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제는 노골적인 질문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나는 부끄러운 것도 잊고 고개를 끄덕였다. 차정한이 씩 웃으며 조금 더 빠르고 세게 허리를 움직였다. 그의 성기가 아래에서 위로 확 올라올 때마다 등줄기가 다 오싹할 만큼 쾌감이 찌릿찌릿 올랐다.
“아…. 움직여 봐, 유현아.”
“…흣, 아….”
차정한이 내 허리 아래 양쪽 뼈를 붙들고 위아래로 들었다가 놓는 시늉을 했다. 나는 아래에서 파고드는 성기의 느낌과 차정한의 손길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위로 살짝 들어 올렸다가 아래로 내릴 때마다 그의 성기가 깊은 곳을 지나칠 만큼 세게 자극했다. 눈물이 날 만큼 강한 쾌감에 속눈썹 젖는 느낌이 났다. 나는 부끄러움도 잊고 차정한의 움직임에 맞춰 몸을 들썩였다.
“아… 아! 아! 흐으, 읏, 응… 아!”
내가 내려앉을 때마다 차정한은 있는 힘껏 위로 몸을 쳐올렸다. 몸이 정확하게 맞물리는 순간 허리가 비틀릴 만큼 강한 쾌감이 온몸을 녹였다. 너무 좋아 눈물이 막 흐르고, 움직임이 커졌다. 내 몸인데 꼭 내 몸이 아닌 것처럼 전혀 제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차정한의 어깨를 붙든 채 몸을 들썩이고, 허리를 비틀었다. 깊게 찔릴 때마다 사정감이 밀려들고 아랫배가 울렁였다. 나는 차정한이 위로 확 깊게 찔러 올리며 내가 멀어지지 못하게 허벅지를 꽉 눌러 앉히는 순간 사정했다. 자극점을 눌린 채 꼼짝도 하지 못해 그런지 사정을 했는데도 계속 그 극점의 감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쾌감에 고여 머리가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하으, 응! 정한, 정한아… 아… 아아… 그, 그만… 흐윽, 아!”
“아… 유현아….”
허벅지를 누르고 있던 힘이 사라지고, 잠시 멈춘 내 안을 다시 깊게 확 그의 성기가 찌른 순간 나는 하릴없이 말간 것을 그에게 쏟아냈다. 눈을 떴는데도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벌어진 입술도 마구 떨렸다. 내 안으로 깊게 쏟아지는 뜨거움과 함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차정한의 두 팔이 나를 끌어안고, 그의 온기가 여기저기로 닿아 왔다. 고개를 들고 싶은데 몸과 생각이 완전히 다른 존재처럼 따로 놀았다. 숨을 쉬기 힘들어 마구 헐떡이면서도 내가 얼굴을 파묻은 차정한에게서 나는 좋은 향에 기분이 좋았다. 나는 귓가로 쏟아지는 흐트러진 차정한의 숨소리를 들으며 완전히 눈을 감았다.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아침에 알람과 함께 눈을 떴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감으며 잠시 머물다가 얼른 다시 눈을 떠 옆을 바라보았다. 혹시 늦잠을 자서 아직도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간 모양이었다. 몇 시간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갔을 텐데 피곤할 것 같아 걱정이었다.
더 자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침대에서 벗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칫솔을 입에 물고 또 눈을 감고 있다가 눈을 뜨자 거울에 붙은 종이가 보였다.
<네 얼굴 좀 봐. 아침부터 완전 예뻐.>
무슨 말이지 생각하려는데 작은 메모지 바깥으로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보였다. 차정한 때문에 나르시시스트가 된 것 같아 웃음이 터졌다. 내가 진짜 차정한 때문에 살 수가 없다. 고개를 저으며 메모가 젖지 않도록 잘 떼어 욕실 한쪽으로 잘 두었다.
양치를 하고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샤워부스 문에도 메모가 붙어 있었다.
