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잘고 동글게 엉겨 있는 (22/24)

잘고 동글게 엉겨 있는

엎드려 누워 있던 황 대표는 아까부터 요란하게 진동을 떨어 대는 핸드폰을 찾아 베개 밑을 휘저었다. 가늘게 뜬 눈의 초점을 맞춰 확인한 액정에 익숙한 이름이 깜박인다. 유 대표였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진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도로 베개에 편히 고개를 파묻은 그는 짤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보통 이 정도 안 받으면 지쳐서 끊길 법도 한데. 유 대표에게 정도를 바라는 건 너무 큰 기대인지 전화는 계속 연결되는 중이었고, 그 탓에 기계를 엉성히 쥐고 있는 손바닥에 지진이라도 난 것 같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도 두 대표의 유치한 실랑이는 한참이나 끈질기게 이어졌다. 잠깐의 고요를 뒤로하고 진동이 짧게 지났다. 그냥 간과하기엔 미심쩍은 느낌이 스친다. 베개에 턱을 얹은 황 대표는 손가락만 대충 움직여 액정을 밝혔다. 대체 어디서 배워 온 건지 모를 희한한 말투로 유 대표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난무한 오타를 제대로 읽어 보면 뜻은 다음과 같았다.

[자네. 내 새끼 데리고 살면서 자꾸 그렇게 나한테 싸가지 없이 굴 건가? 그렇다면 내가 집으로 찾아가겠네.]

그리고 다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집으로 찾아오겠단 말은 괜한 협박이 아니라 진심일 거다. 버들의 친형만 아니었으면 뭐든 신경도 안 썼을 문제에 그는 심각하게 눈썹을 비틀었다. 늘 그래 왔듯 결국엔 문을 열어 주고 있을 제 모습이 그려진다. 치열하게 전개된 이번 각축전에서 두 손을 먼저 든 쪽은 황 대표였다. 여태 살아오면서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하고 우선이었던 남자에게 처음으로 약점이 생겼다.

둘만 있는 시간을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다. 썩 내키지 않지만 하는 수 없이 통화 키를 눌렀다. 벼르고 있었단 듯 다짜고짜 욕설이 쏟아진다. 전화가 걸려온 시간부터 응대까지, 예의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다. 물론 저희가 예의를 따질 사이는 아니지만.

황 대표는 익숙한 태도로 핸드폰을 귓가에서 멀찌감치 떨어뜨렸다. 그런데도 여전히 쩌렁쩌렁하다. 너무나 상스러워 고막이 썩을 지경이다. 미간 사이를 손끝으로 살짝 긁어내린 황 대표가 궁금했던 걸 물었다.

“술 마셨어?”

―그게 중요해?

“아니야?”

―그게 중요하냐고.

“중요해. 술 마셨어?”

―한 잔 마셨다. 한 잔.

한 병은 마셨단 소리네. 지금 전화를 받아 다행이다. 시간이 좀 더 경과했으면 완전히 취해 형편없이 뭉개진 발음으로 같은 말만 반복했을 것이다.

시트를 걷고 일어난 황 대표는 부스스한 머리칼을 쓸어 올림과 동시에 옆을 바라봤다. 잠버릇 심한 제 연인의 베개가 저만치 굴러떨어져 있다. 긴 팔을 뻗어 바로 끌어당겨 정리했다. 살짝 구겨진 베갯잇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꼼꼼하게 폈다.

차가운 안광이 너른 공간을 빠르게 훑었다. 함께 잠들었던 버들은 어디로 가 버렸는지 저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다. 자리를 비운 지 꽤 됐나 보다. 구겨진 시트를 손끝으로 쓸자 묻어나온 온기가 희미하다.

황 대표는 더 지체할 것 없이 어둠을 뚫고 침실을 벗어났다. 문고리를 돌려 작게 생긴 틈으로 왁자지껄한 소음이 확 파고든다. 소음의 출처는 1층이었다. 3층 난간에 한쪽 팔을 올리고 삐딱하게 선 황 대표의 시야가 밑을 향했다.

텔레비전 가까이에 서 있는 버들의 머리꼭지가 정통으로 눈에 담겼다. 딱 정수리뿐인데 그게 귀여워 터진 난데없는 웃음에 입가가 녹는다. 이때만큼은 저를 들들 볶는 유 대표를 향한 짜증도 하얗게 지워졌다.

―알았어?

“……어.”

침음 섞인 음성이 까칠하게 튀어나왔다. 덜 취한 상태라 그런지 통화가 예상보다 짧았다. 핸드폰을 대충 던져 둔 황 대표는 1층으로 내려가려다 말고 방향을 틀었다. 잠기운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 향한 곳이 욕실이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무렵에도 여전히 시끄러운 소리가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지나쳐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갔다. 딱히 조용히 숨을 죽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버들은 축구 경기에 얼마나 심취해 있는 것인지 자신의 등 뒤로 가까워지는 기척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그 덕분에 황 대표는 무방비한 버들의 뒷모습을 샅샅이, 혀로 핥듯 눈에 새겨 넣을 수 있었다. 버들의 발뒤꿈치부터 머리까지, 아주 느리게 기어오른 그의 눈길에 공기마저 은밀해진 순간이었다.

아킬레스건이 가엾게 푹 파여 있고, 길게 뻗은 목덜미는 설원처럼 새하얗다. 작업하다가 나왔는지 손에는 물감이 잔뜩 묻은 채였는데 대체로 화사하게 쓰인 색감이 이른 봄을 연상시킨다. 가만히 손목을 쥐자 갑작스럽게 스민 체온에 놀랐는지 흠칫 떤 버들이 고개를 휙 뒤돌렸다.

“대표님.”

“응.”

황 대표는 허리를 낮춰 버들에게 입을 맞추었다. 촉촉하게 맞닿은 입술이 쪽, 낯간지러운 감상을 남기며 떨어졌다. 버들이 찰나 어깨를 움츠리며 감았던 눈을 떴다. 물기로 어룽진 동그란 눈동자가 티 없이 맑다. 그 속에서 정신없이 바뀌는 스크린이 아른아른 흔들렸다.

시력이 나빠질 것을 우려한 황 대표는 우선 버들을 텔레비전에서 멀찍이 떨어뜨려 놓았다. 리모컨을 주워 든 버들이 아예 전원을 껐다. 착하기도 하다. 삽시간에 고요한 공기가 침전되었다.

황 대표는 1층 전등을 전부 올리면서 제 막냇동생을 반드시 집으로 데려오란 유 대표와의 통화를 상기했다.

치열하면서 애달프게 쌓아 올린 시간들을 통해 제 하나뿐인 꼴통의 고집이 얼마나 센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짧게 끝날 것 같지 않으니 계속 서 있을 수는 없어 버들을 소파로 데려가 앉혔다. 나란히 앉아 서로를 응시했다. 말간 볼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황 대표가 입을 열었다.

“왜 일어났어?”

새벽 2시경이다.

“잠이 안 왔어?”

“아까 낮에 너무 많이 잤더니……. 대표님은요?”

“나는 옆에 너 없어서.”

샤워를 막 한 참이라 황 대표의 촉촉한 호흡에서 민트 향이 풍긴다. 황 대표는 속눈썹을 빠르게 깜박거리는 버들을 좀 더 제 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녹녹한 애정이 서로의 눈빛을 통해 따스하게 물든다.

현재 버들이 걸치고 있는 옷은 황 대표의 크림색 니트였다. 체격 차이가 상당한 만큼 버들의 몸에는 사이즈가 커 제대로 된 옷의 기능을 상실했다. 어깨선이 고정되지 못하고 한참 아래로 떨어져 움푹 파인 쇄골을 전부 드러낸 것도 그렇고, 헐렁헐렁하게 손가락을 전부 가릴 정도로 소매가 축 처져 있는 것도 그렇고.

니트 군데군데 잘 지워지지 않는 물감이 묻어 있다. 다른 사람이 허락도 없이 제 옷을 꺼내 입은 것도 모자라 이딴 짓을 저질러 놓았단 것에, 원래라면 여과 없이 신경질부터 튀어나갔을 고약한 성미의 남자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다. 오히려 평온하다. 어느덧 ‘버들이 한정’은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 버린 터다.

자신의 변화를 자각 못 한 황 대표가 그저 버들이 불편하지 않게끔 묵묵히 소매를 접어 올려 주었다. 엄지로 지분거린 손목뼈가 새삼 앙증맞다. 크기와 모양, 전체적 느낌이 입 안에 굴려 뱉었던 어떤 과일 씨앗과 닮았다. 그 과일도 여름이 제철이었다.

황 대표가 버들의 팔을 들어 안쪽 여린 살갗을 빨았다. 갑작스럽게 침범해 온 자극에 움찔거리면서도 버들이 얌전하다. 입술 사이로, 혀로 느릿느릿 음미한 연약한 피부에 울혈이 피었다. 흡족함을 눈빛에서 드러낸 황 대표는 버들을 안아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곤 허벅지를 벌려 저를 보게끔 몸을 돌렸다.

“…….”

“…….”

큰돈을 들여 전문가를 고용해 체계적으로 식단을 짜 삼시 세끼를 챙기고 있지만 여전히 허벅지를 짓눌러 오는 가벼운 체중이 안타깝다. 버들의 수줍은 시선이 황 대표의 굵직한 목울대에 가만히 머물렀다.

“버들아.”

“네?”

뽀얀 볼에 입술을 붙였다 떼며 황 대표가 말을 이었다.

“아침 일찍 집에 가야 해.”

“좋아요.”

버들이 들떠한다.

“좋아?”

“대표님 서울 집 오랜만에 가는 거니까…….”

“아니. 너 본가 가야 돼.”

“왜요?”

“왜긴. 네 생일이니까.”

싫은데. 작게 투덜거리면서 버들이 인상을 찡그렸다. 집에 갔다간 제 생일을 구실로 유난 떠는 형들에게 오랫동안 꼼짝없이 붙잡혀 있을 게 뻔하다. 제 생일 때마다 매년 겪어 봤기에 확신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제 생일을 보내고 싶지 않은 버들이 황 대표에게 졸랐다.

“대표님이랑 같이 있을래요.”

손가락에 슬쩍 감아 올린 버들의 곱실한 머리카락 감촉이 부드럽다.

“네? 저 대표님이랑 같이 있을 거예요.”

버들의 뒷덜미를 감싸고 있다 척추를 쓸고 내려와 엉덩이에 다다르기까진 나긋나긋했던 황 대표의 큼지막한 손은 속옷 속을 파고들 때엔 불친절했다. 손바닥을 탐스럽게 채운 살덩이를 꽉 힘을 줘 잡았다가 서서히 풀었다. 보지 않아도 각인처럼 제 손자국이 선명히 올랐을 하얀 둔부가 상세히 떠오른다. 부드럽게 감싸인 버들의 피부가 마치 허리 짓을 해 보라는 듯 성감을 채근한다.

버들의 볼 언저리에 은은한 홍조가 번졌다.

서두르지 않는 속도로, 덧그리듯 저를 탐하는 손놀림을 밀어내는 대신 버들은 황 대표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무너졌다. 간지러움을 참느라 끙끙, 응축된 신음이 샌다. 온도가 더해지는 버들의 호흡은 황 대표의 귓전으로 고스란히 흘러들었다.

하아. 황 대표가 목구멍에 고인 한숨을 천천히 풀었다. 중심에 슬슬 열이 몰린다. 더 하면 결국 불이 붙고 말 것이다. 괴롭게 인상을 구긴 황 대표는 간신히 자제력을 발휘하였다. 녹아내릴 듯 말랑한 감촉을 잃은 손이 속까지 허전하게 만든다.

“대표님…….”

황 대표는 언뜻 수심에 잠긴 얼굴로 버들의 등을 토닥였다. 연애 전이나, 연애 후나 버들은 어미 닭 쫓는 햇병아리가 따로 없다. 자신과 떨어지지 않으려는 버들을 당연히 저 역시 어디든 보내기 싫다. 연인의 특권으로 오롯하게 버들을 독점하고 있다. 심지어 명절도 단둘이서 지낸다.

