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그해, 물결치는 (1)
비스듬히 소파에 누워 스포츠 중계를 시청하던 겨울이 벌떡 일어났다. 1층이 시끄럽다. 문을 살짝 열어 보자 유 회장과, 장 여사와 함께 외출했던 버들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주말이라고 세워 놓은 계획이 몇 개 있었더랬다. 오랜만에 사정없이 물고 빨고, 오붓하게 드라이브도 하고, 쇼핑도 하고 그러려고 했건만 눈 떠 보니 집안은 적막했고 달랑 저 혼자뿐이었다. 겨울이 당장 아래로 내려갔다. 편안한 차림의 겨울을 보고 버들이 손을 흔들어 먼저 아는 척을 했다.
“형. 깼어?”
“깼지, 그럼. 지금 시간이 몇 시야.”
오후 여섯 시쯤 됐다.
“부모님은?”
“저녁 약속 있으시대.”
“왜 이제야 와? 형이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언제 일어났는데?”
“세 시.”
“퍽이나 오래 기다렸네.”
버들이 눈을 흘기고선 주방으로 들어갔다. 운전기사가 퇴근하기 전, 옮겨 놓은 짐들이 식탁을 수북하게 차지했다. 손을 씻은 뒤 버들이 본격적으로 짐을 풀기 시작했다.
“형 좀 깨우지 그랬어.”
“뭐 하러. 모처럼 쉬는 날인데 푹 자면 좋지.”
집에 들어온 버들의 뒤를 겨울이 졸졸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쓰레기를 버릴 때도 졸졸. 설거짓거리를 싱크대에 옮길 때에도 졸졸.
“놔둬. 내일 키퍼들이 와서 하게.”
“냄새나잖아.”
급기야 버들이 설거지까지 직접하고 나섰다.
“저리 좀 가.”
“형 섭섭하게 자꾸 그럴래?”
“물 튀기잖아.”
뒤에 서 있던 겨울이 버들의 어깨에 턱을 기대고선 과장되게 킁킁거리는 소리를 냈다.
“너한테서 낯선 형의 냄새가 난다? 응?”
“낯선 형? 하늘이 형 냄새?
이른 새벽부터 산해진미들로 음식을 장만해 군 복무 중인 다섯째 형에게 면회를 다녀오는 길이었다. 남들 다 가는 곳이 군대였다. 게다가 줄줄이 아들만 있던 터라 처음만 서글펐지 좀 지나고 나니 누가 군대에 가든 말든 알아서 잘 살아오겠거니 당연하게 무뎌진 유 회장과 장 여사와 달리, 버들은 제 형들을 참 살뜰하게 챙겼다. 이번 면회도 제 막내아들이 가자고 하니까 나들이 삼아 유 회장과 장 여사가 움직인 것이었다. 하늘이 역시 산해진미인 음식보다 누가 괴롭히진 않는지, 훈련은 너무 힘들지 않는지, 제 걱정을 하는 막냇동생부터 옆구리에 끼고 반겼다.
“걔 어떻디?”
“팔팔해.”
“아직도?”
“그게 무슨 말이야?”
버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건?”
“음. 아, 좀 까맣게 탔어.”
“촌스러워졌겠네?”
“아니야. 안 촌스러워.”
한 번을 그냥 지나치는 법 없이 버들이 하늘을 두둔했다.
“그 새끼는 진짜 더 굴려야 하는데.”
“하늘이 형도 비슷한 말 하더라.”
“비슷한 말? 뭐라고?”
“형은 한 번 쫄딱 망해서 고생 좀 해 봐야 정신 차린대.”
겨울이 쌍욕을 했다. 물 묻은 손으로 그런 겨울의 어깨를 버들이 철썩 내려쳤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하늘. 이렇게 물에 빠졌어. 누굴 구할 거야?”
“난 수영 못 하잖아.”
펄쩍 뛰며 겨울이 진짜 섭섭하단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변했네, 너! 예전에는 형부터 구한다고 그랬었잖아.”
“그건 어렸을 때고.”
“야, 새끼야. 지금도 너 어리거든?”
“뭐래. 다 컸거든?”
“아니. 어리거든? 애새끼거든?”
“애새끼 아니거든? 다 큰 어른 맞거든?”
유치하게 티격태격하는 새에 설거지가 끝났다. 그 많은 식기들을 기어코 전부 닦아 낸 것에 겨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시간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버들을 데리고 나갈까 하다가 피곤해 보이는 기색에 겨울이 다음으로 계획을 미뤘다.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좀 가.”
“가만히 있어 봐. 형 생각 중이잖아.”
“무슨 생각?”
“많이 귀찮게 할까. 조금 귀찮게 할까.”
버들이 재빨리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곧 말도 못하게 빠른 속도로 겨울이 저를 잡으러 오는 것에 기겁하며 버들이 제 방문을 쾅 닫아 버렸다. 타이밍이 좋았다. 문을 잠그자마자 문고리가 철컥철컥 돌아갔다.
한참을 욕조에 느긋하게 몸을 담그고 나온 버들이 화들짝 놀랐다. 분명 문을 잠갔는데 어떻게 들어왔는지 제 방 침대에 겨울이 엎드려 누워 있었다. 수건을 한쪽에 내려놓고 그쪽으로 버들이 다가갔다.
“내려와.”
“왜?”
“아. 내려와. 형 침대 아니잖아.”
“네 거, 내 거 구분 지을래? 형제들끼리?”
버들이 겨울을 끌어내려고 했지만 힘에 밀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치지도 않는지 두 형제가 또 한창 티격태격하고 있던 중이었다. 전화가 울렸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든 겨울이 버들에게 잠깐만 기다리라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혹여 업무 전화일까 싶어 방해가 되지 않도록 버들이 얼른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런 버들의 착한 반응에 겨울이 픽, 웃었다. 하지만 통화 버튼을 눌렀을 땐 돌연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
“어. 말해. 황 대표.”
버들의 귀가 쫑긋하게 섰다.
“응. 주문 다시 넣어 놨어. 다음 주 화요일에 시안 나온다더라. 뭐? 그것도 이른 거야. 쪼아 댔어. 쪼아 댔으니까 다음 주 화요일까지 시안 빼 준다는 거지. 응.”
은근슬쩍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 내일 회사에서 봐.”
전화를 끊고 일어나려는 겨울을 버들이 다시 눕혔다. 이불도 턱 아래까지 끌어당겨 덮어 주었다. 얘가 왜 이러지. 제 침대에 좀 누웠다고 눈을 뾰족하게 뜨고선 당장 내려오라고 할 땐 언제고. 버들의 친절에 의심을 담은 눈초리로 겨울이 쳐다봤다.
“형. 방금, 황 대표님이야?”
도톰한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집어 잡아당기던 버들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응. 간단하게 겨울이 긍정했다.
“황 대표님이 뭐래?”
“가까이 와 봐.”
“왜?”
“비밀 이야기니까 그렇지.”
슬금슬금 가까이 다가온 버들의 이마를 겨울이 아프지 않게 팍, 튕겼다. 아! 아무리 약하게 튕겼다고 해도 연약한 피부에는 무리였나 보다. 영락없이 빨갛게 손자국이 난 이마를 감싼 버들이 물러서자 겨울도 유유히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하늘이 타령하더니. 또 이제 황 대표 타령할 거야?”
“……아프잖아.”
“겨울이 형 타령은 언제 할 거야?”
“안 해. 씨.”
겨울이 짐짓 엄하게 으름장을 놓았다.
“어허. 사람이 공평해야지.”
“형. 황 대표님이 형이랑 왜 친구 하는 거야?”
“뭐, 인마? 성격 좋은 내가 친구를 해 주는 거지. 그 새끼랑.”
“부럽다.”
“뭐야?”
“나도 친해지고 싶은데.”
참지 못하고 결국 겨울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도대체 황 대표 어떤 점에 버들이 꽂혔는지 모르겠다.
“네가 걔랑 친해져서 뭐 하게.”
“형. 나, 부탁이 있는데…….”
겨울이 퍼뜩 자세를 고쳐 앉았다.
“부탁? 뭔데.”
욕심 없는 버들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조심스레 꺼내 든 부탁이 무척이나 반갑다. 뭐가 갖고 싶다고 할까? 뭘 해 보고 싶다고 할까? 뭐든 다 들어줄 기세였지만 선이란 게 있는 거다.
“나 작업실 갖고 싶어.”
“작업실 있잖아. 더 넓히고 싶어?”
“그게 아니라. 집에 있는 작업실 말고.”
“그럼.”
“학교 근처 작업실.”
학교 근처에 작업실이 있으면 수업이 비는 시간을 허투루 버리지 않아도 된다는 둥, 종알종알 어필하는 버들의 말을 겨울이 가로막았다.
“독립하겠단 거야?”
“응.”
해가 뜬 지가 언젠데 아직도 자고 있는 겨울을 버들이 살벌하게 내려다봤다.
“형. 일어나. 아침 먹으래.”
말을 전하며 버들이 발로 겨울을 흔들어 깨웠다. 비몽사몽 한 몰골의 겨울까지 착석하자, 네 식구가 모두 식탁에 둘러앉았다. 잠이 덜 깬 몰골로 겨울이 물컵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런 겨울의 손등을 버들이 찰싹 내려쳤다.
“이거 내 물이야. 형 물, 저기에 있잖아.”
“아. 쥐방울만 한 게. 왜 이렇게 손이 매워?”
버들의 볼을 꼬집자마자 그러지 말란 듯 유 회장이 큼큼, 헛기침을 했다.
“너 자꾸 이렇게 엇나갈 거야?”
“내가 뭘?”
살짝 버들을 향해 몸을 기운 채 겨울이 소곤거렸다. 혼을 내려는 겨울에게 버들이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쳐들었다. 이놈의 새끼가. 다시 볼을 꼬집으려고 했지만 유 회장과 장 여사가 보고 있어서 겨울이 얌전히 수저를 쥘 수밖에 없었다. 음식물이 들어간 버들의 말간 볼이 제법 통통하게 부풀었다. 오물오물 잘 씹고, 잘 삼킨다. 맛있냐고 묻자 응, 부루퉁한 대답이 뒤따랐다. 정면을 향해 있는 버들의 속눈썹이 길다. 미운 스물한 살이야. 뭐야.
식사를 끝낸 버들이 가사도우미가 내준 차를 쟁반에 옮겨 거실로 나와 유 회장과 장 여사의 앞에 내려놨다. 겨울이 생수를 벌컥거리면서 그런 버들을 주시했다.
“있잖아요.”
버들이 딱 한 마디를 꺼냈을 뿐이었다.
“안 돼!”
귀청 떨어져 나갈 듯 큰 소리로 겨울이 외쳤다.
* * *
사진을 고르던 유 대표가 인상을 찌푸렸다. 서른 넘은 형들에게 너무 늦게 귀가하거나 외박할 시에 가차 없이 뭐라고 나무라던 놈이 감히 독립할 생각을 해? 생각해 보니까 더 괘씸하고 어이가 없다.
“사춘기가 스물 넘어서도 오나?”
뭔 헛소리인가 싶었는지 황 대표가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 황 대표. 어떻게 생각해?”
“뭐가.”
“스물 넘어서도 사춘기가 올 수도 있나?”
“일할 땐 일만 좀 할 수 없어?”
유 대표가 눈을 홉떴다.
“나 지금 진지하다.”
“나가라 너. 시끄러워서 안 되겠다.”
“원래 육아는 공동으로 하는 거래잖아.”
더 말할 가치가 없단 듯 황 대표가 욕했다.
“아. 왜 갑자기 작업실을 따로 내 달라고 그러지? 그것도 뜬금없이.”
유 대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독립하고 싶어질 때는…… 제 머리로는 한 가지 이유밖에 떠오르지가 않는다.
“이놈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나.”
사진을 넘기던 황 대표의 손이 멈칫거렸다. 자신이 왜 제 발을 저려야 하는지 모르겠고, 제 발을 저렸단 것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황 대표가 인상을 찌푸렸다. 다 큰 사내놈이 독립한다는 것에도 저런 유난인 반응인 걸 보면, 분명 제 새끼가 남자 좋아하는 호모란 걸 유 대표는 일절 염두에 두지도 못한다는 것에 확신이 선다.
황 대표가 내려놓은 사진 뭉치들을 유 대표가 가져갔다.
“여기서 진짜 마음에 드는 배우가 한 명도 없어?”
“같은 말 반복하는 거…….”
“어, 그래. 너 그거 질색하지.”
“알면 하지 마. 다 마음에 안 드니까.”
문득 유 대표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황 대표를 응시했다. 아주 어렸을 때에 만나 때때로 주먹싸움도 해 가며 쌓아 올린 세월이 지긋지긋하게 길었다. 웃으면 좀 나으나 그마저도 철저히 비즈니스를 위해 만들어진 웃음이고, 냉혈하고, 완벽함을 추구하는 정도가 도를 넘는 경우가 다수고. 이래저래 쉬이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분위기나 인상은 결코 아니었다. 이렇게나 성질 더러운 놈이랑 버들은 왜 친해지고 싶다고 하는 거지?
커피 잔을 쥐며 왜 쳐다보느냐는 듯 황 대표가 눈썹을 까닥였다.
“내 새끼가 너보고 예쁘다더라. 웃기지 않냐?”
“……버들 씨가 집에서 내 얘기를 해?”
“우리 버들이가 얼마나 바쁜데. 네 얘기만 하겠냐?”
“내 얘기만 한다는 거야?”
“야. 잘난 척하지 마라.”
못마땅한 듯 유 대표가 표정을 구겼다. 겨울이 형 잘생겼다고 내내 말하다가, 너 예쁘단 말 잠깐씩 하는 수준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쳤다.
버들의 하얀 얼굴을 떠올리며 황 대표가 눈썹을 찌푸렸다. 호모라는 게 가족들 사이에서 밝혀지건 말건 그건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 가족들이 애지중지 키워 온 막둥이의 성적 취향이 황 대표, 자신이란 것까지 밝혀진다면 그건 좀 피곤해질 것 같았다.
“버들 씨 여자 친구 있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황 대표가 지나가는 어투로 물었다.
“있었지.”
“……아. 그래?”
“한 네 살 때였나. 연상의 누님이 세발자전거 뒷자리에 싫다는 버들이 태우고 돌아다닌 걸 네가 봤어야 했는데.”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다. 얼마나 귀여웠는지 아냐면서 유 대표가 한참 낄낄거렸다.
겨울의 사옥 대문에서 누군가와 부딪힌 버들이 저만치 밀려났다. 아픈 어깨를 짚고 고개를 들자 황 대표가 보인다. 뜻밖이다. 삽시간에 버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햇볕이 강해서 그런지 그 웃는 모습이 반짝반짝 빛이 나는 듯했다.
“안에 유 대표 있어요.”
“대표님. 어디 가세요?”
“주차장이요.”
“아. 그건 아는데…….”
주차장으로 향하는 황 대표의 뒤를 버들이 따라가는 중이었다.
“점심은 드셨어요?”
“…….”
“저녁에 저 호텔 레스토랑에서 약속 있는데요.”
“…….”
“혹시 대표님도 오세요? 만약 우연히 만나게 되면…….”
황 대표가 우뚝 멈춰 섰다. 널따란 황 대표의 등에 이마를 부딪친 버들이 얼굴이 새빨개졌다. 셔츠가 얇아서 그런지 황 대표의 단단한 등 근육이 느껴졌다. 황 대표가 뒤를 돌아 버들을 내려다봤다. 큼지막한 눈이 순하다.
“버들 씨.”
“……네?”
버들 씨, 하고 제 이름을 불러 주는 저음이 오늘도 온갖 설렘을 안겨 주었다. 신발 속에 감춰진 발가락을 버들이 꼬물거렸다.
“전 여자 좋아해요.”
가만히 선 채로 버들이 눈을 깜박거렸다.
수업이 끝나는 대로 버들이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가는 곳만 가고 먹는 것만 먹는다는 황 대표의 성향에 전부 들어맞는 장소였다. 황 대표와 단둘이 만날 수 있는 확률은 회사보다 여기가 더 높을 것이다. 벌써 나흘 째 허탕을 치긴 했지만. 테이블에 책을 펼쳐 놓고 공부하던 버들이 음료를 한 잔 더 주문했다. 환했던 창밖이 곧 야경으로 물들었다.
화장실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물기 젖은 손끝을 탈탈 털며 조명이 어둡게 조성된 복도를 걷던 중 버들의 발이 꼬였다. 앞쪽에서 남녀가 엉켜 있었다. 당황한 버들이 머뭇거렸다. 자리로 돌아가려면 저 앞을 지나쳐야만 했다. 천천히 가는 것도 이상하고, 후다닥 지나가는 것도 이상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단 듯 평범하게 걸어 보려고 했지만 오히려 더 뻣뻣해진다. 버들이 남녀를 힐긋거렸다.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뛴다.
질척하게 여자의 입술을 혀로 가르던 황 대표가 설핏 웃었다. 갑자기 느껴진 인기척에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 여자가 황 대표의 품에 안겼다. 여자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며 황 대표가 낮게 속삭였다.
“너 유명해?”
그러자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수라고 그랬지. 텔레비전을 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저 스스로 유명하다니까 그런가 보다 넘겼다. 황 대표가 뒤를 돌았다. 주변을 벗어나는 사람이 보인다. 여자가 누군지 알아봤나? 걸음이 허둥지둥한 게 수상쩍다. 사진이나 영상을 찍었다면 덩달아 피곤해진다. 모퉁이로 꺾어 숨어든 사람에게 다가간 황 대표가 손목을 휘어잡았다.
“…….”
“…….”
놀라 커다래진 버들의 눈을 마주하게 된 황 대표가 인상을 확 구겼다. 황 대표의 입술이 타액으로 번들거린다. 차마 오래 쳐다보지 못하고 버들이 고개를 숙이는 걸로 시선을 피했다.
“하나만 해요.”
“…….”
“호모를 하든. 스토커를 하든.”
짜증 섞인 황 대표의 목소리에 절로 위축된다. 어떤 말도 하지 못하겠다.
“사진 같은 거 혹시 찍었어요?”
황급히 버들이 고개를 내저었다.
“유 대표랑 왔어요?”
또다시 고개를 가로젓는 버들의 호흡이 잔뜩 흐트러져 있다.
황 대표가 와인 잔을 내려놨다. 테이블에는 여러 권의 책들이 활짝 펼쳐져 있었다. 굴러다니는 펜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니 버들의 손까지 닿았다. 더럽다. 손톱도, 거칠게 일어난 피부도.
“이제 좀 진정이 돼요?”
어이없단 투로 황 대표가 물었다. 아까 버들은 호흡만 흐트러졌던 게 아니라 얼굴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물 좀 마시라고 컵을 쥐여 줬더니 컵 밖으로 물이 넘칠 정도로 달달 손까지 떨어 댔었다. 지금은 호흡도 손도 잔잔하다.
황 대표가 핸드폰을 꺼냈다. 룸에서 기다리고 있단 여자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아까 그 가수는 아니었다. 다른 여자다.
“유 대표 불러 줄까요?”
버들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저는……. 대표님 매일매일 예뻐해 드릴 수 있어요.”
상황과 뜬금없으면서 기가 막힌 말이었다.
“예전에도 했던 말인데요.”
“…….”
“대표님이 갖고 싶다는 거 다 드릴 거고요.”
“…….”
“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뭐든지 다 해 드릴 거예요. 정말이에요.”
정적이 내려앉았다.
“…….”
“…….”
속눈썹 뒤로 가려진 버들의 커다란 눈에 물기가 참 많이 어려 있다.
“모르는 거 같아서 해 주는 말인데 좋아한다고 자꾸 그러는 거, 상대방한테 지고 들어가는 거예요.”
“……저는 대표님한테 이길 생각 없어요.”
까맣고 반질반질한 눈동자를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다. 순종적이네. 그래서…… 울리기 참 쉽겠다.
울려 볼까.
“대표님…….”
이 정도면 시간을 참 많이 할애해 준 거다. 필요하면 알아서 유 대표를 부르든가 하겠지. 황 대표의 서늘한 눈매가 버들에게서 벗어났다. 동시에 버들이 분주해졌다. 자신을 바라봐 주는 황 대표의 눈빛이 좋고, 그 눈길이 오랫동안 자신에게 머물렀으면 하는 바람이다.
버들이 무릎 위로 끌어온 가방 지퍼를 열었다. 조심히 넣어 둔 해바라기가 보인다.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우연한 만남을 꿈꾸며 꼭 꽃집에 들르게 된다. 전에 없이 망설여진다. 자신이 선물한 꽃을 황 대표가 쓰레기통에 처박은 걸 직접 보았으니까 당연했다. 그래도. 그래도 주고 싶은 마음은 그대로다.
“버들 씨.”
“네.”
황 대표의 앞에 해바라기를 슬쩍 내밀고선 버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어쩌면 꽃은 또다시 버려질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황 대표님이 버들 씨, 하고 제 이름을 불러 줬으니까 그거면 충분할 거 같다.
“저 좋아해요?”
버들의 속눈썹이 말끄러미 황 대표를 향했다. 둘의 눈이 부딪혔다. 하얗고 순한 얼굴이 조금은 멍해졌다. 그 즉각적인 버들의 반응이 흥미롭단 듯 황 대표의 한쪽 눈썹이 위로 치켜떠졌다. 양심이란 건 애초에 갖고 태어나지 않았다.