<내가 정리는 했는데 씻기는 건 시간 모자라서 못했어. 오늘은 혼자 씻어. 다음에는 내가 다 책임질게.>
정리는 했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아래를 바라보았다. 어제 까무러치듯 잠든 뒤로 아무 기억이 없는 걸 보면, 내가 정신없이 잠든 사이에 차정한이 혼자 정리를 한 모양이었다. 그러는데도 모르고 잤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워 어디론가 확 사라지고 싶었다.
“…진짜 내가 못 살아.”
다음에는 다 책임진다는 말도 조금 어이없어 또 웃음이 작게 터졌다. 대놓고 엉뚱한 면이 있어 한 번씩 이렇게 사람을 당황하게 했다. 뭐 덕분에 아침부터 웃고 시작했으니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 메모도 젖지 않게 아까 메모지를 두었던 곳 위에 잘 놓고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보다 조금 더 피곤하기도 하고, 몸 여기저기도 아픈 아침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기분이 붕 떠오르는 좋은 아침이었다.
* * *
몇 년 동안 차정한의 스케줄을 따라 다녀본 결과 영화도 그렇지만, 드라마 촬영이야말로 정말 여러 변수가 생기기 쉬웠다. 정해진 시간에 딱딱 찍으려고 계획을 해도 날씨가 따라주지 않거나 한 배우의 컨디션이 난조일 경우에는 몇 시간씩 뒤로 미뤄지는 경우가 흔했다. 그래서 오전에 있던 촬영이 오후로 갑자기 미뤄지기도 하고, 오후에 있던 스케줄이 새벽까지 밀리는 일도 허다했다.
이번에는 내가 같이 다니는 게 아니라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차정한은 촬영을 시작한 지 딱 사흘 만에 그 변수와 마주한 것 같았다. 원탑 주인공이라 한 회에 안 나오는 신이 없을 정도로 촬영 분량이 많은데 야외 촬영 중 갑자기 예고에도 없던 소나기가 몇 번이나 쏟아지는 바람에 촬영이 두 번이나 중단되었다고 내게 톡을 보냈다.
지금까지 찍은 것 중에 지금 드라마 촬영이 가장 처음부터 빡세다며 졸려 눈을 감고 말하던 차정한이 떠올랐다. 새벽에 나가 또 새벽에 들어오는 스케줄에 그저께도 그렇고 어제도 그렇고 나는 차정한의 얼굴을 한 시간도 채 보지 못했다.
오늘도 새벽 한 시가 넘도록 차정한은 들어오지 않았다. 촬영이 밤까지 밀리고 또 밀려 자정 넘어서야 끝날 것 같다는 톡을 받은 뒤로 아무 연락도 없는 걸 보면 지금까지도 촬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화면에 나오는 지금보다 풋풋한 <가을밤>의 차정한을 보다가 울리는 진동에 얼른 휴대폰을 확인했다.
[정한 : 나 출발했어. 도착하면 거의 두 시 다 되겠다]
[정한 : 먼저 자]
[나 아직 안 졸려]
[정한 : 그럼 기다려 나 금방 갈게 보고 싶어 나 충전해야 돼]
[기다릴게]
메시지를 보내기가 무섭게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얼른 드라마 볼륨을 줄이고, 전화를 받았다.
- 왜 아직 안 자. 안 피곤해?
“너 없으면 못 잔다니까.”
- …그런 말은 나 있을 때 해. 내 얼굴 보고.
“왜?”
- 밖에서 서면 안 되잖아.
“…미쳤나 봐. 형도 있을 텐데.”
-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게 했잖아. 엄청 애매하게.
거침없는 차정한의 화법 때문에 당황했던 적이 많았지만, 이렇게 동윤 형의 눈치가 보이는 건 또 처음이었다. 물론 나와 그런 의미로 대화를 하고 있다는 건 알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괜히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 뭐 하고 있었어?
“해진이 보고 있었어.”
- 서해진이 좋아, 내가 좋아.
화면 속 서해진의 이름을 한 차정한이 울고 있었다. 사랑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울어 버리는 그 외로운 얼굴에 몇십 번을 본 장면인데도 눈동자가 뜨거워졌다.
