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26)

2-4.

며칠이 더 지나고, 훈련도 이제 루틴이 잡혀 막바지 과정만을 반복했다. 몇 달간의 고생을 대가로 C구역의 전 인원들은 주어진 배치 구역 경계가 완전히 몸에 익었다. 다른 구역도 이 강도로 훈련이 진행되었다면, 간 크게 정상회담장에 발을 들인 테러범 중 살아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밀러에게는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로건 상사가 말한 부사관을 통해 동향을 알아본 결과, 라파엘은 이제 소대 생활에 완전히 적응한 것으로 보였다. 그가 보기에도 라파엘과 밀러 사이에 마찰은 분명 있던 듯했으나 그것도 어느 정도 완만해졌다고 했다.

옛 사수와 후배가 나누기엔 지나치게 친밀했던 연락들은 완전히 사라졌다. 단테는 해가 완전히 진 시간이면 버릇처럼 메시지함을 들어갔다. 그곳에 간혹 떠 있던 ‘입력 중’ 아이콘도 이제는 잘 보이지 않았다. 한 번씩 실수로 키패드를 누르기도 했으니, 이제 아이콘이 더 자주 뜨는 건 자신보다 라파엘의 화면일지도 모르겠다.

‘네 훈련, 그리고 내 일 마친 뒤에 보자.’

단테가 선언한 두 달의 시간이 몹시 느리게 줄어갔다. 그러나 단테는 아직도 먼저 손을 뻗지 못했다. 이대로 라파엘과 멀어지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책임감’이 또다시 단테를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결말이 지어질 두 달 뒤가 빨리 오길 바라기도 하면서, 천천히 다가오기를 바라기도 했다. 용기 내지 못한 죄의 심판을 앞둔 죄수가 된 기분이었다.

* * *

정상회담에 투입되는 인원들이 사용하는 훈련장은 통합특수전사령부 예하 대테러본부에 위치해 있으며, 그 주변으로 제도방위군본부 등 제도 내 군의 주요 시설이 모여 있다. 여기서 제도 중심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면 제국군에게 주어진 관사가 나왔다.

훈련장을 나서 관사로 돌아가려던 단테는 사령부 앞에서 얼굴은 낯설되 목소리는 강제로 익은 사람을 마주했다.

밀러 선배였다.

분명 단테를 발견한 것 같은데, 그는 빠르게 눈을 돌리더니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어느 순간부터 그와 통화할 때마다 들었던 위화감이 불쑥 크기를 키웠다. 사실 가장 크게 떠오른 건 라파엘에 대해 불평하던 그의 모습이었다.

뭐라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이미 단테는 성큼성큼 그를 따라잡았다.

“안녕하십니까.”

“어, 어어. 뭐야. 왜 그쪽에서 와.”

“훈련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선배님이 보여서 왔습니다. 제도로 교환 훈련 오신 겁니까.”

“맞아. 이번 주 훈련 일정 끝나서 보고하러…….”

얼핏 느꼈던 대로, 전화로 제게 서슴없이 별 얘기를 다 꺼냈던 것에 비하면 그는 실제로 단테를 마주하자 껄끄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하긴 라파엘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가 한 행동들 또한 떳떳하지만은 않았다. 이제 잘하고 있다는데도 설마 계속 그러는 건 아니겠지……. 단테는 그의 앞을 막아선 채 가늘어지는 눈을 숨기기 위해 엷은 미소를 띠었다.

“선배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뭔데. 바쁘니까 짧게 말해.”

“헤인스워즈 소위는 이제 군 생활 잘합니까.”

“뭐야, 갑자기 그… 소위 얘기를 꺼내고. 뭐, 어어, 괜찮지. 역시 네가 한 번 혼냈냐. 그러니까 좀 고분고분해졌긴 하더라.”

그가 목소리를 한껏 낮춰 말했다.

고분고분? 의아한 말을 들은 단테의 눈썹이 구부러졌다.

“정신 빠졌다고 말씀하셨던 부분은 좋아졌습니까. 중대장에게 덤볐다는 말씀도 있으셨잖습니까.”

“야, 여기 사령부인데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크게 말해. 소리 낮춰. 내가 분명히 잘한다고 말했잖아!”

이게 왜 사령부에서 못 할 말이지. 밀러가 저쪽으로 가서 말하자며 팔꿈치를 잡아당겼다. 단테는 그의 손에서 팔을 빼냈다.

“바쁘시다 하셨으니 여기서 말씀해주십시오. 헤인스워즈가 실수했다고 혼내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번엔 보고서를 아예 올리지 않았다고…….”

“너, 너 누가 들으면 오해하게 말한다? 정확히는 보고가 빠졌다 이거지. 이제 막 수습 마치고 온 놈이 두 손으로 들고 오진 못 할망정 책상에 올려두었습니다, 하는 게 말이 되냐? 건방지게… 상관이 어디 있던 찾아서 바쳐야 될 거 아냐. 우리 때 생각하면 상상도 못 할 일이잖아.”

단테가 억지로 띠었던 미소가 차츰 거둬졌다. 상명하복이 절대적인 군대에서 라파엘이 잘했다곤 볼 수 없지만, 그걸 아예 누락으로 과장하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그럼, 헤인스워즈는 실수한 게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뭐? 제때 안 올라왔다니까 뭘 들었어?”

