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 그해, 물결치는 (3)(2권) (7/24)

07. 그해, 물결치는 (3)

뿌연 담배 연기가 흐리게 흩어졌다. 오늘따라 목구멍이 맵다. 버들이 고개를 위로 젖혔다. 푸르게 우거진 나뭇잎들 사이로 내리쬐는 햇볕이 꼭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거린다. 눈이 부실 정도다. 자연히 눈가가 찌푸려졌다. 가늘게 좁혀진 눈꺼풀에 버들의 눈 아래 살이 볼록하게 튀어나왔다.

요 근래의 날씨는 장마철답게 우중충하거나, 비가 내리거나 둘 중 하나로 극단적이었다. 그러니 오랜만에 맑은 날씨가 조금은 덥더라도 반갑다. 다소 세게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버들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끝이 짧아진 담배를 막 꺼뜨렸을 때다. 같이 점심 먹기로 한 정민이 아는 척을 해 왔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한 시간쯤 됐잖아.”

“그게 오래야?”

버들의 대답에 정민이 웃었다. 오전 훈련이 막 끝난 상태였다. 녹초가 되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힘이 남아돈다. 정민이 땀에 젖은 운동복 상의를 잡고 태극기처럼 펄럭거렸다. 탄탄한 복근이 바깥으로 얼핏 비쳐졌다.

“힘들어?”

가느다란 목을 한쪽으로 기울이며 버들이 물었다.

“그럼. 안 힘들겠냐?”

“난 담배 폈어.”

“그래.”

구겨진 필터가 세 개 정도가 된다.

“너 담배 늘었지?”

딱히 부정할 생각이 없는 버들이 낮게 응, 대답했다.

“줄여.”

“너나 줄여.”

“난 담배 안 피운다니까. 이래 봬도 몸 관리 철저히 해.”

“…….”

시큰둥하니 버들이 정민을 외면했다. 그 순간 흡연과 전혀 상관없이 몸 좋은 황 대표가 아른거린다. 닮고 싶다. 그렇지만 아무리 발버둥 치며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잘 알고 있다. 터무니없는 간절함은 그저 허탈할 뿐이다. 끝에 가서 실망할 바엔 아예 처음부터 접어 버리는 편이 현명하다.

“같이 갈래?”

“어딜?”

“씻으러. 탈의실.”

“뭐야. 싫어.”

“거기 안에 에어컨 있어. 시원해.”

“여기서 기다릴래.”

버들의 시선이 운동장 쪽으로 향했다. 운동하는 애들은 선후배 관계가 확실하다던데 정말인가 보다. 올해 입학한 신입생들이 선배들이 운동하느라 썼던 공과 기구들을 분주하게 움직이며 정리하기 바쁘다.

“유버들. 너 방학 때 뭐 할 거냐?”

“나 되게 바빠.”

“뭐 하느라 바빠.”

“일하기로 했거든.”

“일? 아르바이트? 어디서?”

“전에 본 적 있지? 황 대표님 밑에서.”

큰 관심을 보이던 정민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 사람? 성격 별로지?”

정민의 지적에 버들이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네가 뭔데 황 대표님 성격 별로라고 해?”

“내가 뭐긴. 네 친구지. 아무튼. 잠깐 봤는데 싸가지 없어 보이더라.”

“그때 너 황 대표님이랑 제대로 말을 해 본 것도 아니잖아.”

황 대표를 두둔하며 버들이 꿍얼거렸다. 무어라 대꾸하려던 찰나, 운동부 중 누군가가 다가왔다. 미대와 체대. 어울리지 않는 둘을 바라보는 눈빛이 노골적이다. 무언가 짓궂은 낌새를 간파한 정민이 제 동기가 건네주는 수건을 휙 낚아채 가며 손가락으로 눈을 찌르는 시늉을 했다. 고맙다고 못할망정! 돌아오는 비난에 반성하는 대신 정민이 배은망덕함의 끝을 보여 줬다. 발길질을 휙휙 해 대며 버들의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동기 녀석들을 멀리 쫓아냈다.

“빨리 씻고 와.”

“어. 잠깐만 기다려. 금방 올게.”

“응.”

정민이 돌아서다 말고 다시 버들을 바라봤다.

“나 기다리면서 더위 먹지 마라.”

“나는 원래 그런 거 안 먹어.”

“다행이네.”

“빨리 갔다 와.”

버들이 짜증을 내고서야 정민의 행동이 빨라졌다. 가만히 앉아 정민을 기다리던 버들이 벤치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이 전부 빠져나간 운동장이 직전까지 웅성거렸던 게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버들이 그 한구석을 향해 걸어갔다. 미처 챙기는 걸 깜박한 모양이다. 허리를 굽힌 버들의 손에 조그마한 공이 잡혔다. 의외로 단단해서 만질 때마다 놀란다. 야구공에 묻은 흙먼지를 버들이 툭툭 털어 냈다. 온 힘을 다해 힘껏 내던진 공이 근처에서 뚝 떨어졌다. 야속해진 버들이 그걸 말끄러미 바라봤다.

* * *

씻고 나온 황 대표가 전화가 걸려 온 핸드폰을 찾았다. 발신인을 확인한 순간 표정이 확 구겨졌다. 소희다. 내버려 두니까 새벽이건 대낮이건 가리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오고 있었다. 평소처럼 그냥 넘어가지 않고 황 대표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인사나 안부 따위 필요 없는 사이였다. 전화가 연결될지 몰랐는지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곧 소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희가 하는 말들을 황 대표는 듣고만 있었다. 물론 건성이었다. 커피를 따르고 시계를 골랐다. 완벽하게 외출 준비를 마칠 때까지 통화는 계속되었다. 급기야 흐느낌이 들려온다. 피곤한 기색으로 황 대표가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뭐 어쨌다고 울어. 같이 잘 놀았잖아.

섹스하던 때처럼 달래 주길 기대했던 걸까. 예상과 달리 단조로운 황 대표의 반응에 소희가 입을 다물면서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그대로 전화가 끊겼다. 뭐가 부서진 소리가 크게 났던 걸로 보아 아마 핸드폰을 던져 버렸을 거다. 황 대표가 낮게 웃었다. 화끈한 성격은 참 마음에 든다.

* * *

달력을 집어 든 버들이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오늘 날짜에 동그라미가 여러 번 그려져 있었다. 황 대표와 만나기로 정해 놓은 날이 참 느리게 다가왔다. 황 대표가 물어 놓았던 잇자국이 만나지 못한 나날만큼 흐려졌다. 피가 나서 작게 흉터가 진 곳은 분명 송곳니가 닿았던 자리일 거다. 버들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물들었다. 이거 진짜 꽃 같은데. 멍이 들어 색깔은 초록이지만 모양은 활짝 핀 해바라기를 닮았다.

사옥에 도착한 버들이 겨울의 대표실 문을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봤다. 텅 비어 있다. 미련 없이 돌아선 버들이 복도를 따라 걸었다. 적막함이 곳곳에 내려앉아 있다. 황 대표의 대표실과 가까워질수록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혹시 심장 뛰는 소리가 황 대표에게 들릴까 봐 걱정이 될 정도다. 노크를 하고 기다리자 들어오란 황 대표의 낮은 저음이 들려왔다. 앉으란 곳에 앉으면서도 버들의 시선이 황 대표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대표님. 잘 지내셨어요?”

