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쾌감은 고였고, 나는 쾌감의 영역을 넘은 것 같은 감각이 내 몸 여기저기를 강하게 치고 다니는 느낌에 마구 몸을 비틀었다. 더는, 정말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이러다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강한 쾌감이었다. 하지만 차정한은 내 허리를 꽉 붙들어 누른 채 놓아주지 않았다.
“흐윽, 정한아… 제발, 아… 흣, 제발…. 안 돼… 으응, 응…. 하으…….”
“아…. 유현아. 네가 내 걸 막 오물거리고…. 끊을 것처럼 조였다가 풀었다가… 하….”
솔직히 조였다가 푼다고 말은 하지만 그 의미가 별로 없었다. 애초에 내가 조이고 풀고 할 수 없을 만큼 그의 성기는 지나치게 크기 때문이었다. 한계치만큼 벌어진 아래는 내가 힘을 최대한 풀어야 버틸 수 있었다.
“혀… 아, 내밀어 봐.”
눈앞에 차정한이 마구 흔들렸다. 몸은 그에게 눌린 채 움직이지 못하는데 눈동자가 흔들리는 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내밀었다. 고개를 앞으로 기울인 차정한이 입술을 대지 않은 채 혀만 내밀어 내 혀끝을 핥았다. 혀가 문질리는 그 야릇한 감각이 더해지자 아랫배로 믿을 수 없는 쾌감이 흘러내렸다. 나는 온몸을 채워 찰랑대는 쾌감에 차정한을 잡고 애원했다. 눈물이 흐르다 못해 뚝뚝 떨어지고, 온몸으로 식은땀이 반짝였다.
“하읏!”
깊게 찌르고 있는 안으로 다시 그의 뜨거움이 쏟아졌다. 허리를 파고들 것 같던 손에서 힘이 빠지자 나는 차정한의 어깨 위로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아직도 잡혀 있는 것처럼 너무 뜨겁고 몸이 이상했다. 차정한은 우는 내 머리칼과 뺨에 입을 맞추고 귓가에 속삭였다.
“하…. 빼면 흐를 텐데 그냥 이러고 집까지 갈까. 나 운전할 수 있어.”
“…하아…….”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차정한이라면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몸을 떼고 눈을 맞췄다. 젖은 머리칼을 쓸어넘긴 차정한이 장난기 어린 눈으로 나를 보다가 소년처럼 웃었다. 나는 그 웃음에 정말 너무 약했다.
“…너 그렇게 웃을 때마다 어릴 때 너 생각나. 3학년 때 나랑 다른 반 되고 매일 복도에서 나 기다렸잖아. 종례할 때 내 자리에서 복도를 보면 네가 키가 크니까 꼭 네가 보였는데…. 그때마다 너 나한테 이렇게 웃었어.”
“너 아니면 내가 웃을 일이 없었잖아.”
“입 모양으로 배고파, 그냥 빨리 나와, 내가 들어가서 너 데리고 나올까. 막 이런 말 하다가 웃는데… 그게 너무 좋았어. 3학년 때는 종례 때 선생님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나…. 너 보느라 들은 적이 없거든.”
“그때부터… 좋아했어?”
“…더 전부터.”
차정한은 나를 가만히 보다가 두 팔을 벌렸다. 나는 가만히 몸을 앞으로 기울여 차정한에게 안겨들었다. 그의 단단한 두 팔이 내 몸을 완전히 가두어 안은 순간 나는 바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유현이 네 마음 모르고 산 시간 만큼… 아니, 그건 너무 당연한 거고, 앞으로 평생…. 평생 내가 너 더 좋아할 거야.”
“…….”
“질려도 어쩔 수 없어. 난 너 좋아할 거고, 사랑할 거야.”
“…….”
“너 하나만 사랑하라고 지금까지 사랑이라는 말 경멸하면서 살았나 봐.”
