에 발이 파묻히는 것도 잊은 채 몇 발자국이나 더 앞으로 나가 택시가 멀어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았다.

카페 앞에 쌓인 눈을 전부 쓸고 있는데 목도리를 칭칭 감은 현우가 넘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걸어오는 게 보였다. 만약 차정한이 버티고 있었다면 현우가 어떤 얼굴을 했을까. 조금 궁금하긴 하지만, 역시 보내기를 잘했다는 게 결론이었다.

“형! 안녕하세요! 그거 제가 할게요!”

“응, 안녕. 거의 다 했어. 오는데 힘들었지.”

“늦을 것 같아서 30분이나 먼저 나왔는데 그래도 막히더라구요. 사람 엄청 많고.”

“따뜻한 거 만들어 줄게. 들어가자.”

“네! 근데 형 뭐 기분 좋은 일 있으세요?”

“응? 왜?”

“오늘 기분 엄청 좋아 보여요!”

딱히 어제와 다른 행동을 하는 것도 없는데 내 기분이 좋게 보인다는 게 신기했다. 솔직히 차정한과 밤새 시간을 보내고, 좁은 침대에서 체온을 마주한 채 잔 그 시간이 기분 좋기는 했지만, 그게 다른 사람 눈에도 보인다니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그래? 뭐… 기분이 좋기는 해. 뭐 마실래? 커피?”

“음… 저 녹차라떼요! 요즘 거기 꽂혔어요. 어릴 땐 녹차 써서 싫었는데.”

슬쩍 음료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한 가지에 꽂히면 끝까지 파고들어 묻고 또 묻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더는 내 기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현우를 보며 안도했다. 솔직히 기분이 좋은 것도 맞고, 그 이유도 명확히 알지만, 그래도 이 기분을 타인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은 나 혼자만 이 감정을 잔뜩 품은 채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싶었다.

“어! 형, 진동 와요.”

“아…. 고마워.”

카운터 앞쪽으로 놓인 내 휴대폰을 안으로 밀어 준 현우가 에이프런을 제대로 묶고 홀 청소를 시작했다. 나는 우유를 데우며 차정한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정한 : 집에 왔어 벌써 보고 싶다]

보고 싶다는 그의 말에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차정한과 이런 메시지를 나눠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정한 : 고민하지 말고 그냥 보고 싶다고 솔직히 말해]

[정한 : 나 안 보고 싶어?]

어디서 나를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를 정확하게 파악해 빠르게 올라오는 메시지에 괜히 주변을 다 살폈다.

[나도 보고 싶어]

[정한 : 빨리 하루가 지났으면 좋겠다]

[정한 : 열심히 일하고 올게 이따 보자]

별말도 아닌데 마음이 간지러워 한참이나 차정한이 보낸 글자들을 바라보았다. 분명 글자인데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형! 우유 넘쳐요!”

“어? 아…!”

현우의 말에 보니 정말 우유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놀라서 얼른 스티머를 끄고, 흘러넘친 우유를 닦았다. 안 하던 실수까지 하는 걸 보니 정신이 온통 차정한에게 몰려 있는 게 맞긴 한 모양이었다.

“미안해. 얼른 다시 해 줄게.”

“에이, 그럴 수도 있죠.”

마른행주를 가지고 나가 테이블을 닦기 시작하는 현우를 보다가 슬쩍 다시 진동이 오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정한 : 아 그런데 진짜 보고 싶다]

그동안 잘 나지 않던 웃음이 났다. 어떤 표정으로 이 말을 할지 너무나도 생생해 화면으로 손을 더 깊게 뻗으면 차정한이 만져질 것 같았다. 안 하던 실수를 하고도 이렇게 웃음이 나다니 현우가 보면 미쳤다고 할 게 빤해서 입술을 꾹 깨물어 웃음을 감추고 스티머 안으로 다시 우유를 부었다.

[정한 : 현우인지 한우인지랑 말 열 마디 이상 하지 마]

다물린 입술 안에서 자꾸 웃음이 톡톡 건드려 힘들었다. 아무래도 이 즐거운 고통은 차정한이 올 때까지 종일 계속될 것 같았다.

