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26)

1-6.

단테 베일리의 섹스 취향은 담백한 편이었다.

체력이 다할 때까지 격하게 구르는 건 평소 훈련을 받으며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니 식사 후 분위기가 조성된다면 서로 기분 좋게 잠들 정도의 하룻밤. 이게 그가 선호하는 섹스 패턴이었다.

또한 격하거나 무리가 가는 체위도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이편이 뒤처리가 깔끔하며, 또 상호 간 다음 날 일과에 지장을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한창 혈기 왕성한 20대 때도 이딴 짓은 해본 적이 없었다.

제도에 폭우가 내렸던 날 오후 즈음 체크인,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최소 세 번은 넘어갔던 섹스, 늦은 시간에 룸서비스로 식사를 때우다 다시 라파엘의 눈에 불이 붙어 테이블을 짚고 삽입, 벽으로 밀려나 또 박힌 뒤 다시 침대로 돌아와 몸을 섞다 아침이 밝은 것을 보고 기절.

짧게 정신을 잃고 일어났을 땐 “이 미친놈….” 소리가 절로 나왔다.

뭐? 안 아프고, 다정하고, 사랑한다 말하며 하는 섹스? 고백을 성공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이런데, 사귀는 사이가 됐다면 어떤 정력을 발휘했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오전의 햇살이 내리쬐는 침대 위에서 감각이 전부 깨어난 단테는 또 한 차례 신음해야 했다.

등 뒤에서 나온 라파엘의 팔이 허리에 감겨 있었고, 두 몸은 깊이 밀착해 있었으며, 단테의 안에는 여전히 라파엘의 성기가 들어 있었다. 담백한 섹스 취향을 가졌다 주장하는 단테는 또 한 번의 기상천외한 상황에 이마를 짚었다.

어제 그렇게 쏟아내고도 아침을 맞아 새롭게 발기한 성기가 내벽을 눌렀다. 성기를 빼내려 움직인 행동은 오히려 잠든 라파엘을 자극했고, 라파엘이 눈을 떴다. 두 사람의 침대는 또 한 번 울렸다.

그리고 단테는 그다음 블랙아웃에서 오랜만에 해피 같은 강아지 귀와 꼬리를 단 라파엘이 덤비는 꿈을 꿨다. 오늘따라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치댐이 심했다.

깨어난 뒤 꿈의 원인을 알았다. 알몸의 라파엘이 단테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단테는 입을 맞춰오는 라파엘의 목을 끌어안았다.

어깨와 허리의 욱신거리는 부분을 어떤 손길이 부드럽게 눌러 풀어주었다. 한참 단테의 몸을 만져준 손은 이제 머리카락을 넘기고 있었다.

단테는 열여섯 즈음, 체육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청소년 학군단에 들며 기숙사에서 지냈다. 그렇게 홀로 살게 된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감촉이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은 머리카락을 넘겨 이마를 드러나게 하고, 이마 선을 따라 머리카락을 옆으로 쓸어내렸다. 손길이 기분 좋아서라는 이유뿐만이 아니더라도, 잠이 깼지만 손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었다.

하아……. 길게 숨을 내쉬며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머리를 만지던 손이 뺨을 쓰다듬었다.

“일어나셨습니까.”

눈을 뜬 정면보다 조금 위에 라파엘이 보였다. 그는 단테가 아팠던 날 간호를 해주었을 때처럼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어느새 클리닝 서비스를 맡긴 건지, 비 오는 날 입었던 옷의 소매에선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물……, 좀.”

“예.”

라파엘이 바로 물을 뜨러 갔다. 그 사이 단테는 침대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맨몸인 줄 알았던 몸에는 편한 티셔츠와 바지가 입혀져 있었다. 슬쩍 허리끈을 들춰보니 속옷도 꼼꼼히 들어 있었다.

“팀장님 깨어나시기 전에 잠시 나가서 사 왔습니다.”

기억이 없는 낯선 옷들에 대한 의문은 바로 해결이 되었다.

물로 입 안을 적시자 까끌하던 목소리가 돌아왔다. 잠기운이 가시며 묻혀 있던 둔통도 깨어났다. 온몸이 아프지만 개중에서도 어깨와 허리, 골반, 그리고 말 못 할 곳이 집중적으로 지끈거렸다.

창밖 하늘은 언제 폭우가 왔느냐는 듯 새파랬고, 솜 조각을 떼어놓은 것 같은 구름이 드문드문 떠다녔다. 청청한 하늘이 눈부심 없이 보인다는 건 오전 시간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오늘 며칠이야.”

“21일입니다.”

단테와 라파엘의 약속은 19일이었다. 단테는 눈가를 짚었다.

“2박 3일……, 하아. 전지훈련도 아니고.”

“…….”

술에 취한 것보다 더 흐린 3일이었다. 라파엘 헤인스워즈가 완벽하다지만 정력까지 완벽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단테의 앞에 선 라파엘은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본인도 양심이 있다면 알 것이다. 아무리 단테가 허락했다지만 몹시 과했다는 걸.

“이리 와 봐.”

단테가 손짓하는 방향으로 라파엘이 냉큼 다가왔다. 단테가 커다란 강아지 어르듯 라파엘을 쓰다듬었다.

“원 없이 했어?”

“예.”

머리를 만져주며 부드럽게 묻자 라파엘이 긴장을 누그러뜨리고 배시시 웃었다. 단테는 그를 보며 마주 미소 지었다. 하지만 얼굴 한쪽에 드리운 검은 기운까지 지우진 못했다.

자신은 눈에 보이는 손등만으로도 온몸이 퍼석해진 게 느껴지는데, 라파엘은 혼자 보양식이라도 챙겨 먹은 것처럼 얼굴이 번쩍번쩍했다.

“헤인스워즈 소위.”

“……예, 팀장님.”

“엎드려.”

“옙.”

라파엘이 두 팔을 바닥에 짚고 엎드려 뻗쳤다. ‘으…….’ 그제야 단테는 부러질 듯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렸다.

단테는 아픈 부위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라파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눈을 빛내는 라파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러고 있으니 진짜 커다란 강아지 같다.

“팀장니임.”

장난을 치는 줄 알고 라파엘이 헤헤 웃었다. 그래, 몹시 즐거운 2박 3일을 보냈으니 웃음이 나올 만했다.

무엇보다 수습이라지만 반년을 SAG에서 보냈는데, 플레이트 캐리어도 안 찬 맨몸으로 엎드리는 건 몸에 기별도 안 갈 것이다.

“헤인스워즈.”

“예.”

지난 새벽에 한쪽 다리만 그의 어깨에 걸치고 허리를 뒤튼 채 박혔던가. 그에 비하면 라파엘의 자세는 몹시 편안해 보였다.

배시시 웃는 라파엘을 마주 보며 단테도 미소를 지었다.

“아…….”

반면 라파엘의 미소는 조금 어색해졌다.

라파엘은 단테의 시원시원하고 털털한 미소를 몹시 좋아했다. 한편으로, 반년간의 경험상 그를 지휘했던 중대장의 미소도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분명히 웃고 있지만 어쩐지 무섭고, 위압감이 느껴지는… 바로 이 표정이었다.

“오른손 뒷짐.”

어, 어……. 라파엘이 손을 떼어 등 위에 올려놓았다. 강아지처럼 눈을 끔뻑이며 마지막으로 필사적으로 ‘장난이시죠?’ 하는 신호를 보냈다. 단테가 다정하게 대답했다.

“왼손도 뒤로 보내고 머리 박을래?”

“아닙니다.”

라파엘은 얌전히 눈을 깔았다.

“씻고 나올 동안 자세 유지.”

“예…….”

단테는 허리며 골반을 짚으며 욕실로 향했다. 20분 정도의 소소한 복수는 받아 마땅했다.

물소리가 멎고 욕실 문이 열리자마자 라파엘은 일어나 단테에게 다가왔다. 역시나 20분간의 기합은 별 기별도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이렇게 지나치게 쌩쌩하니 또 괘씸함이 느껴졌다.

라파엘은 새 수건을 꺼내 와 덜 마른 단테의 머리를 꼼꼼하게 닦았다. 그 과정에서 머리카락에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그래, 죄책감에 울먹이는 모습보다야 이게 낫지만…….

“왜 이렇게 치대.”

“저 귀엽다고 하신 거 기억 안 나십니까? 해피라는 별명으로도 부르시고, 막 여기저기 만져주시고…….”

“알겠어. 이리 와 봐.”

단테가 라파엘의 복슬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뭘 먹고 이렇게 귀엽게 구냐.”

“제가 귀엽습니까?”

“자만할 정도는 아니고.”

라파엘은 사랑스럽고 매력적이다. 그의 감정을 어리게만 봤던 단테도 맥을 못 출 만큼.

“……그래서, 이젠 안 미안해?”

“팀장님께서도 기분 좋으셨던 것 맞지요?”

“응.”

“그러면… 이번엔 정말로 합의하에 한 섹스니 안 미안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단테 자신에겐 더욱 어울리지 않았다.

“너랑 처음 했던 섹스도 이번과 비슷했어. 그러니 강간이라는 기억이랑 부채감도 잊어.”

“……예, 그러겠습니다.”

이제 됐다. 단테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허리를 기댔다. 통증이 며칠 가긴 하겠다만, 라파엘이 한 달 가까이 품어온 죄책감에 비하면 괜찮은 대가였다.

병간호를 받던 동안 말랑해졌던 마음은 원래 단테 베일리의 모습대로 돌아왔다. 꿈꾸는 것처럼 웃는 라파엘을 보며 단테는 현실을 직시했다. 휴가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헤인스워즈, 내일 시간 있냐?”

라파엘이 둥그런 눈으로 단테를 돌아봤다.

“같이 가줬으면 하는 곳이 있어서.”

“있습니다. 많습니다.”

라파엘은 냉큼 대답했다. 단테가 지금 당장 장기 매매가 성행하는 으슥한 골목으로 출발하자고 해도 힘차게 고개를 끄덕일 기세였다.

우선 냉큼 대답한 뒤에야 라파엘은 어디에 가는 거냐고 물어봤다.

“시골 으슥한 동네에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사는 곳. 그래서 혼자 가기가 무섭단 말이지.”

“거기가 어딥니까……?”

