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26)

3-3.

훈장 수여식이 있던 날, 팀원들은 모처럼 말쑥하게 정복을 챙겨 입었다. 가장 앞에 서는 단테 역시 오랜만에 착장을 완전히 다 갖췄다.

“대위 단테 베일리, 중위 안젤라 해리스. 앞으로.”

단테는 한 걸음 뒤의 안젤라와 함께 단상 위로 올라갔다. 이번 사안이 워낙 크게 다뤄져, 군 행사치고는 이례적으로 방송국 카메라가 여럿 보였다.

머쓱함을 누르고 곧게 허리를 펴 단상 중앙으로 걸어간 단테의 앞에 헤인스워즈 총사령관이 다가와 섰다. 황실에서 나온 훈장의 대리 시상자는 육군 참모총장이었다.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가슴에 훈장을 달아주면서도 못내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 헤인스워즈 총사령관은 결국 악수를 나누며 물었다.

“그런데 자네 정말 시연 생각 없나. 혹시나 마음이 바뀌었을까 해서 내 카메라까지 챙겨 왔는데.”

단테는 바로 뒤에 서 있는 안젤라가 들었을까 식은땀을 흘리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재차 극구 사양했다. 단상에서 도망치듯 내려가는 걸음이 올라올 때보다 빨랐다.

수여식이 끝나고 이후 저녁에는 팀원들 모두가 고대하던 축하 술자리가 예정되어 있었다. 작은 펍을 하루 동안 통째로 예약해 놓은 팀원들은 모두 상당히 들뜬 상태였다. 단테도 오늘만큼은 기쁘게 마시고 취할 예정이었다.

단테 외의 팀원들은 이번 주부터 전부 정상 출퇴근을 시작했지만, 부상으로 수술을 한 단테에게는 일주일간의 공가가 추가로 주어졌다. 퇴근 시간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는 팀원들을 업무로 돌려보내고 그는 행정 부서로 가서 부상 휴가에 필요한 서류를 작성했다.

복도 곳곳에서 축하를 받으며 지나가던 중 단테는 리온과 마주쳤다. 둘은 나란히 계단을 내려갔다.

“수여식 잘 봤다. 참, 수술한 데는 좀 괜찮냐?”

“옷 속에 밴드로 고정해놔서 답답하긴 한데 움직이는 덴 문제 없어. 두어 달 재활하면 완전히 회복될 거래.”

“그래도 훈장에 어깨 한쪽이면 할 만한 장사다, 야.”

“싸게 먹힌 편이지.”

단테의 등을 툭툭 두드린 리온이 팔을 저어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부상을 입은 단테를 대신해 리온은 C구역 총괄의 마무리 업무를 가져가 주었다. 방금까지 예정에 없던 서류 작업을 추가로 하다 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말은 투박하게 오고 가더라도, 어느 기수나 오랜 시간 함께한 사관학교 동기 사이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정상회담장 경호’ 자체는 깔끔하게 마무리되어 크게 할 일이 남진 않았다. 다만, 그 외 나머지가 복잡해진 원인은 다른 데에 있었다.

“인생사 진짜 모르는 거다. 테러범들 때문에 데릭슨 에프런이 덜미 잡힐 줄 알았냐.”

“아 참. 에프런이랑 마티네즈 일 어떻게 처리되고 있어?”

“안 그래도 그게 제일 문제인데…….”

리온이 골치 아픈 표정으로 머리를 헤집었다.

“마티네즈는 실수로 넘어갈 일은 아니니 보직 해임될 것 같고, 에프런은, 하……, 어쨌든 군 내에서 한 짓이 아니니까 처벌은 없지만, 연대장님한테 제대로 찍혔지 뭐.”

“역시 그 정도인가.”

“그 마티네즈가 악에 받쳐서 혼자는 못 죽는다고 발악하는 모습도 보기 씁쓸하긴 하더라.”

단테가 알기에도 마티네즈는 조용하고, 소심한 후배였다. 데릭슨 에프런이 집안 간 거래를 미끼로 협박을 해 자리를 바꿀 수 있을 만큼.

그러나 하필 떠밀려 간 테네시에서 테러가 발생했고, 억지로 자리를 빼앗겼던 그는 치명적인 실책까지 냈다. 그 일로 강한 징계를 받게 된 마티네즈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그 자리에 끌어낸 사람을 고발했다.

“심란하네. 어쨌든 윗선 귀에 들어갔다니 데릭슨도 당분간 진급은 물 건너갔군.”

“당연하지. 으휴, 사람이 이래서 착하게 살아야 돼.”

리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단테는 그 말에 몹시 동의했다. 근래 데릭슨과 밀러 일을 겪었더니 윗기수 전체에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그 기수는 어쩌다 후배에게 꼬장 부리는 놈들만 남았냐. 아, 밀러가 내 새끼 괴롭혔던 거 생각하니까 또 빡친다.”

단테는 요 근래 자신에게 향하는 총사령관의 애정을 차라리 라파엘에게 좀 옮겨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든든한 백의 보호가 필요한 건 여리고 순한 라파엘 아닌가.

그 말을 들은 리온은 ‘으, 징그러운 커플.’ 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뭐 그건 솔직히 사령관님뿐 아니라, 자식 중 하나는 군대 보내야 하는 수준의 집안 어른들이면 다 그래. 우리 아버지만 해도 SAG에 있는 아들에게 너무 편히 일하는 거 아니냐 하시더라. 각하도 비슷하시겠지. 음, 굳이 덧붙이자면 에프런 회장님도 그런 느낌이긴 하다. 이번 일도 아마 데릭슨이 가문 몰래 저지른 걸걸.”

“…….”

“이러니저러니 해도 분위기는 다 거기서 거기라.”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는데 라파엘도, 데릭슨도 나올 수 있다니. 새삼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단테는 눈썹을 찌푸리며 리온을 흘겼다.

“라파엘이랑 그 인간이랑 같은 선상에 놓지 마라.”

“야, 그럼 나는!”

“알 바 아니지.”

“이렇게 동기도 친구도 내팽개치면서 잘도 비밀 연애 지켜주길 바라… 읍.”

“아이고, 대위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코웃음을 치는 리온과 싹싹 비는 시늉을 하는 단테는 마저 건물을 벗어나던 중 누군가와 마주쳤다.

“어이구,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복도 반대편에서 데릭슨이 다가왔다. 대대장실이 있는 방향인데, 평소에도 짜증스러운 얼굴이 더욱 일그러진 걸 보니 한바탕 깨지고 오는 길인 모양이었다.

뭐가 어찌 되었든 아직까진 사관학교 선배이자 같은 대위이니 최소한의 인사는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

데릭슨은 단테가 정복을 입은 모습을 보고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했다. 그의 얼굴에 조금 전보다 더 어둡고 형형한 감정이 어렸다.

“뭔데 사람을 저딴 식으로 봐?”

혀를 차는 리온을 데리고 데릭슨의 옆을 지나치려던 단테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선배님.”

그를 불러세우자마자 자신을 찢어 죽일 듯 노려보는 시선을 재차 받을 수 있었다.

“저랑 선배님 사이 달라지는 건 이제 바라지도 않는데, 최소한 마티네즈에겐 사과하십시오. 후배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기회 다 빼앗은 것이나 다름없잖습니까.”

마티네즈는 처음 만났을 때와 테네시에서 재회했을 때, 두 번에 걸쳐 단테에게 사연이 있음을 토로하는 눈빛을 보냈었다. 그의 이야기를 알고 나니 그 시선들이 뒤늦게 마음에 걸렸다.

“씨발, 네가 뭐라도 된 줄……!”

터져 나오려던 큰 소리가 멈췄다. 여기가 사령부라는 것을 의식한 모양이었다.

“잘난 척하지 말고 꺼져. 너 아직까진 진급 안 했고, 내가 선배야.”

“…….”

하긴, 이 말을 들어줄 정도의 사이만 되었어도 관계가 이 정도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테는 한숨과 함께 그에게서 멀어졌다.

단테와 리온이 지나가고, 복도에 남은 데릭슨의 손등에 뿌득 핏줄이 섰다.

“하…….”

‘하, 큰오빠.’

전날 여동생이 이마를 짚으며 내쉬던 한숨 소리가 났다. 멀어지는 건방진 후배 둘의 뒷모습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워낙 고마운 걸 모르는 사람이라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난 그 정상회담장 배치인가 뭔가 하고 싶다 할 때 그래도 찬성해줬어요. 그때 괜히 편 한번 들어줬다가 지금 나까지 에반에게 타박 듣는 거 못 봤어요?’

에반은 그녀의 쌍둥이 오빠이자, 에프런 가의 현 후계자의 이름이었다. 또한 데릭슨이 가졌던 자리를 빼앗은 동생이기도 했다.

‘TV에서 자주 보이는 테러 막은 대위가 심지어 오빠보다 후배라면서요. 그런 대단한 건 안 바랄 테니까 집안 이름 창피하게만 하지 말아줘요. 예?’

여동생에게 그런 말을 듣고 온 직후에 단테를 보자 더 부아가 치밀었다.

자신이 조금 더 빨리 자원해 현장으로 가서 공을 세웠더라면, 여동생은 한숨이 아니라 존경의 눈으로 그를 보았을 것이다. 여동생과 외모와 성격이 비슷한 안젤라도 마찬가지였겠지.

그 스스로도 이게 열등감이란 걸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근본 없는 고아에게 열등감을 가진다는 사실 또한 그를 분개하도록 만들었다.

다른 곳에서라면 집안 없는 일개 군인은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하필 여기가 군대여서, 무식하게 몸은 잘 쓰는 새끼에게 유리한 곳이라 이렇게 되고 만 것이다.

그나마 운 좋게 슈스터, 해리스 가문 사람과 친해지고, 헤인스워즈의 사수를 맡아 하층민 인생을 조금 편 주제에.

“건방진 새끼…….”

귀족이자 상류층 사회를 살아온 그에게 단테는 늘 아랫사람으로 비쳤다.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주체에 따라 거슬리는 정도가 다른데 하물며 낡은 고아원 출신임에야. 데릭슨은 이번에도 그가 당한 모든 불행에 대한 분노를 단테에게 옮겼다.

* * *

“내 새끼, 누가 이렇게 심통 나게 했어.”

“…….”

“미안하다니까. 응?”

하얀 뺨을 열심히 문질러 관사 천장에 가 있는 시선을 도로 붙잡아 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아직 앞으로 비죽 나온 입술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단테는 도톰해진 분홍빛 입술에 입을 쪽 맞춰줬다.

“화 좀 풀어라.”

라파엘은 성의를 조금 더 봐야겠다는 듯이 입술을 넣지 않고 붕어처럼 뻐끔거렸다. 단테는 웃으며 다시 한번 입술을 붙였다. 오늘은 죄인인 그가 마음을 풀어줘야 하는 입장이건만, 토라진 티를 팍팍 내는 라파엘을 보고 있자니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전날 수여식이 끝나고 해가 지지도 않은 이른 저녁부터 시작된 축하 술자리는 다시 해가 뜰 때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단테 또한 환자라는 처지가 무색할 만큼 술이 많이 들어갔다. 종래에는 물인지 술인지 구분도 못 하고 그저 보이는 액체를 입 안에 부었다.

그리하여 비척비척 관사로 돌아와 뻗은 뒤 다시 정신을 차리기까지 약 24시간, 누군가의 애인은 연락 두절이 되었다. 그 시간 내내 단테를 걱정하며 전화 수십 통과 메시지 수백 통을 쌓아놓은 애인은 사건의 전말을 듣고 몹시 토라졌다.

“술 드시는 중간에 한 번만이라도 연락해주셨으면…….”

“생각을 못 했어. 미안해.”

“…….”

“다음부턴 안 그럴게.”

역시 라파엘은 단테에게 오래 화를 내지 못했다. 대신 그는 침대에서 단테의 허벅지를 베고 눕는 특혜를 받았다.

단테는 자신의 무릎을 꼭 붙잡고 누운 라파엘의 머리카락을 사락사락 쓰다듬어 주었다. 소소한 실수, 작은 투닥임, 그 뒤의 화해. 일련의 과정을 거치니 연애 중이라는 실감이 물씬 났다.

“술자리에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셨습니까.”

“그냥, 뭐… 이것저것 많았지.”

몇 달 훈련에 매진하던 시간 동안 팀원들 사이에는 서로 꺼내지 못한 이야기가 제법 쌓여 있었다. 뒤늦게 전하는 소식들이 불어나며 결국 술이 술을 더 부르게 되었다.

그중에 하나가,

“우리 팀에 이번에 수습 또 들어오게 됐어.”

“예?”

라파엘이 심통 난 볼을 집어넣고 대번에 눈썹을 찌푸렸다.

“아니, 무슨 수습을 매년 받습니까? 특수부대에 이제 사관학교 막 졸업한 학생이 오는 게 말이 됩니까? 절대 안 된다고 하셔야 합니다.”

