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읏!”
팔에 얼굴을 파묻었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니 차정한이 젖은 손을 들어 올리는 게 보였다. 손에 묻은 것이 내 성기 끝에서 떨어지던 물이라는 걸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차정한은 그 젖은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안 된다는 말이 입술 근처로 나왔지만, 차정한이 더 빨랐다. 차정한은 손끝을 흥건하게 적셔 떨어지는 그 물을 혀끝으로 건드리고 머금었다.
“그걸… 그걸 왜 먹어….”
“네가 흘린 거잖아.”
“…….”
“미친놈처럼 봐도 어쩔 수 없어. 나 미친놈 맞아.”
젖은 손이 다시 허리를 꽉 쥐었다. 분명히 젖은 느낌과 함께 피부를 짓누르는 느낌에 몸이 다시 뒤로 길게 빠졌다. 차정한은 뜨거운 숨을 뱉어내며 다시 있는 힘껏 허리를 움직였다. 나는 다시 미칠 것 같은 사정감에 올랐지만, 더는 그 무엇도 뱉어내지 못했다.
“아…….”
차정한은 숨과 섞인 신음을 내쉬며 다시 내 안으로 사정했다. 사정의 순간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가 빠졌다. 다리가 떨리고, 온몸이 다 내 것이 아닌 것처럼 흔들렸다. 차정한은 내 안에서 느릿하게 빠져나와 나를 다시 돌려세웠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를 끌어안고 머금었다. 혀 위로 닿아오는 나와 똑같이 뜨거운 체온에 힘은 없어도, 사랑은 들끓었다.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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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대로 나를 데려간 차정한은 조금 전과는 다르게 나를 아주 조심스럽게 눕혔다. 힘이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이대로 잠드는 건 싫어서 차정한이 내 옆으로 올라오는 사이 몸을 조금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잘 줄 알았는데.”
“정한아.”
“응.”
“…안아 줘.”
“…….”
“우리 어제 싸우느라 내내 떨어져 있었잖아.”
“제대로 안으려면 여기로 와야 하는데?”
차정한이 나를 살짝 당기며 허벅지 위를 탁탁 두드렸다. 솔직히 맨정신이라 차정한의 다리 위로 먼저 올라앉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분위기가 나를 이끌었다. 나는 차정한의 다리 위로 올라가 앉아 그를 마주 보았다. 차정한이 웃음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웃어.”
“좋아서.”
“…….”
“네가 너무 좋아서.”
차정한은 사랑과 가까운 말을 소리 낼 때마다 꼭 천진한 소년처럼 굴었다.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 본 적 없고, 바라 본 적도 없던 감정을 진지하게 마주해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안 그 눈을 볼 때마다 그 사랑이 다가와 늘 나를 밝혀 주었다.
“…큰일이야. 이제 이런 것도 맨정신에 하면 다음에는 더 이상한 것도 하게 될 거 아냐.”
“이게 왜 이상한 거야. 나란히 앉아서 어떻게 안아. 안으려면 이렇게 올라와야지.”
“…그래도 애들이나 이러지.”
“그럼 내가 올라갈까?”
장난스러운 말에 잠시 머릿속에 차정한이 내 다리 위로 올라와 앉는 모습이 그려졌다. 순간 웃기기도 하고 안 어울리기도 해서 작게 웃음이 터졌다. 웃는 나를 보며 소리 내어 웃은 차정한이 두 팔 가득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어느새 가장 편해진 그의 품으로 몸을 기대었다. 평소보다 짙어진 차정한의 체향이 좋아 그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매일 아무것도 안 하고 유현이 너랑 이러고 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기분 좋아.”
“나도 좋지?”
“네가 좋아서 기분도 좋은 거지.”
“아는데 듣고 싶었어.”
내 머리칼에 입 맞춘 차정한이 고개를 숙여 내 귓가와 뺨에도 따뜻하게 입술을 대고 사랑을 속삭였다.
“아, 맞아. 유현아. 나 모레 지방 촬영 가.”
“지방 촬영? 얼마나?”
“일주일.”
“…일주일이나?”
드라마나 영화 촬영을 하다 보면 자주 있는 일이라 놀랄 일은 아니지만, 일주일이나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게 조금 막막하기는 했다. 몸을 떼고 보자 차정한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세트장 때문에 어쩔 수가 없나 봐. 안 가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
“매일 전화할게. 자기 전에 영상 통화도 해.”
“응. 그러자.”
“나 너 없으면 못 자는데.”
