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어젠 잘 들어갔어?]
이게 이틀 전 아침에 보낸 메시지였다. 그리고.
[헤인스워즈 소위.]
[왜 답이 없냐. 무슨 일 있어?]
이건 오늘 저녁까지 아무 답도 받지 못한 단테가 자존심을 굽히고 다시 보낸 두 통의 메시지였다. 모두 답은커녕 읽었다는 표시조차 뜨지 않았다. 단테 베일리의 인생에 최초로 ‘섹스 후 무통보 잠수’라는 기록이 추가되려 했다.
그는 이틀 전 자신의 과거를 되짚어봤다. 떠올려 보니 더 열이 받았다.
커다란 덩치와 성격도, 행동도 들어맞지 않던 라파엘은 섹스만은 덩칫값을 했다. 허리 아래는 그렇게 거칠면서 입으로는 ‘팀장님 좋아요, 팀장님 좋아요.’ 소리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계속 듣다 보니 부끄러워져 단테도 조금 더 흥분을……. 흠, 솔직히 그가 골반을 붙잡고 퍽 쳐올렸을 때 단테는 신음도 지르지 못하고 숨넘어가는 소리만 냈다. 깊숙이 싸질러진 정액을 빼느라 다음 날 제법 고생을 했다.
“윽.”
그는 테이블 반대편 저 멀리 밀려난 휴대폰을 가지러 일어났다가 신음을 흘렸다. 아직도 허리가 지끈거렸다.
라파엘은 섹스가 처음이고, 단테도 삽입을 당하는 포지션은 처음이라 둘은 몹시 요령 없는 섹스를 했다. 그 여파는 뒤로 커다란 성기를 받은 단테에게 고스란히 남았다.
으……. 휴대폰을 주워들며 단테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금욕적인 천사의 얼굴, 색스러운 악마의 몸, 그리고……, 짐승의 고간을 가진 단테의 부하는 다음 날 아침 흔한 쪽지 한 통 없이 사라졌다.
거기까지는 ‘어휴, 귀여운 새끼, 술 깨고 어지간히 창피했나 보군.’하고 넘어갈 의사가 있었는데, 이틀이나 연락을 무시당하니 슬슬 인내심과 자존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사실 단테는 라파엘이 “팀장님, 제가 그날….” 하고 훌쩍이며 찾아올 모습을 예상했다. 그러면 그 앞에서 선배답게 말하려 했다. ‘자, 이미 지나간 일이니 어쩔 수 없다. 잊자! 없던 일로 하자!’ 비록 새로운 첫 경험을 상당한 크기와 아픔과 함께 했지만, 어린 후배를 위해 그렇게 덮을 용의가 있었다.
라파엘은 라파엘 나름대로 얼마나 놀라고 당황스럽겠는가. 그날의 일은 모두 취중의 해프닝일 뿐이라 말해주면 그도 마음을 놓을 것이다.
그랬는데.
단테는 메시지창을 열었다가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부끄러워하는 건 이해를 하겠는데, 연락을 싸그리 무시해? 나야말로 화려하고 방탕한 휴가를 보내려던 계획이 누가 허리를 아작내서 망했는데.
그 때, 타이밍 좋게 휴대폰이 진동했다. 단테는 빠르게 화면을 켰다.
[야 이 배신자 새끼야, 자정도 안 돼서 튀냐?
오늘 팀장, 부팀장 모임 어떰? 네가 사라.]
동기 리온에게 온 메시지였다. 휴대폰을 뻣뻣하게 쥔 손에서 힘이 풀렸다. 곧, 내심 무언가를 기대했다가 실망한 자신이 어이가 없어졌다.
단테는 아예 휴대폰을 뒤집어 엎어버렸다. 그랬다가 다시 집어 들었다.
[그래. 마셔. 밤샐 수 있는 곳으로 알아볼게.]
휴가 중에 휴대폰과 눈씨름을 하느니 술이나 진탕 마시는 게 낫다. 그런 김에 팀장이 술자리에서 일찌감치 튀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을 부팀장 안젤라에게도 싹싹 빌어야 하고.
단테는 겉옷과 지갑만을 챙겨 현관문을 열었다.
힘껏 연 문은 밖에 서 있던 누군가와 제법 세게 부딪쳤다. 관사의 복도에 쾅, 하는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십…….”
이내 단테는 말을 멈췄다. 상대도 부딪친 이마를 문지르다 자리에 바로 섰다.
“티, 팀장님.”
“너…….”
그의 관사 문 앞에는 라파엘 헤인스워즈가 서 있었다.
단테는 라파엘을 마주하면 최소한 ‘야 이 자식아, 너는 생각이 있어? 없어?’ 정도는 나올 만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라파엘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투지가 눈 녹듯 사라졌다. 단테의 두 손이 라파엘의 얼굴을 덥석 붙잡았다.
“얼굴이 왜 이래!”
한쪽 뺨이 온통 새빨갛게 부풀어 있었다. 이건 분명히 사람에게 맞은 자국이었다. 그런데 손바닥에 감싸인 볼은 차가웠다.
초봄이라고는 해도 아직 서늘한 계절이었다. 복도에 대체 얼마나 서 있었던 거야. 얼굴을 붙잡은 단테의 손 주변에서 더듬더듬 배회하는 라파엘의 손은 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했다.
“팀장님…….”
라파엘이 고개를 푹 숙였다. 연락을 피한다고만 생각했지, 정말로 무슨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 단테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들어와.”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같은 말 두 번 하게 하지 마라. 들어와.”
그제야 머뭇머뭇 안으로 발을 옮겼다.
“헤인스워즈, 대체.”
왜 문 앞에 서 있기만 했고, 얼굴은 어쩌다 그렇게 됐고, 연락은 왜 안 받았냐. 물을 게 많았다.
그러나 단테가 입을 열기 전, 라파엘이 무릎을 풀썩 꿇었다.
“팀장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뭐가?”
“…….”
라파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단테의 앞에 푹 고개를 숙였다.
“제, 제 얼굴도 다신 보기 싫으실 거 압니다. 이렇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아직 제가 팀장님 팀 소속이라…… 전역을 하려면, 허가가 필요하다고 해서…….”
“……뭐?”
전역? ……라파엘의 7년 선배인 단테에게도 까마득한 말이었다. 이제 막 사관학교 졸업한 녀석이 전역을 왜 해?
“왜 네가 전역을 하려고 해? 무슨 일 있었어?”
“…….”
“라파엘 헤인스워즈. 내가 중대장으로서 이유는 들어야 할 것 아냐.”
라파엘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어버렸다. 한참 무릎 꿇은 라파엘을 쳐다보고 있어도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단테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았어. 우선 전역은 둘째 치고, 얼굴이 왜 그 모양인지부터 말해. 싸웠어?”
민간인과 다툼이 있었다면 그거야말로 병아리 라파엘이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현 사수인 단테까지 책임을 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문제보다는 라파엘의 얼굴과, 갑자기 전역을 하겠다는 말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밝은 방 안에서 보니 얼굴이 부은 것뿐만 아니라 입술도 터져 있었다. 연락을 무시한 일에 대한 언짢은 마음이 싹 가실 만큼 처참한 꼴이었다.
특수군에서 기껏 훈련까지 받아놓고는 어떤 놈한테 맞고 온 거야.
단테의 시선이 닿은 걸 느꼈는지 라파엘은 슬그머니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닙니다. 싸운 건 아닙니다.”