“내 연봉의 8할을 상납해온 곳.”

“예?”

단테가 라파엘의 어깨를 두드렸다.

“편하게 입고 와라. 아주 무서운 데를 손봐주러 가는 거니까.”

* * *

단테와 라파엘은 택시에 올랐다. 휴가 기간에 입었던 옷 중 가장 기동성이 뛰어난 차림으로 나타난 라파엘은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경계했다.

택시는 도심을 빠져나가 한참을 달렸다. 그러다 이윽고 산 옆으로 난 길에 올라탔다. 단테 쪽에 난 창으로는 산이 보이지만, 라파엘 쪽의 창으로는 막 푸릇하게 싹이 올라오는 긴 들판이 보였다.

하늘은 시원한 푸른색, 지평선에서부터 펼쳐진 땅은 따뜻한 녹색이었다. 뚫어져라 창밖을 보며 무서운 표정으로 보초를 보던 라파엘은 바깥 풍경에 완전히 눈을 빼앗겼다.

좁은 시골길 옆으론 제도에서는 보기 힘든 아담한 집들이 이어졌다. 아주 오랜 시간 그곳에 있어 주변의 자연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마을은 풍경화를 보듯 평화로웠다.

이윽고 택시는 두 사람을 낡은 담장 앞에 내려주었다. 단테와 라파엘의 허리보다 낮은 담장은 세월의 흔적뿐만 아니라 알아볼 수 없는 낙서로 꼬질꼬질했다. 삐뚤삐뚤 글씨도 적혀 있는데, 한눈에 바로 풀기는 어려운 암호였다.

단테는 미리 트렁크에 실어 둔 커다란 짐을 꺼냈다. 무서운 경고를 들은 라파엘도 나름 만반의 준비를 해왔는데, 단테가 가져온 짐은 웬만한 군장 못지않은 크기였다.

“팀장님, 여기… 어떤 조직의 은신처라도 되는 겁니까?”

로프와 총칼 한 자루씩이면 진입하지 못할 곳이 없는 단테가 저 정도 장비를 꾸려 올 곳이라면 라파엘로선 더욱 만만히 볼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단테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 은신처. 개념은 비슷해.”

“예? 그럼 저희 단둘이서만 올 곳이 아니지 않습…….”

라파엘이 위기를 느끼기 무섭게, 두 사람의 등장을 눈치챈 정찰병들이 안쪽에서 달려 나왔다.

단테와 라파엘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몹시 가벼운 뜀박질로 가까워진 무리는 순식간에 단테에게 육탄공격을 가했다.

“단테 왔어!”

“우와아, 단테!”

일고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 둘이 단테의 허리에 답삭 매달렸다. 이어 안쪽에서 그 아이들보다 조금 큰 아이들이 나왔다. 단테는 가방을 내려놓고 아이들을 양팔 가득 받아안았다.

“이게 누구야. 왜 이렇게 많이 컸어. 다음번에 오면 못 알아보겠는데.”

“단테는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단테, 이거 뭐야? 열어봐도 돼?”

“안 돼. 너희끼리 열어보고 또 싸우려고. 이리 줘.”

“이제 안 싸워!”

단테는 우르르 몰려나온 아이들에게 둘러싸였다. 라파엘은 순식간에 북적북적해진 광경을 황당하게 바라봤다.

무시무시한 곳이라고… 손을 봐주러 간다고 하셨는데…….

그 때였다.

“단테.”

이번에 단테를 부른 건 아이들이 아니라 연륜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단테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굽히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단테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지어졌다.

라파엘은 단테의 이런 미소를 처음 보았다.

그가 보아온 단테는 늘 상급자이자, 책임자였다. 열두 명의 생명을 짊어진 채 가장 효율적인 방향으로 작전을 이끌어가는 리더. 팀장 단테 베일리의 여유로운 미소는 팀의 단단한 지주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지금, 낡은 담 안에서 나타난 누군가의 앞에 선 단테는 입고 있던 무형의 무장을 내려놓은 듯했다.

단테는 아이들을 매달고 나이 든 수녀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단테의 얼굴에 그리움이 가득 묻어났다. 그가 허리를 숙여 품 안에 다 들어올 정도로 작은 여인을 끌어안았다. 그러나 어쩐지 단테가 수녀에게 안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서 오렴.”

“다녀왔습니다.”

짧은 포옹이 끝나고, 그녀가 라파엘을 발견했다.

“단테, 이분은?”

“후배입니다. 헤인스워즈, 인사드려.”

“아, 안녕하십니까. 제국 특수전사령부 제1특수무장……, 단테 대위님의 부하 라파엘 헤인스워즈입니다.”

관등성명을 칼같이 대려던 라파엘도 이건 아니라 느꼈는지 쉬운 설명으로 정정했다.

“대천사의 이름을 가지고 계시군요. 환영합니다. 주신의 딸 요안나입니다.”

그녀가 따뜻한 미소로 라파엘을 맞이했다.

다만 라파엘의 자기소개가 요안나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알아들을 만큼 쉬웠다는 게 문제였다.

“부하래!”

“단테 부하야?”

“단테가 ‘가서 싸워라!’ 하면 싸우는 거야?”

“그럼 숙제도 해줘?”

“대신 피망도 먹어줘?”

“어……?”

당황한 라파엘의 어깨에 단테의 손이 턱 올라왔다.

“그럼. 얘가 내 피망 대신 다 먹어서 이렇게 큰 거야.”

“우와아!”

“단테 나쁘다! 아니 바보야! 편식하니까 부하보다 더 작지!”

단테가 씩 웃으며 어린아이의 북슬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맞아. 편식하면 부하보다 작아져. 그래서 내가 이렇게 작은 거야. 그러니 너희들은 부하보다 작아지지 않게 골고루 먹어라.”

사실 단테는 라파엘보다 작다 뿐이지 객관적으로 결코 부족한 신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키 차이를 보며 편식하지 않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황당한 교육방식에 눈을 끔뻑이는 라파엘의 소매가 아래로 톡톡 당겨졌다.

“단테가 지구 정복해오라고 했어?”

“티, 팀장님은 그런 부당한 명령 안 내리셔.”

수백 년간 이어진 황가가 지엄해, 헤인스워즈의 힘까지 전부 동원한다고 해도 쿠데타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야. 단테는 오랫동안 못 올 때마다 지구 정복하러 간다고 해.”

“……팀장님이? 정말?”

“지구 평화 지키러 간댔지, 내가 언제 정복하러 간다고 했어.”

“평화였나?”

“그랬나?”

“그러면 지구 평화 지켰어?”

아이들은 금세 새로운 화제를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단테는 익숙한 듯 새 화제에 맞춰 대답해주었다.

“응, 지구 평화 지키고, 싸우는 사람들 말리고 왔어.”

단테가 자신의 왼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린 아이에게 설명했다. 아이들 사이에 있는 단테의 모습은 사뭇 자연스러웠다. 그가 아이를 부드럽게 내려놓으며 라파엘에게 고갯짓했다.

“들어가자.”

“아……, 예.”

라파엘은 멍하니 단테의 뒤를 따랐다. 단테와 수녀의 주변에는 아이들이 두세 명씩 붙어 있고, 라파엘의 옆엔 낯을 덜 가리는 아이가 손을 당기며 무어라 쫑알쫑알 말을 걸었다.

담장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손으로 만든 그네, 낡은 골대 뒤로 자그마한 성당이 보였다. 택시를 타고 지나친 마을처럼 작고 아담한 건물이었다.

“참. 어머니, 이번에 어디 손 볼 곳이 있다 하셨죠?”

손 볼 곳. 그 단어가 유난히 라파엘의 귀에 꽂혔다.

“맞다……. 쉬다 가라 하고 싶은데 그게 있었지. 애들 교실 쪽에 천장이 삐걱거리던데, 좀 봐줄 수 있니?”

“그러려고 온 거예요. 어머니.”

라파엘이 입을 떡 벌렸다. 그, 손을 봐준다고 했던 게……!

단테는 라파엘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팀에 있을 때 이런 식으로 수십 번을 속아놓고도 라파엘은 또 속았다.

마침 아이들이 놀이를 하다 나온 것 같은 공이 보였다. 발끝으로 공을 튕긴 단테가 라파엘에게 공을 차 보냈다. 라파엘은 반사적으로 공을 받았다.

“자, 가서 놀아줘라 부하야!”

“우와아아!”

“티, 팀장님?”

라파엘은 단테를 보며 눈을 끔뻑였다. 그러나 씩씩한 아이들은 이미 신이 나서 라파엘의 팔다리를 끌었다. 단테가 ‘저 형이 나보다 축구 잘해.’ 하자 머뭇거리던 아이들도 눈을 빛냈다.

라파엘은 아이들의 손에 끌려가다시피 하며 운동장으로 나갔다.

복작이던 인원을 내보내고 난 뒤, 단테는 조금 더 친근하게 요안나의 곁에 붙어 걸었다.

“다 그대로네요.”

성당 안 풍경은 단테가 까치발을 세워도 창틀에 손이 닿지 않을 때부터 여전했다. 이제는 창문 맨 위 턱에 무리 없이 손이 닿았다. 그러는 사이 한없이 커다랗게만 보이던 어머니도 점점 작아졌다.

“큰애들은요? 아직 학교에 있을 시간인가?”

“에이바와 조이, 메이슨은 학교에 갔고, 제이콥, 노아, 릴리, 해나, 재커리는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지. 밖에 나가 지내는 아이들도 내일이면 돌아오겠구나. 자고 가니?”

“후배랑 같이 와서 오늘은 돌아가야 될 것 같아요. 내일 다시 와서 볼게요.”

단테는 겉옷을 벗어 팔에 걸치며 창밖을 보았다. 팔이며 다리, 허리에 주렁주렁 아이들을 매달고 쩔쩔매는 라파엘의 모습이 보였다. 단테의 입가에 다시 웃음이 올라왔다.

그는 창고에서 익숙하게 공구 상자를 꺼내 들었다. 교실로 들어가기 전, 단테는 주머니에서 반으로 접힌 흰 봉투를 부스럭 꺼냈다.

“어머니, 받으세요.”

“응?”

내용물을 어렵지 않게 추측한 수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단테는 그녀의 주름진 손을 억지로 끌었다.