“허.”

지금으로부터 딱 1년 전에 ‘삐약삐약. 저는 어제 졸업한 라파엘이에요.’라는 문구를 이마에 적고 찾아온 게 누구인지 생각이 안 나는 모양이다. 라파엘 병아리를 6개월간 업고 어르고 달래 키워준 사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미 결정된 거라 못 바꿔. 위에서 우리 팀엔 당분간 큰 작전 예정된 게 없으니 한 명만 더 키워 보라 하시더라. 솔직히 상황은 너 왔을 때가 더 안 좋았어, 인마.”

“…….”

조금 전 토라졌을 때처럼 들썩거리려는 입술을 단테가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거기다 어제 술자리에 찾아와 싹싹하게 인사까지 하고 가서 이제 물리지도 못해. 너 처음 왔을 때 생각나더라. 완전 병아리 같아서는.”

“……걔 이름이 뭡니까?”

“왜. 괴롭히게?”

“아닙니다. 그냥 알아두려는 겁니다.”

그러면서 왜 주먹은 불끈 쥐고 입술은 코끝에 닿으려고 하는 건지.

“뭐더라… 성은 기억 안 나는데 이름은 섀넌이었어. 여자애야.”

“예에?”

라파엘이 누운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더니 아주 펄쩍 뛰다 못해 침대를 두드리고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느냐 싶을 만큼 통탄을 했다.

“아니, 아무리 제국이 자유분방해졌어도, 남녀가 유별한데! 어떻게 남자 선배한테 여후배가 수습을 옵니까?”

“뭐, 아예 없는 일도 아니고.”

“그리고 올해 졸업하면 무려 8기수 차이입니다! 어디 하늘 같은 대선배를 찾아옵니까?”

“……그게 7기수 차이 나는 선배 집 침대에 누워 있다가 할 말은 아니지?”

분하게 콧김을 뿜는 라파엘에게 단테가 물었다.

“흠, 그럼 남자면 괜찮아?”

“그것도 사실 안 됩니다……!”

팀장님 후배는, 저만…. 웅얼거리는 라파엘을 보며 단테가 킥킥 웃었다.

“완전 잘해줄 거야. 어린 애가 험한 특전사 지원한 거 기특해서라도.”

“저, 저도 지금보다 어릴 때 험한 특전사 지원했…….”

“한 달 정도 있다가 친해지면 사석에서 그냥 이름 부르라 할까?”

“단테!”

라파엘이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라고 앤지가 말했어.”

그는 라파엘의 여러모로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더욱 짓궂게 입술을 밀어 올렸다.

“사수가 내가 아니라 해리스 중위라고.”

“……아…….”

수습을 ODA-133으로 온다고 해서 꼭 단테가 사수인 것은 아니었다. 라파엘이 한숨을 탁 쉬며 녹아내리듯 어깨를 떨어뜨렸다. 단테가 조금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만난 지 1년이 되어 가는데 아직도 이런 거에 속아 넘어가네.”

“…….”

“내 새끼, 질투했구나?”

“예, 그렇습니다.”

도로 빵빵해진 얼굴이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팀장님은 아랫사람들에게 유난히 더 잘해주시니까…….”

“걱정 마. 걔랑 나랑은 더 만날 일도 없어.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맡은 사수는 너야.”

“……그래도 같은 팀이지 않습니까. 계속 마주칠 거고…….”

“아, 팀은 올해 안에 해체될 것 같아.”

이번에 라파엘은 무어라 반응하지 못했다. 대신 크게 뜬 눈만 위아래로 끔뻑였다.

“아니, 나쁜 이유는 아니야. 일단 내가 소령 진급이 확정되면서 인사이동 얘기가 계속 나오는 중이고, 마침 앤지도 내년이면 대위 달 연차이니 팀장 자리 물려받아야지.”

“아…….”

“그리고 로건 상사님 따님이 올해 학교 입학해서, 가족이랑 최대한 시간 보낼 수 있도록 일반 부대로 옮기신대. 제니스에겐 이번 작전 성과 덕에 스카웃이 왔다더라. 정보국 쪽인 것 같아.”

여러 가지 이유로 한 팀의 수명은 보통 3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단테의 팀도 슬슬 그 시기가 왔다.

새로 편성될 ODA-133 해리스 팀에는 아마 기존 인원의 절반 정도만이 남고, 나머지를 새로운 팀원이 채우게 될 것이다. 단테가 부팀장에서 팀장이 될 때 그랬듯이.

“다 잘됐고, 축하할 일이긴 한데 아쉽더라. 아무래도 떠나가는 사람들 중엔 나랑 오래 같이 있던 고참이 많으니까.”

“그래서 술 많이 드신 거였습니까?”

“그렇다고 하면 봐주나?”

“……제가 그렇게, 심하게 화난 건 아니었습니다.”

“아이구, 그랬어요.”

단테는 이번엔 반대로 라파엘의 다리를 베고 벌러덩 누웠다. 그렇게 진탕 술을 마시며 아쉬움을 떨쳤는데도 아직 헤어짐이 실감나지 않았다.

“하아. 팀원들이랑 진짜 추억 많았는데. 막 팀장 달았을 때였나. 상사님 따님이 유치원에 입학한다는 거야. 그래서 팀원들 다 같이 정복 차려입고 몰래 찾아가서 따님 어깨 세워주기도 했다.”

“유치원생 아이면 엄청 좋아했겠습니다.”

“응. 그날 하루 종일 아주 신났다더라. 그리고 다음 날 민원 들어와서 나 혼자 대대장실에서 두 시간 동안 머리 박고 있었어.”

“아…….”

하긴… 유치원에 군복 입은 시커먼 덩치의 사람들이 줄줄이 들어오면 좀 무서운 광경이긴 하겠다. 라파엘도 그를 따라 어색하게 웃었다.

단테는 라파엘이 없던 시절의 팀 이야기를 조금 더 들려주었다. 그가 라파엘처럼 막 수습을 마쳤을 무렵의 일, 팀원을 안타깝게 떠나보냈던 일, 안젤라가 불쑥 부팀장이 되어 찾아왔던 일 등.

소령 진급과 함께 인사이동을 하면, 지금처럼 현장에 파견되기보다는 상부관리자로서의 일을 맡게 될 것이다. 이후로는 소수 인원과 단란하게 움직이는 일도 거의 사라진다.

“진급은 좋다만… 팀장님 호칭이 제일 부담 없고 친근했는데 괜히 빼앗긴 기분이야.”

“팀장님, 팀장님.”

“이제 와서 부르는 척하지 마라. 너 요새 툭하면 이름으로 부르잖아.”

불리한 말은 또 못 들은 척, 라파엘은 단테 가까이로 고개를 숙였다.

“제가 왜 선배님보다 팀장님이라는 호칭 더 좋아하는지 아십니까?”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선배 소리는 꺼내지도 않았네. 그래, 왜?”

“만나지도 못했던 학교 후배보다는 팀장님이 귀여워해 주시던 팀원으로 기억되고 싶어서였습니다. 저는 팀장님께 수습 받던 시절을 앞으로도 잊지 못합니다. 애인인 단테와 별개로, 그때의 팀장님은 제 평생 최고의 상관이었습니다. 고작 6개월을 본 제가 이런데, 다른 팀원분들께는 훨씬 더 좋은 팀장이셨을 겁니다.”

라파엘이 단테의 얼굴 앞에서 눈을 접으며 미소를 지었다.

“팀장직 무사히 마치신 거 축하드립니다.”

“고마워.”

단테도 따라 뿌듯하게 웃었다.

“단테.”

“응.”

“앞으로 제 남은 삶의 모든 수단과 목표는, 팀장님 다음으로 얻어낸 호칭인 ‘단테’를 곁에서 부르기 위해서가 될 겁니다.”

단테는 말을 마친 라파엘의 입술을 빤히 보다 고개를 기웃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프러포즈야?”

“예? 아, 아닙니다! 제가 설마 프러포즈를 말로만 하겠습니까.”

“아니, 나도… 결혼 얘기는 좀 많이 이르다 싶었는데, 분위기가 완전 프러포즈길래.”

“그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앗, 그런데 결혼할 마음이 드셨다면 저는 언제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너 겨우 스물넷이야. 정신 차려라.”

“팀장님을 만난 뒤로 제 꿈이 어린 신부입니다…….”

“또 헛소리한다. 또.”

의도가 조금 엇갈렸지만, 라파엘이 서툴게 건넨 말속엔 자신만큼은 단테를 영원히 떠나지 않겠다는 다짐이 듬뿍 담겨 있었다. 아쉬움에 젖어 있던 단테에게 그건 제법 위안이 되었다.

어리고, 순수하고, 착하고, 귀엽고.

미소 지은 눈이 더 가늘어졌다. 단테는 손을 까닥여 바짝 가까이 불러온 라파엘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라파엘.”

“예.”

“다음 주말엔 오랜만에 성당에 같이 갈래?”

“아, 네! 좋습니다.”

이번엔 어머니에게 라파엘을 이전과 다르게 소개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휴가 중에도 출퇴근을 할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일과가 하나 있었다. 식사 후 간단한 저녁 운동을 다녀와 샤워까지 마친 단테는 테이블에 앉았다. 그의 휴대폰은 오늘도 정시에 울렸다.

“금요일에 그냥 내가 내려갈까? 너 지내는 데서 같이 하룻밤 자고 성당 가면 되지.”

―환자가 자꾸 어딜 오려 하십니까. 제가 갈 테니 계십시오.

라파엘의 대답은 단호했다. 이걸로 벌써 세 번째 거절이었다. 어쩐지 작전에서 다친 이후로 단테가 테네시에 오는 걸 싫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팀장님, 병원은 다녀오셨습니까? 의사가 뭐라 했습니까?

단테에게서 내가 가겠다는 말이 또 나오기 전에 라파엘은 화제를 돌렸다.

“다 나았대. 이제 환자 아니라더라.”

―거짓말인 거 다 아니까 만날 때까지 재활 잘 다니셔야 합니다.

“알았다. 알았어. 너 지금 사수 맡았을 때의 나보다 잔소리가 더 많은 것 같아.”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다 보니 어느새 라파엘을 재울 시간이었다. 내일도 무료한 휴가를 재활 센터에서 보낼 단테와 달리 라파엘은 출근이 있었다.

“응. 잘 지내고 있으니 내 걱정 그만하고. 잘 자, 라피.”

짧은 인사를 입에 올리는 동안 그보다 긴 미소가 지어졌다.

“예, 단테. 단테도 잘 자요.”

“그래, 내일 보자.”

오늘도 전화를 먼저 끊어주려던 차에 뒤늦게 한 마디가 더 도착했다.

“사랑해요.”

손가락이 급히 멈칫했으나, 이미 종료 버튼에 닿은 직후였다.

“하…….”

이 타이밍을 노린 게 분명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짚은 단테의 귓가가 발긋해졌다.

라파엘의 마지막 고백은 괘씸하게도 다음 날 일찍 재활을 나가야 하는 애인이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단테는 서너 시간 정도의 짧은 잠 속에서도 금색 몽실 구름 속에 숨이 막힐 정도로 파묻히는, 길몽인지 악몽인지 모를 꿈을 꿨다.

“하여간 라파엘 헤인스워즈, 잔망만 늘어서는…….”

선잠으로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재활 훈련을 하러 가던 중, 단테의 휴대폰이 울렸다.

웬일로 근무 시간인데 전화를 했지, 하며 꺼내 본 휴대폰에는 라파엘이 아닌 다른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집.

이라는 이름으로 저장된 성당이었다. 마침 연락할 일이 있었던 단테는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타이밍 좋네. 나 다음 주에,”

―혀, 형. 흐윽……. 지금 어디야?

단테는 걸음을 멈췄다.

“이든? ……너 울어? 무슨 일이야?”

―형, 그게, 지금, 성당에…… 아!”

―어른이냐? 이리 전화 바꿔.

동생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성당에서 좀처럼 듣기 어려운 거친 성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단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뭡니까. 당신.”

대답하는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스피커 너머에서 휴대폰을 빼앗은 남자와 그것을 도로 가져오려는 동생이 실랑이를 했다. “돌려줘요!”, “아 이 꼬맹이가 진짜!” 하는 다툼을 듣고 단테는 소리쳤다.

“무슨 짓이야!”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놀라 그를 쳐다봤지만 시선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단테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도로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성당에 무언가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성당에 상주하는 인원은 성인이 되지 않은 아이들과 나이 든 원장 수녀, 그녀와 마찬가지로 오래 성당에서 함께한 직원들뿐이었다. 그 외에는 호의로 일손을 돕는 마을 사람들이 오가는 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안전을 걱정하지 않았던 건, 그곳이 정말로 외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낡디낡은 성당에 굳이 해코지를 목적으로 찾아올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택시 기사에게 성당의 위치를 부른 단테는 침착을 되찾고 동생에게 말했다.

