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퇴근을 한 단테는 고요한 집 안을 의아하게 둘러봤다. 현관에 동거인의 실내화가 없는 걸로 보아 외출을 한 건 아닐 것이다.
“라피.”
그는 집 안으로 들어서서 곤색 소파와 TV가 있는 거실을 지나갔다. 팔걸이가 없는 단조로운 디자인의 소파는 단테의 취향이고, 등받이에 덮인 아이보리색 뜨개 블랭킷은 라파엘의 취향이었다. 소파 옆, 협탁에 놓인 작은 화병 안에는 잘 말린 분홍빛 장미꽃 한 송이가 소중하게 꽂혀 있었다.
부엌과 서재에서도 라파엘을 발견하지 못한 단테는 침실 문을 열었다가 미소 지었다. 그리고 불 꺼진 방 안을 소리죽여 건너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군복 착장을 벗고, 몸을 가볍게 씻고 나올 때까지 큼지막한 침대 위에 불룩 솟은 이불은 깨어나지 않고 쌕쌕 오르내렸다. 단테는 갈아입은 옷의 단추를 잠그며 다가가 침대 안쪽을 쓱 살펴보았다.
‘아, 또 이러고 자네.’
두 사람이 함께 쓰는 침대의 왼쪽에는 단테의 베개가, 오른쪽에는 라파엘의 베개가 놓여 있다. 라파엘은 단테가 없을 때면 자신의 베개를 베고, 단테의 베개로는 얼굴을 덮고 자곤 했다.
단테가 출근한 동안 새로운 집에서 기다리게 된 라파엘은 간혹 한 번씩 이렇게 시간에 맞지 않는 잠에 빠져 있곤 했다.
‘키가 크려고 그러나… 갑자기 무릎이 아프고 낮잠이 늘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진 머쓱한 해명은 성장판이 애저녁에 닫힌 연상 애인으로 하여금 식은땀이 나게 하는 말이었다.
단테는 주방으로 가서 저녁거리를 확인했다. 이만하면 장을 보러 나갈 필요는 없겠다 싶자 도로 침실로 왔다. 그는 자신의 베개를 치우고 라파엘의 어깨를 두드렸다.
라파엘이 그제야 부스스 머리를 들었다.
“헤인스워즈 취준생. 많이 졸립니까.”
“취준생 라파엘 헤인스워즈……. 아닙니다. 일어나겠습니다.”
교관이 교육생을 부르듯한 말투를 듣고 라파엘이 눈도 못 뜬 채 웃으며 장난을 받아주었다.
“퇴근한 애인에게 진하게 키스 한 번 해주고 잠 깨도록 합니다.”
“네엡.”
라파엘이 벌떡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은 단테의 목을 끌어안았다. 단테는 이불 속에서 따끈따끈해진 몸을 끌어안고 입술을 붙였다. 쪽, 쪽 입술이 간지럽게 닿았다 떨어졌다. 단테는 막 자리에서 일어나 한층 부스스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이전의 사건은 라파엘의 불명예전역이 아닌, 소란에 대한 책임을 느낀 당사자가 스스로 군복을 벗는 형태로 마무리 지어졌다. 그리하여 단테의 7년 후배 ‘헤인스워즈 소위’는, 어리고 귀여운 ‘취준생 애인 라피’가 되었다.
“네 할 일이나 하라니까 뭘 또 그렇게 냉장고에 이것저것 채워 놨어.”
“퇴근하시고 같이 먹을 생각하니 좋아서 그랬습니다. 별로 안 힘들었습니다.”
“알겠어. 고마워. 이불 정리하고 나와.”
“예!”
부스럭부스럭 몸을 일으키는 라파엘을 두고 단테는 부엌으로 나가 라파엘이 미리 재료를 쌓아 둔 라자냐 판을 오븐에 넣었다.
두 사람이 고른 동거 하우스는 제도 중앙과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단테가 출퇴근하기 용이하고, 전체적인 방 개수가 적은 대신 서재와 침실이 널찍한 단독 주택이었다.
단테 베일리 ‘소령’은 이곳에서 새로 인사발령을 받은 통합 특수전사령부 제도본부로 출퇴근을 했다. 라파엘은 그가 부재한 시간 동안 집안일―도련님으로 자란 걸 알아 불안해했다가 생각보다 잘 해내서 놀란―을 하거나, 서재에서 공부를 하거나, 때때로 나가서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왔다.
사실 일반적인 구직 활동을 모르는 단테로서는 라파엘이 무언가 새 취직을 열심히 준비하고 있구나, 할 따름이었다. 동생들로부터 취직 준비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익히 들었던지라 굳이 요새 무얼 하냐든가, 잘 되고 있냐든가 하는 질문을 던질 생각은 없었다.
“팀장님.”
눈을 비비며 침실에서 나온 라파엘이 단테를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어깨 위로 얼굴을 내밀어 뺨을 맞대고 문지른 뒤에야 그를 놓아주고 옆에 섰다.
“수프 이대로 데우면 되지?”
“예. 제가 하겠습니다. 앉아 계세요.”
한 번은 거절했지만, 그가 등을 떠밀어 단테는 결국 테이블을 차리는 일을 맡았다. 라파엘의 뒷모습이 오븐을 확인하려 허리를 굽혔다가 수프를 저었다가 하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퇴근 후 돌아온 집에 불이 밝혀져 있고,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잠들기 전까지 시간을 보낼 사람이 있다. 단테에겐 이런 환경이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라파엘이 직업을 천천히 얻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단지 신중한 선택을 응원한다는 의미만이 아닐 정도로.
‘실제로 여러모로 어리기도 하고…….’
후배 장교로 만나긴 했지만, 라파엘은 실제로 스물네 살밖에 안 된 어린애다. 헤인스워즈 가 사람 앞에서 재정적 여유를 논하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제국군 소령 월급이 두 사람을 넉넉히 먹여 살릴 정도는 되었다. 성당에도 피해보상금이 나와, 어머니가 제게 이 이상은 결코 손을 벌리지 않을 거라 못 박기도 했다. 그래서 더욱 여유가 생겼다.
테이블 위에 라파엘이 만든 식사가 올라왔다. 동거 일수가 늘어날수록 화려해지는 저녁 식단을 보고 감탄하자 라파엘이 뿌듯하게 어깨를 세웠다.
두 사람에게 닥쳤던 사건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운 식사시간이었다.
지나간 사건의 원인인 데릭슨 에프런은 더 이상 SAG에 머무르지 못하게 되었다.
하극상은 보통 반항을 일으킨 후임을 더 괘씸하게 보긴 하지만, 하극상을 당한 선임도 우스갯거리가 되긴 마찬가지였다. 특히 이전에 친 사고도 있는 데릭슨은 떠밀리다시피 SAG에서 보직을 옮겨야 했다. 리온의 말로는 헤인스워즈 가와의 갈등에 기함한 에프런 가가 그들의 눈치를 봐서라도 가문에서의 입지를 완전히 없앴다고 했다.
데릭슨 에프런은 어떠한 일을 꾸밀 때 매번 자신의 손은 더럽히지 않는 방식을 써왔다. 성당에 저질렀던 일 역시 원래라면 어떠한 처벌이나 타격을 입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라파엘의 하극상, 그로 인한 헤인스워즈와의 갈등은 그를 완전히 몰락시켰다.
사관학교부터 군 생활 내내 단테를 힘들게 했던 그는 이렇게 드디어 단테의 주변에서 사라졌다.
라파엘이 만들어준 결과가 애틋하면서도, 여전히 한 번씩 마음이 무거워지곤 했다.
가진 것을 모두 걸고 단테를 지켰던 라파엘은 눈앞에서 양 볼 가득 복스럽게 음식을 넣고 우물거렸다. 라파엘이 저를 쳐다보는 시선을 의아해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단테는 마법의 말을 꺼냈다.
“너 예뻐서 보고 있었어.”
라파엘의 볼이 더욱 위로 부풀어 올랐다. 자신이 만든 라쟈냐도 마찬가지로 크게 한 조각 입에 넣은 라파엘이 이번엔 한쪽 눈썹을 구부렸다.
“음… 소스를 조금 더 적게 넣었어야 했나.”
“맛있는데, 왜.”
“약간 짜지 않습니까? 반죽과 고기에도 간이 되어 있어서…….”
“아니야. 딱 좋아. 잘 먹고 있잖아.”
“흠…….”
도련님 입맛인 라파엘에게야 차이가 있겠지만, 단테는 이 정도로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집에서 차려 먹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었다. 관사에 있는 동안은 번거로워서 나가 먹거나 포장을 해 왔으니까. 더군다나 일곱 살 연하 애인이 만들어 준 식사인데, 웬만해선 맛없다는 말이 나올 리가.
라파엘은 조금 더 심각한 표정으로 라쟈냐를 보다가 작은 수첩에 무언가를 메모했다. 집안일의 시행착오를 기록해둔 그만의 살림 노하우 수첩이었다.
단테는 오랫동안 성당, 기숙사 등에 살아 타인과 부대껴 지내는 게 익숙했고, 라파엘은 단테라면 그저 좋을 따름이었다. 약간의 불안함을 안고 시작한 동거는 뭘 맞춰나갈 필요도 없이 유한 두 사람의 결합으로 몹시 순탄했다.
“새로 하시는 일은 힘든 일 없으십니까?”
“응, 뭐. 그냥저냥 견딜 만해.”
“…….”
라파엘이 뾰족 입술을 세웠다. 답변이 틀렸다는 뜻이었다. 단테는 멋쩍게 웃으며 적당히 갈무리하려던 말을 늘렸다.
“퇴근 전에 보고 올렸다가 혼났는데, 좀 억울하더라. 난 배운 적도 없는데 왜 이것도 모르냐는 식이어서.”
“속상했겠네요.”
“이쪽 일이 빡세단 말은 들었지만……. 나름대로는 열심히 해서 제출한 거라 좀 짜증 났어. 팀원들과 지내다 위로 까마득한 상관들이 득시글한 곳에 뚝 떨어지니 낯설기도 하고, 공부할 것도 너무 많아. ……왜 웃어.”
“잘하셨습니다.”
또, 단테는 근래 자기가 힘들었던 일들을 라파엘에게 말하는 연습을 했다. 사소한 일이라도 혼자 감내하지 않고 애인에게 내려놓는, 그가 가장 서툴어하는 행동이었다.
“다른 일은 없었습니까?”
“음…….”
그는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꺼내 되짚었다. 그러다 문득, 점심 즈음 스치듯 들은 말이 떠올랐다.
‘데릭슨 에프런 부대 옮길 때 보니까 눈빛이 반 미쳐 있더라.’
단테도 ‘그 새끼는 끝까지….’ 하는 정도로 여기고 지나갔다. 그러므로 단테와 라파엘 모두에게 불유쾌한 이름까지 테이블 앞에서 꺼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두 번 다시 얽힐 사이도 아니고.
“사령부 간부 식당 밥이 별로 맛이 없어.”
“아, 음. 아무래도 아버지 나이대 분들 입맛에 맞출 테니까…….”
직장인의 입장에서 참 심각한 문제지만, 이것만큼은 라파엘이 공감이라거나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는 종류였다.
대화가 조금 더 오가다 보니 어느새 식사가 마무리되었다. 단테는 저녁 식사를 준비해 준 라파엘을 위해 그릇을 수거해 개수대로 가져가며 물었다.
“저녁 먹고 봐야 할 거 조금 남았는데, 너도 서재에서 뭐 할 거 있어?”
“예. 팀장님 일하시면 옆에서 같이 공부하겠습니다.”
“응. 아이고, 서류 보며 야근하는 것보다는 빡세게 훈련 뛰는 게 훨씬 나은 것 같아.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일할 날이 올 줄이야.”
단테는 허리 아래에서 앞치마를 묶고, 셔츠 소매를 걷어 개수대 앞에 섰다. 식사를 마친 식기들 위로 물이 쏟아졌다.
그는 소령 진급과 함께 통합 특수전사령부 내 작전장교 자리를 받았다. 잘해야 특수교육관으로 가는 정도를 생각했던 것에 비하면 몹시 파격적인 인사였다. 작전과 보직은 장성급을 향한 엘리트 코스의 시작점이라고도 불리는 위치였다.
단테의 진급 점수가 나쁘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이 정도 자리는 누군가의 강력한 의지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떤, 잘 아는 높으신 분이 정말로 자신을… 누구 대신 후계자로 키우려 하시는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도 들고…….
그런 이유로 단테는 7년간 실무를 뛰며 보지 못했던 군 내 큰 그림들과 실질적인 운영 체계를 익히느라 정신이 없었다.
설거지를 하는 단테의 옆에는, 소파로 가 있으라 했지만 말을 듣지 않은 라파엘이 멀뚱멀뚱 쪼그려 앉아 있었다.
“라피.”
“예, 단테.”
“너 왜 이렇게 귀엽냐.”
라파엘이 배시시 웃었다. 엉덩이 아래 꼬리가 있었다면 사정없이 바닥을 쓸었을 것이다.
“팀장님. 저, 여쭤보고 싶었는데, 쑥스러워서 계속 말씀 못 드린 게 있습니다.”
“뭔데? 나한테는 할 말 못 할 말 다 시키면서.”
“음, 음… 저 정말 신경 안 쓰니까 편하게 답해주십시오.”
얘가 뭔데 또 이럴까.
“제 어디가 제일 좋으십니까?”
하하. 그릇 위에 몽글몽글 맺힌 세제 거품이 입에서 새어 나온 바람을 맞고 파르르 밀려났다.
“다 좋아. 전부 다 좋으니까 이렇게 데리고 살지.”
“다 말고, 특별히 더 좋아하시는 곳은 없습니까?”
“음……, 손?”
하얗고 가지런하게 쭉쭉 뻗은 손은 총칼보단 만년필이 어울리는 도련님의 손 같았다. 그러나 그 손이 몸에 닿을 때나 손을 잡았을 때 거친 굳은살이 분명히 느껴지는 것도 좋았다.
라파엘이 끔뻑끔뻑 자신의 손을 보다 단테에게 두 손을 쭉 펴 내밀었다. 단테가 장난스레 몸을 반대 방향으로 물렸다.
“너무 대놓고는 좀 부담스럽고.”
“앗.”
손이 도로 접혔다. 라파엘은 또 어디가 좋냐고 묻는 대신 질문을 영리하게 전환했다.
“팀장님, 그러면 제가 말씀드리는 부분이 어떤지 점수로 말씀해 주십시오.”
마지막 그릇을 내려놓은 단테가 손에 묻은 물기를 털며 라파엘을 돌아봤다. 또 어디서 뭘 보고 온 건지……. 이상한 거면 이번에야말로 출근할 때 인터넷 선을 뽑아놔야겠다.
