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비 오는 날 흙냄새 (3)
에어컨 한기가 내려온 바닥이 차다. 이불 속에 파묻혀 있는 버들이 따뜻한 체온이 감도는 배꼽을 만져 시린 손을 달랬다. 커다란 눈동자가 데굴데굴 구른다. 괜히 집 안을 한 바퀴 훑어본 버들의 시선이 책장에 박혔다. 텅 빈 채 제 역을 못 하던 가구였다. 그런데 지난번, 황 대표가 외출하고 다녀온 뒤로 팔자가 바뀌었다. 황 대표가 들고 온 서적들이 책장에 빼곡하게 채워졌다. 별로 관심 없는 척 그 앞을 몇 번 서성거렸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책만큼은 절대 건드리지 말라며 황 대표에게 주의를 받았다. 싸늘한 어조였다. 거기에 겁을 먹은 버들은 그 뒤로 책장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중이었다. 누운 채 버들이 물끄러미 황 대표를 바라봤다. 타자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희고 곱다. 차차 수마에 빠져들면서 버들의 눈꺼풀이 차분히 감겼다.
* * *
달이 동동 뜰 정도로 늦게까지 조각하고 집에 돌아온 버들이 곧장 씻었다. 그런 버들의 뒷덜미를 붙잡아 황 대표가 책장으로 데려갔다.
“여기서부터 여기.”
무슨 말이냐는 듯 버들의 말똥한 눈이 황 대표를 올려다봤다.
“읽어.”
단조로운 대꾸가 황 대표에게서 돌아왔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읽어도 된다고 황 대표가 허용해 준 범위는 딱 잡지가 꽂힌 칸이었다. 영화와 관련된 것이니 틈을 내 공부하라고 명령하는 계약서상 갑의 태도에 계약서상 을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잡지 하나를 고른 버들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베개를 가슴팍 아래로 구겨 넣었다. 독서를 하기엔 자세가 마땅치 않아 오래 버티지 못하겠다. 허리도 아프고, 목도 뻐근하고. 자고로 남자는 허리를 보호하고 아낄 줄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벌떡 일어난 버들이 황 대표가 작업하고 있는 식탁에 가서 앉았다.
이로운 내용들로 그득한 잡지를 보고 있다 보니 지금 당장 감상하고 싶어진 고전 영화 리스트가 생겼고, 모르고 지나쳤던 촬영 장소나 뒷이야기 등등 새롭게 알게 되는 사실들이 쌓였다. 황 대표의 영화가 나오면서부터는 페이지를 못 넘길 정도로 푹 빠져들었다. 버들은 그 부분을 통째로 외우기라도 할 듯 읽고 또 읽었다.
나중에, 그러니까 현재 황 대표와 함께 작업하고 있는 영화가 개봉하게 된다면, 이런 잡지에 황 대표님이 작업에 몰두했던 장소로 여기, 시골이 소개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낮에는 매미가 울고 밤에는 풀벌레 소리가 진해지는. 자갈이 깔려 있는 마당 구석에는 정자가 세워진. 텃밭도 있는. 여기서 나도 같이 살고 있으니까 어쩌면 황 대표의 이름과 제 이름이 세트처럼 묶여 거론될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금방 벅차오른 버들이 잡지를 얼굴 높이에 맞춰 들었다.
“대표님.”
“네.”
“우리 여기서 그냥 평생 살래요?”
뭔 개소리인가 싶다. 황 대표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제가 계획을 세워 봤는데요. 텃밭에서 브로콜리 따 먹고, 버섯 캐서 먹고, 감이랑 사과 따 먹고.”
역시 개소리였다. 갑자기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살짝 상기된 버들의 볼이 현재 들뜬 감정을 역력히 드러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에 황 대표가 무의식중에 허리를 뒤로 물렸다.
“감나무는 사옥에도 있어요.”
“시골에 있는 감나무가 더 건강하지 않을까요?”
덜떨어진 버들의 계획에 황 대표가 상종하지 않았다.
“네? 여기서 우리 평생 살아요.”
“여기서 살면 버들 씨, 학교는요.”
“학교는…….”
좀 고심하는가 싶던 꼴통이 이내 명쾌하게 답을 내렸다.
“저 학교 안 가도 돼요!”
불쑥 거리를 좁혀 온 버들의 이마를 황 대표가 손끝으로 쭉 밀었다. 이어 까불지 말고 마저 잡지나 보란 듯 턱을 까닥였다. 아픈 건 아니었으나 황 대표가 밀친 제 이마를 쓰다듬던 버들이 입술을 보로통하니 내밀었다. 노트북 화면에 집중한 황 대표를 말끄러미 응시했다. 버들의 기다란 속눈썹이 눈 아래에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잡지 봐라.”
“네.”
하얀 건 종이요. 까만 건 글씨였다. 버들의 관심은 홀라당 황 대표에게 넘어가 버렸다. 세상에. 새삼 놀랍다. 황 대표님과 함께 저녁 시간을 공유하고 있단 게 꿈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세상 참, 살다 보니 별일이다. 버들의 입가가 나긋하게 호선을 그렸다.
오전 작업을 끝마친 버들이 노부인이 싸 준 반찬 꾸러미를 달랑달랑 흔들며 집으로 돌아와 달그락, 식사 준비를 했다. 살짝 익힌 스테이크에 황 대표가 나이프 끝을 찔러 넣었다. 후추를 집기 위해 팔을 뻗던 황 대표의 시선이 문득 맞은편 버들의 밥그릇으로 향했다. 버들이 직접 퍼 담은 밥의 양이 극히 적다. 고작 주먹의 반만 하다. 사내놈이라면 한입에 털어 넣을 수도 있을 양이었다. 깔짝거리기만 할 뿐인 버들의 젓가락이 신경 쓰인 황 대표가 인상을 찌푸렸다.
“버들 씨.”
시무룩하게 처져 있던 버들의 고개가 들렸다.
“오늘은 왜 저 좋아한다고…….”
“좋아해요. 대표님 좋아한단 말, 하루에도 백 번은 하고 싶어요.”
버들의 어깨선을 따라 옷이 한쪽으로 처졌다.
「대표님이 갖고 싶다는 거 다 드릴 거고요. 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뭐든지 다 해 드릴 거예요. 정말이에요.」
황 대표가 와인 잔을 살짝 흔들었다.
「모르니까 해 주는 말인데 좋아한다고 자꾸 그러는 거, 상대방한테 지고 들어가는 거예요.」
「……저는 대표님한테 이길 생각 없어요.」
버들의 순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뾰족하게 비틀린다. 갖고 싶은 거 다 준다고 그러고.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 준다고 그러고. 이길 생각이 없다고 그러고. 멍청한 게 나한테만 이러는 건지. 아니면 다른 놈한테도 가서 이러는 건지.
“유버들 씨.”
“대표님, 좋아해요.”
“누가 고백하랬어요?”
“……그럼요?”
내버려 두면 정말 하루에 백 번씩, 좋아한단 말을 하고도 남을 거다. 잠자는 시간 쪼개서. 밥 먹는 시간 쪼개서. 안 봐도 뻔하다. 버들의 보얀 귓불로 황 대표의 시선이 느릿하게 옮겨 갔다. 여태 남의 손을 타 본 적이 없는 건 확실했다. 나야 같은 거 달린 호모 새끼가 끔찍할 뿐이지만 다른 애먼 놈에게 걸렸다면 처참히 뼈가 발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황 대표가 무심코 한숨을 터트렸다.
간지러운 제 볼을 버들이 젓가락 든 손등으로 벅벅 문질렀다. 오늘은 아직까지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은데 괜히 위축된다. 저를 쳐다보고 있는 황 대표의 시선이 느껴지면서 버들이 허둥댔다. 어디 가선 야무지고 총명하단 평을 받는 버들의 성정이 황 대표에겐 한없이 미련스레 비쳐지나 보다. 물론 황 대표 한정으로 버들이 미련하게, 물렁하게 굴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버들의 큰 눈이 슴벅거렸다. 황 대표가 정민에 관해 물었다. 사생활 같은 건 모른다면서 버들이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사생활 같은 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서로 친구가 돼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무하고나 스스럼없이 어울리기엔 집안으로 인해 벌어지는 격차가 있지 않나? 그러고 보니 희한하다. 대중교통도 아무렇지 않게 이용하고 다닐뿐더러 방과 후 시간도 자유롭게 만끽하고, 재벌가의 보석 같은 막내아들이 아니라 진짜 물가에 내놓은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닌가 싶다. 권위적인 유 회장과 유 이사가 버들을 보며 헤벌쭉 웃음을 흘렸단 걸 직접 목격하지 못했더라면, 방금 전 ‘유버들 미운 오리 새끼설’에도 좀 더 신빙성이 붙었을 거다.
“욕할 줄 알아요?”
하얀 얼굴이 어떤 욕을 지껄여도 위협을 주기엔 어려울 것 같다.
“저도 사람인데요.”
“그래서 욕할 줄 안다고?”
“네. 욕해요. 최근에도 했어요.”
“최근? 언제?”
버들이 차분히 대답했다.
“수강 신청 망했을 때.”
황 대표가 순간 코로 비웃었다.
식사를 이어 하느라 침묵이 생겼다. 다 식어 버린 계란국을 버들이 괜스레 휘저었다. 식욕은 오늘도 여전히 없었다.
“버들 씨.”
유지되던 침묵을 먼저 깨뜨린 쪽은 황 대표였다.
“아버지나 형들이 뭐 하는지 주변에 말하고 다녀요?”
“아니요.”
“말 안 해? 왜?”
“해야 돼요?”
다이아몬드 스텝 밟고 태어난 걸 왜 과시하지 않느냐, 묻는 의미가 아니었다. 버들을 괴롭히려다가도 문턱 높은 집안을 보고 쫄려 물러설 경우도 있을 것 같은데 일절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니. 며칠 전 술에 취했던 버들이 떠오른다. 대체 얘가 누군지는 알고 막걸리 따위 먹인 건가?
눈이 마주쳤다.
“황 대표님.”