사랑. 나는 아직도 차정한이 소리 내는 사랑이라는 말이 조금은 낯설었다. 차정한이 말한 것처럼 그는 내내 사랑이라는 말을 경멸했다. 불신했고,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감정이라 여겼다. 그랬던 차정한이 내게 점점 더 자연스럽게 사랑을 소리 내고 있었다.
“유현이 너한테만 사랑받고 살라고 누구도 날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안겨 있던 몸을 떼고 늘 외로움에 감정들이 파묻혀 있던 차정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요즘의 차정한은 불쑥 튀어나온 외로움에 생각에 잠기지도 않고, 감정을 소리 내는 시간도 늘어났다.
“…더 빨리 말할걸.”
오랜 시간 동안 쌓인 외로움이 다시 그 존재를 보일까 두려워 얼른 차정한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차정한은 뺨을 감싼 내 손을 잡아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그 안에서 간지럽게 쪽쪽 소리가 울렸다.
“걱정하는 얼굴이 뭐 그렇게 야해.”
“…너 자꾸 그런 말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아직 안에 든 차정한의 성기가 커지는 게 느껴졌다. 너무 분명한 느낌에 놀라 바라보니 차정한이 근사하게 입술을 끌어 올리며 웃었다.
“한 번 더 하자.”
힘들어서 안 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입술 바깥까지 나오지는 않았다. 나는 차정한의 뺨을 두 손으로 꾹 눌렀다.
“…한 번만이야.”
“미안해, 두 번.”
“힘들어서 두 번은….”
“아, 세 번.”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를 얼굴로 웃은 차정한이 내 몸을 끌어안은 채 다시 시트 위로 눕혔다. 우리의 열기와 땀으로 축축해진 시트 위로 등이 닿고, 그가 조금 더 깊게 파고든 순간 생각의 불이 꺼졌다. 어떻게 되든 상관없을 것 같았다. 두 번이든 세 번이든 차정한이라면 좋았다. 정말 내일 침대 밖으로 조금도 나갈 수 없다고 해도 그건 내일 생각할 일이었다.
나는 다시 머리끝까지 피어오르는 열기를 마주하며 차정한을 끌어안았다. 있는 힘껏.
#73
?
?
눈을 떴을 때는 정오가 훌쩍 지난 시간이었다. 침대에 누운 채 어제 있던 일을 떠올렸다. 차정한과 공원을 걷다가 차로 가서 섹스한 기억까지는 선명했다. 늘어질 만큼 하고, 또다시 시작해서 내 성기에서 아무것도, 단 한 방울도 뭔가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한 기억이 났다. 차정한은 안 나오는데도 계속 가는 거냐며 내 성기를 잡고 귀두를 혀끝으로 문질렀다. 나는 그런 차정한을 보다가 완전히 무너졌다. 그게 기억의 끝이었다.
정말 그 뒤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잠든 게 아니라 정말 기절했던 건 아닐까. 어떻게 집까지 올라왔는지 이 침대에는 어떻게 누웠는지도 전혀 조금도 기억이 없었다. 혹시 차정한도 아직 안 나간 게 아닌가 싶어 옆을 보니 자리가 비어 있었다.
“…….”
나가는 소리도 전혀 못 듣고 지금까지 잔 걸 보면 정말 까무러쳤던 모양이었다. 나는 빈 베개 위를 손으로 덮었다. 부드러운 촉감 사이로 뭔가 종이 질감이 느껴져 스탠드를 켜고 보니 메모가 붙어있었다.
- 자는 것도 예뻐서 아침에 또 하고 싶었는데 혼날까 봐 참았어. 잘했지. 이따 나 보면 칭찬해 줘.
반듯한 글씨로 아침부터 이런 걸 써서 붙여 놓고 갔을 차정한을 떠올리니 웃음이 났다. 나는 차정한이 적은 글씨 하나하나를 눈에 담고 또 담았다.
메모를 보고 있는데 등 뒤 어디인가에서 진동이 울렸다. 한 번 울리더니 연달아 계속 울리는 것에 뻐근한 몸을 돌려 휴대폰을 확인했다. 예상대로 차정한의 이름이 연달아 화면으로 떠올랐다.
