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그해, 물결치는 (2)
현관 앞에 어지럽게 널린 신발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버들이 풀썩 주저앉아 짝을 맞추었다. 한집 사는 식구가 대폭 줄어든 만큼 신발 정리가 수월하게 끝이 났다. 몸을 일으킨 버들의 앞으로 껄렁껄렁하게 겨울이 나타났다.
“벗어.”
버들의 단호한 요구에 겨울이 눈썹을 들썩였다.
“가족끼리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장난치지 말고 좀.”
“형처럼 진지한 사람이 또 어디에 있다고 장난치지 말래.”
“어딜 봐서 형이 진지한 사람이야?”
“서운해지네. 여태 그걸 몰랐어? 써서 외워라.”
버들이 정색했다. 그 앞에서 보란 듯 겨울이 발을 까닥거렸다.
“벗어, 빨리.”
슬리퍼의 본래 주인이 짜증을 냈다.
“와. 형을 막 치고, 이게? 응?”
겨울의 발등을 주먹으로 쾅쾅 내려쳤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다.
“언제 철들래, 너는?”
“어허. 형이라고 해야지. 공손하게.”
겨울의 발아래에서 낑낑거리던 버들이 슬리퍼 한쪽만 겨우 빼앗을 수 있었다. 실밥 뜯기는 소리가 우두둑 났다. 다행히 겉으로는 상태가 멀쩡해 보인다.
“좋은 말 할 때 슬리퍼나 내놔.”
“좀 신자. 닳는 것도 아니고.”
닳다 뿐인가. 겨울이 큰 발을 억지로 욱여넣은 터라 버들의 슬리퍼가 곧 찢어지게 생겼다. 큰 눈을 끔벅거리던 버들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버들의 한숨으로 인해 장난친다고 한참 작은 슬리퍼를 세 시간 전부터 미리 신고 있던 겨울의 입장이 무척이나 한심해지고야 말았다. 가늘게 뜬 눈으로 겨울이 버들을 흘겼다.
“너 어디 갔다 와냐? 왜 이렇게 늦었어?”
버들이 빼앗은 슬리퍼 한쪽만이라도 신었다.
“형은 몰라도 돼.”
제 옆을 지나가려는 버들을 놓치지 않고 겨울이 덥석 껴안았다. 버들에게서 후덥지근한 바깥 공기가 전해진다.
“왜 자꾸 이래?”
“좀만 안고 있을게.”
“손 씻어야 돼. 나 신발도 만졌잖아.”
“그니까 그걸 왜 만져?”
“형이 정리 안 해 놨으니까.”
“그거 내일 출근하는 키퍼들이 할 일이야.”
본격적으로 질척거리려다가 말고 겨울이 순순히 버들을 풀어 줬다. 물비누를 꾹꾹 짜 버들이 오랫동안 정성을 들여 손을 씻고 나왔다. 응접실을 마치 제 안방처럼 활개를 치고 다니는 겨울을 보아 아직 장 여사와 유 회장이 귀가하기 전인가 보다.
“형. 뭐 해.”
“또 왜.”
“비켜.”
버들의 앞을 태연한 태도로 이쪽저쪽 가로막아 가며 방해하던 겨울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버들의 얼굴을 감싸 손바닥에 힘을 줬다. 통통한 버들의 볼살이 가운데로 모아지면서 붕어처럼 입술이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이러지 말라며 단박에 뿌리칠 거라고 예상했는데 어쩐 일인지 버들이 얌전하다.
“심심하지 않냐?”
아니. 버들의 목소리가 웅얼거리면서 나왔다.
“형은 심심해. 뽀뽀나 한 번 할까?”
“나 박치기할 거야.”
협박을 하네, 이게. 좀 컸다고 몇 해 전과 달리 스킨십에 호락호락하지 않은 막냇동생이 겨울의 눈에는 고까웠다. 고작 스물한 살인 주제에 이 정도로 까칠하게 나오는데 스물두 살이 되면 또 얼마나 어른 행세를 하려고 들지. 벌써부터 웃기다.
지그시 저를 쳐다보는 겨울에게 버들이 “왜? 무슨 할 말 있어?” 하고 물었다. 산뜻하게 겨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 대표가 들고 와서 보여준 버들의 노트 속 그림은 분명히 시나리오를 봐야지만 그릴 수 있는 구도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봐야 하는데 겨울이 기꺼이 다음 날로 미루었다. 지금은 피곤해 보이는 버들이 안락하게 쉬는 게 우선이다.
“잘 자.”
“응.”
“형한테도 잘 자라고 해야지.”
“잘 자.”
“오냐. 내일 눈 뜨자마자 형한테 뛰어오고.”
“왜?”
“뽀뽀나 하게.”
콧김을 씩 내뿜은 버들이 계단을 밟았다. 끝까지 슬리퍼 한쪽은 돌려받지 못했다. 각자 한 발은 맨발인 채로 형제가 정답게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방 안에 들어선 버들이 문을 잠그자마자 그대로 허물어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가 혼자가 되니 온몸에서 금방 힘이 빠져나갔다.
