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오랜만에 갖는 팀 내 지휘 장교 및 부사관 모임이었다. 팀장 단테 베일리 대위, 부팀장 안젤라 해리스 중위, 그리고 최고참 부사관 로건 터너 상사가 그 멤버였다.
가운데에 앉은 팀장은 도끼눈을 뜨고 있었고, 다른 두 사람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배신자들. 귀관들은 전우를 버렸습니다.”
단테가 투덜거렸다. 안젤라도, 로건도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무사히 생환하셨으면 된 거 아닙니까.”
“안 됐습니다. 아니 상사님은 어떻게 5년을 함께한 저보다 겨우 반년 본 헤인스워즈 편을 들어줍니까? 상사님이 제일 섭섭합니다.”
일전의 전화 사건에 대해 단테는 거세게 항의했다. 나름 사람 간에 신의와 의리로 살아 왔다 생각한 단테로선 외로운 선배가, 외로운 팀장이, 외로운 사람이 되어야 했던 슬픈 순간이 잊히질 않았다.
……고 쩌렁쩌렁 어필해도 두 사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사실 안젤라는 이미 웃고 있었다. 휴가의 끝은 아쉬웠지만, 오랜만에 팀의 유쾌한 분위기에 젖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단테는 정말로 드물고 귀한 상관이었다.
“후배 괴롭히며 운동하셨다면서요. 다 들었습니다. 반년 동안 팀장님이 제일 신나게 데리고 노셨잖습니까.”
“데리고 놀다니. 업어 키운 거지. 내가 사람 하나 만들어 보낸다.”
호기로운 말에 로건 상사가 단테를 보며 슬쩍 입술을 올렸다. 단테가 뜨끔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짓는 미소였다.
“사족이 길었습니다. 그럼 회의 시작할…….”
“새삼 팀장님이 팀에 부팀장으로 처음 오셨을 때 생각납니다. 제가 중사일 때였는데, 어리버리한 얼굴로 이거 어떻게 쓰는 거냐고 울먹이면서 물어보고, 결국 다 못해서 하루가 멀다 하고 혼나지 않았습니까.”
슬쩍 화제를 돌려보려던 단테의 노력은 실패로 이어졌다. 그리고 안젤라는 능글맞은 팀장의 귀 끝이 붉어진 걸 분명히 보았다.
“아,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다른 사람들 앞에선 운 적 없습니다. 모함하지 마십시오.”
“팀장님이요? 정말입니까?”
“그때 당시 팀장님 상관이 또 후배에게 살가운 성격이 아니셔서 팀장님 고생 꽤 많이 하셨지 말입니다.”
“오…….”
“후배 앞에서 진짜 이러실 겁니까.”
안젤라가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괜한 말을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은 단테는 멋쩍게 웃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때 중대장님이 누구셨습니까?”
“일레인 테일러 소령님. 그 왜…… 엄하고 무뚝뚝하게 챙겨주는 사람들 있잖아. 매일 무섭게 굴다가 한 번 토닥여주면 눈물 나는 사람. 딱 그런 타입이었어. 그래도 그때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들어본 기억이 없는 분인데……. 이제 SAG에는 안 계신 겁니까.”
“정보국 특수팀 요원 쪽으로 스카웃 받아 가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앤지 넌 감사해야 돼. 내가 그때 매일 눈물 삼키며 나는 후임 들어오면 잘해줘야지 이를 득득 갈았어. 그래서 내가 이렇게 잘해주잖아.”
“다짐에 비해선 실천이 미미하신 것 같습니다.”
“동의합니다. 특히 이다음으로 들어온 후배는 더 못살게 구시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해 봅시다. 헤인스워즈 제일 열심히 골린 게 접니까, 두 분입니까.”
“팀장님이십니다.”
“팀장님이시죠. 후배가 선배에게 놀아달라는 말도 무서워 못 꺼내고 여러 사람 돌려 돌려 말하게 하는 분 아닙니까.”
“……그 후배 저희 집에 무사히 놀러 와 까마득한 7기수 선배가 해주는 밥 대접받아 먹고 갔습니다.”