“그래. 말해 봐.”
“음, 우선 얼굴은 어떻습니까.”
“10점.”
망설임 없이 만점이 나왔다. 사실 이건 라파엘도 조금 기대를 한 부분이었다. 단테가 가끔씩 저도 모르게 자신의 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거나, ‘와…. 잘생겼어.’ 하며 칭찬할 때가 있기 때문이었다.
“성격은요?”
조리대에 기대선 단테가 손끝으로 팔짱 낀 팔을 톡톡 두드리다 대답했다.
“8점.”
“…….”
모두 만점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막상 점수가 깎이니 약간은 시무룩했다. 하지만 성격은 단테 본인이 워낙 완벽하고 굳건하니 조금 부족한 점수도 이해가 갔다.
“그럼, 으음…… 잠자리…는요?”
단테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며 조금 더 깊이 팔짱을 꼈다. 얼굴에 미소가 올라왔다.
“일취월장해서 10점.”
라파엘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불끈 쥐었다. 성격에서 8점을 받은 속상함은 벌써 잊혔다. 두 주먹에 ‘해냈다!’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적혔다.
“이제 끝이야?”
“아, 그러면 마지막으로… 몸은 어떠십니까?”
단테의 시선이 티셔츠의 브이 자로 파인 넥라인 안, 상체에 닿았다.
“흠, 몸…….”
라파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섰다. 단테가 옷 위로 라파엘의 가슴부터 복근까지를 쓸어내렸다. 라파엘은 몸에 조금 더 힘을 주면서도 나름 의기양양했다. 테네시에서 단테를 못 만나는 긴긴 시간 동안 정말로 할 일이 없어 운동만 했기 때문이었다.
단테는 라파엘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의미로 감탄을 했다. 전에도 느꼈지만, 진짜 이건 타고 나지 않으면 생길 수가 없는 몸이었다.
곧 단테가 흰 이가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100점.”
“……?”
앞치마를 벗은 단테가 널찍한 어깨를 탁탁 두드려 주고는 서재로 들어갔다. 그 뒤를 라파엘이 “100점 만점이었습니까?! 그럼 제 성격은……!”하며 억울한 얼굴로 뒤따라 들어왔다.
두 사람은 열 시 즈음까지 나란히 서재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 뒤, 동네를 가볍게 산책한 후 맥주 한 병씩을 사서 돌아왔다. 그걸 과자 한 봉지와 함께 비우고, 양치와 세수를 했다. 기껏 산책까지 시켰건만, 단테의 동거인은 지나치게 건강하고 체력이 넘쳐 단테가 입가에 흰 양치 거품을 묻힌 모습을 보고 트레이닝 팬츠 한쪽이 두툼해졌다.
저게 전역하면서 총기 반납도 안 하고……. 라는 생각을 한 단테는 라파엘과 입을 맞추며 손 안에 성기를 한데 쥐고 비벼 취침 전 일어난 불씨를 껐다.
욕실에서 예정보다 시간을 보내고 나와 둘은 침실의 불을 껐다.
“단테, 저도 내일 아침 일찍 나갑니다.”
“그래? 몇 시쯤?”
단테가 가슴 바로 앞에 찰싹 달라붙은 머리를 쓰다듬자 으응, 잠결인지 교태인지 모를 소리가 났다.
“출근하실 때 같이 나가면 될 것 같습니다.”
“응. 알겠어.”
라파엘이 단테의 품을 조금 더 파고들어 킁킁거리다 말했다.
“참, 팀장님. 요새 담배 안 피우시는 것 같습니다.”
“어. 아아… 응. 그렇더라.”
단테도 제가 담배를 찾지 않게 된 걸 자각하고 있었다. 정상회담 훈련까지만 해도 한 번씩 쉴 때마다 나가서 피우고 들어오곤 했는데, 라파엘과 사귄 뒤로는 쉬는 시간을 연락에 쓰느라 횟수가 줄어들었다.
결정적으로 병원에 입원한 사흘간 한 대도 건드리지 않으며 담배 생각이 뚝 끊겼다. 그 이후에 라파엘과 동거하고 나니 정말… 식후에 상관이 굳이 권할 때를 제외하고는 손을 대지 않게 되었다.
담배를 끊은 독한 사람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 했는데,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저도 모르는 사이 끊도록 만드는 라파엘은……. 단테는 속으로 허허 웃었다.
“네 앞에서 담배 냄새 풍기는 거 신경 쓰였는데 잘됐지 뭐.”
“음…….”
“너 지금 아쉬워해야 할지, 좋아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지?”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냥.”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게 한두 번이 아니라 이젠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제 자자. 내일 나가야지. 잘 자, 라피.”
“예. 단테도 안녕히 주무세요.”
인사를 하고, 라파엘이 몸을 당겨 남은 틈을 더욱 밀착했다.
“저는 욕심쟁이인가 봅니다. 계속 떨어져 있다가 동거를 시작하니 너무너무 행복했는데, 함께하게 되니까 이젠 매일 아침마다 단테를 군대에 빼앗기기가 싫습니다…….”
단테가 투정이 들려온 머리를 쓰다듬었다. 함께 지내다 보니 생각도 닮아가는 모양이다.
* * *
단테의 아침 출근 준비는 굉장히 기계적이고 빠르게 끝나는 편이다. 머리카락이 짧고 잘 뻗치지 않는 직모라 단정하게 정돈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고, 군복의 탈‧착의는 유사시에 초 단위로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아왔다. 즉 세수와 양치, 라파엘과의 아침 식사를 제외하면 그 외 다른 일의 소요 시간은 대개 15분 미만이었다.
그러므로 단테는 라파엘보다 먼저 준비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한편 라파엘은 다른 건 몰라도 머리카락만큼은 단테와 정반대였다. 자고 일어나면 곱슬머리가 이리저리 뻗쳐 있는 와중에 기대 누운 쪽 머리만 푹 눌려 있다. 그걸 멀쩡한 모양으로 만들려면 시간이 다소 필요했다.
그런 것 치고도 오늘은 준비가 평소보다 더 오래 걸리는 편이었다. 기다리던 단테가 의문을 느끼며 안쪽을 돌아보았을 때, 마침 라파엘이 문을 열었다.
“팀장님, 제가 늦었죠.”
“……어…….”
그리고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단테가 종종 북슬북슬 쓰다듬던 보드라운 곱슬머리는 반만 뒤로 넘겨져 이마를 드러냈다. 정갈한 투 버튼 재킷이 널찍한 어깨선을 덮고 가슴과 허리를 적절히 조였다. 바지 역시 재킷과 같은 색으로 맞춰 편한 복장일 때보다 늘씬한 느낌을 주었다.
그가 목에 감은 타이를 조절하며 단테에게 다가왔다. 아래로 내리깐 속눈썹, 반듯한 턱날, 흰 손등, 손목을 감싼 은색 시계가 일직선에 놓여 마치 그림 같은 조화를 그렸다.
“웬 정장이야?”
“오늘 가는 곳이 단정하게 차려입어야 하는 분위기라서요.”
“아…….”
면접이라도 보는 걸까. 그는 속으로만 짐작하고 내색하지 않았다.
지난봄 즈음에 라파엘이 정장을 입은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라파엘을 밀어내야 할 후배로만 생각해서였는지, 지금 드는 감상과는 사뭇 달랐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이상…합니까?”
라파엘이 옷자락을 쥐며 쑥스럽게 물었다.
단테는 라파엘에게 계속 눈을 떼지 못했다. 확실히 키가 크고 몸이 잡혀 있으니까 정갈한 차림이 몹시 잘 어울렸다. 물론 몸뿐만이 아니라 어깨 위의 얼굴도 상당히 큰 몫을 했다. 긴 팔다리를 감싼 슈트 위에 귀족적이지만 앳된 기운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 올라가 있으니 꼭 젊은 통치자 같다.
이걸, 이 감상을 이른 아침부터 너무 주접스럽지 않도록 짧게 에둘러 표현하자면.
“너 진짜 꼴린다.”
“……!”
라파엘이 가슴 앞에 두 손을 교차하고 몸을 감추듯 상체를 돌렸다.
아. 단테도 한 박자 늦게 자신의 입가를 때리듯 막았다. 그러나 이미 멋지게 드러낸 라파엘의 이마 아래가 온통 새빨갛게 물들었다.
“멋있, 멋있다고. 말이 잘못 나왔어.”
“어, 어제부터 제 몸만 좋다고 하시더니…….”
“아니… 말실수야. 그리고 내가 언제 몸만 좋다 그랬어.”
“얼굴 10점, 성격 8점, 섹스 10점…… 몸 100점이라 하셨습니다. 저 팀장님께 버림 안 받으려면 오늘부터 슈트 아니면 벗고 있겠습니다.”
“아, 늦겠다. 가자, 가자.”
단테는 라파엘의 등을 툭툭 두드려 현관으로 이끌었다. 그도 대체 어쩌다 자신의 입에서 저 말이 튀어나왔는지 어안이 벙벙했다. 라파엘이 드디어 숨겨진 본심을 실토하게 하는 천사의 능력이라도 익힌 건가.
라파엘이 단테를 차로 사령부 앞까지 데려다주는 동안, 둘 사이에는 오랜만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단테는 아무리 수위 높은 화제에도 끄떡 않고 도리어 쑥스러워하는 라파엘을 놀리는 편이었다. 하지만 아침 댓바람부터, 그것도 중요한 일정을 앞둔 것 같은 연하에게 무의식적으로 꼴린다는 말부터 튀어나온 건 좀……. 스스로의 욕망에 대한 성찰이 필요했다. 단테는 도착하자마자 얼른 안전벨트를 뽑으며 말했다.
“아깐 정말로 멋있다는 말이 잘못 나온 거야. 그러니 신경 쓰지 말고, 흠, 외출 잘하고 와.”
“예…….”
어깨까지 빠르게 두드려 준 뒤 차 문을 열고 나서려던 단테의 손목이 불쑥 붙잡혔다. 돌아보니 라파엘이 아침과 마찬가지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단테를 결연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저…! 이번 주 주말에는 섹스도 100점 받겠습니다. 100점 받을 때까지 몇 번이고 재시험 치를 겁니다.”
“그, 그래.”
“몸 말고, 다른 곳도 꼴, 아니, 좋아하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어어…….”
어떻게 차 문을 닫았는지 모르겠고, 어떻게 배웅했는지 모르게 라파엘을 보냈다.
삐걱삐걱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단테는 얼굴을 감싸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옆자리의 상관에게 넋이 나가 있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남은 시간 찬바람이라도 쐬고 들어가야겠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자 단테를 환영하듯 불이 켜져 있었다. 하지만 단테의 도착을 알아차리고 안쪽에서 빠르게 달려올 발소리가 잠잠했다.
오늘도 깜빡 잠들었나.
침실 문을 먼저 열어보았지만 라파엘은 보이지 않았다. 단테는 서재로 향했고, 그곳에서 찾던 사람을 발견했다.
책상 앞에 앉은 라파엘은 아침에 입은 정장에서 재킷만 벗은 차림이었다. 그런 채, 의자 등받이에 살짝 기대 눈을 감고 있었다.
졸음에 빠진 고개가 왼쪽으로 꾸벅꾸벅 흔들렸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종이에 닿은 펜이 옆으로 상형문자를 그려 놓았다. 모처럼 멋있게 차려입었으면서 또 귀여운 짓으로 어른스러움을 깎는다.
“취업이 많이 힘든가…….”
같은 군 내에서 보직을 옮긴 자신도 낯선 업무투성인데, 특히나 라파엘은 기존에 해왔던 것과 직종을 완전히 바꾸게 되는 것일 테니.
사실 지난 새벽에 라파엘이 스륵 침대를 빠져나가는 걸 보았다. 뺨에 몰래 쪽 입을 맞춘 그는 서재로 가서 무언가를 하다 날이 밝을 즈음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잠깐 자고 일어나 아침 일찍 집을 나섰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천천히 준비해도 되는데.”
스물넷이면 한 1년쯤은 마음껏 놀아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라파엘은 군대 말투가 빠지기도 전부터 무언가를 향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단테는 자신의 뒤가 아닌 옆이나 앞에 서고 싶다 고백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어머니는 단테에게 종종 ‘그렇게까지 숨 가쁘게 달릴 필요 없어.’라고 말하곤 했었다. 지금에서야 그 심정을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기도 했다. 불편하게 앉아 입술 사이로 피곤한 호흡을 오르내리는 모습이 기특하면서도 안쓰러웠다.
그나저나 이렇게 자면 불편할 텐데.
“음…….”
단테는 라파엘의 앞으로 가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꾸벅꾸벅 조는 상체를 자신에게 기대게 한 후, 라파엘의 허벅지 아래에 손을 받쳤다. 의자에 앉아 있던 커다란 몸이 위로 떠올랐다. 잠든 라파엘을 업은 그는 터벅터벅 서재를 나섰다.
거실과 연결된 복도로 나올 즈음, 어깨에 기대어 있던 라파엘의 고개가 들렸다. 그는 지금 상황을 파악하듯 고개를 좌우로 두리번거렸다.
“……꿈인가……?”
목소리가 잠결에 푹 젖어 있었다.
“깼어? 꿈 아닐걸.”
“제가 지금 업혀서 옮겨지고 있는 상황이… 실제가 맞습니까?”
“응. 왜 불편하게 거기서 자고 있었어.”
“팀장님은… 무슨, 힘이… 대체 절 어떻게 업고 계신 겁니까? 안 무거우십니까?”
“깃털 같아.”
“거짓말…….”
“깃털 85kg.”
“…….”
단테는 라파엘을 침대에 내려놓았다. 신방으로 옮겨진 새신부처럼 수줍은 자세로 앉은 라파엘은 여전히 자신이 옮겨진 게 놀랍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곧 퍼뜩 눈을 크게 떴다.
“팀장님 어깨!”
“응? 아, 괜찮아. 어깨로 업은 것도 아니고.”
“그래도 무게는 닿잖습니까. 왜 몰랐지.”
“진짜 괜찮아. 무리였으면 내가 먼저 내려놨지.”
단테가 보란 듯이 다친 어깨 쪽 팔을 움직였다. 입술 가운데를 올리고 있던 라파엘이 결국 허탈하게 바람 소리를 냈다.
“저 누구에게 업혀본 거 10년 전 이후로 처음입니다.”
“또 업어줘? 동네 한 바퀴 돌아줄까.”
“아니오. 절대 아닙니다. 그거 분명 신고 들어갈 겁니다.”
“애인 귀여워서 업어주겠다는데 무슨 명목으로.”