벌써 보고 싶다.
새벽 즈음, 스산한 바람이 불더니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난 버들이 휘청거렸다. 갑자기 움직여서 그런지 현기증이 순간 핑 돌았다. 옷을 갈아입는 버들의 손길이 느릿하다. 그대로 방을 가로질러 욕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을 한참 맞고 있었다. 젖은 머리로 침대에 엎드려 누웠을 때는 창문을 때리는 빗줄기 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올 정도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버들이 제 팔 안쪽에 손을 가져갔다. 정확히 황 대표가 물었던 그 자리에 달뜬 체온이 만져진다.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나 보다. 꼭 하늘을 부술 것처럼 사납게 치는 천둥소리에 흠칫 놀라며 버들이 눈을 떴다. 커튼을 들춰 바깥을 내다봤다. 시간은 아침인데 비 때문인지 주변이 어둑어둑하다. 아마 매년 장마철이 되면 황 대표와 단둘이서 스승님을 뵈러 갔던 그날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내 시간이, 내 하루가, 내 계절이, 황 대표로 물든다. 물드는 과정이 재차 반복될수록 색깔은 점점 짙어질 것이다.
「혹시나 아픈 거 못 참겠다고, 소리 내지 마. 목소리 듣기 싫으니까.」
가만히 깜박이던 버들의 긴 속눈썹이 아래로 잠겼다. 어제는 차마 보지 못했던 제 팔 안쪽을 살펴봤다. 황 대표가 물어서 생긴 이빨 자국이 시퍼렇게 새겨졌다. 황 대표로 인해 제 주변을 떠도는 감정들이 막연하다. 내가 하고 있는 게 첫사랑인 줄로만 알았는데……. 황 대표가 말해 주기 전까지 내가 하고 있는 게 구걸이란 걸 몰랐다.
* * *
레스토랑 입구에서 걸어 들어오고 있는 겨울을 발견한 버들이 들고 있던 물컵을 내려놨다.
“데리러 간다니까.”
“반대 방향이라 그럼 형이 힘들잖아.”
“괜찮아?”
겨울이 고개를 끄덕이는 버들을 걱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열이 올라 응급실에 다녀와야 했던 버들의 눈가가 아직 붉다. 겨울이 버들의 이마를 만져 열이 있나 없나 꼼꼼하게 쟀다. 체온은 정상적으로 돌아왔지만 절대 침대 밖을 나오지 말았으면 싶었다. 하지만 버들이 답답해하니 잠깐의 외출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봤자 외식 정도다. 옆자리에 앉은 겨울이 주문을 끝냈다.
“누가 더 와?”
세 명의 자리가 준비된 것에 버들이 물었다.
“응. 황 대표.”
겨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버들과 황 대표의 눈이 부딪쳤다. 전까지 잔잔했던 버들의 마음에 돌멩이가 던져진 것처럼 파동이 일었다. 계속해서 황 대표만 생각이 났다. 저를 보고 웃어 줬던 얼굴,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줬던 목소리 등등.
두 대표가 일에 관련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버들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버들 씨.”
“네?”
갑자기 불린 제 이름에 버들의 고개가 퍼뜩 위로 들렸다.
“수첩 가지고 왔어요?”
수첩을 가져다주기로 했던 황 대표와의 약속은, 응급실에 가 있느라 시간을 어겨 못 지키게 됐다. 수첩을 넣어 놓은 가방을 들고 나와서 다행이다. 왠지 숙제 검사를 맡는 심정이다. 황 대표에게 버들이 낡은 수첩을 천천히 내밀었다. 잊어버린 수첩을 오랜만에 보게 된 황 대표의 미간이 좁혀졌다.
“황 대표님 수첩이 맞아요?”
가죽에 이니셜 ‘H’가 새겨져 있었다.
“이거 뉴욕 어디에서 주웠어요?”
황 대표와의 인연은 머플러가 시작이 아니었다니. 버들의 얼굴이 상기됐다.
“카페에서요.”
“카페?”
국적 불문하고 사람들로 넘쳐 나는 도시가 바로 뉴욕이었다. 번화가 중심에 위치한, 단골로 다니는 카페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중인 걸로 기억한다. 그 바글거리는 곳에서 황 대표가 잃어버린 수첩을 주운 사람이 나라니.
“사거리 끝에 있는 카페였는데.”
손가락으로 사각형을 그려 가며 버들이 말을 덧붙였다. 목소리 톤에서 들떠 있는 게 전해졌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황 대표가 아,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어렴풋하게 잡히는 기억이 있다. 유동 인구가 많은 장소에 위치한 카페는 항상 붐볐었다.
“그때요. 대표님이 저 대신 수학 문제 풀어 주셨어요.”
“…….”
“기억나세요?”
“…….”
