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성글게 녹아 (3)
화창한 날씨였다. 오전부터 어수선하다. 뒷걸음질 치며 밀린 버들이 어느덧 방구석으로 몰렸다. 복잡한 걸 피해 황 대표는 일찌감치 집 밖을 나간 상태였다. 보통 때라면 자석처럼 달라붙어 황 대표를 따라 나갔을 텐데, 꿍한 표정으로 버들이 올곧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면서 큰 눈을 치켜떠 정신없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빤히 주시했다.
황 대표의 짐은 약소했다. 그러나 아주 사소한 흠집도 생겨서는 안 되기에 전문가 몇 명이 달라붙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오래 잡아먹었다. 정확히 손목시계처럼 고가로 취급되는 소유품들만 차곡차곡 정리됐다. 나머지는 그저 막 굴러다닌다. 버들의 입장에선 그게 문제였다.
숨죽이며 얌전히 있던 버들이 화들짝 놀라며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눈썹을 구긴 버들의 얼굴이 단단히 심통 나 보인다. 미처 말리지 못한 사이 직원들 중 누군가 파란색 비닐봉지에 황 대표의 물건들을 함부로 쏟아부었다. 버리려는 것들이었다.
황 대표님 볼펜, 황 대표님 와인 잔, 황 대표님 포스트잇, 황 대표님 이불, 황 대표님 향수, 황 대표님 면도기……. 막내 도련님 하며 누가 아는 척을 해 와도 버들이 고집스레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서둘러 움직였다. 좁은 버들의 품이 이내 황 대표의 물건들로 버겁게 채워졌다. 그걸 아까 자신이 서 있었던 구석 자리에 전부 가져다 놓았다.
“어? 잠깐만요!”
여유를 피울 틈이 없다. 뒤돌자마자 버들이 다시 사람들 틈 속을 파고들었다. 황 대표님 베개를 이제야 발견했다. 이미 마구잡이로 밟혀 형태가 엉망이 되어 버린 뒤다. 속상하다.
“저, 도련님.”
“왜 대표님 물건 다 버려요?”
그나마 가장 친숙한 황 대표의 비서가 버들에게 다가왔다.
“왜 버려요, 왜?”
“대표님이 버리라고 하셔서요.”
“안 돼요.”
“네?”
위험하다. 빼앗길 거 같다. 턱을 치켜들고 따져 묻던 버들이 일단 모은 황 대표의 물건들만이라도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해 주저앉아 주섬주섬 끌어 모았다. 이불이랑 베개의 부피가 너무 크다. 낮잠 잘 때 마치 내 것처럼 황 대표님 베개를 사용했었고, 황 대표님 무릎에서 잠들어 새벽녘에 종종 깨면 제 어깨에 이불이 덮여 있고는 했었다. 어느 것 하나 포기 못 한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니 하필 시야가 가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다. 비틀비틀, 불안하게 걷던 버들이 기어코 벽에 부딪혀 몇 걸음 뒤로 떠밀렸다. 버들은 남몰래 쪽팔려 했고, 주변 사람들은 혹시나 막내 도련님이 다치진 않을까 쩔쩔맸다. 전부 황 대표에게 소속된 고용인들이었으나 버들이 유 대표의 막냇동생이란 걸 모르지 않았다.
“황 대표님.”
정자에 앉아 담뱃불을 막 붙이고 있던 황 대표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작게 웃었다. 베개는 옆구리에 끼우고 이불은 잡아끌고. 갑자기 등장해 가까이 거리를 좁혀 오는 버들의 꼬락서니가 참 가관이었다.
……아침부터 이게, 꼴통 짓하네. 그러면서 앙다문 입술하며 표정은 쓸데없이 다부져 보인다. 약하게 부는 바람에 버들의 머리카락이 새싹처럼 두어 가닥 솟았다. 매캐한 연기가 버들에게 가지 못하게끔 황 대표가 담배를 반대쪽 손으로 바꿔 들었다.
“대표님. 있잖아요.”
정처 없이 부는 바람에 방향을 가늠하기 어렵다. 황 대표가 아직 장초인 담배를 비벼 껐다.
“너 그거 왜 들고 와.”
“사람들이 이거 다 버리려고 해요.”
마치 고자질하는 어투였다.
“버리게 놔두지 왜 방해하고 그래.”
“진짜 대표님이 시키셨어요? 이거 다 버리라고?”
가볍게 황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이거 다 대표님 거잖아요.”
“근데.”
“대표님 거 왜 다 버려요?”
볼펜 한 자루마저 악착같이 챙기려 들며 버들이 구질구질한 집착을 보이고 있는 반면, 황 대표는 이곳 생활 자체에 조금의 미련도 없었다. 초조하게 구는 버들을 앉은 채 비스듬히 올려다보는 황 대표가 태만하다.
“대표님. 저 할 말 있어요.”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저 며칠 전에 이거 엄청 만지고 싶었는데 참았거든요.”
불쑥 내민 게 고작, 와인 잔이었다.
“진짜 다 버리고 가는 거예요?”
주변으로 잠자리가 둥실둥실 떠다닌다.
“그럼 제가 전부 가져도 돼요?”
“뭐 하게.”
“그냥요. 갖고 싶어요.”
성의 없는 대답을 뱉어 내고선 버들이 소심하게 눈치를 살폈다. 이불과 베개를 내려놓게 한 뒤 황 대표가 버들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제 쪽으로 좀 더 가깝게 오도록 끌어당겼다. 가을을 향해 시간은 덧없이 흐르고 있었지만 계절은 아직 여름이었다. 날씨가 후덥지근했다. 버들이 골라 입은 단정한 남방을 황 대표가 무연한 눈빛으로 훑었다.
화사한 버들의 피부 톤과 잘 어울리긴 하나 답답해 보인다. 목 끝까지 단추를 꼭꼭 잠근 것도 그렇고. 손등을 반이나 넘게 가릴 정도로 긴 기장도 그렇고. 불편하지 않도록 황 대표가 말없이 버들의 소매를 두어 번 걷어 줬다.
가느다란 손목에 볼록 솟아오른 뼈가 희다. 앙증맞은 느낌이 꼭 어떤 과일 씨앗과 닮았다. 황 대표가 버들의 손목뼈를 엄지손가락으로 슬쩍슬쩍 밀며 쓰다듬었다. 간지러운 감각에 버들이 정신을 차렸다. 화들짝 놀라서는 황 대표가 못 보게 제 양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뭐가 갖고 싶은데.”
“주실 거예요?”
“말해 봐.”
말리기보단 체념하듯 물었다.
“대표님 물건 전부 다요.”
황 대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다 어떻게 챙겨.”
“제가 챙길게요. 챙길 수 있어요.”
“고집 부릴 만한 거 아니다, 이거.”
이번엔 버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만 골라. 가서 새로 사 줄게.”
“싫어요.”
시선이 오고 갔다.
“너 말을 더럽게 안 듣네.”
“대표님도 지금 제 말 안 들어주시고 계시잖아요.”
무서운 얼굴로 황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요?”
“너 혼내러.”
황 대표가 버들을 으슥한 곳으로 데려갔다. 여태 있는지도 몰랐던 나무판자로 된 창고였다. 전구가 깨진 채다. 벌어진 좁은 틈새로 햇빛 한줄기가 들어왔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가 빛에 반사되어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코끝이 간지러워진 버들이 작게 재채기를 터트렸다. 버들의 귓가로 황 대표가 가까이 얼굴을 숙였다. 나지막하다.
“좋아한다고 말해 봐.”
“좋아해요.”
짧게 입술이 부딪힌 뒤 멀어졌다.
“이용해도 된다고 말해 봐.”
“……이용해도 돼요.”
혀가 섞였다.
바퀴가 돌에 걸려 차가 크게 덜컹거렸다. 창문 밖으로 시골 풍경이 스쳐 지나간다. 침울한 표정으로 버들이 연거푸 침을 삼켰다. 이게 대체 무슨 기분인지 모르겠다. 이상하다. 그러면서 불안함이 함께 밀려든다. 버들이 애꿎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마지막 날이라고 해서 특별히 황 대표는 달라지지 않았다. 평소와 일절 다를 바가 없었다. 하루하루 쌓아 추억으로 만들어 놓은 산책 코스나 여타 다른 물건들을 그저 귀찮은 듯 소홀히 대했다. 그런 황 대표의 태도를 자꾸만 곱씹게 된다.
버들이 무릎 위에 올려 둔 가방 지퍼를 열었다. 가방이 터져 나갈 정도로 챙겨 넣었다가 황 대표에게 딱 걸렸다. 꺾은 풀 더미부터 과일 나부랭이까지 그 자리에서 전부 버려졌다. 결국엔 남은 건 밀짚모자 두 개와 황 대표가 작업할 때 주로 썼던 볼펜 한 자루가 전부다.
가장 먼저 출발한 황 대표의 차가 보이지 않는다. 서울까진 같은 차에서 함께 있을 줄 알았더니, 혼자만의 욕심이었나 보다. 덥진 않은지. 춥진 않은지. 심심하진 않은지. 운전석에 탄 직원이 죄송할 정도로 저를 챙겨 주고 있었다. 버들이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신경 쓰지 말라고 일러뒀다.
황 대표가 걷어 줬던 손목 소매를 원래대로 내렸다. 오랜만에 가족들을 만난다. 절대 마른 거 들키면 안 되는데. 그래서 가장 도톰한 두께의 옷을 걸쳤다. 좀 덥지만 못 견딜 수준은 아니었다. 일렁거리는 속을 진정시켰다. 차창에 머리를 기댄 버들이 잠시 후 눈을 감았다.
에어컨을 껐다가 켰다가. 라디오를 켰다가 껐다가. 그런 황 대표에게 왜 그러는지 비서가 의중을 물어 왔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짤막히 대답한 황 대표가 뒤쪽을 바라봤다. 바짝 붙어 따라 오고 있던 차가 보이지 않는다. 서울에 도착하는 대로 업무 때문에 들러야 할 곳도 있고. 또…….
「같이 못 타요? 대표님, 길 모르잖아요.」
「내가 운전 안 해. 넌 뒤에 있는 차 타.」
「대표님. 그런데요…….」
「시끄러워, 좀. 사람들 기다리는 거 안 보여?」
오늘 이후로 더는 단둘이 있는 게 아니었다. 세상이 뒤집혀졌다고 한들 주어진 각자의 생활이 있다. 참견하거나 침범해선 안 되는. 그런데 혹시라도 버들이 그깟 키스 조금 한 걸로 착각에 빠져 귀찮게 굴까 봐 차를 따로 타게 했다. 황 대표가 무심하게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네. 대표님.
황 대표가 잠시 뜸 들였다.
“에어컨 너무 세게 틀지 마.”
-네?
“유 대표 막냇동생, 추위에 약하다고 들어서.”
-아. 그렇습니까? 알아서 잘 모시겠습니다.
용건이 끝났다.
“유 대표 막냇동생 멀미는 안 하는 거 같아?”
-그런 말씀 없으셨습니다.
“그런 말 원래 안 해. 괜찮아 보여?”
-주무십니다.
“……자? 언제부터?”
-꽤 되셨습니다.
속 좋게 자? 자고 있다고?
휴게소에 줄줄이 차가 섰다. 먼저 도착해 있던 황 대표가 차에서 내렸다. 뜨거운 태양열에 살짝 미간이 구겨졌다. 버들이 타고 있던 차 문을 열어젖혔다. 직원의 말대로 버들은 세상 편하게 잠들어 있었다. 새근거리며 얕게 들려오는 숨소리도 안정적이고 불편해 보이는 것도 없다. 기가 막힌다. 황 대표가 한숨을 내뱉었다. 마냥 편안하고 안정적인 버들의 꼴에 왜인지 속이 뒤틀린다.
버들에게 뻗던 손을 황 대표가 거두었다. 대신 가장 가까운 거리에 서 있는 직원보고 버들을 깨우라고 시켰다. 어깨가 잡혀 몇 번 흔들리고 나서야 버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면서 열렸다.
“내려.”
당황하는 직원을 뒤로한 채, 버들을 조수석에 태우고 황 대표가 핸들을 잡았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경로를…….
버들이 눈을 깜박였다. 내비게이션 버튼 몇 개를 꾹꾹 눌러 봤다. 같은 내용을 수십 번 반복했던 기계가 기특하게 고장 나지 않고 멀쩡하다. 황 대표가 아무렇게나 핸들을 꺾어 도착한 곳이 어딘지 모르겠다. 인적이 드물어 고요하다. 나무들이 우거져 있고, 정면으로는 커다란 호수가 보였다.
“대표님. 우리, 집에 안 가요?”
황 대표가 차에서 내려 앞쪽을 돌아 조수석 문을 열었다. 왜 그러냐는 눈빛으로 버들이 황 대표를 올려다봤다. 황 대표가 대신 버들의 안전벨트를 풀었다. 말없이 손목을 잡아 당겨 차에서 내리게 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가셨어요?”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 딴소리하는 버들을 무시하며 황 대표가 하고 싶은 대로 했다. 품에 안은 버들의 어깨에 턱을 올렸다. 겉으로 드러난 주변 공기는 잔잔했다. 하지만 버들의 심장 박동은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중이었다. 그게 맞닿은 가슴팍을 건너 황 대표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너 진짜 못생겼더라. 아까 자는 거 보니까.”