친구 동생이건 뭐건 따지지 말고…… 울려 볼까. 내가 너무 좋은 나머지 나한테 이길 생각도 없다는데. 내 발 밑에 납죽 엎드려 있어 울리는 건 정말 쉬울 거다. 같은 남자란 점에서 오히려 더 거리낌이 없어진다.
재미있을 거 같으니까. 또 말로 해서는 도저히 못 알아듣는 거 같으니까. 질질 짜고 나야지만 정신 차리고 더는 내 앞에서 이딴 꽃을 들고 설치지 않을 거란 판단이 선다.
“버들 씨.”
“네. 대표님.”
나른한 표정으로 황 대표의 입술이 열렸다.
“좋은 거 하러 갈래요?”
잠깐의 정적으로 틈이 벌어졌다. 옅게 미소가 걸린 황 대표의 입가가 너무나 매혹적이라 머리가 그대로 굳은 느낌이다. 솔직히 말의 뜻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좋은 게 무얼까.
……좋은 거라는데 뭐든. 홀린 것처럼 버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두근거린다. 다 퍼 줘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좋아하고 있는 사람이 좋은 거 하러 가자는데 달리 다른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여유롭게 황 대표가 식사를 주문했다.
“다 먹었어요?”
“네? ……네.”
“안 모자라요?”
“배불러요. 많이 먹었어요.”
“그럼 일어나요.”
황 대표를 따라 버들이 서둘러 가방을 챙겨 들었다. 계산하는 모습도 멋지다. 황 대표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버들이 잘 먹었다고 작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나란히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사선으로 위치한 창밖이 눈부시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언제나 그렇듯 감탄이 나온다. 복잡하게 줄지어져 있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꼭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처럼 화려하다. 유독 오늘은 밤하늘의 달도 짙게 떴다.
“버들 씨?”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줄도 몰랐다. 먼저 안에 타 있던 황 대표가 낮게 저를 부르는 소리에 버들이 화들짝 놀라며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공간에 오롯이 단둘이다. 빨갛게 표시되는 층수가 높아진다. 거기에 신경 쓰지 못하고, 버들의 시야엔 저와 등지고 선 황 대표의 뒷모습만 담겨져 있다. 어깨가 어쩜 이렇게나 넓지. 등까지 포함해 정말 태평양이 따로 없다. 그리고 단단해 보인다. 황 대표만 바라보는 걸로 하루가 금방 갈 거 같다.
“내려요.”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오자마자 버들이 아래를 바라봤다. 폭신하게 카펫이 밟힌다.
천천히. 그리고 비밀스럽게. 황 대표의 몸을 버들의 눈동자가 마치 핥기라도 하듯 끈적끈적하게 바라봤다. 어깨에서 팔꿈치, 손목으로 다다랐다. 혹시나 포장으로 쓰인 비닐이 구겨질까 봐 조심히 대하는 자신과 달리 황 대표는 멱살이라도 잡은 모양으로 해바라기를 들고 있었다.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번엔. 왠지 안 버릴 거 같단 기대감이 서린다. 반짝거리는 버들의 시선이 황 대표의 긴 종아리를 지나쳤다. 황 대표의 발 사이즈와 제 발 사이즈를 어림잡아 비교했다. 버들의 손이 주춤거리며 제 가슴으로 향했다.
심장은 일찌감치 난리가 난 상태였다. 이미 좋아한단 마음을 남김없이, 밑바닥까지 싹싹 긁어 보여 주었지만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을 들키게 된다면, 이건 좀 많이 쑥스러울 거 같다. 주책없어 보일까 봐 걱정이다. 정신 좀 차리자. 버들이 제 뺨을 살짝 두드렸다. 그러느라 황 대표와 거리가 멀어졌다. 버들이 얼른 황 대표의 등에 가까이 붙었다.
문득 주변을 살폈다. 복도가 조용하다. 카펫 때문인지 흔한 발소리도 나지 않는다. 불편할 만큼 조명이 어둡게 설정되어 있었다. 좋은 거 하러 가는 걸까? 좋은 게 뭘까?
“대표님. 저희 어디 가는 거예요?”
룸을 지나치고 또 지나쳤다.
“버들 씨.”
낮은 저음에 가슴이 떨렸다.
“해 봤어요?”
목소리를 음악처럼 감상하느라, 황 대표의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미안한 기색으로 버들이 “네?” 하고 조심히 되물었다. 황 대표의 걸음 속도가 느릿해졌다.
“섹스, 해 봤냐고.”
버들의 동그란 눈이 순간 깜박이는 걸 잊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호모 새끼는 아니었을 거 아냐.”
“…….”
“여자랑 한 섹스가 성에 안 차거나 만족스럽지 않았어요?”
“…….”
“그간 별 볼 일 없는 여자들만 만났나 봐요.”
“…….”
“그게 아니면, 버들 씨가 그쪽으로 형편없거나.”
돌아선 황 대표가 걸음을 멈추자 버들의 걸음도 멈췄다. 말귀를 못 알아들은 것처럼 버들의 얼굴이 그저 멍청하다.
……섹스? 버들의 목울대가 침이 넘어가면서 일렁거렸다. 황 대표의 말투는 나긋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제대로 듣긴 한 걸까? 버들이 제 귀를 의심했다. 무슨 뜻이냐고 되묻고 싶었는데 목구멍이 답답해져 쉽게 말이 떨어지지 않는다. 싸늘하게 굳어 버린 표정을 의식하며 버들이 위로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억지로 웃는 거라 어색하다.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한 손끝을 감추기 위해 버들이 등에 메고 있던 제 가방끈을 움켜잡았다.
“좋은 거…….”
“응. 좋은 것 해요.”
웅얼거린 버들의 목소리가 쉽게 묻혔다. 멈춘 곳은 복도 제일 끝의 룸이었다. 황 대표의 노크에 문이 열렸다. 아름답단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여자가 나왔다. 짧게 커트 친 머리를 쓸어 넘기는 몸짓에 물방울 모양의 귀걸이가 달랑거린다.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리긴 했는데, 나도 딱히 한가한 사람은 아니거든.”
쌀쌀맞은 어조로 여자가 말을 하자 황 대표가 그쪽을 돌아봤다. 여자의 허리 뒤로 황 대표의 팔이 감겼다. 해바라기가 들려 있는 손이었다.
“셋이 놀자고 하더니. 어디서 애송이 하나 데려왔네?”
저를 훑어보며 여자가 비웃듯 꺼낸 말에 버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피가 식는다는 느낌이 뭔지 상세히 서술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씻고 있겠다며 여자가 유유히 돌아섰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나 보다.
“고맙다고 절을 해도 모자랄 판국에. 왜 도망가요.”
단단한 황 대표의 손이 버들의 손목을 비틀어 잡았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던 버들이 휘청거렸다. 힘 조절의 배려도 없었다. 잡힌 손목이 아픈지 버들의 눈가가 잔뜩 찌푸려졌다. 아. 들릴 듯 말 듯 작게 버들이 신음했다.
“못 하겠어요? 힘 좀 쓰라고 기껏 밥도 사 먹였더니.”
꼭 땅을 파고들 것처럼 아래로 꺾여 있던 버들의 고개가 위로 들렸다.
“…….”
“…….”
큼지막한 버들의 눈을 황 대표가 응시했다. 물기가 차차 더해지는 꼴에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샜다. 툭 치면 우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아!”
잡고 있는 버들의 손목을 힘주어 황 대표가 끌어당겼다. 금방 룸으로 끌고 들어갈 것 같은 황 대표에게 놀란 버들이 버텼다. 그 바람에 엉덩이가 뒤로 쭉 빼졌다. 제 손목을 잡고 있는 황 대표의 손을 풀어 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다. 오히려 올가미처럼 더 옥죄어 온다. 금방 문 안쪽을 넘어설 거 같다. 다급한 심정에 다리까지 구르며 버들이 고개를 내저었다.
“누가 보면 나 나쁜 사람인 줄 알겠네.”
“…….”
“내가 여기까지 버들 씨 억지로 데려왔어요?”
“…….”
“따라왔잖아. 네 발로, 네가.”
반말에 설레어할 틈도 없었다. 버들이 힘껏 입술을 말아 물었다. 숨을 쉬는 것도 버거운데, 음? 하며 황 대표가 버들에게 대답을 종용했다.
“못 하겠어요?”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게 최선이었다.
“…….”
“…….”
침묵이 길게 느껴졌다.
“……실망이네.”
미묘하게 웃음기가 섞인, 나른하게 떨어진 황 대표의 말에 버들의 눈빛이 정처 없이 주변을 헤매었다. 황 대표가 버들의 손목을 놓았다. 또 잡힐까 싶었는지 버들이 제 손을 얼른 등 뒤로 감췄다.
쾅. 문이 닫혔다.
꽃밭이었던 버들의 머릿속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몸에서 열이 나는 거 같다. 울컥울컥, 속이 치민다.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던 중이었다. 생각나는 게 있어 룸으로 돌아간 버들이 노크했다. 곧 문이 열렸다. 힘이 바짝 들어간 버들의 목에 안쓰러울 만큼 쇄골이 도드라졌다.
“……같이 놀까?”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황 대표가 물었다. 다정한 얼굴이라서 더 비수가 되는 거 같다. 단정했던 와이셔츠 단추가 풀려 있다. 뒤엔 젖은 여자가 가운 끈을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있었다. 버들이 손을 내밀었다. 그걸 황 대표가 눈만 내리깔아 보았다. 미세했던 떨림이 지금은 눈에 띄게 심해졌다.
“주세요.”
불안정한 발음이었다.
“제가 드린 해바라기 주세요.”
황 대표의 걸음을 버들의 시선이 따라갔다. 해바라기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밟혔는지 샛노란 꽃잎이 군데군데 짓이겨지고 납작해져 있다. 돌려 달라고 내민 손이 무의미했다. 황 대표가 해바라기를 던져 버렸기 때문이다. 제 어깨를 맞고 떨어진 꽃을 주워 든 버들이 깜깜한 호텔 복도에 오도카니 홀로 남겨졌다.
아팠다. 삼 일 내내. 아침부터 밤까지. 머리가 울리는 것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속이 쓰리다. 겨우겨우 조금 삼킨 음식물에도 버티지 못하고 넘어오는 신물이 아주 곤혹스럽다. 뭐든 입에 넣는다는 것 자체가 머뭇거려지고 급기야 기피하기에 이르렀다. 먹은 게 없으니 기력을 잃었다. 기분은 어제보다 오늘 더 가라앉는 식이었다. 삼 일째니까 땅바닥에 곤두박질 친 것으로도 모자라 지금은 아예 지하 땅굴로 파고들고도 남았을 거다. 더 늦기 전에 건져 올려야 한다는 건 알지만, 생각뿐이다. 어떤 의욕도 생기지 않는다.
꺼내 든 담배를 입에 물고서 버들이 눈가를 찌푸렸다. 라이터가 보이지 않는다. 가방 곳곳을 들춰 보았지만 손에 잡히는 게 없다. 열어 뒀던 가방 지퍼를 모두 채운 다음 온몸을 수색하고 나서야 가장 나중에 확인한 뒷주머니에서 라이터를 발견했다. 가뜩이나 기력 없는 마당에 뭔가 실속 없는 짓을 저지른 거 같아 어깨가 축 처졌다. 천천히 내뿜은 담배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빨간색 정점으로 타들어 가는 건 담배뿐만이 아니었다. 속도 탔다.
좋으니까, 좋아하니까, 좋다.
상대방을 향한 내 마음이 어떤지 또렷하게 자각하는 게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목적지인 줄 알았건만 정말로 큰 착각에 불과했다. 황 대표를 좋아하는 것으로 요 며칠 사는 게 즐겁더니 한순간에 잿빛으로 우울해졌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유버들.”
이기고 있던 연습 경기였다. 버들을 발견한 정민이 야구공을 집어 던지고 그쪽으로 뛰어갔다.
“야. 내가 부르는 거 안 들려?”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아는 척을 하는 정민의 호흡이 뛰어와서 그런지 가빴다. 턱 끝에 맺힌 땀방울을 대충 손등으로 닦아 내고 있는 정민을 슬쩍 바라봤다가 도로 앞을 향한 버들의 눈빛이 딱 무심하다.
“너 살면서 생긴 대로 놀라는 말, 들어 본 적 없어?”
유버들과 담배라니. 진짜 안 어울린다.
“저기. 네 친구들이 너 부르잖아.”
“내버려 둬. 아. 맞다.”
벌떡 일어난 정민이 다시 제 친구들 무리 속으로 파고들었다. 너 때문에 술값 내게 생겼다며 날아오는 발길질을 요령껏 피했다. 한쪽에 수북하게 쌓아 두었던 음료수 중 그나마 시원한 걸로 골라 무사히 돌아왔다.
“마셔.”
“배 안 고파.”
담배를 비벼 끄며 시큰둥한 버들을 정민이 흘겨봤다. 어이가 없네.
“너는 콜라를 뭐 배고파야 마시냐?”
“별로 생각이 없다는 거지.”
“안 더워?”
“응.”
“그럼 나중에 생각날 때 마셔.”
정민이 제 손에 억지로 쥐여 준 캔을 버들이 바라봤다. 숙여진 고개를 따라 풍성한 머리카락이 밑으로 쏟아졌다. 캔 겉면에 묻은 물방울이 버들의 손바닥으로 옮겨 갔다. 시원해서 계속 만지작거리는 동안 손톱까지 축축해졌다. 갈증이 나지만 지금은 물만 마셔도 속이 뒤틀렸다.
“너 이런 거 마셔도 돼?”
옆에서 탄산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는 정민을 향해 버들이 물었다.
“뭐가.”
“몸 관리해야 한다면서.”
“뭔 소리야?”
“탄산 몸에 안 좋잖아. 그래서 난 우리 형이 자주 못 마시게 하는데.”
눈을 깜박거리며 쳐다보는 버들을 정민이 황당하게 마주 봤다.
“야. 담배가 훨씬 더 몸에 안 좋거든?”
그런가, 하며 낮게 대꾸하는 걸로 버들의 반응은 끝이었다.
“너 무슨 일 있냐?”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그냥.”
“그냥. 뭐.”
달싹거리는 버들의 입술이 애태운다. 정민이 눈가를 찌푸렸다.
“아 답답하네. 무슨 일 있어?”
“누구 좋아하는 게 무슨 일은 아니잖아.”
“……어?”
“자연스러운 거 아니야?”
“어?”
여태 초연하게 잘 유지해 왔던 감정이 뱉어 놓고 보니 서럽다. 버들이 가방을 챙겨 들고 자리를 떴다.
* * *
유 대표가 태블릿 전원을 켰다. 영화 제작에 들어간다는 소문이 좀 더 구체화되면서 기획사 측에서 먼저 접촉을 해 오고 있었다. 도착한 메일들이 전부 그러한 내용들이다. 흥행은 보장되어 있고, 더 나아가 칸에 초청받을 수도 있을 테니 안달이 났을 거다. 초반일 땐 괜한 헛소문이 도니까 이러한 관심이 반갑지 않았지만, 지금의 진행 단계에선 적당히 소란스러울 필요가 있었다. 캐스팅을 제외하고, 촬영 준비가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다. 못마땅한 눈초리로 유 대표가 황 대표를 노려봤다. 그렇게 포옹력을 좀 발휘해 보라고 조언을 해 줬건만 일절 보람이 없다. 여전히 하늘 꼭대기에 달린 황 대표의 눈이 도통 내려올 줄을 모르고 있다.
“야. 황 대표.”
“왜.”
“같은 말 반복하는 거…….”
“싫다고 했다.”
“응. 근데 새로운 배우거든? 한 번 봐.”
유 대표에게 건네받은 태블릿을 황 대표가 바로 내려놨다.
“왜? 별로야? 괜찮지 않아? 우리 영화랑 이미지가 잘 맞을 거 같은데.”
“안 돼.”
“왜?”
“걔 나랑 잤어.”
“야. 새끼야.”
얼굴을 확 구기며 유 대표가 역정을 냈다.
“걔랑 왜 잤어?”
왜 잤겠어. 자자고 하니까 잤겠지. 유 대표의 잔소리를 흘려들으며 황 대표가 콧방귀를 꼈다.
“유버들 씨 말이야.”
“내 새끼? 내 새끼가 왜?”
눈을 감자 해바라기를 든 채 바들바들 떨고 있던 버들이 떠올랐다. 물기로 가득했었던 동그란 눈이 울지는 않았다. 가소로웠다.
“물어볼게 있는데. 버들 씨, 경영 물려받아?”
곧바로 유 대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새끼는 경영 안 할 거야.”
“그래?”
하긴. 경영할 깜냥도 없어 보였다.
“세상에 좋은 게 얼마나 많은데 내 새끼한테 경영 따위 시키겠냐.”
“그럼.”
“그냥 있는 돈 펑펑 쓰면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 거야.”
시시하다. 생각이 있다면 그딴 취급당해 놓고도 또다시 해바라기 들이밀며 설치지 않겠지만 또 나타난다면…… 함부로 대해도 될 거 같다.
「저는……. 대표님 매일매일 예뻐해 드릴 수 있어요.」
* * *
“속이 불편하고 또?”
“두통이요. 두통이 있어요.”
버들이 약사 앞에서 또박또박 제 증상을 밝혔다.
“에어컨 너무 틀어 놓고 그러지 마세요. 냉방병 때문에 두통 있는 분들이 많거든요.”
순하게 버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손과 발이 차서 웬만하면 에어컨을 틀지 않는다. 그렇다고 황 대표와 일면식도 없는 약사에게 “제가요. 황 대표님을 너무 좋아해서 머리도 아프고 밥도 못 먹고 있는 거 같거든요.” 하고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갑을 꺼내 계산을 치른 뒤 약국 이름이 적힌 봉투를 건네받았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버들은 침대에 곧장 엎드렸다. 서랍을 열어 머플러를 꺼내 깊숙이 코를 파묻었다. 황 대표의 향수 냄새가 차차 희미해지더니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 같다. 가슴 한쪽이 묵직하게 저려 온다. 좋아하는 마음을 감췄어야 했나? 버들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황 대표가 돌연 쌀쌀맞아졌던 게 아무래도 저가 좋아한다고 고백한 후부터인 거 같다. 좋아하는 마음을 감춰야 하는 게 정답이라면, 이미 몇 번씩이나 말해 버린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정표도 없이 온통 처음 느껴 본 감정들이라 헤매게 된다.
첫사랑이다.
앞치마를 들고 버들이 터덜터덜 작업실에 들어갔다. 우울해하던 버들의 얼굴이 작업을 하자 조금이나마 생기가 돈다. 흙을 덧붙이느라 손이 잔뜩 지저분한 이때 하필 코가 간지럽다. 열심히 코끝을 꿈틀거리던 버들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손으로 벅벅 긁는 게 제일 시원할 거 같지만 어쩔 수 없이 가장 깨끗한 팔뚝으로 코를 비볐다.
황 대표님은 지금쯤 저녁 드셨을까?
* * *
“그래서 네 눈에는 그게 문제가 없다고?”
“야. 그렇게 디테일한 걸 관객들이 찾을 수나 있을 거 같아?”
“찾게끔 만들어야지. 내용상 그게 얼마나 중요한 복선을 나타내는데.”
“황 대표. 그럼 어떡할 건데. 소품 나온 거 다 엎어?”
“엎어.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어?”
운전석에 앉아 있는 유 대표와 조수석에 앉아 있는 황 대표가 언성을 높였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버들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학교에 있던 중에 지나가는 길이니 같이 집에 가자며 겨울에게 전화가 걸려 왔었다. 별생각 없었던 중에 황 대표와 만나게 됐다. 문제는 제 형과 황 대표가 다투고 있어 분위기가 딱딱했다는 것이다. 호텔 이후 처음 보는 건데 이대로 가다간 황 대표님이랑 말 한 마디 섞을 기회조차 없을 것 같다. 버들이 시무룩해졌다.
“어차피 지금 배우 안 정해졌잖아. 촬영 들어가려면 기간 남았어.”
“내 말이. 배우부터 정하는 게 시급하지 않아?”
황 대표를 먼저 집까지 데려다준 다음 버들과 같이 귀가하려고 했으나 유 대표가 방향을 틀었다. 술집 앞에서 차를 멈췄다. 문 닫히는 소리가 세 번 들렸다. 공손하게 손을 내민 직원에게 차 키를 건네준 뒤 유 대표가 뒤를 돌았다. 부루퉁한 표정으로 서 있는 버들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제야 아차, 싶다. 서로 감정 섞여 황 대표와 나눴던 욕들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깜박할 게 따로 있지. 어떻게 내 새끼 싣고 온 걸 잊고 있었을 수가 있지? 그만큼 황 대표와 다투고 있는 내용이 심각했었다. 방금까지 종잇장처럼 표정을 구기고 있던 유 대표가 버들에게 다가가면서 씩, 웃었다. 그사이에 황 대표가 먼저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버들아. 기사 불러 줄게.”
“형. 술 마셔?”
“일 때문에 황 대표랑 회의하는 거지.”
“내가 옆에 있어도 되잖아.”
“재미없을걸.”
“나 배고파.”
“여기 밥 없어.”
“술만 파는 곳이야?”
“응.”
“안주는? 과일 같은 거 먹어도 돼.”
“버들아. 그냥 기사님 불러 줄 테니까 집에 가서…….”
“배고파, 형.”
집에 돌려보내려고 했으나 배가 고프단 버들의 말에 유 대표가 약해졌다.
“그래, 그럼.”
“나도 같이 가도 돼?”
“과일이면 되겠어?”