[정한 : 일어났어?]
[정한 : 아직 자는구나 어제 너무 무리했나]
[정한 : 힘들면 오늘은 침대 밖으로 나오지 말고 푹 쉬어]
[정한 : 혼자 일어나다가 또 넘어지면 안 되잖아]
[정한 : 어쩔 수 없이 집에 있어야겠다]
내가 오늘 나가지 않았으면 하는 사심이 가득 담긴 차정한의 메시지를 확인하는데 위로 김원우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번갈아 가면서 바쁘게 떠오르는 메시지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김원우 : 오늘 오는 거 맞지?]
[김원우 : 바쁘냐?]
[김원우 : 갑자기 잠수?]
생일 당일에 갑자기 잠수나 타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아서 겨우 몸을 조금 일으켜 침대에 기댄 채 김원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미안 이제 봤어]
[김원우 : 오늘 올 거지?]
솔직히 말하면 차정한이 바라던 것처럼 그냥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집에 있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약속 당일에 이런 이유로 갑자기 약속을 깨는 건 내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착하거나 의리 넘치는 사람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친구에게 지켜야 할 기본적인 것들은 지키고 싶었다.
[응. 어제 보내준 데로 가면 되지?]
[김원우 : ㅇㅇ 오늘은 너 2차도 가는 거다?]
[김원우 : 밥만 먹고 빠지기 없기]
이런 모임에 가도 대부분 밥만 먹고 빠져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차정한 촬영장에 늦지 않게 가야 할 때도 있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차정한 혼자 집에 있는 게 마음에 걸려 내내 모임에 집중할 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김원우는 내가 늘 차정한을 이유로 밥만 먹고 일어난다는 걸 눈치챈 유일한 사람이었다.
[알았어 이따 보자]
김원우에게 대충 응수하고 바로 차정한의 메시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촬영에 들어갔으면 아마 답을 못 볼 테지만, 그래도 나중에 봤는데 답이 없으면 걱정할 것 같아 몇 글자를 적었다.
[이제 일어났어]
[갈 때 깨우지 나가는 거 전혀 몰랐어 진짜 기절했나 봐]
[저녁에 나가야 할 것 같아]
[오늘 늦어?]
보내고 조금 기다리는데 읽었다는 표시가 생기지 않았다. 촬영에 들어간 것 같아 거기까지만 보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혹시나 해서 다리 사이를 살짝 건드렸는데 역시 아무것도 묻어 나오지 않았다. 내가 자는 사이에 차정한이 다 정리했다고 생각하니 아무도 없는데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고 지난 새벽에 일어났을 일을 상상하며 부끄러워했다.
씻고 간단히 점심을 먹으며 차정한의 드라마를 봤다. <가을밤>을 볼까 하다가 오늘은 조금 가벼운 것을 보고 싶어 <어떻게 연애할까요?>를 틀었다. 1화를 틀자 <가을밤> 때보다는 조금 더 배우티가 나고, 지금보다는 조금 더 풋풋한 차정한이 화면에 들어찼다. 나는 포크를 든 채 먹는 것도 잊고 한참이나 화면만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봤던 드라마인데도 차정한의 얼굴과 연기를 보는 재미가 쏠쏠해서 쉽게 끌 수가 없었다. 나가려면 준비를 해야 하는 시간까지 연달아 드라마를 보다가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옷을 입으면서도 화면을 보고, 머리를 만지면서도 화면 속 차정한을 눈에 담았다. 나가기 직전까지 보다가 화면을 끄고 현관으로 나갔다. 오늘 촬영이 쉴 틈 없이 이어지는 건지 차정한에게서는 아직도 연락이 없었다.
아파트 앞에서 택시를 타고 김원우가 알려 준 곳 주소를 말했다. 벌써 해가 질 준비를 하는 걸 보니 하루가 짧게 느껴졌다. 물론 오늘 늦게 일어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제야 다른 사람들의 낮처럼 정신이 또렷해지고 기운이 나기 시작해서 해가 지는 게 아쉬웠다.
