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성글게 녹아 (2)
겹치고, 비벼지고, 부딪히고, 스치고, 깨물고. 욕심내며 진득하게 물고 있던 버들의 아랫입술을 서서히 놓아줬다. 바람이 불었다. 감긴 눈 그대로 축 처져 버린 몸뚱이가 새삼 참 많이 말랐다. 꺾이듯 접힌 버들의 한쪽 무릎이 바닥에 닿기 직전, 황 대표가 안아 들었다. 집 안으로 옮겨 가만히 이불 위에 눕혔다. 부엌과 거실, 서로 그만큼의 거리가 벌어졌다. 측은할 정도로 파르르 경련하던 손끝과 불안정하게 헐떡이던 호흡은 긴 시간 뒤에야 진정됐다. 어둠이 짙게 깔렸지만 불을 켜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황 대표가 잠이 든 버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날이 새도록.
* * *
제 스승님 댁에 가겠다며 뛰쳐나간 버들이 반나절을 넘겨서 돌아왔다. 밥 먹었어요! 정확히 30분 뒤에 약도 챙겨 먹었어요! 깁스에 물 안 들어가게 먼저 비닐로 싸맨 다음 최대한 조심히 씻었어요! 로션도 발랐어요! 묻지도 않은 걸 웅변하듯 크게 나불거린 버들의 수다가 드물게 짤막했다. 그 후 미묘하게 바닥에 깔려 있는 정적이 느껴졌다. 환기를 위해 열어 둔 창문으로 단조롭게 들려오는 풀벌레 울음소리가 전부다. 노트북 화면에서 황 대표가 기어이 고개를 돌렸다. 미간이 옅게 찌푸려진다. 대체 저게 뭐 하는 짓인가, 싶다.
“너 뭐 하는데.”
“공부해요.”
“무슨 공부. 너 영화 잡지 보고 있는 거 아니야?”
“저한테는 그게 공부하는 거예요.”
말대꾸만큼은 평소와 다름없다. 황 대표가 턱을 괬다. 감겼다가 뜨이는 눈꺼풀에 권태로움이 담겼다. ……공부? 어설프다. 내 딴에도 속아 넘어가 줄 수 있는 선이란 게 있는데 나름 고르고 골랐을 버들의 핑계는 그 수준에 한참 모자랐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켜지다가 말았다. 함께 산 지 몇 주다. 식탁에 오지 않는 한, 평소 잡지를 보는 버들의 모습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채였다. 그게 가장 편할 자세일 테니까. 어쨌든 잡지는 버들에게 구실일 뿐이었다. 힐긋힐긋 저만 훔쳐보기 바쁜 버들을 진작 파악한 뒤였다.
“불편하게 공부를 왜 그렇게 해.”
“……저는 하나도 안 불편해요.”
“왜 벽 보고 앉아 있어. 기대.”
“이게 제가 공부할 때 집중하는 방법이에요.”
벽을 향해 돌아앉은 버들의 뒷모습이 참 무방비하다.
“너 공부 못하잖아. 멍청해서.”
“……아니에요. 저 공부 잘해요.”
황 대표의 시선이 얇은 티셔츠 바깥으로 툭 튀어나와 있는 버들의 어깨뼈에서 팔꿈치로 완만히 이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아니. 정확히 혀를 섞은 뒤 줄곧 보고 있는 게 버들의 등짝이었다. 서로 얼굴 못 본 지 벌써 몇 시간이나 흘렀다.
‘소원’에 대해선 암묵적 합의를 거친 것처럼 누구 하나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게 황 대표 입장에선 의외였으며, 계속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다. 사실 다음 날 버들이 ‘왜 뒤따라 와 자신과 키스했는지’ 꼬치꼬치 캐물어 댈 걸 예상했었다. 미리 귀찮아서 치를 떨었건만. 예상과 달리 버들은 최선을 다해 저를 피하는 중이었다. 느릿느릿, 황 대표가 손가락으로 식탁 위를 건반처럼 두드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의식 안 하는 척 굴고 있지만……. 버들의 붉어진 귓불이 눈에 확 띄었다.
“유버들.”
이름만 불렀을 뿐이었다. 놀란 버들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마치 희대의 파렴치범이 된 거 같아 황 대표의 미간이 좁혀졌다. 알아서 피해 주니 귀찮지 않아 편해야 하는 게 맞는데 이상하게 거슬렸다.
“너 이리 와 봐.”
“……저요?”
황당하다.
“그럼 여기에 너 말고 또 누가 있는데.”
잡지를 내려놓고도 버들이 한참 미적거렸다. 드디어 거리를 좁혀 오기 시작한 버들의 고개가 푹 숙여진 채다. 앞머리가 쏠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옆에 앉아.”
버들이 의자 위로 슬쩍, 엉덩이를 붙였다. 또 등을 보인 채다.
“뭐 해. 너.”
“……의자에 앉았는데요.”
“말대꾸 계속 그렇게 할 거야?”
목소리에 짜증이 섞였다.
“말대꾸가 아니라…….”
“누가 그렇게 앉으래.”
“……앉으라고 하셔서 앉았는데.”
“나 보고 앉아.”
무심히 말을 툭 자르며 황 대표가 바라는 걸 요구했다. 버들이 울상을 지었다. 좋아하기 때문에 특별할 수밖에 없는 황 대표 앞에서 그저 그런 형들에게 하는 것처럼 고집을 피운다거나 버텨 내는 건 애초에 무리였다. 어쩔 수 없이 황 대표와 마주 볼 수 있게 돌아앉기 전, 버들이 잊지 않고 심호흡을 했다.
“너 뭐 사고 쳤어?”
“아니에요. 저 되게 얌전히 놀다가 왔어요.”
“근데 왜 내 눈을 못 봐.”
“볼 수 있어요. 대표님 눈.”
“그럼 고개 들어.”
키스 후, 처음 둘의 눈이 부딪혔다. 나른한 표정이었던 황 대표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정면을 향해 고개를 들긴 했으나, 버들이 야무지게 제 입술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있었다. 기가 찬다. 혹시 또 입맞춤이라도 할 줄 알았나. 밑도 끝도 없이 방어적인 꼴통의 태도가 같잖았다. 버들이 눈을 깜박였다. 눈망울이 순하다.
저랑 가깝다고 바짝 움츠러든 어깨와 버들의 팔에 돋아난 소름이 계절과 겉돌고 있었다. 우스웠다. 사내놈의 입술을 가르고 먼저 혀를 집어넣은 건 헷갈릴 것도 없이 분명히 자신이었지만, 피부로 스며든 여름은 여전히 질척거렸으며 더웠다. 안심이 됐다. 약간 고개를 기운 황 대표의 표정이 나른하게 풀렸다. 버들과 달리 자신의 세상은 키스 후에도 뒤집히지 않았다. 늘 그랬듯 평탄했고 무미건조한 것 역시 그대로였다.
“손 떼. 내가 떼?”
머뭇대던 버들이 입술을 가리고 있던 제 손을 천천히 내렸다. 동시에 여유롭던 황 대표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방금까지 멀쩡하던 머리가 살짝 지끈거렸다. 위아래, 특히 아랫입술이 표가 나게 퉁퉁 부어 누가 봐도 버들이 전날 뭘 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꼴이었다. 그것도 애먼 쪽으로.
“너 그러고 돌아다녔어?”
버들이 끄덕거렸다.
“입술 가리고?”
“밖에서는 안 가렸는데요.”
“밖에서 가렸어야지 왜 나한테 가려.”
황 대표가 이어 물었다.
“밖에 나가서 혼자 놀았어?”
“아니요. 사람들 만났는데…….”
“노인네들?”
버들이 다시 끄덕거렸다.
“너 입술 보고 그 사람들이 뭐라고 안 해?”
“했어요. 입술 왜 그러냐고…….”
“넌 거기다 대고 뭐라고 대답했어?”
“모기가 물었다고 했어요.”
모기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양쪽 볼이 저렇게 토실토실한데 모기면 차라리 먹을 거 많은 얼굴을 물었겠지. 입술은 무슨. 차라리 닥치고 있던가. 고리타분한 노인네들이라 그냥 수긍하고 넘어갔을 거 같지만 그래도 걸린다.
“혹시…….”
“네? 혹시, 뭔데요?”
“사람들이 너랑 나랑 같이 사는 거 모르지?”
버들이 제 스승님 댁에 사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거 같다.
“이 동네 사는 사람들 중에서 대표님이랑 저랑 같이 사는 거 모르는 사람 한 명도 없어요.”
볼펜을 집으려던 황 대표의 손이 순간 삐끗했다.
“……너랑 나랑 같이 사는 거 모르는 사람이 없대?”
“없어요. 다 알아요, 다.”
잠시 침묵했다. 퉁퉁 부은 걸로 모자라 핏기가 좀 올라와 있는 버들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내려다봤다. 황 대표가 버들의 턱 아래를 엄지손가락으로 약하게 당겨 입술을 벌리게끔 했다.
“……아팠어?”
냉큼 버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정했다, 방금 황 대표님이. 엄청 다정한 목소리로 아팠냐고 저에게 물었다.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몸을 비틀어 버들이 황 대표의 손을 피했다.
“저 나갔다 올게요!”
버들이 의자가 밀릴 정도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 어딜 나간다는 거야. 대체.
“그리고 노파심에 말씀드리는 건데요. 저, 대표님이랑 키스한 거 하나도 기억 안 나요. 별로 좋지도 않았고 다 까먹었어요.”
……그러니까, 차라리 입을 닥치고 있으라고.
“너 어디가.”
“멀리 안 나가요.”
“그럼.”
“정자에 있을 거예요. 바람 쐬면서.”
미처 잡기도 전에 버들이 후다닥, 뛰쳐나갔다. 내뱉은 말 전부가 거짓말은 아니었다. 창문 밖으로 정자에 앉아 있는 버들의 모습이 훤히 내다보였다. 멍해 있는 게 제대로 넋이 나간 채다. 황 대표의 시선이 고정됐다. 얼마나 지났을까. 버들이 불쑥 주머니에 꽂고 있던 손을 꺼냈다. 자기 입술을 한참 동안 만지작거리더니 손끝을 입안에 넣어 혀도 톡톡 두드려 본다. 회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황 대표가 인상을 썼다. 키스 한 거, 기억이 안 나?
골 때린다. 진짜.
* * *
장이 섰다. 골목마다 소란스럽다. 나란히 산책하던 버들이 의도적으로 걸음을 늦췄다. 황 대표의 널따란 등이 황홀하다. 흐려지는 정신을 억지로 붙들었다. 사람들로 붐비는 걸 싫어해 잔뜩 예민하게 굴면서도, 여기서 때때로 황 대표가 저를 챙겨 줬었다. 얼굴에 묻은 뭔가를 닦아 주기도 했었고. 엉킨 앞머리를 정리해 주기도 했었다. 버들이 까만 핸드폰 액정에 제 얼굴을 이쪽저쪽 비춰 봤다. 집에 있다가 나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과 잘 보이고 싶어 빗은 지 얼마 안 돼 단정한 머리카락이 마냥 아쉽다. 입술을 삐죽거렸다.
