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비 오는 날 흙냄새 (4)
학습 능력이 생겼다. 개울가 앞에 선 버들이 허벅지 중반까지 옷을 쭉쭉 잡아당겼다. 탄력이 없는 소재라 입을 앙다물고 힘을 줘야 했다. 운동화를 벗어 양손에 들었다. 이러면 빨랫감을 줄일 수 있다.
“넌 여기 밟고 가란 돌이 안 보여?”
황 대표가 인상을 쓰며 지적했다.
“……흔들려서.”
“이정도 균형도 못 잡아?”
황 대표의 꾸중에 담배 생각이 났다. 묵묵히 버들이 물가를 휘저으며 건너갔다.
“너는 그 몸을 어디다 쓸래?”
황 대표의 시비에 버들이 턱을 당겨 제 몸을 내려다봤다. 대표님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저도 대표님 나이 되면 균형 잘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기죽지 않고 버들이 따졌다.
“넌 애초에 글러 먹었어.”
“저는 대표님 몸이었으면…….”
“……내 몸이었으면 뭐.”
마주친 눈빛이 은근하게 지속되었다.
“대표님. 군대 갔다 왔어요?”
“유 대표랑 나란히 입대하고 나란히 제대했어.”
“……아.”
“왜. 넌 군대 안 가려고?”
버들이 딴청을 피웠다.
“와. 양아치였네.”
권태로운 어조로 황 대표가 조롱했다.
“…….”
“…….”
진짜 아무것도 모르면서.
“버들 씨.”
산책을 끝내고 다시 개울가 반대쪽으로 건너가기 위해 운동화를 벗어 드는 버들을 황 대표가 불러 세웠다. 멀뚱히 저를 올려다보는 버들의 눈빛에 황 대표가 낮게 한숨을 쉬며 거리를 좁혔다.
“어?”
들어서 옮겨 주려면 좀 곱게 들어주지. 황 대표가 버들을 짐짝처럼 한쪽 어깨에 둘러멨다. 가뿐했다. 가뿐하다 못해 지나치게 가벼운 버들의 무게에 잠깐 놀랐던 게 사실이었다. 갑자기 붕 들린 몸에 놀란 건 잠깐이었다. 거꾸로 엎어져 코가 황 대표의 등에 부딪히고 피가 쏠려 얼굴이 빨개지면서도 버들은 마냥 해맑았다.
“대표님.”
“가자. 집에.”
황 대표가 땅에 내려 주자마자 버들이 손에 들고 있던 운동화를 황급히 꿰신었다. 놓칠세라 바짝 쫓아갔다.
“저 왜 들어 주신 거예요?”
“…….”
“네? 저 왜 들어 주셨어요?”
“…….”
“저 물에 젖어도 되는데요?”
“…….”
“운동화 젖어도 되고, 옷도 다 젖어도 되는데요?”
“…….”
“홀딱 젖어도 저는 상관없는데요?”
“…….”
“황 대표님. 저 왜 들어 주신 거예요? 네?”
……두 번 다시, 안 들어 준다.
* * *
기껏 황 대표가 입안에 발라 준 약을 혀로 굴려 맛보는 걸 들켰다. 도망치려는 버들의 손목을 황 대표가 붙잡았다. 진득하게 혼이 난 버들이 풀이 죽은 채 입을 벌렸다. 황 대표가 다시 버들의 입안에 꼼꼼하게 연고를 발라 줬다. 손가락이 점막 어디를 스칠 때마다 척추까지 저릿해지는 기분이 들어 버들의 귓불이 조금 붉어졌다.
“밥 먹고 연고 또 발라야 하니까…….”
“밥은 나가서 먹고 올게요.”
버들이 대뜸 황 대표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래. 그럼 잠도 나가서 자라.”
쌀쌀맞게 외면한 황 대표의 모습에 버들은 점심때에 맞춰 하는 수 없이 그릇을 들고 식탁 앞에 앉아야 했다.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은 황 대표가 와인 잔을 들었다. 고개를 살짝 꺾었을 때 황 대표의 시선이 버들을 향했다. 젓가락질이 신통치 않다. 밥을 처먹지 않고 밥그릇의 밥알이 얼마나 되는지 세고 자빠진 버들이 심기를 매우 거슬리게 만든다. 아, 진짜. 뭐 저런 새끼가 다 있나 싶다. 사사건건 마음에 안 드는 짓만 골라 해 대는 것 같다. 끝까지 무관심으로 일관하려고 했으나 혈압이 올라 결국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맛없어요?”
노부인이 솜씨를 발휘한 반찬들을 훑어보며 버들이 얼른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입이 아파서요.”
그리고 입맛도 없었다.
“음식 들어가면 아파요?”
“네.”
황 대표가 인상을 썼다. 버들의 눈이 찰나 반짝였다. 그만 먹으라고 할 줄 알았다.
“그래도 끝까지 다 먹어.”
또 하루가 간다.
* * *
하루가 느리게 흐르는 거 같으면서, 빨리 지나가는 거 같고. 무미건조 하는 거 같으면서, 평온한 거 같기도 하다. 서울에서는 집중이 필요할 때면 아무도 안 만나고 집에만 틀어 박혀 24시건 48시건, 72시건 보낸 적이 다수였다.
대꾸 한 번 하지 않아도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공중을 메우고, 밥그릇이 달그락거리고, 산책을 함께하고. 딱 한 명과 24시, 48시, 72시를 보내고 있단 사실이 새삼 자각되어 조깅 잘하다 말고 황 대표가 괜히 울컥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의 기준이 여기선 조건이 성립되지 않았다.
황 대표가 커피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노트북 화면을 빤히 바라보던 황 대표가 스페이스 바를 두어 번 눌렀다. 신경질적이다. 무슨 일이시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잡지를 보고 있던 버들이 빠끔히 고개를 들었다.
“유버들 씨.”
“……네?”
아직까지 사고 친 거 없는데, 나. 여태 가만히 앉아 잡지만 보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히 뜨끔했다. 가까이 오란 황 대표의 턱짓에 버들이 잡지를 내려놓고 주춤거리면서 다가갔다.
“노트북 같은 거 잘 다뤄요?”
“이거 왜 이래요?”
노트북 화면 가득 블루 스크린이 떠 있다. 잠깐 짜증이 나긴 했지만 외장하드에 자료들을 전부 저장해 놓기에 정작 황 대표는 별로 심각성을 못 느꼈다. 반면에 버들의 조막만 한 얼굴은 잔뜩 심각해졌다.
“고쳐 봐.”
아주 쉽고, 간단한 어조로 그러면서 우아하게 황 대표가 명령했다.
“고쳐요? 제가요?”
“응.”
의자를 뒤로 밀어 물러난 황 대표와 노트북 사이로 버들이 들어왔다. 꼴에 본 거는 있나 보다. 에프로 시작되는 숫자들을 일일이 눌러 보고, 엔터를 반복해서 치는 버들의 손가락이 신중하다. 그런 정성에도 블루 스크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까지 없던 이상한 까만색 빗금들이 쳐졌다. 버들이 당황했다. 둘 다 내로라하는 재벌가의 자제들이었다. 물건 아까울 줄 몰라도 되는 환경에서 자랐다. 특히 가전기기에 문제가 발생하면 한 놈은 당연히 새로 사는 것에 익숙했고, 다른 한 놈은 공대생 애인을 둔 제 다섯째 형을 부르는 것에 익숙했다. 잠시 머뭇대던 버들이 이제는 컨트롤과 아무 키를 조합하기 시작했다. 창조적인 레시피였다.근본도 없었고.
황 대표가 느긋하게 팔짱을 꼈다. 뒤로 서 있는 버들의 거리가 가까웠다. 모니터 화면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서인지 버들이 허리를 바짝 낮췄다. 그만큼 뒤로 빠진 엉덩이가 곧 닿게 생겼다. 벗겨 놓으면 저 엉덩이가 어떤 모양인지 잘 안다. 소복하게 살이 올라 탱글탱글했다. 황 대표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느릿하게 감겼다가 뜨이는 황 대표의 눈빛이 음습함을 담아 버들의 무방비한 뒷모습을 샅샅이 핥았다. 가느다란 허리와 긴 다리. 팔꿈치. 어깨뼈……. 황 대표가 눈가를 찌푸렸다. 또 출처를 모를 화가 슬금슬금 기어 나온다.
“비켜.”
황 대표가 버들을 옆으로 밀쳤다.
“아. 이렇게 해 보면 어때요?”
밀려나는 도중 버들이 마우스를 흔들었다.
“…….”
“…….”
가진 건 돈뿐인 재벌가 도련님들이 사이좋게 힘을 합쳐 노트북을 박살 냈다.
처음엔 새로운 노트북을 사 오라고 비서를 시킬까 했다, 어차피 쓰는 기종만 쓰는지라. 운전석에 올라탄 황 대표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찌푸려진 눈가가 불만이 가득하단 걸 말해 주고 있었다. 가방을 멘 버들이 느지막하게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황 대표가 기다렸단 듯 시동을 걸었다. 큰 눈을 슴벅거리며 황 대표를 주시하던 버들이 다시 집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저 새끼가. 닦달하기 위해 황 대표가 기어코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사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버들이 다시 옷을 골랐다. 황 대표가 걸친 셔츠가 검정색인 줄 알았는데 햇빛 아래서 보니까 남색이었다. 검정색 티셔츠를 벗어 던지고 서둘러 남색 티셔츠로 갈아입은 버들이 문을 열었을 때 코앞에 서 있는 황 대표 때문에 화들짝 놀랐다.
“……아. 깜짝이야.”
“나와. 빨리.”
“네.”
오늘도 버들은 성실히 길을 안내했다.
“대표님. 오늘은 수영장 안 가요?”
“…….”
“오늘은 서울에서 계속 저랑 있을 거예요?”
“…….”
“대표님. 맛있는 거 먹으러 갈래요?”
한 번만 더 시끄럽게 하면 내리라고 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알고 버들이 그때부터 꾹 입을 다물었다.
황 대표가 뒷좌석에 새로 산 노트북을 실었다. 뭐가 신이 난 것인지 버들이 생글생글하다. 손이 꾀죄죄한 건 어디서든 매한가지나 시골에 있을 땐 못 봐줄 정도로 암담하더니 그래도 번듯하게 차려입어서 그런 건지 한결 나아 보인다. 주차장을 부드럽게 빠져나오면서 황 대표가 버들을 힐긋거렸다.
“유 대표 보러 갈래요?”
“대표님은요?”
“난 유 대표랑 볼 일 없어요.”
“그럼 저도 없어요.”
“…….”
유 대표가 실제로 들었다면 뒷목 잡고 쓰러졌을 거다. 자식새끼 키워 봤자 아무짝에도 소용없다고 하면서.
“대표님. 이제 우리 시골 가요?”
밤마다 가족들이랑 통화하는 주제에 버들의 말간 얼굴은 곧바로 시골에 가더라도 전혀 아쉬움이 없어 보인다. 반나절도 안 걸린 외출이었다.
“유버들 씨.”
“네?”
황 대표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영화 보러 갈래요?”
순간 잘못 들은 줄 알고 버들이 “네?” 되물었다.
“싫어?”
영화 보러 가잔 황 대표의 말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버들이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로 고개를 내저었다. 심장이 덜컹거릴 정도로 두근거림이 거셌다. 마침 보고 싶었던 영화가 있었고, 마지막 상영일이 바로 오늘이었다. 혹시나 황 대표가 일정을 번복할까 싶어 냉큼 좌석을 예매했다.
아직 영화 시작까지 시간이 널찍하게 남았다. 조명이 훤한 상영관에 들어서면서 버들이 코를 훌쩍거렸다. 와서 보니 커플석이다.
“너 내가 수작 부리지 말랬지.”
“그게 아니라, 저는 두 자리 있는 거 체크했을 뿐이에요.”
억울했다, 나름.
“진짠데. 이런 자린 줄 모르고 저는…….”
얼굴은 새빨개져서 종알종알 버들이 변명했다.
“너 영화 보고 나와.”
“대표님은요?”
“따라 나오지 말고 앉아.”
버들이 엉거주춤 앉았다.
“차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 보고 나와요.”
커플석인데 버들의 옆자리만 텅 비어있는 채였다. 고개를 빼 앞뒤, 옆을 두리번거리던 버들이 시무룩해졌다. ……수작 부린 거 맞기는 했다. 어떻게 알았대, 여우같이. 그래도 손끝도 안 건드릴 예정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시작부터 푹 빠져들었을 만큼 영화는 재밌었다. 반전을 거듭했던 결말 또한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그래서 아쉬움이 남는다. 황 대표님도 봤다면 재미있다고 하셨을지도 모르는데. 아. 취향과 멀어 재미없다고 하셨을까? 영화를 보았더라면 황 대표의 반응이 어땠을지 상상하느라 버들이 가장 늦게 극장을 빠져나왔다.