* * *

종일 시간이 정말 어떻게 흘렀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눈이 그치고 다시 정신없이 바빠진 점심시간 외에도 오늘 유난히 사람이 많아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현우가 간 뒤부터 마감까지는 제법 여유로운 편이었는데 오늘은 마감 직전까지도 음료를 만들어야 할 정도였다.

그래도 마감을 하고 정리까지 싹 하니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굉장히 하루를 알차게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숨을 돌리며 얼음을 가득 채운 물을 한 컵 마셨다. 그때 문 쪽에만 살짝 반쯤 열어 둔 블라인드 사이로 불빛이 반짝였다. 빛을 보는 순간 바로 떠오르는 정한이라는 이름에 얼른 카운터에서 나가 문을 열자 운전석에서 내리는 차정한과 눈이 마주쳤다.

“왔어?”

차정한은 뭔가 굉장히 급한 사람처럼 문을 닫고 내게 다가와 내 손을 잡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나 급해.”

“왜 그래? 무슨 일…….”

말이 끝까지 이어지기도 전에 입술이 맞물렸다. 나는 내 얼굴을 감싸는 차정한의 따뜻한 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차정한의 이런 행동이 몹시 불안하고, 걱정됐었는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내가 차정한과 만나는 시간을 기다린 것처럼 차정한도 이 시간만을 기다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꼭 휘핑크림처럼 몽글몽글해졌다.

부드럽게 입속을 헤집고, 혀를 머금던 차정한의 혀가 느릿하게 풀렸다. 살짝 떨어진 입술 사이로 따뜻함보다 조금 더 데워진 숨이 입술을 덮었다.

“보고 싶어서, 하…. 죽는 줄 알았어.”

“…하아…. 놀랐잖아. 급하다고 해서.”

“어떻게 운전하고 왔는지도 기억 안 나.”

“그러다 사고 나. 조심해. 운전할 때는 운전 생각만 해야지.”

“알았어. 네 말 들을게. 내가 우리 지유현 말 안 들으면 누구 말을 들어.”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고 볼을 누른 차정한이 다시 입술에 간지러운 소리가 울리도록 몇 번이나 입 맞췄다.

“짐은 챙겼어?”

“올 때 캐리어에 넣어 온 그대로라 챙길 것도 없어. 짐 안 풀었거든. 집 빨리 구해서 나가려고.”

“오피스텔에서 뺀 짐은 다 어디 있어?”

“아, 그건 보관 맡겨놨어.”

“그건 다시 오피스텔로 옮기자. 그래도 되지? 괜히 그런 데에 돈 쓸 거 없잖아.”

“…알았어.”

“착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씩 웃는 차정한을 보자 아침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나는 손을 들어 그의 잘 만져진 앞머리를 살짝 건드렸다.

“머리 잘랐네? 예쁘다.”

“네가 더 예쁘거든.”

“…….”

“…아, 진짜 나 발정 났나.”

“속으로 하려던 말 같은데.”

“아니야, 너도 들으라고 한 말이야.”

진지하게 당당한 말을 들으니 조금 어이가 없기도 하고, 한편 귀엽기도 해서 웃음이 났다. 새어 나오는 웃음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는데도 생각하니 또 웃겨 자꾸 웃음이 흘렀다. 차정한이 그런 나를 보며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어제 그냥 할걸. 저 방 침대부터 싹 다 바꾸면 되는 건데.”

“…저기서는 절대 안 돼. 누나도 들어가고, 가끔 현우도 들어가는데 저기서 어떻게….”

“잠깐.”

갑자기 정색한 차정한이 몹시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내가 한 말 중에 뭐가 문제였는지 찾으려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쉽게 내 잘못을 찾을 수 없었다.

“알바가 거기를 왜 들어가?”

“아…. 뭐 옷 갈아입을 일 있거나 하면….”

“너 자는 방인데 거기를 들어가서 뭘 해? 옷을 갈아입어?”

“아니, 나 있을 때는 그런 적 없어. 저 방이 원래 막 매일 누가 살고 그런 방은 아니고….”

“그리고 알바는 성이 없어?”

“응?”

“현 씨야?”

“…아니. 서 씨.”

“서현우라고 부르면 되겠네. 얼마나 멀어 보이고 좋아.”