황 대표를 뒤따라 걷기 잠깐이다. 핸드폰을 가랑이 사이에 끼운 버들이 제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뒤섞었다. 숱이 많아서 쉽게 엉망이 됐다. 무심코 뒤를 돌아본 황 대표가 움찔거렸다.
황 대표가 한숨을 내쉬자, 버들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바닥으로 굴렀다. 그러면서 섣불리 저지른 제 행동을 후회했다. 오늘은 날이 아닌가.
“너 꼴이 그게 뭐야.”
이번에 버들이 움찔거렸다. 끝까지 무시할 줄 알았더니. 황 대표가 말을 걸면서 성큼성큼 다가왔다. 버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돌멩이를 주웠다. 세모 모양으로 그 주변 돌멩이 중 가장 귀여웠다. 황 대표가 눈썹을 찌푸렸다.
“버려. 더럽잖아.”
버들이 미련 없이 돌멩이를 휙 던졌다. 새둥지가 된 버들의 머리를 잠시 내려다보던 황 대표가 정리해 줬다. 그게 너무 달콤해서 미쳐 버릴 것만 같다. 딱, 머리에 꽃 달고 뛰어다니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수선했다. 스치는 사람들 전부가 장사를 하거나, 구경하기 바빠 저와 황 대표에게 무관심했지만 혹시나 싶어서. 비밀스럽게. 작은 목소리로 현재 제 마음이 어떤지 버들이 빗대어 고백했다.
“대표님. 제가 아이스크림 사 드릴까요?”
단지 더웠다, 정도로 지나갔을 계절인 여름이.
황 대표로 인해 싱그럽게 차올랐다.
* * *
씻고 나온 황 대표가 컵에 얼음을 채우고 미리 내려 뒀던 커피를 따랐다. 시간을 확인하니 자정에 가깝다. 절로 한숨이 샜다. 벌컥, 문이 열렸다. 어쩌면 무의식중에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리라, 미리 예고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황 대표는 차분했다.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심술맞아 보이는 노인이 버럭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버들이 좀 옮기세!”
달이 동그랗게 뜬 밤이다.
버들은 술병과 함께 평상에 나뒹굴고 있었다. 아까 산책길에 사서 버들의 양쪽 귀에 걸어 준 마스크가 온데간데없다. 퉁퉁 부은 아랫입술이 여실하다. 안아 들자 버들에게서 술 냄새가 끼쳤다. 순간 치솟는 화를 가까스로 억누른 황 대표가 지체 없이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음 같아선 정신 차리라고 벌써 이불에 확 던져 버리고도 남았는데, 저 때문에 다쳐 깁스를 한 게 걸렸다.
버들의 몸에 이불을 덮어 주다가 말고 젖혔다. 오르락내리락, 반복하는 버들의 가슴팍으로 황 대표가 몸을 낮춰 옆얼굴을 가져갔다. 숨을 죽였다. 그 상태로 가만히 귀를 댔다. 착각이 아니었다. 작은 새가 방정맞게 날갯짓하는 것처럼 버들의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어 대고 있었다. 당연했다. 마른 몸에 못 이길 정도로 알코올이 들어갔으니깐.
못마땅한 얼굴로 황 대표가 버들의 이마에 손가락을 팍, 튕겼다. 골이 빠개지는 소리가 났다. 맞은 자리는 당장 빨갛게 자국이 남았다. 잠결에도 아픈지 꿈틀대던 버들이 하필 깁스한 손으로 그 부분을 만지려고 했다. 황 대표가 그런 버들의 손을 가볍게 붙잡았다. 뭘 잘한 게 있다고 버들이 칭얼거린다. 달래 주지 않았다. 미지근한 물을 떠 와 마시게 했다.
일하던 황 대표의 집중이 두 시간도 못 되어 흐트러졌다. 버들이 끙끙거렸다. 체온이 높다. 해열제를 꺼내 와 먹였다. 그 과정이 이젠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말간 버들의 얼굴을 황 대표가 가만히 응시했다. 눈빛이 이내 깊어졌다. 위로 말려 있는 고운 속눈썹, 코, 볼, 인중, 이마에 난 제 손자국……. 무던히 방황하던 황 대표의 시선이 버들의 입술에 정착했다. 그러기 잠깐이다. 뒤돌아 욕실로 향한 황 대표가 세정제를 사용해 손을 씻고 나왔다.
괜찮다.
제 세상은 뒤집히지 않았단 걸 확인했고, 또 끝까지 뒤집힐 일도 없을 테니까.
아무렇지 않다.
버들의 입가에 물방울이 맺혀 있는 걸 황 대표가 쓱, 문질러 닦아 줬다. 그대로 시간이 멈췄다. 연고를 발라 주기 위해 몇 번 행하던 짓이었건만. 괜한 생각들이 겹치면서 머릿속이 순간 어지럽혀졌다.
길게 숨을 내쉰 황 대표가 버들의 입안으로 느릿하게 손가락 하나를 넣었다. 당장 버들이 보인 반사적인 반응에 황 대표가 미간을 좁혔다. 말랑하고 연한 버들의 혀가 제 손가락 전체를 감싸며 밀착했다. 뜨겁다. 손가락을 두 개로 늘렸다. 서두를 것 없이, 은밀함을 담아 앞뒤로 두어 번 움직였다. 버들의 윗니에 손톱이 걸려 긁혔다. 간지러워서 그랬나. 뜻밖이다. 별 거 아닌 그 작은 자극이 오랫동안 여운으로 남아 머물렀다. 황 대표의 손등에 굵직한 핏줄이 섰다. 오럴은 하는 것도, 받는 것도 싫다. 그런데 버들의 타액으로 손가락이 흥건하게 젖어 들자, 허벅다리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아무래도 욕구 불만인 거 같다.
* * *
싱크대 앞에서 버들이 꼼짝없이 얼어 버렸다. 제 등 뒤로 바짝 황 대표가 붙어 서 있었다. 서늘한 인상의 향수 냄새가 그윽하게 풍겨 왔다. 버들의 눈이 정처 없이 깜박였다. 전에는 간곡하게 부탁해도 무시하더니 어쩐 일인가 싶다. 높은 선반에 위치한 물건을 꺼내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황 대표가 도와줬다.
황 대표의 눈꺼풀이 아래로 잠겼다. 휘청거리는 척하다가 중심을 잡았다. 황 대표의 손에서 떨어진 반찬통이 바닥을 굴렀다. 버들이 당황하며 몸을 돌렸다.
“대표님. 괜찮으세요? 어디 다치시진 않았어요?”
더듬거리면서 제 상태부터 살피며 묻는다. 무표정을 유지하며 황 대표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의 배꼽이 아슬아슬하게 맞닿기 직전이다. 이걸 노렸다. 여유 있게 웃으며 황 대표가 버들의 골반을 쥐었다. 데리고 노는 거지, 다른 건 아니었다.
* * *
둘이서 오전 일찍, 예약해 둔 병원에 다녀온 날이었다.
“너 안 자?”
“조금 있다가 잘 건데, 대표님은요?”
“……나도.”
새벽 늦게까지 버들이 쌩쌩했다. 버들이 메시지를 주고받느라 핸드폰에서 울리는 진동 소리와 황 대표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한데 섞였다. 짤막하게 한숨을 내쉰 황 대표가 더 못 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엎드려 있는 버들이 불만이었다. 목이랑 허리에 전부 좋지 않은 자세였다. 버들을 똑바로 앉힌 다음 핸드폰까지 빼앗아 한쪽에 내려놨다. 난데없는 행동들이었다. 의아한지 버들의 큰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황 대표가 앞머리를 걷어 드러난 버들의 이마를 짚었다.
항상 이 시간에 아팠었는데, 멀쩡하다. 눈이 마주친 게 그저 좋은 것인지 버들이 샐쭉 웃었다. 열이 올라 끙끙거리는 버들의 몸을 안고 소파에서 잠든 지 여러 날이었다. 별말은 못 하고 황 대표가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았다. 대자로 뻗은 채 버들이 잠들었다. 형광등에 눈이 부시지도 않나 보다. 세상 태평해 보인다. 역시나 열은 없었다. 호흡도 안정적이었다.
……뭐지? 버들이 안 아프니까 뭔가 기묘하게, 거치적거린다.
에어컨이 계속 작동되는 집 안의 공기가 차가웠다. 망설임을 끝냈다. 노트북을 정리한 뒤, 황 대표가 잠들어 있는 버들을 살살 품에 안아 소파로 데려갔다. 제 가슴팍에 폭 기대어 오는 무게와 뜨끈뜨끈한 체온을 느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제야 뾰족하게 날이 섰던 신경이 누그러졌다. 그 정도쯤 제게 생긴 변화는 황 대표도 너그러이 받아들였다.
평화는 길게 가지 못했다.
아팠을 때와 다르게 버들이 중간에 잠이 깼다. 눈꺼풀이 가물가물 깜박였다. 고개를 들자 황 대표와 눈이 마주쳤다. 꿈인가, 아닌가. 이게 무슨 상황일까, 성의 없이 파악하던 버들이 일순 굳었다. 황 대표의 어깨를 버들이 세게 밀쳤다. 오히려 뒤로 넘어간 건 버들이었다. 황 대표가 아무렇지 않게 잡아 줬다.
황 대표가 태연히 사기 친 말에 버들이 속아 넘어갔다. 소파에 황 대표님이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내가 무릎 위로 기어 올라왔다고? 죄송하다고 사과 후 도망가려는데, 또다시 붙들렸다. 조마조마하다. 목구멍이 꽉 죄어 왔다. 더러운 게이 새끼라느니, 호모 새끼라느니. 황 대표의 입을 통해 나올 심한 욕설을 잔뜩 겁먹고 기다렸는데, 한참이 지나도 잔잔한 공기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버들의 속눈썹이 빠르게 깜박였다.
“자.”
“…….”
“자라고.”
“…….”
황 대표의 손이 버들의 엉덩이를 은근슬쩍 만졌다.
“이상해요.”
“뭐가.”
“이거 이상해요.”
“그러니까 뭐가.”
“자세가…….”
“자세 뭐.”
정신없는 버들이 우물쭈물했다.
“자, 빨리. 나도 잘 거야.”
황 대표는 지나칠 정도로 뻔뻔했다.
“이대로 제가 어떻게 자요?”
황 대표가 감았던 눈을 떴다. 이대로 그동안 잘 자 놓고선 왜 못 자? 뒷덜미를 붙잡아 버들을 억지로 제 가슴팍에 기대게끔 유도했다. 뒷덜미를 놓아주자마자 버들의 고개가 용수철처럼 들렸다. 정면에서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새벽이라 그런지 주어진 정적은 더욱더 진했다. 두근거린다. 버들의 속눈썹이 황 대표를 피해 먼저 아래로 치우쳐졌다. 그러자 황 대표의 목젖이 보였다.
“가까이에서 보니까…….”
권태롭게 황 대표가 비난했다.
“너 못생겼다.”
여태 거울을 보지 않고 살았다면 모를까. 또 극성맞을 정도로 팔불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형들을 다섯이나 뒀다. 그러다 보니 저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는 가정 환경에서 자라났다. 황 대표가 방금 내뱉은 그 비난은 어떠한 손상도 입히지 못하고 버들의 한쪽 귀로 빠져나왔다.
