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다음 날 출근을 하면서도 전날의 짧은 통화 내용이 계속 떠올랐다.
단테가 사수를 맡은 6개월 동안 라파엘 헤인스워즈는 분명 빠릿하고 꼼꼼한 수습생이었다. 실수가 있을지언정 근무 태만이나 태도 불량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단테도 그런 부분에서 점수를 높게 주었고, 칭찬도 여러 번 해주었다.
라파엘의 조심스러운 성격은 작전을 수행할 때의 철저한 준비를 통해 여러 번 볼 수 있었다. 특히 군인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선지 웬만한 상황에서도 그는 차분하게 대응했다.
한편으론, 그런 라파엘이 단테에 한해서는 평소의 침착함을 잃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공사를 완벽히 구분하기엔 그가 자신을 모를 수 없을 만큼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러니 라파엘이 일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정신을 빼놓고 있다면, 그 원인은 높은 확률로 자신이었다.
돌이켜보니 지나치게 자주 연락하고 자주 만나긴 했다.
사소하게는 매일 하는 통화부터, 크게는 휴식과 수면 시간을 줄여 단테를 보러 오는 것까지. 라파엘은 단테에게 상당히 많은 시간을 썼다. 새로 부임한 소위의 일과와 병행하기엔 결코 쉽지 않은 일정이었다.
‘라파엘 녀석, 잘 좀 하지. 사소한 실수로 질책받는 게 제일 억울한 건데…….’
오전 훈련을 마칠 때까지 단테의 눈앞엔 라파엘의 얼굴이 비눗방울처럼 둥둥 떠다녔다. 예쁜 얼굴은 밀러의 짜증스러운 항의의 목소리와 함께 팍 터졌다가 또다시 헤헤 웃으며 피어올랐다. 지금만큼은 해맑은 얼굴이 마냥 예쁘다고만 보기가 어려웠다.
점심을 먹고 흡연 부스로 나와 단테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커티가 준 담배 뭉치는 한숨의 횟수에 비례해 줄어갔다.
영락없이 어린애 유치원 보내놓은 보호자 꼴이었다. 잘하고 있나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오늘따라 흡연 부스에서 말을 거는 사람도 없어 생각만 더 이리저리 복잡하게 꼬여갔다.
매번 담배를 피울 때마다 저리 가라 해도 달라붙으려던 라파엘이 떠올랐다. 지금만큼은 차라리 옆에 있기라도 했으면 부대에서 무슨 일이 있냐 묻기라도 했을 것이다.
“하아…….”
스스로가 오지랖 넓고 사서 걱정이 많은 성격인 걸 이렇게 또 깨우칠 줄은 몰랐다.
단테의 머릿속에선 하루 종일 두 가지 의견이 치열하게 충돌했다. 두 의견은 서바이벌 훈련을 할 때처럼 알파팀, 베타팀으로 나뉘어져 치열하게 다퉜다. 각 팀은 엎치락뒤치락 한 시간에 한 번씩 우위를 바꾸며 머릿속을 시끄럽게 괴롭혔다.
밀러의 전화를 받고 발끈했으며, 아침부터 한 번씩 단테의 얼굴을 찌푸리게 한 건 A팀 쪽이었다.
▷단테A : 라파엘 그 녀석 뭐 하고 있는 거야. 배속된 지 한 달도 안 돼서 직속 상사가 전 사수에게 연락할 정도로 처신을 잘못해? 귀여우면 단 줄 알아?
곧바로 B팀이 응전했다.
▶단테B : 라파엘이 그 정도 실수를 할 녀석은 아니잖아. 밀러 선배는 중대장이 됐으면 감싸주진 못할망정 그걸 곧이곧대로 일러바치냐. 라파엘 만한 순한 후임이 어디 있다고. 또 귀엽고.
A팀이 주춤한 틈을 타 B팀이 한 번 더 의견을 밀어붙였다.
▶단테B : 알잖아. 꾀를 부릴 녀석이었으면 진작 SAG에서 버티지도 못했어.
다시 B팀이 우세해지려는 찰나, A팀이 불쑥 끼어들었다.
▷단테A : 그렇지만 보고서 펑크낸 건 너무 치명적이라 할 말이 없지 않냐?
▶단테B : …….
단테 본체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다시 한번 지나갔다. 그런 다음 B팀이 필사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단테B : 그거야, 애가 어리고 순진한데 시행착오 좀 겪을 수 있지. 그리고 그걸 왜 굳이 수습 기간 끝난 사수에게 일러? 그 선배 좀 이상해.
▷단테A : 아, 그건 맞아.
머릿속이 소란스러운 덕분에 오늘 하루는 갖은 시비도 한 귀로 흘릴 수 있었다. 데릭슨이 뭐라 시비를 건 것 같은데 “아, 예, 예.”하고 지나갔고, 그 내용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생각이 복잡해 다른 일들은 튕겨냈다는 게 맞을 것이다. 그렇게 일과를 마치고 관사로 돌아갈 때까지 하루를 멍하게 날려버렸다.
라파엘은 제도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다시 테네시로 내려갔다. 다음 제도 훈련 일정이 있는 차주까지는 얼굴을 마주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그도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했는지, 이전보다 전화 횟수가 조금 줄어들었다. 대신 메시지가 절로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생생해졌다.
단테는 새 소식을 알리며 깜빡이는 메시지함 아이콘을 눌렀다.
[선배님, 보고 싶습니다T0T!
선배님 인터뷰 영상만 하루에 백 번씩 돌려보고 있습니다.
아, 원본 영상 구했는데 보내드릴까요?
편집본도 멋지지만, 역시 자막으로 선배님 몸이 가려지지 않은 쪽이 좋습니다.
선배님은 군인 아니셨더라면 스포츠 스타가 되셨을 겁니다.]
[좋은 말로 할 때 지우자^^]
[안 됩니다. 저만 보겠습니다.]
[SAG 훈련과정 중에 해킹도 있는 거 알아?]
[악 안도ㅐ요]
라파엘은 지우겠다는 대답 대신 무어라고 낑낑거렸다. 낑낑거림 속엔 인터뷰 영상이 인터넷에서 난리가 났다는 둥 하는 말도 있었지만, 그래 봐야 삭막한 제국군 계정에 올라간 게 다일 텐데 과장이 심했다. 라파엘과 주고받은 메시지를 눈에 담으며 단테는 턱을 괴었다.
이렇게 보면 별일은 없어 보이는데. 역시 괜한 생각인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걱정이 어느 정도 씻겨 내려갔다. 단테는 적당히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다 머리맡에 휴대폰을 내려놓고 침대에 누웠다.
불 끈 방 안에서 눈을 감자 어쩐지 허전함이 밀려왔다. 휴가 땐 매일 얼굴을 보던 라파엘을 저번 주는 전화 통화로만, 이번 주는 메시지로만 만나니 괜스레 옆자리가 헛헛했다.
이것도 다 말려든 거였다. 귀엽게 왕왕 치대기나 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람을 녹이고 존재감을 뽐내는 솜씨가 탁월했다. 팀원들에게서 아직도 한 번씩 라파엘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집중적으로 공격을 받아 가장 흐물흐물해진 건 단테 자신이었다.
돌이켜보면 이런 단테조차 처음엔 라파엘이 헤인스워즈라는 이유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 생각은 얼굴을 마주한 지 1분 만에 금이 가고, 팀원으로 받아들인 지 1시간 만에 완전히 사라졌지만.
‘그런 녀석이니 어디든 적응만 하면 잘 지내겠지. 괜한 걱정이야.’
단테를 하루 종일 괴롭혔던 고민은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다음 날부터, 라파엘을 대신해서… 그 선배에게 오는 전화가 늘기 시작했다.
* * *
“……라파엘, 헤인스워즈가요?”
라파엘이요? 하려던 물음을 수정하다 어색하게 풀네임이 불렸다. 며칠 전 단테에게 갑작스레 연락을 했던 밀러는,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다고 이틀에 한 번씩 연락을 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엔 정말로 당혹스러운 말을 꺼냈다.
“그럴… 녀석은 아닙니다. 성격은 기본적으로 순한 녀석입니다. 당황했거나, 실수로 그런 거지 정말로 중대장에게 덤비려는 뜻은 없었을 겁니다.”
―난 네가 대체 뭘 가르쳤는지 모르겠다. 그놈 여기가 여태 학교인 줄 아는 거 아니야? 그날 이후로 여태껏 똑바로 정신 차린 날이 없어.
그가 오늘 전한 건 라파엘이 상관 명령에 불복했다는 소식이었다. 이 말만큼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을뿐더러, ‘제가 수습 때 잘 가르치지 못했나 봅니다.’ 하며 때울 수 없는 화제였다.
“헤인스워즈가 그럴 리 없습니다. 무언가 다른 문제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소위에게 연락해 중재를 해도 되겠습니까?”
―어, 음… 아니. 하, 이게 또 우리 중대 일이라 외부인에게 중재까지 맡기기도 그렇고, 일 크게 만들기엔 헤인스워즈 가문이 껄끄러워서……. 너도 걔 밑에 둬 봐서 알잖냐. 나도 조심스러워 전 사수인 너한테나 말하는 거니까. ……쯧, 이 얘기까진 안 하려 했는데, 그놈 전에 누구랑 통화하면서 ‘아버지에게 이른다’ 어쩌고 하더라.