“어.”
“좋아해요.”
“…….”
* * *
-뽀뽀 안 해?
“형. 미쳤어?”
-너 행운의 편지에 답장해야지.
“행운의 편지, 그거 다 무효야.”
-왜 무효야. 누구 마음대로 무효야.
유치함에 버들이 인상을 썼다.
“끊어. 전화비 아까워.”
-영상 통화하면 전화비 더 많이 나가?
바보 같은 질문을 던져 놓고선 겨울이 뾰족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점점 화면에 가까워진다.
“형 입술 지금 곱창 같아.”
-곱창도 못 먹는 놈이.
“끊어, 빨리. 나 일해야 돼.”
-황 대표가 일 많이 시켜?
버들이 황 대표가 있는 방향을 힐끔거렸다. 그러곤 “일 많이 안 시키셔.”라고 낮게 속삭였다. 방 안은 좁았고, 버들의 목소리는 고스란히 황 대표의 귀에 들려왔다. 30분을 통화해 보았지만 결국 제 새끼에게 뽀뽀 한 번 받지 못한 겨울이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느닷없는 타이밍이었다.
버들의 핸드폰 화면이 시커멓게 암전된 대신, 황 대표의 핸드폰이 진동을 떨어 댔다. 유 대표의 이름이 액정에 떴다. 귀찮단 걸 감추지 않은 채 황 대표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피곤함이 다분한 기색이다.
-야. 황 대표. 내 새끼한테 일 시켜? 왜 일을 시키고 지랄이야. 시키는 척만 해. 진짜로 시키지 말고.
짧게 한숨을 터트리는 황 대표의 곁으로 버들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제 형의 주책에 버들의 낯이 붉어졌다.
“끊어.”
-아니. 이것들이. 둘이 짰나. 왜 자꾸 전화를 끊으래.
“일해야 돼.”
-아침 여섯 시부터?
“아침, 밤 가려서 일할 때야?”
-그래서 진짜 일한다고? 어? 이렇게 일찍?
“그래. 일해야 돼.”
-그 말도 둘이 짰어? 뭐야?
겨울이 짓씹은 욕설이 핸드폰을 타고 넘어왔다. 잠자코 있던 버들의 눈썹이 일순간 뾰족해졌다. 황 대표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 가져갔다.
“형! 황 대표님한테 개새끼가 뭐야?”
-…….
“전에도 개새끼라고 욕했지?”
-…….
“개새끼가 뭐야? 어?”
버들이 버럭 화를 냈다.
-개새끼를 개새끼라고…….
“다른 욕도 많잖아. 널리고 널린 욕 중에서 왜 하필 개새끼야? 개새끼라고 하지 마. 황 대표님, 강아지 무서워해.”
이번엔 황 대표의 눈썹이 뾰족해졌다. 가만히 있다가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다. 내가 언제 개를 무서워했다고.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싫어하는 거다. 황 대표의 변명이 현재 버들의 귀에는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다른 욕 뭐.
“개새끼 말고 다른 거.”
-그러니까, 뭐.
“씹새끼도 있고.”
이 새끼, 저 새끼 찾는 통에 아침부터 난장판이었다.
“형. 그래서 그게 잘못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
오래전에 외박한 일까지 끄집어내 제 형에게 계속 바가지를 긁는 버들의 볼을 황 대표가 가만히 응시했다. 수강 신청을 망쳐 놓고 컴퓨터 앞에 앉아 씹새끼, 욕을 종알대는 버들의 모습이 저절로 그려졌다. 그래서 결론은…… 역시 하찮다.
* * *
회의 도중 문자가 도착했다. 잠깐 브리핑을 멎게 한 뒤 유 대표가 핸드폰을 쥐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제 금쪽같은 새끼의 뜻을 따라 유 대표는 오늘 아침, 황 대표의 이름을 ‘씹새끼 황’으로 수정해 놓았다. 씹새끼 황께서 보내온 건 배우의 이름이었다. 유 대표가 빠르게 인터넷 창을 열어 인물을 검색했다. 두 명의 남자 배우 사진이 컴퓨터 화면에 나란히 띄워졌다. 황 대표가 원하는 캐스팅의 조합이었다. 괴상할 것 같더니. 동성임에도 불구하고 두 배우가 섞이는 분위기가 썩 나쁘지 않다.
* * *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동네 아는 할머니를 만난 버들이 참외를 얻었다. 네 개, 다섯 개 수북하게 담아 주시려는 걸 버들이 만류했다. 그러고선 딱 두 개만 챙겼다. 한 집에 두 사람이 사니, 두 개면 충분했다.
“……안 드세요?”
기대에 찼던 버들의 표정이 이내 가라앉았다. 황 대표의 표정만 봐도 어떤 대답인지 알겠다. 호의를 베풀 때마다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거절이다. 터덜터덜, 마당으로 걸어 나온 버들이 정자에 앉았다. 등이 둥글게 굽혀졌다. 조그마한 칼을 기울여 신중히 참외 껍질을 깎았다. 황 대표가 먹지 않은 참외 하나는 역시나 모자에 담았다. 덥석 베어 문 참외가 자두처럼, 포도처럼 당도가 높아서 참 달았다. 10분도 안 됐다. 황 대표가 부르는 소리에 버들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네 느낀 점을 말해 봐.”
황 대표가 두툼한 시나리오를 버들의 앞에 던졌다. 시나리오 전부를 읽고 나니 듬성듬성 알고 있던 내용이 전체적으로 그림이 되어 버들의 머릿속에 흘렀다. 뉴욕에서 첫 몽정과 첫 자위를 경험하게 만든 수첩의 내용이 나왔을 땐 남몰래 숨이 멎기도 했다. 시나리오 마지막 장을 덮자 허벅지 안쪽에 괜히 힘이 들어갔다.
“아무 말이나 괜찮으니까.”
“아무 말, 해도 돼요?”
황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두 사람이 끝에 다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한쪽은 살려 주시면 안 돼요? 한쪽이 죽었다고 왜 다른 한쪽이 죽어야 해요?”
“두 사람이 다 죽어야 해피 엔딩이니까.”
“그게 왜 해피 엔딩이에요? 반대로 한 명이 남아 숨 붙어서 사는 게 왜 비극이에요?”
버들이 느낀 감상을 소홀히 흘리지 않고 황 대표가 메모했다. 영화 속에서 살아갈 주인공들의 삶, 그 자체의 대화였다. 정답이 또렷하게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니 두 사람의 목소리가 얕아졌다가 깊어졌다가, 진해졌다가 옅어졌다가 했다.
하품이 터지자 버들이 얼른 입을 가렸다. 꼬박 날을 샜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어렴풋하게 감만 잡히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제작자 입장에서 뜻밖의 수확들이 많았다. 보상으로 가진 담배를 전부 다 털어 줘도 아깝지 않을 정도다. 휘날리는 글씨체로 빽빽하게 채워진 수첩을 보며 황 대표가 펜을 빙그레 돌렸다.
“예뻐요.”
“…….”
“대표님 손톱에요. 반달.”
“…….”
“엄청 예뻐요.”
쓸데없는 소리를 했으니 담배는 안 줘야겠다.
미간을 살짝 좁힌 채 황 대표가 몇 가지 부분을 골라 줄을 긋다가 말았다. 식상함을 제외시키는 건 조금 있다가 해도 될 것 같다. 황 대표가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버들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씻고 자.”
“대표님은요?”
“운동.”
운동, 따라서 가고 싶다. 하지만 달리는 황 대표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낙오될 게 뻔했다.
“대표님.”
버들이 황 대표에게 청했다.
“산책 갈래요?”
“…….”
“우리 어제 산책 못 갔잖아요.”
“…….”
“산책 가요.”
차례대로 씻고 바로 집을 나섰다. 반 발자국 앞장서서 걷는 버들을 황 대표가 내려다봤다. 물기를 제대로 닦지 않았는지 티셔츠가 버들의 등에 살짝 들러붙어 있었다. 어깨뼈가 선명하다. 새벽 공기가 촉촉하게 피부에 닿는다. 여름답게 해가 중천에 뜨자마자 더위가 심해질 테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서늘함은 잠시뿐이다.
저를 내버려 두고 황 대표가 징검다리를 건너가자 급해진 버들이 예전처럼 물속으로 얼른 발부터 집어넣고 봤다. 햇볕에 바짝 말린 운동화는 물론 무릎 아래까지 바지가 젖어 버렸다. 무심코 뒤를 바라본 황 대표가 인상을 찌푸렸다. 정작 버들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인다. 마주친 시선에 눈꼬리를 휙 접으며 웃는다. 해사하다.
개울을 건넌 뒤엔 사방이 나무로 둘러싸인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바람이 불 적마다 머리 위의 나뭇잎이 스쳤다. 조각에 관해 종알종알, 버들이 떠는 수다가 메아리로 겹쳐 들리는 것 같다.
“대표님. 힘들지 않으세요? 오래 걸어서 다리 아프실 거 같은데……. 우리 여기서 조금만 쉬었다가 갈까요?”
어디 허름한 숙박업소로 이끌 것 같은 말만 골라 나열하던 버들이 손가락으로 벤치를 가리켰다.
“젖었잖아.”
“……그래도요.”
흥건하게 아침 이슬이 스민 벤치에 버들이 보란 듯 털썩 주저앉았다. 예민하고 까다로운 남자인 황 대표가 눈썹을 구겼다. 진동으로 울리는 핸드폰을 꺼내 든 황 대표를 버들이 눈을 깜박거리며 주시했다. 가슴을 꽉 채우고 있는 감각이 동그스름하다. 그걸 조금이라도 더 잇고 싶다. 이대로 산책을 끝내고 집에 돌아간다면 비눗방울처럼 흔적도 없이 깨져 버릴 거 같다.
목소리도 많이 들었고.
제 말에 대답도 많이 해 주셨고.
자주 웃었다, 황 대표님이.
“대표님.”
버들이 낮게 황 대표를 불렀다.
“벤치 옷 안 젖게 앉을 수 있어요.”