“형이 전화 받을게. 휴대폰 잠시 넘겨줘.”

성당에 성인 남자에게 대항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이상, 자극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했다. 또 뭐라 날 선 중얼거림이 들려온 뒤에 남자가 휴대폰을 이어받았다.

―이보쇼. 이쪽 업체가 여기 낡아빠진 곳 싹 고쳐 놨는데, 사흘 전부터 불러서 일 시켜놓고 용역비를 안 주고 있소. 댁이 낼 거요?

“……?”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성당이 공사를 했단 말입니까?”

―뭐야, 모르나? 이 애들이랑 관계가 어떻게 되시오?

“보호자 맞습니다. 지금 바로 가는 길이니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아, 거 참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이쪽도 오래 기다리긴 곤란한데.

남자의 목소리 뒤에서 희미하게 어린아이의 훌쩍임이 들렸다. 아는 직원이 차분히 달래는 소리도 함께 나는 걸로 보아 직접적인 위해를 당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까지는.

단테는 입술을 꾹 물었다 놓는 사이 생각을 마쳤다.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성당을 고쳤다는 건, 공사 업체에서 나왔습니까? 회사 이름이 뭡니까?”

남자가 대답해 준 명칭은 단테의 기억에 없는 것이었다.

―씨, 지방 작은 회사라고 지금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통화를 하는 남자의 말투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트러블이 있는 상황이라지만 지나치게 거칠었다. 몇 마디 말이 더 오갈수록 그 생각이 더 짙어졌다.

“상황에 대한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그러니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손 하나 대지 마십시오.”

최대한 대화를 이어가던 전화가 끊겼다. 까만 화면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성당에 이런 표정으로 향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단테의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고 무언가 압박감을 느꼈는지, 택시 기사도 빠르게 달려 평소 걸리던 시간보다 일찍 그를 성당에 내려주었다.

성당 앞에는 직원 두 명과 어른들 뒤에 불안하게 매달린 아이들, 그리고 그들과 대치하듯이 정면에 서너 명의 남자가 껄렁한 자세로 서 있었다.

갑자기 등장한 택시를 발견하고 공사 인부로 보이는 남자들이 이쪽을 험악하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내린 사람이 단단해 보이는 키 큰 남자인 것을 보고 조금 기세가 꺾였다.

“형!”

“단테!”

아이 둘이 울먹이며 단테에게 달려왔다. 나머지 아이들은 여전히 직원의 허리에 매달려 그를 보았다. 단테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까이 다가갔다.

“전화 받은 보호잡니다. 무슨 일…….”

“형, 히끅.”

알고 있는 사람 중 가장 든든한 사람을 보자 잔뜩 세우고 있던 긴장이 풀렸는지 허리에 매달린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문득, 단테는 어느 한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단 걸 깨달았다.

“어머니는 어디 계셔?”

“아, 아까 저 아저씨들이 밀어서…….”

“아니, 말은 바로 해야지. 매달리는 걸 뿌리쳤더니 지가… 아, 아니 시스터가 알아서 자빠진걸.”

“……뭐?”

“단테, 괜찮아! 마을 아주머니랑 같이 병원 가셨어. 크게 다치신 건 아니야.”

단테의 직업이 군인이며, 군인은 민간인을 건드려선 안 된다는 상식과도 같은 규정을 직원들 역시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눈을 부릅뜬 단테를 황급히 말렸다.

단테의 입술이 으득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깨물렸다.

그는 먼 곳으로 작전 수행을 나갔을 때 참혹한 현장을 많이 보았다. 아이들을 유괴해 인신매매하던 범인, 주둔군을 포함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먹는 식용수에 독을 푼 미친놈, 동료의 몸에 총알을 박았던 적군 등.

그러나 사살 명령이 내려지지 않은 이상 군인에게 처분권은 없었다. 때로는 국제법에 걸려 그들을 눈앞에서 놓아줘야 하기도 했다.

단테는 그때 배웠던 인내를 지금도 필사적으로 끌어올려야 했다.

아이들이 보고 있다. 성당 앞이다. 제국군은 일반 제국민을 공격해선 안 된다. 여러 사실이 그를 말려도 꽉 쥐어진 손과 눈에 힘이 풀리질 않았다.

“아, 법대로 하쇼! 아니면 뭐, 한 대 치기라도 하던가.”

시비를 걸던 인부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가 커다란 덩치와 고성으로 사람들을 위협한다면, 단테는 총칼로 사람을 직접 겨누던 군인이었다. 어머니를 다치게 한 사람에게 내비치는 살기와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단테는 자신의 허리를 안은 아이의 어깨를 슬쩍 밀며 직원 두 사람을 돌아봤다.

“애들이랑 같이 예배당이나 침실에 가 계세요. 제가 해결하고 가겠습니다.”

두 사람은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그를 보다, 아이들을 챙겨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단테는 인부들을 보았다.

“공사한 데가 어딥니까.”

그가 안내받은 곳은 전에 그와 라파엘이 손을 보았던 교실이었다. 낡은 성당 안 소담한 교실의 벽, 천장, 바닥이 모두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옆에 붙어 있는 작은 창고를 텄는지 공간이 넓어졌고, 신식 판서 도구와 깨끗한 책상들이 놓여 있었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둘러싸인 교실은 문밖의 나무로 된 복도와 괴리가 느껴졌다. 포근한 느낌을 줘야 하는 흰 벽이 도리어 이질적인 싸늘함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서 단테가 예전에 공부를 했던 기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성당과 어머니가 이 정도 규모의 리모델링을 했다고? 도무지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 여느 사립학교 못지않은 화려한 교실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얼맙니까.”

그들이 눈치를 살피다 액수를 불렀다. 단테가 어이없다는 소리를 냈다.

“장난합니까. 내가 학교 다니며 어머니 몰래 안 해 본 아르바이트가 없는데. 자재 하나씩 뜯어보기 전에 양심적으로 부르시죠.”

결국 뻥튀기되었던 금액은 30%가량이 깎였고, 계약서를 수정했다. 그렇다 해도 상당히 큰 액수였다.

단테는 군 행정 부서와 약 10분 정도 통화를 했다. 제국 특수군의 복지 중에 긴급대출이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생각보다 간단한 절차로 처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한 액수를 이체할 수 있었다.

대금이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 아까 전부터 목소리가 가장 큰 인부가 혀를 차며 괜히 교실 문을 세게 밀어젖혔다.

“진작 받았으면 이럴 일도 없지. 아 우리도 아랫사람들이란 말요. 돈 안 받아 가면 이쪽도 곤란해진다고!”

단테가 말없이 나가는 뒷모습을 노려보자, 성당 출입구에 다 와서는 그가 외쳤다.

“거 통화하는 거 들어보니 군인 같은데 나라 지키는 놈이 어디 선량한 시민들을 노려봐? 그따위로 살지 마!”

그러고는 더 빠른 걸음으로 차에 올라탔다.

단테는 차가 성당 부지를 벗어날 때까지 창밖을 살피다 교실 책상에 털썩 걸터앉아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런 표정으로 아이들에게 돌아갈 수는 없었다.

화를 가라앉힌 뒤, 그는 도무지 그가 아는 성당의 일부라고는 믿기지 않는 교실을 둘러보았다. 창틀에 무늬까지 음각된 과한 공사도 문제인데, 이 싸늘한 인테리어는 도무지 수십 년간 이곳을 지킨 어머니의 취향이 아니었다. 아이들의 낙서로 빼곡한 담도 새로 칠하지 않는 분인데.

단테는 의문을 누르고 교실을 나서 아이들이 있는 예배당으로 갔다.

“단테.”

걱정스레 자신을 부르는 직원 다이앤을 향해 웃어 보이며 단테는 달려온 아이를 들어 안았다. 다이앤도 단테가 어릴 때부터 있던 사람으로 나이가 결코 적지 않은데, 갑작스러운 상황을 맞아 상당히 놀랐을 것이다.

“제가 해결하고 보냈어요. 다시 찾아올 일 없을 겁니다. 티미, 제이. 이리 와. 나 왔으니까 이제 괜찮아.”

일단 그의 살을 파내 인부들을 돌려보냈다뿐이지, 사실 사태에 대해 파악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겁에 질린 아이들을 안심시키는 것이 먼저였다. 단테는 엉겨 붙는 어린 동생들 사이에 앉아 무릎이며 품, 어깨 등을 남김없이 내주었다.

“어머니는요? 많이 다치신 겁니까?”

“아니야. 그냥 넘어지신 건데 연세가 있으시고, 또 충격을 받으셔서 그래. 괜찮으시다고 병원에서 연락받았어.”

단테의 입술 사이로 안도의 한숨이 길게 뻗어져 나왔다.

“우선… 애들 추스르고 자세한 이야기 들을 수 있겠습니까.”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점심과 저녁 사이의 시간대였다. 평소처럼 점심을 준비하던 부엌도 갑작스러운 사태에 엉망이었다. 삶고 있던 면은 다 불어 쓸 수 없고, 스튜도 바닥이 눌어붙었다.

당장 준비할 수 있는 건 물과 재료를 더 넣어 복원한 스튜와, 냉장고에 있는 야채를 뒤섞어 구운 스크램블이 다였다. 그마저도 양이 부족해 단테는 식사를 걸렀다. 대신 식탁을 돌아다니며 잘 삼키지 못하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토닥여줬다.

―단테 오빠!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또, 다행히 독립한 옛 동생들 중 가까이에 살고 있는 동생이 연락을 받고 어머니가 간 병원에 달려갔다.

“모르겠어. 자초지종은 이제 내가 직원분들께 들어볼게. 어머니 별 이상 없어도 병원에서 하루 계시게 해. 여긴 내가 있을게.”

―나도 알아. 오빠야말로 엄마는 내가 잘 데리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

“어머니껜 그쪽 회사에서 착오가 있었고, 연락해서 잘 해결됐다고 말씀드려. 군인이 나타나니까 함부로 못 하고 갔다 하면 믿으실 거야.”

―……알겠어. 왠지 또 오빠만 고생시키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인지 알아내면 연락줘. 제이드 언니들 지금 올라오는 중이래.

“응. 알겠어.”

단테뿐만 아니라 성당을 거쳐 간 모든 아이들은 이곳에서 친부모를 대신해 하늘에서 내려준 사람의 애정을 듬뿍 받고 자랐다. 성당과 어머니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하면 그들은 언제라도 한달음에 달려올 것이다.

아이들이 식사를 마칠 즈음, 고학년의 큰 동생들이 귀가했다. 단테는 그들에게 어린 동생들을 잠시 맡기고, 직원들과 마주 앉아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어느 기업이라고 들었어. 알다시피 우리가 너무 큰 후원은 거절하잖아. 헤인스워즈 가에서 연락이 왔을 때도 그랬고. 그런데 막무가내로 주는 걸 왜 거부하느냐, 받으라는 식으로 나와서…….”

다이앤이 한탄하듯 말을 이어갔다.

“우리가 계속 사양하니까 자길 무시하냐며 윽박을 지르더라고. 이쪽 교구에 항의를 하겠다느니……. 결국 수녀님이 설마 시골 성당에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이 있겠느냐고, 받아서 가장 좋은 일에 쓰자셨어.”

당신이 선한 만큼 타인의 선함을 믿는 어머니다운 말이라고 단테는 생각했다.

“그래서요?”

“역시 다른 곳보다는 아이들 교실 먼저 고치기로 했는데, 거기에 대고도 시공사를 뭐 이딴 데를 부르느냐, 아는 곳을 연결해주겠다며 참견을 해왔어. 그 뒤로도 불쑥 사람을 보내 이것저것 제멋대로 굴었고.”

“…….”

“그렇게 결국 공사가 시작됐는데, 기부금을 보내주겠다고 한 날이 되니까 갑자기 차일피일 미루는 거야.”

기부금을 억지로 떠안기려 든 데다가, 주선한 업체와 공사 일정까지 막무가내로 잡은 그곳은 공사가 완료되는 오늘에 이르러선 갑자기 연락을 뚝 끊었다. 당연히 성당은 공사비용을 마련할 방법이 없었고, 그게 조금 전의 사태를 초래했다.

“얘기만 들어도 너무 수상한데…. 사기라고 의심해보진 않으셨습니까? 신고는…….”

“의심했어. 당연하지! 시가지의 큰 성당에서도 사람 보내 줘서 계약서 검토했고, 경찰서에도 순찰 지나가다 봐 달라 부탁했고. 다들 이 정도로 밀어붙이는 건 조금 이상하지만 기업 자체는 건실한 곳이다, 연말이라 세금 처리나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하는 일일 수도 있다 하기에 우리도 믿기로 했는데…….”

