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철수 명령을 듣고 역 밖에서 팀원들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찰리팀은 갑자기 난 커다란 폭파음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도로 한쪽 바닥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진동했다.
“티, 팀장님. 팀장님!”
안젤라가 급히 인이어에 대고 외쳤다. 그러나 치직이는 노이즈 소리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그 때, 역 안에 있던 팀원들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 안에 단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상사님, 팀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팀장님, 아직 안에, 있습니다. 윽…….”
“예?”
“대피하셨을 겁니다. 위치도, 시간도 폭발 못 피하실 정도는 아니었,”
로건의 말을 끊으며 등 뒤에서 추가적으로 콰앙! 하는 소리가 났다. 바깥까지 충격의 여파가 전해지며 출입구의 벽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로건도, 안젤라도, 뒤에 있던 다른 팀원들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로건이 다급히 현장지휘팀장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안에서 베일리 대위님이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당장 구조작업 진행해주십시오.”
로건의 말을 들은 현장지휘팀장의 얼굴이 경악과 낭패로 물들더니 큰소리로 구조반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는 동안 로건의 형형한 시선이 옆의 마티네즈 대위에게 옮겨갔다.
“저격수 가능성 왜 간과하신 겁니까!”
“아니, 흐. 여, 여러 번 확인했는데.”
그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로건은 이를 뿌득 갈았다.
그래, 원래 사관학교 엘리트 출신 장교들이 팀장, 부팀장을 맡는 SAG다. 이곳엔 편한 부대에만 있다가 한 해쯤 고생해 진급을 목표로 들어온 이런 팀장, 부팀장들도 수두룩했다. 오히려 단테가 드문 케이스였다.
이 사태의 원인이 자신의 치명적인 실수라는 사실을 파악한 마티네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 내, 내가 그래서 절대 싫다고, 그랬는데! 나는, SAG에 들어온 지 반년도, 흐, 안 됐고, 훈련도, 제도에서밖에… 원래 정상회담에 있어야 되는 게 나였다고! 그런데 억지로 바, 바꾸자고 해서……!”
“저 새끼는 또 무슨 미친 헛소리야.”
면전에선 선배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오던 안젤라마저도 험한 말을 내뱉었다. 어찌 되었든 지금 당장은 추궁이 아닌 구조작업이 우선시되어야 했다.
그 때, 출입 통제선을 지키던 대열에서 빠져나와 전철역 입구로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당연히 그 사람은 앞을 지키고 있던 특수부대원들에게 제지당했다.
포획된 짐승처럼 붙잡힌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연녹색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전철역을 바라보았다.
“단테…….”
라파엘이 흔들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 * *
부서진 승강장의 반대편 스크린도어가 선로 쪽에서 더듬더듬 열렸다. 단테는 그곳으로 기듯이 매달려 올라왔다.
“윽…….”
팔에 체중을 싣는 순간, 조금 전 추락으로 충격을 받았던 어깨가 지끈거렸다.
승강장 위로 올라온 단테는 바닥에 엎드려 마른기침을 터뜨렸다. 폭발의 열기로 이곳저곳이 화끈거리긴 하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다. 다만 귀를 최대한 보호했는데도 이명이 끊이질 않았다.
“고백 들어야 하는데, 큰일 났네…….”
자신의 목소리조차도 물속에서 말을 하는 것처럼 웅웅이며 들렸다. 이렇게라도 그나마 들리는 걸 보니 고막이 완전히 나간 건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었다.
단테는 몸을 일으켜 건너편 플랫폼을 보았다. 불이라도 났다면 꼼짝없이 질식사할 판이었는데, 교통 요충지에 위치한 역은 훌륭하게도 폭발과 동시에 스프링클러와 환기 시설을 작동시켰다. 그 덕에 화재까진 이어지지 않았다.
“알파 원 송신. 들리나?”
기계의 고장인지, 폭발 때문에 무전이 되질 않는지, 아니면 귀가 안 들리는지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노 조이(아무도 응답하지 않음) 상황은 오랜만이었다. 그러나 폭탄의 세기와 자신이 다친 정도를 보면 계단 위에 있던 팀원들이 30초간 달려 나간 거리까지 폭발이 미치진 않았을 것이다.
단테는 플레이트 캐리어에서 토니켓(지혈대)을 꺼내 조금 전 칼에 베인 곳을 묶은 뒤, 욱신거리는 어깨를 벽에 붙이고 어긋난 뼈를 밀어 맞췄다.
“아윽…….”
당연하지만 빌어먹게도 아파 눈물이 찔끔 났다. 올해 라파엘과 침대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 거의 처음으로 고인 눈물이었다. 마침 옆 벽에 붙은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 아무래도 울겠는데.”
단테가 아니라, 단테 때문에 올해만 해도 이미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눈물을 떨군 누군가가 말이다. 얼굴이고 팔다리고 성치 않은 이 모습을 보자마자 입을 쩍 벌리고 주저앉아 엉엉 울 것 같다. 지금도 밖에서 애가 타 죽어가고 있을 테니, 조금이라도 빨리 나가 안심시키고 달래주어야 했다.
그 때, 단테의 헬멧 위로 무언가가 토도독 떨어져 내렸다. 천장에서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였다. 아무래도 폭발과 함께 내부에 꽤 큰 충격이 가해진 모양이었다.
“음…….”
이대로 위층으로 올라가 출구를 통해 빠져나가는 게 가장 빠른 길이겠지만, 섣불리 움직이기가 저어되었다.
단테는 우선 한 손에 권총을 들고 주변을 둘러보며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승강장을 반쯤 건넜을까. 그의 눈에 벤치 옆에서 흔들리는 그림자가 들어왔다. 때마침 차츰 청력이 돌아오며 그곳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식별 가능해졌다.
“흐어, 허어엉…….”
어린아이 울음소리였다.
단테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울음소리는 점차 더 커졌다. 그리고.
“괜찮아. 괜찮을 거야.”
또 다른 아이의 목소리도 들렸다. 수많은 동생들을 두어 본 단테의 추측으로는 열 살 즈음, 성별이 모호한 나이대의 목소리였다.
설마 인질인가? 테러범 잔당이 남았을 가능성을 상정해 단테는 총을 겨눈 채로 벤치 앞으로 다가갔다.