“그게 부하 소대장에게 휴가 중 근신을 줄 만한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상체를 뒤로 물린 밀러가 눈썹을 꿈틀했다. 단테의 안에서 점점 더 의아함이, 아니, 의심이 커져갔다. 단테의 표정을 본 밀러가 제 발 저린다는 듯 외쳤다.

“겨우 그걸로 근신 주고 그랬는 줄 알아? 시키는 거 안 들은 일도 있고 해서, 부임 초반이니 군기 좀 잡은 거지. 이제 알았으면 비키…….”

“헤인스워즈가 어떤 명령을 안 들었습니까.”

이 순간 떠오른 건, 마지막으로 꼭 해야 하는 말이 있냐는 물음에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던 모습이었다.

“부대 안의 일까지 내가 너한테 말해줘야 되냐?”

“…….”

“너… 뭐야. 조금 전부터 표정이 왜 그따위야. 어?”

단테는 그에게 한발 다가갔다. 같은 직급, 햇수로 1년의 차이가 있더라도 특수부대에 7년을 있던 작전팀장의 위압감과 비교하기는 어려웠다. 차갑게 굳은 얼굴도 한몫을 했다.

“오늘은 들어야겠습니다.”

“뭘…….”

“제게 말하지 못할 명령 내리셨습니까?”

단테의 눈이 형형해졌다. 선배에게 하기엔 불손한 태도였으나 이제는 상관없었다. 밀러가 시선을 다잡고 뻣뻣하게 목을 뺐다.

“단테 베일리 대위.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지금 다른 부대 상관과 부하의 일에 개입이라도 하겠다는 말로 들리는데? 그건 내 소관이야. 원래 이렇게 경우 없는 사람이었나?”

“먼저 절 개입시킨 건 선배십니다. 제게 뜬금없이 연락해 헤인스워즈 얘기 꺼내시지……!”

“아 씨!”

단테의 입을 틀어막으려는 듯 손바닥이 다가왔다. 그러나 단테가 손목을 잡아채는 게 먼저였다.

“여기서 그 이름 좀 그만 부르라고! 버릇없는 건 둘째 치고, 쌍으로 같이 진급길 막힐 일 있어? 너야 이미 끈 떨어진 신세 됐다지만,”

“선배님.”

그의 손목을 쥔 손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

“다시 묻겠습니다. 라파엘에게 무슨 짓 하신 겁니까.”

“너 아까부터 내가 지금 괜히 부하 잡았다는 말투다? 이게 에프런에게도 막 대한다더니, SAG 가니까 선배가 선배 같지도 않아? 그… 소위가 너한테 딱 이상한 거 배워 왔나 본데.”

하, 데릭슨 에프런. 둘이 끼리끼리 논다더니 아주 똑같았다.

‘라파엘, 무슨 일 있어?’

‘음……, 사실 조금 힘든 것 같습니다.’

라파엘과의 지난 대화가 불현듯 다시 떠올랐다.

라파엘 헤인스워즈 이 멍청이. 상관이, 중대장이 이 모양이라고 차라리 나한테 말을 했으면…….

“예. 제가 가르쳤습니다.”

단테라고 대단한 게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군인의 생태는 라파엘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특히나 이런 종류의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도.

“그러니 앞으론 제 후배에게 할 헛짓거리 제게 하십시오.”

“뭐…….”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평생 꺼내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말을 꺼냈다.

“장인어른이 아들에겐 엄하신데.”

단테는 입가를 뻣뻣하게 올렸다.

“제겐 상당히 관대하십니다. 소위에게 명령하신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직급도 더 높은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일이 많지 않겠습니까.”

“뭐, 뭐야. 너 변호사랑 헤어졌다는 소문 분명히 들었는데. 한 번도 안 만나는 걸 보니 깨지고 헤인스워즈랑 척진 게 확실하다고…….”

“…….”

하……. 단테는 이제야 그가 학창 시절에 접점도 없던 후배에게 불쑥 연락을 했다가, 또 연락을 뚝 끊어버린 전모까지 알았다.

허탈하고 한심한 웃음을 뱉은 단테는 그대로 대답 없이 뒤를 돌았다.

“야, 자, 잠깐만. 베일리, 야……!”

저딴 새끼 말을 믿고 라파엘을 몰아붙인 자신도 용납이 되질 않았다.

* * *

단테는 정신없이 거리를 달렸다. 군복을 입고 대로변을 가로지르는 군인에게 시선이 몰리며 ‘어, 대테러훈련 대위……’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의 신경은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손을 뻗어 막 옆을 지나가는 택시를 급히 잡아탔다. 내린 곳은 라파엘이 제도에 머물 때마다 사용하려 장기 투숙을 걸어놓은 호텔이었다.

단테는 라파엘이 몇 호실에 머무는지 알고 있었다. 이전에 라파엘이 오고 싶으시면 언제든 오시라며 아예 여분의 카드키를 쥐여주었기 때문이었다.

단테는 계단을 올라 낮처럼 환하게 불을 밝힌 로비로 들어섰다. 안내데스크 왼쪽 옆으로 난 계단과 그 옆에 설치된 엘리베이터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것처럼 성큼성큼 올라갈 용기가 나질 않았다.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작전에 투입될 때보다 더 큰 불안이 발목을 붙잡았다.

