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43)

“유현아.”

“…응.”

“지금도 너만 아는 거 맞아.”

“아니잖아…. 밖에도 네가 너무 많아. 화면에도 많고, 버스정류장에도… 편의점에도, 길에도… 너무너무 많아.”

“그래. 그것도 나지만, 좀 달라. 너만 볼 수 있는 게 더 많아.”

차정한은 내 손을 잡아 자신의 뺨 위로 가져갔다. 나는 차정한의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차정한이 그런 나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내 손바닥에 깊게 입 맞췄다.

“내 얼굴 만질 수 있는 사람 너밖에 없어. 나 누가 나한테 손대는 거 싫어하잖아.”

“또…?”

내 손을 만지작대던 차정한이 그대로 얼굴을 기울여 입술을 포갰다. 차정한이 너무 따뜻해서 자꾸 울고 싶었다. 차정한은 입술을 댄 채 목소리를 냈다.

“이렇게 닿을 수 있는 사람도 지유현밖에 없어.”

“또 있어?”

입술이 깊게 맞물렸다. 나는 따뜻하게 파고들어 뜨겁게 휘감는 차정한의 혀를 마주 머금었다. 내가 술에 취해 그런 걸까, 아니면 이게 내 원래 솔직한 모습인 걸까. 혀가 너무 달콤하고 맛있어서 자꾸만 먹고 싶었다. 나는 차정한의 얼굴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그의 혀를 한참이나 쪽쪽 빨았다.

“하아……. 너무 좋아.”

“나도, 나도 좋아.”

“정말?”

“그럼. 나 이렇게 좋게 하는 사람도 너밖에 없어. 흥분하게 하는 것도 너밖에 없고.”

“흥분했어?”

“…그럼 안 해? 내 위에 앉아서 혀를 무슨…. 사탕처럼 빠는데. 너 지금 진짜 야해. 눈빛이 내가 알던 그 지유현이 아닌데….”

다정한 목소리가 흐르는 입술을 보니 자꾸만 닿고 싶었다. 나는 차정한의 얼굴을 쥔 채 다시 다가가 먼저 그 입술을 머금었다. 말을 하다 멈춘 입술 사이로 혀를 넣어 뜨겁고 말캉한 것을 살살 문지르고 빨았다. 허리를 뒤에서 받치고 있던 차정한의 손이 안으로 파고드는 느낌이 났다. 옷 안으로 들어와 피부에 닿는 느낌에 숨이 쏟아졌다.

“…아…….”

“…너 진짜 앞으로 나랑 있을 때 말고는 술 마시지 마.”

“왜…. 술 맛있었어.”

“내 생각은 안 났어?”

“났지…. 아니, 안 났어.”

“났다는 거야, 안 났다는 거야.”

“너는 생각이 나는 게 아니야.”

“그럼?”

“그냥 항상… 항상 있어. 여기.”

나는 차정한이 항상 존재하는 내 머리를 손으로 두드렸다. 차정한은 내 손이 닿은 곳을 보다가 내가 손으로 짚은 곳에 살짝 입 맞췄다.

“여기도….”

머리에 닿았던 손을 내려 심장 부근을 꾹 눌렀다. 눌린 손끝에 차정한이 묻어나오는 것만 같았다. 차정한을 본 뒤부터, 그와 친구라는 이름을 가진 그날부터 단 한 번도 차정한이 여기에서 나간 적이 없었다.

“여기 많이 아팠지.”

차정한이 내 손 위를 덮으며 심장 부근을 따뜻하게 눌렀다. 마음 안으로 나의 차정한이 더 꽉 가득 찼다.

“조금. 조금만 아팠어.”

가만히 바라보는 차정한을 보다가 다시 입술을 머금었다. 닿아도 또 닿고 싶고, 먹어도 또 먹고 싶었다. 나는 차정한의 혀를 한참이나 머금다가 내 혀를 다시 옭아매는 그의 리드에 끌려갔다. 입술이 떨어지려고 하면 차정한이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내 머리칼 사이로 손을 넣어 눌러 입술을 깊게 머금었다.

