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26)

Epilogue.

휴대폰 너머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대방은 그 자리에 있는 게 영 귀찮은 눈치였지만, 의리를 지켜 해리스 가문의 대표로 자리해 주었다. 그래서 단테도 전화로 걸려온 생색을 얼마든 받아주었다.

“어어, 그럼. 당연하지. 라파엘도 나도 고맙게 생각해.”

―저희 부모님 아주 신나셨어요. 여기서 누구 하나 잡아 오지 않을까 하고. 어휴, 팀장 일 몰아치는 것만 해도 죽겠는데.

“그렇지. 그맘때 진짜 바쁘지.”

안젤라의 말에 온 정성을 다해 동의해 주며, 단테는 한쪽 귀에서 휴대폰을 떼지 않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선배가 팀장 자리 주면서 저한테 일복까지 다 넘긴 거 아닙니까? 역시 기회 났을 때 일반 부대로 튀었어야 했어.

“에이, 그럴 생각도 없으면서 무슨. 2년만 버텨. 그 안에 너도 무조건 진급할 거야.

―맞아… 하……. 이제 와 아까워서 어떻게 옮기겠어요. 그런데 선배는 어디예요?

“아, 나 지금 공항이야.”

모자부터 구두까지 육군 정복을 갖춰 입은 단테는 한 손에 군용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는 안내데스크와 무인예매기를 지나 공항 내부 안내도 앞에 멈춰 섰다.

―네? 지금 공항이라고요?

“응. 출장 갔다가 막 돌아온 길이야. 이틀 동안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죽는 줄 알았다.”

GATE 11. 단테는 찾던 표시를 발견하고 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군화 대신 신은 구두가 바닥을 빠른 걸음으로 박찼다.

―와…. 벌써 외부 일정 보좌하는 거 멋있긴 한데, 하필 날짜가 그렇게 겹쳤어요?

“그러니까 말이야. 나도 하필 오늘이냐고 생각했어.”

―그럼 선배 여기 안 와요? 출장이라니 어쩔 수 없긴 하지만…….

“아니. 갈 거야. 그러려고 출장 기간 내내 빌어서 공항에서 퇴근했어. 시작을 맞춰 가진 못해도 아예 참석 못 하진 않을 거야.”

11번 게이트를 나서자 사전에 조사해둔 대로 플라워 숍이 있었다. 제도와 가장 가까운 공항은 국빈이나 연예인, 스포츠 스타 등의 방문이 잦았고, 그들을 환영하며 건네는 꽃다발 장사로 제법 수익을 내는 가게였다. 단테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게 주인이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단테 베일리 이름으로 예약했습니다.”

주인이 기다렸다는 듯 뒤에 준비된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그 소리는 고스란히 휴대폰 너머로 새어 들어갔다.

―예약? 공항이라더니 이젠 또 어디예요?

“공항에 있는 꽃가게. 빈손으로 갈 순 없잖아.”

―아하…….

그걸 출장 다녀오면서까지 예약해 놓는 정성도 참. 눈에 보이진 않지만 안젤라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단테는 탐스러운 분홍 장미로 가득한 꽃다발을 안고 향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만족한 표정으로 값을 치렀다.

막 가게를 나서려는데, 수화기 너머에서 멀리 안젤라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 찾네요. 지금 시간이면 공항에서 여기까지 3, 40분쯤 걸리려나. 그럼 이따가 봐요.

“응. 수고해. 금방 갈게.”

―네에.

그리고 통화가 종료되었다. 안젤라와 단테의 보직이 각각 바뀐 뒤로 직속상관과 부하 관계 역시 사라졌다. 이후 두 사람의 친분과 단테의 털털한 성격이 어우러져 사석에선 전보다 격 없는 선후배 사이가 되었다.

단테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한 팔엔 꽃다발을 안은 채 택시 승강장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정복은 의전용 복장에 걸맞게 어느 정도 편리함을 제하고 멋과 장식성을 높인 의상이었다. 옷차림만으로도 충분히 눈에 띄는데, 큼지막한 꽃다발까지 든 그는 의도치 않게 시선을 끌었다. 몇 달 전 뉴스를 탄 그의 얼굴을 알아본 목소리도 더러 들렸다.