라파엘은 이렇게 찾아온 자신에게 어떤 반응을, 얼굴을, 감정을 보여줄까.

그는 지금까지 이런 초조함을 품고 자신의 집 앞에 찾아왔던 걸까. 처음 강간 오해를 했던 날과 며칠 전 울며 돌아가야 했던 날. 라파엘은 이렇게 어려운 걸음을 벌써 두 번이나 해왔다. 그 중 두 번째엔 엉엉 울던 채로 매몰차게 밀쳐졌고…….

어쩌면 라파엘은 이번에야말로 마음을 꺾을지도 모르겠다. 애정을 쏟아붓다 못해 헌신했던 상대에게 실망해 돌아서더라도 단테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이번에야말로 자초지종을 물어 듣고, 그게 안 된다면 사과만이라도 하자. 단테가 무거운 걸음을 옮기려던 차였다.

“……단테 베일리?”

누군가가 로비 한쪽에서 단테를 불렀다. 단테는 황급히 뒤를 돌았다.

이곳에 와서 만나려 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단테의 눈을 커다랗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이름을 부른 남자는 단테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환하게 웃었다.

“단테 형, 형 맞지? 형!”

“어…….”

십여 년 전까지 성당에서 함께 자랐던 동생이었다. 천방지축에 어머니 속을 제법 썩이던 그가 번듯한 슈트를 입고, 구두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동생을 이런 곳에서 만나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7, 8여 년 만의 재회에 대한 놀람은 잠시 이곳에 온 이유를 밀어냈다. 단테는 별수 없이 걸음을 잠시 멈추고 동생의 앞에 섰다.

“오랜만이다. 다른 지역에 있다고 들었는데, 제도엔 언제 왔어?”

“우리 의원님도 정상회담 준비 중이시라 따라왔지. 형은 왜 여기 있어? 헉, 혹시 이 호텔에 테러범이라도…….”

“아니야. 절대 아니야.”

훌쩍 큰 키와 입고 있는 옷은 바뀌었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황당한 상상력은 여전했다.

그가 국회의원 비서실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었다. 그는 모시는 상사의 지역구를 따라 지방으로 내려가야 했고, 단테도 작전지를 옮겨 다니는 바람에 별수 없이 만남이 뜸했던 동생이다.

“그렇구나. 일하는 건 괜찮아?”

“응. 할 만해.”

그가 단테에게 조금 더 친근하게 다가섰다.

“여기도 엘리트주의며 혈연, 지연이 있어서 차별이 없다고는 못하겠는데, 총칼 들고 싸우는 형만 하겠어. 어디 아프거나 다친 덴 없는 거지? 나 형 군복 입은 모습 오늘이 처음이야. 멋있다.”

“멋있을 거 없어. 사람이랑 말로 싸우는 게 더 정신 소모가 크지. 벌써 이렇게 자리 잡았을 줄은 몰랐네. 장하다.”

“응…….”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동생이 스르르 미소를 지었다.

모시는 국회의원을 수행해 여기까지 왔다고 했나. 웃고는 있지만 피로한 기색이 군데군데 보였다.

“상사는 괜찮은 사람이야?”

“응. 우리 의원님 인간적으로는 참 괜찮은 사람이야. 가끔 의욕이 앞서면 말부터 훅 튀어나오고 그걸 수습하는 게 비서실이라는 걸 빼고는……. 지금도 수습하러 가던 길이란 것도 빼고는…….”

동생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거기도 뭔가 복잡한 사정이 있는 모양이다. 단테는 그를 따라 어색하게 웃었다. 어쩐지 C구역 여덟 팀을 맡은 중령이 떠올랐다.

“그래도 지금이 좋아. 내가 번 돈 성당에도 보내고, 일하다 보면 힘들긴 한데 뿌듯한 순간도 분명 오고.”

“그래. 언제 이렇게 다 커서는 멋있게 일하고 있어. 잘하고 있네, 내 동생. 자랑스러워.”

그의 얼굴에 단테와의 우연한 만남보다 더 기쁜 미소가 퍼져나갔다. 그 반응을 보며 단테는 동생에게 자연스레 술술 나간 이 말이, 사실은 다른 누군가에게 해주고 싶어서 줄곧 눌러놓았던 말임을 깨달았다.

“형한테 칭찬받으니까 진짜 뿌듯하다. 우리 어릴 땐 형이 다 챙겨주는 사람이었잖아.”

“그 말은 나한테 말고 성당에 가서 해야지. 시간 나면 어머니께 다녀와. 어머니도 너 많이 보고 싶어 하셔.”

“응. 정상회담 끝나고 들를 수 있었으면 좋겠어. 나도 엄마 보고 싶다……. 거기에서 먹는 감자 수프가 제일 맛있다는 거 왜 그때는 몰랐을까.”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곧 얼굴에 떠오른 그리움을 갈무리했다.

“형, 나 이만 가 봐야 돼. 일하다 나온 거라서.”

“응. 알겠어. 몸조심하고.”

“걱정 마. 형도 몸조심해. 다치지 말고.”

작별 인사를 하고 잠시 머뭇거리던 동생은 팔을 벌려 단테의 허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뺨을 꾹 눌렀다.

“……가족 얼굴 보니까 너무 좋다. 요새 좀… 많이 지치긴 했거든.”

