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가 묘하게 어긋났다. 차정한은 내내 이 스캔들 내용 자체를 부정했고, 내게 하유리와 아무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어필했다. 하지만 아직도 내가 차정한에게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너한테 무의미한 시간이고 내가 알면 화날 것 같은 일이면… 어제처럼 말 안 할 거야?”
- 안 할 거야. 그런 가치 없는 일로 우리 시간 방해받기 싫어.
덮을 수 없었던 노트북을 덮었다. 손끝까지 번진 열에 손이 조금 떨렸다. 차정한의 시간 중 내가 모르는 시간이 앞으로도 생길 거라는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차정한에게 직접 들으니 견딜 수 없는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어제 네가 말했으면 몇 분 기분 별로다가 풀렸을 거야. 그리고 이런 기사를 봐도 내가 아는 얘기니까 해프닝 정도로 넘겼겠지. 오늘 저녁에 네가 와도 웃으며 볼 수 있었을 거야. 네가 나한테 말해 줘서 나도 이미 다 아는 얘기니까.”
- …….
“너한테는 저녁 메뉴가 뭐였는지 기억도 안 나는 무의미한 시간이었을지 몰라도 나는 네가 파스타 먹은 것도 기사로 봤고, 그걸 실시간 검색어에 네 이름이 뜬 걸 보고 내가 직접 눌러서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은 경로로 알게 됐어.”
- …….
“내가 안 물었으면 몰라도… 두 번이나 물었잖아. 말 안 하면 평생 내가 그냥 모르고 넘어가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럼 나도 앞으로 그래도 돼? 누굴 만나든 어디를 가든 너한테 말했을 때 네가 기분 나쁠 것 같으면 아무 말 안 하고 그냥 몰래, 너만 모르면 되니까 그렇게 다녀도 되는 거야?”
- …미안해. 이런 일이 없어야 했는데.
“…넌 지금도 이 스캔들 난 게 미안하지. 끊자. 더 얘기해 봤자 닿지도 않는 무의미한 말만 계속할 것 같아.”
- 빨리 갈게. 가서 얘기하자.
“…이제 얘기 안 할래. 기사로 봤으면 충분해. 일해. 끊을게.”
내 이름을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전화를 먼저 끊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차정한의 일, 그것도 이런 일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아니, 그들보다도 늦게 확인했다는 게 속상하고, 화가 났다. 앞으로도 내 기분이 상할 일이면 계속 이렇게 숨기겠다는 차정한의 말이 귓가에 맴돌아 더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
뭐든 다 말하자고, 숨기지 말자고, 속에 있는 말은 서로 다 하자고 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실망하게 하는 걸까. 나는 방으로 들어가 겉옷과 지갑만 챙겨 들고 현관으로 나섰다. 내 말에 머뭇대던 차정한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사랑을 고백한 지 이제 6일째였다. 차정한의 연애는 정말 일주일을 넘지 못하는 걸까. 참담하면서도 너무 슬펐다. 그리고 또 너무 이 상황이 우스운데 또 하나도 안 웃겨서 소리 없는 웃음이 터졌다가도 금세 사라졌다. 아니, 우스운 게 아니라 기가 막힌 것 같았다.
“…….”
아무렇게나 운동화에 발을 욱여넣고, 집을 나섰다. 화가 나는데 그 화를 강하게 표출할 수는 없었다. 내게는 여기 소모할 힘이 더는 없었다.
집을 나가 어디로 갈지 떠올렸다. 누나의 카페로 가자니 내가 없는 걸 알면 차정한이 가장 먼저 그곳으로 연락을 하고 올 것이었다. 그건 부모님 댁도 마찬가지였다. 비어 있는 오피스텔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하나씩 내가 갈 수 있는 곳을 제하고 나니 갈 곳이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내내 차정한에게서 전화가 왔다. 끊이지 않는 진동과 마주하며 계속 통화를 거절했다. 이제는 메시지가 계속 오는 것에 톡에 들어가니 계속 숫자가 늘어나는 아래로 악몽이나 꾸라는 김원우의 메시지가 보였다.