“유버들. 오늘은 왜 나 좋아한다고…….”
“좋아해요. 오늘 말 안 한 거 아니에요. 아까 여러 번 말했어요.”
“……아까 언제.”
“대표님 일할 때요.”
눈치를 보느라 버들의 말끝이 바닥을 기었다.
“넌 내가 왜 좋아? 언제부터 좋았어요?”
황 대표가 가만히 물었다.
“……처음 딱 봤을 때는 관심만 갔어요.”
“웃기지 마. 너 처음부터 나 좋다고 꽃 주면서, 달려들었잖아.”
“해바라기 줬을 때는 좋아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였지만, 처음엔 진짜 관심이었는데…….”
“관심은 왜 가졌는데, 나한테?”
조용조용 대화가 쌓였다.
“저는…….”
탐이 났다. 건강하고 당당해 보였으니까. 따라 할 수만 있다면, 저도 황 대표와 같은 분위기가 나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늘 바랐고 꿈꿨던 이상향이었다. 황 대표를 향한 관심이 애정으로 바뀌었던 건 순식간에 벌어진 사고나 다름없었다.
“…….”
“…….”
황 대표가 버들의 말이 이어지길 끈기 있게 기다렸다.
“처음에 대표님이 저한테 ‘유버들 씨’하고 불러 준 게 기뻤어요. 설레고.”
“……그럼 네 이름이 유버들이니까 ‘유버들 씨’라고 하지. 뭐라고 해.”
꽂힌 부분이 터무니없을 만큼 너무 시시했다. 열이 받을 정도였다. 황당해하고 있는데 버들이 웃었다.
“왜 웃어.”
“그냥 웃었어요.”
안달복달하며 겨우 스무 살을 넘기면 뭐 해. 제 형들도 여전히 저를 한두 살 먹은 어린 애로 취급하고 있다. 심장이 약하게 태어나 항상 조심해야만 했었다. 어렸을 적, 보호자 없이 놀러 나간 놀이터에서 무슨 꼬임에 넘어갔는지 실컷 공을 차며 뛰어다니다가 심정지가 왔었던 적이 있다. 운이 좋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마침 심폐 소생술을 할 줄 아는 대학생이 근처에 있었고 응급 처치를 한 상태에서 구급차가 도착했다. 나는 다시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저를 대신해 그날의 기억들을 가족들이 샅샅이 나눠 가진 것 같았다. 그래서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는다는 그 당연한 일이 나한테 다들 과분하다고 여기는 건 아닐까 싶다.
“대표님. 서른 살이니까, 어때요?”
9년 차가 마냥 까마득하다.
“네? 어때요?”
“너희 형한테 물어봐. 유 대표도 나랑 같은 서른 살이잖아.”
저가 궁금한 서른 살은, 특별하게 딱 한 명뿐이었다. 다시 버들이 웃었다. 눈꼬리가 접혔다.
“대표님. 아주 많이 좋아해요…….”
불쾌한 기색으로 황 대표가 인상을 찌푸리자 가슴이 시큰거렸다. 아픈 거 잘 참아서 다행이다. 아무렇지 않게 제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 누굴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나를 위해서. 혹시나 미련 남지 않게. 황 대표에게 줄 수 있는 거 다 주고, 할 수 있는 건 다 해 주고 싶다.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받아도 어쩔 수가 없다.
“잠이나 자.”
버들이 아랫입술을 혀로 축였다.
“대표님. 그런데요…….”
눈치를 봤다.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닌데, 자세가 너무 야해요.”
“……아무 사이도 아니라서 아무 짓도 안 하는데 이 자세가 뭐가 야해.”
황 대표가 짜증내며 대꾸했다.
……많이 졸리신가. 피곤하실 텐데, 내가 안 자서 못 주무시는 건가.
“대표님. 안 무거워요? 안 불편해요?”
“자꾸 시끄럽게 할 거야?”
매서운 눈빛에 못 이긴 버들이 조심조심, 황 대표에게 안겼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로 요동치는 버들의 심장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이유야 뻔했다. 직전까지 딱딱했던 황 대표의 입가가 나긋하게 풀어졌다.
허리 근처에서 맴돌던 황 대표의 손이 아래에서 위로 움직임을 반복하며 버들의 등을 쓰다듬었다. 자연히 옷이 들춰지고 때때로 버들의 맨살이 드러났다. 그럴 때마다 쏟아지는 간지러운 기분을 참기 위해 버들이 바짝 몸을 웅크려야 했다. 그게 황 대표의 어깨에 더 폭 고개를 기대게끔 만들었다. 질끈 눈을 감았다.
자다가 깨서 그런지 버들이 다시 잠들기까지의 시간이 짧았다. 쌕쌕거리는 버들의 숨소리가 목 근처에서 부서졌다. 황 대표가 핸드폰을 꺼냈다. 날짜 맞춰 공항에 데리러 간다고 혜주에게 답장을 보냈다.
날이 밝았다. 먼저 깬 건 황 대표였다. 붙어 있는 버들의 몸을 떼어 냈다. 둘 다 발기한 상태였다.
* * *
새벽녘 공기가 시원하다 못해 차다. 새들이 무리 지어 낮게 비행했다. 요 며칠 연속으로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더니만. 먹구름이 모여 꾸물거리는 하늘이 심상치 않게 흐리다. 곧 폭우가 쏟아지게 생겼다. 황 대표가 뛰던 걸 멈추고 잠시 허리를 굽혔다가 폈다. 저 멀리서 들쭉날쭉하게 펼쳐진 산들이 시야 그득히 담긴다. 꼭대기 즈음 돌돌 휘감겨 있는 안개가 스산하다.
이르게 나와 평소보다 더 오래 조깅에 집중했다. 버들을 안고 자다가 한 곳에 피가 쏠려 들들 열이 끓었던 신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황 대표가 여유로움을 되찾았다. 심각할 거 없다. 남자라서, 단순한 신체적 반응에 불과하다.
턱 아래로 흐른 땀방울을 대충 문질러 닦으며 집으로 향하다가 문득 발아래를 내려다봤다. 처음 쌍욕 나오게 만들었던 울퉁불퉁한 흙길과 스치면 다리에 엉겨 붙고는 했던 잡초 따위들이 어느새 아무렇지가 않다. 그렇게 꺼려 하던 촌구석 생활에 시간이 지나자 저절로 적응하고, 그걸 유순히 받아들인 방금 전 제 태도가 불현듯 마음에 들지 않아 황 대표가 욕을 씹었다. 표정이 사납다.
* * *
식탁 기둥에 종아리가 턱 하니 걸리면서 버들이 눈을 떴다. 무릎을 꿇은 자세로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눈꺼풀은 붓고 곱실거리는 머리카락은 민들레 홀씨처럼 산발이 됐다. 귓불 아래를 긁적거린 버들이 작게 하품을 터트렸다. 기분이 계속 몽롱했다. 잠이 덜 깬 와중에도 가장 먼저 생각이 나는 게 황 대표다. 버들이 황 대표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거실이 텅 비어있다.
……어디 가셨지? 고개를 위로 꺾어 복층을 바라봤다.
“황…….”
목구멍이 따끔했다. 버들이 자기 목젖을 만지작거렸다. 황 대표를 부르기 위해 우선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부터 가다듬으려던 찰나. 배꼽 아래가 근지러우면서 묵직하단 걸 깨달았다. 곧바로 고개부터 꺾였다. 무릎 사이가 제 의사와 달리 활짝 벌어졌다. 그 틈을 한참 바라보던 버들이 콧잔등을 찌푸렸다.
……섰다. 명백히 황 대표님 때문에.
몽유병처럼 자다 말고 황 대표님 무릎 위로 기어 올라왔다는데, 그런 나를 내치지 않고 황 대표님이 오히려 안아 줬었지? 빨리 자라고 제 등을 쓰다듬던 투박한 손길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그 탓인지 간밤의 꿈에 황 대표가 나왔었다. 만약 꿈 내용이 얌전했다면 양심에 가책 없이 굴 수도 있었을 거다. 단지 아침이란 핑계를 대면서. 그런데 복사기에서 요란했다.
버들이 허둥거리며 이불 위를 벗어났다. 우선 티셔츠를 잡아당겨 앞섶부터 가렸다. 날이 밝은 것 같기는 한데 정확히 몇 시인지 확인할 새도 없었다. 황 대표가 집 안에 없단 게 현재로선 무조건 다행이었다. 서두르는 통에 미처 보지 못한 베게에 발목이 걸려 하마터면 크게 자빠질 뻔했다. 욕실 문을 쾅 닫았다. 욕조에 걸터앉는 버들의 얼굴이 붉다. 꼿꼿하게 발기한 제 몸을 주춤거리던 버들이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읏……. 등이 절로 둥글게 굽었다. 진땀이 밴다. 서툰 손짓이었다. 하지만 황 대표를 떠올리는 것으로 흥분은 빠르게 올라 사정에 이르렀다.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마음 같아선 누워 있고 싶지만 땀이 난 몸과 끈적끈적한 손바닥을 서둘러 씻지 않으면 안 됐다. 욕조에 물이 받아지길 잠자코 기다리던 버들이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세면대 앞쪽의 거울 앞에 섰다.
거울을 문질러 닦아도 잠시뿐이다. 금세 수증기로 어릿해진다. 불투명하게 비춰지는 제 얼굴을 버들이 빤히 바라봤다. 점차 붓기가 가라앉고 있는 입술에 물끄러미 시선이 닿았다. 황 대표가 그랬던 것처럼 아랫입술을 자근자근 씹어 보고, 혀를 안쪽으로 말아 입천장을 건드려 봤다. 혼자서는 아무렇지 않다.
척추 전체가 지르르 울리고.
소나기가 내려 온몸이 젖는 거 같고.
머릿속이 흐물흐물해지고.
다리까지 풀렸던.
감당 못 할 범주로 휘몰아치던 그 낯선 감각이 며칠이나 되었다고 벌써 까마득하다. 아쉽다.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던 버들이 자아 성찰을 하며 제 뺨을 톡톡 두드렸다. ……아침 댓바람부터 너무 황 대표님 생각에만 빠져 있는 거 같다. 그렇다고 딱히 새삼스러울 것도 못 된다. 뭐, 언제는 안 그랬나.
심장 박동이 세차다.
커튼이 걷히지 않은 집 안은 불까지 켜지 않아 아직까지 어둑어둑했다. 황 대표가 웃통부터 깠다. 갈라진 근육들이 땀에 젖어 선명하다. 눈에 들어와야 할 버들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힐끔거린 욕실에서 옅은 물소리가 들려왔다. 거실을 몽땅 차지할 정도로 폭신하게 깔린 이불이 잔뜩 구겨진 채다. 일부러 버들을 깨우지 않았다. 더 자라고 바닥에 최대한 조심스레 눕혀 줬다. 그 후 조깅하러 나갔다가 온 사이 혼자 남겨진 버들이 이리저리 실컷 굴러다닌 모양이다. 잘못해서 손목을 깔아뭉개거나 하진 않았겠지. 생긴 대로 좀 놀지. 잠버릇이 그 따위로 험악해서야.