“대표님.”
조수석에 올라탄 버들이 용기를 내어 황 대표의 탄탄한 허벅지 위에 들고 있던 해바라기를 올려놨다. 샛노란 꽃잎에 생기가 잔뜩 머금어져 있다. 버들이 눈을 가만가만 깜박였다. 영화관 일층에 있던 꽃집을 미리 봐 뒀었다. 황 대표가 아무런 말이 없다. 허벅지 위의 해바라기를 건드리지 않고 내려다보고만 있을 뿐이다. 그런 황 대표의 눈치를 버들이 조심스레 살폈다.
“이제 집에 가요?”
황 대표가 인상을 썼다. 핸드폰만 열면 바로 호텔에서 만날 상대들을 찾을 수 있었다. 노트북이 고장 난 바람에 오전까지 처리했어야 할 업무가 밀렸다. 차에 앉아 곰곰이 생각하니까 이도 저도 아닌 기분으로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생산성도 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걸 제일 끔찍이 여기는데 지금이 딱 그랬다. 예민한 황 대표의 신경에 자잘한 틈이 벌어졌다.
“……어디야.”
고개를 조수석 쪽으로 돌리자 체중이 준 탓에 비쩍 마른 버들의 어깨가 오늘따라 유독 약해 보인다.
“네?”
“전에 말했던 우동 전문점.”
그래. 이틀도 아니고 단 하루니까. 나온 김에 겸사겸사.
「대표님. 스테이크 말고 또 좋아하는 음식 있어요?」
「…….」
「저 요리 잘하는데…….」
「…….」
「아니면, 저희 학교 근처에 맛있는 밥집 많이 있거든요.」
「…….」
「우동 좋아하세요? 새로 생긴 우동 전문점이 있는데, 맛있어요.」
「…….」
「거기서 우동 먹다가 어떤 남자랑 여자랑 뽀뽀하는 것도 본 적 있어요.」
「…….」
「칸막이가 쳐져 있어서 그런가? 대표님. 저랑 가 보실래요?」
우동 전문점은 대학가의 후미진 골목에 위치해 있었다. 주차장도 없다. 차안에 잠시 적막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건 황 대표였다. 자리 잡고 있으란 말로 버들을 먼저 들여보냈다. 적선하는 기분으로 여기까지 왔다지만 아무래도 시간 아깝단 생각이 머릿속을 빙빙 떠돈다. 허벅지 위에 버들이 올려놓은 해바라기를 황 대표가 멱살 잡듯 거칠게 집어 들었다. 연보라색 투명한 포장지가 잔뜩 구겨졌다. 전봇대 아래 쓰레기 봉지가 난잡하게 쌓여 있는 곳으로 걸어가 그대로 해바라기를 처박았다. 생기가 가득했던 샛노란 꽃잎에 덕지덕지 더러운 오물이 묻었다. 문득 둘러본 거리에 매미 울음소리 대신 차 경적 소리만 들려온다.
“황 대표님. 여기 앉으세요.”
우동 전문점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좁았다. 몇 개 되지 않는 테이블이나 의자 역시 작고, 좁았다. 간격이 다닥다닥한데 칸막이까지 처져 있어 뭔가 싶다. 방학이라 그런지 손님이라곤 단 한 명도 없었다. 벽 곳곳마다 붙어 있는 각지의 해외 관광 명소들이 우동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 사업가인 황 대표의 시선으로는 새로 생겼단 우동 전문점은 망하기 직전이다. 버들이 물컵만 응시하고 있던 눈꺼풀을 살며시 들어올렸다. 위생적으로 민감한 황 대표가 선호하는 환경이 전체적으로 아니란 걸 모를 리가 없었다. 영화관에서처럼 앉기도 전에 나가 버리면 어쩌나 전전긍긍했다.
좁은 공간에 두 사람의 다리가 쩍 벌어졌다. 통로라 그런지 뭘 가지러 왔다 갔다 하는 주인이 불편해 보인다. 버들이 두 무릎을 다소곳하게 모았다. 황 대표와 발끝 하나라도 부딪히지 않기 위해 방법을 찾아냈다. 쩍 벌리고 있는 황 대표의 다리 사이, 빈 공간으로 버들의 두 다리가 안착했다.
황 대표는 무감한 표정이지만 속으로는 욕을 짓씹는 중이었다. 버들은 물론 연대 책임으로 유 대표까지 싸잡아서. 불쾌하다. 열댓 번은 더 자리를 박차고도 남았을 거다. 차에 앉아 있을 테니까 먹고 나오라고 하면 영화와 달리 안 먹고 버들이 따라 나올 것 같다. 입이 짧은 버들은 식사하는 동안 언제나 감시가 필요했다. 황 대표가 꾸역꾸역 화를 억눌렀다.
“대표님. 아까 영화…….”
버들이 눈치도 없이 영화 이야길 늘어놨다. 밥집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다. 장르가 아무리 스릴러라도 그렇지. 손목이 왜 잘려 나갔단 거야? 황 대표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윽고, 전문점답게 직접 면을 뽑아 만들었단 우동 두 그릇이 각각 두 사람 앞에 놓였다. 김을 폴폴 뿜어 대고 있는 국물이 투명하다. 의외로 젓가락을 냉큼 든 버들을 황 대표가 바라봤다. 입안이 헐었으니까 밥보단 이런 매끄러운 면을 먹는 게 수월할지도 모르겠다. 버들의 젓가락에 면발 하나가 걸렸다. 수제란 걸 일부러 뽐내기 위해서인지 우동 면이 균일하지 않은 두께다. 먼저 뜨겁지 않게 잘 식힌 다음 버들이 얌전히 먹기 시작했다.
버들이 눈을 깜박였다. 학교 근처 밥집 중에 여기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맛있단 걸 소문을 통해 알았다. 황 대표에게 좋은 게 있으면 주고 싶고, 맛있는 게 있으면 먹이고 싶다. 밥 먹을 때 반찬이라도 달라지는 저와 달리 황 대표는 시골에 있는 동안 똑같은 스테이크만 먹었다. 그게 버들의 마음에 걸렸다. 언뜻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다.
“대표님.”
“네.”
“여기서, 저 뽀뽀 안 해요.”
……뭐?
“아니. 겁먹으신 거 같아서요.”
너무 어이가 없다 보니 비난할 의지도 꺾인다. 그렇지만 눈길만큼은 냉담했다.
“내가 왜 겁을 먹어.”
“제가 뽀뽀할까 봐…….”
“뽀뽀하지 마라.”
“안 해요, 뽀뽀.”
176cm, 188cm 키 큰 남자 둘이서 한참 뽀뽀로 다퉜다.
“목소리 낮춰.”
“……네.”
봐주니까, 이게 아주 요즘 기어오른다. 황 대표가 낮게 욕을 내뱉었다.
금방 풀이 죽은 버들이 다시 젓가락을 움직였다. 황 대표와 다투는 사이 우동은 딱 먹기 좋게 식어 있었다. 오물오물 씹는 버들의 턱을 황 대표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나마 거치적거렸던 게 좀 가시는 것 같다. 역시 사료를 바꾸는 게 정답이었던가. 이제 좀 살이 찌려나. 우동 한 끼 먹이면서 너무나 큰 바람을 황 대표가 아무렇지 않게 흘렸다.
“더 먹어.”
슬쩍 젓가락을 놓으려는 버들에게 황 대표가 턱을 까닥였다. 버들이 다시 우동을 입에 넣었다. 한쪽 볼이 볼록해졌다.
“대표님은 안 드세요? 이거 진짜 맛있는데…….”
이런 밀가루 따위 안 먹는다.
“진짜 맛있어요.”
우동을 권하는 버들의 말끝이 바닥을 기었다. 그때였다. 우동 그릇을 마치 엎어 버릴 것처럼 굴던 황 대표가 젓가락을 들자 버들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우동 그릇에 황 대표의 젓가락이 성의 없이 처박혔다. 덜 씹은 면을 버들이 급하게 삼켰다.
한입도 먹지 않고 황 대표가 다시 젓가락을 내려놨다. 탁! 짜증이 다분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버들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대표님…….
“……젓가락질 못하세요?”
곧장 황 대표가 쏘아봤다. 화들짝 놀란 버들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스테이크를 썰던 황 대표의 능숙하고 여유로웠던 손길이 떠올랐다. 와인 맛의 깊이를 감별하고, 원두 향을 구분했던 성숙한 모습도 함께 스쳤다.
“뭐 하는 거야.”
차갑다 못해 사나운 황 대표의 눈빛에 진작 움츠러들었지만 버들이 꿋꿋하게 버텼다. 새로운 숟가락과 젓가락을 빼 자리에서 일어나 앞쪽으로 허리를 기울였다. 정말로 뽀뽀를 한다면 할 수도 있을 만큼 황 대표와 거리가 가까워졌다. 황 대표의 우동 그릇에 젓가락을 넣으려던 버들이 멈칫했다. 티슈를 꺼내서 제 손톱에 돌돌 감았다. 흉측한 부분이 얼추 가려졌다. 숟가락 위에 버들이 짧은 우동 면을 건져 올렸다. 화내실 거야. 진짜 화내실 거야. ……그렇지만.
긴장이 휘몰아쳤다. 꼭 달리기를 한 것처럼 숨이 가빠졌다.
제 입가로 내밀어진 숟가락을 황 대표가 노려봤다. 버들의 가는 손목이 바들바들 떨리는 중이었다. 재깍재깍, 시간이 갔다. 버들의 귓불이, 목이, 얼굴이…… 점점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겁에 질려 있는 주제에 수저만큼은 꿋꿋하게 황 대표를 향해 있었다. 옅은 황 대표의 한숨이 침묵을 깼다.
버들의 다리가 막 풀려 가려던 찰나 황 대표가 입을 벌려 우동을 받아먹었다. 빈 숟가락을 들고 버들이 뒤로 주저앉았다. 상기되어 있는 얼굴이 여전하다. 심장이 이만큼이나 뛰는 걸 보아 체온이 최고치로 올랐을 거다, 분명. 버들의 눈가 주변이 파르르 떨렸다.
“대표님. 어때요? 맛있어요?”
맛이라고 할 것도 없다. 밋밋하다. 이걸 먹느니, 생수를 먹는 게 낫겠다.
“너 다 먹었어?”
“네.”
잘 먹었단 버들의 인사는 무시한 채 황 대표가 계산을 끝냈다. 먼저 조수석에 올라탄 버들이 포만감이 느껴지는 배를 두드렸다. 시동이 걸렸다. 아직 주변이 화창했다. 안전벨트를 잡아당기면서 버들이 황 대표를 흘깃거렸다.
“대표님 우리, 이제 궁에 가 볼까요? 거기에 군것질할 것도 많다고 그랬고 또…….”
“집에 갈 거야.”
“……네.”
차창에 흐릿하게 반사되어 비춰지는 황 대표의 모습을 버들이 마음껏 마음에 담았다. 온 세상의 공기가 발그레하다.
노트북을 닫고 시계를 확인한 황 대표의 한쪽 눈썹이 위로 쭉 올라갔다. 어느새 자정을 넘어 새벽이 되어 가고 있지만 여전히 하루의 연장선이다. 집에 돌아와서 버들이 막 씻었을 때다. 노인이 들이닥쳤다, 한잔하러 가잔 말과 함께.
「……대표님. 같이 가실래요?」
샴푸 냄새 폴폴 풍기면서 제 눈치를 살피던 버들은 자신이 아무 말이 없자 슬금슬금 신발을 신고선 나가 버렸다. 아무한테나 배꼽을 보이건 말건, 아무 앞에서 바지를 벗건 말건. 뭐 어쩌라고. 짧게 욕을 해 보아도 어느 틈에 자리 잡은 역정이 가실 기미가 없다. 시간이 이상하게 느릿느릿 흐르는 것 같다. 황 대표가 밖으로 나갔다. 정체 모를 새소리가 저기 먼 산속에서 울린다.
노인의 집 방향으로 좀 걷다 보니까 떠들썩한 목소리가 퍼졌다. 가까이 다가가니 역시나. 예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동네라고 언젠가 버들이 해 줬던 말이 있다. 예술은 무슨. 하나같이 시뻘건 얼굴들이 전부 술꾼들이다.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거쳐 가던 황 대표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예술가 집단에서 가장 막내인 버들은 끝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술 마시지 말라고 했더니만.
“대표님?”
무섭게 눈썹을 추켜세운 황 대표를 발견한 버들이 양쪽 볼을 물들인 채 허둥거렸다.
“서울에서 온 양반 아닌가.”
반가워하며 누군가 황 대표를 덥석 붙잡아 앉혔다. 타인의 손길을 뿌리친 황 대표가 버들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얼마나 마셨어.”
“……별로 안 마셨는데요.”