김원우 때문에 생긴 일은 아니지만, 괜히 그 말 때문에 내가 정말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아 조금 더 화가 났다. 나는 계속 늘어나는 톡에서 나와 김원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직을 한다더니 아직도 자고 있던 것 같은 그 목소리에 집 주소를 물었다. 김원우는 비몽사몽 내게 주소를 알려 주었다. 나는 어렵지 않은 주소를 중얼대며 아파트 앞에서 택시에 올랐다.
* * *
김원우는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뭔가를 생각하다가 또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 뭐냐…? 갑자기?”
“여기 좀 있어도 돼?”
“여기? 왜 뭐 너 가출했냐?”
“…어.”
“뭐? 야, 왜?”
“있어도 돼, 안 돼. 안 되면 다른 데로 가고.”
“아니, 되긴 되는데…. 뭔데. 왜 가출했는데.”
문을 여는 김원우의 옆으로 들어갔다. 집은 꽤 엉망이었다. 별 기대도 없었고, 이럴 거라고 예상도 했지만, 그래도 어질러지고 여기저기 빨래가 널린 집을 보니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왜 가출했는데. 너 차정한이랑 같이 살잖아? 아니다, 카페 일한댔는데. 카페에서 나온 거야, 차정한 집에서 나온 거야? 아, 뭔데.”
“나중에. 지금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야, 난 속이 터질 것 같거든? 아, 진짜 존나 궁금하네. 너같이 바른 생활 타입이 무슨 가출을 해. 이제 사춘기 오냐?”
김원우가 질릴 만큼 물었지만, 나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김원우가 납득할 수 있을 설명을 하려면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았다. 지금은 누구도 이해시키고 싶지 않았다. 나도 그 무엇 하나 이해를 못 하고 있는데 이런 내가 누구를 이해시킬 수 있을까.
“…아, 독한 새끼. 너 얌전하고 착하긴 한데 사실 존나 독해. 그래, 말하지 마라, 마. 아, 진짜 독하네. 밥은 먹었냐?”
“생각 없어.”
“나 라면 먹을 건데 나 혼자 먹는다?”
“어.”
“…아, 진짜 독한 새끼.”
드디어 옆에서 멀어지는 김원우를 흘끗 보다가 눈을 깊게 감았다.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막 쌓여 있던 것이 무너지고 흩날렸다. 나는 무릎을 세워 끌어안고 그 위로 얼굴을 묻었다.
“야, 전화 오는데?”
김원우의 말을 듣는 순간 그제야 진동 소리가 들렸다. 나는 겉옷 주머니에 든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 화면에 뜬 차정한의 이름을 보는데 눈동자가 다 뜨거워졌다. 나는 소파 앞 테이블에 휴대폰을 엎어놓고 다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진동은 끊겼다가 다시 길게 이어지고, 또 잠시 끊겼다가 말도 안 될 만큼 길게 이어졌다.
“아, 진짜 누군데 너 이래? 뭐야. 차정한이네.”
나는 김원우가 보고 있는 내 휴대폰을 빼앗아 겉옷 주머니 안으로 아무렇게나 넣었다. 김원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테이블 위에 걸터앉아 나를 툭툭 건드렸다.
“차정한이랑 싸웠냐? 와, 너희도 싸우긴 싸우는구나. 뭐 얼마나 싸우면 집을 나와? 야, 그 새끼가 본성 드러냈어? 너한테도 막 지랄해? 너 맞았냐?”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가서 밥 먹어.”
“차정한 때문은 맞는 것 같은데…. 야, 난 진동이 저렇게 오래 올 수 있는 것도 지금 처음 알았어. 저 새끼 저거 몇 통을 계속하는 거야. 난 쟤 진짜 너무 질려.”
