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닿아서, 덮여서 (1)
노크 소리가 단조롭게 울렸다. 아. 잠깐……. 미처 응답하기 전, 문이 밀리면서 의료진들이 들어왔다. 이제 막 갈아입을 옷을 꺼냈던 버들이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마주친 시선들이 전부 부드럽다. 직전까지 바삐 굴러가던 머릿속이 일순 굳은 느낌이다. 속눈썹을 슴벅거리고 있던 버들이 제 이름이 불린 것에 엉거주춤 구부리고 있던 허리를 폈다. 어차피 들어오라고 허락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래도. 들어오라고 아직 말하기 전이었는데……. 옷이라도 먼저 벗고 있었어 봐. 빳빳한 새 환자복을 도로 내려놓으면서 버들이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이 사람들은 매일 같은 시각, 저를 만나는 것에 익숙해져 가는 모양이다. 미리 병실에 들어오란 자신의 허락까지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어떻게든 지금의 계절에 익숙해지지 않으려 발버둥치고 있는 제 모습과 비교되면서 새삼 꼴사나워졌다. 어차피 처해야 할 상황이란 걸 받아들이고 있으니 좀 더 스스로가 의연해지길 바란다. 노력 중이다.
어렸을 적부터 알아 왔던 만큼 주치의가 친숙하다. 해마다 나이를 먹는 동안 저는 무럭무럭 자라났지만 희한하게 주치의의 인상은 어렸을 적 알았던 그때에 딱 멎어 있는 것 같다. 턱 아래를 전부 가릴 정도로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이 영락없는 산타클로스다. 밥은 먹었니, 어젯밤은 어땠니, 불편한 점은 없니. 가벼운 어투라서 언뜻 친근한 사이에 안부를 묻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제 입장은 엄연히 환자였다. 어제와 그 엊그제와…… 딱히 달라지지 않는 대답을 내놓는 버들의 태도가 차분하다.
노크 없이 문이 열리더니 둘째 형이 도착했다. 오지 말라니까. 투덜거리면서 버들이 옅게 인상을 찌푸렸다. 저가 뭐라고 하든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여름을 보아하니 제 형이 틀림없다. 나이를 많이 먹은 놈들이나 적게 먹은 놈들이나 기본적으로 다들 능글맞다. 여름이 주도한 농담에 분위기는 한결 유해졌다.
할 일을 끝낸 의료진들이 빠져나갔다. 마지막으로 주치의와 제 둘째 형이 나란히 대화하며 나가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곧 외면했다. 환자인 자신은 외톨이로 두고 저들끼리만 뭘 그렇게 속닥거리는지 모르겠다. 뻔히 저와 관련된 내용일 게 분명하나 크게 관심 두지 않고선 버들이 심드렁하니 침대에 걸터앉았다.
하루가 길다. 길고 느릿하게 흐른다.
“내일 겨울이 들어온다더라.”
“또?”
버들이 질겁했다.
“뉴욕이 옆 동네 슈퍼인 줄 아나 봐.”
“옆 동네 슈퍼 오너한테 관심이 있나 보지.”
“……그게 나야?”
제 가슴팍을 손으로 가리키며 버들이 계속 질겁했다.
“진짜 철없지 않아?”
“막내 너는 그럼 철 있냐?”
“보면 몰라?”
“직접 말해 줘.”
“겨울이 형보단 있어. 많아.”
여름이 웃었다.
“내가 봤을 때. 겨울이 형은 결혼 못 해.”
단호하게 버들이 겨울의 미래를 점쳤다.
“아직 어리니까 막내 너는 결혼 생각 없지?”
“내가 뭐가 어려. 그리고 나 결혼 생각 있어.”
웃고 있던 여름이 살짝 굳었다.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치는 줄 알았다.
……결혼 생각이 있다고? 팔랑팔랑, 깜박거리는 기다란 속눈썹 때문인지 버들의 모습이 참 새치름하다. 눈 아래에 살짝 그림자가 만들어졌다.
“있다가 없다가 자꾸 바뀌는데 지금은 아무튼, 있는 쪽이야.”
“사귀는 사람이 있는 거야? 아니면 관심 있는 사람이 있단 뜻이야?”
버들이 도톰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자세가 바르고, 발목이 예쁜 한 사람이 떠올랐다.
밤이 되자 완벽하게 혼자가 됐다. 가습기와 공기 청정기 등 사사롭게 작동되는 기계음들이 고요함을 방해한다. 광활한 밤하늘에 비해 비스듬히 기울어진 초승달 하나가 낡아 보인다. 누운 채 창밖을 쳐다보고 있길 한참이다. 심심해진 버들이 양쪽 엄지발가락을 엇박자로 까닥였다. 그것도 곧 재미없어졌다.
벌떡 일어나 앉은 버들이 환자복 소매를 어깨가 시작되는 부근까지 전부 걷어 올렸다가 전부 벗는 걸 택했다. 목, 어깨, 가슴팍 사이, 유두, 옆구리, 허벅지, 종아리……. 황 대표의 입술이 지나간 자리는 전부 발긋해져 제 몸 자체가 꼭 알록달록 꽃밭처럼 느껴졌었다. 꼼꼼하게 살펴보았지만 첫 관계에서 황 대표가 만들어 놓은 울혈들이 전부 사라지고 없다. 그게 흐릿흐릿해져 갈 때 너무 아깝다 못해 애가 다 녹을 지경이었다. 황 대표의 흔적들이 영원토록 선명했으면 좋겠는데 그건 터무니없는 바람에서 그쳤다.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로 허리에서 느껴졌던 시큰거림 또한 이제는 아득해졌다. 전부 달콤했던 기억들로 뭉친다.
새벽을 지나 어느덧 아침이다. 하늘의 변화를 버들이 창틀에 턱을 기대고 앉아 빠짐없이 지켜봤다. 어김없이 시작되는 하루가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다. 버들이 대자로 드러누워서 병실 천장을 올려다봤다.
손을 뻗어 더듬거리자 티슈가 잡힌다. 포장지에 깨알처럼 적혀져 있는 글씨를 전부 읽었다. 겨우 2분 남짓이 지났을 뿐이었다. 어깨까지 축 처지면서 한숨이 터졌다. 버들이 틈틈이 문 쪽을 바라봤다. 귀찮단 투로 고개를 내저었지만, 오늘 오기로 한 겨울을 오매불망 기다리게 된다.
꾸역꾸역 점심 식사를 끝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간호인이 뒷정리를 도왔다. 문이 반쯤 열렸고 겨울이 빠끔히 고개를 들이밀었다.
“겨울이 형.”
버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형. 왜 이제야 왔어?”
“비행기가 연착됐어. 잘 있었어?”
덩치 생각 못 하고 안겨 오는 제 형을 버들이 토닥거렸다.
“난 잘 있었지. 형은?”
“내 새끼, 얼굴 더 예뻐진 거 같은데?”
“형. 내가 비타민 타 줄까?”
“비타민?”
“맛이 좀 여러 개야.”
버들의 성화에 겨울이 발포 비타민 여러 잔을 마셨다.
“야. 새끼야. 이거 하루에 한 잔만 마시라고 써있잖아.”
“그런 말이 어디에 써 있어? 난 못 봤는데.”
“여기! 이렇게 몰아서 먹으면 오히려 몸에 나빠요.”
“형. 이틀에 하루 꼴로 술 마시면서, 비타민 좀 몰아 마셨다고 몸에 나쁘단 말이 나와?”
또박또박, 맞는 말만 골라 말대꾸를 하는 버들을 겨울이 흘겨봤다.
“여기는 손님 대접을 싸가지 없이 하네. 웨이터! 비타민 말고, 그냥 물 좀 갖고 와.”
……웨이터? 여기 구멍가게 아니었어?
먹구름이 뒤덮이며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간호인이 때를 맞춰 선물 들어온 화분을 바깥에 내놨다. 번갈아 가며 버들이 책 몇 권을 펼쳤다. 빗소리가 어수선해서인지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어지럽혀진 테이블을 그대로 둔 채 버들이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 쌀쌀한 기온을 느끼며 버들이 눈을 깜박였다. 여름 지나 가을, 가을 지나 겨울. 지체하지 않고 계절이 흘러간다.