별로 못 미더운 눈치다.
“진짜예요. 옷 안 젖는 거, 장담해요.”
“넌 이미 젖은 채로 앉아 놓고 뭘 장담해.”
인상을 쓰면서도 황 대표가 버들이 있는 쪽으로 가까워졌다. 혹시나 싶었다. 진짜 그럴 듯한 방법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 힘이 들어간 버들의 턱 아래 조그마한 호두가 생겼다. 혼날 각오를 여러 번 한 뒤에야 버들이 과감히 황 대표를 잡아당겼다.
“…….”
“…….”
버들이 제 다리 위에 황 대표를 앉혔다. 우랄산맥 같은 등짝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긴장되어 얼어붙어 있던 버들이 황 대표에게서 아무런 말이 없자 그제야 안심했다. 웃을락 말락 하던 버들의 입가가 꽃눈 틔운 꽃봉오리처럼 활짝 펴졌다. 어차피 안 보이실 테니까. 감히 만지진 못하고, 작품처럼 바라만 보고 있던 황 대표의 넓은 등에 제 옆 볼을 기댈 것처럼 살짝 가져가 보았다. 심장이건 맥박이건 마구잡이로 날뛴다.
황 대표의 등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웃으신 건가? 버들이 슬그머니 옆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황 대표를 관찰했다.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저 서 있을 때처럼 핸드폰을 보고 있는 채였다. 누가 뭐 재미있는 거라도 보내 준 건가? 아무렴 어떠랴. 짧게나마 황 대표가 웃으니까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황 대표의 입가가 느슨히 풀렸다. 하도 어이가 없다 보니 헛웃음이 재차 터졌다. 그래. 밤새우면서 고생했으니까. 저를 잡아당겼던 버들의 힘이 형편없이 약했지만 뜻하는 대로 한 번 따라 준 거다. 태어나 처음 남의 무릎에 앉아 봤다. 그 사실에 또다시 희미하게 헛웃음이 켜졌다. 같은 거 달린 사내놈 무릎 위에 앉게 될 줄이야. 황 대표가 일부러 체중을 쏟았다. 버들의 가느다란 허벅지가 돌덩이 같은 황 대표의 다리에 짓눌려 겉으로 아예 보이지 않게 됐다.
……황 대표님. 엄청 무거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버들의 무릎이 후들거렸다.
* * *
손목의 뻐근함에 황 대표가 깜박이는 커서를 잠시 외면했다. 집 생각이 났다. 목을 뒤로 꺾자 곧바로 퍼붓는 형광등의 빛에 손등으로 눈가를 가렸다. 의자하며, 조명하며. 여긴 확실히 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과 동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남자와 남자의 로맨스로 영화 내용이 바뀌게 되자 주연을 꿰차기 위해 거래를 제안했던 소희는 목적을 잃었다. 스캔들은 무의미했다.
「사람 꼴 우습게! 왜 삽질하게 만들어!」
며칠 전 전화를 걸어온 소희는 어울리지 않는 내숭은 집어치우기로 했는지 다짜고짜 비난과 욕을 퍼부어 댔다. 본래의 화끈한 성격이 반가울 지경이었다.
「그러게. 왜 시키지도 않은 삽질은 하고 그래.」
자신의 말에 극도로 화가 났는지 둔탁한 소음과 함께 전화가 끊겼었다. 소희의 소속사가 전면에 나서서 스캔들을 수습했다. ‘둘은 오래된 친구 사이에 불과하며 여성 병원에 갔던 것과 스캔들은 어떤 연관성도 없다, 공인이기는 하나 공인이란 이유로 지극히 사적인 시간까지 침범해 감시받는 것 같아 그간 기사의 내용들이 매우 불쾌했다.’로 마무리되었다.
어차피 언론사와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정정 기사들이 우르르 터졌다. 매혹적이고 당찬, 거기다 건강한 이미지가 더해진 소희는 유방암 예방 홍보 대사가 되었다. 건강을 위해 검진은 필수이다. 그러니 남 눈치 볼 필요 없이 적극적으로 병원을 찾아가라며 소극적인 여성들을 격려했다.
어느새 컵이 비었다. 커피를 내리자 원두 향이 사방팔방으로 넘실거린다. 황 대표가 창가 쪽으로 걸어가 커튼을 걷었다. 한강과 어우러진 도시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대신…… 수돗가에 쪼그려 앉아 있는 버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여기에 온 지 며칠이나 지났더라.
매미 소리가 소란스럽다. 커피를 들이켜는 황 대표의 모습이 느긋하다. 고리타분하고 촌스러운 시골 생활도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적응되어 가는 중이었다. 하얗게 덩어리진 큰 구름을 올려다보던 황 대표의 시선이 그대로 내려와 버들에게 닿았다.
……저 꼴통은 그냥 여기서 태어나서 자란 게 아닌가 싶다.
대낮에 한여름이었다. 강렬한 햇볕을 피할 만한 그늘이 수돗가 주변에는 없었다. 열심히 손을 조몰락거리면서 버들이 자기 운동화를 빨고 있었다. 지지리 궁상맞아 보인다. 황 대표가 인상을 찌푸렸다. 버리고 새것을 사던가, 세탁소를 찾던가. 힘들이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그런데 꼴통 새끼답게 가만 보면 버들은 꼭 힘든 선택을 골라 했다.
“버들이 있는가.”
낯선 목소리를 따라 창가에 선 황 대표도 운동화를 빨고 있던 버들도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본 노인이 서 있었다. 하지만 버들에겐 구면인가 보다. 당장 물기 줄줄 흐르는 운동화를 내팽개치고 그쪽으로 쪼르르 뛰어간 버들이 꾸벅 인사하며 참 밝게도 웃었다. 자외선 때문인지 드러나 있는 버들의 피부 곳곳이 붉었다. 볼이 그랬고, 귀가 그랬고, 목덜미가 그랬다.
“바빠 보이네만.”
“저 안 바빠요. 뭐 시키실 거 있으세요?”
쫄래쫄래, 버들이 노인을 따라갔다. 골 때린다, 진짜. 그 스스럼없는 일련의 과정을 목격하게 된 황 대표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집안 배경이 특수한 상황이라 납치의 위험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아주 어렸을 적부터 받았던 교육 중 하나가 낯선 상대를 향한 경계심이었다. 그런 저와 다르게, 하물며 같은 핏줄이면서 같은 환경에서 자랐을 유 대표와도 다르게 버들은 마냥 허물없어 보였다. 물론 찾아온 노인과 버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었으니 낯선 사이가 아니란 점은 분명하다. 또 버들이 한두 살 먹은 어린애가 아니었거니와 노인 역시 납치 뭐 그런 위험한 짓을 저지르기엔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래도 그렇지.
마당에는 덩그러니 버들의 운동화만 남겨졌다.
버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땐 뉘엿뉘엿, 노을이 지고 있었다. 새파랬던 하늘에 실처럼 가느다란 금빛 그물이 걸렸다.
“맞다. 운동화!”
까맣게 잊고 있던 운동화를 마저 빨아 탈탈 턴 뒤, 벽에 기대어 세웠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마음이 편안해진다. 변함없이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황 대표는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대표님. 저 왔어요.”
황 대표의 눈이 버들을 향했다. 도대체 나가서 뭘 하고 돌아왔는지 잔뜩 꼬질꼬질해진 상태였다. 상대할 가치가 없단 듯 황 대표가 버들을 무시했다.
“대표님. 이거.”
버들이 손바닥을 펼쳤다. 주먹에 꽉 차 있던 동그란 열매가 모습을 드러냈다. 초록색의 매실이었다.
“냄새 좋아요.”
버들이 매실을 코에 파묻었다. 시골이라 힘을 써야 할 일이 있으면 젊은 사람이 필요했다. 오늘은 하루 종일 매실을 땄다. 싱그럽게 익은 알이 굵었다. 농약을 치지 않고 재배해 저희 농장의 매실은 명품이나 다름없다며 떵떵거린 노인의 자랑이 듣기 좋았다. 버들이 선뜻 황 대표에게 매실을 건넸다.
“냄새 맡아보실래요?”
“바닥에 흙 떨어지는 거 안 보여요?”
“아. 씻고 올게요.”
욕실까지 버들이 매실을 들고 들어갔다. 이윽고 물소리가 들려온다. 빤히 노트북을 바라보고 있던 황 대표가 굳이 마시지 않을 커피를 내렸다. 일부러 진한 원두 향을 유도했다. 흐릿하게 감도는 매실 냄새가 완벽하게 없어졌다.
“대표님.”
버들이 깨끗하게 닦아 반질반질해진 매실을 제 이불 위에 올려 뒀다. 황 대표가 있는 식탁으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구실이 필요했다. 주섬주섬, 색연필과 노트를 꺼내 자리에 앉았다.
“커피 냄새 좋아요.”
“…….”
“이제 다른 데서 커피 냄새 맡아도 대표님이 떠올라요.”
원두 종류도 구분할 줄 모르는 놈이. 황 대표가 콧방귀를 꼈다.
운동하러 나간 황 대표의 귀가가 평소보다 늦다. 가만히 앉아 황 대표를 기다리고 있던 버들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오늘도 역시, 덥다. 마당 너머를 멀뚱히 내다보길 잠시. 다시 집 안으로 들어온 버들이 조금 느린 속도로 티셔츠를 벗었다. 거꾸로 쓸리는 바람에 뒷머리가 붕붕 떴다. 괜찮나? 욕실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 보는 버들의 얼굴이 자못 심각해졌다. 누군가 체중이 줄었다고 지적해도 이제는 반박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해진 갈비뼈를 빠르게 외면했다. 커다란 버들의 눈동자가 이쪽저쪽 바쁘다. 황 대표가 주로 물어뜯는 어깨와 목 주변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흔적을 찾았다. 은근하게 남아 있던 멍도 사라져 지금은 살결이 완전히 깨끗해졌다. 팔 안쪽도 마찬가지고 종아리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괜찮겠다.
제 스스로의 물음에 버들이 답을 내렸다.