하지만 단테도 그 모습이 이웃 주민들에게 몹시 괴상하게 비칠 거란 생각은 했다. 단테가 아직 잠이 달아나지 않은 눈가를 쓰다듬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라파엘, 나는 그래도 너 한동안은 충분히 책임질 수 있어. 그러니 너무 무리하진 마. 직업 천천히 가져도 괜찮아. 알겠지.”
라파엘은 살짝 ‘으음…?’ 하는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저 정말 힘든 거 없습니다. 이건 거짓말 아닙니다.”
“기특하네. 내 새끼.”
그리고 단테는 잠시 고민하다 조심스레 질문을 꺼냈다.
“오늘, 흠. 면접은 괜찮았어?”
“앗……, 예. 면접인 거 어떻게 아셨습니까?”
“정장 쫙 빼입고 나가는데 어떻게 몰라. 아침엔 긴장할까 봐 별말 안 했지.”
“저보다 긴장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을 텐데요. 걱정하신 것보단 잘 해냈습니다.”
음, 하긴 라파엘이면 대면 면접에선 프리패스를 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안 그래도 툭 튀어나온 키로 눈에 띌 텐데, 그 높이에 달린 얼굴이 이렇게 생겼으니.
하지만 단테는 만에 하나의 변수로 면접에서 떨어진다면 라파엘이 실망할 거란 생각에 그 말은 아꼈다. 물론 면접관이 제정신이라면 그럴 수가 없긴 했다.
“긴장 안 하고 대답 다 했으면 됐어. 수고했어.”
“예? ……대답이요?”
라파엘의 ‘으음……?!’ 하는 표정이 조금 더 심화되었다. 그리고 아, 하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팀장님. 혹시 그동안 장난치신 게 아니고 진짜로 제가 취준생…….”
여기까지 말한 라파엘은 잠시 눈동자를 도르륵 옮기다 하려던 말을 그냥 멈췄다.
“아닙니다. 팀장님, 저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 안 해도 된다니까.”
단테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진심이 담긴 말을 농담처럼 건넸다.
“천천히 커.”
라파엘은 미묘한 얼굴로 웃었다.
* * *
주말은 단테가 쉬는 날이자 병원에 재활 치료가 예약되어 있는 날이었다. 라파엘은 너무나 당연하게 단테의 일정에 동행했다.
“……읏. 아… 윽.”
단테가 눈을 찌푸리며 신음했다. 라파엘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단테의 뒤에 바짝 다가앉은 남자가 그의 양쪽 어깨를 잡고 뒤로 당겼다.
“아……!”
단테의 입술 사이로 가늘게 탄성이 샜다. 그는 입술을 물었다가 고통을 인내하듯 숨을 후 뱉었다. 단테의 등 뒤로 남자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남자, 물리치료사는 수술로 굳은 근육을 풀어주기 위해 어깨를 이리저리 꺾게 했다.
“윽.”
“많이 아프세요?”
단테는 아프거나,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런 신체에 찾아온 자극을 크게 표현하기보단 신음으로 에둘러 나타내곤 했다. 또한……, 다른 어떤 감각을 느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라파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도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니, 지, 지금… 지금……! 지금! 둘이!
“하아……, 예. 거기, 특히 아픕니다.”
라파엘은 재활치료실과 복도 사이의 유리벽을 그대로 뚫고 지나갈 기세로 찰싹 달라붙었다. 반대쪽에서 보면 열 손가락과 손바닥, 이마와 코끝까지 둥그렇게 눌린 모양이 그대로 보일 모습이었다.
그러나 의사가 시키는 대로 기구를 들고 팔을 움직이기 바쁜 단테는 알지 못했다.
“흐읏……!”
라파엘의 손끝이 유리벽을 뽀드득 긁었다.
30분간의 재활 치료를 마친 단테는 의사와 인사하며 문가로 몸을 돌렸다.
“아윽… 욱신거려. 라피, 왜 그러고 서 있어?”
“…….”
라파엘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단테와 의사 사이에 섰다. 말이 사이지, 치료실을 나오려던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낑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밖이잖아. 치대지 마.”
오히려 의사가 허허 웃으며 옆으로 비켜나 주었다. 으이그. 단테는 라파엘의 허리를 주먹으로 툭 두드렸다. 라파엘은 아랑곳 않고 그의 옆에 찰싹 붙어 걸었다.
거의 회복을 마쳐 가던 어깨에 다시 치료가 필요해진 건 데릭슨 에프런과의 몸싸움 때문이었다. 단테는 라파엘이 테네시에서처럼 과한 VIP 병동을 잡아 온 것을 바로 취소시키고, 다른 일반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외래 진료를 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물리 치료를 마친 지금도 라파엘과 나란히 로비의 긴 의자에 앉아 수납 순서를 기다렸다.
“어깨는 좀 괜찮으십니까?”
“응. 수술 부위에 이상 없단 건 전에도 들었잖아. 그래도 평소엔 몰랐는데, 전문가가 만지니까 확실히 뻐근한 곳이 느껴지긴 하더라. 재활 미루지 말고 꼬박꼬박 나와야겠어.”
“…….”
라파엘이 콧등과 입술을 우물거리다 말했다.
“저… 물리치료사로 취직할까요.”
“엥? 갑자기?”
“꿈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생기는 거잖습니까.”
“됐다. 자기 덩치랑 힘도 제대로 모르는 녀석이. 그러다 사람 잡아.”
단테는 다시 한번 라파엘의 허리를 두드렸다.
“충동적으로 말고 네가 가지고 싶은 직업 신중히 생각해봐. 라파엘 어린이, 커서 무슨 일을 하고 싶어요?”
“단테 베일리 배우자요.”
“어유, 그랬어요?”
“진짭니다…….”
투닥이는 두 사람의 앞으로 조금 전 재활을 함께했던 물리치료사가 지나갔다. 단테는 손만 들어 가볍게 인사했고, 그도 미소 지어 눈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옆을 보니 라파엘의 눈이 가늘어져 있었다. 라파엘은 단테를 흘끔거리며 자신의 상의 목깃을 붙잡고 조금 내렸다.
“흠, 흠.”
더운가? 싶더니만 이번엔 옷자락을 펄럭펄럭 흔들기 시작했다. 들썩이는 옷자락 아래로 하얀 배 위, 균형 잡혀 쪼개진 근육들이 그대로 드러났다. 단테는 윗옷 아랫단을 잡고 쑥 내려주었다.
“사람 많은 데서 왜 배를 까.”
라파엘은 보란 듯이 더 옷자락을 흔들었다. 어쭈. 이건 또 무슨 장난이야. 단테가 웃으며 아랫단을 꽉 붙잡았다.
“이건 집에 가서 나만 보여줘야지. 뭐 하는 거야.”
“그겁니다! 맞습니다. 팀장님도……!”
라파엘이 억울한 얼굴이 되었다. 무어라 항변하려다 목소리를 낮춰 작게 속삭였다.
“팀장님도, 물리치료사 앞에서 그렇게… 막, 세, 섹시한 소리 내지 마십시오. 제 앞에서만 섹시하시기로 약속하셨잖습니까.”
뭐? 허…….
“섹… 은 무슨. 그리고 지금 내가 아픈 소리 냈다고 맞불로 사람들 앞에서 속살 내놓은 거야? 어?”
“티, 팀장님이 다른 곳 보셔서 시선 잡아 오려고 몸 보여드린 겁니다. 팀장님은 제 몸을 제일 좋아하시니까.”
“입, 입.”
으이그. 한동안 어른스러워 보이겠다고 낑낑거리다 왜 또 이렇게 애같이 구는지 모르겠다. 단테는 라파엘의 양 볼을 꾹 눌러 붕어 입술을 만들었다.
“우리 둘이 이러고 있는데 퍽도 애인 사이인 거 못 알아보는 사람이 있겠다. 아까 그 물리치료사도 나한테 애인 시선이 아주 무섭다고 하더라.”
“틈즈느 으프으응.”
“누가 봐도 나는 사귀는 사람 있어 보이니까, 질투하지 마세요. 내 새끼. 응?”
라파엘은 볼이 꽉 눌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테가 라파엘을 놓아주는 때를 맞춰 창구에서 이름이 불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단테를 양 뺨이 분홍빛이 된 라파엘이 졸졸 따라왔다.
하지만 단테는 이때 조금 더 단단히 말해두었어야 했다고, 바로 몇 시간 뒤에 후회하게 된다.
병원을 나와 둘은 라파엘의 수많은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예쁜 호수공원으로 향했다. 산책로는 다소 붐볐지만, 그만큼 연인들도 많아 자연스레 손을 잡고 걸을 수 있었다.
추워진 날씨에도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은 조경은 부쩍 가까워진 겨울이 테마였다. 흰 장식물이 조롱조롱 걸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가운데, 새 모양 장식 앞에서 웃는 단테를 라파엘이 행복하게 바라봤다.
호숫가의 끝에선 카페를 발견했다. 벤치에 앉아 다른 곳보다 조금 가격이 비싼 커피로 몸을 녹이다 라파엘은 단테의 어깨에 머리를 툭 내려놓았다. 조금 뒤엔 단테를 두 팔로 꽉 안으며 더욱 엉겨 붙었다. 단테는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며 들고 있던 뜨거운 커피나 반대쪽으로 치워주었다.
두 사람의 평화로운 토요일 오후를 방해한 건 단테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예, 맞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가능합니다. 예.”
통화를 할수록 단테의 목소리가 점차 밝아졌다. 표정에도 확연한 반가움이 그려졌다. 라파엘의 고개가 의아함을 담아 기우뚱했다. 이윽고 전화를 끊은 단테가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했다.
“라피, 미안. 오늘 저녁은 혼자 먹어야겠다.”
예에?! 하고 따져 묻기 전에 단테가 기쁘게 웃었다.
“미하엘 조사가 끝났대.”
* * *
미하엘은 나이가 아직 어린 데다가, 다른 테러범들과 달리 세뇌의 정도가 깊지 않아 디프로그래밍이 어렵지 않았다. 또, 그에게는 제국민 아이를 지키려 한 공로도 있었다.
무엇보다 딸을 구한 오브리의 부모님이 적극적으로 나서주어 조사 자체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만 망명에 필요한 절차와 앞으로 제국민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교화 과정에 다소 시간이 들었다.
그리하여 테러 발생일로부터 두 달여가 지난 지금, 미하엘은 정식으로 제국민의 신분을 받았다.
조사 기관 1층 카페에 함께 앉아 있는 인원은 오브리의 아빠와 엄마, 무서운 곳에 있을 때보다 한층 활달해진 오브리, 키가 10센티는 쑥 큰 것 같은 미하엘. 마지막으로 단테까지 총 다섯 명이었다.
그리고 단테는, 민망한 얼굴로 어쩔 수 없이 뒤쪽을 가리켰다.
“죄송하지만, 한 명만 더 동석해도 되겠습니까? ……이쪽도 현장에 있었던 군 관계자입니다.”
그렇게 끝내 단테를 따라온 누군가도 함께 앉았다.
오브리의 부모는 아이의 천진한 성격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겠는, 선한 인상의 사람들이었다. 단테도 병실에 있을 때 그들에게 긴 내용의 감사 편지를 받은 기억이 있었다. 폭탄이 터진 역 안의 두 아이와, 그들을 안은 군인을 서툴게 그린 오브리의 그림과 함께였다.
“아직도 유치원에 갈 때면 소령님이 주신 고글을 쓰고 가겠다고 해요. 원피스에 무슨 고글이냐고 말려도, 가방에라도 넣어주지 않으면 집을 나서질 않아요.”
오늘은 군인 아저씨가 돌려달라고 할까 봐 안 가져간대요. 혹시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오브리의 아빠가 속삭였다.
단테는 시치미를 뚝 떼고 앉아 있는 꼬마 공주님을 보며 웃었다.
“안 주셔도 됩니다. 오브리에게 무서운 기억으로 남지 않았으니 다행입니다.”
그리고 단테는 옆자리의 미하엘을 돌아봤다.
“넌 뭘 먹고 이렇게 컸냐. 지금의 반 토막만 했던 것 같은데.”
“반 토막만 하지 않았어.”
단테의 손바닥이 오랜만에 만난 미하엘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전에는 팔다리가 비쩍 말라선 영양실조의 흔적이 가득했는데, 이제 제법 살이 붙었다. 키가 쑥 큰 원인도 거기 있을 것이다.
“조사받는 건 힘들지 않았어?”
“별로. 그 정도쯤이야.”
“기사님은 그새 더 멋있어졌네.”
미하엘이 조금 쑥스러운 기색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테가 미하엘과 대화하는 사이, 라파엘은 오브리의 관심을 받았다.
“아저씨, 군인 아저씨랑 TV에서 끌어안았던 사람이지?”
“응? 어, 어…….”
“오브리도 봤어. 아저씨는 어른인데 막 울었어. 팀장님! 으앙! 했어.”
“그, 그렇구나. 슬퍼서 그랬어.”
단테는 고개를 돌린 채 풉 소리를 냈고, 오브리의 부모님만 어른을 의도치 않게 놀리는 아이를 보며 쩔쩔맸다.
오브리의 아빠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차와 디저트를 주문하기 위해 카운터로 향했다. 아이들이 떠나 차분해진 자리에 남은 오브리의 엄마가 단테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소령님, 얼굴 보고 인사드리는 건 처음이죠. 어려운 상황에서 저희 아이들 모두 무사히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친딸인 오브리 뿐만 아니라 미하엘까지 포함해 ‘아이들’이라 불렀다. 그게 미하엘이 조금 더 빨리 국적을 얻을 수 있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미하엘을 입양하시기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예. 아이가 제국에서 잘 자라도록 보답해주고 싶기도 하고, 또 아이들끼리도 좋은 남매 사이로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미하엘이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자랄 수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었다. 단테는 반가운 이야기를 듣고 반색하다 문득 아, 하고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 녀석… 오브리를 좋아하는 것 같던데 남매 사이가 되면 지금은 좀 속상하겠습니다.”
“예? 아뇨, 오브리를 동생으로 무척 예뻐하긴 하는데 제가 보기엔.”
그녀가 단테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소령님을 좋아하는 것 같던데요.”
“……저요?”
“맞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당신이야.”
때마침 도착한 미하엘이 단테의 앞에 차와 간식을 내려놓으며 눈동자를 빤히 바라봤다. 어…. 단테는 멋쩍게 뺨을 긁었다. 라파엘도 고백이 꽤 저돌적이었는데, 이 고백은 한술 더 떴다.
“하하……, 그거 참 고마운 말인데, 제국엔 아동보호법이 있어서 그런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내가 수갑 찰지도 몰라. 너는 성인이 되려면 멀었으니 또래를 좋아하는 게…….”
