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26)

3-5.

그러나 결론적으로 둘이 도란도란 챙겨둔 캐리어를 끌고 나가게 된 건, 그로부터 몇 주가 훌쩍 지나 해가 넘어가서였다.

본래 떠나려고 계획을 세워둔 주말엔 단테가 급작스럽게 당직사령을 서게 됐다. 그 때문에 여행은커녕 서로 얼굴을 보지도 못했다. 새벽에 메시지를 주고받던 라파엘이

[내 애인을 내놔라 나쁜 군대야 T△T]

하며 섧게 울자,

[네 애인은 조국이 데려간다]

[안 돼!!!!!]

그렇게 밤을 새운 다음 날 아침, 라파엘이 사령부 앞으로 마중을 나왔다. 두 사람은 여행지에서 뜨는 해가 아닌 익숙한 도심의 일출을 봤다. 그리고 하얗게 오전의 빛이 들어온 침실에서 함께 곤히 잠들었다.

그렇게 또다시 주중이 찾아왔다. 단테가 출근을 한 동안 라파엘은 서재에서 무언가를 하거나, 나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저녁 준비를 하며 단테를 기다렸다. 그리고 퇴근해 돌아온 단테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두 사람은 소소한 일상 속에 웃으며 지냈다.

다시 새로 돌아온 주말. 추적추적 찬비가 내리는 게 영 놀러 갈 날씨는 아니었다. 둘은 목적지를 성당으로 바꾸고 아이들과 실내에서 신나게 놀아 주었다.

또한 그 날.

“어머니.”

단테는 요안나를 부른 뒤에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라파엘을 가리켰다.

“저 라파엘이랑 만나고 있어요. 지금은 동거 중이고요.”

그리고 이전과는 다르게 라파엘을 소개했다.

“저를 만난 뒤로 꿈이 어린 신부라니까, 준비되면 좋은 소식 들려드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요안나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라파엘이 먼저 ‘팀장니임!’하며 단테에게 달려왔다. 머리가 좀 굵은 아이들은 와, 하며 탄성을 질렀고, 단테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작은 아이들은 놀이를 하는 줄 알고 라파엘과 똑같이 단테에게 달려들었다. 꽤 많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인 채로 단테는 요안나의 다음 말을 들어야 했다.

“어머나. 그랬구나. 어쩐지 헤인스워즈 도지사님이 저번에 뵈었을 때 나를 사부인이라고 부르시더니.”

“……아.”

어쩌면… 이렇게 비장하게 알리지 않아도 몇 년 뒤쯤엔 온 사방에 알려져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내 함께 하고 있으니 여행이 몇 차례 더 미뤄져도 크게 서운하거나 하진 않았다. 단테는 처음엔 라파엘이 많이 아쉬워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기왕 이렇게 된 김에 같이 다른 걸 해보죠!’라며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 안심했다.

그리하여 결국 해가 바뀌고, 연말과 연초를 맞아 여행지에 몰린 관광객도 다 빠지고 난 뒤에서야 현관 옆에 덩그러니 놓인 캐리어가 트렁크에 실릴 수 있게 되었다.

“라피, 너 겉옷 더 챙겨야 하는 거 아니야?”

“저 이거 하나면 괜찮습니다!”

괜찮긴. 저건 안감이 얇은 코트다. 여행 시기가 초겨울에서 한겨울로 밀린 만큼, 미리 챙겨뒀던 것보다 옷차림이 더 따뜻해져야 했다. 단테는 보호자의 마음으로 두꺼운 점퍼를 트렁크 한쪽에 실었다.

가는 길의 운전은 라파엘이 맡았다. 이전에 한 번 가봤던 곳이니 길을 잘 안다고 우겨서였다. 내비게이션을 열심히 흘끔이는 걸 보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다만……. 부쩍 어른스러워진 척을 하고 싶어 하는 걸 알고 있으므로 순순히 조수석에 타주었다.