동생이 말썽꾸러기이긴 하지만 이렇게 살갑고 어리광 많은 성격은 아니었다. 단테도 파병 후 몸살을 앓을 땐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파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성당에서 부대끼던 체온이 그리운 적이 많았다. 그는 품에 들어온 등을 토닥였다.

“충분히 잘하고 있어.”

“응……. 형, 사랑해.”

이것도 들으리라 생각해 보지 못한 말이었다. 심지어 단테도 어머니에게조차 제대로 해보지 못한 말이었다.

이…런 말을 여기서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머뭇거리던 단테는 형으로서의 역할을 떠올렸다. 그리고 두 팔에 힘을 조금 더 주며 말했다.

“나도 사랑해.”

그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충격에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불과 한 달 전까지 들어왔으며 바로 조금 전까지도 머릿속에서 재생되던 익숙한 목소리였다.

단테가 그 방향을 돌아봤다.

“아…….”

“…….”

라파엘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서 있었다. 커다랗게 뜬 눈, 턱, 하얗게 질린 두 손, 어디 하나 떨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벌어진 입에선 가느다란 숨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라파엘은 호흡조차 멈추고 단테를 보았다. 어느 날 갑자기 신문에 ‘헤인스워즈 가문, 부도!’라는 기사가 실려도 저런 표정은 아닐 것이다.

“……라파엘.”

그제야 라파엘이 뱉어내듯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단테가 한발 다가가자 몸을 성큼 뒤로 물렸다.

“…….”

눈동자는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분주하게 진동했다. 그러다 곧 입술이 괴롭게 깨물렸다. 조금 떨어진 자리의 단테에게도 우득, 살갗을 무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어둡게 가라앉은 연녹색 눈동자에 세상 모든 고통과 설움과 번뇌와 아픔이 담겼다. 그는 경건히 기도를 드리다 제단 앞에 강림한 신에게 뺨을 맞은 듯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출입구를 향해 달리는 걸음이 단테가 시켰던 훈련의 성과만큼 빨랐다.

“라파엘!”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라파엘을 향해 단테는 유리 구두 한 짝을 든 것처럼 손을 뻗었다. 목소리가 충분히 들릴 거리이건만, 그는 단테의 부름을 무시하고 도망쳤다.

“자, 잠깐만, 나도 이만 갈게. 연락해.”

“뭐야? 형, 왜 그래? 저 사람 테러범이야?”

“아니야! 테러범이 저렇게 순하고 예쁜 얼굴일 리가!”

“뭐?”

단테는 얼기설기 인사를 남기고 라파엘의 뒤를 따라 급히 로비를 뛰쳐나갔다. 군홧발이 바닥을 박차는 소리 뒤로 로비엔 작은 중얼거림만이 남았다.

“아니… 저쪽에서 나 엄청 노려보던데, 대체 어디가 순해…….”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호텔 주변은 사람들로 붐볐다. 단테는 빌딩 사이로 뛰어가는 복슬한 금발 머리를 발견했다. 왕왕 돌진할 때도 빨랐던 후배는 도망칠 때는 더 빨랐다.

“라파엘!”

있는 힘껏 이름을 불러도 라파엘은 돌아보기는커녕 도망치기만 했다. 골목을 꺾을 때 얼핏 보인 표정은 절망에 물들어 있었다. 라파엘에게서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내가, 그 해맑던 후배를 저렇게 만들었구나.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과 함께 몸이 멈췄다. 조금만 더 따라가면 붙잡을 수도 있었으나, 순간 사라진 용기가 다리를 옭아맸다. 그 잠깐의 망설임 사이에 라파엘은 단테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단테는 그가 사라진 쪽으로 급히 따라갔다. 그러나 어디에도 불쑥 솟은 환한 금발은 보이지 않았다. 초조하게 주변을 둘러본 단테는 우선 가장 가까운 골목으로 뛰어 들어갔다.

주변을 한 시간 정도 헤매자 이마에서 여름처럼 땀이 비 오듯 떨어졌다. 몇 달 전, 샤워장에서의 해프닝으로 라파엘이 도망쳤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인적이 없는 외길이기라도 했지, 이곳은 제도 번화가 한복판이었다.

호텔 주변을 몇 번이나 돌고 주변에 들어갈 만한 건물을 전부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라파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해 지나가던 순경에게 ‘혹시 중범죄자 추적 중이십니까? 협조가 필요하십니까?’라는 질문만 세 번을 받았다.

군복을 입은 채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뛰어다니는 군인―그것도 특수부대임이 분명한―을 보고 충분히 할 수 있는 오해였다. 정상회담 홍보와 함께 대테러부대, 즉 특수전사령부의 간판인 SAG를 필두로 한 대대적인 선전이 이루어졌다더니 성과가 하필 이렇게 드러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급함은 더해졌다. 머릿속에서 마지막으로 본 라파엘의 표정과 현관 앞에서 쫓겨났을 때 보였던 표정이 겹쳐졌다. 라파엘은 그로 인해 받았던 상처 위를 또다시 날카로운 칼로 헤집어진 것처럼 아픈 얼굴이었다.

“……또 어디 박혀서 울고 있는 거야…….”

다시 발을 떼려는 순간, 언젠가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라피는 화장실에 있을 거예요. 옛날부터 눈물은 많은데 울면 더 혼이 나서 욕실에서 물을 틀어놓고 우는 게 습관이 되었거든요.’