“그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보호자를 맡아주시기로 한 분들이 생겼다. 그리고, 제국법에 16세 이상은 보호자의 허락하에 결혼식을 올릴 수 있다고도 배웠다. 그러니 당신이 4년만 기다려주면 된다.”
이 소리를 제법 여러 번 들었는지 오브리의 부모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단테는 황망하게 웃었고, 단테 뒤의 한 사람만 웃지 못했다.
“안 돼.”
딱딱한 목소리가 미하엘의 부푼 꿈을 막아섰다. 라파엘이 단테의 반대쪽에 있는 미하엘을 바라보았다.
“너에게까지 기회 가지 않을 거야. 포기해.”
“…….”
마주 보는 미하엘의 눈매가 뾰족해졌다. 두 사람은 말없이 눈빛으로 대치했다. 그 결과, 가운데 낀 단테만 가시방석이 되었다. 일곱 살 연하와, 무려… 열아홉 살 연하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따끔따끔했다.
단테는 심각하게 인상을 쓴 미하엘을 보았다가 표정이 별반 다르지 않은 라파엘을 보았다. 이쪽은 어린애라 쳐도, 얘는 또 왜 이럴까. 오브리의 부모님은 ‘역시 저 둘이 사귀는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엘의 가슴 앞에서 작은 주먹이 꾹 오므라들었다.
“그때 지하철역에서 함께 밖으로 나오면서 교제할 예정인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었다.”
“이제 예정이 아니야. 그러니 팀장님 말씀대로, 너는 네게 맞는 또래를 만나.”
라파엘이 단테의 팔을 꾹 붙잡았다.
“다른 건 다 좋아. 나도 이곳에서 네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라. 하지만 이 사람은 절대 양보 못 해.”
단테가 알고 있던 라파엘의 단정한 말투와 어조는 그대로인데, 목소리의 높낮이가 한 톤 낮았다.
“라파엘.”
단테가 그를 불러 말리려는데 이번엔 미하엘이 당차게 응수했다.
“지금은 둘이 사귀지만 4년 뒤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 아닌가.”
“4년 뒤에도, 40년 뒤에도 달라질 건 없어.”
단테는 생각했다. 왜 기싸움은 둘이서 하는데 가장 창피한 건 나인 걸까. 치정 드라마의 가장 흥미진진한 대목을 보는 듯한 오브리 부모님의 시선에도 둘은 아랑곳 않았다. 단테는 민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며 테이블 아래 라파엘의 무릎을 토닥였다.
“이제 그만해.”
“팀장님.”
“애랑 뭐 하는 거야. 너라도 어른스럽게 행동해야지.”
“…….”
억울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고분고분 입을 닫았다. 대신 꽉 다물린 입술 아래 턱이 쪼글쪼글해졌다. 어휴, 보면 얘도 애는 애야. 열두 살 어린애가 한 말에 뭘 이렇게까지 발끈을 한단 말인가.
단테는 이어 미하엘의 머리카락을 쓱쓱 헤집었다.
“쪼그만 게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미하엘 또한 제 머리를 넉넉히 덮은 커다란 손을 뾰로통하게 보았다.
결혼이니 뭐니 허무맹랑하긴 하지만, 상상의 나래를 이만큼 펼치고 종알거리는 모습은 드디어 제 나이 또래처럼 보이기도 했다. 역에서 만났을 때의 모습을 생각하면 몹시 기특한 변화였다. 막 성당에 와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던 동생이 처음으로 목소리를 들려주었을 때와 비슷한 심정이 느껴졌다.
그래서인가. 미하엘을 대할 때면 저절로 동생들에게 하는 말투가 나왔다.
“꼬마 기사님, 잘 생각해. 4년 뒤 네가 열여섯일 때 나는 서른다섯이야. 앞날이 창창한 청소년이 좋아하기는 너무 많은 나이지. 아마 그때 되면 지금 한 말 취소하고 싶어질걸.”
“내가 그럴 리 없다.”
“없긴. 이제 학교 다니기 시작하면 주변에 예쁜 친구들이 수두룩할 텐데.”
“그냥 만나게 될 사람들과 당신은 의미가 다르잖아.”
미하엘이 머리에 얹어진 단테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리고 작은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당신은 나한테 나이로 계산하는 것보다 더 특별하다. 좋아해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이니까.”
아이는 그사이 감정도, 표정도 상당히 풍부해졌다. 부루퉁하게 부풀어 오른 뺨이 들썩였다. 어리게 태어난 게 분해 죽을 것 같다는 눈빛이 제법 진지했다. 하지만.
‘좋아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꽤 많을걸…….’
허허허. 단테의 웃음이 부자연스러웠다. 그는 몇 달 전 누군가를 상대로 비슷한 고민을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물러날 곳도 없이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구애를 받으며, ‘얘가 왜 이러지?’ 하고 진땀을 뺀 지난봄의 일이었다. 둘이 이름뿐만 아니라 이런 것도 닮은꼴이었다.
단테가 아무 대답이 없자 라파엘이 단테의 팔을 잡았다. 미하엘도 질세라 단테의 손을 작은 손가락들로 꾹 감쌌다.
“그럼 열여섯 말고, 내가 어른이 되어도 안 되나?”
“음…….”
“나는 당신이 늙어 할아버지가 돼서 흰머리가 나고 주름이 져도 상관없다.”
“야, 할아버지라니.”
할아버지, 흰머리, 주름. 세 단어는 30대 초반의 무던한 감성에 약간의 내상을 입혔다.
“너랑 내가 나이 차가 좀 있긴 해도 그 정도는 아니거든?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요점은……읏, 라파엘, 잠깐.”
단테의 팔을 끌어당기다 못해 찰싹 붙어 앉은 라파엘이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가까이 앉은 단테의 귓가에만 들릴 만한 크기로 끄응…. 강아지 앓는 소리가 났다. 해석하자면 지금 당장 내게 관심을 주고, 날 더 예뻐하라는 의미였다. 질투로 심통이 난 강아지의 콧김이 뒷목에 식식 느껴졌다.
등 뒤에선 돌아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라파엘의 시선, 앞에는 간절한 어린아이의 시선.
엄마 품을 차지하고 앉은 오브리까지 눈을 끔뻑이다 단테를 돌아봤다.
“아저씨, 엄마가 나쁘대.”
“응?”
“어머. 아니에요. 죄 많은 남자라고 했답니다.”
“하하…….”
“아저씨가 오브리한텐 나쁜 사람 물리치는 군인이라고 했었는데.”
“어… 맞아. 아저씨 나쁜 사람 아니야.”
단테는 몸에 얹어진 두 천사의, 네 개의 손을 보았다.
“……아마도.”
우선 이 상황부터 적당히 무마해야겠다. 수많은 동생들을 돌봐온 경력을 살려서……. 24살 먹은 애는 잠시 두고, 진짜 어린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하엘, 우선 쑥쑥 크자. 그리고 어른이 된 뒤에 찾아와. 그때 나보다 더 커져 있으면 생각해 볼게.”
“팀장님.”
“정말인가?”
“안…….”
단테는 무릎을 붙잡아 뭐라 하려는 라파엘의 말을 막았다.
“가만히 있어. ……응. 정말이지. 그러니 뭐든 잘 먹고, 부모님 밑에서 씩씩하게 지내.”
미하엘이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끄덕였다.
“내가 크는 걸 기다려주겠다고 약속한 거다. 내가 당신보다 더 커지면, 그땐 내게도 결혼할 기회가 있는 거다.”
아, 이게 그렇게 해석이 되는 건가.
“그래, 뭐……. 알겠어.”
“좋아!”
앞으로 다른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제국에 적응하고 조금 더 크면 지금보단 설득이 편할 것이다. 이제 막 낯선 곳에 발을 들인 아이를 시무룩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미하엘은 그제야 단테의 손을 놔주고 제 자리에 앉았다. 잠시 슥 돌아간 시선이 또 라파엘을 못마땅하게 본 것 같지만, 곧 다시 단테에게 돌아왔다.
“이제 너도 놔.”
“…….”
“라파엘.”
이름을 듣고 손끝을 움찔한 라파엘도 단테의 팔에서 스륵 손을 떼어냈다.
“으이그.”
단테는 의자를 옆으로 끌어 바짝 붙어 있던 몸도 떨어뜨렸다. 그로써 간신히 오브리의 가족들 앞에서 죄 많은(?) 모습은 그만 보일 수 있게 되었다.
어른들 사이에 대화가 조금 더 오가던 중, 오브리가 작은 입을 벌리고 하품을 했다.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기엔 아이가 질릴 시간이긴 했다. 겨울철의 하늘은 벌써 캄캄해졌다.
“이만 자리 정리할까요.”
라파엘이 의견을 냈고, 딱히 이견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오브리의 부모님이 두 아이를 챙기는 사이 단테와 라파엘은 테이블을 정리했다. 라파엘이 자신의 앞으로 가져온 쟁반 위에 빈 컵과 접시를 모았다.
“라파엘, 여기….”
단테가 내민 접시가 손가락 사이에서 쑥 빠져나갔다. 그는 수거한 식기들을 카운터에 두고 돌아와 벗어둔 겉옷을 입었다. 어쩐지 태도가 서늘했다.
“음, 라피. 피곤해?”
“예.”
라파엘은 단테를 쳐다보지도 않고 짧게 대답했다.
음, 으으음. 뒤늦게 단테의 뒷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뚝 흘렀다. 으음, 설마…….
그 때, 단테의 소맷단이 아래에서 툭툭 당겨졌다.
“단테.”
“어어… 미하엘.”
“이렇게 이름으로 불러도 되나?”
그러고 보니 이름으로 불린 건 처음이었다. 오브리처럼 군인 아저씨라 부르지 않는 이상에야 이름이 자연스러운 호칭인 건 맞는데, 그가 부르니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단테는 다른 곳을 보는 척하는 라파엘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걸 목격했다.
“아저씨도 괜찮긴 하다만…….”
“알겠어, 단테.”
역시 미하엘은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았다.
“단테. 나는 금방 클 거다. 그러니 기다려줘.”
“……알겠다, 알겠어. 잘 지내고,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알려준 번호로 연락해.”
“그럼 또 구해주러 올 건가?”
“당연하지.”
또 한 번 단단한 손이 머리를 덮었다. 꾹 눌린 앞머리 아래 눈동자에 잔잔한 감동이 어렸다. 미하엘은 그를 만난 이래로 가장 환하고, 순수한 기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 얼굴을 마주 보고는 단테도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일행은 건물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아직 입양 절차가 남은 미하엘은 옆 건물인 보호시설로 돌아갔다. 오브리와 남매가 되는 건 몇 주 정도 시간이 더 걸린다고 했다. 오브리의 부모는 미하엘을 배웅한 뒤, 졸음이 올라와 심통이 나기 시작한 오브리를 달래며 이별했다.
단테는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라파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라피, 차 키 줘. 피곤하면 내가 운전할게. 아까 호수공원 갈 때도, 여기 올 때도 네가 운전했잖아.”
“…….”
라파엘은 단테의 손을 말없이 보다 주머니의 차 키를 그 손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조수석 방향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단테는 눈치가 부족한 편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과 오랜 시간에 걸쳐 부대껴 살았기도 하고, 본인도 타인의 기분을 잘 챙겨주는 편이었다. 거기다 매일 헤실헤실 웃고 있는 녀석이 저런 태도를 보이면 모를 수가 없었다.
라파엘의 뒷모습이 조수석으로 쑥 들어가고 차 문이 닫혔다. 단테는 잠시 팔짱을 끼고 있다가 한숨을 푹 쉬고는 운전석으로 갔다.
단테가 운전석에 타자 라파엘은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뚱하게 가라앉은 기운이 완연했다.
“내 새끼.”
“……예.”
“음… 삐졌어?”
라파엘의 아랫입술이 안으로 말려들어 갔다가 다시 나왔다. 윗니로 꾹 눌린 입술이 진한 분홍색이었다. 단테는 핸들에 몸을 바짝 숙여 라파엘의 얼굴을 보려 했다. 그러나 라파엘이 고개를 더 옆으로 숨기는 바람에 실패했다. 단테의 두 눈썹과 함께 한쪽 입꼬리가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흠…….”
그는 가운데 센터 콘솔을 짚고 조수석 쪽으로 몸을 쑥 기울였다. 단테의 상체가 갑자기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돌리고 있던 라파엘도 조금 놀라 그를 보았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입을 맞출 듯 가까운 거리에서 단테의 눈매가 둥글어졌다.
“아무리 화나는 일이 있어도.”
라파엘의 셔츠 깃을 스친 손이 어깨 너머에 있는 안전벨트를 잡아당겼다. 단테는 조수석의 안전띠를 쥐고 다시 운전석으로 물러났다. 검은 벨트가 라파엘의 가슴 앞을 가로질러 엉덩이 옆에 툭 채워졌다.
“안전벨트는 해야지.”
“…….”
“그렇지?”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온 그는 손가락을 굽혀 뼈마디로 라파엘의 뺨을 쓰다듬었다. 라파엘의 얼굴이 붉어지며 조금 더 복잡한 감정이 어렸다. 토라짐이 누그러진 것도 같은데 대신 서러움이 섞였다.
단테는 자신도 벨트를 매고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라파엘은 도로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도 단테의 말을 무시한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까만 유리창 너머로 단테를 흘끔흘끔 훔쳐봤다. 그게 단테 쪽에서도 훤히 다 보인다는 게 문제였지만.
늘 이런저런 말을 먼저 걸어주던 라파엘이 조용하자 차 안은 고요해졌다. 도심을 빠져나온 차는 가로등이 줄지어 켜진 한적한 길목으로 진입했다.
“내 새끼가 정말로 마음이 단단히 상했나 보네.”
“…….”
“라파엘.”
“예.”
“나랑 계속 말 안 할 거야?”
그 질문을 하고 조금 뒤에 “아닙니다.”하는 대답이 나왔다. 목소리가 먹먹하게 잠겨 있었다. 입을 다물고 있던 게 단지 기분이 상해서만이 아니라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서도 있었나 보다.
그제야 단테도 룸미러로 고개를 푹 숙인 라파엘을 자세히 살폈다.
‘장난처럼 넘어갈 기분이 아닌가…….’
단테는 창틀에 팔꿈치를 짚고 있던 손으로 핸들을 잡고, 반대쪽 손은 중앙을 넘어가 라파엘의 팔 옆에 내려놓았다.
단테도 그런 편이지만, 특히 라파엘은 더 갈등을 힘들어한다.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 손등에 닿은 팔이 긴장으로 잔뜩 굳은 게 느껴졌다.