“그러면.”
“그게…….”
“이틀간 연락도 안 되고, 갑자기 나타났는데 얼굴에는 상처가 가득하고, 그런 채로 전역 허가를 요구하는 이 상황에 내가 납득된 게 하나도 없잖아. 제대로 설명해.”
“여, 연락하셨습니까? 죄송합니다. 휴대폰이 부서져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혹 중요한 명령이었다면.”
“아니…… 별말은 아니었으니 그건 됐다. 그래서, 얼굴은 왜 그렇게 됐는데?”
“그게…….”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가족이, 제가, 연회장의, 그, 방을 썼다는 걸 아셨습니다. 그리고 사, 상대 남자를… 그렇, 그렇게 했다는 사실에 아버지가 많이 분노하셔서…….”
라파엘 헤인스워즈의 아버지라 하면 현재 육군의 꼭대기, 육군참모총장을 말했다. 사령관이 아들에게 무척 엄하다는 건 특수부대로 쫓겨난 라파엘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설마 남자와 잤다는 이유로 아들을 이 꼴로 만든 건가.
“그래서… 이렇게 얼굴이 다 터진 거야?”
“아닙니다. 겉보기에만 부어서 심해 보이는 겁니다.”
“내가 코앞에서 본 상처 하나 제대로 파악 못 할 것 같아?”
저건 있는 힘껏, 그것도 여러 차례 내리친 상처였다. 흰 피부 위라 손자국이며 푸릇하게 멍이 올라온 흔적 모두 적나라했다.
“그런데 왜 이미 다 들키고 난 마당에 나한테 무릎을 꿇고…….”
곧 단테의 머릿속에 어떤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아 혹시, 어떤 남자와 잤다는 건 아시는데 그게 상관이라는 건 모르시냐?”
“예? ……예. 모르십니다.”
“넌 사령관님께서 모르셨으면 하고?”
“예. 모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아하.”
단테는 라파엘이 전역을 희망한 이유와, 자신을 찾아와 다짜고짜 무릎부터 꿇은 이유를 깨달았다.
남자와 잤다는 사실만으로 이 사달이 났으니, 상대가 무려 직속 상관인 하극상 관계라는 걸 안다면 아버지의 눈이 지금보다 더 뒤집힐 것이다.
즉, ‘외부에 나와 잔 사람이 당신이라는 사실을 발설하지 말아 달라’는 의미였다.
그의 집안 환경과, 하나뿐인 아들을 이 정도로 혹독하게 대하는 가풍을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상황이다. 취기의 충동에 못 이겨 라파엘의 상황을 고려하지 못한 단테의 잘못이 컸다. 다만, 단테는 입 안이 조금 썼다.
“됐다. 알았으니까 이럴 것 없어. 네 말뜻은 충분히 알겠고,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다.”
이런 걸로 전역까지 들먹이며 입막음을 하러 올 건 없었다. 사정을 몰라도 어련히 알아서 비밀을 지켜줄까.
단테가 표정 없이 짧은 한숨을 내쉬자 라파엘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곧, 아래 눈가가 바르르 떨렸다.
“화, 화 많이 나셨습니까.”
“……아니. 내가 왜.”
그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괜히 목소리가 딱딱하게 나갈 만큼 결말이 찝찝할 뿐이었다. 취중의 장난기로 먼저 자극한 입장에서 할 말은 없지만, 아끼던 후배 하나를 이렇게 잃는구나 싶었다. 아마 이전처럼 대하긴 서로 어려울 테니까.
“…….”
라파엘이 고개를 더욱 푹 숙였다. 그래서 단테는 라파엘의 얼굴에 서린 절망적인 표정을 보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팀장님.”
“됐다니까.”
“자, 자수하기 전에 신변을 정리하는 데 시간이 걸려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뵙고 사죄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불쾌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이제 자수하러 가겠습니다.”
“그래 잘 가……, 잠깐만, 자수? 자수?”
자수라니? 갑자기 튀어나온 단어에 단테는 돌아서려던 걸음을 멈췄다. 이게 갑자기 무슨 말이야.
“자수를 왜 해?”
라파엘이 고개를 들었다. 단테와 눈을 마주하자 상처로 엉망인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저, 저는, 흑, 강간범이니까요…….”
“……네가?”
“죄송합니다…….”
연락이 되지 않던 이틀 동안 한 일이 강간……일 리는 없다. 자신을 보며 이렇게 서럽게 비는 걸 보니.
“설마, 그 강간한 상대가 나 말하는 거야?”
“예……? 예…….”
“네가 언제 날 강간했어?”
“…….”
라파엘이 단테를 올려다봤다. 연녹색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들더니 뚝뚝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입술이 쉴 새 없이 우물거렸다.
“팀장님, 계속 아, 아프다고 하셨잖습니까. 심지어, 팀장님, 우시기까지 했는데…….”
“내가?”
“예, 흐, 저, 팀장님 우시는 거, 처음… 그때, 멈췄어야 했습니다…….”
섹스가 격했던 데다가 뒤로 하는 게 처음이었으니 흥분이 고조되었을 때 생리적 눈물이 났을 수도 있다.
아. 끊어진 기억 드문드문 라파엘이 열심히 뺨을 핥았던 기억이 났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이 자식 사실 해피인 거 아니야?’라는 생각을 했었다.
“……또 내가 뭐라고 했는데?”
“팀장님께서 너무 크, 크다고, 아프다고, 그만하라고…….”
크긴 컸다. 처음에 주머니에 담아온 술병으로 착각한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안 된다고 하셨는데 세 번이나 더 했고…….”
까무룩 기절하듯 잠든 걸로 보아 꽤 오래 몸을 섞긴 했다. 중간부터는 둘 다 열기에 취해 체위도 가물가물했다.
“사실, 끅, 팀장님 기절하시고 나서도 허벅지에 문질러 사정을 했습니다. 팀장님, 성기도, 흐, 가, 갑자기 맛있어 보여서 몰래 핥아봤습니다.”
……어쩐지 일어났는데 몸에 말라붙은 정액이 많았다. 그리고 뒷말은… 일단 못 들은 걸로 하기로 했다. 라파엘이 얼굴을 두 손에 묻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파렴치한 강간범입니다…….”
“……뭐라고?”
“저, 저는 파렴치한 강간범입니다!”
“아니, 복창하라는 게 아니라!”
대체 저 금색 몽실구름 같은 머리통에서 무슨 사고가 흘렀는지 모르겠다. 단테는 이마를 짚고 그날의 기억을 필사적으로 더듬었다.
그래. 크다, 아프다는 말은 했던 것 같다. 근데 내가 언제 그만하라고…….
‘헤인스워즈, 흐, 읏, 거긴, 그만, 더 안쪽에, 아…! 흐, 아파, 천천히…….’
아.
단테는 라파엘을 확 돌아보았다.
“라파엘 헤인스워즈! 너, 각하께 뭐라고 말씀드렸어.”
“연회날 술에 취해 싫다는 상대를 강간했다고 솔직히 말씀드렸습니다. 그 상대가 팀장님인 건 말하지 않았습니다.”
“야 이 미친놈아!”
“맞습니다. 제가 그때 미쳤었습니다…….”
“아니!”