겨우 꺼낸 버들의 인사를 황 대표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읽어 보고 사인하세요.”

계약서였다.

“야.”

펜을 든 버들의 손목을 황 대표가 붙잡았다. 황당한지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한 말 안 들었어요?”

“대표님이 사인하라고 해서 사인하려고요.”

“그 전에. 읽어 보라고 한 말.”

버들의 말간 얼굴이 뭐가 문제인지 전혀 모르는 것 같다.

“계약서 내용부터 확인해요.”

황 대표가 손목을 놓아주자마자 버들이 페이지를 팔랑팔랑 넘기며 사인해야 할 공간마다 빠르게 채워 나갔다. 그런 버들의 꼬락서니를 황 대표가 잠자코 지켜봤다. 점차 인상이 써졌다. 안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을 줄 알고 그렇게 사인을 막 해. 겁대가리가 없다.

계약서를 내려놓은 버들이 맞은편에 앉아 있는 황 대표를 쳐다봤다. 잘난 사람은 오늘도 역시 잘났다. 볼 때마다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캐주얼한 느낌의 데님 셔츠 차림이었다. 황 대표와 무척 잘 어울린다. 나도 저런 거 입을걸. 저거랑 비슷한 옷 많은데.

“확인하라니까 뭐 해.”

“확인 안 해도 돼요. 어차피 여기에 사인해야 황 대표님이랑 일할 수 있는 거잖아요.”

무슨 말을 더 붙여 봤자 들어 처먹지 않을 게 분명하다. 황 대표가 알아서 중요한 내용을 찾아 페이지를 넘겼다. 보수에 관련된 조항이었다. 버들의 기다란 속눈썹이 깜박거렸다. 보수고 나발이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일을 한다는 건 매 순간이 특별할 것 같다.

“근데요, 대표님.”

“응.”

“저 돈 필요 없어요.”

기가 막힌다. 황 대표가 헛바람을 내뱉었다.

“저 돈 받아도 쓸데없어요.”

재벌 집 막둥이기에 지껄일 수 있는 말이었다.

“일을 했으면,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지. 나도 일을 시켰으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게 맞고.”

점심은 드셨는지 궁금하다. 버들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들로만 가득했다. 과연 꼴통다웠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났다. 한 시간 내내 미약한 두통을 느꼈던 황 대표가 반대쪽으로 다리를 꼬았다. 마치 창과 방패 같았다. 돈을 주겠다는 쪽과 돈을 받지 않겠단 쪽이 팽팽하게 맞섰다. 계약도 말이 통해야지만 진척이 되는 거였다. 사회 경험이 전혀 없는 어린애한테 조항을 하나하나 풀어 줘야 하는 게 성질을 끌어 모았다.

“이해했어?”

버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가 봤을 땐 이해 못 했다. 한숨이 길게 흐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담 비서를 퇴근시키지 말고 옆에 앉혀 놓을 것을 그랬다.

“돈 말고 필요한 게 뭐야.”

“……네?”

“돈은 필요 없다면서.”

돈이 필요 없단 놈에게 달리 뭐가 필요하겠느냐마는.

“대표님 있잖아요.”

“안 돼.”

황 대표가 버들의 말을 단호히 잘랐다.

“……왜요?”

“너 이상한 거 말하려고 그런 거잖아.”

“이상한 거 아니에요.”

“그럼.”

저랑 어디에 가요. 저랑 어떤 걸 보러 가요. 저랑 뭐 먹으러 가요. 이상한 건 아니었지만 황 대표의 입장에선 들으나 마나 한 말들이었다. 무슨 이딴 식으로 협상을 하자는 거야. 이익과 전혀 동떨어진 헛소리를 조잘거리는 버들의 도톰한 아랫입술이 쉬지 않는다.

“대표님. 언제 한가하세요?”

버들에게 닿아 있는 황 대표의 눈빛이 무척 따분했다. 주눅이 드는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다가오려는 애탄 버들의 움직임이 빤히 전해졌다. 멍청한 게 자존심까지 없다 보니까 처참하다. 황 대표가 계약서를 찢어 버렸다. 어깨를 움찔거린 버들의 앞에 새롭게 출력한 계약서를 내려놓았다.

“읽어.”

바깥으로 밤이 펼쳐졌다. 돈 말고 가지고 싶은 걸 버들이 겨우 떠올려 냈다. 다섯 명의 형들에게 돌아가면서 졸라 보았지만 마치 짠 것처럼 다들 “안 돼!” 하고 거절했던 걸 황 대표는 선뜻 고개를 끄덕여 줬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버들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황 대표의 눈치를 살폈다.

아까부터 겨울에게서 걸려 오고 있는 전화를 버들은 모르는 척하는 중이었다. 진동으로 설정했지만 주변이 워낙 조용해 전화가 걸려 왔단 걸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던 버들의 표정이 핸드폰에서 신호가 끊기면서 밝아졌다. 조용한 순간은 얼마 유지되지 못했다. 황 대표의 핸드폰에 전화가 걸려 온 것에 버들의 속이 다시 말라 갔다. 액정에는 겨울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황 대표와 버들의 눈빛이 얼핏 스쳤다.

“받지 말아요.”

버들의 목소리에서 조바심이 느껴졌다.

“아무한테도 말 안 하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버들이 황 대표에게 갖고 싶다고 말한 건 ‘작업실’이었고, 이어 붙인 조건은 ‘비밀’이었다. 분명 겨울이 알았다간 전부 없던 일로 뒤집어 놓을 게 분명했다.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황 대표가 22층 버튼을 눌렀다. 불안하다 못해 아예 바짝 쪼그라들었던 버들의 마음이 핸드폰 전원을 꺼 버린 황 대표의 행동에 겨우 진정됐다. 위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속도가 빠르다.

“대표님. 운동하세요?”

“…….”

“아니면 타고나신 거예요?”

“…….”

아무 말도 없이 잠잠한 황 대표의 넓은 어깨를 버들이 빤히 바라봤다. 불투명한 엘리베이터 문으로 둘의 모습이 어릿하게 비춰지고 있었다.

“주로 수영해요.”

황 대표의 대답은 한참 뒤에 들려왔다. 버들의 눈이 ‘존경심’으로 사정없이 반짝거렸다. 커다란 골격과 꽉 짜인 근육들의 비결은 수영이었구나. 감탄이 나온다. 버들이 자기 몸과 황 대표의 몸을 비교해 봤다.

“저도 수영할까요? 수영하면 황 대표님 몸처럼…….”

문에 비춘 버들의 실루엣을 황 대표가 느릿하게 훑어봤다.

“넌 수영해도 안 돼.”

제 말을 황 대표가 싹둑 잘라 버린 것에 버들의 눈썹이 처졌다. 꼭 그렇게 정확히 짚어 주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냥 그러려니 대충 흘려들으시지. 다른 건 다 대충 흘려들으시면서.