혀끝이 문질리다가 깊게 빨리고, 질척한 소리가 귓가에 마구 울렸다. 입술을 떼고 헝클어진 숨을 내쉬는 동안에도 차정한은 한 번씩 내게 쪽 소리가 나게 입 맞췄다. 입술도 간지럽고, 마음도 간지러웠다. 기분도 너무 간지러워서 자꾸 웃음이 났다. 차정한은 웃는 나를 보며 입술을 부드럽게 끌어 올렸다.

“왜 자꾸 웃어. 설레게.”

“너도 꼭 나를 사랑하는 것 같아….”

“…….”

“너무 좋아…. 너무 좋아, 정한아.”

차정한이 나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그고 한없이 아래로 빠져드는 느낌과 함께 사랑이 퍼진 나의 몸속 모든 곳으로 그 기운이 퍼졌다.

바라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고, 이렇게 손을 살짝 대기만 해도 향긋한 감정들이 찰랑거렸다. 나는 그 온기 속에서 웃고 싶은 만큼 웃고, 입 맞추고 싶은 만큼 입 맞췄다. 부정적인 감정은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랑해, 정한아….”

“…….”

“…사랑해.”

차정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니, 내가 흔들린 건지도 몰랐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차정한을 보다가 몸을 기울였다. 차정한과 완전히 몸을 포갠 채 그의 어깨 위에 얼굴을 대고 눈을 감았다. 몸에서 힘이 천천히 빠지고, 멀리서 다가온 잠이 순식간에 내 모든 것을 뒤덮을 때까지도 차정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꼭 끌어안았다. 나는 그 안정적인 힘에 모든 것을 기대며 잠들었다.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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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 저절로 눈이 떠졌다. 다시는 술을 마시지 말아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몸을 일으키는데 머리 위로 따뜻함이 번졌다. 고개를 돌리자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은 차정한이 보였다.

“벌써 일어났어? 지금 몇 시야?”

시간을 묻자 차정한이 휴대폰을 한 번 보고 다시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여섯 시 좀 넘었어. 왜 벌써 일어났어.”

“머리 아파….”

“약 줄게.”

“응.”

바로 방을 나간 차정한이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차정한이 옆에 놓은 휴대폰을 들어 다시 내 눈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여섯 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 맞았다. 왜 이 시간에 차정한이 저렇게 자지 않고 앉아 있던 건지 궁금했다. 막 깬 사람 같아 보이지 않고, 지금까지 자지 않고 있던 것처럼 보여서 더 그랬다.

차정한은 곧 물과 약을 가지고 들어와 나를 일으켜 앉혔다. 혼자 먹을 수 있는데도 알약을 들어 내 입에 넣어주고, 물잔도 기울여 먹여 주었다. 손 하나도 움직이기 힘들 만큼 컨디션이 좋지 않아 나는 차정한이 하는 대로 가만히 모든 것을 받았다.

“다시 눕자. 푹 자.”

“넌 왜 벌써 깼어? 몇 시에 나가?”

“난 열 시쯤.”

열 시쯤 나간다는 말을 듣고 나니까 더 이상했다. 나는 이불을 올려 덮어 주는 차정한의 손을 잡았다.

“안 잤어?”

“…응. 잠이 안 와서.”

“그래도 안 자면 어떻게 해…. 촬영 힘들 텐데.”

“괜찮아. 가면서 눈 좀 붙이면 돼.”

“지금이라도 좀 자. 세 시간은 잘 수 있잖아. 그거 자고 안 자고 얼마나 다른데.”

“알았어.”

뭔가 차정한의 분위기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새벽이라 장난기가 없고 한 건 당연한 거지만, 평소보다 훨씬 더 차분한 분위기에 무슨 일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나는 침대 옆으로 올라와 앉는 차정한을 올려 보다가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켜 앉았다.

“…화났어? 나 늦게 들어와서?”

“화났지, 그럼. 술을 그렇게 마시고 새벽에 들어왔는데 화가 안 나?”