“응. 어차피 다른 건 없다면서.”
안으로 들어가자 매니저가 예의 바르게 룸으로 안내했다. 버들의 어깨를 감싸고 안으로 들어온 유 대표를 보며 황 대표가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렸다. 세로로 길쭉한 테이블에는 이미 독한 도수의 술과 얼음, 약간의 안주가 도착해 있었다.
“일 얘기 하러 온 거 아니었어, 여기?”
삐딱하게 황 대표가 불만을 던졌다.
“보안이 우선이야.”
“내 새끼는 입 무거워.”
황 대표가 비웃었다. 진짜라는 듯 버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과일만 먹고 간대. 지금 배가 고파서.”
유 대표가 포크에 찍어 준 멜론을 버들이 베어 물었다. 차분히 오고 가나 싶더니 차에서처럼 두 대표의 언성이 높아지는 게 금방이다. 어수선함 속에서 버들이 바지런히 황 대표를 힐끔거렸다.
“버들아. 기사 불러 줄까?”
“나 아직 덜 먹었는데…….”
“그래? 더 먹을 거야?”
황 대표와 싸우고 있는 와중에도 유 대표가 틈틈이 버들을 챙겼다. 평소 입이 짧아 뭐든 금방 물려 하는 걸 알기에 먼저 이것도 먹고 싶다, 저것도 먹고 싶다 하는 버들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두 대표의 목소리가 한껏 낮아졌다. 저가 들으면 안 되는 내용인가 보다. 눈치껏 버들이 화장실을 다녀왔다. 돌아오니 자리엔 겨울이 없었다.
“……저희 형은요?”
“통화하러 갔어요.”
“아.”
황 대표님과 만나는 날을 미리 예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 옷 대충 주워 입고 나왔는데. 하필. 원래 제 자리에 앉지 않고 유 대표가 앉았던 자리에 버들이 엉덩이를 붙였다. 그편이 황 대표와 더 가깝기 때문이었다.
「좋은 거 하러 갈래요?」
황 대표의 눈길이 저한테 닿기를 바라면서도 진짜로 닿을까 봐 겁이 난다.
“제가 대표님 좋아한다고…….”
“만날 때마다 그렇게 소름 끼치게 할 거예요?”
천천히 입을 연 버들의 말을 황 대표가 가로막았다.
“제가 대표님 좋아하는 게…….”
“잘못된 거라니까.”
“우리 둘 다 남자니까요?”
응. 간단하게 황 대표가 대답했다.
“…….”
“…….”
속이 쓰리다. 황 대표를 좋아하는 마음이 스스로를 속상하게 만든다.
흡연해도 되는지 버들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황 대표가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라이터를 달칵였다. 깊게 들이마신 연기를 일부러 정면을 향해 내뱉었다. 버들이 고스란히 희뿌연 담배 연기를 뒤집어썼다.
“이거…….”
버들이 가만히 담배 브랜드를 중얼거렸다. 기가 막힌지 순간 황 대표가 저도 모르게 웃었다. 하얀 얼굴이 기침을 내뱉으면서 도망칠 줄 알았더니, 냄새만 맡고 어떤 브랜드인지 알아맞힐 줄이야. 배려 없는 제 행동에도 꿋꿋하게 앉아 있는 꼴이 자존심도 없는 모양이다.
“대표님.”
“네.”
“제가 쭉 생각해 봤는데요. 오해예요.”
“뭐가요.”
“저 남자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저 좋다면서요.”
“그러니까 남자가 좋아서 대표님한테 고백한 게 아니란 거예요. 저는요, 대표님이 여자분이셨어도 좋아했을 거예요.”
저절로 입장 바꿔 생각이 된다. 유 대표가 걸핏하면 들먹거리는 포옹력이란 이런 걸까. 나라면 키 188cm에 어깨가 벌어진 여자와는 침대까지 못 갈 거 같다.
“버들 씨.”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버들이 애꿎게 손만 꾹 움켜잡았다.
“저랑 자고 싶어요?”
펄떡거리는 버들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잔다? 황 대표님과?
“그게…….”
“섹스. 버들 씨, 저랑 섹스하고 싶어요?”
담배를 끄고 황 대표가 턱을 괬다. 여자들에게 사랑한단 말을 아끼지 않는 편인데 그게 딱 침대 위에서만이다. 나른한 황 대표의 시선이 버들의 머리에서 어깨로 떨어졌다. 긴장하고 있단 게 전부 티가 난다. 힘이 바짝 들어간 채 움푹 파여 있는 쇄골이 그 증거였다. 음. 약간은 의외다. 사내새끼가 목도 가늘고 어깨 끝도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
버들이 긴 속눈썹을 빠르게 깜박였다. 앉아 있는데 현기증이 느껴진다. 섹스, 거기까지 미처 생각지 못했다.
“남자 놈들끼리 섹스 어떻게 하는지 알아요?”
나긋나긋한 어조가 혼을 빼놓는다.
“…….”
“…….”
버들이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많이 아프다던데. 음?”
“아파요? 저랑 자면, 대표님 아픈 거예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버들이 정말로 같잖다.
“내가 아니라, 너겠지.”
“……저만 아파요?”
“내가 넣을 거니까. 왜, 저한테 박고 싶어요?”
가정이란 걸 전제했지만 말을 뱉고 나니 헛웃음이 터졌다. 황 대표와 달리 계속 진지하고 심각했던 버들이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대표님이랑 섹스하면, 저만 아픈 거죠?”
“응.”
확실하게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한 버들이 몸을 뒤로 기울였다. 아 다행이다.
“다행?”
미간을 찌푸리며 황 대표가 되물었다.
“네. 대표님이랑 섹스할 때 아파도 저 괜찮아요.”
“…….”
“왜냐하면…….”
“…….”
“저는 아픈 거 되게 잘 참거든요.”
……유 대표는 알까. 죽고 못 사는 지 새끼가 어마어마한 꼴통이란 걸.
통화를 끝낸 겨울이 돌아왔다. 룸 천장에 담배 연기가 자욱하다. 황 대표의 앞에 놓인 재떨이가 채워진 걸 보고 대뜸 인상을 찌푸렸다. 알아서 자리를 꼬물꼬물 비켜 주고 있는 버들을 붙잡은 유 대표가 안색부터 살폈다.
“버들아. 괜찮아?”
“뭐가.”
담배 연기에 기침을 많이 해서 힘들어할 줄 알았더니 멀쩡하다. 도리어 무슨 일이냐고 묻듯 버들의 커다란 눈망울이 말똥말똥 유 대표를 쳐다봤다. 칼집이 난 오렌지 껍질을 마저 까서 입에 물려 주자 버들이 마지못해 입을 벌렸다.
“아. 뭐야. 형. 이러지 마.”
제 성에 찰 만큼 유 대표가 버들의 뒷머리를 벅벅 격하게 쓰다듬었다.
“황 대표님. 원래 싸가지 없는 줄은 알았는데 이 정도까지 막 나갈 줄은 몰랐습니다.”
유 대표의 화살이 황 대표를 향했다. 무슨 뜻이냐는 듯 황 대표가 턱을 까닥거렸다.
“담배 말입니다.”
“흡연이 가능한 곳에서 담배가 왜.”
“애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싶습니까.”
“여기에 애가 어디에 있는데.”
“안 보이냐? 눈은 장식이야? 여기에 있잖아.”
유 대표가 당당히 버들을 가리켰다.
“내 새끼. 유버들.”
주책바가지야, 진짜. 창피해진 버들이 겨울을 흘겼다. 제 다섯 형들 중 넷째와 다섯째가 제일 문제였다. 지들 나이 먹을 때 나는 노나? 버들 역시 착실하게 나이를 먹고 있었지만, 변함없이 애 취급을 해 대니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네 눈에만 애지. 다 큰 성인 아니야?”
황 대표의 말에 버들이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니야. 덜 컸어. 한참 더 클 때야.”
대단한 콩깍지를 뒤집어쓴 유 대표가 뻔뻔하게 굴었고, 그에 황 대표의 미간이 구겨졌다. 민망한 건 버들의 몫이었다. 주책 그만 떨란 듯 버들이 겨울의 허벅지를 툭 쳤다.
“그러니까 내 말은 비흡연자를 존중하라는 거지.”
겨울과 버들의 눈이 마주쳤다. 이윽고 “그치?” 하며 제게 동의를 구하는 겨울에게 버들이 간신히 턱을 주억거릴 수 있었다.
잠시 끊겼던 업무적 대화로 두 대표가 집중했다.
황 대표님은 그 담배를 피우는구나. 내일부터 나도 그 담배를 피워야겠다.
영양가 하나도 없는 잡생각을 진지하게 하던 버들이 문득 제 뒷주머니에 손을 가져갔다. 볼록하게 라이터가 만져지자 뜨끔했다. 물론 흡연이 죄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형들에게 들켰다간 필히 여러모로 곤란해진다. 살살 겨울의 눈치를 보며 간신히 라이터를 꺼낸 버들이 황급히 가방 안쪽 깊숙한 곳에 숨겼다.
두 시간쯤 더 지나고 나서야 두 대표가 슬슬 자리를 뜰 기미를 보였다.
“안 졸려?”
“괜찮아. 나 원래 잠 없잖아.”
“형 따라다니느라 피곤하겠네.”
틈이 생기자 과하게 안쓰럽단 투로 겨울이 또 서슴없이 꼴값을 떨어 댔다.
“아니야. 나 괜찮아. 일하느라 피곤한 건 형이지.”
겨울에게 다정다감히 걱정을 돌려주면서 정작 버들의 시선이 슬그머니 향한 곳은 황 대표가 있는 자리였다. 입술, 목울대, 눈썹, 볼, 귓불, 목, 귓바퀴, 코, 콧대, 턱, 눈썹 뼈……. 황 대표의 얼굴에 푹 빠져 있느라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하품 한 번을 안 했다. 당연히 피곤한 줄도 모르겠다. 오늘 봤으니 다음엔 또 언제 만날 수 있는 걸까. 기약 없는 기다림이 참 막연하다.
“왜. 가방 무거워? 형이 들어 줘?”
황 대표를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꾸물꾸물 늦장을 피우는 버들에게 겨울이 물었다. 라이터와 담배가 들어 있는 가방을 사수하며 버들이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 대표가 먼저 밖으로 나가 버리자 버들의 행동도 빨라졌다.
이미 가게 매니저가 대리 기사를 불러 놓고 대기하는 중이었다. 밤하늘이 서늘하다. 축축한 공기가 살갗에 닿는다. 불시에 버들의 가방을 낚아챈 겨울이 묵직한 무게에 한숨을 지었다. 화들짝 놀란 버들이 다시 제 가방을 뺏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차 안쪽으로 버들의 가방을 던져 놓고선 유 대표가 황 대표에게 말을 걸었다.
“타. 가는 길이니까.”
겨울이 껴안자 술 냄새가 난다고 버들이 진저리를 쳤다.
“어허. 형한테 그러면 돼, 안 돼?”
꼬부랑꼬부랑 굴러가는 혓바닥으로 으름장을 놓으며 겨울이 버들을 안고 있는 팔에 더 힘을 줬다.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쳐 보았지만 확연한 체격 차이에 어림도 없다. 최선을 다해 꼬물거리던 버들이 다 포기하고 코를 움켜쥐었다.
제대로 교육을 받은 만큼 매니저가 겉으로 내색은 안 했으나, 처음 보는 유 대표의 모습에 뜻밖이란 눈치였다. 사회적 지위와 덩칫값을 저 멀리 날려 버리고 난리 블루스를 치고 있는 유 대표를 황 대표가 외면했다. 버들의 까만 눈동자가 황 대표를 따라 이동했다. 황 대표는 독한 도수의 술을 꽤 많이 마셨는데도 일절 흐트러짐이 없다. 심지어 걸음걸이조차 바르다.
“타. 왜?”
“됐어.”
무심한 황 대표의 거절에 매니저가 재빨리 택시를 잡았다. 겨울이 이유를 물었다.
“스토커한테 집 알려지기 싫어서.”
때마침 울린 경적과 황 대표의 대답이 겹쳤다. 제대로 못 들었는지 유 대표가 “뭐라고?” 고개를 갸웃거렸고, 버들은 눈에 띄게 침울해지고야 말았다. 황 대표의 비아냥거림이 제대로 귀에 박혔기 때문이었다.
……나 스토커 아닌데. 계속해서 황 대표에게 오해를 사고 있는 것 같다.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버들이 쓰린 속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 * *
몇 번의 노크 끝에 버들이 겨울의 방문을 열었다. 해가 아까 중천에 떴으나 넓은 방 안이 잠잠하다.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들을 버들이 발끝으로 휙휙 치워 가며 침대로 다가섰다.
“형.”
“…….”
“겨울이 형.”
“…….”
엎드려 누워 있는 겨울의 등이 미동을 하지 않는다. 물론 예상했던 반응이다. 어제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으면 곱게 가서 자지 제 방까지 따라 들어와 한참 뻗대다가 돌아갔었다.
한심함을 담아 버들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한쪽 무릎으로 침대에 올라선 뒤 가차 없이 겨울을 퍽퍽 내려쳤다. 맵기 그지없는 버들의 손맛에 그제야 겨울이 애벌레처럼 꿈틀거렸다. 꾹 감겨 있던 눈도 빠끔히 떴다.
“이제 너는 큰일 났다.”
낮게 가라앉은 겨울의 목소리가 쩍쩍 갈라지며 나왔다.
“무슨 큰일?”
“너희 형 등짝 구멍 났어.”
“구멍 안 났어.”
“잘 봐 봐.”
“지금 보고 있잖아.”
“구멍 안 났어?”
“응.”
그렇군. 허무하게 대꾸하며 겨울이 벽을 보고 돌아누웠다.
“일어나서 해장해.”
“조금만 더 자고.”
“지금 시간이 몇 신 줄은 알아?”
“그럼 5분만.”
“안 돼. 이미 밥 차려져 있단 말이야.”
“나중에 먹는다고 해.”
“그럼 일 두 번 하시잖아.”
“그걸 네가 왜 신경 써. 월급 받는, 아!”
저 쥐방울만 한 게. 확, 그냥!
“뭘 봐? 빨리 일어나기나 해.”
닦달하는 쥐방울만 한 것에 못 이겨 겨울이 옷을 꿰입었다. 꿍얼거리면서도 쥐방울만 한 것에 이끌려 순순히 계단을 내려왔다.
겨울을 식탁 앞에 앉히고 나서야 버들이 꿀물을 탔다.
“어때. 속 많이 아파?”
“……응.”
“잘한다, 진짜. 어제 술 많이 마시더라.”
“고작 그게?”
사납게 흘겨보며 버들이 겨울의 옆에 앉았다. 국을 뜨려다 말고 겨울이 그런 버들을 바라봤다.
“아직 밥 안 먹었어?”
“형이랑 같이 먹으려고 기다렸어.”
“그럼 그렇다고 진작 말하지.”
“빨리 먹어.”
“뽀뽀나 한 번 할까?”
“술 냄새 나. 어제 안 씻고 잤어?”
“새끼야. 씻고 잤어.”
멋쩍게 대꾸하며 겨울이 연거푸 국물을 들이켰다. 적당히 매콤한 해장국에 속이 확 풀어진다. 사우나에 들어간 아저씨처럼 걸쭉한 감탄을 내뱉었다. 점점 젓가락질이 느려지는 버들의 앞으로 좋아하는 반찬들만 골라 밀어 주며 겨울이 식사를 끝냈다. 씻고 나오니 침대에 버들이 벌러덩 누워 있다.
[대표님 해장하셨어요?]
15분 뒤.
[대표님 꿀물 타는 법 아세요? 저 꿀물 되게 잘 타요.]
제 형만큼이나 독한 술을 마신 황 대표의 속이 걱정이다. 해장은 하셨을까, 보낸 메시지 끝에 숫자 1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게 황 대표의 개인 비서 번호인 줄 모르는 버들이 틈나는 대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마음은 바짝 타고 입술은 부루퉁하게 튀어나왔다.
“왜. 뭐 할 말 있어?”
누운 채 저를 쳐다보는 버들을 보며 겨울이 눈썹을 까닥거렸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버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형 씻어서 이제 술 냄새 안 나는데 아까 못 한 뽀뽀나 한 번 할까?”
“싫어.”
“그럼 너 장가가지 말고 형이랑 평생 사는 거다.”
“그런 말 좀 그만해.”
“새끼가. 뽀뽀도 안 해 주면서 장가까지 가겠다고?”
나한테 황 대표님이 장가왔으면 좋겠다. 그럼 나, 진짜 잘해 줄 자신 있는데.
“형, 어제 보니까…… 황 대표님이랑 왜 그렇게 싸워?”
“어제 직접 봤으니까 더 잘 알겠네. 싸울 만하지 않던? 그 새끼 고집 피우는 거 너도 봤지? 이미 전체적으로 소품이 나왔는데 영화 장면으로 몇 컷 나오지도 않는 걸 새로 제작하자고 하잖아.”
하면 되잖아. 그게 싸울 일인가. 나라면 황 대표님이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하겠다.
“형.”
드라이기 코드를 꼽으며 겨울이 거울을 통해 버들을 쳐다봤다.
“나, 있잖아. 작업실…….”
“너도 안 된다는 거 자꾸 고집 피울래?”
“……누가 고집 피웠다고 그래.”
“너 작업실 따로 둬서 뭐 하게?”
“뭐 하긴. 작업하려고 그러는 거지. 학교랑 가까우니까 강의 빈 시간에 들러 조각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너 곧 방학 아니야?”
“그렇긴 한데…….”
말문이 막혔다.
“너 솔직히 말해 봐.”
머리를 충분히 말린 뒤 겨울이 버들에게로 다가갔다.
“여자 친구 생겼어?”
“형. 황 대표님은 애인 있으셔?”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버들이 되게 조심히 물었다.
“그 새끼가 연애를 하건 말건 뭔 상관이야. 그런 건 왜 물어?”
“그냥. 궁금하니까 그렇지.”
여자 친구 유무에서 왜 갑자기 황 대표의 연애로 말이 튀는지 모르겠다.
“왜 그렇게 봐.”
겨울이 버들을 째려봤다. 하루라도 황 대표 타령을 안 하면 입에 가시가 돋나 보다. 형제들이 많아 제 막냇동생을 독차지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가장 극성맞은 라이벌은 현재 군 복무 중이라 떨어져 있는 시점, 새로운 복병이 나타났다. 그게 황 대표일 줄이야. 오래 알아 온 사이인 만큼 황 대표의 성격이 어떤지 아는데 아마 제 막냇동생을 상종도 해 주지 않을 것이다.
“황 대표를 닮고 싶은 거야? 그래?”
“예쁘고 착하시니까.”
잠시 호텔에서의 일이 떠올랐지만 버들이 고개를 흔들어 떨쳐 냈다.
“그 덩치가 예쁘냐? 어이가 없네. 야. 예쁘고 착한 사람 내가 한 트럭으로 데려와 볼게. 거기에 황 대표는 없어.”
“황 대표님이 없으면 한 트럭이 무슨 의미가 있어?”
겨울이 버들의 코를 꽉 꼬집었다.
“이게 말대꾸하는 거 봐라. 황 대표, 어디가 착하던? 어제 형한테 욕하는 거 봤지?”
“형도 황 대표님한테 욕했잖아.”
빨개진 코로 버들이 할 말은 했다.
“너 생긴 걸로 사람 판단하지 마. 그거 되게 위험한 거야.”
“형. 나는 황 대표님을 외모만 보고 판단하고 그러지 않아.”
“그럼.”
“목소리도 봤어. 키랑 또…….”
“확, 그냥!”
버럭 소리를 내지른 겨울을 버들이 흘겼다.
“나는 형이랑 같이 살기 싫어서 장가 갈 거야.”
“뭐, 인마?”
겨울의 입장에선 청천벽력과도 다름없는 말이었다. 휙 가 버리려는 버들을 잡아 다리를 걸어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파닥거리는 버들을 겨울이 힘으로 눌렀다. 티격태격 다투고 있던 중에 겨울이 핸드폰을 꺼냈다. 그 틈에 빠져나온 버들이 겨울의 종아리를 퍽, 발로 차 준 뒤 밖으로 나가려는데 그대로 발이 묶였다.
“왜. 황 대표.”
-네 시에 약속한 거 잊지 마.
“어. 안 그래도 지금 나갈 거야.”
-이따 봐.
버들이 서둘러 제 핸드폰을 열었다가 금방 실망했다. 저가 보낸 메시지 끝에 달려 있는 숫자 1이 그대로였다. 왜 내 메시지는 안 읽으시지?
겨울이 버들의 어깨를 감싸 귀 가까이 핸드폰을 대 줬다. 숨죽인 채 황 대표의 목소리를 듣던 중 버들이 순간 저도 모르게 재채기를 터트렸다. 한창 오늘 있을 회의에 대해 설명하던 황 대표가 침묵했다.
-……유버들 씨?
저만치 도망가 버린 버들을 보며 겨울이 웃었다. 침대에 엎드린 버들의 뺨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자신은 평생 황 대표가 저음으로 제 이름을 불러 주는 것에 가슴 떨려 할 것 같았다.
겨울이 대충 둘러대며 황 대표와 전화를 끊었다.
“어깨 좀 주물러 봐.”
“…….”
“어깨 주물러 주면 황 대표 비밀 이야기 해 줄게.”