하지만 버들의 생일만큼은 예외가 된다. 재벌가의 귀하디귀한 막내아들로 태어난 버들이 가족들의 끔찍한 사랑을 독차지하고 성장했단 걸 모를 수 없는 입장이다. 황 대표는 버들이 몰래 탄식을 내쉬었다.

“……버들아.”

귓가에 다정한 밀어를 속삭이며 황 대표는 아홉 살이나 어린 제 애인을 어르고 또 어르고, 달래고 또 달랬다. 긴 시간이 지나서 버들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고집스레 단호했던 눈썹이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제 생일에 같이 무인도 가기로 한 약속은요? 저 짐도 다 챙겨 놨는데.”

황 대표의 시선이 버들의 어깨 너머 현관을 향하는 복도에 당도했다. 거기엔 버들이 말한 짐이 있었다. 아, 저게 짐 다 챙겨 놓은 거였어? 가방이 홀쭉해 아직 짐을 챙기지 않은 줄 알았다.

실망한 어조가 띄엄띄엄 이어진다.

“대표님 속옷 두 장이랑 제 속옷 여덟 장이랑…….”

황 대표의 눈매가 휘었다. 어쩌지 못할 사이 픽, 웃음이 났다.

“무인도에서 며칠이나 있으려고?”

놀리듯 물었다.

“…….”

“…….”

하루 동안 같이 있기로 했으면서. 그새 약속을 잊어버린 건가 싶어 버들은 말없이 쀼루퉁해졌다. 힘이 가해진 턱 아래에 조그마한 호두가 생겼다. 그걸 만지던 황 대표가 버들의 서운한 감정을 알아차리고선 서둘러 마른 몸을 으스러져라 품에 껴안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무인도에 단 하루 있을 거면서 자기 속옷을 여덟 장이나 챙긴 제 꼴통 때문에 자꾸만 웃음 짓게 되어 곤란하다.

쓰다듬거나, 자국을 남기거나, 입천장을 노긋하게 헤집거나……. 연인으로서 행하는 접촉이 진해지면 면역이 없는 버들의 민감한 몸은 모두 섹스 전희의 농밀한 애무로 받아들여 버리는지 금방 속옷이 젖어 버리고야 만다. 정력 좋아지는 한약과 장어 꼬리를 꾸준히 먹어 오고 있지만 하등 소용이 없다. 제 아래에서 발개진 눈가로 허물어지는 버들이 황 대표는 그저 좋고, 기특하다.

“무인도에서 우리 하루 내내 폰 섹스 하기로 했잖아요.”

버들은 잘 느끼는 야한 몸으로 단둘뿐인 무인도에 가서 하루 내내 하고 싶은 게 달랑 폰 섹스인 남자다. 그러한 간극들이 저를 서서히 물들이다가 끝내 속절없이 빠져들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란 걸 일찌감치 인정하지 못하고 부정했었다. 맹목적인 애정에 오만했고 건방졌다. 그렇게 지나쳐 온 계절 중엔 분명 온도 높은 날이 무수히 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버들의 첫사랑은 늘 혹한처럼 매서웠다. 웃는 얼굴로 감춰 왔을 열병에 얼마나 앓고 아팠을지 감히 상상도 못 하겠다.

“황 대표님.”

미어지며 일그러진 황 대표의 음울한 마음을 버들의 나지막한 음색이 밀어내었다. 상처 입거나 부서지는 걸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온몸으로 부딪쳐 왔었던 버들의 체온이 절절히 전해진다. 위태롭긴 했지만 결단코 나약하진 않았다. 수분을 촉촉이 머금고 있는 그 체온으로 버들은 황 대표의 세상을 기어이 뒤집어 놓았고 황폐한 감정에 꽃씨를 심어 냈으니까.

“……하기 싫어요?”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우리 내일 무인도에 가요.”

황 대표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

“…….”

버들이 다물린 황 대표의 입술을 어서 열라며 조르듯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황 대표가 깊게 버들을 포옹했다.

“내일은 본가에 가고……. 나중에 폰 섹스 이틀 하자.”

황 대표님과 폰 섹스를 이틀이나 할 수 있다니. 괜찮은 제안이었다. 자신의 잇속을 챙긴 버들이 사업가 집안의 자제답게 겉으로는 마지못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버들의 수가 훤히 다 보여 황 대표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황 대표는 그대로 안아 든 버들을 침실로 데려갔다. 손에 물감이 묻어 침대가 더러워질 수도 있다고 일어나려는 걸 괜찮다며 재웠다.

생일을 맞은 버들을 본가에 데려다줘야 하는 아침은 야속하게 빨리 찾아왔다.

* * *

버들이 잠든 뒤로 황 대표는 서재에 박혀 일했다. 문득 시계를 바라봤다. 내리 몇 시간을 타자만 두드렸더니 손목이 뻐근하다. 어느 순간부터 진척 없이 커서가 제자리에서만 맴도는 중이다. 인상을 찌푸린 황 대표는 애써 썼던 몇 줄을 미련 없이 지워 버렸다. 펜을 찾다가 무심코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직은 어슴푸레하나 갈수록 날이 밝아 오는 시간이 이르단 걸 깨달았다. 이제 꽃샘추위만 무사히 넘기면 따뜻한 바람이 불 것이고, 그럼 완연한 봄을 실감할 수 있다.

「제가 계획을 세워 봤는데요. 텃밭에 브로콜리 따 먹고, 버섯 캐서 먹고, 감이랑 사과 따 먹고.」

풍요로운 텃밭은 물론이고 각양각색의 꽃과 식물로 화사해질 저들만의 정원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황 대표는 머릿속으로 해바라기 파종 시기를 세심히 체크했다. 8월, 계절이 여름으로 향할 즈음 담벼락을 물들일 태양의 꽃에 버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그걸 떠올리자 일이 막혀 답답했던 게 가신다. 버들은 황 대표만의 피로 회복제였다.

저 멀리 능선을 휘감은 구름이 구불구불 흐른다. 한적한 풍경과 어우러지는 재즈 선율을 떠올리며 황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삼중 책장을 슬라이딩해 가득하게 찬 음반 중 하나를 골라 음량을 작게 조절해 오디오 전원을 켰다. 선별이 옳았다. 바닥부터 깔리는 피아노 연주가…… 와인은 안 되겠고, 갓 내린 원두커피를 곁들이고 싶게 한다.

힐긋 돌아본 노트북 옆의 컵이 텅 비어 있다. 버들이 친히 만들어 준 우드 코스터에 컵 모양대로 둥글게 커피 자국이 남았다.

서재에서 벗어난 황 대표가 막상 향한 곳은 주방이 아닌 침실이었다. 문고리를 최대한 천천히 돌렸다. 보일러 온도를 높여 놓은 덕분에 감도는 온기가 훈훈하다. 들어와 보길 무조건 잘했다. 침대 밖으로 버들의 한쪽 다리가 내려와 있다. 더 늦었으면 굴러떨어졌을 거다.

최대한 침대 안쪽으로 버들을 옮겨 놓고 곁에 앉았다. 버들의 손이 습관처럼 황 대표의 옷자락을 걷어 배꼽을 찾는다. 그 가소롭기 짝이 없는 손길이 문란했던 남자를 동요시킨다. 복근 전체로 뻣뻣이 힘이 들어간다.

황 대표는 자신의 배를 만지작대는 버들의 손은 내버려 두고, 반대쪽 손을 들어 눈앞에 가져가 꼼꼼히 살폈다. 검지 손톱을 재차 확인하던 황 대표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옷이나 이불에 쓸리면 아플 게 분명하니 침대 옆 서랍을 열어 꺼낸 손톱깎이로 거스러미를 신중히 잘라 주었다. 손에 묻은 물감들을 젖은 수건으로 완벽히 닦은 다음 한의원에서 받아 온 연고를 듬뿍 발라 놓았는데, 그 덕분인지 건조한 게 많이 가셨다. 감촉이 부들부들하다.

그대로 버들의 손끝에 입 맞췄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열일곱 번……. 손등, 손바닥……. 조용한 공간에 자그마한 소음이 소란을 일으킨다. 쪽, 쪽, 하는 소리가 금방 서른 번을 넘어갔다.

그나저나 잠을 대체 어떻게 자는 건지. 버들이 니트를 다 늘려 놓았다.

“가슴 다 보이게.”

하얀 나신에 황 대표의 눈길이 지그시 닿았다. 삐죽 튀어나온 크림색 실을 잡아당기자 뜻밖에 둘둘 풀린다. 생일을 맞은 건 버들이건만 선물은 제가 받은 기분이다.

버들의 머리 옆에 팔을 짚어 체중을 지탱한 황 대표는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그러곤 깃털처럼 조심스레 버들의 몸에 입술을 묻었다. 가슴팍 사이에서 전해져 오는 뜨끈뜨끈한 체온이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

본격적으로 동거를 시작한 이후로 황 대표가 버들이 몰래 가장 많이 들여다보고, 가장 많이 입술로 지분거리는 곳이 수술 자국이다. 그때 많이 힘들고 아팠단 걸 호소하듯 흉터는 깔끔히 아물지 못했다. 새살이 뒤죽박죽 올라와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다. 수술하고 건강해지면 버들의 마음에도 변화가 있을 줄 알았다. 어린 날의 제가 잠들기 위해 혜주의 피아노 연주를 필요로 했지만 그까짓 것 백색 소음으로 대체할 수 있었던 것처럼.

수술 후 눈물로 눈가가 짓이겨져 애달프게 잠든 버들을 두고 돌아서야 했다. 잡고 싶었지만, 수백 번 들려준 버들의 진심 어린 고백을 믿지 못해 끊임없이 시험하고 괄시한 제겐 감히 자격이랄 게 없었다. 혼자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들었던 생각과 기분의 귀결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참담한 수준이었으며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버들은 모든 예상을 깼다.

자기가 없으면 쉽게 잠들지 못하는 저를 알면서도 하다못해 감정의 우위에 서려는 법 없이 한결같았다. 버들은 저를 탓하며 차갑게 외면하는 식으로 벌주지 않았다. 자기 좀 봐 달란 듯 찾아와 해사하게 웃는 버들의 얼굴에 속이 남을 것 없이 뭉개져 내렸다. 처음부터 버들은 길 잃는 법이 없었다. 수술 후 안정을 찾고도 오로지 저만을 향해 있던 그 순한 눈망울에 밑바닥까지 허물어졌다.

「좋아해요.」

……너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던,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던 계절의 변화가 시시했겠지. 아기자기하게 즐거운 감정을 전혀 알지 못했을 거고. 무엇보다 맹목적인 애정을 받는 경이로움을 일절 이해할 수 없었을 거다.

새근거리며 잠든 버들의 얼굴이 눈길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아무래도 생일이니까 가족들이 있는 본가에서 머물다가 자고 올 텐데, 버들과 떨어져 지낼 시골집에서의 하루가 벌써 암담하다.

황 대표는 이불 속으로 버들의 팔을 집어넣어 준 뒤 메모지에 뭔가를 휘갈겼다. 혹시나 잠에서 깬 버들이 저를 찾아 불안해하며 울지 않도록.

트레이닝복을 갖춰 입은 그는 싱크대 앞에 섰다. 운동하러 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버들은 소화 기관이 약한 탓인지 꼬들꼬들한 밥보다 조금 진 밥이어야 몇 수저 더 뜨기 때문에 가급적 쌀을 오래 불려 놔야 한다. 요리 학원에서 배워 온 걸 토대로 버들의 식성에 맞추는 일은 이젠 완벽히 터득한 뒤다.

냉장고를 열어 버들의 스승님 댁에서 챙겨 준 사골 육수를 꺼냈다. 미리 다진 마늘, 국 간장, 마른미역, 전복도 차례차례 준비했다. 산지에서 직송한 전복이 싱싱하다. 꿈틀꿈틀, 아직 살아 움직이는 전복을 본 그의 표정이 살짝 얼었다. 아이스박스 뚜껑을 닫는 폼이 조금 다급했다.

