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26)

1-3.

새벽이 밝았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척박한 국경에서 공국의 부대와 합동 훈련을 지휘하던 단테 베일리 대위는 습관적으로 눈을 떴다. 그러나 훈련관이라기엔 아늑한 침구, 무엇보다 창밖에 펼쳐진 도시의 골목 풍경을 보고 도로 몸을 눕혔다.

운동이 끊긴 몸은 생각보다 쉽게 굳는다. 그러니 한 달이라는 긴 휴가 기간 내내 나태하게 보낼 순 없지만, 인간적으로, 일주일 정도는 괜찮았다.

한바탕 봄비가 내리려는지 하늘이 꾸물꾸물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없으니 눈꺼풀이 자연스레 아래로 덮였다.

그래서 다시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는데.

“…….”

게으름을 원하는 몸과 달리 머리는 군부대에서의 습관이 철저히 들었다.

기상 점호를 마치고 오늘의 활동을 시작한 머릿속은 가장 먼저 어제의 주요 사건을 브리핑했다. 어제 하루 동안 벌어진 모든 기억들은 잠기운을 순식간에 내쫓기에 충분했다.

하루 만에 너무 많은 사건을 실은 광풍이 지나갔다. 격전지에서도 이보다 많은 일이 일어나진 않았을 것이다.

‘일단…… 그, 일에 대해서는, 진정하고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

어제 라파엘과 단테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헤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단테에게는 머리를 식힐 시간이, 라파엘에게는 상한 콜라를 버릴 시간… 아니, 벅차오른 감정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했다.

단테는 몸을 일으켜 앉아 흐리멍덩한 하늘을 보며 목을 좌우로 풀었다. 이상기후로 며칠간 봄비가 장마 못지않게 기승을 부릴 것이란 예보를 떠올렸다.

협탁에 놓인 낡은 시계를 확인했다. 예상대로였다. 07시 15분. 약속 시각까지는 정확히 6시간 45분이 남았다.

머리를 툭툭 정돈하고 테이블에 놓인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아직 시간은 많았다. 그러니 지금부터 천천히 당황스러운 감정을 품은 후배에게 전할 말을 고민해 보자 싶었다.

밖에서 보니 우중충한 구름이 지면으로 한층 더 다가와 있었다. 다 피운 담배를 끄고 버린 그는 지하 카페테리아에서 아침으로 먹을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서 방으로 돌아갔다.

훈련 중에는 죽어도 가지 않던 여섯 시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단테는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빗소리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민과 함께 식어간 커피와 직직 그어진 글씨들만 가득한 종이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지난 휴가에도 입었던 티셔츠와 청바지를 꺼냈다. 구매한 지 몇 년 되었지만 유니폼이 있는 직업의 특성상 몇 번 입지 않아 버리지도 못하고 계속 둔 옷이었다.

적당히 티셔츠에 목을 끼워 넣으려는데.

‘팀장님께 첫눈에 반했습니다…….’

갑자기 라파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그리고 단테는 다시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반하고 말고를 떠나 모처럼 제도에서 만나는데 너무한 차림인가 싶었다.

그래도 첫눈에 반한 상대라는 말까지 들었는데 거지꼴로 나가긴 좀…….

단테는 티셔츠를 벗어 내려놓고, 서랍에 있는 새 셔츠의 포장을 뜯었다. 말쑥해진 차림을 확인하고 거울에 비친 얼굴을 빤히 보았다.

누군가에게 얼굴을 이유로 거절당한 적은 없지만, 뭐 특별한 구석이 있나 싶은 외모였다. 특히 명화 속 천사의 현신인 라파엘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대체 그런 녀석이 어쩌다 나를 좋아……

“…해서 지 팔자 지가 신나게 꼬고 있냐.”

어린놈 하나를 잘못 건드린 자신의 죄가 우선이지만, 라파엘의 취향도 너무나 특이했다.

왜 나를? 라파엘 헤인스워즈가 왜 나를?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 라파엘에게 해야 할 말도 정하지 못했다.

약속 시각이 가까워졌다. 단테는 창문으로 한 번 더 날씨 상태를 확인했다. 보아하니 지나가는 비는 절대 아니었다. 그는 감색 우산의 먼지를 털어 챙겨 들고 방을 나섰다.

단테가 사는 곳은 제도 방위군과 제도 안팎을 오가는 일부 특수군에게 지급된 관사였다. ‘군인아파트’라는 투박한 별명으로 불리고 있지만, 연구시설이 포함된 관사는 웬만한 복합단지 못지않게 시설이 좋았다.

밀리터리 ID를 내면 무료로 이용이 가능한 푸드코트, 트레이닝 센터, 여가시설이 있으며, 공공연한 비밀로는 지하에 특수부대를 위한 훈련장이 넓게 설치되어 있다.

그런 이유로 높은 경쟁률을 뚫어야 입주할 수 있는 관사에 특수부대원은 100% 합격이었다.

관사의 복도는 근무시간답게 고요했다. 단테는 평일 오후에 여유롭게 복도를 걷는 사치를 누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는 현관을 나서자마자 눈 사이를 좁혔다. 분명 회색으로 물든 날이었는데, 저 앞에 금빛 몽실거리는 무언가가 둥둥 떠다녔다. 심지어 그 무언가는 반갑게 자신을 돌아봤다.

“팀장님!”

“…….”

관사 건물 바로 앞에 라파엘이 서 있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사실 단테는 ‘그 옷은 뭐냐’라고 묻고 싶었다.

라파엘의 옷차림은 콘서트홀에 가져다 놓으면 오늘의 메인 연주자요, 예식장에 가져다 놓으면 오늘의 신랑이었다. VIP 경호를 할 때나 보았던 쓰리피스 정장을 이렇게 또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비가 많이 와서 모시러 왔습니다.”

“비가 많이 와?”

너 나랑 태풍 때문에 제방 무너진 곳에서 구조 작업하던 기억 안 나니? 라파엘이 빗방울을 튀기며 성큼성큼 다가와 우산을 기울였다. 청춘 드라마에 나올법한 로맨틱한 모습이었다.

빗속에서 세레나데를 부를 것처럼 환하게 미소 지은 라파엘이 자신의 우산 속으로 들어오라 손짓했다. 어쩐지 우산이 둘이 써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큼지막했다.

그러므로 단테는 슬그머니 자신의 우산을 펼쳤다.

* * *

단테는 라파엘의 차를 타고 제도 근교의 어느 카페로 이동해 마주 앉았다. 외관부터 웅장함을 자랑하는 카페는 내부도 화려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우아하게 꾸며진 곳이었다.

직원이 두 사람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고 분홍빛이 나는 차를 따랐다. 다기도 컨셉에 맞게 장미 덩굴이 화려하게 음각되어 있었다.

정장을 완벽히 빼입은 라파엘과는 어울리고, 무난한 차림의 단테와는 어색한 장소였다.

“팀장님.”

“아, 어.”

단테는 비 오는 숲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혹시… 정장 차림을 싫어하십니까?”

“아니. 딱히 싫어할 이유가 있나.”

어깨 위에 라파엘의 얼굴이 얹어져 있는데 뭔들 안 어울리겠는가. 저 정장도 라파엘에게 입혀짐으로써 실제보다 배는 태가 살았을 것이다.

“다행입니다. 우산 같이 안 써주시, 흠, 아니, 계속 창밖을 보고 계셔서 이 모습이 싫으신 건가 걱정했습니다.”

“그런 건 아니야. 그냥…….”

괜찮은 것과 별개로 똑바로 마주 보기 부담스러운 차림이지 않는가.

정돈해 뒤로 깨끗이 넘긴 머리카락이며 멍 자국을 가려 훤칠한 이목구비를 되찾은 얼굴, 탄탄한 몸에 딱 맞아떨어진……, 하아, 누가 봐도 ‘저 오늘 엄청 신경 써서 차려입었어요.’라 말하는 의상까지.

누가 저 모습을 보고 군인이라 짐작하겠는가. 대부분이 이름 있는 명가의 도련님―이건 맞는 설명이긴 했다―이나, 재벌가의 후계자를 떠올릴 것이다.

라파엘은 카페 안에 얼마 없는 사람들의 시선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이 모습이 단테의 눈에만 도드라져 보이는 건 아닌 모양이다.

“어제 집에서 별일 없었어?”

“예. 참, 아버지께 사과 듣고 화해했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팀장님이 아니었다면 전 그대로 집안과 절연하고 지냈을지도 모릅니다.”

“총사령관님께 일개 대위가 건방지게 대든 건데 감사는. 각하께 뭐 더 안 좋은 말씀 듣진 않았고?”

“아버지께선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이셨습니다. 어머니와 누나도……, 누나가, 오늘 팀장님을 만난다 하니 이렇게 입고 가라고 조언해줬습니다. 상판대기는 멀쩡하니 옷이나 좀 제대로 차려입으라고…….”

다시 보니 역시 이상한 것도 같습니다. 라파엘이 창에 흐릿하게 비친 모습을 보며 매무새를 다듬었다.

“잘 어울려. 서로 간에 별 모습을 다 봤는데, 멀끔히 차려입고선 뭘 그리 수줍어해.”