“대체 매번 이렇게 많이 주고 나면 넌 뭘 하고. 이제 부하들도 제법 있다며. 너도 돈 써야지.”

“이번에 파병 다녀온 특별수당이 나와서 그래요.”

“성당 후원 계좌에도 돈 많이 넣었다는 얘기 다 들었어. 이건 가져가서…….”

“거기 부친 건 또 애들 물건만 사실 거잖아요. 어머니 옷 사 입고, 몸에 좋은 거 드세요. 저는 나라에서 관사 나와, 군복 나와, 매 끼니도 훌륭하게 잘 나오고 있어요.”

단테 역시 고집을 굽힐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예전부터 자신의 생떼를 무척 잘 받아주는 다정다감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주님 가르침 어기고 총 쏘다 왔으니 회개한다고 생각하세요.”

단테는 억지로 그녀의 손바닥 안에 봉투를 내려놓고 손가락을 접게 했다. 그러곤 공구를 들고 교실 쪽으로 성큼성큼 가버렸다.

“단테!”

수리를 반쯤 마치고 부엌일을 돕고 있던 단테의 등은 또다시 습격을 받았다. 우다다 달려온 아이가 허리를 덥석 안으며 등에 얼굴을 부딪쳤다.

“얘들아, 조심해야지.”

원장 수녀를 닮아 성격이 푸근한 조리사가 말했다. 단테는 들고 있던 과도를 돌려 칼날을 아이 쪽에서 멀리 떨어뜨렸다.

“왜 불러?”

“단테 있잖아, 진짜 막 총을 이렇게 빵빵빵, 쾅! 쏴서 나쁜 놈들한테 잡혀 있는 사람들을 구해줬어?”

“막 무전기에 대고 돌입준비! 사격준비! 전투준비! 했어?”

아이들이 팔을 벌리며 펄쩍펄쩍 뛰었다. 출처가 어디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어어, 그거 군사기밀인데. 누가 말해줬어?”

“군사기밀이 뭐야?”

“비밀 작전이라서 남한테 말한 사람은 무서운 경찰이 우르르 찾아와서 잡아가.”

“지, 진짜?”

“당연하지. 우리 팀은 완전 비밀 작전만 수행하는 곳이야. 지구 평화를 지키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데.”

아이는 똑같이 놀란 표정의 친구들을 한 번, 그리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들의 뒤쪽을 보았다.

“누가 말했냐니까?”

“아니야! 아무도 말 안 했어!”

“흐음…….”

단테가 주방 입구를 보았다. 아이들의 뒤엔 라파엘이 서 있었다.

“라파엘 헤인스워즈가 말했나?”

“아니야!”

“아, 아니야! 절대 아니야!”

겨우 라파엘의 허리만 한 아이들이 그의 앞에서 열심히 손을 저었다.

단테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도 도로 등을 돌리자 아이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라파엘을 보며 이제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파엘은 아이들에게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식사는 가짓수가 소박하지만 양은 풍족했다. 음식을 앞에 두고 요안나 수녀의 기도를 따라 모두 눈을 감았다. 단테는 아이들과 조금 친해졌다고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라파엘을 보며 몰래 숨긴 미소를 지었다.

단테가 오지 못한 사이 들어왔다는 막내 아기가 뒤뚱뒤뚱 걸어와 들고 온 동화책을 라파엘에게 내밀었다. 라파엘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리, 이거 아까 열 번도 더 읽어줬잖아.”

“또, 또오. 이거조.”

아기의 언니의, 오빠의, 누나들까지도 본 아기 돼지 삼 형제 그림책은 몹시 낯익고 또 낡았다. 단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인스워즈. 내가 볼 테니 너는 식사…….”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라파엘은 아이를 번쩍 안아 무릎에 앉히고는 책을 읽어주었다. 식탁 위로 낮은 목소리가 조곤조곤 울렸지만 우당탕 시끄러운 환경이 익숙한 아이들은 식사에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다.

라파엘의 입술 끝에서 퍼지는 목소리는 무릎 위 아기와, 그리고 단테에게만 전해졌다.

식사를 마치고 단테는 어린아이들의 양치를 도왔다. 이를 닦기 싫어 도망 다니는 아이들을 능숙하게 옆구리에 끼고 무시무시한 충치와 치과 이야기를 들어가며 양치를 시켰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라파엘은 다섯 살 즈음 되는 아이가 단테의 눈을 피해 슬그머니 양치 줄에서 나오는 걸 목격했다.

“도망가면 안 돼.”

“아아아!”

라파엘은 도망가던 아이를 안아 들어 손수 단테에게 데려다주었다. 조금이나마 늦게 양치를 할 수 있었던 아이의 순서는 앞으로 대폭 당겨졌다.

아이를 건네받으며 손이 스치고, 동시에 시선이 마주쳤다. 단테가 먼저 미소를 지었고 라파엘도 그를 따라 눈을 접었다.

“고마워.”

부하인 라파엘 헤인스워즈 소위가 평소 그에게서 받던 인사는 ‘고맙다’라는 딱딱한 말이었다.

이제는 작은 한마디에도 심장은 자존심도 없이 뛰었다. 양치가 끝날 때까지 라파엘은 욕실 앞에 미동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애들이랑 인사하면서 5분만 있다가 나와라.”

어느덧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단테는 라파엘의 등을 두드리고 먼저 밖으로 나갔다. 5분 기다렸다 나오라는 명령을, 라파엘은 1분만 있다가 나오는 방식으로 반만 지켰다.

이 장소에서 쫄랑쫄랑 따라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 옛 친구 해피가 떠올랐다.

“천천히 나오라니까.”

단테의 입술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막 불을 붙인 담배 끝이 초저녁의 어스름 속 노을처럼 붉었다.

“어머니껜 이르지 마라.”

라파엘은 단테가 흡연자라는 걸 당연히 알지만, 오늘은 한 번도 입에 대지 않은 것도 알았다.

“저쪽으로 가.”

단테가 휙휙 손짓해도 라파엘은 고개를 젓고는 옆에 서 있었다. 단테의 시선은 연기가 퍼져나가는 허공에 가 있었고, 라파엘은 그런 단테를 보았다.

“이미 알았겠지만 여기가 내가 자란 곳이야. 단테는 베이비박스 안에 나와 함께 놓여 있던 쪽지에 적힌 이름, 베일리는 어머니가 존경하는 성직자에게서 따온 성.”

“그렇습니까.”

노을이 단테가 기댄 낡은 담장을 붉게 물들였다. 일부러 멀리 나와 피우는 것이라도 신경이 쓰였는지, 단테는 반도 피우지 않은 담배를 껐다.

“몰랐지?”

“몰랐습니다.”

“너도, 너희 가족도 모두 몰랐겠지.”

라파엘의 눈가가 움찔 흔들렸다.

“혹시 제가 이곳을 보고 팀장님의 출신을 알게 되면, 팀장님에 대한 마음을 돌릴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라파엘은 조금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단테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가 고아라는 이유로 날 다르게 대할 사람이었다면 여기 데려오지도 않았어.”

“…….”

“하지만 이건 어떨까.”

단테는 라파엘의 앞에 마주 보고 섰다. 진중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앞에서 그는 노을과 어울리는 미소를 띠었다.

“나는 이곳에서 다정한 어머니의 손에 자랐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워. 그래서 버는 돈의 8할을 이곳에 후원하고, 휴가 중 많은 시간을 쓰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여기 있는 아이 몇의 후견인이 될 거야. 내게 있어 굉장히 보람 있고 기쁜 일이 되겠지. 하지만 그런 삶을 사는 내가, 다른 누군가의 좋은 연인이 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단테가 연애에 있어 아는 사람보다 낯선 사람을, 긴 만남보다 짧은 만남을 선호하는 이유였다.

그는 사람 간의 만남을 싫어하진 않지만, 타인을 깊이 들이기엔 이미 스스로 짊어진 이들이 있었다. 연인이 생기더라도 마음 중 일부는 이곳의 몫이었다.

그렇기에 듬뿍 사랑받고 싶어 하는 이 귀여운 후배의 감정은 너무나 아까운 것이었다. 단테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이 마음을 가졌다면 예쁜 얼굴이 흐려질 일은 없을 텐데.

“너는 내게 너무 과분한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점점 네게 흔들려. 그래서 더 여기까지만 했으면 좋겠다.”

“…….”

“시간이 맞으면 만나 신나게 놀고, 몸이 동할 때면 섹스 정도는 나눠도 좋겠지. 그렇지만 나는 네가 주는 마음 크기만큼은 평생이 가도 못 줄 거야. 네가 바라는 대로 사귀게 된다면, 지금 이상으로 서운한 일이 많을 텐데.”

단테가 발아래 길어진 그림자를 보며 쓰게 웃었다.

“너는 겨우 그런 취급을 받을 사람이 아니잖아.”

“…….”

“나도 좋은 후배를 그렇게 잃고 싶지 않아.”

미안해. 낮은 목소리로 사과가 흘러나왔다.

“……제게 이 말씀을 하려 여기 데려오신 거였습니까.”

라파엘의 감정은 단테가 보기에도 이미 주체 못 할 만큼 커다래졌다. 이제는 단테도 단순히 안 된다는 말뿐만 아니라 솔직하게 이유를 밝혀야 할 때였다. 그렇기에 그의 삶에서 언제까지고 1순위일 수밖에 없는 장소를 보여주었다.

라파엘이 무어라 말하려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금빛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단테의 얼굴에 머물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단테는 라파엘을 잠시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다. 옆을 스쳐 지나가며 라파엘의 어깨를 무심히 토닥였다. 그사이 붉은 하늘 끝에 푸르스름한 밤이 섞여들었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택시를 부르려 휴대폰을 꺼내려 할 때였다. 라파엘이 몸을 돌려 단테에게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단테의 손목을 잡아 멀어지는 걸음을 멈추게 했다.

“단테.”

노을이 어린 금빛 속눈썹이 짧게 진동했다.

“제게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을, 아니.”

라파엘의 말이 멈추었다. 조금 전 대화를 나눌 때보다 두 사람의 거리가 몹시 가까웠다.

“……하…….”

바로 말을 잇지 못한 건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이, 지금 내보내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였다.