그동안 울혈을 감추기 위해 기장이 긴 옷들을 골라 입었다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버들이 새로 갈아입은 옷들은 전부 얇았다. 햇빛에 몸 윤곽이 고스란히 비칠 정도였다. 바삭하게 마른 운동화를 신고 입구까지 나왔다. 저만치서 달려오던 황 대표가 보인다. 탄탄한 흉곽이 거친 숨을 따라 부풀었다.
“대표님. 오늘 바쁘세요?”
“…….”
“스승님이 조각에 대해 할 말 있다고 모셔 오랬어요.”
“내가 왜.”
흘린 땀을 황 대표가 건성으로 닦았다.
“오늘 바쁘시면 내일…….”
“주제 파악을 못 하네. 필요하면 직접 오라고 해.”
“…….”
황 대표가 던진 수건이 버들의 얼굴을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수건을 주워 든 버들이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고개를 숙인 채 수건에 묻은 흙을 털어 냈다. 문득 황 대표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옷이 뭐 저 따위야. 버들의 쇄골이 환하게 밖으로 드러난 채였다. 속이 뒤틀렸다, 꼴 보기 싫어서.
황 대표가 다짜고짜 버들의 손목을 잡고 집 안으로 끌고 갔다. 벽에 세운 버들의 피부에 입술을 파묻고 마음껏 이를 세웠다. 버둥거리는 버들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고정했다. 어깨와 목 사이에서 고개를 뗀 황 대표의 눈이 느릿하게 감겼다가 뜨였다.
숨을 가쁘게 쉬며 버들이 파르르 떨었다. ……다 끝났나. 긴장이 풀렸는지 허물어지려는 버들의 몸을 봐주지 않고 황 대표가 억세게 밀어붙였다. 황 대표로 인해 버들의 한쪽 팔이 높게 들렸다. 손등과 벽이 세게 부딪히면서 오는 통증에 버들이 질끈 눈을 감았다. 소매를 걷고 할 필요도 없었다. 버들의 팔 안쪽 여린 살이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다. 피부가 희다. 황 대표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깊숙하게 박힌 만큼 상흔은 진하게 남겨졌다.
터져 나올 것 같은 소리를 버들이 악착같이 참아 냈다. 왜, 화가 나신 거지?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나? 순간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현기증이 돌았다. 잠깐 사이 등에 식은땀이 잔뜩 뱄다. 기어이 버들이 바닥에 풀썩 주저앉고야 말았다. 황 대표가 배려 없이 잡아당긴 손목이 시큰거린다.
* * *
“진짜로 왔네.”
버들의 반응이 시큰둥했다.
“내가 온다고 그랬잖아.”
왜인지 의기양양한 태도로 정민이 콧대를 세웠다.
“진짜로 올 줄 몰라서.”
“원래 나 약속 잘 지켜.”
조각도를 내려놓고 버들이 앞치마를 벗었다.
“운동은?”
“하고 왔어. 내일 오전까지 자유 시간이야.”
“그럼 자고 가는 거야?”
“아니. 그럼 포도 따야 돼서.”
정민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너희 할아버지 포도 맛있더라.”
“……따 줄까?”
“포도 따기 싫다면서.”
“너 먹으면 따.”
“안 먹어.”
몸을 휙 틀어 버린 버들을 보며 정민의 한쪽 눈썹이 위로 쭉 올라갔다. 이게 사람을 아주 들었다 놨다 하고 있어. 얄미운 버들을 향해 정민이 꿀밤을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그림자로 다 보여, 너.”
으름장을 놓으면서 버들이 정민을 째려봤다. 갈팡질팡 고민 많았는데, 버들의 얼굴을 보고나니 역시나 오길 잘했단 생각이 든다. 어깨를 나란히 걷던 중이었다. 걸음에 속도를 늦추던 버들이 슬금슬금 정민의 반대쪽으로 위치를 바꾸었다. 덜컹거리며 지나간 경운기로 인해 흙먼지가 일어나 시야를 가렸다. 버들이 잔기침을 터트렸다. 정민이 차도로 나와 있는 버들을 아무렇지 않게 안쪽으로 이끌었다.
“뭐야?”
“뭐긴 뭐야.”
“네가 오른쪽에 서.”
“왜. 또 왼쪽 귀 안 보여 주게?”
버들이 얼른 왼쪽 귀로 손을 가져갔다.
“……모기가 물었어.”
웅얼거리는 버들의 말을 정민이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모기한테는 네 귀에서 단맛 나나 보다.”
“……몰라.”
“당연히 모르겠지. 네가 모기냐? 무슨 맛이 나나 궁금한데 내가 모기를 대신해서 한 번 물어 볼까?”
“죽는다.”
버들의 눈이 표독스러워졌다. 참 나.
티격태격하는 사이 펜션에 도착했다.
“저기에 앉아 있어.”
버들이 손가락으로 어딜 가리켰다.
“저기는 왜?”
“갈 데가 없으니까.”
그렇기는 하네. 떨떠름하게 수긍하며 정민이 정자에 앉았다.
“너는 어디가?”
“대표님한테. 나 왔다고 말씀드려야지.”
“그 사람이 무슨 학부모냐.”
정민의 투덜거림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버들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작업 중인 황 대표에게 인사를 했지만 돌아오는 대꾸가 없었다. 마당에 있을 거니까 혹시 뭐 시킬 거 있으면 부르라며 버들이 다시 신발을 신고 나왔다.
창문 밖으로 도란도란 대화가 들려왔다. 여전히 황 대표의 고개는 노트북에 고정되어 있다.
“운동은 잘돼?”
“어쩐 일이야? 그런 걸 다 묻고.”
“잘 안돼?”
“돼. 곧 시합인데, 컨디션이 좋아.”
팔을 뒤로 뻗어 체중을 지탱한 정민이 살짝 몸을 뒤로 기울였다.
“너 안 더워?”
“아…….”
버들이 제 옷을 내려다봤다.
“탈까 봐.”
사실은 황 대표가 만든 멍을 가리기 위해서 덥지만 긴팔을 챙겨 입어야 했다. 바싹 마른 입술을 버들이 혀로 축였다. 이상하게 기운 없어 보이는 버들을 흘깃거리면서 정민이 가방을 열었다.
“이거.”
끝이 갈라진 제 손톱을 들여다보고 있던 버들이 정민이 건넨 걸 받았다. 초콜릿이다.
“이런걸 뭐 하러 사 왔어.”
“왜. 고마워?”
“담배나 사 오지.”
“…….”
잠깐의 침묵 후 정민이 속사포처럼 말을 퍼부었다.
“이 초콜릿은 보통 초콜릿이 아니야. 아버지가 해외 출장 다녀오면서 선물이라고 딱 하나 사 왔는데, 그게 바로 이 초콜릿이야. 아껴 먹어야 하는데 내가 너 주려고 챙겨 온 거다. 응? 귀한 거라고.”
갑자기 영업 사원으로 둔갑해 초콜릿을 어필하는 정민을 버들이 빤히 쳐다봤다. 편의점만 가도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초콜릿이었다. 다만 포장에 불어가 쓰여있냐, 한국어가 쓰여있냐, 그 차이뿐이었다. 정민은 열정만 가득할 뿐 수완이 없는 초보 영업 사원이었다. 초콜릿에 대한 비밀을 털어놓을까 하던 버들의 입술이 얌전히 다물렸다.
“고마워.”
정민의 얼굴이 불시에 확 붉어졌다.
“근데 다음엔 뭐 가져오려면 담배 사 와.”
붉어진 얼굴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담배 좀 끊어라. 그거 몸에도 나쁘잖아.”
“뭐. 넌 운동하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정민이 어리둥절한 채 물었다.
“운동하는 게 벼슬이야?”
“그럼. 너야말로 골초가 벼슬이냐?”
“골초 아니야. 여기서는 담배 많이 못 폈어.”
버들이 코를 훌쩍거렸다.
“왜? 대표님인가 하는 사람이 뭐라고 잔소리해?”
“아니. 담배도 주고, 라이터도 빌려주셔.”
영 몹쓸 어른이었잖아!
“초콜릿이나 먹어라.”
“……나중에.”
“왜? 민트 맛 별로 안 좋아해?”
“그게 아니라. 입속이 좀 헐어서.”
“왜?”
“모르고 깨물었거든.”
아, 해 보라는 정민의 말에 버들이 아, 입을 벌렸다.
“어? 진짜네. 상처 났다.”
상처가 난 건 제 입인데 정민이 더 아파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버들이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제 탓이었다. 황 대표가 제 몸을 씹을 때 소리를 참느라 턱에 힘을 주는데 실수를 했다. 그 바람에 입 안쪽 살이 좀 깊게 뜯겨 나갔다. 음식이 들어가면 거치적거리고 따끔해 그 이후부터 쭉 밥도 안 먹고 있다. 침울한 감정이 번지면서 버들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때였다.
“대표님!”
황 대표가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버들이 자동으로 벌떡 일어났다. 언제 어깨가 처졌냐는 듯 팔랑거리면서 살아났다.
“어디 가세요?”
“산책.”
“아. 같이 가요!”
버들의 집중이 순식간에 황 대표에게만 쏠렸다. 기껏 놀아주려고 찾아왔더니만! 헌신짝처럼 저만 남겨 두고 가 버린 버들을 정민이 얼른 따라나섰다. 처음엔 셋의 산책이었다. 하지만 중간에 마실 나온 제 할아버지에게 딱 걸린 정민이 포도 농장으로 잡혀갔다. 그러는 와중에 정민은 고래고래 버들의 이름을 불러 젖혔다. 동네가 다 시끄러울 지경이었다. 아무튼, 정민에겐 비극이었지만 황 대표와 둘이 있고 싶었던 버들은 방싯거리기 바빴다.
“이리 와 봐.”
“왜요?”
“두 번 말해야 돼요?”
