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우연한 것에서 비롯된 (2)
개강 직후부터 쏟아진 과제가 쌓여서 지금은 엄청나게 불어났다. 뭘 우선으로 해야 하는지 버들이 신중하게 제 일정을 정리했다. 아침, 저녁으로 기온이 쌀쌀했지만 불어오는 바람엔 훈기가 감돌았다. 강의실, 식당, 도서관 등 캠퍼스는 어딜 가든지 활기를 띠었다.
하루 일과를 꽉 채우고 지친 기색으로 버들이 터덜터덜 방으로 들어왔다. 샤워를 끝낸 뒤 책상 앞에 앉아 몇 권의 책을 뒤적거리거나 스케치를 하고 있는 사이 시간은 벌써 자정에 가까워졌다. 버석하게 마른 제 머리카락을 버들이 손으로 빗어 내렸다. 태어났을 때부터 곱실거렸던 머리가 헤집어질수록 풍만하게 부푼다. 버들이 불을 끄고, 침대 속에 파고들었다. 차차 시야가 어둠에 적응되어 어렴풋하게 천장이 보인다. 버들의 눈동자가 말똥말똥하다. 오늘은 피곤해서 곧바로 잠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벽을 향해 버들이 몸을 뒤틀었다. 이런 식으로 잠을 설친 지 꼬박 일주일을 채웠다. 그리고 입맛을 잃었다.
반쯤 열어 뒀던 창문을 닫는단 걸 깜박했다. 차라리 잘됐다. 이불을 끌어안던 버들이 너무 뛰어 대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청량하면서 쌀쌀한 밤공기가 코끝을 파고든다.
「유버들 씨.」
기분이 멍해진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길고 고왔던 손가락이. 사나워 보였던 눈매가. 예뻤던 속눈썹이……. 황 대표의 여럿 모습들이 비눗방울처럼 주변을 둥둥 떠다니는 거 같다.
돌연 침대에 걸터앉은 버들이 서랍을 열었다. 조심히 손에 쥔 건 황 대표에게서 받은 명함이었다. 불을 켜지 않아도 또렷하게 보이는 이름 석 자를 소리 내어 뱉어 본 순간 손끝이 다 간지러워졌다.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도 아닌데 괜스레 망설여지는 이유를 모르겠다. 어쩌지. 갈팡질팡하던 버들이 드디어 고민을 끝내고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하나씩 꾹꾹 눌렀다. 숫자를 전부 바르게 찍은 것인지 명함과 여러 번 대조해 가며 꼼꼼히 확인했다. 황정우 대표님. 저장했다가 곧바로 수정 버튼을 찾았다. 그리고 뒤의 대표님, 세 글자는 삭제했다. 황정우. 이름만 남게 됐다. 무슨 큰일이라도 해낸 것처럼 온몸의 힘이 쭉 빠진 기분에 버들이 벌러덩 드러누웠다.
* * *
“안 간다니까.”
“아, 와라. 응?”
과는 다르나 1학년 때 우연히 같은 교양 수업을 듣게 된 이후로 버들이 유일하게 말을 터놓고 지내는 동기인 정민이 불쑥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버들의 콧잔등에 주름이 졌다.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버들의 가방끈을 붙잡아 휙휙 흔들며 정민이 본격적으로 조르기 시작했다.
“가방에 돌 넣고 다녀?”
“책 넣고 다닌다.”
“그걸 몰라서 물어봤겠어? 안 무거워?”
“나 바빠.”
아직 두 개의 수업이 더 남아 있었다.
“모임에 나와라.”
“네 친구들이랑 노는 모임 아니야?”
“어차피 동갑이니까 내 친구들이 네 친구들이 될 수도 있는 거지.”
“모임에서 뭐 하는데.”
별로 궁금하진 않았지만 물어본 말이었다.
“인생에 대해서 고민도 나누고. 응?”
술 마신다는 소리를 희한하게 한다. 그럴 시간에 차라리 빨리 집에 가서 쉬는 게 낫다.
“좋은 말 할 때 이거 놔.”
버들의 으름장에 정민이 피식거렸다. 워낙에 하얗고 순한 인상인지라 버들이 표정을 구겨 봤자 타격이랄 게 없었다.
“나 수업 있거든?”
“여기서 너만 학생이야? 나도 수업 있어.”
“그럼 각자 갈 길 가면 되잖아.”
뭐가 어째? 눈을 부릅뜬 정민이 버들을 향해 섭섭한 자기 마음을 쏟아 내려던 차였다.
“정민아.”
갑자기 뒤에서 아는 척하며 다가온 선배에게 정민이 꾸벅, 인사했다.
“오늘도 훈련?”
“예. 뭐…….”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정민이 말끝을 늘렸다. 선배와 이야기하느라 방심한 찰거머리를 드디어 내팽개친 버들이 부랴부랴 본관으로 향했다. 우려와 달리 뒤에서 쫓아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한 번도 안 쉬고 걸은 보람이 있다. 수업까지 약 7분 정도가 남은 상태다.
자판기에서 뽑아 든 생수가 손바닥을 시원하게 적신다. 버들이 건물 뒤쪽 벤치에 가서 앉았다. 학교 내 흡연할 수 있는 장소 중 여기가 가장 인적이 드물어서 좋다. 가방 안쪽에서 꺼낸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켜는 버들의 모습이 능숙하다. 붉은 입술을 비집고 담배 연기가 여유롭게 흘러나왔다. 반쯤 감긴 눈꺼풀을 버들이 느릿하게 깜박였다. 부는 바람에 섞인 연분홍이 어릿어릿하다. 작년보다 벚꽃의 개화 시기가 앞당겨졌다고 그랬다. 그새 날씨가 더워져 간다.
수업이 끝나는 대로 버들이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손을 씻고선 제 방보다 더 먼저 찾아간 게 겨울의 서재였다. 데스크는 늘 그렇듯 서류며, 파일이며, 반지며, 시계며, 저금통이며, 온갖 잡동사니들로 난장판이었다. 그중에서 뭔가를 고른 버들이 제 방으로 옮겨 갔다.
-내 새끼.
신호음이 울린 지 얼마 안 돼서 겨울이 전화를 받았다. 침대에 걸터앉은 버들이 겨울의 서재에서 들고 나온 만년필로 제 허벅지를 꾹꾹 찔렀다.
“형. 뭐 해?”
-일하지.
“그럼 회사겠네?”
자꾸 머뭇거리게 된다.
-응. 형은 회사지. 넌 어디야?
“난 학교 갔다가 이제 막 집에 왔어.”
잠시 숨을 골랐다.
“있잖아. 형.”
-응?
“내가 회사로 갈까?”
-갑자기?
“서재 보니까 형 결재할 때 쓰는 만년필 있던데?”
-잠깐만.
핸드폰을 타고 겨울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이 순간 달아올랐다. 누구 목소리인지 파악하기 위해 바짝 집중한 버들의 모습이 꼭 핸드폰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다. 그러나 금세 기대가 식고 김이 팍 샜다. 목소리의 정체는 비서였다.
-응. 버들아. 만년필이 뭐라고?
“만년필, 내가 회사로 가져다줄까?”
-아니야. 필요 없어.
“왜? 가져다줄게.”
-됐어.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니야.
전에는 이거 가져다 달라, 저거 가져다 달라 잘도 시키더니 필요할 땐 제 마음도 몰라주는 형이 야속하다. 한참 통화 후 겨우 회사에 와도 좋단 심부름 허락이 떨어졌다. 애를 먹었지만 어찌됐건 결과가 좋으니 됐다.
“이상한가?”
거울 앞에 선 버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럿 옷들을 몸에 대보느라 드레스 룸이 금방 엉망이 됐다. 회사에 갔다가 혹시나 황 대표를 만날 수도 있는 거니까 마음이 초조해진다. 고민을 거듭하던 버들이 가장 나은 것 같단 판단으로 청재킷을 걸쳤다. 맨 처음 골랐던 옷이었다.
한 고비를 건너니 새로운 고비가 나타났다. 청재킷 소매를 어쩌지? 걷는 게 낫나? 내리는 게 낫나? 끙끙거리던 버들이 삼십 분 만에 소매는 내리기로 결정했다. 바닥에 너저분하게 어질러진 옷가지들을 한데 뭉쳐 구석으로 몰아 놓았다. 지금은 옷 정리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 뭐로 해. 버들은 어차피 신발 신으면 보이지도 않을 양말을 어떤 색으로 신을지 한참이나 머리를 굴렸다.
빗을 찾아 버들이 거울 앞에 섰다. 머리를 빗으면 빗을수록 점점 인상이 찌푸려진다. 어느 방향으로 빗어 넘겨도 꼬불꼬불 웃기는 모양새다. 머리숱까지 많다 보니 제어가 잘 되지 않는다. 계속 빗질을 하고 있던 통에 팔이 다 아프다. 머리는, 그냥 포기다.
버들이 팔을 내리고 바른 자세를 취했다. 기다란 속눈썹을 깜박거리며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바삐 움직였던 탓에 버들의 귓가에 체온이 올라 조금 발개졌다. ……이상하네. 혼잣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못나 보이지? 들인 시간에 비해 만족 못한 버들이 부루퉁하게 입술을 삐죽거리며 돌아섰다.
무릎 꿇고 앉아 서랍장 깊숙한 곳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혹시나 다른 사람이 만질까 봐 꽁꽁 감춰 두고 있던 황 대표의 머플러를 버들이 꺼내 들었다. 지워 보려 애를 썼던 진흙 자국은 완전히 물들어 버려 하나의 무늬처럼 남게 됐다. 머플러에 코를 폭 파묻은 버들이 최대한 깊숙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 ……냄새 좋아. 이게 황 대표님이 쓰는 향수 냄새일까?
보고 싶다.
* * *
황 대표를 만나지 못한 지 거의 한 달 가까이 됐다. 개나리와 철쭉으로 울긋불긋 물들었던 봄이 유유히 지나간다. 버들의 속이 바짝 탔다. 일부러 심부름을 만들어 회사에 찾아가는 목적은 오직 하나였다. 황 대표가 보고 싶으니까. 그런데 회사에서 저를 맞아 주는 건 번번이 제 형뿐이었다. 시무룩한 버들의 옆에서 겨울은 왜 이렇게 형을 자주 보고 싶어 하냐면서 호들갑을 떨어 댔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비서가 내온 쿠키 끝을 분지르자 가루가 흩날렸다. 손가락을 비벼 털던 버들이 지나가는 말투로 꾸며 물었다.