벤치 옆 바닥에는 여자아이 하나와 남자아이 하나가 주저앉은 채 꼭 붙어 앉아 있었다. 온 얼굴이 축축이 젖은 여자아이 쪽이 예닐곱 살로 보이고, 여자아이를 끌어안고 있는 남자아이가 그보다 세 살가량 많아 보였다.
‘……아이들뿐인가?’
단테는 두 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이들도 단테를 발견했다.
“히이익!”
온몸에 새카만 흑복을 입고 무장한 남자의 등장에 울음소리가 비명으로 바뀌었다.
“무서, 무서워, 무서워! 흐엉……!”
여자아이가 고개를 파묻자 남자아이는 단테를 떨리는 눈으로 올려다보면서도 여자아이의 어깨를 더욱 꽉 안았다.
단테는 주변을 살폈다. 테러범의 습격이 지나간 을씨년스러운 승강장 주변에 아이들 외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흐어, 끅, 힉, 히윽!”
겁에 질린 여자아이의 울음이 경기로 넘어가려 했다. 역 곳곳에 대피하지 못한 인원이 있다더니, 여기에 아이 둘이 남아 있을 줄이야.
단테는 그들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댔다.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춘 그는 헬멧을 벗고 새카만 마스크를 내렸다.
“얘들아, 안녕. 아저씨는 군인이야.”
“히끅, 흐…, 군, 인? 흐윽.”
다행히 여자아이가 울음을 멈추고 눈을 깜빡였다. 단테는 아이들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여기서 많이 무서웠지. 구해주러 왔어. 같이 밖으로 나가자.”
“아저씨, 우, 우리 엄마는 어디 있어요?”
“너희 엄마는 먼저 밖에 나가서 기다리고 계셔. 나쁜 사람들 때문에 여긴 위험해서 어쩔 수 없이 대신 왔어. 아저씨가 엄마한테 데려가 줄게.”
“아, 어, 어…….”
그럼에도 내내 겁에 질려 있던 아이들은 쉽게 경계를 풀지 못했다. 단테는 헬멧에서 고글을 풀어 아이들의 시야 높이에서 흔들며 웃었다.
“짠. 이거 군인만 쓸 수 있는 완전 특별한 안경이야. 이거 쓰고 밖에 나가면 저어기 제도까지 다 보인다? 멋있지. 둘 중에 여기 아저씨 있는 데까지 달리기해서 이긴 사람에게 선물로 줄게.”
“나, 나아!”
“잠깐만! 가면 안 돼!”
남자아이보단 어린 여자아이 쪽이 더 천진난만한 구석이 있었다. 아이는 안겨 있던 오빠의 품을 벗어나 단테에게 도도도 달려왔다.
“당신! 오브리에게 손대지……!”
“무거워어.”
단테는 무시무시한 경고에도 아랑곳 않고 작은 머리를 커다란 고글로 감싼 뒤, 끈을 조여 머리에 맞게 조절했다.
“우와, 완전 멋진데. 우리 팀이랑 같이 작전 나가도 되겠어. 내가 아는 군인들 중에 제일 세 보여.”
“정말? 히히…….”
여자아이는 칭찬을 받으니 마음에 들었는지, 조금 무거워도 벗으려 하진 않았다.
“오브리가 이거 하고 나가서 엄마도 찾고, 오빠네 아빠랑 오빠 가방도 찾아줄래.”
오빠네 아빠? 남매가 아닌가? 단테의 의문은 금세 그에게 마음을 푼 오브리의 조잘거림이 풀어주었다.
“오브리랑 오빠랑 아까 저기 위에 햄버거 가게에서 만났어. 거기서 오브리네 엄마랑 오빠네 아빠도 인사하고 같이 햄버거 먹었어.”
“그랬구나. 그럼 오브리는 엄마를 찾아줘야겠고…. 너는 아빠 외의 일행은 없었니?”
“…….”
남자아이가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잃어버린 가방은 어떤 거였어?”
“하얀색! 이이만큼 큰 거. 오빠가 기타가 들어있다고 했어.”
“아, 아빠랑, 초등학생 기타교실 가는 길이었어…….”
“그렇군. 그럼 우선 너도 밖에 나가서 아빠를 찾아야겠네.”
그리고 단테는 아직도 저쪽에 혼자 서 있는 남자아이를 향해 어서 이리 오란듯이 손짓했다. 그가 결국 쭈뼛쭈뼛 단테에게 다가왔다.
“이건 달리기 2등 상.”
남자아이의 머리 위에는 자신의 헬멧을 얹어주었다. 역시 좀 무거운지 휘청거렸다. 단테는 헬멧의 턱 끈 역시 단단히 조여 주었다.
“여기 꼬마 공주님 이름은 오브리 양인 것 같은데, 꼬마 기사님 이름은 뭐야?”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게 익숙한 단테는 금세 분위기를 친근하게 풀어냈다. 공주님 호칭까지 획득한 오브리의 호감은 완전히 얻어냈지만, 남자아이는 아직 단테를 향한 시선이 뾰족했다.
“미, 미하…….”
“오빠 이름은 미하엘이야!”
“……진짜?”
단테는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눈을 끔뻑였다. 천사 이름을 가진 사람과 여러모로 얽히는 건 여기서도 적용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된 아이 이름이 미하엘이라니. 그도 이제 ‘단테’라는 이름에 무언가가 있다는 걸… 단순히 우연이라고만 치부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부모님이 동부 출신이신가?”
“어?”
“아니, 제도에서는 미카엘이라고 발음하니까.”
“잘, 몰라.”
“그렇구나. 하긴 그 나이대면 그런 것까지 알진 않지.”
우물쭈물한 답변이었지만, 단테는 적당히 수긍하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허벅지에 꼭 달라붙은 오브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빠르게 탈출 계획을 세웠다.
“자, 이제 무장도 했으니 우리 다 같이 밖으로 나가볼까요?”
“네에!”
단테는 씩씩하게 대답한 오브리의 오른손을 잡고, 오브리의 나머지 왼손은 미하엘이 잡은 채로 줄지어 이동했다.
일행에 아이들이 더해지자 무너질 위험이 있는 중이층을 건너간다는 선택지는 완전히 사라졌다. 민간인을 데리고 있는 상황이라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는 건 안전한 루트로의 탈출이었다.
