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어색해도 좀 지내다 보면 거기에 또 익숙해질걸.”
“그래서 넌 익숙해졌어, 나 없는 거?”
금세 불만이 뒤섞인 목소리가 흘렀다. 반을 먹고 남은 딸기를 마저 입에 넣으며 차정한을 바라보았다. 서운해할 준비를 마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그를 보니 웃으면 안 되는데 웃음이 나왔다. 내가 웃는 것을 본 차정한이 조금 더 심각하게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솔직히 네가 없던 적이 없잖아.”
“왜 없어? 너 오피스텔에서 멋대로 튀고 내가 누나한테 전화해서 네 행방 알아내서 습격하기 전까지 닷새였나? 너 혼자였잖아. 뭐야……. 설마….”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혼자 아니고 누구랑 같이 있었어?”
쿠션을 던지자 가볍게 받아 등 뒤로 넘긴 차정한이 내가 앉은 쪽으로 몸을 조금 더 가까이 당겨 앉았다.
“누가 들으면 내가 지명수배자라도 되는 줄 알겠다. 튀고, 행방을 알아내고…. 거기다가 습격까지.”
“누나도 너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했으면 진짜 신고했을지도 몰라.”
“뭐라고 신고할 건데?”
“같이 살던 내 친…! 사람이 사라졌다고.”
친구라는 말이 금기어도 아닌데 멈칫하더니 굳이 사람이라고 바꿔 말하는 차정한을 보니 굉장히 그 말에 의식하고 있구나 싶었다. 오랜 시간을 그 이름으로 지냈으니 친구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사이에서 친구라는 이름이 완전히 사라지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차정한에게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같이 살기로 한 첫날이니까.
“단순 가출이라 그래서 나 찾아 주지도 않아. 괜히 너 기사만 날걸.”
“기사 나면 더 좋지. 누군가는 찾아 줄 거 아냐. 전국에 네 얼굴 아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내 홈마가 만우절에 네 홈이라고 바꾸면서 네 사진 백 장인가 올렸었잖아. 그때 너로 갈아탄다는 사람도 많았어.”
“그런 걸 지금도 기억해?”
“그럼 그걸 잊어? 그때 그 파일 나도 받았는데.”
“…내 사진 잠깐 올렸던 그걸?”
“어. 다 잘 나왔더라.”
“받았다고 말 안 했었잖아.”
“뭐 그런 걸 말해. 그냥 나 혼자 가지고 있는 거지. 그런데 기분이 좀 이상하긴 하더라. 그때 네 옆에서 받았었거든. 고개만 돌리면 진짜 지유현이 있는데 뭔가 다른 사람이 찍은 사진 속에 널 보니까 뭔가 좀 다른 사람 같은 기분이었어. 뭐랄까.”
소파 뒤로 몸을 푹 기댄 차정한이 와인을 한 모금 마저 마시며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뭔가 정확하게 표현할 말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나 혼자만 알던 내 걸… 남이 안 것 같은 기분.”
“…….”
“내 눈에만 예쁜 게 아니었다는 걸 확인 사살당한 좀… 이상한데 더럽기도 한 기분?”
차정한이 한 번씩 예쁘다는 표현을 할 때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내 외모에 대해 딱히 생각을 깊게 해 본 적이 없어 더 그랬다. 지금도 뭘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 그냥 술만 홀짝댔다.
“유현아.”
“…어?”
“너도 그랬어?”
“…뭘?”
“너도 다른 사람들이 나 보는 거 싫었어? 너만 보고 싶고, 가지고 싶고?”
“그런 적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네가 유명해지고… 사람들이 다 너를 좋아하고, 세상 여기저기에서 네가 크게 보일 때마다 멀어진 것 같았어.”