의료진들이 모여 있을 땐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던 겨울이 주치의를 따라 나갔다. 못마땅해진 버들이 눈썹을 구겼다. 누가 형제들 아니랄까 봐. 둘째랑 넷째 서로 하는 짓들이 어쩜 저리 닮았는지 모르겠다. 화분의 넓고 통통한 이파리가 떨어지는 빗줄기를 맞고 흔들렸다. 물끄러미 주시하던 중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형. 뭐야.”
“낮잠 자는 줄 알고, 문 조심히 열었더니.”
“나 몰래 무슨 말 하다가 왔어?”
겨울이 대답은 하지 않고 부산스레 굴었다.
“형. 나 수술받으려고 뉴욕 온 거 아니야?”
“……맞지. 너 수술받으려고 온 거야. 왜.”
“근데 수술이 왜 자꾸 미뤄지는데.”
“…….”
못 들은 척하며 겨울이 테이블 위의 책에 관심을 보였다.
“마취 거부해, 또?”
“…….”
“그래? 응?”
“…….”
“마취가 안 되냐고 묻잖아.”
“…….”
뭐 어쩌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수술 못 하는 거, 내 잘못이야?”
“누가 네 잘못이래?”
“내 잘못도 아닌데 왜 사실대로 말을 해 주지도 않고 감춰?”
태어날 때부터 약했던 심장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렇게 버들은 외웠다.
“조금 쉬다 보면…….”
“알아.”
버들이 겨울의 말을 잘랐다. 당장 수술이 어렵게 됐으니 심장이 더 나빠지지 않도록 절대적 안정이 필요했다. 뉴욕은 요양하기엔 너무 들떠 있는 도시였지만, 고립되어 있는 병원만큼은 예외다. 의자를 끌어 겨울이 버들에게 다가갔다.
“수술 빨리하고 싶어?”
“때 되면 하겠지, 뭐.”
“새끼야. 빨리하고 싶다고 해야지.”
“아. 그런 건가?”
“수술 빨리하고 싶어?”
“응. 그런 거 같아.”
날이 밝았다. 어제, 일주일, 한 달 전과 다르지 않은 하루가 시작되었다.
* * *
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간 황 대표가 곧장 냉장고부터 열었다. 수영을 다녀온 길이었다. 한동안은 그냥 지나가는 바람을 인기척으로 둔갑시켜 이른 아침이건, 늦은 밤이건 문을 열어 꼭 바깥을 확인해야 직성이 풀렸다면. 한 달이 지나고 나니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가 나더라도 태평히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을 수 있게 됐다. 신발을 벗고 들어온 사람은 유 대표였다. 두 대표 사이에서 특별히 오가는 대화가 없었다. 생수병 뚜껑을 열어 황 대표가 목을 축였다.
“생각보다…….”
먼저 입을 연 쪽은 유 대표였다.
“멀쩡하게 사니까, 짜증이 확 나네.”
뜬금없는 유 대표의 빈정거림에 황 대표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여태 골프 따위에 별로 관심 없던 새끼가 새로운 취미를 들였나 싶었다. 한쪽 벽에 세워져 있는 골프채에서 유 회장 사인을 발견했다. 버들이 들고 나갔던 골프채란 걸 이제야 알아본 유 대표가 인상을 찌푸렸다.
손잡이 부근에 매달려 있는 빨간색 리본이 그저 어이가 없다. 황 대표의 집에 버들이 들어왔던 흔적으로 봐야 하나? 아니면 다른 데서 버들에게 건네받은 걸 황 대표가 집까지 들고 온 걸까? 황 대표 성격이 어떤지 샅샅이 알고 있는 유일한 최측근으로서 본인이 내놓은 두 개의 답안 모두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다.
데이트 앞둔 풋내기처럼 설레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외출했던 그날, 비 맞아 열이 펄펄 끓는 버들을 병원으로 데려간 건 황 대표였다. 원래부터 만나기로 되어 있었던 건지. 우연히 마주친 건지. 둘 다 언급한 적 없는 그날의 사정을 저가 나서서 들쑤신다고 뭐 얻어지는 게 있을 리 없다.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싣기 전이었다.
「형. 혹시나 황 대표님이 나 찾으면…… 있잖아. 그냥 유학 갔다고 해. 절대로 아프단 말은 하지 마. 알았지?」
새끼손가락까지 걸어 왔던 버들의 당부를 겨울이 떠올렸다.
“왜 왔어.”
갑자기 사라진 버들로 인해 방황을 했다거나 혼란스러움을 겪었다거나 그런 흔적들을 집안에서나 황 대표 자체에서나 일절 찾아볼 수가 없었다. 뉴욕에 얼굴 보러 간다고 하면 오지 말라고 온갖 싫은 척 내숭을 떨어 대면서 정작 그날이 되면 버들이 아침부터 저를 기다리고 있단 걸 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황 대표다. 한창 다른 말을 하다가도 버들이 황 대표의 근황을 넌지시 물어 온다. 아. 그럼 그거 황 대표님도 드셨어? 아. 그럼 거기 황 대표님도 가셨어?
팔은 안으로 굽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부아가 치민다.
“버들이 요즘 따로 만나거나 해?”
황 대표가 생수병을 식탁에 내려놨다.
“한국에 없잖아. 떠보지 마.”
황 대표의 서늘한 눈매가 유 대표를 직시했다. 정적은 찰나였다.
“유학.”
짧게 유 대표가 상황 설명을 마쳤다.
“내가 떠보지 말랬잖아.”
귀찮단 투로 황 대표가 신경을 세웠다.
“어디가 떠본다는 건데.”
“자세히 말해 줄 거 아니면, 조용히 해.”
“어쨌든 궁금하긴 하나 보다.”
“유학, 그거 결정은 버들 씨가 한 거야?”
“그럼. 억지로 유학 가라고 등 떠밀었겠어?”
“이유가 있을 거잖아. 나야?”
유 대표가 헛웃음을 켰다.
“내 새끼가 유학 가는데 왜 이유가 너야.”
분위기가 여유 없이 팽팽하다. 황 대표 입장에선 ‘동성끼리라서. 친구 동생이라서’, 유 대표 입장에선 ‘친구끼리라서. 같은 성별인 내 막냇동생이라서.’ 감정이 더 구르지 않도록 유지해야 하는 선이란 게 있었다. 그게 아주 약간만이라도 균형을 잃고 쓰러진다면 와르르 무너져 수습조차 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오후에 일정 있어. 나가.”
“그거 우리 같은 일정이야.”
유 대표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다리겠으니 준비하란 듯 턱을 까닥였다. 돌아선 황 대표가 욕실로 들어갔다. 물방울이 흐르는 거울이 사물을 굴곡져 보이게 한다. 물소리가 멎었다. 황 대표가 젖은 제 칫솔 옆에 버석하게 말라 꽂혀 있는 버들의 칫솔을 외면했다.
정장을 갖춰 입은 두 남자가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숫자가 빠르게 하강한다.
“내가 걱정되는 게 있는데…….”
“…….”
“그게 쓸데없는 걱정이길 바란다.”
유 대표의 목소리가 낮게 주변을 울렸다.
“유학이고. 버들 씨가 직접 내린 결정이라며. 거기서 달라지는 거 있어?”
“……아니.”
“그럼 너 지금 쓸데없는 걱정하고 있는 거야.”
* * *
버들이 노트북을 앞에 두고 턱을 괬다. 저분이 누나셨구나. 나직하게 버들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황 대표와 곧잘 셋이서 식사 자리를 가졌었던, 여자분의 이름과 얼굴이 내내 화면에 나오는 중이었다. 예전에 황 대표와 저 누나란 분 둘이서 나누는 이야기가 묘연히 결혼으로 집중될 때면 어김없이 심장은 쿵, 쿵, 바닥으로 떨어졌었다. 추접스럽게. 버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멋대로 혼자 오해해 가족한테 질투를 한 꼴이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아예 없던 일로 만들고 싶다.
생중계인 데다 취재 경쟁까지 붙어서 그런지 화면이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기자들이며 방송사 관계자들이며 경호원들이며. 쉽게 구분 지을 수 없을 만큼 질서가 엉망이었다. 그만큼 관심도가 높았다. 한 장이라도 더 사진을 찍고, 조금이라도 더 길게 영상을 담아내기 위해 경쟁이 붙을 수밖에 없는 날이었다. 그들만의 세상처럼 비밀스레 치러져 왔던 그간의 재벌가 약혼식이 오늘만큼은 달랐다. 식 진행은 당연히 비공개였지만, 보여 줄 수 있는 부분들은 훤히 드러냈다. 그래서 특별했고, 특별한 만큼 화려했다. 내로라하는 연예인들과 정재계의 인물들이 입장하는 호텔 입구에 초점이 맞춰져 카메라 셔터가 사정없이 터졌다.