황 대표가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자 버들도 핸드폰을 꺼냈다. 문자를 확인하는 황 대표 옆에서 버들은 까만 액정에 반사되는 자기 얼굴을 멀뚱멀뚱 바라봤다. 황 대표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버들도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황 대표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자 버들도 머리를 쓸어 넘겼다. 버들은 황 대표 흉내쟁이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황 대표가 비밀번호를 눌렀다. 여섯 자리의 비밀번호를 딱 한 번 말해 주었지만 버들은 금세 외웠다.

“대표님. 진짜 이거 저 가져도 돼요? 주셔도 되는 거예요?”

생각보다 좋은 작업실에 버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딱 1인에 최적화된 인테리어다.

“너 계약서 안 읽었지.”

가지라고 준 게 아니라 계약 기간까지 제공해 주는 거였다. 자기 상황이 불리해지자 버들이 야경이 멋지다느니 딴소리를 꺼냈다. 황 대표가 버들을 지나쳐 오피스텔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작업실을 갖고 싶다는 버들의 계약 조건은 황 대표에게 어려울 것도 없었다. 어차피 충동구매로 사 놓고 놀리는 집들이 많았다. 작업의 진행 속도와 결과물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할 것 같으니 자신이 편히 오고 가기 위해선 현재 거처로 사용하고 있는 집과 작업실이 가까워야 했다. 그렇게 고르다 보니 여기였다.

버들의 작업실로 내주면서 오피스텔엔 오랜만에 방문하게 됐다. 낡은 가죽 수첩을 뜻밖에 되찾은 것처럼 불필요한 상자들의 자물쇠를 열어 본 기분이 든다. 오피스텔은 따로 관리인을 써서 관리를 하고 있던 터라 사람 없이 비어 있던 기간이 티가 나지 않는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다. 넝쿨처럼 엉켜드는 생각에도 무감한 표정인 황 대표가 소파에 앉았다. 주방에 들어가 서랍을 열어 보기 바쁜 버들이 정면으로 보인다. 잔뜩 들떠서 웃는 얼굴이 해맑다. 자신에게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더니 결과만 놓고 봤을 때 버들은 껌값으로 돈도 받고, 부동산도 뜯어냈다.

“황 대표님. 여기 대표님이랑 저만 알고 있는 거예요?”

서랍을 열어 둔 채 버들이 황 대표가 있는 곳으로 쪼르르 다가갔다.

“자주 놀러 오세요. 제가 맛있는 거 많이 해 드릴게요!”

주인 행세하는 게 고깝다.

“아무것도 건드리지 마. 그냥 여기서 작업만 해.”

깜박거리는 속눈썹 뒤로 버들의 큰 눈이 평온하다. 꼭 울 것 같은 상황이 몇 번이나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버들은 울지 않고 넘겼다. 어쩌면 그러한 점이 가학성을 자극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네가 어디까지 버텨 내나 보자, 하는.

하늘거리는 흰 티셔츠가 보기만 해도 얇다. 근처까지 다가온 버들의 손목을 붙잡아 황 대표가 잡아당겼다. 그대로 끌려간 버들이 소파에 비스듬히 눕혀졌다. 몸 위로 올라온 황 대표가 형광등을 가려 시야가 순간 컴컴했다. 달싹거렸던 버들의 입술이 가만히 다물렸다. 한동안 서로 묵묵했다. 갑작스레 잡아당겨진 통에 버들의 옷자락이 등 쪽으로 말려 올라갔다. 맨살과 소파의 가죽이 비벼졌다. 손을 뒤로 꺾어 옷을 내리려던 버들의 팔을 황 대표가 잡았다.

“넌 죽을 때까지 평생 게이 새끼겠다.”

나지막하게 황 대표가 입을 열었다.

“안 설 거니까.”

몽정도 하고 자위도 한 적 있다. 버들의 그런 비밀스러운 사생활을 알 리 없는 황 대표는 대답이 없는 걸 긍정으로 알았는지 비릿하게 조소했다. 버들의 턱 아래를 살짝 쓰다듬었다. 멍청해서 상처도 안 받을 것 같고. 앞뒤 안 재고 얘가 먼저 달려들었으니 막 대해도 되겠네. 황 대표가 웃었다. 황 대표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던 버들의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황 대표님이 웃어 주니까 너무 좋다. 버들이 따라 웃었다. 눈꼬리가 순하게 접혔다.

버들의 팔이 드러나게 소매를 걷은 황 대표가 일부러 물었던 곳을 또 물었다. 이를 세우고 피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힘을 강하게 줬다. 시키는 건 잘한다. 소리 듣기 싫다고 했더니 꽁꽁 입을 다문 채 절대 내지 않는다. 그러한 버들의 노력이 징그러우면서…… 역시 편하다.

어떻게 할까. 스트레스 받을 때나 심심할 때 가지고 놀까? 단물 다 빨아먹고 버리는 것도 참 쉬울 거다. 시키는 거 잘하니까 달라붙지 말라고 하면 달라붙지 않겠지? 아니면 속이든가. 실컷 갖고 놀다가 자장면이랑 꼬까옷 사 주고 시장 바닥에 데려다 놓고 버리는 거 아니란 식으로 말을 해 주면 철석같이 믿고 그런 줄 알 거다.

바짝 힘이 들어간 버들의 몸이 미약하게 꿈틀거렸다.

“진짜 안 아파?”

빨갛게 된 얼굴로 버들이 떨면서 대답했다.

“안 아파요. 더 세게 물으셔도 돼요.”

말랑거리는 버들의 연약한 살에 진한 울혈이 몇 개씩이나 남겨졌다. 황 대표가 놓아주자 몸을 일으킨 버들이 팔소매를 씩씩하게 내렸다.

“난 너처럼 게이 새끼로 태어났으면 못 살았을 거야. 너 같은 취급당할 바엔 쪽팔려서 죽었을 수도 있겠다.”

문을 닫고 나가 버린 황 대표의 뒷모습을 버들이 멀거니 주시했다. 황 대표가 했던 말이 마음을 비집고 돌처럼 박혔다. 정말 딱하단 황 대표의 어조에 볼이 저릿했다.

* * *

“그러니까 왜 전화를 안 받아!”

황 대표와 유 대표가 나란히 스캔들에 연루됐다. 유 대표가 역정을 냈다. 띄엄띄엄 앉아 있던 비서와 실장들이 움찔거렸다. 표정 변화 없이 한쪽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황 대표가 느슨한 태도로 소매를 살짝 걷어 올렸다.

유 대표에게 언제 전화가 걸려 왔었더라. 아마도 버들이 갖고 싶다던 작업실을 제공해 주기 위해 갔었던 오피스텔 엘리베이터 안에서였던 것 같다. 스캔들 같은 중대한 사안으로 걸려 온 전화인 줄 몰랐다. 단순히 연락 없이 평소보다 늦게 귀가하는 제 새끼를 찾는 전화일 줄 알았다. 전화받지 말아 달라며, 작업실 생긴 거 절대 형한테 이야기하지 말아 달라며 부탁하는 버들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어 아예 핸드폰 전원을 꺼 버린 게 실수였다. 한숨이 텁텁하게 목구멍을 맴돈다.