단테는 사수를 맡은 반년간 땀에 흠뻑 젖은 라파엘부터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꼬질해진 라파엘, 심지어는 맨몸으로 바다에 입수하는 라파엘까지 보았다. 단정한 정장 차림을 보고 처음에 괜히 어색함을 느낀 게 아니었다.

“그렇죠. 팀장님께서는 제 모습을 다…… 보셨죠…….”

라파엘이 볼을 붉혔다. 어떤 추억을 떠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단테 자신과는 다른 기억인 것 같았다.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단테는 이미 식은 차를 입으로 가져갔다. 머뭇거리던 라파엘이 먼저 말을 꺼냈다.

“팀장님,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어어. 뭔데?”

“저…….”

그가 수줍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곤 오른손으로 살포시 자신의 가슴 가운데를 짚었다.

“제 몸은 팀장님 마음에 들었습니까?”

“큽……! 쿨럭, 컥.”

막 입에 담은 찻물이 도로 튀어 나가려는 걸 겨우 삼켜냈다. 가슴을 퍽퍽 치며 겨우 사레를 진정시키고 라파엘을 다시 보았다. 라파엘의 눈동자는 그새 또 끄트머리가 축 처졌다.

“그, 그렇게 별로였습니까……?”

“그걸, 그렇게 물어보는 녀석이 어디 있어!”

사레가 제법 세게 들렸는지 아직도 코가 매웠다. 라파엘은 우물쭈물 대답했다.

“앞으로 어떻게 노력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여쭤봤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질문을 시정하겠다는 건지, 자기 몸을 시정하겠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객관적으로 몸은 딱히 시정할 곳이 없어 보였는데.

‘팀장님, 팀장님…….’

…라는 생각과 동시에, 어느 밤에 눈앞에서 들썩이던 어깨가 떠올랐다. 단테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북북 헤집었다. 안 돼. 그 기억 떠올리지 마.

이 와중에 라파엘은 ‘앗, 제 머리를 쓰다듬으셔도 되는데…….’ 하는 소리나 했다.

“너.”

“예.”

“어제 말한 거 진심이야?”

“예, 저 팀장님 진심으로 좋아합니다. 팀장님을 만나기 전까지 이렇게까지 좋아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저, 저 팀장님이 첫사랑입니다!”

황제가 공공연하게 남성 연인을 두며 동성혼, 동성애 등에 남아 있던 보수적인 시선이 완전히 거둬졌다곤 해도, 지나치게 저돌적인 고백이었다.

그러고 보니 황제와 연인의 나이 차가 7살이라, 한때 연인 간에 7살 나이 차가 애틋한 사랑의 상징이라 여겨진 적이 있었다.

갑자기 이게 왜 떠올랐냐면, 첫사랑이라는 말을 듣고 나이 차를 되짚어보다가 라파엘과 단테 사이의 나이 차가 7년임을 문득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줄곧 팀장님을 좋아했습니다. 팀장님을 강제로 덮친 줄 알았을 때, 집안에서 쫓겨나는 것보다 팀장님이 절 싫어하실까 봐, 그게 더 무서웠습니다. 팀장님이 제게 ‘죽어, 쓰레기야.’라고 하면 어떻게 죽어야 좋을지 고민도 했고…….”

“그딴 고민을 하기 전에 나한테 연락을 했어야지, 멍청아.”

“연락 드렸다가 ‘죽어, 쓰레기야.’ 하실까 봐…….”

“…….”

하아……. 단테는 등받이에 몸을 풀썩 기댔다. 반대로 라파엘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무릎 위에 두 손을 단정히 내려놓았다.

“오해가 풀리고 나선 팀장님께서 가짜로 사귀자고 하신 말씀이 너무 슬펐습니다. 몇 달간 팀장님과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꿈을 꾸며 살아왔는데, 이런 식으로 이뤄진 게 너무 속상했고……. 사귀는 척하자는 말씀이 제겐 꼭 여기까지라고 선을 긋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

“그게 너무 속상해 어제 충동적으로 고백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전부 진심이었습니다. 속삭이듯한 목소리가 덧붙여졌다.

“너는… 내게 호감을 갖게 된 것까지야 뭐 취향이 특이하다 할 수 있는데, SAG 팀장이 어떻게 사는지 봤으면서 연애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네! 듭니다. 사귀어 주실 겁니까?”

“아니? 전혀.”

“그, 그러시군요.”

역시 그렇구나……. 라파엘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단테를 바라봤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다는 게 얼굴에 다 보였다.

“……괜찮아?”

“예, 물론입니다.”

그가 몹시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팀장님께 제 마음 강요드리려 드린 말씀 아닙니다. 저는 감히 팀장님께 무언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라파엘은 말을 마치고 혼자 눈을 끔뻑이다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슬그머니 말을 정정했다.

“사실 조금 바랍니다.”

“…….”

“……그, 그래도, 저는 바라보는 걸로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 어른스럽게…….”

팀장님, 단테를 다시 부르는 목소리가 마치 비에 젖은 강아지 같았다.

“그러니 저…… 팀장님 계속 좋아하는 건 괜찮다고 허락해 주십시오. 팀장님을 향한 마음 최대한 내색 안 하고 바라만 보겠습니다.”

“이제 다른 부대에 갈 녀석이 나는 어떻게 보려고.”

“찾아뵙겠습니다. 팀장님 휴가 때나, 가까운 곳으로 오셨을 때나……, 아, 혹시 그것도 안 됩니까?”

“…….”

사실은 단호하게 끊어내는 게 맞았다. 그러나 스스로도 알고 있다시피, 그는 업무 외 인간관계에선 모진 말을 어려워했다. 특히나 이런 방식으로 간절히 매달리는 후배에게는 더욱 힘든 일이었다.

내색 없이 좋아하겠다고만 하는 녀석에게 절대 안 된다느니, 포기하라느니 하는 말을 할 수도 없고…….

조금 더 솔직한 심정으로는 순수하고, 마음을 따라 필사적으로 달릴 줄 아는 녀석과의 연을 잃고 싶지 않았다.

단테는 테이블에 턱을 괴고 라파엘을 보았다. 커다랗게 뜬 연녹색 눈동자가 간절하게 자신을 향하고 있다.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어느새 단테도 스스로에게 관대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 그건 괜찮아.”

바라보기만 하겠다는 걸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해라 마라를 결정한단 말인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도 잠시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역시 라파엘 헤인스워즈가 제게 주던 시선을 그저 스쳐 지나간 사람들처럼 끊고 싶지 않았다.

“가, 감사합니다.”

“이게 감사받을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조금 씁쓸함이 담겨 있긴 하지만 라파엘이 평소처럼 배시시 미소 지었다. 단테도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치기 어린 마음과 충격적인 사건이 겹쳐서 생긴 감정일 테니, 곧 연애 감정과 다름을 깨달을 것이다. 그때는 웃으며 ‘그런 일이 있었지’ 하는 선후배 관계로 돌아가면 되었다.

그나저나 예쁘게도 웃는다. 얼굴에 모든 미인의 조건이 모여 있다는 건 첫 만남에서부터 알았다. 복도에서 본 서늘한 표정도 잘 어울렸는데, 수줍게 웃는 지금 모습은 눈에 더 선명하게 남았다.

그 때, 저쪽에서 종업원이 커다란 트레이를 이끌고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걸 먼저 발견한 단테가 라파엘에게 물었다.

“헤인스워즈, 뭐 또 주문했어?”

“예? ……앗! 자, 잠깐!”

라파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팔로 가위표를 만들었다.

“잠시만요! 지금 오면 안 되는……!”

그러나 종업원은 그윽한 눈빛으로 트레이 위에 덮인 천을 치우느라 라파엘의 사인을 보지 못했다.

단테의 눈앞에 넘치게 담겨 있는 장미꽃이 펼쳐졌다. 얼추 보아도 수백 송이는 되어 보였다. 트레이가 단테의 바로 앞에 멈춰선 탓에, 커다란 천 아래에서 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꽃향기가 단테의 얼굴로 훅 끼쳤다.

“이게…… 뭡니까?”

“그대의 사랑스러움에 비할 수는 없지만, 넘치는 마음의 일부나마 그대에게 보여드립니다.”

뭐, 뭐라고요? 단테는 소름이 돋은 팔을 감쌌다.

그런 그의 앞에 종업원이 가장 탐스럽게 핀 한 송이를 뽑아 내밀었다. 단테는 얼떨결에 꽃을 받아들었다. 짙은 분홍색 꽃잎이 심지에 가까워질수록 붉은빛이 되는 예쁜 장미였다.

“붉은색과 분홍색이 섞인 사라 로즈는 열렬한 구애, 뜨거운 사랑을 의미합니다. 렉서스 2세가 소꿉친구였던 사라 황후의 마음을 얻기 위해 품종을 개량한 장미에 그녀의 이름을 붙이고, 온 궁을 그 장미로 가득 채운 고백이 성공한 데서 꽃말이 유래했습니다.”

“……아, 열렬한 구애, 뜨거운 사랑이요.”

바라만 보기만 해도 만족……? 내색 안 할 테니 좋아하게만 해달라……?

처연한 짝사랑을 토로하던 라파엘을 떠올린 단테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그, 그만! 됐습니다. 여기까지만!”