“내가 뭐… 이상한 말 했어?”

차정한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화가 난 얼굴은 아닌데, 뭔가 굉장히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라 이상하게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안 했어. 그냥 자는 너 본 거야. 이렇게 시간 빨리 갈 줄 몰랐어.”

“…왜 그러는데. 내가 뭐라고 했구나.”

나를 보며 고개를 저은 차정한이 손을 뻗어 내 뺨을 매만졌다. 아니라는 그 말을 그냥 믿고 넘어가도 되겠지만, 듣고 싶었다. 나는 차정한의 이런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모습을 견딜 수가 없었다.

“말해도 돼. 왜 그래, 응? 나 때문에 그런 거지.”

“진짜 너 때문에 그런 거 아냐. 그냥 좀 생각이 많아져서 그래.”

“…무슨 생각인데 그래. 나한테도 알려 줘. 우리 다… 말하기로 했잖아.”

머뭇대는 차정한을 보니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집에 들어와 차정한과 시간을 보낸 건 기억이 나는데 솔직히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아서 더 불안했다. 술에 취했다고 못 할 말을 막 퍼붓는 성격은 아니라 그랬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라 꼭 알고 싶었다.

“13년 동안 우리한테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생각해 봤는데 끝이 없더라. 중간중간 흐릿한 기억도 있고, 너무 당연하게 반복된 일이라 헷갈리는 일도 많고.”

“…….”

“생각하다 보니까 난 진짜 너한테 다 말했더라고. 좋으면 좋다고 다 말하고, 싫으면 싫다고 다 말하고…. 짜증 나면 짜증 난다고 말하고, 기분 나쁘면 나쁘다고 말하고. 힘들어, 아파…. 거기다가 너한테 서운하다고도 많이 말했더라.”

“…….”

“넌 당연히 내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너랑 친한 것도 싫고, 네가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같이 다니는 것도 싫었어. 내 거니까.”

“…….”

“고등학교 다닐 땐 그래도 괜찮았는데 대학 다니면서 과도 다르고 하니까 내가 모르는 네 시간이 생기고, 네가 없는 내 시간이 생겨서 진짜 싫었어. 끝나면 바로 널 보러 갔는데 넌 다른 사람이랑 웃고 있고, 진짜 그게 제일 싫었어.”

차정한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장난기가 전혀 없는 목소리가 이른 아침을 가르며 고백처럼 다가왔다. 다가가고 싶은데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옅은 어둠 속에서 차정한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서운하더라. 그래서 너한테 서운하단 말도 많이 했었어. 그때마다 넌 아니라고 말했지. 과제 때문이라고, 어쩔 수가 없다고. 나도 알았어. 어쩔 수 없는 일인 거. 아는데도 서운한 거야. 나만 알던 내 걸 남들도 다 알아 버린 것 같아서 입학하고 몇 달은 진짜 좀 내가 돌았나 싶었어.”

그때 차정한은 내게 서운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자기가 없어도 될 것 같다는 말도 하고, 몇 시간이고 내가 있는 과방 앞에서 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도 했다. 한참이 지나 내가 나오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복도를 걸어갔다. 집에 갈 때까지 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걷다가 내가 문을 열면 가 버리기도 했다. 몇 번이나 그 외로운 등을 끌어안고 싶었다. 차정한이 내게 서운함을 느낄수록 나도 그에게 사랑한다고 소리 내고 싶었다. 차정한의 불안정한 마음, 그 고질적인 외로움을 내가 안고 싶었다.

“그러지 말걸.”

“…….”

“고문은 내가 하고 있던 거잖아.”

“…….”

“새벽에 네가… 나를 보고 자꾸 웃는 거야. 너무 예쁘고, 다른 놈들한테도 이렇게 웃는 거 보여 준 건가 싶어서 싫기도 하고…. 그래도 너 웃는 거 자주 볼 수 있는 거 아닌데 계속 웃으니까 너무 좋았어. 그래서 자꾸 왜 웃냐고 장난쳤는데….”

