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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우연한 것에서 비롯된 (3) (3/24)

03. 우연한 것에서 비롯된 (3)

전투적이고 왁자지껄한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심란한 버들이 홀로 동떨어져 있었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 팔꿈치로 툭툭 건드려 왔다. 눈이 마주치자 시원한 입매가 씩 웃어 보였다. 허락도 맡지 않고 정민이 들고 있던 식판을 버들의 맞은편에 내려놨다. 운동하는 애라 그런지 먹성이 좋나 보다. 볶음밥이 무슨 산처럼 수북하게 쌓여 있다.

“우리 과에서 조만간 놀러 갈 건데 너도 끼어라.”

“곧 시험인데 무슨.”

정민이 인상을 썼다.

“시험이 중요하냐.”

“과제도 많아.”

갑자기 간지러운 눈가를 긁적이며 버들이 대꾸했다. 식어 버린 국물을 휘저었다. 조막만 한 두부와 유부 몇 개가 딸려 오는 걸 버들이 다시 담갔다.

“소꿉장난해?”

“……죽을래?”

크게 뜬 밥을 입에 넣으면서 정민이 말을 걸었다.

“봄 타?”

“응?”

“입맛 없어 보이는데?”

“그냥, 좀.”

며칠 전 호텔 레스토랑에서 만난 황 대표가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면서 정신을 빼놓고 있었다. 화장실에 간다고 나가셨는데 중간에 길을 잃어버린 게 아닐까 걱정이 된다.

정민이 놀러 갈 장소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 시골 할아버지 댁인데 거기 가면 산도 있고, 강도 있고, 계곡도 있어서 너도 가면 분명 마음에 들어 할걸?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던 만큼 버들은 이래저래 시큰둥한 반응뿐이었다.

* * *

시나리오가 완성됐다. 가장 큰 난관인 캐스팅을 앞두면서 연속으로 회의가 잡혔다. 여럿 배우들이 물망에 올랐지만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회의에 지친 직원들이 퀭한 좀비 같은 몰골로 뿔뿔이 흩어졌다. 답답하게 조이고 있던 넥타이를 두 대표가 느슨히 풀어 내렸다.

“유 대표.”

황 대표가 운을 뗐다.

“그날 말이야.”

“그날이 언젠데. 나 거기 티슈 좀.”

“우리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했었잖아.”

“새끼가 곱게 좀 주지. 그걸 던져서 주냐?”

못마땅한 겨울이 욕을 내뱉었다.

“아. 맞다. 내 새끼 케이크 사 줘서 고맙다. 맛있었다고 하더라.”

“…….”

“우연히 만났다면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게 끝이야?”

“뭐 더 있어야 돼?”

“아니.”

비서가 내온 커피 잔에 황 대표가 손을 뻗었다. 차를 끌고 호텔을 벗어났을 땐 늦은 새벽이었다. 겨우 별 몇 개가 떠 있는 게 전부인 빈곤한 밤하늘처럼 도로 역시 한산했다. 버스 정류장이었나. 아니면 그냥 벤치였나. 희미한 가로등 아래 앉아 있던 인영을 그대로 지나쳤었다. 유 대표의 동생이란 걸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만약 새벽 내내 금쪽같은 자기 새끼를 바깥에 뒀단 걸 유 대표가 알았다면 벌써 난리가 났을 터였다. 그렇지만 그저 케이크를 사 줘서 고맙단 말만 흘린 걸 보아 심각할 건 없는 것 같다. 애초에 레스토랑에 나온 이유를 버들이 ‘저희 형도 만날 겸…….’이라고 말을 하기도 했었고.

그러니 늦는다는 연락도 당연히 서로 주고받았겠지.

“몇 살이야.”

“누구.”

“버들 씨.”

“아. 이제 대학교 2학년이야.”

어려 보이긴 했지만 미성년자는 아니었다. 황 대표가 한결 개운한 태도로 다시 진지하게 영화와 관련한 일 이야기를 이어 갔다.

* * *

모든 수업이 끝난 뒤 버들이 흡연이 가능한 공간 중 운동장이 보이는 벤치를 골라 앉았다. 열기를 담아 묵직해진 바람이 불어오면서 옷차림이 한결 가벼워졌다. 아직 꽃구경도 제대로 못 했는데 여름이 오네. 아쉬움은 잠깐뿐이었다. 꽃, 하니까 스위치를 누른 것처럼 버들의 머릿속엔 짙은 노란색을 뽐내는 커다랗고 건강한 해바라기가 피어났다. 황 대표에게 선물한 해바라기는 주인을 잃어버린 채 시들어 버렸다. 그걸 함부로 버리지 못하고 작업실 화병에 꽂아 뒀다.

“……친해지기 되게 어렵네.”

한숨을 내쉰 버들이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앞으로 돌려 담배를 꺼냈다. 입술 끝에 필터를 물고 라이터를 찾기 위해 한창 몸을 수색 중이었다. 황 대표님은 담배 피울까? 하루 내내 황 대표의 생각은 이런 식으로 이어졌다. 밥상머리를 앞에 두면 황 대표님은 식사했을까 궁금해지고, 차를 타고 이동할 때면 황 대표님은 지금 어딜까 궁금해졌다.

“몸에 좋지도 않은 거 뭐 하러 피우냐.”

운동장에서 한참 흙먼지를 일으키며 뛰어다니던 정민이 버들을 발견하고 글러브를 낀 채로 다가와 참견했다.

“부러워서 그래?”

“그게 부럽겠냐?”

“너도 피우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야?”

“나 체대야.”

“그래서 뭐.”

“몸 관리해야 돼서 못 펴.”

“자랑하지 마.”

“어떤 점이 자랑으로 들린 거야?”

바람이 불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버들이 따지듯 물었다.

“너 그런데 술은 마시잖아.”

“마시지. 술은.”

“술이나 담배나.”

“그냥 한잔 정도야. 분위기 맞추기 위한 그런?”

아아. 사회생활이란 건가. 버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담배 케이스를 가방에 챙겨 넣는 버들의 꼴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중이었다. 고개를 휙 돌린 버들과 예기치 못하게 눈이 정통으로 마주친 정민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저기 너 부르는 소리 아니야? 가서 운동해. 운동하는 중이었던 거 같은데.”

“그냥. 음료수 내기 경기야.”

“안 가도 돼?”

“응. 괜찮아.”

버들이 자기를 빤히 응시해 오자 정민의 목이 빨개졌다.

“뭘 보냐.”

“너 영어 못 하지?”

“……갑자기 영어는 왜?”

“너 그 모자 쓰지 마.”

“왜?”

정민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뜻 되게 이상해.”

“야. 이거 디자이너 제품이거든?”

“아무튼. 그거 뜻 되게 이상해.”

정민을 뒤로하고 버들이 유유히 교문으로 향했다. 핸드폰을 넣어 둔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려서 꺼내어 받았다.

-버들아.

