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었지. 고생 많았어. 마실 거 줄게, 잠깐만.”
소파에서 일어나려는데 차정한이 나를 잡아 앉히고 그대로 내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광고 촬영을 하느라 멋지게 만진 머리칼이 흐트러졌다. 나는 지친 듯 눈을 감고 있다가 떠서 나를 올려 보는 차정한을 토닥였다.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어. 그냥 휙휙 지나가는데…. 와, 진짜 냉장고 광고 찍는데 그냥 냉장고에 들어가서 자고 싶더라니까. 엔지도 냈어. 내가 원하는 기능만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으니까. 이런 대사인데 내가 뭐라고 그랬는지 알아?”
“뭐라고 그랬어?”
“내가 원하는 기능만 자유롭게 자고 싶으니까. 스태프들 웃고, 감독 웃고, 나도 웃고. 아, 웃긴 웃었는데 그게 진짜 웃은 건지, 내가 웃는 연기를 한 건지도 지금 기억이 안 나.”
“얼마나 피곤하면 그래. 저녁은 먹었어?”
“저녁? 어…….”
차정한이 잠시 머뭇댔다. 저녁을 먹었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나는 건가 싶어 가만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 먹었어.”
“촬영 사이에 그래도 시간이 났나 보다. 형이랑 먹었겠네. 또 대충 밴에서 때운 거야?”
“그렇지 뭐. 아, 동윤 형이 너 잘 지내는지 묻더라. 너 있을 때가 좋았다고 난리야.”
평소라면 뭘 먹었는지 맛은 어땠는지 누구와 어디서 뭘 어떻게 먹었는데 좋았는지 기분이 나빴는지 전부 자세히 말했을 차정한은 저녁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휙 건너뛰었다. 기분 탓이라고 하기에는 갑자기 동윤 형 이야기를 하는 것도 조금 이상했다.
“내가 뭐 잘한 것도 없는데. 형이 더 열심히 하셨지.”
“무슨 소리야. 너 빼 가려고 주변에서 얼마나 난리 쳤는데. 그 스카우트 제의도 왔었잖아. 다른 기획사에서. 너 안 뺏기려고 내가 얼마나 철벽 쳤는데.”
“그랬어?”
“그랬지 그럼.”
씩 웃은 차정한이 손을 들어 내 뺨을 문지르다가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런 차정한의 등을 쓰다듬었다.
“얼른 씻고만 와. 빨리 자자. 너 지금 엄청 피곤해 보여. 내일은 몇 시에 나가?”
“여덟 시 반에는 나가야지.”
“빨리 자야겠다. 차 끓여 줄게. 얼른 씻고 와.”
“잠깐만.”
“응?”
“우리 오늘 며칠이지?”
“…뭐가?”
“오늘부터 1일 뭐 그런 거 있잖아.”
생각지도 못한 말에 말문이 막혔다. 그런 거 절대 안 따지고 입에도 안 담을 것 같아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꼽아 날을 세는 차정한을 보니 조금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음이 같이 터졌다.
“와…. 벌써 오늘이 5일 째야. 닷새 동안 내가 지금 갑자기 바빠서 너랑 제대로 말도 못 하고, 키스도 내가 하고 싶은 만큼 못 하고. 나 왜 살지. 일하려고 사는 거 아닌데.”
닷새 동안 차정한이 무척 바빴던 건 사실이지만, 원하는 만큼 키스하지 못했다는 말에는 사실 동의할 수가 없었다. 새벽에 들어와서도 늘 잠들기 전까지 한참이나 키스했고, 그중 이틀은 끝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것을 만지며 한참 닿기까지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닿고 또 닿아도 더 닿고픈 마음일 거라 생각하니 기분은 좋았다.
“일주일에 촬영 딱 하루 쉬는데 난 왜 쉬지를 못하나. 적당한 사고 하나 칠까. 일 안 들어오게.”
“그걸 말이라고 해. 적당한 사고가 어디 있어.”