화가 난 중에도 차정한을 안 좋게 말하는 김원우의 목소리가 듣기 싫었다. 내가 가만히 바라보자 김원우가 입을 다물고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알았어. 안 까. 안 깐다고, 네 새끼. 아들내미랑 왜 싸우고 나와서 나한테 난리야.”
다시 부엌으로 간 김원우가 곧 면을 후루룩 먹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식탁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와, 이거네. 아주 난리가 났네. 야, 너 차정한 스캔들 나서 나왔냐?”
이제야 포털에 도배된 기사를 본 모양이었다. 드디어 알았다는 듯 목소리가 커진 김원우를 보다가 그냥 다 포기하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아주 신난 것 같은 목소리가 계속 집 안을 왱왱 맴돌았다. 나는 그 내용을 듣고 싶었지만,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
주머니 안에서 계속 울리는 차정한의 그 진동이 너무 강했다. 온 신경이 그곳에 몰려 김원우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고, 내게 전혀 중요하지도 않았다.
진동은 한참이나 울리다가 끊겼다. 아마 다시 촬영에 들어갔을 것이었다. 뜨거워진 휴대폰을 꺼내 보니 부재중 전화가 67통이나 찍혀 있었다. 나는 화면에 뜨는 차정한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정한 : 유현아 걱정되니까 전화 좀 받아]
[정한 : 나 이제 촬영 다시 들어가야 해]
[정한 :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정한 : 유현아]
[정한 : 잘못했어 내가 최대한 빨리 갈게 집에 있어 응?]
[정한 : 집에 있어야 돼 알았지?]
톡에도 메시지가 거의 백 개 가까이 쌓여 있었다. 그걸 눌러서 볼 힘도 마음도 없어 휴대폰을 엎어놓고 소파로 몸을 기댔다. 분명히 행복하기만 했는데 왜 이렇게 된 걸까. 전에도 이런 일은 여러 번 있었고, 스캔들이 속상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우울하지는 않았었다.
“…….”
뭐가 다른 걸까. 그때는 친구였고, 지금은 연인이라서?
“…….”
친구였던 내게는 하루에 있었던 일을 다 말하고 나와 공유하는 게 너무나도 당연했던 차정한이 연인이 된 내게는 숨기는 게 생겼다는 그 사실 자체를 믿을 수가 없었다. 스캔들이 아니라 차정한의 그 말, 앞으로도 내게 말하지 않는 것이 있을 거라는 그 말이 너무 아팠다.
“야, 하유리랑 진짜야? 이 새끼 전에 유아정이랑도 그러더니.”
“…….”
“얘 여자 존나 밝히지? 이럴 때 아니라고 하는 거 다 그냥 쇼하는 거잖아. 뒤로 할 짓 다 하면서 겉으로는 아니라고 가식을 떨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하고 싶기도 하고, 당장 일어나 저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뛰쳐나가고 싶기도 한데 유감스럽게도 몸을 일으킬 힘도 없었다. 나는 김원우의 거의 폭격과도 같은 말들을 고스란히 들어내며 눈을 감았다. 최악의 스캔들과 최악의 상황, 거기에 귓가에서 끝없이 폭탄을 터뜨리는 최악의 배경음까지 정말 모든 게 최악인 첫 연애 6일 차였다.
#79
?
?
집 안으로 노을이 길게 늘어졌다. 어질러진 거실 바닥을 물들이던 불그스름한 빛이 어둠으로 변하자 김원우는 불을 켰다.
무엇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내게 완전히 질렸다는 듯 김원우는 내가 없는 것처럼 자기 할 일을 했다. 그러다가 가끔 내게 시답잖은 것을 묻고, 차정한에 대한 이야기를 떠보기도 했다.
“야, 차정한 기획사에서 기자 고소한다고 난리야. 하유리랑 아니래.”
“알아. 원래 그렇게 잘 대처해.”
“야, 지유현. 나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데.”
조용히 할 일을 하던 김원우가 내 대꾸에 소파 쪽으로 와 나를 보고 앉았다.