물……. 물소리…….

단테는 이 주변 제도 지리를 떠올리다, 다시 땅을 박찼다.

* * *

하늘 끝에 어렴풋이 걸려 있던 해가 지고, 제도를 더욱 화려하게 만드는 밤이 찾아왔다. 그리고 단테는 어느 어둑한 길목 앞에 숨을 몰아쉬며 멈춰 섰다.

한 시간가량을 더 주변 일대를 뒤진 끝에 그는 벤치 위에 몸을 웅크리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커다란 강아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앞에는 공원의 분수대가 시원하게 물줄기를 뿌리고 있었다.

“……이 근처 물 나오는 곳은 다 뒤졌어.”

“…….”

“여기 있었네.”

무릎을 모아 안은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넓은 어깨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단테는 그의 앞에 서서 라파엘에게 손을 뻗었다.

“그만 울…….”

탁.

라파엘이 가까이 다가온 손을 힘없이 밀어냈다. 거친 거부는 아니었지만 라파엘이 처음으로 단테에게 보인 분명한 거절이었다.

“제가, 끅… 그 호텔에, 흐윽, 있는 거, 아시면서, 꼬혹, 거기서, 다른 사람을, 만나셔야 했, 습니까.”

라파엘이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단어 하나마다 설움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괜찮, 흐, 다고 하면서도, 저만, 흐, 일방적으로, 팀장님 좋아하는 거, 정말로, 상처 안 받는 줄, 아십니까. 흐흑…….”

라파엘이 젖은 숨을 토해냈다. 쉰 목에서 계속해 꺽꺽 울음이 쏟아져 나왔다.

“탑 포지션이, 좋흐, 셨으면, 바꿔 드렸을, 겁니다. 끅, 흐윽……, 아니면 덩치가, 작은 사람이, 좋다고, 흐, 미리, 말씀해 주시죠, 그럼, 포기라도 했을 텐데, 저는, 흐으, 흐어, 아, 흐…….”

어깨와 등이 동시에 간헐적으로 들썩였다. 라파엘은 결국 토해내듯 흐어엉, 울음을 터뜨렸다. 흐어, 어, 어어엉……! 늦은 시간이라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누가 보아도 이 장면은 단테가 라파엘을 몹시 괴롭히는 모양새였다. 사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저 이제 팀장님, 흐어어, 안 좋아할 겁니다! 허엉, 정말로 안 좋아할 겁니다…….”

흐어어엉, 어어엉, 울음 속에 서러운 선언이 터져 나왔다. 라파엘의 눈 아래를 받친 소매가 한껏 물이 들었다. 라파엘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꺽꺽거리다, 다시 울음을 쏟아냈다.

세상에서 가장 위력 없는 선언이었다. 단테는 전장에서 ‘죽여버리겠다.’, ‘지옥 끝까지 따라가 복수하겠다.’ 등 갖은 협박을 들어보았다. 그러나 그 어떤 저주에도 무덤덤했건만, 라파엘이 내던진 ‘좋아하지 않겠다’는 말에 철렁한 자신을 발견했다.

라파엘의 애정 속에 어느새 안주하고 있던 걸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그는 무릎을 짚고 허리를 숙여, 벤치에 앉아 있는 라파엘과 머리 높이를 맞추었다.

“하고 싶은 말 다 했어?”

“흐윽, 꺼흑…….”

“그럼 이제 변명 좀 들어줘.”

단테가 길게 내쉰 씁쓸한 한숨이 라파엘의 정수리를 덮은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일단…… 미안해. 미안하다. 사과는 상황설명을 한 뒤에 더 할게. 아까 그 애부터 얘기해 보자.”

“흐.”

어느 장면을 떠올렸는지 라파엘이 다시 울음소리를 냈다. 단테가 급히 말을 이었다.

“동생이야, 동생. 어릴 때 성당에서 같이 자란 동생.”

라파엘이 잠시 울음을 멈췄다. 그리고 포갠 팔 위로 눈을 조금 들어 올렸다. 연녹색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퉁퉁 부어있었다.

“동생…… 말씀이십니까?”

“어……, 호텔 앞에서 우연히 만났어. 국회의원 비서를 하고 있는데, 모시는 사람이 거기 머문대. 요새 하는 일이 좀 힘든가 봐. 그런 와중에 가족을 만나서 벅차올랐는지 나한테 기댔고, 그냥 가족으로서 사랑한다고 한 거야.”

“…….”

“무슨 오해를 했는지 알겠는데, 덩치 작은 사람이 더 좋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을뿐더러 섹스 포지션 나는 이제 바텀도… 아니, 그 얘기는 좀 나중에 하자.”

먹먹한 분위기를 깨고 귀 끝이 달아오를 뻔했다. 라파엘이 금색 속눈썹을 끔뻑였다. 도톰해진 눈가에 도롱도롱 고여 있던 눈물이 또르르 떨어져 내렸다.

“며칠 전에 너 심하게 혼내고 연락 안 받은 건, ……이건 내가 정말 미안해. 사실 너희 중대장에게 네가 실수를 많이 한다는 얘기를 들었어. 잘하던 녀석이 가서 안 좋은 소리 듣고 있으니까 괜히 나 때문에 정신 팔린 건가 했어.”