단테는 택시 승강장에서 순서를 기다리기까지 관심을 조금 더 받아야 했다. 그러다 차 안으로 들어간 뒤에야 벗어날 수 있었다.

“제도 동부 광장으로 가주십시오.”

그가 군모를 벗어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이 든 택시기사는 출발하며 백미러로 흔하지 않은 손님의 행색을 보았다.

“전쟁터에서 무사 생환해 환영받은 사람 같구만. 타지에 오래 있었나?”

“아닙니다. 이건 줄 사람이 있어서 제가 산 겁니다.”

“그럼 생환해 프러포즈하러 가는 거군. 그쪽이 더 멋진데.”

굳이 정정할 건 없는 말이라 단테는 그렇다고 대답하며 웃었다.

제국군에 대한 제국 시민들의 예우는 다른 나라에도 귀감으로 여겨질 정도로 좋았다. 오래전부터 사회 전반적으로 군인에게 호의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는 덕분이었다. 높은 가문에서 세대마다 반드시 한 명씩은 군인을 배출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군 종사자의 유무는 집안의 위상과 명예와 관련되었다.

택시기사는 친절하게 답을 해주는 군인과 훈훈하게 몇 마디를 더 나눴다. 젊은 장교로 보이는 승객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절로 호감과 시선을 잡아끄는 데가 있었다.

두어 개의 화제가 더 지나가고, 택시가 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대화가 마무리되자 단테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겨울날치고 하늘이 맑았고, 걱정한 만큼 날씨도 춥지 않았다. 손에 닿은 꽃다발 포장이 부스럭 소리를 냈다. 꽃다발 위에 얹어진 왼손에서 심플한 남성용 디자인의 반지가 빛났다.

오늘은 라파엘 헤인스워즈의 바로 그 취임식이었다.

[제도 행 비행기 타셨습니까?]

[원래 출장 다녀오신 날은 집에서 따뜻하게 맞아드려야 하는데…….]

[팀장님 보고 싶습니다.]

휴대폰을 열어보니 비행기를 탔을 때부터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안젤라와 통화를 하며 공항 내부를 헤매 꽃다발을 수령하느라 확인이 늦었다. 단테가 메시지를 봤다는 표시가 뜨자마자 전화가 걸려왔다.

♥귀여운 내 새끼♥

라파엘이 몰래 휴대폰을 가져가 꾹꾹 바꿔 놓은 애칭이었다. 조금 전 안젤라가 분명히 행사에 온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바쁘다고 알려줬는데, 이렇게 휴대폰을 붙잡고 있어도 될지 모르겠다.

단테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귀로 가져갔다.

“응, 라피.”

―팀장님! 공항 들어오셨습니까?

“이제 공항에서 출발했어. 택시야.”

―아, 어쩐지 차 소리가 들립니다.

단테는 시간을 확인했다. 역시 그의 일정상 아무리 서둘러도 지각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잘하고 있어? 이제 곧 식 시작하겠네.”

―예. 인사드릴 분들 만나고, 저도 시작하기 전에 잠깐 정비하러 들어왔습니다.

“떨리진 않고?”

―하나도 안 떨립니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씩씩했다. 아무래도 단테만 어린 동생을 스피치 대회에 보낸 심정인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힘내. 최대한 빨리 갈게.”

―서두르지 마시고 천천히, 조심히 오세요.

“빨리 가서 직접 축하해줘야지. 내 새끼 오늘은 얼마나 예쁠지 기대되네. 사진이라도 보내줄 수 있어?”

―아, 사진이요. 예, 보내드리겠습니다.

“고마워. 그럼 이따 봐 라피.”

활기찬 대답을 듣고 통화를 종료했다. 이어 사진 두 장이 도착했다. 한 장은 어색하게 스스로 얼굴을 찍었고, 다른 한 장은 누군가에게 부탁했는지 멀찍이 서 있는 모습이었다.

“긴장 안 된다더니.”

두 번째 사진이 평소보다 어깨가 굳어 있다. 표정도 약간이지만 시무룩해 보이기도 하고.

서둘러 가야겠다…. 고 생각하며 단테는 빠르게 저장 버튼을 눌렀다. 어느 모습인들 예쁘지 않을까 싶지만, 안 그래도 예쁜 걸 꾸며 놓으니 오늘따라 더 눈부시게 빛이 났다.