라파엘이 황급히 그를 제지했다.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 마치 사라 황후를 처음 만난 렉서스 황제의 심정을 나는 느꼈소…」 대목을 읽으려던 직원이 눈을 끔뻑이며 밖으로 쫓겨났다.

단테는 향만으로도 어지러워질 만큼 가득히 쌓인 장미 아래 리본을 보았다.

「디어 캡틴 달링♥」

“어쭈…….”

단테는 한 번 더 소름을 쫓기 위해 팔을 문질러야 했다. 얼굴이 시뻘게진 라파엘의 부끄러움이 절로 전해져왔다.

허, 캡틴 달링?

캡틴 베일리의 입꼬리가 위로 죽 올라갔다. 눈이 웃고 있지 않은 미소였다.

“상관의 성을 갈아치우는 하극상은 또 처음 보네. 내 이름이 언제부터 단테 달링이었지?”

“워, 원래 지금 올 게 아니라 제가 고백을 하, 한 뒤에…….”

라파엘의 커다란 덩치가 점점 수그러들었다. 팀장님 좋아해요, 좋아해요 소리치던 녀석도 이번만큼은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가 개미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누나 아이디어입니다…….”

“어제 뵈었던 이미지보다는 로맨틱하시네.”

“누나도, 연애해 본 적 없으면서 자꾸 저한테 이래라저래라 이게 맞다고…….”

“아까는 바라보는 걸로도 만족한다며. 아주 열렬한 구애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다 해놨네. 이럴 거면 왜 그렇게 애틋하게 혼자서만 좋아하겠다고 말하고 있었어.”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차였으니까… 조금이라도 덜 질척이는 사람으로 보이려 한 겁니다……. 제가 고백, 성공한 것 같으면 오라고 분명 말했는데…….”

사실 단테는 꽃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라파엘의 애절함에 조금 뭉클해져 있었다. 그러나 수백 송이의 장미가 마음에 촉촉하게 고였던 물기를 순식간에 다 빨아먹었다.

단테의 표정이 짜게 식어가자 라파엘이 억울하게 말했다.

“바라보기만 하는 것보다는, 사실 당연히 팀장님께 더 쓰다듬 받고 싶고, 손도 또 잡고 싶고.”

“우리가 언제 손을 잡았어.”

“저 파도에 균형 못 잡을 때랑, 다리 풀려 주저앉아서 일으켜 주실 때…….”

“그게 무슨 손을 잡은 거야. 너 나 몰래 혼자 연애하고 있었냐.”

하아……, 단테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낯선 옷차림을 하고 와서 어색하게 굴다가, 풋풋한 고백으로 촉촉하다가, 이제는 우당탕탕 황당한 해프닝까지. 라파엘과 보낸 잠깐 사이 분위기가 몇 번을 바뀌는지 모르겠다.

단테는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라파엘처럼 자세를 곧게 세웠다. 아마 이 모습과 표정이 라파엘 헤인스워즈가 ‘팀장 단테’에게서 가장 많이 본 모습일 것이다.

“알겠어. 헤인스워즈, 고백을 받았다 생각하고 답을 주겠다.”

“앗, 예.”

그래서인지 라파엘도 곧은 자세로 다시 긴장했다.

“내가 군 생활을 내키는 대로 하는 편이어도 딱 두 가지 철칙은 지켜.”

단테가 라파엘의 앞에 손가락 두 개를 폈다.

“첫째, 13세 미만의 아이들은 적으로 만나더라도 응전하지 않는다.”

그중 하나가 접혔다.

“둘째, 직속 부하와는 연애하지 않는다. 현장에서 지휘관이 형평성을 잃으면 그 팀은 끝이니까.

“…….”

“그러므로 우리는 사귈 수 없다.”

두 가지 원칙 다 타당했으며,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었다. 단테 베일리의 신념과 그리고 지도자로서 그의 다짐이 담긴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라파엘이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게 하는, 완곡하지만 확실한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팀장님의 뜻을 존중…… 응?”

라파엘은 숙연해졌다가 뒤늦게 이 장황한 말의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저는… 한 달 뒤에 직속 부하가 아니게 되고, 한 달간은 휴가라 팀장님께 현장에서 지휘받을 일이 없지 않습니까?”

단테가 혀를 찼다.

“아, 이거 안 먹히네.”

“제, 제가 바보인 줄 아십니까?”

“뭐, 대충 비슷하게 생각은 했는데…….”

“저는 곧 팀장님 부하가 아니게 되니 규칙에서 열외로 해주십시오.”

“안 돼. 원칙은 지키라고 있는 거지.”

“……그러면 한 달 뒤에는 괜찮은 겁니까?”

“흠, 그땐 원칙을 ‘한때 부하였던 사람과는 연애하지 않는다’로 바꿀까.”

“네에? 아, 아니 신념이 그렇게 쉽게.”

라파엘이 억울하게 입술을 뻐끔거리다 말했다. ‘저, 정말 잘해드릴 수 있는데. 정말로…….’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를 끊으며 단테가 잔을 내려놓았다.

“헤인스워즈, 이제 그만.”

그리고 손을 뻗어 라파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똑똑한 녀석이니 내가 이렇게 말해도 무슨 의미인지 다 알았잖아.”

단테는 라파엘을 보며 부드럽지만 단호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의미를 모를 수가 없는 미소였다.

* * *

방종이 허락된 일주일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단테 베일리 대위와 그 휘하 팀의 휴가는 이제 3주가 남았다.

그러나 휴가를 내리 방탕하게 쉬었다간 현장에 투입되었을 때 배의 고생을 할 걸 알았다. 그러므로 단테는 오랜만에 새벽 일찍 집을 나섰다.

세 건물을 건너가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밀리터리 ID를 찍고, 허가된 인원에게만 열리는 층으로 이동했다. 도착한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뒤, 이제는 한 몸처럼 익숙한 플레이트 캐리어를 입었다. 중량판을 넣어 상체에 가해지는 무게를 더한 뒤 훈련장으로 나왔다.

한쪽에서 짧은 준비운동을 마치자 으슬했던 몸에 열기가 돌았다.

관사 중앙 건물에는 특수부대원들을 위한 훈련시설이 널찍하게 지어져 있다. 그는 시설의 테두리를 넓게 두르고 있는 트랙에 올라타 달리기 시작했다. 고작 일주일을 쉬었을 뿐인데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도 휴가 중이니 귀에 이어폰을 꽂아 넣고 달리는 약간의 사치를 부렸다. 휴가의 나태함에 잠들어 있던 몸은 어느 구간을 지나자 서서히 원래 컨디션을 회복해 나갔다.

“야, 단테.”

누군가 어깨를 붙잡아 끼고 있던 이어폰을 뺐다. 옆에 나타난 사람은 동기 리온이었다. 그도 슬슬 몸이 굳을 것을 걱정해 나온 모양이었다. 단테는 리온과 나란히 트랙을 달렸다.

“이번 휴가엔 왜 이렇게 얼굴 보기 어렵냐? 술 한 번을 못 먹었잖아.”

“그냥 좀 일이 있었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뭐야, 심각한 일이야? 혹시 성당에 무슨 일 있어?”

“아니야. 그랬으면 내가 여기서 뛰고 있겠냐.”

“하긴.”

SAG의 두 팀장은 빠른 속도로 트랙을 박차면서도 여유롭게 대화를 나눴다. 리온이 “야, 그러고 보니까,” 하고 다른 화두를 꺼냈다.

“제도방위사령부에서 SAG 쪽에 지원 요청 들어왔다더라.”

“왜? 제도에 테러 협박이라도 왔대?”

“아니. 그거 말고. 가을에 정상회담 열리잖아.”

“아……. 맞다. 그게 올가을이었나. 이쪽도 또 한동안 관련한 훈련 준비로 시끄럽겠네.”

제국은 2년 전 젊은 새 황제를 맞이했다. 정권의 변동이 생기면 내부에서도 외부에서도 잡음이 심하기 마련이었다. 특히나 각국 수장이 모인다는 의미에서 더 위험한 정상회담 시기에는 제도로 사람들이 몰리는 만큼 병력도 중앙으로 모였다.

단테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애들도 오랜만에 제도에서 일할 수 있을까 기대하겠네. 그런데 그게 되어야 말이지.”

“넌 뭘 걱정해. The F 놈들이랑 잘 지내는 건 너밖에 없잖아. 연대장님이 너희 팀부터 냉큼 보내겠다고 썼을걸.”

“그러면 뭘 해, 팀장이 제도에서 원하는 인재상이 아니잖아. 높으신 분들은 다 같은 귀족 출신 군인들 경호를 바라시는데.”

“해리스 가문의 안젤라 해리스가 계시잖아. 여성 VIP들은 다 앤지가 있는 팀 바랄걸. 일당백이지.”

“우리 앤지가 모자란 팀장 만나 고생이 많아.”

정상회담의 대테러방지를 위해 제도로 투입이 되면 다른 오지에서의 훈련보다 몸은 배로 편하다. 시설이 갖추어진 건물에서 훈련을 하고, 퇴근 후엔 번화한 도심에서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 역시도 큰 혜택이었다.

모의 인질 구출, 테러 진압 훈련 등 힘든 일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훈련 후에도 딱딱한 바닥에서 야영을 하는 것과 침대가 기다리는 삶이 비교가 될까.

꽤 오래 제도 밖을 돈 단테도 오랜만에 도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탐이 나긴 했다.