“…나도.”
“영상 통화 하면서 내가 재워 줄게. 얼굴 보고 목소리 듣고 하면 그래도 좀 괜찮겠지?”
“…응. 그럴 거야. 모레 언제 가?”
“아침에.”
내일 하루만 지나면 차정한을 일주일이나 못 본다고 생각하니 평소답지 않게 감정이 흔들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은 그냥 어쩔 수 없다고 담담하게 생각하고 흘려보내는 편인데 그 일에 차정한이 들어가는 순간 나는 늘 너무나도 쉽게 휩쓸렸다. 그래서 혼자 좋아할 때도 그 휩쓸림을 티 내지 않는 게 가장 어려웠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매니저 일을 하고 있다면 차정한을 따라 당연히 내려가겠지만, 지금 나는 차정한의 매니저도 아니고,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모레 아침에 내려가니까 내일도 늦게 끝나진 않을 거야. 내일은 진짜 맛있는 저녁 먹자. 아, 맞다. 오늘 저녁도 못 먹었네. 배 안 고파?”
“음…. 배고프기는 한데 힘이 하나도 없어서 움직이기 귀찮아.”
“배고프면 안 되지. 나도 점심도 제대로 못 먹어서 배고파. 내가 뭐 해 줄까? 라면 먹을까?”
“촬영 전날 그런 거 안 먹잖아.”
“오늘은 많이 움직여서 괜찮아.”
촬영할 때 액션 신 같은 게 있었나 잠시 생각하는데 차정한이 그런 나를 보며 씩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야 섹스 얘기라는 걸 알았다.
“먹고 걱정되면 한 번 더 움직이지 뭐.”
“…그게 돼?”
“돼. 난 아까도 열 번은 더 할 수 있었어.”
“…말도 안 돼.”
“그게 말이 된다니까. 유현이 너도 나오진 않는데 계속 가긴 하잖아. 몇 번 더 할 수 있을걸.”
“…그런 말을 어떻게 진짜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난 정한이 너 보면 가끔 신기해.”
“아무것도 안 나오는데 가는 네 얼굴 보면 얼마나 야한지 알아? 말할 수밖에 없어. 너도 알아야지. 네가 얼마나 야한지.”
장난스럽게 말하면 그냥 농담이구나 생각하겠는데 이런 말을 할 때 차정한은 내 생각보다 훨씬 진지했다.
“…나 야한 거 내가 알아서 뭐해.”
“그런가?”
잠시 고개를 기울여 생각하던 차정한이 뭔가 깨달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굴을 쥐며 가볍게 키스했다.
“하긴 너 야한 건 나만 알아야지.”
“너 아니면 누구도 그런 생각 안 해.”
“당연히 하면 안 되지. 생각하면 내가 다 죽여 버릴 건데.”
“…과격해.”
“순화해서 말한 거야. 내가 솔직하게 진짜 내 속 말하면 너 진짜 도망간다니까.”
“안 도망갈게. 솔직하게 말해 봐.”
차정한은 제 다리 위로 앉은 내 허리를 감아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단단히 잡고는 슬쩍 내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너 아무도 못 보게 나만 아는 집에 가두고 싶어.”
“…….”
“…여기까지만 할까?”
“아니, 다 말해도 돼. 듣고 싶어. 궁금해.”
“…너만 보면 하고 싶어. 가지면서도 내가 더 가지고 싶어. 다 삼켜 버리고 싶기도 해. 사랑하면 미친놈 된다더니…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내가 그래.”
“…….”
“네 가족 빼고 너 보는 사람들 전부… 다 없었으면 좋겠어. 나만, 나만 보고 싶어. 어디를 가도 네 생각만 나고, 누구를 봐도 네가 아니라 아무 의미가 없어.”
도망가고 싶기는커녕 잔뜩 사랑받는 기분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나는 조금 더 몸을 밀착하며 차정한의 몸에 가까이 붙었다.
“더… 더 말해 줘.”
“네가 너무 좋아서 미치겠어. 유현아. 어떻게 해야 네가 내 마음을 다 알까. 너도 날 보면 나처럼 이렇게… 미치겠을까.”
“…….”
“사랑해.”
“…….”
“네 온몸에 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 닿고 싶고…. 먹고 싶어.”
먹고 싶다는 말에 귓가가 확 화끈거렸다. 또 차정한의 눈을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생각으로만 머금고 있던 것들을 소리 내는 차정한은 지나치게 내 마음을 잡고 흔들어댔다.