황 대표 곁으로 다가온 실장이 태블릿을 건넸다. 환하게 밝힌 화면에 뜬 기사 내용이야 어차피 지어낸 말일 터니 사진부터 확인했다. 사진 속 배경은 영화 촬영장 근처였다. 밤이라 어두웠지만 사진에 찍힌 황 대표와 유 대표를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각자의 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었다. 실루엣에서 여유로움이 전해진다. 그리고 연달아 뜬 사진에는 영화배우 소희가 찍혀 있었다. 유행을 선동한 고유의 헤어스타일이 화려하다. 기사 마지막 줄에는 세 사람이 현장에 같이 있단 걸 들키지 않기 위해 거리 유지에 무던히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였다고 나와 있었다.

“너희 둘 뭐야. 진짜 사귀는 거 아니지?”

유 대표가 무심히 던진 물음에 황 대표가 눈가를 찌푸렸다.

“말이 돼?”

“현장에 소희 부른 적도 없고?”

“내 성격 몰라?”

알지. 너무나. 잘.

“근데 이런 사진이 왜 찍힌 거야.”

사진은 더 있었다. 사진만으로 스토리가 연상된다. 아파트에 먼저 황 대표가 들어가면 근처에서 차를 세우고 기다리고 있던 소희가 따라 들어가고. 뒤늦게 나타난 유 대표 역시 그 아파트로 향하는. 사진 속 아파트는 황 대표 집이었다.

황 대표 앞으로 유 대표가 다른 사진을 건넸다. 유 대표와 황 대표가 관계자 미팅차 들렀던 호텔에서도 소희의 사진이 찍혀 있었다. 전부 작위적이었다. 지나친 허구에 오히려 황 대표의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그래서 스캔들 대상이 너라는 거야, 나라는 거야.”

“우리 둘 다야. 쓰레기란 말이 괜히 나왔겠어?”

“쓰레기는 너야, 나야?”

“우리 둘 다니까 쓰레기라고 하는 거지. 새끼야.”

여자 한 명에 남자 둘이라. 황 대표가 다시 사진을 바라봤다. 미간이 지끈거린다. 다른 사람들 눈을 피해 두 대표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명성 높은 여배우라니. 자극적인 관계성에 불이 확 붙어 온갖 소설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소희의 소속사에선 마땅한 대응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그저 당사자를 통해 진위 여부를 확인하겠단 한 줄이 끝이다. 진위 여부 뭘 확인하겠단 거야? 정말 남자 둘이랑 놀아났냐고? 그게 사실이건 아니건 지금 명예가 사정없이 훼손되고 있는데 법적 대응부터 하는 게 맞는 거 아니야?

“다음 거 넘겨 봐.”

유 대표의 말에 황 대표가 화면을 넘겼다. 그리고 그대로 할 말을 잃었다.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담요로 꽁꽁 싸맨 소희가 출입한 건물엔 유독 한 병원의 간판이 크게 보였다. 태블릿을 테이블 위로 던지듯 내려놓은 황 대표가 관자놀이를 손으로 짚었다. 얼마간 싸한 정적이 찾아왔다.

“풀었어?”

“풀었겠어?”

유 대표가 흘린 의심에 황 대표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두 남자 모두 가는 여자 안 붙잡고 오는 여자 안 내쳤다. 당연히 정관 수술을 한 상태였다. 정관 수술을 한 상태에서도 피임 도구는 꼭 사용했다. 상대방을 위한 매너 때문에. 혹은 일회성 만남에 혹시나 헛된 희망을 줘 피곤해질까 봐.

“내가 뭐랬어? 되도록 배우들이랑은 자지 말라니까?”

와중에 잔소리를 퍼부으며 유 대표가 차가운 물을 들이켰다. 생각에 잠겨 있던 황 대표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며칠 전 소희에게 받은 전화로 의중이 무엇인지 손쉽게 간파가 됐다. 뻔했다. 명문 집안의 외동딸이기도 하면서 아쉬운 게 일절 없는 여배우가 인지도를 손해 보게 될지도 모를 스캔들을 내야 했던 이유는 딱 하나였다.

협상이다. 배역을 내놓으라는.

저에게 있지도 않은 애정을 쥐어짜 내려 질척거리는 게 아니라 커리어를 위해 내 작품을 욕심낸다는 점에서 거침이 없다. 배역으로 소희를 캐스팅하게 되면 그간 현장에서 스캔들의 증거로 찍힌 사진들은 ‘촬영차 만남’이란 타당한 이유를 갖게 된다. 스캔들이 사실이 아니라고 판명이 난 뒤에 소희가 여성 전용 병원을 갔던 건 건강을 목적으로 한 검진이나 진료 때문이었다고 해명을 갖다 붙이면 쉽게 해소가 가능하다.

“황 대표. 어떻게 할 거야?”

“집에선 뭐래? 연락 들어온 거 있어?”

“있어도 전부 무시하고 있지.”

집에선 불호령이 떨어졌다.

“황 의원님은…….”

“나야 뭐. 어차피 없는 자식이나 다름없으니까.”

유 대표가 꺼내려는 말을 황 대표가 막았다.

“어떻게 할 건지 결정이나 내라.”

수습이 급했다. 소속사로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배우들을 물밑에서 섭외하는 중이었다. 여배우와 스캔들이 터진 두 대표의 이미지는 난봉꾼으로 찍혀 분명 사업에 걸림돌이 될 게 뻔했다. 현재 촬영에 들어간 영화도 마찬가지다. 현장으로 기자들이 몰려들게 된다면 곤란하다. 침묵을 유지하던 황 대표가 시나리오 속 누군가의 이름을 말했다. 유 대표가 터무니없단 듯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희야. 너 같으면 일개 엑스트라 역할을 허락하겠어?”

“일개 엑스트라여도 비중이 다르잖아. 이거 없이 내용 전개가 돼?”

그 말에 동의한 유 대표가 턱을 까닥이며 지시하자 유능한 실장들이 밖으로 빠져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대표가 보낸 협상의 뜻에 소희의 소속사가 답을 보내왔다. 압축된 파일을 풀자 사진이 뭉텅이로 나왔다. 황 대표가 가는 곳에 소희가 있는 식이다. 둘이 나란히 붙어 있는 장면은 없었지만 스캔들이 터진 상태이다 보니 누구라도 오해하게 만드는 사진들이었다.

“여기에 네 사진밖에 없다.”

유 대표가 황 대표를 툭 쳤다. 황 대표로 스캔들의 포커스가 집중됐다.

스캔들에 반박하지 않았다. 반박해 봤자 어차피 불신만 키우는 꼴이다. 먼저 불을 지른 소희의 소속사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여배우의 위상이 있으니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동안 더는 사진을 찍혀선 안 되었다. 가는 곳만 가고 먹는 것만 먹는 황 대표의 동선은 훤히 노출된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며칠만 시골에 내려가 있어라.”

유 대표가 제안했다. 그런 유 대표의 제안에 고용인들이 숨을 죽였다. 아무리 단 며칠이라도 심기가 매우 불편한 황 대표를, 그것도 외딴곳에서 모셔야 한다니 대놓고 기피할 수밖에 없었다. 짜증이 난 채로 혼자 가겠단 황 대표의 앞을 유 대표가 가로막았다.

“길도 모르면서 어딜 혼자 가겠다고. 그러다 또 사진 찍히면 어쩌자는 건데?”