날짜가 바뀔 때마다 여행 계획은 이리저리 튀곤 했다. 어느 날은 스노우 스포츠, 어느 날은 한적한 시골의 별장 등. 그러다 저번 주에 라파엘이 꼭 가고 싶은 곳이 생겼다며 달려왔다. 하얀 백사장이 펼쳐진 겨울 바다와 그 앞의 호텔이었다. 몹시 상기된 모습과 달리 평범한 여행지였다.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는 단테는 좋다고 대답했고, 여행지가 드디어 확정이 되었다. 이후에 슬쩍 검색을 해 보니 ‘연인을 위한 특별한 장소!’와 같은 수식이 가득 붙어 있는 곳이었다. 러버스 스팟이라나 뭐라나…. 자신이 신경을 쓰지 못하는 이런 부분을 열심히 찾아온 노력이 기특하고 귀여웠다.

“왜 이렇게 신났어.”

운전석에 앉은 라파엘의 어깨가 때때로 들썩였다. 덩치가 커서 조금만 움직여도 동작이 티가 났다.

“그냥……, 좋아서요.”

라파엘의 볼이 동그랗게 솟으며 주변이 붉어졌다. 이제 실없이 히히 웃기까지 했다. 여행은 처음이라지만 한동안 같이 테네시를 오가기도 했고, 동거 후에는 단테가 퇴근한 저녁에라도 짧은 데이트를 즐기곤 했는데 뭐가 그리 좋은 걸까.

라파엘은 여행지로 가는 내내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그 웃음은 자연히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에게도 번졌다.

이른 아침에 제도에서 출발한 자동차는 한적한 고속도로를 달려 늦은 점심 즈음에 도착했다. 차 문을 열고 내리자 불어오는 바람의 냄새도 도시와는 사뭇 달랐다.

라파엘이 찾은 숙소는 로비를 나서면 바로 앞에 프라이빗 비치가 있는 호텔이었다. 한쪽 벽을 덮은 통창 밖으로 바다가 새파랗게 펼쳐졌다.

체크인을 위해 프론트로 곧장 가려는데, 라파엘이 단테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팀장님, 저기서 보는 모래사장이 굉장히 예쁘다고 합니다.”

“응. 그러게. 반짝반짝거린다.”

“제가 체크인하고 있을 테니 둘러보고 오세요. 짐도 여기 두시고요.”

“아니야. 뭐하러. 이따 같이 가면 되지.”

그러나 대답하는 단테의 등은 이미 바다가 보이는 창을 향해 살살 밀려나고 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사전 조, 아니, 이전에 와 본 적 있습니다.”

“흐음…….”

짧은 신음 뒤에 단테는 알겠다며 물러나 주었다. 무슨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어디 많이 까불어 보라는 시선과 함께였다. 라파엘의 입술이 수상하게 움찔거렸다.

그렇게 단테는 프론트와 멀리 떨어진 창 앞에 섰다. 바다 위로 반사된 햇빛이 점점이 길게 이어졌다가 파도가 치며 흩어졌다. 그 자리에 다시 새로운 빛무리가 생겨났다. 애인과 마음 편히 놀러 나온 여행지의 한가로운 풍경. 어딘지 좀 간지럽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는 해변을 향한 고개를 돌려 프론트를 보았다. 라파엘이 아직 직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키를 넘겨받고 창가로 몸을 돌린 라파엘은 단테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걸 알고 코끝을 찡그렸다.

단테는 로비를 가로질러 라파엘에게 다가갔다. 여행 복장에 맞춰 편히 신은 스니커즈가 대리석 바닥을 뚜벅뚜벅 두드렸다. 옷차림은 평범한 일반인처럼 입었지만, 발소리에서 군인 태를 숨기진 못했다.

“다 했어?”

“예. ……팀장님 방금 저희 대화 들으신 건 아니죠?”

“저만큼 떨어져 있었잖아. 어떻게 들어.”

“흠, 입술 모양을 읽으셨다든가.”

“내가 스파이야?”

자연스레 걸음을 옮긴 둘은 때마침 로비 층에 있던 엘리베이터를 잡아탔다.

“팀장님은 특수부대에 오래 계셨잖습니까. 왠지 그런 것도 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건 못해. 차라리 너를 붙잡아서 불게 만드는 게 빠르지.”

“헉……!”

“마침 제 발로 고립된 곳으로 들어왔군.”

무시무시한 악당 같은 대사였다. “아, 안 돼요…!”하며 구석으로 도망친 라파엘에게 단테는 오른손을 뚜둑뚜둑 쥐었다 펴며 다가갔다.