“…라면은 좀 이따 먹을까?”
차정한은 놀라울 만큼 빠르게 내 말을 알아들었다. 금세 달아오른 눈동자로 나를 본 그가 그대로 입술을 머금으며 아래를 맞췄다. 나는 그의 어깨를 잡고 몸을 살짝 들어 다시 발기한 차정한의 것이 아래로 맞물리는 느낌과 함께 천천히 내려앉았다. 내 모든 것을 안락하게 만드는 채움에 맞물린 입술 사이로 서로의 긴 숨이 뒤섞였다.
“아…….”
다시 깊은 곳까지 차정한의 것이 가득 차는 것에 아랫배가 조여 들었다. 모든 힘을 다 써서 오늘은 진짜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다시 흥분이 맺히는 걸 보면 아까 차정한이 말했던 것처럼 몇 번은 더 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저런 생각… 아, 나만 하는 거야?”
“아니…. 흣, 나도, 나도 해. 나도 너… 더 가지고 싶어, 정한아.”
“다 가져도 되는데. 제발 더 가져.”
열이 오른 내 뺨에 입을 맞춘 차정한이 씩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예뻐 몇 번이나 차정한의 얼굴을 잡고 똑같이 입 맞췄다. 차정한이 그런 내 얼굴을 움직이지 못하게 쥐고 깊게 파고들었다. 혀가 입속으로 깊게 파고들어 움직이는 것에 맞춰 맞물린 아래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응… 읏, 응…….”
신음이 차정한의 입속으로 전부 흘러들었다. 안을 잔뜩 늘려 채운 것이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질 수밖에 없는 깊은 곳을 자비 없이 퍽퍽 소리가 나게 찍어눌렀다. 나는 차정한이 위로 찔러 올리기만 해도 성기 끝으로 고이는 쾌감을 참을 수가 없었다.
“유현아, 하…. 너 아직 나와.”
차정한이 내 성기 끝을 살짝 손끝으로 건드렸다. 손끝이 성기 위를 스치는 순간 고개가 뒤로 확 젖혀졌다. 쏟아내는 느낌은 없는데 머리끝까지 치고 오른 쾌감은 어마어마했다.
“하읏…….”
온몸이 다 바들바들 떨렸다. 고개를 앞으로 숙이자 차정한이 살짝 젖은 손끝을 내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혀끝으로 문질렀다. 나는 얼른 그런 차정한의 손을 잡아 내렸지만, 이미 손끝에서 빛나던 액체는 차정한의 혀끝으로 옮겨간 뒤였다.
“…미쳤나 봐…. 그걸 왜 자꾸 먹어.”
“먹고 싶다니까.”
“…….”
“아직 나올 게 조금 남긴 했었나 봐. 이제 안 나올까?”
“…몰라.”
“해 보자.”
“하나도 안 궁금… 아!”
내 허리를 잡아 그대로 뒤로 눕힌 차정한이 단숨에 내 위를 덮으며 올라탔다. 온몸을 묵직하게 누르는 차정한의 무게가 좋아서 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차정한을 끌어안으며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얼굴 안에 담긴 차정한의 모든 감정을 사랑했다. 외로움과 불안감, 혼자 남겨질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초조함. 새로이 그의 마음을 뒤덮은 나를 향한 사랑. 그 모든 것이 담긴 얼굴이 가까이 내려와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고 멀어졌다.
나는 아래로 쑥 내려가는 차정한에 놀라 상체를 조금 들어 올려 내 다리 사이로 얼굴을 가져간 차정한을 바라보았다.
“…빨리 올라와.”
“궁금해.”
차정한은 그대로 내 성기를 쥔 채 혀끝을 댔다. 선단에 그의 혀가 닿는 느낌과 동시에 퍼지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각에 상체를 받치고 있는 팔이 다 후들댔다. 차정한은 그런 나를 보며 짓궂게 귀두 끝을 혀로 문질렀다.
차정한의 혀가 내 성기 끝을 문지르고 있는 걸 두 눈으로 보며 버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숨만 닿아도 아랫배가 저릿한데 저런 노골적인 자극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집요하게 핥고 머금는 자극에 완전히 무너졌다. 차정한의 바람대로 확 밀려든 사정감과 함께 온몸이 녹아드는 거센 쾌감에 휩싸였지만, 무엇도 뱉어내지 못했다.
“진짜 이제 안 나와.”
혀를 돌려 귀두 끝을 둥글게 문지른 차정한이 웃으며 올라와 다시 내 몸을 덮었다. 이제 정말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었다.