미치겠네, 진짜! 단테는 두 손으로 머리를 벅벅 헤집었다. 잠시나마 라파엘을 오해했던 자신을 몹시, 몹시 반성했다. 이어 멍청이라고 다시 욕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금, 성교육만은 철저히 받아왔지만 섹스는 처음인 라파엘은 ‘아파, 그만’을 들으면 멈췄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본능에 못 이겨 섹스를 이어갔으니 자신은 강간범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수를 하겠다며 신변 정리를 하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인 총사령관에게 강간죄를 저질렀다 말하고…….
“…….”
그래, 남자가 잠자리를 가졌으면 책임을 져야 마땅했다. 그건 맞는데, 굳이 자신을 책임질 필요는 없었다. 라파엘의 머릿속 가상의 피해자 단테는 정말로… 라파엘에게 강제로 당한 적이 없었다…….
아니, 강간이라니. 솔직히, 통속적인 표현을 섞어 말하자면 그날 정황상 따먹힌 사람은 라파엘 쪽이었다. 동정을.
“일단 아주 훌륭한 교육을 받았구나. 헤인스워즈, 그날 네가 내게 미안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 것도. 너와 잔 당사자인 내가 너를 강간범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러니 당장 집에 가서 다시 말씀드려.”
“……그, 그게, 집안과는 이미 절연을 해서…….”
“아.”
마른세수를 몇 번이나 했는지 얼굴에 손자국이 남을 것 같다. 순간의 충동으로 귀한 집 도련님을 건드린 대가가 제법 가혹했다.
어린 시절 성당에서 늘 들었던 말, 모든 순간순간을 신께서 지켜보고 계신다는 마음으로 신중히 살아야 한다는 조언이 오늘따라 이렇게 사무칠 수가 없었다. 확실히 지난밤은 주님이 봐선 안 될 만한 밤이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팀장님께서 관대하실 뿐이지, 제가 파렴치한 짓을 한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전 쓰레기예요… 감옥에 처들어가야 마땅합니다…. 라파엘의 체념 걸린 처연한 얼굴이 그렇게 말했다.
“야 이, 멍청아!”
“맞습니다. 제가 멍청…….”
“대답하지 마! 아니, 닥치란 뜻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하…….”
일단 자신이 강간범이라 믿고 있는 바보 같은 해피부터 해결을 해야 했다.
“자, 똑똑히 들어.”
“예…….”
“크다, 아프다는 건 단지 상황에 대한 객관적 서술이야. 네 좆이 커서 ‘크다’, 그리고 그게 뒤에 들어와서 ‘아프다’. 하지만 내가 싫다, 빼라, 뭐 그런 말은 안 했잖아. 그러니까, 아프지만 나쁘지 않다는 뜻이었다고. 알겠어?”
“아, 아프다 하신 게 어떻게 그런 의미가 됩니까.”
“너도 좆 쑤셔 넣었을 때 조여서 아프다고 했잖아.”
“……아.”
그, 그런 거구나. 라파엘이 어느 정도 수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발 뒤늦게 단테의 적나라한 표현들에 얼굴을 화르륵 붉혔다.
“하지만 그만하라고 하신 건,”
“입구만 깔짝깔짝 그만 문지르고 빨리 처박으라고.”
“…….”
하아, 단테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헤인스워즈, 잘 생각해 봐. 나는 싫다, 안 된다는 말을 한 번도 안 했어. 그건 합의하에 한 섹스였다고. 생각해 봐. 내가 진심으로 싫은데 네게 당할 것 같아? 너 하나 못 빠져나가겠어?”
단테 베일리는 특수부대 SAG에서 7년간 현장을 뛰었고, 라파엘은 기껏해야 이제 막 사관학교를 졸업한 병아리였다. 체급 차이가 난다고 한들, 단테가 마음만 먹으면 라파엘을 제압하는 것쯤은 순식간이었다. 라파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러면 내가 저항을 할 생각이 없었다는 거고, 흠, 나도 너와의 섹스를, ……충분히 즐겼다는 거지.”
내가 왜 섹스의 감상까지 전하며 설득을 해야 하는 걸까. 잠시 짙은 회의감이 찾아왔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직관적인 설명을 듣고 나서야 레벨 원, 초보자 병아리, 일주일 전까지 동정이었던 라파엘은 시무룩하던 눈을 들어 올렸다.
“저, 정말입니까?”
“그래.”
“……강간이 아니…었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절대 아니야.”
“……다행입니다…….”
라파엘의 얼굴에 안도가 퍼졌다. 집에서 절연당하고 쫓겨난 주제에 다행이긴 뭘 다행이야. 단테는 골치 아픈 얼굴로 좁은 방 안을 터벅터벅 걸었다.
굳이 말하자면 이 사건은 순진한 녀석보다 자신의 잘못이 더 컸다. 그날 밤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도 자신이요, 잘 타고 있는 곳에 기름을 부은 것도 자신이었다.
하, 어떡한다. 단테는 라파엘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육군참모총장인 아버지한테 가서 ‘제가 사람을, 그것도 같은 남자를 강간했습니다.’라고 말하고, 평생을 군인으로 산 정의로운 아버지의 손에 처맞다 왔다는 거지. 어이없는 상황의 연속에 골이 지끈지끈 울렸다.
“헤인스워즈, 일어나.”
“예.”
“저기 앉아.”
단테가 의자를 가리켰다.
“의자가 하나뿐인데…….”
“그럼 하나뿐인 의자에 내가 앉아서 널 목이 꺾어져라 올려다봐야겠냐? 건방지게.”
“아, 아닙니다!”
단테의 말에 재빨리 자리에 착석했지만, 앉고 보니 자신만 자리에 앉아 있는 쪽이 더 건방지지 않은가… 싶은 얼굴이었다.
깨달았어도 이미 늦었다. 이렇게라도 안 했으면 저 성격에 내내 안절부절 서 있었을 것이다.
단테는 라파엘의 앞으로 와 쥐어 터진 얼굴 이곳저곳을 확인해 보고는 “아이고….” 하며 탄식했다. 새까맣게 딱지가 진 입술 때문에 얼굴이 더 처참해 보였다.
그는 구급상자를 꺼내 손끝에 연고를 덜었다.
얼굴과 손 사이의 거리가 한 마디 정도 남았을 때 단테는 잠시 멈칫했다. 이상한 선배와 얽혀 아버지에게 이런 일까지 당했는데, 자신을 보는 라파엘의 시선은 예전 그대로였다. 실망, 원망 그런 표정은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연고 묻은 손끝이 닿자 따가운지 잠시 몸을 움찔였다. 그러나 그는 곧 단테의 손가락을 눈에 담으며 귓바퀴를 붉혔다. 손끝이 얼굴을 스치는 동안 라파엘은 저항 한 번 없이 얌전히 앉아 있었다.
단테는 투박한 손길로 라파엘의 얼굴 상처 곳곳에 연고를 발랐다. 뭐만 했다 하면 ‘제가 하겠습니다!’, ‘아닙니다!’를 달고 살던 녀석은 금빛 속눈썹을 곱게 내리깔고 얌전히 치료를 받았다.
“잘생긴 얼굴에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아래로 내려가 있던 눈꺼풀이 위로 스륵 올라왔다. 단테는 라파엘과 눈이 마주쳤다.
“왜.”
“……팀장님이 더 잘생기셨습니다.”
단테는 그나마 상처가 없는 이마를 툭 쥐어박았다. 이 꼴로 지금 그 말이 나오나.
“입 안은 괜찮아?”
“괜찮습니다.”
“입 벌려 봐. 크게.”
“…….”