아무리 성격이 더러워도 내 동생이니 함부로 대하진 못하겠지. 버들이도 황 대표가 착하다고, 자기한테 잘해 준다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니까 걱정할 건 없을 거다. 고민을 끝낸 유 대표가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는 버들을 잡아다가 불쑥 황 대표의 차에 태웠다.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한 버들이 눈가를 비볐다.

“버들아!”

창문으로 버들의 얼굴이 쏙 나왔다.

“형이 열 밤 자고 데리러 갈게!”

정확하지도 않은 약속을 하며 유 대표가 황 대표의 차와 함께 멀어지는 버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황 대표가 운전하는 차가 험난한 길을 따라 덜컹거린다. 스승님 댁으로 가는 중이란 걸 버들이 알아차렸다. 슬쩍 바라본 황 대표는 어마어마하게 화가 난 상태였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버들이 경로를 이탈한 황 대표에게 방향을 알려 줬다. 밥 먹으러 오라고 해서 회사에 간 건데 이게 무슨 일이지? 물기로 그렁그렁한 눈을 깜박이며 버들이 힘없이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아이고. 버들아!”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린 버들을 노부인이 얼싸안으며 반겨 줬다. 전에 왔었을 때처럼 황 대표는 노인이 뿌린 소금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썼다. 동그란 바가지를 휙 던진 노인의 얼굴은 후련해 보인다. 부인을 따라 노인이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마당엔 버들과 황 대표 둘만 남겨졌다. 쭈뼛거리며 버들이 바가지를 주워 왔다.

“대표님. 괜찮으세요?”

작게 물은 버들의 물음에 황 대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황 대표 주위를 쩔쩔매며 버들이 맴돌았다. 고운 황 대표의 속눈썹에 굵은 소금 알맹이가 매달려 있다. 조심스레 버들이 팔을 뻗었다. 딱 그것만 털어 주려고 했을 뿐인데 닿기도 전에 버들의 손등을 황 대표가 내쳤다. 잘못한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꼭 야반도주한 것 같은 모양새에 황 대표는 불만이 컸다. 촬영 중인 영화 때문에 외국으로도 못 가고 이런 촌구석에 박혀 며칠을 보내야 한다니. 거기다가 혹까지 달고선.

버들은 들고 있던 바가지를 더 품에 꼭 껴안았다. 황 대표의 스캔들을 뒤늦게 알고 슬퍼하던 버들의 눈빛이 주어진 현실에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겨울이 형이 열흘 뒤에 데리러 온다고 했었지? 그럼 여기서 황 대표님이랑 열흘 동안 같이 있는 건가? 같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 황 대표님이랑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아주, 아주, 아주, 아주,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황 대표의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가는 버들의 뒷모습이 기뻐 보인다.

“대표님. 오늘은 침대 꼭 황 대표님이 쓰세요.”

침대 시트를 팡팡 두드리는 버들의 손이 꾀죄죄했다.

“대표님. 배고프시죠?”

“…….”

“건너가서 밥 먹을까요?”

“…….”

“아직 배 안 고프세요?”

“…….”

“아. 운전하느라 피곤하시겠어요.”

“…….”

“그럼 제가요. ……안마해 드릴까요?”

“…….”

“저 안마 잘해요.”

“…….”

“대표님. 오늘은 비가 안 내려서 다행이에요.”

달고 온 혹이 매우 시끄러워 황 대표는 욕실로 피해 버렸다.

침대를 나보고 쓰라고? 씻고 나온 황 대표가 헛바람을 켰다. 주변을 울리는 나직한 버들의 숨소리가 안정적이다. 침대에 앉아 황 대표를 기다리던 버들이 그만 잠들어 버렸다. 한쪽 팔을 베고 가로로 누운 자세가 참 불편해 보인다. 사소한 모든 것들이 현재, 황 대표의 심기를 거슬렀다. 불안하다 싶더니 버들이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무심히 외면한 황 대표가 밖으로 나가 차로 향했다. 시트를 뒤로 젖혀 이마에 팔을 올리는 모습이 매우 피곤해 보인다. 어딘가에서 정체 모를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유독 밤이 길다.

“아침 다 차려 놨는데 먹고 가지.”

“나중에 와서 먹을게요.”

노인 내외에게 꾸벅꾸벅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버들이 얼른 황 대표의 차에 올라탔다. 머리를 말릴 여유를 주지 않은 탓에 감은 지 얼마 안 된 버들의 머리카락이 축축했다. 그래도 불만이 없는지 물기가 스민 버들의 하얀 얼굴은 그저 순하기만 하다.

버들이 도톰한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틈이 생기는 대로 황 대표를 훔쳐보는 중이었다. 어제는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겠다. 황 대표님이 침대 쓰셨겠지? 안녕히 주무셨겠지? 잠꼬대로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 바람에 어쩌다 바닥에서 자게 된 걸 모르는 버들이 몇 번이나 가슴을 쓸어내렸다.

황 대표의 차는 노인의 집과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 멈췄다. 서울을 떠나기 전 직원을 시켜 미리 통으로 빌려 놓았던 펜션이었다. 어차피 시설이야 어딜 가도 고만고만하니 허접할 것 같아 개중에서 가장 신축 건물을 찾아냈다. 과분할 만큼 웃돈을 줬기 때문에 주인이 모습을 보이며 귀찮게 구는 일은 전혀 없을 거다.

시골에 도착해서 바로 펜션으로 오지 않고 노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던 건 청소가 덜 되었기 때문이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마당 구석에 자리한 텃밭을 구경하던 버들이 황 대표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펜션 내부를 살피는 황 대표의 눈초리가 깐깐하다. 같이 일한 지 오래된 전담 비서가 알아서 챙겼을 제 옷과 필요한 물건들이 각도 맞춰 잘 정리되어 있다.

욕조는 물론 바닥 타일마저 얼마나 잘 닦였는지 번쩍번쩍하다. 평소 쓰는 목욕 용품들이 모두 새것으로 욕실 벽을 타고 일렬로 나열되어 있다. 냉장고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바로 꺼내 구워 먹으면 되는 스테이크가 밀봉되어 차곡차곡 채워져 있다. 에어컨과 공기 청정기를 차례로 작동시키는 황 대표의 눈빛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호텔에 비하면 크기는 당연히 작았지만 그래도 편의성은 고루 갖춰져 있다.

“대표님. 우리 여기서 살아요?”

……우리?

복층으로 되어 있어서 그냥 한 방이나 다름없었다. 황 대표의 곁으로 버들이 주춤거리며 다가갔다. 어제부터 계속 말을 붙이고 있기는 하나 황 대표가 대답해 주지 않고 있다. 그래도 버들은 꿋꿋했다. 그때였다.

“야.”

황 대표의 낮은 저음에 버들이 얼굴을 붉혔다.

“너 나가라.”

황 대표에게 쫓겨난 버들이 졸래졸래 노인의 집으로 향했다. 조각을 하다가 해가 지자 황 대표가 있는 펜션으로 돌아왔다. 비스듬하게 선 황 대표가 버들을 무심히 내려다봤다.

“너 잘 데 없어.”

“저 바닥에서도 잘 자요.”

“네 잘나신 스승님 집에 가서 자. 필요할 때 부를 거니까.”

“그 방 오늘부터 메주 말리고 있어요.”

버들의 말끝이 바닥을 기었다.