유 대표와 나란히 찾았던 요리 학원에서의 첫날이 떠오른다. 그날은 별로 좋지 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두 남자 모두 키가 크고 근육질 체형이라 둘러멘 앞치마가 금방 찢어질 것처럼 팽팽히 당겨졌다. 서로의 모습을 한껏 비웃어 주다가 새우와 꽃게의 위엄에 겁먹고 도망쳐 나왔었다. 감자 깎을 때가 가장 평안했다. 그 순간엔 잡념 따위도 잊었다. 하지만 계속 감자만 깎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굳은 결심과 달리 막상 실천에 닥치면 살아 있는 해산물이나 생선 따위들을 만지지 못해 벽에 붙어 있기 일쑤였는데 버들이 먹일 생각에 지금은 많이 개선된 편이었다. 전문가가 짜 준 식단대로 질문할 게 많아 요리 선생과 단둘이 수업을 한 지 꽤 됐다. 나이 지긋한 요리 선생은 한식 전문가이기도 해서 도움을 크게 받는 중이다.

집을 나서자 싸늘하게 폐 속을 채우는 바람이 춥기보단 오히려 쾌청하다. 구름이 걷힌 하늘이 서서히 밝아 온다. 날씨가 맑겠다. 3월 6일. 버들은 햇살이 나른히 흩뿌려지던 오후에 태어났다.

평소보다 이르게 조깅을 마치고 돌아온 황 대표는 곧장 고개를 꺾어 3층을 주시했다. 버들이 아직 깨지 않았는지 공기가 고요히 잠겨 있다. 트레이닝복 상의 지퍼를 잡아당겨 내리자 흉포하게 갈라진 상박근이 훤히 드러났다. 황 대표 몸 위에 올라타 버들이 애무할 때 가장 진하게 얼굴을 붉히는 장골 역시 선명하다.

서둘러 샤워를 끝낸 황 대표는 머리도 말리기 전에 불려 놓은 쌀을 넣고 밥솥을 작동시켰다. 요리 선생에게 배울 때 따로 메모해 놓은 ‘미역국 끓이는 법’을 꺼내 잘 보이는 위치에 자석으로 부착했다. 실수하면 안 되니 눈으로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황 대표가 계단을 밟았다.

“버들아.”

아직도 자고 있겠거니, 했는데 버들은 침대에 일어나 앉아 있었다. 손에는 ‘운동 갔다 올게.’ 하고 아까 적어 놓은 메모를 쥔 채다.

“대표님.”

“응.”

어제 낮에 많이 잔 덕분인지 새벽에 한 번 깼어도 피곤함이 없는 버들의 얼굴에 황 대표가 안도했다. 곁에 앉자 이불을 모아 꼼지락거리는 폼이 약간 수상하다. 황 대표에게 잡혀 버들은 금방 이불을 빼앗기고야 말았다.

“꿈꿨는데…….”

몽롱한 눈가로 버들이 허둥지둥 변명했다.

“내가 나왔어?”

“……네.”

같이 산 이후로 황 대표는 꿈속에 저가 나오면 버들이 몽정한다는 걸 알게 됐다. 애송이 새끼. 10대 때 치러야 할 과정을 지금 치르고 있다. 그 과정이 제 감시 아래 이뤄지고 있단 게 다행이다. 키스도, 가슴이 범해진 것도, 섹스도, 몽정의 대상도 버들에겐 전부 제가 처음이다.

“씻겨 줄까?”

“대표님은 벌써 씻으셨잖아요.”

“또 씻지, 뭐.”

흑심이란 전혀 없는 얼굴과 배려를 우선시하는 나직한 목소리 톤이었다. 버들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황 대표는 무릎 뒤에 팔을 넣어 버들을 번쩍 안아 올렸다. 저벅저벅. 침실과 연결된 욕실 문이 굳건하게 닫혔다.

시간이 흐르고, 물소리는 우뚝 멎었는데 욕실은 조용하지 않았다. ……아, 읏! 힘에 겨워 헐떡거리는 버들의 신음이 메아리처럼 여운을 남기며 울려 퍼졌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황 대표의 거친 호흡이 들려왔다. 넓은 욕실 안이 수증기로 가득 채워질 정도로 샤워하는 시간이 진득하게 길었다. 버들의 울먹임이 섞였다.

달칵, 욕실 문이 열렸을 땐 커다란 수건에 돌돌 말려진 버들이 여전히 황 대표에게 안겨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버들의 온몸을 씻겨 준 황 대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버들의 온몸을 빨아 댔다.

물론 빨기만 한 건 아니었다. 선반에 앉혀진 순간부터 버들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다리가 들렸고 여유 없이 그 틈새로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미끄러운 비눗물 때문인지 촘촘한 주름은 평소보다 나긋나긋하게 풀렸다. 정성껏 이완을 해 주었지만…… 굴곡진 핏줄이 돋아 험악한 황 대표의 중심이 삽입해 올 때면 그 자체만으로도 빠듯해 역시나 숨이 턱턱 막혔다. 높은 열을 전해 주며 달구치는 허리 짓에 그야말로 혼이 빠져나가는 줄 알았다.

황 대표가 버들을 침대에 조심히 눕혔다. 버들의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 내는 손길이 퍽 다정하다. 씨근덕거리며 버들은 진이 빠져나가 있는 반면 황 대표는 먹은 거 없이 포만감이 들어찬 표정이었다. 실제로 수영이나 조깅 따위로 몸을 풀 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개운했다. 이는 만족감의 차이였다.

황 대표는 사용한 수건들을 한데 모아 세탁 바구니에 넣고 돌아왔다. 시트를 구기며 미약하게 하느작거리는 버들의 마른 다리가 음습함을 고이게 만든다. 장골 아래로 삽시간에 힘이 들어간다. 말랑한 종아리에도 예외 없이 황 대표가 만들어 놓은 울혈이 울긋불긋하게 물들어 꽃밭이 따로 없다.

“……아.”

기껏 보송보송하게 물기를 닦아 줘 놓고 황 대표가 버들의 왼쪽 가슴을 입에 물었다.

“안 돼요…….”

고개를 떼고 황 대표가 왜, 이유를 물었다. 움츠러든 버들이 제 가슴을 사수하고선 고개를 내저었다. 그걸 강압적으로 벌리지 않는 대신 버들의 팔뚝에 입을 맞췄다. 피부에 입술을 묻은 그대로 말을 했다. 나른함이 퍼진다.

“안 돼?”

“……네.”

“조금도?”

“조금?”

“응.”

조금은 괜찮다. 버들은 수줍지만 팔을 약간 내리고 제 가슴을 애인에게 보여 줬다.

“10초만 세.”

“10. 9. 8…… 아아!”

첫 밤을 보냈을 때도 이랬다. 도무지 10초를 셀 수가 없다. 연애한 후로 이런 적이 많다. 손가락을 꼬박 접어도 모자라다. 그만큼 소복소복, 쌓여 가는 중이다. 10초를 세라고 했으면 10초를 셀 수 있게 해 줘야 하는데……. 남은 숫자는 신음을 내지르느라 생각조차 할 수가 없다.

침대 위에선 파렴치한 남자가 연약한 젖꼭지를 원 없이 탐하는 중이다.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그 조그마한 살덩이에서 단맛이 나는 것 같다. 축축한 점막이 점령해 오자 버들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보드라운 유륜 전체를 녹일 것처럼 느릿느릿 덧그리며 움직이는 혀끝에 눈앞이 아득해질 때 즈음, 힘을 강하게 줘 빨아 당기는 유희가 두피까지 쭈뼛 서게 만든다.

갈빗대, 허리, 등줄기……. 여기저기 만져지고 있는 탓에 전신이 절절하게 예민해진 상태였다. 몸의 감도는 조금도 식을 기미가 없는데 거기에서 체온을 한계까지 달아오르게끔 부추기는 농밀한 행위가 버겁다. 발가락을 힘주어 꼰 버들의 입가에서 기어이 흐느낌이 샜다. 황 대표와 함께 촉촉한 소나기를 함께 맞는 기분이다.

“아, 대표님…….”

절실한 버들의 부탁에 황 대표가 입술을 아래로 내렸다. 타액에 젖은 유두가 서늘한 공기에 노출되자 어깨가 흠칫 떨렸다. 여유가 없다. 배꼽 주변으로 더운 입김이 스민다. 버들의 아랫배가 납작하게 수축했다. 간질간질하게 저를 애태우는 황 대표 때문에 미칠 지경이다.

황 대표가 버들의 허벅지 뒤로 손을 넣어 높이 들었다. 예쁘다. 새삼 감탄이 든다. 버들은 예쁘지 않은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체모 없이 분홍 빛깔로 깨끗한 사타구니가 갈증을 불러일으킨다.

고분고분한 성기, 동그랗게 맺힌 음낭, 그리고 비밀처럼 감춰진 좁은 근육으로 연결되는 회음. 버들을 음미하는 황 대표의 눈빛이 한층 탁해졌다. 전체적으로 마른 몸인데 토실토실하게 살이 모인 회음이 곱고 순하다. 보송보송하면 보송보송한 대로, 습기가 있으면 습기가 있는 대로 만지고 싶다. 그래. 이걸 어떻게 눈으로만 봐.

자극 받은 귀두가 붉다. 미끄럽게 윤이 나는 게 꼭 자두맛 사탕 같다. 작게 갈라진 틈에서 끈적끈적한 점성이 느껴지는 액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솔직하고 야한 몸이다. 윤곽 잡힌 성기를 손바닥으로 감싸 쓰다듬어 올리자 그러지 말란 듯 버들이 얼른 황 대표의 손등을 붙잡았다. 손가락이 연약하게 바들바들 떨리고 있다.

“여기, 하지 마?”

탁한 한숨처럼 황 대표의 목소리가 터졌다.

“네, 네…….”

단단한 손이 이윽고 버들의 골반을 속박했다.

“으응, ……하.”

버들이 고개를 뒤로 꺾으며 시트를 움켜쥐었다. 배꼽 주변을 핥으며 배회하더니, 허벅지 안쪽의 가장 여린 살갗을 자근자근 깨물다가 놓았다. 그럴 때마다 버들의 숨이 짧게 끊겼다. 자극이 한꺼번에 오지 않고 천천히 고지를 향해서 지핀다. 으읏! 자신도 모르게 버들이 다리를 벌렸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 속으로 황 대표의 고개가 편히 안착했다.

버들의 종아리를 잡아채 높이 뜨게 하자 속수무책으로 회음이 드러났다. 그 여린 살갗을 혀로 반복해서 주룩 핥아 올리다 이어 입을 벌렸다. 점막 속에 굴러 들어온 음낭이 탄력적이면서 야들야들하다. 혹여 치아에 긁혀 생채기가 생기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가며 탐닉했다. 음란한 소음이 둘의 귓전을 축축하게 울렸다.

타액에 휩싸여 내뱉어진 음낭이 눅눅하게 젖었다. 등허리를 지르르 떤 버들은 좀 더 확실하게 발기했다. 버들이 질끈 눈을 감았다. 배 속이 간지럽다. 분명 거기 하지 말라고 황 대표를 저지한 것은 저인데……. 좀 더 옆, 좀 더 옆, 좀 더 옆.

곧 제 중심으로 이를 것 같았던 황 대표의 손길과 입김이 거리를 벌리자 안타까움이 엉겨든다. 멀어지는 황 대표를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 버둥거리던 버들이 황급히 무릎을 모았다. 황 대표의 머리통이 버들의 무릎 사이에 가둬졌다. 살갗에 머리카락이 비벼지는 느낌이 미묘해 놀란 버들이 숨을 크게 들이 삼켰다.

낮게 웃음 지으며 황 대표가 유연한 버들의 다리를 양옆으로 벌렸다. 얄궂게 자꾸 거기만 피해 뭔가를 해 주지 않으니 입 안이 바짝 탄다. 버들의 허리가 살짝 튕겨져 올랐다. 본인이 현재 황 대표의 입술을 제 가랑이 사이로 유도하고 있단 걸 버들은 자각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저 본능대로 이끌리고 있다. 손으로 제 걸 만지려는데 황 대표가 못하게 했다.

“아, 제발, 대표님…….”

버들이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발기한 버들의 성기가 미약하게 꺼떡거렸다. 털이 없어 뽀얀 게 순해 보인다. 황 대표는 다시 버들의 허벅지 사이부터 배꼽까지 혀를 세워 가며 애를 태웠다.