“하긴. 내가 적당한 걸 잘 모르긴 하지.”
차정한은 자기객관화가 아주 잘 되어 있는 편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차정한이 고개를 돌려 가볍게 키스했다. 입술을 머금었다가 간지러운 소리가 나게 한참이나 입 맞추던 차정한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씻고 올게.”
거실을 벗어나는 그 뒷모습을 보니 요즘 힘들어 그런지 살이 조금 빠진 것 같았다. 너무 바빠서 제대로 뭔가를 챙겨 먹일 시간도 없어 더 마음이 쓰였다.
자기 전에 따뜻하게 한 모금이라도 마시라고 찻물을 끓이는데 김원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얘는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뭘 하나 싶어 보니 그냥 잠이 안 와서 보낸 별것 아닌 내용이었다.
[김원우 : 자냐?]
[아직]
[김원우 : 헐 왜 안 자?]
[원래 늦게 자 넌? 출근할 거 아냐]
[김원우 : 오늘 사표 냈다 이직하려고]
[축하해도 되는 거야?]
[김원우 : 당연하지 그 좆같은 회사 아웃인데]
[축하해 더 좋은 곳 갈 거야]
[김원우 : 퇴사 기념 한잔 콜?]
며칠 전 술 때문에 종일 뱃멀미를 하는 것처럼 고생한 게 떠올라 술 이야기만 나와도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거기에 김원우는 술을 심플하게 마시지 않고, 꼭 이것저것 섞어서 너무 금방 취하고, 숙취가 너무 심했다.
[잘 자라]
[김원우 : 와 이 매정한 새끼 악몽이나 꿔라]
악담하는 김원우를 보다가 티백을 넣고 찻물을 따랐다. 노르스름하게 우러나는 예쁜 수색을 보다가 방으로 가져갔다.
내가 김원우와 메시지를 하며 너무 물을 오래 끓여 그런지 차정한이 나왔는데도 아직 마시기 너무 뜨거운 상태였다. 나는 아직 뜨거운 찻잔을 감쌌다가 뜨거워 얼른 손을 떼었다. 머리를 말리고 나온 차정한이 그런 내 앞에 섰다.
“왜?”
“아직 뜨거워서…. 나오면 바로 마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기다렸다가 마시면 되지.”
“피곤하잖아.”
“식을 때까지 뭐 얼마나 걸리겠어.”
그대로 내 어깨를 눌러 뒤로 눕힌 차정한이 씩 웃으며 올라탔다. 차정한이 움직일 때마다 샴푸 향과 바디워시 향이 그의 체향과 뒤섞여 쏟아졌다. 손을 들어 얼굴을 만지자 차정한이 그대로 고개를 내려 입술을 겹쳤다.
피곤하니 자라고 해야 하는데 솔직히 차정한을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맞물린 입술도 좋고, 내가 조금만 혀를 움직여도 깊숙하게 파고들어 거칠어지는 움직임도 좋았다. 나는 차정한의 혀끝을 살살 문지르며 보송한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넣었다. 차정한은 내가 머리칼을 헤집을 때마다 낮게 숨을 내뱉었다. 나는 방황하는 것 같은 그 숨소리가 좋았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숨. 차정한은 매일 나와 마주하며 고민했다.
“하…. 모레 새벽 촬영이라 내일 낮 촬영만 하고 끝날 거야. 집에 오면 한… 일곱 시나 되려나.”
차정한의 말뜻을 알고 있었다. 솔직히 모를 수가 없었다. 그 말을 듣는데 나 역시도 가장 먼저 한 가지 생각만 떠올랐으니까. 나는 쏟아지는 그의 숨을 삼키며 먼저 그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내일은… 원하는 만큼 해도 되겠다.”
“괜찮겠어? 나 진짜 장난 아닌데.”
“…나도 장난 아니야.”