시간이 좀 들긴 하겠지만, 현재 가장 위험이 적은 방법은 선로를 따라 옆 역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테러 발생으로 이미 전철 운행은 중단되었고, 혹시나 역이 무너지더라도 지하에 견고하게 파인 터널은 무사할 테니까.
조금 전부터 천장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와 자갈들 또한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 머리를 보호하던 것을 아이들에게 양보하고 나니 위에서 뭐가 떨어진다는 게 더 잘 느껴졌다.
단테는 승강장의 가장 끝까지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마지막 스크린 도어를 힘으로 밀어 열자, 다음 역과 연결된 검은 동굴 같은 터널이 나타났다.
목적지인 다음 역까지는 단테의 보폭으로 10분, 아이 둘과 속도를 맞춰서는…… 30분쯤 걸릴 것이 예상되었다.
먼저 선로로 훌쩍 뛰어 내려간 단테는 아이들을 받아 안아서 하나씩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손을 잡고 발을 떼려는데, 붙잡은 손이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야아. 여기 싫어어.”
“아.”
“아저씨, 흑, 무서워, 무서워어. 엄마……!”
불빛이 어슴푸레하게 비치는 선로가 오브리에게는 많이 무서웠던 모양이다. 손을 잡고 여기까지는 나름 씩씩하게 왔지만 어두컴컴한 지하 터널은 얘기가 달랐다. 눈을 꽉 감은 오브리가 울먹이며 고개를 이리저리 저었다.
“이리 와. 오브리.”
별수 없이 단테는 몸을 숙이며 두 팔을 벌렸다. 오브리는 얼른 단테의 목을 끌어안았고, 아이의 몸은 둥실 떠올라 단테의 한쪽 팔에 앉혀졌다. 어른에게 안긴 오브리는 다행히 조금 전보다 안도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단테는 다시 발을 떼지 못했다. 미하엘이 입술을 우물거리며 단테를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
“……무서워?”
미하엘이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나, 나도 못, 걷겠어…….”
“알겠어. 괜찮아. 너도 이리 와.”
단테는 또다시 몸을 숙였다. 다친 팔에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오브리를 옮겨 안고, 다른 팔에 미하엘을 안았다. 겉보기에도 살집이 그닥 없어 보이던 아이들은 안아 들어도 크게 무겁지는 않았다. 다만 아이들을 추켜올리자,
‘윽…….’
다친 뼈마디가 욱신 울렸다.
그리고 단테는 생각했다. 아이들의 보폭에 맞춰 30분으로 늘렸던 예상 시간을, 이렇게 안고 가면 그나마 20분쯤으로 단축할 수 있겠다고.
“얘들아, 지금 내가 두 팔에 너희를 다 안고 있기 때문에 무서운 사람이 나오면 싸울 수가 없어. 그러니 무슨 일이 생겨서 급하게 내려놓으면 저쪽 안으로 가서 숨어야 해. 알았지?”
“응…….”
“응.”
“미하엘이 아까처럼 오브리 꼭 안고 있어 줘.”
“아, 알겠어.”
선로 안으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르릉… 하는 소리와 진동이 전해졌다. 역이 조금 더 무너진 모양이다. 뒤를 돌아본 단테의 눈동자에 멀어진 승강장 빛이 들어왔다.
다음 역까지 최대한 빠르게 가면 20분, 그곳에서 연락을 취하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데에 적어도 10분은 걸릴 것이다.
‘걱정 많이 하고 있겠네.’
팀원들도 팀원들이지만, 특히 라파엘이 폭파 소리며 부상 소식 등을 듣고 숨이 넘어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단테는 걸음을 조금 더 빨리 재촉해 어두컴컴한 길을 계속 나아갔다.
등 뒤로 보이던 플랫폼의 빛까지 사라지자 이제 정말 길의 앞뒤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열 걸음에 하나 정도 선로를 밝히는 불빛이 있지만, 그걸로는 코앞에 발을 디디려는 자리조차 확인하기 어려웠다.
선로 위를 걷는 발소리 사이로 간혹 쥐나 벌레의 기척이 끼어들어 낮은 천장을 울렸다. 그러면 오브리는 흠칫 단테의 품으로 파고들었고, 미하엘이 괜찮다며 오브리를 달랬다. 단테는 코앞에서 그 모습을 감상하며 조용히 웃음을 삼켜야 했다.
5분쯤 더 걷자 오브리는 단테의 어깨에 기대 고른 숨을 쌕쌕였다. 몇 시간 동안 내내 놀라고 겁먹기를 반복했으니, 품에 안겨 잠시 긴장을 놓은 순간 잠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 때, 내내 먹통이던 인이어에 치직… 하고 신호가 잡혔다.
“아.”
문제는 손이 없었다. 단테는 오른팔에 안은 미하엘을 불러 말했다.
“내 귀에 꽂힌 기계, 가장 큰 버튼 좀 눌러줄래?”
“……응.”
미하엘이 손을 들어 버튼을 꾹 눌렀다. 곧 노이즈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치직 소리가 한차례 지나자 어렴풋이 알아들을 만한 소리가 되었다.
―팀……님. ……장님!
“앤지구나. 앤지, 나야. 들려?”
―……범, …른들, ……나. 조심…….
안젤라에게는 단테의 목소리가 전달된 것 같지 않았다. 조금 전과 비슷한 구조의 울림이 반복되었다. 한 번이라도 단테에게 닿기를 바라며 가장 중요한 정보를 몇 번이고 계속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테러……범. 팀, 장님.
아. 순간이었지만,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역 안에……살된 테러범, 공항, CCTV분석…… 같이 찍힌 사람… 아이…….
단테의 목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다.
―큰 가방… 짊어진 남자, 아이 하나.
단테는 옆을 흘끔 돌아봤다. 미하엘의 눈빛이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형형했다. 단테의 목에 바짝 가까이 댄 미하엘의 손에는 작은 칼날이 쥐어져 있었다.
* * *
팍!
거친 소리와 함께 단테의 귀에서 뽑힌 인이어가 바닥을 굴렀다. 두 손을 쓸 수 없는 단테는 저항도 못 하고 인이어를 빼앗겼다.