다짜고짜 황 대표가 버들의 턱을 움켜잡았다. 고개를 쓱 기울이는 황 대표에 놀란 버들이 질끈 눈을 감았다. 술자리는 한창 무르익어 있었다. 나간 시간으로 계산을 해 보면 벌써 뻗고도 남았을 것 같은데 아직 제정신이 박혀 있는 버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탐했다. 별로 안 마셨다고? 황 대표가 버들을 놓아주었다.
예술가 술꾼들이 앞다퉈 버들의 잔에 술을 콸콸 채워 넣었다. 막걸리다.
“이것만 마시고…… 안 마시려고 했어요.”
작게 종알거리다가 딸꾹질이 터지자 버들이 얼른 제 입을 가렸다. 얼굴을 서서히 구긴 황 대표가 버들이 든 잔을 가져갔다. 이건 ‘잔’이라고 할 수 없다. 그냥 사발이다. 희멀건 액체에서 고약하고 텁텁한 냄새가 풍겼다. 별로 좋지도 않은 술로 이렇게 무식하게 마시니까 얘가……. 황 대표가 한숨을 터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대신 막걸리를 마시는 황 대표의 옆에서 버들이 좌불안석이다. 아. 대표님, 막걸리 마시면 안 되는데. 맛없다고 성질내실 거 같은데. 잘근잘근,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두 시간이 지났다.
석류처럼 양쪽 볼이 제대로 빨갛게 익어서는 버들이 고개를 까닥까닥 흔들었다. 눈빛이 멍하다. 손에는 젓가락이 들려 있다. 상을 두드리며 버들이 흥얼거렸다. 아까 외출하다가 들었던 노래의 멜로디가 기억에 남았나 보다. 신명 났던 술자리는 늘 그렇듯 주변이 초토화되면서 끝이 났다. 코가 삐뚤어진 순서대로 비틀비틀, 한두 명씩 자리를 떴다.
“젊은 양반들이 술이 그렇게 약해서야!”
아닌데…….
“황 대표님, 술 잘 마셔요. 뭐든 다 잘해요. 젓가락질 조금 빼고. 진짜예요. 연도 따라 와인 맛도 감별할 줄 아는데. 오늘은 운전 오랫동안 하시느라, 피곤하셨나 봐요.”
다 풀려 가는 혓바닥으로 버들이 황 대표를 두둔하면서, 새치름하게 잘난 점을 자랑했다.
“그죠? 대표님?”
어느 순간, 제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든 황 대표에게 버들이 동의를 구했다. 얌전히 감긴 속눈썹이 참 곱다. 금세 마음이 벅찼다. 행복하다, 진짜. 이대로 어디에 황 대표님을 숨겨 두고 싶다. 무심코 턱을 들자 보름달이 꽉 차 있다. 버들이 웃었다.
“저희 이제 집에 갈게요.”
“어떻게 해서? 버들이 저 양반 업을 수 있어?”
“그럼요.”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나마 젊은 층에 속했다. 장신의 황 대표를 끙끙거리며 버들의 등에 업혀 줬다. 버들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쯧쯧, 여기저기서 혀를 찼다. 제 무릎에 묻은 흙보다 저 때문에 바닥을 구른 황 대표를 가장 먼저 버들이 살폈다. 두리번거리던 버들의 눈에 어떤 게 들어왔다.
“저거 저 한 번만, 빌려주시면 안 돼요?”
리어카였다.
“버들아. 이거 진짜 밀고 갈 수 있어?”
“있어요. 있어요.”
“차라리 여기서 재우고 너만 집에 가라. 여기서 하루 자도 안 죽어!”
모기가 많았다.
“아니에요. 실어만 주세요. 제가 끌고 갈게요!”
남아 있는 사람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겨우 황 대표를 들었다. 그리고 버들이 바란 대로 리어카에 거의 던지듯 옮겨 주었다. 버들이 야무지게 리어카 손잡이를 잡았다. 호기롭게 힘껏 끌어 봤는데 한 발짝 걷기도 힘들었다. 술도 마셨고, 여태 밥도 별로 안 먹었고. 그래도 제 크고 소중한 황 대표님을 무사히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이 술에 취했어도 확연하게 박혔다.
여기저기서 도움의 손길이 닿았다. 리어카를 뒤에서 밀어 준 덕분에 무사히 집까지 왔다.
“감사합니다.”
사라지는 사람들을 향해 버들이 이마가 땅에 닿기 직전으로 인사했다. 리어카 안에서 구겨진 채 황 대표는 잘 자고 있었다. 그런 황 대표를 버들이 느릿하게 눈을 끔벅거리며 오랫동안 바라봤다. ……예쁘네. 잘생겼네. 어차피 술에 취해 듣지도 못할 테니, 제 마음대로 황 대표를 칭찬했다. 좋아한단 말도 수없이 반복해 황 대표에게 들려줬다.
“대표님. 아까 제가 드린 해바라기 어디에 있어요?”
내내 묻지 못한 것도 물었다.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버들이 황 대표의 팔 하나를 들어 어깨에 걸쳤다. 엄청 단단하고 또 엄청 무겁다. 결국 어깨동무는 포기했다.
버들이 황 대표를 질질 끌었다. 팔을 잡아서. 다리를 잡아서. 한참이 걸려 겨우 현관을 통과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버들이 닦아 냈다. 복층 계단을 올라가는 건 도저히 무리다. 빠르게 단념한 뒤 버들이 제 이불을 황 대표의 위에 덮어 주고 베개도 양보했다. 뒤늦게 신발을 벗기려는데 황 대표의 발에 신발이 한쪽밖에 신겨져 있지 않다.
아이. 인상을 찌푸린 버들이 비틀거리면서 다시 현관 밖으로 나갔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몸속에 들어찬 술기운이 진하게 번지는 거 같다. 논바닥에 굴러다니는 황 대표의 신발을 찾아 주워 와 수돗가에 앉아 묻은 진흙을 말끔히 씻어 냈다.
그제야 편히 고꾸라진 버들이 스르륵, 잠에 빠졌다.
* * *
잠자리가 사납다. 눈을 뜨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어떤 꿈을 꿨더라. 갑자기 돌풍을 타고 날아온 무언가에 깔렸었던 것 같은데. 인상을 찌푸린 황 대표가 누운 채로 고개만 살짝 들어 제 몸을 내려다봤다. 아직 바깥은 어두웠다. 어둠에 시야가 적응하자마자 짤막한 한숨이 터졌다. 꿈처럼 현실에서 깔리긴 했다. 웬 한쪽 다리가 제 배를 가로질러 턱 하니 놓여 있다. 누구 다리일지는 굳이 머리 굴려 생각하지 않아도 뻔했다.
별로 무게감도 없는 버들의 한쪽 다리를 황 대표가 제 몸 위에서 치워 냈다. 거친 손길이었다. 그 바람에 버들의 발뒤꿈치가 바닥으로 쿵 추락했다.
……이 꼴통 새끼가.
쓸데없을 정도로 버들은 참 한결같았다. 멀쩡할 때나, 술에 취했을 때나, 지금처럼 잠을 잘 때나. 슬몃슬몃 기분이 뒤틀리는 자신과 달리, 쌕쌕거리는 버들의 숨소리는 일정하기만 하다.
얼마 지나지 않았다. 휙, 공중을 가른 버들의 한쪽 팔이 황 대표의 복근 위에 툭 떨어졌다. 성질은 나나 현재 황 대표에겐 화를 낼 기력이 없었다. 동의 없이 낙지처럼 저를 찰싹 끌어안은 버들의 몸뚱이를 황 대표가 일어나 앉음으로써 벗어났다. 단박에 관자놀이부터 짚었다. 가뜩이나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지끈지끈 아프기 시작했다. 속이 꼬인다. 날카로운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같은 최악의 고통이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숙취였다. 불쾌하다. 황 대표가 이를 악물었다.
눈을 가늘게 떠 간신히 시계에 집중했다. 새벽 4시경이었다. 황 대표의 예민함이 점차 극에 달했다. 어떻게, 언제 집에 왔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까맣게 암전되었다. 미쳤나. 흐릿해진 판단력을 접어 버리자 저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침대도 아닌 바닥에서 이따위로 널브러져 잠이 들었단 것이야말로 꿈같다. 옷차림이 그대로다. 당장 일어나 씻고 싶은데 도무지 맥을 못 추겠다.
별 도리가 없이 황 대표가 다시 누웠다. 조용히 내려앉은 고요함을 비틀고 기척이 느껴졌다. 버들이 반대쪽으로 돌아누웠다. 잘됐다. 황 대표의 한쪽 발이 버들의 등에 닿았다. 굽히고 있던 무릎을 펴자 마른 몸이 별 저항도 없이 쭉 밀려났다. 황 대표의 긴 다리만큼이나 거리가 뚝 떨어졌다.
미간을 좁히며 황 대표가 이마에 팔을 기대었다. 좀 자야지만 숙취가 조금이라도 가실 것 같은데 이래선 어렵다. 침대로 가는 길인 복층 계단을 가만 응시했다. 무리하게 움직였다간 뇌가 곤죽이 되어 버릴 것 같아 바로 관뒀다. 억지로 눈을 감았다.
“……야.”
목소리가 한없이 낮게 터졌다. 기껏 저만치 떨어뜨려 놓았던 버들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여전히 속 편하게 잠이 든 채다. 그야 저는 허리가 아작 날 것 같은 바닥이 버들에겐 안방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꼬물꼬물, 제 옆구리를 파고드는 버들의 체온이 느껴졌다. 손 하나 까닥하기 귀찮다. 어차피 잠버릇이 고약하니 다른 곳으로 굴러가길 바라며 내버려 뒀다. 째깍째깍. 시계 초침 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온다. 재차 한숨이 샜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날이 밝아 있었다.
“유버들.”
이름을 불러 봤지만, 버들의 눈꺼풀이 잠잠하다. 저만치 굴러가길 바랐던 버들은 여전히 제 옆구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찰거머리가 따로 없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손이 시렸던 버들이 잠결에 따뜻한 걸 찾아 방황했고, 이윽고 안정을 찾았다.
황 대표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황 대표가 언제부터인지 제 배꼽을 만지고 있는 버들의 못된 손등을 찰싹 때렸다. 지 배꼽도 아니면서 못 만지게 했다고 버들이 콧등을 찌푸리며 약하게 칭얼거린다. 황 대표의 표정이 쌀쌀맞다.
확실히 자고 일어나니까 좀 낫다. 낫다는 건 움직이는 게 낫다는 거지 컨디션을 완벽하게 회복했단 뜻이 아니다. 버들이 대신 막걸리를 들이부은 속이 아직까지 아리다. 어처구니가 없다. 첫 경험한 막걸리는 뒤끝이 길게 남아 황 대표에게 좋지 못한 인상으로 남았다. 죽겠단 말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별 거지 같은. 그것도 술이라고 마시는 거야? 무식하게.
문득 황 대표가 버들을 내려다봤다. 속눈썹에만 서성거렸던 황 대표의 눈길이 점차 넓어졌다. 새우처럼 웅크리고 있는 버들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분하게 훑었다. 자세 때문인지 동그란 어깨가 안쪽으로 말려 있다. 구부정한 손가락 아래 손목이 가늘다. 밤새도록 에어컨이 계속 작동되고 있어 옷을 벗거나 하진 않은 모양이다. 버들의 바지 지퍼가 단단하게 채워져 있다.
나랑 같은 술을 마신 거 맞아? 얘는 왜 멀쩡해 보이지? 말간 얼굴로 일정하게 호흡 중인 버들을 보고 있다 보니 부아가 치민다. 하여튼 희한한 새끼다.
바닥에서 잤던 통에 근육 곳곳이 뻐근하다. 목을 좌우로 꺾으며 황 대표가 욕실로 들어갔다.
버들이 멍하게 깼다. 무릎 꿇고 일어나 앉은 모습이 부스스하다. 앞으로 쏠려 시야를 방해하는 제 머리카락을 버들이 야무지게 빗어 넘겼다. 아득하게 물소리가 들려온다. 버들이 고개를 돌려 욕실을 바라봤다. 정신이 서서히 차려지는 것에 비례해 버들의 얼굴은 점차 초조해졌다. 어떡해. 안 돼. 지금? 이거 아니야. 눈을 깜박거리며 현실을 외면하는 사이 욕실 저편에서 물소리가 뚝 끊겼다.