“다른 사장 형은 어디에 있어?”
버들의 목소리가 작았다. 황 대표의 안부를 겨우 물어봤지만, 못 들었는지 겨울은 오로지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버들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아마 여섯 형제들이 물에 빠지면 겨울의 주둥이가 가장 높이 뜰 것이다. 가뜩이나 입맛이 없는데 겨울에게 잡혀 저녁까지 먹고 집으로 돌아온 버들의 어깨가 축 처져 있다.
소득 없이 또 한 번의 밤이 깊어 간다.
「유버들 씨.」
반대쪽으로 돌아눕던 버들이 베개 아래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번호를 저장하기 잘했다. 메신저에 들어가니 자동으로 뜬 친구 목록 중에 황 대표의 프로필이 새로 생겼다. 크게 화면을 확대해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그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보고 또 보고.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다.
황 대표의 프로필을 채우고 있는 사진은 모래사장이 광활하게 펼쳐진 바닷가였다. 여기가 어딜까? 비스듬한 각도가 운치까지 있다. 직접 찍으신 거겠지? 여기는 언제 갔다 오신 걸까? 풀리지 않은 궁금증이 차곡차곡 쌓여 간다. 그때였다. 벌컥 문이 열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버들이 벌떡 일어났다.
“내 새끼.”
“아. 뭐야. 형. 지금 집에 들어와?”
저녁을 먹인 뒤 버들을 집에 데려다주고 나서 겨울은 다른 스케줄 때문에 차를 돌려야 했다. 버들이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한 시다. 불을 켠 뒤 겨울이 비틀거리며 버들의 침대로 다가갔다. 아. 버들이 인상을 쓰며 코를 붙잡았다. 꼬부랑꼬부랑 혓바닥이 굴러갔을 때부터 알아봤다. 술독에 빠졌다가 나왔는지 겨울이 다가올수록 독한 술 냄새가 진동을 한다. 정장 재킷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겨울이 버들의 침대에 엎드렸다. 진짜 미쳤나 봐. 버들이 그런 겨울의 등을 퍽퍽 내려쳤다. 아프지도 않은지 겨울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
“왜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와?”
“우리가 남이야, 새끼야? 피를 진하게 나눈 사이에.”
꿍얼거리면서도 버들이 겨울을 위해 한쪽으로 비켜 더 넓게 자리를 내주었다.
“형은 진짜 언제 철들 거야?”
“……내일.”
“내일 되면 철들 수 있어?”
“응.”
“진짜?”
“그렇다니까.”
두 형제가 헛소리를 정답게 주고받았다.
“가서 씻고 빨리 자.”
“여기서 자면 안 돼?”
“형 방에 가서 자.”
“데려다줘.”
“유 회장님 부를 거야.”
“새끼가. 치사하게.”
그 찰나 잠들었는지 겨울이 잠시 잠잠했다.
“버들아.”
얼마 지나지 않아 꽉 잠긴 목소리로 겨울이 말을 걸었다.
“버들아. 왜 대답 안 해.”
“왜. 말해.”
“형. 물.”
“아. 귀찮아.”
투덜투덜, 잔소리를 하면서도 버들이 제 형을 위해 물을 떠다 줬다. 물 한 컵을 금방 비운 겨울이 다시 드러누웠다. 빳빳하게 잘 정돈되어 있던 침대 시트가 잔뜩 구겨져 버렸다. 내가 못 살겠다, 진짜. 한참 겨울을 노려보다가 버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핸드폰 충전기와 핸드폰, 베개를 챙겼다. 어차피 방은 많다.
“버들아.”
“또 왜?”
귀신같이. 문을 나가기 직전 겨울이 버들을 불러 세웠다.
“형. 핸드폰 어디에 있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빨리 찾아 줘.”
아. 진짜.
“형, 바지 주머니에 없어?”
“없어.”
베개를 내려놓고 버들이 침대 위로 한쪽 무릎을 올렸다. 겨울의 바지 주머니 양쪽을 톡톡 건드려 봤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이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정장 재킷을 주워 들었다. 무게부터가 묵직하다. 자. 찾은 핸드폰을 버들이 겨울에게 내밀었다. 졸리면 빨리 자든가 하지 뭐 하는 거야. 버들이 들으란 듯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뜨이지 않는 눈을 억지로 떠 겨울이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최신 통화 목록에 뜬 이름을 그대로 눌렀다.
“야. 황정우.”
막 껐던 불을 버들이 다시 켰다. 겨울이 누워 있는 제 침대로 빠르게 다가가선 한쪽 귀퉁이에 얌전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너 씨. 곧장 집에 가라.”
통화는 짧았다. 혹시나 핸드폰을 타고 들려올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진 않을까, 기대하기도 전이었다. 허무해서 맥이 쭉 빠진다. 미련 없단 듯 저 멀리 던져 버린 겨울의 핸드폰을 버들이 소중하게 주워 왔다. 슬쩍 바라본 겨울은 어느새 두 눈이 꾹 감겨 있다.
“형.”
“……응.”
“술, 황 대표님이랑 마셨어?”
“응.”
그렇구나.
“…….”
“…….”
둘 다 입을 다물자 사방이 고요해졌다. 그러길 잠깐, 버들이 겨울의 배에 손을 올리고 흔들었다.
“……형. 자?”
겨울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다. 숨소리까지 일정한 걸 보아 완벽히 곯아떨어진 모양이다. 버들이 겨울의 핸드폰 액정을 환하게 밝혔다. 비밀번호가 설정되어 있다. 뻔하다. 애인 생일이 항상 겨울의 핸드폰 비밀번호였다. 요 근래 자주 네 발로 걸어 다니는 주정뱅이가 되어 집에 들어오는 거로 보아 겨울은 현재 솔로일 거다. 그리고 솔로일 경우 겨울의 핸드폰 비밀번호는 장 여사님의 생일로 고정이었다.
역시나.
장 여사님의 생일을 입력하자 잠금이 풀렸다.
“마마보이.”
찰싹. 겨울을 때리면서도 버들의 시선은 올곧게 핸드폰만 주시하고 있었다. 이것저것 만지다가 스케줄러를 발견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행운이었다. 빠르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버들이 스케줄을 확인했다. ‘황’이라고 쓰여 있는 몇몇 날짜들이 있다.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황 대표와 같이 가지는 공동 스케줄일 게 분명하다. 그걸 버들이 친히 메모해 옮겼다.
* * *
미리 타이머를 맞춰 놓은 커피 머신에서 커피가 내려지는 소리가 들린다. 원두 향기가 주변을 그득하게 채워 자정을 알아차렸다. 깜박이는 커서를 죽어라 노려보고 있던 황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를 따른 컵을 들고 곧장 노트북 앞으로 돌아왔다. 뜨거운 커피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뾰족하게 날이 서 있던 신경질이 약간이나마 누그러진다. 낮게 한숨이 터졌다. 딱히 체력적으로 피곤한 건 아닌데 한동안 빽빽했던 일정 탓에 몸이 묵직하다. 천천히 목 근육을 회전하며 이완시켰다.
쉴 새 없이 공기 청정기가 작동되고 있는 집 안은 얼마 없는 가구로 깔끔하다 못해 휑할 지경이었다. 주방 선반에는 오로지 컵만 진열되어 있을 뿐이었다. 커피 마실 때. 와인 마실 때. 맥주 마실 때. 물을 마실 때. 구실만 다를 뿐 종류별로 달랑 하나씩이다. 집주인의 성질머리가 인테리어에 그대로 녹아 있는 격이었다.
거추장스러운 게 싫다. 그게 황 대표의 집 안에 화분 하나 없는 이유였다. 시끄러운 것도 마찬가지다. 자동차 경적 등 생활 잡음마저 딱 질색이라 주거하는 곳은 언제나 고층이었다. 그렇지만 잠을 잘 동안에는 백색 소음을 어느 정도 필요로 했다. 어지간히 까다로운 남자였다.
작게 틀어 놓은 라디오를 끄고 황 대표가 책장 앞으로 걸어갔다. 직접 의뢰를 맡겨 제작한 책장은 두꺼운 원목 소재로 천장까지 닿아 어느 역사 깊은 도서관처럼 웅장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빽빽하게 꽂혀 있는 책들이 흡족하다. 국내에 출간되지 않는 원서들이 탐이 나면 기꺼이 외국까지 날아가 수집할 정도였다. 지금은 사업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넉넉지 않아 다른 사람을 시킬 수밖에 없지만, 영어와 불어를 제외한 언어들은 직접 개인 번역가를 고용해 가며 독서를 즐기는 편이었다.
현재 집중해 집필하고 있는 시나리오에 참고할 서적들을 황 대표가 몇 권 골라냈다. 없는 건 작은 메모지에 휘갈겨 써 두었다. 내일 비서를 통해 구해 오라고 지시를 내릴 예정이다. 잘 보이는 곳에 메모지를 붙여 둔 뒤 돌아서자 핸드폰이 울렸다.
“응.”
어느덧 커피는 바닥을 보였다.
-나올래?
예의 없이. 의자 깊숙이 몸을 눕히며 황 대표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왜 아무런 대답이 없어?
“내가 어디에 있는 줄 알고 나오라고 해.”
-어디든. 나와.
“내가 혼자 있는 게 아니면. 방금 전화 실례야.”
어르듯 말을 끝마친 뒤 황 대표가 뒤늦게 핸드폰 액정을 확인했다. 이름 없이 달랑 번호만 떠 있다. 그럼 적어도 내 개인 번호는 알고 있는 사이라는 건데. 누구더라. 목소리만 듣고서 제게 전화를 건 여자를 황 대표가 유추했다.
-……다른 여자랑 있어?
잠깐의 머뭇거림 끝에 던져진 물음이 귀엽다. 새벽에 턱 하니 전화해 다짜고짜 나오라고 조르고 있으면서. 황 대표가 커튼을 살짝 젖혔다. 도로를 수놓았던 자동차 불빛들도 잠잠해지는 시각이었다.
“있으면.”