“…….”

“…너도 날 꼭 사랑하는 것 같다고.”

“…….”

“네가 그러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캄캄해졌어. 불이 다 꺼지고, 생각도 다 사라지고… 할 수 있는 말이 없더라.”

차정한의 말을 듣는 순간 새벽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내가 차정한의 다리 위에 올라앉아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났다. 또렷하지는 않아도 그 분위기는 기억할 수 있었다. 내게는 너무나도 좋기만 한 기억이었다. 내가 저 말을 차정한에게 했다면, 너무 좋아서 한 말일 것이었다. 차정한이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따뜻하고 다정하면서도… 무척이나 두근대는 시간이었을 테니까.

“한 번도 네가 그렇게 날 보고 내내 웃었던 적이 없었어. 내가 널 사랑하는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던 거겠지.”

“…정한아.”

“널 웃게도 못한 주제에 난 내 감정 너한테 다 보였어.”

“…….”

“넌 텅 빈 나를 늘 채워 줬는데…. 난 널 쓸쓸하게 하는 것도 몰랐다는 게 화가 나서 미치겠어. 내가 너무 한심하고, 싫어. 아파서… 죽을 것 같아.”

아프다는 그의 목소리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불안함이 아니었다. 나는 하려던 말도 잊은 채 심장 위를 손으로 뒤덮고 괴로워하는 차정한을 눈에 담았다. 차정한이… 아파하고 있었다. 나와의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복잡한 것도 싫고, 계속 생각해야 하는 것도 싫어. 알잖아. 나 참을성도 없고, 안 될 일은 쉽게 포기도 잘해. 아닌 건 아닌 거고, 남보다는 나고, 뭐든 쉽게 질려.”

“…….”

“네가 사랑한다고 말한 뒤로 너무 복잡해. 생각이 떠나질 않고, 참고 또 참으면서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생각만 해야 돼. 포기하면 쉬울 텐데 포기도 못 해.”

차정한은 한마디 한마디 마음을 그대로 내 앞으로 잘라 보이는 것처럼 소리 냈다. 마음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정말 내 앞으로 그의 마음 조각들이 그대로 놓이는 것 같았다. 차정한이 나와… 같은 감정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데 너만 내 마음대로 안 돼.”

“…….”

“미치겠어도… 아파 죽겠어도, 힘들어서 숨고 싶어도 네가 있어. 네가 보여. 네가… 보고 싶어.”

“…….”

“처음이야. 멈출 수가 없는 이런… 마음.”

“…….”

“이제 나 빈 곳이 없어, 유현아. 다 너야. 너로 다 찼어. 소리 내고 싶고, 보여 주고 싶어. 네가 막 흘러넘쳐.”

듣고 있는 이 모든 말이 꼭 내가 소리 낸 것처럼 생생했다.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차정한이 말한 것을 그대로 말하라고 해도 할 수 있었다. 내가 그동안 차정한을 사랑하며 느낀 감정들이기 때문이었다.

내 마음을 아무리 늘리고 또 늘려도 안에서 커지는 차정한을 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랑이 흘러나오는 게 두려워 나는 몸을 웅크리며 살았다. 차정한의 앞에서는 늘 몸을 숙이고, 흘러넘치지 않게 움직임을 줄였다. 차정한이 한 번씩 내가 크게 흔들릴 만한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할 때면 몸을 흠뻑 적시며 흘러내리는 사랑을 서둘러 감춰야 했다. 내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혼자 있을 때면 비로소 내내 누르고 있던 차정한이 나의 모든 것을 흠뻑 적시며 흘러내렸다. 소리 내고 싶고, 보여 주고 싶어져 또다시 몸을 웅크렸다.

사랑을 말하는 것보다 숨기고 웅크리는 것에 더 익숙해졌을 때, 나는 평생 소리 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한 거니까. 내 사랑은 소리 내면 안 되는 감정이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 감정이 군더더기가 되어 달라붙는 것은 싫었다.

