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굽이치는 밤 (2)
하늘을 찢을 것처럼 내리친 천둥번개에 고막이 먹먹하다. 사납고 자비롭지 못한 날씨였다. 비바람에 무너지고 빗줄기에 가루가 되어 버리진 않을까, 그 정도로 버들이 위태로워 보였다. 서둘러 황 대표가 입고 있는 제 재킷을 벗어 버들의 어깨에 둘렀다. 미쳤나 보다. 어차피 제 꼴도 비를 맞아 온통 젖어 버린 뒤였다. 당장 옷 전부를 벗어 준다고 한들 버들의 체온에는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
황 대표가 팔을 뻗었다. 그게 무슨 신호처럼, 축 늘어져 버린 버들의 몸뚱이를 얼른 품 안에 받았다. 주변으로 흐릿하게 물안개가 피었다.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버들의 몸에 황 대표의 턱 근육에도 딱딱하게 힘이 들어갔다. 서둘러 안아 든 버들을 차에 데려가 옆자리에 앉힌 다음 안전벨트까지 대신 채웠다. 다른 사정 설명 없이 기사를 불러 주겠다고 중간에 내리게 한 혜주에게서 연락이 들어왔지만 무시했다. 히터를 올렸다. 쉴 틈 없이 차를 두드리며 쏟아지는 빗소리가 둘이 되면서 오히려 아득하게 멀어진다.
황 대표가 버들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잠잠히 감겨 있는 긴 속눈썹이 축축하다. 빗물과 함께 묻어 있을 눈물을 황 대표가 큰 손으로 닦아 냈다. 벌어진 입술 틈새로 새어 나온 버들의 한숨에는 못 다 운 서러움이 섞여 있었다.
오른쪽 골목 세 번, 왼쪽 골목 두 번. 버들이 알려준 대로 핸들을 꺾자 이번에도 쉽게 도로로 나올 수 있었다. 빗길이라 어수선하다. 좀처럼 속도를 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버들아.”
“…….”
“유버들.”
“…….”
한쪽으로 기울어진 버들의 고개가 힘이 없다. 처음엔 지쳐서 잠이 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가빠진 버들의 숨소리가 금방 끊어질 것처럼 가느다랗다. 신호에 걸린 틈을 타 황 대표가 버들의 이마를 짚었다. 열이 펄펄 끓고 있다. 황 대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 집으로 가려는 방향을 틀어 향한 곳은 병원이었다.
침대에 옮겨져 누운 버들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황 대표가 유 대표에게 연락을 넣었다. 한 시간도 채 못 되어서 입구 쪽이 시끄러워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대로 정장을 갖춰 입은 유 대표가 곧장 제 막냇동생에게 뛰어왔다. 침대 가까이 붙어 있던 황 대표가 그런 유 대표를 위해 뒤로 물러나려던 순간이었다. 어느 틈에 제 옷자락을 쥐고 있었던 건지 버들의 푸른 손등이 툭 떨어졌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버들의 첫 번째는 황 대표였다.
버들의 마른 몸뚱이를 유 대표가 말없이 부둥켜안았다.
“버들아, 자?”
다정함을 담아 재차 불리는 제 이름을 현재 버들은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유 대표와 버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황 대표의 눈매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깊어졌다. 자기 동생이 왜 이만큼 비를 맞고 쓰러져 있는지 유 대표가 그 이유부터 물어 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떠한 것도 묻지 않은 상황에서, 병실에 누워 있는 버들을 보살피는 유 대표의 태도가 능숙하다. 링거를 제거하게끔 의사를 호출하려는 유 대표의 앞을 황 대표가 불쑥 가로막았다.
“무슨 짓이야.”
“다니는 병원이 있어.”
“열이 높아. 옮길 거면 나중에 옮겨.”
냉철한 성격 그대로 나은 제안을 건넨 황 대표를 향해 유 대표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거친 욕설이 채 튀어나오지 못하고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차분했던 목소리 톤과 달리 황 대표의 얼굴이 사색이었다. 드문 일이었다.
“가서 너 물기나 닦아.”
유 대표가 황 대표를 외면했다. 뒤에 서 있던 비서가 곤란한 얼굴로 다가와 황 대표에게 일정을 보고했다. 유 대표의 반듯한 차림은 곧 있을 행사 때문이었다. 형식적이긴 하나 대표가 빠지면 안 되는 자리였다. 업무적인 대화가 오고 가지 않았지만 두 대표가 현재 각자 해야 할 일이 어떤 건지 판단이 끝난 뒤였다. 비서의 재촉에 황 대표가 고개를 끄덕이고선 병실 밖을 따라 나갔다. 유 대표 대신 지금부터 씻고 준비하여 행사장에 가려면 시간이 촉박했다.
이마 위에 엉망으로 달라붙어 있는 버들의 앞머리를 겨울이 넘겨줬다. 불과 몇 시간 전이다. 어딜 가는지, 누굴 만나는지. 여러 번 물어도 깍쟁이처럼 버들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잔뜩 신이 나서 외출하던 제 막냇동생과 현재 열에 취해 있는 모습이 겹쳐지면서 마음이 미어질 대로 미어졌다. 링거 속의 약이 반쯤 줄었다. 그 덕택인지 버들의 열이 아주 살짝 내려갔다. 더 이상 미룰 순 없었다. 겨울이 직접 버들을 업었다. 미리 대기시켜 놓은 차를 타고 버들의 주치의가 있는 병원으로 옮기자마자 징글징글한 검사가 이어졌다.
결과 내용을 듣고 나온 겨울이 어두컴컴한 복도에 앉아 한참 울었다.
* * *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나온 버들이 곧장 침대에 올랐다. 슬리퍼가 저만치 나뒹굴었다. 버들의 관심은 오로지 씻기 전까지 보고 있던 신문에 꽂혔다. 미처 닦지 못한 물기가 팔꿈치에 남아 있었던 건지 신문이 젖다 못해 찢어졌다. 축 처진 눈썹으로 아쉬워하던 버들이 다시 살아났다. 다행히 낱말 퀴즈 부분은 비껴갔다.
“형. 겨울이 형.”
“뭐, 인마.”
“정답이 뭔지 알겠어?”
“문제가 뭐였지?”
“뭐야. 내가 씻고 올 동안 정답 생각해 놓고 있으랬잖아.”
제 머리를 꼼꼼하게 드라이어로 말려 주는 겨울을 향해 버들이 온갖 잔소리를 퍼부었다. 묻는 말에 대답만큼은 성실히 즉각 해 오나 영 시원치 않다. “몰라.”, 아니면 “그런 게 있어?” 하는 수준이니. 어려운 난이도의 수도와 역사에 관한 문제를 척척 풀어 놓고선 버들이 하나 남은 낱말 퀴즈 칸을 벌써 몇 시간째 비워 두고 있었다.
“형. 하마가 하품하는 이유가 뭔지 진짜 모르겠어?”
“하마 나부랭이 그게 뭐라고 너 아까부터 형을 들들 볶아?”
“아. 왜 하품하는 거야, 얘네?”
“넌 하품 왜 하는데.”
“하마는 왜 하품하는 거지?”
“아. 새끼, 진짜. 그거 풀지 마. 신문 또 찾아다 줄게.”
“하마가 하품하는 이유도 모르면서 어떻게 회사의 대표가 될 수 있어?”
얄밉게 구는 버들을 엎어 놓고 간지럼을 태우려는데 노크 후 간호사가 들어왔다. 간호사의 도움으로 버들이 낱말 퀴즈 빈칸을 전부 채울 수가 있었다. 시골에서 돌아오기 전, 전부 버려질 예정이었던 황 대표의 물건들 중 허락 맡고 겨우 하나 챙겨 올 수 있었던 볼펜으로 버들이 조그맣게 낙서를 끼적거렸다. 젖어 있는 신문 부분에 펜 끝이 닿자 잉크가 사르륵 번졌다.
“괜찮아?”
“괜찮다고 아까 의사도 그러던데?”
“네가 말해 봐.”
“괜찮아.”
혹시나 폐렴으로 이어지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렇진 않았다. 꼬박 일주일간 입원하고 나서야 버들이 더는 새벽에 오한과 고열로 시달리지 않게 됐다. 가끔 잔기침을 하는 게 전부다. 처음 약속했던 대로 겨울이 퇴원 수속을 밟았다. 괜한 근심을 키울까 버들의 의지대로 이번 입원은 가족들 전부에게 알리지 않았다. 집을 비워야 하는 까닭으로 여행을 들먹거렸다. 장 여사와 유 회장은 겨울이 옆구리에 끼고 경치 좋은 곳으로 여행 간 줄 아는 막둥이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버들이 거울 앞에서 길게 시간을 보냈다. 신경 써서 머리를 빗어 보지만 뭐가 문제인지 계속 푸석한 인상이다. 그런 버들을 보며 겨울이 침대를 굴러다녔다. 생긴 게 너무 눈부시다면서. 다이아몬드인 줄 알았다면서 꼴값을 떨어 댔다. 언제 철들 건지. 버들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지만 그런 제 형이 버들은 창피했다.
“업어 줄게.”
“됐어.”
“왜? 형이 업어 줄게.”
“됐다니까.”
잠깐 한눈판 사이 버들의 신발을 겨울이 숨겨 놨다. 두 형제가 티격태격했다.
“진짜 유치하다.”
“째려보든가, 욕하든가 둘 중에 하나만 해라.”