버들이 코를 훌쩍거렸다. 품에서 떼어 낸 버들을 황 대표가 뒷좌석에 앉혔다. 문 닫히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바닥에 부리를 박고 바삐 뭔가 쪼아대던 새가 놀라 멀리 날아갔다.
버들의 목울대가 약하게 일렁거렸다. 옆에 앉은 황 대표가 제 남방 단추를 차례차례 풀고 있었다. 서두르는 손길이 아니었다. 나긋하고, 섬세하다. 그런 황 대표의 손을 버들이 가만히 내려다봤다.
“단추 너무 작아. 풀기 어렵게.”
“…….”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모르겠다. 버들의 어깨 뒤로 황 대표가 남방을 넘겼다. 목덜미 주변이 얼룩했다. 저가 남겨 놓은 울혈에 황 대표가 입술을 가져다 댔다. 버들의 아랫배가 팽팽해졌다.
“……아.”
좁은 차 안 전체에 촉촉이 젖은 소리가 났다. 황 대표가 버들의 젖꼭지를 빨아 댔기 때문이었다.
* * *
버들이 대문을 열었다.
“군대 갔다 온 기분이네.”
오랜만에 보는 마당이 반갑다. 장 여사가 좋아하는 꽃들로 우거진 정원이 예쁘다. 한참 기웃거리던 버들이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잊고 있었던 집 냄새가 코끝 아래로 확 끼치면서 그리움이 터졌다. 부엌에 있다가 거실로 나온 가사도우미가 버들의 이름을 불렀다. 반가워하며 버들이 인사했다. 잘 계셨어요?
가족들이 전부 부재중이라고 하니 슬리퍼를 꿰신은 버들이 계단을 뛰어올라 제 방 앞에 섰다. 이게 뭐라고 두근거린다.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켰다. 당연하겠지만, 모든 게 다 제자리였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비밀스레 황 대표의 머플러를 보관해 둔 수납장 속을 들여다봤다. 그 옆에 시골에서 챙겨 온 황 대표의 수첩과 볼펜을 놓았다.
황 대표와 가고 싶은 장소들을 골라 연구하던 여행 잡지를 꺼내 버들이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얼굴에 책을 올렸다. 서늘한 종이의 감촉이 느껴진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버들이 옷 위로 제 가슴을 건드려 봤다. 전에는 이러지 않았던 거 같은데……. 황 대표님이 만지고. 또 빨아 대기 시작했을 때부터 좀 변한 거 같다. 유두 주변에 닿은 사소한 자극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황 대표님에게 좋아한다고 다섯 번밖에 말 못 했네, 오늘은.
* * *
사옥에 도착해 문을 열자 팡, 오색 빛깔 종이가 휘날렸다. 황 대표가 욕을 지껄였다. 전화 통화를 하도 해 대서 오랜만에 봤지만 오랜만에 본 것 같지도 않다. 두 대표가 서로를 외면했다. 제 새끼가 언제 올까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던 유 대표가 허투루 날린 폭죽이 아까워 욕을 씹었다.
“버들이는?”
“몰라.”
“네가 여태 데리고 있었으면서 뭘 몰라.”
“직원이 집에 데려다줬겠지.”
“아. 그래?”
고깔모자를 그대로 쓴 채 유 대표가 본가로 향했다.
“유버들.”
도착하자마자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버들의 방에 들어간 유 대표가 들뜬 목소리로 제 막냇동생을 찾았다.
“형 왔는데?”
뒤집어쓴 이불이 고요하다. 기대 가득했던 포옹 신은 잠시 뒤로 미뤘다. 피곤한가? 자는 거 깨우지 않고 그저 잠깐 버들의 얼굴만 보려고 했던 유 대표가 눈썹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숨도 잘 못 쉬면서 버들이 식은땀 범벅으로 고꾸라져 있었다.
몇 주의 시골 생활이 당연히 고됐다. 어렵사리 참고 있던 게 몰아서 한꺼번에 터졌다.
* * *
하루 일과를 끝내고 밤이 되어서야 황 대표가 제 집으로 돌아왔다. 널찍한 실내가 적막하다. 먼지 한 톨 떨어져 있지 않은 바닥이 어쩐지 이질적이다. 씻고 나온 황 대표가 노트북 전원을 켰다. 내다보이는 바깥이 네온사인으로 화려하다. 자리에 앉은 황 대표가 다시 일어나 커피를 내렸다. 원두 갈리는 소리가 금방 멈췄다.
백색 소음이 필요하다. 집에 있을 때 라디오를 켜 두는 건 아주 오래 묵은 습관이었다. 볼륨을 낮췄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집 안을 채웠다. 마른 침을 삼키며 황 대표가 문득 잘 관리된 집 안을 둘러봤다.
풀벌레 소리라든가.
버들이 멋대로 떠드는 수다라든가.
해야 할 일을 미뤄 두고, 떠오르는 생각도 강제로 멈췄다. 황 대표가 침실에 들어갔다. 베개를 베고 눕는 것 자체가 어색하다. 소파에 앉아 버들을 무릎에 앉혀 재웠던 며칠이 머릿속을 지나간다. 버들이 저 때문에 다쳐 아팠으니 바닥까지 긁어모아 베푼 알량한 동정심 정도였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천장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허전하다. 지그시 허벅지를 눌러 오던 무게, 뜨끈뜨끈한 체온, 쌕쌕 내쉬는 숨소리 그런 게 전부 없다 보니까…….
브레이크를 걸듯 황 대표가 급하게 머릿속을 지웠다. 뒤척거리는 사이 날이 밝았다.
고열은 3일간 지속되었다. 희미했던 버들의 심장 박동이 제자리를 찾고 나서야 마른 몸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복잡한 기계들이 떨어졌다. 홀가분함을 느끼면서도 버들의 어깨가 축 처졌다. 갑작스러웠던 입원이었다. 한시름 놨단 의사의 소견을 분명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차마 안도가 되지 않나 보다. 제 기분을 재차 물어 오는 장 여사와 유 회장을 버들이 안아 주었다.
버들의 고개가 빠끔히 기울어졌다. 큰 덩치를 구겨 기둥 뒤에 서 있던 겨울이 발각됐다. 모양 빠지게 숨어 있을 땐 언제고. 제 막냇동생에게 성큼성큼 다가간 겨울이 고깔모자를 씌워 주었다. 얼마나 만지작거렸는지 뾰족이 솟아 있어야 할 모자의 꼭대기가 찌그러져 있었지만 누구도 그걸 지적하지 않았다. 왁자지껄하다가도 은연히 가라앉은 분위기가 겨울의 선동에 수면 위로 떴다.
정해진 식사를 차분히 끝낸 버들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평소보다 더 크게 입꼬리를 찢었다. 버들의 작은 얼굴에 웃음이 꽉 찼다. 고장이 난 채 태어난 자신 때문에 여태 초 단위로 마음 졸였을, 그리고 앞으로도 마음 졸여 가며 살아가야 할 가족들의 심정을 모를 수가 없다. 그게 참 끔찍하다.
버들이 앞장서 장 여사와 유 회장을 돌려보냈다. 그간 못 쉬었으니 오히려 두 분의 건강이 우려가 됐다. 링거를 맞고도 여전히 핼쑥한 장 여사를 유 회장이 부축했다. 날이 밝는 대로 다시 오겠다며 약속했다.
모아 온 꽃가루를 몽땅 터트린 겨울을 보며 버들이 입을 열었다.
“형도 이제 가.”
“너는 새끼야. 그게 형한테 할 말이야?”
못할 말은 또 뭐야. 책 본다고 펼쳐 둔 보조 책상을 척척 치워 버린 뒤 겨울이 버들을 눕혔다. 막무가내다.
“너 혼자 있으면 너무 조용하잖아.”
“조용히 혼자 있고 싶어서 그러지.”
버들의 요구에 겨울이 한숨을 내쉬었다.
“야. 이 애물단지야.”
“집에 좀 가. 형 피곤하잖아. 눈 빨개.”
“……저거 진짜. 너야말로 잠이나 자.”
“조금 이따가 씻을 거야.”
“아까 씻었잖아.”
“샤워해야 돼.”
바닥에 떨어진 꽃가루를 모아와 버들의 머리 위에 흩날렸다가 등을 몇 대 얻어맞았다.
“샤워? 내일 해.”
“당연히 내일도 할 거야.”
꼬박꼬박 말대답을 하며 버들이 미간을 구겼다. 겨울 역시 인상을 찌푸렸다. 불에 달군 것처럼 열이 펄펄 끓어 놓고선. 물론 지금은 괜찮아졌다지만 꼭 병원에 와서까지 깔끔한 척 굴어야 하는 건지. 수건과 갈아입을 옷 등을 알아서 척척 챙겨 가며 씻을 준비를 하는 버들의 모습을 겨울이 탐탁지 않은 눈길로 쳐다봤다.
“환자복 저기에 있어. 갖다 줘?”
“별로야. 허리가 너무 헐렁거려.”
병실에 딸린 욕실에 버들이 쏙 들어갔다. 씻고 나온 버들의 젖은 머리를 겨울이 말려 줬다. 노곤하다. 꼭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던 버들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유버들.”
“……어.”
“세상에 형 같은 사람이 또 어디에 있냐?”
“그게 무슨 말이야?”
버들이 눈을 떴다.
“네 머리숱이 보통은 아니잖아.”
“지금 내 욕한 거야?”
발끈한 버들의 옆머리를 겨울이 살짝 밀쳤다.
“네 욕은 아니고. 형이 형 자신을 칭찬한 거지.”
“무슨 칭찬.”
“웬만한 사람은 너 머리 드라이 해 주는 거, 시도조차 못 할걸?”
시큰둥했던 버들이 불쑥 몸을 뒤로 돌렸다. 예전부터 말은 바로 하라고 배웠다. 버들이 배움을 곧장 실천했다.
“아니야. 황 대표님도 나 머리 잘 말려 주셔.”
“…….”
“머리도 몇 번이나 감겨 주셨어.”
“…….”
“형. 황 대표님은 잘 계셔?”
겨울이 입을 다문 채 드라이기를 정리했다. 버들의 말이 당장 믿기진 않았다. 한두 해 알아 온 사이도 아니고. 황 대표 성격이야 자신이 가장 잘 알 텐데. 누구 머리를 감겨 주고, 말려 주는 성질머리가 결코 아니었다.
“이제 누워, 빨리.”
“황 대표님 잘 계시냐니까.”
“그 새끼야 알아서 잘 있겠지.”
뒷다리를 걸어 겨울이 버들을 침대에 쓰러뜨렸다. 이어 턱 아래까지 이불을 덮어 줬다. 큰 눈을 깜박거리던 버들이 갑갑한지 팔을 꺼냈다. 겨울이 머리맡 조명을 어둡게 조절했다. 침대가 크니까 공간이 남아돈다. 자연스레 옆에 누우려는데 버들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형. 나 내일 퇴원해야 돼.”
“퇴원이 가능해야 퇴원하는 거지. 무슨.”
“가능할걸?”
“네가 의사해라. 어?”
“…….”
화창한 하늘이 시골 어느 날과 닮았다. 다리를 까닥이며 창밖을 내다보던 버들이 핸드폰을 집어 와 사진을 찍었다. 흔들렸지만 파란색만큼은 확실하다. 그걸 황 대표에게 전송했다. 어제 보낸 꽃 그림 사진도 그렇고. 아직 황 대표가 메시지 확인을 하지 않은 채다. 많이 바쁘신가?
버들이 몸에 지독한 약냄새가 밸까 겁이나 입기 싫은 환자복을 걸쳤다. 수술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판가름하는 검사가 길게 진행됐다. 지칠 법도 한데 버들은 태연했다. 도리어 가족들을 향해 웃어 보였다. 검사 결과는 원하는 대로 나올 거라고,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인수합병까지 무탈하게 진행됐다. 대형 기획사로 우뚝 서자마자 사방에서 견제가 들어왔지만 다들 콧방귀를 뀌었다. 워낙 뿌리부터 탄탄하게 준비해 왔던 터라, 타격이란 게 없었다. 안정적인 상황이라고 한들 거기서 안주하지 않았다. 계획했던 대로 특정 분야에 따라 사업 파트를 나누었다. 제작은 물론 유통까지. 자금대가 확실하니 콘텐츠 독점으로 투자 방향을 세웠다. 회의가 끝나면서 직원들이 전부 빠져나갔다. 볼펜 꼭지를 똑딱거리고 있던 유 대표가 건너편의 황 대표를 바라봤다.
“몇십 년을 알았어도 내가 알지 못하는 네 면모가 있나 봐?”
서류를 넘기던 손을 멈추고 황 대표가 정면을 바라봤다.
“내 새끼 머리도 감겨 주고, 말려 주고. 응?”