“서해진을 연기한 너.”
- 잠깐만. 형, 몇 분 뒤에 도착해?
대답을 들은 차정한이 갑자기 동윤 형에게 몇 분 뒤에 도착하냐고 묻자, 멀리서 형이 10분 정도 더 걸릴 것 같다고 대답했다.
- 15분 뒤에 현관 앞에 딱 서 있어. 들어가자마자 안게.
뒷말은 조금 작게 속삭이는 차정한의 목소리에 나는 벌써부터 두근대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67
?
?
전화를 끊은 뒤부터 내내 시간만 확인했다. 15분이 이렇게 느리게 흐르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화면 속 서해진보다 지금은 곧 내 앞에서 움직일 차정한이 먼저였다. 나는 10분을 겨우 보내고 현관으로 가 서성였다.
1분, 그리고 또 1분…. 느리게 시간이 네 번 정도 흘렀을 때 비밀번호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현관으로 나가 문손잡이를 잡아 열었다.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그대로 바깥으로 열리는 문에 나는 그대로 끌려가 들어오는 차정한과 마주했다.
“…….”
“…….”
눈이 마주친 순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바깥에서 들어오려던 차정한도 문과 함께 반쯤 나온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입술만 열었다가 닫는 것을 두어 번 반복했을 때, 차정한이 내게 밀려들었다.
문손잡이를 놓치고 몸이 뒤로 밀렸다. 나는 내 입술을 머금으며 들어오는 차정한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주차장에서 묻었을 차가운 기운이 그의 옷에 남아 있었다. 나는 차갑다가 금세 따뜻하게 물드는 차정한의 입술을 마주 머금은 채 눈을 감았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문 열고 나올 만큼?”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씩 웃은 차정한이 다시 고개를 기울여 입 맞췄다. 입술을 쪽쪽 소리가 나게 마주 빨고, 혀를 문지르다가 머금었다. 숨이 가빠지고, 몸에서 힘이 쭉 빠질 때까지 키스한 뒤에야 겨우 현관을 벗어나 안으로 들어갔다. 차정한은 소파로 가는 동안에도 나를 두 번이나 잡아 세우고 다시 입술을 겹쳤다.
“하루 종일 내가 얼마나 하고 싶었는데.”
소파에 앉으면서도 내 얼굴을 쥐고 입술을 겹친 차정한이 아예 쿠션을 치우고 나를 눕혔다. 나는 반쯤 눕혀진 채로 그의 키스를 받다가 그 어깨를 살짝 쥐고 몸을 일으켰다. 차정한이 젖은 입술을 쪽 소리가 나게 빨며 몸을 떼어냈다.
“아, 이제 살겠다.”
몸을 일으켜 앉은 내 허벅지 위로 머리를 대고 누운 차정한이 나를 올려 보며 웃었다. 원래도 군살이라고는 없었지만, 사흘 만에 얼굴이 조금 더 날렵해진 걸 보니 마음이 쓰였다.
“내일도 일찍 나가?”
“내일은 오후 촬영. 며칠 빡세게 굴렸다고 오전에 좀 쉬고 나오래.”
“그래도 다행이다. 내일은 늦게까지 푹 자.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점심에 해 줄게.”
“아무거나 먹어도 되니까 내일 나 나가기 전까지 내 옆에 딱 붙어있어. 어디 가지 말고.”
“…알았어.”
손을 들어 내 뺨을 매만진 차정한이 갑자기 손을 내려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손 좀 줘 봐.”
“손?”
차정한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차정한은 아직 부족한 것처럼 반대쪽 손을 들어 허공에서 움직였다. 나는 그 의미를 읽고 내 다른 쪽 손도 차정한에게 내밀었다. 두 손으로 나의 두 손을 완전히 가두듯 쥔 차정한이 웃었다.
“나 좀 씻겨 줘.”
“…손은 왜?”
“맞을 것 같아서.”
“알긴 알아?”