“바닥에서 잘게요.”

황 대표가 찰나 계산기를 튕겼다. 확실히 외딴곳이라 어딜 잠깐 나간다고 하더라도 길을 안내해 줄 단물이 필요했다. 이어지고 있는 침묵이 버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메주 냄새를 뒤집어쓸 바엔 확실히 등과 허리가 아프더라도 바닥이 나았다. 또 황 대표님과 함께 있고 싶었다.

“거슬리게 하지 마.”

무심한 어조로 흘러나온 황 대표의 말은 곧 허락이었다. 신발을 벗으며 버들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저 대표님 거슬리게 안 할게요! 거슬리게 안 할 자신 있어요!”

삐뚤게 벗겨진 버들의 신발 자체부터 거슬렸다. 황 대표가 복층으로 올라갔다. 버들은 구석에 가방을 내려놓고선 얌전히 앉아 있었다. 시간이 유유히 지나갔다. 땅거미가 진 하늘은 어느덧 컴컴해졌다. 하품이 나오는 걸 버들이 손으로 가렸다. 복층에서 뭘 하는지 황 대표가 내려오지 않는다. 주무시나? 자리에서 일어난 버들이 계단 밑에 섰다.

“대표님. 저 먼저 씻어도 돼요?”

누워 있던 황 대표가 버들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독립적인 성격이라 남과 뭘 함께 공유한다는 것 자체가 신경을 건드린다. 저게 유 대표의 막냇동생이 아니었다면, 조각과 그림이 내 취향에서 벗어났다면, 살아가면서 전혀 부딪힐 경우가 없었을 거다. 황 대표가 짤막한 한숨을 터트렸다. 싫은 건 싫은 거고 씻으란 말 말고 다른 방도가 없다.

“씻어.”

머리 위로 들려온 황 대표의 목소리에 버들의 커다란 눈이 깜박거렸다.

“감사합니다. 그런데요, 황 대표님…….”

“왜.”

“부탁이 있는데요.”

황 대표의 인상이 짙어졌다.

“빌려주시면 갚을 건데요.”

“뭘 빌려 달라는 건데.”

“갈아입을 옷이요. 저 진짜 갚을 거예요.”

“…….”

버들이 문을 열고 욕실에서 나오자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씻고 나온 버들의 어깨를 황 대표가 밀쳤다. 체격이나 힘이나 월등하게 차이가 나는 만큼 버들이 두어 발자국 물러나면서 수건을 놓쳤다. 쾅. 세게 닫힌 욕실 문이 황 대표의 성격만큼이나 심술맞다. 버들이 코를 훌쩍였다. 가족과 떨어진 밤, 어쩐지 서럽다.

황 대표가 각도가 틀어진 욕실 용품을 곧바로 정리했다. 저가 쓰는 진동 칫솔 옆에 노인의 집에서 받아 왔을 일회용 칫솔이 꽂혀 있는 걸 발견하고 어이가 없어졌다. 버들의 칫솔을 황 대표가 바닥으로 내던져 버렸다.

“겨울이 형. 뭐 하고 있어?”

-이제 막 퇴근했어. 너 밥은?

“먹었지. 형은?”

-형도 먹었어.

“유 회장님한테 오늘도 혼났어?”

-유 이사님한테.

“큰형한테? 돌아가면서 혼나?”

-안 자고 뭐 해?

자신의 질문에 말을 돌리는 겨울로 인해 버들의 입술이 톡 튀어나왔다.

“이제 잘 거야.”

-이불 꼭 덮고 자라.

“형. 진짜 열흘 뒤에 데리러 올 거지?”

-그래. 약속했잖아. 형이 어떤 남자야? 약속 꼭 지키는 거 알지?

버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황 대표는?

“씻으셔.”

-괴롭히면 형한테 일러.

“안 괴롭혀…….”

-좋겠네. 내 새끼.

“뭐가?”

-너 좋아하는 황 대표랑 같이 있으니까.

“그렇기는 한데…….”

-대답이 마음에 안 든다. 형이랑 떨어져 있어서 슬프다고 해야지.

“끊어.”

끊으라는 전화는 안 끊고 황 대표랑 자기가 물에 빠지면 누구부터 구할 거냐고 겨울이 닦달했다. 대답하지 않고 버들이 통화를 종료했다. 황 대표의 근사한 골격이 수영으로 만들어졌단 걸 이제는 안다. 겨울이 형이랑 내가 물에 빠지면 수영 잘하는 황 대표님은 누구부터 구해 줄까?

곰곰이 고민해 보던 버들이 곧 의미 없단 걸 깨닫고선 고개를 가로저었다. 겨울이 형도 수영을 할 줄 알았다. 어느 누구에게도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선 물에도 못 뜨는 나부터가 물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아. 맞다. 옷 보내 달라고 해야 하는데.”

황 대표가 갈아입을 옷을 빌려주지 않았다. 시무룩하니 주저앉아 있던 버들이 청바지를 무릎까지 오게끔 돌돌 걷었다. 달칵. 문이 열렸다. 진하게 샴푸 향기가 풍긴다. 황 대표와 단둘이 있단 게 자각될 때마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런 버들과 달리 황 대표는 태연했다. 버들을 아예 없는 취급 하는 중이었다. 냉장고 문을 열어 황 대표가 시원한 물을 꺼냈다.

“대표님. 저도 물 마셔도 돼요?”

목소리가 너무 작게 나왔다. ……나도 목마른데. 버들이 일어났다.

“……황 대표님.”

“거슬리게 하지 마.”

신경질적인 황 대표의 시선에 버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천천히 뒤돌아 멀어지는 버들을 황 대표가 느릿하게 훑었다. 목선을 시작으로 어깨와 옆구리, 그 밑의 골반, 발목까지. 난데없이 황 대표의 눈가가 확 찌푸려졌다. 버들의 발뒤꿈치가 보얗다. 바지를 걷어 올린 통에 드러난 종아리가 일자로 곱게 뻗어 있다. 사내놈이 털 하나 없이 미끈하다. 피부가 희니 복사뼈가 앙증맞아 보인다.

곱게 자란 재벌가 막둥이가 바닥을 피해 은근슬쩍 소파에 앉았다. 하필 에어컨 바람이 직통으로 쏟아지는 자리다.

“너 일어나.”

소파에도 못 앉게 하고. 어차피 에어컨 바람 때문에 오래 앉아 있을 생각도 없었는데. 겨울이 형이 너무나 보고 싶다.

“저기서 아무거나 골라서 갈아입어.”

“……진짜요?”

버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옷장을 열어 황 대표의 옷을 구경하는 버들의 표정이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밝다. 그러더니 힐긋 황 대표의 눈치를 살피기도 했다.

……새로 사 놓으면 되니까. 훔치는 거 아니야. 잠시 빌리는 거지. 버들이 주머니에 황 대표의 새 속옷을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최종적으로 고른 옷은 전에 보았던 황 대표의 데님 셔츠였다. 목 끝까지 단추를 채웠다. 품이 맞지 않아 꼭 포대 자루를 걸친 것처럼 꼴이 형편없다.

“대표님. 깨끗하게 빨아서…….”

“갚지 마.”

“이거 저 가져도 돼요?”