-나 사랑한다고 그랬잖아.
“하지. 사랑.”
대답이 쉬웠다.
-여기 호텔이야. 우리 전에 갔던.
“아. ……우리 잤던 사이야?”
-뭐?
여자의 목소리가 찰나 높아졌다.
-황정우.
“응.”
-술이든 밥이든 먹게 나 보러 나와.
가는 곳만 가고, 먹는 것만 먹는다. 초행길이면 어김없이 주변을 헤매게 되는데 그때 낭비하는 시간들이 아까워 가는 곳만 가게 된다. 먹는 것만 먹는 이유는 신경이 예민해 몸으로 직접 들어오는 음식들에 대한 기준점이 높기 때문이다. 물건들 역시 익숙한 걸 추구하는 편이었다. 고장이 나거나 흠집 난 물건들이 생기면 미련 없이 버려 버리되 똑같은 디자인으로 새롭게 주문했다. 대체적으로 애착이나, 정 같은 걸 황 대표에게선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습성이 사람을 대할 때에도 이어졌다.
“우리 잤냐니까.”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궁금하니까 묻는 거야. 우리 잤던 사이냐고.”
나긋나긋한 목소리 톤이었다.
-어. 며칠이나 됐다고 그걸 잊어?
피곤하다.
“한 번 잤으면 됐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전화 끊을까?”
꾸준히 태연한 황 대표와 달리 여자의 숨소리는 거칠어졌다.
-나 사랑한다면서.
“그래. 사랑하니까 섹스했겠지.”
-나랑 잔 건 기억해?
식사를 한 뒤 준비한 선물을 건네주고, 사랑한단 말을 속삭이며 즐거움을 나눈다. 이미 잤던 사이면…… 어차피 똑같은 그 과정을 거치는 건데 흥미 없다.
“너 이름이 뭐였지?”
짧게 욕설이 들려왔다. 황 대표의 입가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그대로 뚝 끊겨 버린 전화가 처음처럼 예의 없다. 핸드폰을 내려놓는 황 대표의 손가락이 곱다. 취향이라고 할 건 없지만 되도록 도도하고 자존심이 센 여자들이 좋다. 피차 하룻밤 즐겼으면 됐지. 도도하고 자존심이 센 여자들은 공통적으로 그 생각을 갖고 있기에 본인들을 낮춰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경우가 없다.
그러니까, 귀찮지 않아서 좋다.
* * *
“유버들!”
버들이 인상을 썼다.
“내 이름 그렇게 크게 부르지 마.”
“보자마자 툭툭거릴래? 툭툭?”
“내가 언제 툭툭거렸다는 거야?”
“지금도 툭툭거리네. 툭툭.”
남들이 보면 같은 과인 줄 알겠다. 불쑥 나타난 정민을 버들은 반기지 않았다.
“너 이제 수업 없지?”
“없으면 뭐.”
“놀러 가자.”
등 뒤로 노을이 진다.
“넌 공부 안 해?”
진짜 궁금해서 물어봤다.
“시험 한참 남았는데?”
“……나 바빠.”
지나쳐 가려는 버들의 가방끈을 어김없이 정민이 붙잡았다. 쉽게 놔주지 않는 정민의 등을 결국 힘껏 때려 주고 나서야 버들은 간신히 학교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버들이 대기하고 있던 기사에게 오늘은 집에 가기 전 백화점에 들러 달라고 부탁했다. 하루 내내 이 순간만을 기다렸던 버들의 커다란 눈이 반짝였다.
백화점은 사람들로 복잡했다. 원하는 브랜드 매장으로 버들이 쏙 들어갔다. 더워지는 계절에 맞춰 가벼운 액세서리로 가득한 진열대가 화려했으나 버들은 한눈팔지 않았다. 되도록 황 대표의 머플러와 같은 디자인으로 구하고 싶었지만 그건 아주 오래전에 출시된 상품인 데다 한정판이었기 때문에 어렵단 답변이 돌아왔다. 대신에 황 대표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머플러를 골라 주문을 넣어 놓고 연락이 오길 며칠을 기다렸다. 미리 통화를 했던 브랜드 관계자와 조용조용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버들의 뺨이 발그스름하게 물들었다.
몇 분 뒤 백화점을 나왔을 때는 버들의 품에 예쁘게 포장이 된 상자가 들려 있었다.
집에 돌아온 버들이 황 대표의 머플러를 꺼내 안고 침대 위에서 뒹굴었다.
“아. 냄새 좋아.”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는 향수 냄새가 마냥 아깝다. 그래. 이건 버리라고 하셨으니까 허락 없이 내가 가져도 되는 거겠지? 버들이 머플러에 다시 코를 깊숙하게 파묻었다. 오늘 백화점에서 새로 사 온 머플러는 검정색이었다. 이걸 황 대표에게 전해 줄 생각을 하니까 상상만으로도 벅차오른다. 아……. 언제 만날 수 있을까.
버들이 핸드폰을 향해 팔을 뻗었다. 황 대표 이름을 누르자 대화창이 떴다. 뭔가를 썼다가 지웠다가. 또 혼자서 끙끙거리느라 바쁘다. 아 어떡하지?
[안녕하세요.]
마지막 마침표를 뺄까, 넣을까? 너무 딱딱해 보이지 않나? 낯간지러워진 버들이 침대 끝과 끝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마침표를 그대로 둔 채 전송 버튼을 누르는 버들의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대화창 옆에 새빨간 숫자 1이 괜스레 부끄럽다. 심장이 팔딱팔딱 난리다. 심호흡을 한 뒤 버들이 바로 이어서 ‘저 버들이에요.’ 하고 저를 알렸다.
새벽이 깊어진 동안에도 한참을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셔 잠에서 깬 버들의 눈가가 퉁퉁 부은 채다. 엄지와 검지 사이의 근육이 시큰거린다. 자는 동안에도 핸드폰을 꼭 쥐고 있던 탓이었다. 버들이 얼른 대화창을 열었다. 기대와 달리 숫자 1은 사라지지 않았다. 푹 수그러진 버들의 머리는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산발이 된 상태였다. 차분한 성격과 어울리지 않게 잠버릇이 고약한 탓에 늘 그랬듯 파자마 한쪽이 어깨 아래로 축 내려가 있었다. 숨을 꾹 참자 버들의 곧은 쇄골이 도드라졌다.
“……어?”
순간 버들이 굳었다. 잘못 본 줄 알았는데 아니다. 숫자 1이 지금 막 사라졌다. ……읽었다. 황 대표님이, 내가 보낸 메시지를 읽은 거다. 누가 지켜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버들이 얼른 핸드폰을 베개 아래로 감췄다. 놀라다 못해 숨이 멎을 것만 같다.
그 후론 핸드폰과 거의 한 몸처럼 지냈다. 수업을 들을 때도, 교수님과 면담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정민이 낮술 마시러 가자며 지랄할 때도. 제 방 의자에 버들이 풀썩 주저앉았다. 황 대표에게 곧 답장이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핸드폰은 하루 종일 죽은 듯이 잠잠했다. 대화창에는 저가 보낸 메시지 두 줄이 전부다. 책상 위에 엎드린 버들이 기운 없어 보인다. 바쁘신가? ……하긴. 대표님이니까 당연히 많이 바쁘시겠지? 그렇지만 아무리 바빠도 답장으로 점 하나 찍을 틈이 없는 건 아닐 텐데.
납득했다가, 기대했다가, 낙담했다가.
초 단위로 마음이 여러 갈래로 나뉘면서 복잡해진다. 숫자 1이 사라진 게 오히려 더 쓸쓸하다.
「유버들 씨.」
어른을 대하듯 저를 그렇게 불러 주던 낮은 음성이 다시 듣고 싶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버들이 깨끗하게 잘 세탁된 앞치마를 챙겨 들고 작업실로 들어갔다. 덩어리로 묶어 놓은 흙의 상태를 관찰하는 버들의 눈빛이 제법 진지하다. 이목구비의 구체적 형성을 위해 정확하게 비례를 나누고 머리카락 양까지 고려하며 작업을 이어 나갔다. 조각도를 쥐고 있는 버들의 손등 피부가 거칠다.
“……내가 누군지 모르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이름을 까먹으셨나?
“맞아. 그럴 수도 있어.”
혼자 묻고 혼자 답했다. 같은 나이인 제 형도 건망증이 심한 편이잖아. 버들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꽉 막혀 있던 속이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약간 풀리는 거 같다. 손에 덕지덕지 묻어 있는 흙을 닦을 정신조차 없었다. 찰칵! 조금 흔들렸지만 아예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다. 그대로 제 얼굴을 찍은 사진을 전송한 뒤, 숫자 1을 긴장한 채 지켜봤다.
빨리 만나고 싶다.
* * *
황 대표에게 박살이 나도록 깨진 뒤 수행 비서가 비틀비틀 패잔병처럼 걸어 나왔다. 번듯한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인재이나 청소기 필터를 제때 갈지 않아 혼이 났다. 쪽팔려서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 하는 사연이다. 더럽고 치사해서 다 때려치우고 싶지만 매달 갚아야 하는 대출금에 속을 억눌렀다. 가슴팍에서 진동이 울린다. 다짜고짜 자기 버들이라는 통성명의 메시지를 가볍게 무시했었다. 유 대표의 모든 가족들이 죽고 못 사는 막둥이의 이름과 똑같네, 딱 그 생각뿐이었다. 제 핸드폰 번호로 유 대표의 막냇동생이 친히 메시지를 보내 올 일은 없을 거니까 우연히 겹친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액정 가득 환하게 웃고 있는 버들의 사진에 수행 비서가 당황했다.
재차 진동이 울렸다.
[황 대표님. 바쁘세요?]
역시나 발신자는 버들이었다.
* * *
주말이다. 여름을 향해 계절이 착실하게 흘러가고 있는 만큼 중천에 떠 있는 햇볕이 나른하다. 유 회장과 버들이 이른 아침부터 화단을 가꾸는 중이었다. 쪼그리고 앉아 있던 버들이 조그마한 삽을 내려놨다. 직접 손바닥으로 흙을 정성껏 꾹꾹 눌렀다. 오늘 심은 묘목들은 전부 장 여사가 좋아하는 꽃들이었다.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다. 6월이나 7월이면 만발한 꽃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샤워를 끝마친 버들이 달그락 소리가 나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가서 쉬지.”