그리고 뒤늦게 공사를 중단하려 하자 위약금을 들어 협박까지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단테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우리가, 너무 무지하긴 했지. 설마하니… 하아…….”

“아니에요. 마저 얘기 들어보니 그럴 만했습니다. 아까 그 사람들은 이제 다시 찾아올 일 없을 거예요. 다이앤도 오늘 많이 놀랐죠.”

“연락받고 갑자기 달려온 너만 하겠어. 식사도 못 챙겨 어떡하니.”

“저야 이 중에서 제일 튼튼한 사람이잖아요. 한 끼쯤 걸러도 멀쩡합니다. 애들은 제가 재울 테니 올라가서 따뜻한 차 한 잔 드시며 쉬세요. 자, 가요.”

단테는 그녀의 팔을 부축해 직원용 침실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런 다음 아이들의 침실로 향했다.

아직 불은 환하게 켜져 있고, 걱정스러운 말소리가 들렸다. 어떡해, 무서워, 엄마는… 등등. 애써 어린 동생들을 달래는 큰 아이들의 목소리에도 불안이 묻어 있긴 마찬가지였다. 단테는 대화를 끊으며 박수를 짝! 쳤다.

“다들 이제 자야지. 어머니 대신 내가 오늘 계속 여기 있을 거니까 무서워하지 말고 자. 다들 이불 덮었어?”

나란히 놓인 이층 침대들에서 부스럭 이불을 추켜올리는 소리가 났다. 단테는 스위치에 손을 얹고 기다리다가 소등해주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어둠에 적응할 때까지 그 자리에서 기다려주었다.

“단테, 거기 있지?”

“응.”

“거기 있어야 돼…….”

“걱정하지 마. 아침까지 여기 있을 테니까.”

단테의 목소리가 문가에서 들리자 아이는 안심하고 이불을 꼭 쥔 채 눈을 감았다.

한 시간쯤 지나 뒤척임이 거의 사라져갈 즈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침실 문을 반쯤 닫고 바로 앞의 창가에 기대 서서 휴대폰을 확인했다.

라파엘 헤인스워즈.

미안하게도 하루 종일 제대로 연락도 못 준 이름이 떠 있었다.

“…….”

단테는 전화를 받지 않고 화면을 보고만 있었다.

진동은 한참을 울리다 결국 끊어졌다. 이어 메시지가 도착했다.

[단테? 0_0]

단테는 그제서야 휴대폰을 두드렸다.

[아, 재활 다녀와서 깜빡 잠들었다. 미안.

오늘 좀 무리했나 봐. 계속 졸리네.]

기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그는 화면에 지금 상황과 전혀 다른 내용을 적었다.

조금 전 갑작스러운 일이 닥쳤을 때 라파엘을 잠시 떠올렸던 것도 사실이었다. 도움을 받는 게 아니더라도, 불안한 감정이 찾아오자 애인의 체온과 목소리가 절실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놀랐던 마음이 가라앉자 역시 알리지 말자는 마음이 더 커졌다.

물론 상황이 복잡한 데다가, 사귀는 사람에게 적지 않은 액수의 빚이 생겼으니 조만간 제 입으로 말을 하는 게 당연하긴 했다. 하지만 우선은… 스스로 어느 정도 해결을 해두고, 여유를 차렸을 때 전하고 싶었다.

단테의 몸 상태에 몹시 예민한 라파엘은 예상한 그대로의 답을 보내왔다.

[앗 제가 깨운 겁니까? 졸리시면 얼른 다시 주무세요!

저도 씻고 잘 준비 하겠습니다. 좋은 꿈 꾸세요☜♥☞]

그놈의 날개 달린 하트는.

비일상적인 사건이 쏟아진 하루의 끝에서 일상처럼 포근히 느끼던 온기가 다가오니 목 안이 뜨거워졌다.

[응. 너도 잘 자.]

단테는 이전에 보냈던 메시지들을 보고 태연한 답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한참 휴대폰을 꽉 쥐고 있었다.

어머니, 어린 동생들, 직원들, 성당이 어깨에 더해져 그에게도 꽤 가쁜 하루였다.

단테는 방 안에서 완전히 잠든 소리만 나는 걸 확인하고, 기대어 있던 창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늘을 가릴 큰 건물이 없는 시골의 밤하늘은 별이 빼곡했다. 창문을 통해 내려온 달빛이 복도에 앙상한 가지들의 그림자를 그렸다. 그 위로 단테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 아래층으로 내려간 그는 어느 문 앞에 섰다.

“어머니 죄송해요.”

원장실은 잠겨 있었지만, 낡은 건물 문손잡이의 잠금쯤은 단테에게 문제될 게 없었다. 좌우로 요령껏 손잡이를 돌리자 툭, 하고 잠금쇠가 풀려났다. 그는 문을 열고 원장실 내부로 들어갔다.

스위치를 누르자 조명이 서너 번 깜빡이다 켜졌다. 커다란 창문이 있는 방은 창을 닫아도 찬 기운이 새어 들어와 복도보다 더 쌀쌀했다. 앞으로 발을 내딛자 바닥에서 삐걱 소리가 났다.

그는 낡은 책상으로 다가가 위에 올려진 몇 장의 종이 중 계약서로 보이는 것을 찾아냈다. 계약의 주체는 성당과 TDB… 라는 이름의 어느 투자회사였다.

단테는 구형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을 틀었다. 검색기록엔 어머니가 서툴게나마 계약이며 회사에 대해 찾아본 흔적들이 보였다.

투자회사는 다른 사람들의 말처럼 겉보기엔 건실한 홈페이지까지 갖춘 곳이었다. 단테는 인터넷에 뜬 번호와 계약서에 적힌 번호로 두 번에 걸쳐 전화를 걸었다. 밤늦은 시간이라 자동응답기가 받을 뿐이었다.

그는 투자회사에 대해 검색해보던 창을 잠시 내려놓고, 조금 전 인부에게서 들은 공사 업체의 이름을 입력했다.

“……이게 뭐야.”

조금만 결과를 훑어보아도 그들의 견적 부풀리기와 위협적인 태도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며 호소하는 글이 수두룩했다.

한쪽 눈을 찌푸린 단테는 느리게 돌아가는 컴퓨터를 잠시 두고 휴대폰을 열었다.

곧 단테의 입에서 하, 하고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거 완전 양아치 회사잖아.”

업체의 뿌리는 지방의 양아치들이 모여 만든 집단이었다. 나름 사업체의 이름을 갖추고는 있다지만 일 처리 방식에서 나오는 태도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TDB라는 투자회사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곳을 연결해준 거지.

아니 애초에.

이 모든 일을 왜?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위해를 끼쳤다는 데 대한 화를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이 많았다. 기업의 횡포라고 생각하더라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기업이 다른 이들에게 갑질을 하는 건 결국 그 이상의 이득을 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조장해 회사에게 득이 될 것은?

현재 문제의 투자회사, 교실을 고친 건설 업체, 성당 중 득을 본 쪽은 아무도 없었다. 냉정히 따져, 어머니의 부상을 제외하면 성당도 새 교실을 얻었으니 금전적으로 피해를 입었다 주장할 수는 없었다. 단테가 조금만 늦게 도착했더라면 성당엔 다른 방식의 문제가 생겼을 테지만.

“…….”

무언가 교묘히 짜여진 수작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끝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은 ‘대체 이 시골 성당에 왜?’라는 것이었다.

단테는 조금 더 조사를 이어갔다.

새벽이 떠오를 무렵, 성당 밖에서 자동차 한 대가 도착했다. 연락을 받고 급히 도착한 단테의 또래 형제 중 하나가 내렸다. 성당 현관 앞에 미리 서 있던 단테는 어스름 속에 표정을 숨기고 고개를 끄덕여 그를 맞았다.

“어떻게 된 거야, 단테. 하아… 최대한 빨리 온다고 왔는데 늦어서 미안하다. 만나면 진급한 거 축하부터 해주려고 했는데 그럴 때도 아니네.”

“……아니야, 형. 애들이랑 여기 좀 부탁해도 될까.”

“너는? 아, 출근해야 하겠구나. 밤새 고생했다. 알겠어. 빨리 가 봐.”

“응.”

단테는 그 이상의 설명 없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성당을 나섰다. 건물이 만든 그림자가 걷히자 드러난 표정이 어둑했다.

* * *

“베일리 대위님, 부상 휴가 중 아니십니까?”

인사를 받았으나 단테는 고개만 끄덕여 보인 후 걸음을 멈추지 않고 지나쳤다. 평소 살갑게 대꾸해주던 성격 좋은 대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표정이 서늘했다.

휴가 중 난데없이 사령부에 나타난 단테는 복도를 걸어 위층으로 향했다.

이윽고 어느 남자의 앞에 섰다. 그는 평소 단테를 마주하며 짓던 짜증스러운 표정 대신 순간이지만 움찔 놀란 얼굴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단테는 입 안을 물었다.

때마침 지나가던 중에 단테를 발견한 모파즈 중사가 “팀장님? 어쩐 일이십니까?” 하며 다가왔다. 하지만 단테는 겉으로 애써 태연한 모습을 만들어 낸 거지, 주변을 볼 수 있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나서는 더더욱.

“데릭슨 에프런.”

“뭐야, 이…….”

“내가 싫어서 할 짓이 있고 못 할 짓이 있어.”

이 정도로 허술한 짓을 했다는 건, 적어도 조사 능력이 있는 단테에게 자신이 한 행동임을 알리려는 의도였을 터다. 업체가 위협을 할 건 알았겠지만, 설마하니 정말로 성당에서 다친 사람이 나올 줄은 몰랐을 수도 있고.

딱 죄가 안 되는 선에서 다른 사람을 교묘하게 망치는 방식을 불과 얼마 전에 보고도 왜 바로 눈치를 채지 못했을까.

“어제 어디서 뭘 잘못 처먹었나, 아침부터 시비질이야.”

단테는 자신을 무시하고 지나치려는 데릭슨을 막아섰다. 전날 단테가 성당에 있었음을 알고 있다는 듯 언급한 ‘어제’라는 말이 애써 고른 호흡을 들썩이게 했다.

데릭슨과 함께 있던 그의 부팀장도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대위님? 하며 단테를 불렀다.

“학교 다니며 1년 선배랍시고 괴롭히던 거, 이후에도 얼굴만 보면 시비 걸던 거, 정상회담 때 아무 협조도 안 하던 거. 사람이 싫으면 그럴 수도 있다 치자.”

“…….”

“그런데 가족까지 건드리는 게 사람이야, 이 개새끼야!”

단테가 데릭슨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하얗게 주먹을 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조사를 통해 단테가 알아낼 수 있던 건 많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성당에 후원을 주겠다고 했던 그 투자회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에프런 가의 작은 자회사가 나왔다.

의심은 그의 앞에 서자 확신이 되었다.

“뭐라는 거야, 이래서 어려서부터 못 배워먹은 계층은……!”

데릭슨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어깨 위로 치솟은 단테의 주먹이 퍼억, 그의 얼굴에 정통으로 꽂혔다.

데릭슨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지만, 나름 군인이랍시고 휘청거린 몸을 금세 다시 세웠다.

“씨발!”

그도 단테에게 덤벼들었다.

거기서부턴 정말 개싸움이었다. 욕설과 주먹질이 날아오고, 단테 역시 단단하던 이성이 끊어진 채 그의 가슴 한가운데를 걷어찼다.

단테는 머릿속으로 전날 들어갔던 원장실을 떠올렸다.

성당에서 아주 오래 지낸 그에게도 방 안 풍경은 낯설었다. 어릴 때야 중요한 서류들이 있는 방에서 사고를 칠 수 있으니 출입을 막는 것이 이해가 갔다. 그러나 그곳은 성인이 된 뒤에도 그와 다른 형제들에게 허락이 되지 않았다.

어머니의 방인 원장실은 성당의 그 어느 곳보다 가장 낡아 있었다. 단테를 포함한 다른 이들이 보았다면 제 돈을 들여 당장 그곳부터 고쳐주려 들었을 만큼.

그런데도 거액의 기부금이 들어온다는 말을 듣자마자 했던 것이 그녀가 내내 신경 쓰던 아이들의 교실을 고치는 일이었다는 게, 단테의 울분을 더욱 터뜨렸다.

“나로 끝냈어야지! 왜! 진급길이 막히니 이제 난 못 이기겠어?”

그 말에 데릭슨도 완전히 분기가 차올랐다.

“고아 새끼가! 막말로, 줬다 뺏은 것도 아니고 그딴 상식도 없는 게 병신이지!”

데릭슨은 주먹으로 정확히 단테의 다친 어깨를 후려쳤다. 그가 싸움에 한쪽 팔을 거의 쓰고 있지 않은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단테는 팔의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그 팔을 휘둘러 상대의 얼굴을 후려쳤다.