“저리 가.”
겨울의 어깨를 밀치고 버들이 앞서 나갔다. 내 새끼. 성격 더러운 것 좀 봐. 업어 준다는 친절을 끝까지 마다하고 보란 듯 맨발로 성큼성큼 앞서 걸어가는 버들의 뒷모습을 겨울이 흘겼다. 그쪽으로 빠르게 다가가 버들의 가랑이 사이에 다짜고짜 고개를 쑥 집어넣은 겨울이 허리를 폈다. 예고 없이 목마를 타게 된 버들이 휘청거렸다. 놀란 버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높아진 시야가 생소하다. 이내 웃음이 났다. 겨울이 걸을 때마다 몸이 흔들거린다. 무게 중심을 잡느라 움켜쥔 제 형의 머리털을 버들이 죄다 뽑아 놓았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진 밥상으로 버들은 환영을 받았다. 장 여사와 유 회장의 사이에 끼어 최선을 다해 오순도순 오전을 보낸 버들이 겨울이 부르는 대로 쪼르르 2층 계단을 밟았다. 드레스 룸이 잔뜩 헤집어져 있다. 어떤 걸 챙겨 갈 건지 겨울이 묻자, 오물거리는가 싶던 버들의 입술이 꾹 다물려 버렸다. 어떤 걸 챙겨 갈 건지 그동안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모르겠다. 새 옷들이 수북하다.
“형. 뭐 가질래? 줄게.”
“네 물건을 줄 테니까 나보고 가지란 거야?”
“응. 갖고 싶은 거 없어?”
“다 내 돈으로 산 거잖아.”
“아니야. 이건 유 이사님이 사 줬고. 이건 둘째 형이 사 준 거고…….”
“돈 쓰는 걸로는 넷째 형이 최고라고 지금 당장 말해.”
겨울이 버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뒷다리를 걸었다. 안 넘어지기 위해 버들이 제 형의 모가지에 두 팔을 걸고 대롱대롱 매달렸다. 같이 버둥거리면서 두 형제가 웃고 난리가 났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밝아 보이는 제 막냇동생을 보며 겨울은 몇 번이나 안도를 하는 중이었다. 묻고 싶은 몇 가지의 말을 덮어 두기로 했다. 떠나면 어차피 잊힐 기억들이다.
“신발부터 챙길까?”
“신발? 아니. 그냥 옷 몇 개면 될 거 같아.”
“겨우?”
“긴팔 하나랑 반팔 하나면 되지 않을까?”
버들이 옷을 골랐다.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던 겨울이 납득했다.
“아. 하긴. 다 챙겨 갈 필요가 없지. 거기 가서 새로 사 줄게.”
버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 하러 그래. 옷 필요 없어.”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버들이 능청 떠는 제 형을 나무랐다.
“그럼 홀딱 벗고 메리와 리처드와 샘을 유혹하고 다닐 셈이야?”
겨울이 옷더미를 버들에게 내밀었다.
“이거 예쁘다. 우선 이건 꼭 챙기고.”
“형. 옷 많이 가져갈 필요 없어. 새거 사지도 마.”
“뼈 빠지게 일해 번 돈으로 형이 마음대로 쓴다는데 왜 네가 난리야?”
“거기 가면 어차피 환자복만 입을 거잖아.”
“…….”
바닥에 주저앉아 옷을 개키던 겨울의 손이 멈칫했다.
“나 잠깐만.”
드레스 룸을 나온 버들이 제 방으로 들어가 침대 아래에서 박스를 꺼냈다. 그 안에 넣어 둔 것은 황 대표에게 받은 색연필이었다. 버들의 손이 그걸 소중하게 매만졌다. 이거 가져가도 되는 걸까. ……돌려줘야 하나? 색연필이 핑계가 되자 그간 꾹꾹 억눌러 왔던 마음이 터져 버린다. 보고 싶어. 버들이 색연필을 제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러고는 가족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유 회장님!”
버들이 뭔가를 꺼내 왔다.
“이거 저 가져도 돼요?”
* * *
햇볕이 따가울 정도로 맑은 날씨였다. 파란 물감을 쏟아부은 것처럼 하늘이 기가 막히다. 답답하게 옥죄고 있던 넥타이를 풀면서 집에 돌아온 황 대표가 차 키를 아무 데나 던져 놓았다. 차가운 물을 아무리 들이켜도 속이 진정되지 않는다. 씻고 나온 황 대표가 침대를 지나쳤다. 미약하게 두통이 느껴졌다. 소파에 앉은 황 대표가 집안 전체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공허함이 짙어진다.
송곳 끝처럼 날카로워진 신경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었다. 제대로 자지 못한 나날이 벌써 일주일을 꼬박 채웠으니 당연했다. 대외적인 행사에 참석해 모습을 비치는 건 주로 유 대표가 맡아 하는 일이었다. 버들의 입원으로 유 대표의 자리가 공석이었고, 황 대표가 대신해서 스케줄을 처리하는 중이었다. 느릿하게 지나는 밤과 반대로 아침은 이르게 시작되고 있었다.
집안과 얽히고 싶지 않아도, 형식적으로나마 얽혀야 하는 일이 생겼다. 그게 버들이 전시회에 가자는 날과 겹쳤다. 시간을 대강 맞출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혜주와 약혼하게 될 상대의 집안과 만나는 자리가 길어졌다. 어차피 약속 시간은 훌쩍 지나 버렸으니, 버들이 그대로 집에 갔을 줄 알았다. 그래서 다음 일정에 동행해 달란 혜주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인 거다.
큼지막한 버들의 눈에는 원래부터 물기가 가득하게 고여 있던 편이었다. 어떤 모진 말이나 핍박, 괄시를 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등 뒤에서 꿋꿋하게 뿌리내리고 있던 버들이 같잖으면서 또 한편으론 참 독하다 싶어 울려 보고 싶었다. 어디선가 빗소리가 들려오면서 조막만 한 버들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서는 그걸 감추고자 애써 웃음 짓던 노력이 자꾸, 자꾸, 자꾸 목을 막히게 만든다. 그날 다시 차를 돌리지 않았더라면 버들의 서러움은 평생 모르고 지나쳤을 수도 있다.
또 있었을까.
아마, 있었을 거다.
항상 버들에게 먼저 등을 보였었다.
돌아서는 뒷모습에, 멀어지는 자신을 말갛게 주시하며 혼자서 그 큰 눈이 눈물지었던 날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여러 생각들로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오늘도 퇴근이 늦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황 대표가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버들이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뗐다. 서로 가만히 얼굴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대표님.”
버들이 먼저 황 대표를 향해 다가갔다. 뭔가 바닥에 질질 끌리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황 대표가 버들의 얼굴에서 그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버들이 들고 있는 건 골프채였다. 황 대표의 앞까지 잘 걸어가 놓고선 버들이 머뭇거렸다. 한참 뒤에 황 대표에게 리본을 매단 골프채를 슬그머니 내밀었다.
“유 회장님이 쓰시는 거예요. 여기 사인. 제가 받아 왔어요. 이거 갖고 싶어서 전에 물어보신 거 맞죠?”
황 대표의 어떠한 말도 버들은 허투루 넘겨듣는 법이 없었다. 황 대표가 버들의 손목을 잡았다. 왜 전시회 시간에 늦었는지. 둘이서 만나기로 해 놓고선 왜 약속을 어겼는지. 그런 걸 따지거나 화를 낼 줄 알았다.
“식사하셨어요?”
그대로 버들을 황 대표가 끌어안았다. 목구멍이 답답해서 한숨도 채 터지지 않았다. 못 보던 사이 더 말라 버린 등을 쉼 없이 황 대표가 쓰다듬었다. 황 대표의 품에 안겨 있는 버들이 얌전히 눈을 깜박거렸다.
……떨려. 갈비뼈가 아플 만큼 심장이 쿵쾅거린다.
“너 밥 먹었어?”
버들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또 먹어.”
황 대표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버들을 데려갔다. 비서에게 간단하게 문자를 보냈다. 씻고 나온 황 대표가 제자리에서 멎었다. 소파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버들이 손톱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어제까지 공허했던 집 안이 언제 그랬냐는 듯 풍족하게 채워진 기분이 든다. 제 쪽으로 다가오는 황 대표의 기척에 버들이 얼굴을 들고선 눈을 깜박거렸다. 황 대표의 무릎에 버들이 마주 보고 앉기까지. 물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버들의 귓불이 붉어졌다. 황 대표의 시선이 버들의 상태가 괜찮아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집요하게 쫓았다. 긴 한숨을 내쉬고 나서 황 대표가 입을 열었다.
“왜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시간이 늦었으면 가야지.”
부드러운 어투였다. 황 대표의 타박에 아무 말 하지 않고 버들이 그냥 웃었다.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다. 저를 빤히 쳐다보는 황 대표의 눈빛을 버들이 어색해하며 피했다. 그러다가 같이 비 맞았던 걸 떠올렸다. 주춤거리던 버들이 황 대표의 이마에 제 손목을 가져다 댔다. 이마 다음엔 볼과 목. 버들이 저를 만져 볼 동안 황 대표는 눈을 감고 기다려 줬다.
“대표님.”
“……응.”
“아픈 데 없어요?”
황 대표가 고개를 간단히 끄덕였다.
“핸드폰 줘 봐.”
“제 핸드폰이요?”
“응.”