라파엘은 그 말들을 삼키는 대신 손을 꾹 말아 쥐었다.

“전장에서 팀장님의 모든 작전은 성공했지만…….”

라파엘의 입가에 아주 옅은, 그래서 더 쓴 미소가 떠올랐다.

“이번 작전만큼은 크게 실패하셨습니다.”

“…….”

단테는 곤란한 일을 당하면 웃는 사람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여유를 가장해 일렁이는 감정을 방어하는 건 그가 가장 잘하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그는 웃으려 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라파엘을 마주 보며 핀잔주듯 무심히…….

“팀장님은 정말로…… 이번엔 완전히 실패하셨습니다.”

바람이 두 뼘가량 떨어진 거리를 스쳤다.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하지 못한 라파엘은 미소 아래로 일렁임을 밀어 넣지 못했다.

노을이 담긴 연녹색 눈동자는 주홍빛과 분홍빛이 오묘히 뒤섞인 색이 되었다. ‘열렬한 구애’라는 꽃말을 가졌다던 화사한 꽃과 같은 색이었다.

* * *

다음 날 단테는 오전 시간을 체육관에서 보냈다. 혹시나 해서 이리저리 둘러본 곳에 그가 생각한 ‘혹시’는 없었다. 평소보다 무거운 마음으로 운동을 마친 뒤 몸을 씻고 홀로 성당으로 향했다.

“단테다!”

“단테!”

“단테도 왔다!”

단테‘도’? 누가 또 왔냐고 물으려던 찰나, 마당에서 아이들을 매단 화사한 금발의 남자를 발견했다.

“……너 여기서 뭐 하냐?”

“오셨습니까.”

너무나 태연한 대답에 단테는 황당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러나 차마 아이들 앞에서 ‘네가 왜 여길 또 와?’ 같은 질문을 할 수는 없었다.

단테는 라파엘을 어이없이 바라보다 많은 질문을 압축한 한숨만 짧게 내쉬었다.

“일단 이따가 보자.”

“교실이라면 제가 이어서 마무리해 두었습니다.”

성당 쪽으로 향하던 단테의 걸음이 멈췄다. 라파엘을 돌아본 단테의 눈썹은 약간 구부러져 있었다.

“팀장님께서 제게 가르쳐주신 보수 방식이니까요.”

“……맞아. 그랬지. 그런데 이건 내가 할 일…….”

“단테 왜 그래? 부하랑 싸워?”

단테가 왔다고 신이 나서 달려온 아이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목소리를 키우지 않아도 두 사람의 분위기가 다르단 걸 아이들은 기민하게 알아챘다.

“……싸우긴 누가 싸워. 누가 먼저 오나 내기했는데 져서 그래. 부하 주제에 나를 이기다니.”

“뭐야, 단테가 늦게 일어난 거잖아.”

“그러니까. 으윽, 분하다.”

단테는 아이들 앞에서는 금세 분위기를 갈무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당에서 점심 식사하러 들어오라는 부름이 들렸다. 아이들을 먼저 식당으로 보낸 뒤, 단테는 라파엘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따라와.”

이 시간이라면 아이들이 오지 않을 예배당 뒤쪽 복도에 멈춰 섰다. 단테가 라파엘을 매섭게 돌아봤다.

“라파엘 헤인스워즈. 왜 네가 여기에 있어.”

“또 보자고 약속해서 찾아왔습니다. 데이비드와 다시 축구를 하기로 했고, 스텔라가 오늘은 팀장님이 새로 사 온 장난감으로 놀아 달라고 했습니다.”

라파엘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라파엘의 성격은 단테처럼 오래 뻔뻔함을 유지할 수 있는 편이 아니었다. 단테가 굳은 표정으로 노려보자 금세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팀장님의 소중한 장소에… 가벼운 마음으로 무작정 찾아온 건 아닙니다.”

“…….”

“어제 팀장님께선 제 마음을 단념시키기 위해 여기 데려와 주셨겠지만.”

팔짱 낀 단테를 라파엘은 다시 조심스레 보았다.

“제가 어떻게 그 말을 듣고 포기합니까. 팀장님이 제게 흔들리신다고 했고, 절 거절하는 이유가 겨우… 팀장님이 저를 덜 좋아하기 때문이라면 제가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네가 왜…….”

“팀장님이 절 일개 부하로 볼 때부터 저는 팀장님을 좋아해 왔습니다. 제가 그런 데에 상처를 받을 리가 있겠습니까.”

“…….”

“저는 그런 말 듣고 팀장님 포기 못 합니다.”

이래서 작전 실패라 했던 거군. 작전지에서 단테의 말이라면 “예!”하며 꼬박꼬박 따르던 녀석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어제 팀장님께 그 이야기를 듣고, 처음으로 제가 헤인스워즈에 태어났음을 감사했습니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그런 당신이라 더 좋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요.”

라파엘의 속눈썹이 젖은 홀씨처럼 가라앉았다. 아이들의 왁왁 신난 소리가 복도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8할이든, 전액이든 원하는 곳에 쓰십시오. 제가 버는 돈도 전부요. 팀장님께서는 그러셔도 됩니다. 제가 이렇게 말했을 때… 이 말이 허풍이 아니라고 증명할 수 있는 재력을 가졌다는 사실이 감사했습니다.”

“…….”

“휴가 때마다 이곳에 오셔야 하면.”

라파엘의 귀 끝이 물들었다. 곱슬한 금발 사이로 솟은 귀가 발긋했다.

“저도 데려와 주세요.”

단테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저건 치기 어린 마음이었다. 고작 6개월간 직속 선후배로 지낸 시간은 라파엘 헤인스워즈에게 앞으로의 삶을 걸고 고백을 건넬 만큼 대단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는 살아오며 라파엘보다 더 빨리 현실이 녹록지 않음을 깨달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라파엘의 이 어린 감정은 그만두라 말려야 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어른도, 어른이기 전에 사람이었다. 단테는 자신에게 올곧게 쏟아지는 햇살 같은 애정, 사랑스러운 고백들에 몹시 동요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라파엘 헤인스워즈는 단테에게 위험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기어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눈썹을 구부린 채로 팔짱을 꼈지만, 목소리가 누그러진 걸 라파엘은 금세 눈치를 챘다. 그리고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팀장님께서 흔들리신다니, 제 행동이 완전히 소용이 없지만은 않았나 봅니다.”

“단독작전일 경우 실패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바로 발 빼야 하는 걸 모르나?”

“승산이 보이면 돌입해야 하는 건 압니다.”

“작전 중지해. 네가 할 필요가 없는 작전이야.”

“죄송합니다. 불복하겠습니다.”

“하아…….”

말장난 같은 대화였지만 핵심은 결국.

“수습 때 반만이라도 말 좀 들어, 이 자식아.”

“싫습니다.”

“…….”

누가 보아도 단테의 기분은 완전히 풀어졌다. 라파엘이 배시시 미소를 지었고, 단테는 깊은 한숨과 함께 몸을 돌렸다. 그 뒤를 라파엘이 조금 상기된 얼굴로 따라왔다.

단테의 옆에 슬그머니 서서 걷던 라파엘이 “아!” 하고 단테를 보았다.

“팀장님, 저도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아까, 일찍 와서 시스터 요안나께 여쭤봐 들은 얘기였는데…….”

이번엔 라파엘이 단테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몹시 억울한 표정이었다.

“해피가 강아지였습니까? 제, 제가 강아지 닮았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해피라고 나도 모르게 여러 번 불렀지.

어… 닮았어…. 미안……. 단테는 이것만큼은 할 말이 없었다.

떡 벌어진 어깨에 무늬 없는 흰 티셔츠, 연청색 바지를 걷어 종아리를 드러내고 빨래를 밟는 모습은 화보가 따로 없었다.

어디서 청량한 CM송이 들리는 듯했다. 유난히 맑은 하늘의 솜사탕 같은 구름과 푸른 들판 위의 흔들리는 버들잎도 전부 그를 위해 마련된 배경 같았다. 낡아빠진 나무통에 들어간 모습이 저렇게 잘나 보일 일인지 모르겠다.

라파엘이 하늘을 보며 손등으로 땀을 닦았다. 미소 지은 입술 사이로 가지런한 이가 드러났다. 이곳이 조금만 더 도심이었다면 한 손에 다 들어가지 않을 만큼 연예기획사의 명함을 받았을 만한 자태였다.

단테는 그 옆의 빨래통에서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이불을 밟으며 생각했다.

저 라파엘 헤인스워즈에게 어쩌다 이런 열렬한 구애를 받게 됐지…….

고백 전에는 늘 머뭇거리고 쭈뼛거리던 녀석이, 마음을 밀어붙이기로 결심하자마자 불도저처럼 직진해 오기 시작했다.

정찰은 신중히, 돌격은 신속히, 적이 돌아볼 틈도 주지 말고 순식간에 침투한다. 일상에서도 모범생답게 배움을 몹시 잘 실천하는 녀석이었다.

부하이자 귀여운 후배에 불과했던 라파엘은 순식간에 단테의 코앞까지 다다랐다. 고개를 돌릴 수도 없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보는 눈빛 앞에서 그는 더 이상 여유를 차리기 어려웠다.

삐약삐약 병아리 같던 녀석이. 잘생긴 데다가 몸 좋고 헌신적이지나 말든가…….

두 사람이 들어 있는 빨래통에 아이들이 신나서 뛰어들었다. 폴짝폴짝 뛰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라파엘은 싱그럽게 미소 지었다.

단테는 괜히 유치해지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틀 전, 그러니까 라파엘을 이곳에 데려오기 전날 밤, 단테는 그에게 어떻게 말을 전해야 할까 고민하며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바로 어젯밤도 마음의 불편함으로 몸을 뒤척여야 했다.

그 고민이 무색하게 라파엘은 ‘팀장님이 내게 흔들리고 계시대! 성공이다!’라며 신이 나 오늘도 냉큼 달려왔다니.

그는 빨래 더미 위에 몽글몽글 피어오른 거품을 한 움큼 쥐었다.

팍!

라파엘의 어깨에 흰 거품 덩어리가 날아와 터졌다.

“앗, 차가.”

“단테가 그랬어!”

“단테가 라파엘한테 거품 던졌어!”