황 대표가 서류 다음 장을 유유히 넘겼다.
“난 네가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친하게 지내는 걸 못 봐서 그래. 버들이 입에서 어떻게 네 칭찬이 마르지 않고 나오지? 내 새끼야 원래 사람 보는 눈이 더럽게 없어서 그런다고 쳐. 넌? 황 대표 너는 원래 아무한테나 착하게 구는 그런 새끼가 아니잖아.”
열이 펄펄 끓던 버들을 입원시키면서 몸에 있던 흔적들을 발견했다. 워낙 흐릿하기도 했고, 또 자잘한 반점으로 열꽃이 전체적으로 수놓아져 처음엔 그냥 지나쳤었는데…….
버들은 황 대표의 근황을 궁금해하며 혼잣말처럼 재잘거렸다. 잘 계실까? 식사는 하셨을까? 많이 바쁘실까? 그런 버들과 황 대표에게 느껴지는 온도 차가 확실하다. 버들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없이 지나치는 황 대표가 거슬린다. 제 사업 동업자로, 제 막냇동생으로 서로 얼굴만 몇 번 본 적 있는 게 다인 예전과 다르다. 근 두 달을 둘이서 함께 살았다.
「너 황 대표 타령 왜 하는 거야?」
「멋있잖아.」
「아깐 예쁘다면서?」
「당연하지.」
「뭐가 당연해?」
「멋있기도 하고 예쁘기도 하니까.」
예전의 ‘황 대표 타령’과 비교하니까 더 확실하다. 머리를 감겨 주고 말려 줬다며 특정한 행동을 언급한 게 아니라 그때처럼 막연하게 버들이 황 대표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면 아무렇지 않았을 것이다.
겨울의 입에서 한탄이 섞인 한숨이 묵직하게 흘렀다. 좋은 공기 마시면서 안락하게 잘 쉬고 있단 버들의 발랄한 통화 내용이 스쳐 지나갔다. 빗발치는 유 대표의 감정 중에 후회가 또렷하게 섞여 있었다. 속은 기분이 든다. 한 번쯤 찾아가 볼걸. 그런 생각이 애초에 들지 않게끔 안심시킨 사람이 다름 아닌 버들이라 어떤 탓도 못 하겠다.
“너랑 나랑 하루에 통화를 서른 번도 더 넘게 한 날이 수두룩해. 어떻게 한 마디를 안 해. 두 달 가까이 너랑 살면서 내 새끼 살이 그렇게 빠졌는데.”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황 대표가 서류를 데스크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네 새끼 살 빠진 걸 왜 남의 탓을 해. 너도 잘 알고 있다며. 나는 원래부터 그런 말 안 하는 성격이야.”
황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유 대표도 따라 일어났다.
“황 대표.”
“어.”
“마지막으로 물을게.”
감정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나한테 할 말 없어?”
* * *
수영을 다녀왔다. 원래의 생활로 돌아왔건만 발목이 붙잡힌 것처럼 신경이 내내 날카롭다. 며칠째 시달리고 있는 불면증을 원인으로 꼽으며 황 대표가 욕을 짓씹었다. 간밤의 숙취가 괴롭다. 틈틈이 시원한 물을 마셔 주는데도 지끈거리는 두통이 나아지지 않는다. 라디오를 껐다. 예정되어 있는 일정을 체크해 뒤로 미룬 다음 황 대표가 차 키를 들었다.
손목을 다친 버들을 대신해 수강 신청을 해 줬었다. 특정 과목별 시간들이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버들의 학교까지 경로를 몇 번 이탈한 끝에 도착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높다. 쨍한 햇볕에 눈살을 찌푸리며 황 대표가 정문으로 걸었다. 개강을 한 대학가답게 거리가 활기차다. 황 대표가 고개를 내려 손목에 채운 시계를 확인했다. 기다리면, 뭐. 보겠지. 그런 미친놈 같은 생각이 아무렇지 않게 들었다.
한 15분쯤 지났을까. 다시 시계를 들여다봤다. 5분도 채 안 됐다. 짜증이 난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 자체가 낯설었고, 그러면서 이질감이 들었다.
지루함이 담긴 황 대표의 시선이 주변으로 닿았다. 농구 골대, 나무, 벤치, 표지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서서히 돌아가던 황 대표의 고개가 일순 멈췄다. 바글거리는 여러 사람들 틈새로 버들이 보였다. 저도 모르게 황 대표가 숨소리를 낮췄다. 일주일 만에 보게 된 버들의 얼굴은 여전히 말갛고, 여전히 하얗다. 바뀐 거라고는 하나 찾아볼 수가 없는데…… 제일 예뻤다. 땅바닥에 곤두박질친 심장이 느껴지자마자 갈증이 났다. 버들이 저를 발견하기 전에 황 대표가 그 자리를 떴다.
비서에게 차를 돌리라고 황 대표가 지시했다. 주량을 넘어섰던 술 때문인가. 자잘하게 진동하는 가슴이 언짢다. 오피스텔 엘리베이터에 황 대표가 올라탔다. 버들에게 작업실로 내줬던, 바로 그 집이었다.
들어와 살피니 여전히 구석구석 깔끔하게 잘 관리되고 있었다. 뉴욕에 있는 혜주가 한국에 들어올 때면 여기에서 머물렀다. 소파에 몸을 깊숙하게 묻으며 황 대표가 눈을 감았다.
그때, 비밀번호 눌리는 소리가 났다. 감고 있던 눈을 떠 황 대표가 현관문 쪽을 바라봤다. 관리자 정도를 예상했는데 뜻밖이었다. 양손에 커다란 비닐봉지를 들고선 버들이 서 있었다.
“대표님?”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만나게 된 버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대표님. 여기는 웬일이에요?”
신발을 벗고 버들이 쪼르르 황 대표에게 다가갔다.
“여기가 왜. 네 거야?”
“……작업실로 쓰라고 허락해 주셨잖아요.”
“쓸 거야, 작업실로?”
“당연하죠. ……안 돼요?”
버들이 황 대표의 손가락, 눈, 귓불, 목을 차례대로 바라봤다. 혹시나 이게 꿈은 아닐까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퇴원 첫날부터 이게 무슨 횡재일까. 감동이나 감격 같은 기분을 황 대표로 인해 새롭게 이해했다. 가까이 다가온 버들의 팔을 황 대표가 배려 없이 잡아 당겼다.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니 황 대표의 무릎 위다.
“대표님?”
다시 한 번 심한 갈증이 번졌다. 버들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선 황 대표가 숨을 깊게 들이켰다. 버들에게서 바깥의 냄새가 생생히 묻어난다. 원하는 게 아니었다. 살갗 냄새를 맡기 위해 황 대표가 버들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간지러운지 버들이 어깨를 움츠리며 움찔거렸다. 티셔츠를 걷어 버들의 맨살까지 만지고 나니, 그제야 우습게도 꽉 막혀 있던 숨통이 터졌다. 어쩐지 기진맥진하다.
“살 빠졌어?”
“아니요.”
“아니긴. 시골에 있을 때보다 더 빠졌네.”
버들이 쭈뼛거리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버들아.”
황 대표의 목소리로 듣는 제 이름이 무던히 설렌다. 둘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색연필 사 줄게.”
“……안 사 주셔도 돼요.”
“많이 갖고 있어도 사 줄게.”
나른하게 펼쳐진 오후였다.
“대표님.”
대답이 없다. 버들이 황 대표의 가슴팍에 기대고 있던 고개를 뗐다. 저를 껴안은 채 황 대표가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은은하게 향수 냄새가 풍겨 온다. 이 정도까지 욕심은 안 부렸다. 가끔 사무실에서 부딪히는 날이 있길 바랐을 뿐이었는데. 서울에 온 뒤로 황 대표와 각각 떨어져 살고 있지만, 꿈같은 시골 생활이 꼭 연장되는 거 같다.
……아. 너무 좋아. 무리하지 않아도 입가가 부드럽게 풀리며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황 대표의 생활 패턴이 바뀌었다. 작업이건 업무건 몽땅 몰아 밤과 새벽 사이에 해결했다. 그리고 버들의 수업이 끝날 때쯤 맞춰 미리 오피스텔에 가서 기다렸다. 큰 창문에서 노을이 쏟아져 들어왔다. 제 품에 안긴 채 버들이 재잘재잘, 학교에서 있었던 자기 하루 일과를 들려줬다.
“대표님. 좋아해요.”
내리깐 시선에 황 대표의 목젖이 보였다.
“난 너 안 좋아해.”
“……알아요.”
황 대표가 불면증에서 완벽하게 벗어났다.
버들의 집에 도착했다. 바래다주는 시간이 언제나 깜깜한 밤이다.
“내려. 빨리.”
버들의 눈썹이 처졌다. 매번 저 혼자만 아쉬운 모양이다.
“대표님. 제가 맛있는 거 사 드릴까요? 야식 같은 거.”
“내리라고. 일하러 가야 되니까.”
“…….”
안 들리는 척 버티는 버들을 말끄러미 응시한 황 대표가 인상을 썼다. 그제야 버들이 가방을 챙기면서 잘 가란 인사를 건넸다. 내리라고 할 땐 언제고. 정작 버들이 차에서 내리려고 하자 황 대표가 붙잡았다. 그리고 뒷좌석에서 종이 가방을 꺼내 버들의 손에 들려 줬다.
“뭐예요?”
황 대표가 말이 없자 버들이 종이 가방을 펼쳤다.
“……저 색연필, 진짜 필요 없는데.”
괜히 하는 소리라고 여겼다. 황 대표가 버들의 어깨 뒤로 팔을 감았다. 서서히 다가오는 황 대표의 얼굴에 버들이 눈을 감았다. 서로 다른 체온을 지닌 입술이 겹쳐졌다. 버들의 속눈썹이 떨렸다. 조급하게 구는 황 대표에게 버들이 살며시 혀를 내줬다. 쪽, 황 대표가 제 혀끝을 빨아 당겼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면서 오금이 저렸다. 수축한 아랫배 밑으로 전부 젖는 기분이 든다.
황 대표가 입질하듯 자근자근 깨문 탓에 입술이 붉어지면서 부어 버렸다. 부끄러워진 버들이 서둘러 차에서 내려 마당을 가로질러 뛰었다. 아무도 못 보게 제 입술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나서 현관문을 열었다. 꽃가루가 팡, 터졌다. 불시의 공격에 버들이 휘청거렸다.
“형. 뭐야. 이거 취미야?”
“내 새끼. 이거 뭔 줄 알아?”
수술 가능 여부에 대한 결과가 담긴 서류가 병원에서 도착했다. 장 여사와 유 회장에게 축하를 받았다. 뒤늦게 버들이 웃었다. 보란 듯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웠다. 서류를 들고 버들이 제 방으로 들어갔다. 몸이 벽을 타고 허물어졌다. 손끝이 달달 떨린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불안함이 그득 담겼다. 몇 번을 확인해도 수술 가능 확률이 수술 불가능 확률보다 높게 측정되어 있었다.
믿을 수가 없다. 자신 있었는데……. 분명,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나올 줄 알았다. 버들의 큰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입맛을 잃고. 치미는 구역질을 해 대느라 목구멍이 붓고. 그걸 참았던 이유는 뉴욕에 가기 싫어서였다. 억장이 무너진다.
두어 시간이 지나자 머릿속이 차분해지면서 달달 떨리던 손도 함께 진정이 됐다. 버들이 숨을 최대치로 크게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몸을 일으킨 뒤 바닥을 두리번거렸다. 어둠에 눈이 익어 벗겨진 슬리퍼 한쪽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불을 켰다. 수술이 가능하다고 적힌 서류가 엉망으로 구겨져 있다. 가족들은 신줏단지 모시듯 대했을 테니 범인은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구겨진 부분들을 집중해 폈다. 우글우글한 종이가 처음처럼 완벽하게 돌아오지 않는다. 어차피 기대한 것도 없다. 늘 그랬듯 포기가 빨랐다.
봉투 속에 서류를 집어넣어 정리하는 버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가방을 들고 온 버들이 일부러 서류 봉투 위에 내려놓았다. 얼핏 비친 병원 마크는 꼼꼼하게 가방 끈으로 가렸다. 당장 눈에 안 보이는 것처럼 전부 없던 일이 되어 버렸으면 좋겠다.
……맞다! 뒤늦게 번쩍 떠오른 생각에 거울 앞으로 향하는 버들의 걸음이 빨라졌다.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리하다가 말고, 버들이 제 입술을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겨우 균형을 맞춰 가던 기분이 비틀렸다. 손톱 끝은 갈라져 흉하고 입술은 버석하게 말라 까칠하다. 침을 좀 묻혀 보니 낫다. 손톱도. 입술도.