펼쳐진 황 대표의 손바닥에 버들이 순순히 자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화면을 밝히자 의외다. 기본 바탕에 시계가 커다랗게 보일 수 있도록 설정되어 있는 게 전부다. 황 대표의 고운 손가락이 입력한 번호를 버들이 빤히 쳐다봤다.
“누구 번호예요?”
“나.”
“……대표님 번호예요?”
“응.”
이제껏 황 대표의 번호인 줄 알고 있는 숫자를 버들이 외우고 있었다. 황 대표가 직접 입력해 저장시켜 준 번호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버들의 고개가 옅게 갸웃거렸다. 버들의 말랑한 볼을 황 대표가 톡톡 건드렸다. 고개를 들면서 가까이 눈이 마주쳤다. 버들의 눈꼬리가 그믐달처럼 휙 휘어졌다. 동시에 황 대표가 버들을 바짝 껴안았다. 숨을 길게 몰아쉬면서 버들 역시 황 대표의 가슴팍에 제 옆얼굴을 기대었다. 성냥에 지핀 불처럼 느껴진 안정감을 두 사람이 같은 순간에 느꼈다.
“버들아. 아프지 마.”
버들이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유 대표 말이 감기였다며.”
“…….”
“감기건 뭐건 아프지 마.”
“…….”
“너 아프니까 우리 일주일 동안 못 만났잖아.”
“…….”
“음? 유버들.”
황 대표의 채근에 대답 없던 버들이 고개를 살짝 끄덕거렸다.
시간이 흘렀다. 그러면서 황 대표의 호흡이 차차 느려졌다. 드디어 깊숙하게 잠이 든 황 대표와 달리 버들은 눈을 깜박이면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의 비가 가을을 앞당겼는지 그 전과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로 기온이 많이 낮아졌다. 감겨드는 눈을 버들이 억지로 떴다.
의존하면 안 돼.
혼자서 잘 줄 알아야 돼.
기대선 안 돼.
없이 살아야 돼.
몇 시간 뒤, 황 대표가 잠에서 깼다. 비서가 사 온 걸로 식사를 한 뒤 버들을 바래다줬다.
* * *
바람이 쌀쌀하다. 버들이 어깨를 가운데로 모으며 몸을 움츠렸다.
“유학은 어디로 간다고 했지?”
“너 그거 한 번만 더 물어보면 백 번째야.”
“백 번 채울까?”
“됐어. 뉴욕.”
“뉴욕에 가면 너 만날 수 있냐?”
뒷머리를 긁적이며 정민이 물었다.
“뉴욕에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도 바빠. 그냥 해 본 소리야.”
“그냥 해 본 소리?”
“안 간다고. 뉴욕.”
정민이 욕을 하는 대신 허탈하게 웃었다.
“연락처는 그럼, 있는 거지?”
“나한테 연락하려고?”
“박 터지게 공부를 하다가도 가끔 연락받을 틈을 있을 거 아냐.”
“나 연락 잘 안 될걸.”
“야. 나도 국제 전화비 아까워서 연락 같은 거, 안 하려고 했어.”
느닷없는 헤어짐이 익숙한 버들에게 이렇게 누군가를 따로 만나 작별을 하기는 처음이었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 정면을 쳐다봤다.
“양정민!”
같은 체대 선배가 정민을 불렀다. 어쩔 수 없이 정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번호 안 바꿀 거니까 돌아오면 연락해라.”
돌아올 수 있을까. 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민이 운동장 한가운데로 뛰어갔다. 버들이 펼쳐진 경기를 지켜봤다.
* * *
황 대표가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버들이 먼저 와 있었다. 이제 막 세수를 했는지 볼에 물기가 촉촉하다. 손을 진득하게 씻고 나온 황 대표가 버들의 얼굴에 가만가만 로션을 발라 주었다.
“저한테서 대표님 냄새 나요?”
왠지 상기되어 들뜬 버들의 얼굴을 감싸고 황 대표가 짧게 입을 맞추었다.
“너한테서는 네 냄새 나.”
“황 대표님 로션 발랐는데 왜 내 냄새가 나요?”
잔기침을 터트리면서도 버들이 또박또박 말대꾸를 했다.
“뭐 하고 있었어?”
“책 봤어요.”
바닥에 펼쳐진 책이 두 권이다. 요리책, 여행 책.
“오늘 여기서 자고 가도 돼요?”
“유 대표한테 너 다 이른다.”
“저희 형 오늘 출장 간 거 저 다 알아요.”
“…….”
모든 할 일을 끝내고 왔고, 외박한다고 말까지 이미 해 두었단다.
“아무 옷 꺼내서 갈아입어.”
“……아무 옷이나요?”
“응.”
“진짜 아무 옷이나 꺼내 입어도 괜찮아요?”
버들이 재차 확인했다. 황 대표의 드레스 룸에 들어간 버들이 꼭 쇼핑에 온 것처럼 즐거워했다. 편한 옷이 아닌, 황 대표가 주로 업무적으로 출근할 때 입는 정장 셔츠를 골라 꺼내 입었다. 체격 자체가 다르니 남의 옷 빌려 입은 게 여실하다. 폼은 넉넉하고, 기장과 소매가 전부 길다.
와인을 따르다가 말고 황 대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자기도 마시겠다며 와인을 탐내는 버들 때문에 결국 황 대표도 잔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팠던 놈이 무슨 술이야.”
“괜찮아요. 딱 한 잔 마시는 술은 오히려 약이랬어요.”
“누가 그래.”
“스승님이요.”
“전에 시골에 있었을 때?”
“네.”
황 대표가 대놓고 인상을 썼다. 버들에게 한 방울의 술도 허용하지 않았다. 덩달아 황 대표의 음주는 버들이 옷을 갈아입고 나타나기 전 마셨던 와인 한 모금이 전부였다.
무릎에 앉아 재잘재잘, 버들이 떠는 수다가 포근하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 풀었던 낱말 퀴즈를 설명해 주는데 이게 뭐라고 푹 빠져 귀를 기울이게 된다. 황 대표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온화했다.
“대표님.”
“응.”
“아니에요.”
“왜.”
“…….”
버들이 생글생글하다. 그것도 잠시다. 제 허리를 황 대표가 슬쩍 건드리자 버들이 웃음을 삼키고 움찔거렸다.
“간지러운데…….”
버들의 시선이 황 대표의 얼굴을 빤히 주시했다.
“대표님.”
“응.”
“피곤하세요?”
“피곤해 보여?”
“얼굴이 약간, 거칠어 보여서요.”
“……그러니까 왜 오늘 왔어. 어제 건너뛰고.”
버들의 눈꺼풀이 아래로 감겼다.
“대표님. 제가 대표님한테만 말하는 건데요.”
황 대표가 턱을 주억거렸다.
“저…….”
막상 말하려고 하니까 발바닥까지 숫접다. 오랫동안 망설이고 있는 버들을 황 대표는 재촉하지 않았다. 달싹거리는 버들의 입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참 잘 갔다.
“사실은요.”
“응.”
“저는…… 축구 선수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아무에게나 털어놓지 못한 제 비밀이었다.
“……그랬어?”
버들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축구 잘해?”
“못해요.”
축구는 못해도, 제일 예쁜 축구 선수로 소문은 났을 게 분명하다.
“그럼 조각은?”
“조각도 할 거예요.”
“그림도 그릴 거고?”
“네.”
그래. 골 좀 못 넣으면 어때. 제일 예쁘다 못해 조각이랑 그림에 재능 있는 축구 선수로 소문이 났을 거다.
“축구 선수 할 만큼 허벅지에 힘 있어?”
“없을걸요…….”
“…….”
“아예 없는 건 아니고, 조금은 있어요.”
조금은 있단 허벅지 근육을 보여 주기 위해 버들이 무릎을 세워서 일어났다. 눈높이가 달라졌다. 본의 아니었겠지만, 황 대표의 시선 정면에 버들의 가슴이 들어왔다. 못 앉게끔 버들의 허벅지 뒤쪽을 한 팔로 감싸 고정한 뒤, 황 대표가 고개를 가져갔다. 옷을 벗기지 않고도 버들의 젖꼭지가 있는 곳에 정확히 황 대표의 혀가 닿았다. 촉촉해졌다. 절벽 끝에 몰린 것처럼 아찔하다. 제 가슴에 매달려 있는 황 대표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버들이 콧잔등을 찌푸렸다. 얇은 천이 사각거리며 유두를 뭉개는데 자극적이다. 버들의 허벅지 안쪽으로 황 대표가 손을 파고들었다. 연한 살이 주무르는 대로 손자국이 벌겋게 남았다.
황 대표는 버들이 다시 제 무릎 위에 앉게끔 유도했다.
“대표님.”
“응.”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황 대표가 단정하다.
“예전이랑 달라요.”
작게 버들이 말했다.
“응…….”
마찬가지로 작게 황 대표가 대답했다.
“대표님 있잖아요. 이제…… 남자랑 자도 돼요?”
“…….”
“전에는…….”
그래. 전에는 절대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유 대표의 동생인 걸 떠나 버들은 남자였다. 좋아한다고 저에게 고백하는 순간 목소리를 듣는 것도 싫었고, 곁에 다가오는 것도 불쾌했다. 그 초반의 감정과 지금은 버들이 말했던 대로 다르다. 그것도 판이하게. 그러니 세상이 뒤집혔다고 볼 수 있다.
“아무 남자하고는 안 자.”
“그럼요?”