라파엘이 단테를 보며 눈을 끔뻑였다.

어차피 고자질 당한 이상 몰래 던질 필요가 없었다. 단테는 이제 수류탄 좀 던져보던 어깨를 유감없이 휘둘렀다. 가슴을 조준한 거품은 라파엘이 피하는 바람에 팔꿈치에 맞았다.

“팀장님.”

“라파엘 괴롭히지 마!”

“단테 왜 그래!”

“내가 지켜줄게!”

아이들이 단테를 향해 야무지게 쥔 거품은 여기까지 날아오지 못하고 포르르 떨어졌다. 단테는 “오, 덤비겠다는 거지?”하고 거품을 계속해 던졌다.

아이들을 조준해 던지는 척한 거품은 계속해서 라파엘에게 날아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첨벙거리는 아이들보다 라파엘이 더 거품투성이가 되었다.

“티, 팀장…….”

“에잇, 에잇!”

“단테 나빠!”

빨래통 사이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왁왁 신난 아이들과 작은 전투를 하던 단테의 뺨에 턱, 하고 거품 덩어리가 날아들었다.

“허…….”

단테는 거품을 닦아내며 한쪽 입꼬리만 들어 올렸다.

이곳에는 평일 낮에 학교를 가지 않은 어린아이들만 있으며, 아이들의 팔 힘으로는 잘 뭉그러지는 거품을 이 거리까지 던지기는 어려웠다. 그러므로.

라파엘이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어쭈.”

하극상을 당한 단테 베일리 대위가 눈을 번뜩 뜨며 거품을 한가득 집었다.

“딱 서, 딱 대라.”

“저, 저는 스무 번도 넘게 맞았습니다.”

“그래서 피할 거라고?”

“아니……, 얘들아, 나, 나 좀 지켜줘.”

“헤인스워즈 소위, 상관 명령이다. 차렷.”

움츠렸던 몸을 곧게 펴며 라파엘이 어이없이 입을 벌렸다.

“수습 기간 내내 한 번도 안 쓰시던 위계를 이렇게 쓰십니까.”

“단테 라파엘 괴롭히지 마!”

“단테 나빠!”

“야, 너희 업어 키운 게 누군데 걔 편을 들어.”

“엄마가 업어 키웠어!”

“하……, 맞는 말이네. 어머니께 효도 많이 해라. 말 좀 잘 듣고.”

“에잇!”

단테의 빨래통 안으로 첨벙 뛰어든 아이가 아예 거품을 퍼서 단테의 허리에 처덕 묻혔다. 라파엘은 단테가 아이의 기습을 일부러 받아주었단 걸 알았다.

대신 단테는 흰 이를 보이며 씩 웃고는 아이의 허리를 휙 낚아챘다. 단테에게 선제공격을 한 아이는 빨래통 안에 첨벙 엉덩이부터 빠지고 말았다.

그다음은 맨몸으로 하는 백병전이었다. 조금 전보다 커다래진 아이들의 깍깍 웃음소리와 텀벙이는 물소리가 이어졌다.

* * *

결국 빨래 시간은 시끌벅적한 물놀이 시간으로 변했다.

“이불 빨래를 한 대신 새로운 빨랫거리가 늘었네.”

쫄딱 젖은 아이들의 옷을 벗기며 요안나가 미소 지었다. 그리고 라파엘은 단테의 상의와, 전에 왔던 자원봉사자가 두고 갔다는 하의를 받아 갔다.

“그나마 큰 옷인데 맞을지는 모르겠다. 그것밖에 없으니 참아.”

“예.”

우스꽝스럽고 추레한 조합이라 생각했는데, 옷걸이가 라파엘이니 모 괴팍한 디자이너의 옷을 소화해낸 모델쯤으로 보였다. 오히려 짝을 맞춘 트레이닝복 상·하의를 입은 단테가 더 후줄근한 차림 같았다.

엊그저께는 비를 쫄딱 맞더니 오늘은 온몸이 흠뻑 젖도록 물장난……. 곱게 자란 도련님이 자신을 따라다닌 뒤로 참 여러 일을 겪어본다.

심지어 둘은 빨래를 마쳐 묵직해진 이불과 옷가지들을 들고 뒷마당의 빨랫줄 아래로 가야 했다. 이 정도는 그래도 군에서 숱하게 해봤다고, 라파엘은 능숙하게 단테를 도와 이불을 펼쳐 널었다.

봄비도, 봄비가 불러왔던 추위도 어느덧 가셨다. 이제 완연한 봄이었다.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있으면 한 겹 옷으로도 춥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봄이 물씬 찾아온 3월의 끝이었다. 그만큼 한 달의 휴가도 이제 겨우 일주일 남짓한 시간만이 남았다.

“배치 나왔어?”

“아직입니다.”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나뭇가지를 뒤흔든 바람이 막 널어놓은 이불을 펄럭 흔들었다. 바람이 지나가며 이불 위에 꽃잎들을 이리저리 붙였다. 키가 큰 라파엘이 간이 사다리에 올라 꽃잎을 털어냈다.

“사수 점수는 잘 줬다. 학교 성적도 좋았으니 괜찮은 부대 소대장으로 갈 거야.”

“예.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을 안 들을 줄 알았으면 엉망으로 줄걸. 빡센 곳이나 가게.”

“그럼 아버지가 팀장님 더 좋아하셨을 겁니다. 아들 제대로 된 군인 만들어 주려 하신다고.”

“…….”

단테가 이불을 탁탁 당겨 주름을 폈다. 이제 라파엘도 퉁명스러운 농담에 쩔쩔매지만은 않았다.

“막 소위 임관해서 부대 배치받으면, 그 지역 소개팅이 그렇게 많이 들어온다더라.”

라파엘이 눈을 뾰족하게 만들고 단테를 보았다. 이미 한 번 투닥거린 적이 있는 주제였다. 장난스럽게 킥킥 웃는 단테를 야속하게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사다리에서 뛰어내렸다.

“다 거절할 겁니다. 하나도 안 나갈 겁니다. 휴일엔 팀장님 보러 와야 하니 소개팅할 시간 없습니다.”

“누가 만나 준대?”

“……흥.”

“흥? 어쭈.”

“…….”

라파엘이 모른 척 바구니에서 다른 이불을 꺼냈다. 이게 하극상이지, 하극상이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단테는 빨랫줄 위로 이불을 거는 라파엘의 옆으로 가서 팔꿈치로 허리를 툭 찔렀다.

“나 좋아하지 말란 게 아니라, 그런 것도 한가한 소대장 때나 하지 언제 또 하겠어.”

“팀장님은 제가 그랬으면 좋겠습니까?”

“응. 그래서 너 닮은 귀여운 사람 만나 ‘아, 내가 그땐 잠시 미쳤었구나.’ 했으면 좋겠어. 그럼 네 애인 앞에서 네가 나 좋아해 쫓아다녔다고 놀리게.”

“…….”

라파엘이 퍽 속상한 얼굴을 했다.

“그럴 일 없습니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소개팅, 아니, 업무 외엔 아무도 단둘이 만나지 않을 겁니다. 태어나 처음 좋아하게 된 마음 품고 소개팅 같은 거 나가고 싶지도 않습니다.”

당당한 선언과 달리 큰 어깨가 점차 아래로 쳐졌다. 몹시 시무룩한 일을 당한 강아지 귀 같았다.

“그러니까 팀장님 말고 다른 사람은 어떠냐는 말씀은 하지 말아주세요.”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주어야 할지, 아니면 아직도 정신이 안 드냐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한숨이 푹 나왔다. 단테도 이제는 할 만큼 했다. ‘네 잘난 인생을 왜 나를 쫓아다니며 쓰려 하냐’는 말을 선배답게 에둘러 좋게좋게 풀어낼 말도 더는 없었다.

지 인생 지가 꼬겠다는데 어쩌겠는가.

“……알았어. 난 너 말릴 만큼 말렸다.”

단테의 짧은 한숨과 함께, 라파엘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제 제풀에 지쳐 포기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너 나중에 왜 자기가 나이도 많고, 빽도 안 될 선배 따라다녔나 땅 치고 후회해도 소용없어.”

“절대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말하면 그거 저 아닙니다. 변장한 적군이니 쏴버리셔도 됩니다.”

단테가 피식 웃었다. 라파엘의 눈썹이 점점 위로 올라갔다.

“마음대로 해라, 마음대로.”

자신이 한 몇 마디, 그게 뭐라고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단테가 라파엘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라파엘이 얼른 고개를 가까이했다.

단테는 조금 전 그의 상처받은 표정에서 느꼈던 죄책감, 그리고 약간의 심술을 담아 머리카락을 마구 쓰다듬었다. 잘 정리되어 있던 머리가 다 헝클어지는데도 라파엘은 헤실헤실 웃었다.

“뭐가 그렇게 좋다고 웃어.”

“팀장님 계속 좋아해도 된다고 직접 허락받았잖습니까.”

“뭐? 내가 언제.”

“제 마음대로, 팀장님을 마음껏 좋아하라고 하셨잖습니까.”

“허…….”

상황을 멋대로 해석하는 능력이 이렇게나 출중할 줄은 몰랐다. 볼을 붉힌 채 긴 속눈썹을 깜빡인 라파엘이 속삭였다.

“팀장님, 좋아합니다.”

“…….”

단테는 조금 뒤에 대답을 꺼냈다.

“…그래.”

이제는 그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 * *

시끌벅적한 저녁 시간이 또 한 번 지났다. 라파엘은 전날 단테가 어머니 몰래 담배를 피우던 곳에 주차해 둔 차를 꺼내 왔다.

“팀장님,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타십시오.”

“여길 그 큰 차를 끌고 왔어?”

단테도 운전이 가능하고, 휴가 때 간혹 차를 빌리기도 하지만 이곳을 직접 운전해 온 적은 드물었다. 커다란 차가 무사히 통과할 수 없는 산길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라파엘의 차 곳곳에도 나뭇가지가 낸 상처들이 보였다. 안타까워하는 단테와 달리 주인인 라파엘은 ‘그게 왜요?’라는 눈빛을 했다. 하긴 전에도 차를 함부로 다루던 전적이 있었다.