말투는 장난 같긴 했는데, 그래도 우리한텐 농담이 아니지. 하는 말을 들으며 단테는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 선배님 그건…….”
아마 자신과의 통화일 것이다. 그럼 좀 억울한 오해였다. 하지만 오해를 풀려면 라파엘과 자신의 관계를 폭로해야 할 판이라 단테는 더 말을 하지 못했다.
―그 녀석이랑 연락 주고받을 일 있으면 내가 말했단 건 빼고, 그냥 상관 말 좀 잘 들으라고나 해.
“……알겠습니다.”
단테는 통화를 끊고 입가를 무겁게 쓸어내렸다. 저녁 식사가 아직인데 허기도 싹 가셨다.
한참을 어둑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휴대폰에 뜬 그의 이름을 보고 오늘만큼은 입술을 물었다. 며칠간 바빠서 메시지로 대신하고 넘어갔으니 꽤 오랜만에 듣게 된 목소리였다.
시간은 정확히 9시. 단테가 식사를 마치고 쉬고 있을 즈음의 시간이었다. 단테에게 가장 편한 시간을 알아낸 라파엘은, 부대에서 소리 죽여 통화하는 한이 있어도 이 시간을 지켜 전화를 걸었다. 늦은 시간이라도 상관없으니 차라리 퇴근하고 하라 했으나 라파엘은 늘 그렇듯 헤실거리며 넘겼다.
―선배님. 일과 잘 마치셨습니까?
오늘도 라파엘은 목소리가 작았다.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중대장이랑 사이가 좋지 않아? 너는 괜찮아? 목소리가 낮은 걸 보니 부대인데, 왜 아직 퇴근을 못 했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부대에서의 통화를 중대장이 들은 건 알아?
그중에서도 불과 조금 전까지 라파엘의 상관에게 험담을 듣고 있었다는 사실이, 화가 나고도 속상했다.
“라파엘.”
―네, 선배님.
“잘하고 있어?”
사실은 조금 더 캐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라파엘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사수도 아니거니와, 라파엘은 타 부대의 어엿한 소대장이다. 과도한 참견은 지양하는 게 서로 좋았다. 단테는 머쓱하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냥, 이래저래 한 달 넘게 지났으니까 어떻게 지내나 자꾸 궁금하네. 너야 뭐 어디서든 걱정은 없지만.”
―아…, 예. 열심히 노력하고 있…….
늘 씩씩하게 그렇다고 대답하던 라파엘이 오늘은 말끝을 흐렸다. 그러더니 하려던 말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음……, 사실 조금 힘든 것 같습니다.
쾌활하던 목소리가 드물게 가라앉았다. 진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라파엘이 눈앞에 없으므로 단테는 휴대폰이나마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무슨 일 있어? 안 좋은 일이라든가.”
라파엘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답변을 기다리는 단테의 입술도 초조하게 달싹였다. 역시, 직속 상관이 그 난리인데 아무 일 없을 리가.
짧은 침묵이 지나고 드디어 라파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군인이 적성에 맞는 걸까요.
“…….”
이건 또 갑자기 무슨 말이야?
―요즘 들어 더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습 기간에 군 생활이 조금이나마 좋았던 건 역시 선배님이 옆에 계셔서였나 봅니다. 아니, 어쩌면 선배님을 매일 볼 수 없는 환경이 싫은지도 모르겠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살짝 벌어졌던 단테의 입매가 그대로 딱딱하게 굳었다. 잔뜩 걱정한 것에 비해 답변은 투정으로 가득했다. 맥이 탁 풀렸다. 그 자리에 작은 언짢음이 찾아왔다.
보고 싶다고.
상관이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니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밀러가 말한 ‘여기가 지금 학교인 줄 알아?’ 하는 질문이 단테의 목 안에서도 울컥 솟았다.
지금 네 바로 가까이에 있는 직속 상관에게 매일 무슨 말이 들려오는지도 모르면서……. 하루 종일 떠올린 걱정이 뭉쳐 가슴을 거세게 두드렸다.
“철없는 소리 하지 마. 거기서도 이렇게 애처럼 구는 거 아니지?”
―아, 아닙니다. 잘하고 있습니다. 선배님 말씀대로 소대원들과도 많이 친해졌습니다.
“소대원뿐만 아니라, 상관이랑도 잘 지내.”
단테는 휴대폰을 쥔 손에 세게 힘을 주었다가 다시 풀었다.
“너 붙임성 좋게 잘하잖아. 일도 빠릿하게 배우고. 더 빡센 SAG에서도 잘만 따라오던 녀석이, 왜 일반 부대에서 우는소릴 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적응 잘해야지. 몇 번이나 말했지만, 네게 정말 중요한 시기야.”
―예, 선배님.
라파엘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풀이 죽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떠올라 목 안에 뭉친 말들이 슬그머니 녹아내렸다.
“…….”
―……저, 선배님.
단테의 말이 멈추자, 라파엘이 머뭇거리며 화제를 바꿨다.
―혹시 다음 주 화요일에 만나주실 수 있으십니까? 귀찮지 않으시도록 저녁 시간, 아니, 잠깐만이라도 얼굴 뵙고 싶습니다.
“또 한밤중에 제도 넘어왔다가 새벽에 돌아가려고?”
―아닙니다. 휴일입니다. 쉬는 날입니다…….
“…….”
힘없는 목소리가 울컥했던 감정을 완전히 가라앉혔다. 그러고 나니 괜히 딱딱하게 나갔던 말들에 대한 죄책감이 찾아왔다.
밀러의 앞에서 몇 번이나 부정했다시피 단테는 라파엘이 그럴 리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밀러와 라파엘의 전화를 연속으로 받자 걱정이 만든 의심이 치솟았다.
그래, 라파엘의 말대로 만나는 게 낫겠다. 얼굴을 보지 못해 라파엘도 자신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상황이 있을 것이다. 그건 전화보다는 직접 눈을 마주하고 할 이야기였다.
그렇게 만나서, 네 중대장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는데 어떻게 된 거냐 물을 생각이었다. 묻고, 도와주거나, 위로하거나, 타이를 게 있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응. 화요일에 보자. 그리고, 그때까진 연락 최소한으로 줄이자. 특히 전화는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자제하는 걸로.”
―예? 왜… 이, 이유가 뭡니까? 왜…….
네가 나 때문에 실수를 만든 것 같아서. 마음이 딴 곳에 와 있다는 게 네 상관 눈에 고스란히 보이고 있고, 오늘은 내 눈에도 보였어서.
단테는 눈을 감았다 떴다.
“내가 바빠. 당분간 퇴근해서도 포메이션 짜고 훈련 준비해야 해. 다음 달에 갑자기 헬기 하강훈련 일정도 잡혔고.”
―아…….
라파엘의 목소리가 안타깝게 흐려졌다. 하지만 단테가 말한 이유에 대고 반대 의견을 꺼내진 않았다. 만약 ‘널 위해서’가 이유였다면 라파엘은 괜찮다고 하겠지만, ‘단테를 위해서’가 이유였으므로 순순히 물러났다.
―알겠습니다. 그럼 화요일에 뵙겠습니다. 선배님, 오늘도 수고 많으셨고 푹 쉬십시오.
“너도 수고했고, 앞으로도 잘…….”
단테는 문득, 최근 라파엘과의 통화며 메시지가 ‘너도 잘해’, ‘잘해야 돼’로 끝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밀러로부터 연락이 시작된 이후 무의식적으로 생긴 버릇이었다. 단테는 한숨을 삼키고 말했다.
“라파엘, 힘내.”
―…….
라파엘은 잠시 말이 없다가, 단테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 통화를 마쳤다.
꺼진 화면 위로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가던 언젠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가 꺼낸 ‘힘들다’는 말이 투정이라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순 없었다.
다른 일이었다면 단테는 라파엘의 시무룩한 반응에 슬그머니 뜻을 굽혀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너무나 별개의 문제였다.
우선 만나자. 만나서 잘잘못을 명확히 하고, ……그런 뒤엔 안아주자. 다소 오버를 섞어 “아이고, 내가 키운 귀여운 내 새끼!” 하며 충분히 웃게 하다가 보내줄 것이다.
* * *
화요일까지 남은 엿새간, 라파엘은 약속대로 전화를 걸지 않았다. 다만 아침저녁 하루에 두 통의 메시지. 그것을 통해 절제하고 절제한 안부를 물었다.
[선배님, 좋은 아침입니다. 제도는 하루 종일 날이 맑다고 합니다. 오늘도 훈련 힘내시고, 다치지 마세요. 맡으신 직무 수행 중 너무 스트레스 받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저녁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텍스트로도 라파엘의 시무룩함이 느껴져 마음이 씁쓸했다. 그러나 단테는 가급적 그가 미련이 없을 답신만을 보냈다.
[응. 너도 잘 다녀와.]
[예, 선배님.]
마지막 메시지에 단테가 답을 하지 않는 것으로 매회 짧디짧은 연락은 마무리가 되었다.
나흘째 되던 날 무심코 메시지창을 들어갔더니,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상대가 입력하는 중이라는 아이콘이 떠 있었다. 하루에 딱 두 번 허락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라파엘은 아주 느리고 천천히 메시지를 썼다.