습관처럼 웃음을 띤 버들의 눈가가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한숨마저 혹여 습관이 될까 의식하며 억눌렀다. 침대 위를 무릎으로 기어 가로질렀다. 창문을 열자마자 들이닥친 바람에 애써 정리한 앞머리가 다시 흐트러졌다. 대문 앞이 보일 듯 말 듯 한다. 창틀에 양팔을 내린 버들이 최대한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황 대표의 차가 보이지 않는다. 하긴.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있을 리가 없지. 입천장이 전부 녹아내리진 않을까, 걱정이 들만큼 촉촉하고 달콤했던 키스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잘 자라고, 운전 조심하라고, 또 뵐 수 있으면 좋겠다고, 내가 그런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던가? 서로 포개졌던 입술을 천천히 떼어 낸 찰나 황 대표님이 짓던 미소가 정말 제대로 된 내 기억이 맞을까?
석고 반죽 앞에서 버들이 진중하다. 됐나?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각도를 쟀다. 스케치는 한참 전에 끝났다. 더 손볼 게 없는데도 자꾸만 아쉬움이 남아 머뭇거리는 중이었다. 주변은 벌써 다음 단계로 넘어가 덩어리를 깎아 내기 시작했다. 하얀 가루가 먼지와 뒤섞여 꼭 눈보라처럼 휘날린다. 기운 빠진 버들이 등을 굽혔다. 이렇게 더딘 속도라면 분명 남들과 동떨어지고야 말 거다. 버들이 하는 수 없이 연필을 내려놨다. 필통 속에 있어야 할 지우개가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근처에서 발견했다.
버들이 끌과 망치를 이용해 넓은 부분을 깨뜨렸다. 다쳤던 손목에 무리가 가는지 이따금씩 시큰하다. 미간을 찌푸린 버들이 허공에 손목을 탈탈 털어 가며 작업을 이어 갔다. 교수가 성의 없는 설명과 함께 간결하게 적고 나간 글씨가 칠판에 적혀 있었다. 인물 표현. 위로 날아가는 글씨체이지만 못 알아볼 수준까진 아니었다. 옆에 있던 동기 녀석이 허리를 쭉 펴 제 작품과 버들의 작품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너 주제 몰라?”
“나?”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불숙 걸어온 말에 제 가슴팍을 찔러 보이며 버들이 “지금 나한테 하는 말이야?” 하고 되물었다.
“그래. 너 말이야, 너. 주제를 몰라?”
“내 주제? 잘 아는데…….”
“네 주제가 뭔데?”
“말해 주기 싫어.”
“네 주제가 우리 모두의 주제이기도 해.”
“응?”
커다란 버들의 눈이 투명하다. 쯧. 마주 본 동기 녀석이 팔짱을 낀 채로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가뜩이나 많은 먼지가 그런 동기 녀석의 움직임에 더 풀썩거리며 날아다니는 게 반갑지 않았다. 코끝이 간지럽다. 버들이 가방을 뒤져 마스크를 찾았다. 금방이라도 재채기가 터질 거 같다. 답답함을 무릅쓰고 버들이 마스크 끈을 잡아당겨 양쪽 귀에 걸었다. 그러자 첫 키스 후 산책하다가 말고 멈춰서 마스크를 사 줬던 황 대표가 스르륵 그림처럼 떠올랐다. 위아래 붕어처럼 팽팽하게 부은 입술이 신경 쓰이고, 또 못생겨진 거 같아 속이 상했었다. 어떻게든 황 대표에게 만큼은 보여 주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댔었는데…….
「다른 데 가서 입술 보여 주지 마.」
「……그럼, 대표님한테도 보여 주지 말아요?」
「난 봐야지.」
몽글거린다.
「제 입술 보실 거예요?」
「응.」
단조로운 그 대답이 무던히 가슴을 떨리게 만들었다.
“유버들. 인물 표현이 과제 주제야.”
동기 녀석의 판단에는 버들이 작품 혼자만 외딴 방향으로 노를 저어 가고 있었다.
“나 지금 인물 표현 열심히 하고 있어.”
혼자만 외딴 방향으로 향하면서 버들은 꿋꿋했다.
“그걸로 인물 표현이 된다고 생각해?”
버들의 작품에 동기 녀석이 순수한 의문을 가졌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버들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당연히 인물 표현이 된다고 제 작품을 열렬하게 두둔했다.
모자를 거꾸로 뒤집어쓰며 동기 녀석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을 포함해 다른 사람들이 조각을 새겨 넣고 있는 석고엔 과제 주제에 맞춰 인물이 나타나 있는데 버들은 달랐다. 하긴. 이런 놈도 있고 저런 놈도 있기 때문에 세상은 요지경으로 돌아가는 법이다. 얄미울 만큼 재능을 타고나 뭘 하든 앞길이 빵빵한 놈들이 있는가 하면. 유버들처럼 학기 초부터 학점에 구멍 뚫리는 놈이 생기기도 하는 거지. 그게 뭐 큰 대수겠어.
“발목으로 인물 표현이 되는구나. 내가 장담하는데, 넌 ‘D’다.”
농담인지 악담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는다. 어쨌든 버들이 콧잔등을 찌푸렸다.
“남자 발이네, 이거. 모델이 누구야? 아. 너 형들 많다고 했지? 너희 형들 중 한 명?”
형들이 많기는 하나 다들 고만고만하다. 그중에서 아무나 한 명을 골라 모델로 써 조각을 새긴다니. 조각이 장난도 아니고. 생각만 해도 시간 아까운 짓이었다. 자꾸 간섭하려 드는 동기 녀석에게 버들이 대꾸하지 않았다.
시린 손목을 빙글빙글 돌리며 밖으로 나온 버들이 벤치로 향했다. 주머니에서 꺼낸 게 담배다. 마스크를 턱 아래로 잡아당겼다. 금방 시야가 흐려진다. 연기를 짧게 내뿜으며 버들이 팔을 내려 재를 털었다.
가까운 나무에서 매미가 울고 있었다. 가냘프다. 안 그러려고 해도 시골의 풍경과 비교를 하게 된다. 시골 매미는 귀청을 멀게 할 정도로 처절하게 울어 댔었다. 벌써부터 그곳 생활이 그리워져서 큰일이다. 휘황찬란하게 물드는 노을을 보며 황 대표와 함께 살았던 나날들 중, 어떤 하루를 떠올려도 좋아하는 사람이 중심이 된다.
담배를 비벼 끈 버들이 벤치에서 일어났다. 예상되는 학점도 꼴찌였고, 작업 진행도 꼴찌였다. 언제 학교를 그만두게 될지 모르니 솔직히 학점이 ‘D’건 ‘F’건 상관없다. 하지만 진행 속도만큼은 신경 쓰인다. 건물 입구에서 버들이 누군가에게 붙잡혔다.
“이거 드세요.”
불쑥 내밀어진 음료수가 갑작스럽다.
“1학기 때 저희 같은 교양 들었거든요. 그룹 발표도 했었는데…….”
자기 얼굴을 보고도 영 기억 못 하는 것 같은 버들에게 음료수를 다시 건네며 관계를 설명했다.
“혹시 여자 친구 있으세요?”
“그런 건 왜요?”
“아. 그냥요. 혹시 마음에 들거나 선호하는 타입이 뭔지 물어봐도 돼요?”
훅 들어오는 질문에 버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날만을 기다렸다.
“저는 자세가 바른 사람이 좋아요.”
딱 한 문장을 말하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뛰어선 안 돼.
많이 걸어선 안 돼.
무리해서 움직이면 안 돼.
땀 흘려선 안 돼.
버들이 운동장을 쳐다봤다. 공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가 거칠게 몸을 쓰며 경쟁하고 있었다. 어렸을 적 철퍼덕 놀이터에 앉아 조용히 땅을 파는 자신을 보며 가족들 모두가 안심했었다. 원래부터 버들이 뛰는 것도, 많이 걷는 것도, 무리해서 움직이는 것도, 땀 흘리는 것도 안 좋아해서 다행이라고.
사실은 형들이나 또래 아이들이 너무 부러웠다. 미끄럼틀을 거꾸로 기어오르거나, 철봉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거나, 허리에 두른 도복 띠 같은 것들이. 물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을 결정해 주었던 조각도는 더없이 소중하다.
집에서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짐을 버들이 내려놓았다. 등 뒤로 문이 닫히자 어떠한 잡음도 들리지 않는다. 오늘은 오실까. 안 오실까. 이틀 연속 황 대표를 만나지 못했다. 오피스텔을 방황하며 돌아다니는 버들의 양손에 머플러와 수첩이 들려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인테리어에 관련된 교양 과목을 좀 들을 걸 그랬다. 고심 끝에 머플러와 수첩이 있을 자리를 정했다. 음?
“……비슷하네.”
머플러에 새겨진 자수와 수첩에 새겨진 자수가 같은 ‘H’라 그런지 비슷하게 느껴졌다. 거품을 잔뜩 묻혀 여러 번 손을 닦았다. 수건에 물기를 닦으며 욕실 안을 둘러봤다. 칫솔 두 개. 샤워 스펀지 두 개. 시골에서 황 대표와 둘이 살았던 것처럼 두 개씩인 필수품들이 있다. 그걸 버들이 사진으로 찍었다. 몇 번을 찍어도 형체를 알아 볼 수 없게 흔들려 아쉽다.
해가 지는 게 순식간이다. 책상을 차지하고 앉아 한참 스케치에 몰두해 있는데,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방음이 잘되니 다른 걸 잘못 들은 게 절대로 아니었다.
“대표님!”
노트를 당장 덮은 뒤 버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쁘셨어요?”
갑작스레 달려든 버들을 지나쳐 황 대표가 넥타이를 잡아당겨 풀었다. 버들의 얼굴이 잔뜩 상기된 채다. 황 대표가 샤워를 하는 동안 버들이 문 앞에서 바짝 서 기다렸다. 물소리가 끊겼다. 그제야 버들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유버들.”
“잠깐만요.”
물기 어린 타일을 버들이 맨발로 밟았다. 아까 찍어 둔 사진을 지우고 새롭게 셔터를 눌렀다. 아까는 제 칫솔과 샤워 스펀지만 젖어 있었다면, 지금은 둘 다 똑같이 젖어 있었다. 새로 찍은 사진 역시 전부 흔들렸지만 만족도는 달랐다.
“대표님. 식사는 하셨어요?”
“했어. 너는.”
“저도 했어요. 근데 대표님. 많이 피곤하세요?”
잠을 못 잔 것처럼 황 대표가 예민해 보인다.
“한 시간만 잘 거니까 알람 맞춰 놔.”
“제가 깨워 드릴게요. 걱정 마세요.”
“…….”
“대표님. 얼른 주무세요.”
“넌 나 자는 동안 뭐 하게.”
“저는 여기서 조용히 있을게요.”
자는 얼굴 실컷 볼 수 있겠다, 오늘은.
소파에 앉은 황 대표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제 발치에 앉아 생글거리는 버들을 보며 낮게 한숨을 내뱉었다. 버들도 황 대표를 따라 한숨을 폭 내쉬었다. 진짜 조용히 있을 건데 황 대표가 그런 제 말을 못 믿는 거 같다.
“나 자야 되니까…….”
“…….”
“이리 올라와.”
황 대표의 무릎 위에 앉은 버들의 볼이 발갛다.
“처음인 것처럼 왜 수줍어 해.”
아닌데. 저 수줍어한 적 없는데, 하며. 눈도 못 맞추고선 버들이 웅얼거렸다. 버들의 등에 팔을 올린 황 대표가 옅게 미간을 찌푸렸다. 손바닥 전체로 툭툭 불거져 나온 버들의 척추뼈가 만져졌다. 밥, 진짜 먹은 건지 물으려다가 말았다. 황 대표가 버들을 품에 끌어안았다. 굽혀진 무릎이 오랜만이라 혹시 아프진 않을까 만지작대자 버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가족 행사에 다녀와 불쾌했던 감정들이 뒤로 물러나면서 차차 흐려진다. 샤워했는지 버들의 목덜미에서 저와 같은 향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티셔츠 속으로 손을 넣은 황 대표가 버들의 맨살을 쓰다듬었다. 조용한 공간에 단둘의 숨소리만 존재했다.
주변 공기가 고요해지자 감고 있던 눈을 황 대표가 떴다. 제 가슴팍에 기운 버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헛바람이 켜졌다. 깨워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던 놈이 더 먼저 잠들어 있었다.
……이거 집에 데려가면 안 되나. 물건처럼 살 수 있는 거면 좋았을 뻔했다.
정확히 한 시간 뒤에 황 대표가 버들을 깨웠다. 곱게 깨우지 괴팍한 성질머리대로 그냥 소파에 내팽개쳤다. 가물거리는 눈을 끔벅거리면서 버들이 황 대표부터 찾았다. 주방에서 황 대표가 물을 마시고 있었다. 버들이 멋쩍게 제 이마를 긁적였다. 기분처럼 눈썹이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아, 언제 잠들었지? 여러모로 복잡해진 머릿속에 그간 밤잠을 설쳤던 게 꼭 거짓말 같다. 황 대표님이랑 있으면 잠 못 들어 끙끙거리는 밤도 몇 안 되겠다. 버들이 황 대표의 뒤를 따라다녔다.