몸을 웅크리고 눈까지 질끈 감은 어린 양에게 무자비한 손이 뻗어졌다. 모양 좋게 올라붙은 한쪽 엉덩이가 청바지와 함께 꽉 쥐어졌다.

“애인 멀리 보내놓고 뭘 그렇게 시시덕거렸어. 어?”

“으으읍……!”

라파엘은 입을 꾹 앙다물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러니 단테가 몇 개월을 봐도 장난기를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었다.

라파엘과 단테를 실은 엘리베이터는 목적지인 29층을 다 가지 못하고 18층에서 멈춰 섰다. 땡,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다행히 한때 특수군 훈련을 받은 두 사람은 문이 열리기 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캐리어 뒤에 정렬해 설 수 있었다.

다시 문이 열리자마자 라파엘이 도망치듯 튀어 나갔다. 그는 먼저 가서 머무를 숙소의 문을 열었다. 29층에 단 두 개뿐인 객실 중 왼쪽에 위치한 1호실이었다.

“들어오세요.”

짙은 초록색 벽지며 붉은빛 도는 가구들이 앤티크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방이었다. 그게 고풍스럽다기보단, 젊은 사람들이 주로 찾는 호텔답게 그들이 좋아할 만한 독특한 연출을 한 느낌이었다.

라파엘은 캐리어를 한쪽에 세워두고 객실 내부를 돌아봤다. 화려한 거실과 달리 침실은 화이트 톤으로 차분히 꾸며져 있었다. 그는 가구와 장식, 벽지의 무늬까지 꼼꼼히 살펴봤다.

만약 단테 혼자였더라면 벽지 색이며 테이블의 무늬가 어떻든 그냥 스쳐 지나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에게 숙소란 욕실, 침대, 조리대. 세 가지만 갖춰지면 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라파엘이 여기저기를 짚으며 설명해주니 그 세 가지 외에 다른 것도 눈에 들어왔다.

“예쁘다.”

“마음에 드십니까?”

“응. 좋아. 그리고 신기해.”

“다행입니다.”

라파엘이 금박이 입혀진 액자 앞에 서서 웃었다. 고급스럽게 꾸며진 방과 라파엘. 제법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너 거기 서 있으니까 왕자님 같다.”

“……칭찬이시죠?”

“당연하지. 나는 너 생긴 걸론 빈말 안 해.”

“…….”

‘성격 8점’을 기억하는 라파엘은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라파엘은 객실 전체를 다 둘러보고 단테에게 쪼르르 돌아왔다. 방은 해가 진 후에도 실컷 볼 수 있으므로 두 사람은 간단히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가 29층까지 다시 올라오는 동안 라파엘의 시선은 옆 객실, 2호실의 문에 가 있었다.

“저기는 왜?”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면서 라파엘이 슬며시 손을 뻗어 단테의 손을 잡았을 때,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첫 번째 일정으로 그들은 식당을 찾아가 해산물이 가득 찬 접시를 비웠다. 야자수나 코코넛이 그려진 셔츠를 입고 들어와야 할 것 같은 식당은 겨울이라 그런지 사람이 적었다.

커다란 갑각류와 나무망치를 처음 본 단테는 잠시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하지만 이내 두꺼운 껍질을 단번에 부수는 그의 든든한 망치질 덕에 라파엘은 끙끙대던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에 비해 몹시 편안한 식사를 했다. 그리고 직원으로부터 예전 사격 게임 옆에 서 있던 아르바이트생과 비슷한 시선을 받았다.

“좀 걷다 들어갈까?”

“예.”

관광보다는 휴양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일정은 많지 않았다. 둘은 일부러 길을 빙 돌아 해변으로 향했다.

바닷소리가 주변을 메웠다. 단테와 라파엘은 파도가 칠한 모래사장의 경계선을 따라 걸었다. 겨울 하늘은 흐릿한 흰색이었고, 주변을 에워싼 공기에서 소금 맛이 났다. 스니커즈 코끝에 모래가 고였다가 발을 들어올리기 무섭게 흩어졌다.

바람을 맞은 코트와 점퍼 자락이 흔들렸다. 단테의 시선이 긴 해안선을 따라 훑고, 평화롭게 들썩이는 파도를 보았다.