“아무튼 이번에 지원 되면 슬슬 너도 윗선에 얼굴도장 좀 찍고 그러……. 윽.”

“왜? 아.”

단테와 리온은 저 멀리서 가까워지는 사람을 보고 표정을 구겼다. 그러나 눈이 마주친 이상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트랙을 정방향으로 돌고 있던 두 사람과 마주쳤다는 건 즉, 저 또라이는 굳이 반대 방향으로 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가 고개를 쳐들고 단테와 리온을 보았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두 사람은 떨떠름한 인사를 꺼냈다. 나타난 사람은 단테와 리온의 사관학교 1년 선배이자, 같은 SAG 팀장 데릭슨 에프런이었다.

하, 그가 두 사람을 보고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은 혀를 차는 것이었다.

“너네는 선배랑 마주쳤는데 관등성명도 안 대냐?”

“…….”

또 시작이군. 리온은 대놓고 왜 지랄이냔 표정을 지었고, 단테는 코끝으로 한숨만 쉬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데릭슨은 단테에게 다가와 머리를 툭 밀쳤다.

“새끼들이 빠져서 지들이 뭐라도 된 줄 알고. 야, 관등성명 대라고. 내가 너희보다 군대 밥을 몇 끼를 더 먹었는데.”

“대위 단테 베일리.”

“대.위. 리온 슈스터.”

리온이 ‘대위’에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말했다.

임관 7년 차인 단테와 리온의 직급은 대위, 그리고 8년 차인 데릭슨 역시 대위였다. 학창 시절에야 1년 선배가 까마득해 보인다지만 임관이 된 이후부터 연차는 아무 소용이 없다.

군대는 무조건 계급순이었다. 실력과 경력에 따라 후배가 먼저 진급하는 경우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런 경우 상관이 된 후배가 부하에게 선배라 부르며 명령을 내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직급이 같아지는 시기, 특히 중위에서 대위 즈음에는 사관학교 기수의 경계가 흐릿해지기 마련이었다.

즉, 계급이 같은 세 사람 사이의 인사는 단테와 리온이 처음 건넨 정도가 맞았다. 그것도 선배라고 기껏 멈춰 서서 해준 것이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특수군은 대개 특수부대에서만 일한 연차를 별개로 센다. 육군 군번으로 계산한 기수야 데릭슨이 앞서지만, 이곳에선 일반 부대를 거치지 않고 계속 특수부대에 있던 단테의 기수가 한참 앞섰다. 보통 이 경우에는 아무리 선배라도 SAG 기준의 선임에게 숙이고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단테는 그런 것까지는 바라지 않으니, 이 쓸데없는 시비만이라도 걸지 않길 바랐다. 학생 때도 아니고 서로 서른이 넘었는데 아직까지 유치하게 이러고 싶을까.

“너희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어. SAG에 빨리 들어갔다고 그만큼 빨리 진급하는 게 아니란 말이야.”

맞는 말이었다. 그래도 졸업한 순서보단 특수부대에서 험하게 구른 연차가 빠른 진급에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실력이지, 실력. 고작 특수부대 몇 년 더 있었다고 그렇게 뻗대다간 평생 소령 못 달아. 알아?”

“예.”

“아 예, 예.”

이번에도, 말을 비꼰 건 리온이었다. 그러나 데릭슨은 단테를 보며 “하, 그런데 새끼가 충고를 해줘도” 하고 시비를 걸었다.

“하긴, 출신 없이는 기껏해야 중령이 최대치일 테니 천천히 진급해도 상관은 없겠네. 정년 달 즈음엔 그래도 진급할 거다.”

단테가 윗선에 인맥이 없음을 대놓고 말하는 것이었다. 단테는 귀족도, 하다못해 중산층 집안 출신도 아니었으니까.

단테는 그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예, 예 대답을 했지만, 리온은 친구를 대신해 제법 발끈했다. 그는 감정을 담아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 보니 단테, 저번에 소령! 진급! 심!사! 들어간 건 어떻게 됐냐?”

이 말을 꺼낸 친구의 의도가 뻔했다. 의도대로 소령 진급 심사라는 말을 듣자마자 데릭슨이 “뭐?”하며 외쳤다.

“아직 결과 안 나왔어.”

“7년 차에 진급 심사라니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 친구가 바로 선배가 말한 실력주의의 대표주자 아닙니까. 축하해 주시죠!”

“와아, 감사합니다. 슈스터 대위님.”

소위 시절을 일반 부대에서 보내고 이후에 SAG로 보직을 옮긴 둘보다 단테가 수행한 작전은 훨씬 많았다. 에이스 팀장으로 이름을 알린 데다, 공적과 표창의 수가 남다르니 먼저 심사에 들어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두 친구의 만담을 듣는 데릭슨은 당연히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추천 인원이 없어서 연대장님이 의리로 끼워 넣으신 걸 가지고. 하여간 근본이 없으니 별거 아닌데도 시끄럽게 호들갑 떨지. 비켜!”

끝내 데릭슨은 슈스터 집안의 리온은 두고 단테의 어깨를 퍽, 치며 지나갔다. 단테는 어깨를 툭툭 털었고, 리온은 “오오, 끝까지 저토록 찌질할 수가…….” 하며 감탄했다.

“더 난리 칠 거 알면서 왜 굳이 긁고 그래.”

“넌 그딴 말 듣고도 안 빡치냐?”

“하나하나 다 반응하다간 끝도 없어. 그냥 흘려듣는 게 나아.”

그래도 휴가 기간에까지 저러니 오늘은 좀 짜증이 나긴 했다. 단테는 다시 트랙을 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 인간은 언제까지 나한테 저럴까.”

“앤지가 쟤 받아줄 때까지?”

“아, 절대 안 돼. 차라리 나한테 평생 지랄하라 해.”

단테는 수많은 황족과 고위 귀족이 거쳐 간 제1사관학교의 모난 돌이었다. 그래도 학창 시절에는 데릭슨이 뒤에서 씹어대긴 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둘 사이가 틀어진 건 단테가 4학년 때였다.

제도에서 수습 과정 중이었던 졸업생 데릭슨은, 사관학교 신입생 구경을 왔다가 1학년 안젤라 해리스에게 꽂히고 만다. 졸업생이 신입생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꼴사납게 구애를 한다는 사실은 당시 학교를 다니던 기수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안젤라는 무심, 도도, 차가움으로 무장하고 무시로 일관했다. 그러나 데릭슨은 지치지도 않고 안젤라를 찾아왔다. 이 과정에서 보다 못한 4학년 몇이 ‘1학년한테 뭐 하는 겁니까. 그만 좀 하시죠.’라며 데릭슨을 밀어냈다. 그중 하나가 단테였다.

데릭슨도 어느 정도 수치는 아는 건지, 아니면 해리스 가문의 눈치를 봤는지 모르겠지만 둘의 사이는 그냥 그대로 끝났다.

문제는 안젤라가 졸업 후 단테 밑의 부팀장으로 자진해 발령을 받으며 발생했다. 제도 근교의 평화로운 자리에서 안젤라에게 손짓하고 있던 데릭슨은 다시금 뻥 차였다.

그때부터 데릭슨은 단테라면 눈에 더욱 불을 켰다.

“아버지한테 슬쩍 쟤네 집안에 언질이라도 주시라 해 볼까?”

단테와 함께 있는 리온 역시 전형적인 귀족 코스를 밟아온 사람이었다. 그러나 드물게 데릭슨보다 단테와 더 가까웠다.

사실 데릭슨이 고위층 후배들에겐 잘해주어 한때 인기 좋은 선배인 적도 있었는데, 최근의 부진한 성적을 보고 떨어져 나간 동기들도 꽤 많았다. 그를 만회하고자 억지를 써 SAG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도 얼핏 들었다.

“됐다. 일러도 우리 어머니께 일러야지 왜 너희 아버지께 일러?”

단테는 그 나름의 감사 인사와 완곡한 거절을 돌려주었다.

“다정다감한 너희 어머니께 일러서 뭐 하게.”

“내 아들 괴롭힌 놈 지옥에 떨어지라고 기도라도 해주시지 않을까.”

리온이 혀를 쯧 차며 고개를 저었다.

“부하 앞에서 쪽 당하고 속도 좋다.”

“굳이 따지자면, 이제 팀장, 부하 사이보다는 선후배 사이에 가까우니까.”

단테와 리온의 시선이 같은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곳에 있는 기둥 뒤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움찔 떨렸다.

“저건 또 뭐냐. 스토킹?”

“음, 남은 기간 동안도 선배를 지켜보고 정진하려는 갸륵한 후배. 아마도.”

“……저게? 하여간 네 주변 사람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처음에야 신기하고 정들어서 그렇지. 저러다 앤지처럼 금방 질려. 어려서 그래.”

그리고 단테는 혼자만 들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직 포기를 안 했나.”

단테는 기둥 뒤의 라파엘이 자신에 대한 존경심과 호감이 뒤섞인 상태란 걸 알았다.

자신은 딱히 남에게, 특히 앞날이 창창한 헤인스워즈에게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저 감정이 오래 가서 좋을 건 결코 없었다. 어쩌다 자신의 밑으로 와 수년째 사지를 오가는 안젤라의 사례도 있고 말이다.