장난기 하나 없이 예민한 얼굴로 말하는 차정한을 향해 그냥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그냥 그러고 싶었다. 굳이 차정한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나 저기서 안 지내잖아.”

“그래서 봐주는 거야. 빨리 가자.”

“응. 빨리 가자. 나 캐리어만 가지고 나올게.”

“같이 할까?”

“아니야. 나 혼자 할 수 있어. 무겁지도 않고.”

“알았어. 그럼 트렁크 열어둘게.”

나가는 차정한을 보다가 방으로 가서 캐리어를 가지고 나왔다. 가지고 들어올 때처럼 똑같이 가벼운 캐리어를 끌고 카페 바깥으로 나가니 차정한이 얼른 그것을 들어 트렁크 안으로 넣었다. 나는 카페 문이 잠긴 것을 확인하고 조수석에 올랐다. 곧 옆으로 탄 차정한이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출발할게.”

“…응.”

같이 차를 타고 가는 게 처음도 아닌데 이렇게 함께 그 익숙한 집으로 가는 이 순간이 꿈 같기도 했다. 물론 차정한과 내가 온전히 연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도 아니고, 여전히 우리가 가진 감정은 조금 다르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제 비슷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을 보고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비슷한 곳에 위치한 것을 보며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충분했다. 차정한이 사랑이라는 말을 소리 내고, 떠올리며, 마주하려 두려움 없이 나아가는 그 걸음이 좋았다.

“유현아.”

“응.”

“나 너무 떨려.”

“뭐가?”

“너랑 지금 집에 가는 거.”

“나랑 집에 처음 가는 것도 아닌데?”

“그러니까. 거의 매일 같이 가고, 주말에도 같이 갔었는데…. 지금 떨려 죽을 것 같아.”

슬쩍 옆을 본 차정한이 내 손을 꼭 잡았다. 정말 긴장한 건지 손이 유난히 뜨거웠다. 나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차정한의 손을 마주 쥔 채 다른 손으로 그의 손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익숙한 주차장에 내려 캐리어를 끌고 위로 올라갔다. 일요일에도 왔던 곳인데 잠시 머물다가 갈 곳이 아니라 차정한과 같이 지내기 위해 왔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두근거렸다. 나는 캐리어를 들고 내가 쓰던 방으로 들어갔다.

“거기는 왜?”

“응? 내가 쓰던 방 여기잖아.”

당연한 걸 물어서 당연한 대답을 했더니 차정한이 기가 막힌다는 듯 문에 기대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에 썼던 방이지.”

“응?”

“나랑 같이 살려고 왔잖아. 그런데 왜 여기를 써.”

“…….”

“내 방에서 나랑 같이 자야지.”

“뭐?”

“뭐야. 진심으로 여기 쓰려고 그랬던 거야?”

이 집에서 다시 같이 지내는 것까지만 생각하고 방에 대한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기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보고만 있자 차정한이 삐딱하게 문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워 내게 다가와 캐리어를 번쩍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정한아. 방은 그냥 내가 저기 쓰는 게….”

“나 너 매니저로 데리고 온 거 아니거든.”

그대로 자신의 침실로 들어간 차정한이 캐리어를 한쪽에 아무렇게나 놓고 나를 침대에 앉혔다. 일요일에 여기서 자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방은 오랫동안 차정한이 혼자 잠들어 있는 것을 본 방이라 그런지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게 조금 어색했다.

“…안 되겠어. 나 그냥 저기 쓸래.”

아무리 생각해도 차정한과 같은 방을 쓰고, 한 침대를 쓰는 건 어색해 일어나 도망치듯 방을 나섰다. 물론 이 집 안에서 도망치는 게 아무 의미도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시 내가 썼던 방으로 가니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기어이 여기 쓰겠다고?”

“너랑 같이 있으려고 온 건 맞는데… 갑자기 방을, 또 침대를 같이 쓴다는 게 나한테는 아직… 적응도 잘 안 되고….”

다시 문에 비스듬히 기댄 차정한이 빤히 나를 보다가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여기 써.”

“…고마워. 기분 상했어?”

“아니. 괜찮아. 옷 갈아입고 나와. 동거 기념 파티하자.”

“…동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순수한 의미로 말한 건데.”