그래도 멈출 수가 없었다.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적어도 내가 13년 동안 가지고 온 사랑은 그랬다. 미치겠어도, 아파 죽겠어도, 정말 너무너무 힘들어서 숨고 싶어도 그 모든 순간에 차정한이 있는 것. 차정한이 보이고, 차정한이 보고 싶어지는 것.

그만두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고, 때로는 뒷걸음을 치고 싶어도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빈틈없이 꽉 찬 마음과 머리는 내가 제어할 수 없어 자꾸만 안 된다는 생각을 뚫고 또 소리 내고 싶고, 보여 주고 싶어졌다.

열일곱의 여름, 처음으로 차정한이 나를 흠뻑 적시며 흘러넘쳤다. 그가 닿은 손톱 끝에서, 마음에 스며든 그 다정한 목소리 안에서. 처음이었다. 그런 감정은.

“어디서 뭘 해도… 네 생각밖에 안 나.”

나는 이 말을 알고 있었다.

‘집에 있어도 너 걱정돼서 아무것도 못 해. 네 생각밖에 안 나.’

나의 세상을 순식간에 사로잡은 내 열일곱의 소년이 나와 같은 감정을 소리 내고 있었다.

“…사랑해.”

나를….

“사랑해, 유현아.”

사랑한다고.

“…밤새 이 생각만 했어. 말하고 싶었어. 사랑해, 나 너 사랑해.”

내게 존재하는 모든 감정에 불이 반짝 켜졌다. 태어나 가장 밝은 불빛이었다. 나는 그 밝은 불빛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나의 친구를 보고 켜진 그 불빛의 이름은 사랑이었다.

“…유현아. 아직 안 믿기면 내가 더…….”

“…믿어.”

“…….”

“나 네 사랑 받을 거야…. 받고 싶어. 내가 너 가질래.”

어느 겨울의 어스름한 새벽. 빛이 충분하지 않아도 충분히 찬란한 차정한의 고백이 쏟아졌다. 감정이 시작된 열일곱이나 나를 향한 사랑을 마주한 지금이나 사랑은 처음이라 이럴 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또 어떻게 이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하나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차정한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 내가 오랫동안 그를 보며 느껴 온 그 감정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는 것.

“그거 내 소원인데. 지유현이 나 가져 주는 거.”

내가 더 행복한 소원을 말하며 차정한이 그제야 웃었다. 잠든 나를 보며 내내 홀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고단한 그를 안아 주고 싶었다. 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차정한을 가득 끌어안았다. 안아 주고 싶을 때 안을 수 있고, 닿고 싶을 때 닿을 수 있는 관계. 사랑을 소리 내도 놀라지 않고, 그게 반짝임이 되어 마음을 빛낼 수 있는 사이. 연인.

머릿속을 채워 이리저리 두드리던 통증은 어느새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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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가기 전까지 차정한은 뭐든 다 나를 보며 하려고 애썼다. 머리를 말릴 때도 굳이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나를 보며 말리고, 셔츠를 입을 때도, 또 주스를 마실 때도 내 얼굴을 보며 마셨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는 그 얼굴을 보며 나도 따라 웃었다. 차정한은 마시던 주스를 내려놓고 나를 당겨 자신의 다리 위로 앉혔다. 갑작스러운 당김에 앉기는 했지만, 맨정신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라 얼른 일어나려는데 차정한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왜 그래.”

“새벽에는 잘 앉았잖아.”

“그건 취했으니까 그런 거지.”

“원래 취했을 때 본심 나온다던데. 내 위에 앉아서 먼저 막 어? 키스도 계속하고, 나 좋다 그러고 난리도 아니었어.”

“…내가?”

“응, 네가. 나 소파로 딱 밀고, 거칠게 막 키스하는데… 와, 유현이 형 진짜….”

“말도 안 된다, 진짜.”

“와, 억울해 죽겠네. 나 입술 좀 봐. 네가 안 놔주고 계속 물고 빨아서 여기, 여기 부었잖아.”

“…어디?”

“여기. 자세히 봐 봐.”