손을 빼내 양쪽 뺨을 누르자 차정한이 얼른 몸을 일으켜 섰다.
“빨리 씻고 나와. 차 줄게.”
“바로 잘 거 아니지? 얼마 만에 이렇게 얘기하는 건데.”
“응, 안 자. 그러니까 빨리 씻고 와.”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고 서둘러 욕실로 가는 뒷모습을 보니 자꾸 웃음이 났다. 그가 나오기 전에 마시기 좋은 온도의 차를 주고 싶어 나도 얼른 부엌으로 향했다.
물이 뚝뚝 머리칼 끝에서 떨어지는데도 그냥 나온 차정한의 머리를 말려 주었다. 길지 않아 금방 마른 머리를 쓰다듬어 예쁘게 만져 주고 같이 차를 마셨다. 며칠 동안 있었던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이야기였지만, 꼭 전에 같이 살 때로 돌아간 것 같아 좋았다.
새벽 네 시가 넘은 뒤에야 같이 방으로 들어갔다. 그 어색하던 일이 단 며칠 만에 자연스럽게 변해 조금 민망하기도 하지만, 잘 때도 따로 있으면 정말 얼굴 볼 시간이 없어 어쩔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잠들기 직전까지 차정한의 얼굴을 보고, 또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좋고, 또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차정한을 볼 수 있다는 것도 너무 좋았다.
“아, 내일 저녁에 누나 와. 그래서 같이 저녁 먹기로 했어.”
“드디어 누나 오시는구나. 잘됐다. 너 이제 아침에 매일 안 나가도 되는 거지?”
“응. 카페는 다시 누나가 할 거니까.”
“집에서 뭐 할 거야? 심심하지 않겠어?”
“뭘 할지 생각도 하고, 준비도 하고… 그러려고.”
내 말에 차정한이 뭔가 생각난 듯 손을 뻗어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약한 불빛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그 다정한 얼굴과 손길에 자꾸 그쪽으로 기대고 싶어졌다.
“아, 맞다. 실장님이 곧 연락할 거야.”
“나한테? 왜?”
“나 얼마 전에 실장님이랑 점심 먹었잖아.”
“응.”
“실장님이 너 일 진짜 다시 안 하냐고 나한테 계속 물으시더라고. 내 매니저 일 아니어도 너 일 잘하고 해서 콘텐츠 기획이나 광고 기획 쪽으로 일해 봐도 좋을 것 같다고 하시던데. 한 번 연락 올 거야. 그쪽으로도 생각 있으면 한번 잘 해 봤으면 좋겠어. 뭐든 너 하고 싶은 게 우선이긴 하지만.”
“생각해 볼게.”
머리를 쓰다듬다가 가까이 다가와 내 베개에 머리를 댄 차정한이 가볍게 입 맞췄다. 대화 대신 한참이나 쪽쪽대는 간지러운 소리가 귓가로 울렸다. 마지막으로 조금 깊게 물어 잠시 머문 차정한이 가볍게 입술을 떼어냈다.
“유현아.”
“…응.”
“우리 이제 이름 만들까.”
“…응?”
“나 너랑 진지하게 만나고 싶어. 지금도 물론 진지하지만…. 친구도 아니고, 아직 애인이라고…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
“…….”
“나 너랑 연애하고 싶어.”
차정한이 소리 낸 연애라는 말에 머릿속으로 퍼졌던 노곤함이 사라지고, 정신이 또렷해졌다. 이 집에 다시 들어온 뒤, 한 번도 연애라는 말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여기 왔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연애하게 된 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고, 설레서 그다음 이야기를 떠올리지 못했었다. 그냥 이대로 가다 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막연한 생각에 판단을 보류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내가 아는 차정한의 연애는 늘 짧았다. 가장 길었던 게 일주일이었고, 그 일주일도 얼굴 한 번 제대로 안 보고 지난 적이 대부분이었다.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시작한 연애에 이름을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불쾌해하던 얼굴이 아직도 선명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얽힌 모든 것에 차정한은 결벽에 가까운 거부감을 보였다. 그걸 누구보다도 가까운 곳에서 오랫동안 봐 왔기에 차정한이 소리 내는 연애라는 말에 덜컥 겁이 났다.