아직도 차정한이 배우가 되고 바빠졌을 때를 떠올리면 마음이 아팠다. 실물보다 광고나 화면에서 보는 차정한의 모습이 더 많아졌고, 당연해졌던 시간에 익숙해지려 노력하고 또 노력했었다. 당연한 거라고, 모두에게 사랑받게 되어 잘 된 거라고, 이제 정한이가 외롭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고…. 시간이 날 때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서운해하는 내가 이기적인 거라고.
“어떻게 참았어.”
“…….”
“난 네가 다른 친구 만난다고만 해도 짜증 나서 죽을 것 같았는데 넌 어떻게 그걸 티도 안 내고 혼자 참아.”
“너한테는 그게 좋은 일이었으니까.”
“…….”
“나랑은 멀어졌지만, 외로움 많이 타는 네가 많은 사람한테 사랑받고, 관심받아서 좋았어.”
깊게 숨을 내쉰 차정한이 잔에 남은 술을 모두 마시고, 잔을 놓았다. 나도 남은 와인을 마저 마시고, 빈 잔을 그의 잔 옆으로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착해 빠졌다는 소리나 듣는 거야. 너한테 안 좋은 일인데 왜 나한테 좋은 일이라고 그걸 참고 있어.”
“그럼 데뷔 다 했는데 배우 하지 말고 나랑 놀자고 해? 그럴 수는 없잖아.”
“네가 그랬으면 나 다 때려치웠을 거야.”
“그래, 그럴 거 아니까 안 한 거지.”
“너 내가 안 찾아갔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차정한이 그날 찾아오지 않았다면, 같이 있어 달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한 번도 그 ‘만약’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막연한 상실감을 마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글쎄……. 생각 안 해 봤어. 그냥 가끔 너 시간 날 때 만나서 밥 먹고 그러지 않았을까? 원우나 다른 애들 한 번씩 보는 것처럼.”
“그랬어도 네가 지금까지 날 좋아할까.”
그냥 가볍게 넘길 수도 있는 말이었다. 장난스럽게, 진지하지 않게 지나칠 수도 있지만, 나를 바라보는 차정한의 시선이 장난스럽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아서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좋아했을 거야. 어차피 처음부터 혼자 좋아하던 거니까.”
“난 지금도 모르고 있겠지.”
“…….”
“내가 취해서 너한테 키스한 것도, 네가 오래 날 좋아한 것도.”
기대고 있던 몸을 앞으로 해 내게 다가온 차정한이 그대로 나를 끌어안았다. 내 귓가와 목덜미에 입을 맞춘 차정한이 어깨 위로 얼굴을 묻었다.
“네가 이렇게 따뜻한 것도 몰랐을 거야.”
덜컥 내려앉은 심장이 마구 두근대며 귓가가 화끈거렸다. 나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어 굳었던 팔을 조금 들어 차정한의 등을 겨우 가볍게 쓸어내렸다. 귓가로 내내 쏟아지는 그의 목소리에 몸에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빠졌다.
“앞으로는 다 말해 줘.”
“…….”
“하나도 숨기지 말고.”
“…….”
“내가 미우면 밉다고 말해. 짜증 나면 짜증 난다고도 말하고, 화내야 할 때는 화도 내. 나도 잘못된 건 고쳐야지. 싫은 것도 다 말해. 네가 싫어하는 건 안 할 거야.”
너를 어떻게 미워할 수가 있을까. 짜증이라는 감정은 내가 차정한에게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앞으로도 평생 소리 낼 일이 없을 말 같기도 했다.
“그리고 좋을 때는 좋다고도 말해 줘.”
“…….”
“사랑한다는 말도 하고 싶을 때는 꼭 해 줘. 너한테 그 말 들을 때마다… 숨이 안 쉬어져.”
“…….”
“그만큼 좋아.”
살짝 몸을 뗀 차정한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진지한 차정한의 눈을 마주하며 아주 많이 흔들렸다. 몸이 자꾸만 차정한이 있는 쪽으로 기울었다. 눈이 감기고, 와인보다 달착지근한 혀끝이 마주 문질리다가 서로를 집어삼키듯 뒤엉켰다. 차정한에게 꼭 사랑받는 것만 같아 기분이 아주 가볍고 포근하게 떠올랐다.