휴대폰을 두 손으로 쥐고 한 마디 한 마디를 고르고 있을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어깨를 힘없이 늘어뜨리고, 예쁜 연녹색 눈동자 가득 화면을 담고 있을 것이다.
8시가 조금 넘은 시간부터 떠 있던 아이콘은 정확히 9시에 새 메시지의 도착과 함께 없어졌다. 그 간절함을 누르고 도착한 메시지는 이번에도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선배님, 잘 들어가셨습니까? 일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퇴근하셨으면 푹 쉬십시오. 화요일이 많이 기다려집니다. 미리 인사까지 드리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라파엘에게 충동적인 면이 있다는 건 휴가 기간 동안 그를 겪어본 단테가 가장 잘 알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라파엘은 이렇게 중심만 잡아주면 얼마든 절제를 했다. 그래, 라파엘은 딱 스물네 살 나이만큼 어릴 뿐이었다.
4일.
……이만하면 오래 참았다. 그러니 한 번쯤은 다독여주어도 괜찮을 것이다.
[통화 가능해?]
그렇게 답장을 보내기 무섭게, 라파엘에게서 바로 전화가 왔다.
―팀장, 아, 아니, 선배님.
“전화를 하고 싶은 것 같길래.”
―하고 싶었습니다……. 아, 혹시 제가 부담을 드렸습니까?
“아니야.”
단테는 화요일의 만남을 기다리며 하고 싶은 말을 꾹 눌러 담았다. 라파엘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결국 별일 없냐, 다른 사람들은 잘 있냐, 이런 평소와 같은 안부 대화나 겨우 오갔다.
―선배님 저, 아무 부담 가지시지 말고, 그냥 제가 드리고 싶어서. 한마디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뭔데?”
―정말 좋아합니다. 저… 선배님이 생각하시는 이상으로 선배님이 많이 좋습니다.
“…….”
단테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 라파엘이 금세 말을 이었다.
―말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걸로 화요일까지 저는 버틸 수 있습니다.
“…….”
입술을 달싹이던 단테는 결국 라파엘에게 짧은 웃음을 들려주었다. 그러나 평소처럼 환하게 웃진 못했다.
“버틴다고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해. ……나는 네가 내게 좋은 후임이었던 만큼, 다른 곳에서도 인정받았으면 좋겠어.”
―예. 노력…하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휴대폰에서 들려오던 라파엘의 온기가 사라지자, 단테는 다시 제도에 혼자 남았다. 관사 앞으로 나와 서서 피우는 담배 연기가 썼다. 이럴 때마다 옆에 불쑥 다가와 조잘거리던 어떤 금빛 인영이 자꾸 떠오른 탓이었다.
* * *
[선배님, 오늘 뵙겠습니다! 너무 오랜만입니다. 정말로 기대됩니다. 그럼 오늘 일과 잘 마치시고, 파이팅입니다.]
화요일이 되었다. 아침에 라파엘에게서 온 연락은 가라앉아 있던 평소에 비해 몹시 활기찼다. 단테도 오랜만에 웃음기 섞인 답장을 주었다.
오늘 잡힌 일정은 팀끼리의 개별 훈련이었다. 덕분에 평소보다 더 빨리 마칠 수 있었다. 단테는 팀원들을 쉬게 두고 올라가서 보고를 마쳤다.
팀원들에게로 돌아가려는데, 때마침 휴대폰이 울렸다.
[라파엘 헤인스워즈 거기에 있냐?]
밀러 선배였다. 단테는 이제 숨길 생각도 없이 눈을 찌푸렸다. 오늘 라파엘은 휴일이었다. 쉬는 날인 후임에게까지 왜 이러는지.
한두 번은 이전 사수에게 잘못을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라파엘은 공식적으로 밀러의 부하고, 단테는 굳이 말하자면 타 부대 사람이었다. 남에게 자신의 부하를 이렇게까지 계속 험담하는 사람이 제대로 된 상관이라 보이지도 않았다.
[제도에 온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렇기에 단테도 사무적으로 대응했다.
[저번 일 이후로도 정신을 못 차려 근신하라 했더니만, 선약이 어쩌고 하더니 그새 거길 넘어가?]
……근신? 큰 잘못을 했다면 처분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갓 부임한 소대장에게……. 단테는 입술을 깨물며 눈가를 짚었다.
[아직 제도로 출발했는지 여부는 모릅니다. 알게 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하…….”
무슨 일이든 간에 약속은 취소일듯싶다. 라파엘이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근신을 받았으니 예정대로 제도에 올라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휴일에 근신을 이유로 붙잡아두는 건 솔직히 상관으로서 많이 치졸한 짓이었다. 하지만 상명하복이 절대적인 군대인데 어쩌겠는가.
그 이해와 동시에, 밀러에 대한 불신은 더욱 커졌다. 대체 대위가 신임 소위를 상대로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며칠간 일방적으로 이런저런 연락을 받으며 단테도 이 선배가 그닥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걸 파악했다. 자신에게 라파엘의 잘못을 쏟아내고는 있지만, 부대 내 보안을 이유로 구체적인 정황은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그저.
‘헤인스워즈에게 내 말 좀 잘 들으라고나 해.’
이 주문만 계속될 뿐이었다. 뭐가 어찌 되었든 그가 라파엘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오늘 라파엘과 만나지 못하더라도 무조건 통화로 자초지종을 묻는 게 좋겠다. 라파엘의 이야기를 듣고, 오해를 확실히…….
여기까지 생각한 단테는 자신이 이미 중재고 뭐고 라파엘의 편밖에 들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선을 잡겠답시고 연락도 받지 않은 주제에 말이다.
* * *
팀원들이 대기하는 위치로 다시 돌아가는데, 옆으로 지나가는 소리 중 단테의 귀에 유난히 들어온 것이 있었다.
“라파엘 헤인스워즈래. ‘그 헤인스워즈.’ 장군의 아들…….”
헤인스워즈? 상대가 되물으며 입을 떡 벌렸다. 이때 단테도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누구기에 다들 저렇게 쳐다보나 했다. 소위면 스물 네다섯쯤 됐겠네. 그런데 헤인스워즈가 왜 여길 돌아다니고 있지.”
“단테 베일리 부사수로 들어가서 거기서 수습 받았잖아. 유명한 얘긴데 몰랐냐?”
“뭐? 히야, 수습을 하필 그 빡센 팀으로…… 아! 베일리 팀장이 장군의 사위라느니 하는 얘기가 그래서 돈 건가? 사수 맡은 걸로 헤인스워즈 집안이랑 연이 돼서? 둘 다 여러모로 대단하다.”
“어쨌든 지금은 특수전사령부 소속은 아닌 걸로 아는데 멋대로 들어오는 건 좀 그렇네. 요새 사령관님도 자주 돌아다니시잖아.”
“팀원들 다 있는데 누가 찌르지만 않으면 한두 번쯤은 뭐.”
어깨를 으쓱인 그가 목소리를 살짝 낮췄다.
“그리고 솔직히 헤인스워즈가 못 갈 데가 어디 있냐. 다른 사령관님들 다 아버지 친구들인 데다가, 숨만 쉬고 살아도 미래엔 그 자리로 갈 텐데.”
“흠……, 사위에, 아들에. 요새 각하께서 특수군 쪽에 라인 많이 다지시네.”
“그러니까. 아아, 부럽다. 베일리 팀장이 수습 때 얼마나 헤인스워즈 꿀 빨게 해줬으면 여기까지 찾아오냐.”
“…….”
단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발걸음이 조금 더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라파엘이 여기에 왔다고?
설마 그렇게까지 공사 구분을 못 하진 않았을 것이다. 설마…….
그리고 모퉁이를 돌기 전, 팀원들의 목소리 사이에서 지금만큼은 듣고 싶지 않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대원들은 총 몇 명이냐?”
“32명입니다.”
성큼성큼 걸어가던 단테의 걸음이 뚝 멈췄다.
“팀보다 인원이 많아서 처음에는 적응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제는 많이 익숙해졌습니다.”
라파엘의 목소리였다.
“SAG에 있다 보니까 서른 명 넘는 소대는 진짜 까마득하다.”
“거기서도 잘하고 있지? 전에 마주쳤을 땐 그래도 나름 앞에서 멋있게 소대원들 데리고 가던데.”
이어서 밝은 대답이 돌아왔다.
“예,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다시 들어도 라파엘의 목소리가 맞았다.
며칠 전 전화를 받았을 때보다 더 속이 뜨거워졌다. 수일간 단테의 머릿속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던 것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열이 몰린 얼굴에 찬물이 끼얹어진 기분이었다. 그는 벽을 돌아 성큼성큼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다가갔다.
“어, 팀장님 오셨다.”
그를 등지고 있던 금빛 머리통도 뒤를 돌았다.
“팀장, 아 참. 선배님.”
라파엘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단테는 두 손을 핏기가 가실 정도로 세게 쥐었다.
왜, 왜 네가 여기 있어. 왜.
“팀장님, 얘가 팀장님 보고 싶어서 아침 일찍 테네시에서 여기까지 달려왔답니다.”
“아뇨, 하하. 그게…….”
라파엘이 배시시 쑥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평소 ‘어이구, 그랬어?’ 하며 엉덩이를 두드리던 팀장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라파엘 앞에 섰다.
“아…….”