“사실 나 바다에 군복 안 입고 오는 거 처음이야.”

SAG는 생존 훈련 및 수중훈련이 매년 필수적으로 배정되어 있다. 단테는 그 덕에 바다는 지겹도록 와 보았다. 그러나 개중에 이렇게 누군가의 손을 잡고 한가롭게 해변을 걸은 적은 없었다.

물론 지금 손을 잡고 있는 사람도 딱 일 년 전에는 단테의 구령에 맞춰 진흙 뻘 위를 구르고 있었다. 눈빛을 보아하니 둘 다 비슷한 추억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때 많이 놀랐습니다. 사석에선 다정하셨던 분이 훈련 들어가니까 순식간에 엄해지셔서요.”

“나도 너 보고 놀랐어. 힘들어 눈물 뚝뚝 흘리면서도 끝끝내 포기하겠다는 말은 안 하고 버텨내서.”

“아…….”

“그게 꽤 예뻐 보였는데.”

라파엘의 손이 단테의 손안에서 꾸물거렸다.

“내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지금과 또 다른 형태가 되더라도 팀장님과 계속 함께 여행을 오고 싶습니다.”

“좋지.”

수줍은 바람에 단테는 시원스러운 승낙을 주었다.

“앞으로도 계속 웃고, 즐겁게 지내고, 여행 다녔으면 좋겠다.”

“……계속 같이 있어 주실 겁니까?”

그는 라파엘을 바라보며 빼내려 해도 뺄 수 없을 만큼 손을 단단히 쥐었다.

“너는 이제 가만히 있어도 돼. 나머지 확신은 내가 줄게.”

“어떻게요?”

“음. 연락 늦지 않고, 퇴근 후 새는 일 없이 집에 들어오고, 주변 사람들에게 네 얘기 많이 해두고.”

맞잡은 손 위의 팔이 사락 스쳤다.

“사랑한다고 자주 표현하고.”

“…….”

“사랑해.”

피부가 흰 라파엘의 코와 귀 끝이 먼저 붉어졌다. 단테는 천천히 나아가는 걸음 속에 생각했다. 숨 가쁘게 달리다가 어딘가에 기대선 기분이라고.

지난봄, 스스로를 꾹 눌러내며 사는 게 익숙한 그의 곁에 라파엘이 다가왔다. 그는 대뜸 꽃다발을 내밀거나, 단테의 손을 붙잡고 주저앉거나, 좋아한다고 엉엉 울면서 쫓아와 단테의 발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내내 달리느라 보지 못했던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라파엘이 단테의 손을 마주 세게 잡았다. 그리고 자리에 멈춰 섰다.

“단테,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겨울의 짧은 해가 넘어가는 모래사장 위에 멈춰선 라파엘의 표정이 상당히 비장했다.

“너무 놀라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무슨 큰 사고 친 거 아니지?”

“아니, 절 뭘로 보시고…….”

라파엘이 순한 강아지로 위장할 수 있는 시절은 이미 지났다. 데릭슨을 두들겨 패고, 군대를 때려치우며 집안을 나온 대형 사고 이력 덕분이었다. 단테는 이제 그가 몸을 말고 눈을 끔뻑이다가도 우당탕 뛰쳐나갈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라파엘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단테의 눈은 몹시 가늘었다. 라파엘이 억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붕붕 저었다.

“일단 들어나 보자.”

“정말로 사고 아닙니다. ……실은 여행지에서 꼭 말씀드리고 싶던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계속 준비하던 일이 저번 주에 끝났습니다.”

준비하던 일? 단테가 고개를 기울였다.

“저도 다음 달부터 출퇴근하며 일합니다.”

“아 정말? 취직했어?”

뭘 열심히 하는 것 같긴 했다만 이렇게 빨리 성과가 나올 줄은 몰랐다. 라파엘이 우물쭈물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활짝 갠 단테가 라파엘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요새 취업 힘들다는데 대단하다. 어유, 장해. 내 새끼.”

라파엘은 말없이 단테를 꼬옥 끌어안고 이마에 입술을 댔다. 포근히 안긴 단테의 입가에서 흰 김이 새어 나왔다. 머리를 기댄 어깨와 품이 전보다 넓게 느껴졌다. 대견하면서도 내심 씁쓸한 감상이 찾아왔다.