“입 벌려 봐.”
“…….”
손가락은 안 움직여도 차정한의 말에 입술은 벌어졌다. 벌어지는 것과 동시에 바라고 있던 것처럼 혀가 그를 향해 움직였다. 입술 바깥에서 마주 닿은 혀끝이 느릿하게 문질리는 동안 차정한은 내게서 시선을 조금도 떼지 않았다. 그 시선에서 쏟아지는 달뜬 사랑에 생각과 마음 모든 것이 녹아내렸다. 나는 다시 내 안으로 파고드는 차정한의 온몸을 가득 끌어안았다. 가지고 있어도 가지고 싶은 나의 유일한 사랑을.
* * *
결국, 밤에 라면은 먹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계속 쾌감에 사로잡힐 수 있나 싶을 만큼 섹스했고, 마지막에는 그대로 또 기절했다. 꿈 하나도 꾸지 않고 완전히 깊게 잠들었다가 깨 보니 낮이라 머리가 다 멍했다. 비명을 질러대는 몸 여기저기를 조심히 움직여 욕실로 가니 거울에 또 저번처럼 메모가 붙어 있었다.
<내가 다 했으니까 빨리 씻고 나가서 냉장고로 가.>
뭘 다 했다는 건지는 씻으면서 알았다. 잠든 내 안을 정리하는 차정한에 익숙해질 날이 진짜 오기는 올까. 씻으면서도 아무것도 모르고 잔 내가 떠올라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씻고 메모에 적힌 대로 냉장고로 가니 그 위에도 메모가 붙어 있었다. 나는 냉장고에 붙은 메모를 떼어 그 위에 적힌 차정한의 흔적을 한 글자씩 눈에 담았다.
<점심 사다 놨어. 거르지 말고 꼭 먹어. 사랑해.>
냉장고를 열어 보니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샐러드 파스타와 새우튀김롤이 들어 있었다. 나가기도 바쁘고 피곤했을 텐데 언제 이건 또 사다 넣어 두고 간 걸까. 배도 고프고 해서 얼른 샐러드 파스타와 롤을 모두 꺼내 식탁에 놓았다.
“…….”
식탁에서 먹으려고 하니 어제 내가 여기 누워서 했던 모든 일이 머릿속을 스쳤다. 내가 누웠던 곳에 혼자 앉아 점심을 먹기가 조금 민망해 그냥 거실로 가 소파에 앉아 먹기로 했다.
[고마워 맛있게 먹을게]
[나도 사랑해]
차정한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게 아직까지 막 자연스럽거나 익숙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말을 할 때마다 마음이 꽉 조여 들고 설레는 기분이 좋았다.
내일부터 일주일 동안 못 만날 생각을 하면 벌써 보고 싶고 그립지만, 그래도 그 일주일이 우리를 더 단단하게 이어 줄 것을 알기에 우울한 쪽으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가 앞으로 함께할 날들은 그 일주일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길게 남아 있으니까.
그것으로 잠시나마 마음을 달래기에는 충분했다.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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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정한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나가기 전에 현관에서 10분도 넘게 끌어안고 또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최대한 담담하게 잘 다녀오라고 인사했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가서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눈을 맞추고 손을 흔들었다.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보기만 해도 차정한이 보고 싶어져서 얼른 그냥 집으로 들어왔다. 계속 보고 있다가는 주차장으로 달려 내려갈 것 같기 때문이었다.
오늘 아무 일도 없다면 내내 차정한이 지방 촬영을 하러 내려간 것만 생각 날 텐데 오늘은 실장님과 점심 약속을 한 날이었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기는 했지만, 내게 아주 중요한 약속이기에 긴장이 되어 자꾸만 시간을 보게 됐다.
차정한의 기획사 실장님과는 내가 차정한의 매니저로 일하면서 자주 뵙고, 또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기에 어색한 사이는 아니었다. 매니저를 관둔다고 했을 때 고맙게 잡아 준 분이기도 하고, 매니저로 시작해 굴지의 기획사를 차린 분이기도 했다. 대표 자리에는 실장님의 형이 있지만, 사실상 국내 최고의 배우 기획사는 실장님이 이끌어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분과의 진지한 자리이니 긴장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늦지 않기 위해 약속 시각 한 시간 전에 집을 나섰다.
나도 일찍 도착했는데 실장님도 나와 비슷한 시간에 도착해 약속 시각보다 20분 먼저 식당으로 들어갔다. 아주 오래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을 관둔다고 한 뒤로 처음 뵙는 거라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꽤 길게 이어졌다.