#63
?
?
와인 한 병을 둘이 다 비우고, 영화까지 본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신은 별로 피곤하지 않은데, 종일 일을 해서 그런지 몸이 조금 피곤했다. 테이블을 치우려는데 차정한이 혼내는 소리를 장난스럽게 내며 내 어깨를 뒤에서 잡아 욕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나는 욕실 안에 여전히 있는 내 칫솔을 가만히 보다가 집어 들었다. 이 집은 정말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잘 준비를 하고 나오니 차정한이 욕실 앞에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서 있었다. 마주친 순간 놀라 반사적으로 문을 닫았다가 다시 조금 열었다.
“놀랐잖아.”
“진짜 저 방에서 잘 거야?”
“아까 얘기 다 했잖아.”
“…좋아. 알았어. 한 번 한 말은 지켜야지.”
차정한이 내가 들어가려는 방 앞에서 내 얼굴을 잡고 고개를 기울였다. 가볍게 마주했던 입술이 조금 깊게 맞물리고, 한참이나 혀가 섞였다. 간지럽고 조금은 끈적한 소리가 몽롱해질 만큼 울린 뒤에야 입술이 떨어졌다. 아까 마신 아이스 와인보다도 더 달착지근한 것 같은 맛에 나는 괜히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잘 자, 유현아.”
“…응. 너도 잘 자.”
그의 시선이 달라붙는 곳마다 자꾸 열이 올라 얼른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귓가와 목덜미, 입술이 마구 뜨거워 창을 살짝 열고 바깥에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열을 식혔다. 미지근한 술기운과 차정한이 데운 열기가 차가운 공기와 섞여 전혀 춥지 않고, 시원하게 느껴졌다.
‘앞으로는 다 말해 줘.’
차가운 바람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정한의 따뜻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두드렸다.
‘하나도 숨기지 말고.’
내가 또 숨길까 봐 불안한 것처럼 숨기지 말라고 나를 토닥이던 그의 목소리가 새벽의 냉기에 휩쓸려 사라질 것 같아 얼른 창을 닫았다.
“…….”
몇 년이나 잤던 침대를 다시 마주하니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도 어제까지 잠들었던 카페 침대보다는 덜 낯설었다. 나는 잘 정돈된 이불 안으로 들어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알람을 확인했다. 화면 불빛이 너무 강해 조금 빛을 줄이는데 방문이 슬쩍 열렸다.
“유현아…. 나 아픈 것 같아.”
“아파? 어디가?”
“감기인가…. 몸도 좀 으슬으슬 떨리고…. 머리도 좀 아픈 것 같고….”
“…좀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잖아.”
머리만 방 안으로 넣어 보던 차정한이 아예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문은 왜 닫는지 말하려는데 그 말이 나오기도 전에 침대로 온 차정한이 나를 안쪽으로 밀며 침대에 올라앉았다.
“눈 오는데 막 밖에 계속 있어서 그런가?”
“…진짜 아파?”
“이마 만져 봐. 열나는 것 같은데.”
얼굴을 가까이하는 차정한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따뜻하기는 한데 딱히 열이 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열 없는 것 같은데….”
“너 술 마셔서 손 뜨거운가 보다.”
어둠 속에서 뻔뻔히 말한 차정한이 아예 이불 안으로 다리를 넣었다.
“차정한.”
“진짜 나 뜨거워. 여기 만져 봐.”
차정한이 내 손을 잡아 자신의 뺨 위로 가져갔다. 이마랑 마찬가지로 따뜻하기는 한데 아파서 나는 열 같지는 않았다. 내가 아무 말도 없자 차정한은 뺨에 대고 있던 내 손을 내려 목에 대었다. 그리고 또 내려 자신의 가슴 위에 대는 손을 빼서 어깨를 밀어냈다.