바라던 대로 오럴을 해 주니 조를 땐 언제고 버들이 허리를 뒤틀어 피하려 들었다. 황 대표의 단단한 손가락이 변덕을 부리는 버들의 허리를 붙잡아 고정했다.

“읏!”

황 대표의 손가락이 주름을 매만지자 움찔하며 구멍이 꽉 조여들었다. 조금씩, 손끝을 밀어 넣은 다음 손목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황 대표의 입술은 쉬지 않고 버들의 몸을 애무했다.

“흣, 아.”

버들은 작게 입술을 벌린 채로 색색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등마루가 전부 물렁한 젤리처럼 녹아 버린 기분이다. 오금은 물론 힘이 바짝 들어가서 주름진 발바닥까지 모조리 벅벅 긁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그만!”

버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목 주변도 마찬가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버들의 가느다란 허벅지가 경련을 일으켰고 울컥, 사정했다. 반드시 뒤를 자극하는 제 손길이 있어야지만 정액을 쏟아내는 버들의 몸에 황 대표는 은밀히 입매를 끌어당겨 미소 지었다.

두 남자 모두 정액 양이 많은 편이었다. 버들의 하반신이 진득진득 엉망이다. 한 번의 사정만으로도 온통 젖어 번들거린다. 허리를 세운 황 대표가 버들의 구멍에서 천천히 손가락을 빼냈다.

그는 제 볼에 튄 버들의 정액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다리를 서서히 놓아주자 버들이 잔기침을 터트리며 모로 몸을 돌렸다. 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황 대표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겹쳐진 다리 사이로 버들의 음낭이 눌린 게 비쳤다. 새하얀 피부가 시각적으로 자극이 크다. 황 대표가 버들의 성기를 잡아 허벅지 뒤로 가져왔다. 남아 있는 불투명한 정액이 주르륵, 흘러내리는데 신경을 아찔하게 죈다. 그걸 전부 엉덩이 사이에 발랐다.

“……대표님.”

“응.”

황 대표가 버들의 등 뒤에 붙었다. 겁먹은 것 같은 버들에게 다정히 팔베개를 해 주었다. 버들은 자신의 목 뒤를 지나온 황 대표의 손에 자신의 손가락을 얽었다. 단단한 가슴팍이 제 척추뼈에 밀착함으로써 야릇한 감촉이 저민다.

차츰차츰, 서두를 것 없는 속도로 제 속을 관통해 오는 것에 버들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내벽을 짓누르며 빈틈없이 메우는 황 대표의 성기가 속에서 더 커지는 것 같다. 이미 한계치에 다다른 버들이 아랫입술을 사리물었다.

황 대표가 버들의 턱을 잡아 고개를 살짝 뒤로 돌렸다. 포개진 입술 틈새로 서로의 신음이 풀어졌다. 버들이 좋아하는, 입술만을 쓰는 다정한 키스다. 머릿속이 금방 흐물흐물한 곤죽처럼 녹더니 사고 회로가 신체 한 곳에만 집중된다.

버들의 상태를 섬세하게 확인해 가며 야한 짓을 하고 있던 황 대표가 어느 순간 인상을 썼다. 침이 삼켜진 목울대가 올각거렸다. 잘게 찔러 박고 있는 움직임이 점차 깊고 빨라진다.

“하……. 앗. 아!”

버들의 신음이 한층 더 커졌다. 귓불을 빨고, 목덜미를 핥고. 꼼짝 못 하게 버들의 배를 둘러 안고 있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버들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자세가 낯선 것만으로도 벼랑 끝에 내몰린 것 같았는데 황 대표가 성기를 잡고 흔들자 공중으로 던져진 양 몸이 붕 뜨는 것 같다.

부드럽게, 거칠게, 다시 부드럽게 유영하는 허리 짓이 끝날 줄을 모른다. 성기를 흔드는 무례한 손짓도 마찬가지다. 황 대표의 손에 버들이 사정했다. 잘했단 듯 황 대표가 동그란 어깨 끝에 입을 맞추었다. 이어 바들거리는 한쪽 다리를 잡아 올렸다.

“으응!”

옆으로 누워 한쪽 다리가 들린 채 박히는 게 가늠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각도가 깊어, 버들은 잠깐 굳었다 이내 시트를 비틀어 쥐고 비명을 내질렀다. 황홀함이 미친 듯이 몰려든다. 황 대표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하아. 흥분한 황 대표의 숨소리가 버들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버들의 내벽을 적시고 싸지른 황 대표의 정액이 구멍 밖으로 넘쳐 흘러나왔다. 버들의 몸을 똑바로 눕히고 상냥히 혀를 섞었다. 콘돔을 사용한 섹스였다면 이대로 몸을 넣은 채 아늑한 감상을 즐겼을 테지만, 버들이 배앓이할 수도 있으니 서둘러 제 정액을 모두 긁어내야 한다. 지체 않고 황 대표가 다시 버들을 번쩍 안아 들어 욕실로 들어갔다.

침실에 있는 침대가 가장 컸지만 두 남자의 정액이 흥건하게 스며들어 깨끗해진 버들을 눕힐 순 없었다. 욕실에서 나온 황 대표가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 방은 많았다.

“버들아.”

탈력감에 버들은 대답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황 대표는 물기를 닦아 준 버들의 몸을 내려다봤다.

“아팠어?”

“아니요.”

버들은 간신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전히 숨이 찬지 목소리가 떨렸다.

“가슴은?”

“안 아파요.”

붉은 젖꼭지를 빨려고 하자 버들이 한쪽으로 얼굴을 치우치며 질끈 눈을 감았다. 아프단 뜻이었다. 버들이 안 아프다고 거짓말을 해도 황 대표는 이제 그 거짓말을 간파할 수 있었다. 며칠 전 미열이 지폈을 때도 그랬고, 몇 주 전 조각도에 손을 베었을 때도 그랬다. 버들이 아픈 걸 숨기며 참기 전에 황 대표가 먼저 헤아려 준다.

황 대표의 커다란 손이 혼곤한 버들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깜박거리는 눈꺼풀이 묵직하다. 초점이 아른아른, 흐려지니 황 대표의 얼굴도 아른아른, 흐려진다. 고개 숙인 황 대표가 나붓이 전한 귓속말에 버들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생일 축하해. ……자기야, 라니.

덧없이 로맨틱한 아침이다. 버들은 포근함에 이끌려선 스르륵 잠이 들었다.

버들이 깨지 않게 조심히 문을 닫고 주방으로 내려온 황 대표의 걸음이 어느 때보다 가볍다. 욕실과 침실을 옮겨 가며 애인을 정성껏 물고, 빨고, 핥고, 보듬은 만큼 시간은 촉박해졌으나 제가 서두르면 되는 것이니 큰 문제는 없다. 평일이라 다행히 차가 막히진 않을 테고.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시계에서 눈길을 거둔 황 대표의 얼굴이 마냥 여유롭다. 아무리 늦어도 몇 시까지 출발하면 좋을지 어림잡아 계산하며 손부터 꼼꼼하게 씻었다. 시선 정면에 들어와야 할 메모가 삐뚤어져 있어 자석을 하나 더 사용해 바르게 고정시켰다.

황 대표는 미역국 끓이는 과정을 다시금 신중히 훑고 나서 마른 미역을 미지근한 물에 담갔다. 아이스박스를 열기 전, 크게 심호흡을 했다.

테두리와 껍질을 솔질한 전복을 흐르는 물에 깨끗하게 씻은 다음 숟가락을 꺼내 살과 내장을 분리했다. 가위로 세심히 이빨을 제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단한 일을 해냈는데 숨 돌릴 틈이 없다.

집중해서 전복 손질을 끝내 놓는 동안 알맞게 불어난 미역을 전용 칼을 꺼내 작게 썰었다. 서툴고 투박한 손짓이다. 수영으로 단련된 탄탄한 팔뚝 근육과 비교했을 때 칼 사이즈가 너무나 소박하다. 전용 칼이란 표현도 너무 거창한 것 같다. 그냥 토마토나 썰어야 할 것 같은 과도다.

조각을 어렸을 때부터 해 온 버들은 모든 칼을 용이하게 다룰 줄 안다. 버들이 수준에선 사과를 나비로 깎은 것 정도는 정말 별것도 아니었던 거다. 위험하니까 처음엔 말렸었는데 도마가 흔들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식칼을 거침없이 내리치며 생닭을 손질하는 모습에 할 말을 잃은 적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유 회장님이 하는 거 옆에서 보고 배웠다면서 섬뜩한 칼날로 회도 곧잘 뜬다. 쫑쫑, 미역 써는 황 대표의 무의식이 제 하나뿐인 꼴통 자랑으로 흘렀다.

참기름을 두르고 미역을 볶자 고소한 냄새가 풍긴다. 아홉 살이나 어린 애인의 몸보신을 위해 전복을 잔뜩 넣었다. 간은 대체로 삼삼하게 맞추는 편이다. 오래 우린 사골 국물로 인해 맛이 진한 전복미역국이 완성됐다.

이어 칼집을 내 버터를 두른 전복을 오븐에 넣고 구웠다. 빈혈에 좋다는 생선은 언제나 빠지지 않는다. 꼬리 쪽이 살짝 탔다. 인상을 쓴 황 대표는 미관상 별로인 그 부분을 미련 없이 잘라 개수대에 버렸다. 밑반찬들을 꺼내 먹음직스러운 생일상을 거의 다 차렸을 무렵 방울이 딸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개코’라는 표현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황 대표는 충분히 예상했단 듯 창문을 열었다.

하얀색 털 뭉치가 꼬리를 방정맞게 흔들더니 컹, 목청을 높여 짖었다. 같은 시골 동네에 살아서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보고 지낸 지는 꽤 되었지만 저와는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요리를 할 때면 꼭 이렇게 찾아와 반갑게 알은척을 한다.

“전복 먹을 수 있어?”

황 대표가 묻자 납작 엎드린 재복이 엉덩이만 치켜들고 좋아했다. 전복이 뭔지는 몰라도 뒤에 ‘먹는다’라는 표현은 귀신같이 알아들은 재복은 얼른 발라당 드러누워 배를 깠다. 털에 가려지지 않은 뽀얀 뱃살이 포동포동하다. 겨우내 살이 제대로 올랐다. 버들은 저게 살이 오른 게 아니라 털이라고 두둔하며 감쌌다. 전복은 아무래도 안 될 것 같고.

황 대표가 재복이 전용 간식 바구니를 뒤져 육포를 꺼내 들었다. 창문 아래엔 강아지 그림이 그려진 밥그릇과 물그릇이 다소곳하게 놓여 있다. 밥그릇에 툭 넣어 준 육포를 금세 먹어 치운 재복이 또 달라며 벽에 앞발을 올리고 매달렸다. 맡겨 놓은 것처럼 태도가 당당하다. ……아니. 발이 왜 저렇게 커. 개야, 돼지야, 곰이야.

반사적으로 물러났던 황 대표는 창문이 높아 안심했다. 머뭇머뭇 육포를 건넸다. 버들은 여전히 제가 강아지를 무서워하는 줄 알지만,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싫은 거다.

“너 정원 흙 파 놓지 마라. 알았어?”

말귀 다 알아들으면서 저 불리할 때만 딴청이다.

“친구도 데려오지 마. 여기가 너희 집이야?”

잔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버들이 신발도 그만 숨겨 놓고.”

아무런 걱정 없이 산이며, 들이며, 강이며 놀러 다니는 게 일상인 똥강아지는 오만 군데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활달한 성격이라 마을의 유명 인사이기도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런 재복이 하루 중 가장 오랫동안 머무는 곳이 바로 버들과 황 대표의 집이었다. 여기에서 낮잠 자다가 주인 할아버지에게 잡혀 연행되어도 어느 틈에 쪼르르 돌아와 시골집을 최우선으로 지켜준다. 물론 아무도 그걸 부탁한 바 없다.