황 대표의 표정이 싸늘하다. 기억 안 난다고 하고 싶지만, 무의식중에 펼쳐진 장면이 있었다. 볕이 잘 드는 야외 테라스에 앉아 문제집을 들여다보고 있던 어린 동양인과 버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앉아도 되나요?”, “앉으세요.” 짤막하게 주고받았던 대화가 영어였기에 서로가 한국인인 줄 몰랐다. 빽빽하게 채워지는 문제집을 무심코 눈빛으로 따라갔다. 공식 중간에서부터 삐끗한 부분이 있었다. 그걸 모르고 답을 찾기 위해 끙끙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기에 답답했다. 내 일이 아니니 무시하려고 했으나 자꾸 그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결국 문제집을 가져가 공식을 수정해 준 뒤 답까지 내 주었다. 그리고 정해진 일정을 위해 자리를 떴었다. 아마 그때 서두르느라 수첩을 흘렸던 모양이다.
“야, 너는 이런 거 주웠으면 형한테 말을 했어야지.”
수첩을 먼저 낚아채 안을 살펴보던 겨울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형은 한국에 있었잖아.”
“형이 매일 전화했잖아. 그때라도 말을 했어야지.”
“……왜.”
“위험한 거니까.”
“수첩인데?”
“네 나이 때 보기 야한 내용이잖아, 새끼야.”
맞다. 그래서 태어나 처음 몽정도 하고 자위도 했었다.
“이거 보고 그렸어요, 그림?”
“……네.”
황 대표가 유 대표에게 수첩을 받아 갔다. 손바닥에 닿는 가죽 느낌이 아련하다. 휘갈기듯 적어 놓은 내용이 의외다. 황 대표가 버들의 얼굴과 노트, 수첩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지금의 시나리오처럼 상세한 설명이 적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유출 걱정을 할 필요도 없을 수준이었다. 그런데 빈곳마저 버들은 그림으로 채워 넣었다. 유연한 황 대표의 손가락이 수첩 위를 톡톡 두드렸다.
“형. 어디 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겨울을 황급히 버들이 붙잡았다. 황 대표의 눈썹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전에도 다른 사람한테 저러더니. 자신을 좋아한다고 떠들면서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 스스럼없다.
버들의 머리를 쓰다듬은 유 대표가 김 실장에게 걸려 온 전화를 친히 보여 주면서 금방 돌아오겠단 말을 남기고 바깥으로 나갔다. 때마침 달그락거리며 음식이 나왔다. 버들이 제 앞에 놓인 커트러리를 들어 작게 고기를 조각내 입에 넣었다.
“유버들.”
나지막한 황 대표의 목소리에 버들이 네, 대답했다.
“도둑질도 해요?”
“……네?”
“왜 약속을 안 지켜.”
멍하게 버들이 눈을 깜박였다.
“막상 돌려주려니까 싫었어요?”
억울하다.
“제가 일이 생겨서 약속 못 지킨다고 연락드렸는데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거리긴 하나 못 믿는 눈치다. 도둑질이라니. 터무니없는 오해에 초조해진다. 정말로 미리 연락드렸었는데. 사과도 했었다. 숫자 1이 사라져 그 메시지를 읽으신 줄 알았는데.
“무슨 일?”
아픈 거 잘 참는다고 말해 놓은 게 있다 보니 사실대로 말을 못 하겠다. 열이 올랐다고 그러면 실망하실 거 같다.
“친구들이랑 술 마시면서 노느라?”
버들이 대답을 머뭇거리는 사이, 겨울이 돌아왔다. 바통을 터치하듯 버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잠깐. 화장실.”
떨리는 손가락을 굽혀 감춘 뒤 버들이 복도로 나왔다. 화장실까지 가지 못했다. 갑자기 손목이 잡혔고, 비상구 계단으로 끌려 들어갔다. 놀란 버들의 호흡이 찰나 거칠어졌다. 눈앞에 황 대표가 서 있었다. 마주친 시선에서 도망친 버들의 눈빛이 황 대표의 어깨 즈음에서 머물렀다. 머리 위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살 빠졌네.”
체중계에 올라가 보지 않았지만 황 대표가 살 빠졌다고 하니까 진짜로 그럴지도 모르겠다. 버들이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전에 겨울은 모르고 지나쳤던 제 체중 감소를 황 대표가 정확하게 알아맞혔던 때가 떠올랐다.
“보여 줘.”
턱 끝으로 황 대표가 가리킨 곳이 제 팔이란 걸 버들이 알아차렸다.
“저 진짜 수첩 도둑질하려는 거 아니에요.”
“…….”
“돌려주려고 했었어요.”
“알았으니까.”
황 대표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였다.
“팔, 보여 줘요.”
“저기에…… CCTV 있어요.”
비웃음을 흘리며 황 대표가 그 CCTV 바로 아래에 버들을 데려가 세웠다. 사각지대였다.
“됐지?”
“…….”
“보여 줘요.”
“…….”
할 말을 못 찾고 굳어 버린 버들의 귓불이 붉어졌다. 꿈쩍 않는 버들의 손목을 황 대표가 머리보다 높이 들어 벽에 고정했다. 소매를 걷자 버들의 팔에 저가 물어서 생긴 잇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게 보인다. 스멀거리며 만족감이 퍼진다. 자근자근 씹어 버리고 싶은 가학성이 대체 어디서 오는 건지 모르겠다.