잠시 위로 들렸던 라파엘의 눈이 다시 팔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런 네게 신경이 쓰여서 나도 훈련에 집중이 안 되더라. 그래서 서로 일 끝날 때까지 거리를 두려고 한 거였는데, 이것도 오늘 보니 네 잘못이 아니었고.”

단테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라파엘은 또다시 울음이 차올랐다. 서럽게 울진 않지만 팔 안쪽에서 가쁘게 내쉬는 숨이 여전히 푹 젖어 있었다.

“헤인……, 라파엘. 나 그만 좋아하고, 이제 싫어해도 되니까 그만 울어.”

단테가 다시 손을 뻗었다. 이 손은 내쳐지지는 않았다.

“오해해서, 차갑게 대해서 미안해.”

“……흐윽, 흐…….”

단테의 손이 라파엘의 머리카락 사이에 푹 잠겼다. 어찌나 울었는지 두피가 뜨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단테는 그대로 머리카락을 천천히 옆으로 쓸어넘겼다. 그도 이 감촉이 몹시 그리웠었다. 그러나 이렇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활짝 웃던 라파엘은 반대로 얼굴을 더 일그러뜨렸다.

“팀장님, 흐, 너무합… 흐윽, 팀장님, 팀장님…….”

라파엘은 양옆으로 가득 찡그린 입 안으로 끅끅 소리를 눌러 담으며 눈에선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냈다. 온몸이 울음을 따라 서럽게 들썩였다. 안도를 한 듯, 그러나 아직 서러움이 다 가시지 않은 듯 흐느낌이 계속되었다.

“팀장님 나, 나쁘, 흐으, 끅, 이제, 싫습…….”

“……그래. 넌 그래도 돼.”

“…….”

라파엘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온 얼굴을 한 점도 빠짐없이 눈물로 적신 채 그가 외쳤다.

“아, 아니히, 요. 아, 안, 싫어요, 허엉……!”

바보 같을 정도로 순한 라파엘은 싫다는 말도 끝까지 꺼내지 못했다. 그냥 단테의 앞에 몸을 웅크린 채 쌓인 서러움을 더 풀어냈다. 단테는 여전히 몸을 굽힌 채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미안하고, 안쓰럽고, 가엾고.

그리고 사랑스러웠다.

일곱 살 연하, 한참 아래 기수의 후배, 헤인스워즈 가문의 사람. 단테를 옭아매던 것들을 끊고, 억눌려 있던 욕심이 바깥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렇게나 선명해져 버린 감정에서 이제는 도무지 도망칠 수가 없었다.

단테는 손에 쥐고 뛰어다니던 모자를 라파엘의 머리에 푹 씌워주었다.

“잠깐 진정하고 있어.”

“어, 어디 가십…….”

울던 와중에도 단테가 손을 떼자 라파엘은 팔을 뻗었다. 단테가 모자 위를 다시 한번 눌렀다.

“5분 안에 올게. 약속해.”

단테가 돌아왔을 때, 라파엘은 단테가 준 모자를 벗어 끌어안고 있었다. 단테는 사 온 물의 뚜껑을 따서 건네고, 새로 딴 한 병으론 수건을 적셔 꾹 짠 후 마찬가지로 라파엘에게 주었다.

“…….”

라파엘이 눈을 끔뻑이더니 수건을 받는 대신 단테의 손을 향해 얼굴을 내밀었다. 무의식적으로 몸에 밴 애교가 무섭긴 무서웠다.

어쩔 수 없이 단테는 푹 젖은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직접 닦아주었다. 얼굴이 눈물에 절어 퉁퉁 불다 못해 부르터 있었다. 그래서 못생겼냐면…… 갸름하던 얼굴이 도톰해졌고, 볼에 발긋하게 홍조가 도는 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미로 예뻤다. 꼭 귀여운 애니메이션 캐릭터 같았다.

결론은, 미인은 어떤 얼굴을 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더 울고 싶어?”

“아닙니다.”

“그럼 옆에 앉아도 돼?”

“…….”

라파엘은 말없이 옆으로 비켜나며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벤치에 깔았다. 단테는 손수건을 들어 올리고 맨 벤치에 앉으며 손에 들린 보드라운 손수건으로는 라파엘의 눈가를 다시 닦아주었다.

“이런 게 있었으면 네 얼굴 닦을 때 줬어야지.”

“깔고… 앉으시라고 드린 건데.”

“됐어.”

단테는 손수건을 도로 개어 라파엘의 무릎 위에 올려주었다. 라파엘이 단테의 모자와 함께 손수건을 가슴 앞에 꼬옥 쥐었다.

“팀장님.”

“응.”

“……중대장님이, 제게 팀장님께도 그랬으니까… 자기도 저희 가족들 만나는 자리에 데려가 줄 수 없냐고 물었습니다. 안 되면 집안에서 열리는 파티 같은 데에라도 초대해달라 했습니다.”

“뭐?”

단테의 눈이 커졌다.

헤인스워즈 총사령관이 단테를 마음에 들어 하고, 그가 카밀라 헤인스워즈와 교제를 한다는 소문은 제법 널리 퍼졌었다. 두 사람이 부인하고 만남조차 갖지 않자 이내 헤어졌다는 둥 하며 교제설은 어느 정도 사그라들긴 했지만…….

그로 인해 단테가 가졌던 것과 같은 기회를 노리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을 줄은 몰랐다.