냉장고 안쪽에서 생수를 꺼내 든 황 대표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차분히 목부터 축인 다음 눈을 감았다. 휴식은 오래가지 못했다.
“유버들.”
욕실 문을 노크하자 물소리가 뚝 끊겼다. 이윽고 달칵, 문 잠기는 소리가 났다.
“……야.”
황 대표의 미간이 바로 구겨졌다. 뒤늦게 문고리를 돌려 봤지만 당연하게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저 손목에 무리 안 가게끔 잘 씻고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버들이 문을 잠가 버리자 심기가 거슬렸다. 황 대표가 다시 노크를 했다.
“유버들.”
“……왜요.”
작디작은 목소리가 굳건히 닫힌 문을 통해 넘어왔다. 기가 막힌다. 왜요? 저를 적대시하는 버들의 태도가 다분히 느껴졌다. 내가 무슨 변태처럼 씻는 거 보여 달라고 했어? 매번 귀찮은 걸 무릅쓰고 머리 감겨 줬더니만. 머리숱도 많은 게.
배은망덕한 버들의 꼬락서니가 자기 넷째 형을 영락없이 빼닮았다.
“문 열어.”
“네? 저 씻는 중이에요.”
“알아. 문 열어, 빨리.”
목덜미, 등, 허리, 허벅지 안쪽. 거품이 느릿느릿 버들의 몸에 길을 내고 있었다.
“어떻게 문을 열어요.”
황당한 어조로 버들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왜 못 열어.”
“……벗고 있어요.”
잠깐 조용했다. 그제야 황 대표가 문을 열 수 없는 상황을 납득하고 멀리 떨어진 줄 알았다. 막 안심하려던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안쪽으로 말린 버들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어디까지 벗고 있는데.”
“…….”
“어?”
“…….”
“씻은 지 오래됐지?”
“…….”
“손 불편해서 혼자 샤워까지 못 하잖아.”
“…….”
“유버들.”
진짜 못살겠다. 버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샤워하는데 어디까지 벗고 있겠어요. 다 벗고 있지. 그래서 문, 못 열어요.”
처음보다 버들의 목소리가 컸다. 욕실 문을 힐끔거리며 버들이 스펀지를 비틀어 짰다. 손가락 마디마디, 거품이 빠져나와 손목을 훑었다. 부드러운 게 꼭 생크림 같다. 바닥 타일이 미끄럽다.
“다 벗고 있다고?”
한쪽은 열라고, 한쪽은 못 열겠다고. 양보 없이 반복하는 실랑이가 팽팽하게 잡아당긴 고무줄 같았다. 황당함에 버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턱을 아래로 내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제 몸을 바라봤다. 운동 갔다 오셨겠지? 갑작스레 저를 채근해 대는 황 대표의 의중을 모르겠다.
단단히 문을 잠갔지만 불안하다. 버들이 움츠러들었다.
“너 왜 다 벗고 있어?”
“씻고 있다고 아까 말씀 드렸잖아요.”
“그러니까. 한 손으로 어떻게 혼자 씻을 수 있다는 건데.”
“씻을 수 있어요. 깁스에 비닐도 혼자 감았어요.”
“아. 깁스에 비닐 감았어?”
“비닐도 감고 그 위에 수건도 겹쳤어요.”
“……그래?”
“네.”
황 대표가 한 걸음 물러났다.
“열어.”
되돌이표다.
“그럼 10초만 세고 들어오세요.”
언제나 패자는 저였다. 승자는 황 대표였고.
“대표님. 네?”
“알았어.”
“대표님 10초 꼭 세셔야 돼요.”
“알았다니까.”
“황 대표님이 먼저 10초, 세고 들어오신다고…….”
“말 그만해. 너 때문에 ‘대표님’ 이 말 닳게 생겼으니까.”
버들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더는 버텨 내지 못한 버들이 잠갔던 문고리를 풀었다. 그리고 후다닥 물도 담기지 않은 욕조 안으로 들어가 주저앉았다. 커다란 수건을 끌어당겨 몸을 감췄다. 10초는커녕, 3초도 안 되어서 문이 열렸다. 황 대표가 성큼성큼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타이밍이 참 아슬아슬했다.
“너 건방지게 문은 왜 잠가.”
버들이 코를 훌쩍거렸다.
“머리 감았어?”
차마 황 대표 쪽은 바라보지 못하고 버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떻게 감았어?”
“……잘 감았어요.”
“손목.”
수건 속에 감추고 있던 깁스된 팔을 버들이 내밀었다. 황 대표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비닐을 혼자서 용케 감아 두긴 했지만 엉성하다. 손가락 근처로 삐져나와 있는 붕대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기다리든가 하지 왜 먼저 씻었어.”
야한 꿈을 꿨으니까. 기다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욕실은 사방이 꽉 막혀 있는 공간이었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버들이 용기를 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시야도 거꾸로 뒤집혔다. 황 대표를 보자마자 버들이 화들짝 놀랐다. 옷을 벗고 있는 황 대표의 탄탄한 상체가 숨을 턱 막히게끔 했다. 핏줄이 서 도드라진 장골이 근사하다. 좁혀진 거리에 버들이 흠칫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황 대표는 태연히 저 하고 싶은 대로 굴었다. 양해를 구하지 않고 버들에게 팔을 뻗었다. 귓가에 묻어 있는 거품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닦아 여 보란 듯 눈앞에 가져다 댔다.
“샴푸 제대로 한 거 맞아?”
샴푸 제대로 했다. 자꾸 문 열라는 통에 제대로 못 헹궈서 그렇지.
“눈 감아.”
버들이 순순히 말을 들었다. 긴장이 녹았다. 뜨거운 물에 온몸이 금방 노곤해진다. 황 대표가 차분히 버들의 머리를 감겨 주기 시작했다. 무의식이었다. 버들의 입술에 시선이 가만히 머물렀다.
이어서 황 대표가 씻고 나왔다. 찬물 때문에 타일 전체에서 한기가 스며들었다. 드라이기 정리를 막 끝낸 버들이 황 대표의 옆을 스쳐 다시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세면대 물을 틀었다가 금방 잠갔다. 꼭꼭 뭉친 무언가를 버들이 주먹 속에 감추었다. 현관 쪽으로 빠르게 달려가는 버들의 바지가 종아리까지 둘둘 접혀 있었다.
황 대표가 커피 머신을 작동시켰다. 드르륵. 원두 갈리는 소리가 났다. 이내 진한 커피 향이 감미롭게 퍼졌다. 커튼을 걷었다. 하늘은 아까보다 좀 더 어둡고 흐렸으며 역시나 예상처럼 비가 내리고 있었다.
버들이 슬리퍼를 꺼내 신었다. 뽀얀 발가락부터 아킬레스건까지 앞뒤로 훤히 드러났다. 황 대표의 미간이 좁혀졌다. 뒤쪽을 불편하게 꺾어 신은 운동화는 보이는 부분이 기껏해야 발뒤꿈치가 전부라지만 저건 정도가 심했다. 버들이 현관문을 열기 직전이었다. 황 대표가 버들을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인지 고개만 뒤 돌린 버들과 황 대표의 눈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어디 가.”
“……잠깐.”
“잠깐 어디. 확실하게 말해.”
“스승님 댁에 다녀올게요.”
얕게 황 대표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거길 왜 가. 밖에 비 오는 거 안 보여?”
버들이 미적거렸다.
“손에 든 건 뭐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두 번, 세 번 물어봐야 대답할 거야?”
말해 주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속옷이라서.
“지금 가야 하는데. 꼭 지금 가 봐야 하는 일이 있는데…….”
소심하게 버들이 투덜거렸다. 시끄럽단 황 대표의 비난에 버들이 시무룩해졌다. 눈썹 끝이 축 처진 꼴이 가관이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버들이 슬리퍼를 벗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무감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황 대표가 턱을 까닥였다.
“나가 봐, 그럼.”
못 나가게 잡아 두는 것보다 너그러이 풀어 주는 황 대표의 태도가 어쩐지 살벌했다. 그래도 애써 얻은 기회를 그냥 날려 버릴 순 없었다. 버들이 우산을 펼쳤다. 황 대표가 보는 앞에서 다섯 걸음도 못 갔다. 거세게 분 바람으로 낡은 우산이 거꾸로 뒤집히고야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도로 집 안으로 들어가자 너 그럴 줄 알았단 태도로 황 대표가 조롱 섞인 눈초리를 보냈다. 기가 죽은 버들의 등 뒤로 크게 번개가 내리쳤다.
시간이 유유히 흐른다. 버들이 아까부터 창가에 매달려 있었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빗줄기가 그야말로 억세게 퍼붓는 중이었다. 흙으로 된 땅이 뚫려 웅덩이가 몇 개나 파였다. 나뭇가지가 휘어지더니 분질러져 어디론가 날아갔다.
“대표님.”
소파에 앉아 있는 황 대표에게 버들이 쪼르르 다가갔다. 야한 꿈에 심란했던 것도 잠시. 외출을 하지 못해 섭섭한 것도 잠시였다. 지금은 그저 황 대표와 한 공간에,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단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내년 어느 날, ‘작년 여름’이 어땠냐고 누군가 감상을 물었을 때 어쩌면 무의식중에 황 대표와 제 기억이 겹칠 수도 있었다. 그게 버들의 마음을 붕 뜨게 만들었다.
“우리 빈대떡 만들어 먹을까요? 김치전이나. 비 오는 날에는 원래 그런 거 먹는데요. 아니면, 라면 끓여 드릴까요? 아. 인스턴트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시죠? 대표님. 뭐 드시고 싶은 거 없으세요? 제가 다 해 드릴게요.”
황 대표가 태블릿을 내려놨다.
“너 죽 먹어야 돼.”
지치지 않는지 버들이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저는 죽 먹을게요. 대표님은 빈대떡이랑 김치전이랑…….”
“뭐 하려고 좀 하지 마. 너 전에 사고 친 거 잊었어?”
귀찮은 투가 역력했다. 황 대표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은 버들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그러면, 대표님. 제가 좋은 거 알려 드릴까요?”
황 대표의 비서가 주고 갔던 박하사탕을 꺼내 반으로 쪼갰다. 큰 건 황 대표의 몫으로 남겨 두고, 작은 사탕 조각을 골라 입에 넣었다. 알싸한 맛이 번진다. 담배를 빼문 버들이 라이터를 켰다. 창문을 약간만 열었다. 고작 그것만으로 빗소리가 선명해졌다. 손을 굳이 쓰지 않고, 능숙하게 필터만 이로 굴리며 희뿌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입술이 붉다. 잔뜩 찌푸리고 있는 미간이 같잖다.
“……너 뭐 하는데.”
“좋은 거요. 이거, 대표님한테만 알려 드리는 거예요.”
속닥거린다. 몇 번이나 ‘좋은 거’란 말을 강조해 가며. 빗소리와 박하사탕을 합하면 색다른 담배 맛이 난단다. 여기 와서 우연히 알게 되었다며 꼴통 새끼가 낮게 주절거렸다. 활짝 웃는 버들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어려 있었다. 그런 꼴통 새끼를 세상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던 황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타부타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버들의 담배를 압수했다.