“괜찮아요. 재밌어요.”
“재밌어?”
“네.”
유 회장이 허허 웃었다. 무뚝뚝한 형제 놈들 사이에서 어떻게 이런 놈이 나왔을꼬.
“이거 버리고 올까요?”
“그래.”
주말이면 유 회장은 온전히 장 여사만을 위해 시간을 냈다. 직접 닭 뼈를 손질하고 있는 모습이 능숙하다. 닭죽은 장 여사가 물리지 않고 먹는 음식 중 하나였다. 유 회장의 곁에 바짝 붙어 소금을 치고, 닭죽이 냄비 바닥에 눌러 붙지 않게끔 부지런히 국자를 휘저어 가며 버들이 일손을 도왔다. 이윽고 고소한 닭죽이 완성됐다. 며칠 입맛이 없었는데 식욕이 돋았다. 호, 불어 가며 버들이 죽 한 그릇을 뚝딱 비워 냈다.
때마침 장 여사가 일어났다. 장 여사와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유 회장이 바지런히 상을 차렸다. 오붓하게 두 분이서 시간을 보내시라며 버들이 2층으로 향했다. 어제 진탕 술을 퍼마시고 들어온 겨울은 일이 있어 일찍이 출근하고 없었다. 형도 배고플 텐데.
외출복으로 갖춰 입고 1층으로 내려와 보니 장 여사와 유 회장 역시 나가기 위해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꺼내 놓은 장비들로 보아 날이 풀렸으니 등산을 갈 모양이었다. 웃으며 버들이 두 분을 배웅했다. 주방으로 들어온 버들이 보온병을 꺼내 닭죽을 담았다. 잊지 않고 꼼꼼히 수저도 챙겨 넣은 가방이 무겁다.
4월의 바람은 선선하고 날씨는 화창하다. 음악을 들으며 좀 걸을까 싶었지만 시계를 확인하고 나니 그럴 여유가 없단 걸 깨달았다. 과제 때문에 오늘 꼭 가야만 하는 전시회가 두 개나 됐다. 시간이 촉박할 거 같아 큰 길로 걸어 나온 버들이 택시를 잡아탔다.
“왜 묶여 있어?”
버들이 강아지들에게 물었다. 강아지들이 잔디밭에 코를 파묻고 킁킁거리다가 버들을 발견하고선 반갑게 아는 척을 했다. 목청 높여 짖는 소리가 확실히 예전에 비해 또렷해졌다. 영특한 강아지들은 버들이 자기들을 항상 오냐오냐해 준다는 걸 이미 파악한 상태였다. 방금까지 묶여 있어도 아무렇지 않아 하다가 낑낑거리고 난리가 났다.
“답답해서 그래?”
버들이 목줄을 풀어 줬다. 마당을 활개 치며 뛰노는 강아지들의 커다란 귀가 펄럭거렸다. 안으로 들어오자 비서 자리가 비어 있다. 문이 조금 열려 있는 겨울의 대표실에서 어렴풋이 대화가 들려왔다.
“형.”
별생각 없이 겨울을 부르며 대표실 안으로 들어간 버들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그동안 잠도 설치게 하고 입맛도 잃게 만들었던, 그 정도로 보고 싶어 했던 얼굴이 있었다. 순간 숨이 차올랐다.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남몰래 제 팔을 꼬집어 본 버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프다.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들어와.”
겨울이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들어가도 돼?”
“당연하지. 빨리 들어와.”
겨울의 옆에 버들이 다소곳하게 앉았다. 정면으로 황 대표가 보였다. 아찔하다.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우연을 기대하며 심부름을 자청하고, 선물을 준비하고, 메시지를 보내고. 그랬던 버들이 정작 황 대표가 눈앞에 있자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소극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왜 이렇게 얌전해?”
아무런 말이 없는 버들의 얼굴을 보고자 겨울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웅얼거리며 버들이 대꾸했다. 회사에 올 때면 황 대표를 만날 것을 대비해 항상 신경 써서 옷을 골라 입었었다. 하지만 오늘은 겨울의 얼굴만 잠깐 보고 나올 터였기에 후줄근한 차림새로 집 밖을 나왔는데, 하필 이런 날 황 대표와 우연히 마주치게 될 줄 몰랐다. 그런 버들의 앓는 속이야 알 리 없는 겨울이 턱 하니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부들거리는 버들의 말간 볼을 매만졌다.
“형한테 인사해야지.”
“안녕.”
겨울이 웃었다.
“그래. 형한테도 하고. 다른 사장 형한테도 해야지?”
“……안녕하세요.”
버들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네. 안녕하세요.”
존댓말……. 두근거린다.
용기 내어 버들이 고개를 들어 보았다. 단정한 황 대표의 모습이 절로 넋을 잃게 만든다. 저가 보낸 메시지가 떠오르자 긴장감에 주먹이 꼭 쥐어진다. 왜 답장 안 했냐고 물어봐도 되는 걸까? 우물쭈물하던 버들의 입술이 한숨을 삼키며 곧게 다물어졌다. 떨려서 도무지 말을 못 걸겠다.
두 대표가 서로를 노려봤다. 버들이 들어오면서 흐름이 뚝 끊겼지만 욕설까지 섞어 한창 다투던 중이었다.
“아.”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를 뒤늦게 버들이 생각해 냈다. 가방을 열어 보온병을 꺼냈다. 황 대표를 만나게 될 줄 알았더라면 머플러 선물을 챙겨 왔을 텐데. 아쉬움이 별똥별처럼 꼬리를 문다.
“형. 어제 술 마시고 아무것도 안 먹었지?”
보온병 뚜껑을 열며 버들이 소곤거렸다.
“응. 형은 술 잘 마시잖아.”
“그걸 무슨 자랑처럼 말해.”
“자랑이지. 그럼.”
“그게 무슨 자랑인데?”
“형은 뭐든 다 잘한다는 뜻이니까.”
뭔 헛소리냐며 버들이 눈가를 찌푸렸다. 황 대표만 없었더라면 눈치 보지 않고 철없는 제 형의 등짝을 퍽퍽 때려 줬을 거다. 보온병 뚜껑을 열자 고소한 닭죽 냄새가 퍼지면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옆에서 그걸 구경하던 겨울이 갑작스레 걸려 온 전화를 받으러 잠깐 자리를 떴다.
“저기…….”
발바닥부터 끌어올린 용기가 미미했다. 버들의 목소리가 바닥을 기었다.
“황 대표님.”
황 대표는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황 대표님.”
처음보다 더 큰 목소리로 버들이 황 대표를 불렀다.
“…….”
“…….”
버들이 당황했다. 분명 들렸을 텐데, 황 대표가 저를 쳐다봐 주지 않았다.
“……황 대표님.”
“네. 버들 씨.”
그 잠깐의 기다림 사이, 천국과 지옥을 오고 간 버들의 손바닥엔 땀이 흥건하게 찼다. 황 대표와 눈이 마주쳤다. 저한테 반응해 준 것에 안도를 하기 전이었다. 서늘하다 못해 사나운 황 대표의 눈빛에 버들이 허둥거렸다.
“혹시 닭죽 좋아하세요?”
황 대표가 눈살을 찌푸렸다. 업무적으로 유 대표와 나눠야 할 말들이 남아 있어 자리를 못 뜨는 중이었다. 달그락. 버들이 황 대표를 향해 그릇을 내밀었다. 하마터면 욕이 튀어 나갈 뻔했다. 흉측한 버들의 손을 보고 있자니 비위가 다 상한다. 친구 동생이란 걸 다시금 상기했다. 제 성질을 누르며 황 대표가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요.”
입가에 웃음이 그려질 것 같아 버들이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형. 이거 먹어.”
바깥에 나갔다가 돌아온 겨울에게도 버들이 닭죽을 권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시선은 자꾸만 황 대표를 향했다. 버들의 머릿속엔 전시회나 과제 따위 이미 까맣게 잊힌 뒤였다.
“아. 이제 속이 좀 풀리네.”
닭죽을 한 입 떠먹은 겨울이 아저씨 같은 감상평을 내놨다.
“형. 술 좀 적게 마셔.”
헝클어져 있는 버들의 앞머리를 겨울이 정리해 줬다.
“내 새끼 용돈 줘야겠다. 형이 술 마시면서 돈 많이 벌어 왔으니까.”
능청스럽게 겨울이 진짜 지갑을 꺼냈다. 수표 사이 영수증이 보인다. 그걸 꺼내 용돈이라면서 겨울이 버들의 손에 쥐여 주었다. 꿍얼거리면서 그걸 펴 본 버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게 다 얼마야? 영수증에 찍혀 있는 액수의 동그라미를 세어 보던 버들의 속눈썹이 빠르게 깜박거렸다. 뒤늦게 아차 싶은 겨울이 영수증을 도로 뺏으려고 했으나 버들이 휙 몸을 돌려 피했다.
“형. 이거 카드 긁었어?”
정말 사업하느라 필요해서 긁은 거였고, 그래 봤자 푼돈이었다.
“카드 좀 아껴 써.”
겨울이 소리 내어 웃었다. 뒤따라 황 대표도 옅게 웃음을 터트렸다. 카드값 걱정하는 재벌가 막내아들이라니.
“그러게. 돈 너무 많이 썼다, 형이.”
“어쩌려고 그래?”
버들만 혼자서 계속 심각했다.
“내 새끼. 형 용돈 좀 줘라.”
“……나 학생이야.”
“근데.”
“돈 없어.”
금수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이아몬드 스텝을 밟고 태어났기에 버들의 명의로 자연스레 주어지는 재력은 실로 엄청났다. 막상 버들의 지갑엔 현금은 얼마 없지만 형들이 경쟁하듯 줄줄이 꽂아 준 카드들은 대체로 한도가 없는 것들이었다.
둘을 보고 있던 황 대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따 전화해.”
“우리 아직 할 말 남아 있지 않냐?”
“그러니까. 이따 전화하라고.”
밖으로 나가는 황 대표를 보며 버들도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나도 갈게.”
“벌써?”
“친구 만나기로 했거든.”