“형이다!”
지루하게 늘어져 있던 버들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포토라인에 서 주길 바라는 주위의 함성을 등지고 늘씬하게 잘 빠진 두 남자가 경호를 받으며 안으로 삽시간에 들어가 버렸다.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버들이 내쉬었다. 가슴팍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체온이 귓불까지 빨개질 정도로 달아올랐다. 황 대표를 봤다. 아주 잠깐이었고 그마저 옆모습이었지만. 상황 자체가 불만이란 듯 노골적으로 찌푸려진 미간이 확실하게 제 눈에 담겼다.
「저 없는 데서…….」
「난 너 없어도 잘 먹고 잘 살아.」
버들이 무표정하게 굳어 버렸다.
마음이 이상하다. 울지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평정심을 찾지도 못하겠고.
누나인 혜주의 약혼식이니 몇몇 미디어의 관심은 차남인 황 대표에게 향했다. 화면이 전환되어 그간 황 대표와 스캔들이 났던 연예인들이 모자이크가 되어 가십처럼 다뤄졌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갖가지 감정들이 무게를 실어 저를 짓누르는 것 같다. 버들의 눈꺼풀이 점차 느릿해졌다. 음울하게 잠긴 계절 한가운데서 덩그러니 길을 잃은 기분이 든다.
황 대표가 병원으로 들어갔다. 뉴욕이었다. 목적은 은사님의 병문안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지끈거리기 시작한 두통이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심해졌다. 조명이 어두운 복도를 피해 우선 인공적으로 가꿔진 정원으로 나갔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겼다. 차마 흡연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넉넉하지 않았기에 잠시 찬바람만 쐬려고 했었다.
난간을 향해 걸으며 황 대표의 시선이 무심하게 닿은 쪽이 벤치였다. 별생각 없었다. 벤치를 스쳐 지나 다시 정면으로 황 대표의 고개가 물 흐르듯 움직였다. 그러다가 문득, 다시 고개가 벤치로 향했다. 두 다리가 바닥에 묶인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벤치에 앉아 있어 작았던 그림자가 일어서면서 커졌다. 저를 먼저 알아봤다. 초조해 보이는 움직임이 그랬다. 다리를 시작으로 어깨, 목, 얼굴까지. 마치 하루가 걸릴 정도로 느리게 황 대표의 시선이 올라갔다.
거기엔 버들이 있었다. 수척하게 말라서.
“…….”
“…….”
말갛게 포동포동했던 볼살이 온데간데없다. 깜박거리는 큰 눈에서 전해지는 순한 인상이 아니었다면 누군지 모르고 스쳐 지났을 뻔했다. 황 대표의 인상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두 달 전, 긴 망설임 끝에 통화 버튼을 눌렀던 버들의 번호는 없는 번호가 되어 있었다. 심장이 태어날 때부터 약했단 걸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유학? 촌스러운 발상의 출처는 결국 뻔했다.
금방 도망칠 것 같은 버들의 앞을 가로막은 황 대표가 습관처럼 손목을 붙잡았다. 어깨를 비틀긴 했지만 간발의 차로 미처 황 대표의 손길까지 피하지 못한 버들이 쥐고 있던 뭔가를 뚝 떨어뜨렸다. 야외라서 그런지 뒤섞인 체온이 비슷했다. 겨울을 담고 있는 매서운 바람처럼 서늘한 황 대표의 눈매가 버들의 얼굴을 주시했다. 속눈썹, 코, 입술. 뭔가를 확인하는 것처럼 집요하게 따라붙어 핥았다.
예전에도 마른 몸이었다. 딱 하루를 건너뛰어 만난 버들을 무릎에 올려 두면 그새를 못 버티고 체중이 줄어들어 있는 게 감지될 정도였다. 음식점 전단지를 도토리처럼 모아 오고, 반찬 만드는 책을 뒤적거리면서도 정작 떠드는 수다에 자기가 뭘 먹었단 이야기는 꼭 빠져 있었다. 자꾸 버들은 말라갔다.
서로 떨어져 있는 동안, 그러니까 달력을 고작 몇 장 넘긴 사이 비척하게 말라 버린 느낌이 선연하자 황 대표가 저도 모르게 버들의 손목을 놓아 버렸다. 얼른 바닥에 주저앉은 버들이 떨어뜨렸던 걸 주워 등 뒤로 감췄다. 버들의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카디건 끝자락이 황 대표의 발등을 덮었다가 멀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버들이 뒷걸음질 쳤다. 호흡이 흐트러지고 금방 시야가 어룽졌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확보한 다음에서야 버들이 등을 보였다. 황 대표를 피해 부리나케 정원을 빠져나갔다. 카디건이 기어코 주인을 잃어버렸다. 턱에 들어간 힘이 빠지지 않는다. 혼자 남겨진 정원에서 황 대표가 버들의 손목을 잡았던 제 손을 내려다봤다. 앙상했다. 나뭇가지처럼. 버석거렸고.
……수술, 받은 거 아니었어? 욕이 짓씹어졌다.
「거울 안 봐? 너 지금 살 다 빠져서 곧 죽을 환자 같아. 못생겼고.」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생각을. 생각부터.
어두운 복도를 커다랗게 울리며 들리는 건 오로지 제 발소리뿐이었다. 혼자서 보내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했다. 처음엔 한사코 안 된다고 했던 가족들도 지금은 합의점을 찾아 최대한으로 배려해 주고 있다. 시간표처럼 시간이 쪼개졌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을 골라 버들이 형광펜으로 칠해 놓았다.
혼자서 할애하는 시간 동안 뭘 하냐면, 주로 침대에 드러누워 천장을 빤히 올려다보는 게 대다수였고 아니면 창밖을 구경하거나 시계 소리에 집중하거나 했다. 기분이 어떤지 묻거나 잠을 좀 자 두란 형식적인 참견 없이 오롯하게 홀로 남겨지면 그제야 황 대표의 생각을 이어 이어 할 수 있었다. 별 재미없는 병실이 넘실넘실 황 대표로 가득 찼다.
따지고 보면 첫사랑이 자신에게만 모진 게 아니었다. 막말로 지금은 뻔질나게 차와 여자를 바꿔 대며 살고 있는 겨울만 봐도 그렇다. 겨울이 현재 제 나이보다 어렸을 때였다. ‘이제 너도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학업에 전념하렴.’ 현실을 충고하며 뽀뽀밖에 못 해 봤다는 대학생 누나가 끝끝내 헤어짐을 고했던 그날, 쪽팔림을 모르고 겨울이 얼마나 요란스럽게 진상처럼 굴어 댔었는지 머릿속 저기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던 케케묵은 기억을 버들이 끄집어냈다.
남과 비교해서 처한 처지에 안도하는 게 얼마나 비겁한 짓인지 잘 알지만……. 그래도 겨울의 첫사랑과 제 첫사랑을 비교해 보고 나니까 어깨가 펴진다. 그나마 제가 좀 낫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좋아하는 사람이랑 나는 뽀뽀도 해 봤지. 키스, 거품 목욕도 해 봤지. 차 뒷좌석과 정자를 침대처럼 써 본 적도 있지. 그리고…… 잤지.
이게 핵심이다. 포인트. 별표를 여러 개 그려야 한다. 그냥 잔 게 아니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야하게 잤으니까.
모르고 살았으면 평생 억울할 정도로 달콤한 기억들이다.
다른 누구와 연애 경험이 있는 상태에서 황 대표님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후회가 꼬리를 문다. 좋아한다고 해서 좋아한단 고백을 마구잡이로 하면 안 되는 거였다. 귀하게 전달되어야 하는 그 마음이 발설한 횟수만큼 쉽고, 가볍게 느껴질 수가 있다니까. 맹세코 단 한 번을 쉽고, 가볍게 뱉어 본 적 없지만 무엇보다 듣는 상대방의 기분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해바라기도 죽을 때까지 안 줄 거다. 황 대표의 집에는 식물 같은 게 하나도 없었다. 이래서 사람은 분수 파악이 중요하단 말이 있는 모양이다. 정작 황 대표에게 주고 싶은 만큼 줄 수 있는 게 없었고, 해 주고 싶은 만큼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것도 모르고 까불었다. 물론 자신이 줄 수 있는 거, 해 줄 수 있는 게 있다고 해도 제 호의를 받을 필요가 없는 황 대표님은 거절했겠지만.
