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26)

1-4.

이른 시간 단테의 잠을 깨운 건 전화벨 소리였다. 이 시간이면 무리 없이 일어나 있던 베일리 대위는 전날 잠을 설쳐 겨우 눈을 떴다. 발신인을 확인한 단테는 몸을 일으켰다.

“대위 단테 베일리, 제도 제1 관사입니다.”

유사시 빠른 출동을 위해 SAG는 긴 관등성명을 생략하는 대신 현 위치에 대한 정보를 보고했다.

―이제 일어나십니까.

업무 전화가 아니었다. 단테는 몸을 다시 침대에 풀썩 붙였다.

“어어, 앤지. 잘 지냈지?”

―하루 스무 번씩 시집가라는 잔소리 때문에 종일 나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잘했어. 앤지 네 남편감을 찾기에 제국은 너무 좁다. 우리 팀원들이랑 11:1로 싸워 이기는 놈 아니면 허락 못 해.”

―벌떡 일어나 춤추실 소식 가져왔는데 계속 잠꼬대하실 겁니까.

“뭔데.”

단테는 심드렁하게 물었다. 휴가 중 부관에게 전화를 받고 기쁠 일이라 해봐야 소개팅 주선 정도인데 지금 딱히 그건…….

―제 동기가 제도방위사령부에 있는 거 아시죠? 오늘 슬쩍 연락해 알려줬습니다.

안젤라가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팀 정상회담 기간에 회담장 경호조로 배치되었습니다. 백 퍼센트라 합니다. 오늘 중으로 팀장님께 공문 갈 거랍니다.

“새삼스럽게. 이런 걸론 춤 안 춰.”

당연한 결과라는 듯 대답했지만, 단테도 활짝 미소를 지었다. 됐구나.

―중요한 건 다음 소식인데요. 데릭슨 에프런 팀은 제도 관문 경계 확정입니다.

짧은 한마디가 끝남과 동시에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앤지, 나 1분만 완장 내려놔도 될까.”

―네, 저도 1분만 계급장 떼도 됩니까?

“아, 물론입니다. 지금부터 시작.”

수화가 바깥, 안쪽 할 것 없이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숨이 넘어갈 듯 웃다가, 흐느끼다가, 결국 또 침대를 두드리며 열심히 웃었다.

―The F에서, 악, 진짜 너무 웃겨서. 데릭슨 새끼 오면 테러범으로 착각한 척하고 쏴버린다고 했대요. 그래서 바로 쫓겨났답니다. 아오, 이게 온 동네 쩌렁쩌렁 발표가 나야 하는데!

단테는 아직 끊이지 않은 통쾌한 웃음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제국군 통합 특수전사령부에는 총 다섯 부대가 소속되어 있다. 공군이 하나, 해군이 둘, 그리고 육군이 둘이었다.

육군의 두 부대는 각각 SAG라는 별칭을 가진 대테러 특수무장부대와, The F라는 별칭을 가진 외인 공수부대이다.

같은 육군 특수부대여도 SAG가 사관학교 출신 장교와 제국민 부사관으로 이루어진 엘리트부대라면, The F는 그야말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실력자를 스카우트한 용병부대였다.

출신 성분과 서로를 보는 시선의 차이로 SAG와 The F의 사이는 몹시, 매우 좋지 않았다. 단테는 그나마 양쪽 모두 유들하게 지내는 편이지만, SAG의 전형적인 귀족 도련님 장교들과 The F의 상성은 최악이었다.

한쪽은 야만인, 한쪽은 약해빠진 샌님이라 헐뜯는 관계의 현재 정점은 데릭슨이었다.

The F는 통제가 어렵지만, 부대원 한 명 한 명의 개인당 능력치는 제국군의 최정상급이었다. The F 중 몇은 무조건 정상회담이 이뤄지는 건물의 경계를 맡을 거라는 건 알았는데, 그들 때문에 데릭슨이 쫓겨날 줄이야.

―보세요. 춤추셨죠?

“어떻게 알았어. 고마워, 앤지. 덕분에 활기차게 하루를 시작하네.”

―별말씀을요. 좋은 소식은 빨리 알려야죠.

정상회담엔 분명 테러를 포함한 갖은 위험이 있다. 그렇기에 훈련받은 군인들을 제도로 모으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 솔직함을 섞어 말하자면…… 군인의 입장에서는 시설이 휘황찬란한 제도에서, 고매하신 높은 분들의 곁을 수행하는 작전이 편한 건 물론이요, 추가 수당도 흡족했다.

반면 이 시기 제도 밖의 경계는 하드코어하기 그지없었다. 테러범이 있나 없나 하염없이 감시하며, 조금이라도 수상한 사람이 나타나기라도 하면 산길이나 하수도를 온통 뒤지고 다녀야 한다. 그런데도 수당이며 고생의 태가 나는 건 제도에 배치된 군인들보다 현저히 낮다.

무엇보다 당일 현장 경호는 정상급 요인들과 얼굴도장을 찍을 절호의 장이었다. 단테는 그런 부분엔 심드렁하지만, 위로 올라서려는 야망이 가득한 데릭슨은 눈을 빛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잔뜩 약이 올라 분해하고 있겠지.

“안내나 할 겸 다들 모이라 해야겠다. 앤지, 오늘 시간 괜찮아?”

―네. 아버지 잔소리 피하려면 일하는 척해야 하는데, 연락 돌리는 거 도와드립니까?

“아, 그러면 고맙지.”

―헤인스워즈에게도 연락하겠습니다.

“아. 어……. 그래야지.”

맞다, 헤인스워즈가 아직은 내 팀이었지. 휴가가 그리 오래지 않았는데도 벌써 그 사실을 깜빡했다.

라파엘이 불과 저번 달까지만 해도 그저 부하일 뿐이었다는 사실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짧은 며칠 사이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한 선후배에서 많은 것이 바뀐 탓이었다.

단테는 끊어진 휴대폰을 내려놓고 멍하니 천장을 보았다. 눈을 감으면 어제의 일이 떠오를 것 같아서였다. 실제로도 그 때문에 어제 밤새 뒤척여야 했다.

“하아…….”

이제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 * *

휴가가 끝난 뒤에도 계속 제도에 머무르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팀원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단테는 소식을 전하고 자리에 앉으며 문가를 흘끔 보았다. 함께 둘러앉은 열두 명의 사람 가운데 툭 튀어나와 있어야 할 금발이 보이질 않았다.

오늘 얼굴을 마주하면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고민했는데, 막상 나타나지 않으니 의아했다.

“지금 전부 다 온 건가?”

잘 돌려 말했다 생각했는데, 차라리 ‘헤인스워즈는?’ 하고 대놓고 묻는 게 자연스러웠겠다. 단테가 고작 열세 명의 인원 중 부재자를 모를 정도로 무심한 팀장은 아니었으니까.

“헤인스워즈는 집안에 빠지기 곤란한 일이 있다 합니다. 한 시간 정도 늦게라면 올 수 있다기에 그럼 그러라고 했습니다.”

“아아.”

“그래서 30분 내로 튀어오라고 했습니다.”

“왜 애를 괴롭히고 그래.”

“30분이나 기다려주는 상관이 세상 어디 있다고 그러십니까.”

“휴가 중에 부르는 상관부터가 그렇게 좋은 상관은 아니야, 앤지.”

집안 일이라. ……안 그런다고는 했는데, 혹시 또 그 순둥한 녀석이 맞거나, 성격이 잘 맞지 않는다는 가족들 사이에서 끙끙이고 있는 건 아니겠지. 문득 걱정이 들었다. 예를 들면 좆대가리를 잘라버린다, 중성화 수술을 시킨다든가 하는 소리를 또 듣고 있다거나…….

“헤인스워즈에게 별다른 말은 없었고?”