그래…. 부하일 때나 걱정하면 되지, 육군 최고책임자와 제도 도지사를 부모로 둔 라파엘의 재력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단테는 그냥 고맙다고나 인사하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관사로 모셔드리면 되겠습니까?”

“응. 땡큐.”

“예.”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진 외길을 자동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고요한 밤이었다. 아직 풀벌레가 깨어날 시기는 아닌지 산길이 고요했다. 몇 달만 지나면 이 길을 지나는 내내 옆에서 찌르르 우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지해 중간에 있는 작은 산길을 넘고, 자동차는 이제 제도 외곽을 도는 도로에 올라탔다. 퇴근 시간이 이미 한참 지난 시간이라 도로가 한적했다.

고가도로에 올라서자 아래로 흩뿌려진 보석 같은 도시 야경이 보였다.

“예쁘네.”

조수석에 탄 이만이 볼 수 있는 귀한 광경이 차창 옆으로 펼쳐졌다.

“팀장님, 야경 좋아하십니까?”

“응. 예쁘잖아. 반짝거리고.”

“그럼, 제도까지 조금 돌아서 가겠습니다.”

창밖에 시선을 뺏긴 단테의 얼굴을 몰래 훔쳐본 라파엘이 미소 지으며 차선을 옮겼다.

라파엘은 제도까지 곧장 직진해 가는 경로 대신 고가도로를 빠져나와 강 옆의 길을 달렸다.

조수석 옆으로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그 다리를 건너는 자동차, 너른 강을 따라 이어지는 건물. 그들이 내는 불빛이 반사된 강이 펼쳐졌다. 야경 드라이브의 완벽한 정석을 보여주는 듯한 장면이었다.

단테는 창문을 조금 열었다. 밤바람이 안으로 새어 들어와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운전은 또 마냥 모범생처럼은 안 하네. 지킬 거 다 지키며 할 줄 알았는데.”

차가 없는 한적한 시간이긴 했지만, 내비게이션에 규정 속도 준수 경고 표시가 제법 떴다. 제한 속도를 넘어서진 않더라도 얌전하진 않은 운전이었다.

“혹시 불편하십니까?”

“아냐, 시원해서 좋아.”

“다행입니다. 방학 때마다 별장에서 트랙 돌던 버릇 때문에 차 없는 길에서는 운전을 좀 내키는 대로 합니다. 누나한테도 한번 뭐라 들은 적 있는데……. 조심하겠습니다.”

“……트랙?”

아마 단테가 알고 있는 그 달리기를 하는 트랙은 아닐 것이다.

뭔진 모르겠지만 별장에 자동차를 험하게 모는 습관이 들 수 있는 트랙이 있구나. 지나치게 먼 세계 얘기에 단테는 허허 웃었다. 역시 자동차가 조금 까진 걸로 걱정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강 위로 거대한 오리가 지나갔다. 정확히는, 뱃머리를 귀여운 오리 머리처럼 만들어 놓은 커다란 배였다. 강을 따라 가볍게 도는 여객선이었다. 이어 멀리 황성이 보였다. 제도가 가까워졌다는 의미였다.

강가를 길게 따라 달린 자동차는 어느새 다시 도심으로, 그리고 관사 앞에 도착했다.

“차 잘 얻어 탔다. 조심히 들어가. 참, 내일은 성당 갈 생각 없으니 몰래 찾아가지 마라.”

“예. 쉬십시오.”

라파엘은 관사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 빈 공간을 이용해서 차의 방향을 돌렸다. 단테는 배웅할 생각으로 자리에 서 있었다.

그 때, 라파엘이 운전석의 창문을 내렸다.

“팀장님, 두고 가셨습니다.”

“어?”

뭐를 떨어뜨렸나? 단테가 주머니를 더듬으며 도로 차에 다가갔다.

라파엘이 “이거….” 하면서 무언가를 꺼내는 척하더니만, 창밖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단테의 뺨에 라파엘의 입술이 쪽 닿았다.

상황을 파악한 단테가 황당하게 눈썹을 구부리고, 라파엘이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야, 너……!”

“안녕히 주무십시오. 들어가 보겠습니다!”

라파엘은 자동차를 출발시켰다.

멀어지는 차의 뒤꽁무니를 보고 있던 단테는 라파엘이 입을 맞춘 자리를 짚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치겠네 진짜…….”

* * *

단테가 막 눈을 뜰 무렵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단테의 생활 패턴을 몹시 잘 아는 사람이 분명했다. 역시나, 그의 왼팔 부팀장 해리스 중위였다.

휴가가 겨우 5일밖에 안 남은 시점이라 딱히 심각한 업무 전화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단테는 가볍게 받았다.

“응 앤지.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팀장님, 시간 있으십니까?

“오늘?”

―예.

어……, 부팀장에게 오랜만에 이런 전화를 받아봐서 단테는 다소 당황스러웠다.

무슨 고민 상담할 거리라도 있는 건가. 단테는 기억을 더듬어 오늘 급한 일정이 없음을 확인했다.

“응. 오늘 약속 없어. 무슨 일…….”

―그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

―수고하십시오.

그 말과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단테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화면을 본 지 채 1분이 지나지 않아, 다시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번엔 라파엘로부터 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팀장님, 오늘 저 댁으로 놀러 가도 됩니까?

뭐야, 이 상황은. 단테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아니, 안 되는데.”

―예? 어, 어… 시간 있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너 지금 까마득한 선배인 부팀장을 사주했냐?”

―사주라뇨. 아닙니다.

아니라 대답하는 목소리에 괘씸하게도 웃음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후, 단테는 허리에 손을 얹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휴가 때 내리 봤는데 지겹지도 않냐. 네가 내 애인도 아니고.”

―…….

라파엘이 말없이 끙끙이는 소리를 냈다.

“왜.”

―그게, 지겹다는 말에 슬퍼해야 할지, 애인이란 말에 기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애인도 아니고’라고 했…….”

―그냥 가능성을 주셨다고 생각하고 기뻐하겠습니다.

허. 단테는 소리가 나오는 곳을 황당하게 쳐다봤다. 뭐라 하면 낑낑거리기밖에 못하던 녀석이 어느 순간부턴가 능글거릴 줄도, 단테의 말을 받아칠 줄도 알게 되었다.

“아무튼, 앤지한테 줄 시간은 있어도, 너는 없어.”

―어, 어째서입니까……?

“앤지는 귀엽고, 너는 아니거든.”

단테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이어 조금 전의 데자뷰처럼 곧바로 안젤라에게 전화가 왔다.

“어, 앤지. 너는 오늘 시간…….”

―아침부터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마세요! 어우, 수고하세요.

그리고 전화가 또다시 뚝 끊겼다. 단테는 외로운 선배가 되었다.

하, 단테는 오기가 끓었다. 이런다고 라파엘 외에 만날 사람이 없는 줄 안다면 큰 오산이었다.

단테는 무려 5년간 동고동락한 전우, ODA-133의 든든한 지붕, 지휘 부사관 로건 상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사님, 휴가 잘 보내고 계십니까. 오늘 뭐 하십니까.”

수화기 너머에서 쿡쿡 숨기지 못한 웃음소리가 났다.

―팀장님.

“예?”

―후배랑 놀아 주십쇼.

“…….”

―귀여운 후배 왜 괴롭히십니까. 그럼 고생하십쇼.

또다시 전화가 끊어졌다. 단테는 눈을 끔뻑인 다음에야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외로운 선배에 이어 외로운 팀장이 되었다.

하……, 이게 그 특유의 새끼 강아지인 척을 이용해 팀원들을 녹여놓은 게 분명했다. 단테는 탁 웃음을 뱉었다.

“내가 팀원들 말고는 만날 사람이 없는 줄 아나.”

단테는 동기, 리온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오늘 뭐 하…….”

질문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리온은 이미 웃고 있었다. 설마……. 단테는 눈을 가늘게 떴다. 두 번의 경험이 만들어 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야, 단테.

“……어.”

―헤인스워즈랑 놀아. 귀엽더라.

“야, 걔가 대체 너네한테 뭐라고…….”

부하가 아닌 리온은 인사조차 없이 전화를 끊었다. 단테는 외로운 선배에서 외로운 팀장에 이어 동기에게도 버림받은 외로운 사람이 되었다.

이게 진짜……! 단테는 통화 기록에서 라파엘의 번호를 찾아 맹렬히 눌렀다.

―팀장님!

씩씩거리며 건 발신인과는 달리, 라파엘은 몹시도 활기차게 전화를 받았다. 단테가 도끼눈을 떴다.

“상관이 건 전화를 누가 그렇게 받나? 관등성명 안 대?”

―아, 소, 소위 라파엘 헤인스워즈.

“각 맞춰 손 똑바로 올려라. 나 아직 경례 안 받았다.”

―예? 아, 예……!

진짜로 자세를 잡는지 옷 스치는 소리가 났다. 이런 걸 보면 아직 순진하긴 순진한데.

“헤인스워즈 소위.”

―예, 대위님.

“소위는 내 주변 사람들을 언제 다 구워삶았나?”

―아…, 아닙니다. 제가 그랬을 리가 있겠습니까.

“웃지 마라.”

라파엘도 이미 단테가 진심으로 화내고 있지 않다는 걸 알 것이다. 실제로 단테는 이런 일로 진심으로 화를 낼 사람도 아니었다. 팀원들에게 전화해 단테와 놀고 싶다 하소연한 정도로는 뭐라 할 명분도 없었다.

한편으론 라파엘과 투닥거리자니 단테도 점점 유치한 마음이 피어올랐다. 그는 목소리에 한껏 힘을 실어 말했다.

“됐다. 우리 어머니께 가면 되거든? 너 안 만날 거야.”

―아, 시스터께는…….

“너 설마 어머니께도 뭐라 말씀드렸어?”

이번에 묻는 목소리에는 정색이 묻어 있었다. “아, 아닙니다.” 라파엘이 다급히 말했다.

―그게, 이번에 헤인스워즈 리조트가 프리시즌 가오픈을 해 아이들과 다녀오시는 게 어떠신가 여쭤보았습니다. 이건 정말로 우연입니다. 아이들이 물놀이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시스터께는 스파를…….

“…….”

―어머니께서 특별히 시댁… 아, 아니 몹시 신경 써 모시라 말씀해 두셨다고 했습니다.