“나 지금 수업 중이야.”

-다 끝난 거 알고 전화한 거니까 까불지 마라.

콧방귀를 뀌며 겨울이 말을 받아쳤다. 입술에 힘이 들어가면서 버들의 턱 아래에 작게 호두가 생겼다.

-이쪽으로 와.

“어디? 회사?”

-어.

“왜? 뭐 시킬 거 있어?”

-밥이나 먹자는 거지.

버들의 표정이 시큰둥하다. 바쁘다고 막 거절을 할 참이었다. 옆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비서일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단 걸 알기에 버들이 애써 들끓는 속을 모르는 척했다.

-차 보내 놨으니까 그거 타고 와.

“누구랑 밥 먹을 거야?”

-나랑. 유 회장님이랑. 유 이사님이랑.

“아…….”

-황 대표랑.

버들이 손으로 이마를 가렸다. 손을 내렸을 땐 말간 버들의 얼굴이 다소 상기되어 있었다. 바삐 교문을 나오자 겨울이 보냈단 차가 보였다. 그쪽으로 뛰어가려던 버들이 과일의 단내에 잠시 주춤거렸다. 날씨가 더우니까 골이 얼얼할 정도로 시원한 주스가 당긴다. 캐릭터로 꾸며진 과일 간판이 앙증맞다. 주스를 주문하고 그 잠깐을 기다리면서도 버들은 몇 번이나 시계를 확인했다. 빨리 만나고 싶다.

버들이 대표실 문을 열었다. 데스크 앞에서 막 벗어나던 참인 겨울이 자기 눈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법석을 떨어 댔다. 다리를 꼬고 앉아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는 황 대표를 발견한 버들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떨린다. 비틀거리며 걸어간 겨울이 황 대표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곤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치워라. 얼굴.”

“새끼야. 나도 바로 후회했거든?”

서로를 잠깐 째려봤다.

“형.”

겨울을 부르면서도 버들의 시선은 황 대표에게 향해 있었다. 황 대표가 다시 핸드폰에 집중했다. 이런 식으로 우연히 부딪히게 되는 날이 쌓이다 보면 서로 전화 통화도 할 수 있을 만큼 친해지지 않을까? 조급하게 굴지 않기로 다짐했다.

“버들아. 어디에 있어?”

“형 바로 앞에 있잖아.”

“눈부셔서 보이지가 않네.”

꼴값을 떠네. 10분 전까지만 해도 직원들에게 온갖 성질을 버럭버럭 부려 대더니 같은 사람인가 싶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얼굴 근육 다 허문 채 팔불출 짓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겨울을 보며 황 대표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쪽으로 와.”

가방을 내려놓은 버들이 겨울이 가리킨 자리에 가서 앉았다.

“학교 잘 갔다 왔어?”

“그렇지 뭐.”

“그건 뭐야?”

겨울이 턱으로 버들이 들고 있는 비닐봉지를 가리켰다. 아. 버들이 정신을 퍼뜩 차렸다. 서둘러 회사에 오고 싶은 마음에 주문한 음료 세 개 중 두 개를 취소했다. 딱 하나 사 들고 온 주스를 버들이 꺼내기 전 꼴깍 침을 삼켰다.

“과일 주스인데…….”

말끝이 바닥을 긴다.

“형은 딸기 싫어하지?”

“뭔데. 그거 딸기야?”

버들이 여러 번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기. 황 대표님. 이거 드세요.”

겨울의 무릎을 건너, 황 대표 앞에 버들이 얼른 주스를 내려놨다. 빨대가 분홍색이다. 플라스틱 컵 안에 얼음이 미끄러지면서 청아한 소리를 냈다.

“형 거는 없어?”

“……딸기밖에 안 팔아서.”

“와. 그럼 다른 거라도 사 와야지.”

버들의 하얀 얼굴을 겨울이 흘겨봤다.

“자식새끼 키워 봤자 다 소용없는 짓이라더니.”

조급하지 않기로 다짐한 지 이제 10분 남짓 되었을까.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의식이 된다. ……왜 안 드시지?

겨울이 잠깐 자리를 떴다. 등 뒤의 창문으로 햇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황 대표님. 과일 주스 싫어하세요?”

주스는 바라보지도 않은 채 황 대표가 고마워요, 낮게 중얼거렸다. 워낙 잘나 남들이 베푸는 호의가 익숙했다. 거절하거나 사양하면 왜 거절하는지, 왜 사양하는지 이유를 물어 오는 게 대다수다. 피곤한 걸 피하려면 무연히 받아들이는 게 차라리 낫다. 어차피 버려 버리면 되니까.

“과일, 어떤 거 좋아하세요?”

“…….”

“저희 학교 앞에 과일 주스 파는데 다 맛있거든요.”

“…….”

“바나나랑 키위랑 아, 자몽도 있어요.”

“…….”

“제가 다음에 또 사다 드릴게요.”

그제야 황 대표의 눈길이 주스에 닿았다. 잠깐 스친 것과 마찬가지다. 무심한 태도로 황 대표가 고개를 기울였다. 저걸 들고 왔을 버들의 손이 언제나 그랬듯 흉했다. 인상이 써지기 전 황 대표가 알아서 표정 관리를 했다.

“유 대표는 어떤 과일 좋아해요?”

“아. 저희 형은, 바나나요.”

교묘히 주제를 바꿔 넘겼다.

“…….”

“…….”

정적이 찾아왔다. 과일 별로 안 좋아하나? 버들이 계속 황 대표를 신경 썼다.

“가자. 밥 먹으러.”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겨울이 두 사람을 재촉했다. 겨울이 운전하는 차로 다 같이 이동했다. 안전벨트를 꼭 쥐고 있는 버들의 폼이 쓸데없이 야무지다. 시선은 계속 정면이었다. 제 앞의 조수석에 탄 황 대표가 얼핏 보였다. 유 대표와 황 대표가 끊이지 않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사업에 관련된 내용이라 어려워 알아듣지 못하지만 낮게 울리는 황 대표의 음성만은 피부로 스며드는 거 같았다. 버들이 작게 재채기를 터트렸다.

“버들아. 추워?”

곧장 고개를 뒤로 돌려 겨울이 물었다.

“아니. 안 추워.”

“손 시려?”

“아직.”

손끝과 발끝이 차가워 사계절 내내 고생이었다. 발이야 양말이랑 신발을 신으면 됐지만 손은 무대책이었다. 장갑을 낄 수 없는 여름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다 터득한 노하우대로 버들이 티셔츠 아래를 들춰 손을 집어넣었다. 신체 중 가장 체온이 높은 제 배에 차가워져 꼭꼭 찌르듯 아픈 손끝을 달랬다.

