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43)

“오늘 왜 이렇게… 말 안 들어? 나 죽이려고 그래?”

“…하아…. 너도 좋았어?”

“좋았냐고? 진짜 죽는 줄 알았어. 네가 물고, 아…. 말만 해도 미치겠네. 네 입으로 막 들어갔다가 나오고 하는데…. 그리고 너 지금 얼굴에 다 묻었거든.”

차정한이 손을 뻗어 내 뺨과 눈가에 묻은 것들을 닦아냈다. 그리고 고개를 기울여 입술 위를 핥았다. 나는 혀를 내밀어 그런 차정한의 혀끝을 마주 문질렀다. 가볍게 입술을 핥는 것처럼 움직이던 차정한이 미간을 구기며 그대로 깊게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숨도 못 쉴 만큼 깊어진 키스에 그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렸다.

“네 건 맛있었는데 내 건 맛없다.”

혀로 입술을 핥은 차정한이 고개를 저었다. 뭐가 내 건 맛있고, 자기 건 맛이 없다는 건지 생각하다가 정액이 머리에 떠오른 순간 그의 어깨를 밀었다.

“…미쳤나 봐.”

“내가 지금 제정신이면 그게 더 이상하지.”

씩 웃은 차정한이 그대로 성기 끝을 내 다리 사이로 대었다. 방금 분명 사정했는데 차정한의 것은 다시 단단하게 발기해 있었다. 혀가 드나들었던 아래로 그의 성기가 눌릴 때마다 허벅지 안쪽에 힘이 들어갔다가 빠졌다. 나의 모든 것이 전부 다 민감하게 차정한을 향했다.

“아흣….”

들어올 듯 말 듯 애태우던 성기 끝이 안으로 파고든 순간 빠르게 몸에 열이 돌았다. 안을 서서히 늘리며 들어오는 느낌이 너무 적나라했다. 나는 차정한의 몸을 끌어안은 채 완전히 아래가 맞물릴 때까지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차정한은 더 들어올 수 없을 만큼 안으로 완전히 들어온 뒤에야 흐트러진 숨을 내 목덜미에 내쉬며 입 맞췄다.

움직이지도 않고 들어오기만 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숨이 거칠어졌다. 어깨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자 차정한도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해 뭉그러지며 뒤섞이자마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입술이 다시 맞물렸다.

혀가 얼얼할 정도로 서로를 헤집으며 몸을 움직였다. 깊숙하게 들어온 성기가 거의 빠져나갔다가 몸 부딪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들어올 때마다 그의 혀도 내 입안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몸과 감당하기 힘들 만큼 몰아치는 쾌감이 뚝뚝 고여 성기 끝에서 떨어졌다.

“하으… 읏, 응! 아… 아!”

정신없이 입 맞추다가 또 정신없이 서로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며칠이나 떨어져 있었다고 이러는 거냐고 누군가가 보면 어이없어할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긴 시간이었다. 정말 분리 불안 같은 게 생긴 건 아닐까. 나는 차정한의 등을 겨우 끌어안으며 다시 사정했다. 내가 사정하는 순간에도 차정한은 내 깊은 자극점을 마구 눌러댔다. 너무 기분이 좋아 몸이 떨리고 눈물이 다 흘렀다. 차정한은 고개를 숙여 내 눈가에 입술을 댄 채 있는 힘껏 허리를 움직였다. 그리고 내 허벅지를 꽉 쥔 채 사정했다.

“읏…! 아…….”

“하으….”

터져 나오는 숨조차도 놓치고 싶지 않아 또 서로를 찾아 입술을 머금었다. 숨을 삼키고 또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며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웃으면 차정한이 그 웃음도 머금을 것처럼 입술을 집어삼켰다. 그러고는 만족스럽게 웃는 차정한을 보며 내가 그의 얼굴을 잡아 다시 입을 맞췄다. 흐르는 시간이 너무 아쉬워 몸이 다 저릿했다.