나란히 식사를 끝냈다. 늘 먹는 것만 먹는 황 대표가 신경 쓰인다. 세상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와인을 따르던 황 대표가 잠시 자리를 떴다. 식탁 위를 치우던 버들이 와인 잔을 만졌다. 바깥 동태를 잠시 살폈다. 술을 탐내는 게 아니었다. 황 대표의 입술이 닿았던 부분이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아주, 살짝만 대 볼까? 간접 키스.
뾰족하게 입술을 내밀었다가 이내 관뒀다. 너무 변태 같은 제 모습에 버들이 의기소침해졌다. 남자인 황 대표를 좋아하니까 게이나 호모가 되는 건 당연한 거겠지만, 변태만큼은 되고 싶지 않았다.
술이 들어가자 몸에서 자잘하게 열이 올라온 황 대표가 보고 있던 책을 덮었다. 맞은편에 앉아 뭔가 끼적거리고 있는 버들을 가만히 주시했다. 사실 아까부터 버들이 추워한다는 걸 알았다. 에어컨을 껐다. 쾌적한 실온을 유지하기 위해 반대로 보일러를 켰다. 공기가 금방 훈훈해졌다.
식탁에서 벗어난 버들이 황 대표의 눈치를 살살 살펴 가며 이불을 폈다. 어지르지 말라고 하실까? 뭐라고 잔소리가 날아올 줄 알았더니. 보고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 버린 게 의외였다. 다행이다. 한결 편안해진 버들이 대자로 드러누웠다. 소란스러운 빗소리가 멀어져 가고, 눈꺼풀이 차차 느릿해진다. 바닥이 따뜻하니 그대로 녹아 버리게 생겼다. 저도 모르게 버들이 까무룩 잠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에서 깬 버들이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엄청 푹 잔 것 같은데 겨우 20분이 지난 채였다. 기지개를 쭉 켜며 버들이 몸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아까 식탁에 앉아 있던 황 대표는 언제인지 소파로 자리를 옮긴 뒤였다.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이 우아하다. 바닥에 누워 있어 황 대표의 발목이 너무나 잘 보였다.
……섹시해. 만지는 것도 아니고. 멀리 떨어져 그저 바라볼 뿐이건만 손끝이 간지럽다.
황 대표의 시선이 저에게 향하려 하자 버들이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그 이유가 흑심이란 걸 버들이 애써 외면했다. 황 대표의 무릎에 기어 올라간 건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런 자신을 황 대표가 내치지 않았단 게 핵심이었다. 황 대표의 발치까지 버들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들키지 않을까. 들키면 어쩌지. 긴장감에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무릎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한 버들을 내버려 두면서 황 대표가 페이지에 남은 글자를 마저 읽었다. 버들이 황 대표의 가슴팍에 옆얼굴을 기대었다. 설렌다.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충동에 저지른 짓이었는데 가슴이 터질 것처럼 벅차올랐다. 헤벌쭉 웃음이 터지기 직전이다. 표정 관리를 했다.
책을 내려 둔 황 대표가 버들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쭉 밀었다.
“내려가라.”
나지막한 황 대표의 말에 “네.” 공손히 대답한 버들이 바닥에 앉았다. 황 대표의 서늘한 눈매가 닿았다. 감히 어딜. 밤도 아니건만.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내리니 조각은 물론 산책도 하러 나갈 수 없었다. 먹고 자고, 먹고 잤다. 잡지에 나온 영화 내용으로 버들이 수다를 떨었다. 오래되기도 했고 명절 때면 필수로 방영해 주는 영화 중 하나였다. 그만큼 대중적이라 누구나 알 만한 줄거리였다. 대표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감독님은 무슨 의도였을까요?
황 대표에게 돌아오는 대답이나 반응은 없었다. 제 생각엔 그 감독님의 의도는……. 꿋꿋하게 버들이 황 대표의 등을 보며 재잘거렸다. 저를 대하는 황 대표의 무관심은 만연히 적응된 것도 있지만, 애초에 기대한 게 없어 괜찮았다.
자리를 옮기는 황 대표를 따라 버들이 움직였다. 제 뒤를 졸졸 따라오는 버들의 기척을 느끼며 황 대표의 입가가 나긋하게 풀렸다. 맹목적인 애정이 참 쉽다. 그러면서 번거롭지 않았다. 예를 들어 약속을 잡거나 특별히 시간을 낸다거나 하는? 버들에겐 그런 기본적인 노력조차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고개만 돌리면, 언제 어디서든 버들을 볼 수가 있었다.
……이래서, 개 키우나?
* * *
비는 3일 내내 내렸다. 그래서인지 밤하늘이 유독 쾌청했다.
챙겨 주는 약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살포시 눈을 뜨니 어김없이 황 대표에게 안긴 채였다. 아. 뭐야. 진짜 몽유병이야? 낙담과 동시에 부랴부랴 바닥으로 내려가려는 버들의 손목을 황 대표가 붙잡았다. 어정쩡한 자세를 민망해하는 버들을 아무렇지 않게 황 대표가 다시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버들의 목덜미가 금방 달아올랐다. 혹여 저 때문에 황 대표가 무겁거나 불편할까 봐 무릎으로 일어났다. 그러면서 눈높이가 달라졌다. 버들이 황 대표를 내려다보고, 황 대표가 버들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노파심에 말씀드리는 건데요. 저, 대표님이랑 키스한 거 하나도 기억 안 나요. 별로 좋지도 않았고 다 까먹었어요.」
버들의 입술에 시선을 멈춘 채로 감았다 뜨는, 황 대표의 눈빛이 나른했다.
“슬리퍼, 그거 어디서 났어?”
왜 자꾸 무릎 위에 기어올라 오냐, 변태냐, 호모 새끼냐, 그런 날카로운 추궁을 예상했었는데 빗나갔다. 슬리퍼? 버들이 갸웃거렸다.
“원래는 정민이 건데요, 사이즈가 작아서 못 신는다고 해서 제가 잠깐 빌렸어요.”
황 대표의 손이 버들의 허벅지 뒤쪽을 만졌다. 간지러움을 못 이긴 버들이 풀썩 주저앉았다.
“슬리퍼, 그거 돌려줘.”
“……편한데.”
“그거 신으면 너 발가락이건 발톱이건 다 보여.”
“제 발도 보기 싫으세요? 더러워요?”
“…….”
한없이 낮은 목소리로 물은 버들의 마지막 질문을 황 대표가 곱씹었다. 전부 아니란 대답이 목구멍 안쪽을 맴돌았다. 버들의 발은 뽀얗기만 했다. 대답 대신 황 대표가 버들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숨을 크게 들이켠 버들이 움찔거렸다.
“……만지지 마세요.”
조막만 한 목소리가 샅샅이 흩어졌다.
피하려고 해 보았지만 힘에서 밀리니 당연히 무리였다. 그리고 황 대표의 무릎 위에 앉아 있어 마음처럼 쉽게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버들이 얌전해졌다. 힐긋거리는 눈초리가 순하다. 황 대표가 제 가슴팍에 버들을 기대게끔 했다. 버들의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이 제 쪽으로 건너왔다.
“슬리퍼 편해서 계속 신고 싶어?”
“……네.”
“그럼 양말도 챙겨 신어.”
양말 신은 발로 슬리퍼를 신으라니. 아무리 시골이라지만 너무한 처사였다. 차라리 슬리퍼 안 신겠다고 돌려주는 게 낫겠다.
“그러는 대표님은…….”
“나 뭐.”
달싹거리는 버들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제 부당한 기분을 좀 느껴 보란 목적으로, 발목 보이면서 다니지 말라고 하려다가 난데없이 딜레마에 빠지고야 말았다. 황 대표의 발목을 아무나 다 보는 건 싫다. 하지만 그걸 가려 버리면…… 저조차 못 보게 된다.
버들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첫사랑이 녹록지 않은 건 짝사랑이기 때문이었다. 뭐든 손해가 뒤따른다. 그걸 충분히 감내할 자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운이 쭉 빠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자. 빨리.”
꼬물거리던 버들이 이끄는 대로 황 대표의 어깨에 턱을 기댔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새벽이었다. 버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토하고 싶었다. 잠이 든 황 대표를 깨워서는 안 되었다. 조심히 무릎 아래로 내려가려고 움직이는데, 단단한 팔이 허리를 바짝 끌어당겼다. 그대로 갇혔다.
……아. 어떡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다. 어떻게든 황 대표의 품을 벗어나 토하러 나가느냐. 아니면, 이대로 황 대표에게 안겨 있느냐. 수평을 유지하던 저울의 무게는 당연히 한쪽으로 치우쳐졌다. 토하고 싶은 걸 억눌러 가며 버들이 황 대표의 품에 폭삭 안겼다. 속이 쓰리고 아프니 이후 잠들기는 글렀다. 황 대표가 습관처럼 제 등을 쓰다듬고 틈틈이 이마를 짚어 본단 걸 버들이 그날, 알아차렸다.
* * *
버들이 노란색 색연필로 종이 가득 해바라기를 그려 황 대표에게 선물했다. 황 대표는 업무 보기 바빠 쓱, 눈길만 뒀을 뿐이었다. 버들이 밖을 나갔다.
「그리고 노파심에 말씀드리는 건데요. 저, 대표님이랑 키스한 거 하나도 기억 안 나요. 별로 좋지도 않았고 다 까먹었어요.」
막무가내로 기승을 부리던 더위가 한풀 꺾였다.
“유버들.”
“네?”
시간 맞춰 완벽히 마무리한 업무를 유 대표에게 보내 놓은 뒤, 황 대표가 창가에 서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곤 마당을 부산스레 누비는 중인 버들을 불렀다. 버들이 손에 들고 있는 나뭇가지에 정체 모를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황 대표에게 쪼르르 달려가면서 버들이 재잘거렸다. 대표님 일은 다 끝내셨어요? 이거 살구래요. 살구 열매 보신 적 있어요? 냄새 되게 좋아요. 맡아 볼래요?
황 대표는 집 안에서, 버들은 바깥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버들이 웃었다.
“가까이 와.”
“이만큼요?”
“더 와.”
“…….”
“더.”
황 대표가 팔을 뻗었다. 동시에 버들의 어깨가 바짝 움츠러들었다. 아까부터 신경이 쓰였다. 아침 이후, 버들이 자꾸 뒤통수를 긁적였었다. 그러면서 이따금씩 콧잔등을 찌푸리기도 했다.
“이거 왜 이래? 어디서 다쳤어? 말 안 할 거야?”
황 대표가 인상을 썼다. 아픈 거 잘 참는다고 한 것처럼. 또 못 참을 정도로 아프더라도 저한테만큼은 아프다고 절대 말하지 않겠다며 고집을 피운 것처럼. 뒤통수에 주먹만 한 혹을 달고 와 놓고 버들은 침묵했다. 저한테 떠들었던 버들의 수다 내용을 황 대표가 더듬었다. 아침 잠깐 사이 외출해 이것저것 한 것도 많았다. 참외도 땄고, 포도도 땄고, 멜론도 땄고. 뒤통수에 난 혹에는 어떤 연고를 발라줘야 하나.