저에겐 달콤한 기억들이 애초에 게이가 아닌 황 대표의 입장에선 두 번 다시 꺼내기 싫은 악몽일 수 있다. 그래서 꼭 한 번, 다시 만나고 싶었다. 만나게 된다면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식은 아니었다. 적어도 병원에서만큼은 부딪히기 싫었다.
“유버들.”
복도를 지나 다다른 병실 문을 버들이 열어젖혔다. 버들의 이름을 안에서 부른 사람은 겨울이었다.
“어디 나갔다 와? 추운데 카디건이라도 걸치지.”
옷장을 열어 겨울이 겉옷을 꺼내 들고 왔다. 팔에 소매를 끼워 주기 전, 버들이 겨울을 안았다.
“웬 어리광이래?”
“……형.”
마주 안은 제 막냇동생의 뒤통수를 겨울이 사정없이 쓰다듬었다.
“버들아.”
“…….”
“같이 산책이라도 할까?”
“…….”
“추우니까 밖에 나가긴 좀 그렇고. 복도만 잠깐 걷는 거 어때?”
버들이 고개를 들어 겨울을 올려다봤다.
“형. 있잖아.”
“응?”
“나 지금 좀 어때 보여?”
뜬금없는 물음에 겨울이 버들의 얼굴을 감쌌다.
“너 어때 보이냐니?”
“못생겼지?”
“누가 너 못생겼대.”
순간 진심으로 화가 나서 겨울이 욕까지 내뱉었다.
“어때 보여. 솔직하게. 어?”
“…….”
“누가 봐도 지금 나, 환자야?”
겨울이 가만히 고개를 내젓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산책 핑계 대며 굳이 복도를 걸을 필요도 없겠다. 자기가 어때 보이냐고 물어 왔던 버들의 물음이 아주 참 오랜만이다. 거기서 바로 알 수 있었다. 만났구나.
“여기 황 대표님 계셔.”
아무렇지 않게 겨울이 그러냐고 받아쳤다.
“혹시나 해서…….”
“…….”
“나 보러 온 거야?”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 은사님을 겨울이 설명했다.
“나 아픈 거 절대 말 안 했지?”
갑자기 가습기 물을 갈기 시작하는 제 형을 빤히 쳐다보며 버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형!”
“자세히는 말 안 했어. 그것도 말실수로 잠깐 나온 거였고.”
“말실수? 그게 변명이 된다고 생각해?”
“감기 정도로 둘러댔어. 흔하잖아.”
버들이 입술을 깨물었다가 놨다.
“유학하다가 감기 걸려서 입원하는 거, 흔한 일 아니야?”
“……모르겠어.”
“흔한 일이야. 형 주변에 몇 명 그런 애들 있었어.”
적당한 때라고 생각했는지 겨울이 버들의 앞에 앉았다.
“병문안은 같이 왔는데 이동은 같이 못 해. 황 대표랑 서로 일정이 달라서. 근데 업무적으로 나눠야 하는 이야기가 있거든. 버들이 바빠? 안 바쁘면 여기서 잠깐 황 대표랑…….”
“밑에 카페 있잖아.”
“중요한 내용인데? 시간도 촉박해서. 밑에 카페는 자리도 좁고, 줄도 길잖아.”
“…….”
5분만. 3분만. ……1분 30초만. 1분만.
딱 1분만 있다고 간다고 하니, 버들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야.”
자리에서 일어난 겨울이 핸드폰을 꺼냈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버들이 뒤늦게 급해졌다. 거울 좀 봐 둘걸. 세수도 다시 할걸. 옷도 갈아입을걸. 그나마 겨울이 입혀 줬던 겉옷의 단추를 허둥거리며 잠그고 나니, 문이 열렸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이런 식의 재회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꾸준히 연습했던 그대로만 하면 된다.
예의 바르게.
예의 바르게.
예의 바르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황 대표와 유 대표가 그대로 서 있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자 문이 닫힌 엘리베이터가 다시 하강을 시작했다. 누구 하나 나서서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그렇게 몇 분간의 시간이 흘렀다.
“병문안?”
기가 막힌 어투로 황 대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유 대표가 먼저 일러 줬던 호수의 특실은 텅 비어있었다.
“퇴원하셨더라고.”
“3년 전에.”
뻔뻔하게 받아친 유 대표의 말에 어떻게 알았는지 황 대표가 정확히 기간을 언급했다. 사선 방향에 앉아 있던 버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걸치고 있는 겉옷을 잡아 당겨 그 아래 삐죽하게 튀어나온 환자복을 가리려고 아닌 척 애쓰는 노력까지 황 대표의 눈에 전부 잡혔다. 유 대표가 있어서 그런지 저와 한 공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원에서처럼 버들이 도망치지 않았다. 얼굴의 살이 사라지니 큰 눈이 더 커다랗게 보였다. 깜박이느라 눈꺼풀이 닫히면 주변이 고요해지는 착각이 일었고, 다시 뜨여 까만 눈동자가 드러나면 세상이 약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예의 발랐다. 완벽하게.
생각은 더더욱 꼬였다.
“여태 감췄으면서 얼굴 보여 준 이유가 뭐야.”
묻고 싶은 걸 물었다.
“너 좋으라고 보여 준 거 아니야.”
불쾌하단 듯 유 대표가 인상을 썼다. 그간 황 대표에게 버들이 아프단 말도, 현재 버들이 병원에 입원 중이란 말도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 달라고 버들이 부탁하기도 했지만 사실 황 대표에게 언급할 기회가 없었단 게 옳다. 황 대표가 먼저 물어 온 것도 아니고, 궁금한 낌새를 보이지도 않으니까.
그래서 짜증이 난다. 어디에서 뭘 하고, 뭘 먹었는지 사소한 것마저 세세하게 버들은 황 대표에 대해 궁금해했다. 버들의 그러한 부분을 긍정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 역시 짜증을 키우는 이유가 됐다. 뭘 사 줘도 시큰둥하던 애가 황 대표를 만나러 나갈 때면 잔뜩 신이 나서 새 옷도 꺼내 보고, 새 신발도 신어 보고, 새 가방도 만져 보는데…….
황 대표를 향한 버들의 감정이란 건강함을 닮고 싶단 동경에서 그칠 줄 알았다. 동경, 거기서 더 나아갈 수도 있단 변수는 당연히 염두에 두지 않았다. 속이 뒤집힌다. 더 나아간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둘 중 누군가 정확히 말해 주지 않는 이상 알 수 없겠지만 동경, 거기서 더 나아간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럼. 누구 좋으라고 보여 준 거야.”
황 대표가 건조하게 되받아쳤다. 평소와 똑같은 모습이다.
“황정우.”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자기 몸 상태와 수술까지 전부 마땅한 일로 받아들이면서도 결과야 어떻게 되든 버들은 미련 없어 보였다. 그러한 버들의 모습을 주변에선 의젓하다고 칭찬했지만 겨울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 버들이 다 놓아 버리면 어쩌나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황 대표가 한동안 머물러야 했던 시골에 버들을 딸려 보냈던 명목도 그 때문이었다. 버들을 위한 줄 알았던 그때의 선택을 지금은 사무칠 정도로 후회하고 있다.
“하나만 물어보자.”
창밖으로 바람소리가 제법 세차다.
“보러 갈 것도 아니었으면서, 버들이 어디에 있는지 조사는 왜 했어.”
“한국에 없는 이유가 궁금했으니까.”
“유학이라고 내가 말했었잖아.”
“유학이었으면…….”
야반도주하듯 날라야 했던 이유로 유학이란 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나만 졸졸 따라다녔던 얘가 유학을 간다고? 말도 없이?
“한국에 없으면 뭐. 네 성격에 없는가 보다, 하겠지. 시간 들여 가면서 조사는 왜 했어.”
선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한 암묵적인 협상처럼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황 대표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차례대로 주차장을 빠져나와 똑같은 속도로 병원을 벗어나던 중 유 대표의 차와 반대 방향으로 갈라지는 길목을 노려 황 대표가 도로 병원을 향해 핸들을 꺾었다.