손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보니 화면에 차정한의 이름이 있었다. 나는 운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전화를 받았다. 너무 고요하지 않게 택시 안에 라디오가 나오고 있어 다행이었다.
“응, 정한아.”
- 와, 진짜 가는 거야? 소리가 딱 택신데.
“맞아. 택시 탔어. 넌? 오늘 촬영 길어졌어?”
- 이혁준이 어제는 싸우고 난리더니 오늘은 엔지를 몇 번을 내는지… 아, 진짜 확 엎어 버릴까 하다가 참았어. 그거 때문에 지금 몇 시간을 쉬지도 못하고. 아,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네가 집을 나간 게 중요한 거지.
“너 모르게 나간 것도 아닌데 뭐.”
- 가라고 한 적도 없거든.
“그럼 지금이라도 가도 된다고 해 줘. 그래야 내가 마음이 편하지.”
- 싫어. 다른 놈들 보러 가는 거 뭐가 예쁘다고.
한숨 소리가 들렸다. 허락받을 일도 아니고, 솔직히 차정한이 과하게 싫어하는 것도 알지만, 차정한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기에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 …그래도 예쁘긴 해.
“…….”
- 알았어. 저녁 맛있게 먹고 와.
“고마워.”
- 웃지 말고, 눈도 3초 이상 보지 마. 얘기할 때 허공 보고 말해. 천장이나.
“왜?”
- 너 눈 너무 예뻐. 웃으면서 눈 마주치고 그러면 다 너 좋아하게 돼서 안 돼.
농담처럼 말하면 좀 나을 텐데 진지하게 말하는 것에 다른 사람이 듣는 것도 아닌데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는 뭐라고 대답할 말도 찾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눈가만 괜히 꾹꾹 눌렀다.
“…옆에 아무도 없어? 누가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하겠다.”
- 아무도 없어. 뭐 난 누가 들어도 상관없는데 너 곤란해지잖아. 너 곤란한 일은 안 해. 빨리 대답해. 뭐 하지 말라고?
“…웃지 말고, 눈 오래 마주치지 말라고.”
- 오래라니. 큰일 날 소리 하네. 3초.
“알았어. 3초.”
- 너무 늦지 말고. 난 촬영 마저 해 봐야 알 것 같아. 일찍 끝나면 너보다 먼저 갈 수도 있고, 늦으면 뭐 새벽에나 가는 거고.
차정한의 목소리 너머로 동윤 형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전화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아쉬웠다. 오늘 차정한을 한 번도 못 봐서 그런지 생생한 그의 목소리라도 조금 더 듣고 싶었다.
“얼른 가 봐. 저녁 어떻게든 먹어, 알았지?”
- 알았어. 너도 맛있게 먹어. 남녀노소 조심. 집에서 보자.
남녀노소 조심하라는 말에 전화를 끊고서도 한참이나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마 기사님이 웃는 나를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었다. 나는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입술을 꾹 문 채 고개를 숙이고 한참이나 실없이 웃었다.
김원우의 생일이라 모인 건데 내가 들어가자마자 역시 제일 먼저 나온 말은 차정한이었다. 차정한에 대해 뭔가 계속 묻기는 하는데 솔직히 내가 함부로 대답할 수 없는 것들이기도 하고, 차정한이 없는 자리에서 그에 대해 어떤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아 슬쩍 김원우의 생일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김원우도 그런 나를 눈치채고 계속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며 더는 차정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게 해 주었다.
“오늘 중간에 가는 놈은 진짜 배신자다, 어? 내가 일부러 장소도 어? 밥이랑 술이랑 같이 먹을 수 있는 데로 골랐는데! 그래도 가면 진짜 이건 의리가 아니야. 지유현! 너 말이야. 너. 알았냐?”