찬물이 오랫동안 쏟아졌던 욕실에는 냉기가 가득 찼다. 갈아입을 옷을 챙기지 않은 황 대표가 태연히 가운을 걸쳤다. 사용한 면도기를 제자리에 되돌려 놓기 위해 수납장을 열었다. 잠시간 멈춰 안을 빤히 쳐다봤다. 황 대표의 시선은 정확히 버들이 가져다 놓은 로션에 꽂혀 있었다. 그동안 없는 물건 취급하며 지나쳤던 평소와 달리 황 대표가 그걸 꺼내 들었다. 이리저리 돌려 가며 성분이 뭔지 무슨 향을 내는지 살펴봤다. 거슬린다. 버려 버릴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제 면도기는 수납장에 고이 뒀다. 그리고 버들의 로션은 천장과 맞닿아 있는 수납장 위에 올려놓았다. 분명 버들의 신장으로는 손을 쭉 뻗는다고 한들 닿지 않을 거다.
문을 열자 밖에서 마치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단 듯 버들이 확 튀어 들어왔다. 부딪힐 수도 있었던 걸 황 대표가 어깨를 비틀어 피했다.
“야!”
황 대표가 곧장 인상을 썼다. 대꾸 없이 욕실에 들어간 버들이 다짜고짜 문부터 닫으려고 했다. 황 대표가 문고리를 쥐었다. 힘의 차이로 버들은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였다. 황 대표에게 손목이 붙잡힌 버들이 욕실 벽에 세워졌다.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습기로 버들의 옷이 축축해졌다.
“야.”
버들의 머리가 산발이다. 칼만 쥐여 주면 영락없겠다. 망나니.
둘의 눈이 부딪혔다. 버들이 얼른 고개를 숙여 버렸다. 잠깐이었지만 버들의 눈에 서려 있던 초조함을 황 대표가 발견했다. 왜 이래? 의아해하며 황 대표가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아주었다. 버들의 발가락이 움찔거렸다. 인생은 실전이라던가. 날쌔게 도망칠 방법들을 궁리해 실행에 옮겼으나 황 대표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다시 손목이 붙잡혔다. 욕실 벽과 황 대표 사이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됐다.
“뭐야.”
“……씻으려고요.”
큰 눈이 데굴데굴 구른다.
“왜 눈을 못 맞춰.”
“저 아직 안 씻었고 또…….”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버들이 어떤 걸 삐죽삐죽 감추려고 했다.
“치워 봐.”
“……네?”
같은 말을 반복하는 대신 황 대표가 버들의 나머지 한쪽 손목도 잡았다. 티셔츠 끝자락을 아래로 늘리고 있던 손이 불시에 치워지면서 당혹스러워진 버들이 숨을 급하게 들이켰다. 황 대표를 향해 원망 담은 눈초리로 버들이 고개를 확 치켜들었다. 아랫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여유로운 태도로 황 대표가 그런 버들을 내려다봤다. 한쪽 손목을 자유로이 풀어 주면서 작게 비웃음을 흘렸다. 아등바등하며 버들이 왜 불안해했는지, 어떤 걸 감추려고 했는지 황 대표가 전부 알아차렸다.
느릿하게 물었다.
“세웠어?”
버들의 얼굴이 새빨개지기까지 순식간이다.
“그게 세워져?”
황 대표의 기준에선 그저 한 줌에 불과했던 버들의 성기를 떠올렸다. 같잖다, 진짜.
“제가 일부러 세운 거 아니에요.”
쩔쩔매던 버들이 겨우 입을 뗐다.
“네가 세운 거 아니면 그걸 누가 세웠는데.”
아침이니까 저절로 선 거다. 거기까지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지, 버들이 애꿎게 제 아랫입술만 자근자근 씹어 댔다. 황 대표가 불쑥 거리를 좁혀 왔다. 화들짝 놀란 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더 다가오지 못하도록 황 대표의 배를 밀었다. 딱딱한 황 대표의 복근이 손바닥 전체로 번지면서 버들의 어깨가 흠칫거렸다. 그렇지만 지금은 수줍어할 틈이 없었다. 무조건. 악착같이. 버텨야 했다.
황 대표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지금 막 씻었어요.”
“…….”
“더러운 손으로 어딜 만져.”
버들의 어깨 전체가 처졌다. 황 대표의 몸에서 손이 툭, 떨어졌다. 버들이 버틴다고 버텼던 게 아니라 당연히 황 대표가 봐주는 거였다. 결국엔 힘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대표님.”
제 몸과 차츰 가까워지는 황 대표의 하반신을 바라보던 버들이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저와의 접촉을 버들이 조금이라도 반겼더라면 그야말로 끔찍했을 거다. 못된 성질머리를 타고난 황 대표의 눈빛이 반짝였다. 버들이 밀어내고 싫어하니까 흥미가 유발된다. 황 대표의 한쪽 다리가 버들의 다리 사이에서 굽혀졌다. 그러면서 서로의 다리가 포개지기 직전이다.
황 대표에게 벗어나기 위해 버들이 방법을 떠올렸다. 엉덩이를 뒤로 빼 보았지만 벽이다. 처음부터 막다른 골목에 막혀 있었다. 애를 쓰던 버들이 까치발을 들었다. 발버둥 친다는 게 고작 그 수준이다. 하지만 현재로선 그게 최선이었다. 높이가 달라지면서 황 대표의 중심이 버들의 몸에 쓱, 문질러졌다. 낯선 감촉을 확인하고자 버들이 무의식중에 고개를 숙였다. 곧이어 버들의 입술이 벌어졌다. 가까스로 나오려던 소리를 삼켰다. 황 대표의 가운 사이가 벌어져 아슬아슬했다.
“대표님…….”
아랫배가 기어코 맞닿았다. 간지러운 건지 뭔지. 벌렁거리는 기분이 버들의 척추를 타고 피어났다. 황 대표의 묵직한 그게, 이질적이다. 단지 타인이라서가 아니다. 저 자신도 남자고, 위로 형만 줄줄이 다섯이었다. 동성과의 스킨십이 잦았다. 그렇지만……. 아마도 좋아하는 사람의 몸이라서. 그래서 더 뜨겁게, 더 특별하게 제 모든 신경을 건드리는 모양이었다.
“아. 이상해.”
꺼려하는 버들의 어투에 황 대표가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뭐가 이상해.”
따지듯 묻게 된다.
“호모 새끼가.”
“…….”
“너 이런 거 바라고 나한테 매달리는 거 아니야?”
버들의 눈에 그렁그렁하게 물기가 고였다.
“대표님이랑 저는…….”
버들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평생 섹스 못 할 거예요.”
무슨 말을 하나 기다려 줬더니 어이가 없다. 황 대표가 꼭 맞닿았던 하반신을 느릿하게 뗐다. 이미 버들의 숨은 가빠질 대로 가빠진 뒤였다.
“왜.”
이유를 묻는 황 대표의 탁한 목소리가 나지막했다.
“대표님 거기, 저한테 안 들어가요.”
확고한 어조였다.
“…….”
“…….”
씩씩거리는 버들을 두고 황 대표가 돌아섰다. 욕실 문이 쾅 닫혔다.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뚜껑을 돌려 땄다. 물을 반 정도 마시다가 말았다. 직전까지 무감했던 황 대표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곱씹을수록 황당해진다. 황당함은 이내 불쾌함으로 바뀌었다. 내가 애초에 넣어 줄 생각이 없는데 평생 섹스 못 할 거라고 왜 네 쪽에서 못을 박아. 호모 새끼가. 변태 새끼 주제에. 대체 무슨 자격이 있다고.
“대표님.”
“…….”
“로션 꺼내 주시면 안 돼요?”
“…….”
“황 대표님.”
볼록하게 솟아 있던 버들의 앞섶이 판판해졌다.
“네 일은 네가 해야지.”
“손이 안 닿아요.”
“그래서 뭐.”
버들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제 로션…….”
“너 그 로션 쓰면서 피부 안 따가워?”
“안 따가워요.”
“그거 네가 샀어?”
“아니요. 겨울이 형이 사 줬는데 왜요?”
지가 직접 샀다고 하면, 끝까지 무시했을 거다. 그렇지만 유 대표가 사다 바친 거라고 하니. 자기 새끼가 쓰는 건데 고르고 고른 거겠지. 성분 하나가 별로였지만 황 대표가 로션을 꺼내 줬다.
황 대표의 머리카락은 바짝 마른 채였고, 버들의 머리카락은 푹 젖은 채였다. 상태는 달랐지만 둘에게선 같은 샴푸 향기가 감돌았다.
버들이 눈가를 문질렀다. 여태 가시지 않은 숙취로 속이 거북했다. 얼큰한 음식들로 연신 해장을 해도 모자랄 판국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밥상머리 앞에서 둘 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젓가락 끝만 문 채 버들이 황 대표 눈치를 살폈다. 표정 없이 앉아 있던 황 대표가 나이프 끝으로 접시 귀퉁이를 톡톡 두드렸다. 스테이크를 구우면서 사용한 버터 냄새가 배 속 전체를 꼬이게 만드는 것 같다. 통째로 날려 버린 어제로 인해 이후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였다. 잠깐 숨을 참았다가 황 대표가 내뱉었다.
“……잘까?”
전혀 뜻밖이었다.
“네!”
버들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일어난 두 사람이 식탁을 벗어났다. 황 대표는 침대로, 버들은 바닥으로 각각 제자리를 찾아갔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안락하다. 바닥에서 자 본 게 난생처음이었다. 불과 몇 시간 채 안 되지만, 잠깐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진저리 치게 된다. 누워 있던 몸을 반쯤 일으켜 황 대표가 밑을 내려다봤다. 뒤척거리던 소리가 줄더니 버들은 어느덧 잠이 든 채였다. 저 꼴통 새끼는 무인도에 가도 잠만 잘 잘 거다.
햇살이 바닥에 길게 길을 냈다.
중단되었던 식사는 저녁이 되면서 이어졌다.
“먹어, 빨리.”
“대표님은요?”
“난 하루쯤 안 먹어도 돼.”
“저도요! 하루쯤 안 먹어도…….”
저녁 식사는 일방적이었다. 황 대표의 사나운 눈매에 버들이 밥알 몇 개를 떴다.
“너 허리 안 아파?”
황 대표의 물음을 따라 무심코 버들이 제 허리를 더듬거렸다.
“허리가 왜요?”
“바닥에서 자는 거.”
아. 무슨 말인지 알겠단 듯 버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안 아파?”
“저 아픈 거 잘 참아요.”
물컵을 쥐려던 황 대표가 잠시 멈칫했다. 버들이 황 대표를 멀뚱하게 쳐다봤다.
“왜요?”
아무것도 아니란 듯 황 대표가 외면했다. 안 아프단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나 보다, 너무 아무렇지 않아 보였으니까. 아픈 거 잘 참아요. 여러 차례 버들의 입을 통해 들었던 말이었다. 그래서 새삼스럽지도 않아야 하는 게 맞다.
황 대표가 저도 모르게 잠깐 골몰히 생각에 잠겨 들었다. 그사이 버들이 밥그릇에 와락 물을 쏟아부었다. 야. 너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걸 황 대표가 지적했다. 그대로는 못 삼킬 거 같아서 그랬단 버들의 핑계에 더 하려던 말을 관두었다. 하루 동안 버들의 입속 상처에 연고를 발라 주지 못했다. 앞쪽으로 수그리고 있던 어깨를 버들이 빳빳하게 폈다. 달그락거리며 수저질을 했다.
“대표님.”
슬슬 회복이 되나 보다. 재잘재잘, 떠든다.
“저 꿀물 잘 타는데. 꿀물 마시면 술 깨요.”
“술이 안 깰 땐 숙취 해소 음료를 마셔야지.”
“저는 그런 약에서 오히려 술 냄새 나던데, 대표님은 안 그래요?”
“안 그래. 넌 술꾼이라 그런가 보지.”
“저 술꾼 아니에요.”
버들이 코를 훌쩍였다. 술자리에 황 대표가 직접 찾아오도록 만들었으니 제 해명이 별로 신빙성이 없단 걸 잘 알았다.
“대표님. 제가 꿀 사 와서 꿀물 타 드릴까요?”
“…….”
그러라고 하면 곧장 튀어 나가고도 남을 버들이 충분히 그려졌다.
“밥이나 마저 먹어.”
버들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황 대표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양치를 하고 돌아온 버들을 붙잡아 입을 벌리게 했다. 입안의 상처가 얼마나 나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황 대표가 얼굴을 바싹 가져갔다.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나려는 버들의 뒷목을 억세게 고정했다. 옴짝달싹 못 하게 되자 아까 전 욕실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 버들이 속눈썹을 빠르게 깜박였다.
힐긋힐긋, 황 대표를 바라봤다. 제 눈은 찬물로 세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퉁퉁 부어 있지만 황 대표는 멀쩡했다. 저보다 더 많은 술을 마셨고, 잠은 똑같이 잔 거 같은데. 그런 게 전부 무색할 정도로 단정한 황 대표에게 버들의 뺨이 화끈거렸다. 속으로 감탄이 폭죽처럼 터졌다. 어쩜 이러시지? 내가 진짜 엄청난 사람을 좋아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아마 눈이 부었어도 황 대표를 보며 버들은 감탄했을 거다. 눈이 부었는데 왜 이렇게 잘생겼지? 하며.