제 앞에 선 버들의 꼬락서니를 황 대표가 위아래로 훑었다. 장이 선 날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았다. 현재 자신과 버들을 빗대자면 저잣거리에 놀러 나온 품계 높은 집안의 자제와 종놈 그 자체였다. 맑은 버들의 눈빛이 황 대표를 피했다. 한숨을 내쉰 황 대표가 마음대로 헝클어진 버들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줬다. 언뜻 시선이 마주쳤다. 사사로운 황 대표의 손길에 버들의 마음이 두둥실 날아다녔다.
“치사한 새끼.”
간신히 포도 지옥에서 탈출한 정민이 산책하고 유유히 돌아온 버들을 보자마자 펄쩍펄쩍 뛰었다.
“왜 또 왔어.”
“간다는 인사하러!”
“벌써 가?”
……가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서로 말똥말똥 마주 보고 있는 버들과 정민을 남겨 두고 황 대표가 집 안으로 사라졌다. 산책할 땐 분명 괜찮았던 것 같은데 찰나 황 대표의 표정이 좋지 않단 걸 알아차린 버들이 초조하게 굴었다.
“이거.”
“뭔데?”
“연고. 입안에 바르는.”
“그런 것도 있어?”
“사 왔어.”
바스락거리는 비닐봉지를 버들이 건네받았다. 두 개였다. 하나는 정민이 사온 연고. 하나는 포도.
“포도 못 먹어.”
“연고 발라서 나으면 먹어.”
“대표님 드려야겠다.”
“야. 내놔.”
“……치사하다.”
그냥 해 본 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줬던 포도를 정민이 낚아채 갔다. 아쉬운 마음에 버들의 시선이 포도가 든 비닐봉지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연고, 얼마야?”
“됐어. 그거 뭐 얼마나 한다고.”
“그래도.”
예약한 버스 시간까지 좀 남았다면서 정민이 정자에 앉았다.
“너도 앉아.”
“응.”
코밑으로 포도 향기가 달달하게 풍긴다. 시골에 반드시 와야 하는 특별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배차가 긴 차편 때문에 잠깐만 머물렀다가 가는 정민이 참 실속 없이 느껴졌다. 버들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바람이 살랑거리며 지나갔다.
“너 여기서 안 심심해? 네 또래도 없잖아.”
“나는 여기 놀러 온 거 아니라니까. 일하러 온 거야.”
그리고 또래가 있다고 해도 걔랑은 안 놀았을 거다.
“그래서 안 심심하다고?”
“응.”
선뜻 버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 여기서 살고 싶어.”
“진짜? 왜?”
“황 대표님이랑 같이.”
“…….”
경기에서 이겨야 하는 운동선수들은 덩치가 커서 겉으로 둔해 보일지언정, 기본적으로 동물적인 촉이 발달하게 되어 있다. 정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입안이 순간 썼다. 무의식중에 정민이 제 뺨을 매만졌다. 사실 황 대표란 사람을 향한 버들의 감정이 무언지 언뜻 짐작이 가능했다. 아무 감정이 없었다면 카페에 앉아 형 친구 얼굴을 뭐 하러 그리고 있었겠어?
“모자는 줬냐?”
“……아니.”
“왜? 준다면서 신나게 사더니.”
“안 받으실 거 같아서.”
버들이 생각난 김에 모자를 들고 왔다.
“안에는 뭐야?”
“자두랑 참외. 황 대표님 드리려고 했는데, 싫다고 하셔서.”
싱싱함을 잃고 물러 터지기 시작한 자두를 버들이 아까워하며 살폈다.
“유버들.”
“응?”
기다란 버들의 속눈썹을 말끄러미 정민이 주시했다.
“너 남자 대 남자란 말 뭔지 알아?”
“알아.”
버들이 돌연 정민을 뒤돌게 했다. 뭣도 모르고 정민이 버들을 따랐다. 아! 정민의 비명이 크게 울렸다. 버들이 주먹으로 정민의 등을 쾅 내려친 것이다.
“왜 때려?”
때린 쪽이나 맞은 쪽이나 어리둥절했다.
“남자 대 남자. 한 대씩 치자는 거 아니야?”
“누가 한 대씩 치자는 걸 남자 대 남자래?”
“아니야?”
“아니야!”
“그렇다면 미안.”
버들의 손은 몹시 매웠다. 근육은 올록볼록해 가지고는 정민이 유난스럽게 좁은 정자를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남자 대 남자가 뭔데?”
“솔직하게 털어놓자는 거지!”
정신 사납다. 여태 굴러다니는 정민의 멱살을 잡아 버들이 진정시켰다.
“뭘 솔직하게 털어 놓아?”
“유버들. ……우리 친구 맞지?”
평소 가벼운 어투가 아니었다. 그런 말을 진지하게 뱉고 나니, 버들과의 관계를 스스로 정리해 버린 꼴이다. 그나마 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이라 다행이라면서 정민이 씁쓸한 제 속을 위로했다.
“친구인 데다 남자 대 남자로 솔직하게 말하는 거다.”
말간 얼굴로 버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
정민이 목소리를 낮췄다.
“저 사람 좋아해?”
저 사람이 곧 황 대표란 걸 알았다. 놀란 기색으로 버들이 정민을 마주 봤다. 모자 깃을 잡고 있는 버들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너무 단도직입적이라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버들의 눈이 갈 곳을 잃고 잠시 방황했다. 마른 침을 삼켰다. 포도 주변으로 벌 한 마리가 날아왔다. 작은 날개치고 꽤나 소란스럽다.
“저…….”
더듬거리면서 말문이 터지자 엉켰던 머릿속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굳어 있던 버들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대표님은 나 싫어해.”
무덤덤하게 버들이 대답했다.
“너 싫어하는 사람한테 모자는 왜 사 주려고 그러냐?”
“…….”
“자두랑 참외는 왜 주려고 그러고.”
불만스럽게 정민이 미간을 좁혔다.
“대표님이 나 싫어한다니까 그래서 내 마음대로 하는 거야.”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버들의 입술이 차분히 열렸다.
“내가 모자 안 사 줘도 싫어하실 거고, 사 줘도 싫어하실 거고. 자두랑 참외 안 줘도 싫어하실 거고, 줘도 싫어하실 거고. 어차피 뭘 해도 미움받고 있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지. 대표님한테 나는 뭐든 다 주고 싶으니까.”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아무런 말없이 해가 지는 광경을 바라봤다.
“또 놀러 올게.”
“너 차 시간 늦은 거 아니야?”
“늦었지.”
“어떡해?”
“할아버지 집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출발해야지, 뭐.”
그렇구나.
“다음에 놀 거 챙겨 올게.”
“담배나 사 오라니까.”
“그래. 담배도 사 오고, 놀 것도 챙겨 올게.”
버들이 웃었다.
“너 다음에 오면 매실주 마시러 갈래?”
“웬 매실주?”
“내가 매실 열심히 땄거든. 매실주 담근 거 맛보여 주신댔어.”
“그래? 알았어. 전화할게.”
“응.”
남자 대 남자로서 어색해진 침묵을 깨고 정민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굴었다. 그런 정민에게 연신 손을 흔들어 준 뒤 버들은 황 대표가 있는 집 안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나란히 벗겨져 있는 황 대표의 신발 옆에 버들의 운동화가 저만치 날아가 짝짝이로 뒹굴었다.
“창문 닫을게요. 밤 되면 벌레 들어오니까.”
작게 중얼거린 버들이 열려 있는 창문을 닫았다.
“대표님. 식사 안 하세요?”
“…….”
“포도 좋아하세요?”
“…….”
“정민이가 갖다준 게 있는데 되게 달거든요.”
“…….”
“제가 먹어 봐서 알아요.”
“…….”
“대표님. 포도 싫어하세요?”
과묵한 황 대표를 향해 서 있던 버들이 얕게 턱을 주억거렸다.
“저 씻고 나올게요.”
수건을 챙긴 버들이 욕실 문을 닫았다.
「대표님은 나 싫어해.」
황 대표의 곧은 눈썹이 일그러졌다.
비닐봉지가 바스락거렸다. 버들이 연고를 들고 거울 앞에 섰다.
“유버들 씨.”
“네?”
제 쪽으로 다가오란 황 대표의 지시에 버들이 연고를 내려놨다.
“그거 들고 와.”
샤워를 한 것과 별개로 지저분한 버들의 손가락을 보며 황 대표가 인상을 찌푸렸다. 제 옆자리에 버들을 앉게 했다.
“아, 해 봐.”
“…….”
“아.”
“……싫어요.”
순간 황 대표의 속이 어그러졌다. 아까 다른 사람한테는 스스럼없이 아, 입을 벌려 주던 버들을 봤다. 도망치려는 버들의 어깨를 억세게 잡아 눌렀다. 흠칫 놀란 것도 잠깐. 아픈지 버들이 신음했다.
“아, 해.”
“……왜요?”
“내가 억지로 벌려요?”
“…….”
다그치는 황 대표의 앞에서 버들이 얼굴을 붉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버티려고 했지만 그건 제 바람으로 그쳤다. 싸늘한 황 대표의 눈초리에 원하는 대로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제 자신이 무력해지는 기분이다. 버들의 입안의 상처를 황 대표가 눈으로 확인했다.
“입, 이거 왜 이래?”
이유를 추궁해 봤지만 멍청한 게 미적거리면서 외면할 뿐이다. 하기야 이유가 뭐가 있겠어. 밖에서 까불고 다니면서 지가 씹었겠지. 못 미덥단 표정으로 황 대표가 버들의 손에 들린 연고를 낚아챘다. 남이 쓰던 거였으면 당장 내다 버렸을 텐데 연고는 새것이었다. 사용 기한부터 성분까지 모조리 확인하고 나서야 황 대표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서랍을 열어 면봉을 꺼내 들었으나 이게 썩 위생적인 방법은 아닌 것 같다. 황 대표가 내뱉는 한숨에 버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잠깐만 있어.”
깨끗하게 손을 씻고 황 대표가 돌아왔다. 그러곤 손가락 끝에 연고를 조금 덜었다.
“아, 해.”
“……제가 할게요.”
“또 두 번 말하게 하네.”
권태롭게 들린 황 대표의 목소리에 신경질이 묻어 있었다.