“난… 그러니까 난 정한아….”
차정한을 기분 나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너랑 연애 같은 거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시작이라는 말과 함께 따라붙는 끝이 불안했다.
“내가 너무 서둘렀어?”
“솔직히 조금… 무서워. 연애 같은 거랑 진짜 연애는 다른 거잖아. 내가 친구로는 좋은 친구일지 몰라도 네 연애 상대로는 안 어울릴지도 모르고….”
“그 걱정은 내가 해야지.”
“…….”
“친구로는 봐줘도 애인이 저러면 깰 짓은 내가 더 많이 하잖아. 너는 애초에 그런 일 자체를 안 하고.”
“…….”
“만회한다고 해 놓고 너 오자마자 내가 또 이래.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을 듣자 마음이 아플 만큼 뛰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차정한은 어른스럽게 감정을 숨기고 나를 보며 웃었다. 상처 받은 게 아닐까 걱정이 되어 이제는 마음이 따끔거렸다.
“나 원래 성격 급하잖아. 네가 눈앞에 있는데 내 손에 있는 것 같지가 않아서 자꾸 앞서가.”
“…….”
“알아. 너 손에 쥐고 가두고 그럴 수 없는 거. 그냥…. 그냥 내 마음이 그렇다는 거야. 널 물건 취급하거나 그러는 건 절대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
“…그렇게 생각 안 해.”
“키스해도 돼?”
다시 손을 들어 내 뺨 위를 부드럽게 문지른 차정한이 입술을 달싹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묻지 않고 하더니 왜 갑자기 묻나 궁금해 가만히 바라보자 차정한이 작게 웃었다.
“갑자기 왜 물어봐?”
“허락받고 싶어서.”
“…….”
“네가 좋아야 허락하는 거잖아.”
나는 대답 대신 그의 얼굴로 먼저 가까이 다가갔다. 살짝 입술을 댄 채 차정한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해 줘.”
그대로 내 뒷머리를 한 손으로 감싸 누른 차정한이 입술을 더 깊게 맞물리며 파고들었다. 흥분보다는 간지럽고, 마음이 자꾸 들뜨는 키스에 나도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불안하지 않게 할 거야.”
“…….”
“일주일이 지나도 달라질 게 없다는 거 보여 줄게.”
차정한이 말하는 일주일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내가 뭘 불안해하는지 그가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나는 차정한과의 끝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친구의 끝을 겪으며 온몸으로 맞은 그 감정들을 다시는 마주하기 싫었다.
“너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라 나 때문에 그러는 거야. 내가 그런 생각을 깊게 해 본 적도 없고… 그래서 그래.”
“그럼 지금부터 해 줘.”
“…….”
“나 가지는 생각.”
차정한을 가지는 생각. 차정한의 마음이 내 것이 되고, 그가 나만을 사랑하는 생각. 아, 세상에 그런 생각이 존재할까 싶을 만큼 상상만으로도 머릿속이 반짝거렸다.
“…응. 매일 할게.”
“그럼 일단 지금은 나 차인 거지.”
“답을 뒤로 미룬 거지.”
“그게 그거거든.”
“…화났어?”
“아니.”
“…….”
“다음엔 안 차여야지.”
눈을 접으며 웃는 차정한을 보니 벌써 아침이 된 것만 같았다. 분명 가장 약한 불빛인데 주변이 너무나도 밝게 느껴졌다. 나는 미안한 마음과 이해해 줘서 고마운 마음이 뒤섞인 채 그를 가볍게 당겼다. 차정한은 기다렸다는 듯 내 품으로 애처럼 파고들어 안기며 팔을 뻗어 불을 껐다. 나는 그런 차정한의 머리를 꼭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잘 자, 정한아.”