그래서 나름 단호하게 말을 했고, 충분히 알아들었다 생각했건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리온이 손가락을 튕겼다.

“야, 나 뭔지 알겠다.”

“뭘?”

“너한테 천사 이름을 가진 사람을 끌어들이는 뭔가가 있나 보다. 이름이 단테라 구원해주고 싶은 인상인가 봐.”

안젤라, 라파엘, 그리고 사관학교에서 그때 걔. 리온이 손가락을 세 개 펴 내밀었다.

단테는 그 손을 주먹으로 툭 치고 먼저 앞으로 달려갔다. 나란히 구보를 시작한 두 사람 뒤로 트랙이 잘 보이는 자리에서 서성거리는 걸음이 있었다.

* * *

단테와 리온은 훈련 시설에서 오전 시간을 온통 쏟아붓고 나왔다. 아침부터 긴 시간 운동을 하고 샤워까지 하고 나니 허기가 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점심으로 뭘 먹을지 고민하며 함께 입구를 나오자, 그 앞에 라파엘이 서 있었다.

어제 정도는 아니었지만 체육관에 온 것치고 복장이 몹시 멀끔했다. 특히 분홍색 카디건이 덩치 큰 남자에게 이렇게 잘 어울릴 일인가 싶었다. 생각해 보니 저거…… 어제 본 장미색과 비슷하기도 했다.

단테 대신 리온이 손을 들며 라파엘을 불렀다.

“헤인스워즈, 여기서 뭐 하냐?”

“아, 소위 라파엘 헤인스…….”

“하지 마, 하지 마. 휴가 중엔 경례하지 말고, 휴가 중 사복 입고 있는 사람한텐 더더욱 하지 마. 우린 그런 사람 아니다. 너도 그런 사람으로 크면 안 된다?”

“예, 알겠습니다.”

“너 한참 전에 나가지 않았어?”

라파엘은 분명히 한 시간쯤 전에 먼저 샤워 시설을 쓰고 훈련장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나간 차림 그대로 출구에 서 있다는 건, 여기서 죽 기다렸다는 의미였다.

리온이 눈을 끔뻑였다. 흐음.

자신보다 먼저 달려가 어깨동무를 하며 ‘자식, 같이 점심이나 먹자!’ 할 단테가 가만히 있는 것, 그리고 라파엘이 단테를 머뭇거리며 보는 모양을 보자니 둘 사이에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아 참. 나 볼 일 있었는데 깜빡했다! 먼저 가야겠다 인마. 마침 잘됐다. 후배에게 점심이나 사줘.”

“뭐? 할 일은 무슨. 리온 슈스터 대위님. 저랑 댁이랑 똑같이 휴가 중입니다.”

“또 빡빡하게 군다, 또. 헤인스워즈, 선배 좀 잘 모셔라. 배고파서 지금 성질부리는 거야.”

“내가 언제……!”

“아, 알겠습니다. 제가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그럼 형아는 간다. 사이좋게들 놀아.”

리온은 단테와 라파엘의 등을 동시에 토닥이고는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누군가에게는 빌어먹을 동기, 누군가에게는 멋진 선배로 기억에 남은 모습이었다.

“팀장님 저 밥… 사주십니까?”

“…….”

단테는 저 뻔뻔한 척도 제대로 못 하는 얼굴을 보고 한숨만 나올 따름이었다. 별수 없이 단지 밖, 종종 가던 단골 식당을 턱짓했다.

“깨작거리지 말고 많이 먹어라, 많이.”

“예. 팀장님도 많이 드세요.”

“나는 점잔 안 떨고 잘 먹는 사람이 좋더라.”

라파엘이 곱게 칼질을 하던 피자 조각을 저돌적으로 먹기 시작했다. 양 볼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언제 봐도 단순한 녀석이었다.

그래서 면전에서 거절을 들으면 쉽게 포기할 줄 알았다.

“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시켜.”

“아이이아.”

라파엘이 씩씩하게 입에 샐러드를 욱여넣으며 단테를 살폈다.

“그래, 너 잘 먹는다. 잘 먹어. 보기 좋네.”

“예.”

라파엘이 체념을 한 건지 안 한 건지 알기 어려웠다. 표정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확연히 가라앉아 있긴 한데, 아침부터 따라다닌 것 하며 냉큼 같이 식사하자며 나선 것도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미적지근한 관계가 되어버리긴 했지만 라파엘은 단테가 제법 정을 준 후배였다. 그가 품은 호감과 자신이 가진 호감의 종류는 달라도, 확실한 건 라파엘이 싫은 건 아니었다. 어린애가 잘 먹는 모습을 보니 또 괜히 흐뭇해지는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내가 자주 가는 곳으로 데려온 거긴 한데, 입맛에 맞아?”

라파엘은 콜라 한 모금과 함께 입에 든 것을 삼켜냈다.

“예, 맛있습니다.”

“하긴 군대 밥 먹다 왔는데 우리가 뭔들 맛이 없겠냐.”

단테가 농담을 건네며 웃자 라파엘도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헤인스워즈.”

“예.”

“수습 마치고 새로 배치받기 전에 앤지에게도 연락해 봐. 팀에 후배가 들어온 게 처음이라 많이 신경 쓰고, 또 너 꽤 귀여워했어.”

“앤지… 안젤라 해리스 중위님 말씀이십니까?”

“응.”

“절… 귀여워하셨다고요……?”

“앤지가 무뚝뚝해서 표현을 잘 못 해서 그래.”

물론 단테 입장에서는 병아리처럼 총총 들어온 후배나, 병아리가 귀엽다며 쿡쿡 챙겨주는 아기 닭이나 둘 다 기특할 따름이었다.

“알겠…습니다.”

라파엘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훈련장은 어쩐 일로 왔어? 첫 휴가인데 며칠 더 놀지 않고.”

“…….”

“헤인스워즈?”

“……아, 죄송합니다. 계속 잠을 못 자서 잠깐…….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단테는 왜 못 잤느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그가 잠을 이루지 못한 원인은 몹시 높은 확률로 자신이었다.

“그래, 그러면 밤새 마음 정리는 잘했고?”

라파엘이 들고 있던 포크가 달각 접시 위에서 진동했다. 그는 포크를 접시 옆에 내려놓았다.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못 했지만… 차인, 사람이 자꾸 마음 들이미는 건 강요인 걸 알고 있습니다.”

라파엘의 속눈썹이 아래로 처연하게 내려앉았다. 널찍한 어깨도 아래로 축 처졌다.

“저번처럼 갑작스럽게 고백을 하는 등의 부담드리지 않겠습니다. 이번엔 정말로 좋아하게만 해주십시오.”

“…….”

단테가 대답이 없자 라파엘의 표정이 한껏 더 애처로워졌다.

“부탁드립니다. 사귀는 척해주신다 하셨던 걸 생각해서라도…….”

“대체 네가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구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돼.”

“저도, 이유를 알면 팀장님 위해서라도 마음 정리해보려 노력하겠습니다만, 저는 그냥 팀장님이라 좋습니다.”

“…….”

최신 유행가를 틀어놓는 레스토랑에선 사랑의 아픔을 말하는 여성 보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대 나의 사랑, 나 홀로 간직한 이 마음, 슬픈 운명. 그런 가사가 귀에 꽂아 넣듯 들려왔다.

“좋아하게만, 해주십시오.”

그리고 단테의 앞에는 그 노래에 맞는 감성적인 뮤직비디오가 펼쳐지고 있었다. 라파엘 헤인스워즈, 싱그러운 나이 24살, 정상급 배우와 외모를 견주어도 밀리지 않는 예쁜 남자가 주연이었다.

단테는 이마를 짚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네 좋아하는 방법이 스토킹이라면 곤란한데.”

“스, 스토킹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팀장님을 스토킹합니까. 팀장님 마음만 먹으시면 저는 5분 안에 퇴치됩니다.”

“숨어서 내내 쳐다보고 있는가 하면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고. 그게 스토킹이지.”

“어차피 처음부터 들켰는데……. 팀장님 쳐다보려던 게 아니라, 아, 물론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이게 아니라. 팀장님 보여드리려고 온 겁니다.”

“뭐를?”

“저를요. 얼굴… 자주 보여드리면 조금이라도 더 정이 들까 싶어 주변에 있었습니다.”

“…….”

“그런데 생각해 보니 운동하시는 데 방해할 수는 없어서 나와서 기다린 거였습니다.”

아이고, 애처롭다 애처로워.

단호하게 끊어내야 하는 걸 알고 있지만, 금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모습을 보자니 또다시 마음이 약해졌다.

“이러지 않아도 너 여전히 귀여운 후배로는 생각해. 걱정하지 마.”

라파엘이 눈을 반짝 떴다. 아, 단테는 급히 말을 붙였다.

“연애 감정은 없지만.”

“……. ……예…….”

“…….”

라파엘의 눈썹과 어깨가 같은 모양으로 축 처졌다. 이건 희망 고문을 하려던 게 아니라 라파엘이 단테의 한 마디에 지나치게 일희일비할 뿐이었다.

“헤인스워즈. 마음 정리 다시 하도록 노력해 봐. 네가 뭐가 아쉽다고 차인 사람에게 미련을 가져. 더 좋은 사람 나타날 거다.”