“라피, 나는… 우리가 사귀며 서로 감정 틀어지거나 싸울 일은 최대한 없었으면 좋겠어.”
두 사람의 성향상 사소한 투닥임이 아닌 감정적 다툼은 정말 좋지 않았다.
“물론 우리 둘 다 사람이니 화나고 서운할 일이 생기겠지. 그럴 땐, 이 관계가 만들어지도록 노력한 건 너니까 유지하는 건 내가 더 열심히 하자고 생각했고.”
“……. 단테…….”
“너도, 나도 불편한 이 분위기 집까지는 이어가지 말자. 왜 화가 났는지 말해줘. 미하엘 앞에서 가만히 있으라고 했던 게 많이 기분 나빴어?”
“…….”
라파엘이 옷깃을 꾹 쥐었다. 입술도 함께 꾹 눌렸다가 떨어졌다. 그는 두 좌석을 가르는 선을 먼저 건너온 손을 보았다.
“팀장님이 이런, 분이셔서 저는 더 쪽팔린 겁니다. 어린애 질투한 감정 하나 갈무리 못 하고 있잖습니까.”
조금 뒤, 라파엘이 드디어 모로 돌아가 있던 고개를 들어 단테를 마주했다.
“팀장님 말 무시하고 불편한 분위기 만들려고 한 거 아니었습니다. 지금, 목소리에서 감정도 안 숨겨지고…. 입 열면 애 같은 투정이나 튀어나올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화를 낸 것도 아니고, 그 정도 가지고 뭘 미안해해. 질투해서 기분 안 좋은 거였어?”
“……예.”
“설마하니 나와 그 애 사이에 뭘 의심한 건 아닐 거고. 어떤 점이 기분 나빴어?”
신호에 걸린 차가 멈춰 섰다. 이 와중에도 여유롭게 속도를 줄인 차는 흔들림 없이 부드럽게 섰다. 안전선을 정확히 지킨 정차가 꼭 어른이 되지 못하고 동요하는 건 누구 하나뿐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맞잡은 라파엘의 두 손이 꾹 눌렸다.
“결혼 이야기는 어린아이여도 장난으로라도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건 제게도 거절하셨던 거잖아요.”
그것도 사유가 있는 진지한 거절이 아니라, 조금 전 미하엘을 대할 때와 똑같이 어린 게 까분다는 식의 대응이었다.
“왜, 한 번 만났을 뿐인, 그것도 저보다도 한참 작은 어린애와 제가 같습니까.”
“아…….”
“팀장님이 단호하게 끊어내려 하면 얼마나 칼 같은지 저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겠죠. 그러실 수 있는 분이, 왜 그렇게 무르셨습니까.”
그게 문제였군.
말을 다 꺼낸 라파엘의 얼굴은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본인도 열 몇 살은 더 어린아이에게 질투하는 모습이 싫어서 온전히 분한 감정을 품지는 못했을 것이다. 화가 나고 속상하고 슬퍼도 항상 단테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던 녀석이었으니.
“미하엘은… 지금 당장 뭐라 하기보단, 다른 사람들을 만나보며 자연스럽게 생각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 그 애 양부모가 될 분들 앞이라 조심스러웠던 부분도 있었고.”
“예…….”
“하지만 네 마음도 이해해. 사귀는 사람을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니었어. 앞으론 안 그럴게.”
“…….”
“미안해. 마음 풀어, 라피.”
단테 나름의 속상함을 누그러뜨려 주려는 시도로 라파엘의 팔을 토닥토닥 문질렀다. 사과를 들었는데도 라파엘의 고개는 더욱 숙여졌다. 꽉 쥔 두 손도 그대로였다. 핸들이 옆으로 꺾였다. 두 사람의 집이 있는 동네가 가까워졌다.
“팀장님, 제가 질투하는 모습 애 같으시죠?”
“음…….”
답을 흐렸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답이 되는 답변이었다. 부드럽게 회전한 차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집과 차고가 멀리 눈으로도 보이기 시작했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셔도 괜찮습니다.”
“애 같다는 게 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니야. 널 좋아하는 애인으로서 귀엽게 느껴질 때도 많아.”
담과 담 사이 어두운 길을 속도를 줄인 차가 천천히 나아갔다.
“……가끔은, 이해가 안 갈 때도 있고.”
단테는 한 손으로 입가를 쓸어내렸다. 그게 꼭, 그가 답답할 때면 피우던 담배를 든 것처럼 보였다. 연애를 시작하며 자연스럽게 끊었다고 말한 적이 있어 라파엘은 마음이 더 시큰해졌다.
단테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안에서 소중한 순위를 매긴다면 물리치료사나 미하엘보다 네가 한참 우선일 게 당연하잖아. 내가 뻣뻣한 편이긴 해도 그 정도 확신을 못 주진 않았고.”
집이 가까워졌다. 단테가 창문 밖으로 손을 뻗어 비밀번호를 누르자 차고 문이 열렸다.
“그래서 네가 지금보단 여유로워졌으면 좋겠어.”
“…….”
자동차가 캄캄한 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센서등에 불이 켜지기까지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내리자.”
단테의 말 뒤로 둘은 각기 차 문을 열고 나왔다. 차고에는 겨울밤의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쌓여 있었다. 단테는 먼저 집 안으로 연결된 문 앞에 서서 라파엘을 기다렸다.
그러나 라파엘은 두어 걸음을 내디딘 자리에 멈춰 섰다.
“팀장님은, 어른스럽고, 이성적이고, 절 안심시켜주실 말도 해주시고, 팀장님이 말하신 거 하나도 틀린 게 없는데, 저는 왜 이렇게…… 마음이, 이상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라파엘이 고개를 푹 숙였다.
“팀장님, 죄송합니다. 저 잠시 머리 좀 식히고 오겠습니다. 이대로 같이 들어가면 괜히 더 투정 부리고 후회할 것 같습니다. 저도 불편한 분위기 집으로 가져가기 싫습니다.”
단테는 그제야 옆모습으로만 보았던 라파엘의 얼굴을 정면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울지는 않았지만, 처음 차에 탈 때보다 더 얼굴빛이 안 좋았다.
“라파엘.”
단테로서는 걱정이 되고, 차라리 붙잡고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투정 부린 뒤 후회하기 싫다는 말을 듣고 잡을 수도 없었다.
“금방 들어올 거지.”
“예.”
“알았어. 기다리고 있을게.”
라파엘은 한 번 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곤, 차고에 난 두 개의 출입문 중 바깥과 연결된 출구로 갔다.
단테는 차고에 잠시 더 서 있다가 다른 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늘 웃으며 먼저 달려오던 모습만 보아서인가, 오늘 몇 번이나 본 뒷모습이 익숙하지 않았다.
해소되지 않고 남은 이 무거운 분위기는 다툼을 닮았다. 하지만, 라파엘 덕에 ‘싸웠다’라고 표현하기는 또 어려운 상황이었다. 세상에 서로 다툰 뒤에 정중하게 다녀오겠다고 인사하고 나가는 녀석이 어디 있겠는가.
오전에 출발해 밤늦게 돌아온 집은 온통 불이 꺼져 있었다. 단테는 스스로 불을 켜며 안으로 들어가다가 문득 어색함을 느꼈다. 그가 퇴근 후 귀가할 때면 늘 라파엘이 불을 환하게 밝히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레스룸에 들어가 겉옷을 벗자 서늘한 집 안 공기가 느껴졌다. 그는 옷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나왔다. 마찬가지로 어둑한 부엌에도 불을 밝히고, 물 한 잔을 꺼내 마셨다.
복잡하게 웅성거리던 속이 아주 잠시 식었다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으휴, 이……, 삐돌이 강아지.”
머릿속 여러 단어를 추린 결과 지금 라파엘에게 꼭 맞는 수식어는 그것이었다.
단테는 모처럼 쉬는 귀한 주말에 라파엘과의 갈등을 만들기 싫었다. 그래서 아까도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긴 했지만, 가끔은 그의 질투가 ‘나를 믿지 못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될 때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라파엘은 착해 빠져선 속상한 마음을 끙끙 앓기만 하는 녀석이었다. 지금만 해도 감정이 상한 상황에 쿵쿵 발을 구르는 것도 아니고, 시무룩하게 꾸벅 인사를 하고 집을 나가니. 단테로서는 이도 저도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화를 내거나 투정을 부리면 맞대응을 하거나 안고 달래주기라도 하지.
늘 그와 마주 앉아 있던 테이블 위에 단테의 머리가 툭 떨어졌다.
라파엘이 관계에 열정적이며, 제게 느끼는 감정의 폭이 큰 건 알고 있었다. 단테 역시 그를 좋아하는 마음의 총량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단테는 라파엘처럼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하며 열렬히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근데 또 이걸… 난 질투 안 하니까 너도 하지 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결론은 라파엘이 좀 더 여유로워질 때까지 단테가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겨우 이런 일로 갈등을 빚을 건 아니니까.
어느새 물컵이 비었다. 물방울만 도륵 흘러내리는 컵을 기울이다 몸을 일으켜보니 시간이 조금 지나 있었다. 휴대폰을 열어 봤지만 별다른 연락이 와 있진 않았다. 단테는 자연스럽게 암기한 번호를 입력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르르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안 받네?
1분쯤 신호음을 듣다 먼저 통화를 끊었다. 그리고 메시지를 입력했다.
[라파엘. 왜 안 와?]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야 문득 생각났다. 이 녀석 혹시 또 어디… 쭈그려 앉아서 울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걱정과 동시에 분수대 앞에서 서럽게 울던 모습도 떠올랐다.
감정 일렁임이 많고, 오늘도 속상함을 얼굴에 주렁주렁 매달고 힘없이 나간 애인.
쯧, 단테는 크게 혀를 찼다.
“오늘은 날도 추운데.”
단테는 자리에서 일어나 벗어둔 겉옷을 챙겼다.
팔을 꿰고, 지갑과 휴대폰을 코트 주머니에 막 넣으려던 차였다. 화면 속 메시지 옆에 읽음 표시가 떴다.
그리고 무어라 입력 중이라는 표시가 떴다. 그는 잠시 멈춰서 휴대폰을 보았다.
곧 메시지가 도착했다.
[팀장님이 저엊ㅅ인 아무엇도 못했으면 조ㅎ겠어요]
“엥?”
이게 뭐야?
[저은 단태가 업ㅇ으면 살 수가 엊는데]
라파엘이 보내는 메시지는 이모티콘이나 애교 등으로 점철되어 있긴 해도 항상 맞춤법은 칼 같았다. 그런데 이건… 뭐지. 엉망진창인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들여다보는데, 라파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라파엘. 너 어디야?”
주변이 시끌벅적했다. 단테의 한쪽 눈이 가늘어졌다. 웅성이는 소란이 들리다, 휴대폰이 다른 누군가에게 넘어갔다.
―아, 선배. 저예요.
그리고 라파엘이 아닌 다른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앤지?”
* * *
사건은 세 가지 우연이 겹쳐져 일어났다.
하나. 라파엘 헤인스워즈는 시무룩하게 길을 걷고 있었다.
둘. 두 사람의 집은 단테가 출근하기 편하도록 사령부와의 거리가 멀지 않다.
셋. 두 사람의 집과 사령부의 중간 즈음에 위치한 술집에서는 해리스 팀의 회식이 진행 중이었다.
그 결과, 길을 지나가던 라파엘은 ‘저기 헤인스워즈 아니야?’라는 부름과 함께 회식 장소 안으로 잡혀 들어갔다.
옛 팀원들은 단테와 라파엘의 교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축 처져 아무 말도 못 하는 라파엘을 보자마자 단테와의 갈등을 단박에 눈치챘다. 의리 넘치는 옛 팀원들은 ‘네가 감히 하늘 같은 팀장님을 모시고 살지는 못할망정 싸워?!’ 하면서도 듬뿍 위로주를 따라주었다.
솔직히 말해 둘이 연애하면 상관이 힘들겠는가, 부하가 힘들겠는가. 지위를 제쳐놔도 꽉 잡혀 사는 건 어느 모로 보나 라파엘의 몫이었다.
“자, 마셔. 마셔.”
그렇게 거절하지 못하고 꿀꺽꿀꺽 기울인 잔이 늘어갔다. 본인도 속상한 채로 나갔으니 완전히 억지로 마신 건 아닐 것이다. 그와 함께 라파엘의 발목도 회식 테이블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 모든 소식을 전해 들은 단테는 시동을 끈 지 한 시간도 안 된 차를 끌고 안젤라가 말해준 장소로 왔다. 주차를 하고 시끌벅적한 술집으로 다가가는 동안, 한숨이 흰 꼬리가 되어 입가에서 피어올랐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쪽 테이블에 익숙한 몇몇의 뒤통수가 보였다. 어쩐지 급격하게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테이블로 다가가 아는 사람의 어깨를 짚었다.
“잘 지냈어?”
“엇, 팀장, 아니, 소령님!”
저도 모르게 익숙한 호칭을 꺼낼 뻔했던 팀원이 말을 정정했다. 반 정도는 반가운 표정, 나머지 반은 ‘아, 저 사람이 그….’ 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테이블 오른쪽 끝에서 가장 어려 보이는 사람이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안젤라가 사수를 맡고 있는 후배였다. 군기가 바짝 들어간 인사를 받고 단테는 손을 저었다.
“편히 앉아. 다른 사람들도 경례 같은 거 하지 말고, 계속 회식 즐기십시오. 갑자기 불쑥 찾아와 미안합니다.”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섞여 있어 그는 예의 차린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옛 팀장과도, 새 팀원들과도 익숙한 이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애인 데리러 오셨습니까?”
야유를 들으며 단테는 어깨를 으쓱였다. 팀원들의 눈빛이 짓궂어졌다. 무어라 놀림이 나오기 전에 단테가 먼저 선수를 쳤다.
“참고로 싸운 거 아니다.”
“어유, 그럼요. 헤인스워즈가 상대나 되겠습니까. 살살해주십쇼.”
대답 대신 팔짱을 낀 채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놀릴 건수를 하나 잡힌 것 같았다.
“라파엘은?”
“아, 해리스 팀장님이 소령님 오시기 전까지 물이라도 먹이고 오겠다며 데려가셨습니다. 금방 올 겁니다.”
“소령님, 여기 앉으십쇼.”
“아니야. 여기 껴서 꼰대 노릇하기 싫다. 라파엘만 데리고 갈게. 우리끼린 나중에 자리 한번 만들자.”
“알겠습니다. 참, 그리고 헤인스워즈는 저희가 술 약한 거 생각 못 하고 억지로 먹인 거니 뭐라 하시진 마세요.”
“알았어. 걱정 마.”