“얼른 네 방으로 안 가?”
“네가 저 방으로 안 온다고 하니까 내가 온 거잖아.”
“…너….”
“그래도 우리 같이 살게 된 첫날인데 따로 자는 게 말이 돼?”
“…….”
“나랑 자는 거 싫어서 그래?”
“싫은 게 아니라…….”
내가 어떤 대답을 할지 긴장이라도 한 것처럼 주먹을 말아쥐고 입을 막고 있던 차정한이 웃으며 나를 안 듯 그대로 눕혔다. 같은 침대에 차정한과 자기 위해 눕는다는 건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 몸에 자꾸 힘이 들어갔다.
“나 봐 줘.
이렇게 같이 누웠는데 천장만 보고 있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차정한을 향해 몸을 돌려 누웠다. 차정한이 내 베개 끝으로 다가와 머리를 놓고 몸을 밀착하듯 붙였다.
“너 카페도 갈 거고, 나도 곧 촬영 시작하면 당분간은 이렇게 같이 자지도 못할 거 아냐.”
“…아, 촬영. 곧 시작이지.”
“촬영하면 늦게 끝나는 날 있을 거고, 늦게 끝나도 오라고 네가 해 줘서 안심하기는 했는데…. 그래도 미안했거든. 내가 너무 이기적으로 구는 것 같아서. 자는 너 깨우는 것도 미안하고.”
“…괜찮다고 했잖아.”
“너야 당연히 괜찮다고 하지. 착해서는….”
손을 든 차정한이 내 뺨을 매만졌다. 아주 살살 문지르는 그의 손길에 몸에서 힘이 쭉 빠지고 솔솔 잠이 왔다.
“이제 너 집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진짜 마음이 놓여. 조용히 자는 너 보면 되잖아.”
“기다릴게.”
“언제 끝날 줄 알고 기다려. 카페 나가려면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
그의 손길 때문인지 앞으로 무엇이든 다 말하겠다고 약속한 것 때문인지 마음에 있는 말을 차정한에게 들려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도 너 보고 싶으니까.”
“…….”
“널 봐야 나도 마음이 놓이지.”
“…미치겠다.”
“왜?”
“네가 너무 예뻐.”
“…넌 그런 말을 잘하더라.”
“그 말 말고는 표현할 말이 없어서 그래. 너 지금 진짜 예뻐.”
베개 위에 얼굴을 댄 채 더 가까이 다가와 밀착한 차정한이 몸을 뒤로 빼려는 내 허리를 확 끌어안았다.
“자꾸 도망가지 마.”
“…이러고 어떻게 자.”
내 다리 사이에 차정한의 다리가 들어오고, 몸은 완전히 붙어 있었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바로 앞에 차정한의 얼굴이 보이고, 숨이 닿는 가까운 거리에서 편하게 잠들 자신이 없었다.
“재워 줄게.”
“…네가?”
“뭐야. 나도 잘 재울 수 있거든.”
“내가 너 재우는 게 빠를걸.”
“와…. 뭐지, 이 완벽한 무시는. 매일 재워 달라고 울지나 마.”
그대로 내 목 아래에 팔을 넣은 차정한이 내 몸을 조금 더 돌려 품으로 끌어안았다. 꼭 팔베개를 한 채 그의 품에 안겨든 모양새라 조금 전보다 더 어색했다. 차정한은 그런 나를 완전히 꽉 가두는 것처럼 끌어안았다. 머리칼 위로 닿아오는 그의 숨과 목소리에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지금은 어색해도 익숙해질 거야.”
“…….”
“잘 때 되면 너는 나를 찾고, 나는 너를 찾게 될 거고, 또 너무 당연하게 같은 침대에 누울 거고, 아무 말도 안 해도 이렇게 안게 될 거야.”
“…….”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
“내가 너 없으면 못 사는 것처럼, 너도 나 없으면 못 살게 할 거야. 절대 안 놔줘.”