기대감과 동시에 다시 입술이 맞물렸다. 원하는 만큼 못 해서 불만이라던 차정한의 마음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은 채 한참이나 입 맞추고, 또 한참이나 시선을 맞췄다. 차정한은 결국, 너무 식어 차가워진 차를 단숨에 들이켜야 했다.
나와 같은 샴푸 향이 나고, 바디워시 향이 나는 차정한과 마주 보며 시시콜콜한 이야기, 또는 달콤하고 부끄러운 사랑 이야기를 하며 잠드는 시간은 분명 행복이었다. 악몽이나 꾸라는 김원우의 악담이 전혀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너무나 완벽하고, 다정했다.
분명히 그랬었다.
#77
?
?
아침에 나갈 준비를 하는 차정한을 소파에 앉아 바라보았다. 분주하게 준비한 차정한은 마지막으로 내게 와서 얼굴을 쥐고 가볍게 여기저기 입 맞췄다. 이제는 이런 스킨십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여전히 두근대고 또 설레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어색하지 않은 사이가 됐다는 걸 나는 차정한과 닿는 순간마다 실감했다.
“오늘 저녁 뭐 먹을까? 오랜만에 같이 먹는 거잖아. 뭐 먹고 싶어?”
“음, 글쎄.”
“어제는 저녁 뭐 먹었어? 메뉴 겹치면 별로잖아.”
“어제?”
의도를 가지고 물은 건 아닌데 또 머뭇대는 차정한을 보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어제저녁 이야기가 나오면 그렇게 말을 잘하고 막힘이 없는 차정한이 멈칫하는 건지 솔직히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뭐든 다 좋아. 메뉴 겹치고 할 것도 없어. 뭐 잘 먹지도 못하는데.”
“…응. 알았어.”
차정한은 여전히 그 이야기를 피했다. 피한다는 표현이 조금 강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예 어제저녁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싶어 하는 것처럼 굴기에 피한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가야겠다. 오늘도 잘 보내.”
“응. 정한이 너도 다치지 말고 조심해.”
“알았어. 내 생각 계속하고.”
“가끔 못 하면?”
“나 바로 집으로 오지.”
“어떻게 알고?”
“네가 내 생각 안 하면 경보 울리잖아.”
정말 경보기가 울리는 것처럼 손을 들어 얼굴 옆에서 휘휘 돌린 차정한이 웃었다. 나도 따라 웃자 차정한이 다시 내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조금 깊게 입 맞췄다. 떨어지기 싫을 만큼 기분 좋게 키스하는 사이로 진동이 파고들었다. 나는 얼른 전화를 받으라고 그의 팔을 두드렸지만, 차정한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의 주머니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 동윤 형의 이름을 확인하고 통화 버튼을 눌러 그의 귀에 대었다. 그렇게 하면 받을 줄 알았는데 차정한은 나의 예상을 무너뜨리며 조금 더 깊게 혀를 움직였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동윤 형의 목소리에 나는 살짝 차정한을 밀고, 내가 대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형, 저 유현이에요. 네. 안녕하세요. 정한이가 지금 방에 잠깐…. 네. 저요? 저야, 뭐 잘 지내죠.”
반가운 형의 목소리를 들으며 인사하는데 바로 앞에서 나를 바라보던 차정한이 말하는 내 입술 위를 핥았다. 나는 하지 말라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차정한은 싫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그럼 지금 정한이 내려가면 되는…….”
턱을 쥔 차정한이 그대로 다시 입술을 겹쳤다. 말을 제대로 끝내지도 못했는데 입속으로 파고든 혀가 깊게 내 혀를 옭아맸다. 나는 한 손으로 차정한의 어깨를 두드렸지만, 차정한은 놓아주지 않았다. 다행히 동윤 형은 내가 말을 매듭짓지 못했다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힘이 쭉 빠지게 혀를 문지르는 그의 혀끝을 살살 마주 문질렀다. 기분이 좋아 머릿속이 다 저릿했다.