“음…….”
단테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미하엘의 시선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긴장된 대치 가운데 단테의 입꼬리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그럴 것 같더라.”
예상치 못한 반응을 마주한 미하엘이 흠칫 숨을 삼키며 손을 꾹 눌렀다. 단테의 목에 실금 같은 상처가 났다.
“아무리 군인이라도 칼에 찔리면 아파. 너희 떨어뜨리겠다.”
단테의 표정과 말투는 목에 칼이 닿은 일이 없는 것처럼 태연했다. 가던 방향으로 계속 옮기는 걸음도 흔들림이 없었다.
“……내가, 교단에서 온 사람인 걸 짐작했다면 왜 데려왔지?”
날 선 시선을 보이는 것과 함께, 어수룩한 말투 역시 온데간데없어졌다.
“의심이 생긴 건 오브리에게 네 짐 얘기를 들었을 때였는데, 처음엔 반반이었어. 눈을 속이기 위해 폭탄 운반책을 맡은 아이거나, 옆에 보호자가 있는데도 부러 자기보다 큰 기타를 짊어진 아이거나.”
“…….”
“어쨌든 둘 다 아동학대니까 데려가야지.”
칼끝이 단테의 살갗을 조금 더 파고들었다. 칼날에 핏방울이 맺혔다.
“참전을 명령받은 시점부터 나는 성인이다. 이것은 교단의 신자로서 치르는 내 성전이다.”
칼자루를 쥔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단테의 목뿐만 아니라 칼을 잡는 방식이 잘못된 미하엘의 손에도 상처가 남았다.
“제국은 전쟁으로 내 조상의 터전을 빼앗고, 우리 신의 성역을 짓밟아 신도들을 핍박해왔다. 제국의 터전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피가 뿌려지고 불바다로 만들어 마땅하다.”
단테는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꺼낸 장황한 말 중, 열 살 남짓한 어린아이의 머리로 정확히 이해한 문장이 얼마나 될까. 어른들에 의해 만들어진 소년·소녀 병사나 어린 테러범을 보는 기분은 몇 번을 겪어도 변하질 않았다.
“군인이 진 사명은 지금 이 나라에 사는 국민들을 지키는 거라, 과거 전쟁 같은 제국 역사까지 변호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
“내가 만약 100년 전 전쟁에서 진 나라에 살고, 내가 믿는 신이 부정당해도 직접 칼 들고 싸웠으면 싸웠지, 너만 한 어린애한테 몸통보다 큰 폭탄을 짊어지게 하진 않아.”
또. 그가 덧붙였다.
“네게 다른 어린아이를 해치라 시키지도 않고.”
미하엘이 테러범 일행이라는 걸 가정한다면 짚어보아야 할 일은 하나가 더 있었다. 얼굴이 노출되는 걸 경계해야 하는 테러범이 오브리의 가족과 대화를 하고, 심지어 아이들끼리는 친분을 쌓았다는 것이었다.
그를 의심해 본다면,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 미하엘에게 내려진 광신도들의 지령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네 몸에 사람을 해친 흔적이 보였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총을 쐈어. 그게 아니라는 건, 네 나름대로 어떤 다른 선택을 했다는 거겠지.”
목에 닿은 칼날이 짧게 흔들렸다.
“그러니까 널 밖으로 데리고 나가, 제국에서 아이답게 살도록 도와주려는 거다.”
미하엘은 이곳까지 폭탄을 짊어지고 왔지만, 결국에는 오브리를 지하층에 숨겨 웅크리고 있었다. 그를 보고 단테는 결심이 섰다.
“…….”
혼란함이 떠오른 얼굴 속 눈동자가 들썩였다.
“아니야! 그래, 오브리는 어려서 봐주었지만 당신은 달라. 나는, 성전을 치르는 중이다. 제국에 붙잡혀 순교해 천국에 가는 건 바라는 바다. 살려달라고 빌어. 그럼 참작해주지. 제국군이 신도 앞에서 비참하게 비는 모습을 신께 바친 뒤에…….”
“살려줘.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이게 뭐 어려운 거라고, 이걸 듣기 위해 이 어린아이의 입에 이딴 말을 주입했나.
“난 밖에 사랑하는 어머니와, 80명의 동생과, 오늘부터 사귀기로 한 사람이 있어.”
“……장난해?”
“전부 다 사실인데?”
“지금 나를 농락하……!”
“우응.”
자는 데 시끄러운지 오브리가 뒤척이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러더니 몸을 보채 단테의 품에 더 넓게 기댔다. 오브리의 손이 다가오는 바람에 미하엘은 급히 목에 댄 칼을 치웠다.
단테는 그 틈에 두 아이의 몸을 덜컹 추어올렸다.
“아!”
몸이 흔들린 미하엘이 칼을 놓치고, 단테는 바닥에 떨어진 손바닥만 한 단검을 옆으로 툭 차 치웠다. 미하엘이 단테에게 무어라 소리치려는 찰나.
“으으응……!”
“미안, 미안. 착하지. 더 자자.”
잠에 완전히 취한 오브리가 잠결에 투정을 부렸다. 쉬이…. 목소리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바꿔 오브리를 달래는 모습에 미하엘의 입이 뚝 다물렸다. 다시 오브리가 새근새근 잠잠해지고, 단테는 쿡쿡 웃었다.
“조용히 말해야겠는데. 공주님 깨시겠다.”
“…….”
“그리고, 어깨가 아파서 아까 그거 두 번은 못 하겠으니 또 목에 칼 대는 건 좀 봐주고.”
단테의 뺨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잠시 정도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다친 채로 아이를 안은 팔이 제법 많이 아팠다. 목의 상처에서 난 아픔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단테는 아픈 기색을 숨기고 계속해 앞으로 걸어갔다.
“그럼 하던 얘기 계속해볼까. 미하엘, 나와 오브리와 같이 여기서 나가자.”
미하엘 또한 뒤늦게 단테의 상태를 눈치챘다. 그가 무어라 말을 꺼내려던 찰나, 단테가 먼저 말했다.
“사실 뭐라 하든 간에 억지로라도 널 데리고 나갈 생각이긴 해.”
단테는 눈을 세게 감았다 떠 눈가를 적신 땀을 털어냈다.