거짓말까지 쳐 가며 버들이 황급히 대표실을 빠져나왔다. 입구에 서 있는 황 대표를 발견한 버들이 잠시 멈춰 선 채 제 모습을 살폈다. 신발 속 양말 색깔도 마음에 차지 않지만 별수 없다. 숨죽인 버들이 황 대표의 뒤로 천천히 다가갔다. 셔츠 바깥으로 황 대표의 등 근육이 꿈틀거렸다. 골격이 정말 근사하다. 버들이 저도 모르게 꼴깍, 침을 삼켰다.
“대표님.”
황 대표의 옆에 버들이 조심히 섰다.
“비서 어디 갔는지 알아요?”
“아. 저 왔을 때부터 자리에 안 계시던데.”
질서 없이 정원을 누비고 있는 개들 때문에 황 대표의 걸음이 묶였다. 꼭 개를 묶어 놓으라고 그렇게 다그쳤건만. 언제 또 풀어놨는지 모르겠다.
“저……. 황 대표님.”
하얗게 질린 황 대표의 표정을 살피던 버들이 혹시나 싶어 넌지시 물어보았다.
“강아지 무서워하세요?”
무서워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 그리고 자신은 개를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싫어한다. 그걸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자 황 대표가 입을 열었지만 타이밍이 어긋났다. 저만치 멀어진 버들이 박수까지 쳐 가며 강아지들을 제 쪽으로 유도하기 시작했다. 황 대표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머리숱이 굉장한가 보다. 이따금씩 부는 미약한 바람에도 버들의 머리카락이 민들레 홀씨처럼 휘날렸다. 그 꼬락서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황 대표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이미 자신이 개를 무서워하리라 혼자서 판단이 끝난 상황에서 뭘 말한다고 한들 들어 먹지 않을 것 같다.
왜 저러나 싶다. 막말로 내가 개를 무서워한다고 쳐도 내 일이니까 신경을 꺼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생각이 하나둘씩 늘어날수록 은근히 피곤함이 커진다. 머릿속을 의도적으로 막 비웠을 때다.
“황 대표님.”
눈이 마주쳤다. 버들의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휙 휘어졌다.
“제가 잡고 있을 테니까 지나가세요.”
그렇게 말을 하는 버들의 모습이 오히려 개에게 잡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잠깐만 얌전히 있어.”
버들이 종알거렸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중인 강아지 두 마리를 한꺼번에 안는 건 무리였다. 한 마리를 겨우 안아 들었는데 그마저도 무게가 무거워 버겁다. 한 품에 쏙 들어왔을 때도 있었는데 언제 이렇게 컸는지 모르겠다. 강아지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버들의 눈에 애정이 뚝뚝 묻어난다. 노는 건줄 알았는지 안긴 강아지가 버둥거리며 버들의 턱 아래를 연신 핥아 댔다. 안기지 못한 또 다른 강아지가 저한테도 관심을 보여 달라며 버들의 무릎을 딛고 일어나 꼬물거렸다.
황 대표가 가느다랗게 신음했다. 저 단편적인 장면이 무척 소란스럽게 느껴진다. 얼씬도 하기 싫다.
“괜찮아요. 아직 애기들이라, 물려도 아프지 않아요.”
꿈쩍도 하지 않는 황 대표를 보며 버들이 걱정했다.
“제가 잡고 있는데도 무서우세요?”
욕이 맴돈다. 자리를 비운 채 전화까지 받고 있지 않는 비서를 떠올리며 황 대표가 이를 바득 갈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여길 뜨고 싶어졌다. 그러려면 얼씬도 하기 싫은 저길 우선 거쳐야만 했다.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황 대표가 버들의 옆을 쓱 지나쳤다. 안기지 못한 강아지가 그런 황 대표를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컹, 짖었다. 버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얼른 제 발에 매달려 있는 강아지를 부르며 주의를 분산시켰다. 덕분에 대문을 나서는 순간까지 황 대표는 개털에서 무사할 수 있었다.
불쾌하고 기분 나쁘다. 버들의 노고로 강아지와 닿지 않았으면서 제 옷을 툭툭 털어 내는 황 대표의 손길에 신경질이 그득하다. 한 블록 위에 위치한 전용 주차장을 향해 황 대표가 걸음을 옮겼다. 차 키를 꺼내 드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대표님.”
돌아보지 않았다.
“황 대표님.”
“……월급 드려야겠네.”
뒤에 서 있던 버들이 옆으로 오자 황 대표가 인상을 썼다.
“대표님.”
샘처럼 맑은 버들의 눈빛은 오로지 황 대표의 옆얼굴에 닿아 있었다. ……잘생겼다. 엄청. 자꾸 감탄하게 된다. 버들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놓았다. 눈의 깜박거림도 차차 느려졌다.
돌부리에 걸려 잠깐 휘청거린 순간조차 버들의 눈에는 황 대표로만 한가득 채워져 있었다.
“뭡니까.”
제게 달라붙던 불편한 시선을 떼어 내고자 황 대표가 낮게 쏘았다.
“강아지 있잖아요.”
“…….”
“둘이 좀 닮았죠?”
“…….”
“금동이랑 감자에요, 이름.”
버들이 종알거렸다.
“구분하는 방법 알려 드릴까요?”
더 빨리 걷기 시작한 황 대표를 버들이 바지런히 쫓았다. 언덕길이라 숨이 찼지만, 급한 호흡에도 자꾸만 황 대표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거스러미 하나 없이 둥글게 깎인 황 대표의 손톱을 빤히 쳐다보던 버들의 시선이 다시 황 대표의 얼굴로 올라왔다.
“감자는 진짜 얼굴형이 감자 같고요.”
“…….”
“금동인 색이 더 금색처럼 짙어요.”
황 대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개 이름 따위 알아 봤자 평생 부를 일 없을 거다. 카드키를 가져다 대고 황 대표가 주차장 안으로 들어갔다. 매장에 온 것처럼 외제 차가 빽빽이 들어차 있다. 유 대표의 취미가 장난감 모으듯 외제 차를 수집하는 거였다. 두 대표의 성격이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차이가 난다. 변덕이 죽을 끓는 황 대표는 새로운 차가 끌고 싶어지면 기존의 차부터 먼저 처분하는 편이었다.
“강아지 무서우면, 다음에 제가 또 도와 드릴까요?”
버들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결국엔 이 말이 하고 싶었다.
“다음에 또 도와 드릴 수 있어요.”
황 대표가 자기 차 옆에서 멈췄다.
“저한테 연락하시면 되는데…….”
“…….”
“오시기 전에요. 그럼 제가, 강아지 미리 와서 붙잡고 있을게요.”
주차장 안은 축축한 공기가 감돌았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봄날처럼 상기된 버들의 양쪽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저 회사 잘 안 나와요.”
그런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렇게 회사를 들락거려도 보지 못했지.
보고 싶었다. 그리고 또 보고 싶을 게 분명하다.
매일 매일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
“…….”
어느 틈에 가까워진 버들을 뒤늦게 눈치챈 황 대표가 놀랐는지 움찔거렸다. 비록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개털이 잔뜩 묻어 있을 게 분명한 버들을 황 대표가 운전석에 올라타는 걸로 피했다. 쾅, 닫힌 문소리가 유독 크게 주변을 울렸다. 버들의 눈썹 끝이 처졌다. 창문이 어두워 황 대표의 모습이 일절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버들이 앞에서 기웃거렸다. 또 만나기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걸까?
“저기…….”
버들이 창문을 톡톡 두드렸다.
하. 미치겠네. 황 대표가 욕을 짓씹었다. 친구의 동생만 아니었으면 진작 차를 출발하고도 남았을 거다. 잠깐 시선을 비틀어 버들을 바라보았다. 그냥…… 하얗고 말갛다. 두 번째 봤다고 첫인상이 달라지진 않았다. 오히려 점수가 더 깎였다. 아까 돈 없냔 유 대표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던 버들의 모습에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긴 했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다 큰 사내놈으로 시시하게 느껴졌다. 노는 물이 다르단 표현이 적합하겠다. 유 대표의 동생이 아니었다면 아마 살면서 일절 부딪힐 일이 없었을 거다.
불편한 표정을 감춘 뒤 황 대표가 창문을 반쯤 열었다. 하고 싶은 말도 있고 묻고 싶은 말도 있는데, 혹시 이대로 헤어질까 봐 침울해졌던 버들이 다시 활기를 찾았다.
“대표님. 있잖아요.”
“버들 씨.”
귀가 녹는 게 아닐까?
“……네?”
황 대표가 조수석에 있던 상자를 들었다.
“치즈케이크 좋아해요?”
“치즈케이크요?”
“아까, 저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
창문으로 황 대표가 상자를 건넸다. 빨간색 리본이 조잡스럽게 장식된 상자의 정체는 치즈케이크였다. 버들의 손끝과 닿지 않게 황 대표가 교묘하게 피했다. 멍하게 버들이 상자를 내려다봤다.
“이거, 저 주시는 거예요?”
“혹시 치즈케이크 안 좋아해요?”
그렇지 않다며 버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머리카락이 너풀거렸다.
“다행이네요.”
“아. 저기. 대표님.”
창문이 올라가자 버들이 다급해졌다.
“메시지, 보내도 돼요?”
“……바빠서요.”
아……. 버들의 얼굴에서 아쉬움이 드러났다. 감정을 숨기는 게 서투른 것인지, 아니면 그런 걸 아예 안 하는 것인지. 얼굴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쉽게 간파가 되었다. 제 개인 연락처를 가르쳐 주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었다. 유 대표님 막냇동생에게 메시지가 왔단 보고를 하는 비서에게, 말이 떨어지자마자 짜증을 냈었다. 시시콜콜한 내용을 전부 듣고 있을 정도로 자신이 한가해 보이냐고. 중요한 것만 골라 보고하라고. 그것 때문에 월급 주는 거라고. 그 뒤로 비서에게 메시지 건에 대해서 들은 말이 없었다.
“많이 보내는 건 아닌데…….”
버들이 우물쭈물했다.
“…….”
“…….”
뭐 어떠랴 싶다. 나한테 오는 메시지도 아닌데.
“답장은 잘 못 할 거예요.”
“괜찮아요! 답장은!”
버들이 기운 차렸다.
“운전 조심하세요.”