“저한테 시간 괜찮을 때 한번 보자던데요.”

“뭐? ……너랑 둘이?”

“팀장님이 저한테 연락해 보라고 시키신 거면서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제가 걔를 귀여워했다는 말도 안 되는 루머는 왜 만드십니까.”

안젤라의 핀잔을 듣고 나서야 제가 예전에 했던 말이 기억이 났다.

술자리는 지각자인 라파엘을 두고 시작되었다. 긴 휴가 기간 동안 마음 놓고 푹 쉬기도 했거니와, 반가운 소식을 들은 팀원들의 분위기는 벌써 화기애애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막 맥주 한 컵을 비울 즈음 라파엘이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땀으로 젖은 라파엘이 테이블 앞에서 숨을 골랐다. 안젤라가 준 타임 리미트의 절반인 15분 만의 도착이었다.

그는 재킷을 벗어 팔에 걸치고 목을 조인 타이를 당겼다. 장소와 맞지 않는 정갈한 차림에 ‘오오, 멋있네, 잘 생겼네.’ 하는 놀림 반 칭찬 반이 터져 나왔다.

“친척 약혼 파티장에서 바로 와서…. 하하… 감사합니다.”

머쓱하게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던 라파엘과 단테의 시선이 마주쳤다.

“팀장님, 저…… 왔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단테가 가장 늦게 도착한 막내를 짓궂게 놀릴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라파엘이 당황하며 손을 젓는 모습을 팀원들은 익숙하게 기대했다.

그러나 오늘은 단테도 라파엘도 금세 서로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괜찮다. 앉아.”

“……예.”

그리고 빈자리는, 우연처럼 비워진 단테의 옆자리 하나뿐이었다.

라파엘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뚜벅뚜벅 다가와 의자를 당겼다. 단테의 오른쪽, 눈높이 조금 위쪽에 살랑이는 금발이 자리했다.

“헤인스워즈, 너 몇 달만 수습 늦게 왔으면 고생 덜했을 텐데. 생각해 보니 여기저기 따라다니며 고생만 하다 가네.”

“아닙니다.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팀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반대쪽에 앉은 이가 라파엘의 등을 두드리며 단테를 가리켰다. 단테가 고개를 돌렸고, 연녹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팀에 정상회담까지 제도에서 훈련 및 대기 명령이 내려왔어.”

“휴가 끝나고도 몇 달 동안 제도에서 출퇴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거지.”

“아, 잘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너도 어디로 갈진 모르겠지만, 가까운 곳으로 배치받으면 종종 연락해라.”

라파엘은 미소 지으며 당연히 그러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국경 밖의 모기가 유난히 기승을 부렸던 초원에서 철수할 때 못지않게 팀원들은 표정이 밝았다. 술자리는 금세 떠들썩해졌고, 테이블에 커다란 타원을 그리며 둘러앉은 사람들 중 어느 한 모서리의 어색함은 쉽게 묻힐 수 있었다.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건물을 나온 단테는 꺼낸 담배에 불을 붙였다. 곧이어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단테는 연기를 한숨처럼 뱉어냈다.

라파엘은 테이블의 옆자리에 앉을 때와 마찬가지로 슬그머니 단테의 옆에 섰다. 단테가 휙휙 손짓을 했다.

“저리 가. 담배 냄새 나.”

“괜찮습니다.”

“비흡연자가 담배 냄새 좋아하는 건 아닐 거 아냐.”

“냄새는 싫지만 팀장님 담배 피우시는 건 섹시해서 좋습…… 아, 아닙니다.”

다 말해 놓고 마지막에 아니라고 하면 말이 삼켜지나. 단테는 후 연기를 뱉었다.

입에서 나온 연기는 바람을 타고 라파엘의 뺨으로 날아갔다. 하필 바람이 단테에게서 라파엘 쪽으로 불었다.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뱉은 연기도 라파엘에게로 갔다.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라파엘 때문에 단테는 얼마 피우지 않은 담배를 껐다.

“넌 어제 그런 일이 있고도 바로 날 볼 마음이 드냐.”

라파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고개가 조금 숙여졌다.

“……당연히… 지금도 창피해 죽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겨우 창피함 때문에 팀장님 뵐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 어제는 감사했습니다.”

“감사받을 일이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아닙니다. 덕분에 어… 안전했고, 좋았습니다. 정말로…….”

처음으로 자극적인 화면을 접하고 몽정이라도 한 듯한 소년의 얼굴이 수줍게 말했다.

라파엘이라면 정말로 어젯밤 몽정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괜히 거기까지 물어 과한 정보를 얻고 싶지는 않았다.

“화약 냄새, 피 냄새 나는 손이 뭐가 좋다고.”

“아닙니다. 팀장님 냄새가 났습니다. ……좋았습니다.”

단테는 자신의 손바닥을 펴 보았다. 흉터와 굳은살이 박인 예쁠 것 하나 없는 손이었다.

“너도 참 대단하다.”

단테가 적당주의로 사람을 만나게 되기 전까진 그도 나름대로 누군가에게 연애 감정을 품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기억이 다 흐려진 첫사랑조차도 라파엘만큼 열정적이지는 못했다.

“난 먼저 들어간다.”

“팀장님.”

라파엘이 걸음을 옮기려는 단테를 붙잡았다.

“조금만 더 같이 계셔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저, 음, 취한 것 같아서……. 바람을 더 쐬어야 할 것 같은데, 만취한 채 혼자 있으면 위험하잖습니까.”

몇 번이나 든 생각이지만, 연기나 시치미가 어울리지 않는 녀석이었다. 단테는 자신의 오른편을 가리켰다.

“대신 이쪽에 서.”

“예.”

라파엘을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보내고 담배에 새로 불을 붙였다. 이제 연기가 라파엘의 반대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래도 혹시나 연기가 닿을까 싶어 필터를 빨아들이며 옆으로 한 걸음을 떨어졌는데, 라파엘은 얼른 따라붙어 거리를 도로 좁혔다. 단테는 포기하고 그 자리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팀장님 저, 하나만 여쭤보고 싶습니다.”

“안 돼.”

단호한 대답에 당황한 라파엘을 향해 단테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상한 거 물어볼 거잖아.”

“이상한 거 아닙니다…….”

“대답하기 곤란하거나, 야한 질문 아니야?”

“야하, 절, 절대 아닙니다.”

진짜 그냥 질문입니다……. 라파엘이 단테를 끔뻑끔뻑 보며 그 특유의 미련 뚝뚝 떨어지는 표정을 지었다.

“뭔데. 듣고 판단할 거야.”

“소령 진급하실 때 어느 보직으로 가실 예정이십니까?”

“왜, 나 따라오게?”

피식 웃으며 건넨 물음에 라파엘은 진중하게 “예.”하고 대답했다.

“이거 스토킹의 스케일이 점점 더 커지네.”

“아닙니다. 저, 이건 팀장님에 대한 좋아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라 상관으로서 존경해서 그렇습니다.”

“말은 고마운데 관둬. 소령으로 진급해도 몇 년은 팀장 계속하다가 운 좋으면 특수교육관, 아니면 지역대장으로 가게 될 거야.”

“아……, 계속 특수전사령부 소속으로 계실 겁니까?”

“응. 그래야 돼. 청소년 학군단 출신이거든.”

라파엘은 단테가 사관학교 졸업 후 7년간 이동 없이 SAG에 머무른 이유를 깨달았다.

10대에 선발되어 어린 나이부터 장학금과 훈련을 받은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특수부대에 재직을 해야 한다. 단테에게도 청소년 학군단 당시 받은 장학금에 따라 의무 복무 연수가 있을 것이다.

“나야 운 좋게 특수부대가 적성에 맞았지만 너는 아니고, 또 선택이 가능하잖아. 다른 데 가.”