거짓말인 거 같은데. 그냥 저 골려 주려고 꺼낸 말 같은데. 그러면서도 무시할 수가 없다. 울상인 얼굴로 버들이 겨울에게 다가갔다. 제 형의 어깨는 얼마든지 주물러 줄 수 있다. 그런데 거기에 황 대표를 조건으로 붙이자 어렴풋하게 깨닫는 게 있었다.
황 대표를 좋아하는 마음이, 약점이 됐다.
* * *
복도를 묵직하게 울리며 현관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가 의미 없는 층수에 멈춰 잠잠하다. 무의식중에 황 대표가 곡선으로 말려 있던 버들의 긴 속눈썹을 떠올렸다. 술자리 후 같은 차를 타지 않았다고 해서 내 개인 정보가 무사히 보호되리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유 대표가 가장 문제였다. 사소한 내용의 계약 사항 하나까지 책임져야 하는 위치라 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분 짓고 있었지만 그간 목격한 걸로 보아 제 새끼 앞에선 와르르 허물어질 거란 게 안 봐도 훤하다. 유 대표는 버들이 자신에 대해 물어본다면 동업자의 사생활이라며 올바르게 함구하는 대신 줄줄 발설하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집 주소는 기본이겠지. 명확한 루트를 통해 날개를 단 스토커는 자신의 좁은 행동반경 또한 일찌감치 파악을 끝냈을 수도 있다.
차를 끌고 나오면서 집 주변을 둘러보던 황 대표의 눈매가 평소와 달리 구석구석 집요하다. 물론 경비가 유독 삼엄해 외부인은 절대로 출입할 수가 없단 걸 알지만, 외부인도 외부인 나름인 거다. 아무리 내 눈에 하찮게 보여도 실체는 대단한 유가(家) 기업의 막내아들이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거절보단 승낙을 당연시 여길 수 있는 특권을 쥔 채 자랐을 거다. 그러니 삼엄한 경비 정도는 우습겠지. 본인이 내킬 때면 거기가 어디라도 자유롭게 들락날락할 수 있단 뜻이었다. 마찬가지로 저 역시 다를 바 없는 배경이기에 그 어렵지 않은 수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좋아해요.」
황 대표가 콧방귀를 뀌었다.
좋아한단 말을 입 밖으로 끄집어낸 순간 무조건 자신에게 손해라는 걸 약간만 계산해도 알 수 있을 텐데 버들은 멍청하게 생겨서 멍청한 짓만 골라 한다. 심지어 빙빙 돌리거나 꾸미는 것도 없었다. 좋아해요, 단조롭게 끝나는 네 글자는 너무나 올곧게 자신을 향해 있었다. 소나기처럼 갑작스러워 그 상황을 피하지 못했단 게 이제 와 신경을 건드린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뭐든지 다 해 드리고 싶고……. 그리고 제가 드릴 수 있는 거면 어떤 거든 황 대표님께 드리고 싶어요.」
태어나 처음이었다, 살면서 그렇게 덜떨어진 말을 들어 본 게.
멍청한 정도가 아니라 병신인가 싶다. 그에게는 아까운 게 아무것도 없으니 기꺼이 뭐든 다 줄 것이고, 뭐든 다 해 준다며 매달리는 그 투명한 마음이 기가 찼고 이어 귀찮아졌다. 경영을 물려받는다면 또 모를까. 애초에 단물 없는 껌 주제에.
성격상 귀찮은 걸 귀찮다고 내버려 두는 대신 뿌리까지 뽑아 없애 버리는 쪽을 택하는 편이었으나 어쨌든 상대가 같이 사업하는 이의 동생이란 점에서 황 대표는 그간 꾸역꾸역 최소한의 배려를 발휘했다. 그게 무관심이었다. 하지만 워낙 멍청해서 그런지 그걸 배려라고 전혀 못 느끼는 모양이었다. 동그란 눈을 깜박거리며 몇 번 씩이나 자신의 앞에서 고백을 반복했다. 계산은 그렇다 치고 요령도 피울 줄 모르나. 슬쩍슬쩍 훔쳐보던 버들의 시선은 자신이 등이라도 돌리면 이때다 싶은지 노골적으로 들러붙었다. 형편없어 보이니까 아닌 척 좀 감춰 보라며 조언을 해 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황 대표가 핸들을 꺾었다. 좀 더 속도를 높여 도로에 진입했다.
「저랑 자고 싶어요?」
하나만 하지.
「섹스. 버들 씨, 저랑 섹스하고 싶어요?」
가지가지 한다.
섹스 이야기에 달아올랐던 얼굴은 도망치지 않았다. 더 나아가 아픈 거 잘 참는다며 적극적으로 굴었다. 스토커에. 남자한테 발정하는 호모 새끼에. 변태에.
……아. 꼴통이란 걸 빼먹을 뻔했네.
수영장에 도착한 황 대표가 주변으로 눈을 돌린 뒤, 차에서 내렸다.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와 대표님, 하며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릴 것 같다.
거슬린다.
* * *
짙은 어둠이 막 깔리기 시작했다. 최대한 빨리 씻고 나온 버들이 환기를 위해 열어 뒀던 창문을 모조리 닫았다. 커튼까지 단단히 쳤다. 그제야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은 버들이 두 다리를 편안히 쭉 폈다. 말리지 않은 머리칼이 물기로 축축하다. 노트북을 무릎 위에 올려 두고 전원이 켜지길 기다렸다. 그간 이성에 쭉 관심이 없었기에 성(性)에 관련한 호기심도 적었다. 그런데 며칠 전, 수업이 시작하기 전 동기 녀석들 중 누군가 농담 삼아 흘렸던 성인 사이트가 다른 때와 달리 왜 기억에 남는 건지 모르겠다.
인터넷 창을 연 버들이 천천히 주소를 입력했다. 침을 삼킨 버들의 목울대가 일렁거렸다. 보이는 건 검정색 화면뿐이다. 여러 아이콘을 클릭해 봤지만 화면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일단은 로그인을 해야 하나보다.
겨울의 개인 정보를 입력 후 엔터를 누른 버들의 얼굴이 못마땅하게 찌푸려졌다. 아. 뭐야? 이미 가입된 이름과 생년월일이란다. 버들이 코를 훌쩍거렸다. 첫째 형의 개인 정보를 입력했다. 탈퇴한 회원이라고 뜬다. 둘째 형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유부남이라 그런가 보다. 셋째 형의 개인 정보도 쓸모가 없었다. 이미 가입했다니까. 군대에 가 있는 다섯째도 마찬가지였다. 침울하게 처졌던 버들의 어깨가 다시 붕 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 형들이 가입했단 사이트라니까 아직 제대로 둘러보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성인 사이트란 느낌이 확 든 것이다.
본인 개인 정보로 사이트 가입을 끝낸 버들이 로그인을 했다. 까맣게 보였던 화면이 금방 다른 색으로 꽉 들어찼다. 온통 살색이다. 놀란 버들의 입술이 자그맣게 벌어졌다. 미리보기 형식으로 짧게 재생되는 성행위의 장면이나 신체들이 노골적이다. 입안이 금방 바짝 탔다.
버들이 검색 창으로 마우스 커서를 옮겼다. 간신히 한 글자씩 쳐 검색한 키워드가 ‘연상’이다. 연상과 관련한 영상은 넘쳐흘렀다. 가장 첫 번째에 있는 걸 버들이 클릭했다. 연상의 여자 선생님을 막 어떻게 하는 내용으로 하필 수위가 높았다. 당황한 버들이 꺼 버렸다. 남녀의 동영상보단 다른 게 보고 싶었다. 그래서 버들이 두 번째로 검색한 키워드가 ‘대표님’ 그리고 ‘게이’였다. 그 두 가지 조합으로 뜬 영상의 수도 무려 몇 페이지가 넘어갈 만큼 장난 아니게 많았다. 그중에서 어떤 걸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
갈팡질팡하던 버들의 손이 또 제일 첫 번째에 있는 영상을 클릭했다. 서류 복사를 하다 말고 난리가 났다. 역시나 수위가 셌다. 시뻘게진 얼굴로 버들이 노트북 화면을 쳐다봤다. 황 대표님이 섹스하면 많이 아프다고 그랬다. 거짓말이 아닌 것 같다. 침대도 아니고 복사기 위에서 뒹구는 건장한 사내들이 매우 힘들어 보인다. 그러니까 정확히 아래쪽에 있는 사람이. 위에 있는 사람은 사냥을 끝낸 맹수처럼 포만감에 취해 있다. 버들이 화면을 껐다. 노트북을 저만치 밀어 버리고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내가 뭘 본 건가 싶다. 심장이 무진장 펄떡거린다.
나는 아픈 거 잘 참으니까…….
에어컨 바람에 손이 시리다. 버들이 파자마를 들춰 제 배꼽 주변을 만지작거렸다. 새벽이 깊어져 사방이 고요했다. 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유일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발가락을 까닥거리며 천장을 올려다보던 버들이 은근슬쩍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봤다. 바지는 고무줄로 되어 있어 벌리면 벌리는 만큼 쉽게 벌어졌다. 속옷이 손끝에 걸린다. 잠시 고민하던 버들이 손을 뺐다. 몸을 뒹굴어 서랍 속에서 수첩을 꺼내어 엎드렸다. 첫 몽정을 하게 했고, 첫 자위를 하게 만들었던. 뚝뚝 끊긴 문장을 하나씩 연결하면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섹슈얼한 느낌이 다분하다. 이게 성인 사이트 동영상보다 더 야한 거 같다.
똑똑. 갑자기 들린 노크 소리에 버들이 후딱 몸을 일으켰다. 다시 서랍 속에 수첩을 넣고 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노트북도 꺼졌는지 재차 확인했다.
“버들아.”
노크 대신 이번엔 겨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뒤늦게 대답하며 버들이 문 쪽으로 달려갔다.
“형. 이제 왔어?”
“문은 왜 잠그고 있어?”
“잠그고 있었는지 몰랐어.”
그럴싸하게 둘러댔다.
“형이 심부름 하나 부탁해도 될까?”
날이 밝기 기다렸다가 버들이 급히 사옥에 도착했다. 정원이 잠잠하다. 감자와 금동이가 강아지들이 다니는 유치원에 입학했다. 버들이 비서에게 종알종알 궁금한 걸 물었다. 웃으면서 비서가 강아지들의 근황을 들려줬다. 유치원에서 잔재주를 많이 배워 와 앉으라면 앉고, 구르라면 구른단다. 실제로 본다면 너무 귀여울 거 같다. 마실 음료수를 챙겨 버들이 비어 있는 겨울의 대표실로 들어갔다.
황 대표가 차에서 내렸다. 금방 비가 내릴 것처럼 하늘이 우중충하다. 회사로 들어서자 비서가 벌떡 일어났다. 인사를 대충 받으며 황 대표가 유 대표의 대표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정면으로 동그란 뒤통수가 보인다. 천천히 저를 향해 돌아보는 얼굴이 말갛다. 며칠 안 보이더니.
“대표님. 안녕하세요.”
미리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가? 내가 여기서 유 대표와 약속이 있는 줄 알고?
“대표님. 전에, 술 마시고 나서요.”
“…….”
“다음 날 해장은 잘 하셨어요?”
“…….”
“속, 괜찮으셨어요?”
“…….”
그날이 언젠데 이제 와 해장은 했는지, 속이 괜찮은지 물어. 황 대표가 코로 비웃었다.
맞은편에 황 대표가 앉기를 기다리던 버들이 가방을 열었다. 그 손길에 황 대표의 한쪽 눈썹이 위로 쭉 올라갔다. 해바라기를 꺼내겠지? 황 대표가 그 생각을 하자마자 버들이 앞쪽으로 해바라기를 내밀었다. 수가 빤히 보인다. 징그러운 걸 떠나 이젠 질리니까 레퍼토리 좀 바꿨으면 싶다.
무심히 내려다본 꽃을 들었다가 황 대표가 도로 버들을 향해 툭 던져 버렸다. 버들의 마른 팔이 버려진 꽃을 주워 들었다. 샛노란 색감이 언제나 화사하다. 황 대표에게 줬지만 버려져 다시 저한테 돌아온 해바라기가 시들어 집에 쌓여 간다.
아무런 말없이 꽃잎만 만지작대는 버들을 황 대표가 서늘한 눈매로 훑었다. 옷이 얇아 몸매의 선이 드러난다. 끝이 동그란 모양을 하고 있는 버들의 어깨가 옷을 벗겨도 동그랄지 궁금하다.
“버들 씨.”
버들의 눈 깜박임이 잠시 멎었다. 황 대표가 낮은 저음으로 제 이름을 불러 주면 처음처럼 설렌다.
“저한테 뭐 바라는 거 있어요?”
무슨 뜻인지 단박에 알아듣지 못하고 버들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친절하게 황 대표가 뱉은 말을 일일이 풀었다.
“꼴이 웃겨서. 넙죽 엎드려서 밟아 달라고 사정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정말 그래요?”
“네?”
“진짜 밟아 주길 기다리고 있는 건가 싶어서요. 꽃까지 줘 가면서.”
버들이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저 바라는 거 없어요.”
“바라는 게 없어?”
“네. 저 바라는 거 없이 대표님 좋아해요.”
투명한 버들의 눈빛에 황 대표가 오롯하게 담겼다.
“좋아한다고 매번 꽃 갖다 바치면서 진짜 나한테 바라는 게 없어?”
황 대표님이 매일 보고 싶다. 그런데 막상 만나면 무던히 행복하기만 한 게 아니라, 가슴이 따끔거리기도 한다. 지금처럼. 긴 다리를 꼬며 황 대표가 비스듬히 턱을 기울였다. 잘생겨서, 묻어나는 여유로움이 멋있어서 버들의 넋이 잠시 나갔다.
“말해 봐요. 혹시 알아요? 내가 머리에 총 맞아서 작은 것 정도라면 들어줄지.”
음? 다정한 말투에 버들이 마음이 노곤히 풀렸다. 황 대표님한테 바라는 거…….
“저한테 웃어 주세요.”
뜻밖의 요구였다.
“웃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바라는 거 없긴 개뿔. 웃어 주면 좋겠어요? 제일 말도 안 되는 걸 뻔뻔하게 바라고 있었다. 여기에서 그만둘까. 아니면 좀 더 놀릴까.
“친구 동생으로서, 아니면…… 섹스 상대로서?”
며칠 전에 본 성인 사이트가 떠올라 버들의 귓불이 뜨거워졌다.
“저 진짜 아픈 거 잘 참아요.”
황 대표의 입가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었다.
“진짜예요. 저는 거짓말 같은 거 안 해요.”
“그러니까 목적은 그거에요? 나랑 자는 거?”
버들의 가느다란 목에 힘이 들어갔다. 자꾸 대화가 이상한 쪽으로 흘러간다. 그냥, 그냥 나는……. 버들의 도톰한 입술이 달싹였다.
“아픈 거 잘 참는다고 그랬죠?”
“네.”
“잘됐네. 많이 아프게 할 생각이었는데.”
버들의 눈썹이 가라앉았다. 아픈 건 잘 참지만, 안 아프게 할 수는 없는 건가? 물론 황 대표님이라면 복사기 위에서건 뭐든 감내할 수 있을 거다. 그 정도 각오는 진작 되어 있었다.
“거짓말 진짜 안 해요?”
“네. 안 해요.”
다부지게 말했다.
“그럼 확인시켜 줘요.”
나른하게 황 대표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나랑 비슷한 키에 덩치면 다 좋을 거 아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다른 새끼랑 섹스하는 거 보여 줘요. 그거 보고 내가 결정할게. 버들 씨가 아픈 거 잘 참나. 못 참나.”
귓불을 타고 버들의 얼굴 전체가 빨개졌다. 머릿속이 순간 엉켜 명확하게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해바라기 비닐 포장이 구겨졌다.
“저는…….”
황 대표님이 나를 보고 웃어 주면 좋겠고, 이름을 불러 주면 좋겠다. 내가 터무니없이 큰 걸 바라고 있는 건가? 버들이 애꿎은 아랫입술만 질끈질끈 깨물었다.
“못 하겠어요?”
황 대표가 다정하게 물었다.
“또 실망시킬 거예요? 좋은 거 하자고 나 따라와 놓고 도망갔던 날처럼?”
버들은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제 모습이 바보처럼 느껴져서 속상하다. 황 대표님에게 잘 보이고 싶은데 그 마음이 큰 만큼 속이 꽉 막히는가 보다. 버들이 간신히 황 대표를 쳐다봤다. 그것도 잠시. 진짜 실망이네, 하며 이어 들려온 황 대표의 말에 버들의 고개가 다시 푹 숙여졌다. 해바라기를 못살게 굴고 있는 버들의 손에 황 대표의 시선이 닿았다.
“버들 씨.”
“네?”
버들의 속눈썹이 빠르게 깜박였다.
“손 안 씻어요?”
“……손이요?”
“볼 때마다 지저분해서.”
……아니에요. 손톱이 엉망이고 살갗이 갈라지고 일어난 건 전부 전공과 관련이 있었다. 결코 위생에 소홀해서 제 손이 못난 게 아니었다. 힐긋 바라본 황 대표의 손과 너무나 비교가 된다. 저와 달리 예쁘고 참 곱다. 버들이 더 위축됐다. 빨간 볼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
“…….”
안 우네. 황 대표가 약해 보이는 버들을 빙글거리며 주시했다.
“아. 시간 다 됐는데 왜 안 와.”
짜증 섞인 황 대표의 중얼거림에 버들의 심장 박동이 더 빨라졌다.
「내 새끼. 형이 심부름 하나 부탁해도 될까?」
「심부름? 어떤 거?」
「스승님 얼굴 본 지 오래됐지? 만나러 갈래?」
「그게 심부름이야? 너무 좋아!」
「황 대표랑 같이.」
「……나랑, 황 대표님이랑 둘이서?」
안 그래도 스토커로 오해받고 있다 보니 버들은 겨울에게 거듭 당부했었다. 황 대표님에게 미리 말해 놓으라고. 더하지도 빼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설명하라고. 원래는 제 형과 황 대표가 같이 이동하기로 한 일정이었는데 중요한 미팅이 잡혀 빠질 수밖에 없다고 그랬다. 황 대표가 길치이니 누군가와 대동해야 하는데 마침 적당한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며 겨울이 부탁했었다. 하지만 황 대표의 반응을 보니 겨울에게 어떠한 언질도 전해 받지 못한 게 분명하다. 핸드폰을 꺼내 겨울에게 연락을 취하고 있는 걸 보며 버들이 괜히 조마조마 가슴을 졸였다.
“어디쯤이야.”
-거기 버들이 안 갔어?
“……뭔 상관이야.”
-난 못 가. 버들이가 길 잘 알아. 오히려 거기 내 새끼가 가면 환영할걸. 너랑 나랑 둘이 가 봤자 소금만 맞고 쫓겨나. 버들이 데려가. 아. 나 그리고 미팅 들어간다. 전화 못 받아. 계약금이 커서 집중해야 돼. 나중에 통화해.
일방적으로 끊긴 전화에 황 대표가 황당해했다.
침묵 속에 하릴없이 몇 분이 흘렀다. 버들이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아까 황 대표와 나누었던 대화 중, 계속 걸리는 게 있었다. 이대로 지나가면 안 될 거 같다. 바닥부터 용기를 끌어 모았다.
“저기…….”
하지만 용기는 너무나 나약했다. 한숨처럼 작은 소리라 황 대표님이 못 들었을 거 같다. 버들이 낙담했다.
“네.”
“어? 저기…….”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황 대표의 대꾸에 버들이 허둥거렸다.
“저는 다른 사람이랑 안 자요.”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던 황 대표가 고개를 들어 버들을 마주봤다.
“셋이서 하기도 싫어요.”
“…….”
“아무리 대표님이랑 키랑 덩치가 비슷해도 다른 사람이면 싫어요.”
“…….”
“대표님하고만 자고 싶어요.”
더듬거리며 버들이 내뱉은 말이 전부 기가 찼다. 황 대표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버들은 오로지 펄떡거리는 제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고생하고 있었다. 황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시간을 너무 많이 낭비했다. 세 시간 정도 차로 걸리는 길이었고 혼자서 이동한다면 길을 헤매어 배가 걸릴지도 모른다.
“어떻게 가는지 알아요?”
“알아요. 많이 가 봤어요.”
황 대표의 턱짓에 버들이 몸을 일으켰다.
“버들 씨.”
황 대표가 가만히 버들을 내려다봤다. 황 대표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버들의 긴 속눈썹이 저쪽으로 이동해 버렸다. 깜박거리는 버들의 눈이 뜸들이며 황 대표에게 향했다. 그때까지 황 대표가 끈질기게 기다렸다가 물었다.
“저 좋아해요?”
도톰한 버들의 아랫입술이 곧장 열렸다.
“좋아해요.”
웃음이 났다. 너무 쉬워서.
황 대표의 차에 버들이 올라탔다. 무릎 위에 양손을 올리고 얌전히 앉아 있었지만, 이쪽저쪽 둘러보느라 눈만큼은 바빴다. 성격이나 특징이 엿보이는 장식 하나가 없다. 먼지도 마찬가지였다. 꼭 새것 같다. 처음 만났던 날이 저절로 펼쳐진다. 겨울의 차였지만, 어쨌든 황 대표가 운전해서 집까지 바래다줬었다.
시간은 흐른다. 그 속에서 별다른 노력 없이도 저절로 쌓게 되는 추억이 생긴다. 오늘도 그런 날이겠지? 버들의 입가가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좋아서. 저만치서 담배를 피우고 황 대표가 걸어오고 있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황 대표의 인상은 짙어졌고, 버들의 맥박은 빨라졌다.