어제는 하루가 길었던 반면 오늘은 하루가 짧았다.
작업하고 있던 걸 잠시 미뤄 뒀다. 담배 케이스와 라이터를 챙겨 황 대표가 밖으로 나갔다. 날씨가 흐리다. 먹구름이 잔뜩 끼면서 흐릿하게 비 냄새가 났다. 벌써부터 김칫국을 마시고 기어 나온 지렁이가 있으면 어쩌나 신중하게 바닥을 살피며 황 대표가 정자에 가서 앉았다. 다리를 꼬고 담배를 빼 물었다. 그러자 슬금슬금 다가온 버들이 슬쩍 곁에 앉았다. 굳이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황 대표가 기꺼이 제 담배를 버들에게 내밀었다. 흡연자이기 때문에 그 심정을 헤아려 베푸는 친절에 불과했다.
턱을 조금 치켜 든 버들이 여유롭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비는 짧게 내리다가 멈추었다. 대신에 빗줄기가 굵어 더위가 식었다. 황 대표가 창문을 열었다. 밖에 있는 버들이 보였다. 소재가 얇은 옷 밖으로 어릿하게 실루엣이 비쳤다. 황 대표가 미간을 좁혔다. 버들은 혼자서 엄청나게 바빴다.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뭘 들었다가 뭘 내려놨다가. 그렇다고 그게 목적성이 분명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냥 실속 없게 분주한 느낌이다. 저러니까 살이 안 찌나. 먹는 것에 비해 많이 빨빨거리면서 움직이니까. 추측에 확신이 선다.
“유버들 씨.”
황 대표의 부름에 버들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들어와요.”
순순히 말을 듣고 집 안에 들어온 버들이 손부터 여러 번 씻었다. 큰 눈이 맑다.
“대표님. 뭐 시키실 거 있으세요?”
“옆에 와서 앉아요.”
턱을 까닥이며 황 대표가 지시했다.
“앉았는데요.”
“응.”
“뭐 시키실 거…….”
“그냥 그대로 앉아 있어요.”
‘그냥 그대로 앉아 있기’를 시킨 황 대표의 옆얼굴을 빤히 주시하며 버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타자 두드리는 일정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루하다. 잠자코 있던 버들이 더는 못 참겠는지 입을 열었다.
“대표님. 저 오전에 복숭아 땄는데요. 혹시 좋아하시면…….”
“말도 하지 마.”
“…….”
황 대표가 한숨을 쉬었다.
“나 보지도 말고.”
……아무것도 못하게 하냐. 왠지 치사하다.
“…….”
“…….”
꿋꿋이 뻗대고 있는 버들의 얼굴을 황 대표가 친히 앞쪽으로 돌려 주었다. 싱크대에 걸려 있는 주걱이 버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아랫입술이 절로 부루퉁하게 내밀어졌다. 차마 따지지도 못하고 버들이 얌전했다.
세 시간이 지났다. 그사이 버들은 엎드린 채 잠이 들었다. 턱을 괸 황 대표가 말간 버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다른 데는 전부 말라 가면서 볼살만큼은 변함이 없다. 그런 버들의 볼을 황 대표가 손가락으로 콕 찔러 봤다. 통통한 게 폭신하다. 이어 꼬집어 봤다. 부드럽다. 깨우기 위함인데 곱게 감겨 있는 버들의 속눈썹이 살짝 움찔거렸을 뿐이다.
이런 자세로 자면 허리랑 목, 전부 안 좋을 거다. 황 대표가 버들의 무릎 뒤쪽에 팔을 넣어 번쩍 안아 들었다. 이불을 펴지 않았다. 개켜져 있는 상태가 조금이라도 두툼하니까 그 위에 버들을 눕혔다. 바닥에서 자고 깼을 때 허리가 가장 불편했었다. 황 대표가 베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걸 버들의 허리 아래로 밀어 넣었다.
썩…… 좋은 방법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허리 근육에 더 무리가 갈 자세가 되어 버렸다. 황 대표가 제 착오를 빠르게 인정했지만, 당장 수습하진 않았다. 버들의 하반신이 베개 높이만큼 올라왔다. 손끝이 묘하게 간지러워져 무심코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버들의 몸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던 황 대표가 버들의 바지를 들췄다. 허리 부분이 밴드로 되어 있어 힘을 준 만큼 쉽게 벌어졌다. 속옷이 보인다. 더 깊숙한 곳을 보기 위해 황 대표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은은하게 잡혀 있는 윤곽에 콧방귀가 뀌어졌다. 작아 가지고. 허벅지 안쪽의 뽀얀 살결을 만져 볼까 하는데 버들이 뒤척거렸다. 버들의 허리 밑에서 빼낸 베개를 머리 아래로 옮겨 줬다. 노트북 앞에 앉기도 전이었다. 다시 버들의 곁으로 돌아간 황 대표가 베개를 빼내 저만치 던져 버렸다. 황 대표의 심술에 버들의 뒤통수가 바닥에 쿵, 부딪혔다.
「대표님이랑 저는…… 평생 섹스 못 할 거예요.」
잠 못 들고 있는 황 대표가 반대쪽으로 돌아누웠다.
「대표님 거기, 저한테 안 들어가요.」
커튼을 치지 않아 달빛이 그윽하게 방안을 밝혔다.
“너 솔직히 섹스해 봤어? 남자랑.”
버들이 고개를 들었다. 색연필로 공간을 채우면서 음영까지 줘야 했기에 몰두했던 집중이 와장창 깨졌다. 사선 방향에 앉아 있던 황 대표와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무의식중에 버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남의 손 타 본 적 없다는 거 알아차린 지 꽤 됐지만 그래도. 잠자코 다물려 있던 버들의 두툼한 입술이 달싹거리자 황 대표가 저도 모르게 아래턱에 힘을 줬다.
“복사기에서…….”
“복사기에서? 복사기에서 뭐?”
“봤어요.”
……봤다고? 황 대표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회사에서? 내 회사에서? 유 대표랑 내가 있는 회사에서? 회사 복사기에서? 남직원들이 그랬다고?
버들이 기억을 더듬었다. 그 언젠가 복사기 위에서 섹스하던 동영상을 봤던 게 상세히 떠올랐다. 사이트 주소를 외웠다. 폭발하기 직전이었던 황 대표가 허탈함에 짧게 욕을 짓씹었다.
“했냐고 물어봤지, 내가 언제 너 야한 거 본 적 있냐고 물어봤어?”
짜증이 역력하다. 황 대표가 작업하고 있던 걸 모조리 저장시킨 뒤 인터넷 창을 켰다. 그리고 버들이 말해 줬던 주소를 검색했다.
“너 이리 와.”
머뭇거리는 버들을 보고 있자니 신경질이 난다. 손목을 확 잡아당겨 옆에 세웠다. 노트북을 버들이 있는 방향으로 살짝 틀었다.
“로그인해.”
로그인을 하자마자 인터넷 화면 전체가 난리, 난리, 그런 난리도 없었다. 금발에 흑발에 국적도 다양하다. 굳이 재생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움직이는 영상이 여럿이다. 모자이크도 없이 신체 구석구석이 적나라하다. 여자의 교성, 남자의 탄식 등등 신음도 다방면으로 섞였다.
“뭐지?”
당황한 버들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전에 자신이 접속했을 때보다 더 강력하게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다. 다리를 동동 구르던 버들이 황 대표의 귀를 막아 주었다. 손바닥으로 귀마개처럼 막은 게 아니라, 귓구멍 속으로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귀는 황 대표의 성감대였다. 뭘 생각하기도 전에 소름부터 돋아났다. 황 대표가 버들의 손목을 탁, 아프게 내쳤다. 힘 조절을 못 했다. 여린 피부에 금방 황 대표의 손자국이 벌겋게 그려졌다. 버들이 욱신거리는 제 손목에 호, 입김을 불어넣고 있는 동안 정신을 차린 황 대표가 마우스를 쥐었다. ‘마이 페이지’에 들어가자 구매한 영상 목록이 보인다. 복사기에서 저게 뭐 하는 짓들이야. 양복 입은 두 명의 덩치 큰 사내들이……. 더 말하고 싶지도 않다. 몇 번 페이지를 이동하면서 원하는 걸 기어이 황 대표가 찾아냈다.
“탈퇴해.”
“……네?”
“탈퇴하라고.”
버들이 꾸물거렸다.
“적립금 많은데요.”
야한 걸 뭘 얼마나 보겠다고 돈을 참 빵빵하게도 충전해 놓았다. 기가 찬다.
“세 번 말해야 알아들을 거예요?”
모른 척 회피하던 버들이 하는 수 없이 마우스를 넘겨받았다. 버들의 커다란 눈망울이 봐달란 식으로 황 대표를 향했다. 단호한 황 대표의 눈매에 어림도 없단 게 짐작된다. 눈을 질끈 감고선 버들이 탈퇴 버튼을 눌렀다. 적립금은 물론 딱 하나 구매한 영상마저 끝까지 보지 못한 점이 너무나 아까웠다.
“가. 이제.”
터덜거리면서 버들이 자리로 돌아왔다. 색연필을 쥐었다.
“너 남자랑 남자, 어떻게 자는지 알아?”
……바보 취급하시는 건가.
“구체적으로.”
“알아요.”
버들의 목이 올곧게 세워졌다.
“저 공부 많이 했어요.”
“공부?”
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를 많이 해서 안다고?”
“네.”
“구체적으로?”
“네.”
“어떻게 자는데.”
“순서가 있어요.”
황 대표의 눈가가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첫 번째는…….”
버들이 알아서 말을 이었다.
“제가 깨끗하게 준비해야 돼요.”
“……깨끗하게 어떤 준비를 해야 되는데?”
“대표님은 모르세요? 남자랑 남자가 어떻게 자는지?”
황 대표가 욕했다. 공부를 많이 해서 황 대표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 거란 자부심에 버들이 주눅 들지 않았다. 도리어 눈빛이 말똥말똥하다.
“말해 봐.”
버들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한심하단 듯.
“모르셔도 돼요. 대표님은.”
……이 새끼가.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며 뭐라고 하려는 참에 버들의 전화가 울렸다.
“어. 정민아.”
버들이 나가 버렸다.
“…….”
황 대표만이 덩그러니 남겨졌다.
* * *
버들이 뒤척거림을 멈췄다. 입안이 바싹바싹 탄다. 등을 좀 더 웅크렸다. 전에는 이러면 괜찮아졌던 것 같은데 지금은 이상하게 소용없다. 에어컨이 작동되고 있어 집안의 공기는 오한이 들 정도로 싸늘하나 온몸 전체로 식은땀이 번졌다. 더 버티지 못한 버들이 결국 눈을 떴다. 코앞에 벽이 보인다. 시간이 늦은 만큼 사방은 적막했다. 이불을 걷고 버들이 일어나 앉았다. 축 처진 어깨에 도통 기운이 들어가지 않는다. 황 대표가 잠들어 있을 복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목이 말랐지만 냉장고를 열고 닫는 기척에 혹시라도 깰까 봐 걱정이다. 차라리 집밖으로 나오는 쪽을 택했다.
버들의 걸음이 조심스럽다. 정자에 앉은 버들이 곧장 기둥에 머리를 기대었다. 기다리다 보면 괜찮아진다. 언제나 그랬다. 느릿느릿, 감겼다가 뜨이는 버들의 긴 속눈썹이 축축하다.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목구멍 밑으로 최선을 다해 숨을 죽였다. 머리가 묵직하고 체한 것처럼 속이 답답하다. 여전히 소화가 잘 되지 않았다. 버들이 제 명치 부근을 엄지 손끝으로 꾹꾹 짓눌렀다.
밤하늘에 뜬 달이 참 높다.
* * *
황 대표와 버들이 나란히 서서 남의 집 담벼락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 대표가 다짜고짜 변호사 팀을 호출시켰다가 취소하게 만들었던, 문제의 바로 그 집이었다. 파란색 대문이 꽉 닫혀 있다. ‘개조심’ 종이는 언제부터인지 떼어지고 없었다. 목줄이 팽팽히 당겨지면서 찰캉 소리가 났다. 전과 달리 버들이 겁먹지 않았다. 황 대표 역시 표정에 변화가 없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사납게 굴던 큰 개는, 며칠 사이 180도 달라져 있었다. 저가 언제 그랬던 적이 있냐는 듯 꼭 시침을 뚝 떼는 것 같다. 주인아저씨가 나오자 양쪽 귀를 바짝 눕히고 순한 표정으로 꼬리를 흔들기 바쁘다. 아저씨! 버들이 인사했다.
“버들이 들어올래?”
“어……. 아니에요.”