후배에게 잘해주겠다 굳이 이를 갈며 다짐까지 하지 않아도 어차피 단테는 그럴 사람이었다. 이런 짓궂은 말이 나오는 것도 두 사람 다 그걸 알기 때문이었다.
단테는 상처만 남은 잡담을 정리하고 본 회의 내용을 꺼냈다. 앞으로 팀이 제도에서 맡을 일에 대한 상의였다. 한때 라파엘처럼 막 졸업한 모습으로 SAG에 왔던 단테는 이제 어엿한 책임자가 되어 그가 이끌 팀의 작전을 상의했다.
세 사람은 화기애애했던 모습을 지우고 진지하게 작전 구성에 몰입했다.
“지금까지 현장에서 투입조, 대기조 6-6로 나눴던 거 베이스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세부적인 조정이 필요하긴 하겠습니다만, 2년 차 이하를 무조건 뒤로 빼기보다는 적절히 분산해 상사님과 제가 맡는 게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도 그편이 좋습니다.”
“예. 그러면 배치는…….”
세 사람의 회의는 두 시간가량 이어졌다. 여기서 연차가 적은 안젤라가 크게 참여할 수 있는 건 없었지만, 그럼에도 단테가 자신을 이 자리에 부른 건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배우라는 의미인 걸 알았다. 안젤라가 이후에 팀장으로 올라갔을 때 이보다 유용한 경험은 없을 것이다.
사실은 좋은 선배다 아니다 놀릴 수 있다는 것부터가 그가 좋은 선배라는 반증이었다. 직속 상관을 단테로 만난 건 그녀가 군 생활에서 만난 행운 중 하나였다. 단테 같은 상관을 다시 만나기는 아마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귀한 선배의 관심을 모조리 가져간 라파엘이 귀엽다가도 한 번씩 괘씸하게 느껴지곤 했다. 안젤라는 조용히 웃으며 두 사람의 대화소리에 마저 집중했다.
회의를 마치고, 단테는 두 시간 동안 굳은 몸을 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얼마 안 남았지만 휴가 잘 보내십시오.”
평소라면 같이 식사나 하자고 권할 단테가 인사를 했다. 안젤라는 단테에게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막내를 극진히 사랑하는 팀원들 등쌀에 못 이겨 오늘도 막내 챙겨주러 간다.”
“아……, 알겠습니다.”
하긴 라파엘도 이제 슬슬 배치가 나왔을 것이고, 다른 부대의 소대장으로 떠날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괴롭히지 말고 잘 챙겨주세요.”
“알았다, 알았어. 내가 부사수를 들인 건지, 막냇동생을 업어온 건지.”
괜히 고개를 저으며 가는 단테의 모습을 뒤로 하고 안젤라도 귀갓길에 올랐다.
사실 잘 챙겨주다 못해 요즈음에는 둘 다 극성이라고 느껴지기까지 했다. 어느 후배가 반년간 신나게 굴린 사수를 졸졸 따르며, 또 어느 사수가 그런 후배를 다 받아주겠는가.
그러나 그게 보기 나쁜 모습은 물론 아니었으므로 그냥 좋은 시간 보내라며 단테를 배웅할 뿐이었다.
* * *
“팀장님!”
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부름이 들렸다. 해사한 미소를 가득 띤 라파엘은 단테에게 얼른 달려왔다.
소대에 갈 준비를 마친 라파엘은 한 달 동안 조금 자란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나타났다.
라파엘은 제도와 차로 3시간 정도 떨어진 지방에 주둔하는 사단의 소대장 자리를 받았다. 관할지에 제도로 들어오는 큰 길이 포함된 부대라 알음알음 빡세기로 소문이 난 곳이었다. 하지만 SAG에서의 다사다난했던 6개월에 비하면야 견딜 만할 것이다.
또 수습을 SAG에서 치르고 왔다 하면 감히 무시할 수 있는 선임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단테 역시 최대한 많은 것을 가르치도록 노력했다.
“회의 잘 마치셨습니까?”
“응.”