“…네, 형. 다음에 시간 되시면 같이 저녁…. 네, 그럼요. 아, 정한이 내려가라고 할게요. 네.”
겨우 떨리는 숨을 누르고 통화를 마쳤다. 완전히 끊긴 것을 확인하는데 차정한이 다시 파고들었다. 그의 뺨과 목덜미를 살살 쓸어 주며 한참을 마주했다. 떨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그랬다가는 차정한의 일정에 무리가 생길 것 같아 살살 달래며 입술을 떼었다. 맞물렸다가 살짝 떨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워진 숨이 흐트러져 뒤섞였다.
“…아, 진짜 너 두고 어떻게 가지.”
“빨리 갔다 오면 되지. 기다릴게.”
“…알았어. 미리 말하는데 이따 나 집에 오면 내일 나가기 전까지 너랑 안 떨어질 거야. 씻는 것도 당연히 같이해야 돼. 너 혼자 아무것도 못 하게 할 거야.”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차정한이 조금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당연히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던 건지 커진 눈으로 보다가 내 뺨에 깊게 입 맞췄다.
“이따 저녁에 물어볼 거니까 네가 얼마나 예쁜지 공부하고 있어.”
“…또 이상한 말 한다. 이제 얼른 가. 형 기다려.”
“넌 내가 맞는 말만 하면 이상한 말이라고 하더라. 아, 억울해. 예쁜 걸 예쁘다고 말해도 아니라 그러고. 예뻐서 예쁘다고 하는데 이상한 말이라고 하시면, 저는 그저 예뻐서 예쁘다고 한 것이온데….”
유명한 사극 대사를 바꿔 말하는 차정한의 등을 아프지 않게 때리자 차정한이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차정한을 따라 현관으로 나가 그를 배웅했다. 어차피 다시 올 것을 알지만, 배웅의 순간은 솔직히 매번 아쉬웠다.
“전화할게.”
“응. 저녁에 봐.”
문을 열고 나가려던 차정한이 다시 돌아와 나를 꽉 끌어안았다. 매일 나갈 때마다 이렇게 오래 걸리고, 남들이 보면 요란하다고 하겠지만, 나는 떨어지기 싫은 마음이 너무 잘 느껴져서 좋았다. 차정한이 나를 끌어안은 힘만큼 나도 힘을 꽉 줘서 단단히 끌어안았다가 천천히 놓았다. 다시 진동이 울리는 것에 차정한이 어쩔 수 없이 집을 나섰다. 나는 닫힌 문을 보고 웃었다. 6일째에 접어든 연애는 너무 달기만 했다.
커피를 내리고, 과할 만큼 차가운 물을 부었다. 거기에 얼음까지 가득 넣어 커피라기보다는 카페인 물에 가까운 것을 만들어 노트북을 열었다.
실장님의 제안을 괜찮다는 말로 흘려보내고 싶지 않아 준비를 제대로 해 볼 생각이었다. 그런 대형 기획사에서 기획 일을 할 수 있다면 재미도 있고, 전공과도 동떨어지지 않아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콘텐츠 기획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검색창을 클릭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적으려는 순간, 실시간 검색어로 자연스럽게 눈이 갔다.
1. 차정한
누구보다도 익숙한 이름에 손이 그대로 멈췄다. 차정한이 실시간 검색어 1위를 하는 경우는 많으니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지만, 이상하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소속사에서 홍보 자료를 뿌렸을 수도 있고, 방송에 나온 게 화제가 되어 검색어에 오른 걸 수도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순간 검색어가 다음으로 넘어갔다.
2. 하유리
하유리. 나는 그 이름도 알고 있었다. 차정한과 같이 드라마 촬영을 하는 신인 배우. 엄청난 경쟁의 오디션을 뚫고 캐스팅되었다는 기사가 많이 올라왔었다.
“…….”