앞발을 삐죽삐죽 흔드는 재복을 삐딱하게 내려다보던 황 대표가 다른 간식을 꺼내 왔다. 재복은 원래 닭을 좀 지켰으면 싶어 주인 할아버지가 기르기 시작한 강아지였다. 그렇지만 달걀을 입에 물고 귀 펄럭거리면서 신바람 나게 달려가는 꼴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유일한 목격자인 황 대표는 근무 태만인 재복의 내밀을 함구해 주고 있다. 제가 출근해 퇴근이 늦어질 경우 집에 버들만 남아 있어야 하는데 그럴 때 와서 놀아 주는 것에 대한 의리다.

간식을 두둑하게 챙겨 먹고 배부른 재복이 홀연히 아침 산책을 떠났다. 위풍당당 높이 솟은 뚱뚱한 꼬리를 지켜보던 황 대표 역시 몸을 돌렸다.

“버들아.”

저를 깨우는 황 대표의 부름에 버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잘 잤어?”

“네.”

황 대표는 기지개를 켠 버들의 팔을 붙잡아 제 셔츠를 입혀 주고 이불에 둘둘 말아 안아서 식탁까지 데려와 앉혔다.

“……저 걸을 수 있어요. 허리 안 아픈데.”

자꾸 안겨 다니는 게 수줍은지 작게 종알거린 버들은 전혀 예상 못 한 생일상을 보고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컵 가득 물을 따라 주고 황 대표가 묵묵히 밥을 퍼 가져왔다. 식기는 마침 2인용에 맞춰져 있어 주문한 건데 신혼부부에게 인기가 높다는 혼수 용품이었다.

“자.”

건네 준 수저를 받아든 버들이 미역국부터 한 입 떠먹었다. 뜨거워서 살짝 콧등이 찌푸려졌지만 놀랄 만큼 맛있다. 새벽부터 일어나 여태 고생해 놓고는 황 대표가 무심하다. 맛이 어떤지 묻지도 않고 그저 국그릇을 가져가 후, 식혀 주고 있다. 그런 제 애인의 팔뚝에 버들이 이마를 기대고 비볐다. 체하니까 똑바로 앉아서 먹으라고 따끔히 나무라면서도 황 대표의 눈빛이 온화하다.

“있잖아요, 대표님.”

“응.”

“미역국 또 누구한테 해 줬어요?”

“이걸 누구한테 해 주겠어.”

“제가 처음이에요? 네?”

“……먹어, 빨리.”

말 안 듣고 버들이 재잘재잘댄다.

“대표님은 저한테 계란찜도 처음 해 주고, 궁중 떡볶이도 처음 해 주고, 쌀국수도 처음 해 주고, 안 매운 순두부찌개도 처음 해 주고, 파스타랑 파니니도 처음 해 주고, 소불고기 야채말이도 처음 해 주고, 보쌈도 처음 해 주고, 금귤정과도 처음 해 주고, 인삼잉어탕도 처음 해 주고, 버섯전골도 처음 해 주고, 해물탕도 처음 해 주고, 전복구이랑 전복미역국도 처음 해 주고……. 다 제가 처음이네요.”

버들은 황 대표가 제게 해 준 요리들을 순서대로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왜 다 제가 처음이에요?”

눈은 퉁퉁 부어 가지고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버들이 생글생글하다.

“대표님. 네? 왜 그런지 이유, 알아요?”

“몰라.”

“나는 알아요.”

“뭔데.”

“왜냐하면……, 대표님이 저 좋아해서.”

말간 얼굴을 마주한 황 대표가 결국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저를 향해 나른하게 감겼다 뜨인 긴 속눈썹이 섹시해 버들은 잠시간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제 세상엔 오로지 황 대표만 존재하는 것 같다. 자기 때문에 두근거려 현재 정신이 하나도 없는 어린 연인을 알지 못하고, 황 대표가 버들이 앉아 있는 의자를 통째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저도 내년 대표님 생일 때는 꼭 맛있는 거 많이 해 드릴게요.”

“난 올해 생일도 좋았어.”

한 달도 더 지났지만 기억 속에 조금도 빛바래지 않은 황 대표의 생일이 떠올라 버들은 자동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버들은 황 대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하루 전날 손수 케이크를 구워 숨겨 뒀었다. 그리고 아침에 미역국을 포함해 다양한 요리를 하려고 재료들을 준비해 놓았지만 어떤 것도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1월 30일. 깜짝 생일 파티를 하기 위해 버들이 알람을 맞춰 둔 시각은 오전 다섯 시였다. 그러나 실제로 눈을 뜬 시각은 오후 세 시가 넘어서였다. 시계를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꿈이길 바랐는데 현실이었다.

그때라도 서두르려고 했으나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가 없었다. 죽을 끓여 와 황 대표가 수발을 들어줬다. 밤이 되었을 무렵에야 황 대표의 생일을 축하할 수 있었다. 생일상엔 덩그러니 케이크 하나가 올라갔다. 여전히 기진맥진한 버들을 대신해 생일 당사자가 직접 촛불에 불을 붙였다.

생일상이 조촐해진 데엔 그만한 사유가 있었다. 생일 선물로 갖고 싶은 게 있는지 물어보아도 매번 황 대표에게선 없단 대답이 돌아왔었다. 전날 밤, 혹시나 싶어 버들은 같은 질문을 던졌다. 황 대표의 대답이 바뀌었다. 갖고 싶은 건 없지만 보고 싶은 게 있단다. 화색이 된 버들이 그게 뭔지 물었다.

「너 자위하는 거.」

버들은 물을 마시며 찬찬히 숨을 골랐다.

“잘 먹을게요.”

“응.”

함께 식사를 하는 매일 아침이 몽글몽글하다. 예전에 비하면 황 대표의 젓가락질이 많이 나아졌다. 이건 꾸준한 버들의 가르침 덕택이다. 버들이 밥을 뜨자 황 대표가 열심히 가시를 바른 생선 살을 수저 위에 올려 줬다.

버들이 입이 심각하게 짧은 편이라면 태생이 섬세한 황 대표는 가리는 게 많은 편이었다. 놀랍다, 정말. 저따위로 편식이 심한데 키가 어떻게 저렇게나 크고, 몸에 근육은 어떻게 저 정도나 붙어 있을 수 있는 건지. 괜히 완벽한 남자라고 하는 게 아니다.

애정이 충만하게 차올라 반짝거리는 버들의 눈빛이 제 소중한 대표님에게 콕 박혀 있다. 밥알을 씹으며 버들이 식탁을 휘둘러봤다. 느글거리는 식감이 별로라 꺼려 하는 가지나 나물 반찬들을 버들이 먹여 주니 마지못해 황 대표가 받아먹었다.

“터널 쪽이었어요. 그날 안개가 심각하게 껴서…….”

먼저 식사를 끝낸 황 대표는 관자놀이를 괴고 버들이 들려주는 수다에 귀를 기울였다. 면허도 없는 놈이 이른 아침에 해주는 교통 방송을 왜 그렇게 꼬박꼬박 챙겨 보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며칠 전의 교통 방송을 어디다 써먹으라고 제게 말해 주는 건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냥 버들이 이런 말 저런 말 떠드는 걸 듣는 게 좋다.

“아.”

황 대표가 눈썹을 까딱였다.

“그래서. 고라니가 무사히 지나갔어?”

“네. 안개 때문에 조금 위험했는데 무사히 지나갔어요.”

“다행이네.”

버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저 이제 배불러요.”

“다 먹었어?”

“네.”

버들은 평소보다 많은 식사량으로 황 대표를 기쁘게 했다. 황 대표의 큼지막한 손이 버들의 아랫배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먹은 게 다 어디로 갔나. 버들의 배는 홀쭉할 뿐이지만 눈 닿는 곳마다 전부 다 예쁘다.

나란히 양치와 세수를 하고 나온 황 대표가 청초한 제 꼴통을 붙잡아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뜯어보았다. 역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얼음주머니를 꺼내 와 버들의 눈가에 대 준 뒤 한약을 중탕했다.

태어난 순간부터 퇴원과 입원을 반복하느라 약에 단련된 버들은 고약한 약초 냄새가 나는 한약을 마시면서도 표정 변화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맛이 안 쓰단 건 아니다. 디저트 접시에 쓴맛을 중화해 줄 목적으로 초콜릿과 말린 살구가 준비되어 있지만, 버들은 황 대표를 향해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고개를 기운 황 대표가 살며시 뽀뽀해 줬다. 방울져 맺힌 한약이 혀에 옮겨 묻자 황 대표가 단박에 인상을 찌푸렸다. ……귀여워. 잘생겼는데 귀엽고, 귀여운데 섹시하고, 섹시하면서 멋지다. 발그레 볼이 달아오른 버들이 웃으며 초콜릿을 황 대표의 입 속에 쏙 넣어 줬다.

황 대표는 버들을 번쩍 안아 들어 식탁에 앉혀 셔츠를 벌렸다. 젖꼭지가 더 건드릴 수 없을 만큼 부어 있다. 색깔도 진달래 못지않게 짙다. 살짝, 살짝, 혀를 내밀어 핥아 오는 아늑한 감촉에 둥글게 말린 버들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오늘따라 왜 이러시지. 집착이 평소보다 심하다. 한숨처럼 가느다란 신음을 내쉰 버들이 황 대표의 머리를 꼭 부둥켜안았다.

핸드폰이 날뛴다. 유 대표에게서 전화가 쉼 없이 걸려 오기 시작했다. 황 대표는 차분한 태도로 제 오랜 친구인 유 대표의 번호를 차단했다. 이제야 좀 조용하다. 진작 이럴 것을. 이어 비서에게 연락을 취해 집 전체의 소독과 정돈을 지시했다.

버들이 안 볼 때만을 노려 본래의 성격이 드러난다. 마음에 들지 않은 일처리에 황 대표의 어조가 날카롭게 튀어나갔다. 전처럼 청소업체 전문가들이 버들의 작업실을 건드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며 주의를 줬다.

옷을 든든히 갖추어 입고 차에 올라탔다.

아침 일찍 버들을 본가에 데려다주려고 했건만 해가 중천에 떠 있다. 황 대표가 부드럽게 핸들을 꺾었다. 버들의 몸에 무리가 갈까 봐 과속방지턱을 느릿느릿 건너갔다.

“대표님. 우리 휴게소에 들를까요?”

“뭐 하려고.”

“탄…….”

“탄산수 안 돼.”

버들이 없는 하루를 어떻게 견뎌야 하나, 막막하기만 하다. 제 속도 모르고 버들은 계속해서 탄산수 타령이다. 허전함을 겉으로 내색하지 못하고 있던 그는 신호에 걸리자 버들의 손을 깍지 끼어 잡았다.

각자의 손목에 채워져 있는 시계가 똑같다. 내로라하는 정재계의 자제들인 두 남자가 연애하는 거라 아무래도 남의 이목을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며칠에 걸쳐 신중히 고민한 황 대표가 웨딩 링을 대신해 버들에게 선물한 건 다름 아닌 시계였다.

* * *

버들의 본가 앞에서 차가 멈췄다. 안전벨트를 풀지 않고 버들이 차창을 통해 멀뚱히 제 집 대문을 바라보고 있다. 누가 보면 남의 집에 데려다준 줄 알겠다. 황 대표가 내리자 꼭 쥐고 있던 탄산수도 내던지고 버들이 서둘러 따라 내렸다.

황 대표는 차 앞을 돌아 버들과 마주 보며 섰다. 몸에 밴 포옹을 자연스레 하려다가 장소를 의식해 멈칫거렸다.

“전화하면 데리러 올게.”

헤어져야 하는 순간은 언제나 낯설고 아쉬움을 번지게 한다.

“대표님.”

“응.”

포옹도 못 하다니. 초인종을 누르려는 황 대표의 손목을 대뜸 붙잡고 버들이 어딘가로 걷기 시작했다. 버들에게 손목이 잡힌 채 따라 걷던 황 대표가 어디 가는지 물었다.

“차고 뒤쪽 저기에, 골목이 있거든요. 거기 좁고 아무도 안 오는…….”

그러니까 인적 드문 골목이 있단 소리였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버들의 허리를 번쩍 안아 든 황 대표가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목적지에 도착했다. 으슥한 분위기다. 3월이긴 하나 오늘은 추위가 풀려 따뜻한 날씨였다. 건물에 가려진 골목은 응달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햇볕이 사라지니 냉랭한 기온이 덮쳐든다.