버리란 황 대표의 뒷말은 버들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바지는?”

“괜찮아요.”

욕실에 들어간 버들이 훔친 황 대표의 속옷을 꺼내 입었다. 같이 들고 온 황 대표의 바지가 크다. 어쩔 수 없이 본인 바지로 도로 갈아입었다. 욕실에서 나오자 황 대표가 버들에게 물병을 건네줬다. 갑자기 왜 이렇게 잘해 주시지? 속눈썹을 깜박거리며 잠시 의심을 하던 버들이 얼른 마른 목을 축였다.

“바지 그거 입고 자려면 불편할 것 같은데.”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 원래 청바지 입고 잘 자요.”

비스듬히 고개를 꺾어 황 대표가 버들을 응시했다. 셔츠 길이가 버들의 엉덩이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어차피 똑같은 거 달린 사내새끼인데 뭐 거칠게 있나 싶다.

“벗어 봐.”

“……네?”

또렷하게 황 대표가 말했다.

“벗어 보라고.”

속옷 훔친 거 들킨 거 아냐?

“한 번만 더 말하면, 같은 말 세 번 하는 거야.”

“대표님. 있잖아요.”

“벗어.”

버들이 딱 버클만 풀었을 뿐이다. 못 벗겠다. 새빨개진 얼굴로 다리를 동동 구르는 버들에게 황 대표가 성큼성큼 다가갔다. 버들의 손목을 붙잡아 식탁에 돌려 눕혔다. 납작하게 엎드린 버들이 버둥거렸다. 물기에 들러붙은 바지를 벗기는 게 쉽지 않은지 황 대표의 손길이 거칠었다. 팔을 뒤로 두른 버들이 셔츠를 어떻게든 더 내리려고 노력했다. 황 대표의 사이즈라 속옷이 컸다. 고정이 되지 않았다. 딱 달라붙지 않고 헐렁거리는 속옷이 엉덩이까지 드러낼까 무섭다. 황 대표가 양 손목을 포박해 버들의 허리에 붙였다.

……다 망했어. 바지가 벗겨지면서 낙담한 버들이 이마를 차가운 식탁 위에 붙였다.

바깥에서 매미가 울었다.

버들의 맨다리에 황 대표의 눈빛이 깊어졌다. 저절로 목울대가 일렁거렸다. 손가락은 더러운데 버들의 발가락은 빨아도 될 정도로 투명해 보인다. 언제부터인가 버들이 눈앞에 보이면 가만히 못 두겠다. 싫으니까. 보얀 버들의 발뒤꿈치에 황 대표의 손끝이 닿았다. 예고치 못한 접촉에 버들이 숨을 급하게 들이켰다. 종아리를 만지자 얼마 붙어 있지 않은 살이 말랑거린다. 주무르는 대로 버들의 피부에 자국이 새겨졌다. 버들이 다리를 꼬려고 하는 걸 황 대표가 방해했다. 보드랍고 여린 버들의 피부를 보고 있자니 턱 전체로 뻣뻣하게 힘이 들어갔다.

쿵, 소리에 황 대표가 눈을 떴다. 여름이라 해가 일찍 떠 시야가 밝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굴러다니던 버들이 벽에 부딪힌 모양이었다. 목부터 어깨까지 뻐근하다. 근처에 수영장이 있으려나. 당연히 없을 거다. 낮게 욕을 내뱉으며 계단을 내려가는 황 대표의 발에 뭐가 밟혔다. 아침부터 짜증나게. 버들이 빨아서 계단에 널어놓은 양말과 천 하나가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졌다. 비누로 빨았나 보다. 양말과 천에선 비누 향이 풍겼다. 황 대표의 시선이 양말을 지나쳐 다른 천에서 오래 머물렀다. 뭔가 싶었다. 집어 들고 보니 팬티다.

……엄청 작다.

비웃음 뒤에 황 대표가 짤막한 한숨을 터트렸다. 속옷을 빨았다는 건 속옷을 안 입었단 뜻인가? 어제 버들의 바지를 직접 벗겨 놓고도 모르겠다. 욕실을 향하던 황 대표의 걸음이 방향을 틀어 버들에게로 향했다. 몸을 낮춰 버들이 입고 있는 제 셔츠를 들추자 예상과 달리 속옷이 보였다. 브랜드를 통해 그게 자기 속옷이란 걸 알아차린 황 대표의 인상이 구겨졌다.

헐렁거리는 틈 사이로 버들의 연한 살덩이가 비쳤다. 털이 없어 노출되는 범위가 그대로 무방비하다. 속옷 사이즈가 커서 굳이 잡아 내릴 필요도 없겠다. 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려는데 낯선 간지러움 때문인지 버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갑자기 마주친 시선에 놀랐는지 마른 몸이 움찔 튀었다.

“대표님. 뭐 하세요?”

가느다란 버들의 목소리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보려고.”

“……네?”

“본다고.”

“어디를요?”

“안에.”

있는 힘껏 버들이 황 대표를 밀치고 일어났다.

“안 돼요!”

욕실로 숨으러 들어가는 버들의 뒷모습을 보며 황 대표가 나른히 입술을 핥았다. 버들의 종아리에 시퍼런 이빨 자국이 나 있었다. ……어깨랑 목도 물어도 되겠다. 어차피 둘인데. 자국 난다고 누가 보겠어.

스트레스가 조금은 해소된 기분이다.

* * *

쪼그리고 앉아 있던 버들이 무슨 생각에선지 벌떡 일어났다. 손에 들고 있던 망치와 끌까지 미련 없이 내려놨다. 그러고는 턱을 잡아당겨 제 모습을 살폈다. 앞치마가 하필 검정색뿐이었다. 조각하면서 휘날린 하얀 돌가루들이 들러붙은 게 눈에 잘 띈다. 황 대표와 함께하는 시골 생활에서 자연스레 배우게 되었다. 보고 싶은 마음이 아무리 앞선다고 해도 이대로 갔다간 황 대표에게 절대 좋은 소리 못 듣는다. 앞치마부터 벗어 던진 버들이 꼼꼼히 손을 씻었다. 어딜 가는지 묻는 스승님께 버들이 대답 대신 씩 웃어 보였다.

도착한 펜션 문을 열었다.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는 황 대표가 눈에 들어왔다. 황 대표의 얼굴을 보자마자 조각하느라 힘들었던 게 싹 가셨다. 버들이 얌전히 문을 닫고 다시 스승님 댁으로 발길을 돌렸다.

노부인의 요구대로 버들이 염색된 천을 빨랫줄에 걸었다. 햇볕이 따사로운 만큼 버석하게 마를 거다. 버들이 제 허리께를 주먹으로 두드렸다. 하도 굽히고 있었더니 저릿저릿하다. 노부인이 고생했다며 오디즙을 꺼내 왔다. 새콤하고 달콤한 냄새에 버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잘 마시겠단 감사의 인사부터 했다. 막상 입에 대려고 하니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어딜 가냐고 묻는 노부인에게 버들이 환하게 웃으며 곧 돌아오겠단 말을 남겼다. 뜀박질까지는 아니고 조금 빠르게 속도가 붙은 걸음을 따라 버들의 머리카락이 신나게 들썩거렸다.