“안전벨트.”
“아.”
황 대표의 지적에 버들이 안전벨트를 채웠다. 흐린 하늘이 머리 위로 따라온다. 큰 도로로 나오면서 버들이 허리를 세웠다. 가슴팍을 가로지른 안전벨트를 꼭 쥐고 있는 버들의 주먹에서 열심히 길을 안내하리라는 의지가 엿보였다. 하지만 안내할 틈도 없이 황 대표는 내비게이션을 따라 무리 없이 핸들을 꺾어 가며 운전했다. 버들의 입술이 벙긋거렸다. 도착한 곳이 백화점이다. 차에서 황 대표가 내리자 멍했던 버들도 서둘러 뒤따라 내렸다. 지하라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퍼졌다.
“대표님?”
대꾸 없이 황 대표가 본관을 향해 걸었다. 멀뚱히 선 채 버들이 차와 황 대표를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어쩌지? 여기는 왜 오신 거지? 하나둘씩 늘어 가기 시작한 물음표를 싹둑 잘랐다. 버들이 얼른 황 대표를 쫓아갔다. 하얀 셔츠와 검은 슬랙스의 황 대표와 하얀 여름용 니트와 검은 청바지를 입고 있는 제 모습이 너무나 만족스러워 슬쩍 웃음이 났다. 드레스 룸에서 오랫동안 시간을 할애한 게 전혀 아깝지가 않다. 버들의 시선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짧은 바지 밑단 아래 드러난 황 대표의 발목은 여전히 섹시했다. 고운 복숭아뼈도 보인다.
언제부터 황 대표 생각을 하며 앓았나 하는 고민이 툭 하니 던져졌다. 답을 찾고 보니 별로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부터였다. 스스로 자각만 하지 못했을 뿐, 처음 황 대표의 머플러를 주웠던 날부터 자신은 황 대표가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땐 사소한 점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점차 눈에 굴려지듯 그 마음이 부풀어지고 있다. 지금보다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커지면 어떻게 하지?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한참 생각에 빠져 걷던 버들이 우뚝 멈췄다.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린다. 사람들 틈에서 황 대표를 잃어버렸다. 어딜 봐도 보이지 않는다. 어떡해. 뒤에서 걸어오는 사람과 부딪혀 버들이 앞으로 떠밀렸다. 바보 같다. 어떻게 좋아하는 사람을 잃어버릴 수 있지? 잘 따라갔어야지. 제 탓을 하며 버들이 터덜터덜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황 대표의 차 앞에서 버들이 한참 기다렸다.
황 대표는 작은 선물 상자와 함께 돌아왔다.
“아까 저 따라오지 않았어요?”
“……아. 그랬는데요.”
따라온 거 알고 계셨구나. 그게 또 뭐라고 버들의 마음이 사르르 일렁거렸다.
“근데 왜 여기에 있어요?”
“그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있는 그대로 말하면 왠지 한심해 보일 것 같아서 꺼려진다. 버들이 적당한 말을 고르고 있는 사이 답답했는지 황 대표가 낮게 한숨을 내뱉고선 먼저 차에 타 버렸다. 질문은 했지만 딱히 대답을 바랐던 건 아닌 모양이다. 차라리 잘됐다. 입을 다문 버들이 차 문을 열었다.
“안전벨트.”
“아.”
부랴부랴 안전벨트를 끌어당긴 버들이 황 대표가 뒷좌석으로 던진 작은 선물을 힐긋거렸다. 스승님 선물일까? 그러기엔 너무 분홍색이다. 예전에 보답의 선물로 황 대표가 선물했던 치즈케이크를 떠올렸다. 치즈케이크는 상해서 먹지 못했고, 빨간색 리본만 흔적으로 보관하고 있다. 혹시 어쩌면 길 안내를 해 주는 보답으로…….
“이거 제 거예요?”
버들의 손가락이 선물을 콕 가리켰다. 황 대표가 헛웃음을 켰다. 내버려 두니까 버들이 멋대로 김칫국을 들이마신다. 애초에 박아 줄 생각도 없는데 나하고만 섹스하겠다고 지껄이던 것도 그렇고. 황 대표가 시동을 걸었다.
“껌값.”
“껌값이요?”
“저안에 팔찌 들었어요. 여성용.”
“…….”
버들의 입술이 순간 축 처졌다. 여성용이라면, 제 것은 아닌 게 분명하다.
“대표님. 애인 있으세요?”
“참 빨리도 물어보네. 고백하기 전에 물어봤어야지.”
있으면 어쩌지. 목격한 것들이 있어 뒤늦게 조마조마하다. 황 대표에게 애인이 있다면 좋아한단 마음을 품고 있는 것 자체가 그 애인에게 못할 짓 하는 게 된다. 주차장을 벗어나 맞이하게 된 하늘이 계속해서 흐리다.
“없어요. 애인.”
우울하게 잠겨 있던 버들의 표정이 황 대표의 한 마디에 금방 환해졌다. 그러다가도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 모습들에 다시 기가 죽었다.
“전에 키스하셨잖아요. 어떤 여자 분이랑. 또 다른 분이랑 손도 잡으시고…….”
“진짜 스토커네.”
“아니에요! 그냥 보여서 본 건데요.”
애인은 없다니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 한편 가슴이 허물어진 건 어쩔 수 없다.
“근데 껌값이 뭐예요?”
“껌은 섹스 파트너고. 값은 선물. 사랑한단 말까지 포함해서.”
단조롭게 툭툭 튀어나온 황 대표의 말이 주변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
“그럼 저는요?”
“너 뭐요.”
말간 얼굴이 진지하다. 그 얼굴을 바라보던 황 대표가 어이없어했다.
“버들 씨. 편의점 가면 껌 많죠? 종류도 많고, 브랜드도 많고.”
버들이 살짝 고개를 주억거렸다.
“쉽게 씹었다가 뱉을 수 있는 새 껌이 그렇게나 많은데 내가 굳이…….”
너무 황당하니까 말이 나오다가 말았다.
“그러면 저는 대표님한테 껌도 될 수 없어요?”
자신 역시 상대방에게는 껌이었다. 쉽게 씹었다가 뱉을 수 있길 서로 바라면서 뒹구는 거다. 자존심도 없는지 제발 씹어 달라고 애원하면서도 그를 올곧게 향해 있는 버들의 눈빛은 꾸밈없이 맹목적이다. 그냥 몸만 바라고 덤볐더라면 훨씬 나았을까. 내가 웃어 주면 좋겠다고? 그저 기가 막힐 뿐이다.
“버들 씨는 나한테 빨아먹을 단물도 없는 껌.”
왜요? 되물으며 버들이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아직 안 빨아먹어 봤는데 단물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요?”
……꼴통 새끼, 진짜. 유 대표가 들었다면 아마 뒷목 잡고 쓰러졌을 거다.
“직접 생각해 봐요.”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아, 그쪽 말고 저쪽으로 가셔야 돼요.”
왜 황 대표에게 자신은 빨아먹을 단물도 없는 껌인 것인가 스스로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길 안내를 하느라 그럴 틈이 없었다.
안내를 종료하겠습니다.
세 시간 반을 운전해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서울 외곽에서 벗어나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이 푸릇하다. 꼬불꼬불한 산줄기를 타고 또 강이 있는 다리를 건너기도 했다. 적은 세대수가 사는 마을이 옹기종기 붙어 있다. 그곳과 좀 떨어진 곳에 덩그러니 집 한 채가 있었다. 차가 온전히 멈추기도 전에 버들이 안전벨트를 풀었다. 빨리 내리고 싶은지 엉덩이가 들썩거려진다.
“아이고.”
외부인의 등장에 슬쩍 경계하더니 버들인 걸 보고서 누군가 대문을 뛰쳐나왔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버들도 그들에게 뛰어가 안겼다. 스승님! 노인 내외가 버들의 얼굴을 매만지거나 손을 잡아 가며 오느라 고생했네, 오랜만이네, 안부 인사를 쏟아 냈다. 붉게 상기된 버들이 방긋방긋 웃었다. 뒤늦게 내린 황 대표가 주변을 둘러봤다. 넓은 마당에 조각하다가 만 돌덩이들이 놓여 있다.
“황 대표 아닌가.”
황 대표를 보자마자 노인의 얼굴이 험상궂어졌다. 영화 속 주인공의 방에 중요한 메타포로 배치할 조각품을 의뢰했다가 유 대표와 그 자리에서 욕을 먹고 쫓겨났었다. 제일 중요한 게 돈 아닌가? 속물처럼 치를 대가부터 언급했단 이유였다. 본인이 예술가란 타이틀에 흠뻑 취해 사는 성향은 정말이지 고리타분하고 상대하기 피곤하다. 콧대 높여 봤자 먹고 살기 급급한 위치면서. 천장이 낮고 지은 지 오래되어 보이는 낡은 집을 깔보며 황 대표가 콧방귀를 꼈다. 성격 괴팍한 노인이 내로라하는 조각가가 아니었다면 첫날 이후, 두 번 다시 여기에 올 일은 없었을 거다.
“여기가 어디라고!”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부엌에서 소금을 한 바가지 퍼 가지고 들고 나온 노인이 그대로 황 대표에게 쏟아부었다. 갑작스런 봉변을 당한 황 대표의 눈이 지그시 감겼다. 유 대표, 이 치사한 새끼. 애꿎은 화살이 겨울에게로 꽂혔다. 소금 안 맞으려고 혼자 빠진 거네.
아. 어떡해. 소금이 아까운 버들이 난감해했다.
마당에 있는 평상이 지저분해 조각가의 집에 도착한 뒤로 황 대표가 계속 서 있었다. 콘크리트를 대상으로 조각 중인 제 스승님 옆에 찰싹 붙어 버들이 쉴 새 없이 종알거렸다. 노인이 이것저것 세심하게 가르친다. 전공이 조각이라더니 버들은 아마도 기술을 전수받는 중인가 보다. 딱히 관심을 두고 싶지 않건만 눈앞에 있으니 볼 수밖에 없는 황 대표가 얼굴을 확 찌푸렸다.
노인의 손이 눈에 들어온다. 짧고 두꺼운 손이 엉망진창으로 상해 있다. 굳은살이 박이고, 아프게 갈라져 보이는 부분도 있는데 그마저도 생활인 것처럼 아무렇지 않아 한다. 버들도 나이가 들면 저런 손이 되는 건가? 황 대표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티끌 하나 없는 상품으로 새 껌이 널리고 널렸는데, 역시나 저 호모 새낀 아니다.
“대표님.”
버들이 쪼르르 황 대표에게 다가갔다.
“스승님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요?”
“…….”
“무서운 분 아니세요. 절대요.”
뭐라고 더 말을 덧붙이려는데 “버들아!” 하고 노인의 부인이 불렀다. 남편은 조각을 하고, 부인은 천연 염색을 한다. 버들의 눈에는 전통을 지키는 이상적인 부부의 모습이었고, 황 대표의 눈에는 그저 궁상으로 비쳐졌다.
“해 볼래?”
네! 대답 후 곧장 버들이 대야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안에는 하얀색 천과 황토가 가득했다. 도톰한 입술로 버들이 재잘거렸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집에서 있었던 일 등등 주제가 참 다양하기도 하다. 가만히 듣고 있던 노부인이 동의를 해 주기도 하고 고민을 줄일 수 있는 힌트를 주기도 했다. 아! 버들의 하얀 니트 귀퉁이에 황토가 묻었다. 마치 제 옷에 묻은 것처럼 황 대표의 기분이 구겨졌다.
저녁이 되자 한두 방울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방 안으로 들어간 황 대표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조각가인 노인이 뭘 들고 와 앞에 내려놨다. 유 대표가 설명했던 시나리오대로 만들고 있던 조각품이었다. 아직 미완성인 조각품을 집어 들더니 황 대표가 세심히 살폈다. 너무 기교 부린다는 황 대표의 첫마디에 노인이 벌떡 일어났다. 또 소금을 들고 나올 기세다. 버들이 얼른 나서서 분위기를 돌렸다. 이건 저래서 멋지고. 저건 이래서 의미가 있고. 이글이글 타오르던 노인의 눈길이 버들을 향할 땐 한껏 가라앉았다. 저 어린 것이 어른들 기 싸움에 제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단 게 기특한 모양이었다.
황 대표가 계약서를 내밀었다. 마감일은 절대로 넘겨선 안 된다는 말에 노인이 또 발끈했다. 황 대표 역시 지지 않았다. 예술품을 의뢰한 게 아니라, 영화에서 소비될 상품을 의뢰하는 것이란 점을 분명히 짚었다. 소비라니! 노인이 노했다.
계약서에 붉은 지장이 찍히기 전까지 노인은 여러 번 화를 냈고, 줄기차게 욕을 내뱉었다. 어쨌든 계약이 성사됐다. 황 대표와 버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잘된 거 맞죠? 버들의 휙 휘어진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쉬워서 어쩌누. 저녁은 먹고 가지.”
노부인이 아쉬워하자 버들이 미적거렸다. 어두워지고 있는 데다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으니 더 지체할 순 없었다. 황 대표가 버들의 손목을 붙잡고 질질 끌어 차에다가 태웠다. 버들의 표정이 푹 가라앉았다. 차 창문을 내려 노인 내외에게 버들이 방학하면 놀러 오겠다고 약속했다.
마을을 벗어난 지 얼마 안 돼서 다시 차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비가 퍼부어 댔기 때문이다. 강물이 삽시간에 불어 다리도 위험해 보였다. 불가피하게 일박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황 대표의 표정에서 신경질이 그득하게 묻어났다. 차를 튕겨 대는 빗소리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버들이 황 대표의 눈치를 보며 가방을 주섬주섬 열었다.
“제가 우산 갖고 왔거든요.”
망가진 해바라기 옆에서 버들이 우산을 꺼냈다. 하나밖에 없었다.
“같이 쓰실래요?”
쭈뼛거리며 물었지만 황 대표가 먼저 차에서 내려 버렸다. 뒤따라 내린 버들의 마른 어깨가 하늘을 찢을 듯 순간 내리친 천둥에 흠칫거렸다. 노인이 다시 등장한 황 대표를 노려봤다. 독채로 분리되어 있는 손님방을 빌릴 수 있었던 것도 오로지 버들 덕분이었다.
좁은 방에 침대가 딱 하나다. 다른 데 몸을 눕힐 만한, 예를 들어 소파 같은 가구도 없었다. 젖은 몸을 닦아 내던 버들이 황 대표를 슬쩍 바라봤다. 가방을 들고 저가 먼저 슬쩍 침대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하얀 얼굴이 비루한 형광등에도 맑다.
“대표님. 어디서 주무실 거예요?”
황 대표의 시선이 침대로 향하자 버들이 눈꺼풀을 빠르게 깜박였다. 성인 남자 두 명이 눕기엔 침대 크기가 매우 약소했다. 황 대표가 수건을 내려놨다. 이런 데서 잘 수 있을 만큼 무신경하지 않다. 그렇지만 버들이 그렇게 묻자 가뜩이나 꼬인 심성이 발휘된다.
“침대요.”
“침대 하나밖에 없는데요.”
“버들 씨가 비키면 되겠네요.”
“……저 곱게 자랐어요.”
눈썹까지 처져 시무룩하게 버들이 꿍얼거렸다.
“나 좋아한다면서.”
적막한 방 안을 빗소리가 채웠다.
“좋아하는 나한테 침대 하나 양보 못 해요?”
버들이 벌떡 일어났다.
“대표님 침대 쓰세요! 저는 바닥에서 자도 돼요! 아예 바깥에서 자도 돼요!”
뭐든 다 주고 싶고, 어떤 거든 다 해 주고 싶은 사람이다. 기꺼이 침대를 포기한 버들이 구석으로 가방을 옮겼다. 황 대표와 좁은 방 안에 둘이 있단 게 의식되자 두근거린다. 비가 내려서 참 여러모로 다행이다. 비 덕분에 이런 꿈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했고 또 비 내리는 소리 덕분에 소란스레 펄떡거리는 제 심장을 감출 수도 있으니까. 어색하게 방 안을 맴돌던 버들이 무릎 꿇고 앉았다. 핸드폰을 꺼내 겨울의 번호를 찾아 꾹 눌렀다.
“형, 나야. 서울도 비 와? 여기 엄청 내려. 천둥도 치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는데 펄쩍펄쩍 뛰는 겨울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어떻게 데리러 온다는 거야? 갈 수도 없는데.”
-형이 보고 싶으니까 그렇지!
“참아. 고작 하루잖아.”
-새끼야. 어떻게 그게 고작 하루야? 하루씩이지.
“형. 나 없다고 술 마시고 외박하지 마라. 일찍 들어가.”
질척거리는 겨울을 내일 만나자며 달래 놓고, 버들이 이어 유 회장과 장 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겨울에게 전화가 걸려 왔지만 황 대표가 받지 않았다. 이건 무시하는 게 아니라 휴전을 위한 선택이었다. 신경질이 있는 대로 나 있는 상태라 지금 유 대표와 통화를 했다간 다투게 될 게 뻔했다.
황 대표의 시선이 버들에게 닿았다. 가족들과 거의 남이나 다름없어서 그런가. 가족들 한 명, 한 명에게 저가 어디에 있고 언제 귀가할 것인지 알리는 버들의 모습이 신기하다. 하얀 옷이라 아까 묻은 황토 색깔이 더 진해 보인다. 가뜩이나 단물 없는 껌인데, 포장에 흠집까지 났네. 저딴 건 팔리지 못하고 폐기 처분이다.
눈이 마주치자 버들이 웃었다. 폐기 처분의 결정이 내려진 줄도 모르고 보드레한 뺨에 숨겨진 수줍음이 읽혔다. 그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탐탁지 않은 눈길로 노인이 황 대표를 훑었다. 궂은 날씨를 배경으로 두자 험상궂은 인상이 더욱더 살벌해 보인다.
“저녁은.”
“됐습니다.”
딱 한 번의 거절에 재차 묻지 않았다. 노인이 버들만 데리고 그 자리를 떴다. 방 안에 황 대표 홀로 남겨졌다. 노란 장판을 시작으로 낮은 천장 등 어디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곳이다. 바닥에 앉기 싫은 황 대표가 침대로 향했다. 오래 운전을 하기도 했고, 전날 잠을 설치기도 했고. 피곤함이 겹친다. 그대로 눕자 침대 스프링이 사정없이 삐걱거린다. 짜증 난다. 겨우 노곤해지려던 찰나 벌컥 문이 열리면서 비바람 소리가 세게 들려왔다. 고개만 들어 황 대표가 그쪽을 바라봤다. 바깥엔 노인 혼자 서 있다.
“버들이 좀 옮기세.”
뭔 소리야. 가만히 있는 황 대표에게 노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귓구멍이 막혔나?”
속으로 욕을 짓씹으면서 황 대표가 노인을 따라갔다. 처마 아래로 걸었지만 바람에 휘어진 비를 맞기도 했다. 꼴통은 동그란 상에 이마를 파묻고 잠들어 있었다. 저녁 후 노인에게 술잔을 받았단다. 국화주였다. 안주로는 두부. 넉살 좋게 따라 주는 족족 술을 마시더니, 한 잔, 두 잔이 금방 열 잔을 넘겼다고 했다. 등이 한껏 구부러져 불편해 보이는데 꿈쩍을 하지 않는다. 곱게 자랐기 때문에 아까 바닥에서 못 잔다는 새끼가. 기가 막힌지 황 대표가 한숨을 내쉬었다.
“뭐 하나. 어서 옮기지 않고.”
노인이 황 대표를 향해 두 눈을 부릅떴다. 하는 수 없이 황 대표가 버들의 무릎 뒤로 팔을 넣어 안아 들었다. 성인 남자란 걸 감안했을 때…… 가벼워서 놀랐다. 제 품에 안긴 버들을 황 대표가 내려다봤다. 기력 없이 축 처져 있는 버들의 뺨이 제 가슴팍에 닿아 있다. 굴러다니는 빈 술병만큼이나 달큼한 꽃향기가 진동한다.
손님방으로 건너가는 도중 번개가 내리쳤다. 황 대표의 향수 냄새가 나자 무의식중에 버들이 꿈틀거렸다. 제 목에 버들이 코끝을 비벼 댄 감촉에 소름이 돋은 황 대표가 걸음을 멈췄다. 혹독한 노인의 시선이 느껴져 나오려던 욕을 겨우 참았다. 노인은 황 대표가 버들을 순순히 침대 위에 눕히는 것까지 보고 나서 이불을 곧 가지고 오겠노라 말을 남긴 뒤 문을 닫았다.
황 대표가 버들을 만졌던 손을 벅벅 씻고 나왔다.
“더워.”
나지막한 버들의 중얼거림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비 와서 서늘한데 뭐가 더워. 아마 술 때문에 체온이 올라가서 그럴 게 분명했다. 무심코 뒤를 돌아본 황 대표가 그대로 굳었다. 훤히 드러난 버들의 배꼽이 움푹 파여 있다. 잠깐 다른 데로 향한 황 대표의 시선이 자석처럼 끌려 다시 버들에게 돌아갔다.
술기운에 버들이 옷을 벗다가 만 채다. 그 옷이 하필 바지였다. 풀려 있는 단추가 이상하게 은밀하다. 속옷과 함께 허벅지 중간쯤 내려간 바지로 인해 버들의 연한 살결이 드러났다. 사내새끼라고 전혀 생각되지 않을 만큼 뽀얗다. 욕을 내뱉으며 황 대표가 표정을 확 굳혔다. 뭔가 불쾌함이 몰려든다. 차라리 차에 가서 있으려고 문을 열었는데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 이불 가지고 온다고 그랬지? 문을 닫은 황 대표가 다시 꼴통 새끼를 바라봤다.