두 번을 더 사정한 뒤에야 늘어졌다. 내 품으로 얼굴을 파묻는 차정한의 머리를 끌어안고 엉망으로 터지는 숨을 천천히 눌렀다. 빠르게 뛰던 심장박동을 따라 내 품으로 거칠게 터지던 차정한의 숨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벌써 해가 뜬 건지 블라인드 사이로 빛이 약하게 파고들었다.

“내가 데려다줄까? 운전 힘들잖아.”

“어떻게 오게. 차도 없는데.”

“택시 타고 와도 되고…. 버스 타도 되고.”

“힘들잖아.”

“너도 힘들잖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가면 바로 촬영할 텐데.”

“난 힘 안 들어. 너 봐서. 그리고 다시 일하면 같이 다닐 텐데 그전에 푹 쉬어. 나 원탑 자리 지키려면 스케줄 빡세게 돌아야 하거든. 나 바쁘면 너도 같이 지옥문 열리는 거야.”

다른 사람이 자기를 스스로 원탑이라고 하면 잘난체하는 것처럼 느껴질 텐데 차정한이 그런 말을 하면 그냥 맞는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차정한이 이삼십대 젊은 배우 중 원탑이라는 말을 누가 반박할 수 있을까. 나는 차정한이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서 더 좋았다. 그 자리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또 앞으로 나아가니까. 내가 그런 원탑 배우와 함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게 너무나 좋았다.

“지옥이면 어때. 네가 있는데.”

“…넌 무슨 말도 그렇게 네 얼굴처럼 해.”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차정한이 몸을 올려 내 뺨에 깊게 입 맞추며 속삭였다.

“예뻐 죽겠네.”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말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나를 보는 차정한의 눈빛이 너무 다정하고 따뜻해서, 또 그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우리 매니저님 첫 일은 그럼 제작발표회려나?”

“음…. 아마도?”

“은근 긴장되네. 기자들 앞에 서는 건 아무렇지도 않은데 네가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떨린다.”

“나도 떨려. 그 좋은 기획사 일 하면 좋지만, 우리가 이렇게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거든.”

“나중에 기획사 차리면 나 데려가.”

“꼭 와 줘.”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조금은 먼 미래 이야기에도 그저 좋았다. 예상한 것처럼 갈 수도 있고, 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지만, 우리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달라져도 그 안에서 우리의 방향은 결코,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리고 그 방향의 이름이 사랑이라는 것도.

#88

?

?

기획사에 다시 돌아가 처음으로 마주한 일은 예상했던 것처럼 차정한의 드라마 제작발표회였다. 의상부터 줄줄이 잡힌 인터뷰, 그리고 디테일하게 챙겨야 할 부분들을 체크하고 또 체크했다. 전보다 해야 할 일, 신경 써야 할 일이 비교도 못 할 만큼 늘었고, 몇 배로 더 바빠졌지만, 움직일 때마다, 하나씩 일이 진행될 때마다 뿌듯함이 너무 커서 즐거웠다.

직급이 달라진 탓에 동윤 형과 불편해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형은 내가 돌아와 같이 일한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며 축하해 주셨다. 걱정했던 일이 하나씩 무사히 풀릴 때마다 온몸을 휘감고 있던 긴장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너무 바쁜 거 아니야? 무슨 전화를 그렇게 계속해.”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헤어와 메이크업을 다 받은 차정한이 보였다. 명품 브랜드에서 제공한 슈트와 헤어 스타일이 너무 잘 어울려 피곤함이 다 가셨다.

“광고 미팅 전화도 왔고, 이따 끝나고 인터뷰 얘기도 했고…. 인터뷰 요청 들어오는 것만 지금 벌써 스무 건이 넘어. 잡지, 신문, 각종 프로그램에 뉴스도 들어왔어.”

“뉴스?”

“그 문화 코너 있잖아.”

“아, 머리 비면 못 나간다는 거기.”

“응. 생방송이고, 꼭 나왔으면 좋겠다고 하시는데 나도 좋은 기회인 것 같아. 드라마 홍보도 할 수 있고, 거기 나가는 사람들 다 이미지 좋잖아. 거기 대열에 합류하는 것도 의미 있고.”