“진짜 너희처럼 죽고 못 사는 친구 생기면 열애설 그런 거에 가출도 하고 싶고 그러냐? 야, 진짜 이건 궁금해서 묻는 거야.”
“열애설 때문에 나온 거 아니야.”
“그럼?”
“그냥 좀 소통의 방향이 달라서.”
“싸웠단 거네.”
“…….”
“와, 너희도 싸우기는 하는구나. 갑자기 인간미가 확 느껴지네. 그동안 자주 싸웠냐?”
“아니. 처음이야.”
“……와. 노벨우정상 이런 거 없냐. 존경스럽다, 존경스러워.”
지금까지 정말 단 한 번도 이렇게까지 감정이 화라는 이름으로 끓었던 적이 없었다. 물론 10년이 넘게 알고 지내면서 단 한 번도 서운한 적이 없다거나 실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감정들은 생각보다 쉽게 사라지고, 그 자리를 금세 좋은 감정들이 채웠었다. 둘 다 뒤끝 있는 성격도 아니고, 꼬투리를 물고 늘어져 일을 키우는 성격들도 아니기에 감정의 정리는 생각보다 쉬웠다.
내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을 마주하면 차정한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나를 이해시켰다. 솔직한 게 장점이고 지나치게 솔직한 게 단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차정한은 그 무엇도 내게 숨기지 않았다. 때로 조금 포장해서 말해도 될 것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차정한의 그런 성격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군더더기를 남기지 않는 내 성격이 합쳐져 우리 사이에는 그 어떤 감정의 찌꺼기도 남지 않았다.
분명히 그랬는데 왜 오늘은 이런 걸까. 평소와는 다르게 내게 숨기는 것이 생긴 차정한과 그런 차정한을 보며 지나치게 감정이입을 해 화가 난 나는 정말 낯설었다. 차정한과 지유현이라는 두 이름을 놓고 봤을 때 우리 둘도 마주한 적이 없는 낯선 모습이었다.
나는 한동안 울리지 않다가 다시 울리기 시작하는 휴대폰을 아무렇게나 엎어 두었다. 김원우가 한 번씩 진동이 끊이지 않는 휴대폰을 들어 차정한의 이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야, 너 진짜 그러고 있을 거야? 진짜 여기서 자게?”
“자는 건 안 돼? 가야 하면 갈게.”
“아니, 가라는 게 아니라 여기 있어도 되냐 그거지.”
“무슨 말이야, 그게?”
과자를 들고 와 뜯은 김원우가 다시 소파 앞 테이블에 걸터앉아 뭔가 굉장히 걸리는 게 있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작아작 감자칩을 먹는 김원우를 보다가 다시 몸에서 힘을 뺐다.
“차정한이 여기까지 쳐들어올까 봐 무서워서 그래. 걔 너 가는 데는 다 가잖아. 반 모임까지 오는데 여긴 안 오겠어?”
“못 와. 주소 모르잖아.”
“아, 하긴. 주소를 모르긴 하지. 걔 내 번호도 모를걸.”
“…정한이가 만약에 온다고 해도 뭐 너 잡아먹어? 왜 그렇게 싫어해. 정한이가 너한테 잘못한 것도 없는데.”
“팔이 안으로 굽다 못해 부러졌다, 부러졌어. 하여튼 차정한 얘기만 나오면 아주 자동이지, 자동이야. 야, 배 안 고파?”
종일 먹은 게 하나도 없는데 배가 하나도 고프지 않았다. 뭘 먹으면 체할 것 같은 기분에 나는 김원우가 내미는 과자봉지를 슬쩍 됐다며 밀었다.
“왜 싸웠는진 모르겠는데 웬만하면 풀어라. 너희처럼 오래 진짜 친하던 애들이 진짜 별것도 아닌 일로 갈라진다니까. 10년 친구여도 반나절이면 남보다도 못하게 돼. 그러기 전에 풀어. 너 착하잖아.”
“나 안 착해.”