황 대표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대꾸가 없었다. 저 멀리 사라지는 차를 버들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오늘도 머플러 이야긴 꺼내지도 못했네. 그렇지만 메시지를 보내도 된단 허락을 받았다. 그것만으로 둥실둥실, 기분이 뜬다.
“아. 내 가방!”
그제야 겨울의 집무실에 두고 나온 제 가방을 떠올렸다. 원래라면 가겠단 자신을 꽁꽁 붙잡아 어딜 가는 것인지, 몇 시에 들어올 것인지 추궁하듯 캐묻고도 남았을 겨울이 왜 그냥 순순히 보내 줬는지 알 것 같다. 가방을 가지러 다시 돌아와야 한단 걸 알았을 거다.
대문을 밀며 들어간 버들에게 강아지들이 마구잡이로 달려들었다.
“……안 돼.”
치즈케이크가 망가지지 않도록 상자를 머리 위로 높게 치켜든 버들이 강아지들을 피해 간신히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는 보이지 않던 비서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누구랑 통화 중인 것인지 쩔쩔매고 있다. 꾸벅, 인사한 뒤 버들이 대표실 앞에서 망설였다. 얼굴에서 곤란함이 드러났다. 어쩌지. 이거 황 대표님이 나 먹으라고 준 건데. 형이랑 나눠 먹어야 하나? 먹기 너무 아까운데. 버들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치즈케이크로 치사해진 건 이 치즈케이크를 다른 누구도 아닌 황 대표가 줬기 때문이었다.
“친구 잘 만나고 왔냐?”
불량한 모습으로 소파에 길게 누워 있던 겨울이 들어온 버들에게 아는 척을 했다.
“유버들.”
갑자기 불린 이름에 버들이 뜨끔했다.
“왜.”
“너 이리 와.”
겨울이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삐꺽거리는 버들의 태도가 영, 수상쩍다.
“왜. 거기서 말해.”
아무렇지 않으려고 버들이 최선을 다했다.
“유버들.”
“응?”
심호흡을 한 뒤 버들이 겨울을 쳐다봤다.
“너 배 속에 뭐 감췄어?”
“……아무것도 없어.”
주먹만 한 치즈케이크를 옷 속에 감춰 둔 상태라 상자의 단면대로 버들의 배 부분이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피하려던 버들이 결국 겨울에게 손목이 붙잡혔다. 치즈케이크를 들켰지만 겨울이 그것에 관심이 없어 보이자 내내 불안해하던 버들이 그제야 안도했다.
“진짜 친구 만나기로 했어?”
“원래는 전시회장에 가려고 했는데…….”
“했는데, 뭐.”
“그냥 집에 가려고.”
“그래? 형이랑 같이 가.”
“형 집에 갈 거야?”
“주말이니까 형도 쉬어야지. 잠깐만.”
보온병을 닫고 주변을 정리하는 겨울을 기다리면서 케이크 상자에 매달린 리본을 매만지는 버들의 손길이 무척 조심스럽다. 다음에 황 대표님을 만난다면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물어봐야겠다.
“너 치즈케이크 별로 안 좋아하잖아.”
“이거 치즈케이크인지 어떻게 알았어?”
“형은 모르는 게 없다.”
“나 치즈케이크 좋아해.”
“치즈도 안 먹는 놈이 무슨.”
“아니야. 치즈도 좋아하고, 치즈케이크도 좋아해.”
“언제부터?”
“……오늘부터.”
그걸 누가 줬더라. 무슨 기념일을 맞은 직원 누구였던 거 같은데. 예약이 밀릴 만큼 유명한 제과점 제품이라고 그랬다. 대표님들은 안 가져갈 거 같다면서 직원이 각자 개인 비서들에게 차 속에 미리 챙겨 달라고 부탁까지 해서 어쩔 수 없이 받은 거였다. 그게 오늘 아침이었다.
“버들아.”
“응?”
그거 냉장고에 다섯 개나 있다고 말해 주려고 하던 찰나 전화가 울려 겨울이 잠시 자리를 떴다.
* * *
“형.”
겨울이 퇴근하기만 기다리고 있던 버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겨울은 넥타이를 풀다 말고 제 막냇동생의 젖은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하지 마. 버들이 겨울의 손길을 피했다.
“나 물어볼 거 있어.”
“너는 씻었으면 머리를 말렸어야지.”
“나중에 말리면 돼.”
“감기 걸려. 가서 말리고 와.”
“나중에 말린다고 했잖아.”
“형 일단 씻고 나올 테니까 넌 머리 말리고 있어.”
씻고 나왔지만 버들의 머리는 여전히 젖은 채였다.
“새끼. 진짜 말 안 듣는데.”
겨울이 버들을 끌어다가 의자에 앉혔다. 드라이기를 작동시키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거울에 비친 버들을 보며 겨울이 헛웃음을 지었다. 수발을 받는 버들의 모습이 자연스럽다. 아주 상전이 따로 없지. 숱 많은 버들의 머리카락이 버석하게 말라 갔다.
“야.”
“응?”
겨울이 드라이기를 내려놓았다.
“형. 어깨 좀 주물러.”
“왜?”
“네 머리 말리다가 형 팔 빠지게 생겼다.”
“내가 말려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밉지 않게 버들을 흘기던 겨울이 이어서 자기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버들이 틈을 노려 겨울의 핸드폰을 낚아챘다. 아주 당연하게 장 여사의 생일을 입력했는데, 음? 어쩐 일인지 비밀번호가 틀렸다고 나온다. 숫자를 잘못 누른 건가 싶어 심혈을 다해 다시 네 자리 수를 눌렀다. 그런데 비밀번호가 맞지 않았다.
“형. 여자 친구 생겼어?”
겨울이 씩 웃었다. 스트링팬츠만 입고 있던 터였다. 그걸 툭 잡아 당겼다가 놓으며 섹시하냐고 버들에게 물었다. 어처구니가 없다. 너무나 아저씨 같다며 버들이 냅다 인상을 확 구겼다. 애들이 뭘 알겠냐며 겨울이 드라이기를 정리했다. 탄탄한 겨울의 복근을 바라보다가 버들이 제 배를 만져 보았다. 홀쭉하기만 하다.
황 대표님 배는 어떤 모양일까? 근육이 있을까? 혼자 상상해 본 황 대표의 복근에 더워진 버들이 창문을 벌컥 열었다. 그것도 모자라 테이블에 납죽 엎드렸다. 차가운 유리에 달아오른 볼이 맞닿았다. 시원하다.
“가서 자라, 인마.”
“형. 겨울이 형.”
가서 자란 말에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핸드폰 비밀번호 뭐야?”
“형 핸드폰에는 게임 같은 거 없어.”
“내 핸드폰에도 게임 같은 거 없거든?”
“근데. 뭘 보려고.”
전에 적어 뒀던 스케줄 메모를 잃어버렸다. 대답을 못 한 채 버들이 애꿎은 제 입술만 우물거렸다. 그러는 사이 핸드폰까지 뺏겨 버렸다.
“형.”
“응.”
버들이 심호흡을 했다.
“대표님 말이야.”
아무렇지 않은 척 운을 뗐다.
“대표님? 누구? 황 대표?”
“……응.”
겨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난 네 입에서 다른 대표 나오는 거 영 별로다.”
능글맞게 대꾸하며 장난을 걸어오려는 겨울에게 버들이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황 대표님은 진짜 착한 거 같아. 친절하시고.”
겨울이 코로 웃었다. 착해? 누가? 황정우가? 친절하다고? 당사자인 황 대표 역시 방금 버들이 한 말을 들었다면 어이없어서 웃었을 거다.
“형 친구들 중에 황 대표님이 처음이야. 나한테 존댓말 해 주시는 거.”
혀를 찬 겨울이 버들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인마, 그게 친절해서 존댓말을 하는 거겠어? 선 긋는 거지.
원래부터 물기 그렁그렁한 버들의 눈이 황 대표 이야기를 꺼내면서 반짝거렸다. 다시금 겨울이 혀를 찼다. 이렇게나 사람 볼 줄 몰라서 큰일이다. 이 험난한 세상을 어찌 살아가려고 그러지?
“넌 형 두고 장가갈 생각하지 마라.”
“뭐래. 형, 황 대표님이랑 나도 친해질 수 있을까?”
“왜 친해지게, 그 새끼랑.”
“그냥. 어른스럽잖아.”
“어른스럽다고? 어른 다 죽었겠다.”
버들의 대답에 겨울이 투덜거렸다.
“야. 형도 황 대표랑 동갑이야. 어른스럽다고 말해.”
“형은 아직 철도 덜 들었으면서.”
“이놈 이거 오늘따라 얄밉네. 확 깨물어 버릴라.”
“물기만 해. 가만 안 둘 거야.”
“어떻게 가만 안 두게? 엄마한테 가서 이를 거냐?”
“유치해.”
“넌 뭐 어른스럽냐?”
“형보다는 어른스러워.”
“이리 와. 물어 버릴 거야.”
두 형제가 야밤에 티격태격했다.
“겨울이 형.”
“뭐. 형 삐쳤어.”
“황 대표님……. 아무것도 아니야.”
황 대표로 노래를 불러도 불만이겠지만, 말을 하다가 마니까 더 거슬린다. 얘가 왜 이러지?
“형. 핸드폰 비밀번호 뭐야?”
“궁금해?”
“빨리 가르쳐 줘.”
“이리 와서, 뽀뽀 한 번 해.”
겨울이 제 볼을 톡톡 건드렸다. 버들이 열여섯 살 때까지 아무렇지 않게 행해졌던 애정 행각이었다.
“……안 그럴걸? 나 애 취급 안 할걸?”
“뭔 소리야. 누가 뭘 안 해?”
“뽀뽀! 애 취급 안 할걸? 나한테 뽀뽀하라고도 안 그럴 거야!”
“아, 귀청이야.”
정말이다. 황 대표만은 어른 대하듯 저를 대해 줄 거 같다. 뽀뽀하라고 장난도 안 칠 거고.
갑자기 버럭버럭 화를 내며 버들이 방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홀로 남겨진 겨울이 맹하다. 그러다가 확 인상을 구겼다.