“안 괜찮네. 잠깐 좀 참아 봐.”
단테의 손가락이 라파엘의 입 안으로 들어가 퉁퉁 짓씹힌 볼 근처에 약을 발랐다. 뻣뻣이 굳은 혀가 손가락에 닿았다. 안쪽에도 상처가 나서 볼이 더 퉁퉁 부은 모양이다.
“다른 데보다 여기가 제일 아팠겠는데.”
약을 바르면서도 안쓰러워 자꾸 괜히 금색 머리통을 만져주게 되었다. 단테를 끔뻑끔뻑 바라보던 눈동자가 젖어 들기 시작했다.
“왜 울어.”
“……아이이아.”
입 안 곳곳에 꼼꼼히 연고를 발라준 손가락이 빠져나왔다. 손을 닦고 연고를 제자리에 둔 뒤 돌아오니 라파엘의 눈 주변이 새빨갰다. 벅벅 문지른 게 분명했다.
“기껏 약 발라줬더니만. 가만히 있어.”
단테는 라파엘의 손을 쳐내고 축축하게 젖은 눈가를 대신 닦아주었다.
그러나 손가락으로 문질러도 두드려도 계속 눈물이 차올랐다. 라파엘도 필사적으로 참아 보려는 듯 미간에 힘이 세게 들어갔지만, 결국 뺨을 타고 눈물이 떨어졌다.
“팀장님…….”
라파엘의 어깨가 떨렸다.
“저, 진짜, 팀장님, 강제로 한 거, 아니지요……? 제가, 파렴치한 쓰레기로 보이시는 거, 아니지요?”
“…….”
단테는 새삼 라파엘이 이제 학교를 나온 어린애라는 걸 실감했다. 훈련을 꽤 어른스럽게 잘 따라와서 잊고 있었지만 고작 스물넷이었다.
상관을 강간했다 오해하고, 집안에 절연당하고, 자수를 결심하기까지. 단테가 겨우 연락이 없다는 짜증을 품은 동안 그는 줄곧 공포에 질려 있었을 것이다.
“아니야. 정말로 아니야.”
“……네…….”
단테의 양심이 거세게 공격을 당했다. 쓰레기는 이 순진한 녀석을 건드린 자신이 쓰레기였다. 자신의 스물넷과 올곧고 순진하게 자란 병아리의 스물넷이 다르다는 걸 왜 몰랐을까.
단테는 훌쩍이기 시작한 라파엘에게 집 안에서 그나마 가장 부드러운 수건을 찾아 내밀었다. 제게 위로해 줄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축 처진 어깨가 너무나 가여웠다.
“헤인스워즈.”
“……예.”
이제 단테가 하룻밤의 충동과 그로 인해 벌어진 상황에 책임을 져야 했다. 연장자이자, 일을 시작한 사람으로서.
“각하께 상대가 직접 뵙자 한다고 연락드릴 수 있나.”
라파엘이 단테에게 고개를 들고 눈을 끔뻑였다.
소리 없이 푹 적신 얼굴을 보고 단테는 한숨 뒤로 피식 웃음을 지었다. 손가락이 또 한 번 축축한 얼굴을 훑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 * *
리온과의 술 약속은 취소가 되었다. 대신 단테는 라파엘과 함께 한낮의 햇볕이 내려앉은 도심을 달렸다.
약속 장소는 연회가 있던 곳과 비슷한 수준인 호텔의 최상층 레스토랑, 그것도 프라이빗 룸이었다.
정복이 있으니 격식을 차리는 자리에 갈 때 별도의 옷이 필요하지 않아서 집에 딱히 적절한 옷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예전에 사둔 얇은 정장을 꺼내 입었다. 여름용이라 조금 춥긴 하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팀장님, 정말 이러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저는 나중에라도 부모님께 다시 연락을 드리면 되고…….”
“운전하는데 옆에 보는 거 아니다. 전방 주시해. 정신 사나우니 조용히.”
“…….”
“들어가서도 넌 한마디도 하지 마.”
“하지만……, 네.”
라파엘은 단호한 대꾸를 듣고 바로 입을 다물었다.
호텔에 도착하자 라파엘은 한층 더 끙끙거렸다. 단테가 합죽이를 시켜 놓아 말만 못 하지, 눈빛으로는 걱정을 벌써 4절까지 쏟아냈다.
제도 시내 전경이 훤히 보이도록 한쪽 면을 뚫어 놓은 엘리베이터가 힘차게 올라갔다. 특급호텔을 경험해 본 생애 단 두 번의 경험이 이런 식이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약속 장소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아무리 정계니 재계니 하는 것과 연이 없는 단테도 헤인스워즈 패밀리를 모르지는 않았다.
라파엘의 아버지, 헤인스워즈 육군참모총장.
라파엘의 어머니, 헤인스워즈 제도 도지사.
그리고 카밀라 헤인스워즈. 라파엘의 누나로, 황실 법무팀을 대표하는 변호사였다.
어느 한 사람 빠짐없이 상류층 중의 상류층이라는 분위기를 풍겼다. 아들과 껄끄러운 일이 있다던 남자가 들어오는데도 표정에 조금도 동요가 없었다. 헤인스워즈 총사령관만이 훈련된 단테의 걸음걸이를 보고 미간을 조금 좁혔을 뿐이었다.
“……내가 그 못난 녀석 아비일세. 이쪽은…….”
헤인스워즈 총사령관이 단테에게 먼저 다가왔다. 한평생 스크린으로만 볼 줄 알았던 상관을 참으로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만나게 되었다.
“대위 단테 베일리. SAG ODA-133 팀장입니다. 상황과 장소가 적절하지 않다 판단해 거수경례는 인사로 대신 드리겠습니다.”
헤인스워즈 총사령관의 눈이 새파랗게 커졌다.
“……저 정신 나간 녀석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상관에게 손을 대었나?”
“그날 소위와 밤을 보낸 사람이 저인 건 맞습니다. 허나 각하께서 오해하신 사항이 있어 바로잡고자 나왔습니다.”
“팀장님.”
총사령관이 의아한 눈으로 단테를 바라보고, 라파엘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우선 앉아서 말씀 나누시겠어요?”
헤인스워즈 제도지사가 우아한 목소리로 대화를 잠시 중단시키곤, 테이블을 가리켰다.
“저도 대화를 함께 나눴으면 합니다.”
정중하지만 결코 거절할 수 없는 확실한 권유였다.
네 사람은 자리에 착석했다. 헤인스워즈 패밀리의 세 사람이 한쪽에, 그 반대쪽엔 단테가 앉았다. 남은 한 사람 라파엘은 우왕좌왕하다 단테가 툭툭 친 옆자리에 앉았다.
“그래, 내가 오해했다는 게 뭔가.”
“소위는 그날 술에 많이 취해 상황을 잘못 기억하고 있습니다. 라파엘 헤인스워즈는 저와 강제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으며, 지난밤의 일은 서로의 합의를 거친 화간이었습니다. 헤인스워즈 소위는 비난받을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단테는 라파엘을 돌아보았다. 자리를 생각해 한숨은 삼켰지만 한쪽 눈이 가늘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자수를 할 이유도 없습니다.”
“……팀장님.”
“그 말씀을 드리고자 왔습니다.”
이미 라파엘이 스스로 자신이 강간을 했다고 말한 이상, 그가 아무리 ‘사실은 아니었습니다.’라고 말한다 한들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이건 단테의 입으로 나와야만 하는 이야기였다.