조금 더 팔을 꽉 조여 나를 깊게 끌어안은 차정한이 내내 사랑 같은 말을 속삭였다. 나는 쏟아져 들어오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차정한의 따뜻한 어둠 속에서 눈을 감았다.
귓가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에 놀라 눈을 뜨고 얼른 알람을 껐다. 소리를 들었는지 잠들 때와 비슷한 곳에서 나를 보고 잠든 차정한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나는 손을 들어 그 구겨진 미간 위를 부드럽게 눌러 펴고 등을 몇 번 쓸어 주었다. 깰 것처럼 굴다가 다시 잠드는 걸 보니 귀여워 아침부터 웃음이 났다.
차정한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침대에서 내려와 방을 나섰다. 발끝을 물들이는 아침의 빛과 마주하다가 얼른 욕실로 들어갔다.
기분 좋은 따뜻한 물로 씻고 나와 어제 남은 딸기와 바나나를 갈아 주스를 만들었다. 아침 대신 한 컵을 마시고, 남은 것을 가득 유리잔에 따르는데 차정한이 방에서 나왔다.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뜨는 것을 보니 아직 졸린 모양이었다.
“더 자지.”
“너 없어서 깼어.”
“딸기랑 바나나 갈았는데, 지금 마실래?”
“정신 좀 차리고 올게…….”
아침이라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 차정한이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코트까지 입고 나오니 주스를 마시고 있는 차정한이 보였다. 딱히 꾸민 것도 아니고, 편한 옷을 입고 자다 일어나서 주스를 마시는 것뿐인데 꼭 주스 광고를 보는 것만 같았다. 나는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잊고 차정한이 컵을 내려놓을 때까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
다 마시고 싱크대로 가 컵에 물을 부어 놓은 차정한이 휙 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빠른 움직임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아…. 나… 갔다 올게.”
“갔다 오는 건 좋은데, 혼자 가는 건 싫어. 기다려. 옷 가지고 나올게.”
“택시 타고 가면 돼. 어제 늦게 자서 피곤할 텐데 더 자.”
“내가 차가 몇 댄데 네가 택시를 타.”
방으로 들어가 코트와 모자를 가지고 나온 차정한이 현관에 있는 거울을 보며 아무렇게나 모자를 눌러 썼다.
“오늘 스케줄 없어?”
“실장님이랑 점심 약속. 촬영 들어가기 전에 꼭 밥 먹이잖아. 가자.”
내 손을 잡은 차정한이 코트를 팔에 걸친 채 문을 나섰다. 집이 워낙 따뜻해서 그런지 문을 열기만 해도 훅 끼치는 냉기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옷 입어. 춥잖아.”
“운전할 때 불편하니까.”
“그래도…. 그러다가 감기 걸려.”
“알았어.”
그대로 팔을 넣지는 않고 어깨에 코트를 두른 차정한이 늘어진 코트 안으로 내 손을 잡아넣었다.
“…….”
문이 열리고 안에 올라서도 차정한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 손을 쥔 채 장난치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나보다 마디가 굵고 더 단단한 차정한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 사이사이를 느릿하게 문지르듯 들어오기도 하고, 또 힘을 주어 쥐었다가 살살 달래듯 풀며 만지기도 했다. 그냥 손을 잡고 있을 뿐인데도 그 움직임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묘해 나는 괜히 층수만 확인했다. 오늘따라 내려가는 속도가 몹시 느린 것 같았다.
“나랑 자니까 어땠어? 혼자 자는 게 더 편해?”
“그럴 줄 알았는데…. 내 생각보다 편했어. 잠도 잘 오고.”
“너 이제 나 없이 못 잘걸.”
확신하는 목소리에 웃음이 났다. 웃는 나를 흘끔 본 차정한이 문이 열리자마자 내 손을 잡은 채 차로 빠르게 다가갔다.