마음 같아선 백 번, 천 번 “네!”를 외치고 남았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짤막한 안부를 주고받는 버들을 황 대표가 힐긋 내려다봤다. 큰 눈이 휙 접히며 방긋방긋 참 잘 웃기도 한다.
“구경해. 그럼.”
마당에서 소쿠리를 챙겨 주인아저씨가 집으로 들어갔다. 원래는 순한 성격이었다는 걸 증명하듯 큰 개는 꾸준히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개집 안에는 볏짚이 그득하게 깔려져 있었다. 곧 들썩거리더니 바깥으로 강아지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버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동안 새끼를 배고 있어 큰 개가 사납게 굴었던 모양이다.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버들이 강아지 수를 세었다. 총 열 마리나 된다. 저놈들이 한꺼번에 배 속에 들어가 있었다는 건데. 더운 여름에 얼마나 몸이 무겁고 힘들었을지. 기특하면서 측은함까지 느껴진다. 금동이랑 감자는 잘 있을까? 못 보는 사이 되게 많이 자라 있을 거 같다.
“돼지 새끼들이네.”
황 대표가 툭, 감상을 내놓았다.
“귀엽잖아요.”
어미가 어찌나 젖을 잘 물렸는지 강아지들은 전부 토실토실했다. 털에는 윤기까지 좌르륵 흘렀다. 아직 아가들이라 앞발과 뒷발이 짧아 움직일 때마다 배가 땅에 끌리는 놈들도 있다. 기우뚱, 넘어지자 보이는 분홍색 배가 역시나 빵빵하다. 버들이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저 똥개 새끼들. 털 엄청 날리겠다.”
무심한 어투로 황 대표가 자꾸만 감동을 파괴했다.
“말 안 듣는 거 봐라.”
묶인 어미가 케어 못할 범위로 넓게 강아지들이 벗어났다. 어미가 안달을 내며 강아지들의 꼬리를 물어 잡아당겼다. 그것도 잠깐이다. 놓아주면 다시 자기들 멋대로 뿔뿔이 흩어지기 바쁘다. 말 그대로 개판이다.
“좀 크면 말 잘 들을걸요?”
버들이 새끼 강아지들을 두둔하고 나섰다.
“대표님. 쟤네들은 안 무서워요?”
“무서워한 적 없다니까. 그냥 싫어.”
못마땅하게 황 대표가 인상을 찌푸렸다.
“대표님.”
“헛소리 계속할 거면 입 다물어.”
“동물원에 갈래요?”
“입 다물라고 했지.”
“동물원 가잔 말이 헛소리에요?”
“그럼 아니야?”
가려운 턱 아래를 긁적이며 버들이 황 대표를 바라봤다.
“대표님은 좋아하는 동물 없어요?”
“없어.”
황 대표의 대답이 단호하게 끊어졌다.
“그러면 동물 없고 예쁜 데 갈래요?”
버들이 오래 전부터 세워 뒀던 계획을 늘어놨다.
“저랑 궁에 가요. 돌담길 좀 걷다가 맛있는 거 먹어요.”
황 대표가 한숨을 내쉬었다.
“헛소리 계속할 거야?”
“궁에 가자는 것도 헛소리에요?”
“너랑 어딜 가자는 것 자체가 헛소리야.”
“…….”
재차 열리려던 버들의 입술이 그대로 오므려졌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저거, 너 같다.”
뚱해진 버들의 옆 머리카락을 황 대표가 삐죽하게 잡아당겼다.
“뭐가요?”
“저거.”
황 대표가 가리킨 쪽을 버들이 쳐다봤다. 하얗고 쌍꺼풀이 도드라져 보이는 강아지 한 마리가 아장아장, 담벼락 아래로 걸어오고 있었다. 걸음마다 손톱보다 더 작게 접힌 귀가 팔랑거렸다. 버들이 더 가까이 와 보라며 손을 내밀자 조막만 한 꼬리를 마구 흔든다. 언제 봤다고 서로 반가운 척이야. 그 모습을 보며 황 대표가 작게 헛바람을 켰다. 열 마리 중에서 버들과 가장 닮은 놈을 제대로 골라냈다.
“너 아무한테나 잘 웃잖아.”
“…….”
“쟤도 아무나 다 따라가게 생겼다.”
“…….”
갑자기 저를 빤히 쳐다보는 버들의 맹랑한 눈빛에 황 대표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뭐. 나 좋아한다고?”
“제가 지금 그 말 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
물이 졸졸 흐른다. 황 대표의 어깨에 둘러메진 버들이 싱글벙글하다. 거꾸로 뒤집혀 언뜻 보이는 물살이 색다르다. 요즘엔 개울을 건널 때마다 황 대표가 들어 주니 옷과 운동화가 무사하다.
“대표님. 저 진짜 빠져도 되는데요?”
“…….”
“옷 다 젖어도 돼요! 운동화랑.”
“…….”
“햇볕이 뜨거워서 금방 마르거든요.”
“…….”
“대표님. 안 무거워요?”
“…….”
“저는 진짜 괜찮아요.”
“…….”
아, 진짜 시끄럽네.
“황 대표님. 힘드실 텐데 내려 주세요.”
힘들거나 무겁지 않았다, 당연히. 그럼에도 황 대표가 버들을 던져 버렸다. 풍덩! 물에 던져진 버들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젖어 버렸다. 한쪽 운동화가 벗겨져 곧 물에 떠내려가게 생겼다. 그 전에 다행히 운동화를 붙잡을 수 있었다. 물에 빠져서 옷과 운동화가 몽땅 젖어도 괜찮다던 버들이 코를 훌쩍거렸다. 그런 버들을 외면하고 황 대표가 다시 개울을 건너가기 시작했다. 버들이 일어나자 몸에서 후드득 고인 물이 떨어졌다. 다급히 황 대표를 뒤따라갔다. 티셔츠 귀퉁이를 비틀어 버들이 물을 쭉 짜냈다.
“대표님. 오늘은 왜 안 앉아요?”
길목에 놓인 벤치를 버들이 가리켰다.
“흙 묻었잖아.”
버들이 손으로 흙을 털어 줬다.
“됐어요. 앉으세요.”
버들이 이제 흙 없단 말을 덧붙였지만 황 대표는 무심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꼼짝 않는 황 대표를 보며 버들의 눈썹이 처졌다.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싶은데. 황 대표와 함께하는 산책이 혹시나 짧아지면 어쩌나 애가 탄다. 젖어서 오늘은 무릎에 앉힐 수도 없고.
푸드덕, 새가 낮게 날아간 방향을 따라 고개가 돌아갔다. 황 대표의 시선이 자연스레 버들에게 닿았다. 물에 홀딱 젖어서 그런지 햇볕에 버들이 반짝반짝 빛나 보인다. 머리카락 끝이나. 입술이나. 귓바퀴나. 목선이나.
「아. 이상해.」
욕실에서 하반신을 가져다 대자 꺼려했던 버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호모 새끼 주제에. 감지덕지해야지. 고개까지 저어 가며 달아나려고 발버둥 치는 게 가소로워 그땐 그냥 가벼이 그 말을 흘려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상황에 계속 생각이 머무른다.
이상하단 표현은 오로지 자신에게만 해당되어야 한다. 꺼려해도 자신이 꺼려해야 하는 게 맞다. 꽃 사다 바치고, 따라다니고, 고백하고. 하나같이 그의 입장에선 끔찍한 짓이었다. 유 대표 동생이기에 성질대로 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그었던 선이, 언제부터인가 미묘하게 틀어졌단 게 감지됐다. 그게 분명 ‘갑자기’는 아니었다.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혼잡해졌다.
“유버들 씨.”
“네?”
침울하게 앉아 흙바닥만 바라보고 있던 버들이 황 대표를 찾아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렸다. 시선이 마주칠 때까지 황 대표가 차분히 기다렸다가 물었다.
“내가 자자고 하면 잘 거예요?”
버들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섹스 말하는 거야.”
“대표님. 저랑 섹스하실 거예요?”
“내가 미쳤어?”
날카롭게 돌아온 거절에 버들이 큰 눈을 깜박였다. 잠깐 침묵이 유지됐다.
“내가 너랑 잘 거 같아?”
버들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너랑 안 잘 거 알면서, 섹스하는 방법은 왜 공부해?”
“…….”
“너 다음에 다른 새끼 좋아하면 나한테 한 것처럼 굴 거지?”
“…….”
“그 새끼가 너처럼 제정신이 아니면?”
“…….”
“나랑 다르게 똑같이 너 좋다고 하면?”
“…….”
“복사기에서건 어디건 헤프게 웃으면서 배운 대로 다리 벌릴 거고.”
“…….”
순간 볼이 저릿했다.
“왜 얌전해? 너무 정곡을 찔려서?”
버들의 아랫입술이 살짝 떨렸다. 비슷하게 전에도 들었던 말이다. 그런데 처음 들었을 때보다 지금, 더 심장이 요동치며 목구멍이 조인다. 황 대표가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저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버들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저는, 대표님 좋아해요. 평생 대표님만…….”
“그럼 너는 평생 짝사랑만 하다가 죽겠네.”
노골적인 황 대표의 비웃음에 버들이 애꿎은 제 허벅지만 문질렀다.
“나는 너 징그러워.”
“…….”
“나 좋아한다고 별 지랄을 떨 때마다 소름 돋고.”
“…….”
“너랑 있는 거 자체가 수준 떨어지는 기분이야.”
“…….”
“그래서 네 얼굴 볼 때마다 기분 더러워.”
나는 황 대표님이 좋고, 황 대표님은 나를 싫어하고. 그러니 그 간격에서 오는 상처는 당연하게도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무게란 걸 안다. 정말 잘 아는데…….
작게 턱을 주억거리며 황 대표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버들의 시선이 더 버티지 못하고 아래로 잠겨 들었다. 조금만 참아 달란 부탁은 입안에서만 맴돌 뿐 끝끝내 황 대표에게 전하지 못했다. 볼록한 주머니가 문득 서럽다. 마치 사과처럼 식감이 아삭하니 맛있어 황 대표에게 주려고 어제부터 챙겨 뒀던 대추를 꺼내 버들이 꾹 움켜쥐었다. 갈라진 제 손톱에 원망이 찼다.
“…….”
“…….”
주변을 둘러싼 공기는 딱딱해졌건만 시간만큼은 지체 없이 흘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 * *
“대표님.”
황 대표의 주변을 맴돌던 버들이 눈이 마주치자 웃었다.
“아침 안 드세요?”
“신경 꺼.”
“식사 안 하실 거예요?”
“입맛 없어.”
타자를 두드리는 황 대표의 손가락이 길고 곱다. 버들의 시선이 그 위로 한참을 머물렀다.
“대표님 드시고 싶은 거 있어요?”
“…….”
“저 요리 잘해요.”
“…….”
“입맛 없으시면 간단하게 샌드위치 같은 거 만들어 드릴까요?”
“…….”
재잘재잘, 곁에 붙어 혼자 떠들더니 조각하러 가겠다며 버들이 나갔다. 자존심도 없는 새끼. 황 대표가 욕을 내뱉었다. 아무한테나 꼬리 치고 따라갈 기세였던. 진짜 딱 그 똥개 새끼 수준이다.
「너랑 있는 거 자체가 수준 떨어지는 기분이야.」
점심때에 맞춰 집에 돌아온 버들이 마당 구석의 화단 앞에서 한참 동안 쪼그려 앉아 있었다. 얼마 전 저가 꽂아 준 나뭇가지를 타고 나팔꽃 줄기가 꼬불꼬불 올라가고 있다. 점점 버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나는 황 대표님 좋아했을 때부터, 어느 영화 속 대사처럼 점점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가는 거 같은데……. 단둘이서 보내는 시간에 대해 미치는 황 대표의 막심한 손해가 신경 쓰인다. 짝사랑 주제에. 나만 너무 이득인가?
식사를 하고 있는 황 대표의 모습에 버들의 걱정이 쑥 내려갔다. 입맛 없다고 끼니 몇 번을 거르시더니 지금은 괜찮나? 접시 위의 고깃덩어리가 평소와 똑같은 크기처럼 보인다. 양이 줄거나 한 게 아니란 점에서 버들이 안도했다.
“뭘 봐.”
“…….”
버들의 속눈썹이 깜박였다.
“밥이나 먹어.”
“네.”
입안에 든 걸 꿀꺽 삼켰다.
“대표님. 우리 오늘…….”
“밥 먹으라니까.”
“네.”
젓가락으로 밥알을 세던 때와 다르게 버들이 수저 가득 밥을 펐다. 앙, 크게 입을 벌렸다. 모래처럼 버석거리며 밥알이 씹힌다. 어차피 밥그릇을 전부 비워야 식탁을 벗어날 수 있으니까 속도를 내는 게 훨씬 낫다. 어제처럼 참다가 새벽에 토해 버리면 된다.