정원 그 자리, 그대로 버려져 있는 버들의 카디건을 내려다봤다. 니트 소재다. 하얀 얼굴과 잘 어울렸다. 다만, 엉기게 짜인 굵직한 실이라 보온에는 별 영양가 없어 보인다. 한참 뒤 버들의 카디건을 주워들었다.
「대표님. 내일 주말인데 뭐 하세요?」
「일하겠지.」
「저 지금 배터리 없어서 전화 끊길지도 몰라요.」
전화가 끊기기 직전이었을 거다. ……대표님, 하고 저를 부른 버들의 목소리 뒤로 “잘 지내세요.”란 말이 따라왔었다. 건조한 어조였다. 먼저 주말에 뭐 하냐고 물어본 게 있으니 주말 잘 지내란 인사로 알아들었다.
고작 온실 속의 화초 정도가 아니었다. 가공되지 않은 다이아몬드 원석이나 다름없이 집에서 애지중지하는 버들의 위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혹여, 저와 이러고 있는 걸 들켜 유배라도 당한 줄 알았다. 어차피 데리고 살려고 했었으니까, 집에 버들이 가져다 놓은 것까지 포함해서 골프채 일흔 두 개는 어이가 없기는 했으나 고민거리까진 안 됐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이 막혔다. 룸에 들어오자마자 와인부터 찾았다.
* * *
버들의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더 세게 감아 보았지만, 결국 뜨였다. 시곗바늘에 귀를 기울였지만 집중이 여기저기로 분산됐다. 심란한 마음이 울렁거린다. 그게 가끔 헛구역질을 치밀게 만들었다.
딱 한 번,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동안 틈나는 대로 연습했던 게 물거품이다. 사과는커녕. 인사 한 마디 건넨 게 전부다. 딱 한 번만 바랐던 만남이, 두 번으로 불어났다.
구제불능이다, 진짜. 나는 대체 왜 이러지? 언제 정신 차리지.
제 스스로에게 질색하며 버들이 신경질을 부렸다. 잠 못 드는 밤이 지나간다.
“……응.”
한국에 돌아간다는 겨울의 말을 들으면서 버들이 턱을 주억거렸다.
-형. 아마 이 주일은 넘겨야 될 거야.
“그만 와도 돼.”
-딱히 너 보러 가는 건 아니고, 마일리지 쌓으려고.
“형이 자꾸 나보고 내 새끼라고 하니까 진짜 형 닮아 가는지도 몰라.”
-뭐가. 어떤 부분이?
“정신없는 거.”
-이 새끼가.
일이 바짝 밀려 있는 걸 버들이 걱정하자 그 정도쯤 형 능력으로 후딱 처리할 수 있다고 겨울이 뻐겨 댔다. 식사 거르지 말고, 술 좀 적게 마시고. 버들이 긁는 바가지를 겨울이 어쩐 일로 귀찮아하지 않았다. 진중하게 그러겠노라 대답까지 하니까 뭔가 더 수상쩍다.
-형 이제 들어가 봐야 돼.
“응. 비행기 오래 타느라 고생하겠네.”
-2주일 뒤에 봐. 하늘이 휴가 나오니까 같이 갈게.
“응.”
……저기! 전화를 끊으려던 버들이 얼른 귀에 다시 가져가 붙였다. 늦었다. 입에서 맴돌기만 할 뿐 소리 내어 뱉기까지 참 어려웠다. 황 대표님은 2주일 뒤에도 안 오시는 거지?
담담히 마음을 추스른 버들이 원래는 황 대표의 가죽 수첩이었던 걸 꼭 쥐었다. 정원에 나가 뒤늦게 떠오른 카디건을 찾았지만 이미 누가 치워 버렸는지 보이지 않는다. 버들이 벤치 끝에 앉았다. 여기가 제 지정석이 됐다. 바람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나뭇가지 끝을 쳐다봤다. 따뜻하게 마실 것 좀 들고 올 요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구 쪽으로 들어오던 황 대표의 걸음이 버들을 발견하면서 멈췄다. 만약 버들이 수술을 한 뒤 회복하는 과정이었다면 자신은 유 대표와 함께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지도 모르겠다. 황 대표의 시선을 피해 버들이 고개를 숙여 버렸다. 언제부터 나와 있었던 건지 버들의 코끝이 빨갛다. 올해의 겨울은 굉장히 추울 거라고 했었다.
황 대표가 먼저 거리를 좁혔고, 버들은 피하지 않았다. 손 마디마디가 하얗게 불거져 나올 정도로 꽉 쥐고 있는 게 수첩이란 걸 알았으니 그냥 넘어갈 순 없었다. 갑자기 황 대표에게 수첩을 빼앗기자 버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주라는 말도 못 하고 있는데 황 대표가 수첩을 난간 밖으로 던져 버렸다. 원래는 황 대표 물건이었지만, 버린 걸 주웠으니 내 거다. 숨이 턱까지 차 버린 버들이 등을 돌렸다. 그런 버들의 어깨를 잡아 황 대표가 다시 저를 보게끔 만들었다.
“유버들.”
분명 네가 들어오는 것 같은데 바람 소리밖에 나지 않아 보안 카메라를 확인한 적이 있다. 통화했던 날까지 돌려봤었다. 복도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네 모습을 보고 나니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일해야 하는 주말에 네가 말한 초콜릿 가게를 뒤지고 있을 때, 너는 집안에 둔 물건을 정리하고 색연필을 버렸다. 전부 네가 선택한 결과란 것에 확신이 찼다.
“너는 할 말이 있을 거고. 나는 들어야 하는 말이 있어.”
버들이 침을 삼켰다. 작은 목울대가 움직였다.
“죄송해요.”
버들의 그 사과에 다시 한 번 피가 식는 기분이 도졌다.
“난 네가 계산 같은 거 할 줄 모르는 줄 알았어. 네가 그렇게 보이도록 굴었으니까. 근데 너 계산기 전부 튕기면서 나랑 같이 놀았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단 버들의 표정에도 황 대표는 동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떠날 생각이었잖아.”
“…….”
“누가 등 떠밀어서도 아니고, 네가 직접.”
“…….”
“나는 가만히 있었어. 시작도 끝도 다 네가 결정했어.”
“…….”
“그러니까 취소해. 네가 이제껏 뱉었던 말 전부.”
“…….”
“거짓말이었다고 해.”
버들이 태어날 때부터 심장이 약했단 걸 알고 나서는 그 어떤 의지도 가루처럼 박살이 나고 말았다. 구질구질한 신파에 자신이 끼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살다가 딱 한 번만 마주치길 바랐다. 그건 잡음처럼 자신을 괴롭히는 그 가루조차 전부 없애기 위해서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뭐든지 다 해 드리고 싶고……. 그리고 제가 드릴 수 있는 거면 어떤 거든 황 대표님께 드리고 싶어요.」
“할 수 있는 거 다 해 주겠다고, 줄 수 있는 거 다 주겠다고 한 거.”
「모르니까 해 주는 말인데 좋아한다고 자꾸 그러는 거, 상대방한테 지고 들어가는 거예요.」
「……저는 대표님한테 이길 생각 없어요.」
“나한테 이길 생각 없다고 했던 거.”
「제 단물 다 빨아먹어 주세요!」
“단물 다 빨아먹으라고 했던 거.”
「노란색 해바라기는 왜 안 그려요?」
「그려 드릴게요! 노란색 해바라기 백 송이, 천 송이, 만 송이…….」
“해바라기 만 송이 그려 준다고 했던 거.”
「저는……. 대표님 매일매일 예뻐해 드릴 수 있어요.」
“매일매일 나 예뻐해 주겠다고 했던 거.”
「대표님. 무인도에 갈 때 저 꼭 데려가세요.」
「아까 뭐 들었어. 무인도에 안 간다니까.」
“무인도에 너 데려가 달라고 했던 거.”
황 대표가 잠시 숨을 참았다.
「나랑 뭐 하고 싶어서 좋아한다는 건데. 솔직하게. 화 안 낼게. 섹스하고 싶어요?」
「저 대표님이랑 섹스하고 싶어서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그럼. 지지고 볶고, 연애질 뭐 그딴 거 하고 싶어요?」
「아니요. 저는…….」
「섹스가 목적도 아니고. 연애질도 아니고. 그럼 나 왜 좋아해요?」
「저는 그냥…… 대표님 보자마자 좋았어요. 얼굴이 좋았고, 몸이 좋았고, 발목이 좋았고, 손가락이 좋았고, 목젖이 좋았고, 눈이 좋았고, 입술이 좋았고, 눈매가 좋았고, 머릿결이 좋았고, 목소리가 좋았고…… 전부, 다. 다 좋았어요.」
“나 좋아한다고 내뱉었던 말 전부, 네 입으로 거짓말이었다고 해.”