라파엘의 눈꼬리가 그새 더 내려갔다. 조금만 더 시무룩해지면 어깨에 닿을 지경이었다.
“대위님이 그렇게 말해주어 한시름 덜었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헤인스워즈 도지사가 달각,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았다. 효과적으로 자신에게 시선을 모으는 법을 아는 정치인의 동작이었다.
“이이가 뭐라 하든 라파엘은 헤인스워즈의 이름을 건 내 아들이니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자리에 라파엘이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람과 협상하기 위해 나왔어요. 라피가 몹쓸 짓을 했다면 내 모든 것을 다해 진심으로 사죄하겠지만, 그럼에도 피해자에겐 합의금과 기밀 유지 비용을 제안하고 아들에겐 내가 아는 가장 좋은 변호사를 붙였을 거예요.”
“전 이런 문제면 변호할 생각 없어요.”
가만히 있던 라파엘의 누나 카밀라가 처음으로 한마디를 했다.
“그래, 너 다음으로 유능한 변호사. 애초에 넌 친족이니까 안 되지. 헤인스워즈 적폐라느니 하는 말로 난리가 날 테니.”
“그러네요.”
카밀라는 한마디 대답을 남기고는 다시 무뚝뚝하게 차에 곁들여진 스몰 디시를 입에 넣었다.
“아무튼 직접 말해주어 고마워요. 강제가 아니었어도, 원한다면 라파엘의 행동과 이 상황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
“어, 어머니!”
“아닙니다.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도지사님께서도 제게 보상하실 이유가 없으십니다.”
단테는 라파엘의 시선을 받으며 한 번 더 분명히 말했다.
“말씀드렸듯 헤인스워즈 소위와 제 관계에 강제는 없었으니까요.”
“……그래요. 사실 라피의 엄마로서는 오해였다는 결말을 간절히 바라긴 했어요. 가해자 가족의 이기적인 생각이 될 수 있으니 말은 못 했지만.”
라파엘이 누굴 닮아 대쪽 같은가 했더니 법과 질서를 칼로 잰 듯한 부모에게 태어나서였다. 그렇게 라파엘은 상대가 ‘아파’, ‘그만’이라고 말하면 섹스를 멈춰야 한다고 배운 어른으로 자라난 것이고.
단테에게 향하는 목소리는 다소 냉랭했지만, 내용은 라파엘에 대한 어머니로서의 애정이 담겨 있었다. 라파엘의 누나 역시 차 한 모금 들지 못한 동생을 조금씩 신경 쓰고 있었다.
의도치 않게 가족 사이의 화목함을 깬 단테는 딱딱한 표정 안으로 쓴 미소를 지었다.
우선 여기 와서 해결해야 할 한 가지는 끝이 났다. 이제 두 번째 용건이었다.
단테는 테이블 위의 잔을 실수인 척 쳤다. 라파엘의 방향으로 쓰러진 잔은 그의 소매와 상의를 흥건히 적셨다.
“앗.”
“이런. 헤인스워즈. 괜찮아?”
“예, 괜찮습니다. 옷만 젖었습니다. 잔도 깨지지 않았고…….”
“옷이 문제지. 화장실에 가서 닦고 와야겠는데. 다녀와.”
“그, 하지만…….”
자신이 나가면 단테는 가족들 사이에 혼자 남게 된다. 그걸 걱정하는 눈치였다.
“빨리 씻지 않으면 몸에 묻어날 텐데. 가서 옷도 갈아입고 와.”
“그래, 라피. 그렇게 하렴.”
카밀라가 단테에게 말을 보태주었다.
단테가 계속해 등을 떠밀자 결국 라파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까지 뒤를 흘끔거리더니 문이 닫히자마자 걸음이 빨라졌다. 재빨리 돌아와야겠다는 조급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러나 단테로서는 조금 천천히 돌아와 줬으면 했다.
“각하. 또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총사령관이 그를 보았다. 단테 역시 그를 마주 보았다.
“뭔가?”
“……저는 그리 야망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테이블 위에서 고급스럽게 차린 여러 접시들이 손대지 않은 채 식어갔다. 태어나 처음 보는 음식이 대부분이었지만 그것이 탐이 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그의 삶도 그래왔다.
“뒷배가 있는 출신도 아니고, 성격이 소위처럼 좋지도 못해 붙잡은 줄도 없습니다. 그릇이 작은 사람이라 밑에 둔 열한 명의 부하도 챙기기 급급해 진급에 크게 뜻이 있지도 않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그래서, 상황을 보며 해야 할 말을 참고 살지는 않습니다.”
단테는 테이블 아래 긴장으로 굳은 손을 붙잡았다. 눈을 감았을 때의 캄캄함보다 라파엘의 얼굴에 남은 멍이 더 새카만 색이었다.
“현재 라파엘 헤인스워즈의 소속은 SAG 특수무장부대이며, 수습 중인 그가 저지른 모든 일의 책임자는 접니다.”
그제야 단테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를 챈 총사령관이 턱을 쓰다듬었다.
“소위가 제 팀에 소속되어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적어도 제 부하로 있는 동안은 다시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여보, 그런 일이라니…….”
“아, 볼 거라곤 얼굴밖에 없는 라피 녀석 그렇게 만든 거 역시 아버지셨군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남편과 단테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도지사가 그 말을 듣고 눈을 커다랗게 치떴다.
“당신 설마, 저게 당신이 한 짓이었어요? 내가 전에도 그렇게 애 쥐어패지 말라고…….”
“아니, 라파엘 그 녀석이 자기 입으로 사람을 강간했다 하잖습니까.”
“화간입니다. 아니, 제가 먼저 도발했습니다. 소위는 질타받을 만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설령 소위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직속 상관인 제게 보내 군법으로 판결을 받는 것이 절차에 맞습니다.”
강제적 추행 및 폭행에 대한 제국법은 엄격했다. 하물며 가해자가 군인이라면 배로 가중처벌이 되었다. 관련 수사기관 또한 철저하기 그지없었다.
단테도 수사 결과 라파엘이 강간범으로 밝혀졌다면 치를 떨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찢겨죽어도 싼 진짜 강간범의 이야기이고, 혼자 충격을 받고 꺽꺽 울던 멍청이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단테는 평생 진급길이 막혀도 딱히 상관이 없었다. 사관학교에 진학을 한 것만으로도 태어난 환경에 비하면 꽤 큰 성과를 거뒀다 생각하고, 특수군의 팀장 또한 적성에 맞았다. 앞으로 평생 험한 곳만 뺑이치며 사는 것도, 뭐.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니 이 말만은 꼭 해야겠다. 그는 유한 팀장이지만, 팀원을 저 꼴로 패고 겁에 질려 울도록 몰아붙인 사람에게도 유할 마음은 없었다.
하물며 아버지 아닌가. 단테는 라파엘의 이야기를 잠깐 듣기만 했는데도 오해란 걸 알았다. 그런데 라파엘의 성격을 충분히 잘 알 만한 사람이 한마디조차 들어주지 않았다니.
말을 꺼내고 짧은 후회가 들었으나, 조금 전 도지사의 ‘또 쥐어팼다’라는 말을 떠올리자 말끔히 사라졌다.
“흠.”
헤인스워즈 총사령관이 단테를 지그시 바라봤다. 호통을 치거나 권위를 드러낸 게 아닌데도 시선이 무거웠다. 단테가 라파엘을 병아리라 느끼는 만큼, 단테를 한참 병아리라 생각할 장성급의 위압감일 것이다.