“천천히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서 그건 좀 아쉽지만.”

“제가 어떤 직업을 갖더라도 최우선순위는 팀장님 곁에 있는 겁니다.”

입술이 슬며시 마주 닿았다. 사람이 많은 곳이라 깊은 입맞춤까지 하지는 못했지만, 찬바람이 부는 가운데서 전해진 상대의 체온은 조금 더 각별했다.

“그래서 혹시 다음 달 5일에 시간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회사에 잠시 와주셨으면 합니다.”

“어…… 퇴근하고 나서면 못 갈 건 없는데, 외부인이 찾아가도 돼? 아, 혹시 신입들끼리 취업 파티라도 하는 거야?”

회사 근처에서 동기들끼리 파티를 하는 자리라면 들러 인사를 하고 나오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교제하는 사람이 있다는 뉘앙스를 미리 풍겨두면 귀찮은 일도 적어질 거고.

하지만 라파엘은 미묘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이다 말했다.

“아뇨, 취업 파티가 아니라…….”

곧 단테의 입을 떡 벌어지게 할 만한 사실이 드러났다.

“취임식입니다.”

* * *

헤인스워즈 가문은 전쟁 시대 이전부터 군부의 상징과도 같았으며, 그로 인한 정치적 입지도 굳건했다. 현대로 거슬러오며 그들은 권력을 바탕으로 막강한 재력을 구축했다.

가문에 속한 사업체 중 하나인 헤인스워즈 재단은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새로운 사업을 기획했다. 초기 지휘자는 현 헤인스워즈 총사령관의 누이동생이었고, 조카 중 하나가 학생 시절부터 꾸준히 흥미를 보이며 운영에 관여했다. 헤인스워즈 이사장도 철저한 약육강식, 이성주의 집안에서 유일하게 연녹색 눈을 빛내며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이에요?’하고 나서는 조카를 귀여워했다.

재단의 기초 토대를 잡고 보다 구체적인 방향을 확정한 건 약 1년 전, 막 장교가 된 조카가 꺼낸 제안 때문이었다. 그는 신체적 재능이 있는 유소년들의 진로를 돕고 싶다고 말했다.

운동신경이 도드라져 선발되더라도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훈련비용은 큰 부담이 된다. 개중에는 적절한 시설과 코치를 구하지 못해 꿈을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라파엘은 그런 이들을 발굴해 투자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 안에 담긴 구체적 내용은 서툴긴 해도 뼈대가 있었다. 헤인스워즈 이사장은 조카가 제법 진지하게 고민을 해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안정적인 장학금을 위해 스포츠 구단이 아닌 청소년 학군단을 선택한 어떤 선배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줄곧 고민하며 떠올린 것이었다.

꿈의 계기를 만들어준 바로 그 ‘선배’는 설명을 듣는 내내 입을 닫지 못했다.

“그래서 재단… 이사로 취임한다고?”

“예. 바로 제가 실무를 맡는 건 아니고, 고모님께 몇 년 배운 뒤에 시작할 예정입니다. 저는 일단 대외 홍보용입니다.”

군인 출신의, 젊은 헤인스워즈 직계를 내세운 전략은 물론 몹시 효과적일 것이다. 라파엘의 외모가 지닌 힘을 생각하면 더더욱. 아니, 그렇다 하더라도……!

“너, 너 명문가 도련님이잖아. 상속을 이렇게 해도 돼? 후계자 경쟁은? 고모님 자식들이 뭐라고 안 해? 막 뒤에서 암투가 있고 그런 거 아니야?”

“음, 다른 집안은 그러는 것 같기도 한데.”

라파엘은 친척들을 곰곰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아무 문제 없다는 의미로 눈썹을 으쓱 들었다가 내렸다.

“사촌들은 재단 쪽에는 관심이 없고, 이미 다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들 일만으로도 충분히 바빠서 굳이 저와 경쟁을 할 리는 없습니다. 헤인스워즈가 사업 규모에 비해 이번 세대에 태어난 사람이 많이 부족하긴 합니다.”

어……, 외국어로 된 지령서를 읽은 듯한 단테의 표정을 보고 라파엘이 설명을 덧붙였다.