깜박거림을 잊은 버들의 큰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침묵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버들이 눈을 감았다. 속눈썹에 밀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볼을 긋고, 턱 아래에 맺혔다.
“대표님 때문에 힘들어서 미칠 거 같아요.”
간신히 쥐어짠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로 인해 몽땅 어그러져 나왔다.
“처음처럼 꾸준히 욕하고 못되게 굴지 왜 잘해 주셨어요? 이름 불러 주고, 무릎에 앉혀서 재워 주고, 약이랑 끼니 챙겨 주고, 집에 데려가고, 뽀뽀해 주고, 머리 쓰다듬어 주고, 그 얼굴로 자꾸 웃기는 왜 웃어요?”
따지고 싶은 건 손가락과 발가락을 전부 꼽아 세워도 모자랄 만큼 넘쳐 났다.
“예전이랑 다르게 대표님이 저한테 잘해 주시니까 행복했는데 그게 아니에요. 돌아서고 나니까 하나하나, 전부 상처로만 남아요. 지금 이렇게 대표님이랑 마주 보고 있는 것도 저 너무 아파요. 아파서 죽을 거 같아요.”
먼지처럼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대표님한테 거짓말한 적 없어요. 대표님 좋아한 게, 제가 큰 죄를 지은 거예요? 따지고 보면 저 혼자 지은 죄도 아니에요. 좋아하게 만들어 놓고선. 처음부터 내 눈에 띄지나 말든가. 없던 일로 취소, 저는 못 해요. 대표님 뜻대로 다 해 드리고 싶은데, 그것만은 저 절대 안 할 거예요. 좋아해요. 대표님 좋아해서 그동안 힘들고, 아프고, 울었던 거 아까워서라도 취소 못 해요. 억울하잖아요. 대표님 말처럼 우리 같이 논 거라면 왜 저만 아파요? 없던 일로 하건 말건 대표님은 잘 먹고 잘 사실 거잖아요. 저도 살아야죠. 제 손으로 추억할 거 다 없애 버리면…… 저 이 자리에서 죽어요.”
수척해진 버들의 얼굴이 눈물로 푹 젖어 버렸다. 전부 좋았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인상으로 마냥 완벽한 줄 알았던 사람에게서 허점이 발견되자, 이제 막 좋아지기 시작했던 감정이 스스로 제어하지 못할 만큼 빨리 속도가 붙었다. 계절은 완벽한 봄이었다. 덩치는 저래서 강아지 무서워하고. 심각하게 길 하나 제대로 못 찾고.
자려고 누우면 어김없이 저 사람이 떠올랐다. 눈 돌아갈 만큼 예쁜 발목이 아른거려 잠을 설치기도 했지만 특히나 먹는 것만 먹고, 가는 곳만 간다는 게 무수한 밤을 뒤척이게 만들었다. 세상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경치 좋은 곳도 되게 많다는데. 맛있는 걸 찾아내지 않고자, 경치 좋은 곳에 감동받지 않고자 아등바등 애를 써왔던 자신의 시간과 저 사람이 통째로 겹쳐 보였다.
이기심에 눈치채지 못한 내 교만한 착각이었을지언정 상관없었다. ‘대표님. 저랑 궁에 갈래요? 제가 맛있는 거 사 드릴게요.’ 해 보지 못한 무수한 처음을 마찬가지로 처음일 저 사람과 같이하고 있단 상상만으로 사는 게 문득 즐거워졌다. 그래서 태어나 처음 욕심냈다. 유일하게 품어 본 욕심이 소중하니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유버들.”
“이름 부르지 마.”
“……버들아.”
“아프다니까! 너 때문에 아파!”
좋다. 좋아하니까 좋아한다고 따라다녔고, 떠나야 할 것 같아서 떠났다. 절대로 계획된 계산이 아니었다. 황 대표와 처음이자 마지막 통화를 하는 동안에도 고민은 계속됐다. 떠난다고 말을 할까. 말까. 어차피 그와 아무 사이가 아니란 걸 뼈저리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주제에 직접 확인받는 건 무서웠다. 그래서 도망쳤다. 그렇게 해서라도 좋았던 기억만큼은 챙겨 가고 싶었다. 그러지 말걸. 후회가 사무친다.
“너…….”
다정하게 제 이름을 불러 줬던 황 대표의 목소리가 그대로 남아 있단 착각이 든다.
“……죽어?”
숨이 막혔다. 뾰족한 가시를 통째로 삼킨 것처럼 잔인하다. 이러다간 더 너덜거릴 심장조차 남아나질 않게 생겼다. 물론 떨어져 나갈 거였으면 진작 떨어져 나갔을 테지만.
황 대표에게 붙잡힌 제 손목을 버들이 내려다봤다. 불덩어리 같은 버들의 눈물이 황 대표의 손등으로 뚝뚝 떨어져 자국을 냈다. 울음은 도무지 멈추지 않았다. 그 여파로 비틀린 가슴이 쑤신다. 호흡이 삽시간에 무너졌다. 답답한 숨통부터 트기 위해 버들이 주변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자 서러움과 울분이 뒤섞인 감정이 기다렸단 듯 밑바닥부터 올라오더니 온몸을 크게 부풀려 뜻 모를 연민까지 느끼게 했다.
뿌리치는 버들을 황 대표가 재차 붙잡았다. 처음보다 더 확고하고 강한 힘이었다. 이대로는 가슴이건 심장이건 남김없이 전부 터져 버릴 것 같아서 질끈 눈을 감은 버들이 황 대표의 손을 물어 버렸다. 기를 쓰느라 아래턱이 파르르 떨렸다. 이를 세게 박아 넣고 처음부터 강하게 힘을 줬다. 내가 지금 이만큼이나 아프다고. 아픈 걸 알아 달라고. 태어나 처음 버들이 호소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황 대표가 버들에게 손을 내준 채 꼼짝하지 않았다.
“…….”
“…….”
진눈깨비가 버들의 어깨와 머리 위로 떨어졌다.
* * *
등 뒤로 문 닫히는 소리가 육중하게 들려왔다. 호텔에 들어온 황 대표가 담배를 꺼냈다. 거센 천둥이 쳤다. 진눈깨비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고 그 자리를 굵은 빗방울이 대신하고 있었다. 황 대표의 어깨와 머리카락이 살짝 젖은 채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잿빛이다. 사선으로 빗자국이 새겨지는 유리창을 황 대표가 외면했다. 새빨갛게 타들어 가는 담배 필터가 손을 따라 미약하게 흔들렸다. 굵직하게 선 핏줄들이 선명하다. 화면이 꺼졌다가 켜졌다가 하는 것처럼 기억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정신을 잃고 버들이 쓰러졌다. 마른 몸을 황급히 안아 들었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던 버들의 숨결이 나약했다. 병실로 들이닥친 의료진들이 버들의 침대를 빠르게 에워쌌다. 가슴 부근을 움켜쥐고 고꾸라져 있는 버들의 몸을 억지로 펴는 손길들이 억셌다. 애한테 그렇게 하지 말란 말을 겨우 소리 내어 발음했지만 묻혔다. 갈비뼈가 도드라질 만큼 말라 버린 버들의 몸으로 의료 기계들이 뒤덮었다.
바깥으로 떠밀리면서도 버들에게서 고개를 뗄 수 없었다. 버들의 관자놀이 옆으로 짓무른 눈물 자국이 여실했다. 속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갈 정도로 애달팠다. 그러면서 방긋방긋 잘 웃던 얼굴과 황 대표님 하고, 저를 부르던 싱그러운 목소리가 꿈처럼 아득하게 멀어졌다.
재떨이를 찾던 황 대표가 얼마 움직이지 못하고 멈춰 섰다. 떨어진 재가 주변을 더럽혔다.
생각을 정리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얼어 버렸다. 납득이 되지 않는다. 현실과 멀어지면서 뒤집어지기 시작한 제 속을 황 대표가 엄중하게 억눌렀다.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은.
해가 뜨고 날이 졌다.