“제가 바르면 돼요.”
“아, 해.”
버들의 눈가가 일렁거린다. 어떻게 제 입안의 상처를 황 대표가 알아차렸는지 모르겠지만 아픈 거 절대로 보여 주기 싫었다. 미어지는 속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대로 넘어가 주길 바랐다. 버들의 눈이 질끈 감겼다. 제 턱 아래를 황 대표가 움켜쥔 것에 버들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황 대표의 손가락이 버들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어떠한 침입도 받아 본 적 없는 여린 점막 위를 황 대표의 손끝이 긁었다. 소름이 돋았다. 처음 느껴 본 감촉이 절로 발바닥을 곱아들게 만들었다. 숨까지 멎으며 버들이 움찔 떨었다.
손가락에 남은 연고를 씻어 내기 위해 황 대표가 욕실로 들어갔다. 욕이 튀어 나갔다.
“매실 그거 갖다가 버려.”
“…….”
“매실주, 그런 것도 마시지 말고.”
“제가 매실 많이 따서 주신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그거 마시지 말라고.”
“매실주…… 맛있다던데. 그럼, 한 번만 마셔 보고…….”
화풀이였다. 노트북을 밀어 둔 식탁 위에 버들을 눕혀 놓고 잇자국을 냈다.
* * *
현관으로 올라가는 낮은 계단에 버들이 앉아 있었다. 그사이 헐겁게 뜬 달이 자취를 감췄다. 안개가 끼면서 동이 막 트기 시작했다. 무릎 위에 가만히 턱을 기대고 있던 버들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희끄무레한 시야를 비집고 점점 다가오는 차가 보였다.
며칠 전처럼 새벽녘, 황 대표의 직원들이 잔뜩 다녀갔다. 살짝 기울인 손목에 황 대표가 향수를 뿌리는 동안 직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매트리스를 교체하고, 에어컨과 공기 청정기 필터를 갈아 끼우고, 마셔서 없앤 와인과 버려서 없앤 식기들을 충당했다. 한 번 겪어 본 적이 있는 상황이었다. 혼자 남겨질까 봐 버들의 불안함은 곧바로 몸집을 키웠다. 미처 간수하지 못한 버들의 베개가 직원들의 발에 밟혀 이리저리 채였다. 외출 준비를 하는 황 대표의 모습에 홀딱 빠져 있던 탓에 제 베개의 수난을 버들은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베개가 두 개 있는 것도 아니고 저거 딱 하나뿐인데. 속상하다. 솜이 뭉쳐 팡팡해야 하는 부분들이 쑥 꺼져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버들이 베개를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해 반죽을 하는 사이, 황 대표가 집을 나섰다. 집안이 한적해졌다. 놀란 버들이 베개를 내팽개쳤다. 부랴부랴 밖으로 뛰어나갔지만 황 대표의 차는 이미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중이었다. 시큰거리는 가슴을 버들이 붙잡았다. 베개 따위가 뭐라고 거기에 집중했을까. 황 대표에게 따라가고 싶단 말도 꺼내지 못했고 언제 오실 건지 묻지도 못했다. 기운 없이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해가 질 때부터 버들은 같은 곳에 앉아 황 대표만 기다렸다. 하루가 지나 시간은 또다시 새벽이 됐다.
황 대표와 버들의 시선이 짧게 마주쳤다. 버들을 발견하고선 덩달아 안전벨트를 푸는 비서를 제지한 뒤 황 대표가 차에서 내렸다. 완벽한 모습의 황 대표를 바라보던 버들이 다시 무릎 위에 턱을 기댔다. 속눈썹이 아래로 잠기면서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황 대표는 시간과 계절을 가리지 않고 늘 멋진 사람이란 걸 자신 있게 장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차가 후진으로 빠졌다. 은근히 답답했었던 소매 단추를 풀며 황 대표가 버들을 지나쳤다. 긴 다리가 여유롭다. 현관문을 열려던 찰나, 황 대표가 뒤를 돌아봤다.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있던 버들이 한숨을 폭 내쉬더니 천천히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어깨를 어슷하게 비트는 순간 예고도 없이 황 대표와 정통으로 눈이 부딪혔고 그 바람에 움찔거리면서 놀랐다.
“…….”
“…….”
수영도 하고, 정사를 즐기고 온 터라 기분은 드물게 개운한 상태였다.
“저 기다렸어요?”
“아니요.”
버들이 고개까지 저어 가며 황 대표의 물음에 바로 부정했다. 단정한 황 대표의 목울대가 일렁거렸다. 직전까지 개운했었던 기분이 버들을 보는 순간 점차 흩어졌다. 말만 기다리지 않았다고 했을 뿐, 그게 거짓말이란 건 빤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버들의 머리카락과 드러난 살갗이 아침 이슬 때문에 축축해 보였다. 저렇게 눈에 띌 정도로 젖었다는 건 밤새도록 밖에 나와 있었단 뜻이 된다. 몇 달을 거슬러 그 언젠가 호텔과 그리 멀지 않은 가로등 아래 막막히 앉아 있던 버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진짜 안 기다렸어요?”
시선을 피한 다음에 버들이 턱을 주억거렸다.
「기다려? 기다리는 것도 자격이 있어야지. 넌 그런 거 없어.」
마음껏, 황 대표님을 기다릴 수 있는 자격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자격이 구체적으로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버들이 계단을 하나씩 밟아 올라갔다. 다섯 개밖에 되지 않아 금방 황 대표와 나란히 설 수 있게 됐다. 하루 동안 너무 보고 싶었다. 고리를 돌려 버들이 문을 열었다. 황 대표가 먼저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잡아 줬다.
“대표님. 어디 다녀오세요?”
황 대표의 눈썹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저 기다린 거 아니에요. 절대로.”
버들이 저 스스로를 두둔했다.
“궁금해서요. 그냥, 궁금할 뿐이에요.”
수작질이 어설프다. 무시로 일관하던 황 대표의 입술이 열렸다.
“……수영.”
아. 수영! 울적하게 처져 있던 버들의 어깨가 언제 그랬냐는 듯 살아났다. 맞아. 여기는 시골이라 수영을 할 수 있는 스포츠 센터가 없으니까.
“대표님. 저, 어제…….”
본격적으로 버들이 황 대표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정장을 벗고 다시 편안한 청바지 차림으로 황 대표가 식탁 앞에 앉았다. 노트북이 켜지는 동안 손가락을 부드럽게 이완시켰다. 어제의 부재만큼 해야 할 일이 쌓여 있었다. 몇 시간째 황 대표가 업무에만 몰두했다. 재잘거리던 버들의 수다가 어느 순간 멎었다.
뻐근해진 어깨에 잠시 쉬고자 황 대표가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 자리에는 나뒹구는 색색별 색연필과 함께 버들의 노트가 활짝 펼쳐져 있었다. 곧장 거기에 관심이 향했다. 황 대표가 손끝으로 노트를 끌어당겼다. 페이지 가득 버들이 그려 놓은 게 해바라기다. 어제 혼자 집 지키느라 심심했나. 고작 낙서 수준이 아니라 해바라기 한 송이마다 디테일을 고루 살려 놨다. 초록색, 파란색, 보라색. 해바라기의 색깔은 색연필만큼이나 참 다양했다. 그러면서 정작 노란색 해바라기만 빠져 있었다.
“……아. 새끼 진짜.”
노트 귀퉁이에 빨간색 하트가 작게 그려진 걸 발견한 황 대표가 인상을 썼다. 빨간색 하트보다 정확히 빨간색 하트 앞에 적힌 제 이름을 보고 인상을 찌푸린 거였다. 황정우. 제 이름 석 자 역시 버들이가 시뻘건 색으로 꾹꾹 눌러 적어 놓았다. 황 대표의 인상은 금방 펴졌다. 팔랑팔랑, 페이지를 넘겨 가며 버들의 노트를 앞쪽까지 전부 구경했다. 비위 상하게 만드는 못난 손이 조각과 그림을 할 때엔 쓸모가 있다.
「저 빨아먹을 거예요?」
「안 돼요? 빨아먹으면?」
황 대표의 고개가 버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제 단물 다 빨아먹어 주세요!」
황 대표가 잠시 턱을 괬다. 창밖으로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평소라면 버들이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니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때였다. 약하게 꼬물거리면서 버들이 잠투정 비슷한 걸 했다. 그 바람에 버들의 머리통이 베개 위에서 톡 떨어졌다. 동시에 황 대표의 미간이 좁혀졌다. 맨바닥에 누워 달랑 이불 한 장을 덮고 잠들어 있는 버들에게서 어떠한 불편함도 없어 보인다. 어떻게 저 정도로 둔할 수 있는지 기가 막힌 걸 떠나 이제는 신기할 지경이다.
잠이 들면서 버들의 수다가 멎은 대신 새근거리는 호흡이 귓가로 닿는다. 눈에서 안 보였을 땐 생각이 전혀 나지 않더니, 눈에 보이니까…… 또 거슬린다.
황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 버들의 밥그릇을 집어 들었다. 오늘만 그런 게 아니라, 버들이 제 곁에 바짝 붙어 하루 동안 저가 뭘 했는지 재잘거리는 말들 중에는 언제나 먹는 건 쏙 빠져 있었다. 밥그릇 안쪽은 물론 싱크대 자체가 물기 하나 없이 바짝 말라 있다. 그래도 혹시나 싶었다. 정말 한 끼도 챙겨 먹지 않고 미련한 새끼가 밖에서 하루 내내 저만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밥은.」
「먹었어요.」
「언제?」
「대표님은요?」
「…….」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오셨어요?」
내버려 두니까 이게 갈수록 거짓말만 는다.
“유버들.”