대놓고 나를 지목한 김원우가 빈 술잔에 소주와 맥주를 콸콸 부어 섞어 내밀었다. 나는 그 잔을 한 번에 비우고 잔을 내려놓았다. 이걸로 바로 취하지는 않겠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마셨다가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물을 많이 마시고, 앞에 잔뜩 놓인 요리들을 잘 먹으려 노력했다.
술자리가 무르익고 식탁 위로 술병들이 쌓이다 못해 놓을 곳이 없어 다 치워야 할 상황이 됐을 때, 슬슬 정신이 흐릿해졌다. 나는 새로 나온 크림 새우를 하나 집어 한 입 먹고, 눈을 깊게 감았다가 뜨는 것을 반복했다. 역시 술을 섞어 마시니 평소보다 훨씬 빨리 눈앞이 가물거렸다.
“지유현! 벌써 취한 거야?”
솔직히 나보다 김원우가 더 취해 보였다. 나는 그래도 피할 수 있을 때는 적당히 피하면서 주는 술을 다 받아 마시지 않았는데 김원우는 오늘 이 모임의 이유이자 주인공이라 여기저기에서 오는 술잔을 겁도 없이 전부 다 받고, 단숨에 들이마셨다.
“너 차정한한테만 그렇게 잘하고, 어? 나한테도 차정한한테 하는 거 반만 해 봐라.”
“내가 왜? 정한이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너는 그냥 친구인데. 뒤에 이어질 말은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은 남아 있어 다행이었다. 나는 말을 얼버무리며 괜히 술만 홀짝댔다. 김원우도 상당히 취해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또 뭔 말을 하려다가 말았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아, 어지러워. 그만 마실래.”
“뭘 그만 마셔! 이제 시작인데. 몇 잔이나 마셨다고 빼냐. 너 오늘 중간에 가면 진짜 그건 배신이야!”
술을 좀 마시고, 학교 다닐 때 이야기를 하다가 지금 일하는 고충들을 말하는 걸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을 뿐인데 벌써 자정이 넘어있었다. 가끔 이렇게 시간이 진짜 빨리 가는 날이 있는데 오늘이 그 날인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술잔에 찰랑대며 차오르는 술을 보다가 잔을 들고 내밀었다. 여기저기에서 동시에 다가온 잔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고 닿았다가 떨어졌다. 자꾸 갈증이 나서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술이 아니라 물을 마셔야 한다는 생각은 있는데 그게 행동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몇 번 더 술잔에 채워지는 술을 보고, 그걸 마시고, 또 채워지는 걸 보고, 마시는 것을 반복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땅이 아래로 쑥 꺼졌다가 위로 확 솟아오르는 것을 반복했다. 나는 식당 앞에서 친구들과 인사하고 버스정류장으로 가 앉았다. 잠시 눈을 감고 차가운 바람에 술이 깨기를 기다리는데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 앞으로 선 택시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하도 말해 솔직히 부모님이 계신 집 주소나 누나의 카페 주소보다도 익숙한 차정한의 집 주소, 아니 우리의 집 주소를 말하고 시트로 등을 기대었다. 자면 좋겠는데 차정한을 보기 전까지 절대 잠들면 안 된다는 생각이 중심에 버티고 있었다. 차정한이 내 얼굴을 봐야 술에 무너졌던 것처럼 나도 차정한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조금도 흐트러지고 싶지 않았다.
가는 동안 몇 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차정한이 집에 가는 중이라고 보낸 메시지를 보다가 언제 집에 갔나 보려고 옆에 시간을 확인하려는데 초점도 잘 맞지 않고, 차가 흔들려 아무리 봐도 시간이 잘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없어졌구나. 나는 차정한이 보낸 글자를 잘 맞지 않는 초점으로 계속 보며 집까지 갔다.
“…아…….”