저대로 내버려뒀다가 내가 벗긴 걸로 오해하면……. 아. 가정일 뿐인데 심하게 불쾌하다. 침대에 누워 있는 버들에게 황 대표가 다가갔다. 더 벗으려고 잠결에 꼼지락거리고 있는 버들의 손목을 붙잡았다. 술이 들어간 몸이 전체적으로 붉은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발갛다.
“가만히 있어라, 좀.”
짜증 섞인 손길로 황 대표가 버들을 고정했다. 바지를 입혀야 했기에 버들의 성기를 가까이에서 보게 됐다. 순간 너털거리면서 헛웃음이 터졌다. 힘없이 포슬포슬 녹은 게 만지는 대로 고분고분하다. 그리고 작았다. 물론 사이즈야 발기 후에 재야 진짜라고 하지만 이 정도면 뭐. 발기해 봤자 그게 그거일 거다.
겨우 옷을 입히고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온 황 대표가 또 한숨을 내쉬었다. 기껏 입혀 놨건만. 꼬물거리면서 버들이 또 옷을 벗고 있는 중이었다. 유 대표는 자기 새끼의 고약한 술버릇을 알고 있으려나 모르겠다. 다행히 바지 단추만 풀려 있어 그걸 서둘러 잠갔다. 혹시 몰라 티셔츠 밑단도 그 안으로 꼼꼼히 집어넣었다. 창문을 살짝 열어 뒀다. 비가 들어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시원해?”
대답은 없지만 다행히 버들이 더는 옷을 벗으려고 하지 않았다.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가 어이가 없다. 그때 노인이 문을 열고 이불을 던진 뒤 사라졌다. 무언가 허탈해지면서 배알이 꼴린다. 이럴 거였으면 옷을 벗든지 찢어 버리든지 신경 쓰지 말 걸 그랬다.
억세게 퍼붓던 비는 새벽이 깊어지면서 점차 잦아졌다. 처마 밑에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이 벽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무감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황 대표가 소매를 걷어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확인했다. 곧 동이 틀 때다. 느릿하게 감겼다가 뜨여지는 눈꺼풀에 피곤함이 다분하다.
으음……. 버들의 목 안쪽에서부터 낮은 신음이 흘렀다. 비바람에 섞여 금방 묻혀 버릴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하지만 황 대표의 귓가엔 밤새 내리쳤던 천둥 못지않을 만큼 크게 들려왔다. 아마도 거슬려서 그런가 보다. 잠시 뒤척거리는가 싶던 버들이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대체 뭘 하려나 싶어 예민하게 노려봤었는데, 단지 그뿐이다. 그게 습관인 모양이었다.
상의 끝자락이 조금 말려 올라가 버들의 배꼽이 드러났다. 크림처럼 흰 피부가 부드러워 보인다. 무의식중에 황 대표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버들이 다시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엎드려 누운 버들의 한쪽 다리가 바닥에 닿았다. 절벽 끝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아슬아슬하다. 잠시 다른 곳에 눈을 돌린 사이 쿵, 소리가 났다. 결국 버들이 이불에 말려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황 대표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프지도 않나. 잠버릇이 워낙 심한 것으로도 모자라 둔감하기까지 하니 진짜로 답이 나오지 않는다. 밤이 지나는 사이 이게 지금껏 몇 차례 반복되는 중이었다. 대치 중이던 황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의 성질머리라면 침대에서 떨어져 꿈이 깨든, 절벽에서 떨어져 마빡이 깨지든 무시해야 하는 게 맞다. 버들이 금방 제 쪽으로 굴러 올 것처럼 굴자 황 대표의 입에서 짤막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한 공간을 공유하고 있단 게 생각보다 성가시다.
버들의 앞에 느릿하게 앉은 황 대표가 버들의 앞머리를 손끝으로 걷었다. 벽에는 황 대표의 몸집이 그림자로 짙게 그려졌다. 등을 구부리고 앉은 황 대표가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커다랗게 보인다.
자고 있는 탓인지 평소엔 볼록하게 솟아 있던 버들의 눈 밑 살이 현재는 자취를 감추었다. 곱게 감겨 있는 버들의 속눈썹이 기다랗다. 숱도 꼼꼼하게 참 많기도 하다. 이러면 무겁지 않을까, 하는 헛생각이 잠시 났다. 귀찮은 걸 무릅쓰고 흔들어 깨워 봤지만 소용없단 걸 깨달은 뒤다.
기왕 침대에 옮겨 줄 거면 좀 곱게 옮겨 줄 것이지 태생부터 자비가 모자란 황 대표가 버들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한 손으로 마른 몸을 번쩍 들어 침대로 올렸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옷 속에서 버들의 한쪽 팔이 빠져나왔다. 나머지 손도 황 대표가 마저 빼냈다. 이불을 주워 성의 없이 덮어 줬다.
제 할 일을 끝냈단 듯 돌아서던 황 대표가 멈칫거렸다. 비가 내려 달도 없는 밤하늘이었다. 밖에서 켜 둔 어렴풋한 빛이 전부였다. 순간 황 대표의 턱 전체에 힘이 뻣뻣하게 들어갔다. 기껏 덮어 준 이불을 치워 버리고 황 대표가 버들의 바지 단추를 풀었다. 속옷을 잡아 당겨 안을 들여다보기까지 지체 없었다. 그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기까지 했다.
문득 궁금했다. 애초에 털이 없는 건지. 아니면 깎아서 없앤 건지.
……작아. 황 대표의 입술 끝에 비릿한 비웃음이 걸렸다. 순하게 잠들어 있는 버들의 성기가 손바닥에 쥐자 아예 보이지 않는다. 황 대표가 손가락을 오므렸다. 살덩이의 감촉이 말랑말랑하다. 잠결에도 뭐가 이상한 모양이다. 몸을 비틀려는 순간 황 대표의 커다란 손이 버들의 골반을 잡아 그걸 제지했다. 버들의 허벅지 안쪽을 억지로 벌리고 손끝을 세우자 가느다랗게 떨림이 느껴진다. 녹아내릴 것처럼 만져지는 보드라운 살결이 정말로 의외다. 저도 모르게 황 대표가 미간을 좁혔다. 그대로 배꼽 밑 은밀한 부위까지 쓸어 올리자 버들의 아랫배가 납작하게 수축했다. 일부러 깎았다면 거칠어야 하는데 걸리는 거 없이 마냥 부들거린다. 기껏해야 솜털 정도다.
“아…….”
벌린 입술 틈새로 가느다랗게 신음하던 버들의 눈이 불시에 뜨였다. 마주친 시선에 황 대표가 당황했으나 잠시였다. 버들의 가슴팍을 조심히 토닥거렸다. 끔벅거리던 버들의 눈꺼풀이 도로 사르륵 감겼다. 그제야 황 대표가 버들의 아래를 만지고 있던 손을 뗐다. 자는 애 데리고 뭔 짓을 한 거야. 방금 저지른 제 행동에 황 대표가 욕을 삼켰다. 화장실에 들어가 오랫동안 비누로 손을 씻고 나왔다.
……망할. 옷을 벗기기만 했지 입혀 준다는 걸 깜박했다. 아래가 무방비하게 드러난 줄도 모르고 내뱉는 버들의 고른 숨소리가 세상 태평하게 느껴진다. 내가 같은 게이 새끼였어 봐. 뼈째 씹혀 먹히고도 남았을 거다.
서서히 날이 밝아 온다.
“아. 추워…….”
버들이 낮게 종알거렸다. 산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서 그런지 아침 공기가 매우 차다.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앉은 버들이 앞으로 쏠려 있는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쓸어 넘겼다. 잠에서 막 깨 부스스한 몰골인 버들을 바라보면서 황 대표의 이마 힘줄이 불끈 솟았다. 뜨이지 않는 눈에 억지로 힘을 준 버들이 제 오른쪽 팔꿈치를 뒤집어 살폈다. 여기가 왜 아프지?
의아하단 듯 버들의 조막만 한 머리통이 갸웃거렸다. 어딘가에 부딪힌 것처럼 팔꿈치에 작게 멍이 잡혀 있다. 그 부위를 만지작거리다가 우연히 옆으로 돌린 고개에 황 대표와 정통으로 시선이 부딪혔다. 놀란 버들이 그대로 숨을 참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도록도록,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아 황 대표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황 대표님.”
버들이 황급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침대 쓰세요.”
“…….”
시간은 아침 일곱 시경이었다.
“깨우지 그러셨어요, 그럼 침대 비켜 드렸을 텐데.”
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게 갈라져 있었다.
“저기, 황 대표님.”
잘 보이고 싶은데 왜 자꾸 황 대표 앞에선 실수만 연발하는지 모르겠다. 다 주기로 해 놓고. 뭐든 다 해 준다고 떵떵거려 놓고. 아침 댓바람부터 버들의 마음이 소동을 일으켰다. 술이 원수다, 진짜.
“황 대표님.”
네. 계속 무시할 줄 알았던, 황 대표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좋아해요.”
“…….”
“진짜예요. 좋아해요.”
“…….”
“많이 좋아하는데…….”
혹시나 좋아한단 제 고백까지 침대 수준으로 그냥 해 본 소리로 넘겨 버리면 어쩌나 버들이 통통 부은 얼굴로 걱정했다. 황 대표에게 여러 번 멱살이 잡힌 버들의 목 주변 니트가 헐렁하게 늘어나 있다. 곱게 자란 거지새끼 같다. 황 대표가 버들을 외면했다. 비가 내려 고립된 건 사고였다. 그 사고에 여러 피해가 뒤따랐다. 저녁에 잡아 뒀던 일정을 불가피하게 취소할 수밖에 없었고 눅눅한 공기로 가득 채워진 곳에서 일박을 해야 했으며 다른 사람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밤을 지새워야 했다. 그리고 가장 큰 사고로 꼽자면 같은 거 달린 사내새끼의 몸을 보고 만졌단 거다. 그러게, 왜 거기에 털은 없어 가지고. 황 대표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버들아.”
문밖에서 들려오는 노부인의 목소리에 황 대표만 바라보고 있던 버들이 문을 열었다.
“일어났어?”
“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밥 먹게 건너와.”
“네, 금방 갈게요.”
기세가 꺾인 폭우는 아침이 되자 부슬비로 변했다. 동네 집마다 밥 짓는 수증기가 꼭 안개처럼 하늘로 피어오른다. 서늘한 바람에 버들이 어깨를 움츠렸다.
“대표님.”
황 대표에게 버들이 주춤거리며 다가갔다.
“식사하시래요.”
“가서 먹고 와요.”
“대표님은요?”
“난 됐으니까.”
“저도 배 안 고파요.”
“먹고 오라면 와.”
“대표님이랑 같이 있을래요. 진짜 저 배 안 고파요.”
버들의 배 속이 꾸르륵 울렸다.
“…….”
“…….”
타이밍이 하필 절망스럽다. 민망한 소리를 낸 제 배를 양팔로 껴안으며 버들이 황 대표 몰래 인상을 썼다. 원래 아침엔 입맛이 없는데 전날 마신 술 때문인지 드물게 속이 조금 허했다. 현재로서 되는 일이 전무하다. 비가 내렸던 덕분에 황 대표와 단둘이서 오랫동안 있을 기회였건만 망쳐 버렸다. 훌쩍 지나가 버린 밤이 야속하면서 아쉽다. 분명히 안 취할 정도로만 마시고 있었던 것 같은데.
“잠깐만요.”
버들이 밖에 나가 새 칫솔 따위들을 얻어 왔다. 싸구려였다.
버들이 아침을 먹는 동안 먼저 씻고선 황 대표가 차로 향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황 대표가 유 대표에게 사진 하나를 전송했다. 그게 이번 영화의 주인공이었다.
화나신 거 같았어. 맞아. 화날 만도 하지. 내가 양보한다고 해 놓고 침대를 썼잖아. 진하게 끓여진 시래깃국을 뜨며 버들이 침울해했다. 어제 저녁도 안 드셨는데 아침까지 안 드시면 배 많이 고프실 텐데 어쩌지. 눈 뜨자마자 버들은 내내 황 대표 생각만 하고 있었다. 오히려 눈에 안 보일 때보다 더 심하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버들이 얼른 씻고 나왔다.
하늘이 계속해서 흐리다. 노부인이 미리 준비해 놓은 콩과 옥수수를 버들의 가방 속에 담아 줬다. 장 여사가 좋아하는 것들이라 버들이 꾸벅 허리를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조심스레 뒷좌석 문을 연 버들이 무거워진 제 가방과 우산을 집어넣고선 조수석에 올라탔다. 아쉬움을 담아 차 창문을 열고 스승님과 부인에게 인사를 하는 중인데, 심술궂게 황 대표가 차를 출발시켜 버렸다.
“비 들어와. 닫아.”
“……네.”
코를 훌쩍거리며 버들이 창문을 올렸다. 험한 길바닥에 차가 덜컹거린다. 버들의 몸이 들썩거리더니 기우뚱 기울어졌다. 무심코 그쪽으로 팔을 뻗어 버들을 막아 주던 황 대표가 인상을 찌푸렸다.
“안전벨트.”
“아.”
긴장되니까 어제부터 자꾸만 안전벨트를 잊는다. 버들이 부랴부랴 안전벨트를 끌어당겨 채웠다. 앞에 고정되어 있던 황 대표의 시선이 간혹 옆을 향할 때가 있었다. 느리게 깜박거리는 버들의 큰 눈이 멍청해 보인다. 행색이 진짜 재벌 집 소중한 막내아들 같지 않다. 꼭 지적하지 않더라도 그걸 버들 역시 스스로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황 대표는 번지르르했다. 겉으로 외박한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 턱을 당겨 제 모습을 버들이 훑어봤다. 처참한 몰골에 저절로 할 말을 잃었다. 창피함이 먹구름처럼 몰려온다. 그나마 구김이 심한 티셔츠가 아닌 여름용 니트를 골라 입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차는 유려하게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꾸벅 졸던 버들이 화들짝 놀라며 깨어났다. 휴게소다. 다행히 어느덧 비가 완전히 멎었다. 저 멀리서 보이는 산의 능선에 구름이 둘러져 있다. 버들이 황 대표를 따라 안전벨트를 풀었다.
“유버들 씨.”
“네?”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켜던 버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황 대표가 걸음을 멈췄다.
“너 옷 늘어났잖아.”
지가 늘려 놓고 황 대표가 양심 없이 굴었다. 황 대표의 쌀쌀맞은 어조에 아무것도 모르는 버들의 어깨가 축 처졌다. 도대체 잠을 어떻게 잤기에 옷이 이 사단이 난 걸까. 제 성격이 황 대표의 눈에 칠칠맞게 비춰질 거 같아 버들이 시무룩해졌다. 그런 버들의 앞에 차 앞을 빙 돌아 황 대표가 섰다. 눈만 빠끔히 치켜떠 저를 쳐다보는 버들을 무심하게 내려다봤다. 가느다랗게 쭉 뻗은 목 아래, 움푹 파인 쇄골이 아까부터 언짢았다.
우악스러운 손길로 황 대표가 버들의 니트를 가운데로 모았다. 힘이 과하게 들어간 바람에 버들의 몸이 잠깐 휘청거렸다. 코앞에 둔 황 대표 때문에 버들은 눈 둘 곳도 찾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황 대표에게 멱살이 잡혀 제자리에 멈춰 서 있는 거지 안 그랬으면 저만치 도망쳐 버렸을 거다. 기묘한 감정이다. 좋으니까 한없이 닿고 싶으면서 또 좋아하기 때문에 닿는 게 버거워지는 순간이 있다. 황 대표로 인해 태어나 처음 알게 되는 감정들을 허투루 넘기지 않고 버들이 제 가슴에 조각조각 새겼다.
버들의 맥박이 툭툭 빠르게 뛰었다. 귓불도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니트나 잡으라고, 인상 쓴 황 대표가 버들에게 종용했다. 사나운 황 대표의 눈빛에 버들이 위축됐다. 버들의 손이 드레스를 입고 시상식에 참석한 여배우처럼 조신하게 옷이 더 벌어지는 걸 막았다. 침을 꼴깍, 삼킨 버들을 두고 혼자만 만족한 황 대표가 멀어졌다.
“그러고 다녀.”
담배를 피우는 황 대표의 옆에서 버들이 동전을 꺼냈다. 콜라를 마시기에 딱 백 원이 모자라다. 차에 가서 지갑을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황 대표가 담배를 껐다. 혹시나 사람들 틈 속에서 황 대표를 놓칠까 봐 버들이 자판기에 넣은 동전을 그대로 둔 채 다급히 뒤따라갔다.
한참 달려 서울에 도착하자 다시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장마에 접어들 시기였다. 버들이 내비게이션을 따라 열심히 길을 안내했다. 핸드폰이 울리자 황 대표가 스피커폰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들려온 여자 목소리에 버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안 들으려고 해도 황 대표와 나누는 대화들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밤에 호텔에 갈 예정인가 보다. 아무렇지 않은 척 굴고 있지만 버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손끝이 꾹꾹 옥죄어 온다.
“대표님. 바쁘세요?”
통화가 끊어지고, 5분쯤 뒤. 버들이 입을 열었다.
“저 서울에 재밌는 곳 많이 알아요.”
“…….”
“맛있는 곳도 많이 아는데.”
“…….”
“황 대표님…….”
호텔 가지 말고. 다른 사람 만나지 말고. 저랑 있어요.
“…….”
“…….”
버들이 손끝을 서로 모아 잡았다. 마음이 애탄다.
“궁에 가 보셨어요?”
“…….”
“돌담길 걷기 좋다던데…….”
“…….”
“흐린 날 봐도 멋지대요.”
“…….”
버들이 끊임없이 말을 걸며 관심을 사려고 했지만, 황 대표에게서 돌아오는 대꾸는 없었다. 황 대표의 눈썹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종알종알, 시끄러워 죽겠다. 도착한 문자를 신호에 멈춰 설 때 확인했다. 영화에 출연하기로 배우가 수락했나 보다. 분명 그쪽 기획사에 뿌려 대는 기사들이 여럿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목부터 자극적이고 유치하다. 물망에 오른 여배우 둘, 칸에 가는 그녀는 누구? 놀고 있네. 한창 주가를 끌어 모으고 있는 괜한 다른 배우를 들먹거리며 저울질을 해 댄다. 물론 그건 돋보이기 위한 쇼에 지나지 않는다. 저녁 즈음이 되면 칸에 가는 그녀로 최종 확정된 여배우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내릴 게 안 봐도 뻔하다.
연이어 문자가 도착했다. 소희다. 후회하기 전에 만나잔 내용에 황 대표가 낮게 비웃었다. 도도하고 고귀한 여배우인 줄 알았더니 자존심이건 매력이건 전부 깎아 먹은 터라 영 우스워졌다. 신호가 바뀌자 황 대표가 차를 출발했다.
“궁에 갔다가, 삼계탕 먹어요.”
“…….”
“전복이 잔뜩 들어가 몸에 좋대요.”
“…….”
“황 대표님, 그리고…….”
뭔가 생각해야 하는데 옆에서 너무 방해를 하니 짜증이 확 몰려들었다. 황 대표가 핸들을 꺾어 차를 세웠다.
“내려.”
“……왜요?”
“같은 말 하는 거 싫어해요.”
“…….”
미적거리는 버들을 대신해 황 대표가 버튼을 눌러 차 문을 열었다. 열심히 구애를 하던 버들이 낙담했다.
“궁에 그럼 다음에 가고…….”
“…….”
“오늘은 집까지만 바래다주시면 안 돼요?”
“…….”
“여기, 저 어딘지도 모르는데…….”
“…….”
황 대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게 질척거리는 거 딱 질색이다.
“좋게 말하면 못 알아들어요? 내리라고. 꼴 보기 싫으니까.”
버들이 차에서 내렸다. 부슬거리는 비가 그대로 버들의 몸에 쏟아졌다. 뒷좌석에 가방과 함께 넣어 둔 우산이 생각났다. 빌려 드린다거나 준다고 하면 왠지 황 대표가 거절할 거 같다. 놔두면 쓰시겠지?
버들이 차 문을 닫고 도보에 올라섰다. 가방이야 겨울에게 부탁해 가져다 달라고 하면 된다.
차를 출발시키자마자 신호에 걸렸다. 무심코 뒤를 돈 황 대표의 눈에 버들의 가방이 들어왔다. 거추장스럽다. 황 대표가 차에서 내려 가방을 들었다. 지퍼가 열려 있었는지 해바라기건 연습장이건 볼펜이건 콩이건 옥수수건 와르르 떨어졌다. 걸음을 멈춘 버들이 그걸 보고 있었다. 떨어진 물건을 줍는 대신 황 대표가 가방까지 함께 바닥에 내던졌다. 버들의 눈이 순간 동그랗게 커졌다. 서로의 눈이 부딪혔다.
알아서 주워가란 듯 황 대표가 턱을 까닥였다. 버들이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가리고 다니라니까. 늘어진 채 옆으로 기운 버들의 니트를 보니 또 짜증이 난다. 황 대표가 버들의 물건을 발로 차 버렸다. 그때 발에 채인 게 버들이 취미로 스케치를 해 두는 노트였다. 페이지가 활짝 펼쳐졌다. 내리는 비에 종이가 축축하게 젖어 간다. 그걸 잠깐 바라보던 황 대표가 금방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문득 뭐에 홀린 듯 다시 그 노트를 내려다봤다.