“대표님. 저 오늘 학교에서 과제 처음 들어갔거든요. 인물 표현 조각이요.”
황 대표가 버들의 손가락을 바라봤다. 손등이며 손톱이며 갈라져서 볼품없다.
“제가 하는 인물 표현에 제 친구가 ‘D’ 받을 거래요. 저는 사람 얼굴 조각 안 해서, 진짜로 ‘D’ 받을지도 몰라요.”
황 대표가 소파에 앉자 버들도 따라 옆에 앉았다.
“사람 얼굴 조각 안 하면, 넌 뭐 하는데.”
“저는 발목이요.”
“사람 발목?”
“네. 남자 발목.”
“발목을 뭐 하러 조각해.”
해괴하다. 이해 못 한 황 대표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 이거 학교에 제출 안 할까 봐요.”
“그럼 ‘D’도 못 받겠네.”
“좀 작게 만들어서 열쇠고리로 가지고 다니고 싶어요.”
“고작 열쇠고리나 만들라고 유 대표가 너 대학 보냈어?”
꼴통 새끼를 황 대표가 나무랐다.
“그럼 어떡해요.”
“뭘 어떡해.”
“실제 발목으론 열쇠고리 못 만들잖아요.”
버들이 황 대표에게 한층 더 붙었다. 큰 눈이 초롱초롱하다.
“근데요. 대표님.”
“…….”
“발목이 왜 그렇게 예뻐요?”
해사하게 웃는 버들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다. 하도 기가 차니까 한숨조차 나오지 않는다. 황 대표가 차라리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계속해서 재잘거리는 버들의 팔을 잡아 제 무릎 위로 앉혔다. 슬쩍 손이 닿은 엉덩이가 말랑거린다. 버들의 수다가 일순 멎었다. 뭔가 싶나 보다. 고개를 뒤돌려 손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하는 꼴이 우습다. 그대로 끌어당겼다. 버들의 하체가 황 대표의 아랫배에 철썩 맞붙었다. 움찔 어깨를 떤 버들이 최대한 몸을 뒤로 뺐다. 그래 봤자 황 대표의 손아귀 안이다.
“저기, 대표님.”
저를 부른 버들의 말을 무시했다. 무심한 표정으로 황 대표가 버들의 몸을 더 바짝 끌어안았다. 살짝 벌어진 입에서 어떠한 소리도 못 내고 있다. 황 대표가 몸을 뒤로 기울자 아랫배에 닿아 있던 버들의 하체가 황 대표의 하체로 흘러내렸다. 버들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저절로 침이 삼켜졌다. 허벅지 안쪽부터 저릿하게 열감이 지펴졌다. 낮게 터진 버들의 한숨이 뜨겁다.
“유버들.”
앞머리를 넘겨 주는 황 대표의 얼굴이 여유롭다.
“야한 생각하지 마.”
“……안 해요. 그런 거.”
황 대표가 웃었다. 그 작은 반동에 밀착된 아래가 비벼졌다. 각자의 크기가 선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머리카락까지 쭈뼛 설 만큼 오싹하고 저릿한 느낌에 버들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황 대표가 그런 버들을 무릎으로 서게끔 유도해 티셔츠를 걷어 올렸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황 대표의 고개가 망설임 없이 버들의 배꼽 주변으로 향했다. 입술을 묻었다. 흠칫거리며 놀란 버들의 아랫배가 바짝 수축했다. 도망치지 못하게끔 황 대표의 단단한 팔이 버들의 허리를 옥죄었다. 그러면서 쉬지 않고 버들의 몸에 차근차근 입 맞췄다.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은 황 대표의 입술은 깃털처럼 가벼웠고, 속삭이는 것처럼 다정했다. 바들거리는 버들의 다리가 몇 번이나 주저앉으려고 했지만, 그걸 황 대표가 허락하지 않았다.
“아…….”
축축하게 빨린 버들의 왼쪽 젖꼭지가 붉어졌다.
“가자. 바래다줄게.”
버들이 안전벨트를 풀었다.
“대표님…….”
문을 열고 내리려던 버들이 다시 운전석을 바라봤다. 황 대표의 서늘한 눈매에 곧장 기가 죽는다. 차에 탔을 때부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이걸 물어봐도 되는지 망설여졌다. 버들이 아무렇지 않게 보일 수 있도록 최대한 호흡을 가다듬었다.
“저희 집 오면서, 어, 경로 한 번도, 이탈 안 하셨어요.”
호흡을 정리하면 뭐 해. 말이 더듬더듬 거리며 흘러나왔다.
“……어. 그럼. 조심히 가세요.”
일그러진 황 대표의 눈썹을 외면하며 버들이 얼른 차에서 내렸다. 마당 안쪽에 숨어 있다가 멀어지는 황 대표의 차를 끝까지 지켜봤다. 길치인 황 대표가 헤매지 않고 제 집까지 운전한 건, 그만큼 내가 익숙해졌다는 건가? 웃으며 버들이 기뻐했다.
“나 바빠.”
시큰둥한 표정으로 버들이 보고 있던 책장을 넘겼다.
“그런 싸가지 없는 행동은 누구한테 배워왔어?”
겨울이 범인을 추려 냈다.
“당연히 황 대표겠지.”
“…….”
“같이 살면서 못된 것만 배워 가지고 왔어, 아주.”
“……황 대표님 싸가지 있을 때도 있어.”
“언제는 씹새끼라면서.”
“씹새끼이기도 한데. 아무튼. 싸가지가 계속해서 없는 건 아니야.”
버들이 한심하단 듯 한숨을 내뱉었다.
“형은 친구라면서 그런 것도 몰라?”
겨울이 얄밉게 구는 버들을 째려봤다.
“진짜 바빠?”
“많이 바빠.”
“뭐 하느라 바쁜데.”
“나 지금 책 보잖아.”
“일어나, 빨리.”
겨울이 책부터 빼앗았다. 그래도 꿋꿋이 침대 위에 엎드려 있는 버들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나가자.”
“귀찮게 왜 그래.”
“형이랑 단둘이서 시간 보낸 적 없잖아. 시골 갔다 온 뒤로.”
“나중에. 나 지금 일어 난 지 30분도 안 됐거든?”
눈에 씐 콩깍지 때문인지.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산발이 된 버들의 머리가 겨울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했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말끔하기만 한데. 이대로 나가도 상관없을 것 같다.
“나가서 뭐 할 건데?”
“밥 먹고. 너 옷 좀 사고.”
“옷을 또 뭐 하러 사.”
“아, 새끼, 진짜. 이리 와, 너.”
또박또박 말대꾸하는 버들의 이마를 겨울이 아프지 않게 손가락으로 튕겼다.
“그럼 형은 나갈 거니까.”
막무가내로 조르던 겨울이 의미심장하게 다른 카드를 꺼내 들었다.
“너 혼자 집에 있어라.”
“이따가 나도 나갈 거야.”
“……어디 갈 건데.”
“안 가르쳐 줘.”
기껏 꺼내 든 카드가 버들의 앞에선 휴지 조각이다.
“알았어. 형은 나가서 밥 먹고 옷 사고 해야겠다.”
“…….”
“황 대표 만나서 같이.”
겨울이 뒤돌았다.
“형. 황 대표님 만나?”
밀어내는 데 급급할 땐 언제고, 쪼르르 다가와 제 팔을 붙잡는 버들을 보며 겨울은 막상 싱숭생숭해지고야 말았다. 혹시나 저를 놓고 갈까 봐 부랴부랴 외출 준비를 끝낸 버들이 신발장 앞에서 고민이 길다. 재촉하지 않고 겨울이 옆에서 기다렸다.
“이거 이상해?”
“아니.”
“이거랑 저거랑 어떤 게 나아?”
“이거 신어. 옷이랑 더 잘 어울리네.”
“이거 형이 전에 봄에 사 준 거.”
“알아.”
새 옷을 입고 새 신발을 신고 새 가방을 든 버들의 모습이 웬일인가 싶다. 다른 형제들 역시 저들 막냇동생에게 무엇도 아까운 것 없이 굴지만, 특히나 겨울은 더 극심하게 돈지랄을 떨어 댔다. 덕분에 버들의 드레스 룸과 신발장, 책장은 항상 새로운 물건들로 차고 넘쳐 났다. 그걸 버들은 아까워했다.
「어차피 이거 내가 다 쓰지도 못하잖아.」
왜 다 못 쓸 거라고 생각하는지 묻지 않았다.
“너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이렇게 쫙 빼입었냐?”
안 들리는 척 버들이 앞장서서 걸었다.
“물주인 형한테 잘 보이려고 입었다고 해. 야!”
편하게 카탈로그 보며 쇼핑할 수도 있는 걸 굳이 겨울은 버들을 옆구리에 끼우고 돌아다녔다. 결제를 앞에 두고 제 의견을 묻는 겨울에게 버들이 쀼루퉁한 얼굴로 반응했다.
“사지 말라고 하면 안 살 거야?”
“아니.”
“하나만 사라고 하면?”
“다 살 거야.”
어차피 그럴 거면서. 겨울이 잠깐 전화를 받는 사이 앉아서 쉬던 버들이 지갑을 열었다. 몰래 손수건 하나를 샀다. 백화점을 벗어나면서부터 버들의 긴장이 시작됐다.
“우리 이제 밥 먹으러 가?”
“응. 배고파?”
“형. 황 대표님 오시는 거 맞지?”
“…….”
조각을 제외하면 처음이었다. 버들이 뭔가에 집착하며 관심을 보이는 게 사람이란 점이 신기했다. 그때는 별로 심각하지 않았다. 집착하며 관심을 보이는 황 대표의 옆에서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좀 긍정적인 반응이 있길 바라며 시골에 함께 딸려 보냈다. 내 새끼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는 마음이지만…… 결과를 어떻게 판가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레스토랑엔 황 대표가 먼저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꾸벅 인사를 하며 버들이 겨울의 옆에 앉았다. 말없이 황 대표가 내민 메뉴판을 겨울이 받아 갔다. 식사를 하며 겨울이 분위기를 읽었다. 머리도 감겨 주고 말려 줬다더니. 황 대표와 버들의 사이가 뭐 딱히 달라진 건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황 대표의 태도가 덤덤하고 건조한 게 똑같다. 겨울이 우선은 한시름 놨다.
재차 울리는 전화에 겨울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황 대표가 지나가는 서버를 불러 세워 비어 있는 버들의 물 잔을 채우게 했다. 이상하게 말 한 마디 오가지 않았건만 발바닥이 간질간질하다. 고개를 푹 숙인 버들이 아랫입술을 핥았다. 목덜미까지 화끈거리는 기분에 사로잡히면서 기묘한 두근거림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졌다. 좋은 하루다.
* * *
병원 복도를 따라 터벅터벅 걸었다. 인적 없이 고요하다. 환자복 하의가 길게 내려오면서 버들의 발등이 푹 가려졌다. 허리를 고정시켜 줘야 하는 고무줄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일 작은 사이즈로 바꿔 달라고 했더니 남성용 중 이게 제일 작은 사이즈라고 해서 돌아서야 했던 게 바로 오늘 아침이다. 걷기도 어렵게 옷이 왜 이따위냐고 열심히 투덜거렸던 불만이 쏙 들어갔다.
헐렁거리는 바지가 이제나저제나 벗겨질까 아슬아슬한 건, 결국 살이 많이 빠진 제 탓이었다. 허리춤을 붙잡다가 괜스레 아랫배를 쓱쓱 쓰다듬었다. 먹은 게 없어 홀쭉하다. 예전에도 그랬다만 요즘엔 더욱더 입맛을 잃었다. 더 나아가 끼니를 왜 하루에 몇 번씩이나 챙겨야 하는지 모르겠다.
수술은 정해져 있는 수순이었다. 하필이면. 집에 돌아오자마자 정신을 잃을 정도로 열이 끓고 아플 건 뭐였는지. 그날만 아니었으면. 그럼 병원에 실려와 검사까지 이어졌던 상황은 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현재 그게 가장 억울한 부분이었다. 수술이 가능한 몸 상태와 조건 등이 갖춰지면 다시 뉴욕에 가기로 가족들과 약속했다. 어떻게든 그 기간을 늦춰 보고 싶었다. 밥을 먹지 않고 구역질이 나오면 게워 내고. 바보 같다. 속이 전부 망가지면 끝끝내 수술을 피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시골 생활 막바지에 황 대표님이 매일 같이 묽게 끓여 준 죽이 아른거린다.
그걸 덜 먹었다면, 원하던 대로 결과가 흘러갔을까? 하지만 황 대표님이 친히 수저까지 챙겨 주니 덜 먹으려고 해도 덜 먹을 수가 없었고, 맛을 떠나 직접 끓여 준 정성이 아까워서 충동적으로 토기가 일어도 견뎌 내는 쪽을 택했다.