그러나 단테는 자신을 보는 눈동자를 바로 응시했다. 까마득한 상관이 무섭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이 의견만큼은 한 치도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이 말을 하려고 라파엘을 내보냈나?”
“예, 그렇습니다.”
총사령관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떠올랐다. 점점 밝아진 미소는 곧 함박웃음으로 변했다. 호탕한 웃음소리가 방 안에 터져 나왔다.
“자네.”
“예.”
“내 아들 라파엘을 아주 아끼는군.”
단테는 모든 부하를 아꼈다. 물론 라파엘도 거기에 포함되었다. 그러므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예’지만, 어쩐지 냉큼 대답하기엔 의미심장한 미소가 신경 쓰였다.
“그래. 자네의 부하를 건드린 건 내 사과하지. 오해가 풀렸으니 라파엘에게도 사과를 하겠네. 다만, 사고 한 번 없이 얌전히 자란 아들놈이 술김에 상대를 강간했으니 자수하겠다고 했을 때 순간 느낀 아비의 심정도 참작해 주길 바라네.”
“…….”
글쎄……, 그 입장이라면 단테도 어떻게 행동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오해란 게 밝혀진 지금은 공감하기 어려웠다.
라파엘을 감싸는 게 분명한 침묵을 보고 그가 다시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새파랗게 어린 위관급 장교랑 이렇게 눈을 마주치고 있는 건 처음이군. 꼭 내 젊은 시절 보는 것 같아.”
“당신은 헤인스워즈니까 상관에게 덤빌 수 있었던 거겠죠.”
“그렇게 생각하면 이 친구가 더 대단한 거고. 아주 발칙하고 대범해. SAG 팀장이라 했지, 그래서 이렇게 간이 큰 건가.”
그가 남은 웃음을 흘렸다.
“라파엘 녀석이 아주 훌륭한 상관으로도 모자라 분에 넘치는 좋은 사람과 짝을 맺었군.”
……짝? 담담하게 정면을 보고 있던 단테의 표정이 살짝 삐끗했다. ‘짝’이라는 낯선 단어는 단테에게서 얼빠진 “예?”라는 반응을 이끌어냈다.
“서로 합의하에 흠… 밤을 보낸 거라면 둘이 만나고 있다는 뜻 아닌가?”
아뇨. 사귀는 건 아니고 원나잇… 입니다만…….
그러나 아무리 제국에서 동성연애 및 동성혼이 보편화되어간다 해도, 또 할 말은 하자는 게 삶의 모토인 단테라도 차마 상대의 부모님 앞에서 그 사실을 말하지는 못했다.
“……예, 그… 그렇습니다…….”
“수습을 가서 상관과 연애를 하고 돌아오다니, 그 녀석도 제법이야. 평생 숙맥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직도 숙맥 맞습니다. 단테가 속으로만 대답하는데, 총사령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상관이 일어났으므로 단테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인스워즈 총사령관은 예순이 다 되어가는 나이인데도 기골이 장대했다. 라파엘의 큰 키가 어디서 유전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위압감 넘치는 모습으로 다가온 그가 단테의 앞에 섰다. 총사령관은 꼿꼿이 선 단테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첫 만남이 비록 이렇게 되어 유감이지만.”
단테의 두 어깨 위에 턱 하고 손이 묵직하게 얹어졌다.
“나도 자네가 몹시 마음에 드네!”
순간 단테는 총구 앞에서도 짓지 않았던 표정을 지었다. 또다시 멍청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예?”
“라파엘이 좀 보고 배웠으면 좋겠군. 상관의 이 기개며 의로운 모습을. 내가 자네처럼 키우고 싶어서 라파엘을 엄하게 대한 건데, 사관학교를 졸업하도록 저 모양이니. 이렇게 훌륭한 상관 밑에서 반년 동안 뭘 배운 건지 모르겠어.”
“헤인스, 아니, 라파엘은 수습 기간 동안 충분히 열심히 했습니다. 팀에 많은 보탬이 되었습니다.”
흠, 총사령관이 단테를 빤히 보았다.
“그런데 자네는 라파엘의 외모… 말고 그 성격도 마음에 드나? 내 아들이지만 사내놈으로선 영 아니지 않나?”
질문을 듣고 총사령관뿐만 아니라 다른 두 사람도 단테에게 시선을 모았다.
“예. ……음, 귀엽습니다.”
대답이 어눌해서인지 총사령관의 눈썹이 올라갔다. 단테는 얼른 말을 정정했다.
“제가 돌봐주고 싶은 연하가 취향입니다. 좋습니다.”
“아, 그렇군. 역시 라파엘이랑 합이 잘 맞았군.”
헤인스워즈 총장은 다시 한번 단테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네가 앞으로도 라파엘을 잘 이끌어주게.”
“예……, 그런데 한 달 뒤면 수습이 끝나니 앞으로는…….”
“내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자네가 헤인스워즈의 성을 받아주었으면 좋겠군. 모자란 아들놈이지만 대가 끊길 수는 없어서 말이네. 자네가 바라지 않는다면 물론 어쩔 수 없네만.”
“결혼하고 자기 성을 쓰는 경우도 이제는 흔하니까요.”
헤인스워즈 도지사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가 단테를 보며 미소 지었다. 팔꿈치에 부드럽게 손이 닿았다.
“베일리 대위님 같은 분이라면, 저도 얼마든 라파엘을 보내드릴 수 있겠어요.”
“예?”
분위기가 이상했다.
단테는 사실 총사령관이 다가올 때 뺨도 좀 맞고, 물세례도… 거기까진 아니지만, 서로를 위해 헤어져라, 아니면 적당히 즐기다 말아라 하는 충고 정도는 들을 줄 알았다.
그러면 냉큼 “예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려 했다. 출셋길은 좀 막힌들, 아까 말한 대로 별 미련이 없으니까.
하, 하하. 단테는 어색한 웃음을 띠었다. 그러나 다음 질문에는 그도 말이 턱 막혔다.
“결혼은 언제쯤으로 생각하고 있나?”
“…….”
아무래도 그는 단테와 라파엘이 수습 기간 동안 한 지붕 아래 지내며 오순도순 계급의 차이를 넘은 연애를 한 걸로 이해한 모양이다. 단테는 흔들리는 동공을 다잡기 위해 노력했다.
“이, 이제 막 서로를 알아가는 중이라, 그런 말씀은 조금 이른 것 같습니다.”
“그런가. 내가 옛날 사람이긴 한가 보군. 진도가, 흠, 거기까지 나갔으면 결혼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생각했는데.”
“하하…….”
……그렇다면 단테는 지금까지 결혼과 이혼을 수십 번은 반복했어야 했다.
“언제 한번 라파엘도 자네 부모님 앞으로 데려가 감사 인사를 드리게 하게.”
“……예, 언젠가…….”
“그래. 두 사람 생각이 중요한 거겠지. 그럼 우린 방해 않고 일어날 테니 라파엘과 마저 시간 보내게.”
“아, 예.”
“사석에서는 거수경례할 필요 없네. 우리 사이에.”
“……예, 알겠습니다.”
어깨가 마지막으로 묵직하게 툭툭툭 다독여졌다. 총사령관은 흐뭇한 표정으로 단테의 앞을 떠났다.