다음 날, 아직 식사 때가 아닌데 버들이 부산을 떨었다. 지나치지 못하고 황 대표가 뭐 하는지 물었다.
“죽 끓여요.”
버들이 냄비를 휘젓다가 말고 얼른 대답했다.
“그러니까. 죽은 왜.”
“대표님도 드실래요?”
황 대표가 인상을 썼다.
“묻는 말에만 대답해.”
“그냥 밥 먹으면, 입속이 아파서요.”
“거짓말하지 말고.”
“…….”
아까 입속에 연고 발라 줄 때, 상처가 다 나았던 걸 직접 본 터라 황 대표가 콧방귀를 뀌었다. 가스레인지를 대신 끄고 황 대표가 버들의 손목을 잡았다. 의자에 앉힌 뒤 입을 벌리게끔 했다. 역시나 흉터 없이 말끔하다. 냄비 속 허연 죽이 맛없어 보인다.
“그냥 밥 먹어. 반찬이랑.”
“……네.”
식사를 마친 뒤 햇볕이 강해지기 전 산책을 나왔다. 먼저 앞장서서 버들이 개울을 건너갔다. 바짓단이 온통 젖었다. 서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에 버들의 앞머리가 들떴다.
“집에 가자.”
들어주려는 황 대표를 버들이 화들짝 놀라며 피했다. 황 대표가 인상을 썼다.
“왜.”
“…….”
“또 던질까 봐서?”
“…….”
“너 조용하면 안 던져.”
버들이 우물거리면서 입을 뗐다.
“……그게 아니라, 저 젖어서요.”
“근데.”
“그럼 대표님도 젖잖아요.”
황 대표를 앞질러 버들이 이미 젖은 운동화를 신고 물에 들어갔다.
“이제 어디쯤 왔어?”
잡지 페이지를 넘기며 버들이 물었다.
-30분 정도? 그쯤 남았어.
“응.”
-왜. 심심하냐?
“끊어.”
-야. 왜 끊어? 바빠?
“어차피 30분 뒤에 도착한다면서.”
-전화비 아깝다고 해라, 또.
“맞아. 이건 내가 건 전화야.”
-아이, 씨.
정민의 투덜거림에 버들이 픽, 웃었다.
-도착하고 나서 전화할까? 아니면 도착하기 직전에 전화할까?
“알아서 해.”
-마중 나와 있어.
소파에 앉아 태블릿 화면을 넘기던 황 대표가 다 들리는 전화 통화에 고개를 들었다. 마중 나와 있어? 그러기엔 날씨가 너무 더웠다. 거절하지 않고 버들이 응, 짧게 수락한 점이 거슬린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버들이 턱을 괴고 잡지를 읽어 내려갔다. 목을 타고 어깨로 이어지는 선이 하루가 멀다 하고 말라 가는 거 같다. 잘 먹는데 도통 이유를 모르겠다. 인상을 찌푸린 황 대표가 태블릿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으로 나가 현관문을 잠갔다. 안에 마실 물도 있고, 먹을 것도 있고. 하루쯤…… 가둬도 뭐.
덜컹. 현관문이 열리려고 하기에 황 대표가 문고리를 쥐었다. 안쪽에서 버들이 문을 열려고 시도 중이었다. 힘이 없다 보니 포기가 빨랐다. 금방 주변 공기가 잔잔해졌다. 황 대표가 마당을 가로질렀다.
아침에 건너뛴 조깅이라도 할까 싶었다.
“대표님. 어디 가요?”
제 등 뒤에서 불쑥 들려온 버들의 목소리에 황 대표가 움찔거렸다. 현관문부터 바라봤다. 잘 닫혀 있다.
“……어떻게 나왔어?”
“창문으로요.”
가둬 두기엔 여러모로 조건이 부합되지 않았다. 창문 따위. 버들의 긴 다리를 미간을 좁히며 황 대표가 훑어봤다.
“창문 막 불쑥불쑥 넘어 다니면 되겠어, 안 되겠어?”
“안 되는 거 아는데요. 현관문이 갑자기 안 열려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
황 대표에게 버들이 한 발 더 다가갔다.
“어디 가세요?”
“……아무 데도 안 가.”
황 대표가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공손히 내민 버들의 양손에 정민이 담배를 올려놓았다.
“고마워.”
사 오긴 했지만, 영 찝찝하다. 영화 내리기 직전 날에 봤다며 버들이 종알종알 늘어놓는 자랑을 정민이 묵묵히 들으며 호응해 줬다. 서울에 왔는데 나한테 연락을 안 했단 말이야? 마냥 해맑은 버들을 위해 섭섭함을 접었다. 버들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그제야 정민이 어깨를 툭 치며 궁금한 걸 물어보았다.
“너 여기서 못 먹었냐?”
“아니. 왜?”
“그냥.”
볼 때마다 버들의 옷이 점점 더 헐렁해지는 거 같다.
“이 형님이 너를 위해서 놀 만한 걸 챙겨 왔다.”
“그게 뭔데?”
“특정한 장소에서 놀아야 더 재밌는 거라.”
“특정한 장소?”
버들이 코를 훌쩍였다.
“잠깐만 있어. 말하고 올게.”
집 안으로 들어간 버들이 곧장 황 대표에게 다가갔다.
“대표님. 저 잠깐만 나갔다가 올게요. 정민이랑.”
“……어디 가는데.”
“근처 하우스에 갈 건데요. 금방 올게요.”
“…….”
버들이 얌전히 대답을 기다렸다. 황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운 날 하우스는 잘 달궈진 찜질방이 따로 없었다. 지나치게 후끈후끈하다. 먼저 오자며 제안한 만큼 정민은 힘이 드는데도 무더위를 버티고 있었다. 추운 것보다 오히려 더운 게 나은 버들은 상대적으로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다만 황 대표가 계속 걸린다. 오랜만에 창문도 활짝 열어 놓으셨던데. 창문을 통해 일하는 황 대표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오늘이었다.
“우리 그냥, 마당에서 놀자. 안 돼?”
“돼! 그러자!”
정민이 냉큼 대답했다. 하우스를 벗어나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이 정자에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정민이 가르쳐 주는 걸 버들이 눈까지 초롱초롱 빛내며 학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았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정민이 버들을 흘겼다.
“50원만 받아.”
“왜? 80원 줘야 되잖아.”
“친구 좋다는 게 뭐야. 그깟 30원도 못 깎아 줘?”
“그러는 게 어디에 있어?”
버들이 기어이 역정을 냈다.
“여기. 50원 준다.”
“싸고 흔들었는데? 그럼 80원이잖아.”
“그래. 너 싸고 흔들어서 80원인 거 아는데, 그럼 60원.”
“80원이니까 80원 줘야지.”
“너 이거 처음 해 보는 거 맞아?”
“내놔! 빨리!”
정민이 버들에게 멱살이 잡혔다. 화투장이 뒤집혔다. 소란스러움에 황 대표가 창문 밖을 내다봤다. 버들에게 멱살이 잡혀 꺽꺽거리면서도 정민이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황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 대표님.”
호모 새끼면서. 변태면서. 스토커이기도 한 게 역시나 곧바로 제 뒤를 따라온다. 무심코 황 대표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어디 가세요?”
“똥개 새끼들 보러.”
“그 집은 반대쪽으로 가야 되는데…….”
“…….”
황 대표가 걸음을 멈췄다. 반대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유버들. 80원 줄게.”
“나중에.”
버들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정민이 눈살을 구겼다. 황 대표와 버들의 관계성은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다. 딱 봐도 훤했다.
황 대표의 걸음이 우뚝 멈추면 버들이 멈춰 섰고, 버들이 멈춰 서면 정민의 걸음도 멈추었다. 왜 그러시지? 황 대표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버들이 불현듯 앞쪽을 바라봤다. 길 정중앙에 사마귀가 있었다. 몹시 늠름한 자태였다.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분명 무서워하고 있을 황 대표를 위해 버들이 발을 쿵 굴러 사마귀를 쫓아냈다.
“이제 괜찮아요. 대표님.”
황 대표가 몸을 틀었다. 다시 집 방향으로 걸어가는 황 대표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며 버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되게 귀엽지?”
“뭐야?”
두근두근하다.
“아. 나도 어쩔 수 없는 남자인가 봐.”
“……뭐래.”
“보호 본능에 끌려.”
나란히 붙어 서 있던 황 대표와 버들의 모습을 정민이 떠올렸다.
“손도 많이 가고. 내가 지켜 줘야 돼.”
버들의 말은 웃기지도 않았다. 황 대표와 버들은 어깨 넓이며, 손목과 허벅지 두께 등 덩치 차이가 확연했다. 대체 누가 누굴 보호한다는 거야. 누가 누굴 지켜 줘?
황 대표를 다시 따라가기 시작한 버들의 뒷모습에서 저가 끼어들 틈이란 게 전혀 보이지 않는다. 씩씩거리던 정민이 도도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상관없다. 나는 덩칫값을 할 줄 아는 남자니까. 그런데 그때…… 마침. 진짜 마침. 하필. 마침 딱 하필. 나비가 눈앞에 팔랑였다. 구해 달라며 정민이 커다란 몸을 구겼다. 우렁차고 굵직한 엄살에 놀란 버들이 하마터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화투 섞어.”
“안 할래.”
“왜?”
“이제 재미없어졌어.”
“80원 줄게.”
정민이 주섬주섬 100원짜리 동전을 찾아 건넸다. 됐다며 안 받을 줄 알았더니 버들이 냉큼 동전을 낚아채 갔다. 이놈, 이거. 80원 때문에 아까 내 멱살 진심으로 잡은 거였네. 은근히 섭섭해진 정민이 버들을 흘겼다.
“우리 형들이 그랬거든. 돈 계산은 어떤 경우든 철저히 해야 한다고 해서.”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제 다섯 형들에게 붙들려 가르침을 받은 돈 개념을 외며 버들이 거스름돈마저 착실하게 거슬러 줬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정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돈 계산할 게 뭐 있냐, 이게? 게임한 거잖아.”
“게임이면 더 정정당당해야지. 받아.”
한 마디도 그냥 넘어가는 법 없이 종알거리는 버들의 입술이 붉다.
“이제 뭐 하고 놀래?”
버들에게 슬쩍 가까이 붙으며 정민이 물었다.
“생각이 잘 안나.”
우렁차게 울어 대는 매미 울음소리가 귀청을 따갑게 했다.
“영화 몇 번 봤어?”
“나는 한 번밖에 못 봤어.”
“범인이 누군지 이해됐어?”
“아니. 한 번만 봐선 좀……. 두 번은 더 봐야겠더라.”
“거봐. 내가 뭐랬냐?”
정민의 우람한 어깨가 버들의 어깨 뒤쪽을 살며시 건드렸다.
“영화 보고 우동 먹는 동안 나한테 연락해야겠단 생각은 안 들던?”
“……아. 맞네.”
눈을 홉뜨자 정민의 눈이 더 부리부리해졌다.
“대답이 뭐 그러냐?”
“근데 어차피 연락했어도 못 만났을 거야.”
“왜? 운동 중간에 빠져나올 수 있어.”
“내가 혼자 있던 게 아니라서.”
“그럼? 누구랑 있었어?”
“황 대표님.”
버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민이 되물었다.
“사귀는 거 아니지?”
버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전에 말해 줬잖아.”
“뭘. 전에 나한테 뭘 말해 줬는데?”
한숨을 폭 내쉬느라 버들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대표님은 나 싫어한다니까.”
아주 당연한 어조였다.
“근데 왜 같이 영화 보고 밥을 먹어?”
“너는 영화 보고 밥 먹으면 다 사귀는 거야?”
“안 사귀는데 뭐 하러 같이 영화 보러 가고 밥을 먹어?”
“……그럼 안 돼?”
“시간 아깝게. 그게 무슨 짓이야?”
예리한 탐정을 자처하며 정민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게…….”
선뜻 버들의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단지 영화 보고 밥을 먹었단 걸로 사귀냐며 오해를 받은 게 근심스럽다. 물론 저야 그날 하루가 순간마다 기쁘고 즐거워서 어떤 소리를 듣건 상관없었다. 하지만 황 대표의 입장은 엄연하게 다르다. 저 때문에 괜한 피해를 볼 수도 있다. 그걸 고려하자 못된 짓을 저지른 것처럼 손끝이 따끔거린다. 버들이 제 아랫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물었다가 놓았다.
“영화관만 같이 간 거야. 영화는 나 혼자 봤어. 우동도 거의 나 혼자 먹은 거나 다름없었고.”
정민이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
“어쨌든.”
뭐가 ‘어쨌든’인지 잘 모르겠다. 버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자리에 같이 있었단 게 중요한 거라고.”
울적해진 표정을 감추기 위해 버들이 제 이마를 긁적거렸다.
“유버들.”