라파엘이 단테를 보았다가, 도로 시선을 내렸다.

“그 정도 위치에 머무는 모습으로 보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식사가 얼추 마무리될 무렵, 라파엘은 테이블 끝에 놓인 빌지를 가져갔다.

“계산은 제가 하겠습니다.”

“됐어. 내가 데려온 건데. 이리 줘.”

“아버지께서 팀장님 만날 때 잘해드리라고 카드 주셨습니다. 내역이 안 떠 있으면 혼날 겁니다. 제가 계산하게 해주십시오.”

“뭐? 아니, ……하아.”

‘내가 사겠다’라는 고집을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는 이유였다.

라파엘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량한 걸음이 앞으로 터덜… 터덜… 나아갔다. 애써 보지 않으려 해도 눈이 갈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아래로 각도가 기운 어깨와 숙인 고개가 단테에게 따끔따끔 말을 걸었다.

‘제 처량하고 불쌍한 모습을 보세요. 뒤에서 꼬옥 안아주세요. 차였어요. 슬퍼요. 속상해요. 저는 가엾은 라파엘이에요.’

등판은 테이블 대신 써도 될 만큼 널찍하면서, 어떻게 저런 분위기를 낼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작은 유기 강아지인 척하는 대형견종인데…….

문제는 단테의 눈에도 왕방울만 한 두 눈을 그렁그렁 빛내는 작은 강아지의 착각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식사 시간 약 30분 내내 이어진 라파엘의 서글픈 뮤직비디오는 단테의 마음도 여러모로 쥐어짰다.

* * *

전날과 같은 장소에서, 단테는 라파엘과 눈이 마주쳤다.

설마 또 날 따라서.

라는 의심은 다소 빠르게 접을 수 있었다.

라파엘이 앉아 있는 레그 프레스에서 당황의 기색이 역력한 덜컹 소리가 났다. 라파엘의 어깨도 번쩍 솟았다 다시 가라앉았고, 단테를 발견한 눈동자가 맹렬히 흔들렸다가 아래로 슬그머니 가라앉았다. 단테를 기다릴 목적으로 기웃거렸던 어제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라파엘은 휴가 중엔 경례는 되었다는 전날의 말을 따라 고개만 푹 숙였다 다시 들었다.

단테도 짧게 손을 흔들고 지나쳐 다른 운동기구에 앉았다. 단테가 지나가자 라파엘의 운동기구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뒤, 라파엘은 땀을 닦으며 다른 운동기구로 옮겨갔다.

단테와 조금 전보다 더 멀어지긴 했는데… 멀어진 만큼 라파엘의 모습이 더 잘 보였다. 단단한 등 아래 군살 없이 이어지는 허리, 기구를 잡은 두 팔, 위로 매끈하게 올라붙은 엉덩이…가 일직선이 아니었다.

자세가 틀렸다.

한번 눈에 밟히고 나니 계속 신경이 쓰였다. 저 무게 달아 놓고 자세가 저러면 허리를 다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아니, 애가 저러고 있는데 왜 아무도 자세를 안 고쳐줘.

단테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자기 운동에 몰두하는 사람 중엔 라파엘의 자세가 틀린 걸 알아챈 사람이 없었다.

잠시 다른 곳을 보다가도 한 세트를 마치지 못하고 다시 시선이 돌아갔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라파엘의 등에 ‘이것은 오지랖이오.’라고 적혀 있는 듯했다.

오지랖이지. 오지랖이 맞는데…….

라파엘이 마음을 정리하는 당분간은 멀찍이서 지내는 게 답이었다. 하지만 사수이자 팀장의 마음으로 저 모습을 도저히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단테는 결국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파엘의 뒤로 다가간 단테는 그의 어깨 사이 움푹 들어간 곳을 짚었다.

“가슴 뒤로 넣어. 허리를 젖히는 게 아니라 일자로 세워야지. 대신 어깨를 넓게 펴고. 운동 그렇게 하면 허리 일찍 나간다.”

“앗……, 예.”

라파엘이 눈을 끔뻑이며 단테가 지시한 모습으로 자세를 바꿨다. 뒤로 약간 휘어져 있던 허리가 일직선이 되었다. 곧게 파인 등선이 옷 위로 더욱 도드라졌다.

“감사합니다…….”

“다시 당겨 봐. 오른쪽과 왼쪽 균형이 잘 안 맞던데. 아, 허리 똑바로 세우니 잡혔다. 그렇게.”

조금 전보다 훨씬 자세가 안정적이게 되었고, 라파엘이 드는 힘도 줄어들었다. 사관학교에서 숱하게 한 운동일 테니 바른 자세를 모르진 않을 거고, 단테는 도무지 모르겠는 어딘가에 정신이 팔린 게 분명했다.

“그럼 난 이만.”

단테는 내내 눈에 밟히던 자세가 바로잡힌 걸 확인하고 빠르게 돌아섰다. 라파엘이 뭐라 말을 하려던 것 같은데, 단테가 멀어지자 도로 말을 삼켰다. 대신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기구에서 소리가 났다.

끼익… 끼익…… 끼익… 끼잉… 끼잉…….

끼잉… 팀장님… 저 좀 봐주세요… 낑낑… 팀장니임… 팀장님……. 끼잉, 끼이잉…….

이젠 하다못해 환청이 들리기까지 했다. 애써 고개는 돌리지 않았지만, 눈동자가 자꾸만 왼쪽 옆으로 돌아가려 했다.

단테는 일부러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가서 무게를 최대한 많이 달았다. 그제야 겨우 끼잉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운동 내내 그는 라파엘이 가까워져도 내색하지 않았다. 아주 깊이 집중한 척을 하고 있으면 라파엘도 단테를 보다가 곧 자신의 운동에 집중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넘긴 뒤.

단테는 라파엘을 샤워장에서 마주했다.

오늘은 더 이상 눈이 마주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라파엘을 쳐다보지 않다가, 그가 샤워장으로 간 타이밍마저 놓친 게 원인이었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져 운동을 마무리하고 씻고 있는 인원이 듬성듬성 보였다. 단테는 빈자리를 탐색했다. 그의 선택지는 셋이었다.

1. 라파엘과 멀찍이 떨어진 자리.

2. 라파엘과 등진 자리.

3. 라파엘의 바로 옆자리.

문 앞에서 진지하게 세 자리를 훑어보던 단테는 왜 이딴 고민을 해야 하냐는 딜레마에 빠졌다.

그러던 중 문득 어떤 계책을 떠올렸다. 그리고 선택한 위치로 걸음을 옮겼다.

“운동 오래 했네.”

라파엘이 목소리를 듣고 옆을 돌아봤다.

단테는 자연스럽게 라파엘 옆자리의 샤워 부스에 자리 잡고 샤워기를 틀었다. 어깨까지 오는 반투명한 가림막 위로 눈이 마주쳤다.

라파엘이 단테의 팀에서 생활할 땐 숱하게 있었던 일이었다.

단테는 이 행동으로 라파엘에게 말했다.

‘난 너를 한결같이 후배로만 생각한다. 그러므로 네 앞에 알몸으로 서도, 네 알몸을 봐도 아무렇지 않단다. 술김에 해프닝이 좀 있긴 했지만, 우리는 선후배 사이일 뿐이니까!’

“……예. 특수부대원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날이 얼마 안 남아서…….”

“그래? 마지막까지 기특하네.”

“감사합니다.”

단테는 라파엘이 병아리에 불과했던 반년 전의 기억을 열심히 상기시켰다. 삐약삐약 병아리와 샤워쯤은 얼마든 사심 없이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라파엘을 조금도 의식 않는 자연스러운 샤워를 이어갔다. 라파엘도 말없이 시선을 내리고 몸을 씻었다.

“이런. 헤인스워즈. 나 샴푸 좀.”

샴푸통이 바닥을 보인 걸 깜빡한 건 실수지만, 단테는 그로서 또 한 번 몹시 자연스럽게 말을 걸 수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고맙…….”

라파엘이 몸을 돌려 샴푸통을 건넸다. 단테도 마찬가지로 몸을 돌려 라파엘이 내민 물건을 받았다.

그런데, 왜 샴푸통을 든 손 아래로 샴푸통만 한 다른 것이 시야에 들어왔을까.

“…….”

사람이 지나치게 놀라면 사고가 정지하고, 행동이 굳는다. 돌발 상황이 많은 현장을 다니는 특수군에게 담력이 필수 요소인 이유였다.

단테 역시 7년간 온갖 험한 곳을 다녀보았고, 그 경험들은 어떠한 상황에도 침착하게 팀을 지휘하는 의연함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므로 단테는 정말 오랜만에 예상치 못한 당황으로 몸이 굳었다.

작년이던가, 재작년이던가. SNS에서 유행한다며 성기를 콜라캔이니 페트병이니 비유하던 놈들이 있었다. 과장을 듬뿍 담아 낄낄거리던 놈들 사이에서도 감히 식음료 용기를 벗어나 샴푸통이라는 비유는 등장하지 못했다.

그리고 감탄하는 한편으로 경악도 찾아왔다. 저게 내 몸 안에 들어갔었단 말인가. 공복인 아랫배가 갑자기 쿡쿡 아파오는 듯했다.

“팀장님?”

“아, 어어. 고마워. 잘 쓸게.”