“아. 안 돼.”
황 대표가 스케치 노트를 주워 올리자 화들짝 놀란 버들이 그쪽으로 한달음에 뛰어갔다.
“너 이거 뭐야?”
신호가 바뀌고 황 대표의 차 때문에 출발을 못한 차들이 소란스레 경적을 울려 댔다.
“주세요!”
“뭐냐고 묻잖아.”
황 대표가 따지듯 뭐냐고 묻는 페이지에 그려 놓은 그림은 풍경이었다.
“돌려주세요!”
버들이 안달을 내며 팔을 뻗었지만, 황 대표가 쉽게 피했다. 페이지 뒤쪽에 온통 황 대표를 그려 놓았다. 스토커라고 또 힐난하면 어떡해.
턱 아래에서 버둥거리는 버들을 밀친 황 대표가 노트를 갖고 차에 올라탔다. 화난 얼굴이라 더 붙잡지도 못했다.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진 버들이 비를 맞아 엉망으로 젖어 버린 제 가방을 챙겼다. 해바라기가 황 대표의 발에 밟혀 구겨졌다.
수십 번의 경로를 이탈하고 나서야 겨우 사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납게 핸들을 꺾자 주차장 바닥과 바퀴가 마찰되어 날카롭게 소리가 울렸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쓸데없이 날려 먹은 시간을 돈으로 합산하니 역정이 난다. 가방이나 줍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선 길바닥에 서 있던 버들이 잠시 아쉬워졌다. 이따위로 길을 헤맬 줄 알았더라면 회사 근처까지 다 와서 떨어뜨릴 걸 그랬다. 뭐 어떠랴, 싶다. 멍청한 데다 자존심까지 없어 이렇게 버리나, 저렇게 버리나 다음 날이면 또 내 앞에 나타나 꽃을 들이밀며 귀찮게 굴 게 뻔했다.
조수석에 처박아 뒀던 버들의 노트를 황 대표가 집어 들었다. 축축하다. 비를 머금은 종잇조각들이 부풀더니 서로 들러붙었다. 샤프처럼 얇은 심으로 빼곡하게 그려진 풍경이 낯익다. 속이 들끓는다.
유 대표를 찾았지만 대표실이 텅 비어있다. 그간 제자리걸음만 걷던 배우 캐스팅이 결정 났으니 당장 바쁜 일이 늘어날 것이다. 하던 업무를 멈춘 비서가 부랴부랴 황 대표의 뒤를 따라왔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황 대표의 심기가 겉으로 봐도 매우 불편해 보인다. 혹시나 괜한 불똥이 튈까, 눈치껏 모든 창문을 닫고 공기 청정기를 작동시켰다. 원두 향이 사방팔방으로 번진다. 딱 황 대표의 입맛에 맞춘 커피를 내왔다. 그러고 나서 황 대표가 묻기 전에 유 대표의 일정에 대해 간략하게 보고했다.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은 황 대표가 알아들었단 듯 손을 들어 보였다. 공손히 허리를 숙인 뒤 비서가 대표실을 빠져나갔다. 차에 오랫동안 틀어박혀 있던 탓인지 목 전체가 뻐근하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자 호흡이 깊어진다. 빗소리를 제외하고 조용하다. 드디어 어떠한 방해 없이 차분히 머리를 비울 수 있게 되었다. 목구멍으로 삼킨 뜨거운 커피가 날이 서 있던 신경을 누그러뜨린다.
오늘 말고 내일 지랄해도 어차피 똑같단 판단이 선다. 대표실 문이 열리자 자동으로 비서가 벌떡 일어났다. 수행 비서가 바로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수행 비서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돌아온 집은 늘 그렇듯 고요하다. 샤워를 마친 뒤 드레스 룸으로 들어간 황 대표가 시계부터 바꿔 찼다. 셔츠 깃을 세워 넥타이를 둘렀다. 반대쪽 거울에 손목을 비틀어 소매 단추를 채우는 황 대표의 모습이 매우 여유롭게 비춰졌다. 벌어진 셔츠 틈새로 흉포하게 갈라진 복근이 드러났다. 호텔 일정까지 앞으로 남은 시간을 치밀히 계산했다. 콘돔은 충분하다. 창틀에 걸터앉아 잠깐 바깥을 내려다봤다. 세상이 온통 회색빛이다.
「궁에 그럼 다음에 가고…….」
「…….」
「오늘은 집까지만 바래다주시면 안 돼요?」
「…….」
「여기, 저 어딘지도 모르는데…….」
「…….」
애새끼도 아니니, 알아서 집에 잘 찾아갔겠지.
* * *
“공과 사. 구분 못 해?”
테이블 위로 웬 노트 한 권이 날아오자 유 대표가 인상을 찌푸렸다. 못지않게 미간을 구긴 황 대표가 맞은편에 앉았다.
“뭔데. 나 지금 바빠.”
“유 대표님. 모든 계약서에 필수로 들어가는 게 ‘함구’입니다.”
“아. 그러니까 하고자 하는 말이 뭐냐고.”
황 대표가 노트를 펼쳤다.
“눈으로 봐.”
“그림이잖아.”
“우리 이번 영화에 들어갈 장면이야.”
“뭐?”
그제야 유 대표가 태평히 들고 있던 홍차를 내려놨다. 그림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집어 든 노트가 너덜너덜한 걸레짝이다. 남들 눈에는 끝없이 펼쳐진 갈대밭, 벤치, 무지개가 흔한 그림처럼 보여질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자칫 영화가 타격을 입었을 시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두 대표에겐 심각한 사항이었다. 유 대표의 머릿속에 다양한 경우의 수가 떠올랐다. 갈대밭, 벤치, 무지개가 어쩌다 보니 한 페이지에 우연히 담겼을 수도 있다. 그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황 대표가 콧방귀를 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아니.”
유 대표 역시 말이 되지 않는 가정이라며 기꺼이 동의했다. 바람을 맞고 휘어진 갈대의 방향, 벤치의 가장자리 무늬, 무지개가 뜬 새벽. 심도 깊게 다뤄야 하는 장면이 노트 한 장에 사진처럼 담겨 있었다. 즉, 시나리오를 봐야지만 그릴 수 있는 그림이란 거다. 어이가 없다. 몇 번의 영화를 진행하는 동안 이런 일은 처음이다. 대체 어디서 샜을까. 수습은 어떻게 해야 하지. 규칙 없이 뭉쳐지는 우려로 유 대표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일단 범인 잡아서 족쳐야겠지?”
“그래야지.”
“이거 누가 그린 건지 알아?”
“모르고 노트 뺏었을까 봐.”
“알아? 안다고?”
황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데?”
“유버들 씨.”
“뭐?”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유 대표 입장에선 뜻밖의 인물이 범인으로 지목됐다.
“황 대표. 지금 농담할 때야?”
“그림체 몰라봐?”
“깍쟁이라 그림 잘 안 보여 줘.”
“내가 직접 네 새끼한테 뺏어 온 거야.”
“야. 왜 뺏어? 싸가지 없이 힘으로 뺏었지?”
버들이 범인이라고 하니 한결 너그러워진 유 대표가 애먼 것에 화를 냈다.
“시나리오 유출했어?”
“내가 유출했겠어?”
“그럼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황 대표가 손끝으로 노트를 들췄다.
“진짜 버들이가 이걸 그렸다고?”
팔이 안으로 굽어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변명을 만들기 위해 유 대표가 그림을 빤히 들여다봤다. 페이지를 몇 장 더 넘겼다. 뒤쪽에 무수히 그려진 황 대표를 발견했다. 유 대표가 못마땅한 듯 얼굴을 구겼다. 아, 이 새끼가, 진짜. 뼈 빠지게 고생해서 연필 사 주고, 노트 사다 줬더니. 싸가지 없는 황 대표를 뭐 하러 이 정도까지 정성스레 그려 놓은 거야? 혹시나 저도 있나 싶어 유 대표가 노트를 더 샅샅이 살폈다. 지들끼리 딱 달라붙은 종이를 떼어 냈다.
“아. 잠깐만.”
황 대표가 노트를 가져갔다.
“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그림에 황 대표가 헛웃음을 켰다. 기가 막힌다. 최종까지 고심하다 시나리오엔 뺐던 장면이 여지없이 그려져 있다. 마치 제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아주 세밀하게.
“너 확실히 시나리오 유출한 적 없어?”
“시나리오 유출되면 나도 같이 손해 보는 거야. 새끼야.”
제작자이면서 투자자이기도 한 유 대표가 불쾌함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황 대표, 어디 가!”
노트를 들고 황 대표가 회사를 빠져나왔다.
* * *
가방을 잡아 온 손을 버들이 야무지게 뿌리쳤다.
“말 안 해 줄 거야? 어?”
“그냥 좀. 일이 있었어.”
“그러니까 그 일이 뭐냐고.”
“일이 있다면 있는 줄 알아.”
“그렇게 말하면 더 궁금해지잖아.”
“대체 넌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학교를 못 나올 정도의 일이 뭔데 그래?”
걸음을 우뚝 멈춘 채 버들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황 대표에게 노트를 빼앗긴 날, 학교에 가지 못했다. 비를 맞아 뚝 떨어진 체온을 올리기 위해 뜨거운 물에 오랫동안 씻고 나오자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 버린 뒤였다. 그리고 가방이랑 책도 바삭하게 말려야 했다. 그날이 벌써 이틀 전이다. 그리고 그 이틀 내내 학교에 못 나온 이유가 뭐냐면서 정민이 추궁하고 있었다.
“빨리 말해 줘.”
“그게 왜 궁금한데.”
“궁금하니까 궁금하지.”
비가 내리고 있지 않지만 장마철이라 그런지 공기가 축 가라앉아 있었다. 불쾌지수가 저절로 올라가는 그런 계절에 도달했다. 버들이 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놓았다.
“나 집에 가야 돼.”
최대한 빨리 걸어 격차를 벌리려고 했지만 애석하게 키가 큰 쪽은 정민이었다. 금방 성큼성큼 따라잡히고 말았다. 정민이 손을 뻗었다. 가방끈을 잡아당기자 버들의 몸이 뒤로 딸려 온다. 그런 버들에게 정민이 정다운 모양새로 어깨동무를 했다. 하지 말라며 바로 패대기칠 줄 알았건만 어쩐 일인지 버들이 얌전하다. 그게 정민에겐 뜻밖의 횡재였다. 팔 아래로 버들의 뜨거운 피부가 느껴졌다. 순간 정민이 움찔거렸다. 갑자기 휙 고개를 돌린 버들이 제 얼굴을 째려봤다.
“너 우리 형 같아.”
“……형?”
미묘하게 피어오르는 기쁨을 감추고자 정민이 제 코끝을 긁적였다.
“내가 좀 형님 같지?”
“…….”
“내 입으로 말하기 그렇긴 한데. 나는 여러모로 든든한 편이잖아.”
“…….”
“나도 음, 동생이 없어서 네가…….”
제 어깨에 둘러진 정민의 팔이 무겁기 시작하자 힘껏 물리쳤다.
“귀찮단 뜻이거든?”
“야. 유버들!”
정민이 저한테 아는 척해 오는 사람들에게 대충 손을 흔들어 준 뒤 얼른 버들을 뒤쫓았다.
“왜 계속 따라오는 거야?”
“뭐. 나도 원래 이 길로 가려고 했어.”
“유치해.”
“유버들!”
학교 전체에 제 이름을 알릴 예정인가 보다.
“조용히 좀 해.”
“형님한테는 존댓말을 써야지.”
“너 생일 몇 월인데?”
“나 9월.”
피하기만 하던 버들이 정민의 앞에 마주 섰다. 올곧은 허리가 꽤나 당당하다. 왜 그러는지 물어보려고 정민의 입이 막 달싹거리던 참이었다. 버들이 꿀밤을 때렸다. 아! 버들의 매운 손맛을 본 정민이 제 이마를 감쌌다.
“난 3월. 내가 너보다 형이네.”
“어차피 우리 같은 학번이야.”
“아. 저리 좀 가. 나 집에 가야된다고.”
정문을 막 빠져나온 버들이 본능적으로 가로등 뒤에 몸을 숨겼다. 끈적끈적한 습기에 후덥지근한 날씨였다. 저도 모르게 더위를 먹어 헛것을 봤을지도 모른다. 그러길 내심 바라며 버들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황 대표님이었다. 여기는 무슨 일이시지? 근처에서 약속이 있으셨나? 그나저나 분명 노트에 내가 그려 놓은 그림을 보셨을 거다. 그 생각이 들면 자다가도 벌떡 깼다.
버들의 큰 눈에 황 대표가 넘칠 듯 담겼다. 목소리도 듣고 싶고, 가까이에서 얼굴도 보고 싶지만 당분간은 피하고 싶다. 그때였다. 정민이 “유버들!” 하고 제 이름을 크게 부르짖었다.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줄 알았다. 그 바람에 황 대표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치고야 말았다.
묵직한 바람에 버들의 앞머리가 들떴다.
“누군데?”
속닥거리며 묻는 정민의 옆구리를 버들이 팔꿈치로 밀었다. 꿈적도 하지 않는다. 아까 황 대표님과 눈이 마주친 순간 온몸을 타고 전기가 피어올랐다. 발가락 끝까지 저릿했다. 잘 믿겨지지가 않는다. 그러니까 황 대표님이 학교 앞에 서 있었던 이유가 바로 나란 거지, 다른 일 때문이 아니라.
「유버들 씨.」
저를 발견하자마자 지체 없이 황 대표가 걸어왔다. 피하고 싶었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황 대표와 거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버들의 두 다리는 꼭 나무뿌리처럼 땅속 깊숙이 박히는 것 같았다. 결국 꼼짝없이 붙잡혔다.
「학교 끝났어요?」
「……안녕하세요.」
「자주 가는 카페 있어요?」
「카페, 저기 모퉁이 뒤에요.」
카페만 알려 주면 끝인 줄 알고 선뜻 손가락을 뻗었다.
「같이 가요.」
잠깐 이야기 좀 하잔 황 대표의 말에 버들의 심장이 날뛰었다. 어떡하지. 왜 허락도 없이 자기를 그려 놓았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 스토커 아니라고 해도 이젠 믿지도 않으실 거야.
“누군데? 어?”
“…….”
“너 막, 모르는 사람 함부로 따라가는 거 아니다.”
“…….”
“유버들.”
자기한테는 만날 가차 없이 집에 가야 한다고 하더니. 카페 갈 틈은 있나 보지?
“모르는 사람 아니야.”
“그럼 대체 누군데?”
버들이 작게 한숨을 폭 내쉬었다.
“우리 형…….”
“너희 형? 저분이 너희 형이셔?”
“……친구.”
덜떨어진 표정으로 카페 입구 앞에서 정민이 남겨졌다. 우리 형 친구? 버들의 형이라면 잘 보일 필요가 있겠지만 버들의 형 친구라면 그냥 생판 남이다. 벌써 몇 번째 버들의 입을 통해 들어 본 적이 있는 ‘우리 형 친구’ 황 대표를 정민이 쳐다봤다. 그런 정민의 눈빛에는 처음과 달리 적대감이 그득하게 담겨 있다.
키가 크다. 어른이란 느낌이 자연스레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골고루 발달된 근육을 보아 필히 운동을 하는 몸이란 걸 알아봤다. 덜컥 위기감이 닥쳤다. 바짝 마른 아랫입술을 혀로 축인 뒤 정민이 얼른 카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황 대표와 버들이 막 주문하려는 참이었다. 다급히 버들의 옆으로 정민이 끼어들었다.
“버들 씨. 어떤 거 마실래요?”
버들의 고개가 메뉴판을 향했다.
“대표님은 어떤 거 마셔요?”
“저는 커피요.”
“아. 그럼 저도 똑같은 거 마실래요.”
정민이 버들을 내려다봤다. 커피 마시는 거 본 적이 없는데, 커피를 마시겠다고?
“유버들. 너 이거 좋아하잖아!”
재빨리 입을 연 정민이 아는 척을 했다.
“너 안 갔어?”
“안 갈 건데?”
뻔뻔하게 정민이 제 것과 버들의 음료를 대신 주문했다. 황 대표가 카드를 꺼내자 정민의 행동이 불을 붙인 것처럼 급해졌다. 간발의 차로 버들의 음료수를 제 카드로 계산할 수 있었다. 정민의 가슴이 활짝 펴졌다. 그게 뭐라고 무던히도 뿌듯해졌다. 옆에서 껄떡거리는 정민이 거슬릴 법도 한데 황 대표는 단 한 번 쳐다보지 않았다. 음료를 받아 들고 셋이서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잘 있었어요?”
부드러운 어투로 건네 온 황 대표의 인사에 버들이 귓불을 매만졌다. 빗속에 홀로 남겨진 것도. 가방과 책이 몽땅 젖어 버린 것도. 콩과 옥수수, 해바라기가 망가진 것도. 보여 주기 싫은 노트를 억지로 빼앗긴 것도. 꼭 암전이라도 된 것처럼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현재는 황 대표의 입가에 드러난 옅은 웃음만 각인된다. 잘 있었다며 버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애가 왜 이러지? 정민이 버들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버들 씨.”
“네?”
“둘만 있는 곳에 갈까?”
정민의 눈썹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둘만 있는 곳이요?”
“둘만 있고 싶은데. 안 돼요?”
황 대표님과 둘만 있고 싶다, 당연히. 버들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기 시작했다. 속도 함께 뜨거워진다. 그걸 식히고자 얼른 빨대를 물었다.
“지금 일어날래?”
나지막한 황 대표님 목소리가 설렌다. 하지만……. 둘만 있고 싶은데, 둘만 있게 되면 왠지 그림 갖고 화를 내실 거 같다. 차마 어떠한 대답도 내놓지 못하고 버들이 도톰한 제 아랫입술만 말아 물었다.
나한테는 엄청 툭툭거리더니. 정민이 계속해서 버들을 흘겨보고 있는 중이었다. 벌써 제 몫의 주스가 바닥을 보인다. 솔직히 코로 마셨는지 입으로 마셨는지 모르겠다. 그러는 와중에도 정민은 버들의 플라스틱 컵 표면에 맺힌 물기가 신경 쓰였다.
“어디가?”
“어?”
드르륵, 의자를 밀며 일어난 정민의 옷자락을 버들이 얼른 움켜쥐었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정민이 버들을 내려다봤다. 버들의 큼지막한 두 눈이 참 댕글댕글하다. 붙잡으면 놓으라고 그러고. 놀자고 그러면 집에 간다고 그러고. 그동안 거절에만 익숙했던 정민이 저도 모르게 헤벌쭉 웃었다.
“티슈 가져다줄게.”
“왜?”
“손 젖잖아.”
“괜찮아.”
정민의 말에 황 대표의 시선이 자연스레 버들의 손으로 향했다. 갈라진 손끝이 역시나 지저분하다.
“그냥 앉아 있어.”
“어. 그럴게.”
정민이 계속 싱글벙글했다. 입매가 시원하다.
“얼른 마셔.”
“……마시고 있어.”
“다른 거 시켜 줄까? 너 잘 먹는 거 또 있잖아.”
“다 못 마셔. 이거면 돼.”
“알았어. 얼른 마셔.”
얼음이 녹으면 음료 맛이 옅어진다. 정민을 재촉하듯 턱을 까닥거렸다. 그걸 끝으로 셋에게서 대화가 끊겼다. 침묵은 얼마 가지 못했다. 정민이 조금씩 꿈질거렸기 때문이다. 너무 음료수를 한꺼번에 벌컥거린 모양이었다. 황 대표와 버들을 단둘이 두기 싫어서 생리적인 현상을 정신력으로 참아 보려고 했다.
……정신력은 운동할 때만 작용되나 보다. 슬쩍 자리에서 일어난 정민을 버들은 이번에도 놓치지 않았다. 제 옷을 또 움켜쥔 버들의 손을 정민이 내려다봤다. 박제라도 시켜 놓고 싶다. 그게 아니면 사진이라도. 살다 보니까 이런 날이 오긴 오네.
황 대표의 눈썹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어찌나 힘을 줬는지 옷을 잡고 있는, 버들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불거졌다.
“이것 좀 놔 봐.”
“어디 갈 건데?”
“화장실. 금방 올 거야.”
“아. 나도 갈래.”
황 대표의 눈치를 보며 버들이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표님. 저 잠깐…….”
“네. 다녀오세요.”
얼른 다녀오겠다고 말하며 버들이 먼저 화장실로 향했다. 혹시, 노트 뒷장을 보지 못한 건가? 지금껏 화를 내지 않는 황 대표의 반응을 보면 그럴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 아, 제발. 그런 거라면 좋겠다.
“…….”
“…….”
바지 지퍼에서 정민이 손을 뗐다. 뒤쪽 문가에 멀뚱멀뚱 서 있는 버들이 신경 쓰인다. 남중에 남고를 졸업해 체대를 다니고 있다. 땀내 나는 시커먼 사내놈들끼리 허구한 날 뒹굴어 대며 볼 것 못 볼 것 공평히 보여 주고 봤음에도 불구하고 버들에게만 생소하게 굴게 되는 제 행동을 모르겠다. 버들은 땀내가 안 나서? 시커멓지 않아서?
정민이 고개만 뒤돌려 버들을 바라봤다.
“너도 남자잖아.”
“응?”