데릭슨을 그대로 바닥에 쓰러뜨린 단테는 그의 위에 올라타 주먹을 치켜들었다.

“팀장님, 그만 하세요!”

“떨어뜨려! 붙잡아!”

“놔!”

이 이상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모파즈 중사가 단테를 붙잡았다. 에프런 팀의 팀원들도 둘 사이를 갈랐다.

몸싸움을 하는 동안 단테도 데릭슨도 이미 격앙되어 있었다. 둘은 결국 서너 명의 군인들에게 각기 붙잡혀 떨어지게 되었다.

“그쪽 먼저 모셔 가.”

싸움의 당사자들을 제압한 이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고, 선제공격을 한 단테 대신 데릭슨을 붙잡은 사람들이 먼저 자리를 옮겼다.

“됐으니 놔라. 어떤 미친놈처럼 짐승같이 안 구니까.”

데릭슨은 붙잡힌 손을 신경질적으로 뿌리치고 혼자 걸었다. 몇 걸음 가지 않아 그의 얼굴에 비릿한 조소가 걸렸다. 생각지 못한 일이 생겼지만 단테의 무너진 얼굴을 구경한 통쾌함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성당이 적당히 위협을 당했을 즈음 적선하듯 기부금을 던지고 굽신거리는 꼴을 보려 했더니만, 주제에 공사비는 빚을 내 갚았다고 했다.

차라리 잘되었다. 거기에 폭력 사건으로 인한 고소가 더해지면 어떨까. 물론 그는 군인이 평생 벌어야 겨우 갚을 수 있는 합의금을 부를 것이다.

머리는 이렇게 쓰는 것이라 중얼거리며 가던 그는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안젤라와 마주쳤다. 마침 잘 만났다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앤지, 이거 보여? 너희 팀장이란 새끼 지금 미쳐서…….”

“……이, 개새끼가…….”

안젤라가 그를 노려보았다. 혐오가 가득한 표정이었다.

“팀장님께 안 미안합니까?”

그녀가 있었던 복도 멀리서도 두 사람이 싸우며 지른 고성이 들렸다. 단테의 깊숙한 사정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그녀는 전말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안젤라가 이를 뿌득 물었다.

“나는, 지금…… 신입생 때 선배에게 도와달라 하는 게 아니었다 싶고, 다 내 잘못 같고, 팀장님께 미안해 죽을 것 같아서 당장 얼굴을 어떻게 볼지도 무서운데, 하…….”

“부팀장님!”

저쪽에서 다가온 캠벨 하사가 안젤라의 팔을 잡아끌었다.

“상대하지 마십시오.”

“…….”

안젤라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팀장님은?”

“우선 다른 팀원분들이 제압하고 계십니다. 슈스터 대위님이 바로 오셔서 수습 들어가셨습니다.”

“가서 팀장님 진정시키는 거 도와줘. 나는, 하……, 저 새끼도 저랬는데 이제 알 게 뭐야. 그냥 해리스 가에 도움 요청할 거야.”

그리고……. 무언가 더 말하려던 그녀가 입술을 물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갔다.

통합 특수전 사령부 건물에서 소란이 일어난 지 하루가 지났다.

정당방위를 한 피해자 포지션에 가까운 데릭슨 에프런은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는 계속해 이것이 하극상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직위는 같은 대위이며, 단테는 소령 진급이 확실시된 사람이다. 물론 선제공격을 했으니 적당한 벌이야 줬지만, 대외적으로는 단순 ‘다툼’으로 처리되는 게 맞았다.

진술서를 받아든 연대장은 쯧, 혀를 찼다. 하필 주먹다짐이 일어난 두 사람이 단테와 그… 데릭슨이다 보니 몹시 찝찝했다. 모르긴 몰라도 속사정이 있을 거라는 짐작이 갔다.

그런 데다 이쪽은 보아하니 뭐 어디가 부러진 것도 아닌데 하극상이라며 난리니.

“알았으니 나가 봐.”

연대장은 데릭슨에게 손을 내저었다.

“연대장님, 이건 좌시해선 안 되는…….”

“거 나가 보라니까.”

데릭슨은 기분이 나쁘다는 티를 숨기지도 못하고 연대장실을 나섰다.

하루가 지나자 슬슬 얻어맞은 곳이 욱신거렸다. 그깟 몇 푼 때문에 이게 무슨 일인지. 그는 차라리 성당 일대 땅을 사서 아예 건물을 헐어버릴까 하며 이를 갈았다. 성당을 조금 건드렸을 땐 이성이 나갔으니 무너뜨리겠다고 하면 무릎이라도 꿇지 않을까. 그 모습을 떠올리자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데릭슨 에프런 대위님.”

그 때, 그의 앞에 이 자리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이 나타났다.

* * *

다툼이 일어난 당일 저녁, 단테는 소동을 전해 듣고 달려온 팀원들을 뒤로 하고 관사로 돌아왔다. 당장은 아무와도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우선 하루 동안의 근신 처분을 받았다. 어차피 휴가 기간 중이니 형식상의 벌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상부의 질책이 없지는 않았다.

‘진급이 코앞인데 이딴 사고를 쳐? 베일리, 미쳤어?’

데릭슨의 앞에서 치밀어오른 울컥함을 참지 못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로 돌아간다고 다른 선택을 할 것도 아니었다. 혹시나 진급 기회가 날아가더라도 후회는 없었다. 후회하는 건 도리어 다른 쪽이었다.

“어차피 이 꼴 날 거 그냥 몇 대 더 칠걸.”

마지막으로 본 데릭슨의 얼굴은 엉망이었지만, 열 대쯤은 더 들어갈 공간이 분명 있었다.

“윽.”

그가 집중적으로 노린 어깨가 욱신거렸다. 병원을 가야 할 텐데, 지금은 그것도 포기했다.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새빨갛게 범람하던 격한 감정이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손가락뼈 위, 발갛게 벗겨진 상처가 보였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싸움박질을 한 게 대체 몇 년 만인지.

입가에 피딱지를 단 채로는 어머니나 성당을 찾아갈 수도 없었다. 단테는 성당에 별일 없다는 확인만을 받아두고, 계속해서 연락이 오는 휴대폰을 던져두었다.

겨울이 가까워진 계절은 해가 짧았다. 그는 밤이 되도록 멍하니 어둑해진 벽에 기대어 있었다. 이따금씩 상처 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게 하는 행동의 다였다.

그냥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평소에 그랬던 것처럼,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혼자 조용히 있는 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똑똑.

그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찾아올 사람이 없으므로 잘못 왔겠거니 하고 문으로 돌린 시선을 다시 거뒀다.

그러나 잠시 뒤 또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똑.

짧게 두 번 두드리는 소리. 반응이 없자 같은 리듬으로 또 한 번 문이 두드려졌다. 단테는 세 번째에서야 그 소리가 주는 익숙함을 깨달았다.

설마…….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누구, 십니까.”

“…….”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지만 문을 열었다. 그 앞에는, 항상 이 문을 열며 ‘설마’할 때마다 나타났던 사람이 서 있었다.

“…….”

자신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그를 대신해 라파엘이 미소 지었다.

“애인이 필요하실 때인 것 같아서요.”

“라파엘.”

“예, 팀장님.”

사실 단테는 지금 꼴을 라파엘에게만은 보이기 싫었다. 뭐 좋은 모습이라고 세 시간이나 떨어진 곳에 근무하고 있을 그에게 말해 걱정을 시키겠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데릭슨과 싸워 다친 얼굴이며 꽤나 음울할 표정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혼자 있던 공간에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의식하지 못한 반가움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었다.

“……들어와.”

“예.”

그의 등장에 동요한 단테와 달리 라파엘은 평상시처럼 아무렇지 않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들고 온 쇼핑백을 내려놓고 내용물을 꺼냈다. 보온통에 담겨 정갈하게 포장된 음식들이었다.

“팀장님, 아직 식사 안 챙기셨,”

“어떻게 알고 왔어?”

라파엘이 입술을 열기만 하고 대답하지 못하자 단테가 쓰게 미소 지었다.

“앤지가 말했어?”

“…….”

“화내거나 따지려고 묻는 거 아니야. 그냥…… 여러 사람 걱정시킨 게 쪽팔려서 그래.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

“우선 앉으세요.”

단테는 따뜻한 흰 빵과 스튜가 차려진 테이블 앞으로 이끌려 갔다. 멀리서 제도까지 한달음에 달려오면서 음식까지 싸 들고 온 정성과, 아무것도 먼저 묻지 않아 주는 기특한 마음 때문에 단테는 스푼을 들었다.

“고마워. 잘 먹을게.”

아직 김이 오르는 스튜를 입으로 가져갔다. 언젠가 자신이 아플 때 라파엘이 가지고 왔던 것과 같은 맛이 났다.

한번 맛있다는 말을 듣자 이게 ‘단테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머릿속에 굳어졌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 안쪽에서 다른 의미로 울컥하는 것이 있었다.

“나 괜찮아. 라파엘. 그런 눈으로 안 봐도 돼.”

단테가 평소처럼 장난스레 눈썹을 들썩였다.

“뭘 병원에서 환자복 입고 있을 때보다 심각한 눈으로 보고 그래. 라파엘 네가 못 봐서 그러는데, 내가 더 많이 때렸어.”

“……팀장님 실력이 훨씬 좋으시니 당연합니다. 잘하셨습니다.”

“그렇지?”

단테는 스푼 위에서 열기를 조금 식힌 스튜를 마저 입에 넣었다. “맛있다.” 미소와 함께 그가 감탄했다.

“단테.”

“왜? 아, 이거 오랜만에 먹어도 진짜 좋네.”

“웃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정면에 반듯하게 앉은 라파엘이 단테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단테는 제 웃는 모습도, 우는 모습도, 전부 다 많이 보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저한테는 웃는 모습만 허락하십니까.”

“…….”

“즐겁지 않으시면 웃지 마세요. 그리고 화나고 짜증 난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식사를 이미 하고 왔다는 라파엘의 앞에는 단테가 찬장을 뒤져 내온 차가 놓여 있었다. 그마저도 흰 김이 거둬지도록 손을 대지 않았다.

“제가 오늘도 소식 듣지 못한 채 연락 드렸다면, 팀장님은 또 아무 일도 없던 척 받으셨겠죠.”

단테는 부정하지 못했다. 하소연이라든가 위로를 바라며 마음을 털어놓는 일이 그는 익숙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스스로 잘 해내며 좋은 기둥이 되는 역할이 적성에 맞고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지 마세요.”

라파엘의 말이 건네진 뒤에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조금 뒤 입술을 올려 미소를 만들어 냈다.

“아……, 미안해. 사귀는 사이에 내 이야기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들어서 서운했겠다.”

“단테.”

“네가, 아무래도 연하고, 멀리 있으니까.”

“단테. 팀장님.”

라파엘의 입술 사이로 젖은 숨이 길게 터져 나왔다.

“……왜 네가 울려고 그래.”

그러나 단테의 목소리도 묵직한 것으로 눌린 듯 작게 떨리고 있었다.

가장 힘든 순간에 찾아온 애인, 자신을 대신해 울먹이기 시작한 라파엘을 마주하자 마음이 햇볕 아래 놓인 아이스크림처럼 끝에서부터 뭉그러졌다. 목 안에 꽉 틀어막혀 혼자 삭이고 있던 말 역시 그가 준 따뜻한 스튜에 녹아 흘러나왔다.

“나도 그 새끼가 개새끼라 이런 일이 벌어진 거 알아.”

그런데. 단테가 느리게 말을 이었다.

“내가 아니었으면 성당에, 어머니께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수 있었겠지. 데릭슨 에프런의 성질머리를 아니까…. 까짓거 더러워서 몇 번 굽혀줬으면, 아니… 수여식 날 복도에서 긁지 말고 평소처럼 지나갔으면 이런 일까진 안 생기지 않았을까.”

“…….”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데, 어제 울던 동생들을 생각하면 너무 미안하더라. 나 스스로에게도 화가 나.”

이제껏 단테가 라파엘에게 꺼낸 말 중에 가장 두서없는 말이었다. 라파엘의 엉망이었던 고백도 이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스푼을 내려놓는 것과 함께 말이 멈추자 라파엘이 그제야 답을 했다.

“저는 팀장님이 아랫사람들을 이끄는 책임감 강한 모습에 반했었습니다. 그런데 애인이 되고 나니 그 책임감이… 많이 속상합니다.”

테이블 위에 미동 없이 놓여 있던 라파엘의 두 손이 조금 안으로 굽었다.

“팀장님은 책임감 때문에 자기 자신을 원망하시는데, 팀장님. 성당에 있는 누구도 이 일로 팀장님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

“팀장님 원망하는 사람 팀장님뿐입니다. ……그러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팀장님은 아무 잘못도 없잖습니까.”