나흘을 꽉 채우고 나서야 제 속에서 넘쳐흐른 모든 것들을 황 대표는 가까스로 추스를 수 있었다.
“형. 진짜 웃긴다.”
소란은 잦아들기 마련이다.
“모든 하마가 다 그렇대?”
“응. 모든 하마가 다 그렇대.”
“정답이…….”
자기가 내 준 문제를 바로 풀지 못하고 머리를 싸맨 여름을 지켜보면서 버들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처음에만 좀 맞장구 쳐 주다가 이내 하마의 하품 사정 따위에 시큰둥한 태도를 보인 겨울과 다르게 여름은 진심으로 궁금해서 빨리 정답을 듣고 싶어 하는 기색이다. 둘 중에 누가 더 공부를 잘했던가. 형제들끼리 고만고만하게 비슷한 성격 같으면서도 다른 부분은 이처럼 확연하게 갈라지니 새삼 신기할 따름이다.
나도 형제들 중 한 명이니까 남들 눈에 그렇게 비쳐지기도 하겠지?
일부러 제 형들의 잘난 점만 골라 줄줄이 떠올리고 나니 제 입장에서 닮았단 말을 듣는 게 뭐 딱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 것 같다. 자신이 키운 것도 아니면서 버들이 번듯한 둘째 형을 보며 굉장히 흡족해했다.
“이게 어려워?”
하마가 왜 하품을 하는지 처음엔 저도 몰랐던 주제에 버들이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 고민에 빠진 여름을 앞에 두고 버들의 시선이 커다란 원을 그리듯 병실을 훑었다. 큼지막했던 의료 장비들이 모두 빠져나갔다. 여지없이 잘 정돈되어 있는 공간은 그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시침을 뗀다. 그래서 어쩌면 더 비교가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저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동안 병원에만 붙어 있었을 둘째 형의 얼굴이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피곤함이 감춰지지 않는다. 경사가 가파른 산등처럼 위급했던 상황을 꾸역꾸역 넘기고 나니 일상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유난 떨 필요 없다.
“정답 말해 줄 테니까 내 말 들어. 알았지?”
“막내야. 너는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나서 협상하는 질이 너무…….”
“협상하는 질이 너무, 뭐.”
“깡패 같은 거 아니냐.”
“웃긴다, 진짜. 안 궁금하면 말고.”
“졸리니까 하품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시시한 이유로 하마가 하품하는 줄 알아?”
버들이 한만한 태도로 컵에 물을 따랐다. 여름과 슬쩍 눈이 마주치자 버들의 눈가가 휙 휘어졌다.
“어른들 싹 다 모시고 집에 가서 쉬어. 알았지?”
어른들이란 지금은 식사하러 나가 자리를 비운 형수님과 어제 막 뉴욕에 도착한 부모님이었다. 하마가 왜 하품을 하냐면……. 잘난 척하느라 버들의 말끝이 늘어진다. 여름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면서도 제 막냇동생을 꼼꼼하게 살폈다. 오늘 아침부터는 잘 웃고 재잘재잘, 말도 많이 하기 시작했다. 늘 봐 왔던 그 모습이다. 주치의의 소견처럼 단단히 버텨 주고 있는 게 다행이면서 대견하다. 혼자 있고 싶어 하는 버들을 위해 여름이 결국 턱을 주억거렸다.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연락하란 잔소리를 와중에 빼놓지 않았다. 응, 대답은 하나 건성인 태도다.
“막내야.”
마음이 바뀌어 다시 제 형이 병원에 눌러앉을까 배웅해 준다면서 버들이 얼른 슬리퍼를 꿰신었다.
“배웅해 준다면서.”
제 등을 미는 버들을 여름이 쳐다봤다.
“배웅해 주고 있잖아.”
“쫓아내는 거지. 이건.”
“아. 형. 옷 챙겨 가야지.”
식사하러 나간 식구들의 옷가지들이 뒤늦게 떠올랐다.
“맞다. 여기 황 대표는 왜 있던 거야?”
옷가지들을 바지런히 끌어모으던 버들의 어깨가 찰나 굳었다. 정신이 들자마자 계속해서 떠오른 얼굴을 의식적으로 모르는 척하는 중이었다.
“막내 너, 황 대표랑 친해?”
옷을 탈탈 털며 버들이 유독 더 바지런을 떨어 댔다.
“아. 같은 병원에 은사님이 입원해 계신대. 겨울이 형도 아는 사이고.”
“그럼 황 대표는 여기에 은사님 병문안 온 거야?”
“그렇겠지.”
버들이 작게 대꾸했다.
“난 또.”
대화가 더 이어지지 않길 바랐지만 그렇게 끊겨 버리고 나니 묘하게 허전하다.
“대표님……. 언제까지 계셨어?”
“너 진정될 때까지.”
“……그럼 오래 계셨겠네.”
“그거 이제 형 줘.”
겨울 소재들 옷이라 하나같이 묵직했다.
“종이 가방에 담아 줄까?”
“됐다. 바로 앞에서 차 대기하고 있어.”
“응.”
“추우니까 나오지 말고.”
포옹으로 형제가 인사했다. 병실 문이 닫히면서 간신히 혼자가 된 버들이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창밖으로 가득 펼쳐진 하늘이 시리다. 며칠 전에 내린 진눈깨비가 첫눈이 된 셈인가? 여전히 창밖으로 시선을 둔 채 버들이 링거 바늘이 빠져나간 제 팔을 무심코 문질렀다. 아직 약기운이 몸속 구석구석 남아 있는지 한숨조차 축 가라앉는다. 버들이 차분하게 눈을 감았다.
따로 알람을 맞추지 않았는데 괜히 횡재한 기분이 든다. 낮잠을 푹 자고 일어났는데도 아직 하루가 많이 남아 있었다. 여유롭다. 공들여서 씻고 나온 버들이 환자복을 새로 갈아입었다. 소매 쪽에 은근히 삐져나온 실밥이 거슬린다. 가위를 어디에 뒀더라. 서랍을 일일이 뒤져야 하는 게 생각만으로 번거롭다. 통이 큰 사나이답게 실밥쯤이야 없는 셈 치던 버들이 결국 팔을 이리저리 꼬아 가며 가위로 잘라 냈다.
꼭 쥐고 다니던 수첩 생각이 났다. 가죽은 망가지고, 종이들은 서로 눌러 붙었지만 군데군데 황 대표가 쓴 글씨들을 볼 수 있었다. 빈손에 버들이 지갑을 챙겨 들었다. 병실 문을 열고나오니 정체 모를 종이 가방이 툭 쓰러졌다. 종이 가방을 주워 든 버들이 내용물을 들여다봤다. 뜻밖이다. 직전까지 별생각 없던 버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잃어버렸다고 단념했던 카디건이 드라이클리닝되어 곱게 개켜져 있었다. 복도엔 어떤 인기척도 없었다. 혹시나 싶어 카디건을 꺼내 들어 깊숙이 코를 파묻었다. 기대했던 황 대표의 향수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상심한 마음에 잠시 주저앉았다가 종이 가방을 안에 넣어 두고 일부러 사람 많은 휴게실을 찾았다.
안쪽에 종이 가방을 우선 집어넣고, 버들이 일부러 층을 옮겨 사람들이 많은 휴게실을 찾았다. 음료수를 뽑아 텔레비전 앞자리를 차지했다. 손바닥에 비벼서 굴리자 캔이 더 따뜻해진다. 달지 않고 마냥 쌉싸래한 코코아 맛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진다. 캔을 이리저리 살폈다. 카카오 지수가 높다. 익숙해지면 이것도 괜찮겠지. 탐탁지 않은 얼굴로 몇 번 더 홀짝였지만 역시 한계다. 단걸 좋아하는 버들이 캔을 버리고 돌아왔다.
하릴 없이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병원에 있는 기간과 조각을 하지 못하는 기간이 정확하게 비례한다. 그새 손가락이 굳어 버리면 어쩌나 걱정이다.
휴게실 공기가 너무 건조하다. 눈가를 비비던 버들이 얼마 못 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 한기가 확 끼친다. 재채기가 터지면서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병실로 되돌아가는 길이 춥다. 버들의 어깨가 달달 떨렸다. 복도 끝에서 서서히 거리를 좁혀 오는 인영에 걸음이 느릿해졌다. ……두근거린다. 이건 어쩔 수 없는 반응이다. 버들이 벽 뒤로 몸을 감췄다.