나는 그 차정한과 하유리. 두 이름을 보는 순간 소속사에서 뿌린 홍보 자료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다음으로 넘어간 실시간 검색어는 그런 내 생각이 맞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3. 차정한 하유리
4. 차정한 하유리 데일리스포츠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나는 그 검색어를 누르지도 못한 채 계속 다음 순위를 보여 주며 움직이는 글자만 바라보았다. 5위, 6위, 7위…. 드라마 제목이 나오고, 10위에는 기어이 차정한 열애라는 말까지 올라왔다. 나는 실시간 검색어 전체를 열었다. 1위부터 10위까지 단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차정한과 하유리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누를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다. 그동안 여러 번 겪은 일이었다. 전부 다 자극적으로 기사 쓰기 좋아하는 기자의 망상이었고, 소설이었다. 늘 차정한의 소속사에서 단호하게 대처해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단호한 반박 기사가 떴다.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컸다.
“…….”
지금 보지 않고 반박 기사가 나오면, 아니, 이 스캔들 기사를 보고 차정한이 내게 뭐라고 말을 하면 그때 그냥 아무 일도 아니구나 하고 한 번쯤 훑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애써 그쪽에서 시선을 떼었다.
“…….”
차정한은 아직 보지 못한 건지 연락이 없었다. 지금 촬영 중이면 보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나는 조용한 휴대폰을 보다가 쿵쿵 요란하게 뛰는 심장 위를 손으로 덮고 꾹 눌렀다. 그리고 조금 전 생각과 달리 검색어 1위에 있는 차정한의 이름을 눌렀다. 지금 보나 나중에 보나 달라질 건 없었다.
그동안 몇 번이나 겪었던 일이고 나는 차정한의 매니저였다. 나도 어느 정도 가짜 뉴스를 판별할 줄 안다는 말이기도 했다. 누구보다도 내가 보면 잘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차정한은 일할 때를 제외하고는 늘 나와 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카페에서 일을 할 때도 늘 카페에 와서 나와 시간을 보냈고, 이 집에 들어온 뒤는 말할 것도 없었다. 늘 나와 연락을 했고, 이런 일을 벌일 시간이 없었다. 그러니 거의 100%의 가능성으로 차정한이 큰 스캔들에 휘말리기를 바라는 기자들의 망상일 것이었다.
차정한의 이름을 누르자 가장 위에 뜬 데일리스포츠의 기사가 보였다. 나는 그 자극적인 제목을 눈으로 훑다가 클릭했다.
[단독] ‘우아한 제국’ 차정한-하유리 ‘드라마 촬영이 없는 날에도 다정하게.’
핫스타 커플이 탄생했다. 이름만으로도 여성 팬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는 차정한(30) 과 미모와 연기력으로 남성 팬들의 애간장을 녹이는 신예 하유리(25) 가 그 주인공이다.
두 사람은 드라마 촬영을 하며 처음 만났다. 관계자들은 대본 리딩을 할 때부터 서로를 보며 웃는 모습이 아주 잘 어울리고, 싱그러웠다며 두 사람의 첫 만남을 회상했다.
그 싱그러운 첫 만남 덕분이었을까. 두 사람은 드라마 촬영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었다.
드라마 촬영이 없는 일주일의 단 하루, 수요일에 차정한은 아주 바쁜 하루를 보냈다. 오전에는 유명한 패션 잡지 인터뷰를 했고, 오후에는 휴대폰과 냉장고, 광고 촬영을 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차정한의 하루의 틈을 놓치지 않고 그를 찾아온 건 바로 그의 연인 하유리였다.
작은 얼굴을 거의 뒤덮는 마스크를 쓰고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매니저를 대동하고 차정한의 광고 촬영장을 찾아온 하유리는 근처 이탈리아 음식점에서 함께 식사했다. 참석자는 차정한과 하유리, 그리고 차정한의 매니저와 하유리의 매니저 이렇게 넷이었다.