엘리베이터에 올라 집중해서 버튼을 누르고 올라가는 동안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곧 차정한을 볼 생각에 자꾸 웃음이 났다. 문이 열리고 넘어지지 않게 또 반듯하게 걸으려 천천히 걸어 문 앞으로 가서 쪼그리고 앉아 비밀번호를 눌렀다. 숫자가 생각이 하나도 안 나는데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였다. 나는 혼자 움직이는 내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신기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집이 어두웠다. 차정한이 보고 싶은데 너무 캄캄해서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 벽을 더듬다가 불을 켰다. 갑자기 확 켜진 불에 너무 눈이 부셔 손으로 눈을 가리고 꾹 눌렀다가 천천히 다시 눈을 떴다.
“정한아!”
불이 환하게 켜지니 내내 보고 싶었던 차정한이 나타났다. 나는 소파에 앉아 나를 보고 있는 차정한에게 다가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차정한이 내게 다가올 때는 너무 좋아 실없이 웃음이 계속 났다.
“너 지금 몇 시야. 두 시가 넘었어.”
“지금 두 시야? 두 시구나….”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지금 나 보여? 나 누구야.”
“정한이!”
내가 좋아하는 우리 정한이. 차정한을 보는데 계속 웃음이 났다. 차정한은 그런 나를 가만히 보다가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74
?
?
“뭐 타고 왔어.”
“택시!”
“…진짜 돌겠네. 왜 전화 안 해. 끝나면 전화를 해야지.”
“너 힘들어…. 난 너 힘든 거 싫어. 택시가 이렇게 많은데… 너 힘들게 하면 안 돼.”
고개를 젓자 차정한이 또 긴 숨을 내쉬었다. 나는 한숨을 쉬는 차정한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잘생긴 얼굴은 또렷하게 보였다.
“왜 한숨 쉬어? 전화 안 해서 화났어?”
“…넌 왜 자꾸 웃는데. 지금까지 그 친구란 새끼들 앞에서 그렇게 웃고 온 거야?”
“웃었지…. 웃기니까.”
“또 뭐 했어. 웃기만 했어?”
“술도 마시고… 아! 우리 정한이 얘기도 하고.”
몸이 앞으로 움직였다. 나는 소파에 앉는 차정한을 바라보았다. 차정한이 그런 나를 올려 보며 허벅지를 탁탁 두드렸다. 나는 얼른 그 허벅지 위로 올라가 마주 보고 앉았다. 차정한이 그런 내 머리칼을 쓸어내리고 허리를 토닥거렸다. 손길이 기분 좋아 자꾸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안고 싶고 안기고 싶었다.
“내 얘기 뭐 했어? 그 새끼들이 나 욕하지.”
“자꾸… 차정한이 어쩌고, 차정한 얘기나 좀 해 보라고 막 그래서 안 했어.”
“왜 안 했어?”
“네가 없잖아…. 나 걔들이 네 얘기 하는 거 싫어.”
자세히 생각은 안 나는데 자꾸 차정한에 대해 안 좋게 얘기하고, 내가 차정한과 같이 지내 인생을 망친 것처럼 말하던 게 떠올라 기분이 가라앉았다. 나는 차정한의 어깨 위로 얼굴을 묻은 채 너무 속상해 눈물이 다 날 것 같은 감정을 터뜨렸다.
“…울어? 유현아.”
우냐는 다정한 목소리에 눈물이 더 났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차정한 이야기를 함부로 하는 것들은 이제 안 만날 생각이었다. 나 때문에 차정한이 그런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왜 울어. 속상했어? 그 새끼들이 너 울 정도로 내 욕해? 어떤 새끼가 했어. 김원우지. 아, 그 새끼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애들이 네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서… 싫어.”
내 몸을 살짝 떼고 눈을 맞춘 차정한이 눈가를 부드럽게 문질러 닦아 주었다. 나는 내 뺨을 매만지는 그 손을 잡고 기분이 좋아져 얼굴을 비볐다. 차정한이 그런 나를 가만히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나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니잖아. 그 새끼들 나도 싫지만, 뭐 그 새끼들이 나 싫어하는 것도 이해돼. 내가 잘한 적이 없으니까.”