“전문 경영인을 주로 쓰긴 하지만, 가문에 직계, 방계를 포함해 작위가 몇 개 있어서 경영 세습이 불가피한 부분들도 있습니다. 저도 군이 아닌 길을 선택했으니 앞으로 맡아야 할 분야가 몇 개 더 늘어날 겁니다.”

“…….”

단테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나 전역하고 라파엘 헤인스워즈 이사 경호원 할까.”

“헉, 좋습니다! 까만 슈트 입고 절 지켜주는 팀장님 완전 좋습니다! ……군에 하나 남은 희망마저 빼앗아갔다고 제가 아버지한테 맞아 죽을 수도 있지만……! 괜찮습니다!”

“하하…….”

웃음도, 라파엘을 보는 단테의 시선도 모두 어색했다. 잠시 들뜬 라파엘의 어깨가 도로 푹 내려갔다.

“팀장님… 여, 역시 많이 놀라셨습니까.”

“당연하지! 이걸 듣고 놀라지 말라는 게 말이 돼? 어떻게 이걸 숨겨!”

“말씀드리고 싶다가도, 팀장님이 취준생이라며 귀여워해 주시는 게 너무 좋고…. 쓰다듬도 자주 해주시고 하니까…. 그리고 깜짝 놀라게 해드리고도 싶었습니다.”

라파엘이 끙끙거렸다. 안절부절못한 발끝이 모래사장을 콕콕 파고들었다. 얘가 다음 달부터 어느 커다란 회사의 이사라니……. 코앞에서 모든 설명을 듣고도 믿기 힘들었다. 라파엘과 있으면 황당하게 웃을 일이 너무나 많았다.

라파엘은 우물쭈물거리다 자신의 양 볼을 감싸 내밀었다.

“꼬집으시겠습니까?”

라파엘이 무언가 어이없는 짓을 하면 으이그 하며 뺨을 늘이던 걸 말하는 것 같았다. 됐다고 하기엔 약간 괘씸한 마음이 남아, 볼 대신 이마를 딱콩 두드렸다. 이마를 쥔 라파엘은 그래도 안도한 듯 콧등을 들썩였다.

그럼 전에 봤다는 면접도 어쩌면…… 그가 면접 대상자가 아니라 면접관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단테는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 짚었다가 떼어냈다.

“다른 건 잘 모르는 이야기니까 하나만 더 물어볼게.”

“예.”

“이건 네가 정말로 하고 싶어서 결정한 일이야? 떠밀려 결정한 거 아니지?”

“……아닙니다.”

라파엘은 단테의 눈을 보며 대답했다.

“팀장님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태어나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이 생겼습니다.”

오늘 그에게 건넸던 말 중 가장 확신에 찬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 일이 제가 가장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제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다 팀장님 덕분에 있습니다.”

“…….”

“단테와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가기 위해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의 애인은 상상할 수 없는 자리에 올라가서도 그 모습 그대로였다. 조금도 바래지 않은 애정은 이제 막 흙 속을 헤치고 나온 것처럼 반짝거렸다.

어휴. 한숨으로 단테는 남은 놀람을 다 털어버렸고, 라파엘은 배시시 웃었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두 사람은 하늘이 완전히 붉게 물들 무렵 호텔로 돌아왔다. 둘을 실은 엘리베이터가 또다시 두둥실 떠올랐다. 부유감이 꼭 아직 조금은 어안이 벙벙한 단테의 마음을 대신하는 것 같았다.

절반 정도를 올라갈 때까지 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다. 그리고 막 20층을 통과했을 때, 라파엘이 단테를 돌아봤다.

“팀장님.”

“응.”

“저… 이제 하고 싶은 일 해 나갈 거고, 제 나름의 경제 능력도 갖췄습니다.”

칭찬이라도 해 달라는 건가 하고 얼굴을 봤지만, 뭘 바라기보다는 긴장한 표정이었다. 라파엘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저도 이제 어른입니다. 그렇죠?”

“…….”

항상 자신의 시간 속에 들어 있으며, 무제한으로 애정을 쏟아붓는 라파엘에게 단테도 언젠가부터 의지를 했다. 그 마음은 때론 반대로 라파엘이 제게 많이 기대길 바라기도 했다. 아마 그게 지금 슬며시 남은 아쉬움의 정체일 것이다.