키스 마크를 가리기 위함이었지만 어쨌든 목까지 올라오는 두툼한 스웨터를 입혀서 나오길 잘했다. 그래도 춥진 않을까 걱정인데 같은 생각을 했나 보다. 버들이 황 대표의 양손을 모아 제 입으로 가져갔다. 하. 손끝에 부딪혀 오는 입김이 따뜻하다. 힐긋, 시선이 마주쳤다. 온도가 높은 무해한 감정들이 그득그득 찬다. 그래서 저는 유일하게 버들의 앞에서 어찌할 도리 없이 녹나 보다.

“버들아.”

“네?”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거 있어?”

수술 가능성도 희박했던 터라 그간 버들은 욕심 내지 않고 그저 하루를 보내왔을 터였다. 황 대표는 그런 제 애인을 위해서 하고 싶은 게 있는지 틈틈이 물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버들의 눈가가 부드러운 곡선으로 휘어졌다. 웃을 때면 눈 아래 볼록한 살이 더욱더 도드라진다.

“어…….”

운을 뗀 버들이 황 대표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 손이 꼼지락꼼지락한다. 생각해 보니 하고 싶은 게 떠올랐나 보다. 황 대표는 제 꼴통이 어떤 대답을 들려줄까, 차분히 기다렸다.

“대표님.”

잘근 깨문 입술을 놓고 버들이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저 지금…… 대표님, 엉덩이 만져도 돼요?”

예나 지금이나 제 꼴통은 예측을 불허한다. 황당한 청이나 귀엽기도 하다. 응. 황 대표의 허락이 짧게 떨어졌다. 용기 낸 버들이 황 대표와의 거리를 한 발 좁혔다. 허리 언저리에서 꼼지락거리며 배회하는 손이 차마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있다. 한참을 머뭇대는가 싶던 버들이 빨개져 있을 제 얼굴을 감추기 위해 황 대표의 가슴에 폭 안겼다.

“…….”

“…….”

발칙한 버들의 손이 황 대표의 둔부로 천천히 미끄러졌다. 제 품에서 작게 터진 웃음소리가 기가 막혀 황 대표 역시 덩달아 작게 헛웃음을 켰다.

“버들아. 좋아?”

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대표님 엉덩이 예전부터 만지고 싶었거든요.”

“그랬어?”

“네.”

버들의 얼굴을 감싼 손을 위로 들었다. 서로의 눈이 은은히 마주쳤다. 황 대표는 등줄기를 타고 퍼진 약한 전율을 느꼈다. 스스로 중증이란 자각을 하고 있다. 예전에 유 대표가 버들을 옆구리에 끼우고 내 새끼, 내 새끼 노래를 부르며 팔불출 짓을 떨 때 다 큰 사내놈을 두고 지랄한다고 코웃음을 쳤었는데 이해가 간다. 청순하게 생긴 이 새끼가 내 남자라고 공공연하게 알리고 싶은 충동이 드는 것이다.

고개 각도를 비틀고 다가가자 버들이 눈을 감고 살짝 입술을 열었다. 촉촉한 혀끝이 틈새로 보인다. 입술이 여기서 더 부으면 안 된다. 겨우 욕망을 억제한 그는 버들의 턱 아래에 입을 맞추고 귓불을 깨물었다. 간지러워하며 곧바로 움츠러든 마른 몸이 사랑스럽다. 벽으로 등이 닿게끔 살살 밀쳐진 버들이 황 대표의 목에 손을 가져가 셔츠 단추를 풀었다.

태어나 처음 생긴 소중한 것에 황 대표의 애착도 대단했지만, 태어나 처음 욕심내 본 것에 버들의 소유욕도 대단했다.

황 대표는 단추를 제대로 풀지 못하고 자꾸만 삐끗거리는 버들의 손을 잡아 내렸다. 버들의 귓불을 빨면서 제 셔츠 단추를 직접 풀었다.

드디어 드러난 황 대표의 널따란 가슴팍과 쇄골에 생채기가 난무하다. 오늘 아침, 욕실에서 섹스하며 흥분한 버들이 만들어 놓은 것들이다. 울혈을 남기는 것에 버들은 서툴렀다. 애인의 몸에 제 흔적을 진하게 남기고 싶은 마음이 앞서 저도 모르게 입질하는 새끼 짐승처럼 굴게 되는 모양이다.

지금처럼 요령 없이 어깨를 으득, 씹어 버릴 때면 아플 텐데도 황 대표는 그저 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더 하라고 부추긴다. 버들의 가랑이 사이를 벌리고 황 대표가 한쪽 무릎을 깊숙이 집어넣었다.

“세우면 안 돼.”

“……그거,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입술이 부딪혔다가 짧게 떨어졌다. 귓바퀴에 눅눅히 고이는 숨소리에 버들은 발가락이 꼬이다 못해 다리가 풀릴 지경이었다.

“아…….”

급히 타액을 삼키며 버들은 신음이 샐 것 같은 제 입을 손등으로 막았다.

* * *

“춥지 않아?”

“네. 대표님은요?”

“괜찮아.”

포옹을 풀고 골목길에서 나왔을 때는 무려 한 시간가량이 넘어 있었다. 대문 앞에 선 황 대표가 혹시 몰라 버들의 머리와 옷차림을 점검해 줬다. 초인종을 눌러 주고 들어가는 거 보려는데 마침 정원에 나와 있었던 건지 뜻밖에 문을 연 사람이 유 회장이다. 방금까지 끈적끈적하게 굴었던 버들과 황 대표가 얼어붙었다. 두 남자 모두 찔리는 게 많았다.

자연스레 버들의 등을 밀어 대문 안으로 들여보낸 황 대표가 환영하는 유 회장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유 회장의 손에는 골프채가 들려 있었다. 정원에서 골프 스윙을 연습하고 계셨나 보다. 옆의 수행원에게 골프채를 넘겨준 유 회장이 대문을 더 활짝 열었다.

“황 대표도 들어오지.”

거절할 구실이 마땅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유 회장 뒤를 따라 널따란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앞서 걷던 버들이 뒤를 힐긋거렸다.

운동장처럼 넓은 응접실이 난리법석이다. 버들의 형수님들과 조카들까지 모여 큰 집이 북적거린다. 세발자전거를 타고 어린아이들이 질서 없이 지나쳤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당혹스러웠지만 사업가답게 황 대표는 태연한 얼굴로 악수를 청하며 버들의 형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버들이 자라 온 환경은 정제되어 있는 제 집안과 다르단 걸 새삼 느낀다. 안내받은 소파에 앉자 여름이 아는 척을 하며 다가왔다. 버들의 둘째 형과는 뉴욕에서 이미 몇 차례 인사를 나눈 적이 있다. 여름은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황 대표는 질문에 답하며 설핏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디로 갔는지 버들이 보이지 않는다. 본가라서 어디에 있든 위험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버들이 제 눈앞에 있어야 안심이 되는 황 대표는 속이 탔다.

그사이, 버들은 씩씩대며 제 넷째 형을 찾으러 계단을 오르는 중이었다. 마침 복도에서 하늘을 만났다.

“우리 막둥이!”

버들은 다짜고짜 자신을 껴안으며 성대히 반겨 주는 다섯째 형의 등을 대충 토닥거렸다.

“겨울이 형, 방에 있어?”

“들어가지 마.”

“왜?”

“겨울이 형은 없고 웬 주정뱅이가 있어.”

“술 마셨어?”

“어제 엄청 마시고 들어왔어.”

하늘이 그간 겨울과 싸웠던 것들을 줄줄 읊었다.

“알았어. 내가 해결해 줄게.”

게임 시켜 달라며 뛰어다니는 조카들을 데리고 하늘이 맞은편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술 마셨다고 하니, 꿀물을 타 온 버들이 겨울의 방문을 열었다. 침대에 한만하게 누워 있던 겨울은 하늘인 줄 알고 욕하려다가 빠끔히 고개를 들이민 제 막냇동생을 보고 눈을 치떴다. 그러곤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너 이 새끼. 이리 와.”

“꿀물.”

“갖고 와.”

버들이 침대로 다가갔다. 진탕 술을 마시고 들어왔으면 잠이나 잘 것이지. 새벽에 황 대표님한테 전화는 왜 해?

버들을 장가보낸 이후로 겨울에겐 몹쓸 버릇이 생겼다. 버들이 잘못한 게 있으면 버들만 혼내는 게 아니라, 황 대표에게도 연대책임을 문다는 거다. 오랜만에 단둘이 외출했다가 버들이 재채기를 했는데 그 자리에서 겨울이 황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뭐라고 했던 적도 있다. 황 대표님한테 개새끼라고 하지 말라고 버들이 핸드폰을 든 겨울의 손을 잡아당기며 난리였다. 그때 황 대표는 회사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소란한 두 유씨 형제들 때문에 골이 아파 미간을 문지르며.

그런 일화들이 모여 버들이 자신을 본가까지 오게 만든 범인이 누군지 논증하는 추리의 근거가 됐다. 아까 휴게소에서 꺼 둔 핸드폰을 켰다가 버들은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 형으로부터 들어온 부재중 통화가 수십 통이었다. 제가 전화를 받지 않은 만큼 황 대표님에게 전화를 걸었겠지? 이런 걸 두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고 하나 보다. 그래도 생일인데. 둘이 있게 해 주지.

자식새끼 키워 봤자 소용없다고 본가에 세 달 만에 온 버들이 불만에 차 입술을 삐죽였다.

씻은 지 얼마 안 되었는지 겨울의 머리가 축축하게 젖어 있다. 버들은 우선 제 넷째 형과 다섯째 형의 싸움을 중재했다. 꿀물을 비우며 겨울이 툴툴댔다. 그놈은 말이야. 제대한 지 얼마나 됐다고 말이야. 군기가 싹 빠져 가지고 말이야.

“그걸 그새 미주알고주알 너한테 일러바치고 있냐.”

“형이야말로 왜 황 대표님한테 전화해서…… 아!”

겨울은 버들의 말랑한 볼을 꼬집었다.

“너 왜 전화 꺼 놓고 그래. 형 걱정되게.”

“배터리가 없었어.”

퍽 궁색한 변명이었다.

“그럼 즉각 충전을 시켰어야지.”

“충전기 없어. 고장 났어.”

“거짓말.”

“뭐가.”

“황 대표가 네 핸드폰 충전기 여덟 개 사 간 거 내가 본 적 있어.”

정확히 아홉 개다. 말문이 막힌 버들은 꼬집혔던 제 볼을 쓱쓱 문질렀다. 괜스레 코도 훌쩍였다.

“이리 와서 앉아.”

버들이 순순히 침대에 엉덩이를 걸쳤다. 겨울은 청바지만 달랑 입고 있었다. 지퍼를 잠그지 않아 속옷 밴드가 보인다.

“황 대표가 데려다줬어?”

“같이 왔어. 아래층에 계셔.”

“너희 집 정우를 왜 우리 집에 데리고 와.”

“여기에 내가 있으니까.”

겨울은 한마디도 안 지고 또박또박 말대꾸를 하는 제 막냇동생을 가자미 눈깔로 흘겼다.

“됐어. 말 걸지 마. 형 속상하니까.”

“삐쳤어?”

“그래.”

“얼마 동안 삐칠 건데?”

“5분.”

“알았어.”

버들이 5분을 기다렸다.

“근데 형은 왜 여기에 있어?”

“왜 말 시켜. 형 삐쳐 있는데.”

“5분 지났단 말이야.”

“벌써?”

“어.”

혹시 술 마셔서 혼났냐고 묻는 버들의 근심에 유 대표는 헛웃음을 지었다. 아래층에 부모님과 형들이 다 모여 있는 게 걸린 모양이다.

“형이 술 마셨다고 혼날 나이야?”

“형 며칠 전에도 유 회장님한테 불려 갔었잖아. 나 다 알아.”

“어. 근데 그건 다른 사정이 있었어. 술 때문이 아니라.”

“혼난 거 아니면 왜 혼자 방에 있어?”

“너 기다렸지. 새끼야. 네가 없는데 1층엔 뭐 하러 내려가 있냐?”