아무튼. 집에 있게 되니 묘연하게 감시당하고, 먹으라고 시키니까 기계처럼 뭔가를 입에 넣고, 씹고, 삼키고 있기는 하나 하등 쓸모없는 짓이란 판단에는 변함이 없다. 방문을 걸어 잠근 뒤 새벽 내내 괴로운 목구멍을 붙든 채 속을 전부 게워 내는 게 어느덧 하루의 일과처럼 자리 잡았다. 그 와중에 방음만큼은 확실해 소리가 새 나갈 걱정이 없어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게 위안이었다.
수술, 받기 싫다.
침침한 조명이 현재의 기분과 닮았다. 일정한 간격으로 줄지어진 창문들이 꽉꽉 닫힌 채다. 어둑한 바닥엔 꼭 창문만 한 크기로 햇볕 징검다리가 만들어졌다. 강박증처럼 버들이 긴 다리를 쭉쭉 뻗어 가며 그 부분만 밟아 걸었다. 힘껏 움켜쥐고 있는 바지와 지폐가 잔뜩 구겨졌다.
탄산수가 마시고 싶어 휴게실까지 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뭐가 문제인지 아무리 자판기 속에 지폐를 밀어 넣어도 도로 내뱉어지기 일쑤였다. 주변에 저 말고 몇 사람이 휴게실에 앉아 있었다. 망설임은 짧았다. 애초에 동전이 있으면 지폐와 바꿔 달라고 할 번죽거리는 성격도 못 되었고, 무엇보다 자판기 속 메뉴엔 탄산수가 없어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휴게실과 가까이에 흡연실이 있었다. 그건 뜻밖의 수확이었다. 벽에 등을 기대고 선 채 기다렸다. 누군가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미미하게 풍기는 담배 연기가 아니었다면, 일부러 다른 층의 휴게실까지 찾아간 게 정말이지 허무했을 거다.
걸음을 멈춘 버들이 제 팔에 코를 묻었다. 숨을 훅, 들이켰다. 병원 냄새가 나는 건지, 아니면 아침에 사용한 바디 로션 향기가 나는 건지 헷갈린다. 의기소침하게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형?”
병원 코너를 돌자마자 그때까지 무표정했던 버들이 눈으로 샐쭉 웃었다. 제 첫째 형인 유 이사가 병실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미성년자를 벗어나도 가족들의 과보호는 여전했다. 귀찮다. 그리고 미안했다. 그러니까 자신을 향해 집중되어 있는 가족들의 걱정이 귀찮다고 느껴지는 감정이 가장 미안했다.
혼자 오고 갈 수 있다고 몇 번이나 만류를 해 보았지만 소용없다. 병원에 가는 날이면 형들 중 한 명이 꼭 따라붙었다. 나이 차가 가장 많이 나는 만큼 유 이사의 입가에 진 주름이 중후하면서 또 상냥해 보인다. 버들의 어깨를 감싼 유 이사가 병실 안으로 이끌었다.
“어디 갔었어?”
“형이야 말로 회사에 간 거 아니었어?”
“네가 병원에 있는데 형이 어떻게 회사에 가. 잠깐, 앞에서 사람 좀 만났어.”
“그래? 나는 형 회사에 간 줄 알고.”
“너 낮잠 자고 있어서 말을 못 한 거지. 형이 너 없어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나 휴게실에 갔다 왔어.”
“왜, 뭐가 필요해?”
“아니.”
사실은, 개인 병실 냉장고에 이미 탄산수나 음료수가 좌르륵 채워져 있었다.
“나 오늘 수업 되게 많았는데. 그것도 전공.”
침대에 걸터앉으며 버들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학교 좀 안 나가면 어때.”
“와. 안 그래도 요즘 내 학점 불안하거든? 출석률까지 미달이면 어떡해.”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의연히 제게 장기적인 입원을 권하고 있단 의중을 알아차렸다. 요양을 위해서였다.
“나 학교 다닐 거야. 형.”
“…….”
“초등학교도 다니다가 관두고. 중학교도 다니다가 관두고.”
“…….”
“뉴욕에선 학교 근처도 못 가 보고, 가정교사한테만 수업받고.”
“…….”
“나 이러다가 장가가면 하객들 한 명도 없겠다.”
버들이 계속해서 웃었다.
“안 돼? 내 마음대로 하면?”
의자를 끌고 온 유 이사가 버들과 마주 보며 앉았다. 요즘은 결혼식 추세가 소규모로 변모해 가족들끼리만 모여 호화롭게 하는 게 최고라며, 유 이사가 얼토당토 않는 말로 피했다. 버들이 손가락을 얌전히 꼼지락거렸다. 말 잘 듣는, 착한 막내로서 지켜야 하는 위치가 지금은 좀 별로다. 마침 제일 권위적인 첫째 형과 단둘이 있으니 기회였다. 버들이 종알거렸다.
“학교를 계속 다닌다는 게 아니잖아. 수술 날짜 잡힐 때까지만. 응? 등록금 낸 것도 아깝고.”
드물게 고집을 부리는 버들에게 유 이사가 한숨처럼 길게 숨을 내뱉었다.
“형. 형이 겨울이 형한테 말 좀 잘해 줘.”
다른 가족들은 의연히 입원을 권유하는 반면 겨울은 막무가내로 떼를 쓰니 탈이었다.
“알았지? 형?”
“…….”
“응? 알았지?”
“…….”
“형. 대답해. 알았지?”
결국 유 이사가 얕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우르르 몰려 들어온 전문의들과 간략하게 인사를 나눴다. 심장 기능이나 폐 기능 등등 수술에 필요한 검사가 재차 반복되고 있었다. 채 사라지지 않은 팔뚝의 바늘 자국 옆에 또다시 시퍼렇게 바늘 자국이 남았다. 벌집이 따로 없다. 검사를 끝내고 나면, 곧장 다음 검사 날짜가 예약되는 식이었다. 버들이 성의 없이 손톱을 들여다봤다. 전문의들 입에서 나올 말들이 버젓이 예상되면서 벌써부터 지루하다.
심장 박동을 정지시킨 상태에서 수술이 진행되고…… 심장이 완전히 멈춘 시간을 허혈 시간이라고 하고…… 수술 도중 뇌에 혈액 공급을 원활하게 공급하지 못하는 수를 대비해야 하니…… 항응고제 복용에는…….
아니나 다를까.
“익히 들어 아시겠지만, 유버들 환자의 수술 진행 과정은…….”
한국에 있을 땐 한국어로 들었던 말이고, 뉴욕에 있을 땐 영어로 들었던 말이다. 머릿속을 익숙하게 떠다니는 용어들이 몽땅 쏟아졌다. 전문의들은 수술에 앞서 희망과 절망을 적절하게 이해시키려고 했다.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 겨우 마취를 견딜 수 있는 몸 상태로 수술이 가능해졌지만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가 없다. 가족들은 희망을 먼저 고려하고 버들은 그 반대의 경우를 고려했다. 수술받기 전 불가피한 사고가 생길지. 수술 도중에 쇼크사를 할지. 수술 후 치명적인 후유증을 겪게 될지.
빼곡하게 다짐이 들어찼다.
오늘 이후로 황 대표님을 더 많이 좋아해야겠다.
아주 가느다란 빗줄기가 새벽부터 계속됐다. 우산을 접고 버들이 카페에 들어갔다. 비가 내려서 그런지 사람은 별로 없는 실내가 유독 어수선하게 느껴진다. 두리번거리며 만나기로 약속한 상대를 찾았다. 창가 쪽에 정민이 주머니에 손을 꽂고선 엿가락처럼 늘어진 채 앉아 있었다.
저러면 허리 안 아프나? 버들이 서둘러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뾰족한 우산 끄트머리에서 뚝뚝 떨어진 물방울로 길이 생겼다. 아. 버들이 다시 출입구로 돌아가 준비된 비닐에 우산을 꽂아 감쌌다. 몸을 틀자 어느 틈에 바른 자세로 고쳐 앉은 정민이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맞은편 자리에 버들이 가방을 내려놨다.
“많이 기다렸어?”
“뭘. 아직 약속 시간도 아닌데. 너도 일찍 왔네.”
“너도 일찍 온 거잖아. 얼마나 기다렸어?”
“어. 한 10분? 그 정도 됐어.”
“10분 만에 음료수를 다 마셨다고?”
어설픈 거짓말이 바로 발각됐다. 정민이 헛기침을 하며 바닥을 비운 컵을 팔꿈치로 밀어 없앴다.
“또 뭐 마실래? 내가 사 줄게.”
“됐어. 앉아 있어. 뭐 마실 거야?”
“어? 아니야. 내 건 내가 살 거야.”
“내가 사 준다니까 그러네.”
“네가 내 음료수를 왜 사?”
“그러면 안 되냐?”
“이유가 없잖아.”
말문이 턱 하니 막힌 정민이 깐깐하게 구는 버들을 흘겨봤다. 아. 경기가 잘 풀린 기념이라든가, 돈을 주웠는데 이런 돈은 빨리 써 버려야 한다고 해서 그런다든가. 그럴싸한 핑계들이 기회를 놓치고 나니 몇 개 떠오른다.
한탄하며 앉아 있던 정민이 진동이 울리는 벨을 버들보다 먼저 낚아챘다. 음료수를 사 주지 못한 아쉬움을 대신 자리까지 들고 와 주는 걸로 만족했다. 머그잔에서 김이 폴폴 올라왔다.
“운동은 열심히 하고 있어?”
“나야 뭐. 항상 열심히 하지.”
정민이 뻐겼다.
“난 담배 펴. 부러워?”
“중학교 2학년이냐? 왜 자꾸 담배 피우는 걸로 허세야. 담배 많이 피우면 너 어떻게 되는지 알아? 어? 몸에 좋지도 않은 거, 끊어. 너 전에 계단 올라갈 때 숨차서 헉헉거리는 거 다 봤으니까.”
청산유수가 따로 없다. 이번에 버들이 정민을 흘겨봤다.
“준비물은. 말해 준 대로 챙겨 왔어?”
“어? 응.”
정민의 채근에 버들이 가방을 열었다. 준비물이란 건 반짇고리였다. 일렬로 정리되어 있는 실들이 색색별로 참 알록달록하다.
“너 정말 바느질할 줄 아는 거 맞지?”
“그래. 운동복 찢어지면 급한 대로 내가 꿰매 입어. 바느질 한 지 10년도 더 됐어.”
“……그럼 운동한 지 10년도 더 됐어?”
“응. 그렇지.”
며칠 전 버들은 하루 동안 클래스가 진행되는 수업을 찾았다. 찾기만 했을 뿐이었다. 혼자 배우는 게 쑥스러워 뒤로 미루다가 자꾸만 놀자고 조르는 정민에게 권했다. ‘노는 걸로 치고 뭐 배우러 가지 않을래?’ 물었던 버들의 말에 정민이 잽싸게 그러겠노라 반응했다. 뭐 배울 거냐면서 적극적으로 구는 정민의 관심에 버들이 웅얼거리면서 대답한 게 ‘자수’였다. 콧방귀를 뀐 정민이 남자가 무슨 자수를 배우러 가냐면서 버들을 실컷 놀려 댔다. 그게 도를 지나칠 정도였다. 참다못한 버들이 씩씩거리며 앞으로 너랑 놀지도 않을 거고 아무것도 배우러 가지 않을 거라며 절교를 선언했다. 쌀쌀맞게 뒤돌아서는 버들을 정민이 허겁지겁 붙잡았다. “자수, 나 잘해.” 하는 말을 덧붙이면서 만날 날을 정했다. 그게 오늘이었다.
버들의 반짇고리를 받아 간 정민이 바늘부터 꺼냈다.
“아마 우리 운동부 중에 내가 제일 바느질 잘할걸?”
우락부락한 큰 덩치로 바느질 부심을 팍팍 부리는 정민에게 버들이 몸을 쭉 내밀었다.
“진짜 의외다, 너. 바느질 배울 생각을 다 하고.”
“……배워 놓으면 좋잖아.”
“맞아. 나중에 자식들 학예회 옷도 만들어 줄 수 있고……. 아. 넌 처자식 필요 없냐?”
황 대표를 의식하며 걸어온 정민의 이죽거림에 버들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곧 어떠한 표현보다 강한 긍정이 된다. 갑자기 쓰린 속에 정민이 새로 주문한 음료수에서 빨대를 빼 컵째 벌컥벌컥 들이켰다.
“구멍에 실부터 넣어.”
적당한 길이로 잘라 준 실을 버들이 받아 갔다. 구멍 찾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눈 바로 앞에 바늘을 가져가 한참 끙끙거렸다. 겨우 바늘구멍에 실을 꿰어 넣을 수 있었다. 카페 로고가 새겨진 티슈를 바느질 연습용으로 사용했다.
“손에 힘을 빼. 힘도 없어 보이는 놈이.”
바늘이 통과되는 동시에 티슈가 너덜너덜 걸레짝이 됐다.
“손에 힘 다 뺐어.”
“근데 찢어졌잖아. 이거 어쩔 거야?”
“……왜 찢어지지.”
“손에 힘이 들어가니까 찢어지지 왜 찢어졌겠냐?”
겁나 잔소리하네. 버들이 꿍얼거렸다.
“바느질 좀 한다고 유세 떨지 마.”