“그러게.”

단테는 맞잡은 손을 들어 엄지손가락으로 널찍한 손등을 쓰다듬었다.

“언제 이렇게 다 컸어. 설레고 듬직하게.”

곧 29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스륵 문이 열렸다.

라파엘이 단테의 손을 당겼다. 복도에 깔린 붉은 융단을 밟고 나아간 곳은 두 사람이 조금 전 짐을 두고 나온 객실의… 반대편이었다.

“우리 1호실이잖아.”

라파엘은 단테의 손을 놓고 2호실의 방문에 주머니에서 꺼낸 카드키를 댔다. 황당하게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라파엘.”

이어 낯선 방의 문을 불쑥 열고 들어가는 라파엘을 단테는 황당하게 바라봤다.

“라파엘, 뭐야. 또 무슨 서프라이즈 있으면 나 마음의 준비 할 시간 좀.”

그는 라파엘의 뒤로 반쯤 닫힌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러나 이윽고 현관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하…….”

방 안을 본 그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너 이래서… 여기로 오자고. 하하…….”

“…….”

“내가 못 살아, 진짜.”

불이 꺼진 방은 바닥에 해변의 흰 모래를 뿌린 것 같은 조명으로 반짝였다. 단테가 서 있는 현관부터 시작해 온 사방이 전부 분홍빛 꽃이었다. 언젠가 보았던 커다란 꽃다발의 몇 배는 많은 양이었다. 흠뻑 어지러울 만큼의 꽃향기가 그를 향해 쏟아졌다.

방을 가득 장식한 꽃은 이제 단테에게도 몹시 익숙한 것이었다. 꽃잎이 깔린 길 가운데 선 라파엘은 꽃다발을 들고 바짝 긴장한 채 단테를 돌아봤다.

그리고, 그의 등 뒤 노을이 비친 창에 크게 붙여 놓은 잊을 수 없는 문구.

「디어 캡틴 달링♥」

방 안의 광경은 이것이 무엇을 위해 꾸며진 것인지 모를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로맨스 영화의 클라이막스, 혹은 유치한 사랑극의 최종장에 나올 것 같은 장면이었다.

단테는 반쯤 체념한 얼굴로 꽃잎이 그린 길을 걸어갔다. 그가 다섯 걸음 안까지 가까워지자, 라파엘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마저도 ‘로맨틱’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가장 위에 나올 것 같은 모습이었다.

“단테.”

단테 베일리의 투박한 인생에 설마.

“……응.”

이런 프로포즈를 받는 날이 올 거라곤.

그를 만나기 전까진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단테는 웃음이 떠오른 입가를 가리고 라파엘을 보았다.

“사랑합니다. 당신이 저를 만나고 기대를 품게 된다고 하셨던 그 미래를 약속하고 싶습니다.”

‘네 옆에 있으면 계속 현재 이후의 시간에 대한 기대가 생겨나.’

이전에 단테가 테네시에서 했던 고백의 내용이었다. 라파엘은 그때 우느라 하지 못했던 답을 지금 준비해왔다.

진중한 목소리 뒤로 처음 ‘좋아해요, 팀장님….’ 하며 울먹이던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듯했다. 그 간절함은 지금까지도 한결같았다.

“함께하기 위해 항상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계속 곁에 있게 해주십시오.”

화사한 꽃다발이 단테의 앞으로 다가왔다. 탐스럽게 핀 꽃잎이 꽃다발을 든 사람의 손을 따라 진동했다.

“당신의 가족이 되고 싶습니다.”

고백에 흔히 쓰이는 멘트는, 단테에게 건네지며 의미가 보다 짙어졌다.

손가락 뒤에 가려진 단테의 입술이 더 큰 곡선을 그렸다. 완전히 접힌 눈가 사이 눈동자가 라파엘이 보지 못한 곳에서 일렁였다.

“일어나. 대답은 들어야지.”

라파엘이 천천히 무릎을 펴고 섰다.

미소 지은 입술이 그의 삶에서 가장 로맨틱한 사람에게 답을 주었다. 긴 노을 아래 길어진 그림자가 하나로 포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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