“내가 남자 경험이 처음이라 기준치가 높아서.”
발그레한 볼로 버들이 긴장했다.
“대표님 성에 차는 남자는 어떤 남자인데요?”
“백마 탄 왕자 정도는 되어야지.”
유치한 황 대표의 말에 버들이 심각해졌다. 황 대표의 눈가가 나른하게 풀렸다. 버들이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다. 백 번 생각해도 저는 백마 탄 왕자가 아닌 모양이었다. 일말의 기대감에 반짝거렸던 버들이 시들었다. 불퉁하게 입술은 튀어나오고, 눈꼬리는 처지고. 그런 버들의 표정을 황 대표가 무심코 따라 했다.
셔츠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움푹 파인 버들의 등허리를 지분거렸다. 이어 키스했다. 거칠지 않고, 부드럽게. 버들의 뒤통수를 감싼 황 대표가 최대한 천천히 눕혔다. 다리 사이로 황 대표의 체중이 느껴졌다. 아……. 녹녹한 숨결에 금방 녹아 버리는 연분홍 솜사탕이 된 것처럼 척추를 타고 머리끝까지 전율이 퍼졌다. 젖고 있는 건 비단 입천장만이 아니었다. 버들의 배꼽 아래가 자꾸만 떨렸다. 눈앞에서 폭죽이 터졌다. 오금 어딘가를 꼭 피가 날 정도로 긁고 싶어졌다.
자꾸 닿아 예민하게 비벼지는 부위를 피하고자 황 대표가 한쪽 무릎을 굽혔다. 그게 실수로 버들의 다리 사이를 건드렸다. 제 입안에서 터진 버들의 신음을 삼킨 황 대표가 먼저 입술을 뗐다. 둘 다 열이 달떴다. 버들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황 대표의 등 근육이 거칠게 오르락내리락했다. 발기가 되어 어쩔 줄 몰라 하는 버들을 안아 황 대표가 욕실에 데려가 욕조에 걸터앉혔다. 그리고 저는 다른 방 욕실로 향했다. 옷을 벗거나 할 여유가 없었다. 서둘러 찬물부터 틀었다.
“……너.”
잔뜩 흐트러진 버들이 따라왔다. 황 대표의 목에 팔을 건 버들이 입술을 겹쳤다. 찬물은 버들의 몸에도 떨어졌다. 며칠 전의 비처럼. 중심을 잃고 휘청거린 버들의 등부터 황 대표가 잡아 줬다. 버들의 체온이 떨어지는 게 걱정된 황 대표가 등 뒤로 손을 더듬어 레버를 뜨거운 물이 나오게끔 돌렸다. 둘 다 흠뻑 젖고야 말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버들을 안아 든 황 대표가 침실로 향했다. 새하얀 시트가 두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온 물로 어둑하게 얼룩졌다. 움직이려고 꿈틀대는 버들의 손목을 황 대표가 꽉 눌렀다. 그 주변으로 시트에 주름이 졌다. 여전히 거친 숨을 내쉬며 황 대표가 새빨개진 버들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버들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그게 불이 붙은 화살촉을 당기게끔 만드는 거 같다.
“알아.”
사납게 황 대표가 버들에게 윽박질렀다.
“남자니까 지금 네가 얼마나 참기 어려운지.”
“…….”
“그래도 참아.”
“…….”
“나도 똑같이 참고 있잖아.”
“…….”
“조금만 참았다가…….”
버들이 나지막하게 앓았다. 황 대표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너…….”
“키스해 주세요.”
울먹거리는 버들의 기다란 속눈썹이 촉촉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애달프다. 걱정이 되는 와중에 그게 또 너무 예뻐서 미쳐 버리기 직전이다. 버들의 셔츠를 아래부터 황 대표가 풀기 시작했다. 어깨, 목덜미, 목젖, 턱, 코, 붓기 시작한 입술, 눈가, 가슴, 배꼽, 다리……. 버들의 살갗에 황 대표가 부드럽게 입맞춤했다. 뜨거운 인두로 지진 것처럼 그 모든 부위가 화끈거려 버들이 신음했다. 지금은 작게 부딪히는 숨소리마저 버들에겐 과한 감각을 자극해 대 괴로울 게 분명했다.
셔츠가 벗겨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새롭게 갈아입힐 옷을 찾아오기 위해 일어나는 황 대표를 버들이 붙잡았다. 전부 다 벗겨진 저와 달리 황 대표의 맨살은 오로지 손등뿐이었다.
버들의 혀가 황 대표의 손을 애무했다. 서로 다른 체온이 섞인다. 뜨겁게 미끄덩거리는 버들의 혀가 적나라하다. 손가락 마디마디, 손가락 사이사이. 물고, 핥고, 긁고, 빨고. 젖 빠는 새끼 짐승 수준인 그 어설픈 애무를 지켜보던 황 대표가 버들의 입안 옆쪽의 점막을 손끝으로 건드렸다. 그러자 전기가 통한 것처럼 버들의 허리가 크게 움찔거렸다. 황 대표가 버들의 뒷머리를 잡아당겼다. 저를 떼어 내려고 그런 줄 알고 더 필사적으로 매달리려는 버들을 황 대표가 눕혔다.
마른 몸이 이리저리 뒤집히는 대로 뒤집혀진다. 버들의 어깨뼈 사이의 등을 황 대표가 이로 갉작거렸다. 으응……. 솜털이 바짝바짝 선다. 오싹한 기분을 못 이기고 버들이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시트에 마찰되는 성기가 모든 이성을 잠식시킨다.
소복하게 솟은 버들이 엉덩이를 만지며 그 사이로 황 대표가 손가락을 가져갔다. 침대 옆 서랍을 열었다. 있는 건 콘돔이 전부였다. 버들의 아랫배에 손을 넣어 몸을 들어 올리자 조금도 버티지 못하고 풀썩 쓰러져 버린다. 황 대표가 버들의 몸 위로 납작하게 몸을 기울였다. 버들의 연한 귓바퀴 살을 핥으며 다정하게 물었다.
“못 버티겠어?”
가까이에서 들린다 싶은 황 대표의 목소리가 멀어진다. 정신없다. 눈앞이, 머릿속이 빙빙 돌았다. 황 대표가 버들의 몸을 마주 볼 수 있도록 돌렸다. 발개진 버들의 눈가가 관능적이다. 감도 높은 몸은 어딜 만져도 성감대가 되는 것 같다.
“버들아.”
버들이 탁한 호흡을 내뱉었다. 몇 번이나 사정한 제 성기를 황 대표가 발기시켰다. 좋으면서. 괴로우면서. 그 기로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무릎을 꼬아 보려고 했지만, 황 대표의 단단한 허벅지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버들이 근육으로 다져진 황 대표의 옆구리를 쓸어 올렸다. 그 나약한 버들의 손길에 황 대표가 인상을 짙게 찌푸렸다. 버들의 팔을 못 움직이게끔 배꼽 바로 위에 교차해 단단히 고정했다. 가슴을 핥자 버들이 도리질 쳤다. 꺼덕거리는 성기가 그래 봤자 순하다.
“그냥 갈 수 있잖아.”
“……아니야.”
“뭐가 아니야.”
“만져 주세요.”
버들이 달달 떨었다.
“네가 지금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
황 대표의 눈빛이 그윽했다.
“이제껏 손 안 대고 갔어.”
“하. 아……. 아!”
황 대표의 손에서 버들이 왈칵, 사정했다. 가슴은 뾰족하게 세워서 축 늘어진 버들의 콧김이 쌕쌕거린다. 사정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황 대표가 축축한 성기를 흔들어 억지로 발기시키려고 들자 버들이 자지러졌다. 황 대표가 몸을 숙였다. 버들의 코끝에 제 코끝을 가져다 댔다. 버들을 어르고 달래면서도 야하게 몰아치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버들의 정액이 손바닥 전체로 흥건해졌다. 황 대표가 버들의 한쪽 다리를 잡아 위로 들었다.
……환장하겠다. 도톰한 회음부가 뽀얗고 예쁘다. 그걸 홀린 듯 바라봤다. 정액을 그 주변으로 넓게 처발랐다. 버들을 뒤집은 황 대표가 살이 모아진 엉덩이를 깨물면서 잇자국을 냈다. 으응. 힘이 전부 빠진 버들이 미약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름을 불러 보지만 대답이 없다. 뭐라고 말을 해도 지금은 들리지 않는 상태일 거다.
황 대표가 제 성기를 흔들었다. 터질 듯 발기한 황 대표의 성기 주변으로 검푸른 핏줄이 도드라졌다. 언젠가 버들이 자기는 너무 좁고, 난 너무 커서 안 들어갈 거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버들의 연한 근육 사이로 황 대표가 성이 난 귀두 끝을 맞추었다. 일순 몸을 빳빳하게 굳힌 버들이 느껴졌다. 버들의 등을 누르며 황 대표가 체중을 실었다. 몸이 뚫리는 느낌은 황 대표 역시 선연했다. 조여 오는 감각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끝까지 파고들고 나서 모든 행동을 황 대표가 멈췄다. 기다렸단 듯 제 성기를 부드럽게 품어 오는 버들의 속살에 황 대표가 나지막하게 욕을 내뱉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황 대표가 버들의 모든 것들을 헤집어 놨다. 버들의 몸에 큰 황 대표의 성기가 빈틈없이 맞물려 저만의 길을 내고 있었다. 허리를 움직일수록 버들의 흐느낌이 심해졌다. 그래도 멈추는 게 불가능했다. 꿀처럼 진득하게 녹아내리려다가, 또 일순 점성 높게 성기에 달라붙는 버들의 몸에 이성이란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엎드려 있던 버들의 마른 몸을 일으켜 세워 황 대표가 제 위에 앉혔다.