“……이젠 팀장님이 짜는 작전에, 제가 빠져 있겠습니다.”
반년에 더해진 한 달간의 휴가. 그 기간 동안 라파엘 헤인스워즈는 자신의 이름과 존재를 분명히 새겨넣었다.
단순히 반년이 지나고 스쳐 갈 후배에서, 라파엘은 분명히 다른 무언가가 되었다. 단테는 아쉬움으로 시무룩한 라파엘의 등을 두드렸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한 달이 이렇게 빠르게 지나갈 줄은 몰랐습니다.”
거기다 한 달 동안 군복 외의 옷을 입은 모습을 너무 많이 보아서, 이제는 서로 군복을 입고 다시 마주 보면 어색할 것 같았다.
“그러게.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겠네.”
파병을 마치고 주어지는 긴 휴가를 보내다 보면 며칠 지나지 않아 심심하고 좀이 쑤신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번 휴가는 단 한 번도 지루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아마도 그를 매 순간 깜짝 놀라게, 웃게, 어이없게 만드는 라파엘 때문일 것이다. 단테 베일리가 임관 후 8년간 가진 휴가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휴가였다.
오늘 라파엘은 단테에게 마지막으로 가고 싶은 곳이 있다 요청을 했다. 바로 단테에게 가장 처음으로 서툰 고백을 건넸던 장소였다.
그때 말도 안 되는 쓰리피스 정장을 입고 나왔던 라파엘은 이번엔 편안하고 캐주얼한 차림이었다.
두 사람은 한 달 전과 같은 자리에 앉았다.
황당한 꽃다발을 가져다주었던 버틀러가 단테와 라파엘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앗, 망한 줄 알았는데 잘 되셨나 봅니다!’
라는 얼굴로 라파엘에게 엄지를 세우는데, 라파엘은 짧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버틀러는 눈치를 보더니 도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날, 고백을 실패하고 장렬히 차이기까지 하며 울상을 지었던 라파엘은 오늘은 단테와 마주 보며 웃었다. 어느덧 눈을 맞추고 서로 미소를 짓는 게 익숙해졌다.
단테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새…….”
“예?”
“키가 좀 큰 것 같기도 하고.”
“휴가 기간 동안 1cm 정도 컸습니다.”
“진짜 자란 거였어? 거기서 더 클 게 있었냐.”
눈높이가 조금 올라간 것 같은 게 역시 단순한 느낌만은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단테보다 키가 컸어도 까마득히 어려 보인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제는 그런 느낌도 많이 지워졌다.
오늘은 차 대신 간단한 식사를 준비했다.
몹시 고이 자랐을 라파엘은 딱히 음식의 종류나 먹는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펍에서 술과 안주를 먹는 모습, 성당의 식당에서 다 같이 식사하던 모습, 단테가 차린 음식을 먹던 모습, 그리고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모습 등 수많은 모습이 쌓였다.
함께한 시간들이 늘어나고 보니, 그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 더 많이 눈에 들어왔다.
“짐은 다 정리해 뒀어? 내일 떠나나?”
“예. 새벽에 출발합니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 봐야겠다.”
“자주 놀러 오겠습니다.”
라파엘이 미소 지었다.
“그때도 문 열어주세요.”
“따고 들어오지만 않으면.”
단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로 애타게 문을 두드리는데 무시할 수도 없었다.
메인 음식이 나왔다. 스테이크가 나올 때 버틀러가 드라이에이징 기법으로 1,000시간 이상 숙성시킨 고기라고 설명하는 걸 듣고 단테는 라파엘을 흘기며 웃었다.
“팀장님, 입에 맞으십니까.”
“응. 기대하던 맛이네.”
식사의 분위기는 부드러웠다. 지나간 일들을 읊는 대화는 걸리는 것 없이 부드러웠고, 두 사람의 입가에는 미소가 얹어져 있었다.
한편으로는 다음 날도 쉽게 만날 수 있던 지금까지와는 다르다는 걸 서로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종종 꺼내던 ‘다음번에’, ‘또 만나면’과 같은 말을 쓰지 않았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지금까지처럼 자주는 만날 수 없다는 그 사실이, 평소와 같은 만남을 다소 다른 분위기로 만들었다.