식사가 나오기 전 가볍게 시작된 경매가 점점 활기를 띠어 갔다. 치열하게 경쟁 중인 유 회장과 첫째, 유 이사의 표정이 똑같이 심각해졌다. 엎치락뒤치락하던 끝에 경매의 승자는 유 회장으로 결정이 나면서 며칠 전 버들이 마무리한 조각품을 차지하게 됐다. 평소보다 많은 용돈을 얻게 된 버들의 표정이 처음엔 얼떨떨해하더니 금방 환해졌다. 형들이 꽂아 준 카드가 여러 개지만 딱히 그걸 써 본 적은 드물었다. 백화점에서 황 대표에게 주려고 산 머플러 값도 조각품을 팔아 모은 거였다.

“이거는요…….”

막 경매 낙찰이 된 제 작품에 대해 버들이 어떤 것에 영감을 받았고, 또 작업 시간은 얼마나 소요가 되었는지 조곤조곤 설명했다. 사고 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 할 말이 있으니 같이 식사를 하잔 유 회장의 호출에 가히 두려웠다. 그래서 겨울은 황 대표를 방패로 삼고 버들을 무기로 내세웠다. 작전은 당연히 성공했다. 화기애애한 식사 자리에 여 보란 듯 유 대표가 팔꿈치로 툭툭 건드리자 황 대표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유 대표야 원래부터 정상은 아니었으니까 이해는 했다만. 평소 근엄한 유 회장과 냉혈한 유 이사가 이렇게 헤벌쭉 웃는 모습을 처음 보는 거라 적응이 안 된다.

“형. 철 좀 들어.”

급하게 앞당겨야 하는 일정으로 인해 유 회장과 유 이사가 나란히 자리를 뜬 뒤였다.

“형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뭐 사고 친 거 있지?”

“여자 문젠가…….”

“잘한다. 진짜.”

버들이 콧잔등을 찌푸렸다.

“내일, 내일 철든다는 게 벌써 몇 번째야.”

황 대표가 식사를 이어 갔다. 고깃덩어리에 칼끝을 찔러 넣자 접시 위로 피가 고였다.

“너 자꾸 형 혼낼 거야?”

“형도 나한테 바가지 긁잖아.”

“그런 적 없어.”

겨울이 발뺌했다.

“전에 나 집에 늦게 들어갔을 때 엄청 바가지 긁었잖아.”

“넌 그때 더 혼났어야 돼. 세상 위험한 줄 모르고 어딜 연락도 없이.”

능청스러웠던 겨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근데. 둘이 친해?”

겨울이 턱 끝으로 버들과 황 대표를 까닥였다.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무슨 말이야. 그게?”

괜스레 조마조마해진 버들의 목소리 끝이 떨렸다.

“아니. 레스토랑에서. 케이크만 먹진 않았을 거 아냐.”

황 대표의 시선이 유 대표를 향했다.

“그러고 보니까 혼날 사람은 황 대표, 너네.”

버들이 다급히 말려 보았지만 이미 겨울의 눈이 탐탁지 않게 뜨인 뒤였다.

“케이크 먹이고 어디 가서 놀았어?”

“뭔 소리야.”

“케이크만 먹지 않았을 거 아냐.”

잠시 황 대표가 버들을 주시했다.

“새벽이 다 뭐냐. 아침 다 되는 시간에 애를 돌려보낸 게 말이 돼?”

조명이 어두웠지만 새빨개진 버들의 얼굴은 잘 보였다. 황 대표가 차분히 와인을 들이켰다. 시선은 계속해서 버들을 향한 채였다. 새벽녘 호텔을 나섰을 때 스쳐 지나가며 본, 협소한 가로등 불빛 아래 앉아 있던 버들의 모습이 시간이 지났음에도 꽤 또렷하게 떠오른다. 유 대표와 늦게라도 만났을 줄 알았는데 그러기는커녕 늦는단 연락도 주고받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럼 그 시간에 뭐 하러 거기 앉아 있었던 거지?

“그때 나 황 대표님이랑 안 있었어. 내 친구들이랑 있었어.”

“친구? 친구들 누구?”

초조한 것 같은 버들을 황 대표가 외면했다. 어쨌든…… 자신이 심각할 건 없었다.

곧이어 디저트가 종류별로 한 상 차려졌다.

“나 이거 다 못 먹어…….”

“새끼야. 노력이라도 해.”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황 대표가 버들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스푼을 물고 있는 버들의 입술이 도톰했다.

“버들 씨.”

황 대표가 낮은 음성으로 저를 부르는 것에 버들은 순간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었다.

“살 빠졌어요?”

“아니야. 내 새끼 몸무게 똑같아.”

황 대표의 물음에 겨울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저 살 빠진 거 어떻게 아셨어요?”

“너 살 빠졌어?”

황 대표 때문에 잠도 못 자고 입맛도 잃어 체중이 준 건 당연했다. 겨울의 닦달에 버들이 3킬로그램 정도 살이 빠졌다며 솔직히 고했다. 느릿하게 황 대표가 턱을 괴었다. 그러곤 버들을 노골적으로 바라봤다. 볼살은 똑같이 보동보동하나 어깨의 폼이 좀 더 가느다래졌다. 그걸 보고 살이 빠졌단 걸 알 수 있었다.

칼로리 높은 아이스크림을 푹 떠먹여 주려는 겨울이 유난스럽다. 난감한 기색으로 버들이 고개를 휙 돌려 피했다. 그러는 와중에 “버들 씨.”라고 존댓말을 써 준 황 대표를 살짝 훔쳐봤다.

식사가 끝난 뒤 우물쭈물하며 버들이 황 대표의 뒤에 섰다.

“잘 먹었습니다.”

“그래. 오냐.”

계산은 황 대표가 했는데 버들의 인사는 겨울이 받았다. 진동으로 울리는 핸드폰을 들고 겨울이 먼저 내려가 있으라며 자리를 피했다. 황 대표와 버들이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좁은 공간에서 단둘이 있게 되다니. 버들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 쭉쭉,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의 속도를 늦출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무연히 지나치는 시간이 아깝다.

그래서 용기를 냈다. 버들이 황 대표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그러다가 홀리듯 빠져들었다.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킨 버들의 목울대가 올각거렸다. 작은 소리였지만 그래도 기척이 느껴졌을 텐데 황 대표는 낮아지는 숫자만 바라보며 서 있는 채다.

“……예뻐요.”

느릿느릿, 감상이 제멋대로 흘러나왔다. 황 대표의 고개가 버들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황당하다. 나한테 하는 말이야?

“속눈썹이랑 코끝 모양이랑 손톱이랑.”

“…….”

“예뻐요.”

황당하니까 헛웃음이 켜졌다.

“그리고 있잖아요.”

슬랙스 아래 드러난 황 대표의 발목을 버들이 멍하게 바라봤다.

“복숭아뼈도 예뻐요.”

“…….”

“만져 봐도 돼요?”