“소리 내지 마.”
황 대표의 고개가 깊숙이 기울어지자 버들이 턱에 힘을 줬다. 제 피부 위를 배회하는 황 대표의 입술이 뜨겁다. 촉촉한 감촉으로 비벼지는 게 황 대표의 혀끝이란 걸 자각하자마자 예민한 버들이 못 견디고 파득거렸다. 황 대표가 곧장 이를 세웠다. 보드라운 버들의 하얀 피부가 얼룩지며 물들었다.
고개를 살짝 뗀 황 대표의 눈에 가느다랗게 뻗은 버들의 목과 움푹 파인 쇄골이 담겼다. 거기에 입술을 가만히 가져다 대자 툭툭 폭발하며 뛰는 버들의 맥박이 느껴졌다. 우습다. 확 물어 버릴까 하다가 참았다. 자국이 남으면 팔처럼 가려지지 않는 부위였다.
황 대표가 멀어지자 긴장이 동시에 풀리면서 버들이 휘청거렸다. 뻔히 알면서도 황 대표는 잡아 주지 않았다. 풀썩, 버들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황 대표의 구두가 시야에 들어온다.
“변태네.”
“…….”
“느끼는 거 아니죠?”
“…….”
그대로 황 대표가 나가 버렸다. 비상구 계단에 홀로 남겨진 버들이 제 팔을 바라봤다. 황 대표의 타액으로 번들거린다.
* * *
시간이 늦은 만큼 도로가 한산했다. 운전에 몰두해 있던 황 대표의 시선이 문득 옆으로 향했다. 좌석 위에는 낡은 수첩이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집까지 얼마 남지 않은 거리에서 황 대표가 핸들을 꺾어 차를 세웠다.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진 가로등을 따라 갓길은 나약한 붉은빛만이 감돌고 있었다. 수첩 역시 본래의 가죽 색에 붉은빛이 더해져 보인다.
몇 분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던 수첩을 황 대표가 집어 들었다. 손바닥에 감기는 낡은 수첩의 느낌과 아릿하게 나는 냄새 등이 자물쇠가 풀린 것처럼 여럿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귀퉁이의 이니셜 ‘H’를 정우가 손끝으로 천천히 매만져 보았다. 자수로 새겨진 터라 그 부분만 볼록하다. 수첩 속에는 우려했던 것과 달리 심각한 내용을 적어 두거나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계속 잃어버렸던 게 나았을까. 공 던지면 물어 와 칭찬을 바라는 개처럼 수첩을 건네며 초롱초롱하던 버들의 눈동자가 떠오른다.
* * *
버들의 방 안이 어둡다. 그래서 노트북에서 뿜어 나오는 빛이 더욱더 강렬하다. 황 대표가 시나리오를 써서 제작된 영화를 밤을 새면서 보고 있던 중이었다. 신경은 온통 화면 속에 집중되어 있었다. 저도 모르게 살짝 벌리고 있던 입술을 다물었다. 몽롱했던 정신이 퍼뜩 돌아오면서 다급히 베개부터 찾아 껴안았다.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이 은밀하게 숨어든 장소가 비상구 계단이었다. 꼴깍 침을 삼킨 버들의 목울대가 일렁거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영화 속 주인공들이 고개를 꺾더니 키스했다. 간발의 차로 버들이 폭신한 베개에 얼른 이마를 파묻었다. 시야는 차단되었으나 귀는 그대로 열린 채였다. 혀가 얽히면서 들려오는 질척한 소리에 버들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진짜 변태냐.”
울상이던 버들이 벌떡 일어나 형광등을 켰다. 어느덧 화면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있었다. 총 다섯 편의 영화를 보았는데, 아직 볼 게 더 남아 있다. 어렴풋이 새벽이 찾아왔다. 노트북을 바닥에 내려놓고 넓은 침대를 온전히 독차지하며 발라당 누웠다.
천장을 보며 멍해 있던 버들이 제 입술을 더듬거렸다. 영화를 보는 동안 무심결에 자근자근 씹어 놓은 통에 아랫입술이 잔뜩 부어 있다. 전체적으로 뜨뜻한 열감이 전해진다. 버들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작품을 작품으로만 봐야 하는데 저도 모르게 어떤 내용의 주인공이건 황 대표와 자신을 대입해 생각하고 있었다. 키스, 갈등, 섹스, 이별, 뽀뽀, 포옹, 만남. 영화 속에서 소용돌이 쳤던 감정들이 진하게 우려진다. 단지 영화를 봤을 뿐이건만 칼로리 소모가 엄청나다. 손바닥엔 옅게 진땀까지 뱄을 정도다.
황 대표님이랑 키스하면 어떨까?
황 대표님이랑 갈등 같은 건 없었으면 좋겠다.
황 대표님이랑…….
황 대표님이랑 이별하기 싫어.
황 대표님이랑 뽀뽀하고 싶다.