“짐작은 했겠지만, 네가 왔던 곳으로 돌아갈 방법은 이제 없어.”
미하엘을 이곳에 데리고 왔던 테러범 중 몇은 공항에서 붙잡히고, 도망쳐 이곳에서 농성을 벌이던 나머지는 베일리 팀에 의해 제거되었다. 우회적으로 말했지만 미하엘은 의미를 알아들었다.
“정 싫으면 여기서 생존하기 위해 날 이용한다고 생각해.”
“…….”
“우선 지금은, 읏. 순순히 따라가서 방심시키고 나중에 기회 봐서 뒤통수치면 되지.”
슬슬 체력과 함께 집중력이 떨어지는지 선로 사이에 발을 빠뜨리는 드문 실수를 했다. 몸이 덜컹 기울었지만, 그 순간 팔에 힘을 준 덕에 안고 있는 아이들을 놓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약간 무리가 간 듯 오브리를 안은 쪽 어깨가 진동했다. 그 모습을 보며 미하엘은 몇 시간 전까지 무거운 가방을 짊어져 욱신거리는 자신의 어깨를 꾹 눌렀다.
“그건… 당신이 아까 말한 제국민을 지키는 제국군의 태도로 보기는 어려운데.”
“똑똑하네. SAG 행동강령과는 다르지만 어쩔 수 없어. 내 동생들 중에 너 같은 애들이 많아서, 원칙대로 했다간 평생 눈에 밟힐 것 같거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버려진 단테는 차라리 어른에 대한 나쁜 기억은 없었다. 그러나 오브리의 나이, 혹은 미하엘의 나이쯤 되어 들어오는 아이들은 종종 상처를 안고 오곤 했다.
“하아……, 전문 협상가가 아니라 더 이상 멋있게 설득할 말은 안 떠오르는데. 아무튼 네게 선택지는 안 줄 거니 그 나이에 이런 곳에서 죽으려 들지 말고, 나가서 한번 살아는 보자.”
“…….”
“네게 폭탄 짊어지게 한 사람 말고, 너 안고 나가는 사람 말 한 번만 믿어보자고 생각해주면 더 좋고.”
미하엘의 눈에 조금 더 파문이 퍼졌다. 강제로 주입 당한 신념이 많이 누그러졌다는 증거였다. 그가 입술을 달싹이다 몸을 조금 비틀었다.
“내려줘. 내 발로 걷겠다. 도망 안 쳐.”
“그래, 잘 생각했다. 사실 너 별로 무섭지도 않았지?”
“응.”
“연기 못하더라.”
“……어쩔 수 없었다. 이 나이대의 제국민 어린아이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모르는데, 오브리처럼 할 수는 없으니.”
“애들다운 행동도 이제 나가서 배워 봐.”
미하엘은 별 말 없이 단테의 손을 잡고 따라 걸었다. 일단은… 무사히 설득이 된 것 같았다. 다행히도.
사실 테러범과 한패임을 짐작한 아이를 안아 들고, 어울리지도 않는 긴말을 이어간 건 동생들이 떠올라서만은 아니었다. 또 하나, 아이의 이름과 녹색이 도는 눈동자에서 연상된 누군가 때문이었다. 외모도 성격도 전혀 다르지만, 처음 마주했을 때 시선을 불안하게 떨던 모습이 단테를 흔들었다.
‘팀장님, 흐윽, 팀장님…….’
하여간… 이제 예쁘거나 사랑스럽거나 가여운 무언가만 봐도 자연스럽게 그의 얼굴부터 튀어나오니 여간 중증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그 ‘누군가’는 울고 있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새벽에 사망 플래그니 뭐니 장난치는 게 아니라 걱정 말라고나 해줄걸.
“들어오기 전에 달래주기라도 하고 왔어야 했는데.”
“뭐를?”
“아, 들렸구나. 그게, 음. 아까 말한 오늘부터 사귀기로 한 사람.”
“……어떤 사람이지?”
“어떤 사람이냐면…… 연하야. 순하고 귀여워.”
“…….”
생각해 보니 이것도 사망 플래그 중 하나 아닌가. 애인(예정)에게 잘해줄걸 그랬다고 후회한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애인 소개를 하는 모습이……, 아니다. 이제 라파엘이 눈물에 퉁퉁 부은 눈으로 흘겨볼 만한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
다행히 미하엘은 그 이상 묻지는 않았다. 라파엘에 대한 관심보다는 ‘사귄다’는 단어에 대한 관심이었던 모양이다.
“아.”
문득 단테가 위로 고개를 들었다. 아이들과 시선을 맞추느라 내내 숙여진 채였던 얼굴에 그림자가 걷히고 오랜만에 윤곽이 드러났다. 미하엘이 단테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긴 동안 그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단테는 그곳을 향해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여기 터널 잘 지었네.”
다행히 이번엔 사망 플래그는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구원 플래그에 가까웠다.
* * *
한참 꿉꿉한 통로를 걷다 만난 바깥 공기가 청량했다. 그러나 내내 어두운 곳에 있다가 쏟아진 불빛 때문에 눈을 가늘게 떠야 했다.
테네시는 교통의 요충지였고, 이곳 지하는 수 개의 선로가 교차하는 곳이었다. 단테가 발견한 것은 터널 속, 열차를 정비하는 데 쓰이는 통로였다.
삐걱이는 철제 계단을 올라온 세 사람은 지상 출입구를 지키고 있던 군인들과 마주쳤다. 그들도 그 안에서 흑복을 입은 남자가 나올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기색이었다.
“SAG ODA-133 팀장 단테 베일리입니다.”
“아, 어, 어…….”
그것도 대테러 임무 중 실종되어 수색 명령이 내려온 대위일 줄이야. 그들은 황급히 총구를 치웠다.
“아이 좀 받아주시겠습니까.”
“아, 예!”
군인이 단테에게서 잠든 오브리를 받아들었다.
“대위님. 그쪽에 아이는 혹시…….”
다른 이들이 단테 옆의 미하엘을 경계 어린 눈으로 보았다. 테러범 일행인 남자아이의 인상착의는 이미 전달된 듯했다.
단테는 몸을 움츠린 미하엘의 어깨를 두 손으로 짚었다.