“네가 왜 좋은 사람이 아니야. 우리 정한이 진짜 좋은 사람인데…. 좋은 사람이라 내가 좋아해.”
“뭐가 그렇게 좋아?”
뺨을 만지다가 목덜미로 내려온 차정한의 손이 너무 기분이 좋아 자꾸 몸에서 힘이 빠졌다. 세상에 꼭 우리 둘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내가 아는 집, 내가 아는 차정한인데 오늘은 다른 때보다 더 마음도 편하고,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도 마구 솟았다.
“이유가 다 나잖아.”
“응?”
“네가 하는 모든 말, 행동… 다 이유가 나야. 더 자고 싶을 텐데 나랑 같이 학교 가려고 일찍 일어나서 오고, 방학이라 놀고 싶을 텐데 나 다쳤다고 매일 우리 집 와서 나랑 있어 주고, 피곤할 텐데 나 데려다주려고 기다리고….”
“…….”
“사랑할 수밖에 없어…. 내가 어떻게 널 안 사랑해.”
“미안해.”
“왜…. 왜 미안해….”
목소리가 자꾸 길게 늘어졌다. 내 목소리가 늘어지는 걸 들으면서도 그걸 멈출 방법은 없었다.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는 차정한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솔직히 맺힌 생각도 금방 사라지고,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차정한의 얼굴이 너무 슬퍼 보여 마음이 아팠다.
“진짜 알아야 할 건 모르고, 널 너무 오래 괴롭혔잖아.”
“괴롭힌 거 아닌데…. 내가 날 괴롭힌 거야. 너는 안 그랬어. 다 좋았어. 미안해하지 마. 정한아. 내가 너 좋아한 시간 나는 하나도, 진짜 하나도 후회 안 해.”
진심을 꼭 알아줬으면 해서 가슴 위를 손으로 탁탁 치자 차정한이 얼른 내 손을 잡아 자기 가슴 위로 가져다 대었다.
“아프잖아. 나 때려.”
“우리 정한이 아프면 안 돼….”
“그 우리 정한이가 난 건 알지?”
“알지…. 내가 왜 몰라. 차정한 다 알지. 다 알기 전부터도 내가 알았는데….”
“…….”
“나만 알았는데…….”
텅 빈 놀이터 그네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누었던 수많은 밤이 머릿속으로 펼쳐졌다. 종일 보는데도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았을까. 그네가 삐거덕대는 소리, 모래가 사각대는 소리, 어둠 안으로 하얀 입김이 퍼지는 모양. 그 모든 것들이 즐거웠고 설��다.
대학 다닐 때도 참 불가능하다고 느낄 만큼 많은 시간을 함께였다. 과제 하느라 늦게까지 도서관에 있는 내 앞에서 커피를 마시던 차정한이 눈앞에 아른댔다. 사람이 없는 학교를 둘이 걷고, 불빛이 반짝이는 횡단보도에 서면 차정한은 졸리다며 내 어깨에 몸을 구부려 머리를 기댔다.
‘난 배고파서 하나도 안 졸려.’
‘배고파?’
배고프다는 내 말에 몸을 바로 세운 차정한이 바로 내 손과 손목 사이를 부드럽게 쥐고 뒤돌아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밤인데도 운 좋게 남은 참치마요 삼각김밥과 컵라면을 고르면 차정한은 맥주를 가져왔다. 텅 빈 거리를 보며 먹던 한밤중의 컵라면은 너무 맛있어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그렇게 먹고 집에 가면 차정한이 너무나 당연하게 나를 따라 들어왔다. 잠들기 직전까지 학교 이야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이야기에 웃다가 잠들었다. 나는 차정한이 가끔씩 먼저 잠들 때마다 그의 숨소리를 들었다. 자는 걸 보면 가까이 가고 싶어질 것 같아 고개는 돌리지 못한 채 차정한을 등지고 그의 숨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밤을 새운 적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