품속에서 내가 한 말과 같은 말이 다정하게 울렸다. 누구도 외롭지 않은 밤이었다.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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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눈을 뜨니 내가 차정한의 품에 안겨 있었다. 자는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침대 옆에 놔두었던 휴대폰을 조용히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11시가 다 되어 있었다. 아직 곤히 잠든 차정한을 보다가 점심을 먹여야 할 것 같아 고민했다.
시켜 먹는 게 좋을까, 아니면 볶음밥이라도 간단히 해서 먹이는 게 나을까. 매일 바깥 밥을 먹으니 간단히라도 내가 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집에 재료들이 있나 생각하는데 진동이 울렸다. 엄마에게 온 전화라 차정한이 깨지 않게 살금살금 침대에서 내려가 거실로 나갔다.
“네, 엄마.”
- 응, 유현아. 엄마. 잤어? 목소리가 자다 깬 것 같네?
“네. 늦잠 잤어요. 어제 늦게 잤거든요.”
- 잘했어. 카페 일하느라 힘들었겠다. 아, 유주 오늘 오는 거 맞지? 공항에서 전화 와서 받았는데 설명을 들어도 헷갈려서. 오늘이니, 내일이니?
“오늘 맞아요. 저녁에 도착하면 같이 저녁 먹기로 했어요, 누나랑.”
- 그래? 집으로 와. 엄마 아빠 서운하게.
“좀 늦을 것 같아서 괜히 저녁도 못 드시고 기다리실 것 같다고 걱정해서요.”
엄마는 그래도 한 달이나 못 본 누나가 보고 싶으신지 괜찮으니 집으로 오라고 계속 말씀하셨다. 뭐 집에서 만나면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엄마와 아버지만 괜찮으시다면 집으로 모이는 게 편하기는 하기에 그냥 그러겠다고 답했다. 누나에게는 집으로 오라고 메시지를 보내 두면 될 것이었다.
- 정한이는? 정한이는 오늘 못 오니? 보면 좋은데.
“정한이 드라마 촬영 시작해서 요즘 바빠요. 오늘도 오후 촬영 있어서 이따 나가야 하고…. 다음에 쉬는 날 한번 말해 볼게요.”
- 응, 그래. 유현이 너는 아직도 누나 카페에서 자는 거야? 거기서 내내 지내기는 힘들 텐데. 아예 여기로 들어오지 그러니.
“아…. 저 다시 정한이 집으로 들어왔어요.”
집으로 들어오라는 말에 심장이 다 철렁했다. 못된 아들이 된 것 같아 괜히 엄마에게 죄송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엄마는 내가 차정한과 싸우고 완전히 사이가 틀어진 줄 알고 걱정하신 모양이었다. 정말 다행이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시는 것에 또 죄송해 어쩔 줄을 몰라 괜히 애꿎은 소파만 손끝으로 문질렀다.
- 그럼 이따 집으로 와. 유주한테도 말하고.
“네. 이따 뵐게요.”
전화를 끊고 나니 이따 집에 갔을 때 내게 쏟아질 차정한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들에 대해 미리 마음을 단단히 먹어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정한이 외국에 있는 누나한테 새벽에 전화해 내 행방을 물은 일까지 있어 이번에는 쉽게 얼버무리고 넘어가기는 힘들 것 같았다.
나온 김에 보리차 같은 커피라도 한 잔 마시려고 부엌으로 가는데 침실에서 조금 큰 목소리가 들렸다. 내 이름을 크게 부르는 소리에 놀라 방으로 가니 침대에서 내려온 차정한이 내게 다급하게 다가왔다.
“유현아!”
“정한아… 왜 그래, 악몽 꿨어?”
놀라서 가까이 다가온 차정한을 이리저리 살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잔뜩 불안한 얼굴을 한 채 차정한은 나를 바라보았다. 나쁜 꿈을 꾼 모양이었다. 창백하게 질려 식은땀에 젖은 얼굴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얼른 차정한의 손을 잡아 침대로 데려가 앉혔다. 그리고 그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구부려 얼굴을 바라보았다. 잡은 손이 벌벌 떨렸다. 얼마나 나쁜 꿈을 꿨으면 이러나 싶어 얼굴을 본 순간 그 눈동자에서 넘쳐 흐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멍하니 차정한이 우는 것을 바라보았다.