이름을 불러도 잠잠한 버들의 앞에 황 대표가 앉았다. 버들의 몸에 덮어진 이불을 확 걷었다. 역시나. 손이 시린지 버들이 배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못 만지게끔 버들의 손을 저만치 치워 버렸다. 동그랗게 파인 배꼽이 참 희고 뽀얗다. 황 대표가 버들의 납작한 아랫배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얼마나 지났다고 버들이 또 자기 배꼽을 만지려 들었다. 황 대표의 얼굴에 짜증이 담겼다. 살결 고운 배를 홀라당 보여 주고 무방비하게 배꼽 만져 대고.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버릇이었다. 황 대표가 아예 버들의 상의를 바지 속에 꼼꼼하게 집어넣었다. 배꼽이 만져지지 않자 곱게 잠이 든 버들의 눈가가 와락 찌푸려졌다.
“배탈 나.”
나지막하게 황 대표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가만히 버들의 손목을 쥐어 봤다. 얇다. 사내새끼란 걸 감안했을 때, 정말 지나칠 정도로 가늘다. 황 대표가 묵직한 한숨을 목구멍 뒤로 눌러 삼켰다. 귀찮은 거 질색인 이기적인 성격대로라면 뭐 어찌되든 등한시했을 텐데, 현재 같이 살고 있고 또 유 대표 동생이라니까 드물게 신경이 쓰이나 보다.
개를 두 마리나 데리고 사는 회사 비서가 했던 말이 현재의 상황과 적절하게 맞아떨어진다. 사료가 입에 맞지 않는지 개들이 잘 안 먹어서 걱정이라고. 그 개들은 식성이 좋아져 현재 날아다니는 파리도 잡아먹는다. 아. 반려동물을 처음 키워 보는 거라 서툴단 말도 했었지.
유 대표를 불러서 데려가라고 해야 하나.
“유버들 씨.”
황 대표가 잘 자고 있는 버들을 흔들어 깨웠다. 낮과 밤이 바뀌면 더 고생할 게 뻔하다. 버들의 눈이 뜨인 걸 보고 나서 황 대표가 멀찍이 물러났다. 일어나 앉은 버들의 얼굴이 멍하다.
“그러게 밤 꼴딱 새면서 누가 나 기다리랬어요?”
“……안 기다렸어요!”
극구 부인하는 꼴이 진짜 같잖다.
“밥 먹어.”
“나가서 먹고 올게요.”
주섬주섬 일어나 이불과 베개를 정리하는 버들을 황 대표가 직시했다.
“내 앞에서 먹으라고.”
“집에 밥 없어요. 스승님 댁에 가서 먹고 올게요.”
신발을 신은 버들이 잡을 새도 없이 얼른 밖에 나가 버렸다. 집에 밥이 없어? 거짓말인지 확인하기 위해 황 대표가 밥통 앞에 섰다. 난관이 바로 닥쳤다. 오븐과 가스레인지는 능숙하게 작동시킬 줄 알지만 단 한 번 사용해 본 적 없는 밥통은 어떻게 열어야 할지 모르겠다. 정체 모를 버튼이 여러 가지다. 헤매다가 관뒀다. 먹고 온다고 했으니까 알아서 잘 먹고 오겠지. 괴팍하더라도 스승님이라고 불리는 노인이 제자인 버들을 굶기지는 않을 테니까.
버들이 작은 돌멩이를 발로 찼다. 스승님 댁에는 가지 않았다. 그늘진 나무 밑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적당히 시간을 보낸 뒤 집으로 돌아갔다.
그림 작업에 집중해 저녁을 보낸 버들에게서 유화 물감 냄새가 났다. 저가 한 작업물이 만족스러웠는지 굉장히 뿌듯해 보인다.
“이리 와.”
씻고 나온 버들을 황 대표가 불렀다. 황 대표가 빼 준 의자에 버들이 앉았다.
“입안에 약 발랐어요?”
“발랐어요.”
“한 번도 못 봤는데, 내가?”
“……지금 바를게요.”
작게 대답 후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버들을 대신해 황 대표가 연고를 가져왔다.
“주세요.”
“너 손 더럽잖아. 감염되면 어쩌려고.”
“손 깨끗하게, 여러 번 씻었어요.”
“씻어도 더럽잖아. 이걸 내가 몇 번을 말해야 돼.”
고개를 숙이면서 버들이 주먹을 쥐었다. 흉측한 손톱이 가려지자 이번엔 갈라지고 튼 손등이 신경이 쓰였다.
“기다려.”
버들의 눈이 황 대표를 좇아갔다. 욕실에 들어간 황 대표가 손을 씻고 나와 물기까지 말끔히 제거한 뒤에 연고를 짰다.
“아.”
처음엔 안 보여 주려고 바득바득 버티더니 지금은 황 대표의 말에 버들이 순순히 입을 벌렸다. 확실히 입속의 상처에 제 지저분한 손이 닿는 건 별로 건강에 좋지 못한 일인 것 같단 판단이 들었다.
“가까이 와.”
황 대표 쪽으로 버들이 제 얼굴을 내밀었다. 서로가 가까워졌다. 소란스럽게 요동치며 심장이 반응했다. 아, 제발. 황 대표님에게 안 들켰으면 좋겠다. 부끄러운 조바심에 버들의 속눈썹이 빠르게 깜박이더니 한쪽으로 어색하게 비껴 났다. 황 대표의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스며들었다.
버들의 아랫입술을 스쳐 황 대표의 손가락이 천천히 입안으로 들어갔다. 버들이 움찔움찔 떨었다. 에어컨이 쌩쌩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더운 기분이 든다. 제 입안의 여린 점막을 긁는 황 대표의 손끝은 단지 낯선 기분으로 끝나지 않았다. 날카롭게 번개가 치는 것 같다. 척추를 타고 오소소 돋아난 소름에 버들의 어깨가 바짝 움츠러들었다. 보이지 않는 발가락도 옴짝 말았다.
신중하게 약을 발라 주던 황 대표가 돌연 눈썹을 찌푸렸다.
“혀 저쪽으로 해.”
“…….”
“저쪽으로 하라니까.”
“…….”
황 대표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난감한 기색으로 버들이 쩔쩔맸다. 저쪽으로 혀를 하려고 해도 의식이 되니까 뜻대로 따라 주지 않았다. 버들의 혀가 황 대표의 손가락 측면을 다시 말캉하게 짓눌렀다. 약을 두껍게 발라 준 뒤에 황 대표가 손가락을 빼냈다. 넣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버들의 아랫입술을 은밀하게 건드렸다. 거기에 버들이 흠칫거리며 놀랐다. 황 대표의 손가락이 타액으로 젖어 촉촉했다. 손을 씻고 황 대표가 욕실에서 나왔다. 황 대표가 발라 준 연고를 혀로 굴려 맛을 보던 버들이 척추를 꼿꼿하게 세웠다. 고맙다고 인사해도 되려나. 생각하면서 버들의 큰 눈이 끔벅거렸다.
“기다리지 마.”
“안 기다렸는데…….”
“안 오면 안 오나 보다 해. 내가 너 기다린다고 일찍 들어와야 하는 거 아니잖아.”
“진짜예요. 저, 대표님 안 기다렸어요. 제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데요.”
참 나.
“……진짜 기다린 적 없는데.”
버들의 말끝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작아졌다.
“스승님 댁에서 밥은 잘 먹고 왔어요?”
“네.”
진짜로 먹은 건지 안 먹은 건지 의심스러워서 바라본 건데 눈 마주치니까 좋아서 그저 버들이 방싯거리면서 웃었다.
“해바라기 그려 놓은 거 봤어요.”
“……보셨어요?”
“노란색 해바라기는 왜 안 그려요?”
“그려 드릴게요! 노란색 해바라기 백 송이, 천 송이, 만 송이…….”
버들이 부르는 숫자가 터무니없이 커져 갔다.
“일조 송이…….”
사기꾼이네. 황 대표가 버들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가로운 오후에 접어들었다. 밖에 나갔던 버들이 헐레벌떡 집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한창 시나리오를 수정 중이던 황 대표가 인상을 썼다. 기어이 타자를 치던 손이 우뚝 멈췄다. 조각할 때 두르는 버들의 앞치마에서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그걸 지적하려던 순간이었다. 버들의 조막만 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가뜩이나 하얀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려 있다.
“뭐야.”
“……대표님.”
“왜.”
“저랑 어디 좀 같이 가 주세요…….”
귀찮다. 황 대표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저 조각칼 잃어버렸는데, 그거 가지러 혼자 못 갈 거 같아서요.”
“…….”
“황 대표님. 무서워서 그러는데, 한 번만 같이…….”
황 대표가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노골적으로 성가시단 걸 드러내자 버들의 말문이 닫혔다.
“너 조각칼 잃어버린 걸, 나보고 어쩌라고.”
“…….”
숨을 쌕쌕 내쉬며 버들이 뒤늦게 고개를 내저었다.
“바빠.”
군더더기가 없다. 딱 자른 황 대표의 거절에 더 부탁하지 못하고 버들이 문을 닫았다. 집에 오기 전 놀랄 일이 있었다. 조각도를 놓칠 만큼 크게 위협받았다. 계단에 쭈그려 앉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는데 그게 잘 안 된다.
황 대표가 일어나면서 의자가 거칠게 뒤로 밀려났다. 한 번 깨진 집중이 돌아오지 않는다. 아. 짜증나.
“뭐야.”
문 열리는 기척에도 버들은 그대로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아무것도 아니란 듯 고개만 내저을 뿐이었다. 황 대표가 버들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한다고 했죠.”
“……물려고 해서.”
“누가? 너를?”
황 대표가 인상을 썼다.
“물렸어?”
“아직 물리진 않았는데…….”
“물릴 뻔했어?”
버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풍성한 머리숱이 찰랑거렸다.
“…….”
“…….”
버들의 맑은 눈동자에 화가 난 황 대표의 모습이 그대로 비춰졌다.
“너는 사내새끼가 네 몸 하나 못 지켜?”
내가 진짜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 순간적으로 신경질이 솟구쳤다.
“어디서 누가 그랬는데.”
“…….”
“어디서 누가 그랬냐고, 너한테.”
“…….”
혼나는 줄 알고 버들이 아연해졌다.
“말 안 해?”
“…….”
“유버들 씨.”
“…….”