“하긴 너 고집도 세고, 은근 독해. 너 같은 애들이 한 번 화나면 진짜 무서운데 차정한이 그걸 몰랐나 보네.”
김원우가 차정한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속이 따끔댔다. 이쯤이면 마음이 그냥 저절로 알아서 풀리고, 그래, 그럴 수도 있다고 넘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 집에 처음 들어온 그때와 지금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마음 안에는 차정한이 했던 말들이 단단하게 뭉쳐 내 여기저기를 치고 다녔다.
“야, 이번에는 누나래. 차정한 아니라 누나.”
“…….”
테이블 위에 있는 휴대폰 화면을 본 김원우가 내게 내밀었다. 누나인 걸 확인하고 기대고 있던 등을 바로 세워 앉아 전화를 받았다.
“응, 누나.”
- 유현아. 너 어디야?
“나? 갑자기 왜? 무슨 일 있어?”
- 정한이 왔다 갔어. 너 안 왔냐고, 혹시 방에 있는 거 아니냐고 방까지 보고 갔어. 너희 싸웠어?
“…좀.”
- 어머, 너 싸우고 집 나가서 정한이 연락도 안 받는 거야?
“…….”
- 어딘데. 말해 봐. 어디서 뭐 하고 있어?
“친구 집에 있어. 걱정 안 해도 돼. 크게 싸우고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그럴 때 있잖아. 한 번씩. 응, 알았어. 한 번 들를게. 응. 누나도.”
차정한이 카페에 갔다는 건 내가 집에 없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아마 내가 김원우의 집에 있다는 건 알지 못할 것이었다. 나는 화면에 뜨는 새로운 차정한의 메시지를 눈에 담았다.
[정한 : 카페도 안 가고 어디 간 거야?]
[정한 : 전화도 안 받고]
[정한 : 너 이러면 나 진짜 돌아]
[정한 : 보고 얘기하자 나 진짜 딱 죽겠어]
[정한 : 어디야 전화 좀 받아줘]
휴대폰으로 한 것도 없는데 종일 울린 진동 덕분에 배터리가 거의 다 닳아 버렸다. 나는 쉬지 않고 울려 여전히 뜨거운 휴대폰을 든 채 잠시 고민했다.
“야, 그만 받아 줘라. 받아서 전화하지 말라고 해. 밤새 저럴 것 같은데. 폰 터지겠다.”
“…….”
“네가 그럴 정도면 이거 진짜 차정한이 팬 수준인데.”
“정한이 그런 애 아니야. 그냥 좀 생각이 달라서 그런 거라고 했잖아.”
“아니, 쟤는 너랑 싸운 게 아닌 것 같아서 그래. 너는 싸운 거 같거든? 전화 안 받고, 집 나오고, 입 다물고 있는 거 보면 딱인데, 쟤는 지금 무슨 집 나간 애인 찾는 것처럼 굴잖아. 저러다 실종신고 하겠다.”
집 나간 애인이라는 말에 소리 없이 숨이 터져 나왔다. 참 안 어울리는 말인데 너무 정확한 말이라 헛웃음이 다 났다.
“이래서 어릴 때 다 해 봐야 한다니까. 대가리에 든 거 없을 때 싸워야 치고받고 서로 지랄 좀 하면서 금방 풀지, 서른 먹고 싸우면 자존심만 세서 풀고 싶어도 나중에는 못 풀어. 타이밍이라는 게 있잖아? 줘! 형이 해결해 줄게.”
내 다리 위에 놓인 휴대폰을 확 가져간 김원우가 전화를 받는 것을 보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을 뻗었지만, 김원우는 잽싸게 나를 피해 도망쳤다.
“야, 차정한! 전화질 그만하고 와서 데려가. 와, 이 새끼가 갑자기 욕하네. 그래, 나 김원우다. 어쩔래. 뭐. 왜 내가 받겠냐? 지유현이 여기 있으니까 내가 받지.”
머리가 다 지끈댔다. 나는 김원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김원우는 그런 내게서 뒷걸음치며 고개를 저었다.