하유리는 연신 웃는 얼굴이었고, 차정한은 종일 이어진 스케줄 때문인지 지친 얼굴이었다. 하지만 사랑 하나로 찾아온 어린 연인을 보고 한 번씩 웃음을 보였다. 차정한이 웃을 때마다 하유리는 사랑스럽게 애교 있는 고갯짓을 하며 그 웃음에 화답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나온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일터로 돌아갔다. 하유리는 촬영장으로 들어가는 차정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겨울이 물러가고 있지만, 아직 봄이라고 말하기에는 이른 2월. 두 사람에게는 사랑의 봄이 누구보다 먼저 시작되었다.
소설처럼 쓰인 기사의 아래에는 화질이 그리 좋지는 않지만, 차정한과 하유리라고 구분할 수는 있는 레스토랑의 사진이 몇 장 있었다. 하유리는 사진마다 웃고 있어 볼이 동그랗게 올라갔고, 차정한은 대부분 시선을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얼굴이 모자이크된 두 사람이 있었다. 나는 차정한 옆에 앉은 모자이크 된 사람의 몸만 보고도 동윤 형이라는 걸 알았다.
“…….”
너무 소설처럼 쓰였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보고 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두 사람의 이름이 보이고, 함께 있는 걸 보니 싫었다. 그리고 동시에 머릿속을 스치는 목소리가 있었다.
‘저녁? 어……. 먹었어.’
저녁을 먹었냐는 내 물음에 분명 머뭇댔고, 망설였다. 잠깐 그 얼굴에 스친 머뭇거림이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는 걸 이 기사로 확인한 순간 기분이 무너져 내렸다. 차정한은 오늘 아침까지도 어제저녁의 이야기를 얼버무리며 넘어갔다.
‘촬영 사이에 그래도 시간이 났나 보다. 형이랑 먹었겠네. 또 대충 밴에서 때운 거야?’
‘그렇지 뭐. 아, 동윤 형이 너 잘 지내는지 묻더라.’
분명 말할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새벽에 내가 물었을 때 말할 수도 있었고, 오늘 아침이라도 내게 말할 수 있었다. 늘 무언가 한 상황에 대해 자세히 나와 나누기를 좋아했던 차정한이 얼버무리며 건너뛰어 버린 그 ‘어제저녁’의 일을 이런 기사로 자세히 알아야 한다니 점점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조금은 화가 났다.
“…….”
그동안 자주 있었던 패턴으로 보면 하유리가 차정한의 광고 촬영 현장에 찾아왔고, 아마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라 매니저를 대동하고 간단히 저녁 식사만 같이했을 것이었다. 어쩔 수 없었을 테니까.
차정한은 내게 그렇게 말해야 했다. 하유리가 찾아왔고, 어쩔 수 없었다고. 같이 드라마를 찍고 있으니 매몰차게 대할 수도 없고, 사이가 어색해져 좋을 게 없어서 식사만 같이한 거라고. 그냥 그렇게 말했으면 됐을 일이었다.
물론 그 이야기를 들을 때 기분이 좋지는 않았겠지만, 차정한의 위치와 상황을 이해 못 하는 게 아니기에 충분히 이해하고 넘겼을 것이었다. 그랬다면 지금 이 스캔들 기사를 보고도 그냥 운이 없었다고, 기자들이 너무 집요했던 거라고 단순 해프닝 정도로 넘길 수 있었을 것이었다.
차정한이 하유리와 사귀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와 연애하고 있으니까. 이런 기사가 날 만큼 가까이 지내면서 집에 와서는 내게 사랑한다고 말할 사람이었다면, 처음부터 내가 차정한을 사랑할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나는 차정한의 사랑을 믿었다. 하지만 얼버무리고 내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은 차정한의 순간들은 솔직히 서운했다.