얼굴을 잡고 입술을 보러 가까이 다가가니 차정한이 덥석 내 입술을 물며 파고들었다. 나는 차정한의 얼굴을 만지다가 그의 머리칼과 목덜미를 매만지며 한참이나 키스했다. 흐트러진 숨을 목 뒤로 넘기고, 몇 번이나 혀끝을 문지르다가 서로의 뺨과 턱, 목에 입 맞췄다. 간지럽게 입술을 몇 번 더 부딪친 뒤에야 완전히 떨어졌다.

“한 번만 더.”

차정한이 웃음이 묻은 입술로 한 번 더 깊게 입 맞췄다. 떨어지고 싶지 않아 차정한의 다리 위에 앉은 것도 있고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차정한이 그런 내 귓가와 뺨에 차례대로 입 맞췄다. 진동 소리가 나는 걸 보니 동윤 형이 온 모양이었다. 나는 힘을 주어 한 번 더 차정한을 꼭 끌어안았다가 놓아주었다.

“내려가야지.”

“가기 싫다.”

“잘하고 와. 오늘은 집에서 기다릴게.”

“응. 아, 머리 아픈 건 괜찮아?”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

“속은.”

“속은 좀 울렁거려.”

“진짜 앞으로 보내나 봐. 내가 저번에 너 나가면 안 되는 이유 제대로 못 대서 보냈는데 다음에는 무조건 내가 이겨.”

현관으로 가며 의지에 찬 주먹을 불끈 쥔 차정한이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런 차정한의 등을 한 번 쓸어 주었다. 차정한은 신발을 신으며 마스크를 귀에 걸었다.

“같이 내려갈까?”

“혼자 갈게. 가서 더 자. 푹 자고 일어나서 속 괜찮아지면 뭐라도 꼭 먹고.”

“응, 그럴게. 오늘 늦는지 이따 알려 줘.”

“알았어. 다녀올게.”

올렸던 마스크를 내린 차정한이 쪽쪽 소리가 나게 입 맞췄다. 더 했다가는 나도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어질 것 같아 얼른 차정한의 마스크를 턱 위로 올렸다. 웃어서 눈이 접힌 차정한이 내 뺨을 한 번 쓸고는 집을 나섰다. 손은 떨어졌는데 뺨에 남은 그의 온기가 좋아 차정한이 나간 뒤에도 한참이나 뺨이 화끈거렸다.

일어난 김에 이대로 하루를 시작할까 하다가 속이 울렁거려 물 한 병을 들고 다시 침대로 올랐다. 생각에 잠긴 차정한이 앉아 있던 자리를 보다가 베개 두 개를 겹치고 몸을 뒤로 기댔다.

‘사랑해.’

태어나 그렇게 멍해지는 말은 처음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감정과 생각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온통 그 사랑이라는 말이 채웠다. 점도 있게 천천히 떨어지던 말은 아주 묽은 것이 되어 거세게 쏟아졌다.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움직일 수 없도록 나를 옭아매고 아주 느리게 흐르다가 생각도 하지 못한 순간 그대로 모든 것을 휩쓸며 쏟아지는… 예상할 수 없는 감정.

차정한으로 가득 찬 나의 세상은 늘 그랬다. 느리게 그를 담다 보면 너무 꽉 차 무거워진 마음이 요란하게 쏟아졌다. 온몸이 젖고 또 젖어 나는 없어지고 내가 없어진 자리에도 차정한이 들어찼다. 일부로 시작한 감정은 전부가 되고, 나의 일부였던 친구는 어느새 전부가 되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변해 버렸다. 내가 겪은 그 모든 것을 차정한은 지난 새벽, 내게 그대로 소리 냈다.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도… 사랑에 빠진 모습으로.

“…….”

차정한이 나를 사랑한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어쩌면 가장 멀었던 우리의 거리는 이제 완전히 좁혀졌다. 나는 차정한을 향하고, 차정한은 나를 향했다. 뒤도 옆도 아닌 앞. 우리는 마주 본 채 앞으로만 움직였다.