키를 누르자 불이 반짝이는 차로 다가간 차정한이 그대로 조수석 쪽에 선 내 머리 위로 어깨에 걸치고 있던 코트를 뒤집어씌웠다. 순식간에 드리우는 어둠에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순간 그 어둠 안에서 입술로 따뜻함이 파고들었다.
차에 기대선 채 한참이나 그의 코트를 뒤집어쓴 채 그 안에 숨어 키스했다. 쪽쪽거리는 소리와 혀가 엉켰다가 풀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 자꾸 그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아…. 하으…….”
입술이 떨어지고, 코트가 걷혔다. 차정한은 내 입술을 손으로 슬쩍 문질러 닦아 주고, 몸을 앞으로 살짝 당긴 뒤에 문을 열어 주었다.
“너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라 열어 주는 거야.”
“…….”
“안 탈 거면 한 번 더?”
다시 코트를 들어 올리는 차정한에게서 떨어져 차로 올랐다. 그런 나를 보며 소리 내어 웃은 차정한이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잔뜩 기분 좋은 얼굴로 운전석을 향해 움직였다.
차정한은 카페에 도착할 때까지 내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신호에 걸려 멈춰 서면 나와 눈을 맞추고, 자꾸 웃었다. 차정한이 웃을 때마다 애꿎은 심장만 꽉 조여들었다.
카페 앞 주차장으로 차를 세운 차정한은 내가 내리지 못하도록 손을 더 꽉 쥔 채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달래듯 그의 손등을 몇 번 쓸어 주었다. 그래도 놓지 않고 보기만 하는 차정한을 보니 이대로 보내면 지금 이 얼굴이 내내 마음에 걸릴 것 같았다. 나도 참 차정한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너무 마음이 약해져 탈이었다.
“커피 마시고 갈래? 아침에 커피 안 마셨잖아.”
“정말? 그럼 오늘 네가 내리는 첫 커피 내가 마시는 거네.”
“응, 네가 마시는 거야.”
“빨리 가자. 나 커피 마시고 싶어.”
서둘러 안전벨트를 푼 차정한이 그보다 더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커피가 뭐라고 잔뜩 들뜨고 기분 좋은 얼굴을 한 걸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그를 따라 차에서 내려 얼른 카페 문을 열었다.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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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 있어. 커피 줄게.”
“그 알바는 언제 와?”
“올 때 됐어. 왜? 아…. 다른 사람 눈에 뜨이기 좀 그렇지. 안에서 마실래? 방에서.”
“너도 방으로 올 거야?”
“난 오픈 준비해야지.”
“난 너 보면서 마실 거야.”
나를 따라 카운터 안으로 들어온 차정한이 원두를 고르는 내 뒤로 바짝 붙어 섰다. 블라인드를 걷지 않았고, 또 아직 현우가 오지 않기는 했지만, 그래도 문이 잠기지 않은 상태에서 이렇게 붙어 있는 게 조금 그래서 슬쩍 몸을 옆으로 움직여 피했다.
“원두 종류도 많네. 설명 좀 해 주라.”
다시 내 뒤로 다가와 바짝 붙은 차정한이 뒤에서 내 허리를 끌어안고, 어깨 위로 얼굴을 내렸다. 앞에 커피 머신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를 가릴 정도로 높지는 않아서 현우가 들어온다면 우리가 바로 보일 것이었다.
“현우 올 때 됐어.”
“또 현우라 그러네. 현우한테 더 보여 줘야겠다.”
더 꽉 허리를 끌어안은 차정한이 내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뜨거운 입술이 살짝 벌어져 목덜미를 머금다가 이로 슬쩍 깨무는 것에 배 위에 단단히 감긴 팔을 풀려고 했지만, 차정한은 조금도 팔을 풀 생각이 없다는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이, 이것 좀…. 그러다 진짜 현, 서현우가 봐.”
“그러니까 원두 설명 빨리해 주면 되잖아. 무슨 커피 마실지 그래야 빨리 정하고 놓지.”