“……아!”
갑자기 깊숙해진 삽입에 버들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황 대표가 얼른 버들의 등을 안았다. 부어오른 버들의 젖꼭지를 황 대표가 질깃질깃 씹어 댔다. 할 수만 있다면 저가 지금 들어가 있는 버들의 내장 역시 꺼내 씹어 버리고 싶었다. 힘들어하는 버들을 위해 황 대표가 똑바로 눕혔다.
이마 위에 흐트러진 버들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손길만 나긋했다. 고분고분한 버들의 몸을 탐하는 황 대표의 하반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매섭고 사나웠다. 황 대표가 무릎 뒤로 팔을 넣어 버들의 몸을 더 활짝 열리게 만들었다. 몸을 낮추자 버들의 숨이 곧 넘어가게 생겼다. 입을 맞춰 가면서 황 대표가 삽입을 반복했다.
어떠한 황홀함과도 비교 못 하겠다. 하……. 앗. 아. 제 아랫배를 뚫고 황 대표의 성기가 나오진 않을까 곤죽이 된 머릿속으로 버들은 그게 걱정이 됐다. 황 대표가 버들의 귓불을 깨물었다. 그러면서도 쉬지 않고 허리를 달구쳤다. 버들아. 나지막하게 이름을 부르자 감겨 있던 버들의 눈이 뜨였다. 척척하게 가라앉은 제 속눈썹을 버들이 문질러 닦았다. 선명해진 시야로 황 대표를 올려다봤다. 버들의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그게 또 너무 예쁘니까 황 대표가 거세게 성기를 짓눌러 박았다. 황 대표의 몸과 겹쳐진, 동백 같은 버들의 귀두에선 맑은 물이 쉼 없이 줄줄 흘렀다.
아득해진 눈앞에 버들이 정신을 놓았다.
* * *
높은 곳에서 추락하는 서늘한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버들이 잠에서 깼다. 손끝이 저릿저릿하다. 주변에 남아 있는 꿈의 잔상이란 떨어질 때의 그 기분, 딱 한 토막뿐이었다. 그마저 어렴풋하기에 금방 소멸될 줄 알았는데 도리어 상세해지기까지 삽시간이다. 버들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이마는 물론 손바닥에도 땀이 흥건히 찼다. 어느새 체온은 싸늘하게 식어 버린 뒤였다. 오한이 든다. 몸을 바짝 움츠리고 싶었지만 엎드려 누워 있는 탓에 여의치가 않았다. 대신에 버들이 가만히 숨을 죽였다. 정적은 원래부터 짙었다. 문득, 무릎 아래로 스친 시트의 촉감이 낯설다. 당연했다. 여기는 제 방이 아니었다.
커튼 뒤 바깥은 아직 어두웠다. 몇 시일까. 근처에 조명등이 켜져 있기는 하나, 조도가 최대치로 낮게 설정되어 있어 딱히 도움 되는 부분은 없었다. 또렷하지 않은 시야에 덜컥 겁이 났다. 거기다 방심한 틈을 타 호흡이 흐트러져 그걸 억누르기 위해 버들이 한참 동안이나 애를 먹었다.
황 대표님……. 엉망으로 부르튼 버들의 입술이 소리를 내려다가 말았다. 넓은 침대, 한가운데에 누워 있는 건 저 혼자뿐이었다. 일어나야 하는데 오로지 생각만이다. 애초에 힘은 쭉 빠져 있었다. 손가락 하나 쉽게 까닥이지 못하겠다. 어떡해. 아, 어떡하지. 속눈썹을 깜박일 때마다 버들의 초조함이 밖으로 드러났다.
점차 통증이 심해진다. 어깨일까. 등일까. 종아리일까. 어디가 특히 아프다고 명확히 밝힐 수가 없는 건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냥 뼈 마디마디를 포함해 온몸이 다 욱신거렸다. 버들이 아랫입술을 세게 물며 팔꿈치로 간신히 체중을 밀어 일어났다. 버들의 등을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던 시트가 너풀거리며 흘러내렸다. 알몸이었다.
침대 끝에 걸터앉아 버들이 심호흡을 반복했다. 바닥에 두 다리를 딛고 일어섰다. 곧바로 무릎이 꺾인 바람에 그대로 풀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허벅지 전체가 바들바들 떨린다. 새하얗게 질린 버들의 얼굴에서 당혹스러움이 스쳤다. 내 몸이 분명하나 내 게 아닌 것 같다. 상반신이건 하반신이건 마찬가지다. 뭐든 제 뜻대로 따라 주는 게 없었다. 시트를 쥐어짜듯 부여잡고 다시 일어서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겨우겨우 문 앞까지 당도했다.
침실은 그나마 조명등이 켜져 있기라도 했지만, 집안 자체는 마치 한밤중처럼 시커멨다. 넘어지지 않도록 문틀에 몸을 기대고선 버들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응접실의 소파가 텅 비어 있었다. 마음이 너덜거린다. 굳이 모든 방을 돌아다니며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덩그러니 혼자 남겨졌다.
집 어디에도 황 대표는 없었다.
이제 막 동이 트고 있었다. 구름 사이사이가 푸르스름했다. 한쪽 팔을 창틀에 올려놓고 황 대표가 무감한 얼굴로 운전 중이었다. 그때였다. 다짜고짜 밟아 버린 브레이크에 타이어가 찢어질 것처럼 갈렸다. 희뿌옇게 연기가 번졌다. 고무 타는 불쾌한 냄새가 차 안까지 들어왔지만 지금은 그딴 것들이 우선이 아니었다. 길 반대쪽에서 스친 인영을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서 황 대표가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기다렸단 듯 새벽 공기가 덮쳤다. 여름이 언제 끝나 가고 있었는지 차다.
이른 시각인 만큼 8차선의 도로가 기괴할 만큼 한적했다. 드문드문 한두 대의 차가 지나가는 게 전부였다. 신호를 아주 당연하게 어기는 것으로 모자라 속도까지 높여 대니 오히려 차가 많이 굴러다니는 지금이 대낮보다 더 위험할 수 있었다. 차 문을 훤히 열어 둔 채로 황 대표가 반대쪽으로 건너갔다. 입안에서 욕이 맴돌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갓길에서 서성이고 있는 건 버들이 맞았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황 대표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분명히 집을 나오기 전, 깊게 잠든 버들의 얼굴을 몇 번이나 확인했었다.
태어나 처음 갖는 관계란 걸 배려해 천천히, 약하게 움직여야 한단 걸 각오해 놓고선 스스로 제어하지 못했다. 철철 황홀경이 넘쳤다. 손짓이나 눈빛, 숨소리를 포함하여 버들의 모든 것들이 그랬다. 허리를 뒤로 뺄 기미가 보였다 치면 버들의 속살이 성급히 딸려 나왔고, 강하게 짓눌러 박아 대면 쫄깃하게 녹아 마치 한 몸처럼 들러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런 버들의 집착은 심지어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이어졌다. 제 아래에 깔려 극한으로 치단 성감을 버텨 내지 못한 버들을 직접 봐 놓고서도 강하게, 거칠게 밀어붙였다. 마지막 남은 콘돔 포장을 이빨로 찢으면서 이성은 물론 여유까지 날려 버렸단 걸 인정했다. 이제 그만 멈춰야 한단 생각은 금방 사라졌다. 사납게 핏줄이 돋아난 성기는 터질 것처럼 부풀어 좀처럼 발기가 풀릴 줄을 몰랐고 조금만 더, 한 번만 더 버들의 내벽을 끈질기게 탐하였다.
“유버들.”
황 대표의 목소리가 낮게 주변을 울렸다. 버들의 고개가 제 이름이 불린 쪽을 향해 느릿하게 돌아갔다. 거기엔 눈을 뜨자마자 너무 보고 싶었던 사람이 서 있었다. 믿기지 않는다. 현실이 꿈으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코끝이 시큰거린다.
“너…….”
버들의 눈가가 이미 발개져 있었다. 빠르게 감겼다가 뜨일 때마다 차츰 물기가 고였다. 버들이 덜덜 떨고 있단 걸 알아차리자마자 황 대표의 인상이 강하게 찌푸려졌다. 벗어 줄 옷이 차에 있었다. 서늘한 눈빛으로 버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버들이 현재 매우 불안한 상태란 걸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등에 멘 가방 지퍼는 활짝 열려 있는 채였고, 셔츠 단추는 하나씩 밀려 잠겨 있었다. 버들의 마른 어깨가 급하게 들썩거렸다. 벌어져 있는 거리를 좁히기 위해 먼저 움직인 쪽은 황 대표였다. 버들이 황 대표를 외면했다.
“유버들.”
황 대표가 버들의 손목을 잡았다.
“너 왜 여기 나와 있어.”
타박하는 어투에 버들이 황 대표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빨리 가려고 했는데요. 다리에 힘이 없어서…….”
더듬거리며 버들이 변명 같은 걸 늘어놨다. 바람이 불었다. 머리가 흩날리고, 버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어디 가려고.”
뜸을 두고 버들이 대답했다.