유치하게도 이 말이 듣고 싶었던 건지, 지어낸 것이 아닌 진짜 웃음이 허탈하게 입가를 밀어 올렸다.

“다 컸네, 내 새끼. 내가 위로도 받고. 이리 와 봐.”

라파엘이 일어서서 단테에게 다가왔다. 단테는 자신의 앞에 멈춰선 라파엘의 허리를 잡고 배에 머리를 기댔다.

“미안. 하룻밤만 지나면 회복될 거야. 걱정하지 마. 괜히 너 붙잡고 징징거렸다.”

“……단테.”

“응?”

“그러면, 그 남은 하루 동안 아무 생각 안 하게 해드릴까요.”

라파엘이 단테의 뺨과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하, 단테는 이번엔 조금 더 크게 웃을 수 있었다.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예.”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 아니, 좋겠네.”

복잡한 머릿속에 아예 생각이 담기지 않게 하려면 그보다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라파엘이 단테의 손목을 잡고 침대로 당겼다. 그가 이끄는 대로 와 침대에 걸터앉은 단테는 텅 빈 미소를 지으며 스스로의 옷을 풀었다.

“아, 라파엘. 너 내일 출근은 괜찮은 거야?”

라파엘이 단테의 어깨를 밀었다. 그리고 침대에 누운 그의 위로 올라왔다.

“아무 생각도 안 하게 해드린다 했잖아요.”

“…….”

어린 애인의 근무지는 멀었고, 내일은 주말이 아닌 평일이었다. 평소라면 잔소리를 해서 당장 테네시로 돌려보낼 시간인 것도 사실이었다.

단테는 이래선 안 된다는 말들로부터 귀를 막고, 라파엘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래.”

* * *

몸을 섞을 때면 짓궂거나 다정한 말을 주고받던 이전에 비해 침잠된 섹스였다.

라파엘은 말을 섞는 대신 입술이 소리를 꺼낼 틈도 없이 입을 맞췄다. 혹은 혀가 언어를 만들 틈을 주지 않았다.

“흐아… 으읏…… 아, 라피, 아파, 흣……!”

단테의 가슴 주변이 온통 붉은 잇자국으로 뒤덮였다. 라파엘이 수십 번 입에 머금은 자국이었다. 라파엘은 또 새로운 자국을 새기고, 온몸을 깨무느라 붉게 부은 입술을 떼어냈다.

“하으……!”

양옆으로 크게 벌어진 다리 사이에 라파엘의 골반이 거칠게 붙었다. 방 안의 불이 꺼지고, 커튼이 가로등 불빛마저 완전히 가렸다. 틈새로 들어오는 엷은 빛으로는 서로의 실루엣과 거친 동작만이 보였다.

“아, 라파엘. 흐으, 흐!”

수 시간째 성기가 오간 입구에 거품이 생겨 찌걱였다. 몇 번은 콘돔을 끼고 했고, 몇 번은 그걸 챙길 새도 없었다. 처음엔 라파엘의 목을 안고 있던 단테도 이제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 누운 채 그가 주는 감각에 신음하기만 했다.

단테의 손이 이불을 쥐고 바르르 떨렸다.

“아으, 흐, 읏… 라파, 아!”

단테의 등 아래 두 손을 넣어 받친 라파엘이 그의 몸을 쑥 끌어당겼다. 라파엘의 허벅지 위에 앉은 단테는 쓰러지듯이 온 상체를 밀착해 기댔다.

“흣……!”

처음 섹스를 시작했을 때와 조금도 차이가 없는 라파엘은 그를 단단히 붙잡고 다시 안을 파고들었다.

“잠시, 마, 아… 안에, 너무, 많, 흐!”

“오늘만, 하, 팀장님 말, 안 듣겠습니다.”

몇 차례나 이어진 정사 때문에 성감을 제외한 모든 감각이 무뎌졌다. 단테는 이로 라파엘의 어깨를 문 것도 모르고 흔들리며 신음했다.

결국 그 자세로 라파엘은 단테의 안에 또 한 번 사정했고, 단테도 성기에서 묽은 액체를 흘렸다. 몸을 섞는 도중 라파엘이 어찌나 손으로 주물렀는지 사정을 마친 성기가 아릿했다.

단테는 가쁜 호흡을 고르며 말없이 라파엘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라파엘은 단테의 입술을 찾아 그의 턱을 손으로 감싸 당기려 했다. 그러나 단테가 얼굴을 떼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힘들어…….”

“…….”

“너무, 힘들어…….”

몇 번이고 격하게 이어진 섹스가 힘들다는 건지, 아니면 다른 게 힘들다는 건지 그는 명확히 말해주지 않았다. 그마저도 몸과 머릿속이 한창 고양되어서야 나온 귀한 한마디였다.

두 번의 삽입이 더 있고, 결국 단테의 몸이 축 늘어졌다. 라파엘이 퇴근을 하자마자 달려 도착한 늦은 저녁부터 시작해 새벽 동이 터오를 때까지 쉴 새 없이 안겼으니 그럴 만도 했다.

라파엘은 단테의 안에 든 성기를 빼냈다. 단테는 잠결에 짧게 흐느낄 뿐, 온몸에 힘이 없어 제대로 된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조용히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전에 이 집을 방문하며 잔뜩 선물했던 부드러운 수건들을 꺼내 따뜻한 물에 적셨다.

그걸 대야에 담아 나오니 하늘이 약간 밝아져 있었다. 잠든 단테의 모습도 조금 더 잘 보였다. 라파엘은 단테의 얼룩덜룩한 몸을 보고 작게 숨을 삼켰다.

라파엘은 늘 단테에 대한 욕심이 넘쳤다. 그걸 다정하게 어루만져 해소시켜주던 사람이 그를 돌봐주지 못하자 행동을 자제하지 못했다. 라파엘의 감정이 범람한 흔적은 단테의 몸에 고스란히 남았다.

그가 단테에게 오늘 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은, 바꿔 말하자면 다른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속상합니다. 단테.”

다른 사람 때문에… 아니, 이유가 무엇이더라도 혼자 울지 마세요. 그는 작게 속삭이며 단테의 몸을 정성스레 닦았다. 부은 구멍에서 정액도 조심조심 긁어내고, 필사적으로 숨겼지만 자국이 남아 있는 눈물도 닦아주었다.

창밖이 완전히 밝아질 즈음, 라파엘은 새 이불을 꺼내와 단테의 위에 덮어주었다. 그런 뒤에야 바닥에 엉망으로 벗어 던진 자신의 군복을 주워들었다.

몸에 옷을 대강 걸친 뒤, 커튼을 조금 열었다. 벌써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왔다. 그는 빛 아래 형태가 드러난 자신의 군복을 내려다보았다.

이것에 이렇게 미련이 없을 줄은 몰랐다. 열심히 하지 않은 건 분명 아니었는데…….

뭐가 이렇게, 후련할까.

라파엘의 얼굴에 밤이 걷힌 새벽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침대와 조금 더 떨어진 곳에서 목소리를 낮춰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접니다.”

그가 조금 더 창가로 다가갔다.

“군 생활하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잠시 조용하던 수화기 너머에서 물음이 들려왔다.

“오늘 하루만 절 제도로 불러내 주십시오. ……예. 그거면 됩니다.”

통화를 마무리한 라파엘은 다시 단테가 있는 침대로 다가왔다. 그리고 침대 바로 옆에 웅크려 앉아 단테의 얼굴을 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열 배만큼 울어 서러움을 대신 거둬주고 싶을 만큼 마음이 아팠다.

“저는 매번 도와주시면서, 자기가 힘들 땐 도와 달라는 말도 못 하는 내 팀장님.”

“…….”

“기대는 방법은 하나도 모르는… 내 단테.”

라파엘은 단테의 얼굴을 한참 동안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오겠습니다. 팀장님.”

* * *

제도에 위치한 특수전사령부.

전날 있었던 싸움의 여파를 얼굴에 단 채, 연대장실에서 나온 데릭슨을 부른 사람은 라파엘이었다.

“소위 라파엘 헤인스워즈.”

“…….”

“에프런 대위님, 안녕하십니까.”

그는 데릭슨에게 다가와 먼저 인사를 건네기까지 했다. 그러나 얻어맞아 한쪽 얼굴이 퉁퉁 부어 있는 사람에게 그닥 적절한 인사는 아니었다.

라파엘이 단테와 친밀한 사이인 건 이제 군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SAG에서의 수습도 제법 이목을 끌었거니와, 테러 진압을 마친 단테를 라파엘이 끌어안고 오열하는 영상이 유명세를 탄 게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데릭슨은 어제 바로 그 단테와 마찰이 있었다. 그로선 아무리 헤인스워즈라 해도 눈살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라파엘은 그를 보며 엷게나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머리카락에 물기가 조금 남아 있는 것만 제외하고는 평소의 그와 다름이 없었다.

“오늘 날씨가 참 좋지 않습니까.”

“뭐…….”

“바람도 없고, 햇볕도 좋고. 무언가를 시작하거나 결심하기 좋은 날씨 같습니다.”

“…….”

뜬구름 잡는 날씨 얘기를 꺼낸 저의가 뭔진 모르겠지만, 평소 데면데면하던 라파엘이 제게 말을 건 이유로는 어제의 다툼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라파엘 헤인스워즈, 이거 네 사수 놈이 먼저 친 거야.”

“예. 들었습니다.”

라파엘은 고개를 기울여 데릭슨에게 난 상처를 보았다. 곡선을 그리던 눈이 서서히 펴지는 것과 함께, 아직 덜 마른 금빛 머리카락 끝에 맺힌 차가운 물방울이 똑, 똑 떨어졌다.

울긋불긋 쥐어터진 얼굴을 보며 생각나는 건, 수술 흔적이 사라져가던 어깨에 도로 생긴 큰 멍이었다. 열이 받은 머릿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떠나오기 전 꽤 오래 찬물을 맞았는데 별 소용이 없었다.

“팀장님께서 그래도 힘 풀고 치셨습니다. 진심이면 이 정도일 리가 없는데.”

인상을 찌푸린 데릭슨이 이내 코웃음을 쳤다.

“하, 네가 아무리 그래도 나는 그 새끼 제대로 고소할,”

“진심으로 치셨을 때를 제가 본 적이 있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펀치머신이긴 했지만.

그래도 기왕 참지 못하고 터뜨릴 거라면 울분이 남지 않을 만큼 흠씬 두들겨 패지 그랬느냐는 생각이 들긴 했다. 작은 방 안에서 얼굴이 상할 정도로 속상해하는 것보다는 그게 나았다.

데릭슨은 단테에겐 너무나 쉽게 했던 시비도, 드잡이도 라파엘에겐 하지 못했다. 라파엘은 주먹을 세게 꾹 쥐었다.

“왜 제 팀장님을 그렇게 싫어하시는지, 이해도 안 가고 이유를 알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단테를 따라 해 여유롭게 지었던 미소도 금세 일그러졌다. 애써 눌렀던 울분이 조금도 반성의 기미가 없는 얼굴을 보고 울컥 쏟아졌다.

“저도 화가 많이 났습니다. 에프런 대위님.”

왜 그 사람을 당신이 울려.

왜 그 사람을 속상하게 해.

라파엘은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자신이 온순한 편인 걸 알았다.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하기야 하지만, 남들을 제치고라도 달려갈 열정은 없으며 경쟁의 호승심도 적었다.

그래서 단테 베일리는 그가 가진 최초의 목표이자, 의지였다.

“아무리 온순한 개도 주인이 공격당하면 뭅니다.”

라파엘은 살면서 단테의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만큼 화가 났던 적이 없었다. 그 분노가 지금 고스란히 담겼다.

뻑, 소리와 함께 데릭슨의 몸이 나가떨어졌다.

“어억……!”

그는 스스로를 아끼지 않는 단테를 위해 그를 한껏 아껴줄 생각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데릭슨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라파엘의 주먹이 다시 다가왔다. 분노에 찬 라파엘의 표정 속엔 무언가에 대한 후련함도 담겨 있었다.

전날 있었던 단테와 데릭슨의 주먹다짐은 같은 직급 간의 단순 다툼이었다. 단테가 가벼운 징계를 받게 된 것도, 싸움의 책임보다는 소동을 일으킨 장소가 사령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헤인즈워즈 ‘소위’와 에프런 ‘대위’의 싸움은 달랐다. 사연이야 어찌 되었든 이건 분명한 하극상이며, 군대에서 하극상은 아무리 미미한 것이라도 큰 처벌 대상이다. 상황에 따라 가볍게는 영창, 심하게는 불명예전역까지 갈 죄이기도 했다. 상관에게 선제공격을 날리고 그 위를 덮쳐 두들겨 팬 라파엘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다툼 뒤에도 귀가조치가 내려졌던 단테와는 달리, 그는 사령부 내 독방에 임시로 구류되었다. 그렇게 사납게 덤벼들던 모습과는 달리 검은 철창 안으로 연행되는 과정은 얌전했다.