라파엘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도 차츰 거둬졌다. 단테가 차갑게 그를 봤다.
“헤인스워즈 소위. 여기 사석 아니야.”
이곳은 통합 특수전사령부 예하 SAG 대원 전용 훈련관이었고, 단테도 팀원들도 모두 군복을 입고 있었다. 훈련을 마쳤어도 아직 일과가 끝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소, 소위 라파엘 헤인스워즈…….”
라파엘은 그제야 급히 경례를 했다. 당황해 흔들리는 연녹색 눈동자를 잠시 보던 단테는 마찬가지로 손을 올려 인사를 받아주었다. 라파엘이 머뭇거리며 자세를 세웠다. 단테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팀원들을 돌아봤다.
“여기에 왜 외부인이 들어와 있지?”
라파엘의 눈빛이 덜컹 흔들렸다. 팀장의 모습을 본 팀원들도 자세를 세웠다.
“팀장님, 헤인스워즈가 외부인은 아니지 말입니다…….”
팀원 한 명이 단테를 말리려던 걸, 그 옆 사람이 팔을 붙잡고 고개를 저어 말렸다.
절차대로 냉정히 따지자면 라파엘도 팀원들도 잘못한 상황이 맞았다. 그러나 라파엘과 팀이 각별한 사이라는 이유 때문에 단테가 이렇게까지 화를 낼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팀, 아니, 베일리 대위님, 잘못했습니다.”
라파엘이 앞으로 나섰다. 줄곧 잘 붉어지던 얼굴이 지금은 창백했다. 유일하게 붉은 곳은 눈가뿐이었다. 겁에 질린 얼굴에 당혹스러움과 두려움이 넘실거렸다.
“제가 미처… 생각을 못 했습니다.”
라파엘이 단테에게 간절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단테는 돌아보는 기색조차 없이 쳐냈다.
“공사 구분 똑바로 해. 헤인스워즈, 네가 내 팀원이던 건 저번 달까지고, 여긴 SAG 소속 외엔 들어올 수 없는 곳이야.”
“……예.”
“당장 나가.”
라파엘의 얼굴에 선명한 충격이 찾아왔다.
“티, 팀장님…….”
“나가라 했어.”
라파엘의 절박한 부름을 끊고 결국 목소리가 커지고야 말았다.
아래로 늘어뜨린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라파엘은 고개를 깊이 숙여 보이곤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사라졌다. 옆을 스쳐 지나갈 때 본 라파엘의 입매가 울음을 눌러 참듯 꾹 다물려 있었다.
그가 보이지 않게 된 뒤에 단테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벽을 보고 화를 가라앉혔다.
“팀장님, 사실 밖에서 기다리는 걸 우연히 만나서 제가 들어왔다 가라고 했습니다. 못해도 두 시간은 기다린 것 같아서…….”
무거워진 분위기에 마찬가지로 당황한 듯한 안젤라가 조심스레 말했다.
“…….”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환하게 웃던 라파엘의 모습이 그제야 눈에 밟혔다.
“구역별 팀 배치가, 지금은 기밀이지만 나중엔 훈련 때문에라도 알음알음 퍼지는 거 나도 알아. 그래도 지킬 선은 지키는 것과 이렇게 대놓고 드러내는 건 달라.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해.”
“예. 죄송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예, 무겁게 모인 대답이 동시에 났다. 단테가 고개 숙인 팀원들을 돌아봤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이해하고, 나부터가 더 주의하도록 하겠다. 현장 지휘자가 나일 때 생기는 실수는 내 선에서 어떻게든 덮어줄 수 있어. 하지만 여기처럼 보는 눈이 많고 내 위에, 그 위에도 책임자가 있는 지금은 다르니, 우리가 융통성 있게 넘어가던 규칙도 최대한 지키도록 하자.”
팀의 분위기상, 혹은 상관의 성격상 유하게 다루던 문제들이 운 나쁘게 발각된다면 억울한 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이곳은 모든 것이 너무나 복잡한 제도였다.
“이 외에 특별한 공지사항은 없고, 오늘 일과는 여기까지다. 이만 해산해. ……화 많이 난 거 아니야. 내일은 다 잊고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단테는 바싹 언 안젤라를 포함한 팀원들을 다독이다 마지막엔 엷은 웃음을 보이며 배웅했다. 그제야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팀원들을 보내고 이제 돌아가려던 단테는 아직 자리에 남은 로건 상사를 발견했다. 할 말이 있어 보이는 기색이었다. 단테가 그를 보며 멈춰 섰고, 로건이 가까이 와서 옆의 창가에 기댔다.
“상사님은 어쩐 일로 팀원들이 저런 걸 허락하셨습니까.”
단테가 없었더라도 사실 그가 용납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로건 상사는 무뚝뚝한 만큼 단테보다 조금 더 원칙에 철저했다. 가끔 단테가 팀원들에게 과한 장난을 치면 막는 것도 그의 역할이었다.
“마음에 걸리긴 했습니다만 애들이 워낙 반가워하고, 부팀장이 들어오라 말했는데 바로 안 된다고 끊기도 그래서 말입니다. 결정적이었던 건, 밖에서 기다리던 헤인스워즈 표정이 별로 안 좋아 보였습니다.”
늘 해사하던 라파엘에게 붙은 ‘표정이 좋지 않다’라는 수식어가 낯설었다. 그러면서도 어렵지 않게 상상이 갔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고개를 숙이고 표정 없이 바닥을 보고 있었을 얼굴이.
“팀장님이야말로 웬일로 그렇게 화를 내셨습니까.”
“이게 화낸 겁니까. 저번에 애들 셋이서 지뢰 발견하고 보고 잊었을 때 상사님이 팀원 전체 밤새 울고불고하도록 굴린 거 기억 안 나십니까?”
“애들에게 말고 헤인스워즈에게 말입니다.”
“…….”
하아……. 단테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로건 상사는 그런 단테를 지그시 보고 있었다. 과묵한 만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해도 엄격하게 느껴지는 시선을 가진 사람이었다. 단테는 결국 잘못을 시인하듯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혼날 만합니다. 요새 정신 빼놓고 산답니다. 실수도 잦고, 제게 연락해서 말하는 내용도 철이 없고. ……아, 자꾸 자기 올챙이 시절 생각 못 한다는 표정으로 저 보실 겁니까.”
“뭐, 실수야 처음 부임해왔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건데, 헤인스워즈가 우는 소릴 합니까?”
“우는 소리까진 아니지만, 자기가 아직 막내라고 생각하는 건가 싶은 때가 있었습니다.”
힘들다, 보고 싶다 까지는 괜찮았지만, 책임질 사람들이 생긴 지 한 달 만에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다는 투정을 부린 건 단테를 순간 울컥하게 했었다.
거기에 더해 아무리 명령이 부당하다 한들, 직속 상관의 근신 명령도 지키지 않고 여기로 왔다는 것 역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 이유가 단테 자신을 보기 위해서라는 것이 가장…….
그가 쏟아내는 애정에 속절없이 취하다가도, ‘라파엘 헤인스워즈’를 깎아내어 자신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황급히 그를 밀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신 차리게 두라고 말려도 몰래 꼭 달래주러 가시던 분이 가시지도 않고 계십니까. 다른 팀원들은 매번 30분도 안 돼서 찾아가셨잖습니까. 아까 보니 귀여운 후배 울겠습니다.”
“……가긴 갈 겁니다. 그런데, 달래주고 오진 못 할 것 같습니다.”
라파엘이 단테를 좋아한다 따라다니던 초반, 그는 단테가 이러저러한 이유로 안 된다며 그어놓은 선을 말간 얼굴로 돌진해 뛰어넘었다. 팀장님, 팀장님. 간절한 부름에 못 이겨 단테는 결국 그어놓았던 선들을 물리고 라파엘을 허용치 이상으로 들였다.
하지만 이건 단테가 무슨 일이 있어도 양보할 수 없는 선이었다. 자기 할 일도 제대로 못 하고 주변 평판도 돌아보지 못하면서 단테에게 정신이 팔려 있다니. 라파엘이 했던 어떤 방식의 구애도 너털웃음으로 받아들였지만, 이것만큼은 한 점의 웃음조차 보여줄 수 없었다.
그날 단테의 집에서 눈이 돌아가 아침까지 몸을 섞고 나갈 때부터 말려야 했다. 잘하던 녀석이니까, 하며 지나치게 막연히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라파엘이 이 정도까지 선을 넘게 된 건 그 혼자만의 잘못이 아니었다. 단테 역시 충분히 선을 지키지 못했고, 그와 라파엘 사이에 그어져 있던 적정선은 어느새 두 개의 발자국으로 지워졌다.
라파엘은 일곱 살 어린 연하이며, 같은 직업을 가진 후배였다.
그렇기에 이건, 단테가 균형을 잡아야 할 일이었다.
단테는 건물을 나와 라파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번 주까지만 해도 통화 기록을 빼곡히 채우고 있던 번호를, 스크롤을 조금 아래로 내린 뒤에야 찾을 수 있었다. 라파엘은 두 번 신호가 가기 전에 전화를 받았다.
―소위 라파엘 헤인스…….
“됐어. 어디야. 난 정문 앞인데.”
―저 바, 바로 가겠습니다.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또한 분명하게 젖어 있었다. 단테는 기다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춤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라파엘이 어깨를 긴장으로 세운 채 단테의 앞에 와 섰다.