잠시간 이어지던 침묵을 깨뜨리며 정민이 말을 걸었다.
“다음 주에 개봉하는 영화 중에 또 스릴러 있어. 보러 갈래?”
버들의 어깨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너랑?”
“……어.”
“너랑 나랑 둘이서?”
“내가 팝콘 사 줄게. 캐러멜 팝콘 좋아하냐?”
“시간 아깝게 나랑 뭐 하러.”
“…….”
찰나 제 실수를 깨닫게 된 정민이 뒤늦게 아차, 싶었다. 후회가 밀려들면서 욕이 입안을 맴돈다. 앞으로 단둘이서 영화 보러 가자거나, 밥 먹으러 가자고 못 하게 생겼다. 정민이 와락 눈썹을 구겼다.
“사귀는 사람이랑 가.”
“나 지금 사귀는 사람 없어!”
과하게 펄쩍 뛴 정민을 버들이 멀뚱히 올려다봤다. 그래?
“친구끼리는 괜찮아.”
헛기침을 터트리며 정민이 저가 저지른 말실수를 수습했다.
“둘이서 영화 보러 가고 밥 먹으러 가는 거. 친구끼리는 시간 아까운 거 아니라고.”
별생각 없이 쳐다보는 버들의 눈빛을 정민이 어색하게 피했다. 조용히 몇 분간의 시간이 흘렀다.
“맞다. 너 내가 연고 준 건 발랐어?”
“아. 그거 고마워. 나 이제 상처 다 나았어.”
“내가 준 연고 발라서?”
고개를 끄덕인 버들의 대답에 정민의 가슴이 뿌듯하게 펴졌다.
“연고 제대로 발랐나 보네?”
“황 대표님이 발라 주셨어.”
뿌듯함은 짧았다.
“발라 줬다고? 입안에다가? 연고를?”
“응. 매일 발라 주셨어. 아침저녁, 꼬박꼬박.”
그래서 빨리 나은 것 같다면서, 버들의 입가가 나긋나긋 풀어졌다.
“어떻게 발라 줬단 거야? 입안을?”
“응?”
“설마 손으로 발라 주거나 그런 건 아니지?”
“손으로 발라 주셨는데…….”
……아니 이것들이. 이미 사귀는데, 내가 중간에 끼어서 놀아나는 건 아니겠지?
“너 확실하게 말해.”
버들이 큰 눈을 끔벅거렸다.
“저 사람이 너 싫어하는 거 맞아? 확실해?”
처음부터 그랬다. 이미 충분하게, 누구보다 자세히 알고 있는 사실이자 현실이었다. 버겁게 침이 삼켜졌다. 그런 버들을 향해 빨리 대답해 보라며 정민이 눈썹을 까닥였다.
“나 싫어해. 완전 싫어하셔.”
어떠한 기대도, 일말의 바람도 포함시킬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가볍게 날아가지 못한 그 말은 언제나 묵직하게 저를 짓누른다. 가슴이 뻐근하니까 이따금씩 숨 쉬는 것도 답답하다.
빨개진 버들의 얼굴을 쳐다보던 정민이 더듬거리며 상황을 돌릴 말을 찾았다.
“야. 너는……. 너 싫단 사람한테 벌레는 왜 쫓아 주고 그러냐?”
보호 본능에 끌린다는 버들에게 되도 않는 내숭을 피우다가 오히려 욕만 된통 얻어먹었다. 어쩔 수 없는 남자인가 봐? 그래서 보호 본능에 끌린다고? 자고로 진정한 남자라면 공평할 줄을 알아야지.
버들의 보호 본능이란 매우 편파적이었다. 차라리 벌이었다면 쏘일까 봐 그랬단 핑계라도 댈 수 있지. 하등 공격력 없는 연약한 날갯짓의 나비 앞에서 겁먹은 척 굴었던 게 때늦은 쪽팔림을 불러일으켰다. 덕지덕지 붙은 근육을 어떻게든 접어 보려다가 포기했다. 정민이 벅벅, 제 뒷머리를 헤집었다.
“내가 좋아해. 대표님.”
어렵게 꼬는 법 없이 담백했다. 저절로 정민의 말문이 막혀 버렸다. 버들의 시선을 따라가니 창문을 통해 집 안의 황 대표가 보인다.
“저 사람 좀 그만 봐.”
대체 뭐에 꽂혔나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하긴. 내가 저 사람을 봐서 어떤 점을 좋아하는구나, 하고 이해가 된다면 그게 더 큰 문제겠지. 부르르 몸을 떤 정민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저 사람 혹시 돈 많아?”
“많아. 엄청나게.”
……이런. 말을 뱉을 때마다 의문의 패만 당하는 거 같다.
“근데. 넌 나 안 이상해?”
갑자기 궁금해졌다. 버들이 불쑥 물어 온 말에 “뭐가?” 하고 구체적인 뜻을 정민이 바랐다.
“나 남자 좋아해.”
“…….”
“안 이상해?”
“…….”
“친구하기 징그러울 수 있고…….”
잠시 퓨즈가 나갈 수밖에 없었다. 정민이 저도 모르게 턱 하니 벌리고 있던 입을 서둘러 다물었다.
“그런 게 뭐가 이상해.”
내심 긴장하고 있던 버들의 어깨가 탁 풀렸다. 별 대수롭지 않단 투로 넘겨준 정민에게 물씬 고마움이 느껴졌다.
“좋아한다고 말해 봤어?”
“황 대표님한테?”
“응.”
“하루에도 열 번은 더 해.”
“……열 번?”
“원래 백 번 하고 싶은데, 백 번 하지 말라고 하셔서.”
고백을 받은 걸로 몇 번 여자 친구를 사귀어 보긴 했지만 늘 운동이 우선이라 흐지부지 끝나기 일쑤였다. 자신감에 찬 얼굴로 정민이 쯧, 짧게 혀를 찼다. 번지르르한 연애 경험이 없는 건 둘 다 매한가지였다. 그렇지만 황 대표의 뒤를 마치 어미 닭 쫓는 병아리처럼 졸졸 따라다니는 버들보다야 자신이 월등하게 낫단 생각이 든다.
“너 그렇게 하면 안 돼.”
“뭐가?”
“아무리 좋아도…… 어? 안 좋은 척도 조금 하고.”
버들이 웃었다.
“그런 건 너처럼 시간 많은 애들이나 그러고.”
“……야. 나도 바빠. 운동하느라 24시간이 모자라요, 아주.”
“누가 너 안 바쁘대?”
“…….”
머리 위로 유유히 구름이 지나갔다. 정민이 가방을 뒤적거렸다.
“캐치볼 할래?”
버들의 눈에 금방 호기심이 가득하다.
“어디서 났어? 네 거야?”
“음. 비슷해.”
“그게 네 거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일부러 친척집에 들러 미취학 아동에게 빌려 온 거였다. 버들이 테니스공을 손바닥 위에서 굴렸다.
“내가 던질게 받아.”
거절할 틈도 없었다. 정민이 반대편에 가서 공을 던지려는 시늉을 취하자 버들이 저도 모르게 엉거주춤 일어났다. 휙, 던져진 공을 받지 못했다. 어깨 뒤로 넘어간 공이 저만치 굴러갔다. 엄청나게 살살 던진 건데 그것도 못 받느냐면서 한껏 비웃는 정민을 흘겨보다가 버들이 순순히 공을 주워 왔다. 다음번부터 공이 크게 포물선을 그렸다. 정민이 아예 버들의 손에 공이 안착되는 식으로 여유롭게 던져 주었다. 버들의 눈꼬리가 휙 휘어졌다. 웃음소리가 날씨만큼이나 맑다. 황 대표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그만할래.”
“왜? 재미없어?”
재미없다고 고개는 끄덕거렸지만, 사실은 재미있었다. 하지만 숨이 찼다. 겉으로 내색은 못하고 빨리 뛰어 대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버들이 노력했다. 심장은 태어났을 때부터 좋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심장 박동이 높아지면 겁부터 났다. 그걸 가라앉히지 못하고 적정 이상을 넘길 때면 반대로 체온이 하강하는 경우가 생겼다. 면역력이 약했던 어렸을 적엔 그대로 정신을 잃곤 했었다.
돌려준 공이 다시 가방 안으로 사라지는 걸, 버들이 끝까지 지켜봤다.
* * *
“열어.”
황 대표가 시키는 대로 버들이 밥통을 열었다.
“여기 누르면 열려요.”
버들이 황 대표의 옆얼굴을 올려다보며 친절하게 가르침을 덧붙였다. 콧대와 입술, 속눈썹이 너무 멋지고 예쁘다. 저게 전부 내 거라면 참 좋겠다. 밥통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른 김이 금방 시야를 흐릿하게 가려서 아쉬웠다. 황 대표가 저벅저벅 싱크대로 걸어갔다. 밥통을 닫으려던 버들의 손이 주춤거렸다. 다시 돌아온 황 대표의 손에는 뜻밖에 밥그릇이 들려 있었다. 뭐 하시냐고 버들이 물었지만 황 대표가 무시했다. 그저 밥그릇에 그득히 밥을 눌러 담았을 뿐이었다.
“앉아.”
밥그릇 옆에 젓가락과 숟가락을 챙겨 황 대표가 내려놨다. 버들의 커다란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분명 정민이네 가서 저녁 먹고 온다고 말하고 나갔다가 온 거였다.
“저 밥 먹고 왔어요. 정민이네 할머니가 맛있는 거 많이 해 줘서…….”
“내가 내 앞에서 밥 먹으라고 했잖아.”
“지금 또 먹으면, 저 밥 두 그릇 먹는 거예요.”
“그럼 애초에 내 앞에서 한 번만 먹으면 될 걸 나가긴 왜 나가.”
잔잔했던 버들의 호흡이 뭉개졌다. 억울함 때문이었다.
……그럼 보내지 말던가. 밥 먹고 온다고 했을 때 분명 고개 끄덕이면서 허락해 줬으면서.
앞에 턱 하니 앉아 황 대표가 감시하니 어쩔 수 없이 버들이 밥알을 우물거렸다.
“대표님은 안 드세요?”
입맛 없단 말이 돌아왔다. 왜 입맛이 자꾸 없으시지? 걱정된다.
“빨개졌잖아.”
황 대표가 쭉 뻗은 팔로 버들의 손목을 잡았다. 눈가를 비비적거리고 있던 바로 그 손이었다.
“머리카락이 간지러워서…….”
“자르면 되겠네.”
“정민이가 내일 잘라 준대요. 안 그래도. 많이 긴 것 같다고.”
말끝마다 다른 사람 이름 붙는 게 은근히 짜증을 일으켰다. 그것도 닳을 정도로 저를 찾아 황 대표님, 부르던 입으로.
“자격증 있는지 물어봤어요?”
“자를 수 있대요. ……어디 가세요?”
“먹고 있어. 담배 금방 피우고 올 거니까.”
따라 나가려던 버들이 다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황 대표가 나가면서 문이 닫혔다. 기회였다. 버들이 얼른 남은 밥을 밥통에 쏟아 부었다. 금방 오겠단 황 대표가 3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5분까지가 한계였다. 더는 못 기다리겠다. 오늘은 같이 있었던 시간도, 같이 이야기 한 것도 적었다. 버들이 신발을 신고 쪼르르 바깥으로 나갔다. 혹시나 어디 멀리 가 버리셨으면 어쩌나 걱정했다. 다행히 정자에 앉아 있는 황 대표가 보였다. 주변에 담배 필터가 떨어져 있지 않았다. 라이터를 까닥거리는 황 대표의 손가락이 여유롭다. 제 발 저려 묻지도 않았건만 먼저, 밥 다 먹고 나온 거라며 중얼거린 버들이 은근슬쩍 곁에 가서 앉았다. 서서히 어둠이 깔리는 풍경이 오묘하면서 신비롭다.
황 대표가 일어나 빨랫줄로 걸어갔다. 파란색 빨래집게를 빼서 버들의 앞에 섰다.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난다.
“이러면 머리 길어도 안 흘러내리네.”
태연히 버들의 앞머리에 빨래집게를 꽂았다.
“…….”
“…….”
깜박거리는 버들의 큰 눈이 순하다.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하늘색. 골고루 빨래집게를 모아 오더니 버들의 머리에 몽땅 찔러주었다. 풍성한 머리숱이 알록달록하게 장식되었다. 크리스마스트리가 따로 없다. 어쩐지 시무룩하게 버들이 고개를 숙이자 황 대표가 턱을 잡아 눈높이에 맞춰 들어올렸다. 놀란 버들의 새까만 눈에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황 대표가 고스란히 담겼다.
“네 머리 못 만지게 해.”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일부러 만지라고 제가 한 게 아니라요. 긴 부분만 조금 잘라 준다고…….”
“그러니까. 그거 못 하게 하라고.”
버들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꼭 발작이라도 일으킨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