황 대표님이랑 매일매일 만날 수 있다면.
혼자 좌르륵 늘어놓은 생각에 버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난리가 났다.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니던 버들이 벽과 충돌하고 나서야 차분해졌다. 수첩 속 내용이나 영화를 보고 나서 느꼈던 차갑고 건조한 감동이 황 대표의 인상과 비슷하다. 본인과 닮은 느낌의 글을 쓰시는구나.
길게 호흡하며 버들이 눈을 감았다. 가뜩이나 멋있는 사람에게 새로 반해 버린 밤이다. 돌려 드린 수첩에 적힌 내용도 곧 영상으로 만들어진다고 하니 벅차오를 정도로 기대가 된다. 점점 수마에 빠져드는 버들의 뺨이 발그레 물들었다. 저의 첫 몽정과 자위의 기억도 알고 보니 황 대표가 녹아 있었다.
……야해. 바짝 수축된 버들의 아랫배가 찌르르 울렸다.
* * *
“웃어.”
“…….”
“안 웃어?”
“…….”
버들이 부루퉁하다. 그 옆에서 겨울만 홀로 신났다.
“네가 지금 그러고 있으면, 형이 억지로 끌고 온 것 같잖아.”
“억지로 끌고 온 것 맞잖아. 내가 쉰다고 그랬는데.”
난리 법석 블루스를 추며 겨울이 정신을 쏙 빼놓더니 정신을 차렸을 땐 백화점까지 동행한 뒤였다. 겨울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느라 진이 다 빠진다. 며칠 내내 황 대표의 영화를 돌려 보느라 잠이 모자란 버들이 피곤해하며 눈가를 비볐다. 하품도 나왔다. 힘든지 자꾸만 처지는 버들을 겨울이 다독거렸다.
“사탕 사 줄까? 아니면, 초콜릿?”
“내가 애야?”
화만 돋울 뿐이었다.
“여기만 마지막으로 딱 들렀다가 집에 가자.”
불과 10분 전에 나온 매장 앞에서도 저 말을 똑같이 했었다. 공갈을 아무렇지 않게 치는 겨울에게 따질 기력도 없는지 버들의 고개가 순순히 끄덕거려졌다.
“어떤 게 더 마음에 들어?”
가만히 서 있는 버들에게 겨울이 이 옷도 대보고, 저 옷도 대봤다.
“아까 이거랑 비슷한 건 샀잖아.”
“그랬나?”
“샀어. 확실해.”
“그래도 브랜드가 다르니까 디자이너도 다르겠지?”
결국엔 두 개 다 살 거면서 뭘 고민하는 척을 하나 모르겠다. 버들이 코를 훌쩍거렸다. 다 입지도 못할 옷을 또 한가득 구매했다. 신발을 고르려는 겨울의 어깨를 버들이 얼른 잡아당겼다. 옷이야 사 두면 꺼내 입는다지만 신발은 사 놓고도 편한 것만 골라 신으니 정말로 낭비였다. 버들의 만류에 어쩐 일인지 겨울이 쉽게 돌아섰다. 겨울의 지시로 아까부터 직원이 들고 서 있던 바지를 버들에게 건넸다.
“입고 나와 볼래?”
“귀찮은데.”
“사이즈 맞나 보게.”
“내 사이즈 형이 더 잘 알잖아.”
“이게 크게 나온 상품이라잖아.”
“그럼 한 치수 작게…….”
“확 그냥. 빨리 입고 나와.”
옷걸이를 건네받은 버들이 탈의실로 들어갔다. 바지를 바라보는 버들의 표정이 시큰둥하다. 이런 옷, 집에 백 개는 더 있는 것 같은데. 마음에 안 든다고 버텨 봤자 어차피 제 손해다. 무늬가 어떻고, 디자이너 사상이 어떻고, 박음질이 어떻고. 제 입에서 결국 마음에 든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겨울은 옷에 관련한 역사를 줄줄 늘어놓으며 진을 빼 놓을 게 분명하다. 차라리 대충 장단을 맞춰 주는 게 시간을 절약하는 방법이었다.
갈아입은 바지의 허리둘레가 확실히 크다. 설렁설렁 공간이 남는다. 별 뜻 없이 제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보던 버들의 콧잔등이 문득 찌푸려졌다. 요 근래엔 반드시 소매의 길이가 팔꿈치 밑까지 내려오는 티셔츠만 골라 입는 편이었다. 가려진 팔 안쪽에는 황 대표의 흔적이 숨겨져 있다. 처음엔 시퍼랬던 잇자국이 지금은 자줏빛과 노란색이 섞여 주변으로 번져 가고 있었다.
“꽃 같아.”
낮게 버들이 중얼거렸다. 참 예쁘게도 물어 놨다.
* * *
황 대표가 웃었다. 아래에 깔려 있던 여자가 그의 머리를 잡아당겨 눈을 맞추게 했다.
“집중해.”
“그러게. 집중이 안 되네. 오늘따라.”
“왜?”
“속옷이 별로라.”