허락한 적 없는데 이미 황 대표의 앞에서 버들이 허리를 숙인 뒤였다. 뭐 말릴 틈도 없이 버들의 팔이 황 대표를 향해 뻗어졌다. 살갗에 닿은 버들의 서늘한 손끝 체온에 황 대표가 움찔거렸다. 그리고 움켜쥐듯 세게 버들의 팔을 붙잡았다. 거기에 놀란 버들이 순간 중심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다. 얼굴이 푹 파묻힌 곳이 황 대표의 바지 앞섶이었다. 욕을 짓씹으며 황 대표가 잡고 있던 버들의 팔을 강하게 올려 일으켜 세웠다. 뜨거운 콧김이 얼굴 가까이에서 쌕쌕 쏟아졌다. 발그레한 버들의 양쪽 뺨에 황 대표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때 일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 * *

버들이 이불을 코 아래까지 끌어당겼다. 역시나 뒤척거림이 시작됐다. 답답하다. 몸에 열이 도는 거 같다. 결국 이불을 걷고 일어나 앉은 버들이 제 얼굴을 조심히 더듬거려 보았다. 그러자 사고에 가까웠던 접촉이 떠올랐다. 얼굴 전체를 뒤덮었던 황 대표의 다리 사이 감촉이 생생하다.

묵직했지? 엄청. 어마어마하게.

“……큰가 봐.”

엄청.

어마어마하게.

잠 못 이루는 밤이 지나간다.

새벽이 지나며 바깥이 희끄무레하다. 적막함이 안개처럼 내려앉았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끔 문을 닫기 위해 땀까지 삐질 흘리고 있는 겨울의 뒤태가 영락없이 도둑놈이다. 주방과 2층을 번갈아 가며 주시했다. 다행히 잠잠하다. 그제야 겨울은 모양 빠지게 굽히고 있던 허리를 떳떳이 폈다.

“아. 깜짝이야!”

호기롭게 물 한 잔을 벌컥벌컥 들이켠 뒤 유유히 걸음을 옮기던 겨울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만큼 심장 박동이 순간 치솟았다. 소파에 누군가 있다.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는 버들을 발견한 동시에 겨울의 호기로움은 폭삭 무너졌다.

“……버들아.”

작게 말을 걸었다.

“형 출근한다, 이제.”

“…….”

“돈 많이 벌어 올게. 알았지?”

“…….”

“갔다 올게.”

구두에 한쪽 발을 꿰던 겨울이 문득 버들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버들의 눈꺼풀이 느릿느릿 움직인다. 겨울이 다시 어물쩍 집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이 몇 시냐며 당장 으름장을 놓거나, 주정뱅이는 필요 없다고 쫓아내고도 남았을 텐데 버들의 입술이 꾹 다물린 채 열릴 줄을 모른다. 옆에 앉은 겨울이 말간 버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대체 누구 새끼기에 이렇게 잘났지?

“유버들.”

정면만 바라보며 버들이 계속 멍하다. 앞에 뭐가 있나 덩달아 주시했지만 특별할 게 없다. 겨울이 버들의 볼을 콕콕 찔러 보았다. 말랑말랑한 감촉에 한 번 찌를 거 두 번 찌르게 되고, 두 번 찌를 거 세 번 찌르게 된다. 그러다 보니 금방 열 번이 넘어갔다. 하지 말란 짜증을 예상하고 저지른 짓인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뭐지. 이쯤 되니 불안해진다. 외박했다고 새롭게 주는 벌인가.

“버들아.”

결국 버들의 턱을 잡아 제 쪽을 보게 했다.

“……형.”

한참 뒤 버들이 자그맣게 웅얼거렸다.

“왜 그래? 형한테 너무 술 냄새나?”

“…….”

“그래서 무시하기로 했어?”

“…….”

“술 냄새는 씻으면 되는 거잖아. 새끼야.”

“…….”

“외박도 이제 안 해.”

“…….”

“그러니까 남자답게 한 번만 용서해 줘. 응?”

어쩐 일인지 겨울이 차분한 어조로 제 잘못을 순순히 인정했다. 버들의 호흡이 찰나 흐트러졌다. ‘남자답게’란 말이 가슴에 콕 박히면서였다. 몽롱했던 버들의 눈동자가 차차 또렷해졌다. 물이라도 떠 와서 먹이려고 겨울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다. 그런 겨울의 허리를 버들이 덥석 끌어안았다.

“형…….”

오래 뜸 들여 저를 부른 버들의 이마를 겨울이 짚었다. 다행히 열은 없는지 서늘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있잖아. 형.”

“어. 말해. 뭐야.”

나쁜 꿈이라도 꾼 건가. 마음을 놓지 못하고 겨울이 계속 걱정스레 버들을 살폈다.

“나…….”

통통한 제 아랫입술을 버들이 질끈 물었다가 놓았다.

“……되게 건강한가 봐.”

몽정했다. 나이가 몇인데 몽정이 물론 처음은 아니었다. 꿈에는 황 대표가 나왔다. 실내였는지, 실외였는지 장소까지 기억은 안 나지만 황 대표와 나란히 앉아 있었던 건 확실했다. 마디마디 참 고운 황 대표의 손가락이 제 손과 얽혀 들면서 깍지가 껴졌다. 그 은밀한 느낌에 아랫배가 찰랑찰랑 간지러웠다.

“건강하면 좋은 거지.”

“형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뭐야. 진짜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라며 뒤에 겨울을 남겨 두고 제 방에 들어온 버들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같은 남자고,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꿈속에서 손을 잡았다고 몽정을 하다니.

얼굴을 식히는 데 집중하던 버들이 불쑥 서랍을 열었다. 머플러와 치즈케이크 박스에 장식되었던 빨간 리본을 지나쳐 손에 쥔 건 가죽으로 된 수첩이었다. 뉴욕에 있었을 때 우연히 주운 것이었다.

손끝으로 수첩을 쓸어 보던 버들이 아무 장이나 펼쳐 종이 냄새를 깊숙이 들이마셨다. 정말 오랜만이다. 이렇게 만져 보는 것도. 이렇게 냄새를 맡아 보는 것도. 수첩 속에 휘갈겨 적힌 글씨는 뜻밖에 한글이었다. 소설처럼 은밀한 느낌으로 적혀진 그 내용을 보고 태어나 처음 몸이 달았다.

……그러니까, 흥분했었다. 귀 뒤로 땀이 흐를 만큼 쩔쩔맸었다. 꼿꼿하게 서 버린 제 아래를 그저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는 것으로 버들은 태어나 처음 파정을 맞았었다.

한 손에는 머플러, 한 손에는 수첩을 든 버들이 침대에 누웠다. 머플러에 남아 있는 희미한 황 대표의 향수 냄새와 수첩의 축축한 종이 냄새가 의외로 잘 어울린다. 높다란 천장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데 어찌된 일인지 멀미가 난 것처럼 온 세상이 소란스러운 거 같다.

잠들지 못하고, 입맛을 잃고, 울적해지고,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고, 보고 싶고, 만나면 기쁘고. 따로따로 떠오른 감정들이 하나로 뭉쳐지니까…… 곧 터져 버릴 것처럼 심장 박동이 치솟았다.