“잘 지냈다니 다행이야. 그리고 이렇게 다시 일할 생각해 준 것도 다행이고. 솔직히 유현이 너 관두고 내가 너무 아쉬웠거든. 정한이는 생각보다 잘 버텨서 다행이었는데 정한이 차치해도 네 능력이 너무 아까워서 내가 포기가 안 되더라고.”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게 봐 준 게 아니고 네가 잘하니까 좋아 보인 거야. 나도 매니저로 시작했잖아. 매니저 일 우습게 아는 사람들 많은데 기획사 차린 사람들 거의 반은 다 매니저 출신이야. 같이 다니면서 서포트 다 하고, 그 바닥 룰 다 알고, 누구보다 빠삭하잖아.”
“네…. 그렇죠. 매일 접하고, 다니다 보면 다 알게 되니까요.”
“너 정한이랑 다니면서 주변에서 얼마나 난리였는지 알지? 광고주들도 그렇고 대행사도 그렇고 매니저 때문에 차정한 이미지도 더 좋아진다고 칭찬을 얼마나 했는데. 성실하고 센스 있고, 요령 안 부리고.”
쏟아지는 칭찬에 조금 민망해져 괜히 차만 마셨다. 실장님은 말이 너무 많았다며 내게 음식을 권했다. 회 한 점을 들어 입에 넣었는데도 자리가 아주 편하지는 않아 그런지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너 키우고 싶어.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잘 되게. 제대로 한 번 안 해 볼래?”
“저야 너무 좋은 일이라…. 다시 일할 수 있으면 꼭 일하고 싶어요.”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정한이가 우리 회사 메인이잖아. 뭐 배우들 많지만, 요즘 주가로 치면 차정한 누가 이겨.”
“…네.”
“충분히 현장 뛰었으니까 팀장급 자리부터 줄게. 정한이 담당 치프 매니저 1년 하고, 그다음에 실장급 매니저로 승진. 말이 매니저지 네가 차정한이라는 배우 앞길 만드는 거야. 차정한 관련 콘텐츠 기획도 하고, 계약도 다 하고, 미팅에 출연료 협상. 다 너 통해서 진행되는 거야. 로드랑은 다르지. 잘만 하면 그다음은 총괄매니저, 이사, 우리 광고 기획 같이 하잖아. 그다음은 거기 대표도 할 수 있어. 네가 원하면 그전에 기획사 하나 차려도 되고.”
듣고 있는 말들은 내가 생각하고 나온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자리였고, 또 생각보다 훨씬 빠른 흐름이었다. 몇 년 동안 열심히 마음을 다해서 일했던 것을 여기에서도 인정받는다고 생각하니 엄청난 제안이 두렵기보다는 기뻤다.
“네가 정한이랑 일을 같이했기 때문에 또 정한이 일 주는 게 아니야. 아까도 말했지만, 차정한이 지금 우리 소속사 최고의 중심 배우고, 우리도 차정한이라는 배우한테 거는 기대가 크고, 차정한 역량 십분 발휘하게 할 인재가 필요하고. 그 인재를 내가 지금 영입하는 거야. 내부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
“네가 하고 싶은 일 자유롭게 하면서, 차정한 더 끌어올려 봐. 아낌없이 지원할 테니까. 아, 아직 유현이 네 대답도 안 들었는데 내가 너무 앞서 나갔다. 어때? 생각할 시간 많이 필요할까?”
하고 싶었다.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어쩌다 보니 시작해서 한 일이지만, 그동안 열심히 해 왔고, 그것이 양분이 되어 만들어진 그 단단한 길로 향하고 싶었다.
자유롭게 기획하고, 움직이며 바쁘게 살 수 있는 그 날들을 차정한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차정한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최고의 배우였다. 그런 배우를 맡아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건 정말 황홀한 일이었다.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거절하지 못할 만큼 달콤하고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그동안 차정한의 뒤치다꺼리를 한다면서 나를 가엽게, 또는 한심하게 본 사람들에게, 또 티를 내지는 못했지만, 나를 걱정한 가족들에게 보여주 고 싶었다. 그 시간은 절대 헛된 시간이 아니었고, 나는 내 인생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차정한의 옆에서 나도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 내가 할 수 있는, 하고 싶은 일을 했다는 것을 꼭 알려 주고 싶었다.
“…….”