“나도 그건 좋아. 전에도 제안 왔는데 스케줄 안 맞아서 못하지 않았어?”

“맞아. 너 해외 촬영이랑 겹쳐서.”

“이번에 하지 뭐.”

“미팅 잡을게.”

“네, 매니저님.”

차정한이 내 뺨에 빠르게 입 맞추고 떨어졌다. 순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놀라 고개를 돌리니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차정한이 씩 웃었다.

“…미쳤나 봐. 누가 봐.”

“보면 뭐. 매니저랑 뽀뽀 좀 할 수도 있지.”

“…없다고 봅니다만.”

“죄송합니다, 매니저님.”

깍듯하게 고개 숙여 사과한 차정한이 또 웃었다. 저 얼굴에는 당해낼 수가 없어 오늘도 빠르게 차정한을 용서했다.

“오늘 다 끝나면 몇 시나 될까. 마지막 인터뷰가 몇 시랬지?”

“여덟 시.”

“끝나면 열 시나 되겠네. 집에 가면 거의 열두 시 될 거고.”

시간을 체크한 차정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옆으로 앉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내 손가락을 매만졌다.

“내일은 몇 시에 나가면 돼?”

“열 시.”

“그럼 뭐 시간 충분하네.”

손가락 사이를 야릇하게 만지는 차정한을 보다가 그 손등을 아프지 않게 때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마침 커피를 마시며 올라오는 동윤 형과 눈이 마주쳤다. 동윤 형이 풀 세팅을 한 차정한을 보며 감탄했다.

“오늘 진짜 죽인다. 화면 잘 받겠다. 난 정한이 얘 얼굴 볼 때마다 내 일에 자부심 느껴. 이 배우가 내 배우다. 내가 차정한 매니저다.”

과장된 리액션에 웃음이 터졌다. 소리 내어 웃은 차정한이 헤어샵 직원들에게 친절하게 인사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문 앞에 바로 선 밴에 출장 나가는 샵 직원과 함께 올랐다. 차정한은 제작발표회가 열리는 호텔로 가는 동안 내내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게 차에 있는 담요 밑으로 내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슬쩍 손을 빼려고도 하고, 눈치를 주기도 했지만, 차정한은 그럴수록 내 손가락 사이를 더 깊게 파고들어 꽉 쥐었다. 종일 같이 다니기는 하지만, 워낙 일이 바쁘기도 하고, 보는 눈이 많아 이렇게 이동할 때가 아니면 닿을 수 있는 시간이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담요 밑에 숨은 우리의 관계가 들킬까 아직은 조심스러웠다. 물론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건 나뿐이었다.

‘너도 조심하는데 나도 조심하면 그게 남이지.’

‘그게 왜 남이야. 집에서 둘이 있을 때 실컷… 하면 되잖아.’

‘뭘 하는데. 구체적으로 말을 해 줘야 알지.’

‘…손도 잡고, 안기도 하고, 키스도… 하고.’

‘그게 다야?’

‘얼른 자, 이제. 지금 자야 내일 컨디션 좋아.’

‘그게 다가 아닐 텐데. 지유현 머리 안에 지금 하나 더 있는데? 다 보여. 어, 얼굴 빨개진다. 진짜 빨개지네.’

중요한 날이니 컨디션과 피부를 위해 빨리 자라는 내 말에도 차정한은 어제 기어이 원하는 답을 들은 뒤에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침대에 올랐다. 차정한의 귓가에 둘이 있을 때 섹스도 실컷 하자는 말을 소리 내어 말하고 한참이나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차정한은 그런 내 머리칼을 매만지고 귓가에 입술을 묻은 채 다정하고 야릇한 말들을 속삭였다. 키스하고 싶으니 얼른 봐 달라는 낮은 목소리에는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입술을 겹쳤다. 내일을 떠올려도 같은 순간을 공유할 것이라는 걸 알기에 그저 좋았다.

“기분 어때? 떨려?”