유독 동그란 달이 떴다. 활짝 열어 둔 창문 밖으로 차 소리가 들리자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던 버들의 표정이 순간 환해졌다. 하루 중 이때를 가장 기다리고 있었다. 흙이 묻어 지저분한 손을 씻고 물기를 앞치마에 대강 문지르며 나오니 이제 막 귀가한 겨울이 보였다.

“안 잤어?”

“아직 10시밖에 안 됐잖아.”

“그럼 형 기다렸어?”

“응.”

졸졸 따라오는 버들에게 겨울이 어깨동무를 했다. 아, 왜 이래. 무겁다며 싫어하는 버들의 뾰족한 반응에 오히려 더 체중을 실었다. 허리가 반으로 숙여진 채 버둥거리는 버들을 겨울이 와락 껴안았다가 놓아줬다. 피가 쏠리는 바람에 빨개졌던 버들의 얼굴이 점차 원래대로 돌아왔다. 겨울의 핸드폰을 손에 쥔 버들이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 아직 여자 친구랑 안 헤어진 모양이다. 겨울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버들이 궁금한 걸 물었다.

“바빴어?”

“바쁘지. 항상.”

“그럼, 저녁은?”

“응?”

“저녁 먹었어?”

“……뭐.”

애매한 대답이었다.

“먹었어? 안 먹었어?”

“그냥 요기 정도만 했어. 왜?”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왜 저녁을 안 먹어?”

“대충 먹기는 했다니까.”

“먹으려면 확실히 먹어야지.”

갈아입을 옷을 고르다 말고 겨울이 뿌듯하게 가슴을 폈다. 요 근래 버들이 제 방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었다. 하루의 피곤이 풀린다.

“왜 이렇게 예쁜 짓 하지?”

“……내가?”

금시초문이란 얼굴로 버들이 뚱해졌다.

“형이 그렇게 걱정돼?”

성의 없이 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이 씻고 나오는 동안 얌전히 앉아서 기다렸다.

“형. 오늘 바빴다고 그랬잖아. 그럼 황 대표님도 바빴겠네?”

“지금 회사 자체가 정신없을 때야.”

“황 대표님도 저녁 식사 안 하셨어?”

“글쎄.”

“무슨 대답이 그래?”

관심 없단 겨울의 말투에 한숨이 절로 폭 새어 나온다.

“황 대표님, 배고프면 어떡해.”

“배고프면 뭐. 알아서 뭐든 찾아 먹겠지. 어린 애도 아니고.”

“그래도 끼니는 제때 챙겨 먹는 게 좋은 거잖아.”

“그러는 너는 삼시 세끼 다 챙겨 먹었냐?”

“황 대표님은 어떤 음식 좋아해?”

“알 게 뭐야.”

카레 좋아하시면 좋겠다. 나 카레 잘 만드니까. 버들의 혼잣말이 드라이기의 과한 소음을 뚫고 제대로 훅훅 귓구멍에 처박혔다. 가만, 묘하게 이상하단 생각이 든다. 우선 드라이기를 끈 겨울이 젖은 머리를 대강 수건으로 훑었다. 거울을 통해 비춰지는 버들을 가늘게 뜬 눈으로 흘겨봤다. 열이 받는다. 며칠 내 이런 패턴이었다. 처음만 제 걱정이지 그다음부터 버들의 관심은 황 대표로 퍼져 나갔다. 아, 이걸 왜 이제 알아차렸지?

“형. 형.”

버들이 즐겁게 종알거렸다.

“황 대표님, 매운 거 잘 먹어? 형은 친구니까 알지?”

겨울이 팔짱을 꼈다.

“황 대표님…….”

“아, 잠깐만.”

버들의 말을 겨울이 단호히 가로막았다. 버들에게 새로운 입버릇이 생겼는데 그게 ‘황 대표’였다. 황 대표님은…… 하고 운을 떼는 게 부쩍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황 대표 얘기는 왜 자꾸 해?”

“그게 아니라, 형. 황 대표님, 성격 진짜 좋은 거 같아. 그치?”

웃긴다. 진짜.

“나는 황 대표 그 새끼처럼 돈 밝히고, 성격 더럽고, 싸가지 없는…… 아!”

황 대표를 나쁘게 말하는 겨울의 못된 주둥이를 버들이 가차 없이 손끝으로 때려 응징했다. 표정도 새치름하다. 황당해하던 겨울이 도망가려는 버들을 어렵지 않게 붙잡았다. 그리고 곧장 바깥 다리를 걸었다. 겨울의 팔에 아등바등 매달려 어떻게든 버텨 보고자 노력했지만 힘에서 밀린 버들이 기어이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야 말았다. 시무룩하게 버들의 눈썹이 처졌다. 그러기도 잠깐이다. 벌떡 일어나 오목조목 겨울에게 따졌다.

“황 대표님 착해.”

“네가 뭘 안다고.”

“하나를 보면 열을 알아.”

“그 하나가 뭔데?”

“예뻐. 예쁜 사람은 성격 좋아.”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다니. 저 새끼. 위험한 새끼일세.

“야, 인마!”

겨울이 버럭 큰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눈높이를 맞춰 버들에게 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형도 예쁘다고 말해.”

“유치하거든?”

예뻐 보이고자 턱 아래를 다소곳이 받힌 손이 민망해졌다. 갈수록 커지는 민망함을 감추고자 헛기침을 터트리며 겨울이 기절한 척했다. 그냥 좀 지나치지 버들이 그런 겨울을 집요하게 흔들었다. 그래도 끝까지 기절한 척하는 겨울의 감긴 눈을 버들이 억지로 손가락으로 들어올렸다. 순간 웃음이 터진 겨울이 마지못해 먼저 항복을 선언했다.

“형. 있잖아. 황 대표님한테 내 칭찬 좀 해 줘.”

“네 칭찬을 뭐 하러 해.”

“잘 보이고 싶으니까 그렇지. 친해지고 싶단 말이야.”

“황 대표랑 네가 친해져서 뭐 하게.”

“형 친구기도 하고. 친해지면 좋은 거 아니야?”

겨울이 버들의 하얀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크게 말썽을 피운 적도 없었고, 특별한 것에 욕심을 부린다거나 떼를 쓰는 경우도 없었다. 뭘 사 준다고 하면 오히려 마다하는 편이었다. 남다른 스케일로 다섯 형제들이 사춘기를 요란 법석하게 보낸 것에 비해 버들은 늘 한결같았다. 그마저 버들의 성격다웠다.

버들이 뉴욕에 가 있느라 떨어져 지냈을 때조차 겨울은 하루에도 여러 번 화상 통화를 걸어 대며 제 막냇동생을 거의 옆구리에 끼고 살았었다. 그만큼 버들의 대해선 샅샅이 파악하고, 이해하고, 알고 있노라 생각했는데 불현듯 심란함이 번져 왔다. 내가 모르는 게 있나? 놓친 게 있는 건가? ……아닌데.