“집에요. 집에 가야 돼요.”
“데려다줄게.”
“…….”
버들의 가방 속이 뭔가로 꽉 찼다.
“혼자 갈 수 있어요.”
금방 쓰러지게 생겨서는 버들이 고집을 피웠다. 손목을 놓아 달란 듯 쳐다보는 눈빛을 황 대표가 무시했다. 언제부터 나와 있었던 건지 버들의 체온이 말도 안 되게 낮았다. 현재의 심정으로는 손목이건 뭐건 버들을 빈틈없이 옥죄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마른 몸이 조각조각 부러질 수도 있을 거 같아서, 그만큼 버들이 위태롭게 느껴졌기 때문에 황 대표가 울컥 치미는 제 감정을 우선 억눌렀다.
옆으로 차가 지나갔다. 소리에 깜짝 놀랐는지 버들이 휘청거렸다. 안전하게 갓길을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 잡아끌려고 하자 버들이 움찔거렸다.
“길 건너야 돼.”
“……왜요?”
“차가 저기에 있으니까.”
“저 진짜 혼자 갈 수 있어요.”
“혼자 어떻게 갈 건데.”
“택시 타면…….”
“눈 있으면 봐. 택시가 이 시간에 어디에 있어.”
“…….”
“집은 이따가 데려다줄게.”
황량한 도로를 버들이 두리번거렸다.
“그래도…….”
“그래도 뭐.”
“대표님 차, 안 탈래요.”
“…….”
“저는 택시 올 때까지 기다리면 돼요.”
황 대표가 인상을 썼다.
“감기 걸리니까 빨리 집에 가세요.”
자기 감기 걸릴 건 왜 생각을 안 하는 걸까.
“식사도 꼭 챙겨 드세요.”
서늘한 눈매로 황 대표가 버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더 이상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버들을 안아 들었다.
“대표님…….”
갑작스레 두 다리가 공중에 뜨자 버들의 눈이 커졌다. 싫다며 버둥거려 봤자 소용없다. 무심코 쥐고 있던 황 대표의 옷깃을 버들이 놓았다. 힘에서 밀리니 순순히 황 대표가 원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버들이 아랫입술을 비틀어 깨물었다. 억울하고, 원통하고, 비참하고. 새삼 깨닫지만 첫사랑이 참 모질다. 누굴 좋아한다는 게 이만큼이나 어려운 일인지 모르고 덤벼들었다.
소파에 최대한 조심히 앉힌다고 앉혔는데 버들의 콧등에서 앓는 신음이 샜다. 집 안의 불을 켜는 대신 황 대표가 커튼을 전부 젖혔다. 집안은 나오기 전과 다를 바 없이 고요했다. 물을 따라 건네준 컵을 비껴간 버들의 커다란 눈이 오롯하게 황 대표를 주시하고 있었다. 버들이 언제든 물을 마실 수 있게 근처에 컵을 내려놓은 황 대표가 현관으로 향했다.
“안 돼요. ……대표님! 저 주세요.”
울먹거리는 버들의 사정을 뒤로하고 현관에 떨어진 버들의 가방을 황 대표가 집어 들었다. 절로 인상이 써졌다. 동시에 어이가 없어졌다. 버들의 가방에는 아무렇게나 구긴 시트가 돌돌 말려 있었다. 관계 후 모든 기력이 빠진 버들의 몸을 씻기고서 시트를 새롭게 갈았었다. 어젯밤 정사의 흔적이 축축하게 남겨진 시트는 키퍼들이 치우게끔 한쪽에 내버려 뒀었다. 그걸 대체 무슨 생각으로 버들이 책까지 빼 버린 자기 가방에 꾸역꾸역 담아 넣은 건지 모르겠다. 사용 후 묶어서 쓰레기통에 처박았던 콘돔도 버들의 가방에서 나왔다. 정확히 시트 아래에 깔려 있었다. 황 대표가 묵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혼내야 하는 건지, 이유를 물어야 하는 건지 헷갈린다.
황 대표가 버들의 옆에 앉았다.
“할 말 있으면 해.”
시간이 쉬지 않고 흘렀다. 머뭇거리던 버들의 입술이 조용히 열렸다.
“어디 갔다 오셨어요?”
“어디 안 갔어. 너 배고플까 봐 잠깐.”
장어 사러 갔었다.
“저 배 안 고파요.”
시야가 불투명해지자 버들이 황 대표의 목에 팔을 둘렀다. 어디 안 갔단 황 대표의 말에 안도감이 퍼졌다.
“버들아.”
이름을 낮게 불러 주며 황 대표가 버들을 마주 안았다.
“너 왜 이렇게 울어.”
“…….”
“소리 내서 울어. 괜찮으니까.”
황 대표의 어깨를 버들이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비가 세차게 퍼부었던 그날, 미처 못 다 운 설움을 버들이 내려놓았다.
“버들아. 아팠어?”
곧장 버들이 고개를 내저었다.
“근데 왜 울어.”
“…….”
“음?”
“…….”
“유버들. 묻는 말 안 들려?”
버들의 얼굴을 황 대표가 살며시 들어 올렸다. 눈물로 푹 젖어 있다.
“눈을 떴는데 대표님이 없어서요.”
발음이 불확실했지만 황 대표는 전부 알아들었다.
“내가 없어서 우는 거야, 지금?”
“그냥…… 무서웠어요.”
“뭐가 무서워. 혼자 있는 게? 애야, 네가?”
“대표님 집인데 대표님이 없으니까…….”
혼자 남겨졌단 걸 깨달은 순간 머릿속이 무수한 생각들로 꽉 찼었다. 하나 같이 암담했다.
“여기 너희 집 하라니까.”
버들이 다시 안겼다.
“너…… 진짜 큰일이다.”
“…….”
“왜 이렇게 멍청하게 굴어.”
“죄송해요.”
“사과하라는 게 아니라.”
“…….”
단물만 전부 빨아먹으라더니. 단물뿐만 아니라 버들이 손수 자기 간이고 쓸개고 떼어 몽땅 저에게 줘 버렸단 걸 알아차렸다. 등을 쓰다듬자 손바닥 밑으로 척추뼈가 만져졌다. 탈수 증상이 올까 직접 컵을 들고선 황 대표가 버들에게 물을 먹였다. 버들이 눈을 깜박거릴 때마다 속눈썹 밖으로 눈물이 밀려났다.
“대표님.”
컵을 내려놓은 황 대표가 버들의 입술에 방울진 물기를 슬며시 닦아 줬다.
“왜 저랑 있어요?”
“너랑 있으면 안 되는 거야?”
“기분 나쁘시잖아요.”
“……나?”
황 대표가 욕했다.
“너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경로 이탈을 덜 했다면 버들이 깨기 전에 돌아올 수 있었을까. 메모라도 남겼어야 했나. 지금은 본래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게 별게 다 아쉬웠다. 울다가 지친 버들의 몸을 안아 든 황 대표가 침실로 들어갔다. 잔뜩 흐트러져 있는 침대 위에 버들을 눕혀 놓고 셔츠 단추에 손을 가져갔다. 제 행동에 놀란 기색인 버들을 황 대표가 위에서 지그시 내려다봤다.
“안 돼?”
고막이 녹아 버릴 정도로 황 대표의 목소리가 달콤했다.
“보기만 할 건데 그래도 안 돼?”
단추를 두 개쯤 풀자 버들이 몸을 비틀었다. 보기만 할 건데 그래도 안 되는 모양이다. 황 대표가 버들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촘촘한 속눈썹이 눈물에 젖어 무겁게 느껴지면서 눈은 저절로 감겼다. 벼랑 끝에 내몰린 것처럼 위태로웠던 버들의 기분이 황 대표와 함께 있으면서 나아지는 중이었다.
일어나려는 황 대표의 옷을 버들이 황급히 붙잡았다.
“수건 챙겨서 금방 올게.”
어디 가는지 버들이 묻기 전 황 대표가 먼저 말을 해 줬다. 물에 적신 수건을 들고 왔을 때, 버들은 잠들어 있었다. 차라리 잘됐다. 얼굴부터 조심조심 닦아 주고 나서야 침대에 걸터앉은 황 대표가 버들의 셔츠를 벗겼다. 저가 만들어 놓은 흔적들로 버들의 하얀 피부가 온통 울긋불긋했다. 시트와 콘돔, 버들이 없다면 어젯밤은 통째로 도려낸 것과 마찬가지란 걸 문득 깨달았다.
황 대표가 옆에 누워 버들의 목 뒤로 팔을 집어넣고서 시트를 턱 아래까지 끌어당겼다. 말간 버들의 얼굴이 지쳐 있다. 그러는 사이 완벽히 아침이 찾아왔다. 아프냐고 백 번을 물어도 버들은 백 번 다 안 아프다고 대답하겠지만, 그게 거짓말이란 걸 안다. 아팠을 게 분명한 버들의 허리를 황 대표가 힘을 뺀 손으로 어루만졌다.
나란히 잠에서 깼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오후였다.
“…….”
“…….”
힘겹게 일어나 앉은 버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제 몸을 깨닫고선 시트를 끌어와 가렸다. 황 대표가 턱을 괸 채로 버들을 올려다봤다.
“내가 벗겼어.”
팔을 쭉 뻗은 황 대표가 퉁퉁 부어 있는 버들의 눈가를 문지르며 뻔뻔하게 물었다.
“왜?”