순간 버들이 움찔거렸다.
“대표님. 간지러워요.”
마찬가지였다. 머리도 여러 번 감겨 준 적이 있건만 손바닥 전체에 절묘한 자극으로 스치는 버들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생경한 게 이상했다. 숨결이 서로 스칠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다. 버들의 긴 속눈썹이 떨렸다.
「그리고 노파심에 말씀드리는 건데요. 저, 대표님이랑 키스한 거 하나도 기억 안 나요. 별로 좋지도 않았고 다 까먹었어요.」
버들이 황 대표의 입술을 바라봤다.
황 대표가 버들의 쇄골을 바라봤다.
동시에 둘의 목울대가 일렁거렸다.
* * *
새근새근, 잘 자던 버들이 깼다. 깁스를 풀어 손목이 한결 가뿐했다.
“왜?”
“……아니에요.”
이제는 황 대표의 무릎 위에서 자는 게 당연해졌다. 주제넘게 이런 거, 버릇 들어도 되나?
말랑거리면서 따끈한 버들의 몸을 황 대표가 껴안았다. 한 품에 쏙 들어오면서, 지그시 눌러 오는 무게가 안정적이다. 뒤통수에 난 혹을 어루만지던 황 대표의 큰 손이 빗나가 간간히 귓가를 건드렸다. 그럴 때마다 버들의 허벅지 안쪽에 힘이 들어갔다.
“불편해?”
버들이 급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다리 불편하면 말해. 쥐 내렸다거나. 그런 건 아픈 게 아니니까 괜히 버티지 말고.”
곤란하다. 저가 꿈질거리는 게 황 대표는 고작 접힌 무릎이 불편해서 그런지 아나 보다. 황 대표가 허벅지 측면을 쓰다듬었다. 버들이 숨을 꾹 참으며 황 대표의 가슴팍에 이마를 기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황 대표 때문에 애먼 버들의 속만 타들어 가는 중이다.
조각품이 완성되면서 서울로 올라갈 날이 정해졌다.
“할 말 있어?”
자꾸만 얼쩡거리는 버들이 때문에 황 대표의 집중이 흐트러졌다. 참다못한 황 대표가 미간을 잔뜩 구긴 채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멍석을 깔아 주면 도리어 아무것도 아니라며 피할 줄 알았더니, 버들이 할 말이 있단다.
“대표님. 저랑 바다, 가요. 차로 가면 금방이래요. 이제 제가 길 확실하게 알아요.”
너무 쓸데없는 말이었다. 황 대표가 다시 노트북을 바라봤다.
“대표님. 조각품 완성되었잖아요.”
“…….”
“……소원이에요.”
버들의 하얀 얼굴에 황 대표의 시선이 오래 머물다가 떨어졌다.
황 대표가 차 키를 들고 일어섰을 땐 오후 두 시가 넘어서였다. 그 전에 직원들이 다녀갔다. 침구를 새걸로 바꾸고, 공기청정기 필터를 교체하고. 소원 들어달란 걸 거절당한 뒤부터 쭉 정자에 앉아 있던 버들이 차에 올라탄 황 대표를 외면했다.
바다는 핑계였다. 수영하고 싶단 황 대표의 혼잣말을 지나치지 못했다. 또 저만 내버려 두고 황 대표가 수영장에 가 버릴까 싶어 쭉 전전긍긍 굴었다. 울적하다. 지금 외출하시는 거면, 언제 들어오실까? 오늘은 혼자 자야 하는 걸까? 마음이 허해졌다. 그 빈 공간은 황 대표가 아니면 어떻게 채울 방도가 없다.
“유버들.”
“…….”
“타. ……바다 가자며.”
어두웠던 버들의 얼굴이 단숨에 환해졌다.
정민에게 들었던 것처럼 바다는 꼭 외국 같았다. 기대 이상이다. 고운 모래와 기묘한 절벽들이 한데 어우러져 신비로웠다. 규모가 작기도 했고, 혹여 오염될까 마을 주민들 전체가 관광지로 사용하는 걸 원치 않는다고 했었다. 버들의 눈은 휘둥그레졌는데, 창틀에 팔꿈치를 올린 황 대표는 심드렁했다.
“대표님. 수영하고 싶다고 하셨죠?”
“……나보고 여기서 수영하라고?”
“바닷물 깨끗해 보여서 괜찮을 거 같아요.”
“괜찮을 거 같단 걸 왜 네가 결정해.”
황 대표와 버들이 차에서 내렸다. 부는 바람이 살랑인다.
“대표님.”
황 대표가 인상을 썼다.
“나는 바다에서 수영 안 해.”
버들이 차 앞을 돌아 황 대표에게 다가갔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간절한 눈빛으로 제 앞에 선 버들을 황 대표가 내려다봤다.
“바다에서 수영 왜 안 하세요?”
권태롭게 황 대표가 대꾸했다.
“짜.”
예민하고 섬세한 남자란 걸 버들이 새로이 상기했다.
“별로 안 짜 보이는데…….”
“어딜 봐서 안 짜 보이는데?”
“바다 색깔이 연하잖아요.”
“너 공부 못한 거 맞네.”
황 대표가 비아냥거렸다. 바다가 색깔이 연하다고 안 짤 거 같다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바람이 좋았다. 저 멀리 펼쳐진 바다와 맞닿은 하늘의 경계가 애매하다. 파도가 너울진다. 수영할 생각이 없다던 황 대표가 그대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림 같다. 그걸 보고 있던 버들의 얼굴이 새빨갛게 상기됐다. 이상하게 귀가 먹먹해졌다. 심장이 아플 정도로 뛰어 댄다. 지금 이 순간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
바다에서 나온 황 대표가 곧장 버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입술을 겹쳤다. 햇볕이 강했다.
“어때. 짜?”
“…….”
“안 짜?”
버들이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자 황 대표가 웃었다.
“안 짜다고?”
“……네.”
황 대표가 버들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들어올렸다. 방금 제 입술이 겹쳤던 버들의 입술을 아무렇지 않게 황 대표가 빨았다. 짠맛이 날 줄 알았는데 의외다. 황 대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짜 안 짠가?
버들의 뒷덜미를 황 대표가 제 어깨 쪽으로 가볍게 눌렀다.
“핥아 봐.”
“…….”
“뭐 해?”
“…….”
“핥아 보라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눈가가 시큰거렸다. 버들의 입술이 황 대표의 목 부근에 조심히 닿았다가 금방 멀어졌다. 그리고 물기가 옮겨진 제 아랫입술을 혀로 핥았다. 맛의 감상은 똑같았다. 오히려 달기만 했다.
황 대표에게 밀린 버들의 등이 차에 기대어졌다. 벌어진 버들의 다리 사이로 황 대표가 파고들며 자리를 잡았다. 다시 겹쳐진 입술이 깊어졌다.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하는 버들의 어깨를 황 대표가 감싸 제 키에 맞춰 좀 더 위로 들리게끔 했다. 혀끝이 스쳤다. 뜨겁다. 체온이 부서져 서로에게 섞였다. 저릿한 발바닥에 버들이 콧등을 찌푸렸다. 그 감각이 배꼽까지 타고 올라왔다. 그리 길지 않았지만, 한 번의 키스로 다시 버들의 입술이 부었다. 힘이 빠진 다리가 부끄럽다. 키스의 여운에 젖은 버들의 숨은 여전히 가빴다.
황 대표가 젖은 윗옷을 벗었다. 등 근육이 짙다.
……황 대표님 때문에 한 마리의 사납고 포악한 짐승이 될 것만 같았다. 늑대 같은. 내가 덮치면 어쩌려고 저러시지?
“유버들. 난 너랑 섹스 안 해.”
……누가 뭐랬나.
“알아요. 대표님은 저랑 섹스 안 하실 거예요.”
그 언젠가 황 대표는 섹스를 관계의 끝으로 정의했었다.
황 대표가 다시 키스했다. 휘청거린 버들의 허리를 잡아 줬다. 얼마간의 고요함이 지나갔다. 버들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너 가까이에서 보니까, 진짜 못생겼다.”
“…….”
“공부도 못하지. 못생겼지.”
“…….”
“너 키운 유 대표가 왜 너 때문에 뒷목 잡는지 알겠다.”
“…….”
키스는 키스고, 버들이 발끈했다.
“그러는 대표님도…….”
농담으로 황 대표에게 못생겼단 말 따위 나오지 않았다. 밤하늘을 통째로 삼키기라도 하셨나. 버들의 눈에 원래부터 잘난 황 대표는 구석구석, 빛이 났다. 어떠한 별보다 더 반짝거렸다.
“수건.”
“……없는데요.”
“수건 안 챙겼어?”
황 대표가 한숨을 쉬었다.
“아무것도 챙겨 온 게 없는 주제에, 나보고 수영을 하라고 한 거야?”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는 버들에게 황 대표가 요구했다.
“옷 벗어.”
집에 다 왔다. 황 대표가 뒷좌석을 바라봤다.
……골 때린다, 진짜.
뒷좌석에 버들이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다. 바닷가에서 버들이 일러 준 대로 10초를 세고 차 문을 열었더니, 운전석에 티셔츠가 다소곳하게 놓여 있었다. 그걸로 손만 닦고 조수석에 던져 버렸다. 이마를 시트에 처박고 있는 터라 제 티셔츠가 어떻게 다뤄졌는지 버들은 확인할 수가 없었다.
“내려.”
척추, 갈비뼈 모두 앙상했다.
“대표님, 먼저 내리세요.”
뒤쪽은 불가피하게 보여 줄 수밖에 없었지만, 앞쪽은 어떻게든 안 보여 주겠단 의지였다. 황 대표가 순순히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뒷좌석 문을 열었다. 버들의 아랫배 틈새에 손을 집어넣고 그대로 날갯죽지에 입술을 파묻었다. 놀란 버들이 버둥거렸다. 이어 목까지 깨문 다음, 황 대표가 뒤로 물러났다.
노을이 지고부터 비가 내렸다. 두 사람은 정자에 나란히 앉았다. 황 대표가 타 준 따뜻한 차를 버들이 홀짝거렸다. 부은 버들의 입술에는 처음보다 더 진한 핏기가 올라와 있었다. 황 대표가 아프냐고 물었고, 버들은 괜찮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자 천장이 부실한가. 하필 황 대표의 발등으로 빗물이 떨어졌다. 힐끔힐끔, 그걸 쳐다보는 버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겉에 걸치고 있던 옷을 벗어 황 대표의 발에 덮어 줬다. 심술궂은 황 대표가 옷을 발로 차 날려 버렸다. 빗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에 툭 떨어진 옷을 주워 와 버들이 한쪽에 내려놨다. 바다에서 수영도 하셨는데. 혹시 감기 걸리면 어쩌지?
손으로 황 대표의 발등을 덮어 주면 좋을 거 같지만 더러운 제 손이 걸렸다. ……발은 괜찮다고 하셨지? 그런 뉘앙스였다.