“너 황 대표 타령 왜 하는 거야?”

“멋있잖아.”

“아깐 예쁘다면서?”

“당연하지.”

“뭐가 당연해?”

“멋있기도 하고 예쁘기도 하니까.”

겨울이 질색했다.

“조각, 피사체로서?”

버들이 감탄했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채 웃음을 담는 눈매가 선하다.

“야, 인마. 지금 웃을 때 아니야.”

“……그럼?”

발육이 늦되더니 때늦은 사춘기가 온 건가. 황 대표에 관한 버들의 과한 관심을 겨울이 동경으로 초점을 맞췄다. 닮고 싶은 롤모델, 뭐 이런 건가 싶은 거다.

“위로 형이 다섯이나 있고 그중에서 제일 잘생긴 나랑 같이 살고 있으면서 왜 황 대표야.”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몰라, 새끼야.”

괜히 동생 뺏긴 거 같아 부아가 치민다.

“형은 안 멋있어? 멋있잖아.”

“수염 좀 깍지?”

“야. 이게 멋이란 말이야.”

콧방귀 뀌며 버들이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 * *

사옥에 도착한 버들이 대문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버들이 온 걸 강아지들이 알아차리고선 대문의 작은 틈새로 주둥이를 내민 채 반가워서 난리가 났다. 벌름거리는 까만 콧구멍이 발랄하다. 앞에 쪼그려 앉아 톡톡 두드리자 손끝에 축축함이 묻어났다.

조심히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때만 기다렸던 강아지들이 껑충껑충 뛰어 댔다. 볼 때마다 쑥쑥 크는 거 같다. 잘 있었어? 밥 잘 먹었어? 버들의 정다운 안부에 강아지들의 꼬리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빨라졌다. 비서 자리가 비어 있다. 손부터 씻은 다음 버들이 알아서 제 마실 것을 챙겨 겨울의 대표실로 향했다. 인기척에 뒤를 돌자 막 자리에 앉으려던 비서와 눈이 마주쳤다.

“아. 유 대표님, 영화 관계자 미팅 때문에 지금 자리에 안 계십니다.”

네. 고개를 끄덕인 뒤 버들이 대표실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 온도가 쾌적하게 맞춰져 있다. 익숙하게 가방과 컵을 내려놓은 뒤 버들이 에어컨 앞에 섰다. 옷자락을 붙잡고 한참 펄럭이며 서 있자 배꼽 부근이 싸해진다. 시원하다.

“겨울이 형은 좋겠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 종일 황 대표님이랑 있을 수 있는 거니까. 그런 면에서 금동이랑 감자도 부럽다. 나보다 훨씬 더 황 대표님을 우연히 볼 수 있는 확률이 높으니까. 부러움에 버들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에어컨을 뒤로하고 버들이 소파에 앉았다. 겨울과 나란히 앉던 자리가 제 지정석이었지만 슬그머니 그 맞은편으로 옮겨갔다. 황 대표가 매번 앉던 자리였다. 버들의 입매가 부드러워졌다. 고작 황 대표가 앉던 자리에 앉아 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밴다. 해바라기가 상하지 않게 조심히 테이블에 올려 뒀다. 오늘은 황 대표님이랑 꼭 만났으면 좋겠다. 막연히 희망하며 버들이 가방을 열어 책을 꺼냈다.

공부를 좀 하다가, 탄산수를 들이켰다가, 에어컨 바람 좀 쐬었다가, 버들이 하품했다. 강하게 들어오는 햇볕에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는 먼지들이 꼭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나른한 오후다. 무거워진 눈꺼풀을 비볐다. 그래도 눈이 가물가물하다. 잠깐만 쉬어야겠다. 버들이 소파에 누웠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 * *

자기 대표실에 있던 황 대표가 겨울의 대표실로 향했다. 복도를 걸으며 고개를 좌우로 꺾자 뚝뚝 피곤한 소리가 났다. 영화가 곧 제작에 들어간단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시나리오 내용까지 멋대로 추측하며 온갖 군데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었다. 어떤 관심이 됐건 아직은 시기상조다. 쓸데없는 소문들이 만들어지면 작품에 득이 아니라 독이 되니까. 황 대표가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유 대표에게 걸려 온 전화일까? 확인한 발신인에 소희의 이름이 찍혀 있다. 황 대표의 입에서 한숨이 샜다. 요 며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소희에게 자주 전화가 걸려 왔다. 서로 재미있게 잘 놀아 놓고선 왜 이러실까. 영화 들어가는 것에 관심을 보이며 제 매력을 깎아 먹고 있었다. 전화는 받지 않았다.

겨울의 대표실 문을 열자 색색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소파를 독차지한 채 반듯하게 누워 잠이 든 버들이 보였다. 금방 회사에 도착한단 메시지를 유 대표에게 받고 유 대표의 대표실로 넘어온 황 대표가 인상을 썼다. 자기 동생이 와 있을 거란 말은 없었다. 황 대표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버들의 하얀 얼굴은 오늘도 변함이 없다. 살짝 벌어진 도톰한 아랫입술도 그렇고. 위로 둥글게 말려 있는 속눈썹도 그렇고. 직전까지 별생각 없었는데 버들을 보고 있자니 묘하게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으음……. 버들의 칭얼거림에 그 맞은편에 앉아 핸드폰을 내려다보고 있던 황 대표의 고개가 위로 들렸다. 손이 시린 버들이 잠결에 따뜻한 곳을 찾아 꼬물거렸다. 옷을 들춰 습관처럼 배꼽 주변을 만졌다. 그런 버들의 모습에 황 대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속살이 뽀얗다. 뽀얀 속살과 끝이 전부 갈라진 것으로 모자라 조그맣게 멍이 생긴 손톱이 비교돼서 더 흉측하게 부각된다. 버들의 납작한 배를 외면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 순간이었다. 쿵! 소파에서 버들이 굴러 떨어졌다.

“김 실장. 욕 나오게 일처리 그 따위로 할 거야!”

억세게 문을 열고 유 대표가 들어왔다.

“뭐야.”

문 앞에 서서 제 동생과 황 대표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길 잠시. 유 대표가 냅다 인상을 찌푸렸다. 예. 제가 다 설명하겠습니다. 그게 뭐냐면……. 자기한테 물어본 말인 줄 알고 지레 겁먹은 김 실장이 차분히 상황을 풀어 나갔다. 유 대표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황 대표가 턱을 까닥이며 가리켰다. 핸드폰 너머로 얼핏 들려온 김 실장의 말을 그냥 흘려듣지 않았다. 정확히 숫자를 밝히는 부분에서였다. 유 대표를 향해 중요한 내용인 것 같으니까 집중해서 통화하라고 황 대표가 지적했다.

“야. 황 대표.”