단테가 예상한 것과는 너무나 다른 결말이었다. 라파엘 이상으로 얻어맞을 각오도 하고 진급에 대한 보복도 충분히 있을 거라 생각하고 약속을 잡았었다.
그런데, 이……, 상견례를 한 것처럼 훈훈한 분위기는 대체 뭘까.
하, 하, 하! 복도 저쪽에서 헤인스워즈 총사령관의 호탕하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몹시 기분 좋아 보이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헤인스워즈 도지사가 뒤이어 단테의 손을 붙잡았다.
“정말 고마워요. 베일리 대위님.”
“아, 아닙니다.”
“우리 애가 대위님에 비해서는 많이 모자란 아이지만, 그래도 대위님처럼 보듬어주는 사람을 만나 다행이에요.”
“…….”
“라피는 워낙 여려서, 듬직한 아들이 한 명 더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오늘 이렇게 소원을 이루게 되네요. 고마워요.”
단테의 얼굴을 보며 그녀의 미소가 짙어졌다.
“저도 참 주책이지만 벌써 아들같이 느껴지네요. 라파엘을 이렇게 멋지게 감싸주고 귀여워해주는 사람이라니, 너무 반가워서.”
“아, 아닙니다. 감사, 합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반사적으로 인사를 했다. 다행히 그녀는 어색하게 말려 올라간 말끝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럼, 라피가 돌아오면 즐겁게 식사해요.”
“……알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허리 숙여 인사한 뒤, 마지막으로 단테의 앞에 온 건 카밀라 헤인스워즈였다.
“받으세요.”
네 모서리의 각이 칼같이 뾰족뾰족 선 명함에는 그녀의 이름과 직장,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황실 법무팀 소속 변호사 카밀라 헤인스워즈」
“이번에 저희 집안 때문에 시끄러운 일 겪으셨으니, 연락주시면 무슨 일이든 한 번은 무료 변호해 드릴게요.”
짧은 용건을 전하는 내내 목소리 톤은 변화 한 점 없었다. ‘변호 한 번’이라고 표현했지만, 천문학적 액수를 자랑하는 카밀라 헤인스워즈 변호사의 몸값은 ‘한 번’이라고 표현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넣어두세요. 인생 어떻게 될지 몰라요. 라피랑 연애하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어디 아셨나요.”
“……예.”
사실은 연애할 줄도 몰랐으므로, 단테는 지갑을 열어 안쪽에 명함을 고이 넣었다.
“라피에게도 아버지 고소하고 싶으면 연락하라고 전해 주세요.”
“그러셔도 되는 겁니까?”
“알 반가요. 명확한 사실은 아버지가 위계를 이용해 친족인 라피를 폭행 수준으로 쳤다는 것과, 본격적으로 들어가면 헤인스워즈라는 제국 명가를 뒤집을 대 소송이 될 거라는 거죠. 헤인스워즈는 망해도 제 이름값은 올라갈 거예요.”
“…….”
“농담이에요. 그냥, 다른 곳도 아니고 애 얼굴을 때린 게 빡쳐서.”
“참, 헤인스워즈. 아니, 라파엘은…….”
옷을 갈아입고 돌아올 만한 시간은 한참 지났다.
“라피는 화장실에 있을 거예요.”
그녀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꼈다.
“옛날부터 눈물은 많은데 울면 아버지한테 더 혼이 나니까 욕실에서 물을 틀어놓고 우는 게 습관이 되었거든요. 여긴 욕실이 없으니 화장실에 가 있겠죠.”
“아…….”
“사실 그 애가 어떻게 이 집안에 태어났는지 모르겠어요.”
헤인스워즈 부부가 나간 문밖을 슬쩍 쳐다본 그녀가 말했다.
“가족 간에 사이가 나쁜 편이라고 할 순 없지만, 아까 보셨죠. 아버지도, 어머니도, 나도. 우선 1순위는 자기 자신이에요.”
아들의 상황보다 자신의 정의와 분노가 먼저였던 아버지, 헤인스워즈 도지사 자리를 지키고 싶어 하는 어머니. 누나야 뭐…… 모든 말과 행동으로 입장을 보여주었다.
“나는 이 방식이 편하고 익숙한데, 라피는 자기가 준 만큼의 애정이 식구들에게서 돌아오지 않는 데에 상처를 받고, 상처받으면서도 계속 바보 같은 행동을 반복하더라고요.”
“그렇습니까.”
“이해는 안 가도, 가엾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어요. 오늘 대위님의 행동도 제게는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에요. 라파엘이 뭐 대수라고 평생의 커리어를 걸고 상관에게 대들어요.”
“…….”
그녀가 이곳으로 와 처음으로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둘이 만난 걸 잘됐다고 생각해요. 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 같고, 아버지는 거기다 더해서… 아들에게 보지 못했던 군인다운 남자라 눈이 돌아가신 것 같고요. SAG에 계신다고 했죠?”
“예.”
“사위가 아니라 라피 대신 아들 삼겠다고 하시는 거 아닌가 몰라…….”
농담처럼 말하지만, 조금 전 모습을 보면 완전히 농담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카밀라의 온기 없는 말을 듣고 애정을 갈구하듯 자신을 보곤 했던 라파엘을 떠올리자 미약한 죄책감이 찾아왔다. 손끝을 따끔거리게 하는 그 감각은 팔을 타고 점점 더 올라왔다.
“아무튼, 고맙고 미안했어요. 또 봐요.”
“예. 그럼.”
단테는 그녀와 서로 가볍게 목례를 하고 방을 나섰다.
그는 출입구의 반대쪽으로 가서 화장실의 위치를 물었다. 화장실에 가까워질수록 물소리가 들렸다. 단테는 화장실 문을 두드리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 티, 팀장님.”
숨어 있기라도 하면 어쩔까 싶었는데, 라파엘은 세면대를 짚고 서 있었다. 카밀라의 말대로 물을 세게 틀어놓은 채로.
“가족들 다 가셨다. 나와.”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라파엘은 바로 고개를 숙여 얼굴을 찬물로 씻어냈다. 씻는다기보단 얼굴을 찬물로 헤집는 수준이었다.
이윽고 목 위를 흥건히 적신 라파엘이 단테의 앞으로 돌아왔다. 앞머리며 속눈썹이 처연히 젖어 물을 뚝뚝 흘렸다. 라파엘 헤인스워즈 정도의 외모가 되니, 얼굴 곳곳에 남은 상처마저 지금의 청초함과 조화가 되었다.
“아까 나온 건 다 식었겠다. 여기 다시 데워달라 하면 해주냐?”
“아, 아닙니다.”
라파엘이 고개를 저었다. 물방울이 살짝 튀었다.
“새로 주문하십시오. 제가 사겠습니다.”
그 말에 됐다느니 실랑이할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아 단테는 적당히 손을 저었다.
“그래. 찬물도 한 잔만.”
조금 전 다섯 사람에 맞춰 차려졌던 테이블이 말끔하게 치워지고, 이번에는 정갈한 식사가 차려졌다.
라파엘은 사람을 물리고 직접 잔에 얼음물을 따라 단테에게 내밀었다. 차가운 물이 들어가자 엉망이 된 머리가 좀 진정되는 것 같았다.
“우선, 이런 일 겪게 해서 미안하다. 그날 네 입장을 생각 못 하고 행동한 건 변명의 여지 없이 내 잘못이야. 네게 그런 식으로 행동해선 안 됐어.”
“아,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입술을 달싹이던 라파엘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죄송합니다.”