그 안에 들어가서도 그는 수갑이 채워진 손을 모으고 낡은 철제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하극상을 일으킨 ‘헤인스워즈’라는 말에 바짝 긴장했던 감시인은 한두 시간 뒤엔 서서히 긴장을 풀었다.

‘하극상을 벌일 얼굴로는 안 보이는데…….’

그가 안쪽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림자가 진 곳에 앉아 있는 이의 표정은 서늘했다. 소문처럼 사수를 잘 따를 것 같은 순둥한 모습이어서가 아니라, 잘 자란 도련님 같은 귀족적인 얼굴이 도무지 주먹질 같은 격렬한 행동을 할 인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 때, 라파엘이 시선을 들었다. 감시인은 연녹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쳐다보고 있던 것이 지레 찔린 그가 움찔했다.

라파엘은 눈이 마주친 사람에게 슬쩍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는, 시선을 다시 손목에 걸린 수갑으로 내렸다. 고개를 숙이자 긴 속눈썹이 더 도드라졌다.

감시인이 다시 한번 대체 저 사람이 왜……? 하고 생각할 때였다.

독방의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다급히 들어왔다.

“라파엘 헤인스워즈.”

사령부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단테는 문을 열자마자 그의 이름을 불렀다. 감시인의 눈앞에서 라파엘의 얼굴이 빠르게 순박해졌다.

“어……, 팀장님.”

“너 이게 대체……!”

검은 철창 뒤에 있는 라파엘을 확인하자 단테의 눈이 커졌다. 그는 앞으로 성큼 걸어 들어오려다 어정쩡하게 그를 막아선 감시인을 돌아봤다.

“들여보내 줘. 저 녀석 사수였어.”

“아, 저…….”

“설마 이 상황에 우리 둘이 무슨 짓을 하겠어.”

결국 그가 물러나 주고, 단테는 혼자 철창 앞으로 와 섰다. 라파엘 역시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단테에게 다가왔다. 둘의 가운데를 검은 철창이 가로막았다.

라파엘을 보는 단테의 표정에는 놀람과 화남, 걱정 등 여러 감정이 담겨 있었다.

“너…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하극상은 또 뭐며, 이 시간에 제도에 있으면 어떡해.”

“무단이탈은 아닙니다. 아버지께 제도로 불러 달라 했습니다.”

“그걸 자랑이라고 말해!”

단테가 쥔 철창에서 덜컹 소리가 났다. 꽉 쥐어진 주먹 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화… 많이 나셨습니까?”

단테의 시선이 말없이 라파엘을 주시했다. 말로 대답하지 않아도 머리끝까지 화가 난 게 보이는 표정과 마주한 라파엘이 수갑 찬 두 손을 꾸물꾸물 모았다. 감시인은 둘의 심각해진 분위기를 보고 문밖으로 나와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럼 화나신 김에 다른 화나실 일도 다 실토하겠습니다. 팀장님이 지신 대출 제 사재로 다 갚았고, 성당에는 제가 고용한 시터들과 경호원들을 보내놨습니다. 이 일과 관련된 투자회사나 건설회사와도 소송 들어갔습니다.”

“…….”

철창을 쥔 손등에 핏줄이 더욱 도드라졌다.

“누가 멋대로 그런 짓 하라고 했어.”

“팀장님.”

“빚도, 그 새끼한테 진 원한도, 설령 못 갚더라도 너한테 떠넘길 생각 추호도 없어. 라파엘 헤인스워즈. 너 이대로면 불명예전역이야. 네가 한 짓, 단순히 날 괴롭힌 놈 호기롭게 대신 패 준 게 아니라 하극상이라고.”

“……압니다.”

“아는 녀석이!”

다시 소리를 치려던 단테가 멈칫했다. 그리고 철창을 잡고 있던 손을 뻗어 라파엘의 팔을 잡았다. 단테의 손바닥에 닿은 군복 안의 팔은 덜덜 떨고 있었다. 수갑에 감싸인 손도 끄트머리가 푸르스름했다.

“……너… 지금 무섭지?”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과 달리, 헤인스워즈 가의 후계자는 사실 성격도, 사고방식도 딱 스물네 살 나이에 맞았다. 사회에 발을 들인 지 1년도 되지 않은 그에게 지금 상황이 무섭지 않을 리 없었다.

라파엘은 어깨를 움츠리고 옆으로 물러나 단테의 손을 떼어냈다. 손이 빈 단테는 다시 철창을 붙잡고 라파엘을 노려보았다. 그는 단테의 표정을 보고 숨기는 것을 포기했다.

“후회는 안 합니다.”

단테가 복잡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한숨 뒤에, 화를 눌러 참은 목소리로 말했다.

“앤지가… 그러더라. 헤인스워즈 가의 후계자가 불명예전역 당할 상황이니, 이건 군 내 문제가 아니라 가문 간 문제로 커질 거라고. 어쩌려고 이랬어.”

“……그것도 알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같은 군인이니 못 나서시고, 아마 어머니가 에프런 가와 담판을 지으실 겁니다.”

“알면서 그랬다고? 앞날 창창한 소위 자리 빼앗기고, 집안싸움 날 걸 알면서? 너 미쳤어?”

라파엘의 팔 못지않게 단테의 손이 떨렸다. 라파엘은 단테가 이렇게까지 절박한 얼굴을 한 걸 처음 보았다.

“에프런 가는 헤인스워즈 가의 상대가 안 됩니다. 일을 크게 만드느니 데릭슨 에프런을 쳐내는 걸 선택할 겁니다.”

데릭슨은 에프런이라는 성을 마치 자기 자신처럼 여겼다.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가문을 빼앗고 상류층 생태계에서 매장시키는 건 물론 최고의 복수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 너는.”

“예……?”

“군에서 쫓겨나고, 집안엔 분란을 가져온 너는 어떻게 되냐고. 헤인스워즈 가 안에서 네가 가지고 있던 위치는? 아니, 사령관 각하 얼굴을 다시 볼 수는 있어?”

“…….”

“대답 못 할 거면서 왜 이딴 짓을 해!”

결국 단테의 목소리가 커졌다. 격앙된 외침이 어두컴컴한 벽에 부딪혀 울렸다.

단테의 무서운 얼굴을 바로 앞에서 마주한 연녹색 눈동자가 일렁였다.

“저는, 고작 작년에 졸업한 애새끼고, 팀장님이나 데릭슨 에프런보다 직위도 한참 낮습니다. 팀장님께 뭐든… 어떻게든 해드리고 싶은데 손에 들린 게 아무것도… 없는 걸 어떡합니까.”

결국 라파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 강한, 흐, 팀장님 우시는 거 보고도,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일곱 살 어린 후배가 지금까지 쌓은 거 다 망치면서 복수해주면, 그럼 나는, 마음 편할 것 같아?”

눈물을 닦는 건지 고개를 젓는 건지 모르게 머리가 흔들렸다.

“제가 사관학교에 들어오기 위해 준비한 시간, 사관학교에서 보낸 4년은 모두 팀장님을 만난 것으로 차고 넘칩니다.”

윽, 흑, 소리와 함께 눈 주변을 훔치고 라파엘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눈가와 코끝이 붉었다.

“확실히 마음을 정하면 알려드리려 했는데, 전역은 원래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고민이 이거였습니다…. 군 안에 있으면 저는 평생 팀장님의 뒤에 있어야 하잖습니까.”

팀장님, 라파엘이 더듬더듬 손을 움직여 철창을 쥔 단테의 손을 잡았다.

“그건 싫습니다. 팀장님. 옆자리에 있고 싶고, 가끔은 제가 팀장님 앞에 서고 싶습니다.”

축축해진 소매가 무색하게 다시 눈가가 젖어 들었다.

“저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아무것도 아깝지 않습니다.”

눈동자 속에 들어 있는 단테의 형상이 함께 흔들렸다. 단테의 손을 감싼 두 손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팀장님이 단단한 분인 건 압니다. 하지만…….”

“…….”

“이번 한 번만큼은, 저에게 기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울면서 제게 기대라는 말을 꺼내다니. 앞뒤가 안 맞아도 이렇게까지 맞지 않는 장면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눈물을 보며 단테는 무리해서 단단히 세우고 있던 제 안의 무언가가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분하게도.

라파엘은, 지금까지 그가 감싸주는 게 당연하다 여겼던 어린 후배는 훌쩍이며 두 팔을 벌려 자신에게 다 맡겨 달라 하고 있었다.

올곧게 자신을 바라보는 연녹색 눈동자를 보다, 단테는 먼저 시선을 내리고 말았다.

“겁도 많은 게, 지금 철창 안에서 떨면서 잘도 말한다.”

“팀장님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강간했다고 자수하고 철창에 들어갔을 겁니다.”

“하…….”

“팀장님. 저, 저 봐주세요.”

단테는 결국 라파엘을 다시 마주 봤다. 라파엘이 철창에 바짝 몸을 붙여 가까이 다가왔다.

“저는 언제가 되었건 군을 나갔을 겁니다. 하지만 팀장님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버티다가 도망치듯 전역을 했을 겁니다.”

라파엘이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미소를 만들어 냈다.

“그래서, 팀장님 복수를 하고 군복을 벗은 이 상황이 후련하고, 조금은 기분이 좋기도 합니다.”

그는 상처투성이가 되고도 주인을 지켜 뿌듯한 강아지처럼 웃었다. 아직 잔떨림이 남아 있는 손에서 강아지가 기꺼이 입은 영광의 상처가 느껴졌다.

“……얼굴 더 가까이 와.”

라파엘이 고개를 기웃하며 철창에 이마를 기댔다.

“입.”

입술을 벌린 라파엘의 혀 위에 알약이 하나 놓였다.

“진통제야. 물은 못 가지고 왔으니 씹어 삼켜. ……데릭슨 에프런이 그래도 나름 SAG에서 훈련받았던 놈인데 용케도 치고받을 생각을 했다.”

입 안에 쓴 약 맛이 퍼져 라파엘이 코끝을 잔뜩 찡그렸다.

단테는 몰래 챙겨온 연고를 보이는 상처들 위에 성기게 발라주었다. 라파엘은 언젠가 그랬듯이 눈을 감고 단테의 손길을 얌전히 받았다. 잠시간 둘 사이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상처에 약을 다 발라준 단테가 한숨 쉬며 말했다.

“네가 마음대로 했으니까, 나도 마음대로 할 거야.”

“그건 불공평합니다. 팀장님은 몇 번이나 저를 마음대로 도와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단테는 한 통을 다 짜내다시피 한 연고를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억울하면 선배 하든가.”

“……치.”

“여기선 뭘 더 할 수도 없겠지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단테는 몸을 돌리려다 마지막으로 철창 안에 손을 넣어 라파엘의 이마를 딱, 두드렸다.

“넌 거기서 나오면 각오해.”

“예…….”

라파엘은 이마를 문지르며 눈을 끔뻑였다. 위로 올라온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보고 단테는 다시 한번 눈을 찌푸렸다.

반면 라파엘은 그를 배웅하듯 배시시 웃었다. 단테는 오늘만큼은 마주 웃어주지 않으려 했지만, 어이가 없어서 바람 새는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한참 어두운 곳에 있어선지 문을 열고 나오자 눈이 부셨다. 사령부를 쭉 거슬러 올라가 출입구 근처까지 다다른 단테는 건너편 복도를 보고 눈 사이를 좁힌 한숨을 한 번 더 내쉬었다. 라파엘과 처음 마주했던 그 복도였다.

지갑을 열고 안쪽에 넣어뒀던 명함 한 장을 꺼냈다. 받은 지 벌써 몇 달 정도가 지나 끄트머리가 약간 구겨져 있었다. 그는 명함에 적힌 번호를 눌렀다.

상대는 단테가 이름을 밝히자 제법 반갑게 맞아주었다. 단테는 낮아진 목소리로 용건을 꺼냈다.

“전에 한 번 제게 변호를 해주신다고 하셨던 걸 기억하십니까?”

―네. 물론이에요.

카밀라의 대답은 마치 단테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라파엘이 불명예전역을 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역시……. 카밀라의 무뚝뚝한 말투 속에 웃음기가 얼핏 깃들었다.

―둘이 정말 많이 닮았다니까.

* * *

카밀라는 그날, 친족의 직접적인 변호는 불리할 수 있다는 설명과 함께 군사법 전문가와 대리인을 보냈다.

하루가 지난 후 경과보고를 위해 단테와 만난 그녀는 친동생의 일인데도 단테보다 더 태연했다.

“정말 이걸로 괜찮으시겠어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카밀라의 흰 손끝이 우아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은 헤인스워즈 도지사와 몹시 닮았다.