“조금. 우리 다시 같이하는 공식적인 첫 스케줄이잖아. 팬들도 좋아하던데. 너 다시 같이 다닌다고.”

“아…. 공계에 댓글 달린 거 봤어.”

차정한의 사진 한쪽에 내가 흐릿하게 찍힌 걸 본 팬들이 다시 일하게 된 걸 축하한다며 폭죽 이모티콘과 함께 댓글을 많이 달아놔서 참 신기했다. 정보가 빠른 것도 신기하고, 또 다수가 나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해 주는 게 좋아서 몇 번이나 댓글들을 보고 또 봤었다. 그중에서 올해 만우절도 걱정 없다는 댓글에는 정말 한참을 실없이 웃었다. 또 생각하니 재밌어 웃자 차정한이 그런 나를 바라보았다.

“팬들이 올해 만우절 이벤트 걱정했었는데 나 돌아와서 다행이래.”

“뭐야. 또 네 사진 백 장 푸는 거 아냐?”

“그렇게 있지도 않을걸.”

“가만 보면 내 팬 아니라 네 팬이라니까.”

“내가 팬이 어디 있어.”

“왜 없어. 듣는 팬 서운하게.”

“내 팬이었어?”

차정한이 고개를 젓고 소리 없이 입만 열어 소리를 그려냈다. 애인이지. 네 글자를 정확하게 알아본 나도 참 나였다. 담요 속에서 더 손가락을 단단히 얽은 차정한이 기분 좋게 웃었다. 그 웃음을 따라 웃자 기분이 더 화창하게 피어났다.

제작발표회가 열리는 스텔라호텔 그랜드볼룸 홀은 차정한의 팬클럽이 보낸 화환으로 가득했다. 그 한가운데에는 쌀이 쌓여 있고, 차정한 팬클럽인 ‘다정한’이 쌀 30톤을 기부한다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그동안 기부하는 걸 많이 보기는 했지만, 30톤이라니 솔직히 어느 정도로 많은 건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소속사에서 미리 나와 있던 포토그래퍼와 직원이 와서 인증 샷을 여러 장 찍었다. 차정한은 각 화환 앞에 서서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했다. 오늘은 머리도 올리고 평소 팬들이 좋아하는 블랙 슈트를 입었으니 아마 ‘작정한’이라고 좋아할 것 같았다.

기자들과 연예프로그램 리포터들까지 차정한에게 다가와 셔터를 누르고, 마이크를 들이댔다. 동윤 형과 나는 얼른 경호원과 함께 차정한을 보호해 대기실로 움직였다. 메인 홀 옆에 있는 조금 작은 홀로 들어가니 먼저 온 배우들이 차정한을 맞았다.

“저기 안 가고 너랑 있으면 안 돼?”

배우들에게 인사한 차정한이 내게만 들리게 슬쩍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얼른 그런 차정한의 등을 배우들이 있는 쪽으로 살짝 밀었다.

“차갑다, 차가워.”

삐진 것처럼 입을 한 번 삐죽한 차정한이 금세 얼굴을 풀며 배우들 사이로 가 앉았다. 그런 차정한을 보다가 동윤 형과 스케줄을 다시 확인하고, 오가는 스태프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전 세계로 생중계될 제작발표회가 30분 후면 시작된다고 생각하니 내가 다 떨려서 속이 울렁였다.

“제발회 시작으로 이제 엄청 바빠지겠네.”

“네. 광고도 그렇고 인터뷰 요청도 그렇고… 난리도 아니에요.”

“나 진짜 걱정했거든. 유현 씨 안 오면 그 누구냐. 최민정 매니저 임시로라도 붙는다고 했거든. 근데 나 최 매니저님이랑 안 좋잖아.”

“아…. 아직 안 푸셨어요?”