“이게 유세 떠는 거라고? 난 잘난 척했던 거야.”
……겁나 잘난 척하네. 버들이 욕했다.
“잘 봐. 나 보고 따라 해.”
정민이 시범을 보였다. 집중하느라 버들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바느질은 굉장히 섬세함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한 시간이 지나자 손가락 전체가 뻣뻣해진 기분이다. 여전히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도 처음보단 나아졌다. 적어도 어떻게 바늘을 쥐어야 하는지 느낌을 알겠다. 해사하게 웃으며 버들이 가방을 뒤적거렸다. 전에 백화점에서 산 손수건을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이걸로 할까. 저걸로 할까. 황 대표의 이미지를 연상해 가며 잘 어울릴 실 색깔을 고르고 골랐다. 최종적 후보로 고른 검정색과 남색 사이에서 머뭇거렸다. 그러길 한참이다. 고민을 거듭한 보람도 없이 버들은 전혀 생뚱맞은 색의 실을 꺼냈다. 앞에서 그런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던 정민이 허탈하단 듯 투덜거렸다.
“어차피 빨간색 고를 거면서 검정색이랑 남색 실은 뭐 하러 꺼냈냐?”
“기분이 안 좋아졌어.”
“갑자기?”
버들의 눈이 실을 오고갔다.
“검정색이랑 빨간색, 둘 다 써야겠다.”
이니셜 ‘H’는 검정색. 뒤에 새길 하트는 빨간색.
“내 생각엔…….”
손수건과 바느질을 연습한 티슈의 질감은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티슈처럼 찢어지진 않았지만 손수건이 우글거리면서 자수가 새겨져 말 그대로 망했다. 물끄러미 들고 있던 손수건을 바라보던 버들이 입을 열면서 정민을 쳐다봤다.
“스승이 별로라…….”
“야!”
정민이 발끈했다.
“밥 먹으러 갈래? 내가 사 줄게.”
“웬 밥?”
“바느질 가르쳐 줘서 고마워.”
삽시간에 열이 몰린 얼굴로 정민이 멋쩍게 뒷목을 긁적거렸다. 피자를 앞에 두고 각자 다른 생각에 빠졌다. 뒤늦게 제정신을 차린 정민이 식어 버린 피자를 우걱우걱 해치우기 시작했다. 나이프로 피클을 못살게 굴면서 버들이 깨작거렸다.
* * *
비는 하루 종일 왔다. 오피스텔에 들어온 황 대표의 머리카락, 어깨, 구두가 조금씩 젖어 있었다. 씻고 나온 황 대표가 다른 말 없이 버들의 팔을 붙잡고선 소파로 데려갔다. 미팅이 꼬여 잠깐 짬이 나서 들른 거라 금방 나가 봐야 하는데, 게으름을 피우고 싶게끔 마음이 푹 놓아진다.
목덜미에 코를 파묻자 날씨 탓인지 버들의 피부가 서늘하게 느껴진다. 황 대표가 버들의 머리카락 끝이 젖어 있는 걸 손끝으로 건드렸다. 어제였다. 창문을 열었는데 구름이 곱슬곱슬한 모양이기에 곱슬머리인 버들이 무심코 떠올랐었다.
“비 맞았어?”
“씻었어요.”
같은 샴푸나 비누를 쓰고 있지만, 버들의 몸에서 끼치는 향들은 색다르게 느껴진다. 이건 시골에서부터 쭉 이어진 의문이었다. 버들이 들려주는, 특별하지 않은 일상을 눈을 감고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무슨 책을 읽었고, 수업 중에 지우개를 세 번이나 잃어버렸는데 세 번 전부 찾게 됐고.
계산기를 두드릴 가치조차 없다. 황 대표 입장에선 재미도 없고, 들어 봤자 어디다 쓸 수 있는 정보 따위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알거리는 버들의 수다를 가로막지 않았다. 하루에 한 일들 중 먹는 건 꼭 빠져 있다.
“밥은.”
“저 피자 먹었어요. 정민이랑.”
만져지는 허벅지가 마냥 가느다랗다.
“너 살 빠졌어. 알아?”
빗소리마저 차단된 공간에서 꼴깍꼴깍, 버들이 침 넘기는 소리가 여실히 들려왔다.
“대표님 주무실 거예요?”
“말 돌리지 말고.”
“…….”
“너 끼니 잘 챙겨 먹어. 죽 같은 거.”
그놈의 죽. 진짜. 버들이 아랫입술을 살짝 비틀어 깨물었다가 놓았다. 사방이 고요해졌다. 황 대표의 무릎에 앉아 있던 버들이 가만히 시선을 내렸다. 입술과 턱을 지나 목젖으로 천천히 향한 까만 눈동자가 일자로 퍼진 황 대표의 어깨를 따라 움직였다. 참 넓다.
“대표님…….”
자수 ‘H’를 손수 새긴 손수건을 선물할까, 말까 갈등에 빠졌다. 이내 버들이 갈등을 접었다. 어디 가서 당당히 꺼낼 수조차 없을 만큼 손수건에 새겨진 자수가 엉망이었던지라 황 대표가 전혀 기뻐하지 않을 게 빤히 예상됐다. 이기심을 부려 노력이라든가, 정성이라든가 알아 달라며 억지로 황 대표의 손에 손수건을 쥐여 줄 수도 있었지만 버들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미 멋들어지게 새겨진 ‘H’ 자수가 수첩에도, 머플러에도 있었다. 비교되는 건 싫었다.
“대표님. 비 오는 날에는 부침개…….”
“조용히 해라.”
뜻이야 어쨌든. 나지막하게 울린 황 대표의 목소리가 충분히 설레었다.
“대표님. 오늘은 언제 나가세요? 저 이따가 나가 봐야 해서요.”
“집 말고 다른 데 간다는 거야?”
“밥 사 줬더니 정민이가 빚지는 거 싫다고 술 산다고 해서요.”
“……술 마시러, 지금 나가겠다고?”
“지금 나간다는 게 아니라, 나중에요. 대표님 나갈 때 맞춰서 나갈 거예요.”
한 템포 늦게 황 대표가 대꾸했다.
“내가 언제 나갈 줄 알고.”
“언제 나가실 거예요?”
“안 나가. 오늘.”
미팅을 꼬이게 한 건 상대측의 실수였으니, 취소시켜도 손해 볼 게 없었다. 버들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안 나가요? 그럼 계속 여기에 있어요?”
“어.”
“밤새도록?”
버들을 황 대표가 끌어안았다. 시골에서처럼 오랫동안 황 대표와 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건가? 버들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대표님!”
달뜬 버들의 얼굴을 황 대표가 마주 봤다. 자신이 여기에 있겠다고 분명히 밝힌 이상 다른 사람과 한 약속 따윈 뒤집고 버들이 껌 딱지처럼 여기에 눌러 있을 거란 건 안 봐도 뻔했다. 참 쉽다. 도톰한 버들의 입술이 열렸다. 기껏해야 또 부침개 타령이나 할 줄 알았다.
“그럼, 저랑…… 술 마실래요?”
우산을 쓰고 나갔다. 앞서 걷는 황 대표의 뒤를 버들이 졸졸 따라 걸었다. 한눈팔지 않았다. 오히려 황 대표에게만 집중한 탓에 코앞의 물웅덩이를 보지 못했다. 철퍽, 밟았다. 황 대표가 힐긋 버들을 쳐다보고선 인상을 찌푸렸다. 버들의 신발이건 옷이건 전부 젖어 버렸다. 그 따위야 아무렴 버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시골에서 황 대표와 함께 산책했던 길과 날씨, 습도, 바람의 세기 같은. 한여름의 중심들이 갑작스레 범람했다. 전부 좋았던 기억들뿐이다. 버들이 감상에 폭 빠져 허우적거렸다. 도시의 아스팔트엔 흙바닥인 시골에서처럼 황 대표가 무서워하는 지렁이가 없었다.
노란색 장바구니를 들고 마트를 누비는 버들의 뒤를 황 대표가 느른한 걸음으로 따라다녔다. 우유나 술이나 과자나 버들이 뭘 집든 유통기한을 깐깐하게 체크하면서. 버들이 괜찮다며 극구 말려도 황 대표가 카드를 내밀었다. 다시 우산을 쓰고 같은 곳으로 돌아왔다.
갈아입을 옷이 없어 빗물에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어야 했지만 버들은 찝찝함을 일절 느낄 새가 없었다. 주변이 흑백으로 물들어 가면서, 소음이 차단되면서. 제 세상에는 황 대표, 딱 한 명만이 존재하게 된다. 식탁에 나란히 앉았다. 꽃봉오리처럼 들뜬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부풀어 오른다.
캔 맥주를 따자마자 바깥으로 확 치솟은 거품을 버들이 얼른 입술부터 가져가 흡입했다. 꼴통 짓 하는 꼴통을 보며 황 대표가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한숨에는 설핏 한심함이 담겼다. 대체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것인지. 피곤함이 번지면서 문득 땅바닥에 내다 버리고 있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
“이거 마셔.”
버들의 손에서 맥주 캔을 빼앗은 뒤 황 대표가 잔을 쥐여 주었다. 황 대표가 가볍게 마실 수 있는 샴페인을 꺼내 와 따라 줬다. 버들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 대표가 턱을 괴었다. 따라 주는 대로 족족 들이켜는 버들의 모습에 기가 막혔다.
“너 진짜.”
심기가 거슬렸다.
“술 그렇게 마시지 말라고 했잖아.”
“오늘은, 취하고 싶은데요?”
황 대표가 웃어 버렸다. 진지하면서, 침울하게 내뱉은 버들의 말이 같잖았다.
“언제는 안 취할 정도로 마셨고?”
“저 원래 그렇게 술 많이 안 마셔요. 시골에서만 그런 건데…….”
주량이 센 건 아니었다. 취기가 올라 버들의 귓불까지 빨개지는 게 순식간이다. 급하게 또 잔을 들고 고개부터 직각으로 꺾으려는 버들의 팔을 황 대표가 인상을 쓴 채 붙잡았다. 눈자위가 벌겋다. 황 대표가 구부린 손가락으로 버들의 뺨을 스치듯 매만졌다. 부드럽다.
“너 못생겼어.”
황 대표의 힐난에 버들의 기다란 속눈썹이 축 가라앉았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 네가 제일 못생겼어.”
“……저 예쁘다는 말 들어 본 적 있어요.”
“누가 너 예쁘대?”
“잘생겼다고도 했는데…….”
“그러니까. 누가 너보고 예쁘고 잘생겼대?”
“…….”
매몰찬 추궁에 버들이 애꿎게 아랫입술만 자근자근 물었다.
“너 예쁘고 잘생겼다고 말해 준 사람들이 누구야.”
식탁 위에 널브러진 버들의 노트와 필통을 황 대표가 끌어왔다.
“이름 적어.”
버들이 순순히 연필을 꺼내 들었다. 가장 첫 번째 줄에 ‘유겨울’ 이름이 적혔다.
“너 못생겼어. 너한테 예쁘다, 잘생겼다 해 주는 사람들이 진심이겠어? 사기 치는 거니까, 앞으로 상종도 해 주지 마.”
진짜로 기분이 상해 버린 버들이 눈을 느릿느릿 감았다가 떴다. 저녁이 깊어진다. 황 대표가 버들의 얼굴을 감싼 뒤 살짝 들어 올렸다.
“웃어 봐.”
가라면 가고, 기라면 기고, 오라면 오고. 그것도 모자라 멍청한 게 웃으라니까 또 웃는다. 물론 억지로 웃는 거라 버들의 눈꺼풀이 바들바들 떨렸다. 반달로 휙 휘어진 눈 밑 아래 도톰하게 올라온 살을 황 대표가 만져 보았다. 만지면 어떨지 늘 궁금했다. 손끝에 버들의 속눈썹이 걸렸다.
“대표님. 예전에 생각나요?”
“예전, 뭐.”
“막걸리 마셨었잖아요.”
황 대표가 인상을 구겼다.
“그때…… 대표님, 가둘까 했거든요. 아무도 못 보게.”
“아무도 못 보게 가둔다고 내가 가둬지겠어?”
“가능했어요. 막걸리 마시면서 대표님 잠드셨잖아요. 그래서 리어카에 대표님 태워서 집까지 데려갔었는데……. 제가 혼자 못 미니까 다른 분들이 도와주셨어요.”
기억은 안 나지만 두 발로 집에 잘 걸어온 줄 알았다. 차라리 몰랐어도 됐을 법한, 사라진 기억을 알게 되면서 황 대표의 인상이 한층 더 짙어졌다.
“리어카에 대표님 타 계셨으니까, 어떻게든 끌어서 아무도 못 보는 데 가둬 버리고 싶었는데…….”
진심으로 아쉽단 듯 버들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거 범죄야.”
“알아요.”
“나 가둬서 뭐 하게.”
“키스나 하게요.”