“네가 죄송할 건 그날 아침에 말없이 튄 것밖에 없어.”
“죄송합니다…….”
“그것도 굳이 말하자면 내 잘못이 크지. 얼굴은 좀 괜찮냐?”
“예. 괜찮습니다. 팀장님께서 약 발라주신 이후 하나도 아프지 않습니다.”
단테는 물잔을 반쯤 비웠다. 라파엘도 그를 따라 한 모금을 마셨다.
“잘된 건지는 모르겠는데 우선 각하와 이야기는 마쳤다. 아, 아까 문밖에서 어디까지 들었어?”
“……제가 팀장님 부하인 동안은 손대지 말라……. 그 부분밖에 못 들었습니다.”
“그거 듣고 그렇게 감동해서 울었어? 정말 그게 다야?”
“죄송합니다. 거기서부터 ‘우리 애가 대위님에 비해서는 많이 모자라지만’ 까지 들었습니다.”
결국, 옷을 갈아입으러 가기는커녕 쪼르르 돌아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다는 의미였다.
“설명할 필요 없으니 차라리 잘됐네. 너희 집안에서는 우리가 교제 중인 걸로 알고 있으니, 얼마간은 그렇게 말을 맞추다가 시간이 지나고 서로 마음이 멀어져 자연스럽게 헤어진 걸로 하자.”
단테는 책상에 턱을 괴고 피식 웃었다.
“너도 억울하잖아. 어쩌다 이상한 상관 놈에게 잘못 엮여서 겨우 원나잇으로 결혼을 하느니 마느니 이야기가 나오고……. 가족 간에 곤란한 일 만든 것 다시 한번 미안하다.”
“…….”
라파엘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단테를 바라봤다. 무슨 말을 하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내 얼굴 보기 껄끄러우면 남은 기간 동안 최대한 마주치는 일 없도록 조치해둘……,”
“아, 아닙니다!”
라파엘의 어깨가 가쁘게 오르내렸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 저는 계속 팀장님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혹시 제가 불편하신…….”
“아니. 나도 그런 건 전혀 아니야. 다만 네가 불편할까 봐 그렇지.”
라파엘은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나부낄 정도로 고개를 저었다.
“불편하지 않습니다. 전혀, 조금도…….”
그러더니 입술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팀장님. 저.”
라파엘이 허벅지 위에 내려놓은 두 손이 옷을 세게 쥐었다.
“사실 처음 뵐 때부터 팀장님을 진심으로……, 이,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수습 기간 동안, 마음을 접질 못했습니다…….”
금빛 속눈썹에 눈물방울이 맺혔다. 곧 커다래진 방울이 뺨을 타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흘러내렸다. 정면에서 바라본 우는 모습은 제단 앞에서 무릎을 꿇고 호소하는 대천사인 줄 알았다.
라파엘의 어깨가 위아래로 서서히 들썩였다.
아, 울지 마. 안 돼. 한두 방울 또르르 떨어뜨리는 정도는 괜찮지만 제발 이 분위기에서 오열만은…….
“죄송합니다…….”
라파엘이 눈을 감았고, 눈물이…… 저렇게 예쁘게 쏟아질 수가 없었다. 신에게 인간 세상으로 내려가는 벌을 받은 천사도 저렇게 서럽게 울지는 못할 것이다.
아니, 그러니까 대체 왜?
그러고 보니 연회 날도 자신을 보며 저 표정으로 울먹였었다. 그럼 이게, 지금 단순한 흥미가 아니라 진심이라는 건데.
“너… 나 진심으로 좋아하냐?”
“예, 그렇습니다.”
“대체 왜? 네가 왜 나를?”
라파엘 헤인스워즈가 뭐가 모자라서? 라는 의미가 함축되어있는 질문은 “팀장님께 제가 품기에는 과분한 감정이죠…….”라는 답으로 돌아왔다.
“첫눈에, 흑, 반했습니다…….”
단테는 한 모금 넘긴 물에 사레가 들렸고, 라파엘은 눈물이 떨어지는 붉은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팀장님은 항상 당당하시고, 실력도 좋으시고, 팀원들 잘 챙겨주시고, 제가 실수해도 정당한 방식으로만 질책하시고, 늘 권위를 내세우기보단 앞장서서 행동하시고, 또.”
“…….”
“너무 잘생기시고, 몸도 좋고 멋지십니다.”
“내 몸은 언제 봤냐?”
“샤워장…… 아, 아닙니다.”
라파엘이 고개를 푹 숙였다. 타고난 골격이 있어야만 나오는 넓은 어깨도 축 가라앉았다. 저런 몸을 가진 사람에게 듣는 칭찬이라니 황송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팀원들을 최우선순위로 하시는 모습에 여러 번 반했습니다. 처음 복도에서 뵈었을 때, 기억하십니까? 먼저 얘기 나누자 해주시고, 팀에 들어오기 전에 주의해야 할 점 이것저것 알려주셨는데.”
“어어…….”
“팀장님이 잠깐 보자고 하셨을 때, 헤인스워즈라고 잘난 척하지 말라고 경고 듣거나 몇 대 맞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성격이, 이래서… 사관학교에서도 내내 그랬고…. 팀장님께선 SAG 팀장 중에서도 가장 출신에 연연하는 걸 싫어하시고 훈련에 엄격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단테가 라파엘을 데리고 나와 가장 먼저 한 것은 음료수를 한 캔 쥐여주는 것이었다. 무서운 경고 대신 “보면 알겠지만, 중대장이 이런 사람이라 팀 분위기도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를 거다.”가 첫 마디였다.
이제 막 사관학교를 졸업한 병아리인 라파엘 앞에서도 위계를 내세워 기를 죽이려는 모습조차 없었다. 대신 다른 팀원 열한 명의 이름을 미리 알려주며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남겼다.
“그때부터 팀장님께 눈길이 갔습니다. 아마 저는 처음 뵈었던 그 날부터…….”
첫사랑에 빠진 소년의 얼굴을 한 라파엘을 두고 단테는 생각했다.
그럼, 데리고 나갈 때 그 얼굴이 환하게 갠 게 아니라 맞을 줄 알고 하얗게 질렸던 거였구나. 단테는 새삼 그에게만 미화되었던 추억을 수정했다.
“겨우 그거에 반했다고?”
“겨우가 아닙니다. 저한텐 정말로 큰 기억이었습니다. 그 콜라, 살균 용기에 담아 두고 큰 훈련 나가기 전에 한 모금씩만 아껴 마셔왔습니다.”
“아니 그걸 왜 아껴 먹어? 유통기한도 다 지났겠다. 버려!”
“시, 싫습니다. 마시면 힘이 납니다. 진짜로 효험 있습니다.”
“새로 사줄 테니까 버려…….”
새로 사준다니 솔깃하지만 버리기는 도무지 싫은지 그는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이런 순정을 간직하고 있을 줄은 또 몰랐네. 단테는 남은 찬물을 입 안에 부었다. 라파엘이 얼른 빈 잔을 다시 채웠다.
단테를 바라보는 연녹색 시선이 익숙했다. 라파엘은 한순간도 빠짐없이 이 눈빛이었다. 단테에게만 갑작스럽지, 라파엘에겐 반년을 이어온 감정이었다. 간절한 시선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늦었을 뿐이었다.
단테는 조용히 긴 한숨을 내쉬었다. 허탈한 웃음인지, 탄식인지, 곤란함인지 알 수 없는 한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