라파엘의 얼굴을 정면에서 마주하는 순간 단테는 생각했다.
아, 한 주간 나도 꽤 보고 싶었구나.
목소리만으로는 보고 싶다는 감정을 어떻게든 밀어냈지만, 얼굴을 보자 숨겨두었던 감정이 크기를 키웠다. 오랜만에 곁으로 다가온 이 익숙한 존재감. 이것을 만들어준 후배가 상당히 보고 싶었다. 단테는 쓴웃음을 속으로 삼켰다.
“팀장님…….”
다른 생각에 빠지면 라파엘은 종종 선배로 바꾼 호칭을 잊고 익숙한 호칭으로 돌아갔다. 지금처럼.
“라파엘 헤인스워즈.”
“예.”
“테네시로 돌아가.”
도로 돌아온 호칭과 차가운 축객령을 듣자 겨우 가라앉힌 눈가가 다시 충격으로 젖었다.
“팀장님, 제가 저, 정말 잘못했습니다. 저 오늘 꼭 팀장님 뵙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때문만인 게 아니야. 지금은 너랑 내가 만나면 서로에게 좋지 않을 것 같다. 돌아가.”
단테의 표정은 조금 전처럼 굳어 있지도 않았다. 말투 역시 이전에 식사를 하며 나누던 대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라파엘은 단테에게 혼이 난 어떤 때보다도 더 두렵게 벌벌 떨었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제가 생각이 많이 짧았습니다. 하, 한 번만…….”
“네가 힘든 상황이란 것도 짐작이 가고, 이번 일도 네 잘못만 있는 게 아닌 거 알아. 그래도 모든 일들이 다 조금씩 선을 넘었잖아. 왜 선을 못 지켜.”
왜 나 때문에 라파엘 헤인스워즈가 이딴 흠결을 만들어. 왜 다른 사람들이 네 험담을 하게 해. 왜 그게 내게까지 들려와. 단테는 그 말을 꾹 눌러 담았다. 그 말까지 하면 지금도 불안하게 떨고 있는 라파엘이 완전히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부임 초반이 중요하다는 충고가, 부드럽게 말했더니 별로 말 같지 않았어?”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팀장님 말씀이 말 같지 않다니, 제가, 어떻게 감히…….”
라파엘이 필사적으로 그의 말을 부인했다.
근신을 받고도 기어코 이곳으로 온 기대감을 모르지 않았다. 지난봄에 서로에게 새긴 흔적이 너무 커서 심지어 단테도 계속 보고 있자니 화가 누그러지기 시작했는데, 라파엘은 어땠을까.
하지만 지금은 단테가 어느 때보다도 매몰차게 밀어내야 할 때였다.
“그럼 돌아가. 가서 네 역할부터 잘해. 나는 보고 싶다면서 정신 못 차리는 후배 못 만나.”
“……팀장님, 제발…….”
“제도 오가는 훈련이 언제까지라고 했지?”
“두 달……, 입니다.”
두 달. 그즈음이면 단테의 업무도 마무리가 되어갈 시점이었다.
“앞으로 남은 두 달 동안은 서로의 일에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 게 좋겠다. 네 훈련, 그리고 내 일 제대로 마친 뒤에 보자.”
“…….”
“연락도 그때까진 최소한으로 하고.”
라파엘의 숨이 가빠지고 어깨가 들썩였다. 단테와 몸을 섞을 때와 비슷한 반응이지만, 얼굴이 하얗게 질려 고개를 젓고 있다는 점이 달랐다.
“혹시 나한테 지금 꼭 해야 하는 말 있어?”
분홍색 입술이 아주 작게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흐려지는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였지만, 정면의 단테가 라파엘보다 키가 작아 젖어 든 눈동자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단테는 느슨하게 풀리려 하는 손을 꽉 쥐어 다잡았다.
라파엘은 끝내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침묵을 잠시 기다려준 단테는 몸을 돌리며 냉정한 최후통첩을 내렸다.
“할 말 없다면 이만 돌아가.”
* * *
전보다도 더 꾹꾹 눌러 담은 메시지는 무시하거나 단답으로 일관했다. 망설이고 망설여 걸었을 전화는 그대로 끊었다.
라파엘 헤인스워즈.
화면 가운데에 떠 있던 이름이 그대로 사라졌다. 까맣게 액정이 꺼진 휴대폰을 내려놓고, 단테는 손끝에 힘을 주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가 살아온 시간을 통틀어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날 단테는 먼 길을 달려와 자신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라파엘을 무섭게 혼내고 밀쳐냈다. 보통은 섭섭하고 서러워 한동안은 연락을 피할 것이다. 그런데 왜 라파엘은 닫힌 문에 몸을 부딪치는 강아지처럼 계속해서 매달릴까.
마음이 불편했다. 결국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돌아간 라파엘의 모습 때문에 며칠간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라파엘은 헤헤 웃던 저번 주와는 정반대의 얼굴로 단테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생각이 점령한 영역은 점차 넓어져 일과 중에도 그의 모습이 한 번씩 눈 앞을 가렸다.
‘모든 일들이 다 조금씩 선을 넘었잖아. 왜 선을 못 지켜.’
라파엘에게 한 모진 말들은 어린 후배를 잡아주지 못하고 함께 선을 넘은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하다고 해서 다른 일이 자신을 도와주는 건 아니었다. 날짜가 다가올수록 정상회담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높아져만 갔다. 새 황제의 첫 회담을 단순히 수뇌부의 정치 활동이 아닌, 국민 모두가 참여하는 행사로 만들겠다는 황실의 기획이 이뤄낸 성과였다.
황제와 각국 대표자들이 만나는 사흘간 제국 곳곳에서는 각종 문화교류 행사가 이뤄지며, 크고 작은 지역 축제도 시기를 맞춰 개최될 예정이었다. 인구 이동이 늘어남에 따라, 군 역시 유사시를 대비한 대테러 종합훈련의 횟수를 늘려야 했다.
또한 커진 관심에 발맞춰 훈련의 촬영 및 보도와 같은 부수적인 요소가 더해지며 제도의 군인들은 예상치 못한 바쁜 시간을 보냈다.
제도 방위의 최전선에 있는 단테 베일리 대위와, 그의 팀이 투입된 C구역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단테는 데릭슨과 커티, 문제의 두 사람에게 공연한 다툼은 자제해달라고 진지하게 요청했다. 커티 쪽은 어깨를 으쓱이며 툭툭 걸던 시비를 멈춰주었다. 그러나 데릭슨은 여전히 단테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빡빡하게 이어지는 일정 가운데 데릭슨이 지휘 미스로 그 아래 팀원들과 삐그덕거리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 때문인지 데릭슨은 전보다도 더 날카롭게 굴었으며, 가끔은 그 태도가 C구역의 여덟 팀 사이에 짜증스러운 분위기를 만들기도 했다.
“베일리 대위.”
“대위 단테 베일리.”
“요즘,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좀 그런 것 같은데. 자네도 영 초반 같지 않고.”
데릭슨은 권위주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만큼 상관인 중령의 앞에서는 최소한 몸을 사렸다. 그런데도 중령이 단테를 불러 언질을 하는 걸 보면, 이제 겉으로 보기에도 무언가가 느껴지는 모양이다.
“시정하겠습니다.”
“종합훈련엔 사령관 각하도 오시네. 자네가 제일 신경 써야지.”
“예.”
오해의 잔재가 남아 있는 중령은 단테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하는 사람이지 않나. 더 잘해야지.”
“예, 알겠습니다.”
문득 중령의 말에서 묘한 위화감을 받았다. 말속에서 느껴진 알 수 없던 껄끄러움은, 떠올려 보니 데자뷰였다.
‘라파엘, 더 잘 할 수 있잖아.’
‘잘해. 라파엘. 지금이 제일 중요한 때야.’
그게 듣는 사람의 입장에선 이런 기분이었나. 단테는 씁쓸해졌다. 거리를 두어도 생각의 시작과 끝은 계속해 라파엘이었다.
“후…….”
단테는 두 손바닥을 얼굴에 세게 부딪쳤다. 라파엘에게 뭐라 할 처지가 아니었다.
‘나부터 정신 차려야지.’
온갖 잘하란 말을 쏟아냈으면, 최소한 라파엘이 자신을 보고 배울 만한 선배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얼굴 위에 늘 짓고 있던 가벼운 웃음을 띄웠다. 오늘은 입가를 억지로 당긴 근육이 조금 욱신거렸다. 만들어낸 미소를 유지하며 모여 있는 팀원들에게 다가갔다. 유쾌하고 털털한, 평상시의 팀장이었다.
“이제 겨우 두 달 남았다. 다들 힘내고, 오늘 하루도 잘해 보자.”
속으로는 라파엘이 아닌 자신에게 되뇌었다. 잘하자. 정신 차리자.
라파엘이 부재한 단테의 시간이 일주일가량 더 지나갔다.