통화가 채 끝나지 않았는데 유 대표가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으로 삿대질을 퍼부었다.

“너 버들이 밀쳤어?”

말도 안 되는 유 대표의 오해에 거르지 않고 욕이 튀어 나갔다.

“뭘 밀쳐. 버들 씨랑 나랑 서로 떨어져 있는 거 안 보여?”

밀치려고 해도 접촉이 있어야 하는 건데 생각만 해도 싫다. 유 대표의 시선을 따라 황 대표의 고개가 무심코 움직였다. 소파에서 굴러 떨어질 때 소리가 꽤 크게 났는데 버들은 잠에서 깨지 않았다. 길게 들이마시고, 짧게 내뱉는 호흡대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아랫배의 움직임이 일정하다. 옷에 반만 가려져 드러난 배꼽이 쏙 파여 하얗다. 사내새끼가 참 쓸데없다.

“나중에 다시 불러.”

“그게 언젠데?”

“한가해지면.”

“우리한테 한가해질 때가 있긴 해?”

수긍할 수밖에 없는 유 대표의 말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일정이란 미친 듯이 바쁘든가, 적당히 바쁘든가 둘 중 하나였다. 대표실을 유유히 빠져나가려던 황 대표의 앞을 유 대표가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가로막았다. 둘 다 훤칠하게 큰 만큼 바닥에 드리워진 그림자도 길쭉했다.

-대표님? 유 대표님!

재차 저를 부르는 김 실장에게 유 대표가 잠깐만 있어 보라고 대꾸했다.

곧바로 확인해야 하는 서류를 찾는 것도 급하고, 바닥에 퍼질러져 잠든 제 막냇동생을 챙기는 것도 급하고, 황 대표에게 시비를 거는 것도 급하고. 몸이 하나라 동시에 세 가지 일을 할 수 없단 게 억울해지는 순간이었다. 유 대표가 우선 버들을 안아 소파에 올려 두고 노트북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나 일해야 하니까 대신 좀 깨워.”

뻔뻔한 요청에 황 대표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나도 일하다가 왔어.”

“아, 좀 깨우라고. 그게 어려운 일이야?”

“네가 해.”

“내 새끼 저렇게 자다가 담 걸리면 어떡할 거야.”

“억지 좀 쓰지 마. 그게 내 탓으로 돌릴 일이야?”

“아, 좀 깨워.”

“네 새끼라며. 네 새끼니까 네가 깨워.”

티격태격, 말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공동 대표가 말이야. 네 일, 내 일 가려 하면 되겠어?”

“말 똑바로 해. 네 일, 내 일 가린 적 없어. 네가 네 일을 억지로 나한테 떠넘기려는 거지.”

둘 다 기본은 말로 먹고 살고 있는 만큼 줄다리기가 팽팽했다. 마우스를 흔들다 말고 유 대표가 황 대표를 노려봤다. 황 대표의 가로로 긴 눈매가 냉담할 뿐이다. 야박한 새끼. 저 인정머리라곤 하나도 없는 새끼. 유 대표가 황 대표를 향해 욕을 줄기차게 내뱉었다.

맺고 자름이 지나칠 정도로 분명한 황 대표의 성격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한결같았다. 태어나길 저 따위로 태어난 새끼이건만. 뭐? 착해? 예뻐? 멋있어? 버들이 입버릇처럼 재잘재잘 늘어놓았던 장황한 칭찬이 아깝다 못해 배알이 꼴릴 지경이다. 황 대표, 저놈 저거 본래의 성격을 알아야지만 버들이 더는 황 대표님은, 하고 말을 꺼내지 않게 될 텐데.

난제가 따로 없다. 황 대표의 성격이 어떤지 직접 보고 겪길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게 된다. 내 새끼 좋은 것만 보고 자랐으면 좋겠으니까. 비밀번호를 입력해 여러 개의 폴더를 펼쳤다. 유 대표가 빠르게 마우스를 까닥거려 필요한 자료들만 골라 구분했다. 넓은 모니터 화면이 금세 그래프들로 복잡해졌다.

“김 실장.”

-네. 유 대표님.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

-…….

정적이 짧게 유지됐다. 핸드폰 너머 김 실장의 모습이 눈에 선해서 황 대표는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이내 그의 시선은 자고 있는 버들에게 향했다. 비웃음이 커졌다. 담이 걸리기는 개뿔. 안방에 누워 있는 걸로 착각할 정도다. 그만큼 색색 내쉬는 버들의 숨소리가 안정적이었다.

“예상 수익률 오차가 너무 크잖아.”

짜증을 내며 유 대표가 김 실장을 들들 볶았다.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는 책들과 펜들이 어수선함을 키운다. 팔을 뻗은 황 대표가 가장 가까이에 놓인 전공 서적을 들어 올렸다. 유버들. 꾹꾹 눌러쓴 글씨체로 이름과 함께 학번이 기록되어 있었다. 나이를 계산하니 자신과 아홉 살 차이가 난다.

“그 자료 나한테 있어.”

황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가 흘렀다. 두 대표가 정신없이 일에 몰두했다. 여태 잘 자고 있는 버들이 콧잔등이 간지러운지 문지르며 칭얼거렸다. 바닥에 몇 번 굴러 떨어졌으니 눈에 보이지만 않을 뿐 온갖 먼지들을 뒤집어썼을 게 분명하다. 위생에 대해 민감한 황 대표가 눈살을 찌푸렸다.

* * *

영화 때문에 회사가 바빠졌다.

회사에 잘 안 나온다던 황 대표가 꾸준히 출근을 한다.

새롭게 얻은 정보를 버들이 활기차게 써먹었다. 학교와 집만 오가던 일정에 회사가 추가됐다. 아마 직원이었다면 근태가 훌륭하단 소리가 진작 나왔을 거다. 그만큼 버들은 주말도 없이 회사를 들락거렸다. 가서 하는 일이라곤 겨울의 대표실에 앉아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거기에서 얻어지는 수확은 엄청났다. ‘유버들 씨.’하고 제 이름을 불러 주는 낮은 음성을 듣는 행운이 생기기도 하고, 아주 찰나지만 황 대표의 시선이 저를 스쳐 지나갈 때도 있었다.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빗방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나뭇잎이 몸을 떨었다. 커피 향기가 진하다. 겨울의 눈을 피해 버들이 황 대표를 따라 나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황 대표만 바라보는 것으로 꼬박 하루를 할애할 수 있을 거 같다. 황 대표의 넓은 어깨와 큰 키는 저뿐만이 아니라 남자라면 다들 부러워할 게 틀림없다. 손목에 채워진 황 대표의 시계를 가만히 응시하던 버들이 가방을 열었다. 회사에 나올 때면 항상 꽃집부터 들러 해바라기를 산다. 그 해바라기는 언제나 황 대표만을 위한 선물이었다. 버들이 가만히 숨을 참았다.

“황 대표님.”

걸음을 멈춘 황 대표가 뒤를 돌았다.