황 대표의 발등 위로 버들이 제 발을 살며시 올렸다. 빗물은 이제 황 대표의 발등이 아닌 버들의 발등에 떨어졌다. 황 대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체온이 녹았다. 버들의 순한 눈꼬리가 휙 휘어졌다. 바지 밑단이 젖고 있으면서, 멍청한 게 뭐가 좋은 것인지 웃었다.
“유버들.”
“네?”
황 대표의 목소리가 나지막했다.
“내가 너, 이용해도 돼?”
그믐달이 구름에 잠시 가려졌다가 나타났다. 말간 버들의 얼굴이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처럼 보였다.
“황 대표님이시니까, 저 이용하는 거…….”
고민이 짧았다.
“돼요.”
내가 자기를 못 이용할 거란 판단인지 아니면 진짜로 막 이용해도 된다는 것인지. 명확하고 발랄하기까지 한 버들의 대답이 도리어 기가 막혔다.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웃는 얼굴로 버들이 아까운 것도 없단 듯 제 마음을 들려줬다.
“좋아해요. 대표님…….”
황 대표로 인해 버들이 정자 위로 쓰러졌다. 바닥에 떨어진 찻잔이 팟 깨졌다. 체중이 실렸다. 그 자체만으로 생소했다. 버들의 목과 어깨 사이로 황 대표가 입술을 가져다 댔다. 샴푸 냄새가 나고 저로 인해 날뛰는 버들의 맥박이 전해져 왔다.
「혹시나 아픈 거 못 참겠다고, 소리 내지 마.」
「…….」
「목소리 듣기 싫으니까.」
이를 악 물고 버들이 기다렸다. 뭐가 또 마음에 안 드신 거지? 화풀이로 황 대표는 제 몸을 물어 댔었다. 평소처럼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무릎이 파득거리며 안쪽으로 모아졌다. 버들이 처음 느껴 본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상하게 손가락 하나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황 대표의 커다란 손이 버들의 옷 속을 파고들더니 가슴까지 금방 다다랐다. 버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황 대표로 인해 달뜬 신음이 입김처럼 올라왔다.
끊임없이 빗소리가 들렸다. 나뭇잎을 흔들며 떨어지는 물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길 반복했다. 처음엔 애달프게 흐렸던 황 대표의 향수 냄새는 아랫배가 맞붙으면서 흠뻑 짙어졌다. 빛 없는 깜깜한 밤, 여름날 습도가 피부 전체로 스며들었다.
힘겹게 앓던 버들이 황 대표의 등에 손을 둘렀다. 단단한 체중이 더 밀착됐다. 배려 없이 몰아붙이는 황 대표로 인해 괴로울 만큼 숨이 꽉 막혔다. 안쪽으로 겨우 숨겼던 혀가 이내 붙잡혔다. 뜨겁다. 그러면서 촉촉했고 열대 과일처럼 달큼했다.
빗장뼈를 스쳐 오른 황 대표가 버들의 야트막한 가슴팍을 헤집었다. 가느다랗게 신음하며 버들이 움찔거렸다. 허벅지 안쪽부터 시작되었던 가녀린 떨림이 속눈썹까지 급속도로 번져 갔다. 고작 손끝으로 비벼지는 마찰 정도였다. 하지만 타인의 손길에 어떠한 면역력도 없는 버들의 몸이 아무렇지 않게 버틸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삽시간에 머리끝까지 달아올랐다. 유륜 전체를 쓰다듬던 황 대표의 손이 한 곳에 집중되었다. 빳빳하게 세워진 버들의 돌기를 손가락 사이로 가두었다. 그 은밀한 감촉에 모든 것이 녹아 사라지진 않을까 버들은 문득 두려움이 느껴졌다.
황 대표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소용없다. 버들이 고개를 위로 꺾었다. 겨우 터진 숨통은 잠시뿐이었다. 헐떡거리며 내뱉은 버들의 숨은 집요하게 따라 붙은 황 대표의 입안으로 사라졌다. 버들이 외로 고개를 치우쳤다.
가느스름하게 뜬 황 대표의 눈앞에 버들의 깨끗한 목덜미가 훤히 드러났다. 입질하는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버들의 귓바퀴, 쇄골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어깨 아래로 버들의 티셔츠를 우악스럽게 잡아당겼다. 볼록하게 솟아 오른 버들의 왼쪽 가슴이 황 대표의 코끝에 스쳤다.
전기가 강하게 내리쳤다.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그대로 굳어 버린 버들이 황 대표의 음습한 입안으로 제 가슴이 삼켜지자마자 퍼덕거렸다. 단단하게 힘이 들어간 황 대표의 허벅다리가 못 움직이게끔 버들을 고정했다. 무릎이 서로 비틀렸다. 순간 중심부터 격렬하게 휘몰아치며 몰린 열기로 황 대표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지퍼를 내렸다. 검붉은 핏줄이 돋아 성이 난 제 성기를 황 대표가 버들의 샅에 문질렀다. 한없이 여린 버들의 피부가 뭉개졌다.
황 대표가 버들의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고 욕을 짓씹었다. 과격하게 허릿짓을 하는 대로 버들의 몸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말라서 움푹 파인 등허리를 차근차근 쓰다듬던 걸 관뒀다. 성급한 속도로 황 대표의 손이 버들의 바지 안쪽을 파고들었다. 말랑한 엉덩이를 꽉 움켜쥐자 버들이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
아주 작게 울먹거린 버들의 그 한 마디에 황 대표의 모든 행동이 멈췄다. 황 대표가 버들의 눈을 바라봤다. 그리고 물었다.
“왜?”
시큰해진 코끝에 버들이 시선을 피했다.
“싫어?”
“…….”
“무서워서?”
정리되지 않은 호흡에 황 대표의 가슴이 크게 들썩거렸다. 황 대표가 달래듯 버들의 팔을 쓰다듬었다. 간지럽다. 버들이 발가락을 곱았다.
“……저는, 키스하고 싶어요.”
그렁그렁, 눈물이 찬 눈이 티 없이 맑았다. 황 대표가 고개를 비틀어 버들에게 다가갔다. 서로의 입술이 겹쳐지기 직전, 버들의 눈이 유순하게 감겼다.
……키스해 달라면서, 정작 혀를 피하려 드는 버들을 알아차렸다. 터져라 뛰어 대는 버들의 심장이 꼭 불안하게 느껴졌다. 버들의 머리카락에 황 대표가 손가락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입술만을 쓰는, 다정한 입맞춤을 퍼부었다.
옷을 입은 채 오랫동안 차가운 물을 맞고 서 있어야 했다.
……미친놈. 도대체 어디서 핀이 나가 버렸는지 모르겠다. 쉼 없이 제 자신을 탓하는 욕이 터져 나왔다. 그럴싸한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제 밑에서 콧등으로 애타게 앓던 버들의 한숨 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수건을 던지고 황 대표가 소파에 앉았다. 방 안에는 버들이 없었다. 늘 그렇듯 저를 따라 금방 들어올 줄 알았건만. 여전히 비는 그칠 줄 몰랐다. 황 대표가 다리를 꼬았다.
어지럽게 펼쳐진 생각들을 정리해야 하는데, 신경 쓰인다. 그러한 감정을 더는 예전처럼 ‘짜증’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경계선을 인정한다. 그리고 방금 전……. 버들은, 그래. 가만히 있었다. 가만히 있는 애를 두고 몇 번이나 경계선을 넘어 버린 건 자신이었다.
어쨌든 제 세상은 뒤집혀 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냉철함 속에 아직까지 제정신이 박혀 있다는 거다. 그러니 뒤집혀 버린 제 세상을 누군가 알아채도록 내색하지 않을 작정이다. 그럼 지금처럼 제 생활은 흔들림 없이 그대로 유지할 수가 있다. 쉽다.
한결 여유를 찾은 황 대표가 가운을 벗었다. 차분히 옷을 갈아입고 나서 현관을 나섰다. 목마름이 뒤늦게 느껴졌지만 외면했다. 버튼을 누르자 자동으로 우산이 펼쳐졌다. 뼈대 몇 개가 부러져 너덜너덜하다. 우산은 낡았으나 원래 멀쩡한 상태였었다. 며칠 전 폭우가 쏟아지던 날, 외출을 감행하던 버들이 우산을 펼쳤고 그게 뒤집힌 바람에 망가져 버렸다. 어차피 곧 촌구석을 뜬다. 뭐든 상관없다.
황 대표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자 위, 동그랗게 몸을 웅크리고선 버들이 잠들어 있었다. 감긴 눈꺼풀이 고요하다. 추운지 이따금씩 버들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흐트러진 옷차림을 미처 수습하지도 않은 채였다. 말 그대로 무방비하다. 어이없어서 나지막한 한숨이 연거푸 터졌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처마시는 것도 그렇고. 조그마한 게 겁대가리가 없어서 큰일이다. 황 대표가 잠시 우산을 내려놨다. 청바지 밑단 아래로 버들이 좋아하는 황 대표의 발목이 드러나 있었다.
“유버들.”
꿈쩍도 하지 않는다. 또다시 한숨이 터졌다. 진짜 업어 가도 모르겠네. 확 들고 가서 다른 데다 팔아 버릴까 보다. 차라리, 잘됐다. 황 대표가 정자에 걸터앉았다. 빗물 그것쯤 맞으면 뭐 어떻게 된다고. 제 발등에 떨어지던 비를 대신 맞아 주느라 버들의 발등이 축축하게 젖은 채다. 큼지막한 황 대표의 손바닥에 버들의 발이 잡아먹힐 듯 가려졌다. 손발이 차다더니 사실이다.
……아. 왜 이렇게 자꾸만 마음이 미어지는지 모르겠다.
「저는……. 대표님 매일매일 예뻐해 드릴 수 있어요.」
누가 단물 빨아먹는다고 하면, 못 빨아먹게 해야지. 누가 이용해도 되냐고 묻는다면, 못 이용하게 해야지.
“……멍청한 게.”
황 대표가 서두르지 않은 손길로 버들의 옷을 추슬렀다. 어느 틈에 사정했었던 모양이다. 헛웃음이 켜졌다. 버들의 마른 몸을 품에 꽉 안았다.
단물 다 빨아먹으라고 했으니 남김없이 단물 다 빨아먹을 거고. 이용해도 된다고 했으니 막 굴려 가며 이용해 먹을 거다. 그래도 네가 내가 좋다면. 또 그래도 내가 네가 신경 쓰인다면, 그땐…….
여름 바람에 묽은 가을이 섞였다.
* * *
새벽 즈음 습관처럼 버들이 깼다. 속이 따끔거리면서 아팠다. 깜박깜박, 황 대표의 가슴팍에 옆얼굴을 그대로 기댄 채 눈꺼풀만 움직였다. 바짝 마른 아랫입술을 혀로 축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떼어 냈다. 어깨 위로 둘러진 이불이 툭, 떨어졌다. 버들이 잠시 숨을 죽였다. 정면으로 보이는 황 대표가 꼭 기적처럼 느껴진다. 코도 예쁘고, 입술도 예쁘고, 귀도 예쁘고, 눈도 예쁘고.