즉, 어머니와 성당의 아이들은 전세를 낸 헤인스워즈 리조트에 가서 신나게 놀고 있다는 의미였다. 단테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래서.”

―저는 오늘 팀장님 댁에 놀러 가고 싶습니다!

라파엘은 오늘도 활기찼고, 단테를 향한 이유 모를, 그리고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애정이 넘쳤다.

이 어마어마할 정도로 들이 부어지는 마음은 여태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그는 살면서 단테 베일리 단 한 사람에게만 이 정도로 애정이 쏟아지는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속절없이 약하기도 했다.

마음속에는 벌써 ‘아침부터 연락을 돌려댄 정성이 갸륵하니….’ 라는 생각이 피어올랐다. 어느새 입가에 웃음이 떠올라 있고, 혀가 허락의 말을 했다.

“알았다. 이번엔 문 따지 말고 노크하고.”

―예. 팀장님!

“얼마나 걸려?”

―40분… 아, 아니, 30분이면 갑니다!

“천천히 와라. 준비도 해야 하니까.”

―예, 알겠습니다.

단테는 침대에서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적당히 집 안의 어수선한 부분들을 정돈하고 빠르게 몸을 씻고 나왔다. 그러고 나니 시간이 여유 있게 남지만은 않았다.

가까운 마트로 가서 이것저것 보이는 재료를 담아 돌아오니 거의 바로 라파엘이 도착했다.

“팀장님!”

전화로 목소리를 들을 때에도 선명히 떠오르던 미소와 함께.

“들어와.”

“예. 감사합니다.”

순해 빠진 녀석은 또 꾸벅 인사를 했다.

“점심 아직이지?”

묻는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테는 서랍에서 거의 1년 만에 보는 앞치마를 꺼내 허리에 감았다.

“거기 테이블에 앉아 있어. 뭐 만들려면 시간 좀 걸리니까.”

“직접 만들어 주십니까?”

“그럼 지하 식당으로 갈까?”

“아닙니다. 몇 시간도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기대할 수준은 아니고.”

단테는 뒤돌아 재료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요리는 작전 중 자급자족해야 하는 상황을 대비해서도 배웠지만, 예전에 성당에서 식사 준비를 도우며 손에 익은 게 컸다.

껍질 벗긴 감자를 먼저 냄비에 올리고, 다른 재료도 껍질을 벗기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잘랐다.

조리대를 향해 서 있는 동안, 등 뒤에서는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는 뜨거운 시선이 쏟아졌다. 뒤를 흘끔 보니 라파엘이 테이블에 팔을 괴고 손바닥 위에 얼굴을 꽃같이 얹어놓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눈썹이 위로 들썩이며 화사하게 웃었다.

“…….”

처음엔 외모였던 것 같다. 라파엘 헤인스워즈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하던 건. 복도에서 처음 마주한 날, 군인이라 보기엔 어려운 예쁜 얼굴을 보고 놀랐었다.

다음은 귀여워서였다. ‘팀장님, 팀장님.’ 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병아리가 졸졸 따라다니니 저절로 이것저것 가르쳐주고 싶어졌다.

그다음은 저 눈빛이었다. 단테가 간절하다는 눈빛, 그리고 단테는 이해할 수 없는 크기의 애정을 가득 담은 시선. 단테가 웃거나, 화를 내거나, 다치거나 할 때마다 표정은 변해도 저 올곧은 시선만큼은 변하질 않았다. 그게 단테로 하여금 지금처럼 다른 곳을 보고 있다가도 저절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도록 했다.

토마토를 반으로 가르는 단테의 뒤에서 의자를 밀고 일어나는 소리가 났다. 라파엘은 단테의 뒤로 다가왔다. 접촉이 없어도 한낮의 햇살이 내린 것처럼 등 뒤가 따스해졌다.

라파엘에게 시선을 빼앗기는 마지막 이유는 이것이었다. 그는 단테가 그어놓은 선을 늘 훌쩍 뛰어넘었다. 단테가 눈치챌 틈도 없이 환하게 웃으며 성큼성큼 거리를 좁히고,

“어쭈.”

이렇게 단테를 끌어안았다.

라파엘의 두 손이 단테의 허리를 감았다. 등에 라파엘의 몸이 넓게 닿았다.

“이제는 허락도 안 받고 이러네.”

멋대로 한 접촉인데도 사실 그닥 화가 나지는 않았다. 단테의 입술에서 짧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고개를 돌리자 바로 옆에 라파엘의 복슬한 밝은 금발이 보였다.

“나 칼 들었다. 총보다는 못하지만.”

SAG 내에서도 근접 전투 성적으론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위가 토마토 꼭지를 깔끔하게 도려내며 말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

“응?”

“5분 뒤 칼에 찔리더라도 한 번의 백허그를 하겠습니다.”

“헛소리하지.”

어이없는 소리에 또 전의가 쭉 사라졌다. 단테는 뻔뻔한 라파엘을 잠시 매달고 있다가, 불 앞이라 덥다며 도로 밀어냈다. 라파엘은 테이블로 쫓겨나서도 또 단테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라파엘의 시선이 거둬졌다. 이것도 빤히 바라보는 것 못지않게 신경이 쓰였다. 단테는 라파엘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라파엘은 단테 대신 한쪽에 널어놓은 빨래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특히 줄지어 널려 있는, 속옷을.

“그거 훔치면 너 여기서 살아서 못 나간다.”

“아, 안 훔칩니다. 주시면 받겠지만.”

“안 줘.”

“네…….”

“다 됐으니 와서 상 차리는 거나 도와.”

“예!”

단테가 차린 간단한 음식도 라파엘은 맛있게 먹어주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관사 지하의 체육관으로 내려갔다. 라파엘이 입술을 슬그머니 뾰족하게 내밀었다.

“아니, 저 놀러 왔는데 또 훈련을…….”

“너 SAG 전용 트레이닝 룸 쓸 수 있는 기한도 5일밖에 안 남았다.”

“…….”

“다른 부대로 가면 이만한 곳 절대 없어. 몸만들기에도 여기 시설이 제일 좋고.”

단테가 예전 어떤 장면을 떠올리곤 킥킥 웃으며 라파엘의 배를 쿡 찔렀다.

“복근 포함해서.”

“…….”

얼굴을 씰룩이며 붉힌 라파엘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옷을 갈아입고 기구들 사이로 가는 움직임이 비장했다. 단테도 가볍게 몸을 풀고 기구들 사이로 갔다.

30분 정도 라파엘을 봐주다 단테도 자신 몫의 운동을 하러 갔다.

떨어져 각기 운동을 하던 중 단테는 시선을 느꼈다. 라파엘이 단테를 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다시 몸을 숙이고 팔굽혀펴기를 했다. 그러다 또다시 이쪽을 슥 보더니, 단테가 보고 있다는 걸 알고는 속도를 높였다.

오랜만에 커다란 강아지가 몸으로 외쳤다.

‘저 잘하죠? 몸 좋죠? 잘하죠?’

라파엘 헤인스워즈. 그는 이름 그대로 천사가 날개를 퍼덕이듯 등을 오르내렸다.

길게 뻗은 뼈대 위에 조각처럼 짜여진 단단한 몸이 들썩이는 모습은 분명 매력적이었다. 저 골격은 운동으로는 만들 수 없다. 타고나야만 가능했다.

몹시 이상적인 몸이 엎드린 채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건 단테에게는 다소 괘씸한 광경이었다.

‘팀장님, 좋아, 좋습니다. 아.’

‘야, 흐읏, 너 이게, 대체, 몇 번째……!’

라파엘은 저 모습처럼 단테의 위를 덮고 쉴 새 없이 몸을 오르내렸었다. 지금 그의 모습은 몹시 길고 길었던 호텔에서의 어느 날을 떠올리게 했다.

단테의 입술이 조용히 올라갔다. 단테는 섹터로 구분된 유리문을 열고, 라파엘을 향해 다가갔다.

라파엘의 눈동자가 위로 또록 올라와 단테를 담았다. 입술이 움찔거리더니 배시시 미소가 피어났다.

아직까지는 웃음이 나오는 모양이다.

“잘하네.”

“감사합니다.”

라파엘이 더 팔에 바짝 힘을 주었다.

“아까부터 푸시업만 계속하는 걸 보니 체력이 남아도나 봐.”

라파엘이 눈을 끔뻑이며 단테를 돌아봤다. 단테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 생각해 보니, 성당에서의 일을 포함해 며칠간 유난히 좀 괘씸하게 까불긴 했다…….

“하긴 이렇게 체력이 넘치니 2박 3일을 날 잡고 안 놔줬었지. 안 그래?”

“……그, 그렇습니다.”

라파엘이 얼굴을 붉혔다. 그러고는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젊은 체력은 좋았다. 하지만 여기서 라파엘이 해야 했던 대답은 아니었다. 단테의 입가에 씩 웃음이 걸렸다.

“그냥 뒀으면 사흘은 더 할 수 있었겠어.”

낮아진 목소리는 라파엘만이 들을 수 있었다.

“그, 그, 그렇습니다.”

“그래?”

“예!”

다른 사람이라면 이즈음에서 스산함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나 붉어지기 시작한 얼굴도 갈무리 못 하는 라파엘에게는 무리한 요구였다.

“휴가 중인데 이렇게 체력이 남아서 어쩌나.”

손끝이 라파엘의 턱선을 쓸었다. 라파엘의 미소가 그대로 어색하게 굳었다.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내가 또 도와줘야 할까?”

넘실거리던 홍조가 얼굴을 완전히 뒤덮었다. 얼굴이 새빨개진 라파엘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 도와, 주시면, 저는 너무 좋습니다.”

“좋아. 그럼 도와주지.”

단테는 그대로 저벅저벅 걸어가, 라파엘의 곧게 뻗은 등 위에 털썩 앉았다. 아무리 훈련받은 단단한 몸이라도 군인인 단테의 무게가 더해지자 순간 허리가 쑥 가라앉았다.

“윽.”

“무겁나?”

“아, 아닙니다. 가볍… 깃털 같습니다.”

“이야, 대단한데.”

라파엘의 팔에 핏줄이 섰다. 등 근육이 바짝 일어났다. 사람을 등에 태우고 무거워 낑낑거리는 모습도 이렇게 색기가 느껴질 일인가. 단테의 입술에서 픽 웃음이 샜다.