“야, 와… 이거 말 이상하게 하네. 내가 납치했냐? 얘가 자기 발로 온 거거든. 야, 그따위로 나오면 나도 주소 못 알려 주지. 좋게 넘어가려고 해도 기회를 안 주네. 야, 끊어. 됐어.”
차정한과 싸우듯 말하다가 전화를 끊은 김원우가 그대로 전원을 껐다. 나는 완전히 뜨거워진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전화는 왜 받아서 싸워?”
“그럼 너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건데. 너 차정한이랑 다시 안 볼 거야? 차정한이 지금이야 전화하고 난리지. 저러다 지도 짜증 나서 안 하면 끝이야.”
“…미안해. 내가 괜히 여기 와서 너한테까지 폐 끼쳤다.”
“아니, 폐는 아니고 돈 주고 못 볼 싸움 구경해서 재미는 있는데…. 내가 이런 꼴을 못 봐서 그래. 근데 차정한 쟤 돌았냐? 나 신고할 거래.”
“…왜?”
“내가 너 납치했다고. 다급하게 네 이름 부르다가 내 목소리 듣더니 돌변해서 어떤 새끼냐고 난리야.”
내가 직접 듣지는 않았지만, 귓가에 차정한이 했을 말들이 생생했다. 나는 꺼진 휴대폰을 아무렇게나 주머니에 넣고 식탁 의자를 빼고 앉았다. 맞은 편에 앉은 김원우가 식탁 위에서 울리는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받았다.
“어, 지운아. 주소? 뭔 주소. 차정한이 주소 알려 달래? 와……. 알려 주지 마. 어, 모른다고 해. 그래. 다음에 보자.”
김원우는 무섭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괜히 나무 식탁 위를 손끝으로 의미 없이 문지르며 계속 김원우에게 걸려오는 전화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김원우는 네 번이나 똑같은 통화를 했다.
“…차정한 내가 그냥 인정할게. 얘는 진짜다. 내가 살면서 별 또라이 다 봤는데…. 차정한은 진짜야. 어우, 무서워.”
전화를 끄는 김원우를 보며 식탁 위로 엎드렸다. 지끈대던 머리가 이제는 터질 것 같았다. 나는 하나로 맺히지 않고 따로 먼지처럼 떠다니는 생각들을 붙잡지도 못한 채 방치했다.
“야, 유현아. 와서 이거나 봐. 그냥 웃긴 거 보는 게 최고야.”
집 안 가득 퍼지는 웃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김원우는 요즘 제일 잘나가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이렇게 웃음소리가 가득한데 조금도 웃고 싶지 않았다.
김원우가 보던 프로그램이 끝나고, 곧 다른 프로그램이 시작했다. 또 다들 웃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렸다. 나는 조금 멍한 머리로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 김원우의 말처럼 언제까지 여기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물론 며칠 여기 있을 수도 있겠지만, 여기는 내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나는 소파 한쪽에 벗어둔 겉옷을 집어 들었다.
“오늘 고맙고 미안했어. 다음에 밥 살게.”
“뭐야, 가게? 안 자고?”
“피해서 될 일 아닌 것 같아서.”
“그건 그래. 그냥 둘이 치고받고 풀어. 그리고 밥 말고 술 사.”
“알았어. 갈게.”
현관으로 따라 나온 김원우가 슬리퍼에 발을 넣었다. 나는 한 손으로 문을 열며 그런 김원우를 돌아보았다.
“나올 거 없어. 쉬어.”
“야, 나 그렇게 막돼먹은 놈 아니…….”
나를 보고 웃던 김원우가 말을 흐리며 놀란 얼굴을 했다. 나는 김원우가 보고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숨을 몰아쉬며 나를 보고 있는 차정한과 눈이 마주친 순간 심장이 현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진짜 여기 있었네.”
“…….”
“왜 그렇게 봐. 내가 너 찾아서 싫어?”