“우선 조사는 받아야 해. 하지만 네가 아무도 해치지 않았다는 건 내가 증언할 테니 큰 처벌을 받진 않을 거야.”
“…….”
미하엘도 아무렇지 않게 풀려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까 거짓말한 게 있는데. 네게 사람을 해친 흔적이 보였어도 발포는 하지 않았을 거야. 제국군의 최우선 사명은 제국민 수호이지만, 동시에 세계 평화 조약에 서명한 조직이기도 하거든. 어린아이를 대상으로는 사살보다 생포를 원칙으로 해.”
단테가 허리를 굽혀 그와 시선 높이를 맞췄다.
“어른의 잘못으로 인해 범죄에 가담하게 된 거라면, 다른 어른은 달리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게 당연하니까.”
그는 눈을 끔뻑이는 미하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자란 곳에서 크는 것도 좋겠다. 제국이 다 살기 좋은 곳은 아닌데, 거긴 진짜 좋은 곳이거든.”
칼도, 폭탄도 없는 곳에서 한 번쯤 살아 봐. 단테가 덧붙였다.
“오브리와 내 증언이 더해지면 조사가 그렇게 길지 않을 거다. 끝나면 직접 만나러 갈게.”
“……응.”
미하엘이 조금 크게 뜬 눈 가득 단테를 빤히 바라봤다.
“어두운 데에선 잘 안 보였는데 이렇게 생겼군.”
“왜, 잘난 척하던 거에 비해선 못생겼나?”
“…….”
결국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군인들이 미하엘의 작은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이끌었다. 크게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따라가니 거친 진압은 없었다. 애초에 제국법은 어린아이들에게 관대한 조항이 많았다.
“잘 가, 꼬마 기사님.”
미하엘이 단테를 돌아봤다. 그리고 입술을 우물거리다 말했다.
“난 열두 살이야.”
“아깝네. 한 살만 많았어도 짤 없이 네 다리로 걸어와야 했을 거다.”
단테가 그를 안아준 건 워낙 체구가 작아 열 살 남짓한 나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그가 얼마나 영양이 부족한 상태인지 짐작이 가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열세 살 이상의 사내아이에겐 번쩍 안아 옮겨주는 친절을 베풀 이유는 없었다.
“그래, 그러면 꼬마는 빼고. 또 보자.”
“……응.”
그를 배웅한 단테는 구조반에게 가는 대신, 역의 입구가 어디냐 물었다. 다행히 역과 역 사이 중간 즈음에서 탈출해 처음 위치와 그리 멀리 떨어지진 않았다. 군인 한 사람이 경외심 담긴 표정으로 단테를 안내해주었다.
역의 출입구로 돌아가는 동안, 단테는 주변을 돌아보며 어안이 벙벙해졌다. 해가 거의 다 진 시간인데도 사방이 대낮보다 환했다. 특히 사고가 있던 현장 주변은 온갖 불빛과 사이렌으로 번쩍거렸다.
여기 지금 소방차에, 구급차가 몇 대며……, 저건 뭐야. 기중기? 웬 중장비들이 여기 있어. 아예 역을 들어내고 새로 지을 기세였다. 자신이 안에 있는 동안 밖에선 꽤 큰 소란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역이… 난리가 났네요.”
“예. 폭탄이 터지면서 여파로 역사 일부가 무너졌습니다. 다행히 폭발로 인한 사상자는 없습니다만, 여아 한 명과 대위님을 찾지 못해 수색 작업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보통 수색을 저렇게까지 합니까?”
“저희 대대장님도 의아해하셨는데, 까마득한 윗선에서 보냈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승강장이 좀 터진 정도인 줄 알았는데, 밖에서 이렇게 심각한 대응이 벌어지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짐작한 것보다 밖에 있는 사람들의 걱정이 더 컸겠다.
단테는 조금 더 걸음을 재촉해 역 앞으로 다가갔다. 몇 시간 전, 긴장한 얼굴로 앞에 섰던 역의 출입구가 가까워졌다. 그곳에 익숙한 군복과 뒷모습들이 보였다. 그리고, 유난히 도드라진 키와 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누군가 역시도.
어휴, 저 바보. 걱정돼서 대열이고 뭐고 저 앞까지 튀어나와 있나 보네. 지금만큼은 그 근무 태만도 반가워 픽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조금 늦고 말았지만 기다리고 기다렸던 ‘오늘’은 아직 지나지 않았다. 단테는 당장 앞으로 달려가려는 발을 누르고, 옆의 군인이 수상하게 여기지 않도록 여유롭게 걷기 위해 애써야 했다.
거리가 더욱 가까워지고, 이제 반가운 목소리들도 식별할 수 있었다.
마침내 라파엘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단테는 상기된 걸음을 뚝 멈췄다. 동시에 라파엘이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단테! 아악! 단테, 나와요! 단테, 단테! 팀장님! 아아아아!”
“…….”
역 입구 앞에 켜진 환한 조명이 무대 위 배우의 그것처럼 라파엘의 그림자를 늘였다. 극의 클라이막스 장면처럼 단독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아름다운 배우는 큰 소리로 오열했다. 지금껏 알지 못했던 이 세상의 슬픈 진실을 목도해버린 천사처럼 구슬픈 목소리였다.
“안돼애애애! 단테에!”
출입통제선 밖으로 지나가던 시민들이 어머…. 하고 입가를 가리며 눈물을 글썽였다. 주변을 지키던 군인들마저도 절절한 모습에 감화되어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단테는 눈을 끔뻑였다.
아니, 나 살아 있어…….
“나도 데려가, 아아악! 이런 게 어디 있습니까. 팀장님! 팀장니임! 저도 데려가세요!”
야, 야 인마! 가긴 어딜 가려고! 단테의 입이 떡 벌어졌다.
몸부림치는 라파엘을 붙잡고 있는 팀원들 역시 이 분위기가 당황스러워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헤인스워즈, 팀장님 살아 계시다니까? 대피하셨다니까?”
“아니, 이게 멀쩡한 팀장님 먼저 골로 보내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라파엘의 구슬픈 울음소리 아래로 묻혔다. 한참 소리를 쳤는지 라파엘의 목은 다 쉬어 있었다.