라파엘의 부대는 새로 시작된 주에 다시 제도로 훈련을 왔다. 하루는 중대장인 밀러와 라파엘이 단테의 옆을 스쳐 간 적이 있었다. 그전까진 전화로 한참 말을 쏟아내곤 했던 밀러는 적당히 아는 척만 하고 지나갔고, 라파엘은 여러 표정을 비췄지만 결국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단테를 지나치자마자 얼굴을 돌려 간절히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런 일이 있던 직후라 팀원들도 전처럼 아는 척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귀가한 단테는 마음을 무겁게 누르는 어떤 불편함과 또다시 다퉈야 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날 라파엘에게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이후로도 라파엘은 스스로 연락을 줄였다. 단테를 지겹게 괴롭혔던 밀러의 연락 또한 멈췄다. 혼나고 나면 그 내용만큼은 철저히 지켰던 라파엘답게, 이제 업무에 흠 없이 집중하는 것 같았다.
‘……잘할 수 있었잖아.’
“라파엘 헤인스워즈답게 할 수 있었잖아.”
관사 창밖으로 내다본 하늘이 오랜만에 흐렸다. 지난봄 이후 비는 라파엘을 연상시키는 날씨가 되었다.
비뿐만이 아니었다. 라파엘이 한 달간 단테에게 마구 달려온 시간 동안 이 테이블에, 침대에 그의 모습들이 전부 기록되었다. ‘헤인스워즈.’ 하는 부름에 활짝 웃으며 돌아보는 모습, 어떻게든 단테와 오래 있으려 속이 빤히 보이는 수작을 부리는 모습.
마지막으로 떠오른 건 울음을 참는 서러운 모습이었다.
단테는 충동적으로 휴대폰을 켜고 메시지함을 열었다. 이틀 전 라파엘이 보낸 메시지가 마지막이었다.
[선배님, 소대에서의 생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뒤에는 많은 말을 눌러 담은 한 문장이 써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만 죄송해도 괜찮아.
통화 버튼과 답장을 적을 수 있는 키패드 사이에서 배회하던 손이 결국 아무 일 없이 멈추었다.
라파엘은 지금 잘하고 있다. 상처받았더라도 마음을 다잡고 소대장으로서의 생활을 다져나가고 있는데, 단테가 그걸 다시 흔들 이유는 없었다.
휴대폰이 화면을 뒤로한 채 뒤집혀 내려놓아졌다. 조금씩 쏟아지던 빗줄기가 점점 더 굵어졌다.
* * *
노크 소리를 듣고 단테는 고개를 들었다. 아주 느리고 힘없는 소리였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을 텐데, 하며 일어난 순간 단테는 스스로 어떤 기대감을 품고 있다는 걸 알았다.
“누구십니까.”
상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테가 문 너머를 향해 묻자 흠칫 숨을 들이마셨다.
복도가 있을 곳을 바라보던 단테는 짧은 망설임 뒤, 앞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현관으로 향하는 걸음마다 불안과 기대가 반씩 섞여들었다. 자신이 떠올린 사람이길 바라면서도, 정말로 그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또 그이길 바라지 않으면서도, 아니면 실망할 것 같았다.
단테는 문을 열었다.
“…….”
한 달쯤 전, 라파엘이 이 앞에 하염없이 서 있던 적이 있었다. 단테를 강간했다는 오해를 해 가족과 절연하고, 멍투성이 얼굴로 전역을 허락해달라 찾아온 날이었다.
그때의 그는 유복하게 자랐던 환경을 버리고, 평탄히 흘러온 삶에 전과가 더해졌으며, 좋아하는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잘못을 했다는 생각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라파엘…….”
지금은 그때보다 더 야위고 초췌한 얼굴로 나타났다. 푹신한 머리카락은 비를 맞아 엉겨 붙어 있고, 입술은 파리했으며, 군복 소매 아래로 고인 물이 뚝뚝 떨어졌다.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젖은 뺨을 감싸고 왜 그러느냐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을 만큼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단테는 앞으로 나가려는 손을 애써 막았다.
왜 또다시 여길 찾아온 거야. 밀어내야 했다.
“내가 네 일 끝나고 만나자고.”
“팀장님, 저, 열흘 전으로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 뒤 바로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설레발 치며 훈련관까지 찾아갔던 일, 거절했어야 하는데 신나서 안으로 들어갔던 일 전부 후회가 됩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팀장님과, 그날, 흐, 같이 저녁 식사했을 텐데, 팀장님과 즐겁게, 대화하고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제가, 바보같이, 망쳐서.”
라파엘의 입에서 푹 젖은 숨이 터져 나왔다.
“잘못했습니다…….”
라파엘은 이번엔 울음을 참을 겨를도 없어 보였다. 단테를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범람해 턱 아래로, 복도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열흘이 조금 넘는 시간을 버티다 결국 터져버린 서러움은 쉽게 갈무리가 되질 않았다. 창백하게 젖은 얼굴에 계속해 물기가 더해졌다.
“팀장님께서 팀과 일 모두 소중하게 여기시는 거 압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흐, 제 군 생활도, 잘하겠습니다. 뭐든 시키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제발…….”
“…….”
“제가, 어떻게 사죄드려야 다시 라파엘이라고 불러주실 겁니까.”
당장이라도 팔을 뻗어 안아주고 싶을 만큼 안쓰러웠다. 잔뜩 쏟아진 눈물로 얼굴이 얼룩덜룩하고, 그 사이로 드러난 표정은 겁에 질려 있다. 라파엘은 가는 나무뿌리를 쥐고 절벽에 매달린 것보다 더 절박하게 단테를 바라봤다. 그러다 결국 흐어, 아, 흐윽……. 하며 울음을 크게 터뜨렸다.
“팀장님, 흐, 팀장님. 아, 아…….”
듣는 사람마저 아픈 울음이었다. 라파엘은 한겨울에 호수로 떠밀린 사람처럼 온몸을 벌벌 떨었다. 단테는 놀라 눈을 크게 뜨며 한 발을 가까이 디뎠다.
안 되겠다. 안아줘야겠다.
이상한 선배에게 매일 귀찮은 연락을 받아도 상관없었다. 쓰러질 듯 우는 라파엘을 보자 모든 우선순위가 전복되었다.
“라…,”
라파엘. 그가 원하는 그 부름이 목 아래까지 찾아왔다.
그러나 끝내 마지막 걸음을 막은 건 라파엘이 찬 소대장 완장과, 가슴께에 붙은 R.헤인스워즈라는 이름이었다. 단테의 충동보다 우선시 되는 게 마땅한, ‘라파엘이 가진 것들’이었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네 일 잘 끝내고, 그때 다시 연락하는 거야.”
“팀장님…….”
라파엘이 서럽게 일그러져 얼룩덜룩해진 얼굴을 들었다.
“저, 저 그동안 많이 봐주셨잖습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제가, 앞으로는 말씀하시는 거 하나도 안 어기고 잘하겠습니다. 팀장님과 함께했던 한 달의 시간을, 이렇게, 흐, 사라지게 할 수는…….”
단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입을 열었다간 안쓰러운 후배를 끌어안고 말 것 같았다. 단테의 침묵을 거절로 이해한 라파엘은 떨리는 호흡을 내뱉었다.
“흐으…… 그, 그러면, 할 일, 훈련 마치고, 끅, 연락 드리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 겁니까. 팀장님. 살려주세요. 제가 흐,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라파엘이 늘 빛나던 연녹색 눈동자를 잔뜩 흐린 채 단테를 보았다.
“팀장님께 지금 제가 어떤 모습으로 보이고 있는지, 너무 무섭습니다……. 제가, 흐, 아윽, 아…….”
라파엘이 길잃은 아이처럼 울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보이지 않아 막막한 서러움이 울음에 가득 담겨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단테도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솟았다. 충동을 견디는 인내만큼 아랫입술이 짓물렸다. 다만 앞으로 뻗어져 그에게 닿은 손만은 말리지 못했다.
“내가 아끼며 가르친 헤인스워즈 소위는 누구보다 자신의 일에 열정적이었고, 무엇이든 잘 배워 나를 늘 뿌듯하게 해주었으며, 어느 부대로 보내더라도 사수로서 부끄럽지 않은 후배였어.”
“…….”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믿고 있고.”
단테는 라파엘의 팔에 손을 올렸다. 가슴 앞에 웅크려 모은 팔을 두드리는 손은 마치 그를 밀어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만 울고, 조금만 더 어른스럽게 행동하자.”
마지막 말은 라파엘보다는 스스로에게 되뇌는 것이었다.
“이제 돌아가.”
단테의 손이 라파엘의 마지막으로 팔을 두드리고 돌아왔다. 그가 물러난 자리에 투둑 눈물이 떨어졌다.
* * *
“팀장님도 나도 자세 이상하다고 끝까지 신중하게 잘 보라고 했지.”
“아, 아아. 부팀장님 아픕니다. 아.”
팀장 단테 베일리 대위, 부팀장 안젤라 해리스 중위가 이끄는 ODA-133의 2년차 캠벨 하사는 라파엘의 수습 종료 후 (딱히 바라진 않았지만) 다시 막내 자리를 되찾았다. 그리고, 막 훈련에서 돌아온 막내는 가벼운 염좌가 온 손목에 붕대를 감을 때보다 안젤라에게 뺨을 당겨지는 지금이 더 아프다고 호소했다.