“풀고 말고 할 게 있나. 스타일이 정반대라 안 맞는 거지. 그래서 같이 현주승 맡다가 내가 차정한으로 온 거 아냐. 심각하게 퇴사할까 고민하던 차에 진짜 정한이가 내 동아줄이었지. 결과적으로도 현주승은 사고 치고 망하고, 차정한은 원탑 됐잖아. 난 그래서 유현 씨 다시 와서 너무 좋아. 직급 높여 와서 더 좋아. 갑질 안 하는 상사 만나기가 어디 쉽나.”

“상사는요, 무슨.”

“제발 더 올라가서 기획사 하나 차려. 그리고 나 데려가라.”

일한 지 며칠 되지 않아 그런지 동윤 형이 이렇게 말할 때마다 솔직히 조금 민망하기도 하고 어떻게 답해야 할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말 한마디에 감정이 너무나도 쉽게 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직급이나 미래에 대해서는 깊게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늘 이런 말이 나오면 그냥 웃어넘겼다. 다행히도 바쁜 직업이라 한 번 주제가 흘러가면 쉽게 계속 이어지지 않아 좋았다.

생중계 20분 전 배우들이 모두 제작발표회가 열리는 홀 안으로 들어가 기자들이 있는 쪽 앞으로 놓인 원형 테이블에 착석했다. 쉴 새 없이 플래시가 터지고, 시선이 집중됐다. 대기실에서 자유롭게 있던 배우들은 대기실에서처럼 길게 대화하지 않고 한마디씩 짤막한 이야기를 나눴다.

제작발표회나 각종 행사에서 유명한 진행자가 나와 마이크를 점검하고, 자리에 섰다. 홀 안에 불이 꺼지고 가운데 크게 자리한 화면에서 드라마 시크릿 티저가 시작됐다.

공개된 티저들은 봤지만, 시크릿 티저는 나도 처음 보는 거라 조금도 눈을 떼지 못했다. 분명히 멋있게 나올 건 알고 있었지만, 음악과 효과, 그리고 차정한의 날 것에 가까운 야성미가 압도적이었다. 극으로 몰아가는 날카로운 현악기 소리가 점점 빨라지며 장면이 움직였다. 총성과 함께 화면에 보이던 총구가 내려가고, 그 자리를 차정한의 얼굴이 채웠다.

다 잃은 것 같은 얼굴이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하며 입꼬리가 올라가는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드라마 타이틀이 화면에 박혔다. 그제야 내내 참고 있던 숨이 터져 나왔다. 너무 좋아서 심장이 아플 만큼 빠르게 뛰었다.

“와…. 저 티저가 대박이네. 역대급 아니야? 난리 나겠다. 어우, 소름 끼쳐. 마지막에 눈 봤어? 슬픈 척하다가 쓱 변하면서 웃는 거?”

“…네. 거기 진짜 좋아요. 이따 하이라이트 나올 텐데 저 막 떨려요, 형.”

“나도. 아직도 소름 끼쳐. 어, 사진 찍나 보다.”

진행자의 안내에 따라 차정한이 먼저 단상 위로 올라갔다. 차정한이 움직이는 모든 순간을 담아내겠다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셔터음이 온 회장을 가득 채웠다. 차정한이 서서 웃기도 하고, 손을 들어 인사하기도 하고, 요청에 따라 손가락 하트를 만들기도 하자 셔터 소리는 더욱 거세졌다.

다른 배우들도 올라 사진을 찍고, 모두 위로 올라 단체 사진을 찍은 뒤에 무대 위에 준비된 의자로 앉았다. 하이라이트 영상부터 보고 이야기를 나누겠다는 진행자의 말과 함께 다시 홀이 어두워졌다.

5분 남짓한 하이라이트 영상이 나가는 동안 정말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드라마의 색감이나 음악, 그리고 배우들의 캐릭터와 연기까지 꼭 영화 같았다. 떨려서 두 손을 꽉 잡고 있었더니 나중에는 손이 다 저려 아플 지경이었다. 저 드라마가 나오면 나는 앞으로 몇 번이나 돌려보게 될까. 정말 백 번도 넘게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불이 켜진 무대 위 가장 반짝이는 나의 차정한을 바라보았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 진행자의 질문에 미소 짓는 여유로운 모습부터 캐릭터 설명을 할 때 보이는 진지한 모습까지 전부 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눈에 담았다.