“유버들! 너 누구랑 뽀뽀할 건데? 어? 누가 너한테 뽀뽀하자고 해도 절대로 하면 안 된다! 형들 다섯 명한테 전부 허락 맡고 해! 새끼야! 야! 이 새끼, 왜 방문은 잠그고 난리야? 야, 인마!”
* * *
벤치에 앉은 버들이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짧아진 꽁초를 재떨이에 던져 넣고 핸드폰을 꺼냈다. 바뀌지 않는 황 대표의 프로필을 물끄러미 바라보길 한참이다. 머뭇대던 버들의 손가락이 대화창을 눌렀다. 어젯밤 저가 보낸 메시지의 숫자 1이 사라진 상태였다.
[대표님. 저희 형이랑 절교하세요.]
……이건 취소하고 싶은데. 겨울을 통하지 않으면 황 대표를 만날 수 없단 걸 깨닫고 버들이 침울해졌다. 만나고 싶을 때 만나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아, 정말. 보고 싶을 때 바로바로 볼 수 있으면 소원이 없을 거 같다.
수업이 끝나는 대로 집에 돌아온 버들이 작업실에 콕 틀어박혔다. 내리깐 시선으로 모델의 사진과 작품을 번갈아 가며 비교했다. 단지 큰 덩어리에 불과했었던 흙덩어리가 점점 입체적인 얼굴로 표현되고 있었다. 이목구비의 세부 형태를 보다 더 살리기 위해 버들이 조각도를 다잡았다. 미리 열어 두었던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왔다. 그럴 때마다 커튼이 나부꼈다. 버들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눈앞의 작업에만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었다.
해가 질 때쯤 작업이 마무리됐다. 한 자세로 오랫동안 집중하고 있던 탓인지 팔과 목이 뻐근하다. 욕실로 향하던 중 무심코 앞치마에 손을 집어넣은 버들이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설마. 바스락거리며 손끝에 걸린 무언가를 천천히 꺼내든 순간 버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메모를 앞치마 주머니 속에서 발견했다. 황 대표의 스케줄을 직접 옮겨 적은 메모였다. 찬찬히 내용을 훑어보던 버들이 부리나케 욕실로 향했다. 오늘 날짜에 황 대표의 스케줄이 적혀 있었다. 장소는 호텔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머리 위에 덮어 쓰고 있던 젖은 수건을 던져 버리고 버들이 드레스 룸을 뒤적였다. 형들이 바리바리 사다 나르는 통에 옷은 수북했지만 도대체 뭘 입어야 할지 막막하다. 버들의 머리카락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그대로 목을 가로질러 쇄골에 고였다.
“이게 뭐야.”
잔뜩 공들여 고른 옷을 입어 보고 나니 셔츠와 청바지 차림으로 학교 가는 것과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인다. 드레스 룸을 휘젓고 다니는 사이 물기로 촉촉했던 버들의 피부가 자연히 말라 보송보송해졌다. 황 대표님은 어떤 옷을 입고 계셨더라. 주로 무채색 옷이었지?
외출 준비를 끝낸 버들이 집을 빠져나왔다. 따라 나오려는 기사를 만류하고 택시에 올라타 시간을 확인하니 계획보다 30분이 늦었다. 노을의 끝자락이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아. 치즈케이크에 대한 답례를 해야겠지?
황 대표가 준 치즈케이크는 애지중지 보관만 하다가 상해서 몽땅 내다 버려야 했다. 푸르게 핀 곰팡이를 보며 얼마나 절망스러웠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아까워도 한 입 정도는 먹어 볼걸. 후회를 하던 중 치즈케이크 상자 겉에 붙어 있던 새빨간 리본이 눈에 들어왔다. 그걸 조심히 떼어 냈다. 머플러뿐이었던 버들의 보물은 현재 리본까지 더해져 두 개로 늘어났다.
황 대표님은 오늘 무슨 옷을 입고 나올까? 머리는 어떤 모양일까? 알고 있는 황 대표의 스케줄은 시간과 장소뿐으로 극미했다. 그렇지만 그간 심부름을 자청하며 수차례 헛된 발걸음을 한 것에 비교하면 만날 수 있는 확률이 월등하게 높았다.
「유버들 씨.」
택시 차창에 버들이 툭 고개를 기대었다. 아른거리는 자동차 불빛 새로 황 대표가 겹쳐졌다. 여유롭고, 차분하고, 어른스럽고. 황 대표에게 느껴지는 고유한 분위기가 부럽다. 그래서 호기심이 생기고, 관심도 가나 보다.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우연한 만남을 가장하려고 했던 버들의 얼굴이 출입을 거부당하면서 침울해졌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인지 몰랐다. 이런 곳들을 자주 다녀 봤기에 어떤 분위기인지 버들은 바로 알아차렸다. 사회적 지위를 갖춘 인물들이 주 고객층이고 그들의 프라이버시를 위한 공간이니 원칙이 엄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회원일 게 분명한 제 형이 곧 올 텐데 안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안 되냐고 묻지도 않았다. 입구에 서 있던 매니저가 나가는 방향을 알려 줬다. 기가 죽은 채 버들이 고개를 끄덕거렸을 때였다.
“유버들 씨?”
너무 보고 싶으면 환청 같은 것도 막 들리나? 뒤를 돈 버들이 숨을 들이켰다. 머플러에 흐릿하게 남아 있는 향수 냄새가 가까이 다가온 황 대표로 인해 진하게 스며들었다. 갑자기 더워진다. 인사를 하며 버들이 허둥거렸다. 그런 버들을 내려다보며 황 대표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보이니까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괜한 짓을 한 것 같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사이 몇 번의 시선이 스쳤다. 누가 물은 적 없는 말을 버들이 주섬주섬 늘어놓기 시작했고, 더듬거리며 나온 단어들을 황 대표가 조합했다. 단지 밥 먹으러 왔다고? 밤 아홉 시가 넘는 시간에?
“저희 형도 만날 겸…….”
“형? 유 대표?”
“네.”
레스토랑에서 우르르 몰려나오는 사람들을 피해 황 대표와 버들이 벽 쪽으로 비켜섰다. 의도치 않게 구석으로 몰린 버들이 황 대표를 힐긋거렸다. 셔츠 색깔이 똑같다. 무채색인 검정. 뿌듯한 한편 부끄러워진다. 머리를 쓸어 올리는 황 대표의 손길이 한만하다. 뜸들이던 버들이 황 대표의 행동을 쫓아 제 머리를 쓸어 넘겨 보았다. 아. 이게 아닌데. 흉내를 내는 것조차 어려운 황 대표의 저런 분위기가 탐이 난다.
“아. 대표님.”
버들이 황 대표를 불렀다. 치즈케이크 답례로 사 온 걸 꺼내 조심히 건넸다.
“이거요.”
“……저 주시는 거예요?”
“네.”
“왜요.”
“치즈케이크, 잘 먹어서요.”
사실은 상해서 먹진 못했지만 그렇게 둘러댔다.
“받으세요.”
버들의 손에 들린 걸 내려다본 황 대표의 눈매가 무감했다. ……꽃? 어디까지 봐줘야 하는 거야. 이걸. 친구 동생이니까 어쩔 수 없이 허용해야 하는 범위들이 거슬린다. 해바라기 한 송이가 버들의 손에서 황 대표에게 넘어갔다. 꽃을 포장하고 있는 투명한 비닐이 바스락거린다. 치즈케이크는 어차피 버릴 거였다. 버릴 것을 떠넘겼더니 또 다른 쓰레기가 생겼다. 하. 황 대표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 대표 늦는다고 하던데.”
“……아.”
“안에서 기다릴래요?”
“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출입을 거부당한 레스토랑에 황 대표의 동행자로서 버들이 안으로 들어갔다.
황 대표의 뒷모습을 마음껏 바라보았다. 분명 허락 없이 온 거라 겨울이 화를 낼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건 모조리 뒷전으로 미뤄 버렸다. 황 대표의 손에 꼭 멱살이 잡힌 것처럼 해바라기가 들려 있다. 어찌되었건 선물을 했단 게 중요하다. 동요하는 가슴 언저리를 버들이 움켜쥐었다.
“배고파요?”
“어……. 아니요.”
“그럼 단거 좋아해요?”
“네.”
많은 말을 하고 싶은데 어쩐 일인지 단답형이 최선이다. 땀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을 버들이 제 허벅다리에 쓱 문질러 닦았다. 황 대표가 버들의 몫으로 디저트를 골라 주문했다. 버들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잊지 않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황 대표님. 잘 지내셨어요?”
얼핏 저와 눈을 맞추고 내뱉는 버들의 물음에 황 대표가 웃었다. 짜증은 나나 비즈니스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면 어려울 것도 없다.
“버들 씨는 잘 지냈어요?”
“……저는. 저는요.”
“네.”
“저는, 보고 싶었어요.”
“…….”
예측할 수 없는 비즈니스는 역시 별로다.
“저를요?”
“……네.”
“왜요.”
“그냥요.”
무심한 눈빛으로 황 대표가 버들을 훑어보았다. 냅킨을 비비 꼬고 있는 버들의 손이 대체 뭘 하다 온 것인지 오늘따라 더 심각하다. 땅이라도 파나? 조명 아래 버들이 눈을 내리깔자 속눈썹으로 인해 긴 그림자가 떠올랐다. 눈 아래의 살이 신기할 정도로 도톰하다. 버들이 옅게 미소를 지을 때마다 그게 더 선명히 볼록해졌다.
“대표님.”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버들이 싱겁게 웃었다. 황 대표와 단둘이 마주 앉아 이야기하고 있단 게 현실감이 떨어진다. 낯설 정도로 간지러운 기분을 참아 가며 버들이 옆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때마침 달그락거리며 디저트가 버들의 앞에 놓였다. 포크로 시트 부분을 가르자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초코 시럽이 흘러나왔다.
“와. 엄청 달아요.”
“그래요?”
“맛있어요. 아주.”
“다행이네요.”
자주 만나야겠다. 버들이 속으로 다짐 아닌 다짐을 했다. 자주 만나면, 그만큼 친해질 수 있는 거니까. 아. 가방에 넣어 온 머플러 선물이 떠올랐다. 저기. 막 입을 뗐지만 그대로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묻혀 버렸다.
“일찍 왔네?”
여자가 다가와 황 대표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쌌다.