“내일이면 막내 자리 벗어나 드디어 완장 찰 텐데 감회가 어때.”
“……모르겠습니다. 아니, 사실 아쉬움이 더 큽니다. 이제 제가 책임질 사람들이 생기니 무섭기도 합니다.”
“잘할 거야. 내가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어려운 일 있으면 연락하고.”
“예.”
잠시 말 없는 식사가 이어졌다. 부드럽게 이어지던 라파엘의 동작에 조금 긴장이 어렸다. 라파엘은 식기를 내려놓고 단테를 보았다.
“저…… 내일이면 팀장님 팀원이 아닙니다.”
단테도 라파엘을 보았다.
“아직 저는 어렵겠습니까?”
조심스러운 물음이었다. 그러나 힘이 담겨 있었다. 커다란 꽃다발도, 보란 듯 맞춰 입은 정장도 없었지만 그때보다 배는 진중하게 느껴졌다.
“미안.”
그렇기에 단테도 진솔한 대답을 주었다.
“네 마음이 진지한 걸 알고, 네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도 맞지만… 아직 내가 라파엘 헤인스워즈라는 좋은 후배를 연애라는 불확실한 관계에 넣고 잘 대할 확신이 없다. 미안.”
라파엘은 실망하거나, 아니라고 마냥 주장하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팀장님 생각을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더 다가가며 얼마든 기다리겠습니다.”
“잘난 녀석이 헌신적이기까지 하면 어떡해.”
“그럼 더 예쁘게 봐주세요.”
“충분히 예쁘게 보고 있어. 말투 다 풀린 거 봐주는 것까지 포함해서.”
라파엘이 배시시 웃었다. 단테가 진심으로 뾰족하게 말한 게 아니라는 걸, 그도 충분히 알았다.
“……아, 참.”
문득 단테가 고개를 들고 라파엘을 보았다.
“이제 팀원도 아닌데 팀장은 됐고, 그냥 선배면 돼. 편하게 불러.”
“아…, 입에 너무 익었습니다. 천천히 고쳐보겠습니다. ……사실 호칭 고치는 게 어렵진 않은데, 팀장님이랑 연결된 끈을 놓기가 싫습니다.”
“선후배 사이나 팀장과 부하 사이나 별다를 게 있나.”
“다릅니다. 분명히 다릅니다.”
좋을 대로 해라. 단테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단테의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나도 이름으로 불러도 되냐.”
라파엘의 눈이 커졌다. 이어 입이 눈처럼 떡 벌어졌다. 그다음으론 커다랗게 벌어진 입가가 위로 올라갔다. 구름 한 점 끼지 않을 것 같은, 화사한 햇살 같은 미소였다.
“네! 어…, 어 불러주세요! 지금부터 불러주세요!”
“지금? 지금은 좀 그런데. 나도 헤인스워즈라 부르던 게 입에 너무 익어서.”
단테가 라파엘이 댔던 핑계를 그대로 가져다 썼다. 저 표정과 말투는 놀리는 게 분명했다.
“선배. 단테 선배. 저 호칭 고쳤습니다. 불러주세요……!”
라파엘은 팀장 호칭에 대한 미련을 몹시 쉽게 놓아주었다. 짧은 한숨을 내쉰 단테가 조금 쑥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라파엘.”
라파엘은 진심으로 기쁘게 미소 지었다.
아직 단테는 라파엘을 완전히 깊이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가 계속해 벌려두었던 거리를 라파엘이 성큼성큼 걸어간 끝에, 그도 겨우 한 걸음을 걸어 나올 수 있었다.
시선을 내리고 피식 웃는 단테를 보며, 라파엘은 미소 지은 뺨 위에 홍조를 띄웠다.
단테 베일리의 시간 중 가장 로맨틱했던 휴가는,
라파엘 헤인스워즈라는 푸릇한 후배와 함께 봄처럼 지나갔다.
다음 권에 계속
로맨틱 캡틴 달링 1권
@정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