이래서 귀가가 늦어진 거면 단테도 할 말은 없었다. 애초에 사석, 특히 술자리에서 수평적이고 왁자지껄한 팀 분위기를 조성한 장본인이 그였기 때문이다. 다만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됐나, 하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선배?”
술집 안쪽을 살피던 중 단테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왔어요? 어어어, 야, 거기 발밑 조심해. 다리, 다리.”
오랜만에 보는 안젤라는 하나로 높이 묶던 머리카락을 귀 아래로 깔끔하게 자른 모습이었다. 그녀의 어깨엔 익숙한 사람의 머리가 놓여져 있고, 옆에는 휘청이는 바람에 그녀에게 몸을 바짝 기댄,
“헤인스워즈, 저기 단테 선배 오셨어.”
라파엘이…….
“단…테?”
“…….”
뭐라 생각을 하기 전 몸이 먼저 움직였다.
두 사람에게 성큼성큼 다가간 단테가 라파엘의 팔을 휙 당겼다. 라파엘의 몸이 단테에게 기울었다가 그의 품으로 풀썩 쓰러졌다.
“아우, 마침 잘됐다. 무거워서 어깨 빠지는 줄… 선배 언제 왔어요?”
“…….”
얼음물을 들이켠 것처럼 머릿속을 징, 울리는 진동이 지나갔다. 단테는 한 박자 늦게 입술을 밀어 올렸다.
“방금 도착했어.”
그러나 굳은 근육을 움직이는 것처럼 입가가 뻣뻣했다. 단테는 팔로 감싼 라파엘의 옷깃을 꽉 쥐었다.
“얘 많이 취했어?”
“네 조금… 그래도 초반에만 달리고, 금방 술 빼앗았어요.”
“아닙, 니다. 저, 괜찮…….”
품으로 당겨진 라파엘이 이마를 짚으며 웅얼거렸다. 전해 들은 것처럼 한 번에 술을 많이 마신 모양이었다. 정신은 나름 멀쩡한 것 같은데 몸을 가누질 못했다.
“앤지, 미안. 라파엘은 내가 데려갈게. 챙겨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저야말로 술 많이 먹여서 미안해요. 전역했다는 소식 듣고 섭섭하다느니 하며 좀 괴롭혔거든요. 잘 챙겨주세요.”
“알겠어. 다음에 보자.”
단테는 라파엘의 허리를 꽉 붙잡고, 테이블에 인사한 뒤 밖으로 나왔다.
그는 세워둔 차의 조수석에 라파엘을 실었다. 보닛을 돌아 운전석으로 오니 라파엘이 안전벨트를 당겨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단테는 그걸 빼앗듯 가져와 딸깍 채워주었다. 조금 날카로운 동작을 보고 라파엘이 어……. 하며 눈을 끔뻑였다.
그런 그의 앞에 술 깨는 데 좋다고 알려진 음료수가 쑥 내밀어졌다.
“마셔.”
“……아.”
감사합니다……. 단테는 라파엘이 음료수병을 따고 꼴깍꼴깍 넘기는 모습을 핸들에 기대 빤히 바라봤다. 라파엘은 단테를 흘끔이며 반 정도를 마시고 내려놓았다.
술기운이 가라앉는 과정을 한참 동안 빤히 보던 단테가 말했다.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어.”
라파엘이 대답하기 전에 질문이 하나 더 이어졌다.
“내가 미워서?”
“아닙니다!”
고개가 재빠르게 좌우로 돌아갔다. 남아 있던 취기도 번쩍 사라진 표정이었다. 어려서 그런가 술이 깨는 속도도 빨랐다.
“팀장님, 저 정말로…….”
“아니면 됐어.”
라파엘의 눈앞으로 단테의 손이 다가왔다. 그 손은 흐트러진 앞머리를 넘겨주더니, 뺨을 슬쩍 집었다.
“팀장님?”
“…….”
단테는 말없이 웃고만 있었다. 그런데 그 웃음도 평소와는 느낌이 달랐다. 위로 올라간 입술 안에선 이를 악물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는 한쪽 뺨만 집요하게 꼬집다 문지르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도로 몸을 돌려 핸들을 잡았다. 라파엘은 눈치 못 챈 것 같지만, 한참 그의 손길을 받던 뺨은 조금 전 안젤라의 어깨에 닿았던 부분이었다.
“하하하.”
단테는 정체 모를 웃음을 지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멀지 않은 집까지는 금세 도착했다. 조금 전과 달리 차고에 자동차가 덜컹이며 멈춰 섰다. 단테는 내리지 않고 핸들을 쥔 채로 정면을 보았다. 술이 완전히 깬 라파엘도 이제 단테가 좀 이상하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화… 나셨습니까?”
“아니.”
“죄송합니다……. 그게, 가다가 붙잡혀서, 술자리에 잠깐 앉아 진정하고 온다는 게…….”
“무슨 상황이었는지 짐작 가니까 그건 됐어. 네 잘못 아니야.”
침착하게 대답한 단테는 별안간 두 손으로 붙잡은 핸들에 자기 이마를 퍽 갖다 박았다. 깜짝 놀란 라파엘이 손을 뻗어 단테의 머리를 감쌌다.
“팀장님, 왜, 왜 그러세요.”
“하…… 진짜 어이도 없고, 너무 쪽팔리긴 한데.”
단테가 핸들에 머리를 기댄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아까 너한테 한 말 다 취소야. 잊어버려.”
“예……?”
“라파엘 헤인스워즈. ……너.”
단테가 입술을 물고 있다가 손끝으로 그의 얼굴을 찌를 듯 가리켰다. 단테의 얼굴에 조금 전 라파엘 못지않게 열이 확 올랐다.
“너.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안기지 마.”
“예에?”
라파엘이 큰소리로 되물었다.
“제가 언제 안겼습니까? 세상에 절 안을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진 않은데…….”
“아까 앤지한테 안겨 있었잖아.”
“제가요? 아니, 아……. 그거 제가 발이 걸려서 잡아주신 겁니다. 아주 잠깐…….”
“뭐가 어쨌든. 어디 애인 두고 다른 사람이랑 바짝 붙어 있어? 어?”
“…….”
라파엘의 눈동자가 끔뻑였다.
“팀장님…….”
이어 분홍색 입술이 씰룩였다. 눈은 조금 젖은 것 같은데, 입술은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르게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그리고 한마디를 꺼냈다.
“지금 질투…… 하세요?”
단테가 입술을 꾹 물었다가 터뜨리듯 대답했다.
“어, 질투해.”
“저랑 안젤라 선배를요?”
“어쭈. 이제 정답게 이름도 부르네. 한다, 해.”
“아니……. 저희를 왜요? 안젤… 해리스 선배나 저나 서로 전혀 관심도 없는 거 아시잖습니까.”
“그래, 내가 너한테 느끼던 심정이 딱 그거였는데. 아까까지만 해도 진짜 이해 안 갔어. 그런데…….”
붉어진 얼굴에는 조금 전까지 라파엘이 서운하게 여겼던 어른스러움이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
“아무튼, 다른 사람들이랑 취할 때까지 술 마시지 말고, 붙어 있지도 마.”
“…….”
“……너도, 이제 하고 싶은 만큼 질투하든가. 아니, 같이 해.”
라파엘은 둥그렇게 뜬 눈으로 낯선 애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잔뜩 올리고 팔짱을 꼈다.
“솔직히 질투할 일은 제가 훨씬 더 많습니다. 팀장님은 너무 인기가 많으시니까!”
“내가 뭐가 인기가 많아? 거울을 봐. 네가 훨씬 더 많겠지. 본격적으로 네 주변 살피기 시작하면 할 말은 내가 많을걸?”
“와, 진짜, 와…….”
“와 뭐?”
“그러면 저 이제 하나도 안 참습니다!”
“어. 어디 다 말해 봐.”
라파엘이 주먹을 불끈 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팀장님 상관은 왜 그렇게 자꾸 퇴근 후에도 연락합니까? 샌드위치 가게 점원은 왜 팀장님 볼 때마다 자꾸 멋있다고 합니까? 유치원 등원 시간은 왜 팀장님 출근 시간이랑 겹쳐서 애들한테 눈웃음 지으며 인사해주시고, 팀장님 동기분들은 왜 맨날 어깨동무며 등 두드립니까? 그거 스킨십입니다! 그리고 사령부 옆자리, 앞자리 분과는 뭘 그렇게 친해지셔서 매일 식사 같이하시고, 또, 그때 아무리 제가 갇혀 있었어도 왜 누나랑 단둘이 만납니까. 국방TV 조회수며 댓글은 왜 매일 올라가고, 팀장님 팬 페이지는 왜 거기까지 와서 홍보를 하고 있습니까!”
우다다다 쏟아진 말을 듣고 단테는 눈을 끔뻑였다. 거의 어머니와 동생들을 뺀 단테의 주변 사람 모두가 소환됐다. 그리고 마지막에 뭐라고……?
“패, 팬, 뭐……?”
“제가 진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팀장님 테러 사건 이후에 팬 페이지도 생겼습니다!”
라파엘이 이것만큼은 정말 분해 죽겠는지 시트 아래에서 발을 쾅쾅 굴렀다.
“그딴 게 왜 생겨? 아니, 그런데 넌 그걸 어떻게 알아? ……설마 가입했냐?”
“당연합니다! 게시판지기입니다! 이상한 글 올라오면 바로바로 삭제합니다!”
“야! 허어…. 너…….”
“저 진짜 질투해도 되죠? 팀장님이 이제 질투해도 된다고 하셨으니, 운영자 자리 얻어내고 사이트 폭파시킬 겁니다!”
“마, 마음대로 해!”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던 단테는 황당하게 소리쳤다. 두 사람이 서로 한마디씩 지른 소리가 차고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폭파시킬 겁니다…! 마음대로 해…! 폭파시킬 겁니다…! 마음대로 해…! 지나가던 이웃이 이 소리를 들었다간 테러범들이 여기 숨어 있다며 당장 신고를 했을 것이다.
있는 말 없는 말 다 꺼낸 두 사람은 눈을 마주한 채 숨을 몰아쉬었다. 허, 허…. 하……. 황당한 소리를 내는 단테의 뺨이 떨렸다. 기가 차면서도 웃긴 상황이기도 했다.
“풉.”
결국 단테가 먼저 웃음을 터뜨렸고, 라파엘도 입가를 가리며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한바탕 크흡…, 흡, 하고 터져버린 웃음이 지나가고, 라파엘이 안전벨트를 풀었다. 먼저 내리는가 싶더니 단테의 어깨에 머리를 폭 기댔다. 흘끔 내려다보니 그의 뺨이 한껏 위로 올라가 있었다.
“이제 와서 애교부리지 마.”
“저는 진짜로 팀장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라파엘은 단테의 팔을 끌어안으며 머리를 비볐다.
“팀장님 질투 기분 좋아해서 죄송해요. 그런데 정말로 갑자기… 아까까지 속상했던 거 다 없어졌습니다.”
라파엘이 고개를 들자 복슬복슬한 머리카락이 뺨을 스쳤다.
“……나도 평생 내가 이런 거 안 할 줄 알았어. 너랑 연애하며 별걸 다 해 본다.”
“별거 앞으로 더 많이 하셔도 됩니다.”
단테 역시 조금 전 욱신 하고 솟구쳤던 마음이 전부 녹아내렸다. 저도 모르게 위로 올라간 입술 사이로 안도의 한숨이 길게 새 나왔다.
“표현이 부족한 애인이라 미안해.”
단테가 나직이 말을 꺼내며 라파엘의 어깨를 감쌌다.
“너한테 내가 다 처음인 거 알아. 그걸 네가 불안해하는 것도 알면서, 내 방식대로만 했어.”
“…….”
“내가 너무 속상하게 만들었지.”
라파엘이 입술을 달싹였다. 예쁜 얼굴 위에서 오늘 있었던 서러움과, 단테의 사과를 듣고 울렁거리는 마음이 티스푼으로 젓듯 뒤섞였다.
“……서운했습니다…….”
작은 토로와 함께 단테의 팔에 매달리듯 품으로 깊이 당겼다.
“팀장님은 늘 침착하고 어른스러우셔서, 저만 이렇게 초조하고… 저만 이렇게 많이 좋아하는 건가 싶었습니다.”
단테가 어깨에 얹어진 머리카락을 익숙하게 쓰다듬었다.
“날 얼마나 어른으로 보는 건진 모르겠는데, 네 생각보다 나도 너와 처음인 게 많아. 군 관계자와는 만나지 않겠다는 원칙을 깬 것도, 많은 사람들 앞에 애인이라고 소개한 것도, 집을 얻어 함께 생활한 것도.”
말 사이 미세한 간격이 떨어졌다.
“진지하게 미래를 생각한 것도 모두 다. 나도 이렇게 깊게 사귀는 사람 앞에서 늘 침착할 순 없어.”
가만히 경청하던 라파엘이 마지막 말을 듣고 눈을 들어 단테를 보았다.
“팀장님, 방금 한 말…….”
“음? 늘 침착할 순 없단 거?”
“아뇨. 그거 말고…. 저, 저랑 진지하게 미래를 생각하십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나 때문에 가진 걸 다 버렸던 애인 외의 선택지가 세상에 어디 있어. 그래서 내가 너 만약 취직 못 하더라도 먹여 살리겠다고 몇 번 말했잖아.”
“아…. 그게 그런…, 의미……, 아…….”
라파엘이 들어 올렸던 고개를 도로 조금 내렸다. 손등으로 얼굴을 가리기까지 했지만, 발긋한 귓가에서 기쁜 기색이 그대로 드러났다.
감정 일렁임이 많고, 그걸 아낌없이 표현하고. 또 사랑을 쏟은 만큼 돌려받기를 바라는 애인을 위해 단테는 익숙하지 않은 말을 조금 더 꺼냈다.
“나도 너 많이 좋아하고…. 결혼 얘기는 그동안 쑥스러워서 회피한 부분도 있는데, 당연히 내가 결혼을 한다면 상대는 너야.”
그 말이 끝나고 딱 30초 뒤, 단테는 울먹이며 다가온 얼굴의 습격을 받았다.
“단테에……!”
라파엘의 상체가 중앙을 완전히 넘어 품으로 달려들었다. 단테는 두 팔을 벌려 받아주었다.
“가출 강아지. 나 나름대로 열심히 말했는데 불안함은 좀 가셨어?”
“가출 아닙니다…….”
라파엘은 몹시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이, 이렇게 자주 말로 표현해 주시지.”
“이걸 왜 몰라. 바보야.”
“전 바보라서 하나하나 다 말씀해주셔야 압니다.”
이제야 평소 두 사람의 몽글몽글한 분위기로 돌아왔다. 단테도 라파엘의 어깨 너머로 차의 천장을 보며 웃었다.