수치심 때문인지 여자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일어나려는 여자의 어깨를 붙잡고 그대로 밀어붙였다. 도자기처럼 매끈한 여자의 피부에서 누군가의 보드라운 피부가 생각났고, 가느다란 여자의 팔에서 좀 더 말랑한 살이 붙어 있던 누군가의 팔이 떠올랐다.
* * *
“형. 어디야?”
정민에게 잡혀 방학 기념으로 저녁을 먹고, 술까지 마셨다.
-어딘 줄 알고 전화했는데.
“형 방.”
-형은 지금 회사야.
“시간이 이렇게 늦었는데?”
-이렇게 늦은 시간에 너는 어딘데.
시간은 열한 시 정도였다.
“나는 학교 근처.”
-뭐 하느라 아직도 학교 근처야?
“친구랑 노느라. 형. 집에 갈 때 나 데리고 가.”
-형이 언제 집에 갈 줄 알고.
“몰라. 기다릴게.”
기사 불러 준다는 겨울에게 어차피 바람도 더 쐬고 싶으니까 늦더라도 형이 데리러 오라고 말을 하며 버들이 전화를 끊었다. 방금까지 딱딱하게 굳어 있던 유 대표의 얼굴이 풀렸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황 대표가 태블릿을 가져갔다. 무심한 황 대표의 시선은 복잡한 그래프에 머물러 있었다. 두 대표가 고민 끝에 연예 기획사로 사업을 확장시키기로 결론을 냈다. 그걸로 진득한 회의가 계속되고 있었다.
“버들 씨?”
“응. 목소리 들으니까 내 새끼 술 마셨네.”
“…….”
“영화 현장 가 볼 거지?”
차 키를 챙기며 유 대표가 황 대표에게 물었다.
“넌 빠지려고?”
“집에 버들이 데려다주고 넘어갈게.”
황 대표가 겉옷을 걸쳤다. 통화 내용이 고스란히 들렸었다.
“그거 내가 갈게.”
“뭘?”
“버들 씨 데려다주는 거.”
“너 길도 모르잖아.”
“알아. 길.”
영화 현장에서 관계자가 기다리고 있는 이유가 실질적 경영 때문이었다. 따라서 직접 대화에 필요한 상대는 유 대표만으로 충분했다. 지금도 늦은 시각이었는데, 그 관계자를 더 기다리게 할 순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유 대표가 선뜻 고개를 끄덕거렸다. 큰 길로 두 대의 외제 차가 나란히 내려왔다. 유 대표가 창문을 내렸다.
“야. 운전 거칠게 하지 마라. 내 새끼, 곱게 모셔.”
두 외제 차가 서로 반대쪽으로 갈라졌다.
“겁도 없네.”
학교 정문 바로 앞 버스 정류장에서 버들의 모습이 보였다. 통화할 때 주변이 시끄럽기에 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있을 줄 알았더니 혼자다. 사내놈이라지만 요즘의 범죄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일어났다.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채 눈을 감고 있는 버들이 영 못마땅하다. 차에서 황 대표가 내렸다. 문 닫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아!”
멱살을 잡고 확 들어 올리자 화들짝 놀란 버들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눈가가 가물가물하다. 황 대표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눈만 감고 있는 건 줄 알았는데 잤어? 길바닥에서? 술까지 처마신 상태에서?
황 대표가 멱살을 놓았다. 벤치 위에 주저앉으면서도 버들의 시선이 황 대표를 따라갔다. 매일매일 보고 싶은 황 대표가 갑자기 나타나서 꿈을 꾸는 건가 싶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버들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겨울이 보이지 않는다. 잡혔던 제 멱살을 만지작거리면서, 버들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희 형은요?”
“제가 대신 왔어요.”
“……왜요?”
“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는 대신 황 대표가 조수석 문을 열었다. 버들이 머뭇거렸다. 차에는 왜 타라고 하시지? 이유를 모르겠으니 당연히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매서운 황 대표의 눈빛에 주눅이 든 버들이 결국 조수석 문을 열었다. 좁은 차 안에 둘이 남겨지자 숨이 꽉꽉 막힌다.
“안전벨트.”
“아.”
버들이 뒤늦게 벨트를 잡아당겼다. 차는 곧장 출발했다. 한 마디도 오가지 않은 상태였지만, 차 안은 시끄러웠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내비게이션에 찍혀 있는 주소가 제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눈치를 보던 버들이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300m 전방은 지금이 아니라 더 가셔야 돼요.”
조곤조곤한 버들의 안내에 따라 황 대표가 운전했다.
“안 데리러 오셔도 되는데…….”
“술 마셨어요?”
“조금요.”
“누구랑 마셨어요?”
“……친구랑.”
술 냄새가 독한가. 눈치를 보던 버들이 슬쩍 창문을 내렸다. 파고드는 바람에 연신 앞머리가 위로 날렸다. 황 대표님이랑 얼마 만에 만나는 거지? 손가락을 차곡차곡 접던 버들이 날짜를 계산하는 걸 아예 관뒀다. 지금은 여유롭게 운전하는 황 대표의 모습을 훔쳐보는 것만으로도 바쁘다. 앞을 내다보던 버들의 고개가 슬그머니 옆으로 향했다. 시계 주변으로 푸르게 돋아난 황 대표의 핏줄이 근사하다.