그 때, 뒤에서 현장지휘팀장이 다가와 라파엘을 말리는 팀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 역시 비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슬퍼하게 둬라.”
아, 아니야! 좀 다치긴 했는데 치명상도 아니었다……! 이제 심지어 팀원들 중에도 라파엘의 분위기에 감화되어 눈가를 훔치는 녀석까지 생겨났다.
뒤늦게 탈출한 팀원들은 모를 리가 없었다. 단테의 생존 확률은 아주… 상당히… 높다는 걸. 그러나, 세상 모든 고난을 짊어지고 신에게 대신해 용서를 비는 순결한 천사 같은 얼굴이 조성한 분위기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헤인스워즈, 팀장님은, 좋은 분이셨…….”
라파엘의 어깨를 붙잡고 있던 캠벨 하사가 옆에 같이 주저앉았다. 아니, 앤지 너는 왜 훌쩍거려? 슬픔으로 젖은 현장까지 열 걸음 남짓을 남겨둔 단테는 지금이라도 머리를 쳐서 기절해야 하는 건 아닐까 고민했다.
“저기, 대위님 부르시는 것 아닙니까?”
“……저 아닙니다.”
“…….”
모른 척을 하기엔 통로 앞에서 당당히 SAG ODA-133 팀장이라 소개를 한 일이 있었다. 단테는 조금 전까지의 가벼운 걸음과 달리 삐걱삐걱이며 앞으로 다가갔다.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자 주변에 포진해 있던 군인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퍼졌다. 꼭 막 불시착한 우주선에서 내린 비행사라도 된 기분이었다. 다들 다른 곳 좀 봐주었으면…….
단테는 멋쩍은 걸음으로 다가가 팀원들의 뒤에 섰다. 그를 발견한 이들이 다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 로건 상사마저도 입가를 가리며 감격… 아, 저건 시뻘게진 자신의 얼굴을 보고 웃는 거였다.
“단테에에! 흐아아아!”
그 와중에도 라파엘의 서러움은 끊이지 않았다. 하……, 단테는 결국 눈을 꽉 감고 성큼성큼 걸어가 민망함을 담아 너른 등을 팡! 두드렸다.
“야, 너는 인마! 선배한테 단테가 뭐냐!”
라파엘이 뒤를 돌아봤다.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 위의 눈도, 입도 모두 동그랗게 벌어졌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 어어…….”
커다랗게 뜨여진 눈에서 뺨을 타고 뚝, 뚝, 뚝 큼지막한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단테의 앞에 선 라파엘이 덜덜 떨리는 두 손을 얼굴로 뻗었다. 열 개의 손끝이 아주 조심스레 양 뺨에 닿았다.
라파엘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뚝, 뚜둑, 뚝뚝. 눈물이 떨어지는 속도가 소낙비처럼 점점 빨라졌다.
‘음, 우는 분위기 좀 깨보려 한 거였는데…….’
그의 계획은 품 안에 단테를 와락 가둔 라파엘 때문에 순식간에 수포가 되었다. 덜덜 떨리는 두 팔이 단테를 필사적으로 끌어안아 붙잡았다.
“흐어어엉, 어, 흐어어……! 팀장님, 팀장님…….”
헤어져 있던 몇 시간이 마치 수십 년은 된 것처럼 라파엘은 서럽게 울었다.
귓가를 울리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단테는 그제야 오늘 하루 종일 긴장하고 있던 몸에서 스륵 힘을 풀었다.
라파엘의 품은 차가운 지하선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뜨거웠고, 그를 안은 두 팔은 내내 짊어지고 있던 작전팀장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을 만큼 단단했다.
팀원들의 가장 앞에서 뛰었으며 두 아이를 안고 긴 선로를 따라 걸었던 발이 드디어 바닥에서 떨어졌다. 단테를 안은 채, 라파엘은 다시 바닥으로 풀썩 주저앉았다. 라파엘이 무게를 전부 지탱해 단테의 몸에는 아무런 충격도 닿지 않았다.
단테는 고개를 라파엘의 어깨에 기대었다. 살아 돌아왔다는 감상이 짙게 들었다. 눈이 저절로 아래로 감길 만큼 포근했다. 그는 팔을 라파엘의 등 뒤로 둘러 토닥토닥 두드렸다.
“나 괜찮아, 라파엘.”
“단테, 흐아, 팀장님, 저, 너무, 끅, 많이 걱정, 했습니다. 흐, 폭탄이, 흐윽, 터졌, 는데, 팀장님만, 아, 안, 나오셨, 습니다.”
“기다리느라 고생했어. 왜 이렇게 울어.”
“제가아, 다치지 말라 했잖, 아요. 티잔님은, 사망, 프래그흐, 막, 끅, 얘기하시고…….”
“알았어. 미안해, 미안해. 내가 잘못했으니까 울지 마. 사람들 많은 데서 이렇게 울면 어떡해. 뚝 그쳐.”
“흐으, 뚝. 흐끅.”
단테의 말을 따라한 라파엘이 입을 꾹 닫고 울음을 삼켰다. 치밀어오르는 눈물을 참느라 힘이 잔뜩 들어간 턱이 호두처럼 쪼글쪼글해졌다. 미안하게도 좀 웃긴 얼굴이라 단테는 푸스스 웃고 말았다. 그리고 뺨을 흥건하게 적신 눈물을 두 손으로 훔쳐주었다. 그러자 울음소리를 그친 지 30초도 되지 않은 입이 도로 쩍 벌어졌다.
“허어어엉, 울음이, 흐어, 아, 안 멈춥니다…….”
“어이구, 진짜.”
단테는 한쪽 팔로 라파엘의 머리를 감싸고 그의 어깨 너머로 팀원들을 돌아보았다. 총 열 한 명. 모든 인원이 다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브리핑 이렇게 해야겠다. 다들 마음 졸였지. 하루가 참 기네. 새벽부터 지금까지 고생 많았다. 다친 사람은?”
“전 팀원 중 부상자 한 명 있습니다.”
“누구?”
“팀장님입니다.”
“하하……, 다행이네.”
라파엘이 단테의 어깨 위에서 전혀 다행이 아니라며 먹먹하게 웅얼거렸다.
“넌 울든가 잔소리를 하든가 둘 중 하나만 해라.”