“…정한아…….”
“너, 너 어디 안 간 거 맞지? 나 두고 간 거 아니지.”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왜 너를 두고 가.”
“네가, 유현이 네가 나 질렸다고, 애처럼 굴지 말라고… 나 싫다고 가 버렸어. 나만 두고… 내가 가지 말라고 그랬는데, 잘못했다고 했는데… 지긋지긋하다고…….”
말하는 동안에도 내내 눈물이 넘쳐 흘렀다. 이렇게 많이 우는 것을 연기할 때 말고 본 적이 없어 너무 놀라 움직일 수도 없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안 간 거 맞지? 나 두고 안 간 거지?”
“…안 갔어. 나 여기 있잖아.”
“옆에도 네가 없어서… 진짜 간 줄 알았어. 꿈인 줄 알았는데 네가 진짜 없어서… 난 네가 진짜 나만 두고 가 버린 줄 알고…….”
“아니야, 내가 어디를 가. 정한아…. 울지 마, 정한아. 왜 울어…….”
“내가 잘못했어. 내가 괜히 너한테 부담 주고…. 안 그럴게. 네가 하자는 대로 할게. 유현아.”
아직도 꿈과 현실이 뒤섞인 것처럼 차정한은 몹시 불안한 얼굴로 내 손을 잡았다. 나는 눈물로 젖은 두 뺨을 쥔 채 부드럽게 닦아 주고는 얼른 차정한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꿈이야. 그거. 나쁜 꿈 꾼 거야. 나 여기 있잖아. 엄마한테 전화 와서 잠깐 나갔던 거야.”
“…꿈 맞아?”
“그럼. 다 꿈이야. 나 여기 있잖아. 안아 봐. 응?”
차정한의 두 팔이 조금 뒤 내 등에 감겼다. 살짝, 아주 살짝 팔을 정말 내 몸에 감듯 둘렀던 그 팔에 곧 힘이 들어갔다. 차정한은 정말 몸이 부서질 만큼 세게 나를 끌어안았다. 조금 아프기도 했지만, 그가 이제야 안도한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여기 있어, 나.”
“…유현아. 지유현. 나 너 진짜 간 줄 알았어.”
“나 여기 있어.”
“다행이다……. 다행이야. 진짜 죽을 것 같았어.”
내가 여기 있다는 걸 확인이라도 하듯 차정한은 내 어깨와 팔을 만지고, 몸을 조금 떼어 내 얼굴을 두 손으로 쥐었다.
“이제 좀 괜찮아?”
“…괜찮아. 너 있는 거 아니까.”
“응. 나 여기 있어.”
무너지듯 숨을 내쉰 차정한이 나를 다시 꽉 끌어안았다. 나는 한참이나 그런 차정한을 마주 안은 채 그 등을 쓸고 토닥여 주었다. 불안이라는 감정을 나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자꾸만 차정한이 가진 그만의 불안에 신경이 몰렸다.
차정한은 한참 후에야 몸을 떼었다. 창백했던 얼굴도 원래대로 돌아오고, 예민하게 곤두서고 흐트러졌던 감정도 돌아온 것을 보니 꿈에서 벗어난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차정한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씻고 나와. 내가 오므라이스 맛있게 해 줄게. 우리 밥 먹자.”
“…응. 미안해, 놀라게 해서.”
“아니야. 네가 더 놀랐지.”
나는 차정한이 욕실로 들어가는 것을 본 뒤에야 방에서 나왔다. 냉장고를 열어 오므라이스 만들 재료를 꺼내는데 울던 차정한의 얼굴이 떠올라 자꾸만 마음이 조여들었다. 매끈한 눈동자에서 넘쳐 흐르던 눈물이 너무 속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