‘사랑해, 유현아.’

잔뜩 감정이 흐트러져 어쩔 줄 모르는 중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자꾸만 떠올랐다. 나는 차정한의 베개를 끌어안고 그 위로 얼굴을 묻었다. 좋아서, 정말 좋아서 죽을 것 같았다. 떨리고, 설레고 또 너무 좋아서 아무나 붙잡고 막 자랑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좋아한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그가 내게 사랑을 고백했다고 누구에게라도 소리치고 싶었다. 왜 사랑이 모든 상황에 변수가 되고, 가장 큰 약점이 되는지 알 것 같았다. 혼자의 사랑은 제어할 수 있지만, 서로 마주 본 사랑은 제어가 되지 않았다. 마음이 아플 만큼 조여 들고, 온몸이 다 저릿했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얼굴이 보고 싶고,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닿고 싶고, 만지고 싶은데 옆에 없어 너무 슬펐다.

“…보고 싶다.”

한숨처럼 흘러나온 말이 내 귓가에 닿은 순간 엄습하는 민망함에 베개에 얼굴을 더 깊게 파묻고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차정한의 베개를 끌어안고 보고 싶다고 혼잣말을 중얼대는 내가 낯설지만, 그래도 좋았다. 사랑할 수도 있고, 또 사랑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지이잉, 갑자기 들리는 진동에 스탠드 옆에 놓인 휴대폰을 더듬더듬 집어 들었다. 화면에 요란하게 계속 하나씩 늘어나는 차정한의 메시지를 보니 나와 너무 똑같아 웃음이 났다.

[정한 : 유현아]

[정한 : 어떡해]

[정한 : 큰일 났어]

[정한 : 벌써 보고 싶어]

똑같은 순간에 똑같은 생각을 한 것조차 좋아 이불이 만든 안락한 어둠 안에서 메시지를 적었다.

[나도 그 생각했어]

[정한 : 나 보고 싶어?]

[응 보고 싶어]

[정한 : 넌 어떻게 글자만 봐도 이렇게 예쁘지]

[정한 : 목소리가 다 들려 얼굴도 보이고]

[정한 : 너 두고 내가 지금 어딜 가는 거야]

간지러운 말들을 잘한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글자로 보니 또 색다르게 부끄러워 보다가 베개에 얼굴을 잠시 파묻었다. 그리고 다시 용기를 내어 화면을 보니 차정한의 메시지가 몇 개 더 와 있었다.

[정한 : 엔지 절대 안 내고 인생 연기해서 빨리 끝낼게]

[응 기다릴게 이따 봐]

[정한 : 사랑해]

사랑한다는 글자를 보는 순간 다시 온몸이 저릿하고 마음이 꽉 조여 들었다. 숨을 쉬는 것도 힘들고, 눈물이 다 핑 돌았다. 이렇게 다정한 글자는 또 처음이었다. 나는 울지 않으려고 크게 숨을 고르고 마음을 다해 차정한이 적은 것과 똑같은 글자를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나도 사랑해]

이 말 하나면 차정한이 올 때까지 행복하게 버티기 충분했다. 나는 차정한이 적은 사랑해, 그 세 글자를 아주 한참이나 보고 또 보며 머리와 마음, 그리고 내가 새길 수 있는 모든 곳에 새기고, 담았다.

나를 채운 모든 것이 따뜻해지는 느낌. 첫사랑의 시작은 무엇보다도 완벽했다. 평생 그냥 이렇게 내내 따뜻하고 다정한 시간만 보낼 자신이 있을 만큼.

* * *

며칠 내내 차정한의 스케줄은 정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타이트했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쉬는 날이 있지만, 그날에도 차정한은 밀린 광고 촬영을 소화해야 했다. 오전에는 잡지 인터뷰를 오후에는 광고 촬영을 두 개나 찍고 새벽에 돌아온 차정한은 들어오자마자 나를 가득 끌어안고 늘어졌다. 나는 그런 차정한의 등을 쓸며 얼른 소파로 데려가 일단 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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