버들이 아랫입술을 질끈 말아 물었다. 속이 터지겠다. 얘가 멍청하게 생기고, 모자라 보이니까 분명 괴롭히고 싶은 악한 마음이 들었을 거다. 그렇다고 실제로 만만하게 봐도 되는 놈이 아니었다.
“조각칼, 뺏겼어요?”
“뺏긴 게 아니라, 제가 놓쳤어요.”
“어디서?”
“저기…… 파란색 집 대문이요.”
“기다려.”
황 대표가 집 안으로 들어가 핸드폰을 찾아 당장 변호사 팀을 호출했다. 당황한 변호사에게 자초지종 상황을 설명하는 대신, 확실하게 용건만을 전하고 그걸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대표님. 제가 생각이 짧았는데요.”
“그래서, 뭐. 빨리 말해.”
“가서 어떻게 하실 건지…….”
잔뜩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버들이 황 대표에게 물었다.
“말로 풀 거야.”
황 대표가 이를 으득 씹었다.
“확실히 물려고 했어?”
“네.”
“넌 뭐 하고 있었는데.”
“저는 그냥…… 인사했어요.”
“그냥 인사했는데, 그랬다고?”
“네. 이빨이 엄청 무서웠어요.”
변태 새끼 아니야? 얘가 인사했는데 왜 물려고 해? 황당함을 넘어 황 대표의 표정이 냉혹해졌다. 파란색 집 대문이 가까워졌다. 버들이 떨어뜨렸던 조각도는 그 자리 그대로 있었다. 황 대표가 조각도를 주워 버들에게 건넸다.
“쟤야?”
어느 틈에 제 등 뒤에 숨은 버들을 향해 황 대표가 물었다. 버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시 말을 잃었던 황 대표가 다시 전화를 걸어 변호사 호출을 취소시켰다.
“가자.”
버들의 손목을 붙잡고 대문 앞을 떴다.
“대표님?”
“앞으로 여기 지날 때 인사하지 말고 그냥 고개 숙이고 가.”
“…….”
“눈도 마주치지 말고. 알았어?”
“말로 푸신다고…….”
“말로 해서 알아듣는 상대가 아니잖아.”
파란색 대문에는 ‘개조심’이란 종이가 찰싹 붙어 있었다. 버들이 힐긋 뒤를 돌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커다란 개가 사납게 으르렁 이빨을 드러냈다. 목줄이 찰캉거렸다. 움찔 떨며 버들이 황 대표에게 더 바짝 붙었다.
“……아. 대표님!”
집까지 버들을 끌고 와 식탁에 엎드리게 한 황 대표가 제 잇자국이 잘 남아 있나 확인했다.
* * *
그늘을 따라 걸었다. 한적하다. 황 대표가 통화를 끝내자 주변에서 들리는 것들이라고는 바람소리, 벼가 흔들리는 소리, 풀벌레 울음소리가 전부였다. 두 개의 그림자가 길쭉한 형체로 흙바닥에 그려졌다. 살짝 턱을 치켜들어 구름을 보며 걷던 버들이 황 대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힐긋 뒤를 돌아봤다. 버들의 손에는 어디서 주웠는지 모를 나뭇가지가 들려 있었다. 황 대표의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주워도 꼭 자기 같은 걸 골랐다. 앙상하단 뜻이었다.
제 뒤를 잘 따라오고 있는 황 대표를 확인하자마자 안정감이 물씬 차오른다. 차오르다 못해 넘쳤다. 버들이 유유히 다시 앞쪽을 바라봤다. 터벅터벅. 버들은 어김없이 운동화 뒤를 꺾어 신은 채다. 곧 벗겨질 것처럼 불편해 보인다. 황 대표의 시선이 움푹 파인 버들의 아킬레스건과 새하얀 발뒤꿈치를 가만 주시했다. 발목까지 대충 돌돌 만 바지를 더 올리면 버들의 종아리 정중앙에 자신이 물어 놓은 흔적이 있다.
“넌 무인도 가도 잘 살겠다.”
“대표님. 무인도 가실 거예요?”
“미쳤어?”
“그럼 저도 갈 일 없어요.”
가느다란 버들의 목 뒷덜미가 절레절레 흔들린다.
“내가 무인도에 가면?”
“저도 따라가야죠.”
단순한 대답에 웃음기가 살랑 전해져 왔다.
“넌 단순해서 좋겠다.”
“대표님. 무인도에 가서도 제 단물 빨아먹으면 되잖아요.”
“무인도에 가면 넌 그냥, 씹을 가치도 없는 껌이야.”
“왜요? 조각이랑 그림, 저 계속할 건데요?”
“그러니까. 무인도에서 조각이랑 그림을 어디다가 팔아 써먹을 건데.”
“…….”
무인도, 그 까짓 게 뭐라고. 되게 현실성 있게 구는 황 대표를 버들이 부루퉁하게 흘겼다.
“무인도에 개구리 나와라.”
버들이 작게 중얼거렸다.
“메뚜기도 나오고. 매미도 나오고. 지렁이도 나오고.”
“……야.”
더 이상 언급할 가치도 없단 듯 황 대표가 콧방귀를 뀌었다.
“개구리나 벌레, 제가 다 잡아 드릴게요!”
“앞에 보고 걸어. 넘어지니까.”
“대표님. 무인도에 갈 때 저 꼭 데려가세요.”
“아까 뭐 들었어. 무인도에 안 간다니까.”
“그럼 어디 가실 거예요?”
“아무 데도 안 간다고.”
별생각 없이 내뱉은 대답이었지만 황 대표의 그 단호한 어투는 버들을 설레게 만들었다. 눈망울이 초롱초롱하다.
작게 들리기 시작했던 물 흐르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별 말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도 마지막 종착지는 꼭 개울가였다. 겨우 아침 열 시를 넘겼을 뿐이건만, 지극히 여름다운 날씨였다. 태양이 뜨겁다. 상대적으로 물이 튀기는 개울가 근처의 공기는 제법 시원하게 느껴졌다. 서둘러 반대편으로 건너가고 싶다.
개울가 반대편은 가뜩이나 한가하고 고요한 시골 마을에서도 더 한가하고 고요한 느낌을 받을 수가 있다. 거기에서 황 대표의 마음에 든 건 나무로 울창하게 둘러싸여 은은하게 퍼지는 솔잎 향이었고, 버들의 마음에 든 건 나무로 울창하게 둘러싸여 은은하게 퍼지는 솔잎 향을 감상하며 여유를 즐기는 황 대표의 모습이었다. 어디가 되었든, 설사 거기가 그림도 조각도 할 수 없는 무인도라고 할지언정 황 대표와 함께라면 그 자체만으로 행복할 거 같다.
황 대표가 개울을 건너갔다. 버들이 물속에 발을 집어넣었다. 깊이가 아쉽다. 차라리 허벅지, 가슴, 목까지 물이 차올랐다면 더 좋았을 뻔했다. 그럼 여기서 황 대표님, 충분히 수영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럼 수영하려고 서울 갈 일도 없으실 거고, 그렇게 되면 나도 여기서 황 대표님 없이 혼자 남겨지는 일도 없을 텐데.
물속에 비뚤게 겹쳐진 돌을 밟은 버들이 휘청거렸다.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다. 버들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홀딱 젖어 버리면 그야말로 꼴사납다.
“황 대표님.”
“네.”
“좋아해요.”
“…….”
* * *
“아, 나도 보고 싶어.”
필요한 자료를 찾던 중 황 대표가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밖에서 그림을 그리던 버들이 통화 중인 모양이었다.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무슨 말을 하는지 고스란히 들려왔다.
-나는 세 번 봤어. 네 동기들도 두 번씩은 봤을걸?
“두 번, 세 번 씩이나? 왜?”
-이해가 안 가서.
“너 내용 다 알고 보는 거였잖아. 왜 이해가 안 가?”
-이건 직접 봐야지만, 내 말뜻을 알 수가 있다.
버들이 코를 훌쩍였다.
“너 지금 서울 산다고 잘난 척하냐?”
-넌 날라리처럼 담배 피우는 걸로 잘난 척하잖아.
“어른인데 뭐.”
-옛날부터 폈다며, 담배?
“그렇기는 한데…….”
오랜만에 정민과의 말다툼에서 버들이 밀렸다.
“나도 보고 싶다.”
-내가?
“영화.”
본인도 모르게 구기고 있던 표정을 황 대표가 폈다. 아. 보고 싶다는 게, 영화.
-야, 끊어.
“안 그래도 끊으려고 했어.”
-왜? 전화비 아까워서?
“그래.”
-이거 내가 건 전화거든? 전화비 아까우니까 끊어.
“응.”
-바로 응, 이러면 되냐, 안 되냐.
정민과 버들이 유치한 주제로 서로 옥신각신했다.
-서울 안 와?
“몰라.”
-영화 금방 내려갈걸.
“어쩔 수 없지.”
-영화 보고 싶다면서?
“나중에 텔레비전에서 해 주지 않을까?”
-그때까지 기다린다고?
“…….”
버들이 손등으로 제 코끝을 문질렀다.
“이제 진짜 끊어야 돼. 나 그림 그리고 있었거든.”
-……알았어. 놀러 갈게.
“담배 사 와.”
나이가 몇인데 담배 셔틀을 해야겠냐고 투덜거리면서 정민이 전화를 끊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버들이 핸드폰으로 보고 싶어 했던 영화를 검색했다. 요즘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인 만큼 후기들이 와르르 올라와 있다. 생각이 필요한 스릴러란 장르도 좋고, 프랑스 영화란 점도 끌린다. 발음이 우아하다. 불가피하게 뉴욕에서 3년간 시간을 보냈어야 했지만, 선택권이란 게 있었더라면 무조건 프랑스로 날아갔을 거다.
……아. 한창 색칠 중이던 버들의 손이 멈췄다. 무심코 아쉬움에 잠겨 있던 생각을 얼른 지워 냈다. 뉴욕이어야지. 그래야 황 대표님이 잊어버렸던 수첩을 내가 줍지. 역시. 운명이라니까. 버들이 콧노래를 작게 흥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