버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
예상한 대답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갑자기 황 대표가 일어나려는 몸짓에 침대가 움직였다. 그 사소한 반동도 그냥 넘기지 못하고 버들이 숨을 삼켰다. 욕조에 물을 틀어 놓고 돌아온 황 대표가 웃통을 깐 채다. 콸콸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가 괜한 긴장을 키우는 것 같다. 움츠러든 버들이 황 대표의 눈치를 살폈다.
“배는 안 고파?”
“안 고파요. 대표님, 배고프세요?”
“밖에 장어 있어.”
“장어?”
충분히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버들이 한결 나아 보였다. 견인당한 차를 찾으러 가면서 비서에게 걸려 온 연락에 황 대표가 거듭 말했다. 차야 뭐 어찌되든 상관없으니까 장어부터 챙겨 오라고.
버들의 손에서 황 대표가 시트를 저만치 던져 버렸다. 섹스까지 해 놓고 아직 부끄러울 게 있나 보다. 얼굴을 지나서 쇄골, 팔, 옆구리…… 느슨한 황 대표의 시선이 제 배꼽 아래로 떨어지기 전 정신을 차린 버들이 베개를 휘둘렀다. 갑자기 움직인 바람에 허리를 중심으로 통증이 크게 일었다. 앞쪽으로 고꾸라지고 나서 보니 황 대표의 품속이다.
“너 지금 온몸이 다 아플 거 아냐.”
혼자서 씻을 수 있단 버들의 주장을 황 대표가 한 마디로 묵살시켰다.
욕조에 두 남자가 들어가자 거품이 넘쳤다.
“올라올래?”
“아니요.”
“그래. 그럼.”
싫다는 버들의 뜻에 따라 허벅지 위에 앉히려던 걸 황 대표가 관뒀다. 대신 다리 사이에 앉혔다. 한쪽 무릎을 굽힌 다음 버들의 아랫배에 황 대표가 팔을 둘렀다. 눈앞의 하얀 목덜미가 촉촉하다. 서로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았다. 문을 열어 뒀음에도 불구하고 욕실 전체가 고요했다. 수증기로 인해서 천장에 다닥다닥 맺힌 물방울이 똑 떨어질 때만 소리가 났다.
“힘 빼.”
근육을 풀어 주려고 만지는 건데 도리어 버들이 뻣뻣하게 긴장했다.
목덜미를 타고 어깨까지. 깃털처럼 가벼운 황 대표의 입맞춤에 버들이 떨었다.
“아…….”
황 대표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나직하게 울린 버들의 신음에 목욕은 짧게 끝날 수밖에 없었다. 버들의 얼굴에 로션을 발라 주면서 황 대표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인마. 남자가 참을 줄도 알아야지.”
깜박깜박, 황 대표를 올려다보는 버들의 눈이 순했다. 황 대표가 헛기침을 했다.
“옷 주세요.”
공손하게 내밀어진 버들의 손을 무시하고 황 대표가 직접 옷을 입혔다.
……아. 진짜 미치겠네.
“연고 발라야겠다.”
“어디 다치셨어요?”
“나 말고.”
“저요?”
버들의 양쪽 가슴이 공평하게 부어 있었다. 발갛게. 토실토실하게. 그 지경으로 씹어 대고 빨아 댔던 저 자신을 타박하면서 황 대표가 버들을 눕혔다. 둘의 몸에서 열대 과일 같은 달큼한 향기가 퍼졌다. 민들레 홀씨처럼 흩날린 버들의 까만 머리카락이 하얀 시트와 대비됐다.
기껏 입혀 주었던 버들의 옷을 황 대표가 도로 벗겨 냈다. 남자가 참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쳐 준 지 5분도 안 됐다.
“버들아. 10초만 딱 세.”
입을 벌린 황 대표가 버들의 젖꼭지를 삼켰다.
“10. 9. 8…….”
다급하게 버들이 숫자를 셌다.
“아. 아…….”
10초가 여러 번 지났다. 그만큼 달뜬 한숨이 쌓였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황 대표가 버들의 집까지 헤매지 않고 바로 도착했다. 버들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대표님. 있잖아요.”
“응.”
“저희 형한테 전화해서 어디냐고 물어봐 주시면 안 돼요?”
“왜. 너무 늦어서 혼날까 봐?”
“…….”
아홉 살의 나이 차가 골치 아프게 생겼다. 황 대표가 핸드폰을 꺼냈다.
“대신 전화해 주면, 넌 나한테 뭐 해 줄 건데.”
처음부터 버들에게 황 대표는 뭐든 다 해 주고, 뭐든 다 주고 싶은 사람이었다. 쓰레기통에 버려 버린 해바라기 손수건이 사무친다. 가지런히 모은 무릎만 내려다보고 있는 버들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황 대표가 유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집으로 출발했대.”
“……다행이다.”
진심으로 안도하는 버들을 보며 황 대표가 웃었다.
“버들아. 장어 가져가서 꼭 먹고. 내일 또 나 만나러 와.”
네. 버들이 대답했다.
“대표님.”
차에서 내리려던 버들이 다시 황 대표를 쳐다봤다.
“저 데리고 노는 거 재밌어요?”
차분한 어조였다.
“재미없어요?”
“전에 말했잖아.”
“저희 잤잖아요. 혹시 마음 바뀌셨을까 봐…….”
“……바뀐 적 없어.”
“아. 그럼 저 데리고 노는 거 아직 재밌는 거 맞죠?”
한참 뒤에 황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지 못할 사이 눈물이 고여 버렸다. 그걸 감추고자 버들이 환하게 웃었다.
“대표님. 제가 많이 좋아해요.”
그래. 황 대표님이 재미있다니까, 그거면 됐다.
잠들지 못한 밤이 깊어진다. 아. 버들이 앓았다. 섹스의 여파가 얼마나 갈지 걱정이다. 마음껏 몸을 뒤척거리지 못하니 답답함이 커진다. 베개 밑을 더듬거려 꺼낸 핸드폰을 버들이 힘껏 움켜쥐었다. 황 대표가 직접 입력시켜 준 번호를 외우진 않고 눈으로 끊임없이 읽기만 했다. 내가 자꾸 전화하고 메시지 보내니까 귀찮아서 다른 사람 번호를 알려 준 걸까?
달이 예뻤다. 그걸 사진 찍어 버들이 전송한 번호는 황 대표의 비서 거였다. 여태 자기가 전화하고, 메시지를 보냈던. 기대하지 않았는데 ‘1’이 사라졌다. 아직 안 주무시나 봐. 버들의 눈이 달만큼 휘어졌다.
* * *
더 참지 못하고 황 대표가 태블릿을 내려놨다.
“뭘 그렇게 쳐다봐.”
“너 왜 멀쩡하게 걸어 다니지?”
진심으로 궁금하단 얼굴로 유 대표가 물었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아마 퇴원하고 나서 바로였나? 내 새끼가 너한테 골프채 들고 찾아간 적 없어?”
“…….”
“내 새끼가 골프채 들고 너 찾아간 줄 알았거든, 나는.”
골프채에 버들이 매달았을 빨간색 리본을 유 대표는 못 본 모양이었다.
“집에 굴러다니고 있는 골프채 수만 일흔하나더라.”
지나가는 투로 유 대표가 말했다.
집에 들어간 황 대표가 무의식중에 버들의 신발부터 확인했다. 있다. 고개를 치켜든 황 대표가 가만히 서 있었다. 신이 나서 쪼르르 달려 나와 저를 반길 버들을 예상했는데 희한하게 잠잠하다.
“대표님.”
소파에 앉아 있는 버들의 모습이 청초하다.
“언제 왔어?”
“아까요.”
“책 보고 있었어?”
“네.”
이마를 짚자 미열이 감돈다. ……아. 아직 허리 뭐 이런 데가 아프구나. 저를 담아내고 있는 버들의 눈빛이 사정없이 반짝거린다. 맹목적인 애정이 영원토록 빛바래지 않을 거란 확신은 다름 아닌 버들이 직접 심어 주고 있었다. 주방에 짐을 옮겨 두고선 황 대표가 씻고 나왔다.
“그거 장어예요?”
“응.”
정해진 일정과 달리 회의가 오래 지체되는 바람에 버들이 잘 먹는다는 장어 전문점까지 갈 틈이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누군가를 대신 보내는 것도 싫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하는 수 없이 일대에서 유명하단 곳을 고르고 골라 사 온 장어를 황 대표가 펼쳤다. 나란히 붙어 앉았다.
“장어, 어제도 사 주셨잖아요.”
“내 앞에서 먹은 게 아니잖아.”
버들이 어색하게 눈치를 봤다.
“저 양념은 안 먹는데…….”
우물쭈물 버들이 꺼낸 말에 황 대표가 인상을 썼다.
“소금만 먹어요.”
“너 편식하면 되겠어, 안 되겠어.”
“매운 거 들어가면 위가 따끔거려서요.”
황 대표의 얼굴이 무심했다. 미숙한 젓가락질로 황 대표가 양념을 몽땅 걷어 내는 중이었다. 그걸 잠자코 내려다보고 있으려니까 어디선가 간지러운 기분이 몰려들었다. 버들이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대표님. 왜 저한테 잘해 주세요?”
황 대표가 침묵했다.
딱 장어 한 점을 씹어 삼키는 걸로 버들이 식사를 끝냈다.
“대표님은 안 드세요?”
“너 먹으라고 사 온 거야.”
“전 대표님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던데.”