“제가 적성이 별로였습니까?”

“작전 현장에서 뛰어다니기엔 너무 눈에 띄지.”

키가 큰 데다가 머리색도 밝고, 또한 얼굴도 시선을 끌었다.

“저, 그래도 부사관분들과는 나름 잘 지냈습니다.”

“막내 생활이 좋았나 보네.”

“음…….”

“너는 내 팀에 수습으로 들어왔잖아. 막내 하사보다도 어린 데다가, 훈련이 안 되어 있으니 투입조에 들어가게 두지도 않았고, 생존 훈련 같은 것도 열외로 뺐지. 나나 앤지도 그랬지만 부사관들도 네 편의 많이 봐줬어. 다른 동기들보다야 수습 기간이 빡셌겠지만, 너 정말로 귀여움 듬뿍 받다 가는 거다.”

“……정말입니까?”

“네가 팀장이나 부팀장 달고 정식 장교로 오는 순간, 베테랑 부사관들은 너를 따를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가차 없이 평가해. 그 때문에 특전사로 온 지 반년 만에 도망치듯 나간 장교들도 매년 수두룩해. 앤지도 처음 1년은 너무 힘들어했어.”

냉철하고 무덤덤한 안젤라조차 고생을 했다는 말에 라파엘은 아…, 낮은 신음을 흘렸다.

“해리스 부팀장님은 왜 특전사 오신 겁니까?”

“진급 욕심 있어서. 포부를 보면 최소 합참의장까진 갈 것 같으니 잘 보여 놔라.”

단테는 시간을 확인했다. 가짜로 취한 후배와 잠깐 대화를 나눈다는 게 시간이 제법 지나 있었다.

“이제 슬슬 들어가자. 먼저 가 있어. 난 화장실 들렀다 가게.”

“예.”

순순히 대답했지만 무언가 미련이 남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단테가 건물 쪽을 턱짓하니 라파엘은 어떻게든 갈무리하며 안으로 돌아갔다.

단테가 테이블로 돌아왔을 때는 또 어떤 재미있는 화제가 터져 나왔는지 다들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보아하니 화제의 주인공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쩔쩔매는 라파엘로 보였다. 아무래도 이 팀이 해체되기 전까지 라파엘은 허우대만 멀쩡한 막내 이미지를 벗어나기 어려울 듯싶다.

“다들 또 막내 괴롭히지.”

“괴롭히는 거 아닙니다. 막내 연애 이야기 좀 들어보자고 하는 겁니다.”

단테가 그를 돌아봤다.

“연애?”

“여, 연애 안 합니다!”

라파엘이 단테를 보며 손을 붕붕 저었다.

“연애 아닙니다. 저는 그냥, 좋아하는 사람 있으니 소개팅은 괜찮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그래서, 우리 막내가 애타게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니까? 여기 팀에 유부남 형이 셋에 누나가 둘이나 있어.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한 다방면의 연애 상담이 가능합니다.”

“아닙니다…. 저는, 그냥 제가 노력하겠습니다.”

“상대는? 상대는 네가 자기 좋아한단 걸 알아?”

라파엘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주렁주렁 걸렸다. “그게…….” 라파엘의 시선이 옆자리에서 새로 채운 맥주잔을 기울이는 단테에게 흘끔 향했다.

“아, 압니다.”

“오, 고백은 했고?”

“……예. 차였습니다. 두 번…….”

“뭐어?”

“뭐? 네가?”

다들 입을 떡 벌렸다.

“아니… 황녀에게라도 고백한 거야…?”

현 황제가 미혼이 아니었다면 충분히 믿을 수 있을 만한 가설이었다. 술렁이는 분위기를 보며 라파엘 헤인스워즈를 두 번이나 찬 프린세스 단테는 한숨을 삼켰다.

“야… 헤인스워즈, 네가 뭐가 모자라다고 두 번이나 차이고 와. 속상하다 속상해.”

“그러니까 말입니다. 내가 최근에 본 사람 중에 너만큼 잘생기고 성격도 좋은 사람이 없는데.”

“그 사람이 보는 눈이 아주 땅에 박혔구먼! 안 그렇습니까, 팀장님?”

갑작스럽게 불린 단테가 말없이 비우던 잔에서 입술을 뗐다.

“어?”

악의 없는 앞담화를 들으며 혼미해진 와중이라 그도 조금 늦게 정신을 차렸다. “음…….” 단테는 라파엘을 돌아보았다.

“그러게. 헤인스워즈.”

“…….”

“그 사람에겐 네가 많이 아깝겠다. 네가 뭐가 부족해서 매달려.”

라파엘의 연녹색 눈동자가 덜컹 흔들렸다.

“……아, 아닙니다. 아닙…….”

무어라 꺼내려던 말은 이어 가엾은 막내에게 쏟아진 위로에 가로막혔다.

“맞습니다. 헤인스워즈 같은 녀석이 세상 어디 있습니까. 팀장님 말씀 들었지?”

“헤인스워즈. 미련 버리고 휴가 기간 동안 새 사람 찾아보자. 원래 첫사랑은 묻어두는 거랬어. 이 얼굴에, 집안은 헤인스워즈에, 직업은 장교인데 뭐 하러 짝사랑을 붙잡고 있어.”

단테가 입술을 밀어 올렸다. 그가 라파엘을 거절하며 했던 생각과 일치하는 평가였다. 정확히 라파엘 헤인스워즈가 단테 베일리에겐 아까운 이유들이었다.

“당장 내일부터 하루 두 건씩만 소개팅 나가자.”

“아닙니다. 저, 저는 그냥…….”

그냥, 그분 계속 좋아할……. 라파엘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단테가 혼자서 다 비운 잔을 내려놓았다.

“헤인스워즈.”

그가 라파엘을 보며 다정한 팀장의 얼굴로 말했다.

“좋아한다는 사람이랑 사귀는 것도 아닌데 그냥 나가 봐. 그 나이엔 많은 사람 만나야지. 네가 지조까지 지키며 그 사람 좋아할 필요가 어디 있어.”

“…….”

단테의 말을 들은 라파엘의 입술이 안으로 말려들어 갔다. 단정하게 다려진 바지 위에 놓인 손이 꽉 쥐어졌다.

“……아니오.”

라파엘이 힘을 주어 말했다.

“전 그분 계속 마음에 품을 겁니다. 특별한 관계로 발전 못 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난생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사람인데 후회 남을 행동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게 다른 사람의 이야기였다면 단테도 ‘멋지다, 잘해봐라’와 같은 말을 해줬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라파엘 헤인스워즈가 시간과 감정을 쏟고 싶어 하는 상대는 자신이었다. 팀원들의 말대로 너무나 아까운 일이었다.

단테는 선전포고라도 하듯 결연히 자신을 보는 라파엘에게 답을 주었다.

“아 그래? 그런다고 그 사람이 퍽도 좋아하겠다.”

“……!”

라파엘이 숨을 삼켰다. 뺨과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라파엘은 무어라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입을 벌렸다가 도로 다물며 고개를 돌렸다. 누가 보아도 ‘저 지금 상처받았어요.’라 하소연하는 행동이었다.

라파엘은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눈까지 질끈 감으며 꿀꺽꿀꺽 삼켰다. 단테도 새로 맥주를 채운 잔을 말없이 기울였다.

팀장과 막내 사이의 분위기가 가라앉자 순식간에 주변이 싸해졌다.

“야, 헤인스워즈. 팀장님이 너 혼자 끙끙 앓을까 봐 많이 걱정되시나 보다. 다 너 아껴서 그러시는 거야.”

“아닌데? 미련하다고 구박한 거 못 봤어?”

“아, 팀장님. 제가 협조공문 쓸 때보다 더 잘 포장해 드린 건데…….”