“…….”

“…….”

말없이 버들이 해바라기를 내밀었다. 황 대표가 해바라기를 받아 가자 버들의 볼이 상기됐다.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나며 수줍은 기분에 버들이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비는 오후가 되어서야 멎었다.

“버들아. 일어나. 저녁 먹으러 가게.”

소파에 기우뚱 쓰러져 잠이 든 버들을 겨울이 흔들어 깨웠다. 몽롱한 버들의 모습에 겨울이 주책을 떨어 댔다. 옆에 있는 황 대표의 옆구리를 찔렀다. 내 새끼 좀 봐. 자고 일어나니까 더 예쁘지 않냐? 황 대표가 동의하지 않았다. 네 새끼, 네 눈에나 예쁜 거고.

회사 회식에 버들이 참석했다. 얼결이었다. 의무적으로 잠깐 얼굴을 비친 뒤 두 대표는 회식 장소에서 빠져나와 호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버들도 제 형 옆에서 당당히 그곳 회원 카드를 꺼냈다. 테이블에 음식들이 가득히 채워졌다. 커다란 창밖으로 펼쳐진 야경에 버들이 정신을 팔렸다.

“빨리 먹어라.”

겨울의 채근에 버들이 포크를 들었다.

“다른 거 먹으면 안 돼?”

“다른 거? 뭐.”

곧바로 겨울이 버들의 품에 메뉴판을 안겨 줬다.

“여기 싫어. 다른 데 가면 안 돼?”

“싫지? 그치? 와. 버들아. 잘 생각했다.”

과하게 겨울이 버들을 칭찬했다.

“다음엔 형이랑 둘이 더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슬쩍 어깨를 움츠리며 버들이 물었다.

“황 대표님은?”

“며칠 지켜보고도 모르겠냐? 저 새끼는 먹는 것만 먹어. 질리지도 않나.”

본인 욕을 하는 건데도 황 대표는 무심한 태도였다. 그런 황 대표의 앞에 놓인 접시를 버들이 고개를 쭉 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까 황 대표님은 매번 같은 음식을 주문한다. 먹는 것만 먹는다는 게 여기 레스토랑의 메뉴인 저 스테이크라는 뜻인가? 겉면만 살짝 익힌 고기에 핏기가 돈다.

아! 퍼뜩 떠오른 생각에 버들이 겨울의 귀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자기 쪽으로 당겨 소곤거렸다. 제 형을 통해 황 대표에게 자신을 어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어? 너무 작게 말해서 안 들렸어.”

“나 잘하는 거. 내 칭찬 말이야. 그거 지금 해 줘.”

자기 칭찬을 해 달라며 조르는 버들을 겨울이 잠시 흘겨봤다. 버들의 입에서 나오는 황 대표 타령은 더 늘어났다. 못마땅하긴 하나 버들이 원한다면 못 해 줄 것도 없다.

“야.”

황 대표를 부르는 겨울의 어조가 껄렁했다.

“버들이 잘하는 거 있다.”

황 대표는 딱히 관심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버들이 잔뜩 긴장한 채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우리 버들이 사탕 잘 먹더라.”

버들의 볼이 확 달아올랐다. 너무 황당하다. 무슨 칭찬을 그런 걸로 해. 심지어 사탕을 잘 먹지도 않은 버들이 제 형의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아, 이거 아니야? 버들을 보며 도리어 겨울이 당황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다시 야, 하며 겨울이 황 대표를 불렀다. 긴가민가하다. 입술을 달싹이던 걸 멈추고 겨울이 버들에게 물었다.

“너 초콜릿 잘 먹었던가?”

도움이 하나도 안 된 겨울이 전화를 받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옷매무새를 단정히 정리도 할 겸 화장실을 다녀온 버들이 그 후부터 초조하게 굴며 황 대표의 눈치를 봤다. 버들의 손끝에서 냅킨이 너덜너덜 걸레가 됐다. 바짝 타는 입안에 버들이 연거푸 물을 들이켰다. 어쩌지. 나가자고 해도 되는 걸까?

방금 전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황 대표와 아는 여자를 보게 됐다. 벌써 몇 주나 흘렀다. 겨울의 핸드폰을 통해 알아낸 스케줄로 황 대표와 만나고 싶어 무작정 찾아왔던 호텔 레스토랑 바로 여기에서 봤던 여자였다. 황 대표와 다정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던 그 여자가 아까 다른 남자의 팔짱을 끼고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혹시나 그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황 대표가 상처받을까 봐 버들이 새빨개진 얼굴로 전전긍긍하는 중이었다. 꼭 죄지은 것처럼 버들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이내 마음을 굳혔다. 나가자고 해야겠다.

“대표님, 아…….”

버들의 입술이 조그맣게 벌어졌다. 어떤 여자가 황 대표의 어깨를 만지며 아는 척을 하고 있었다. 어디에다가 눈을 둬야 할지를 모르겠는지 버들이 허둥거렸다. 여자에게 황 대표가 친절하게 웃어 줬다. 잘생겼다. 기분이 멍해진다. 그때였다. 비스듬히 얼굴 각도를 꺾은 여자가 그대로 황 대표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서로의 입술이 농밀하게 포개졌다. 버들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순간 숨이 꽉 막혔다.

“전화해.”

“응.”

황 대표의 셔츠 깃을 쓰다듬은 여자의 손길에 여운이 가득했다. 작별 인사가 그대로 끝이 아니라 다음 만남을 예고하고 있었다. 버들이 제 손을 내려다봤다. 얼마나 힘을 꽉 주고 있었던지 주먹을 펴자 손가락이 다 저릴 정도였다. 황 대표와 버들의 눈이 마주쳤다. 곱다고 감탄했던 황 대표의 입술에 립스틱 자국이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냅킨으로 그 자국을 닦아 내는 황 대표를 버들이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부랴부랴 가방을 챙겼다. 어, 먼저 가 보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인사까지 했으면서 버들이 잠시 멈칫거렸다.

오늘이 아니면 시들어 버리니까……. 품에 안고 있던 가방을 열어 버들이 해바라기를 건넸다. 손끝이 미세하게 달달 떨리고 있었다. 고마워요. 거친 버들의 손이 닿지 않게끔 꽃을 받아 간 황 대표가 평소처럼 말했다.

로비 구석에서 버들이 겨울에게 전화를 걸었다. 길게 이어지던 통화를 막 끝낸 참이었는지 근처에 있으니 금방 데리러 오겠다고 한다. 기분이 너무 이상하다. 제 나름대로 혼란을 덜고자 생각을 정리해 보았지만 어떤 소용도 없다. 그저 마음만 더 답답해지고야 말았다.

아. 황 대표님이다. 기운 없이 처져 있던 버들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황 대표를 발견하자마자 기둥에 몸을 감췄다. 로비 밖으로 나가려던 황 대표가 방향을 틀었다. 버들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황 대표가 해바라기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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