오늘 팀은 오랜만에 무장을 한 채 헬기를 탔다. 팀원들을 싣고 날아오른 헬기는 어느 평지 상공에 멈춰 섰다. 팀장 단테의 신호가 떨어지자 헬기 양옆 문을 통해 로프를 매단 팀원들이 하강했다. 까마득한 높이를 다이빙하듯 거꾸로 내려간 용맹한 선배들을 보며, 고글과 마스크 아래 캠벨 하사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헬기 레펠을 유난히 무서워하며 역레펠 자세가 불안불안하다 싶던 그는, 결국 안정적인 착지 대신 풀썩 쓰러지듯 바닥에 떨어졌다. 다행히 심한 부상은 아닌지 재빨리 몸을 일으켜 총을 뽑고 주변 경계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헬기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팀장은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그는 인이어를 막고 부팀장에게 속삭였다.
‘앤지, 이따 들어가자마자 쟤 손목부터 봐줘.’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나랑 순서 바꿔. 내가 네 자리로 가서 캠벨 커버까지 칠 테니까 내 자리 부탁해.’
‘예.’
팀장은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본래 그녀의 차례였던 순서에 로프를 타고 아래로 쑥 내려갔다. 그리고 손목이 욱신거릴 막내를 위해 말한 대로 두 명분 몫을 했다.
덕분에 멀리서 훈련을 지켜보던 중령의 눈에 큰 실수는 띄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모든 포메이션을 머릿속에 담고 있던 팀원들에게는 제 역할을 못 하는 캠벨과, 그의 역할을 메운 팀장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넌 이따 팀장님 오시면 엄청 혼날 거다. 전에 헤인스워즈 혼내시는 거 봤지?”
“으아……. 화 많이 나셨을 것 같습니까?”
“팀장님 이런 데엔 가차 없기로 유명하셔.”
맞아. 진짜 무서워지시지. 다른 중사들도 한 마디씩 거들어 캠벨을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오늘은 비교적 큰 훈련이 있던 날이라 단테와 최고참 부사관인 로건이 함께 보고를 하러 갔다. 덕분에 연차가 엇비슷한 사람들만 남아 ‘반장 안젤라와 클래스메이트들’ 분위기가 났다. 물론 캠벨은 여기서도 가장 저학년 역할이었다.
“티, 팀장님 헤인스워즈 혼낼 때보다 더 화나셨을까요?”
“글쎄. 나는 헤인스워즈보다 상관을 둘이나 부려먹은 네가 더 괘씸한데, 팀장님은 어떠실지 모르겠네.”
“내가 뭘?”
단테와 로건이 문을 열며 들어왔다. 캠벨 하사가 평소보다 자세를 바짝 세워 일어났다. 캠벨과 단테의 눈이 마주쳤다. 평소와 다름없는 것 같으면서도 오싹하게 느껴지는 시선이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쭉 훑어 내렸다. 캠벨은 붕대 감긴 손을 급히 등 뒤로 숨겼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단테는 팔짱을 낀 채 뚜벅뚜벅 걸어왔다.
코앞에 멈춰선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로건을 제외한 이곳의 모두가 가장 두려워하는 어느 미소였다.
“발.”
“예……?”
“발이 땅에 붙어 있네. 다리를 다친 건 아닌데, 참 이상하지.”
팀장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눈을 접고 더 환히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캠벨의 눈에는 차라리 정색하고 호통을 치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두려운 모습이었다.
흔들린 캠벨의 시선이 도착한 건 단테의 뒤에 있는 로건 상사였다. 그도 단테와 마찬가지로 삐뚜름하게 웃으며 창밖을 턱짓했다.
“뛰어.”
체력 훈련 한 판 신나게 해보자는 의미였다. 캠벨은 어, 어어… 하다가 “예!”하고 급히 뛰쳐나갔다. 단테가 로건 상사를 돌아보았다.
“오랜만에 지옥 교관 좀 부탁해도 됩니까?”
“물론입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도 단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막내 하사는 오늘부로 새로운 공포로 인해 레펠에 대한 두려움을 잊게 될 것이다.
단테는 다른 팀원들을 적당히 격려하고 돌려보냈다. 모여 있던 인원이 해산한 후, 마지막으로 캠벨을 찾아 나서려던 로건 상사가 단테를 불렀다.
“참, 팀장님.”
“예.”
“전에 하신 말씀이 마음에 걸려서, 저도 건너 건너 좀 알아봤습니다만.”
“뭐 말씀하시는 겁니까?”
“헤인스워즈가 간 부대 말입니다. 거기 있는 부사관들 말로는 크게 사고 친 것 없이 잘하고 있답니다. 최근 들어서는 특히 차분해졌다고 했습니다. 아마 팀장님께만 좀 어리광부린 것 같습니다. 귀엽게 봐주십쇼.”
“……그렇습니까.”
라파엘의 이름을 듣자 손끝이 싸르르 차가워졌다. 스치듯 지나간 언급만으로도 단테의 머릿속엔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잘하고 있다니 다행입니다.”
그렇게 또 제도에서의 하루가 흘러갔다. 단테는 로건과 헤어지고 관사로 걸음을 옮겼다. 함께 있던 장소가 멀어질수록 팀원들 앞에서 지었던 유쾌한 미소가 사그라들었다.
라파엘은 꾹꾹 눌러 담아 보내던 연락마저 모두 거뒀다. 또다시 단테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 앞발로 머리를 감싸고 꼬리를 말아 숨긴 채 벌벌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단테는 가끔씩 라파엘과의 메시지함에서 메시지를 입력 중이라는 아이콘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끝내 메시지는 도착하지 않고 지워졌다.
그날 라파엘의 울던 모습은 이 복도를 지날 때면 한시도 빠짐없이 생각났다.
‘팀장님… 팀장님……. 잘못했습니다…….’
그가 가진 것을 지켜주려는 단테의 앞에서, 라파엘은 모든 것을 빼앗긴 것처럼 울었다. 순하고 겁이 많은 라파엘은 단테가 거부하자 끝내 손을 뻗어 붙잡지 못했다. 결국 그는 젖은 얼굴도 다 닦지 못한 채로 돌아섰다.
짧고 차가웠던 만남 뒤로 라파엘을 제대로 보지 못한 지 벌써 보름 가까이가 지났다.
덩치에 맞지 않게 눈물이 많은 라파엘은 단테의 앞에서 벌써 몇 번이나 울었다. 술에 취해서, 이상한 오해를 해서, 단테에게 억지로 끌려가서 등.
그 어떤 울음보다도 그날의 울음은 서러웠다. 보는 사람마저 아리게 만들 정도로 흐느끼면서도, 라파엘은 그를 매몰차게 밀친 단테를 애타게 찾았다.
단테는 이미 자신이 라파엘이라는 비에 젖어가고 있단 걸 알고 있었다. 그날만큼은 몸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많이 아팠다.
그리고, 늘 몸을 감싸던 기분 좋은 빗방울이 사라진 뒤에야 깨달았다.
[보고 싶습니다.]
그간 라파엘이 단테의 몫만큼 말해주어 그가 표현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말이었다. 그 말을 한없이 건네줄 사람이 사라지자, 뒤늦게 자신의 안에도 들어 있던 바람이 들렸다.
* * *
“팀장님, 제가 오늘 저녁 사드리겠습니다.”
“……훈훈한 내용에 비해 말투는 상관을 납치해갈 기세인걸.”
단테는 퇴근길을 불쑥 막아선 안젤라를 향해 황당하게 웃었다. 그녀가 흠, 하고 턱을 짚었다.
“그럼 학교 선배에게 조르는 걸로 할까요. 아니면 헤인스워즈보단 못하지만 일일 해리스 사위 해보시겠습니까?”
“밥 잘 사주는 선배 정도로만 하자. 제가 살 테니 가시죠. 뭐가 먹고 싶은데.”
예상대로 단테는 순순히 시간을 내주었다. 안젤라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비싼 거요.” 단테가 또 한 번 피식 소리를 냈다.
상관을 벗겨 먹겠다는 당당한 선언에 비해 두 사람은 가까이에 있는 평범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사령부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식당에는 두 사람뿐만 아니라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더러 보였다.
훈련 초반엔 끝나고 팀원들과 다 같이 식사도 하곤 했으나, 회담이 다가올수록 훈련의 강도가 세지며 일찍 들어가 쉬는 편을 선호하게 되었다. 그러니 단테 역시 누군가와 마주 보고 식사를 하는 게 오랜만이었다. 아마 마지막이 지난 휴일의 라파엘……. 또다시 일상에 묻어 있는 그가 떠올라 씁쓸해졌다.
주문을 마친 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그가 말을 걸었다.
“사석에서 보는 건 오랜만이네. 훈련은 할 만해?”
“옆에서 매일 보시면서. 선배는 할 만합니까?”
“네가 옆에서 보기엔 어때 보여.”
“헬기 뜰 때마다 조종석 탈취해 제도 밖으로 튀고 싶어 보이시던데요.”
“오… 몇 년 같이 동고동락해서 그런가, 우리 서로 말하지 않아도 생각이 통하네.”
제도에서의 시간을 반기던 팀원들도, 뭐든 좋던 초반이 지나가자 슬슬 단점을 마주했다. 대표적으론 보는 눈이 지나치게 많다는 점이었다. 하필 단테가 얼떨결에 완장을 하나 더 차는 바람에 ODA-133에 쏠린 이목이 더욱 커지기도 했다.
한 번씩 자리를 비우게 되는 팀장을 대신하는 안젤라도 이전보다 업무가 과중해졌다.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팀장을 지탱해주어 고마울 따름이었다.