곧장 돌아온 대답이 골 때린다. 고작 키스 따위나 하려고 감방 갈 궁리를 하는 게 역시나 꼴통답다. 헛웃음을 켠 황 대표의 입가가 곡선을 그리며 유해졌다. 버들의 뒷덜미를 황 대표가 커다란 손으로 감쌌다. 입술이 스며들 듯 포개졌다. 자극에 버들의 발바닥이 안쪽으로 말려 주름졌다. 황 대표가 좀 더, 적극적으로 파고들었다. 여린 혀끝이 은밀하게 얽혔다. 체온이 상승한 탓에 버들의 입안 점막 구석구석이 뜨겁다.
벌써 몇 번째이건만. 키스 도중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하는지 버들은 아직까지도 요령을 찾지 못했다. 나른하게 황 대표가 고개 각도를 바꾸면서 숨 쉴 기회를 줬다. 부족한 산소를 채우느라 들썩거리는 버들의 어깨가 애처롭다.
키스 후 여운이 각자 남았다. 황 대표가 버들의 눈 아래에 짧게 입 맞췄다.
버들의 잔에 황 대표가 더 이상 술을 따라 주지 않았다.
“대표님. ……좋아해요.”
그래. 너 요즘 왜 그 말 안 하나 했다. 황 대표가 코로 웃었다.
황 대표의 팔을 붙잡은 버들이 제 가슴팍으로 가져갔다. 멈춰 버리면 소용없으니까, 팔딱거리는 제 심장 소리를 기회가 있을 때 원 없이 들려주는 게 새로운 소원이 됐다. 황 대표의 한쪽 눈썹이 쭉 위로 올라갔다.
“뭐. 너 이거 술 마셔서 그런 거잖아.”
“……술 안 마셔도 똑같은데.”
버들의 손을 뿌리친 황 대표가 핸드폰을 가져왔다.
“집에 전화해. 못 들어간다고.”
“……네?”
“술 마셔서 너 못 데려다줘.”
“…….”
버들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릴 뿐이다.
“그럼 저 어디서 자요?”
“여기서.”
“대표님도 여기서 주무세요?”
“빨리 전화하기나 해. 시간 늦었잖아.”
“……저 갈아입을 옷 없는데. 이 옷 입고 자면 불편해서요.”
“내 옷 벗어 줄게.”
눈앞에서 황 대표가 셔츠를 벗어 버들에게 건넸다. 황 대표의 골격과 근육들이 황홀하다. 옷을 제게 양보했으니, 이제 황 대표는 날이 새도록 저렇게 있어야 한다. 목이 마르는 기분을 느끼며 버들이 황 대표의 셔츠를 묵묵히 받아 들었다. 심호흡인지 한숨인지. 길게 내쉬어진 숨의 정체가 헷갈린다.
“형. 나야.”
술 약속이 있는지 빤히 알기에, 어디냐고 묻는 대신 지금 데리러 가면 되는지 겨울이 물었다.
“형. 있잖아. 나 지금 술을 많이 마셔서. 집에 못 가. 왜냐면, 아. 친구가 군대 가는데, 어……. 자취방에서 하룻밤만 자자고.”
황당함을 뛰어넘었다. 횡설수설하는 버들의 말에 황 대표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저 쌍놈의 새끼가. 집에 못 들어간다고 전화하라고 했지 누가 거짓말 치라고 했나. 버들의 손에서 황 대표가 핸드폰을 가져갔다. 제 목소리를 듣자마자 유 대표가 잠시 침묵했다.
“버들 씨 나랑 있어. 아침에 데려다줄게.”
-어디야. 내가 지금 데리러 가면 되니까.
“여기에 있겠다잖아. 버들 씨가.”
귀찮다는 어투로 황 대표가 이어 입을 열었다.
“머리 감겨 주고, 말려 준 게 걱정이야? 왜. 반대로 머리카락 뽑았으면 그건 괜찮고? 손 다쳤단 말은 안 하던? 그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베푼 친절이야. 친구 동생이라서 나도 챙겼던 거지 아니었으면 무시했어. 너 알게 모르게 헛생각하는 거, 내 입장에선 불쾌해. 그러기엔 내가 너무 여자에 환장하지 않냐?”
따지고 보면 전부 맞는 말이었다. 머리카락을 뽑았으면 문제지, 할 일 없어서도 아니고 손을 다쳐 어쩔 수 없이 머리를 감겨 주고 말려 준 거라면……. 일단 다른 것보단, 고작 하루 외박하기 위해서 제 새끼가 저한테 거짓말 한 게 가장 걸렸다. 핸드폰 건너편에서 겨울이 한숨을 내쉬었다.
황 대표가 도로 버들에게 핸드폰을 돌려줬다.
“……응. 내일 봐.”
유 대표와 몇 마디 더 주고받더니, 버들이 전화를 끊었다.
“씻고 나와.”
버들이 고분고분 말을 들었다. 샤워 후, 버들이 황 대표의 셔츠만 걸쳤다. 체온이 절로 달뜬다. 이어 황 대표가 씻고 나왔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겼다. 소파에 비스듬히 고개를 기운 채 잠들어 있는 버들을 황 대표가 물끄러미 응시했다. 버들의 벌어진 다리 틈새로 속이 보일 듯 말 듯 한다. 불을 껐다. 어디선가 갑자기 짜증이 몰려왔다. 황 대표가 버들을 안아 무릎 위에 앉혔다. 어설프게 잠들었던 터라 버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뜨였다.
“대표님…….”
황 대표가 버들의 엉덩이를 제 몸과 바짝 밀착하게끔 안았다. 버들이 콧등으로 앓았다. 빠르게 펄떡거리는 심장은 거의 본능이었다.
“대표님, 우리 오늘은 바닥에서 잘래요?”
“나 바닥에서 자 본 적 없어.”
“막걸리 드셨던 날, 바닥에서 잘 주무시던데…….”
침대에 있는 이불을 버들이 펼치면서 이리 휘청, 저리 휘청거렸다. 발라당 눕는 꼴이 가관이다.
“대표님. 베개 쓰세요.”
“어차피 그 베개 네 거 아니잖아.”
어이가 없다. 버들이 새근거리면서 또 금방 곯아 빠졌다. 허벅지 위를 지그시 누르는 무게와 따끈따끈하게 느껴지는 체온이 없으니 허전하다. 그건 버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채워지는 게 아니었다. 순전히 수면욕을 채우기 위해, 하는 수 없이 황 대표가 버들의 옆에 누웠다. 천장을 올려다보는데 불쑥 신경질이 돋는다.
버들의 마른 등짝을 황 대표가 발로 쭉 밀어 버렸다. 덕분에 버들의 몸은 이불을 벗어나 맨바닥행이다. 저만치 거리를 뚝 떼어 놓기를 잠시. 잠버릇 심한 버들이 이내 데굴데굴 제 쪽으로 굴러 왔다. 한 손으로 얼굴을 받친 뒤 몸을 옆으로 한 황 대표가 제 옆구리를 파고들려 열심히 꼬물거리는 버들을 가만히 지켜봤다.
다른 사람, 더 정확히는 ‘다른 남자’를 떠올려 봤다. 가까운 사이인 유 대표와 이렇게 잠들 수 있나? 키스할 수 있나? 포옹할 수 있나? 제 자신을 향해 여러 개 던져 본 물음표에 공통적으로 험악한 욕설이 튀어 나갔다. 결국엔 사내놈이면서 이렇게 잠들 수 있는 것도, 키스할 수 있는 것도, 포옹할 수 있는 것도 딱 한 명뿐이다. 뒤집혀 버린 제 세상을 무조건 함구할 예정이다. 그런 제 곁에서 버들이 애가 타다 못해 까맣게 재가 되어 버릴지언정.
황 대표가 버들을 제 위로 올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대표님…….”
대표님, 하는 호칭은 버들의 입을 통해 자주 불리는 만큼 정말 빛바랜 사진처럼 닳게 생겼다. 아예 정신을 잃을 정도로 취하거나.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취하거나. 역시나 다른 데서 술은 못 마시게 해야겠다. 아니면…… 진짜 나야말로 아무도 못 보는 곳에 버들을 가둬 버리든가. 그런 영양가 없는 다짐과 생각을 반복하며, 황 대표가 버들의 머리를 느른하게 쓰다듬었다. 버들의 몸이 움찔거렸다.
“유버들.”
대답하지 않고 버들이 하던 걸 계속했다. 버들이 황 대표의 가슴을 애무했다. 황 대표가 제게 느끼게 해 주었던 간지러움을 떠올리며, 그렇게 혀를 썼다. 유륜 전체를 핥고, 혀끝으로 슬며시 유두를 짓이겼다.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머리 위로 황 대표가 웃는 게 느껴졌다. 버들이 황 대표를 빤히 쳐다봤다.
“왜. 다 했어?”
버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덜 했어?”
순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버들이 제 입술을 황 대표의 가슴팍 사이로 묻었다. 제 크고 소중한 황 대표님이 혹여나 다치면 안 되니까, 버들의 입맞춤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차근차근 위로 향해 올라갔다. 쇄골을 빨았다. 목덜미를 타고 오른 버들이 황 대표의 귓불을 불쑥 물었다. 귀는 황 대표의 성감대였다. 인상을 쓴 황 대표가 쓰다듬고 있던 버들의 뒷머리를 확 잡아당겨 저한테서 떼어 냈다. 시선이 부딪혔다. 눈 깜박이는 속도가 엇박자였다. 버들이 눈을 떴을 땐 황 대표가 그 속에 가둬지고, 황 대표가 눈을 떴을 땐 버들이 그 속에 가둬졌다. 코끝. 입술. 솜털. 눈썹…….
「너 예쁘고 잘생겼다고 말해 준 사람들이 누구야.」
예쁘고, 잘생겼고. 결국엔 보는 눈은 누구나 똑같단 말이었다.
몸속 어딘가 열이 확 지피면서 충동을 부추겼다. 황 대표는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저가 하고 싶은 대로 했다. 몸 위치가 뒤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천장이 딱 반 바퀴 돌았을 때 버들은 제 위에 있는 황 대표를 올려다봐야 했다.
“……아.”
진하고 짙게, 황 대표가 버들의 허리 부근을 빨며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선뜻하게 번개가 내려쳐진 감각에 놀란 버들이 발뒤꿈치로 바닥을 밀며 피하려고 했지만, 황 대표의 무게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물기 그득한 안개 속에 꼼짝없이 갇혀 버린 것 같다. 팔 안쪽, 오금 온통 젖는 기분이다.
손 안에 들어온 버들의 몸을 황 대표가 주물렀다. 점점 힘을 받아 윤곽이 선명해졌다. 달궈진 버들의 신음이 황 대표의 귓가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솜사탕이 따로 없다. 뭘 제대로 한 것도 없는데 버들이 혼자만 성급히 정상으로 도달해 버렸다. 동백처럼 붉은 버들의 귀두에서 왈칵, 액이 쏟아졌다.
일순 모든 시간이 멎었다.
희미하게 풍기는 냄새는 같은 남자이기 때문에 익숙했다. 갑작스러웠던 한 번의 사정에 모든 기력이 쇠해 버린 버들의 호흡이 가빠졌다. 둥글게 몸을 웅크렸다. 이마 위로 앞머리가 잔뜩 헝클어졌다.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이 위태로울 정도다. 그런 버들을 내버려 두고 황 대표가 욕실로 들어갔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희뿌연 액이 거미줄처럼 얽힌 채였다. 거칠게 욕을 짓씹었다. 닦아 내지 않은 그 손으로 황 대표가 수음했다.
비 때문인지 달도 뜨지 않은 밤이었다.
* * *
학교가 끝나는 대로 버들이 오피스텔로 향했다. 품엔 샛노란 해바라기가 다발로 안겨 있었다. 기억은 취기와 별개로 생생하게 남은 채였다. 서둘러 비밀번호를 누르느라 두 번이나 틀렸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버들이 굳이 바깥에서 서성거렸다. 까짓것. 심한 욕을 얻어먹거나 하물며 손목이 산산이 박살이 나더라도 상관없다. 좋아한다고 백 번을 말해도 모자랄 것 같다. 풍선처럼 기분이 붕 뜬다. 노을이 질 동안, 기다림은 꾸준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오셨다!”
쪼그려 앉아 있던 버들이 벌떡 일어났다. 전혀 지치지 않은 기색이었다.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 나가려던 버들의 걸음이 묶였다. 찬물을 뿌린 것처럼 표정이 싹 굳어졌다. 버들이 해바라기를 제 등 뒤에 감췄다. 빠끔히 튀어나온 샛노란 꽃잎을 보고도 황 대표는 딱히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나가려는 길이야?”
인사도 없이 황 대표가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가 봐.”
황 대표의 옆에 여자가 서 있었다. 화려한 미인상이었다. 누구냐고 제게 황 대표가 설명해 주지 않았다. 손끝까지 따끔했다.
“뭐야.”
“뭐가.”
“여기에 외부인 안 들였잖아.”
“외부인은 아니고, 유 대표 막냇동생.”
“아. 그래?”
벌어진 문틈으로 얼핏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왔다.
“와인 마실 거지?”
황 대표의 목소리를 끝으로 문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