차정한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 내가 가는 그 길에 차정한이 있고, 차정한이 가는 길에 내가 꼭 있어야 하는 그런 날들. 벅차오르는 마음에 눈동자가 다 뜨거워졌다. 절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최대한 분명히 실장님을 보며 소리 냈다.
“하겠습니다.”
손을 뻗어 나와 마주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았다. 웃으며 내게 손을 내미는 실장님의 손을 잡고 악수를 한 뒤에야 몸에 잔뜩 들어갔던 힘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 * *
긴장이 풀려 그런지 집에 와서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소파에 쓰러지듯 기대어 잠들었다. 몽롱한 정신으로 눈을 뜨니 집이 어두워 얼른 일어나 불을 켰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차정한에게서 온 전화가 스무 통도 넘게 있었다. 메시지도 잔뜩 와 있어서 하나씩 다 보고 나서 차정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딱 한 번 울리고 다음에 또 울리려는데 차정한의 목소리가 바로 들렸다.
- 유현아, 너 어디야? 아직 밖이야? 실장님은 잘 만났어?
걱정이 묻은 목소리로 질문을 쏟아내는 것에 웃음이 났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알 것 같아서 더 그랬다.
“집이야. 실장님 잘 뵙고 들어와서 잠들었어. 아까 너무 긴장했거든.”
- 그랬어? 실장님 만난 일은 어떻게 됐어. 일하기로 했어?
“응. 다시 일하기로 했어. 조건도 파격적이고, 칭찬도 많이 들어서 아직도 얼떨떨해.”
자세히 묻는 차정한에게 실장님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전부 다 해주었다.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차정한은 정말 잘 됐다며 몇 번이나 내게 대단하다고 말했다. 실장님에게 듣는 칭찬도 정말 좋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는 칭찬은 더 좋아서 자꾸만 기분이 붕 떠올랐다.
- 아, 실장님은 더 빨리 말해 주지. 그랬으면 같이 내려왔을 거 아냐.
“다음 주에 계약하기로 해서 더 빨리 말했어도 못 갔을걸.”
- 내가 너 붙들고 있어서 주저앉힌 거 아닌가… 그 생각 계속 들었었는데.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넌 더 잘 될 거야. 나중에 지유현 기획사 차리면 나 거기로 가야지.
아주 먼 이야기고 내가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차정한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오늘 촬영은 다 끝났어?”
- 두 씬만 더 찍으면 돼. 이제 나가야겠다.
“잠은 어디서 자?”
- 여기 촬영장 바로 옆에 작은 호텔 있더라고. 거기서. 이따 들어가서 또 전화할게.
“응. 이따 또 해.”
짧지만 그래도 차정한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비로소 하루가 제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벗지도 못하고 잠들었던 겉옷을 벗고 부엌으로 가 물을 올렸다. 라면 하나를 꺼내는데 먹자고 해 놓고 결국, 먹지 못했던 라면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물론 그 밤 라면이 아니라 차정한을 택한 건 최고의 선택이라 절대 후회하지 않지만, 그래도 앞으로 라면을 볼 때마다 그때가 생각날 것 같았다. 우리의 다정하고 틈이 하나도 없던 그 달뜬 밤이. 그래서 나는 끓는 물을 보면서도 또 그 안에 라면을 넣으면서도 자꾸만 실없이 한 번씩 웃었다. 내 기억과 이 모든 곳에 머문 차정한을 떠올리며.
오랜만에 책을 보다 자야겠다는 생각으로 보고 싶은 책 한 권을 골라 차정한이 없어 유난히 넓게 느껴지는 침대에 올랐다. 베개 두 개를 허리와 등 뒤에 대고 책을 펼치자마자 놀랍게도 진동이 울렸다. 차정한의 이름과 마주하며 책을 옆으로 두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화면으로 차정한의 얼굴이 보였다.
“늦게 끝났네.”
- 감독님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한 씬을 열 번씩은 찍었나. 들어와서 씻고 침대 올라왔어. 넌 어디 보자…. 너도 침대네. 어느 방이야? 나 없다고 또 전에 쓰던 방 간 거야?
“아니야. 우리 같이 자는 방.”
- …….
내 말에 차정한은 잠시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보고 있다가 곤란한 사람처럼 입에 손을 대었다.
“…왜 그래?”
- 넌 나한테 뭐 그런 말을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냐고 자꾸 그러는데 너야말로 어떻게 그런 말을 그렇게 예고도 없이….
“내가? 우리 같이 자는 방… 그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