조금도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한 번씩 배우 차정한을 보며 나 혼자 느낀 거리감이 사라졌다. 그 거리는 내가 아니라 차정한이 좁힌 것이었다. 바라만 보고 다가가지 못한 그 길로 차정한이 성큼성큼 다가와 내게 먼저 닿았다. 나는 멀리 있어도 늘 내게 닿아 있는 것 같은 차정한을 보며 긴장감에 잔뜩 몸에 들어간 힘을 풀어냈다. 그제야 편안한 긴 숨이 흘렀다.

* * *

연이은 인터뷰를 끝내고 집으로 들어와 씻지도 않고 둘이 녹초가 되어 소파 위로 쓰러졌다. 차정한은 바깥쪽에 누운 내가 떨어지지 않도록 온몸으로 나를 끌어안고 내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

“고생했어, 오늘. 힘들지.”

“네가 더 힘들지. 넌 제발회에 인터뷰에…. 계속 말했잖아. 말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난 너랑 다녀서 하나도 안 힘들어. 아, 힘드네 하다가 유현이 너 딱 보면 힘든 건 생각 안 나고, 네 생각만 나.”

“내 생각 어떤 거?”

“지유현은 뭘 먹어서 저렇게 예쁠까.”

“너랑 똑같은 거 먹는데.”

“내가 안 먹는 거 하나 더 먹기는 하잖아.”

차정한의 품에 편하게 안겨 얼굴을 묻은 채 곰곰이 생각했다. 차정한은 안 먹고 나는 먹는 게 뭘까. 같이 스케줄을 하면서 먹는 건 거의 다 통일이 됐는데 도대체 뭘 가지고 저렇게 말하는 건가 궁금했다. 나는 품에서 얼굴을 떼고 몸을 조금 올려 차정한과 마주 보았다.

“그게 뭔데?”

“있어. 너만 먹는 거. 잘 생각해 봐. 어떻게 그걸 내 입으로 말해. 말하면 너 또 넌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그럴걸.”

“…이상한 거야?”

“와, 내가 이상한 말을 언제 그렇게 했다고.”

“…야한 거?”

“…와. 지유현 야한 생각 한다. 눈 봐. 완전 야해.”

자꾸 장난치는 차정한의 팔을 힘이 잘 안 들어가는 손으로 때렸다. 차정한은 맞으면서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소리 내어 웃고는 내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다.

“…그래서 나만 먹는 게 뭐야?”

“나한테 나오는 거겠지.”

“너한테 나오는…….”

되묻다가 무슨 말인지 알아차렸다.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대로 굳은 나를 보며 차정한이 이제 몸까지 떨며 웃었다. 아프지 않을 걸 알면서도 몇 대를 때리다가 결국, 웃음에 말려들어 같이 웃어 버렸다. 틀린 말도 아니라 뭐라 반박할 말도 사실 없었다.

“어, 톡 왔어. 동윤 형. 진짜 정직하게 저장했다. 난 뭐라고 저장했어? 막 차정한 이런 거 아니지?”

나는 동윤 형이 물은 것에 간단히 답하고 ‘정한’이라고 저장된 이름을 보여 주었다. 그걸 본 차정한이 기가 막힌다는 듯 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애인인데 저장 이름이 정한이가 뭐야. 바꾸자.”

“뭐로?”

“내 사랑?”

“…그건 좀.”

“우리 자기?”

“…미쳤나 봐.”

“여보?”

“…….”

“어, 대답 없네. 여보가 맘에 드는 거야? 우리 유현이 취향 꽤 하드하네.”

“…할 말이 없어서 그래. 너무 어이가 없어서.”

차정한에게 들을 거라고는 예상도 못 한 말을 한꺼번에 들어서 그런지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차정한은 내가 어지러워하는 사이에 수정 버튼을 누르고 이름을 바꿨다. 정말 여보라고 바꾼 건 아닌가 싶어 화면을 보자 정한이라는 이름 뒤에 붙은 하트가 보였다. 정말 그 이모티콘이 효과가 있는 건지 하트를 보자마자 차정한이 너무 더 사랑스러워졌다. 나는 얼른 차정한의 뺨에 입 맞췄다.