저를 보자마자 숨어 버린 버들을 알아차렸으면서 황 대표는 걷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근처까지 가까워지자 협소한 공간에 가려지지 못한 버들의 발끝만 살며시 보였다. 하얗다. 무감했던 황 대표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대로 버들을 지나쳤다.
눈을 깜박이는 것도 아깝다. 멀어지는 황 대표의 등을 오도카니 선 채 버들이 주시했다. 진눈깨비가 내렸던 그날 이후, 사실은 다시 못 볼 줄 알았는데 이렇게 또 본다. 어깨가 넓어서 그런가. 키가 커서 그런가. 몸이 좋아서 그런가. 대표님은 가죽 재킷도 엄청 잘 어울리네. 버들의 입가가 저도 모르게 나긋하게 풀렸다. 문득 턱을 당겨 제 모습을 내려다봤다.
……괜히 봤다. 오늘따라 굉장히 후줄근한 느낌이다. 그림자로 확인한 머리 모양도 왠지 이상하다. 귀찮음을 무릅쓰고 아까 실밥이라도 잘라 낸 게 참 잘했단 생각이 든다. 몇 모금 마시지도 않은 코코아 때문에 속이 쓰리다.
만남은 또 이어졌다. 다음 날 정해진 검사를 받기 위해 간호인과 이동 중이던 버들이 원래는 내뱉으려고 했던 숨을 도로 삼켜 버렸다. 모퉁이를 꺾자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황 대표가 보였다. 층을 내려가야 하는 것도 똑같다.
……오늘은 코트 입으셨네. 속으로만 버들이 감상했다. 어떤 얼굴을 하고 계실까 궁금한데 차마 쳐다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얌전히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버들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작은 공간에 갇히게 되자 은은하게 황 대표의 향수 냄새가 풍겨 온다. 그러면서 갑자기 등에서부터 열이 솟구쳤다. 이미 목까지 빨개진 뒤다. 간호인이 걱정 담긴 투로 어디 불편하냐고 물어 오는 걸 버들이 냉큼 고개를 내저어 부정했다. 곤란하다. 애가 타서 마음이 졸아든다.
만남은 계속 이어졌다.
복도에서, 정원에서, 휴게실에서…….
장소는 바뀌었지만 하루에 한 번씩은 꼭 황 대표와 부딪혔다.
서로 모르는 척하는 건 똑같았다. 눈길은 오히려 반대로 향했고 흔한 안부조차 건네지 않았다. 가슴이 들썩거릴 정도로 커다란 한숨이 터졌다. 기운을 잃은 버들의 어깨가 삐뚤게 처졌다. 무관심이 깊어질수록 아무 사이가 아니란 걸 결국엔 실감하고야 만다. 황 대표와 한집에 살면서 통째로 공유했던 그 계절의 뜨거움을, 화상을 입어도 좋으니 어떻게든 붙잡고 싶은 심정이다.
일주일 즈음이 지났다. 그중에 이틀은 영하로 기온이 떨어졌었다.
버들이 문고리를 돌렸다. 병원의 도서관은 입원해 있으면서 처음 와 본 장소였다. 구석진 곳에 위치해서 그런지 찾는 사람들은 많이 없어 보인다.
안쪽으로 들어가던 버들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도망치려고 하다가 돌연 멈췄다. 아무리 우연이라도 큰 병원에서 만남이 잦으니까 혹시……. 그럴 일은 없겠지만 황 대표가 저를 보러 병원에 오는 건 아닐까, 제 뒤를 따라다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있다.
역시나 아니었다. 도서관에는 황 대표가 먼저 와 있었고 저가 나중에 도착했다. 진눈깨비가 내렸던 그날 이후 처음으로 버들이 황 대표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사소하게 스쳐 지나가는 눈길조차 없다.
버들이 책을 구경했다.
황 대표가 비스듬히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버들이 문을 열고 나타나면서 놀란 게 사실이었다. 간발의 차로 표정을 감출 수 있었다. 귀, 뒷덜미, 어깨, 등, 허리, 엉덩이, 뒤꿈치……. 버들의 뒷모습을 황 대표가 구석구석 눈빛으로 핥았다. 갈증이 난다. 하루에 한 번은 반드시 버들의 얼굴을 봐야 했다. 버들이 괜찮은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복도를 걷다가 저가 보이면 숨어 버리고, 휴게실이나 정원에 앉아 있다가 저가 들어오면 뭘 하고 있었던 간에 부랴부랴 달아나 버리던 버들이 오랫동안 시야에 담긴다. 오랜만이었다.
버들이 살짝 눈치를 봤다. 인문학 책을 모아 놓은 책장이 하필이면 황 대표가 앉아 있는 자리를 거쳐서 지나가야 한다. 멀찍이 떨어져 맴돌던 버들이 망설임을 끝냈다. 쭈뼛쭈뼛, 인문학 책장 앞으로 다가갔다. 여전히 책만 보고 있는 황 대표는 아마 저가 여기에 와 있는지도 모를 것 같다. 스토커라고 오해받으면 어쩌지. 그러기 전에 빨리 책을 빌려서 나가야겠다.
기계에서 뽑아 든 안내 종이를 바라보던 버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책 위치가……. 허망하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책은 책장 꼭대기에 꽂혀 있어서 손을 아무리 뻗어도 닿지 않는다. 한숨을 내쉰 버들이 다시 까치발을 들었다.
“…….”
“…….”
버들이 굳었다. 등 뒤에서 숨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리고 어깨 너머로 황 대표의 팔이 뻗어졌다. 버들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대신 꺼낸 책을 황 대표가 건네줬지만 버들은 받지 못했다. 그냥 고개를 푹 숙인 채 책 표지만 내려다봤을 뿐이었다. 별 말 없이 황 대표가 다시 책을 꽂아 넣었다. 그리고 그 책이 꽂혀 있던 오른쪽 옆에, 정확히 버들이 보고 싶었던 책을 골라 다시 건네줬다.
시야가 어룽진다. 이번엔 책이 아닌, 황 대표의 손을 바라봤다. 억장이 무너졌다. 목구멍을 긁으면서 침이 아프게 넘어갔다. 눈에 넣어도 안 아까울 만큼 크고 소중한 제 황 대표님이었다. 손등에 커다란 상처가 생겼다. 저가 물어서. 살점이 파인 주변으로 황 대표의 피부가 붉다. 눈가가 불콰해졌다. 며칠이 지났지만 황 대표의 손등 상처는 아물어 가는 걸로 보기 어려웠다. 버들이 황 대표를 밀쳤다. 책이 발등으로 떨어졌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혼자서 울 곳이 필요했다.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얼굴을 봤다. 달라진 게 있다면, 버들이 황 대표를 기다렸다. 진눈깨비를 맞으며 황 대표에게 울부짖었던 제 목소리가 귓가를 괴롭혀 댔다. 휴게실을 기웃거려 보고, 도서관을 다녀오고, 복도에 쭈그려 앉아 한참이나 시간을 보냈다. 슬리퍼를 끌며 터덜터덜 버들이 정원으로 향했다.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버들이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착각이 아니라서 더 놀랐다.
마주하게 된 황 대표의 얼굴에 사정없이 떨린다. 황 대표를 뒤로하고 버들이 먼저 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갔다. 매섭게 불어 닥치는 바람이 살갗에 스친다. 버들이 지정석이나 다름없는 벤치를 골라 앉았다. 두꺼운 겉옷이 무색하다.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아래턱이 딱딱 부딪혔다. 버들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조그마한 물건이 만져졌다. 미워하는 마음은 좋아하는 마음에 밀려 아주 조그마한 크기에 불과했다.
어디로 가 버렸으면 찾아 나서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정원 문이 열리면서 황 대표가 들어왔다. 서로 주고받는 말은 없었다. 황 대표가 고작 몇 발자국 떨어진 벤치에 앉았다. 제 무릎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버들이 황 대표가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대표님…….”
목소리가 작았다.
“……은사님 병문안 오셨어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황 대표가 병원에 오지 않으면 만남은 당장 오늘로서도 막이 내린다. 차가운 공기를 흠뻑 들이켰지만 돌연 답답해진 속이 풀리지 않는다. 가죽장갑을 낀 황 대표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황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들이 앉아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런지 한참이다. 대신에 버들이 놓고 간 게 있었다. 황 대표가 그걸 주워 들었다. 연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