버들이 황 대표의 가슴 위로 손을 가져갔다. 황 대표가 원인으로 언제나 요동치는 제 심장과 다르게, 황 대표의 심장 박동은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버들이 흐릿하게 웃었다.
……그냥. 좋아해도 좋아한단 걸 감출 걸 그랬다. 고백한 게 실수처럼 다가온다. 호모 또는, 게이 새끼로서가 아니라 단순히 친한 형 동생 사이로 접근했다면 관계는 지금보다 더 쉬웠을 거다. 솔직하지 못한 감정은 구정물처럼 혼탁한 대신 흑심을 감출 수가 있다. 그럼 어쩌면, 벌써 궁에도 다녀왔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황 대표를 좋아하니 내 입장에선 데이트여도 황 대표 입장에선 시간 낭비 정도에 그쳤을 테지만.
뉴욕에 주치의가 있다. 3년간 죽으러 간 것인지, 살러 간 것인지 스스로 판단이 서지 않은 그때, 우연히 즐겨 찾는 카페에서 황 대표와 만났다니……. 잃어버린 황 대표의 수첩을 자신이 주워서 찾아 주기도 했고. 유치한 줄 알면서, 한낱 운명을 주장하게 된다. 그러면서 동기 부여가 됐다. 그동안 아무리 좋은 장소건, 맛있는 음식이건 별 생각이 없었는데 같은 곳만 다니는 황 대표와 좋은 장소를 찾아다니고, 같은 것만 먹는 황 대표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졌다.
「손 안 씻어요?」
「……손이요?」
「볼 때마다 지저분해서.」
황 대표에게 안겨 버들이 서러움을 삼켰다.
“우와.”
버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담벼락 너머를 황 대표와 버들이 나란히 선 채 들여다봤다. 파란색 대문의 강아지들은 무럭무럭 자라는 중이었다. 그래도 어미젖을 찾아 보채는 게 아직까지 아기 티가 남아 있다. 황 대표와 버들을 강아지들 전부가 쳐다봤다. 으르렁, 무섭게 이빨을 보였던 어미 개가 귀를 뒤로 젖힌 채 꼬리를 떨어져라 흔들어 댔다.
“저기 너 닮은 개새끼 있네.”
황 대표가 턱을 까닥였다. 나 닮은 개새끼라니. 나한테 지금 개새끼라고 돌려 욕하신 건가? 버들이 침울해 있는 사이 새하얀 강아지가 호기심 있게 담벼락 밑까지 아장아장 걸어와 접근했다. 꼬리건 앞발이건 얼굴이건 모두 토실토실하다. 쌍꺼풀 있는 눈이 축 처져 있다. 버들이 혀를 굴려 소리를 내며 손을 내밀었다. 강아지가 풀쩍 담벼락에 발을 올리며 즉각 반응했다. 황 대표가 반걸음 물러났다. 더 크면 기어오르겠는데? 그 전에 촌구석을 뜰 예정이라 다행이었다.
“가자.”
버들의 팔꿈치를 황 대표가 잡아당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 대표의 미간이 좁혀졌다. 대체 어디서 주워 온 건지. 버들이 손에 들고 있는 정체 모를 풀 더미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졸졸 흐르는 개울가에 도착했다. 내렸다가 그쳤다가 했던 비로 물이 늘어났다. 물살도 평소와 달리 세다. 버들이 고민했다. 어떻게 건너야 할까. 벗겨지면 잃어버릴 위험이 크니 신발을 벗어야 할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눈앞에 그림자가 졌다.
“왜 가만히 있어.”
“네?”
“너 안으라고?”
그런 게 아니었다. 놀란 얼굴로 버들이 펄쩍 뛰었다. 이어 부정할 참이었는데, 그 타이밍에 황 대표가 버들을 번쩍 안아 들었다. 성큼성큼 개울을 건넜다. 덕분에 가장 걱정이었던 신발이 무사했다. 젖지도 않았을 뿐더러 잃어버리는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았다. 새빨개진 얼굴로 버들이 황 대표의 곁을 맴돌았다. 황 대표의 옷 군데군데 물이 튀어 있었다. 버들이 서둘러 챙겨 온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어디서 났어?”
“새거예요. 이거.”
“어디서 났냐고 물었어.”
“겨울이 형이 전에 보내 줬어요.”
그대로 황 대표가 지나쳤다. 쭈뼛거리면서도 버들이 뒤를 졸졸 따라갔다.
“이거, 쓰세요. 가지셔도 돼요. 저 또 있거든요.”
“싫어. 무늬가 촌스러워.”
버들이 가만히 멈춰서 제 손수건을 내려다봤다. ……겨울이 형이 잘못했네.
두 사람이 벤치에 앉았다. 나무로 둘러싸인 공간이 푸릇푸릇하다.
“대표님. 제가, 아이스크림 사 드릴까요?”
고요함을 흔들고 버들이 말을 걸었다. 황 대표가 듣는 척도 하지 않자, 버들이 엉덩이를 끌어 더 가까이 다가갔다.
“시중에서 파는 그런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수제 아이스크림이에요.”
“이런 시골 바닥에 수제 아이스크림 파는 곳이 어디에 있어.”
“있어요. 고추밭, 김 씨 할머니 댁에서 팔아요.”
“고추밭 주인이면 고추를 팔 것이지, 무슨 수제 아이스크림 타령이야. 너 어디서 또 사기 당한 거 아니야?”
“사기 아니에요. 한정판이랬어요.”
“누가?”
“주변에서요. 수제라 하루에 딱 다섯 개만 팔아요. 대표님, 드시고 싶으면 제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 사다 드릴게요.”
황 대표가 버들을 바라봤다.
“안 먹어.”
버들이 실망했다. 황 대표의 환심을 사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
“새벽에 일찍 일어날 생각 말고 잠이나 더 자.”
“…….”
“대답.”
“……네.”
튀어나온 버들의 입술이 삐죽삐죽 난리가 났다. 황 대표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대표님. 제 무릎에 앉으실래요?”
팡팡, 버들이 제 무릎을 두드려 보였다. 그런 버들의 어깨를 감싸고 황 대표가 키스했다. 머리 위로 푸드덕, 새가 날았다. 급히 버들이 눈을 감았다. 황 대표가 진득하게 버들의 아랫입술을 빨아 댔다. 둥근 입천장에 버겁게 황 대표의 혀가 채워졌다. 고개 각도가 서로 비틀릴 때마다 끈적끈적하게 젖은 소리가 났다. 허벅지 위에 다소곳이 놓은 주먹을 버들이 힘껏 말아 쥐었다.
샤워를 끝낸 버들이 거울 앞에 섰다. 하나, 둘, 셋……. 목덜미에만 황 대표가 남겨 놓은 울혈이 열 개가 넘어간다. ‘그날’ 젖꼭지가 부어서 옷에 스치기만 해도 자극이 됐었다, 지금은 괜찮아졌지만. 옷을 입다 말고 옆구리 뒤쪽에 남겨진 울혈을 새롭게 발견했다. 새삼 놀라워하며 버들이 눈을 크게 치켜떴다. 따끔거리면서 아프긴 했는데……. 이게 마냥 아프기만 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신기하다.
칫솔을 꽂고 스펀지를 빨고. 뒷정리를 하던 버들의 손이 우뚝 멈췄다. 나 그날, 무슨 옷 입고 있었지? 잠에서 깼을 때 아예 다른 옷이었고 속옷도 없었던 거 같은데. 내가 벗거나 갈아입은 적, 있나? 반드시 있어야 한다. 있어야 하는데…….
버들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풀썩 주저앉았다. 수줍음이 태풍처럼 몰려든다.
“너 왜 나 피해.”
“……아니에요.”
뭐가 아니란 건지. 한만한 태도로 황 대표가 턱을 괬다. 앞에 앉은 버들이 아니라고 하면서, 하루 내내 저와 눈을 못 마주치고 있었다. 황 대표가 노트북을 한쪽으로 밀어 냈다. 펜을 쥐고 있는 버들의 손등이 움찔거렸다. 황 대표가 버들을 제 옆으로 오게 했다. 여러 번의 키스로 퉁퉁 부은 버들의 입술이 붕어가 따로 없다.
“고개 들어 봐.”
당황해하는 버들을 황 대표가 말없이 기다렸다. 귓불을 만지자 버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고개를 꺾어 다가가자 버들이 숨을 참으면서도 눈을 감는다. 황 대표가 가까이에서 멈춰 버들의 말간 얼굴을 바라봤다. 키스를 하면 하는 대로 얌전하다. 이게 좀, 의아해졌다. 왜 자기한테 자꾸 키스하냐고, 기를 쓰면서 물어봐야 정상 아닌가? 오히려 버들이 없던 일로 치부해 버린다.
“너, 나랑 섹스할 거야?”
속삭이듯 물었다. 버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섹스하자고 하면?”
“대표님은 저랑 섹스 안 해요.”
전에는 그냥 넘겼던 말이었건만 기묘하게 걸린다. 대표님은 저랑 섹스 안 해요? 보통 거절을 할 거면, 저는 대표님이랑 섹스 안 한다고 해야 되는 거 아닌가. 황 대표가 버들의 턱을 들어올렸다. 깜박거리는 눈망울이 순하다. 찰나, 버들이 먼저 다른 곳으로 시선을 피했다.
“왜 나랑 섹스 안 할 건데.”
“안 들어가요.”
버들이 웅얼거렸다.
“넣어 본 것도 아니잖아.”
“……너무 크고, 또 너무 좁아서 안 돼요.”
뭐가 너무 크고, 또 뭐가 너무 좁은지 황 대표는 바로 이해했다.
“넓히면 되잖아.”
“아니에요.”
“뭐가 아니야.”
“대표님은 저랑 평생 안 하실 거예요.”
……그래. 내가 너랑 평생 섹스할 생각이 없기는 한데.
“대표님.”
“어.”
“제가 서울 가면, 수영장 사 드릴까요?”
이미 12층짜리 스포츠 센터가 황 대표의 명의였다.
“너 돈 없잖아.”
“조각품 팔면 돼요. 유 회장님한테.”
“하나에 얼마 받아?”
“시가예요. 부르는 게 값이에요.”
“……양아치네. 등쳐 먹는.”
서로의 숨결이 부딪혔다. 유순한 밤이 흐른다.
* * *
혜주가 왜 한국에 들어오는지 알았다. 결혼 문제였다. 선을 봤다는 건 알았지만, 그게 진행이 될 예정인가 보다. 머리가 이른 새벽부터 아팠다.
잡지를 덮은 버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파에 앉은 황 대표가 드물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예쁘고 잘생기고 멋지고 다하는 황 대표의 얼굴을 실컷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였다. 버들이 발걸음을 죽여 그쪽으로 다가갔다. 잠든 줄 알았던 황 대표가 갑자기 팔을 뻗어 버들의 허리 뒤를 감쌌다. 잡아끄는 대로 버들이 끌려갔다. 티셔츠를 걷어 보들보들한 버들의 아랫배에 황 대표가 얼굴을 파묻었다. 단거, 별로 좋아하지도 않건만. 호흡이건 체온이건 모든 게 온화하며 달달한 버들이 들쭉거리는 제 신경질을 누그러뜨렸다.
내일이면 촌구석을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