“저, 그냥 그분께 매달리거나 귀찮게 안 하고 혼자 마음에만 품을 겁니다. 미련한 짓 아닙니다.”

“눈 뜨고 못 보게 애처롭네. 세상에 너 좋다는 사람 훨씬 더 많을 텐데 시간, 감정 낭비 말고 그런 사람들 찾아 만나.”

“싫습니다!”

오우……, 수습 기간 내내 쫄랑쫄랑 단테를 따르던 귀염둥이 후배 최초의 격한 반항이었다. 다들 이제 말리기를 포기하고 흥미로운 눈으로 팀장과 막내의 대치를 보았다.

라파엘이 워낙 단테를 잘 따르고 또 단테는 그런 라파엘을 예뻐해, 둘 사이엔 평생 ‘아이구, 귀여운 내 새끼’, ‘팀장니임’ 하는 대화밖에 없을 줄 알았더니만.

“그 사람이 너무, 너무 많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

한때 단테의 귀염둥이 막내였던 라파엘은 심지어 눈을 치켜뜨고 두 주먹을 불끈 쥐기까지 했다. 옆 테이블도 애절한 고백에 이쪽을 슥 봤다가, 라파엘의 얼굴을 보고 ‘촬영 중인가?’ 하며 수군거렸다.

“헤인스워즈, 목소리 낮춰.”

그나마 라파엘보다 이성적인 단테가 입술 앞에 손가락을 세웠다. 그제야 라파엘은 잔뜩 세운 어깨를 가라앉혔지만, 또 속상한 얼굴로 잔을 꿀꺽꿀꺽 비웠다. 이제 팀원들이 뻘쭘한 얼굴로 두 사람을 달래기 시작했다.

“팀장님, 막내가 그 사람 무지하게 많이 좋아하나 봅니다. 얘가 알아서 하라 하죠.”

“그래, 소개팅하지 마. 순정 지키는 게 욕먹을 일이냐.”

“등신 같은 일이지.”

팀원들이 보기엔 자존심을 못 굽히고 구질구질하게 한마디를 붙인 걸로 보이겠지만, 단테는 그 한마디에 수십 번의 한숨을 꽉꽉 눌러 담았다.

지금 라파엘을 응원하는 팀원들도, 그가 좋아 죽겠다며 매달리는 상대가 일곱 살 연상의 남자, 그것도 팀장이라는 걸 알면 의견을 정정할 것이다.

“등신 같은 일 아닙니다.”

라파엘도 술이 꽤 들어갔는지 비죽인 대답을 던졌다.

늘 가장 화기애애했던 팀장과 막내 사이가 칼만 안 든 냉전 상황이나 다름없어져, 모처럼의 술자리는 평소보다 일찍 파했다.

* * *

말이 좀 거칠게 나갔나 싶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잔뜩 상처받은 얼굴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다. 신경이 쓰여서 그런지 팔다리도 비를 맞은 것처럼 묵직하게 느껴졌다.

팀원들이 각기 집으로 흩어지고, 택시를 기다리는 단테의 옆에 라파엘이 쭈뼛쭈뼛 다가왔다.

“왜. 또 무슨 말 하게.”

말을 꺼내는데 머리에 가벼운 지끈거림이 찾아왔다. 그래서 목소리가 더 퉁명스럽게 나갔다.

“안녕히 들어가시라고… 인사하러 온 겁니다.”

라파엘의 입술은 여전히 손가락 반 마디만큼 나와 있었다. 조금 전까지 그 난리를 치고도 또 다가오는 걸 미련하다고 하지, 아니면 대체 뭘 미련하다고 한단 말인가. 라파엘은 단테의 앞에 서서 허리를 꾸벅 숙였다.

“들어가십시오.”

“헤인스워즈.”

“……예.”

“네가 뭐가 부족해서 나한테 그렇게까지 목을 매. 아까 내가 한 말들 진심이야. 다른 사람 만나 봐.”

“저도 진심이었습니다.”

“하……, 제발 잘 생각해. 라파엘 헤인스워즈가 날 좋아해서 뭐 하게.”

“제가 오늘 제일 속상했던 게 뭔지 아십니까? 다정한 팀장님이 면전에서 이 정도로 매몰차게 밀어냈으면 눈치껏 마음 접어야 하는데 안 된다는 겁니다.”

라파엘이 성큼 한 걸음을 다가와 거리를 좁혔다.

“내일도 팀장님과 같이 맛있는 식사 하고 싶고, 대화하고 싶습니다.”

가로등이 만든 두 개의 긴 그림자 중 하나는 가만히 서 있고, 하나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갔다.

“더 크게는 손잡고 싶고, 웃어주셨으면 좋겠고.”

“…….”

“흐, 정말로 기회가, 온다면… 제 기억 속엔 팀장님 강간한 모습으로밖에 안 남은 섹스도, 다시, 정성껏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감정이 북받쳤는지 말이 뚝 끊겼다. 단테는 고개 숙인 라파엘을 보았다. 조금 전보다 머리의 지끈거림이 심해졌다.

단테가 몇 번이나 그에게 화간이라 정정해 주었어도 죄책감이 남았을 수 있다. 라파엘은 착하고 성실하니까. 그래, 그게 마음에 걸렸겠군.

“동정인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섹스에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 않아.”

“…….”

“섹스는 안 사귀어도 할 수 있어. 그것 때문에 계속 마음 쓰이면 지금 가서 다시 해. 그리고 죄책감이건 뭐건 다 떨쳐.”

라파엘과 다시 관계를 맺을 마음은 없었지만, 강간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면 그 기억을 덮어줄 용의는 있었다. 이건 단테가 희생하는 게 아니라 찝찝한 일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손해 볼 건 없었다.

단테가 라파엘의 팔을 당겼다.

“가자.”

“예? 시, 싫습니다.”

라파엘이 발을 바닥에 붙이고 고개를 저었다. 단테는 그 손목을 힘주어 잡아끌었다.

“싫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고 싶어서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아, 마침 저기 호텔 간판 보이네.”

“팀장님! 싫어요, 싫습니다!”

한쪽은 특수부대에서 7년을 구른 작전팀 팀장, 그리고 한쪽은 소대장도 못 단 술 마신 병아리였다. 경험과 완력의 차이는 체급의 차이를 훨씬 선회했다.

단테보다 반 뼘은 큰 라파엘의 몸이 앞으로 질질 끌려갔다. 버둥버둥거리는 걸음이 억지로 내딛어지고, 단테가 가리킨 호텔이 가까워졌다.

“티, 팀장님! 팀장님!”

라파엘이 손목을 붙잡은 단테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이 상황에서도 뿌리치는 방법은 모르는 착한 놈이라 단테의 팔을 붙잡고 얼굴만 왈칵 일그러뜨렸다. 세게 잡은 것이 아닌데도 라파엘이 잡은 곳이 욱신거렸다.

“저 사귀기 전까진, 흐, 절대 안 하려 했단 말입니다! 팀장님 아프게 하기 싫어요. 흐윽, 흐, 서로 사랑하게 된 뒤에 할 겁니다. 싫어요!”

낯부끄러운 말을 외치며 라파엘은 울음을 꺽꺽 쏟기 시작했다. 당황해 입에 밴 군대식 말투도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환하게 불이 켜져 있던 호텔이 점점 가까워졌다.

“팀장님! 팀장님!”

“…….”

마침내 호텔까지 스무 걸음도 채 남지 않았다. 라파엘은 이제 소리도 죽이지 않고 서럽게 울었다.

“흐어어엉! 안 돼!”

“허.”

힘으로는 이길 수가 없단 걸 안 라파엘은 바닥에 털푸덕 주저앉는 걸 선택했다. 단테가 혀를 차며 뒤를 돌았다. 아무리 단테라도 무게로 버티는 라파엘을 끌고 갈 수는 없었다.