“응. 앉아.”
황 대표가 익숙하게 옆자리를 가리켰다.
“누구야?”
“유 대표 동생.”
“아.”
저도 모르게 굳어 버린 얼굴이 느껴졌다. 언제 달았냐는 듯 입안에 번진 초콜릿이 그저 껄끄럽다. 황 대표와 단둘이라서 잔잔히 깔려 있던 기류가 셋이 되면서 깨졌다. 버들이 물컵을 쥐었다. 여자와 나누는 대화의 내용이나 편해 보이는 황 대표의 모습에서 서로가 친근한 관계란 걸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황 대표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버들은 입만 벙긋거리다가 말았다.
깨끗한 여자의 손끝을 턱을 괸 황 대표가 살며시 잡아당겼다. 왠지 보면 안 되는 걸 보게 된 것 같아 화들짝 놀란 버들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테이블 위의 해바라기를 버들이 응시했다. 아까는 겨울이 늦게 왔으면 좋겠다고 바랐는데 지금은 서둘러 와 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셋이 있는 것보단 나을 거 같으니까.
그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응. 말해.”
걸려 온 전화를 받는 황 대표의 음성이 그대로 버들의 귓가에 녹아들었다. 고개를 겨우 들었더니, 여자에게 귓속말을 하고 있는 황 대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알았어.”
여자가 대답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사도 없이 바깥으로 나가 버린 여자를 보며 버들의 눈꺼풀이 빠르게 깜박거렸다. 드르륵. 의자를 밀며 일어난 황 대표를 따라 버들의 고개가 위로 향했다.
“어디 가세요?”
그걸 물어 올지 몰랐는지 황 대표가 잠깐 주춤했다.
“화장실.”
버들이 무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이 형이 오기 전까지 황 대표님이랑 둘이 있을 수 있는 거겠지?
껄끄러웠던 초코 시럽이 다시 달아졌다. 버들은 멀어져 가는 황 대표의 뒷모습을 보다가 해바라기 옆에 머플러 선물을 내려놓았다. 다리를 동동 굴렀다.
엘리베이터 바깥으로 야경이 펼쳐졌다.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던 여자가 황 대표의 목에 팔을 걸며 매달렸다. 황 대표는 급할 필요 없다며 차분히 여자를 떼어 놓고선 구겨진 옷을 정리했다.
“이렇게 그냥 나와도 돼?”
“그럼. 친구 동생한테 섹스하러 간다고 말이라도 하고 나와?”
“그런가.”
“어차피 유 대표 만나러 온 거라니까.”
“유 대표님은?”
“늦는다고 전화 온 거잖아. 서로 연락하겠지.”
섹스는 농밀하고 거리낌 없었으며 그만큼 서로가 만족스러웠다.
“어떻게 할래? 바래다줄까?”
“난 오늘 여기서 자고 갈래.”
여자가 누운 채 길게 기지개를 켰다. 조명등을 대신 낮춰 준 뒤 황 대표가 씻고 나왔다. 지친 기색이라 바로 잠들었을 줄 알았던 여자가 모로 누워 황 대표를 향해 웃어 보였다. 가느다란 손목에는 황 대표가 선물한 팔찌가 호화롭게 번쩍거리고 있었다.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는 동안 대화가 오고 갔다. 보통의 연인 사이처럼 대화의 내용들 중엔 간간히 약속이 섞여 있었다. 어디에 어떤 음식점이 오픈했다던데 맛이 괜찮다고 하니 가 보자, 외국 어디에서 전시회가 개최되었는데 투자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하니 쇼핑하러 같이 가 보는 게 어떠하냐, 같은. 응. 전부 수긍하는 대답을 내놓았으나 기약이란 없었다. 유유상종이었기에 황 대표도 여자도 빈껍데기와 같은 약속을 딱히 염두에 두지 않았다.
모든 것이 완벽한 채로, 작별 인사를 막 앞두고 있을 때였다.
“유 대표님 동생은 몇 살이야?”
던져진 물음이 참 난데없었다.
“……글쎄.”
“몰라?”
“내가 알아야 돼?”
“미성년자일까? 어려 보이던데.”
황 대표의 머릿속에 저절로 하얗고 앳된 얼굴이 슥 그려졌다.
“관심 없어서.”
“관심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알아 둔다고 나한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
“같이 사업하는 사람 가족인데 너무하네.”
훈계를 두는 거 같은 어조로 여자는 재미있단 듯 빙글거렸다.
“키스는 해 주고 갈 거지?”
가까이 다가온 황 대표의 넥타이를 여자가 잡아당겼다.
* * *
새벽 한 시가 훌쩍 넘자 직원이 찾아와 마감 시간을 알려 줬다.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버들이 당황하며 화장실로 황 대표를 찾으러 가 보았지만 텅 비어 있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벌써 두 시로 레스토랑 마감할 때가 됐다. 버들이 해바라기와 머플러를 챙겨 로비로 나왔다.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황 대표의 모습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길 잃어버리셨나? 시간이 늦은 탓인지 길거리가 고요했다. 버들이 호텔 앞 주변을 서성거렸다. 차가운 새벽 공기에 재채기가 터졌다.
“유버들. 너 거기 딱 서라.”
살금살금 집에 들어간 버들이 그대로 겨울에게 뒷덜미를 붙잡혔다. 불량했던 형들에게 보고 배운 게 있어 지금 집에 들어온 게 아니라 나가는 거라고 둘러댔지만 애초에 통할 핑계가 아니었다. 늦게 집에 들어오면 어떻게 하냐고 겨울이 온갖 잔소리를 퍼부어 댔다. 속상한 마음에 뭐라고 대꾸할 의욕이 생기지 않아 버들이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잘못했지?”
“응.”
계속 상대해 주기 귀찮아서 버들은 겨울이 원하는 대답을 바로 들려줬다. 혼낼 거 다 혼냈고, 원하는 대답을 듣기도 한 겨울이 이만하면 됐다 싶었는지 버들을 데리고 욕실로 향했다. 밖에 있는 동안 차갑게 식은 버들의 발과 손에 겨울이 뜨거운 물을 쏘아 체온을 높여 줬다.
“형은 어디에 있었어?”
분명 레스토랑 스케줄은 대표 두 명의 공동 스케줄이었다.
“야. 형은 모범 시민으로서 일찍…….”
“레스토랑에 왜 안 왔어?”
“응?”
“지키지도 않을 스케줄은 뭐 하러 적어 놨는데?”
뒤늦게 겨울이 펄쩍 뛰었다.
“너 뭐야. 레스토랑? 너 거기 왜 갔어?”
겨울이 닦달했다.
“말해 봐. 너 레스토랑에 있다가 온 거야?”
“……거기서 황 대표님 봤어.”
버들에게 수건을 꺼내 주며 겨울이 미간을 찌푸렸다.
“레스토랑에 가긴 간 거야? 왜? 어떻게 알고?”
“그게 중요해?”
“형 만나러 갔었어?”
“나도 거기에서 약속 있었어.”
“거짓말하지 말고. 너 거기 못 들어간단 말이야.”
속상함이 물씬 커지는 순간이었다.
“응. 형 보러 갔었어.”
“어떻게 알고 갔냐니까.”
“……있어.”
훌쩍거리는 버들의 코끝을 겨울이 쥐고선 흔들었다.
“뭐가 있어. 말 똑바로 안 해?”
“아. 아파.”
자꾸 괴롭히는 겨울을 피해 제 방으로 도망친 버들이 덜커덕 문을 잠가 버렸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형제가 대치했다. 그러다가 궁금한 걸 서로 하나씩 묻고 답하기로 합의를 봤다.
“레스토랑에 왜 안 왔어?”
“같이 가기로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응.”
“그 사람 일정이 좀 틀어져서 못 가게 됐어.”
“황 대표님 말고 거기서 만날 사람이 또 있었어?”
응, 겨울이 짧게 대답했다.
“넌 거기 어떻게 알고 간 거야.”
이어진 겨울의 추궁에 버들은 그냥 자는 척을 했다. 사업하는 사람이 저렇게 허술해서 큰일이다. 사나이가 정정당당해야지. 내가 너를 그렇게 키웠냐며 겨울은 문 너머에서 오랫동안 시끄럽게 굴어 댔다. 다음날에도 겨울은 퇴근하자마자 어김없이 버들의 방에 들어왔다.
“너 어제처럼 연락 없이 또 늦어 봐. 그땐 진짜 혼날 줄 알아.”
“알았어. 그러는 형은…… 레스토랑에 안 올 거면 미리 연락해.”
“그걸 누구한테 연락하라는 건데.”
“나.”
“네가 뭔데.”
코로 웃던 겨울이 버들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제 이름이 찍힌 레스토랑 회원증을 받아 든 버들이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겨울이 와인과 스테이크가 훌륭하다며 칭찬을 덧붙였다가 어느새 제 막냇동생이 스테이크에 와인을 곁들일 수 있는 나이란 걸 자각하고선 감회를 남달리 했다.
* * *
황 대표가 커피를 내렸다. 창밖의 세상은 이제야 동이 트기 시작한지라 아직은 어슴푸레하다. 환기를 시키기 위해 창문을 열자 서늘한 바람이 기다렸단 듯 휘몰아쳤다. 미약한 두통이 어젯밤부터 이어지고 있었다. 데스크에 팔꿈치를 괴고 엄지 손끝으로 짓누른 관자놀이가 뜨끈뜨끈하다. 황 대표의 손가락 사이 끼워져 있던 볼펜이 툭 떨어졌다.
일정이 빠듯하게 잡혀 있는 날이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억지로나마 잠깐 눈을 붙여 두는 게 컨디션에 도움이 될 테지만 어디까지나 생각일 뿐이다. 침대에 눕는다고 한들 쉽게 잠들 수 없을 거란 걸 미리 알았다. 이러나저러나 괜한 시간만 버리는 짓이다.
그대로 차 키를 들고 황 대표가 수영장으로 향했다. 오픈 전이라 아무도 없는 시간이었다. 크게 팔을 휘저으며 물살을 갈랐다. 물 밖으로 나와 가쁜 호흡을 정리하는 그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좌우로 목을 뚝뚝 꺾으며 수건을 챙겼다. 걸을 때마다 등과 허벅지 근육들이 사납게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