“넌 나 뭐라고 저장했어?”

“내 유현이 하트.”

“…정말?”

고개를 끄덕인 차정한이 휴대폰을 꺼내 직접 보여 주었다. 정말 하트까지 찍힌 걸 보자 사랑이 몽글몽글 뭉쳤다. 나는 다시 차정한의 품으로 얼굴을 파묻고,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차정한이 그런 내 귀에 대고 사랑을 속삭였다. 행복했다. 이 모든 게.

“촬영만 끝나 봐. 집에 처박혀서 일주일 동안 안 나가고 너랑 침대에만 있어야지. 유현이 너도 못 나가는 거 알지?”

“일주일?”

“너무 긴가?”

“아니, 짧아.”

“…….”

“열흘은 있어야지.”

조용해서 고개를 떼고 얼굴을 보니 차정한이 몹시 진지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달아오를 것 같은 그 얼굴을 보며 슬쩍 몸을 뒤로 떼어냈다.

“일단 나 먼저 씻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아래로 휙 움직였다. 순식간에 내 위로 올라온 차정한이 씩 웃으며 내려왔다. 몸 위를 뒤덮는 기분 좋은 무게감에 내일이 아니라 지금이 보였다. 지금, 내 눈 앞의 차정한이.

“이따 같이 씻어.”

“…응.”

나는 내 목 위로 닿아 간지러운 차정한의 넥타이를 쥐고 살짝 당겼다. 내가 당긴 것보다 훨씬 더 가깝게 얼굴을 내린 차정한이 코끝을 살살대고 문지르다가 쪽 소리가 나게 몇 번이나 입 맞췄다. 맞물릴 것처럼 하다가 떼고, 또 파고들 것처럼 하다가 떼는 입술에 애가 타 결국, 먼저 그의 얼굴을 쥐고 입술을 깊게 마주 물었다. 차정한이 그대로 내 뺨을 그러쥐며 깊게 파고들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급했고,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걱정보다는 행복이, 내일보다는 지금, 이 순간이 더 크게 우리를 뒤덮었다. 나는 우리를 감싼 가장 따뜻하고 달콤한 순간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사랑이니까. 모든 순간을 채워 영원에 닿을 사랑이니까.

* * *

차정한이 온다는 소식에 방송국 사람들이 전부 몰려들었다. 여기저기에서 같이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며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동윤 형이 남는 시간에 차례대로 사람들과 사진을 찍어 주었다. 차정한과 사진을 찍거나 악수를 하고 돌아가는 사람들 얼굴이 전부 행복해 보여 좋았다.

시청률이 좋은 메인 시간 뉴스의 한 코너인 ‘문화의 시선’에 생방송으로 출연한다는 건 정말 큰 의미가 있었다. 전에 차정한이 말했던 것처럼 유명하다고 아무나 나갈 수 없고, 전반적으로 지적이고 박학다식한 이미지로 알려진 사람들이 나오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차정한이 두 번이나 초대를 받았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저번 초대에는 스케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응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다시 초대를 받아 나갈 수 있어 다행이었다.

진행되던 뉴스 1부가 끝나고, 광고가 나가는 사이 차정한이 마지막으로 얼굴과 머리를 만진 뒤에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진행하던 앵커와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은 차정한을 보니 내가 더 떨려서 가만히 서 있기가 힘들었다. 차가워진 손끝을 마주 쥐고 혹시라도 방해될까 싶어 카메라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았다.

인터뷰는 생각보다 굉장히 편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생방송이고 또 평판이 굉장히 좋은 뉴스 속 코너라 걱정했는데 진행하는 앵커와 차정한의 합이 굉장히 잘 맞았다. 말이 겹치지도 않고, 서로를 경청하며 안정적으로 이어지는 인터뷰에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