“싫습니다. 저, 좋아한, 흐어, 이렇, 게는. 끅.”

꺽꺽 서럽게 울며 단테와 힘겨루기를 하느라 얼굴이 엉망이었다.

“팀장님은, 그렇게, 흐어, 매번, 끅, 저 차면서, 팀장님, 아깝다고, 하고, 흐어어엉……. 아닌데……. 왜 또, 섹스도, 그런 식으로 말하고. 싫습니다!”

팀장님이 더 등시… 아니, 바보입니다……! 라파엘은 길 한복판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히고 서럽게 울었다.

단테는 그가 빽빽 울며 주장하는 내용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싫다고 울면서 끌려가던 손을 놓기는커녕, 이제는 제가 단테를 붙잡고 있었다.

커다란 울음소리가 머리를 징징 울렸다. 단테는 이마를 꾹 누르며 라파엘을 내려다봤다.

“라파엘 헤인스워즈. 너.”

“어? 진짜 팀장님이네? 여기서 뭐……, 설마 둘이 또 싸웠습니까?”

그 때, 골목에서 팀원 몇이 나타났다. 늦은 시간 어디서 서러운 울음소리가 들려 와본 팀원들은 주저앉아 온 얼굴을 눈물로 푹 적신 막내와 그 앞에 서 있는 팀장이라는 황당한 광경을 목격했다.

“아니……, 팀장님 생전 이런 적 없던 분이 술 드시고 왜 이러세요.”

다가온 안젤라가 라파엘의 등을 두드리며 일어나라고 말했다. 라파엘은 훌쩍이며 상황 파악을 하더니, 벌떡 일어나 안젤라의 뒤로 숨었다.

“부팀장님. 흑.”

허, 안젤라의 몸이 제 반 토막만 하건만…….

“안 싸웠어. 헤인스워즈 나오라고 해.”

라파엘이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젤라도 지금 라파엘이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는 걸 알았다. 하지만…….

“애 울잖습니까. 무슨 일입니까? 사수 하실 땐 귀엽다고 내내 싸고도시더니.”

훌쩍……. 라파엘이 추임새처럼 안젤라의 말끝에 울음소리를 넣었다. 저게 부팀장에게도 작고 가엾은 강아지 흉내를 냈다. 바지런히 단테의 눈치를 살피더니 다른 팀원들도 부르며 낑낑대기 시작했다.

단테는 뒷목이 뻐근해졌다. 팀원들이 ‘아이고 이렇게 어린데….’ 하고 감싸는 라파엘의 입에선 불과 10분 전 팀장에게 섹스하고 싶다는 말이 나왔었다. 저렇게 불쌍한 강아지인 척할 군번은 아니었다.

“라파엘 헤인스워즈. 너 이리 안 나와?”

“부, 부팀장님, 중사님!”

“팀장님, 아니 선배. 진정하시고요. 진정.”

“앤지, 너 나 믿어? 쟤 믿어?”

안젤라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군인은… 약자의 편입니다.”

“부팀장님… 흑흑……. 팀장님이, 술에 취하셔서 막 무섭게…….”

“막내 겁먹은 것 좀 보세요.”

“흑, 흑흑…….”

얼씨구. 이제 우는 척도 한다. 몇 번이나 들어본 라파엘의 우는 소리는 저게 아니었다. ‘윽, 흑, 끄윽, 꺽꺽’에 가깝지 ‘흑흑’은 결코 아니었다. 우는 척하면서 흘끔흘끔 안젤라의 정수리 너머로 눈치를 살피는 것만 봐도 가짜 울음이 확실했다.

“저거 연기하는 것 봐. 야!”

“부팀장님!”

“야야, 둘 다 취한 것 같다. 팀장님 모셔.”

“아니, 난 취한 거 아닌……!”

“예에. 팀장님, 이만 가시죠. 내일 술 깨고 말씀하십쇼.”

그 와중에 라파엘이 꾸벅 인사를 하고는 멀어졌다. 단테는 그를 가리키며 황당하게 입을 뻐끔거렸다.

야, 이리 안 와! 한밤중의 소동은 시트콤이 따로 없었다.

* * *

“으…….”

눈을 뜸과 동시에 깨달은 건 온몸이 흠뻑 젖었다는 것이었다. 입 안은 건조한데, 내뱉는 숨은 뜨거웠다.

단테는 마른세수를 하며 힘없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손바닥에 묻어났다. 숙취라기엔 머리 외의 다른 곳도 동시에 아팠다.

어제 찾아온 두통과 욱신거림이 모두 이 전초 증상이었던 모양이다.

단테는 긴 훈련이나 파병을 다녀온 뒤에는 연례행사처럼 하루씩 앓곤 했다. 이번엔 별 증상이 없어 넘어가나 했더니만, 역시는 역시였다.

지금은 팔다리가 으슬거리는 정도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열이 오를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꼬박 하루를 앓고 나면 다음 날은 멀쩡해진다는 점이었다. 다만 그 하루는 거의 반 좀비 상태로 보내야 했다.

“으으…….”

머리맡을 더듬어 휴대폰을 찾아 화면을 켰다. 겨우 눈앞에 휴대폰을 들어 올리는 데도 팔이 욱신거렸다. 전날 저녁 팀원들과 떠들썩하게 만나는 사이 급여가 들어와 있었다.

단테는 머릿속으로 한 달간의 생활비를 매겨보았다. 옷은 국경 밖을 다녀오는 동안 몇 번 입지도 못하고 둔 것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됐다. 관사 지하의 카페테리아에선 군 장병에게 무상으로 식사가 지급되므로 식사비도 최소한도보다 약간만 여유 있게 매겼다.

그리고 비상금 조금. 짜디짜게 예산을 책정한 단테는 나머지를 미련 없이 송금했다.

저번 달까지 척박한 오지에서 훈련을 지휘한 SAG의 팀장에게는 높은 생명 수당이 지급되었다. 거기에 더해 이번 달에는 휴가 보너스가 지급되어 제법 액수가 많았다.

그러나 그 돈은 통장에 잠시 머물렀다 사라졌고, 손에 남은 건 월급으로 찍힌 금액의 2할 남짓이었다.

‘이런데 내가 무슨 연애를 하겠어…….’

한 팀의 팀장이라는 직위를 단 뒤로 단테는 이전보다 더 가벼운 사이를 선호했다. 책임질 일이 많아질수록 한 사람에게 특별한 관심을 줄 수가 없었다. 단테에게는 특전사라는 험한 일이, 그가 맡은 팀이,

무엇보다.

그는 송금 내역에 떠 있는 글씨를 두드렸다. 이곳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컸다.

단테는 이미 끌어안은 게 너무 많아 상대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어려웠다. 그것이, 그가 먼저 고백을 받아 사귀어도 차이는 결말로 끝나는 이유였다.

‘나도 그런 데엔 무뎌. 서로 쿨하게 만나자.’

자신 있게 말하던 사람도 몇 번 서운한 기색이 지나간 다음에는,

‘대체 너한테 내 비중은 어느 정도야? 우리가 사귀는 건 맞아?’

하며 화를 내기가 부지기수였다. 하물며 사람의 애정과 온기를 좋아하는 라파엘은 어떨까.

‘저 사귀기 전까진, 흐, 절대 안 하려 했단 말입니다. 팀장님 아프게 하기 싫어요. 흐윽, 흐, 서로 사랑한 뒤에 할 거예요. 싫어요!’

밤중의 골목을 울리던 울음소리가 오늘은 단테의 아픈 머릿속을 울렸다. 핏기없는 입술이 픽 위로 올라갔다. 섹스는 서로 사랑한 뒤에 하는 거라니. 이게 몇 살짜리가 할 만한 말이야.