“본인 술버릇 알아요?”
“저 술버릇 없어요.”
황 대표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전에 일 때문에 그러세요? 침대 뺏은 거.”
버들이 얼른 변명을 덧붙였다. 변명이면서 곧 사실이기도 했다.
“저 원래 취할 때까지 술 안 마셔요.”
“그런데 그날은 왜 취할 때까지 술 마셨어요?”
“그날은, 대표님이랑 있는 게 너무 좋고 긴장돼서…….”
말을 하다가 말고 버들이 얼른 제 입을 가렸다. 변태라느니, 호모 새끼라느니, 스토커라느니. 그런 비난을 퍼부을 것 같았던 황 대표가 예상과 달리 잠잠하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
중간에서 차가 멈췄다. 버들이 창밖을 내다봤다. 3층으로 된 커다란 카페가 대낮처럼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지갑을 연 황 대표가 가장 앞쪽에 꽂혀 있는 카드를 빼 버들에게 건넸다.
“마실 것 사 와.”
“……네?”
“같은 말 반복하는 거 싫어한다고 내가 그랬던 거 같은데.”
버들이 안전벨트를 풀었다. 황 대표가 준 카드를 손에 쥔 채 카페에 들어갔다. 음료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버들이 화장실을 찾았다. 큰 카페라 그런지 양치액이 준비되어 있다. 작은 종이컵에 푸른 액을 담아 여러 번 입을 헹구었다. 손도 씻고 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커피를 찾아 돌아가 건네자 황 대표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 커피 안 마신다면서요.”
“……대표님 마실 거 아니세요?”
“가서 다시 사 와. 너 마실 걸로.”
아무것도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버들이 다시 차에서 내렸다. 뒤를 돌아보자 황 대표의 표정에서 귀찮음이 전해진다. 카페 안에 들어선 버들이 빽빽한 메뉴판을 보며 열대 과일 주스를 주문했다.
다시 차로 돌아가자 열린 뒷좌석의 문으로 앉아 있는 황 대표가 보였다. 버들의 큰 눈에 당혹스러움이 스쳤다. 황 대표가 들어오란 듯 턱을 까닥거렸다. 느릿느릿 그의 옆자리에 올라탄 버들이 문을 닫았다.
“잘 마시겠습니다.”
카드를 돌려주며 조용히 버들이 인사했다.
“…….”
“…….”
정적이 마음을 조이게 만든다. 버들이 제 무릎께를 내려다보며 이따금씩 주스를 들이켰다. 달달한 망고 향이 주변으로 퍼진다.
“해바라기 있어요?”
버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다리고 있으면?”
“사다 드릴까요?”
적극적인 꼴통에게 황 대표가 코웃음을 쳤다.
“…….”
“…….”
얼음이 달그락거렸다.
“꽃은 됐고. 보여 줘요.”
“……팔이요?”
버들의 손에서 황 대표가 음료를 빼앗았다. 망설이던 버들이 소매를 들어 올렸다. 황 대표가 버들의 팔 안쪽으로 손끝을 가져다 댔다. 사라지고 없을 줄 알았더니 연한 피부에 멍이 참 오래도 간다. 살짝 쓸었을 뿐인데 버들이 움찔거렸다. 민감한 반응에 황 대표가 조소했다. 여태 남의 손을 타 본 적 없는 게 느껴졌다.
“버들 씨. 저 좋아해요?”
나지막한 황 대표의 목소리에 버들의 마음이 설렜다.
“여기 아팠어요?”
“아니요. 진짜 안 아팠어요.”
고개까지 저어 가며 버들이 대답했다.
“넌 내가 여기 다 물어뜯어 놔도 좋다고 할 거지?”
눈처럼 희니까 그걸 지켜 주고 싶은 게 아니라 발자국을 내 더럽히고 싶어진다.
고개를 비튼 채 황 대표가 버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호흡을 멈춘 버들이 전해졌다. 입술이 닿은 버들의 살갗에서 단맛이 퍼지는 것 같다. 달달한 망고 향이 주변을 맴돌고 있어서 그런가 보다. 힘을 줘 빨아들이자 버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고개를 떼 버들의 팔을 확인하니 흐릿한 자국 위로 또렷하게 울혈이 새로 남았다.
황 대표가 다시금 버들의 팔에 입술을 묻었다. 보드라운 피부가 참 나긋나긋하다. 천천히 배회하던 혀를 감추고 황 대표가 이를 세웠다. 점점, 점점 강하게 힘을 줬다. 그럼에도 들려오는 소리가 없다. 기껏해야 미약하게 비트는 몸이 전부다.
버들의 팔 안쪽에 실핏줄이 전부 터졌다. 피까지 방울졌다.