“들어가. 집에서 마저 얘기하자. 서운한 거든, 질투든 다.”
“예.”
라파엘이 품에서 떨어지고, 단테는 아직 풀지 않은 벨트를 풀었다.
그 사이 라파엘은 얼른 문을 열고 나가 운전석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얼씨구, 하며 내린 단테의 등 뒤에 찰싹 달라붙었다. 단테는 라파엘의 묵직한 무게를 싣고 어기적어기적 문으로 걸어갔다.
어휴, 무거워. 으이그. 혀 차는 소리를 내긴 했어도, 그가 차고 안에 고인 찬 공기를 전부 막아준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 * *
현관까지 그대로 단테에게 달라붙어 따라온 라파엘은 문이 닫히자마자 냉큼 뺨에 입부터 맞췄다. 쪽, 쪽. 쏟아지는 뽀뽀 세례는 점점 아래쪽으로 내려와 이윽고 입술을 머금었다.
“팀장님…….”
잔망스러운 손이 옷 위로 단테의 몸을 쓰다듬었다. 마주 댄 입술에서 알콜 향이 났다.
단테의 몸이 한 발짝씩 뒤로 밀려나다 벽과 라파엘 사이에 갇혔다. 단테는 바짝 붙은 몸 사이에 팔을 비집어 넣어 라파엘을 밀어냈다.
“안 해.”
“아아, 팀장님. 왜요…….”
라파엘은 단테의 손바닥을 몸으로 꾹 누르며 거리를 도로 좁혔다.
“방금 전까지 투닥거리다 무슨.”
“저는 그 덕분에 솔직한 마음 주고받아서 팀장님이 백배, 천배 더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예쁨받고 싶습니다…….”
“읏.”
단테의 입술이 다시 뜨겁게 덮였다. 라파엘을 밀어내던 손은 어느새 붙잡혀 벽에 눌렸다. 아주 가까이에서 마주한 눈동자가 단테를 담은 채로 사르르 휘어졌다. 단테는 결국 입을 더 열어 라파엘을 허락하고 입술을 뒤섞었다.
키스를 마친 라파엘이 두 팔로 단테를 끌어안았다. 단테의 팔까지 한데 모아 매달리듯 힘을 꽉 주는 바람에 숨통이 조였다.
“팀장님, 좋아해요…….”
킁킁 단테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코끝이 겉옷과 셔츠 사이를 파고들었다.
“저 이제 질투 조금만 하겠습니다. 대신 제가 제일 좋다고 자주 말씀해 주십시오.”
목덜미에 따끈한 뺨이 꾹 눌렸다. 단테는 안긴 채 팔꿈치만 굽혀 라파엘의 허리를 토닥였다.
“정 네가 마음에 걸리면, 미하엘에겐 다음에 만나 알아듣게 얘기할게.”
“아닙니다. 걔는 그냥 콩알만 한 어린애고, 저는,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할 미래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공식 애인인 거잖아요.”
“…….”
“꼬마애 달래주신 것뿐 아닙니까. 저도 이제 이해합니다.”
……그래, 그런 걸로 치자…….
라파엘이 단테의 겉옷을 끌어 내렸다. 그는 빙긋 미소와 함께 단테의 코트를 바닥에 내려놓고 자신의 옷도 벗어 내려놓았다. 검은색 코트와 연한 캐러멜색 코트가 포개어졌다.
동시에 라파엘이 입술을 덮으며 단테의 셔츠 단추를 쥐었다. 단테도 밀어내기를 포기하고 라파엘을 끌어안아 널찍한 등의 굴곡을 쓰다듬었다. 귓가에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까까진 집에도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시무룩하다가, 지금은 천장이라도 뚫을 듯 신이 나 있다. 번쩍 들린 꼬리처럼 다른 무언가가 뜨겁게 위로 올라와 있기도 했다.
조급하게 단테의 옷을 풀던 라파엘은 결국 단추 하나를 뜯어먹어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음.”
그는 아주 잠깐, 찰나의 순간만큼만 눈치를 보고 셔츠를 좌우로 당겨 나머지 단추도 우드득 뜯어버렸다. 세게 튕겨져 나간 단추들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팅, 팅 튀었다.
“야.”
“새로 사드리겠습니다.”
“너 백수잖아.”
“백수는 아니……. 흠, 퇴, 퇴직금으로요.”
단테가 어이없어하는 사이 라파엘은 단테의 바지 허리 부분을 비집고 안으로 손을 넣었다. 발칙하게 속옷 안까지 침입한 손이 엉덩이를 쥐었다. 피부에 닿은 손바닥이 뜨거웠다.
라파엘이 무릎으로 단테의 다리 사이를 벌렸다. 그러면서 허벅지가 중심을 꾹 눌렀다.
“흐.”
벽에 닿은 발꿈치가 위로 떠올랐다. 성기를 자극받은 단테의 허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그는 한 팔을 라파엘의 어깨에 둘러 몸을 지탱했다. 하아…. 내뱉는 숨에 열기가 고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왜 이렇게 거칠어…. 너 대신 수줍어지게.”
“저도 이제 팀장님이 어떻게 해야 좋아하시는지 잘 압니다.”
“오…….”
속옷 안으로 들어온 손이 꼬리뼈를 지나 골 사이를 벌리며 내려왔다. 체온보다 뜨거운 손인데도 살짝 소름이 돋았다. 마른 입구를 문지르던 손끝이 뻑뻑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섹스할 때는 조금.”
“읏.”
“막무가내로 굴면, 하아. 초조한 얼굴로, 까분다고 웃으시면서, 더 느끼시잖습니까.”
“……까분다.”
라파엘이 쿡쿡 웃으며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는 한 손으로 지갑의 틈을 벌리고 이로 콘돔을 물어 꺼냈다. 잇새에 콘돔을 문 채 고개를 기울인 라파엘이 사르르 미소 지었다.
“씌워주세요.”
단테는 라파엘 몰래 숨을 삼켰다. 역시 라파엘이 단테에게 가진 최강의 무기 중 하나는 얼굴이었다. 이 녀석이 이제 별 잔망을 다 부리네…. 하면서도 단테는 하얀 이 사이의 콘돔을 빼내 두 손으로 포장을 뜯었다. 그리고 아직 고스란히 바지 안에 담겨 있던 성기를 꺼냈다.
뜨겁게 부푼 것이 손 안에서 두근거렸다. 단테는 손에 든 콘돔을 그 위에 입혀주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두꺼운 기둥은 또 크기를 더했다. 라파엘은 포장 안에 남은 젤로 손을 적셔 다시 엉덩이로 가져갔다.
“하아…….”
긴 손가락은 입구를 적시고, 죄어져 있던 안을 넓혔다.
“라파엘……, 으읏.”
동거를 시작하며 같은 침대를 쓰다 보니 주말이 아니더라도 불이 붙을 때가 가끔… 아니, 매 순간 있었다. 그중 반 정도는 참지 못하고 결국 삽입까지 갔다. 확연히 늘어난 성교 횟수에 걸맞게 단테의 몸도 라파엘을 받아들이는 데 조금 더 유연해졌다.
라파엘의 손목에 밀린 바지가 허벅지에 걸쳐지고, 속옷도 엉덩이 아래로 말려 내려갔다. 등 뒤에서 들리는 젖은 소리와 함께 아래가 점점 벌어졌다. 움틀거리는 내벽이 라파엘의 손을 부드럽게 조였다 풀기를 반복했다.
“흣, 아, 하으……!”
안을 적신 손가락이 빠져나왔다. 평소보다 조금 빠른 타이밍이 조급함을 보여주었다.
“팀장님, 단테.”
라파엘의 입술 안으로 목덜미의 살갗이 빨려 들어갔다. 따끔한 아픔 속에 쾌감이 피어올랐다.
“내 애인.”
소유욕 짙은 목소리가 마치 칭얼거림처럼 들렸다.
“그래, 내 새끼.”
두 하반신이 밀착하며 벽과 단단한 배가 몸을 조였다. 뜨거운 숨이 뱉어지고, 젖은 손이 단테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쥐어 벌렸다.
“여기서 하려고?”
고개를 돌리면 바로 현관문이 보이는 위치였다. 거실, 부엌, 욕실 등에서 몸을 섞어본 적은 있어도 여기는 좀… 그렇지 않나. 하지만 라파엘은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아 보였다. 허겁지겁 단테의 몸을 입에 담으며 아래로는 두 허벅지가 파고드는 만큼 단테의 다리가 벌어졌다.
“하아, 내 새끼, 많이 급해?”
“예…….”
단테의 허리를 끌어안은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덜미에 위아래로 깜빡이는 속눈썹이 스쳤다.
“팀장님, 저, 이렇게…….”
“어쭈.”
라파엘이 단테의 오른쪽 무릎 아래를 슬그머니 받쳐 올렸다. 단테의 한쪽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벌어진 비부 사이로 성기가 문질러졌다. 아직 주름져 있는 입구가 익숙한 쾌감의 전조를 감지하고 움찔거렸다. 아래를 내려다본 단테가 하, 하고 웃었다.
“너 이만큼 발기했으면, 흐, 엎드려서도 뻑뻑하게, 들어가는 거 알면서…….”
그러나 한차례 잔뜩 애무를 받은 단테의 호흡도 점점 짙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안으로 귀두가 반 정도 파고들었다. 오금이 저리는 감각과 함께 아래가 벌어졌다.
“아……, 흣.”
선 채로 다리를 벌린 자세 탓에 평소보다 안쪽 살갗이 더 드러난 것 같았다. 자세가 불안정해지자 단테는 라파엘의 어깨에 매달렸다. 배 속은 침입자를 밀어내려 하는 한편으로 생소한 자세에 놀라 입구를 꽉 조이기도 했다.
라파엘이 허리를 뒤로 물렸다가 세게 단테의 몸에 부딪혔다. 틈새를 열며 두꺼운 귀두가 안으로 완전히 묻혔다.
“아, 천천히……. 나, 자세가. 흐…….”
벽에 기댄 단테의 등이 바짝 긴장했다.
한쪽 발끝으로 겨우 선 단테는 라파엘이 밀어붙일 때마다 중심을 잃고 라파엘에게 무게를 완전히 기댔다. 라파엘이 허리를 세게 쳐올리면 목에 둘러진 단테의 두 팔에 힘이 꽉 들어갔다.
“안이, 읏, 오늘따라 더, 움직, 입니다. 흐.”
“오늘 강아지가 너무 격해서, 윽, 놀랐나 보다. 아…….”
쿵, 하고 벽이 울릴 때마다 꽉 조여진 안쪽이 점점 비집어 열렸다. 성기가 진입할수록 두 사람의 살갗이 더 세게 맞부딪쳤다. 단테의 머리카락이 나풀거릴 정도로 라파엘이 뱉는 숨이 거칠어졌다. 그에 따라 단테의 몸도 더 세게 흔들렸다. 라파엘이 단테의 등을 단단히 받쳤다.
“저한테 기대세요. 팀장님.”
“잠깐, 아!”
라파엘은 다시 몸을 바로 세울 틈을 주지 않고 허리를 밀어붙였다.
“하아, 아, 아, 거기…….”
조여진 안을 기어코 묵직하게 파고드는 성기를 느끼며 단테는 눈을 꽉 감았다.
라파엘이 단테의 안으로 깊숙이 진입했다. 단테의 몸이 또 한 번 흔들렸다. 라파엘의 허벅지에 감겨 있던 한쪽 다리가 엉덩이에서 어느새 허리까지 올라왔다. 단테의 다리도 그만큼 더 벌어졌다. 그의 눈에도 발갛게 부어 주름을 팽팽히 벌린 접합부가 보일 만큼.
거친 숨을 내쉬는 입술이 맞붙었다. 술 향이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아, 맞다. 얘 취했었지. 어쩐지 흥분하는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다. 행동에서도 묘하게 쭈뼛거림이 없었고.
물론 신음 속에 ‘내 애인, 내 단테.’ 하는 간지러운 목소리가 많은 걸 보니 질투도 그에게 불을 붙이는 데 한몫을 했을 것이다. 하여간 귀엽……, 단테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단테, 저 꽉, 잡으세요.”
“……아!”
하강 훈련에서나 느꼈던 부유감과 함께 감고 있던 단테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의 어깨가 어떤 위기감으로 오싹하게 섰다.
“라파엘!”
라파엘이 간신히 바닥을 딛고 있던 다리의 무릎 아래를 받쳐 올렸다. 단테의 두 발이 모두 바닥에서 떨어졌다. 그 대신 무릎 아래를 지난 팔이 그의 등허리를 받쳤다. 단테는 벽에 어깨를 기댄 채 라파엘에게 들어 올려졌다.
“잠까, 이건 아니, 아, 아……. 흐으읏!”
성기가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 단테가 번쩍 안기기 직전 허리를 뒤틀었기 때문이었다. 라파엘은 신음소리로 그의 안에서 나온 게 언짢다는 티를 냈다. 성기 끝이 벌름거리는 입구를 다시 급히 찾았다.
“아윽!”
라파엘이 허리를 받친 손에 조금 힘을 풀며 성기를 쳐올리자, 내벽을 거칠게 긁으며 다시 배 속 깊이 성기가 처박혔다. 아, 아…. 단테가 라파엘의 귓가에 충격과 놀람을 갈무리하지 못한 소리를 내놓았다. 발이 닿지 않는 공중에서 불안하게 흔들리자 두 다리가 반사적으로 라파엘의 허리를 꽉 감았다.
“하아, 단테, 지금, 너무 좋아요. 온몸이 단테로 둘러싸여 있는 것 같습니다.”
“야, 이……. 하아.”
단테는 겨우 정신을 다잡았다. 성기를 꽂은 채 매달리듯 안겨 있는 체위의 부끄러움이 큰 몫을 했다. 내 새끼 튼튼하기도 하지. 애써 여유로운 척 꺼낸 생각과 달리 얼굴은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자세 때문에 벌어진 엉덩이 근육이 떨렸다.
“라피, 나, 아, 이, 자세는, 좀 그런데.”
그가 라파엘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잠깐만 멈추고, 흐, 침실로 가자. 착하지.”
라파엘은 대답 대신 입술을 조금 비죽였다.
“애 취급…….”
“애 취급이 아니라, 늙은 팀장님 허리 나갈 것 같아서 그런다. 너도, 무겁잖아.”
“하나도 안 무겁습니다.”
이번엔 입술과 더불어 눈썹도 같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단테는.”
“아윽!”
“침대에서는, 절 이렇게, 안 안아주실 거잖아요.”
“흔들지, 마. 라피, 아……!”