장난스럽게 씩 웃은 차정한이 방 안으로 느릿하게 들어왔다. 그제야 차정한의 장난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알고, 가까이 다가오는 어깨를 슬쩍 밀었지만, 차정한은 밀리지 않았다.

#62

?

?

“동거라는 말을 써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거야. 이상한 생각 안 했어. 그게 뭐… 이상한 말도 아니고.”

“에이, 단순히 같이 산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게 아닌 것 같은데.”

“…자꾸 장난치지.”

차정한이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더는 뒤로 갈 곳이 없었다.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벽과 차정한 사이에 갇힌 채 그를 올려 보았다. 얼굴 위로 지는 차정한의 그늘에 장난스럽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금세 시선이 뒤엉켰다.

“…….”

심장이 무너질 것처럼 아팠다.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세게 뛰는 심장에 마음 어디인가에서 맺혔던 말도 그 열기에 전부 녹아 사라졌다. 나는 조금 급히 입술을 물어오는 차정한의 손목을 쥐었다. 순식간에 입속으로 파고든 열기에 눈을 감고 그의 혀끝을 마주했다.

“으음….”

혀를 부드럽게 문지르다가 휘감아 빨아들일 때마다 꼭 차정한의 입속으로 몸 전체가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차정한의 손목을 쥔 채 그가 혀를 움직이는 것을 따라 손끝을 움직였다. 툭 불거진 손목뼈 위를 매만질 때마다 차정한의 숨이 거칠어졌다.

“진짜… 하…. 너 손목을 왜 그렇게 만져.”

“…어?”

“무슨 뼈를 그렇게 야하게….”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 속으로 생각해.”

“너도 알아야지. 네가 얼마나 야한…….”

손목을 쥐고 있던 손을 들어 입을 막자 이번에는 차정한이 내 손목을 부드럽게 쥐고 내 손바닥에 입 맞췄다.

“마음 같아서는 진짜….”

“진짜 뭐?”

“내가 솔직하게 말하면 너 나랑 같이 안 살걸.”

“…….”

“이건 속으로 생각할래.”

씩 웃은 차정한이 다시 입술을 파고들어 깊게 입 맞추고 놓아주었다. 나는 방을 나가는 차정한을 보다가 문을 닫고 아무렇게나 흐르는 숨이 고요해질 때까지 잠시 침대에 앉아 마구 뛰는 심장 위를 꾹 눌렀다. 두근대며 울리는 심장 박동 사이로 차정한의 웃는 얼굴이 잔상처럼 눈앞을 내내 흔들었다.

아예 씻고 거실로 나가니 테이블 위에 먹을 것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과일에 치즈, 백화점 지하 식품관에서 종종 샀던 데우기만 하면 되는 몇 가지 요리까지 있어 조금 놀랐다.

“이걸 언제 다 샀어?”

“아까 집에 들렀었거든. 차도 가지고 가야 하고. 그때 형이랑 오면서 샀어. 맥주 마실래? 아니면 와인? 아이스 와인인데. 달달한 거.”

“와인 마시자. 여기엔 와인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인 차정한이 바로 마개를 열어 잔에 와인을 따랐다. 이곳을 나갈 때만 해도 다시 이 소파에 앉아 같이 술을 마시고,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기에 지금, 이 상황이 조금 신기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잔에도 와인을 따른 차정한이 내 옆으로 앉아 내게 잔을 내밀었다. 아주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달착지근한 맛이 입안을 맴돌다가 혀끝에 달라붙었다.

“맛있다. 혼자 한 병도 마시겠어.”

“마실 수는 있는데 와인이 은근 잘 취해서 문제지.”

“맞아. 몇 잔 안 마셔도 어지러워져.”

잔을 놓고 딸기 하나를 집어 반쯤 깨물었다. 와인이 달아서 그런지 딸기는 새콤한 맛이 더 강했다. 으깨진 딸기가 목 뒤로 넘어갈 때쯤 되어서야 딸기도 꽤 달콤하다는 게 느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여기 앉기도 싫었는데.”

“혼자 있기 싫어서?”

“응. 처음부터 혼자였으면 몰라도 난 이미 알잖아. 너랑 같이 있는 게 얼마나 좋은지. 13년을 거의 너랑 같이 있다가 갑자기, 그것도 잘못하면 앞으로 계속 혼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아, 진짜 미치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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