“하나에 연상을, 둘에 존중하자.”

“…….”

“시작.”

라파엘이 단테의 밑에서 애정을 키운 반년간은, 마찬가지로 라파엘이 중대장 단테의 밑에서 구른 기간이기도 했다. 중대장의 목소리를 듣자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여, 연상을.”

단테가 앉아 있는 허리가 낮아졌다. 구부려진 팔이 부들부들 진동했다.

라파엘이 체질적으로 모양 잡힌 근육을 가지고 있다면, 단테는 7년간 현장을 뛴 경력으로 온몸에 필요한 근육만이 꽉 붙은 타입이었다. 근육 무게 때문에 겉으로 호리해 보여도 무게가 꽤 나갈 것이다. 버거울 텐데 라파엘은 꿋꿋이 상체를 깊이 내렸다.

“존중하자.”

떨리는 팔이 다시 펴지며 단테의 몸이 위로 올라갔다. 연상을…, 존중하자…! 그 때, 유리문 안으로 누군가 머리를 빼꼼 들이밀었다.

“팀장님 뭐 하시나 했더니 휴가 중인 후배를 괴롭히십니까.”

슬슬 몸을 풀러 나온 팀원 둘이었다. 단테가 팔짱을 끼고 웃었다.

“휴가 중에 체육관에서 중대장 눈에 띄는 바보가 여기 둘 더 있었네.”

“사랑 넘치는 장면에 감동해서 온 겁니다. 그럼 저희는 좋은 시간 방해하지 않고 가보겠습니다.”

“수고해.”

“예.”

두 사람이 황급히 문을 닫고 나갔다. 혹시나 다시 부를세라 아예 시야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 도망쳤다. 모처럼 쉬는 날 가볍게 왔다가 저 서글서글한 얼굴로 현 SAG의 기적 같은 기록을 갱신해 나가는 남자에게 붙잡히고 싶진 않았다. 좋은 팀장이라는 평가와 더불어, 짓궂은 면도 가득한 사람이라는 걸 팀원 모두가 알고 있었다.

“연상을, ……존, 중하자!”

외진 자리에는 다시 둘만이 남았다. 이쪽을 향하는 시선도 보이지 않았다.

단테는 슬그머니 다리를 옮겨 우직하게 오르내리는 등에 나란히 누웠다. 등 뒤에 운동으로 몸에 고인 열기가 느껴졌다.

“팀장님.”

무게가 분산되어 버티기 쉬울 텐데 오히려 라파엘의 귓가는 더 붉어졌다.

“왜.”

단테는 나른하게 대답했다. 라파엘의 심장 박동이 단테의 등을 두드렸다. 젖은 금빛 머리카락이 목덜미와 뺨을 간지럽혔다.

“저 팀장님이 부족하다 생각하시는 건 전부 고칠 자신 있습니다.”

“훌륭한 자세야. 몸을 숙일 때 왼 어깨가 조금 먼저 내려가니 고쳐.”

“아, 알겠습니다.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란 거 아시잖습니까.”

“고치겠다기에 고칠 점을 알려준 건데, 다른 의미를 내가 어떻게 아냐.”

“…….”

단테는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딱딱하고, 불편하지만 뜨끈한 침대 위에서 한 차례 더 딴청을 피웠다. 능청맞게 구는 건 단테가 라파엘보다 몇 수 위였다.

라파엘의 몸이 다시 말없이 묵묵히 오르내렸다. 곧 단테가 라파엘을 누르던 몸을 일으켰다.

“팀장님.”

“엇.”

발을 디디던 차에 라파엘이 몸을 틀어 균형이 무너졌다. 단테의 엉덩이가 바닥에 부딪혔다.

짧은 신음을 뱉는 틈을 타 라파엘이 불쑥 가까워졌다. 그의 눈이 너무 가까이에서 보인다는 생각이 들기 무섭게, 라파엘이 단테의 양옆에 손을 짚었다.

“팀장님, 저희…….”

처음 만났을 때와 다름없이 라파엘은 단테를 곧게 바라봤다. 도톰하고 모양 좋은 입술에 긴장이 담겼다.

그리고, 아래에 누운 단테가 미소 지었다. 라파엘이 말을 꺼내기 전부터 그의 표정에 이미 대답이 담겨 있었다.

그만. 여기까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다정한 거절이었다.

“일어나도 될까?”

“……예.”

라파엘이 옆으로 비키고, 단테는 몸을 일으켰다. 골려줄 만큼 골려주고 가려던 단테는 손목을 붙잡혔다. 라파엘이 여전히 새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이, 이래도… 체력이 남는 것 같습니다.”

한 번 거절했잖아. 그럼 한 번은 안아줘.

“다시, 도와주시겠습니까.”

라파엘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관사로 돌아가 문이 닫히기 무섭게 라파엘이 입을 맞췄다. 단테가 테이블에 적당히 놓아둔 시계의 초침이 옆으로 짤각이며 움직였다.

휴가가 또 하루 지나갔다. 이제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라파엘은 한층 더 조급해 보였다.

단테를 침대에 눕힌 라파엘은 두 다리 사이에 단테의 허벅지를 가두고, 안주머니의 지갑을 꺼냈다.

지갑에서 한 움큼 꺼내 침대에 내려놓은 것은 콘돔이었다. 색이 종류별로 알록달록했다. 그리고 단테는 처음 보는 사이즈가 적혀 있었다.

“공부도, 더 열심히 했고, 호텔에서 배운 걸로 복습도 많이 했습니다. 오늘 새로 배우고 싶은 것도…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

“예. 이번엔 더 잘하겠습니다.”

라파엘이 입고 있던 티셔츠를 위로 번쩍 벗었다. 조금 전까지 운동을 해선지 부푼 어깨가 맥동했다. 곧 라파엘이 다시 단테의 위를 덮었다.

“흐으…….”

목덜미를 물린 단테의 입에서 가는 숨이 새어 나왔다.

라파엘이 단테의 턱에 쪽, 쪽 붉은 자국이 남도록 입을 맞추고는 몸을 일으켰다. 누워 있는 단테를 자연히 내려다보게 되는 자세였다.

고개를 옆으로 꺾자 매끈한 턱선이 더욱 돋보였다. 단테와 눈이 마주친 그가 눈을 휘며 입술을 밀어 올렸다.

“몇 번 해봤다고 여유롭네.”

단테가 사정했다는 것만으로 감격해 엉엉 울던 모습이 선한데 섹스를 앞두고 미소라니. 괄목할 만한 성장이었다.

“팀장님께선 섹스하며 웃으실 때 가장 섹시하십니다. 그래서…….”

“날 따라 한 거야?”

“예.”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왜 또 귀엽게 굴어.”

라파엘이 단테의 다리를 들었다. 시선은 단테의 얼굴로 향한 채 무릎의 흉터에 쪽, 입을 맞췄다. 오금을 타고 오싹한 쾌감이 스쳤다.

“팀장님, 저 성인인증하고 많이 찾아봤습니다.”

“어이구 그랬어. 장하네.”

“공부 제대로 했나 봐주시겠습니까?”

말만 들어서는 선배에게 숙제를 검사받는 후배의 목소리였다.

“해 봐.”

라파엘이 허리 숙여 단테의 입술을 덮었다. 서툴게 입 안으로 들어오나 싶더니, 감질나게 입 안을 훑고 물러났다. 제법 애를 태울 줄 알게 됐다.

라파엘이 단테의 티셔츠를 걷어 올리고 상체를 뭉근히 쓸었다. 가슴의 꼿꼿이 선 돌기가 둥글게 굴리듯 만져졌다.

“으읏…….”

라파엘은 한쪽 가슴을 입술로 감싸고 다른 한쪽은 손가락 사이에 가뒀다. 입술이 유륜을 통째로 깊게 머금었다.

축축한 혀가 돌기를 간질였다. 라파엘의 이가 딱 간지러움을 해소시켜 줄 정도만 닿았다. 아무 감흥 없던 양 가슴에서 저릿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공부를 했다더니 대체 이 모범생이 또 얼마나 성실하게 준비를 해 온 건지.

“아, 헤인스워즈…….”

단테의 가슴을 만지던 손이 아래로 내려가 버클을 열고, 지퍼를 내렸다.

“하아, 아.”

손이 허리를 쓸며 등 뒤로 돌아가 속옷 안에서 엉덩이를 쥐었다.

가슴을 빨리며 자극에 정신이 팔린 사이 라파엘은 단테의 옷가지를 한 겹씩 없앴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반쯤 나체가 된 단테가 어이없이 웃었다. 대체 언제 이렇게 실력이 늘었지.

“헤인스워즈, 흣.”

쪽, 마지막으로 유두에 입을 맞춘 라파엘이 고개를 들었다. 부푼 유두보다 라파엘의 입술이 더 붉게 변했다. 순진하게 배시시 웃던 모습이 이젠 잘 연상되지 않았다.

“공부 잘했네.”

“그렇습니까?”

“응. 더 해 봐.”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기특해. ……흣.”

오늘도 정성스레 안을 풀어준 뒤에야, 라파엘은 자신의 성기에 콘돔을 씌웠다. 콘돔에 묻은 젤이 뻑뻑한 주름 사이를 적시고, 안으로 파고드는 귀두에 맞춰 넓이를 벌렸다.

라파엘과 몇 번의 섹스를 겪은 몸은 상대를 기억하고 있었다. 늘 뻑뻑했던 입구가 움찔거리며 주름 사이를 넓히기 시작했다. 귀두가 금세 안으로 들어왔다.

“아!”

안쪽이 찔렸다. 노리고 찾은 건지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허리가 들썩였다. 아랫배에 움푹 힘이 들어가 굴곡이 도드라졌다.

순간 질끈 감은 눈을 떴을 때, 라파엘이 단테의 목덜미를 갉작이며 속삭였다.

“오늘도 저는 맛있습니까?”

“하…….”

이번엔 오싹함이 선명하게 찾아왔다. 겹쳐진 두 사람 사이 텐션이 점점 농도를 더했다.

오랜만에 단테의 여유가 닳기 시작했다. 라파엘은 무던한 휴가 중 찾아온 가장 큰 자극이었다.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