그러니까 또 조용히 훌쩍이며 단테를 더 꽉 끌어안았다. 크게 놀랐던 충격이 가라앉질 않았는지 얼굴, 두 팔, 등이 아직도 크게 진동했다. 이렇게나 걱정을 시킨 데 대한 미안함이 ‘이제 그만 떨어져라’는 말도 나오질 못하게 했다.
팀에서 함께 지낸 적이 있는 막내다 보니 팀원들도 다 귀엽게 용인하는 분위기였다. 덕분에 단테는 라파엘을 안은 채로 브리핑을 이어갔다.
“부팀장. 나 없는 사이에 보고받아야 할 특이 사항 있었나?”
“있었는데, 지금 막 해결됐습니다.”
안젤라가 손끝으로 가리킨 건 단테의 품 안에 있는 라파엘이었다. 단테는 픽 웃으며 어깨 위의 곱슬머리를 흐트러뜨렸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 얼른 달래나 주십시오.”
라파엘은 어느새 그의 어깨를 축축이 적셔놓았다. 진이 빠지게 우는데도 여전히 팔 힘은 단단했다. 아무래도 라파엘은 단테를 잃을 뻔했던 두려움이 가실 때까지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휴……, 단테는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청명한 하루였음을 증명하듯 반쪽짜리 달의 모양이 선명하게 빛났다. 이 소란 속에서도 모든 것이 평화롭게 느껴졌다. 그와 함께, 몸에 힘이 점점 더 풀려갔다.
그는 팀원에게 손짓해 구급차 쪽을 가리켰다.
“안 되겠다. 누가 들것 하나만 여기로 불러주라.”
“예!”
“라파엘. 이제 그만.”
“…….”
“음… 사실 나 그쪽 어깨 부러졌어.”
“예에?!”
라파엘이 벌떡 고개를 떼어냈다. 황당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단테가 킥킥 반대쪽 어깨를 가리켰다.
“거짓말이고, 이쪽이야.”
단테의 곁으로 들것이 도착했다. 그는 그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이제 앉아 있을 힘도 없어 방금 전에도 라파엘의 몸에 기대 있다시피 했다. 어깨가 몹시 아픈데, 그게 신경 쓰이지도 않을 만큼 졸립기도 했다.
누운 그의 위로 여러 개의 시선이 다가왔다.
“상사님, 팀원들 정리 맡기겠습니다. 앤지는 같이 좀 가줘. 보고 올릴 내용 들을 겸, 보호자 부탁해.”
“예.”
“그리고 라파엘 넌 복귀해야지.”
“……팀장님…….”
라파엘이 여러 감정이 아직도 넘실거리는 눈으로 단테를 보았다. 이번만큼은 도저히 의젓하게 배웅하지 못하고 ‘저도 따라가고 싶어요.’라는 얼굴로 들것 끄트머리를 붙잡았다. 단테는 입 모양만 움직였다.
라피.
“……!”
라파엘이 숨을 삼켰다. 하고 싶은 말이 가득 담긴 입술이 우물거렸다. 그러나 사람이 많아 차마 꺼내지 못하고 시선만을 가득 보냈다. 단테는 손가락에 닿은 그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금방 다시 볼 수 있어.”
“……예.”
라파엘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단테가 실린 들것이 구급차 안으로 들어가고, 안젤라가 함께 탑승해 자리에 앉자 문이 닫혔다. 단테는 기분 좋게 눈을 감았다.
“선배.”
구급차의 출발과 함께 안젤라의 부름이 들려왔다.
“응. 왜?”
다시 눈을 떠 보니 그녀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팔짱을 끼고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 것 같은 의미심장한 표정과 함께였다.
“혹시…….”
그녀의 눈이 조금 더 가늘어졌다.
“카밀라 헤인스워즈 변호사 말고, 라파엘 헤인스워즈와 사귀십니까?”
“……아, 음… 응.”
하긴 라파엘이 그렇게 온몸으로 달려들었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반쯤 확신 가지고 물어본 거긴 한데……, 선배 입으로 들으니 역시 놀랍네요.”
“……라파엘이 좀, 티 났지?”
“아니오. 티는 선배가 엄청 냈습니다.”
“내가?”
“헤인스워즈야 원래 선배를 오리 새끼처럼 잘 따르던 녀석이었고, 이런 큰일도 처음 겪어봐서 충격받았을 테니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그녀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헤인스워즈 달래주던 선배 표정 보니까 눈치 못 채면 바보겠던데요.”
“……그런 사실 없습니다.”
“그런 사실 있습니다. 다 봤습니다.”
단테는 결국 따끈해진 얼굴을 머쓱하게 돌리며 하아아, 비밀 연애를 포기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옆얼굴로 계속해 따끔따끔한 시선이 느껴졌다.
“언제부터 사귀었어요?”
“……선후배 이상으로 만나게 된 건 휴가 때부터.”
“아, 그러면 혹시 그때 사령관님이 선배 보고 사위라고 부른 게 그겁니까? 카밀라 헤인스워즈가 아니라 라파엘 헤인스워즈의?”
“아, 그랬지. 어어……, 맞아.”
“헤인스워즈 가가…… 제 생각보다 훨씬 개방적이군요.”
“……그렇더라.”
안젤라는 모르겠지만, 헤인스워즈 가는 사실 지금 그녀가 놀란 것의 몇 배정도 개방적이었다. 오랜만에 헤인스워즈 패밀리와의 파격적이었던 첫 만남이 떠올랐다.
흐으으음. 안젤라가 길게 콧소리를 냈다. 단테는 “아니, 뭐 이제 직속 부하도 아닌데 연애할 수도 있지….” 하는 구차한 변명을 붙였다. 그러자 아예 허리에 손을 얹은 안젤라가 당당하게 선언했다.
“헤인스워즈 고생 꽤 많이 할 겁니다.”
“왜?”
“저만 해도 지금 큰오빠 빼앗긴 심정인데, 선배 부팀장 시절부터 같이 있던 팀원들은 어떻겠습니까.”
단테가 저도 모르게 손끝을 움찔할 만큼 무서운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다.
“각오 많이 하라 전해주십시오.”
다음 권에 계속
로맨틱 캡틴 달링 2권
@정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