“아닙니다.”

하필 그가 준 건 흰 바디에 분홍 뚜껑이 달린 샴푸통이었다. 이… 색감조차 무언가와 몹시 비슷했다.

‘헤인스워즈, 흣, 아, 커……, 너, 읏, 뭘 먹고, 이렇게, 큰…….’

‘팀장님, 하아, 아, 단테, 흐, 단테……!’

첫 삽입에서 괜히 하반신이 반쪽으로 갈라질 것 같다는 감상을 품은 게 아니었다.

단테는 곁눈질로 다시 한번 실루엣을 보았다. 샴푸통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라파엘이 미리 뚜껑을 열어두었는지 점성 있는 흰 액체가 주둥이에서 푸슉 튀어나와 흘러내렸다.

으아악! 단테는 저도 모르게 지를 뻔한 비명을 간신히 삼켰다.

주, 주여, 시험을 거두고……. 단테는 성인이 된 이후로 한 번도 외우지 않았던 기도문을 떠올렸다.

색욕과 정욕, 세상의 모든 유혹에서 고뇌하는 영혼을 구하소서……. 그는 주색에 취해 파렴치한이 되었던 지난밤을 진심으로 회개했지만, 머릿속은 이미 음란 마귀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단테는 샴푸를 손에 빠르게 문질러 거품을 내고, 머릿속 생각을 털어내듯 벅벅 헤집었다.

‘흐, 거기, 아, 깊어, 끅, 천천히.’

머릿속은 이럴 때면 유난히 말을 듣질 않았다. 귓가에 그날 들었던 라파엘의 낮은 숨소리, 그리고 낯선 자신의 목소리가 계속해 재생되었다.

서툴지만 조급하고 거친 움직임, 두 손으로 허리를 붙잡고 거센 삽입을 밀어붙이며 자신을 찾던 라파엘.

‘뜨겁습니다. 팀장님, 후, 팀장님, 여기가, 녹을 것처럼.’

한번 터져 나온 기억은 연달아 발사되는 포탄처럼 펑펑 다른 기억을 불러왔다. 그래, 그날도 성기가 저 정도로 굵직하게 커져서는…… 어?

단테는 눈을 끔뻑였다. 저게… 아까 샴푸를 받을 때도 서 있었나?

의문과 동시에 라파엘이 가림막에 걸어둔 수건을 황급히 잡아 뽑았다.

“저,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들어가십시오.”

라파엘은 단테에게 빌려준 샴푸는커녕, 가지고 온 욕실용품마저 전부 두고 도망치듯 나갔다.

어……? 아……?

샤워장에 남겨진 단테는 곧 눈과 입술을 떡 벌렸다. 그도 다급하게 샤워를 마무리하고, 라파엘의 짐까지 챙겨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탈의실에서도 라파엘이 얼기설기 옷을 입고 후다닥 사라지는 뒷모습밖에 보지 못했다.

잠깐만. 이, 이게 아닌데!

단테는 라파엘과 마찬가지로 덜 마른 몸에 대충 옷을 끼워 입었다. 욕실용품도 젖은 채로 대충 캐비닛에 쑤셔 넣었다.

머리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뛰어나갔건만, 주차장에서 나온 검은 세단은 이미 골목을 꺾고 있었다.

“야, 헤인스워즈! 라파엘!”

단테는 차를 쫓아 골목으로 들어갔다. 자동차는 어느새 온 데 간 데 보이지 않았다.

“……간 건가.”

사람의 걸음으로 차를 따라잡기는 무리였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단테는 라파엘의 자동차가 사라진 길을 무작정 따라 달려갔다.

도로로 빠지는 길목까지 나왔을 때, 단테는 산길 쪽으로 차체를 반쯤 파묻은 채 어정쩡하게 멈춘 자동차를 발견했다. 억지로 좁은 산길에 머리를 들이밀어 값비싼 차의 곳곳에 나뭇가지에 긁힌 잔상처가 생겼다.

몹시 괴상한 주차를 한 것은 그도 두어 번 본 적이 있는 라파엘의 차였다.

“헤인스워즈? 너 여기서 뭐 하…….”

단테는 다가가던 걸음을 멈췄다. 해가 거의 저문 저녁 시간, 어두운 산길과 가까운 주변이 고요한 탓에 차 안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팀장님, 흐…….”

설마.

“팀자, 아, 팀장님. 팀장님…….”

“…….”

며칠 라파엘과 붙어 지냈더니 그를 닮아간 게 틀림없었다. 라파엘이 그랬던 것처럼 단테의 귓가도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라파엘은 차 안에서 숨을 몰아쉬며 단테를 부르고 있었다.

“팀장님, 하으, 단테, 아, 하아.”

조금 더 다가가니 목소리 속에 탁탁 규칙적인 소리가 섞여 있었다. 썬팅 때문에 다 보이지는 않지만 운전석에 앉은 커다란 몸이 들썩이는 건 알 수 있었다.

“단테, 아, 흐, 팀장님, 흐, 팀장님…….”

단테의 머릿속에 체육관 샤워장에서 보았던 라파엘의 몸이 떠올랐다.

골격을 타고나 떡 벌어진 어깨, 뽀얀 살갗 위에 보기 좋게 자리 잡은 근육들과 군살 없는 허리, 그 아래는.

기억 속 라파엘의 형상을 떠올리곤 시선을 내리다 문득 또다시 어느 밤의 기억도 떠올랐다. 그 바람에 발밑의 나뭇가지 더미를 보지 못했다.

뿌득. 가지가 부러지고, 놀란 단테가 한 발 물러나며 흙바닥을 끄는 소리까지 났다.

“……아.”

막 졸업한 라파엘도 하지 않을 초보적인 실수였다. 차 안에서 들썩이던 몸과 애타게 단테를 찾던 목소리가 멈췄다.

별수 없이 단테는 운전석 쪽으로 다가갔다.

“……열 거면 열고, 가라 하면 갈게.”

“팀장님.”

차 문은 망설일 틈도 없이 벌컥 열렸다. 단테의 앞으로 쏟아지듯 다가온 어여쁜 얼굴은 닦지 못한 물기와, 그리고 그렁그렁 맺힌 눈물로 젖어 있었다.

다 젖은 옷이 달라붙은 상체가 위아래로 할딱였다. 명화 속 천사의 모습을 떼어낸 얼굴, 대칭과 조화가 완벽한 악마의 몸, 그리고 샴푸통에 비견될 만한 그것.

“야, 너는, 옷을 좀.”

추스르나 마나, 옷이 제 역할을 하질 못했다. 헐겁게 입는 반바지인데도 한쪽 허벅지 쪽이 위로 치솟아 배꼽에 닿을 지경이었다.

“……팀장님…….”

붉은 혀가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벌어진 입술 틈으로 모습을 보였다. 또 그 시선이었다.

‘저는 작은 강아지예요. 팀장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사랑이 필요해요.’

쳐다보는 것만으로 하염없이 단테를 뒤흔드는 표정. 단테가 몹시 약한, 간절하게 갈구하는 눈빛이 다가왔다. 단테는 침음을 흘렸다.

“왜, 왜 여기 처박혀서 이러고 있어.”

“아까 샤워장에서, 팀장님 흐, 가까이 오실 때부터 겨우, 간신히 참고 있었는데…….”

라파엘이 속눈썹을 바르르 떨며 고개를 숙였다.

“여, 옆에 계시니까 마치 팀장님이, 저를, 제 하반신을 쳐다보시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혼자 흥분이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차마 안 봤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단테의 양심이 거세게 두드려졌다. 머릿속이 어느 문란한 기억 속에 허덕이는 동안 죄 많은 눈알이 무슨 짓을 한 걸까.

“너, 내가 벗은 거 여러 번 봤잖아. 샤워장 같이 쓴 게 한두 번이야? 칸막이 없는 곳에서도 잘만 씻어놓고.”

“그때와는 다릅니다. 당연히…….”

어떻게 아무것도 모를 때랑 같습니까.

단테도 묻고 싶었다. 어떻게 이 순진하게 울먹이는 얼굴로 ‘섹스하고 싶어요.’라는 의사를 한가득 담을 수 있는 걸까. 터질 듯 부푼 성기가 괴로운지 라파엘은 무릎을 마주 비볐다.

“이 앞이라도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이, 이런 데서 흥분해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더 이상 가다간 정말 사고 날 것 같아서…….”

“…….”

“제가 혼자 처리하고 가겠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조수석으로 가.”

단테는 라파엘의 어깨를 밀어냈다. 라파엘을 조수석으로 보내고 운전석에는 그가 탔다.

“여기 관사에서 창문 내다보면 바로 보이는 곳이야. 퍽도 수상하게 안 여기겠다.”

“죄송…….”

“사람 없는 곳에 세워줄 테니까 거기서 해결하,”

옆 좌석에서 물기로 축축히 젖은 흐느낌이 들렸다. 고개를 푹 숙인 라파엘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라파엘은 티셔츠 밑단을 당겨 아래를 가리고 있었지만, 그게 그 정도로 숨겨질 리가 없었다. 그런 채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흑, 끕, 소리를 냈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타고 유리구슬 같은 눈물이 톡, 흘러내렸다.