라파엘이 단테를 안은 팔을 올려 엉덩이에서 성기를 뽑았다가 다시 내리찍듯 진입했다. 단테는 할 수 있는 행동이 팔다리로 그를 꽉 조이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자 라파엘이 어깨를 덜컹 떨며 신음했다.
“저 이대로 한 번만… 팀장님께, 꽉 안긴 채로 가고, 싶습니다.”
라파엘은 단테의 손이 느슨해지려 하면 바로 안을 세게 파고들었다. 단테의 아랫배가 숨 막히게 짓눌리며 단단한 두 배 사이에 갇힌 성기도 마찰이 되었다.
“하, 아.”
단테는 라파엘과 몸을 섞을 때면 종종 내가 이렇게 쾌락에 약한 사람이었나 하는 고민을 했다. 그리고 대개 그 고민은 라파엘의 격정적인 동작에 머릿속이 흐려지며 흐지부지되었다.
“라파엘, 흐.”
몸이 낯선 오싹함을 쾌감으로 받아들였다. 배 속이 두터운 성기로 들쑤셔지며 성감이 고조되었던 기억 역시 불러왔다. 단테가 흥분하는 것의 배 이상으로 라파엘은 달아올랐다.
“단테, 아, 깊어. 조, 여요.”
“윽, 흐! 아, 아! 라피……!”
긴장된 자세 때문에 아랫배에 평소보다 배의 힘이 들어간 채로 라파엘을 받았다. 성기가 드나들 때의 마찰이 심했고, 팽팽하게 벌어진 입구가 아렸다. 그만큼 커다란 성기가 드나드는 감각이 배로 더 컸다.
“단테, 더 세게, 잡아주세요. 아, 좋아.”
“흐으, 아!”
뜨거운 신음을 한참 더 주고받았다. 그에게 매달린 단테의 허리도 위아래로 움직였다. 귀두만을 남기고 뽑혔다가 다시 기둥이 안으로 푹 파묻히는 속도가 빨라졌다. 단테는 라파엘과 마주 댄 아랫배가 욱신거린다고 생각했다.
“아, 윽……!”
고개가 뒤로 젖혀졌는데도 라파엘의 두 손은 그의 허리를 단단히 지탱했다.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 팔뚝이며 어깨가 다 단단했다. 라파엘에게 안겨 있는 단테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아!”
한번 허리가 아래로 떨어질 때마다 미추가 음낭을 누를 정도로 삽입이 깊었다.
끝내 라파엘이 먼저 깊이 성기를 묻고 사정했다.
“하아, 단테, 아……!”
여러 차례에 걸쳐 새된 신음을 뱉으며 라파엘은 느리게 허리를 움직였다. 꾹꾹 단테의 성기를 자극하는 동작이었다. 그래서 단테도 완전한 사정은 아니지만 울컥 흰 액체를 쏟을 수 있었다.
“흐, 하아, 하.”
단테는 고개를 푹 숙이고 숨을 골랐다. 이성이 먼저 돌아온 라파엘은 팔로 단테의 등과 엉덩이 아래를 받쳐 자신에게 기대게 했다.
“뭐, 하려고…….”
붙을 듯 꽉 맞닿은 가슴을 통해 서로의 고동이 섞였다.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심장소리가 거셌다.
쪽, 뺨에 입을 맞춘 라파엘은 침실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가 땅에 디딘 발을 움직이자 아직 안에 든 성기가 함께 움직였다.
“야……! 너……!”
단테는 지금만큼은 라파엘의 등에 손끝을 바짝 세운 채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흥분이 애매하게 남기도 했거니와, 아무리 산전수전을 다 겪어본 그라도 뒤에 성기를 박은 채로 들려 옮겨지는 건, 비슷한 경험조차 없었다.
“흐, 하…….”
그새 다시 자극을 받은 성기가 걸음을 따라 안을 드나들었다.
팔꿈치로 침실 불을 켜며 라파엘은 단테의 얼굴을 보았다. 늘 침착한 눈동자가 젖어 있었다.
“팀장님, 지금… 목소리도, 얼굴도 너무 야합니다.”
라파엘과 눈이 마주친 단테가 얼굴에서 애써 흥분한 기색을 숨기며 이를 물었다.
“빨리… 내려놔라……!”
“……으으응.”
라파엘은 단테를 꼬옥 끌어안으며 애교를 부려 봤다.
“내일 오랜만에 애인 말고 중대장 만나게 해 줄까.”
“…….”
“내려.”
“넵.”
라파엘이 조심조심 단테의 허리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여지껏 안에 들어있던 성기가 빠져나가며 단테는 한 번 더 긴 신음을 흘렸다.
“하아…….”
숨을 고르던 단테가 라파엘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봐.”
라파엘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단테는 손을 뻗어 라파엘의 볼을 확 꼬집었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어?”
“잉터넷에서…….”
라파엘이 조금 전 거친 모습은 어딜 가고 헤실헤실 웃었다. 단테도 업무엔 철저하지만 성교에는 모럴이 조금 느슨한 편이라 ‘어디 그런 문란한 자세를!’ 할 생각은 없다만, 영 부끄러운 기억인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잔뜩 속상하던 게 다 풀린 것 같으니 다행이었다. 단테는 넝마가 된 셔츠에서 어깨를 빼냈다. 라파엘도 아직 입고 있던 상의의 단추를 풀었다. 오늘은 토요일이고, 다음 날 역시 휴일이다. 둘 다 한 번으로 끝낼 마음은 없었다.
라파엘이 셔츠를 벗자, 어깨 위로 단테가 매달리며 팔로 꾹꾹 누른 자국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러게 무겁다고 했지.”
“하나도 무겁지 않았습니다. 좋았습니다.”
라파엘은 조금 뿌듯해 보이기도 했다.
“업어 키운 병아리가 이제 팀장님 들어 안아 박기도 하고.”
단테가 수위 있는 도발을 던질 때면 얼굴을 붉히기만 하던 라파엘이 오늘은 단테의 손목을 쥐고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이만하면 잘 컸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고개를 기울이는데… 하. 단테는 할 말을 잃었다. 어린 녀석이 자기도 다 컸다고 구는 발칙함과, 앳된 얼굴에 떠오른 성욕이 주는 묘한 배덕감. 그 두 가지가 뒤섞였다. 이제 병아리가 아니라 아기 닭쯤은 된 걸 인정해야 할 것도 같다.
“팀장님.”
라파엘이 단테의 위를 덮었다. 그리고 몸을 더듬으며 입을 맞췄다. 전부 단테에게 배웠거나 서툴게 공부해 와 단테가 느끼는 방향으로 바꿔나간 동작이었다.
옆으로 뻗은 손이 협탁에서 콘돔을 크게 한 줌 집어와 침대에 내려놓았다. 이건 일반적이진 않은 습관인데, 단테밖에 몸을 섞어본 사람이 없는 라파엘은 이제 이걸 당연한 행위로 인식했다.
다시 이어진 키스가 깊었다. 이제는 제법 입 안 예민한 부분을 자극하고 혀를 얽을 줄 알았다. 그 움직임이 단테의 숨도 조금 가쁘게 했다.
“날이 갈수록 느는 것 같아.”
라파엘의 입술이 수줍게 위로 올라갔다.
“팀장님이 좋아하셨던 곳, 하나도 안 잊고 기억하니까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미소가 보였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저만 아는 겁니다.”
“그래, 맞아.”
단테가 손을 뻗어 라파엘의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넘겼다. 열에 들뜬 표정이 드러났다. 라파엘 헤인스워즈가 다른 이들에겐 결코 보여주지 않는 얼굴이었다.
“너도 마찬가지고.”
* * *
침대에서 다시 시작된 정사는 밤이 깊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몇 번째인지 모를 회차에서, 단테는 겨울 밤하늘에 총총 떠오른 별을 보며 라파엘의 양어깨에 다리를 얹고 있었다. 서로가 남긴 자국으로 빼곡한 몸이 흔들렸다.
라파엘과 단테는 예민해진 몸을 맞비비며 다시 찾아온 절정으로 치달았다. 라파엘은 말없이 어깨를 크게 오르내리며 안을 파고들었고, 두 손으로 이불을 꽉 쥔 단테의 눈에도 쾌감이 만든 눈물이 어렸다.
라파엘의 상체에 닿아있는 허벅지가 세게 붙잡히고 단테의 다리 사이에 라파엘의 골반이 쾅 부딪쳤다. 격한 움직임이 이어진 끝에 배 속 가장 깊은 곳까지 성기가 꽉 들어찬 순간. 단테는 “하… 미친, 또…….” 하고 중얼거리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라파엘은 사정 후에, 짧은 그의 식견으로는 알지 못했던 것을 목격했다. 흥분으로 가늘어졌던 눈을 다시 동그랗게 뜨고 단테를 보자, 그는 새빨개진 얼굴로 다리를 후다닥 내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단테는 그 말을 남기고는 욕실로 도망치듯 달려갔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치대는 라파엘을 피해 새 이불로 몸을 둘둘 감았다.
“팀장님 정말로 안 좋으신 건 아니죠? 제가 너무 무리시켜 드렸습니까?”
“……아니라고.”
단테는 막 씻고 나와 보송보송해진 머리를 푹 숨겼다. 라파엘이 끙끙거리며 단테의 베개로 머리를 넘어와 뒤통수 가까이에 이마를 댔다.
“팀장님……. 알려주시면 다음엔 더 잘하겠습니다.”
“…….”
“제가 뭔가 잘못한 거죠…. 죄송합니다…….”
단테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에 한번 비슷한 일이 있었을 때는 라파엘이 섹스 중 여유가 전혀 없을 때라 눈치를 못 챘던 것 같은데, 오늘은 확실하게 보이고 말았다.
“……이따 연상 애인 뒤 헐도록 쑤셔줬더니 물이 팍 튀겼다고 검색해보든가.”
“아, 알겠습니다.”
“진짜로 하기만 해봐라.”
“예? 어, 어…….”
라파엘이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하아……. 단테는 결국 꽉 쥐고 있던 이불을 손에서 놓아주었다. 반대쪽에서 이불을 당기며 팽팽히 줄다리기를 하던 라파엘이 둘 사이를 가로막은 이불 뭉치를 얼른 치우고 달라붙었다. 단테는 몸을 돌려 그를 보았다.
“라피.”
“예.”
“애교 부려 봐.”
그건 내가 제일 잘하는 거지. 라파엘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그렇게 말했다. 그는 단테의 뺨에 입을 맞추고 어깨를 꼭 안으며 속삭였다.
“사랑해요, 단테.”
“응.”
“너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를 만큼 사랑합니다. 그러니 가끔 한 번씩 어린애처럼 욕심이 튀어나오는 건 봐주세요…….”
“그래. 나도 질투할 거니까 괜찮아.”
“예. 아주 많이 하시고, 제가 팀장님 속상하게 한 날이면 막 때리셔도 됩니다.”
“너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라파엘의 턱 아래가 어르듯 쓰다듬어졌다. 라파엘은 기분 좋게 눈을 접었다. 단테도 따라 미소 지었다.
“우리 다음 주 주말에는 놀러 갈까?”
“어디로 말입니까?”
라파엘이 물었다. 산, 호수, 바다. 그런 여행지에서부터 라파엘이 가고 싶다고 넌지시 말한 전시회나 예쁜 레스토랑들도 좋을 것이다. 날이 많이 추워졌으니 겨울 스포츠를 하러 가는 것도 재미있겠지.
“어디든. 오늘은 중간에 방해받았으니 이번엔 내내 데이트다운 데이트처럼 보내자.”
“예. 좋습니다.”
라파엘은 단테의 뺨과 콧등에 입을 맞추고, 다시 목덜미로 입술을 옮겼다. 군복 아래 딱 아슬아슬하게 걸칠 위치였다. 그 위쪽을 타협했으니 여기서부턴 봐주지 않겠다는 듯했다. 이 정도면 출근을 해서도 행여나 목의 단추나 상의 아랫단이 보이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억울해할 것도 없이, 단테가 매달린 라파엘의 어깨와 등도 여러 자국투성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라파엘은 그 흔적을 좀 기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괜찮다고 도리질 치는 걸 앉혀놓고 연고를 발라줬더니 아쉬운 얼굴이 되었던 걸 보면.
몇 시간을 빨려 발갛게 퉁퉁 부은 가슴이 시트에 스쳐 잠시 인상을 쓴 단테는 라파엘의 코를 집고 살짝 꼬집었다.
“전시회나 식당은 무슨. 너 욕심 채워주려면 무인도에라도 가서 둘만 있어야겠다.”
“아, 섬은 있는데 같이 가주실 겁니까?”
응?
“섬……이 있어?”
“예. 실제로 사람은 안 살고, 가운데 별장이 지어져 있습니다.”
“……어쩌다 그런 걸 가지고 있어?”
“외할아버님 생전에 분배받았습니다. 당시에 저랑 누나 둘 다 미성년자라 저는 섬, 누나는 건물로 주셨습니다. 경영권이나 지분을 받아 봐야 어쩌지 못할 테니까.”
“…….”
진짜 섬이 있는 줄도 모르고 까불었네. 세간에서 로맨틱하게 표현되곤 하는 ‘아무도 없는 섬에 둘이서만 있고 싶어!’ 하는 소리가 라파엘에겐 그닥 허들이 높지 않은 말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이었다니.
“저도 단테와 둘이서만 살고 싶습니다. 평생.”
라파엘은 지금이라도 바로 짐을 쌀 기세였다. 혹시, 이거 내가 역린을 건드린 건 아니겠지…….
어색하게 웃는 단테의 입술을 향해 라파엘이 다가왔다. 그가 쪽, 가볍게 입술을 훔쳤다.
“농담입니다. 저는 애인인 단테만큼, 군인인 팀장님도 좋아합니다. 팀장님이 정의를 지키시는 모습도 좋고, 무공이 합당한 인정을 받고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시는 것도 좋습니다. 팀장님이 빛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도 행복해집니다. 그러니 단둘이서만 있는 건 쉬는 날만으로 참겠습니다.”
“음.”
단테의 표정에 쑥스러움이 깃들었다.
“더 열심히 해야겠네.”
“그래도 조금은 천천히 가 주세요.”
라파엘이 이마를 맞대고, 단테의 허리를 손으로 감쌌다.
“팀장님 옆으로 가려고, 저도 열심히 달리고 있으니까.”
단테는 그 말을 듣고 팔을 뻗어 라파엘의 등을 마주 안을 수밖에 없었다.
“재촉 안 할 테니 천천히 와. 넘어지면 속상해.”
“옆에 서서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그건 안 되겠습니다.”
입술이 다시 포개어졌다. 어느 평범한 주말은 간지러운 굿나잇 키스와 함께 마무리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