소문 속의 라파엘 헤인스워즈는 자신의 사수에게 육군의 수장인 아버지를 만날 기회를 주었고, 제국에서 가장 이름난 변호사인 누나를 소개시켜 주었다. 라파엘과 조금만 연줄이 있다면 누구든 ‘그렇다면 나도….’ 하며 탐이 날 만한 정보였다.

특히나 그 모든 수혜를 입은 ‘단테 베일리’처럼 라파엘의 직속 상관이 되었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거절했습니다. 그건 제가 만들어드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팀장님도 자리를 만든 게 아니라, 우연히 일이 있어 가족과 만나게 된 거라 해도 믿어주질 않았습니다. 그 뒤엔…… 저는 헤인스워즈라 크게 해코지를 하진 못했지만, 제 소대원들의 휴가를 취소하거나, 가장 힘든 자리 경계만 연속으로 배치하는 등의 부당한 보복이 있었습니다.”

“…….”

“그리고 소대원을 감싸다 마찰이 생겼습니다.”

그 쓰레기 같은 새끼가. 그래서 단테에게 계속 전화해 라파엘에게 말을 전하란 주문을 했던 거였다. 라파엘이 단테를 잘 따르는 걸 알아서.

단테는 다시금 밀려온 죄책감과 씁쓸함을 담아 라파엘의 등을 두드렸다.

“잘했네. 못난 팀장이 가르친 대로.”

“몇 번은 저도 힘들어서, 해달라는 대로 해줄까 하는 고민도 했습니다. 하지만 팀장님께서 팀원들 챙기시던 모습 떠올리면,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서러운 기억을 떠올려 다시 울음이 차올랐다.

“그래서, 힘들었는데, 팀장님 어, 얼굴 한 번만 보면 괜찮을 것 같았는데, 그날, 끅, 훈련관 아, 안에 들어간 제가 흐윽, 잘못한 게 맞긴 하지만, 호, 혼나서…….”

“미안해. 미안해, 라파엘.”

“흐으으…… 정말 하루하루 지옥 같았습니다…….”

“내가 잘못했어. 왜 진작 그 얘기 해주지 않았어? 전화로든, 네가 찾아왔을 때든.”

“……어린애, 같아 보일까 봐요.”

라파엘의 뺨이 다시 부풀고, 아래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이제 소대장도 되었는데… 다른 일도 아니고, 사적인 문제로, 걱정 끼치기 싫었습니다. 슈스터 선배에게, 흐윽, 들었습니다. 팀장님은 사관학교 때부터 소위까지, 훨씬 힘든 일이 많았는데 묵묵히 버티셨다고요. 그러니까, 저도……, 그런데, 저는, 흐, 괴롭힘은 괜찮아도 팀장님을 못 보는 건 너무…….”

어깨가 다시 위아래로 진동했다. 단테는 라파엘의 등을 감쌌다. 그러자 라파엘의 고개가 단테의 어깨로 폭 떨어져 내렸다. 라파엘은 단테의 품으로 파고들어 몸을 웅크렸다.

“팀장님은, 다정하시니까, 정말 귀찮은데 어쩔 수 없이, 흐윽, 절 받아줘 왔고, 이제 질리셨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다.”

“아니야. 그런 적 없어.”

단테의 어깨가 먹먹한 숨과 눈물로 따끈따끈하게 젖어 들어갔다. 단테는 라파엘의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토닥였다. 라파엘이 단테의 몸과 자신의 몸 사이, 아직 덜 밀착한 틈을 젖은 눈으로 바라보다가 꾸물꾸물 몸을 붙였다. 두 팔도 단테의 허리를 꽉 붙잡아 당겼다.

“팀장님, 팀장님…….”

아이고, 이렇게 조그마한 강아지 같은 걸…….

라파엘을 안아주었다기보다는 큰 덩치에 깔린 채인 단테가 속상하게 중얼거렸다. 그에 화답하듯 라파엘은 (단테의 눈에만) 새끼강아지만 한 머리를 어깨에 비볐다.

“이제 나 싫어해도 된다니까. 마음 쉽게 풀지도 마. 내가 너한테 잘못했다고 매달릴 테니까.”

라파엘은 단테를 꽉 안은 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팀장님 이제 안 좋아할 거란 말, 저한테는 내일 지구가 반으로 갈라질 거란 말이랑 같은 거짓말입니다.”

“착해서 어떡하냐, 너 진짜.”

라파엘은 아니라는 말 대신 이 기회에 더 끙끙이며 단테를 덮치듯 끌어안았다. 단테가 남은 품마저 다 내줄 수밖에 없도록.

“……많이 운 것 같은데, 괜찮아?”

“예… 조금, 어지럽긴 한데…….”

“그럼 기대. 아니, 잠깐 누울래?”

라파엘이 끔뻑끔뻑 젖은 눈으로 단테를 살피다 고개를 젓고, 머리를 바짝 기대며 슬그머니 입술을 목덜미 부근으로 가져갔다. 킁킁 숨을 깊이 들이마시는 소리가 단테의 귀 바로 아래에서 들려왔다.

“아닙니다. 앉아 있겠습니다. 그런데 힘이 안 들어가서…….”

“너무 울어서 탈진이 왔나 보다. 괜찮으니까 더 기대.”

“예…….”