“팀장님, 제가 싫어지셨죠? 혀, 혐오스러우시죠?”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누나가, 장소 못 가리고 아무 데서나 벌떡벌떡 세우는 남자는 좆대가리를 잘라 버려야 한다 했습니다.”

“…….”

“흐윽, 그딴 건, 사내새끼가 아니라 짐승이니 중성화를 시켜야 한다고……. 특히 연상이랑 잘 만나고 싶으면, 좆대가리 간수부터 잘하라 했는데…….”

단테는 순간 자신의 다리 사이도 선득해지는 듯했다.

라파엘은 티셔츠를 붙잡고 있느라 얼굴도 닦지 못하고 뚝뚝 서럽게 울었다.

“흐, 흐흑…….”

섧게 우는 모습을 보며 라파엘 헤인스워즈의 사수이자, 짝사랑 상대이자, 오늘의 임시 운전자는 생각했다.

울 거면 그… 네가 말한 좆대가리를 수습이라도 하고 울었으면 좋겠다…….

단테의 알몸과 시선에 흥분했다는 성기는 아직도 한쪽 허벅지 위에 우뚝 솟은 삼각형을 그리고 있었다. 트레이닝 바지 끝이 조금 젖은 것도 같다. 그 와중에도 처연한 얼굴에선 눈물이 계속 흘렀다.

울든가 흥분을 하든가 둘 중 하나만 했으면 좋겠는데 위아래로 젖어서 물을 뚝뚝… 아, 아니, 이게 적절한 표현은 아닌 것 같다.

단테는 조금 더 운전을 서둘러 인적이 아예 없는 후미진 골목에 차를 세웠다.

“라파엘 헤인스워즈. 나는 너를 절대 싫거나, 흠, 혐오스럽다고 생각 안 해. 일단 나도 같은 남자니 네 사정을 이해하고…. 음… 헤인스워즈 넌 어리고, 그, 힘도 넘치고, 생리 현상이니까……. 어쨌든 내 잘못이 없지도 않고……. 아, 아무튼. 나가줄 테니 여기서 해결해.”

제대로 지껄였는지도 모르겠는 말을 쏟아내고 단테는 얼른 차에서 내려주었다. 그리고 소리가 안 들릴 만한 곳까지라도 벗어나려 했다.

“……흐, 팀장님, 흐흑, 흐으……, 팀장님, 팀장님…… 흐, 하으…….”

아직 다 멀어지기도 전에 울음소리와 신음소리가 반씩 섞인 소리가 들렸다.

단테는 서럽게 울며 자위를 할 수도 있다는 걸 태어나 난생처음 알았다. 물기가 다 마르지 않은 머리에 서늘한 저녁 바람이 닿는데도 얼굴이 뜨거웠다.

“팀장님, 끄흑, 나는, 흐, 쓰레기야, 쓰레기, 흐흣, 흐윽……. 라파엘 헤인스워즈, 쓰레기……. 죽자. 흐으윽…….”

“…….”

“살아서 뭐 해, 흑…….”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단테는 흘끔 차 안을 봤다. 글로브박스 위에 엎드린 라파엘은 자책과 자위라는 몹시 상반된 두 가지를 동시에 수행하고 있었다.

“아니, 이걸, 진짜, 하……, 미치겠네.”

단테는 조수석 쪽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라파엘이 몇 번 히끅이다 창문을 열었다.

“팀장님……?”

가장 먼저 보인 건, 눈가를 붉게 물든 채 그렁그렁 눈물을 단 예쁜 연녹색 눈동자였다.

울음이 차오른 뺨은 붉었고, 단테도 얼굴에 열기가 훅 올랐다.

지금은 두 사람 중 어느 하나도 술에 취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단테는 며칠째 자신을 곤란하게 하는 이 후배가, 자신에게 보여주는 치태가, 그 모습이 주는 감상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법 세게 불어온 스산한 바람도 얼굴을 식혀주지 못했다.

“……그날, 처럼은 어렵지만 손이라면 빌려줄 수 있어.”

말을 꺼내놓고도 손끝이 긴장으로 뻣뻣해졌다.

“널 이대로 보낼 수도 없고, 책임이 분명히 내게도 있으니까.”

라파엘이 단테를 올려다보았다. 이번에 시선을 먼저 피한 건 단테였다. 언젠가부터 늘 여유롭고 능글맞은 상관이었던 단테의 우위가 흔들렸다.

“네가 필요하다 하면, 도와줄…….”

“필요합니다.”

라파엘이 어색하게 내민 단테의 손목을 붙잡았다. 라파엘의 손바닥은 단테의 체온보다 배로 뜨거웠다. 움찔 흔들린 단테의 손목을 당기는 손은 더욱 조급히 떨고 있었다.

“저는 늘 팀장님이 필요합니다.”

“…….”

“손. 팀장님 손 조금만 허락해 주세요.”

“……알았어.”

오랜 파병 기간 중엔 남자들끼리 서로 빼주는 경우도 왕왕 있다고 들었다. 손이야 빌려준다고 닳는 것도 아니었다.

라파엘이 단테의 도드라진 손가락뼈에 입을 맞췄다. 오랜 기간 총을 만져 화약 냄새가 밴 손바닥을 그가 입술로 쓸었다.

“팀장님…….”

한 손으론 단테의 손을 잡고, 라파엘은 다른 한 손으로 성기를 훑기 시작했다. 하아, 하…. 라파엘의 입술 사이에서 나온 뜨거운 숨이 손가락을 간질였다. 젖은 입술이 닿을 때마다 단테의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위아래로 흔들리는 라파엘의 오른손에선 젖은 소리와 탁탁 난잡한 소리가 났다. 그러나 왼손은 경건한 세례라도 받듯 단테의 손을 쥐고 입술을 문질렀다.

“……헤인스워즈?”

단테가 생각했던 ‘손을 빌려주는’ 형태와 아주 많이 달랐다. 손을 이렇게 쓰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팀장님, 하아, 아, 팀장님.”

“읏…….”

벌어진 입이 단테의 손가락을 머금었다. 손끝이 말랑한 혓바닥으로 감싸였다.

라파엘이 달뜬 눈동자를 들어 단테를 올려다봤다. 흠칫 반 발짝 몸을 물리려던 단테의 움직임은 손목을 붙잡은 라파엘에 의해 제지당했다.

“…….”

라파엘의 입술 틈에서 나온 붉은 혀가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라파엘은 혓바닥을 세워 검지와 중지 사이를 길게 핥아 올렸다. 게걸스레 혀를 내밀다가도, 속눈썹을 내리깔고 입 안쪽으로 손가락을 깊이 집어넣어 볼로 우물거리기도 했다.

눈을 감은 라파엘의 속눈썹이 규칙적으로 떨렸다. 그러는 사이 라파엘의 젖은 상체는 더욱 들썩였다. 단테의 손에 닿는 숨도 점점 뜨거워졌다. 창문 아래 가려진 손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팀장님, 팀자, 아……, 하아, 팀장님, 팀장님…….”

“…….”

단테의 눈앞에서, 어른이 채 되지 못한 미숙한 청년의 얼굴이 감당하지 못한 색욕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혀가 질척하게 손가락을 얽고, 소리 내 쭉쭉 입 안으로 빨아들였다. 성기를 붙잡고 흔드는 것보다 이쪽이 더 난잡한 행위로 느껴졌다. 단테의 손가락을 입에 문 채로 라파엘의 뺨이 황홀하게 달아올랐다.

라파엘 헤인스워즈는 어리고, 조급했으며, 그래서 더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라파엘은 단테의 세 손가락을 완전히 입 안에 넣었다. 손가락이 전부 따뜻하고 말캉한 안으로 사라졌다. 가장 긴 중지의 끝에는 꿀떡이는 목구멍이 느껴졌다. 숨이 막히는지 눈가가 붉어졌다. 하지만 손을 빼지는 않았다.

“흐으, 아, 티자, 아, 흐.”

간절하게 단테를 부르는 목소리는 뭉개진 발음으로도 계속되었다.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등선을 타고 땀이 흘렀다.

또 기묘한 배덕감이 배속을 징 울렸다.

“끅……, 아, 흐아, 아아……!”

라파엘의 성기가 점점 더 크기를 키우고, 손바닥 안에 젖은 소리가 더해졌다.

열기에 가득 취한 라파엘은 차체가 삐걱일 정도로 몸을 거세게 흔들었다. 티장니, 틴자, 아. 그의 숨이 더욱 가빠졌다.

단테는 입술을 물었다. 당장 문을 열고 라파엘의 어깨를 눌러 시트에 눕힌 뒤 그 위를 덮치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저 달아올라 허우적거리는 열기를 공유하고 싶었다. 단테는 그 생각을 필사적으로 삼켜냈다.

천사이거나 악마인 그의 후배는 이번엔 완전한 악마 쪽이었다. 그는 심장이 터질 만큼 유혹적이었고, 시험을 당하는 건 단테였다.

절정이 다가온 라파엘이 등을 크게 움틀였다. 여전히 단테의 손을 필사적으로 입에 담은 채였다.

“흐, 아…… 아, 팀장님, 아아아……!”

마침내 라파엘이 자신의 손에 정액을 쏟아냈다.

바르르 떨리던 속눈썹이 위로 들어 올려졌다. 라파엘의 눈에 그 어떤 것도 없이 오직 순수하게 단테만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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