“너 내가 수작 부리지 말랬지.”
황 대표가 인상을 썼다. 딱 한 점뿐이었지만 어쨌든 버들의 입에 뭔가 들어간 걸 보고 나니까 좀 낫다. 양치 후 책을 보겠단 버들을 안았다. 재우려는 거였는데 먼저 잠이 든 쪽은 정작 황 대표였다.
황 대표의 고운 속눈썹을 바라보는 걸로 버들이 시간을 보냈다. 참아 보려고 했지만 불시에 잔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때마다 잠이 든 상태에서도 황 대표가 버들의 등을 쓰다듬었다.
푹 자고 일어난 황 대표가 욕조에 물을 받았다. 황 대표에게 의존하지 않으려 버티던 버들이 어느새 가물거리는 눈꺼풀을 문질렀다. 황 대표의 가슴팍에 기대고 있던 버들의 뒤통수가 한쪽으로 치우쳤다. 목욕 중에 버들이 잠들어 버렸다. 귓불을 빨다가 황 대표가 헛바람을 켰다.
“더 자.”
“몇 시예요?”
“여덟 시.”
버들의 눈이 데굴데굴 구른다. 욕조에 있었던 것 같은데 왜 침대일까.
“대표님.”
재잘거리면서 버들이 수다를 떨었다. 달걀찜을 어떻게 하면 되는지 설명해 주는 버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황 대표가 눈을 감았다. 버들의 목소리가 흠칫거리며 놀란 뒤 우뚝 멎었다. 시선이 부딪혔다.
“저 왜 옷 입고 있어요?”
“벗길까?”
엉덩이 뒤쪽으로 불쑥 들어온 황 대표의 손에 버들이 숨을 참았다. 어느새 불처럼 달아올라 있는 버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중 눈이 마주치자 황 대표가 웃었다. 잠깐 멍했던 버들이 속눈썹을 빠르게 깜박였다. 황 대표가 더 가까이 버들을 끌어안았다.
“더 자.”
황 대표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머리 위에서 울렸다. 허리를 지그시 누르는 황 대표의 팔이 무겁다.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정감을 준다.
“다 잤어요.”
“내일 출장 가야 돼.”
“어디로 가세요?”
“이태리. 일주일 정도 걸려.”
“…….”
황 대표가 제 품에서 살짝 버들을 떼어 냈다.
“너 이제 어쩔래. 나 없이 일주일 동안 잠도 못 자게 생겼어.”
버들이 의연했다.
“못생겨서는. 너 나 없이 어쩔 거야?”
놀리는 투로 계속 그 말을 꺼내더니 황 대표가 결국 버들을 울렸다.
* * *
황 대표가 출장을 간 지 3일째가 됐다. 보고 싶어서 첫날부터가 한계였다. 아침 일찍 황 대표의 집을 찾은 버들은 밤이 깊어지는 동안 한 자리에서 내내 머무는 중이었다. 그게 복도였다. 벽에 등을 기대고 무릎을 세워 턱을 올렸다. 굳게 닫힌 문을 가만히 바라봤다. 코끝이 아릿하다. 버들이 핸드폰을 꺼냈다.
[대표님.]
전송한 메시지에 숫자 1이 사라질 줄 모른다. 많이 바쁘신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버들이 황 대표가 직접 입력해 준 번호를 찾았다.
[대표님.]
마찬가지로 숫자 1이 사라지지 않았다.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막 내려놨을 때였다. 전화가 걸려 왔다.
-왜.
“…….”
-불렀잖아. 왜.
“…….”
버들의 어깨가 안쪽으로 말렸다.
“……그냥요.”
손이 떨렸다. 첫 전화였다.
-…….
“…….”
서로의 숨소리가 섞였다.
-끊어.
“대표님. 하셨어요?”
-……뭘 해.
“식사요.”
어떻게든 더 길게 통화가 하고 싶은 버들이 아무 말이나 내뱉기 시작했다.
-너는.
“먹었어요.”
-확실해?
“확실해요.”
-뭐 먹었는데.
“밥.”
황 대표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간혹 정적이 찾아왔다. 핸드폰을 통해 듣게 된 서로의 목소리가 생소한 건 둘 다 똑같았다.
“대표님.”
-응.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뭔데.
“있잖아요, 대표님.”
잠시 뜸을 들이다가 버들이 물었다.
“폰섹스해 본 적 있으세요?”
한참 뒤 한심하단 듯 황 대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꼴통 새끼. 이거 진짜.
왠지 혼난 거 같아서 버들이 침울해졌다.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거였다.
“폰섹스할 때 옷은 어떻게 해요?”
-뭘 어떻게 해.
“입어요? 벗어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왜 몰라요?”
-해 본 적 없으니까.
“대표님, 폰섹스한 적 없어요?”
-그래.
“아……. 나도 없는데.”
-너는 없어 보이더라.
버들이 코를 훌쩍거렸다.
-버들아.
나지막하게 황 대표가 버들의 이름을 불렀다.
-옷 입고 있어?
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보이지 않을 텐데 다 알고 있단 듯 황 대표가 이어서 물었다.
-속옷 색깔 뭐야.
은밀하고 저질스러웠다.
“……검정색인데 왜요?”
-버들이 검정색 속옷 입었어? 젖어도 티 덜 나겠다.
“대표님은요?”
-안 가르쳐 줘.
“…….”
버들이 얌전히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홉 살씩이나 어리고 난리야. 혀를 차며 황 대표가 정신을 차렸다.
-잠은 좀 잤어?
“네. 대표님은요?”
-나 뭐.
“저 없는데서…….”
-난 너 없어도 잘 먹고 잘 살아.
“…….”
버들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런저런 말을 섞던 중 황 대표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차렸다. 겨울이 출장 갈 때 따라간 적이 있는 곳이었다. 버들의 표정이 순간 환해졌다.
“호텔 정면 방향에서 왼쪽으로 꺾어야 돼요. 두 블록 지난 다음에 신호등 있거든요? 그거 건너서 우체통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세요. 아. 간판이 없으니까 주변을 잘 보셔야 돼요. 겉에서 보면 초콜릿 파는 가게가 아니라 꽃집처럼 생겨서 저도 몇 번 그냥 지나친 적이 있어요. 제가 살면서 먹어 본 캐러멜 초콜릿 중에 거기가 제일 맛있어요.”
-……누가 너 초콜릿 사다 준댔어?
“제가 먹겠다는 게 아니라 대표님 드셔 보세요.”
-단거 안 좋아해.
“거기 진짜 맛있는데…….”
아쉬움이 뚝뚝 묻어난 얼굴로 버들이 종알거렸다. 핸드폰이 뜨거워졌다.
“대표님. 내일 주말인데 뭐 하세요?”
-일하겠지.
“저 지금 배터리 없어서 전화 끊길지도 몰라요.”
-충전시키면 되잖아.
“집 아니라서 충전기 없어요.”
-……너 어디야.
낮게 물었다.
“대표님 집이요.”
버들의 대답에 황 대표가 내색 없이 안심했다.
“……대표님.”
배터리 칸에 빨간색 불이 사라지더니 핸드폰이 완전히 꺼져 버렸다. 얼마 뒤 버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국한 황 대표가 곧장 집으로 향했다. 문 앞에 비스듬히 뭔가가 세워져 있었다. 색연필이다. 당연히 버들이 와 있을 줄 알았는데 집 안은 텅 비어있었다.
업무가 바빠 피곤한 기색이 남아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편안했다. 버들이 쓸 핸드폰 충전기 포장을 뜯었다. 아까 배터리를 사 오라고 지시했더니 비서가 기종부터 물었다. 기계에 대해 별로 관심 없는 황 대표가 태연한 투로 “모서리가 약간 네모야.”라고 대답했었다. 버들의 핸드폰 기종과 맞지 않으면 버리고 새로 사면 그만이다.
씻기 위해 욕실에 들어갔다. 나란히 꽂혀 있어야 할 버들의 전동칫솔이 없다. 바꿀 때가 됐나. 황 대표가 새 칫솔을 꺼냈다. 제 칫솔과 디자인부터 색깔까지 완벽하게 똑같다. 제 꼴통이 바꿔서 쓸까 봐 황 대표가 매직으로 칫솔 기둥에 ‘유버들’ 이름을 적어 뒀다.
샤워 후 황 대표가 와인을 꺼냈다. 함께 곁들어서 먹으면 풍미가 올라간다는 초콜릿 하나를 깠다. 버들의 설명대로 초콜릿 가게가 아닌 꽃집처럼 생겨서 몇 번이나 앞을 그냥 지나쳤다. 진득하게 녹아버린 초콜릿이 황 대표의 손끝을 더럽혔다. 입에 넣는 순간 욕부터 나왔다. 지나칠 정도로 달다. 이런 걸 처먹으니까 밥맛이 없지. 마르고.
더 녹기 전 초콜릿을 냉장고에 넣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미리 방문을 예약해 둔 한의원에서 안내 문자가 도착했다. 살찌는 한약이 효과가 좋다니까. 초콜릿도 한약 먹일 생각에 사 온 거였다.
인기척에 서둘러 황 대표가 문을 열었다. 흐드러지게 웃는 얼굴도. “황 대표님.” 하고 저를 부르는 목소리도 없었다. 지나가는 바람이 덜컹거리며 문을 흔들어서 난 소리였다.
그렇게 버들이 없이 한 달이 지났다.
[4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