단테와 라파엘의 몸이 틈 없이 밀착했다. 단테는 이 정도면 차라리 허벅지를 베고 눕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지만, 막 울고 난 라파엘에게 떨어지라 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므로 안쓰럽게 머리만 쓰다듬어 주었다. 탈진할 정도로 서럽게 울린 죄책감을 담아서.

“팀장님, 저, 사실.”

라파엘이 단테의 품에 완전히 들어간 채 이야기를 꺼냈다.

“사관학교에 있을 때부터 줄곧 군인이 적성에 안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응.”

“아버지 성화에 못 이겨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이 되어서도 이 생각은 여전했습니다. 수습 기간에 좋은 분들과 있을 땐 그래도 조금은 괜찮지 않을까 했는데… 저는 제일 약한 사람의 목소리가 묵살되는 구조가 여전히 싫습니다.”

적성에 맞지 않는다던 말이 그냥 단순한 투정이 아니었다. 단테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겹치고 겹친 오해가 몇 겹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팀장님이 좋았습니다.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분이 가장 밑에 있는 사람을 신경 쓰고, 챙기고, 그리고 이끌어주시는 모습이 너무 멋졌습니다. 반년간 그 모습을 보며 팀장님이 더욱 좋아졌습니다. 휴가 기간 한 달 동안 게임 센터에서, 성당에서, 관사에서 보여주신 모습들 보면서, 이제 다시는…… 팀장님께 못 빠져나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팀장님과 멀어졌을 때 말과 행동이 조급해졌습니다.”

이어지던 말이 잠시 멎었다. 라파엘이 숨을 가다듬는 소리만 고요하게 들렸다. 해가 완전히 지고 사방이 깜깜해지자 벤치 양옆의 가로등이 켜졌다. 구경꾼도 울음을 숨길 사람도 사라지자 분수는 위로 뿜던 물을 멈췄다.

“모르겠습니다……. 저도 지금 무슨 말을 드리는 건지. 그렇게 많이, 혼란스러웠고…. 팀장님께 어린애로 보이기 싫어 털어놓지는 못하면서, 어리광만 부렸습니다.”

라파엘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일 만에 헤어진 주인을 만난 것처럼 간절한 눈빛이 단테에게 향했다.

“팀장님, 정말로 제가 싫으신 거 아니시죠……?”

단테는 오랜만에 라파엘의 표정이 들려주는 목소리를 들었다.

‘절 싫어하시면 안 돼요. 그러면 상처를 받을 거예요. 예뻐만 해주세요. 싫어하지 마세요.’

라파엘이 단테의 집에 처음 찾아왔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도 라파엘은 간절하게 이 물음을 던졌었다. ‘제가 싫으신 건 아니죠?’ 하고.

“……응.”

어떻게 싫다고 할 수가 있겠어.

그는 늘 이 눈빛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단테는 호텔까지 달려오며, 그리고 몇 시간 동안 라파엘을 찾으며 했던 생각을 이제는 솔직하게 꺼내놓을 수 있었다.

“싫어하지 않아.”

그리고, 단테는 곧바로 이어 말했다.

“또 그건 어리광 아니고, 선배에게 그 정도는 기댈 수 있는데 내가 오해해서 몰라준 거야.”

“…….”

“넌 잘못한 거 없어.”

한숨이 깊이 새 나왔다. 그 끝은 허탈함과 패배감이 담긴 웃음이었다.

처음에는 끝을 모르게 쏟아지는 애정이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다.

단테에게는 친부모는 아니어도 ‘어머니’라 부를 수 있는 다정한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자란 곳의 환경상 오롯이 단테 자신에게만 향한 사랑은 받을 수 없었다.

같은 처지에 있는 많은 형제들과 함께 자란 시간은, 손 안에 들어온 것을 품에 끌어안기 전에 반을 갈라 주변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맛있는 간식은 단테의 입에 들어가는 것보다 스스로 동생들에게 나눠주는 게 먼저였다. 그래야 동생들이 웃으니까. 그래야 어머니가 싸움을 말리느라 진땀을 빼지 않으니까.

그래서였다. 오롯이 제게만 쏟아지는 애정이 낯설어 이렇게나 인정이 늦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단테는 태어나 처음으로 빼앗기기 싫은 물건을 쥔 아이처럼 욕심을 냈다. 품에 안겨 있는 라파엘의 어깨가 단단히 붙잡혔다.

“나도 네가 친한 후배 그 이상으로… 단순히 몸 섞는 파트너보다 더 이상으로 보여. 이제는.”

라파엘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눈이 커다랗게 뜨여진 채였다. 그리고 조금 더 자세히 말해달라는 듯 눈동자가 빠르게 일렁였다. 단테가 웃으며 그의 어깨 위로 자신의 얼굴을 기댔다.

“나도 네가 많이 좋아졌다고.”

“……아…….”

“그러니까, 너도 내가 싫은 게 아니면 계속 나 좋아해 줘.”

단테는 한참 동안 라파엘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있다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들었다.

“부탁해.”

라파엘의 표정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에서 벅차 견딜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어 여러 가지로 다채롭게 바뀌었다. 끝내 마지막에 나타난 표정은 단테를 웃게 했다.

가로등 바로 아래, 불빛이 사라진 도시의 어둠 속에서도 라파엘의 얼굴만은 똑똑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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