“워낙 하루하루 정신없이 지나가서 너한테 선배 소리 듣는 것도 오랜만인 것 같다.”
“바쁘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혼났으니까 며칠 얼어 있기도 했고요.”
“정말? 뭐야, 다른 때는 금방 털어버렸으면서 왜 그랬어.”
“어쨌든 제가 잘못해서 저보다 더 어린 후배가 혼날 일을 만들었잖습니까. 사실 그쪽이 더 신경 쓰였습니다.”
단테의 식기가 잠시 멈칫했다. 그를 눈치챈 안젤라가 슬그머니 질문을 꺼냈다.
“헤인스워즈… 그 뒤로 많이 혼내셨습니까?”
“…….”
“달래주셨어요? 걔가 그렇게 안 생겨선 마음 약하잖아요.”
“짧게 얘기는 했어. 네가 저번에 지적했던 대로 우리 둘 다 지나치게 격의 없어진 것 같아서 바쁜 일 끝날 때까지는 거리 두기로 했고.”
“아…. 그렇게까지 하시란 의미로 말씀드린 건 아니었는데. 사석에서야 친하게 지내셔도 상관없죠.”
“걔도, 나도 이게 맞는 것 같아.”
“……과한 참견일 수 있지만, 그래도 두 사람 반년간 지내던 모습을 본 입장에서 전 아닌 것 같아요.”
하아……, 안젤라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표정엔 숨기지 못한 죄책감이 드러나 있었다.
“사실 계속 신경 쓰여서 얼마 전에 연락을 했어요.”
티 내지 않으려던 노력이 무색하게 라파엘의 근황이라는 말에 바로 고개가 들렸다. 뒤늦게 다시 태연함을 가장해 말했다.
“나 말고도 챙겨줄 선배 충분히 있었네. ……그래서?”
“그냥 서로 잘 지내냐고 물어봤습니다. 할 말 있어 보이는데 끝까지 못 꺼내기에 그러려니 하고 끊으려 했는데요.”
“…….”
단테는 어쩐지 이다음으로 이어질 말을 알 것 같았다. 그 말을 전하는 라파엘의 목소리도.
“팀장님 잘 계시냐고 물어보더라고요.”
‘…팀장님은, 잘 계십니까?’
그가 떠올린 목소리는 안젤라의 말과 함께 귓가에 재생되었다.
“그래서, 음, 둘이 아직 연락도 안 한단 걸 알았고, 헤인스워즈 좀 봐주시라고 청탁 드리려 밥 사드린다 한 겁니다.”
“그런 거였어? 청탁받는 거라면 많이 먹어야겠네.”
“많이 드세요.”
물론 둘 다 빈말이었다. 현재 하는 모든 훈련 과정은 가벼운 몸이 필수였고, 둘 다 내일을 위해서라도 적정량 이상의 식사는 스스로 자제해야 했다.
그러나 라파엘이 안젤라를 통해 자신의 안부를 물었다는 말은 단테에게 그마저의 식사도 멈추게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연락을 나눠 서로의 일과를 알고 있던 때와 지금 두 사람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가 되었다. 속을 싸르르 조이는 불편함이 더 이상 음식이 넘어가지 못하게 막았다.
서럽게 우는 걸 안아주기는커녕 매몰차게 밀어냈는데도 왜, 그리고 어떻게 자신의 소식을 궁금해하는 걸까.
“……라파엘이 거기서 적응 마칠 때까지만이라도 지금 이 정도 선은 필요하다고 생각해. 이름에 붙은 집안의 무게를 생각하면 책잡힐 일 만들지 않도록 도와주는, 게 맞고.”
꺼내기 싫은 말을 붙잡듯 목이 한차례 막혔다. 단테의 말을 들은 안젤라는 턱을 괴며 맥주 냉장고를 흘끔 보았다. 내일도 두 사람 모두 훈련이 있는 게 한이었다.
“선배라면 그런 생각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고,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서 단테가 좋은 사람이긴 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에겐 모두 좋은 사람인 그는 자기 자신에겐 아니었다.
“네, 물론 선배 말이 모범 답안이에요. 그래서 헤인스워즈 잘되라고 밀어내주고 나니까 선배는 마음 편해요?”
“당연히 불편하지만 어쩔 수…….”
“제가 말 꺼낸 게 그거 때문이에요. 뭐 하러 그래요. 걔 집안, 미래 생각해서 나쁜 선배 자처한다고 누가 박수라도 쳐줍니까. 뭐 좋을 게 있다고 혼자 바싹바싹 말라 죽어갈 정도로 속앓이하며 남을 챙겨요.”
“……안 그랬어. 바싹바싹… 그 정도는 아니야.”
“아니긴. 옆에서 매일 보고 있었다니까요.”
단테는 자신의 얼굴을 짚었다. 숨긴다고 숨겼는데 그게 고스란히 다 드러나고 있던 모양이다. 하긴, 로건도 안젤라도 걱정으로 안 하던 참견까지 해주었다.
“이러다 헤인스워즈가 아예 상처받아서 등 돌리면 그럼 선배에겐 대체 뭐가 남아요. 저는 헤인스워즈보다 선배가 더 걱정돼요.”
“…….”
단테는 생각지 못한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라파엘이 나를 돌아선다고…….
손가락이 석회처럼 하얗게 굳었다. 딱딱하게 변한 손끝이 바스라져 떨어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또다시 라파엘의 얼굴이 떠올랐다. 늘 선명하게 시야를 메우던 얼굴이 오늘은 다소 흐릿했다.
단테는 원래 라파엘을 밀어내려 했었고, 지금은 과거에 어쩌면 바랐을 형태와 비슷해졌는지도 모른다. 제국군 내 대부분의 사수와 후배는 이 정도의 관계로 끝나곤 했다. 6개월의 수습 기간 동안 동고동락하고, 그 뒤에는 적당히 연락을 유지하다 서로 데면데면해진다. 라파엘과도 그런 평범한 선후배 관계로…….
“……아.”
단테는 문득 깨달았다. 라파엘이 돌아서면 두 사람의 관계는 끝이 난다. 그건 단테가 라파엘을 밀어내는 것과는 달랐다. 단테는 돌아선 라파엘에게 그처럼 적극적으로 돌진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었다.
라파엘은 수습 기간과 함께 수명을 다한 두 사람의 인연을 줄곧 두 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단테는 느슨하게 쥐고 있던 끈을 팽팽히 붙잡아 유지하던 건 라파엘뿐이었다. 두 사람을 잇고 있던 건, 끊임없이 내리는 비 같은 라파엘의 애정이었다.
단테는 이제야, 라파엘이 쏟아낸 애정으로 유지되었던 관계의 상실이 느껴졌다.
* * *
지나간 시간에 비례해 라파엘에겐 겹겹이 상처가 쌓였을 것이다.
안젤라와 헤어진 뒤 귀가해 관사 침대에 누운 단테는 얼굴을 깊이 쓸어내렸다. 이불 위로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은 빈손이 툭 떨어져 내렸다.
조금 덜 모질게 말할 걸 그랬나. 이름만이라도 불러줄 걸 그랬나.
안젤라의 말대로 서로 편해질 방법은 명확했다. 라파엘이 잘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그 선배의 연락은 차단한 채 지금까지처럼 라파엘을 만나면 되는 것이었다. 전역까지 특수부대에 있을 단테는 그 선배와의 관계에 미련이 없으며, 소대의 일은 라파엘이 알아서 하도록 두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둘 사이에는 딱히 거리낄 것이 없다. 라파엘 역시 그렇게 단테를 만나는 편이 훨씬 행복할 것이다. 라파엘의 공적인 업무며 주변 평판에 아무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단테는 베개로 조소를 흘렸다. 자신이 그럴 수 있을 리가.
라파엘의 반만큼이라도 있는 그대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 상황이 오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도 끝내 자신은 라파엘의 주변을 외면하지 못한다.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에게 달려오는 라파엘이기에 더욱 그랬다.
단테에게도 라파엘에게 손을 뻗고 싶다는 충동이 매 순간 찾아왔다. 충동은 라파엘의 빈자리를 자각한 이후로 더욱 커졌다. 어쭙잖은 ‘좋은 선배’의 마음은 라파엘을 단순히 후배로만 보지 않게 되며 수없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에겐 또한, 보고 싶다 해서 바로 동작으로 실행하지 못할 이유가 있었다. 어쩌면 그것도 자신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성당에서 학군단, 사관학교, 그리고 SAG에 이르기까지. 그는 스스로를 좋은 형, 좋은 선배가 되도록 몰며 자라났고, 또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되 타인에게는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은 뭐든 이르게 시작해야 했던 그를 버티게 해주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남을 위한다는 핑계로 쌓은 지독한 자기방어였다. 지금까지 라파엘과의 교제를 거절한 것도, 그 이전엔 깊은 마음이 오고 가지 않는 만남만을 반복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또한, 지금 라파엘을 밀어내는 행동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눈물 많은 라파엘보다 훨씬 더 겁이 많았다.
휴대폰을 열어 확인한 시간은 9시였다. 단테의 9시는 라파엘을 만나기 이전에 그랬듯 고요해졌다.
익숙해진 적막이 십수 년 전 성당을 처음 나왔을 때처럼 낯설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