혼났냐고 물어 온 버들이 때문에 생각나는 추억 거리가 있다. 버들은 겨울이 자신을 몰래 밖에 데려가 인형도 뽑아 주고 붕어빵도 사 주고 했던 걸 걸려 혼이 나면, 괜찮다고 해도 그게 미안한지 나중에 꼭 보답을 하려 들었다.

그날은 식탁에 큰형과 겨울이 마주 보고 앉았다. 자야 할 시간에 자지 않고 버들이 졸린 눈 비비며 겨울의 옆을 차지하고 앉았다. 뭔가를 잘못한 겨울이 큰형에게 꾸지람을 듣는 상황이었다.

「생각이 있어? 없어?」

첫째 형이 엄하게 물었다. 막둥이가 얼른 나서서 넷째 형을 두둔했다.

「없어. 겨울이 형 생각 많이 없어.」

한껏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형 생각 있어, 인마. 겨울이 슬쩍 귓속말 했다. 못 믿는 눈치였다. 버들이 제 편을 들어 줬단 것에 의의를 둔 추억이다.

“형. 있잖아.”

제 형을 보며 버들의 눈이 갑자기 또렷해졌다.

버들은 정민의 친구들과 무리를 이뤄 주기적으로 만나 식사를 하며 모임을 갖는다. 제 어린 애인을 아무한테도 보여 주기 싫지만, 그런 이기적인 욕심을 억누르고서 황 대표가 유일하게 관대함을 베풀 때가 바로 그 모임 날이다. 아파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버들의 사회성을 길러 주기 위한 노력인 것이다.

물론 모임을 이룬 무리들 신원은 한 명, 한 명 조사해 전부 파악한 상태였다. 다행히 사고 친 것 없이 다들 무난한 성격들이었다. 그런 황 대표의 관심과 보호, 애착, 유애, 집념 이 모든 걸 간단히 축약한 집착 아래 버들은 또래 친구들과 주기적으로 만나 밥을 먹으며 공감대를 쌓고 있다. 운동밖에 모르던 풋내기들도 최근에 한두 명씩 연애를 시작하게 됐다.

「연상을 사로잡으려면!」

다양한 디저트를 맛보던 중 연상을 사귀는 애가 주저리 떠드는 말을 가장 모범적으로 경청했던 사람이 바로 버들이었다. ‘연상을 완벽하게 사로잡는 법’을 잘못 배운지도 모르고 버들은 그날 무척이나 들떠 했다.

그러니까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 사용하면 좋아한다는 거지? 황 대표에게 저도 반말은 한다. ‘응.’ 정도. 하지만 그 정도로는 모자라단 의견이 웅성웅성 모아졌다. 연상을 사로잡으려면 과감해져야 해! 마치 저들 일처럼 적극적인 충고들이 뒤따랐다. 근처에서 차를 대기하고 있던 황 대표와 집으로 돌아온 버들은 과감히 입을 열었다.

「야.」

「……야?」

황당한 어조로 헛숨을 켠 황 대표를 알지 못한 버들이 비장하게 다음 대사를 읊었다.

「데리러 와 줘서 고마워요. 너 운전 잘하더라.」

맥락 없이 그냥 존댓말과 반말을 섞었을 뿐이었다. 버릇없는 것에 황 대표는 직접적으로 야단치지 않았다. 대신 버들은 그대로 황 대표에게 붙잡혀 침대 위에서 오랫동안 시달리며 잘못을 깨우쳤다. 열락에 몸이 달아 사정하고 싶은데 큰 손이 못 하게 막았다. 그날 밤은 너무 힘들었다. 그 후로 버들은 정민의 친구들이 해 주는 연애 조언은 어떠한 것도 새겨듣지 않고 있다. 그런데…….

“뭘 봐.”

버들은 제 넷째 형이 연상만 만나 왔단 걸 알고 있다. 제 나이일 때도 어김없었다.

“형.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뭐.”

“누나들이 형을 왜 좋아하는 거야?”

언젠가 비슷하게 물었던 질문이다. 이번에는 자신이 참고할 수 있게 좀 자세히 답해 줬으면 싶어서 버들이 눈빛을 초롱초롱 빛냈다.

“참나.”

어이없단 듯 짧게 웃음을 터트린 겨울은 대뜸 제 몸에 엉겨 있던 시트를 치웠다. 복근도 그렇고. 두툼한 몸통에 잡힌 상박근 근육이 전체적으로 훌륭하다. 죽마고우라서 그런가. 황 대표와 제 형의 몸매가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황 대표의 몸이 더욱더 흉포하고 사나운 인상이란 거다.

아무튼. 황 대표와 제 형이 나란히 서 있으면 그야말로 ‘선남선남’이 따로 없겠다. 저도 어느 정도 살이 찌면 황 대표님이 수영은 절대 안 되더라도 헬스장에 데려가 운동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고 했었다. 그럼 제 몸에도 탄탄한 근육이 생기겠지?

“응? 누나들이 형을 대체 왜 좋아해?”

“새끼. 어린 네가 뭘 알겠냐.”

아무리 제 친형이라도 거들먹거리는 폼이 좀 재수 없으려고 한다.

“형. 응?”

버들이 간곡하게 대답을 재촉했다. 겨울은 재차 픽, 웃음을 흘렸다. 이윽고 얼굴을 가리켰다. 그 손을 내려 복근을 은밀히 훑었다.

더 깊숙한 아래를 향해 손가락이 내려간다.

“…….”

“…….”

뜻하는 바를 못 알아듣고 멀뚱멀뚱 눈만 굴리던 버들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원하는 대답을 해 주지 않은 제 형이 답답하다.

“나 갈래.”

침대에서 일어난 순간 단박에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버들은 뒷다리를 걸어 온 겨울 때문에 중심을 잃고 쓰러지고야 말았다. 매트리스가 크게 꿀렁거리며 네 개의 다리가 어지럽게 얽혔다. 버들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안 그랬으면 비명이 터져 나왔을지도 모른다.

“아파?”

아팠다. 허리가. 척추가. 몸 전체가. 황 대표와 섹스한 상태라 작은 충격도 크게 전달이 됐다.

“안 아프지?”

“…….”

“안 아프니까 조용한 거지?”

아팠다. 말도 못하게.

같이 쓰러지면서 목부터 등까지 든든히 받쳐 주었으니 다칠 위험은 없었다. 그런데도 갑자기 냅다 팔을 휘저으며 짜증을 부리는 버들을 겨울은 이해 못하는 눈으로 응시했다.

“비켜. 무거워.”

“가만히 있어 봐. 새끼야.”

겨울의 표정이 한껏 진지해졌다.

“유버들.”

제 형을 상대하는 게 귀찮아진 버들은 차라리 고개를 한쪽으로 치우치고 기절한 척했다. 얌전해진 제 새끼를 겨울은 실로 오랜만에 코앞에서 찬찬히 뜯어봤다. 못 본 새, 볼에 살이 좀 올랐다. 그리고…….

겨울은 예고 없이 버들의 목덜미에 얼굴을 가져갔다. 화들짝 놀란 버들이 제 형의 머리카락을 다 잡아 뜯어 놨다. 그래도 머리숱 많은 겨울이 꿋꿋이 버티며 버들의 목덜미를 코끝으로 지분거렸다.

“아, 뭐 하는 거야. 이러지 마.”

“뭘 이러지 마, 새끼야. 형은요. 뭐 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좀 떨어지라니까.”

“야.”

코를 킁킁대던 겨울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버들의 몸에서 다른 남자 냄새가 난다. 그게 무척 오묘하고 낯선 감상을 남긴다. 솔직히 충격이라면 충격이었다. 버들의 몸에서 은은히 묻어나는 향이 황 대표 스킨 냄새라는 걸 모를 일 없었다.

“너 형이 사 준 로션 안 발라?”

“형이 사 준 로션 바를 때도 있어.”

“향수는?”

“향수도 가끔.”

대답이 영 성의가 없다.

“비켜, 진짜. 무거워서 답답해.”

황 대표와 연애하고 있는 버들이 또렷하게 실감된다. 아. 뭐지. 버들이 계속 막둥이일 것 같은데……. 뭔가 이질감이 크게 든다.

“내 새끼.”

“왜.”

퉁명스런 대답이 돌아왔다.

“형한테 싸가지 없이 말버릇이 그게 뭐야?”

“불렀으면 말을 해.”

차마 진도 어디까지 나갔냐고 못 물어보겠다. 예전에는 버들이 아팠던 걸 몰랐다고 치고. 지금은…… 그래. 건드리면 진짜 사람이 아니지. 안 건드렸으니까 살도 오르고 한 거겠지?

혼자 심각했다가 혼자 흡족해하는 제 형을 버들은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잘 들어라.”

“뭔데?”

무슨 말을 꺼내려고 표정이 저리 진지하나 싶었다.

“형이 너 꼬신다.”

버들은 진지한 겨울의 발언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꼬셔서 형이 다시 너 데리고 산다.”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에 버들은 덤덤했다.

“내 새끼. 살 좀 쪘네?”

“어. 오늘 대표님이 전복미역국 끓여 줬어.”

표정이 확 펴지며 재잘재잘, 자랑에 시동이 걸렸다.

“그리고 아침에 황 대표님이 나한테 귓속말로 뭐라고 한 줄 알아?”

“뭐라고 했는데.”

달싹이는 버들의 도톰한 입술로 겨울의 시선이 자연히 쏠렸다.

“근데 너 입술이 왜 이렇게 부었어?”

겨울의 지적에 버들이 눈을 깜박거렸다.

“……말 안 할래.”

“왜? 황 대표가 뭐라고 했는데?”

“비밀이야.”

“궁금하게 만들지나 말든가. 말해, 빨리.”

“그냥 나만 알고 있어야 될 것 같아.”

제대로 얄밉다. 응징하는 수단으로 유 대표가 버들을 간질였다. 버들이 근처에 있을 겨울의 적수를 찾았다.

“형! 하늘이 형!”

순간 문이 달칵, 열렸다. 움직임을 우뚝 멎은 둘의 고개가 그쪽으로 향했다. 방마다 간격이 멀고 방음이 확실하다. 버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 우연히 타이밍이 맞아 하늘이 들어온 줄 알았는데 아니다. 문고리를 쥐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유버들의 큐티 엔젤’ 황정우였다.

인상을 구긴 황 대표가 겨울의 어깨를 신경질적으로 잡아 떼어 내고 버들을 일으켜 깍지 껴 손을 잡았다. 그러곤 한마디도 없이 나가 버렸다. 찬바람이 쌩하니 불었다. 겨울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난데없이 표정이 측은하게 바뀌었다. 그래. 그렇게 둘이 손만 잡고 다녀. 다 네 업보지. 황정우, 이 새끼 피 좀 마르겠어. 껄껄.

아무것도 모르는 겨울은, 아무것도 모르기에 마음이 편할 수 있었다.

복도를 걷던 버들이 어느 방문을 열더니 황 대표의 손을 잡아당겼다.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여기가 제 방이에요.”

버들의 목소리가 갈수록 바닥으로 긴다. 마지막 ‘요’는 아예 들리지도 않았다. 제 방에 가족을 제외하고 누군가를 데려온 게 처음이다. 제가 덮고 지낸 이불을 보여 주는 것도, 평소의 관심사를 집약시킨 책들을 보여 주는 것도. 왠지 모를 스스러움이 번진다.

버들의 콧방울만 주시하고 있던 황 대표의 시선이 여기가 버들이 방이라니까 그제야 주변으로 향했다. 세계 각지에 현지 법인을 둔 대기업의 막둥이가 자라 온 공간은 집 한 채만큼 넓었고, 불필요한 장식 없이 깔끔하게 정돈된 상태였다. 버들이 자신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또 한 번 느낀다. 예전에 시골 생활을 청산하던 날, 그곳에서 사용한 모든 물건들을 미련 없이 버리라고 지시한 저와 달리 버들은 제가 썼던 모든 물건들을, 하다못해 볼펜 한 자루마저 악착같이 챙기려 들었다.

「뭐가 갖고 싶은데.」

「대표님 물건 전부 다요.」

「그걸 다 어떻게 챙겨.」

「제가 챙길게요. 챙길 수 있어요.」

「하나만 골라. 가서 새로 사 줄게.」

버들이 생각에 잠겨 있는 황 대표를 창가로 이끌었다.