숨을 고른 차정한이 내가 잡은 문을 바깥으로 힘주어 열었다. 나는 힘없이 문손잡이를 놓치고 완전히 차정한과 마주했다. 가만히 나를 보던 차정한이 내 뒤로 시선을 옮겼다.
“한 번만 더 지유현 가지고 나한테 장난쳐.”
조금 전과는 달리 잔뜩 날카로워진 목소리에 몸에 힘이 들어갔다. 김원우 역시 만만한 성격은 아니라 조금만 방심해도 싸움이 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나는 반쯤 몸을 돌려 다가오는 김원우를 손으로 막았다. 제발 싸우지 말라는 얼굴로 보니 김원우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내 앞에서 둘이 뭐해.”
날카로운 목소리가 이제 내게 닿았다. 나는 다시 나를 보고 있는 차정한과 눈을 마주쳤다. 화가 난 것처럼 잔뜩 예민해진 눈으로 나와 김원우를 번갈아 본 차정한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나와야지. 왜 안 나오고 그러고 있어.”
“…….”
“내가 너 찾아다니는 사이에 넌 저 새끼랑 더 친해지기라도 했어?”
“…여기서 그러지 말고 가자. 갈게, 원우야.”
김원우에게 인사하는 나를 보며 숨기지 않고 인상을 쓴 차정한이 그대로 내 손을 잡아 바깥으로 당겼다. 혹시라도 김원우가 보고 눈치챌까 싶어 손을 빼려고 애썼지만, 차정한은 어마어마한 힘으로 나를 쥔 채 계단을 내려갔다.
#80
?
?
“이것 좀 놔, 아파.”
“…….”
“차정한.”
이름을 부르자 차정한이 몇 층인지 모를 계단에서 멈춰 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 차정한의 머리 위에서 어두컴컴한 불이 켜졌다.
“놓으면 또 올라가서 저 새끼 집으로 들어가려고?”
“화내려고 온 거야?”
“내가 지금 화내는 걸로 보여?”
“…화내고 있잖아, 지금.”
“참고 있는 거야. 사고 안 치려고.”
다시 손을 힘주어 쥔 차정한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 높은 층은 아니라 금방 1층으로 내려가 바깥으로 나갔다. 차가워진 공기가 얼굴에 닿자 고여 있던 숨이 무너지듯 흘렀다. 차정한은 조수석 문을 열고 나를 바라보았다.
“타.”
내가 조수석으로 오르자 차정한이 문을 닫았다. 그는 운전석으로 가는 동안에도 감시하듯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는 차정한이 운전석으로 타 문을 닫는 소리에 입술 안을 꾹 깨물었다. 해야 할 말이 많아서 빨리하고 싶기도 하고, 그냥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전화 왜 안 받아. 누구 도는 꼴 보려고 그래?”
“너랑… 얘기하기 싫었어.”
“나랑은 얘기하기 싫고, 김원우랑은 같은 집에 있고 싶었어?”
“비약하지 마.”
“비약? 내가 싫어하는 거 알면서 같이 있었으면서 비약? 네 전화까지 김원우가 받았어. 너는 안 받던 그 전화를 저 새끼가 받았다고. 내 기분이 어땠을 것 같아? 하루 종일, 온종일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어. 넌 그렇게 전화 끊더니 연락 안 되지, 톡도 안 보지….”
나는 고집스레 시선을 내려 내 손만 바라보았다. 목소리에 모양이 생겨 손 위로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뾰족한 모양의 목소리는 자꾸만 내 여기저기를 긁고 지났다.
“겨우 일 끝나고 집에 갔더니…. 집은 또 비어 있고, 카페 갔는데 거기도 없고, 집에 전화하고 싶은데 어머니 걱정하실 것 같아서 할 수도 없고.”
“…….”
“너는 계속 전화 안 받고, 또 안 받고… 안 받고.”
“…….”
“그러다가 받았는데 네가 아니라 다른 새끼야. 나는 네 얼굴 못 봐서 미친놈처럼 굴고 있는데 넌 다른 새끼랑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