작정한 것처럼 목덜미에 입술을 댄 채 말하는 차정한의 숨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앞에 놓인 원두 샘플을 하나씩 들어 차정한에게 보여 주었다.
“이건 과테말라 안티구아인데 향이, 잠깐만… 자꾸 움직이면….”
“향이 어떤데. 너처럼 좋아?”
아예 목덜미에 코끝을 대고 문지른 차정한이 얼굴을 파묻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눈앞이 다 아찔하게 흔들렸다.
“…달콤한 향이고, 깔끔해서… 마시기 좋아.”
“그래? 그럼 옆에 건?”
“아, 이거… 제일 대중적인 건데 콜롬비아 수프리모… 아, 잠깐만….”
“아, 수프리모.”
귀에 차정한의 숨이 닿자 몸이 비틀렸다. 손에 든 원두 샘플 봉투가 구겨지고,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귓불을 깨문 차정한이 혀로 느릿하게 그 위를 문지르는 느낌에 나는 바를 두 손으로 짚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아…….”
아직 멍이 가시지 않았을 허리를 꽉 끌어안아서 그런 건지 미약한 통증과 함께 그 통증이 지나고 어마어마한 쾌감이 덮쳐 왔던 그 날이 떠올랐다. 내 허리를 꽉 쥔 채 있는 힘껏 움직이던 차정한의 흥분한 얼굴과 마음 위로 뚝뚝 떨어지던 그의 달아오른 숨이 떠올라 자꾸 몸 여기저기로 달라붙었다.
“세 개나 더 남았는데 왜 설명을 안 해. 못 고르겠잖아. 응?”
“네가, 흣, 네가 자꾸…….”
“내가 뭘.”
짓궂은 목소리에 당할 재간이 없었다. 나는 내 턱을 쥐고 살짝 돌려 어깨 위에서 마주한 차정한의 얼굴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입술이 겹치고, 기다렸다는 듯 처음부터 깊게 엉켜 들었다. 차정한은 그제야 팔에서 힘을 느슨하게 풀고 나를 돌려세웠다. 정신없이 깊게 얽히는 혀에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또 몇 시인지도 다 잊었다.
현우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 순간 문 가까이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차정한을 떼어냈다. 더 하고 싶은지 예민한 얼굴로 인상을 쓴 차정한이 내 어깨 너머를 바라보며 중얼댔다.
“아, 빡세게 꾸미고 올걸.”
“하아…. 어?”
“나 어때.”
“뭐가?”
“얼굴 상태.”
“…잘생겼지.”
“객관적으로?”
“…응.”
“그럼 됐어.”
영문 모를 말들을 물은 차정한이 나보다 먼저 카운터를 나섰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뒤돌아 차정한이 현우에게 다가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현우는 아직 차정한을 제대로 보지 못한 건지 조금 어색한 얼굴로 다가오는 낯선 사람을 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평소보다 다듬어진, 그러니까 ‘배우 차정한’의 모습으로 인사한 차정한이 아직도 영문을 모르고 선 현우를 보며 모자를 벗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머리칼을 쓸어넘기고 선 차정한의 뒷모습과 그런 차정한을 멍하니 보는 현우를 같이 보니 어쩐지 조금 머리가 아팠다.
“헐…. 차… 차정한?”
“네. 우리 유현이한테 말씀 몇 번 들었습니다. 이제야 인사드리네요.”
“네? 아, 아… 저, 저한테 인사를… 와, 대박. 안녕하세요! 저, 저 진짜 팬이에요! 작년에 광고하신 그 패딩도! 저 백화점 오픈 전부터 서서 샀거든요!”
“아, 그 완판 됐던….”
“네! 와, 저 진짜 팬인데…. 영화도 다 봤어요! 와, 형이랑 아는 사이시구나……. 와. 진짜… 대박 잘생겼어요. 태어나서 이렇게 잘생긴 사람 처음 봐요.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