“예전에 대표님이 저 데려다주시면, 여기서 대표님 차 가는 거 보고 했어요.”

황 대표는 바람에 흐트러진 버들의 앞머리를 가만히 넘겨 주었다. 저 역시 버들을 집에 데려다주고, 그 밤을 못 견디고 다시 차를 몰고 여기까지 와서 깜깜하게 불이 꺼진 버들의 방을 올려다보고 했었다.

황 대표를 침대에 앉힌 버들이 보여 주고 싶은 게 있다면서 책장을 뒤졌다. 버들을 기다리며 황 대표가 침구류를 가볍게 손으로 쓸었다. 버들이 잠을 자고, 공부를 하고, 생활을 했던 공간에 제가 들어와 있단 사실이 마음을 뭉클하게 만든다.

성큼 다가온 버들이 가슴팍에 들고 온 파일을 내밀었다. 황 대표가 버들의 손목을 잡아 우선 곁에 앉혔다. 파일 표지를 넘긴 황 대표가 놀란 얼굴을 했다. 그간 황 대표가 썼던 시나리오로 개봉한 영화 포스터들을 버들이 빠짐없이 수집해 놓았다. 구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그걸 머리를 맞대고 한참 구경했다.

“너무 작은 거 아닌가.”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걸 황 대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집에 갈 때 가져갈 거라고 파일을 챙기던 버들이 고개를 갸웃한다.

“저 키 176㎝인데요.”

자신의 반응을 소심하게 살피는 눈빛에 비해 또박또박 매력 어필을 한 버들을 보고 황 대표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큰 손이 가느다란 목을 다정하게 덮어 왔다.

“침대 말이야.”

“아…….”

“작지?”

“네. 지금 보니까 작은 거 같아요.”

퀸 사이즈의 침대가 유독 작아 보이는 이유는, 시골집에서의 침대와 비교를 했기 때문이다. 시골집의 침대는 시중에서 팔지 않은 사이즈로 버들이 자는 동안 원 없이 굴러다니라고 황 대표가 특수 주문 제작한 것이다. 한쪽 면은 벽에 붙이고, 황 대표가 바깥에 누워 든든한 제방이 되어 주니 버들은 동거를 시작한 이후부터 자던 도중 침대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줄었다. 지금은 제가 곁에 있어서 그렇다지만…….

“어릴 땐 자다가 떨어지면 어떻게 했어?”

그게 뭐 대수냐는 듯 버들이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잤다고 대답했다. 솔직히 자느라 떨어지는 것도 모른다.

“형들이랑 같이 안 잤어?”

“귀찮아서요.”

버들이 볼을 득득 긁었다. 말 그대로다. 형들은 같이 자자고 했는데 그게 귀찮아 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잤었다. 늦둥이이자 막둥이를 극성맞게 싸고도는 형들이 다섯이나 됐는데 정작 버들은 독립성과 자립성이 강했다.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뭐든 우선은 혼자 해결을 보려고 했다.

높은 곳의 그릇을 꺼내고 싶은데 손이 닿지 않았을 적에. 버들은 도움을 청하는 대신 밖에서 콩 주머니를 주워와 찬장을 향해 냅다 던져 모든 걸 와르르 떨어뜨린 다음 태연한 얼굴로 원하는 걸 골라냈었다.

“아. 대표님이랑 자는 건 좋아요.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다급히 고백한 버들의 시야가 순간 암전됐다.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매단 황 대표가 머리 위에 씌운 이불을 버들이 쭉 잡아당겼다. 물결치듯 떨어진 이불에 잠시 가려졌던 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휙 휘어진 눈가가 완벽한 반달 모양이다.

황 대표가 재차 버들의 머리 위에 이불을 씌웠다. 버들의 손에 잡힌 이불이 주르륵 내려갔다. 이걸 몇 차례 반복하는 동안 버들의 머리가 사방으로 헤쳐졌다. 민들레 홀씨가 따로 없다. 그래도 좋다고 방싯거린다.

고작 시트 하나로 장난치는 게 뭐가 재밌는지 둘의 웃음이 커졌다. 정답게 흐르던 분위기에 불현듯 정적이 찾아왔다. 버들이 어색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황 대표의 호흡이 느려졌다.

……안 되겠다. 여기서 더 있다간 뽀뽀해 버릴지도 모르겠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경각심을 늦춰선 안 된다. 문을 잠그는 것도 이상하고. 황 대표는 무의식적으로 애정 행각을 저지르기 전에 버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 * *

버들을 위해 겨울이 주문했단 케이크가 배송됐다. 진짜 과하다. 버들은 3단으로 쌓인 제 커다란 생일케이크가 창피해 황 대표 눈치를 봤다. 가족 전체가 식탁에 둘러앉았다. 식구들이 많아 집에서 음식을 해 먹으면 치워야 할 것들도 많이 생긴다. 키퍼들을 배려해 가족들 생일엔 간단히 초만 불고 나가서 외식을 한다.

케이크에 촛불이 꽂아지길 기다리며 나누던 담소의 화제가 황 대표에게 꽂혔다. 정확히 말하면 황 대표가 설에 보낸 설빔, 명품 겨울 코트이다. 원래는 버들의 부모님께만 선물하려고 했는데 그럼 너무 이상해 보일 것 같아서 버들의 형제, 형수님, 조카들, 숙부, 사돈의 팔촌들 것까지 전부 챙겼다.

버들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겨울이 코로 비웃었다. 냉철한 태도로 일관하지만 황 대표가 대형 사고를 친 것과 마찬가지다. 그 선물로 인해 거의 남이나 다름없는 사돈의 팔촌까지 황 대표와 버들이 같이 살고 있단 걸 알게 되었으니까.

예술하는 직업이라 그런지 안목이 대단하다면서 칭찬이 쏟아졌다. 겉으로는 태연하나 황 대표는 입술이 바짝 타는 기분이었다.

봄이 물었다.

“황 대표, 겨울이 친구 아니야?”

“맞아요.”

“근데 버들이가 왜 뿌듯해하는 거야?”

맞은편에 앉아 일부러 다른 곳을 바라보던 황 대표가 버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니에요.”

말만 아니라고 하지 정말 버들의 콧대가 제 칭찬을 들은 것처럼 하늘로 치솟아 있다. 웃음이 나는 걸 나름 참고 있나보다. 씰룩거리는 입가가 귀엽다. 황 대표가 서둘러 표정관리를 했다.

버들의 얼굴을 본 겨울이 황당해했다. 이 새끼가. 그렇게 티 내지 말라니까.

“버들아!”

손바닥으로 버들의 입을 가린 겨울에게 막둥이 귀찮게 하지 말란 여럿 사람들의 질책이 쏟아졌다.

가족들 틈에서 버들이 지극히 안정적으로 보인다. 심장이 약하게 태어나 제약이 많았던 자신의 처지에 하염없이 슬퍼하긴 했어도 비관하거나 주변인에게 화살을 돌려 원망하진 않았다. 얼룩 없이 버들이 성장할 수 있었던 건 가족들이 온 마음을 다해 노력한 덕분이란 걸 이렇게 보니 알겠다. 막둥이를 위한 포용의 범위가 넓다.

「제가 대표님 좋아하는 게, 가족들한테 미안해야 할 일이에요?」

「응. 당사자인 나한테는 무릎 꿇고 빌어야 할 일이고. 너 예뻐해 주는 가족들한테는 미안해야 할 일이고.」

아픈 것도 모르고 일부러 가장 상처 줄 수 있는 말을 골라 지껄였다.

버들이 촛불을 불어 껐다. 지 생일 축하해 주려고 가족들 다 모여 있는데 버들은 생일이고 나발이고, 덕담이고 나발이고 식탁 아래서 황 대표와 발장난 치는 게 그저 좋았다. 황 대표는 제 몫으로 덜어 준 케이크를 반 정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이 따끔따끔해서 도무지 버들의 집에 있을 수가 없다.

“버들인 하루 자고 가.”

“네?”

유 회장의 청에 버들이 허리를 세웠다. 자기 집에서 하루 자고 가라는 건데 뭐 잘못 들은 것처럼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버들의 핸드폰에 문자가 도착했다. 내일 새벽에 데리러 온다는 황 대표의 메시지였다. 응접실로 나오면서 황 대표가 진동이 울린 핸드폰 화면을 밝혔다.

발신인 : 자기

내용 : 싫어요.

또 제 꼴통이 고집을 피울 건가 보다. 여기저기 보는 눈들이 많아 단둘이 있을 때처럼 달래 줄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황 대표가 겉옷을 들었다. 그 전에 이따가 전화하겠단 문자를 보냈다.

인사를 건네고 현관으로 향하는 황 대표의 움직임을 일렁거리는 눈동자가 따라갔다. 기어이 현관문이 닫혔다. 그때까지 굳어 있던 버들이 오늘까지 조각을 끝내야 할 게 있다면서 허겁지겁 자리를 벗어났다. 가족들 중 누군가 버들을 잡아 세우려는 걸 겨울이 오두방정을 떨며 관심을 돌려놓았다. 대문을 나서는 버들이 숨이 찬지 헐떡거렸다.

“대표님.”

황 대표가 뒤돌았다. 저 두고 갈까 봐 신발도 대충 신은 버들이 서 있다. 한쪽 끈이 길쭉하게 풀려 있다. 그게 막연히 안쓰럽다. 황 대표가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버들의 신발 끈을 묶어 줬다. 버들을 차에 태우고 외곽으로 빠졌다. 차창을 바라보던 버들이 차분히 내비게이션 전원을 켜 시골집 주소를 입력시켰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결국 처음 와 본 곳에서 황 대표의 차가 멈췄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허름한 철도 건널목이 나왔다. 옆에 오래돼 보이는 커피 자판기 하나가 세워져 있다. 저 멀리 보이는 산 너머로 노을이 삼켜진다.

“황 대표님?”

황 대표는 무구한 표정으로 여기가 어딘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버들을 제 무릎 위로 끌어다가 앉혔다. 뒷덜미를 감싸 입술에 묻은 생크림을 혀로 핥아 닦아 줬다. 버들이 있기 때문에 제 세상은 포근해졌고 안정으로 뒤덮였다. 하지만, 버들의 세상은? 그저 자신과 있으면서 처음 해 보는 것들을 함께 경험하는 게 정말 큰 의미가 있는 걸까? 가족들과 있는 게 더 좋지 않을까?

“가족들이랑 안 있어도 돼?”

“저는 대표님만 있으면 돼요.”

서슴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쥐여 주는 대답이었다.

“진짜 나만 있으면 돼?”

“네. 저는 다른 건 다 필요 없어요.”

아홉 살 어린 애인이 예쁜 만큼 황 대표의 귓가가 붉어져 있다. 황 대표는 버들을 강하게 껴안았다. 설렘으로 생동감 있게 박동하는 버들의 심장이 마주 닿은 가슴으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아늑한 정적을 뒤로하고 시간이 흐른다. 히터의 더운 공기가 차 안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부연 차창에 맺힌 물방울이 정처 없이 굴러떨어져 불규칙한 길을 냈다.

「대표님……. 안아 드려도 돼요?」

진눈깨비가 흩날렸던 계절의 뉴욕에서 버들이 그렇게 물었다. 안아 달라는 게 아니라, 안아 줘도 되는지.

「대표님. 식사하셨어요?」

그리고.

「식사 거르지 마세요.」

밥 한 수저 뜨지 못한 주제에 멀쩡해 보이려 발악하던 자신을, 순한 눈망울만큼은 유일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

“…….”

시선이 얽혔다.

“좋아한다고 말해 줘.”

“……좋아해요. 저는 다시 태어나도 대표님 좋아할 거예요.”

“버들아. 사랑한다고 말해 줘.”

“사랑해요.”

다시 태어나도 내가 좋다는 너에게, 우리가 만약에 정말 다시 태어나 또 만날 수 있다면. 그때는 내가 너한테 마모되지 않는 첫사랑을 줄 수 있도록. 그러니까 지금의 너처럼 헤매지 않고, 곧장 너를 찾아가 내가 먼저 고백할 수 있길 다짐처럼 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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