버들이 펜션 문을 열었다. 황 대표는 여전히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황 대표를 에둘러 싼 주변 공기가 고고하다. 작품처럼 품위가 느껴졌다. 아는 척을 하려다가 말았다. 지저분한 제 꼬락서니에 선뜻 안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버들이 들고 온 컵을 바닥에 내려놨다.

“대표님. 황 대표님.”

불러도 대답이 없다. 이젠 괜찮다, 이것도 적응돼서.

“이거 드세요.”

“…….”

“남자 몸에 좋아요. 아, 여자 몸에 좋나?”

“…….”

“어쨌든 몸에 좋은 거래요.”

“…….”

“대표님. 이따가 봬요.”

문을 닫자마자 금방 보고 싶다.

열심히 조각하다가 말고 펜션에 뛰어가 황 대표가 있는지 확인하고, 천에 염색물을 들이다가 말고 펜션에 뛰어가 보고 싶은 황 대표를 감상하고. 뜨거운 날, 틈만 생겼다 하면 두 집을 왔다 갔다 하는 통에 버들의 목덜미를 타고 쉴 새 없이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걸 버들이 손등으로 대충 훔쳤다.

여기에 있는 동안만큼은 황 대표님이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볼 수 있다. 꿈같은 현실이다. 이게 현실이 아니라, 정말 한여름 밤의 꿈이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뛰어가서 안기게.

“이거, 맛있는 건데…….”

땅거미가 질 때쯤 모든 일을 끝낸 버들이 펜션으로 돌아왔다. 문 앞에 뒀던 오디즙이 그대로다. 황 대표가 제 뜻대로 그걸 마셔 주지 않은 게 아쉬워 물끄러미 응시하던 버들이 욕실로 향했다. 조각도 하고, 천 염색도 하고. 바빴던 만큼 지저분해진 황 대표의 데님 셔츠를 벗어 힘껏 펄럭거려 먼지를 털어 냈다. 새 칫솔을 뜯어 입에 물고선 버들이 욕조 틀에 걸터앉았다. 이거면 되려나? 필요한 물건들을 문자로 적어 겨울에게 전송했다. 그러자 전화가 걸려 왔다. 거품이 가득한 입안을 얼른 헹군 뒤 형, 밝게 겨울을 불렀다.

-옷이 없으면 벗고 있어?

“아니. 옷 입고 있지.”

-옷 없다면서. 무슨 옷을 입고 있어?

“황 대표님 셔츠랑 황 대표님 양말이랑 황 대표님 속옷이랑.”

-그 새끼가 그걸 전부 순순히 빌려줬어?

“응. 근데 빌려준 건 아니고, 나 가지래. 돌려주지 말래.”

-진짜야?

“내 말이 맞지? 황 대표님, 착하시다니까.”

새치름하게 버들이 대꾸했다. 말하기 전에 미리 옷 같은 걸 챙겨 보냈어야 했는데 세심하지 못했단 겨울의 사과에 버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황 대표 바꿔 봐.

“황 대표님?”

버들이 우물쭈물했다.

“나 지금, 욕실이야.”

-씻는 중이었어?

“아직 씻기 전이야.”

-뭐가 문제야 그럼. 빨리 황 대표가 바꿔 봐.

재차 황 대표를 바꿔 달란 말에 하는 수 없이 버들이 벗어 뒀던 데님 셔츠를 걸쳤다.

“대표님.”

근처까지 와서 저를 부르는 버들에게 황 대표의 고개가 돌아갔다. 분명 아침에 씻고 나왔을 때는 뽀얗기만 하더니 밖에 나가 있는 동안 머리부터 발끝까지 꼬질꼬질해진 채 돌아왔다. 통째로 불순물이 따로 없다. 그런 제 생각에 동의하듯 근처에 있던 공기 청정기가 저절로 작동됐다.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안 보이는 곳으로 좀 꺼지라고 손을 휘저으려는데 버들이 대뜸 들고 있던 핸드폰을 내밀었다. 유 대표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에 화를 누그러뜨린 황 대표가 핸드폰을 가져갔다. 서로의 손끝이 살짝 부딪혔다. 그 짧았던 접촉에 버들은 긴장했고, 황 대표는 불쾌해했다. 버들이 뒤로 물러났다. 통화가 언제쯤 끝날까 기다리느니 씻고 나오는 게 낫겠다. 깨끗해져야지만 곁에 있는 걸 황 대표님이 너그러이 봐주시니까.

-유배당하니까 어때?

“일주일 안에 일 좀 마무리해.”

-나도 버들이 때문에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시키고 싶어.

“그럼 해.”

-시기상조야. 알잖아.

“편한가 봐?”

-새끼야. 나는 여기서 지금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고 있어.

나라고 뭐 편한 줄 아냐면서 유 대표가 욕을 지껄였다. 두 대표가 나란히 미간을 짚었다.

“여기 근처에 수영장 있어?”

황 대표의 속없는 물음에 유 대표가 헛바람을 켰다.

-황 대표님.

“수영장 있냐고. 물었잖아.”

-휴가차 거기 가 있는 게 아니거든요. 네가 왜 거기로 유배 갔는지 모르겠습니까?

“호텔도 없어?”

-시골 촌구석에서 네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삼시 세끼 감자만 먹어 봐야 정신을 차리겠어?

황 대표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여기서 며칠 동안 구겨져 있어야 하는지 뚜렷하게 일정이 정해진 게 아니라 답답하다. 청량한 풀벌레 소리가 심히 언짢다. 잘하면 여기에 있는 동안, ……욕구 불만으로 죽을 수도 있겠다.

* * *

모락모락 수증기가 핀다. 씻고 나온 버들의 머리 위로 황 대표가 던진 옷가지들과 새 속옷이 우수수 떨어졌다. 유 대표가 당부하는 통에 어쩔 수 없었다. 흘러가는 레퍼토리는 뻔했다. 육아란 자고로 공동으로 해야 한다며 뻔뻔하게 억지를 피우는데 진짜 질린다. 물론 육아는 공동으로 해야 한다는 말에 반박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그 육아를 왜 자신이 공동으로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것도 다 큰 사내새끼를.

버들이 빠끔히 눈을 떠 황 대표를 바라봤다.

“이게 다 뭐예요?”

“입어.”

“그래도 돼요?”

마주친 황 대표의 시선이 매섭다. 버들의 어깨가 바짝 움츠러들었다. 더 말을 붙이는 대신, 바닥에 떨어진 옷을 살폈다. 안 그래도 입었던 옷을 또 입어야 해서 찝찝했었는데. 저를 위해 황 대표가 먼저 옷을 꺼내 준 게 기뻤다. 버들은 겨울의 입김이 들어갔단 걸 알지 못했으니, 순전히 황 대표의 친절인 줄로만 착각했다. 무심코 호선을 그리려는 입술을 버들이 얼른 말아 물었다.

“잘 입을게요.”

낮게 인사한 후 황 대표가 준 옷들을 주워 모아 버들이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 황 대표의 옷이기도 하면서 저 입으라고 황 대표가 직접 골라 준 옷이기도 했다. 그게 뭐라고 버들이 한참 구경했다. 옷에 얼굴을 파묻고 냄새를 들이켜자 황 대표의 향수 냄새가 은은히 저에게로 옮겨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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