라파엘처럼 상대를 향한 거대한 사랑을 짊어지고 오는 녀석에게는 그만큼 똑같이 사랑을 줄 수 있는 상대가 어울렸다. 그리고 그건 단테와는 다소 먼 이야기였다.

나라도 정신 바짝 차려야지. 단테는 더운 한숨을 푹 내뱉었다. 마른 목이 따끔거렸다.

슬슬 본격적으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흐리멍덩해지고 생각도 명확히 이어지질 않았다. 대신 징징 울리는 라파엘의 목소리만 남았다.

베개로 귀를 감쌌지만 역시나 별 소용은 없었다. 어제 천사 같은 얼굴을 서럽게 울린 대가인가… 하는 생각을 멍하니 했다.

그 때, 허리 옆에 대충 내려놓은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열어 본 단테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천사는 무슨, 악마보다 더한 타이밍이었다.

[팀장님, 안녕하십니까. 라파엘 헤인스워즈입니다.

어제 팀장님께 좋지 못한 행동거지 보여드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라파엘에게 온 정중한 사과였다.

하아…, 이 착한 놈. 단테는 답장 버튼을 누르고 화면 위에서 손가락을 톡톡 움직였다.

[괜찮아. 나도 잘한 건 없으니 서로 없던 일로 하자. 신경 쓰지 마.]

전송하자마자 곧바로 메시지를 읽었다는 표시가 나타났다. 그리고, 하단에 상대방이 메시지를 입력 중이라는 아이콘이 떴다.

5분을 기다려도, 10분을 더 기다려도 아이콘은 사라지지 않고,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

오류인가? 아직은 쓸 만한 것 같은데 벌써 고장 기미가 보이네. 단테는 고개를 기웃하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로부터 또 10여 분 뒤, 그는 휴대폰 진동을 느끼고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예, 감사합니다. 어제 잘 들어가셨습니까.]

설마 이 두 마디를 30분 동안 쓴 건 아니겠지……. 단테는 짧은 대답을 보냈다.

[응.]

라파엘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빠르게 메시지를 확인하고, 답장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10분이 지났다.

휴대폰의 오류보다는 라파엘이 휴대폰을 붙잡고 말을 썼다 지우며 끙끙대는 것으로 추측이 되었다. 이대로 두면 또 30분 동안 겨우 두 마디를 쓸 게 분명했다. 단테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두어 번 가고, 라파엘은 다소 놀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소위 라파엘 헤인스워즈.

“할 말 해.”

―팀장님, 목소리가…….

전화로 티가 날 정도인가. 목소리를 가다듬어 보았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잠겨서 그래. 하고 싶은 말 지금 말로 해. 메시지 답답해서 못 기다리겠다.”

―어제 제가 건방지게 굴었고, 당사자인 팀장님 마음 배려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알겠어. 마음에 안 담아뒀고, 나도 말 심하게 해서 미안해. 쉬어.”

―예…….

단테가 먼저 통화를 종료했다. 겨우 몇 마디를 했다고 목이 더 칼칼했다. 몸뚱어리가 특전사의 불굴의 의지를 완전히 망각했다.

1년간 흔한 감기 하나 없이 버틴 몸이, 그간 걸렸어야 할 병마를 모아 한꺼번에 쏟아내는 것 같았다. 동기들이 보면 10년은, 아니 10년이 뭐야. 정년까지, 정년 후에 회포를 풀러 만난 자리에서도 놀려댈 모습이었다. 총칼을 맞은 것도 아니고 몸살에 걸려 침대에 얌전히 묶인 꼴이라니.

욱신거림이 팔다리를 타고 올라와 어깨와 등허리까지 괴롭히기 시작했다.

아, 이번엔 진짜 안 좋다……. 팔자에도 없는 연애 고민을 해서 그런 걸까…….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단테는 눈을 감았다.

열이 오른 채 옅게 빠진 꿈속에 라파엘이 나왔다. ‘흑흑’하고 우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붙였는지는 모르겠는데, 머리 양쪽에 해피처럼 긴 귀가 생겨 있었다. 자세히 보니 엉덩이엔 꼬리도 붙어 있다.

이상한 광경이라 생각하면서도 꼬리가 무척 푹신푹신 보드라워 보였다. 라파엘이 귀와 꼬리를 축 늘어뜨린 채 자신에게 몸을 붙이며 물었다.

‘팀장님, 제가 싫으십니까?’

‘…….’

‘어떻게 제가 싫으십니까? 저는 이렇게 귀엽고 가여운데!’

라파엘이 또 끙끙 큰 몸을 웅크리려 애썼다. 산만 한 덩치로 오늘따라 더 새끼강아지인 척을 했다.

‘저는 이렇게 작습니다. 그래도 싫으십니까?’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아무리 몸을 굽혀 봐야 그보다 6, 7cm는 작은 단테보다 조그맣게 보일 일은 없었다.

단테가 대답이 없자 라파엘이 울상을 지었다.

‘진짜로…… 싫으십니까?’

연녹색 눈동자가 비 오는 날의 연못처럼 그렁그렁 젖어가기 시작했다. 눈가에 벌써 작은 사탕만 한 눈물이 맺혔다. 어제 그렇게 울고도 또 울 눈물이 남았나.

“……안, 싫어.”

그러니까 그만 좀 울어. 단테는 마른 입술을 열어 겨우 대답을 했다.

너 안 싫어. 그냥, 내가……. 단테는 열에 취해 자신도 뭐라 하는지 모를 불분명한 대답을 주었다. 그러자 어느새 눈물을 닦은 라파엘의 질문이 바뀌었다.

‘어디 아프십니까?’

아니. 습관처럼 대답이 나갔다.

‘괜찮으십니까?’

응. 괜찮아.

단테가 아프냐고 물어본 사람은 많지만, 단테에게 묻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래서 대답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말했다. 괜찮아. 멀쩡해…. 목소리가 나갔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답을 해주어도 질문 세례가 끊이질 않았다.

‘팀장님 많이 아프신 거 아닙니까?’

꿈에서까지 뭐 이렇게 끈질기게 굴어…….

열이 더 올라선지 꿈속 라파엘의 모습도 부옇게 보였다. 그가 건네는 질문도 귓가에 들렸다가 글씨로 보였다가 하며 둥둥 떠다녔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옆에서 몸을 치대고 있던 녀석이 어쩐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보였다.

‘팀장님 아프십니다.’

아니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이제 멋대로 결론을 내려버렸다. 단테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가… 속 썩여서 그렇잖아.”

꿈속이지만 라파엘이 좀 시무룩해진 것 같다.

잠깐 조용하던 라파엘은 또다시 뭐라고 종알거렸다. 이제 알아들을 수 있는 질문이 거의 없어서 어, 어어……. 하고 애매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라파엘이 또 같은 질문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십니까?’

어차피 못 먹어. 나 좀 내버려 둬. 이제 좀 가.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아무리 꿈속 라파엘이라도 몸을 웅크리고 몹시 섧게 울 것 같았다.

“1,000시간 드라이에이징 스테이크.”

단테는 언젠가 TV에서 보았던 음식을 불렀다.

‘……예? 아, 그, 아, 알겠습니다…….’

라파엘이 어버버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조금쯤 통쾌해졌다.

라파엘은 그 질문을 마지막으로 더 말을 시키지 않았다.

단테는 흐릿한 꿈을 벗어나 드디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머릿속이 완전히 새카맣게 잠기기 전, 마지막으로 이마에 시원한 것이 닿았다.

* * *

너무 깊이 잠들었다 일어나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가늠이 되질 않았다.

단테는 창문을 돌아보았다. 언제 쳤는지 창문도 커튼으로 덮여 있었다. 방 안이 완전히 어둡지 않은 걸로 보아 낮이구나 짐작을 했다.