“어떻게 들으실진 모르겠지만, 저는 살인죄까지 무죄로 풀려나게 할 능력도, 상황을 만들 재력도 있어요. 어차피 라피는 전역을 생각하고 있었으니, 진흙탕 싸움하며 완전 무죄로 만들기보단 도의적인 부분을 파고들 생각이기도 했고요. 이러나저러나 라피가 군을 나가는 결론은 똑같은데 한 번뿐인 기회를 써버린 게 아깝지 않으시냐고요.”

“예. 그 기회는 라파엘이 무사히 전역하는 데 쓰였으면 합니다.”

“길게 설명한 보람도 없이 단호하시네요.”

“결과를 떠나, 라파엘에게 흠결을 만들어 주고 싶지가 않습니다.”

“어떤 흠이요? 하극상은 군대 내에서만 처벌 대상이지 전과 기록이 남거나 하진 않을 텐데요.”

“라파엘이 군을 나온 뒤에는 다른 곳에 취직하게 될 텐데, 혹시 발목 잡힐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습니까.”

“응? 취직이요?”

“예. 어느 분야로 갈지 모르니 만에 하나라도 걸리는 일이 없게…….”

카밀라가 고개를 기웃했다. 단테가 곧 아, 하고 덧붙였다.

“라파엘은 어리니 빨리 새 직장을 가지라고 압박하거나, 이번 전역으로 인해 저희 관계에 문제가 생길 일은 없습니다. 저도 라파엘이 천천히 준비해, 이번에는 적성에 맞고 원하는 곳에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취준생일 동안은 제가 뒷바라지할 겁니다.”

“아하, 라피가 취준생…….”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푸흡, 하는 웃음이 걸렸다. 웃는 대신 큼, 큼. 하며 차로 목을 축였지만.

“그거야, 둘이 모쪼록 잘 상의해 결정하셨으면 좋겠네요.”

“예.”

아 참, 그녀가 박수를 짝 쳤다.

“여기 나오기 전에 아버지 만나고 왔는데요.”

그 호칭을 듣고는 조금 움찔했다. 장군직의 대를 이을 아들인 라파엘을, 결과적으로 자신이 밀어낸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네.”

“엄청 좋아하시더군요. 라피가 그런 일도 해냈다며.”

“예?”

“그 상황에서 참으면 사내놈이 아니다, 잘했다, 역시 대위님과 짝이 된 뒤로 질질 짜던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고요.”

“……아.”

“라피 본인에게는 노발대발하고 계시긴 한데, 속마음은 다르신 것 같아요. 성당 이야기 듣고 더 이해하신 것 같고…. 불같은 면이 있으신 분이잖아요. 아, 참고로 저랑 어머니는 라피 성격에 군대 보내는 것부터 반대했으니 지금 상황 나쁘지만은 않게 생각하고 있어요.”

“군부에 헤인스워즈 가의 후계자가 사라진 건 괜찮습니까?”

“대위님이 해주시면 되죠. 헤인스워즈 이름을 단 다음 장군.”

“…….”

몹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답이었다.

연락이 도착한 휴대폰을 확인한 카밀라가 빙긋 웃었다.

“라피 곧 풀려난다는군요. 저희도 이만 일어날까요?”

묻기도 전에, 단테는 당장이라도 일어날 듯 두 손으로 테이블을 짚고 있었다.

만남을 가진 카페 앞에서 헤어지려는데 카밀라가 단테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단테의 손바닥 위에 새 명함을 올려두었다.

“가족은 평생 무료니 또 찾아주세요.”

“……감사합니다.”

단테는 고개를 숙여 보이곤 돌아서서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 * *

독방에서 풀려나 사령부를 나서자마자 라파엘은 단테에게 손목을 붙잡혔다. 그대로 차에 넣어져 관사 주차장으로, 이어 단테의 방으로 질질 끌려갔다.

“티, 팀장님. 저 하루 동안 갇혀 있어서 몰골이 조금, 그런데…….”

소매로 얼굴을 가리는 것도 소용없이 라파엘은 테이블에 앉혀졌다. 그리고 앞에 식사가 착착 놓였다.

“먹어.”

“아, 저…….”

“네 말대로 하루 동안 갇혀 있었으니 밥도 제대로 못 먹었을 거 아냐. 일단 먹어.”

라파엘은 하는 수 없이 수저를 움직였다.

단테는 그의 앞에 앉았긴 하지만 라파엘이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화가… 난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한 번씩 ‘잘 먹네.’, ‘더 먹어.’ 하는 말을 보태긴 하는데, 평소보다 분위기가 조금 서늘한 것도 사실이었다.

식사를 마친 라파엘은 씻고 나오면 안 되겠냐고 물어 단테의 욕실을 빌려 썼다. 머리에 수건을 감고 나오자 단테가 그를 앉히고 물이 흐르는 머리를 닦아주었다. 내내 눈치를 살피던 라파엘의 얼굴이 풀어졌다.

“헤헤…….”

“뭘 웃어.”

그러는 단테도 피식 소리를 내긴 했다. 라파엘은 내심 그가 크게 화가 난 건 아니구나 하고 안도했다.

머리카락의 물기를 다 훔쳐준 단테가 라파엘의 앞으로 와 섰다. 그리고 휴대폰의 화면을 두드리더니 눈앞에 보여주었다.

00:05:00으로 맞춰진 타이머였다.

“지금부터 딱 5분만 잔소리할 거야. 그 이후엔 네가 스스로 각오하고 선택한 거니 더 뭐라 하지 않을게.”

“아, 알겠습니다…….”

이 정도 대가면 제멋대로 한 행동에 비해 단테가 몹시 봐준 것이었다. 독방에서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가 크게 화를 내고 싹싹 비는 상황까지 각오를 해야 했는데.

그러나 5분, 그것도 말로만 혼나는 것쯤은 솔직히 군인에게 있어 벌이라 할 수도 없었다. 또 솔직히… 전화로 몇 번인가 듣곤 했던 단테의 걱정 어린 잔소리는 그에게 결코 기분 나쁜 일이 아니었다. 내심 기쁘다면 모를까.

단테가 타이머의 시작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정확히 5분 뒤, 알람이 울렸다.

“제가하, 흐어, 진짜, 그, 히끅, 할 수후, 있는 게, 없스흐기도, 끅, 허어엉…….”

라파엘은 온 얼굴을 눈물 콧물로 물들였다. 어느새 두 손바닥도 가슴 앞에서 싹싹 문질러지고 있었다. 단테가 5분이 끝났음을 알리는 알람을 끄며 테이블 위 휴지를 밀어주자, 그게 방패라도 되는 듯 끌어안고 끄흑, 끄흑 더 울었다.

“저, 흐, 다 혼났습니까……?”

“혼나긴. 잔소리라니까. 5분 다 지났어. 이제 더 안 해.”

“……5분이, 철창에, 끅, 하루 종일, 갇혀 있을 때보다 백배는 무서웠습니다.”

라파엘에게 이제 가장 무서운 소리는 ‘혼난다.’가 아니라 ‘잔소리한다.’가 되었다.

낑낑 앓는 소리와 함께 단테의 허리가 앞으로 쑥 끌려갔다. 라파엘이 단테의 품에 얼굴을 박고 남은 울음을 훌쩍였다. 단테는 울어서 따끈따끈해진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군은 조만간 그만둔다 했고, 이제 앞으로 어떻게 지낼 거야?”

“아… 저, 집에 들어가기는 아버지 눈치가 보여서, 쓰던 호텔에서 한동안 지내려고 합니다…….”

단테가 혀를 차자 커다란 어깨가 움찔 흔들렸다. 지난 5분이 어지간히도 무서웠던 탓이었다.

“네가 갚은 만큼 돈 도로 대출했어. 어차피 군인에겐 이자도 적으니까. 거기에 헤인스워즈 변호사님이 에프런 가로부터 받아다 주신 합의금, 테러 진압 포상금으로 나온 것까지 합하니 제도에 남자 둘이 살 만한 집 구할 수 있겠더라.”

라파엘이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들었다.

“너 직업 새로 얻을 때까지 책임은 져야지. 들어와 살아.”

라파엘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굳어졌다. 그리고 겨우 자신이 들은 말을 더듬어 되물었다.

“저, 저희 동거합니까……?”

“어. 너 사고 안 치게 감시할 겸.”

“……우, 우와아아! 우와, 우와아아아!”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럽게 울다가 그새 웃기는. 의자 아래 라파엘의 다리가 앞뒤로 신나게 동동 움직였다. 으휴, 단테는 두 손으로 라파엘의 머리를 북슬북슬 헤집다 이마를 톡 받았다.

“너한테 갚아야 하는 돈에서 매달 월세만큼 깔 거야.”

“아, 그거 안 갚으셔도 되는데……. 아, 아닙니다. 대신 월세 비싸게 매겨주십시오…….”

조금 전 눈물 콧물 쏙 빼며 혼났던 내용 중에는 애인 사이에 지나치게 큰 금액을 함부로 턱턱 쓴다는 문제도 있었다. 그러므로 라파엘은 합 하고 입을 다물었다.

라파엘도 알고 있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머지않은 시일 내에 한 푼도 빠짐없이 고스란히 그 금액을 돌려줄 사람이라는 걸. 그러면 자신은 이제 단테에게 혼이 나지 않으면서 그걸 받지 않을 방법을 고민해야 했다.

“그럼 동거 계획은 천천히 세우고.”

단테는 라파엘의 얼굴을 붙잡은 두 손을 내려 등을 감쌌다. 그대로 그를 세게 끌어안았다.

“……결과가 어찌 되었든, 네가 나 때문에 필사적으로 최선을 다해준 거 알아. 고마워. 라파엘.”

“팀장님이 제게 해 주신 것에 비하면 저는 정말로…….”

“사랑해.”

단테는 철창 안에 있던 그를 안아주지 못했던 만큼, 라파엘을 감싼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등 위로 마주 올라온 두 손바닥의 체온을 느끼며 웃었다.

“사랑한다는 말 듣고 울면 두 번 다신 없다.”

“……. …….”

라파엘은 상대를 꽉 안고 얼굴을 묻어 표정을 숨겼다. 그러나 결국 어깨를 떨기 시작한 그 대신 단테는 입술을 붙여 울음을 막아주었다. 넘실거리는 감정만큼 입 안이 짰다.

단테는 싸늘한 독방에 구금되어 밤을 새운 애인을 이끌고 침대로 왔다.

“또 자는 사이 혼자 나가서 사고 칠 것 같으니까 네가 안쪽에서 자.”

“네에…….”

라파엘이 침대 가에서 몸을 굴려 안쪽으로 가다가 반대쪽 벽에 팔다리를 퍽 부딪쳤다.

“악!”

“야, 야. 괜찮아?”

“괘, 괜찮습니다.”

“침대가 커봤자 얼마나 크다고 네 덩치로 힘껏 굴러.”

가끔 라파엘은 정말로 자기가 얼마나 큰지 모르는 건가? 싶을 때가 있었다. 커다란 상체로 꽉꽉 누르며 치댈 때나 지금 같은 때. 빨개진 손등을 문지르는 라파엘을 보며 단테는 같이 살 곳의 침대는 무조건 큰 걸로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란히 서로를 보고 눕자 라파엘이 팔을 뻗어 단테의 허리를 안았다.

“조심 좀 하지.”

“이제 안 아픕니다.”

“어유, 그래. 장하다.”

단테도 라파엘의 머리를 감싸 둘의 몸이 가까워졌다.

몇 달 전, 처음 둘이 이 침대에 함께 누웠던 밤. 침대 밖으로 라파엘의 어깨가 삐져나갔던 때와 달리 서로를 바라보며 밀착한 지금은 심지어 공간이 조금 남았다.

오늘 조금 더 뜬 눈으로 잠자리를 지킨 건 단테였다. 차가운 철창 안에서 하루를 보낸 라파엘이 먼저 곯아떨어지고, 단테는 여러 가지 복잡한 표정을 담고 라파엘을 보았다.

“라피.”

물기가 마르고 한결 더 복슬해진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겼다. 덜덜 떨면서도 그를 향해 서툴게 벌렸던 품은 평생 잊지 못할 만큼 사랑스러웠다.

오늘은 울보라고 마냥 놀릴 수만도 없게 단테의 코끝도 조금 저릿했다. 라파엘의 애정은 늘 벅찼지만, 가진 것을 모두 다 내버리며 주는 애정은 그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크기였다. 풀물이 옷에 옮겨붙은 것처럼 라파엘의 연녹색 애정은 단테를 담뿍 감쌌다.

밤이 지나갔다. 품 안의 라파엘은 선택의 대가로 내일도 자신의 곁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단테에게도 단잠이 새벽처럼 내려앉았다. 두 사람 모두 오랜만에 눈을 떠야 하는 시간을 생각하지 않고 깊은 잠을 잤다.

다음 날이 오는 게 아쉽지 않은 이유는, 앞으로도 그가 곁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임을 믿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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