너무 당연한 소리를 하기에 버들이 뭐냐며 되물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싱겁게 말하며 정민이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렇지만 여전히 바지 지퍼를 못 내리겠다. 그깟 오줌발 갈기는 소리가 뭐라고.
“안 싸?”
“……넌?”
“난 생각 없어.”
“근데 화장실은 왜 왔어?”
“그냥 왔어.”
마지막 버들의 말끝이 바닥을 기었다.
“…….”
“…….”
남중에 남고를 나온 건 아니지만, 버들에겐 형들만 다섯이었다. 정민과 달리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빨리 해.”
“먼저 가라. 너.”
“왜? 같이 가.”
“…….”
정민이 다시 버들을 바라봤다.
“너 이쪽 보지 마.”
“그럼?”
“벽 봐. 벽.”
“왜?”
“아. 시키는 대로 좀 해라.”
“알았어.”
투덜거리면서도 버들이 순순히 벽을 향해 돌아섰다. 정민이 인상을 썼다. 그렇다고 소리가 안 들리는 게 아니잖아? 정민이 급기야 버들을 화장실 밖으로 내보냈다. 어리둥절한 채 버들이 정민을 올려다봤다.
“여기서 기다려.”
“응.”
혼자 남겨진 화장실에서 지퍼를 내린 정민이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 문을 열고 나오자 버들이 다했냐고 묻는다. 시작도 안 했는데 뭘 다해.
“너 귀 막고 있어.”
“…….”
“귀 막고 있으라고.”
“왜?”
계속 정민이 조르자 영문도 모른 채 버들이 제 귀를 막았다.
“됐지?”
응. 대답 후 후다닥 화장실 안으로 들어간 정민이 바지 지퍼를 내렸다. 오래 참아 온 것을 시원하게 내뿜었다. 소리도 우렁차고, 시간도 길다. 홀가분한 기분으로 옷을 갈무리하고 뒤도는데, 버들이 화장실 안에 들어와 있다. 그야말로 화들짝 놀랐다.
“야! 밖에서 기다리고 했잖아!”
“나 손 씻으려고.”
“언제 들어왔어!”
“얼마 안 됐어.”
“귀는 왜 안 막아!”
“지금 막으면 되잖아.”
“지금 막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야!”
버들의 눈이 뾰족해졌다.
“근데 너 왜 아까부터 소리는 지르고 그래?”
민망함이 어디서부터 몰려오는 것인지 모르겠다. 매사 능청스러운 정민의 얼굴이 드물게 빨개졌다.
“작게 말해. 그래도 다 들리니까.”
나란히 선 채 비누로 꼼꼼히 손을 씻었다.
“줘?”
응. 고개를 끄덕인 버들이 공손히 손바닥을 벌렸다. 정민이 건네준 페이퍼 타월로 손에 묻은 물기를 닦았다. 거울로 비추는 버들을 바라보며 정민이 궁금한 걸 물었다.
“너 키 180cm는 되냐?”
“응.”
“한 10cm정도 모자라지?”
“죽을래? 4cm거든?”
“모자라면서 왜 180cm는 된다고 거짓말해.”
“앞으로 자랄 수도 있는 거지.”
기적이나 다름없는 뜬구름을 176cm가 아무렇지 않게 잡았다. 4cm 모자란 180cm란 흔한 신장이니만큼 주변에 널리고 널렸다. 정민의 목울대가 매우 수상쩍게 꿀렁거렸다. 얘는 말라서 그런가? 여타 다른 놈들과 똑같이 버들을 대할 수가 없다. 힘 넘치는 사내놈들답게 서로 거침없이 주먹을 휘두르고 엎어뜨리는 게 일상이고 노는 거라지만, 버들에겐 기껏해야 가방끈을 잡아당기는 게 전부다. 음. 얘가 확실히 마르긴 했지. 버들은 저가 주먹을 휘두르면 저만치 날아가 버릴 것 같고, 엎어뜨리면 부서질 것 같다. 유일하게 조심스럽다.
“뭘 봐?”
정민의 물음에 버들이 큰 눈을 깜박거렸다.
“네가 나 먼저 봤잖아.”
정확한 버들의 지적에 할 말이 없어졌다. 사용한 페이퍼 타월을 휴지통에 버린 뒤 버들이 손가락을 구부려 얼른 코 밑으로 가져갔다. 비누 향이 흡족하다.
“이거 무슨 냄새인 줄 알아?”
“비누 냄새가 비누 냄새지. 뭘.”
잠시 생각에 잠겼던 버들이 다시 물을 틀었다.
“왜?”
“한 번 더 씻게.”
“그니까. 왜?”
“비누 냄새 좋잖아.”
명절 선물 세트에 샴푸와 함께 들어 있는 평범한 비누였다.
“야. 이런 것 우리 집에 백 개 있어. 줄게.”
“우리 집에도 비누 많아.”
버들이 열심히 비누를 굴려 거품을 잔뜩 냈다. 전에 황 대표가 손은 씻었냐고 물어봤던 게 잊히지가 않는다. 떠오르기만 해도 얼굴이 달아오른다. 정확히 그 후부터였다. 강박증처럼 버들이 손 씻는 빈도가 부쩍 늘어났다. 전공이 조각이고 취미가 그림인지라 물감을 사용하니 원래도 물 닿는 게 잦았던 버들의 손 상태는 근래에 들어 더 건조해지고 갈라져 버석거렸다.
앞장서서 자리로 돌아가던 중 문득 불안해진 버들의 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아. 있다. 그대로 앉아 있는 황 대표의 뒷모습이 보인다. 뒷머리, 목덜미, 귀, 너른 어깨까지. 차근차근 제 눈에 황 대표가 담기고 나서야 버들의 표정에서 안도감이 번졌다. 황 대표와 자주 만날 수 있는 사이라면 또 모를까. 기약 없는 기다림이 계속되다가 어쩌다 하루, 그것도 잠깐 보는 게 전부인데……. 돌연히 황 대표가 가 버리고 없으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다.
“저 손 씻고 왔어요. 비누 냄새 나죠?”
고른 이를 드러내며 버들이 웃었다. 아주 약간 손을 흔들었을 뿐인데 공기 중으로 물망초 향기가 확 퍼져 나갔다. 죽을 때까지 자신은 절대로 쓸 일이 없을 싸구려 비누란 걸 황 대표가 알아차렸다. 휙 휘어진 버들의 눈꼬리를 타고 허리로, 허리에서 팔로, 팔에서 또 손가락까지. 황 대표의 시선이 서두를 것 없단 듯 천천히 움직였다. 물에 젖기만 했을 뿐 더러운 게 전혀 나아지지 않은 버들의 손에 황 대표가 미간을 찌푸렸다.
“황 대표님. 식사하셨어요?”
“…….”
“저는 오늘 덮밥 먹었어요. 그게 식당 ‘오늘의 메뉴’라.”
“…….”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
“겨울이 형은 안 와요? 데리러 온다는 연락 없었는데.”
“…….”
“대표님 혼자서 저 보러 오신 거예요?”
황 대표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떠오르는 대로 말을 걸던 중 버들이 멈칫했다. 매일 가는 곳만 가고 먹는 것만 먹는다는 사람이 먼저 내가 자주 가는 카페가 어딘지 묻고, 거기에 앉아 있었다. 황 대표가 주문한 커피의 양은 전혀 줄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게 무슨 의미일까. 버들의 눈빛이 반짝거린다.
“버들 씨.”
“네?”
“서 있지 말고 앉아요.”
종알거린 버들의 모든 말이 불쾌했다. 알고 싶지 않은 사생활을 드러내고, 건방지게 사생활을 물어 온다. 황 대표의 말을 따라 의자에 막 엉덩이를 붙이려는데 뒤가 소란스럽다. 버들의 고개가 그쪽으로 향했다. 우락부락한 누군가에게 귀가 잡힌 채 정민이 끌려가는 중이었다. 정민의 허리가 코치의 신장에 맞춰 풀썩 반이나 접혀 있다. 현재 내가 카페에 있는 건 아주 불가피한 상황이었노라, 가여운 톤으로 정민은 극심한 목마름을 호소하며 선처를 바랐지만 코치는 이를 곧장 기각시켰다. 농땡이 현행범에게 즉시 괘씸죄가 추가됐다. 그 벌로 코치가 정민의 귀를 인정사정없이 비틀었다. 뭐가 어쩌고 어째? 목이 말라? 이 시간이면 목구멍에 피가 터질 만큼 빡세게 훈련받고 있어야 할 놈이!
간신히 문턱에 발을 걸고 정민이 버텼다.
“야. 유버들!”
크게 불린 제 이름에 버들의 눈꺼풀이 떨렸다.
“나 여기 근처에 있을 거니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
눈이 마주친 정민에게 버들이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
“…….”
황 대표와 둘이 남겨진 버들의 손이 플라스틱 용기를 감쌌다. 어느새 얼음이 반 이상 녹아 음료 맛이 밍밍해졌다. 버들이 애꿎은 빨대만 자근자근 물어 댔다.
“친구?”
침묵을 깨뜨린 쪽은 황 대표였다.
“네. 같은 과는 아니지만. 아. 이름은 정민이에요. 처음에는 되게 이상한 앤 줄 알았는데요. 알고 보면 그렇게 이상한 애는 아니에요. 나쁜 애도 아니고.”
버들의 대답에 황 대표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이상한 걸로 따지면 현재 버들이 제일 이상했다. 누구도 유출한 적 없는 시나리오 한 장면과 누구에게도 언급한 적 없던 시나리오 한 장면이 버들의 노트에 그것도 아주 세밀하게 그려져 있었다. 답 안 나오는 저 스토커를 어떻게 추궁해야 하나.
황 대표의 손가락이 일정한 간격으로 톡톡, 테이블을 두드렸다. ……곱다. 짧게 깎인 손톱 위 하얀 반달이 또렷하다. ……예쁘다. 버들의 눈빛이 멍해졌다. 섬섬옥수 같은 황 대표에게 홀리고야 말았다.
“버들 씨.”
황 대표의 나지막한 부름에 버들이 정신을 차렸다.
“대표님. ……화내실 거예요?”
“왜요. 내가 화낼 만한 짓 했어요?”
찰나 떠오른 생각들이 너무 여러 가지였다. 헛기침을 하며 버들이 대답을 회피했다. 그게 너무나 어색해 보였다. 황 대표의 눈치를 살피던 버들이 스윽, 고개를 앞쪽으로 숙였다. 통통한 아랫입술이 벌어져 좁은 틈을 냈다. 빨대를 물기 직전 황 대표가 더 빨리 버들의 음료수를 낚아채 갔다. 화들짝 놀란 버들의 허리가 뒤로 쭉 물러났다.
“버들 씨.”
“네?”
“오늘은 해바라기 안 줘요?”
가슴이 펑, 부풀었다.
“드릴게요! 드리고 싶어요!”
10분만 기다려 달라고 하며 버들이 서둘러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내 눈에 잘났으면 다른 사람 눈에도 잘난 거다. 남녀가 우글거리는 카페에 황 대표만 두고 나온 게 못내 걸린다. 쉬지 않고 달려 버들이 꽃집에 도착했다. 무리한 탓에 심장이 저릿저릿하다. 사 들고 온 해바라기를 황 대표의 앞에 조심히 내려놨다. 무감한 표정으로 황 대표가 시계를 확인했다. 10분이 아니라 15분이 걸렸다. 옆구리를 감싼 채 버들이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 꼴에 황 대표가 옅게 코웃음을 쳤다. 쉽다. 쉬워도 너무 쉽다.
“우리 마지막으로 봤던 날.”
……‘우리’래. 목구멍이 따끔따끔 아프면서도 버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뭐 잃어버린 거 없어요?”
당연히 있다.
“노…….”
“우산.”
노트라고 버들의 말이 완성되기 직전, 황 대표가 말을 가로막았다. 아. 버들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확히 우산은 잃어버린 게 아니라 일부러 놓고 내린 거였지만.
“우산 차에 있는데. 가지러 갈래요?”
황 대표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에 남겨진 해바라기를 버들이 돌아보다가 그 뒤를 따라갔다. 뒷좌석을 열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타.”
“이따가 친구들끼리 만나기로 해서…….”
“안 들려요? 타.”
갑자기 쌀쌀맞아진 황 대표의 태도에 버들이 움츠러들었다. 차 안이 조용하다.
“우리 어디 가요?”
황 대표가 대답해 주지 않았다. 다행히 창밖에 펼쳐진 풍경이 익숙하다. 버들이 뒷좌석을 바라봤다. 여자들과 잘 때마다 선물로 준다는 껌값이 보이지 않는다. 기분이 금방 울적해졌다. 길이 막히지 않아 호텔 레스토랑까지 금방 도착했다. 버들이 쭈뼛거렸다.
“잘 먹었습니다.”
식사를 끝낸 버들이 작게 인사했다. 머릿속이 내내 소란스러웠다. 황 대표님이 왜 학교까지 나를 찾으러 왔을까? 학교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이나 길을 잃어버렸을까? 겨울이 형도 없이 왜 나한테 밥을 사 주는 걸까? 피 나오는 고깃덩이가 황 대표님은 진짜 맛있는 걸까?
소화가 안 된 것처럼 속이 불편하다. 레스토랑을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황 대표가 누른 버튼에 버들의 커다란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여기서 위로 향하면 호텔 룸으로 가는 거다.
“누구 만나세요?”
“아니.”
“그럼요?”
“호텔을 꼭 누구랑 같이 와서 쉬어야 해요?”
다른 사람 없이 혼자서 쉬실 건가 보다. 안도한 버들이 회원 카드를 가져다 댄 후 아래로 향하는 버튼을 눌렀다. 그걸 보고도 무심한 황 대표의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아. 우산은 가지셔도 돼요. 그거 되게 튼튼해요.”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인사를 하는 버들의 손목을 붙잡고 황 대표가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버들이 정신을 차렸을 땐 발 아래로 푹신한 카펫이 밟혔다.
“저희 어디 가요?”
“…….”
“황 대표님. 저 좋은 거 다른 사람이랑 안 해요.”
“…….”
“저는 대표님 말고 다른 사람이랑 자는 거 싫어요.”
다급한 버들의 목소리가 떨렸다. 웃겼다.
“…….”
“…….”
탁, 닫힌 문에 버들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커튼을 걷자 내부가 환해졌다. 그대로 얼어붙은 버들의 고개만이 이쪽저쪽 돌아갔다. 전과 달리 아무도 없단 것에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무슨 일인지 묻기 전에 황 대표가 버들을 손목을 다시 붙잡고선 구석으로 몰아세웠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버들의 팔을 머리보다 높게 들어 고정하자 반팔 셔츠 소매가 어깨 쪽으로 내려갔다. 황 대표의 매서운 눈빛이 무심코 버들의 팔 안쪽 살을 들여다봤다. 사내새끼가. 쓸데없이 피부가 참 희다.
“대표님?”
인상을 찌푸리며 버들의 팔을 놓아준 황 대표가 담배를 빼 물었다. 뒷골 빠지게 섹시한 여자들하고만 왔던 스위트룸에 난생처음으로 다 큰 사내새끼를 끌고 온 게 문득 어이가 없어졌다. 그렇지만 스토커에게 성질을 부리려면 카페가 아닌, 단둘이 있을 공간이 필요했다.
“너 이거 어떻게 그렸어?”
버들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재킷 주머니에서 황 대표가 꺼낸 건 제 노트였다. 역시 본 거야. 화나신 거야.
“저 스토커 아니에요. 진짜예요. 제가 원래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요. 예쁜 거나 멋진 거 보면 저절로 손이 움직여요.”
“왜 그렸냐고 묻는 게 아니라, 어떻게 그렸냐니까.”
“대표님. 화 많이 나셨어요?”
“물어본 거에 대답.”
“그냥. 그냥, 황 대표님 떠올리면서 그렸어요.”
둘의 온도차가 컸다. 황 대표는 여유로웠고 버들은 초조해했다. 잠시 대화가 끊겼다.
“나를 떠올리면서 그렸다고?”
버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걸?”
황 대표가 그림을 보여 줬다. 아주 당연히 뒷장을 펼쳤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앞장이다.
“이거 어떻게 그렸어요?”
“……그거요?”
“응.”
“보고 그렸어요.”
보고 그렸단 것이 글이었고, 그 글은 낡은 수첩에 쓰인 내용이란 걸 버들이 순순히 고했다. 불붙이지 않은 담배 필터를 황 대표가 재떨이에 버렸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황 대표의 미간이 좁혀졌다. 낡은 수첩의 외관을 언급하자 버들이 그걸 어떻게 알았냐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숨이 나오다가 말았다. 몇 해 전, 뉴욕에서 잃어버린 제 수첩을 주운 사람이 버들이었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사실에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약속이 잡혔다. 황 대표가 말해 주는 시간을 버들이 귀 기울여 들었다.
“내일 가져다 드릴게요.”
황 대표님에게 도움이 되는 건가, 내가?
“제가 안 늦게 꼭 가져다 드릴게요.”
황 대표를 화나게 만들었을까 걱정했던 버들의 어깨가 홀가분해졌다.
“제가 깨끗하게 닦아서…….”
“아니. 뭘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가져와요.”
“그럴게요.”
버들이 해사하게 웃었다.
“대표님.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허리를 굽히며 버들이 인사했다.
“친구들이랑 어디서 놀아요?”
네? 되묻는 버들에게 “네가 아까 논다고 그랬잖아요.” 하며, 황 대표가 인상을 구겼다.
“학교 근처에서 놀 거예요.”
작은 목소리로 버들이 거짓말을 쳤다.
“아까 그 친구도 와요?”
“……모르겠어요.”
“뭐 하고 노는데?”
“밥 먹고…….”
“또?”
“아직 정해진 게 없어서요.”
“술도 마셔요?”
“아마도요.”
술 마시면 덥다고 바지부터 벗던 버들이 떠올랐다.
“헤프네.”
맹한 인상이 그럴 만한 위인은 못 될 것 같지만 가볍게 나랑 자겠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는 걸 보면……. 황 대표의 입술에 조소가 걸렸다.
“너 처음부터 게이 새끼였지?”
“…….”
“네 주제에 여자한테 박아 만족시킬 수 있을 건 같지 않고.”
“…….”
“나 말고 또 누구 있어요?”
“…….”
“너랑 붙어먹는 다른 게이 새끼. 있을 거 아냐.”
“…….”
“다리를 이미 벌렸든가, 아니면.”
“…….”
“나한테 하는 것처럼 제발 다리 좀 벌리게 해 달라며 네가 매달리는 새끼가.”
“…….”
“꽃 사다 주고, 좋아한다며 구걸하면서.”
황 대표가 하는 말을 버들이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몇 분 전만 해도 버들의 마음이 낡은 수첩으로 인해 몽글몽글 피어올랐었다. 그런데 지금은 목구멍이 답답하다. 자기도 모르게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바닥으로 손톱이 파고들면서 따끔거렸다. 황 대표와 눈이 마주치자 버들이 순하게 웃었다.
“내일 비 온대요.”
“…….”
“우산 꼭 들고 외출하세요.”
“…….”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문으로 향하는 버들의 손목을 황 대표가 낚아챘다. 배려 없이 들어간 힘에 욱신거리며 아팠다. 시야가 딱 반 바퀴 굴렀다. 그러면서 뒤통수에 푹신한 침대 시트가 닿았다. 놀란 버들의 눈이 깜박이는 걸 잊었다.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덮쳤다. 둘의 체격 차이가 컸다. 본능적으로 틈을 벌리려 굽혀지는 버들의 한쪽 무릎을 황 대표가 허벅지로 눌렀다.
“나하고만 잔다는 거, 진짜예요?”
부드럽게 물어 온 황 대표의 말에 버들이 느리게 턱을 주억거렸다.
“아픈 거 잘 참는 건?”
티끌 없이 깨끗한 버들의 눈을 황 대표가 무심히 내려다봤다. 원래 물기가 많은 눈인 건지. 아니면 눈물이 고인 건지.
“내가 너랑 잘 거 같아요? 아픈 거 잘 참는지도 모르는데. 음?”
버들의 가슴팍이 크게 들썩거렸다.
“잘 참아요. 아픈 거 저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럼 확인해 봐야겠네. 아픈 거 잘 참나. 못 참나.”
어쩔 수 없단 투로 버들의 반팔 소매를 황 대표가 손끝으로 대충 치웠다. 예고치 못한 접촉에 버들의 몸 전체가 흠칫거렸다. 고스란히 전해진 버들의 긴장을 알면서도 황 대표는 무시했다. 만졌을 때 부드럽단 걸 알게 되니……. 팔꿈치보다 살짝 위쪽인 버들의 안쪽 살결을 황 대표가 손으로 살며시 문질렀다. 간지러움이 느껴지자 황 대표의 아래에 깔려 있던 버들이 꿈틀거렸다.
“혹시나 아픈 거 못 참겠다고, 소리 내지 마. 목소리 듣기 싫으니까.”
황 대표가 고개를 숙였다. 예민한 피부에 황 대표의 코끝과 머리카락이 느껴지자 버들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아. 신음이 샜다. 목소리 듣기 싫단 황 대표의 말이 바로 생각났다. 소리를 내지 않고자 버들이 한쪽으로 고개를 비틀며 턱에 힘을 줬다. 뜀박질을 한 것처럼 숨이 벅차다. 황 대표의 혀가 살갗을 지그시 짓누르며 뭉개는 게 느껴졌다. 버들의 눈이 질끈 감겼다. 그때였다. 황 대표가 이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