또한 단테는 지금 집 안에 자신 외에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이 앞 버스정류장 이름이 아직도 ‘군인아파트 정류장’인데 여길 털러 오다니. 미친 도둑이 틀림없었다.

도둑에겐 안타깝게도 단테의 방 안에는 훔쳐 갈 만한 물건이 없었다. 그러니 조용히 나가서 옆방을 털다가 잡혀주었으면 좋겠다. 단테는 지금 손 하나 까딱할 힘도 내기가 귀찮았다.

그러나 도둑은 기대를 배신하고 단테에게 다가왔다. 단테는 깊은 시름과 함께 이불 안에서 팔을 뻗었다.

도둑은 순식간에 단테에게 멱살을 잡혔다. 단테는 그대로 상대의 멱살을 휙 붙잡아 당기고, 무릎 위로 쓰러진 몸의 팔을 뒤로 잡아 꺾었다.

“악!”

“……어.”

일련의 동작을 반사적으로 수행한 뒤에야, 단테의 눈에 곱슬거리는 밝은 금발이 들어왔다.

라파엘이 남은 한 손으로 항복 제스처를 취하며 단테를 바라봤다.

“……너 뭐야? 왜 여기 들어와 있어.”

라파엘 헤인스워즈가 단테의 방에 뭘 훔치러 온 도둑일 리는 없으니 일단 붙잡고 있던 팔을 놓아주었다. 라파엘은 아픈 어깨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게… 아까 통화할 때 팀장님 목소리가 너무 안 좋아 보이셨는데, 그 뒤로 연락을 안 보셔서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찾아와 문을 두드렸는데 반응이 없어서 쓰러지신 건가 하고.”

“……그래서?”

라파엘이 우물쭈물거리다 헤헤… 웃음으로 변명을 포장했다.

“팀장님께서 저 수습 때 문 따는 법 가르쳐 주셨죠.”

“상관 집 문 따고 들어오라고 가르쳐 준 건 아니었는데.”

단테는 이마를 짚었다. 이마에 얹은 손끝에 축축한 수건이 닿았다.

“뭐야 이게?”

“아, 주십시오.”

라파엘이 수건을 받아 가더니 단테의 옆에 떠 둔 얼음물에 적시고 수건을 꾹 짰다. 그리고 도로 단테의 이마에 올려주려 했다. 단테는 그 손을 밀어냈다.

“됐어.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팀장님 지금 열이 굉장히 높으십니다. 병원은 다녀오셨습니까?”

“작전지에 있다가 돌아와 긴장 풀려서 이러는 거야. 하루 푹 쉬면 나아.”

“그래도, 약이라도 드셔야 하는데…….”

라파엘은 꿋꿋이 물수건을 이마에 올려주고 수건을 하나 더 찬물에 푹 적셨다. 그리고 식은땀이 지나간 옆얼굴과 목덜미를 닦아주었다.

성인에게 해주는 간호치고는 과한 행동이지만, 열을 식혀주는 서늘함이 기분 좋았다.

“……고맙다. 줘.”

단테는 수건을 받아들고 직접 몸을 닦았다. 찬 것이 닿으니 가물가물 남아 있던 잠기운이 가셨다.

“후배 잘 뒀네. 선배 죽을까 봐 문 따고 들어와 간호도 다 해주고.”

핏기없는 입술을 끌어올린 미소가 만들어졌다. 라파엘은 침대 옆에 놓인 의자를 가까이 당겨 앉았다.

“그럼 매번 외부 작전을 수행하고 돌아오실 때마다 이렇게 아프신 겁니까?”

“백 퍼센트는 아닌데, 거의. 작전지에서 잔병치레할 거 몰아서 아프나 봐.”

“……팀장님께서 짊어지신 부담이 많아 보입니다. 팀장님은 또 팀원들 하나하나 많이 신경 쓰시니까.”

“다른 사람들도 다 그래.”

“그건 아닙니다.”

몸을 닦은 수건은 살뜰히 다시 차갑게 적셔져 단테에게 전해졌다. 이 정도로 극진한 간호를 받고 나니 더 이상 무단침입을 나무랄 수 없게 되었다.

“몇 시쯤 왔어?”

“열두 시 경에 도착했습니다.”

“점심 아직이겠네. 뭐라도 차려주곤 싶은데 내가 움직이질 못하겠다. 미안하지만 내 카드 가져가서 너 먹고 싶은 거랑, 내 것도 아무거나 하나만 사다 줄래.”

엇, 라파엘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저 고기 주문해 받아두었는데…….”

“무슨 고기?”

“드라이에이징한 소고기 등심이요……. 팀장님 목 부으셔서 스테이크는 안 될 것 같아 스튜에 넣어 조리해달라 했습니다. 우선 받고 여기서 한 번 끓여두었습니다.”

“……? 드라이에이징?”

“드시고 싶다 하셨습니다. 1,000시간 드라이에이징 스테이크…….”

“내가?”

“예……, 다른 건 다 불분명하게 말씀하셨는데 그것만 선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잠결에 그런 말을 한 기억이 날 듯도 하고, 안 날 듯도 했다. 우선 확실한 건 얼굴에 병마와는 다른 이유로 화끈함이 더해졌다는 것이었다.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찬장의 그릇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어어…….”

라파엘은 얼른 테이블에 두 사람 몫의 식사를 차렸다. 부스스 일어난 단테는 아담한 조리대 위에 뜬금없이 생겨난 거대한 솥을 보고 눈이 커졌다.

곧 단테의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튜 그릇이 놓였다. 단테는 익숙한 그릇에 담긴 낯선 음식을 스푼으로 떠올렸다.

값비싼 고기는 TV로 보며 어렴풋이 맛있겠다고 느낀 것보다 배는 더 혀 위에서 녹아내렸다. 식사를 마치고는 라파엘의 성화에 못 이겨 그가 사 온 감기약과 해열제를 먹었다.

음식이 들어가자 체력이 좀 돌아왔다. 단테는 욕실에 가 땀에 젖은 몸을 씻어내고 나왔다. 씻겨주겠다는 헛소리를 하다 욕실과 멀찍이 떨어진 의자에 20분간 근신을 받은 라파엘은 단테가 나오자마자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수건으로 말려주었다.

그리고 주방으로 와 가까이에서 다시 본 스튜 솥은 여전히 답 없이 커다랬다. 커다랄 뿐만 아니라 내용물도 꽉 들어차 있었다.

“저녁까지 먹고 가. 저걸 나 혼자 어떻게 먹어.”

“예! 이따가는 제가 스튜에 곁들일 빵 몇 가지 사 오겠습니다.”

“그래…….”

라파엘은 환자인 단테를 도로 침대에 눕히고 의자를 가지고 와 머리맡에 앉았다.

“팀장님.”

“응.”

“열 재 봐도 되겠습니까?”

“안 된다고 하면 안 할 거냐?”

“음… 한 번만 하게 해 달라 조를 겁니다.”

“그래, 해라 해.”

오늘은 라파엘과 투닥투닥 실랑이를 할 만한 기운이 없었다.

라파엘의 손이 다가왔다. 그의 손은 하얗고 길쭉했다. 얇은 손마디는 군인보다는 우아한 피아니스트의 손가락 같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오자 단테의 손과 같은 화기 냄새가 옅게 느껴졌다.

라파엘이 손바닥으로 단테의 이마를 감쌌다. 열이 오른 이마보다 그의 손이 더 뜨거워 체온을 잴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따끈한 열기가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늦은 식사를 하고 약을 먹은 몸은 인지하지 못한 사이 또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다시 깨어났을 땐 어느새 창밖이 불그스름했고, 침대 맡 그 자리에서 라파엘이 책을 읽고 있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걱정을 가득 담은 물음을 듣고 차마 왜 안 가고 여태 있었냐는 질문은 할 수가 없었다.