황 대표가 버들의 턱 밑을 손가락으로 톡, 쳐올렸다. 할 말이 있지 않으냐는 듯.
“……좋아해요.”
* * *
제 집에 들어선 황 대표가 차분히 씻고 나왔다. 핸드폰을 열자 버들이 제 카드로 음료를 결제한 내역이 문자로 찍혀 있었다. 그게 뭐라고 잠시 서 바라봤다.
* * *
바리바리 짐을 싸 들고 유 회장의 회사에 찾아온 버들이 그대로 굳었다. 가족들만 모이는 줄 알았던 자리에 뜻밖에 황 대표가 앉아 있었다. 저 짐들이 다 뭐냐고 묻는 겨울의 뒤에 버들이 숨었다. 귀 끝이 달아오른다. 왜 안 어울리게 수줍어하냐면서 눈치 없게 겨울이 버들을 앞으로 끄집어냈다. 버들이 들고 온 짐들은 유 회장에게 팔려는 조각품들이었다. 황 대표가 빤히 주시하는 눈빛에 버들이 허둥거렸다. 곧 유 이사와 유 회장 간의 경매가 벌어졌고 버들이 만든 조각품이 비싸게 팔렸다.
“버들 씨. 조각한 지 얼마나 됐어요?”
“역사가 꽤 깊지. 걸음마 떼고 다른 애새끼들 구구단 외울 때, 내 새끼는 찰흙 만졌거든. 그치? 버들아.”
“그림은 얼마나 됐어요?”
“그것도 마찬가지로 역사가 깊지.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는데도 그 정도 실력이면 진짜 대단한 거 아니냐?”
황 대표가 버들에게 물어본 질문들을 팔불출 겨울이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겨울은 틈틈이 버들의 식사에 참견했다. 탄산수만 겨우 홀짝거리고 있던 버들이 하는 수 없이 감자 샐러드를 뒤적거렸다.
와인을 들이켜며 황 대표가 버들을 바라보았다. 현재 촬영에 들어간 영화 속 주인공과 조각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소비성이라고 언급을 해 놓았건만. 명장의 작품은 너무 과했다. 힘 좀 빼고 다시 제작하란 요구에 쌍욕이 되돌아왔었다. 딱 버들이 정도의 미숙함을 바랐다.
“버들 씨.”
“네?”
“나랑 일해 볼래요?”
“일이요?”
더 들어 볼 필요도 없단 듯 겨울이 불쑥 끼어들었다.
“뭔 소리야. 일? 안 돼.”
버들이 놀고먹기만 바라는 겨울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실장이 들어와 겨울에게 짧은 귓속말을 전했다.
“전화 한 통화 하고 올 테니까. 야, 황 대표. 나 없이 버들이한테 무슨 말도 하지 마라.”
보호자가 자신이니 본인이 없는 데서 오고 가는 모든 대화는 법적 효력이 없단 둥 헛소리를 실컷 늘어놓고 나서야 겨울이 자리를 비웠다.
“…….”
“…….”
덥지도 않은지 버들은 손목까지 길게 내려오는 남방을 입고 있었다. 팔이 일절 보이지 않는다. 황 대표의 한쪽 눈썹이 위로 쭉 올라갔다.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내려놓자 적색의 액이 찰랑거리며 은은한 향기를 내뿜었다.
“버들 씨. 나랑 일하기 싫어요?”
“형이…….”
“스물한 살이면 어른인데 형 허락이 필요해요?”
어른. 버들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일하는 거 별로예요? 아. 나랑 하루 종일 붙어 있는 게 별로인가?”
하루 종일? 툭 흘린 황 대표의 말에 버들이 홀렸다.
“일은 어떻게 하는 건데요?”
“조각하는 거지. 내 옆에서 그림도 그리고.”
손바닥에 땀이 난다. 순식간에 기분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생각만으로도 황홀했다. 하루 종일 황 대표님 옆에서 조각도 하고 그림도 그릴 수 있다고?
“……제가, 그러니까 필요한 거예요?”
건방지게 확대시킨 버들의 말에 기가 찼다. 정확히는 버들의 조각과 그림이 필요했다.
「버들 씨는 나한테 빨아먹을 단물도 없는 껌.」
버들이 포크를 떨어뜨렸다.
“대표님. 저 단물 생겼어요? 단물 있는 껌인 거 맞죠?”
버들의 커다란 눈이 빠르게 여러 번 깜박였다.
“황 대표님!”
상기된 버들의 얼굴이 발갛다.
“저 빨아먹을 거예요?”
버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황 대표가 버들의 성기를 떠올렸다. 순하게 잠든 채 따끈했던 살덩이의 체온과 말랑말랑했던 감촉까지.
무심코 턱 전체가 빳빳해질 정도로 힘을 줬던 황 대표가 금방 여유를 되찾았다.
“안 돼요? 빨아먹으면?”
황 대표의 물음에 버들이 숨을 찰나 들이켰다.
“돼요!”
“……돼요?”
“네!”
청초하게 웃던 꼴통이 말을 이었다.
“제 단물 다 빨아먹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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