“…….”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생각한 걸까. 이 기사가 터지지 않았더라면 나는 내내 차정한이 어제저녁에 누구와 저녁을 먹었는지 내내 알지 못했을 것이었다. 차정한이 내게 말을 하지 않았고, 나는 그걸 거듭 묻고 캘 만큼 집요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잊었을 게 분명했다. 차라리 그랬더라면, 그냥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노이즈가 자글자글한 사진 속 웃지 않는 차정한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창을 끌 수도 없고, 노트북을 덮어 버릴 수도 없었다. 나는 내내 사진 속 차정한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고, 아무렇지 않게 털어내는 방법도 알 수가 없었다. 망상 지분이 더 큰 기사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분은 가라앉고, 심장이 조여들었다.
“…….”
그 엉망인 정적을 가르며 갑자기 울리는 짧게 숨을 내뱉었다. 화면에는 차정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78
?
?
- 유현아. 나야.
“응.”
- 봤구나.
“…응.”
- 봤으면 알겠지만, 그거 다 망상이야. 기레기라 그러니까 진짜 그냥 쓰레기 되기로 작정을 한 모양인데, 아니야. 그거 다 아니야. 봄이고 지랄이고 아주 소설을 써놨어. 믿는 거 아니지?
하유리와 연애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그 기사 전체가 다 망상이라는 차정한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하유리 씨랑 그런 사이 아니라는 건 알아.”
- 그래, 아니야. 감독님이랑 광고 촬영하는 얘기 했었는데, 거기가 세트장 근처였어. 그걸 들었나 봐. 촬영 쉬는 날이라고 그냥 들렀다고 하는데, 거기서 내가 지랄하면 앞으로 촬영할 때 분위기 박살 날 거 뻔하고, 형도 그냥 한 끼 참고 먹으라고 해서 그랬어.
“알아. 그럴 것 같더라.”
- 믿어 주는 거지? 저거 다 망상이야. 망상병자 새끼가 미쳤나.
“…다는 아니잖아.”
- 어?
“열애 중이라는 것만 아니고 나머지는 다 기사에 나온 거 그대로잖아. 하유리 씨가 너 찾아갔고, 같이 매니저 대동하고 저녁 먹었고, 그다음에 헤어진 거.”
화가 날 줄 알았는데 이상할 만큼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차정한이 그 사람과 연애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나도 알고 있기에 나는 다른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어제 솔직하게 얘기하지 못했다는 말, 말할 걸 그랬다는 말, 앞으로는 뭐든 다 말하겠다는 차정한의 이야기를.
- 유현아.
“왜 말 안 했어? 어제 내가 물어봤잖아. 저녁 얘기 나왔을 때 왜 얘기 안 했어?”
- 나한테 중요한 일 아니고, 네가 알아서 기분 좋을 일도 아니니까. 별일 아니었어.
“별일이 됐잖아.”
- 말 못 한 건 미안해.
차분하게 가라앉았던 마음 저 밑바닥에서 뜨거움이 번졌다. 차정한은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지 아직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잖아.”
- …….
“오늘 아침에도 내가 어제 뭐 먹었는지 물었을 때 대답하기 싫은 사람처럼 넘어갔지.”
- 굳이 얘기할 거 없잖아, 그런 일. 들으면 분명히 너 신경 썼을 거고, 기분 나빴을 거야. 집에 가서 네 얼굴 보는 시간 얼마나 된다고 그 시간을 그렇게 날려. 그러기 싫었어.
“그럼 앞으로도 그럴 거야? 이런 일 계속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돼?”
- 화난 거 알아. 놀랐을 것도 알고, 나 미운 것도 알아. 나도 이렇게 말도 안 되게 뜰 줄은 몰랐어. 나도 이런데 너는 더 놀랐을 거 알아. 내가 왜 몰라. 서운할 것도 알고, 화나는 거 당연해. 그런데 유현아. 이거 네가 신경 쓸 가치도 없어. 아니니까. 아무 의미도 없고, 그냥 나한테는 어제 먹은 메뉴가 뭔지 기억도 안 날 정도의 일이야. 그냥 무의미했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