점심 식사가 늦었던 만큼 저녁 식사도 해가 지고 난 뒤에야 들었다. 설거지도 뒷정리도 단테를 억지로 앉힌 라파엘의 몫이었다. 단테가 오늘 라파엘에게 해준 일이라고는 냉장고에서 캔 음료를 하나 꺼내준 것밖에 없었다.

조금 더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많이 늦은 시간이 되었다. 내내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한 번도 나타내지 않았던 라파엘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밤에 조금 더 지켜보다 열 내리는 것 확인하고 새벽에 가면 안 되겠습니까? 아까처럼 의자에 얌전히 있겠습니다.”

“자고 가.”

“정말이십니까?”

“하루 종일 내내 간호해준 사람을 설마 한밤중에 내쫓을까.”

라파엘은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기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바닥에서 자겠습니다.”

라파엘은 입고 온 겉옷을 적당히 뭉쳐 베개처럼 만들고 침대 옆 맨바닥에 누우려 했다.

단테는 벽 쪽으로 물러나 침대 옆자리를 두드렸다.

“됐어. 올라와. 옮는 병 아니야.”

“그, 그래서 바닥에서 자는 게 아니라, 팀장님 편하게 주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 먼지 쌓인 바닥에 재워놓고 퍽도 편안히 잠이 오겠다.”

“저는 괜찮습니다. 팀에서 야영 중 바닥에서 몇 번이나 자 봤…….”

“내 집 침대 밑에서 무서운 거 나온다.”

라파엘의 괜찮다는 말이 그제야 멎었다.

“밤도 깊었는데 군인아파트 7대 불가사의 얘기해줄까? 첫 번째는 침대 밑의 잘린 다리…….”

“으아아!”

고집부리던 라파엘이 단테의 옆에 간이 베개를 착 올려놓았다. 그리고 황급히 침대 위로 올라왔다.

단테는 간이 베개를 다시 옷으로 되돌려 침대 헤드에 걸고, 라파엘에게는 두 개 있는 베개 중 하나를 주었다.

“저, 오컬트적인 거에 약합니다…….”

덩치는 산만 해선 귀엽게 구네 진짜.

단테의 침대는 성인 남자가 혼자 누우면 넉넉히 남는 크기였다. 즉, 평균 체격보다 큰 남자 둘이 누우니 어깨가 닿았다. 라파엘도 그걸 의식했는지 조금 떨어져 침대 가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걸쳤다.

“사실 침대 밑에서 나온다는 거 귀신 아니야.”

“그럼 뭡니까? 귀신만 아니면 괜찮…….”

“거미.”

“…….”

“내려가서 잘래?”

“아, 아닙니다.”

라파엘이 꾸물꾸물 몸을 붙였다. 라파엘과 어깨가 조금 더 겹쳤다.

잠시 고요한 숨소리만 들렸다. 기절하듯 까무룩 잠드는 것밖엔 할 수 없던 낮에 비해 몸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몸의 욱신거림도 한결 가셨다. 그러고 나자 정신없는 사이 얼렁뚱땅 하루를 같이 보낸 후배가 뒤늦게 신경이 쓰였다.

단테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자고 있지 않던 라파엘도 부스럭 소리를 듣고 단테를 돌아봤다. 연녹색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어둑한 실루엣이 분명 단테를 보고 있었다.

“팀장님.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뭔데, 또.”

“정말로 SAG 팀장으로 계속 계실 겁니까?”

“응.”

“특수전사령부 내에서도 다른 보직 있지 않습니까.”

“The F랑 901에서 스카웃이 오긴 했는데.”

“901특전단 말씀이십니까?”

라파엘이 벌떡 고개를 들었다.

SAG가 온 제국민이 존재를 알고 대외적으로 드러난 특수 작전을 수행하는 부대라면, 단테가 말한 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이는 부대였다.

특히 901특전단은 내부 편제마저 1급 군사기밀로, 한번 들어가면 외부와 연이 완전히 끊긴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림자 속에서 제국의 이름으론 공개할 수 없는 작전을 수행하며 어떤 부대보다도 높은 생명 수당과 대가를 받겠지만.

“둘 다 거절했어.”

“아…….”

라파엘의 머리를 다시 베개에 풀썩 내려놓았다. 안도를 숨기지 못한 라파엘이 물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사람 많이 죽일 것 같아서.”

대답은 간결했다.

“어머니가 안 그래도 나 무기 드는 거 별로 안 좋아하시고.”

“팀장님 어머님께서 군인 되는 걸 반대하셨습니까?”

“응. 청소년 학군단 때부터 그닥. 지금은 그냥 받아들이신 것 같지만.”

“아……. 청소년 학군단엔 어떻게 들어가셨던 겁니까?”

“열다섯 살 땐가. 체육 선생님에게 추천받았어. 수업 끝나고 불러선 유소년구단이나 청소년 학군단에 들어갈 생각 없느냐고 물어보더라.”

“왜 운동이 아니라 군을 택하셨습니까?”

“장학금이 필요해서.”

라파엘의 실루엣에서 계속해 나오던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

“우리나라 학군단 복지가 좋아서, 그게 학생에게 나오는 것 치고도 액수가 꽤 많아.”

단테는 자신이 평소보다 말이 많아졌다는 걸 느꼈다. 늘 여러 번 생각을 거치고 말이 나가는데, 오늘은 열과 싸우느라 지쳐 깊은 곳에 묻어둔 내용이 혀를 타고 쉽게 빠져나갔다.

단테가 더 말이 없자 라파엘은 눈치껏 묻지는 않았다. 대신 단테의 이마를 한 번 더 짚었다. 간지럽고, 또 어이가 없었다.

“너는 왜 특수부대로 수습을 나오겠다고 자원했어?”

라파엘의 손등이 목덜미까지 짚고 물러났다.

“예상하시는 이유와 같습니다.”

“각하께서 보내셨어?”

“……예.”

“그랬구나.”

“처음엔 그랬는데, 지금은 팀장님을 사수로 만나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

단테는 오르내리던 눈꺼풀을 감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말 좀 잘 듣자.”

라파엘이 대답 없이 낮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작은 사과가 이어졌다. 그리고 서툴지만 다정한 손길이 이불을 단테의 어깨 위까지 당겼다.

“아프지 마십시오. 팀장님.”

“군인이 열 좀 나는 것도 아픈 걸로 치나.”

“아프실 거면 차라리 다 같이 있을 때 아프세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혼자 있을 때 아파서 다행이지.”

중요한 상황이라는 걸 몸이 아는지, 다행히 현장에서 팀을 지휘할 때 아픈 적은 없었다. 병은 꼭 이렇게 혼자 있을 때를 맞춰 찾아왔다.

그래서 지난번에도, 그리고 그 이전에도. 이제는 기억도 가물한 첫 파병 이후 병치레에도 단테는 혼자 침대에 누워 열을 삭였었다.

병은 마음을 무뎌지게 했다. 무뎌진 상태에서 닿은 체온은 틈새를 파고들어 마음을 물렁하게 녹이기에 충분했다.

고요하던 방에서 타인의 숨소리가 들렸다. 꼿꼿이 세우고 있던 허리를 편히 내려놓을 때처럼 몸이 풀렸다. 힘을 풀며 찾아온 짧은 욱신거림 뒤에, 몸을 기댄 곳부터 천천히 근육이 이완되었다.

“어쨌든 고맙다. 간호해줘서. 이런 거 너무 오랜만이네.”

“저한테는 아픈 모습 보여주셔도 괜찮습니다. 정말로 상관없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꼭 말씀해 주세요.”

단테는 손을 들어 라파엘의 머리가 있을 곳을 쓰다듬었다. 어둠 속에서도 손끝에 닿은 밝은 색깔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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