“꽃다발 받을 사람이랑 연락하나? 표정이 확실히 다르네. 보기 좋구먼.”

그리고 단테는 허허 웃는 택시기사의 웃음소리에 조금 겸연쩍어졌다.

* * *

헤인스워즈 재단의 새로 선발된 비서실장은 젊은 이사가 사용하는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이사님, 실례합니다…. 뭐 하십니까?”

재단의 이사 라파엘은 창틀 위에 촬영 타이머를 맞춘 휴대폰을 올려놓고 뒤로 물러나던 참이었다. 아, 라파엘이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 약혼자가 행사에 늦는 게 아쉽다고 사진을 보내 달라 해서요.”

질문의 대답은 말의 뒤쪽에 들어 있지만, 강세가 들어 있는 건 앞의 ‘약혼자’였다.

이어 라파엘은 찰칵 소리가 들릴 타이밍에 맞춰 카메라로 고개를 돌렸다. 살짝 입술을 올렸지만 어쩐지 슬픔을 속에 감춘 듯한 미소였다. 비서실장의 머릿속에도 주인과 생이별한 강아지의 형상이 떠오를 정도로 처연함이 느껴졌다.

라파엘은 책상으로 돌아가 방금 찍은 사진을 확인했다.

“흠…….”

그리고 비서실장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다.

“어떻습니까?”

“이사님치고 작아 보이게 나온 거 아닙니까? 제가 아래쪽에서 길어 보이게 찍어드릴까요?”

“예? 왜요?”

그야… 다들 애인에겐 듬직하게 보이고 싶지 않나? 하지만 라파엘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좀 작고, 가엾고, 지켜주고 싶게 나와야 합니다.”

아……, 지켜주고 싶게……. 라파엘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비서실장이 고개를 떨떠름하게 끄덕였다. 라파엘은 결국 그 사진을 약혼자에게 보냈다.

비서실장은 라파엘의 매무새를 정비하기 위해 앞에 섰다. 얼굴에서 앳된 흔적을 최대한 지우고자 머리를 뒤로 전부 넘겼더니 섬세한 얼굴이 훨씬 더 도드라졌다. 그리고 얼굴 아래는 전혀 앳되지 않은 단단하고 길쭉한 신체가 있었다.

이런 이사를 작고, 가엾고,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약혼자가 대체 누굴까. 이전에 약혼자와 동성 커플이자 군인 선후배 관계라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러면 190cm가 넘는 이사가 작게 느껴질 정도로 크고 우락부락한 사람인 건가.

비서실장의 머릿속에 영화에 등장하는 공룡 같은 특전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입구에 ‘사람을 겉모습으로 파악하지 말고 누구든 정중하게 신원 확인을 해라.’ 하고 전해둬야겠다.

때마침 라파엘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의 내용을 눈에 담자마자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는 빠르게 액정을 두드려 답장을 적고 비서실장에게 물었다.

“참, 실장님은 여기 어쩐 일이십니까?”

아. 비서실장도 마찬가지로 짧게 신음하고 전달 사항이 있음을 알렸다.

“우선 에프런 가에서 계속해 재고해 주실 수 없냐는 말을 전해왔습니다만.”

“거절하세요. 전과 똑같이 형식적인 답변으로.”

“예.”

매번 정중하지만 몇 겹의 벽을 쳐 여지조차 주지 않으니 에프런도 아마 미칠 지경일 것이다.

헤인스워즈 재단은 에프런 가와 교류는커녕 그 어떤 접점도 만들지 않았다. 에프런 가의 현 회장이 자존심상 끝내 데릭슨을 완전히 놓진 못한 데 대한 라파엘의 답변이었다.

라파엘은 아직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았다. 가문을 뒤에 업은 만행으로 누군가를 상처 입혔다면, 그 반대도 당연히 각오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끈질기게 연락이 오는 걸 보니 제법 절박해지긴 한 모양인데……. 단테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미리 관련 연락처를 다 차단해 두길 잘했다.

단테는 그가 빛을 발하는 군대라는 조직에 오랫동안 머물 것이다. 그곳 역시 제국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위로 올라갈수록 단순히 모든 일을 노력과 실력으로만 극복할 수는 없어진다. 라파엘의 권력은 단테의 뒤에 살며시 붙어 그만 모르는 날개가 되어줄 것이다.

“또 추가적으로 전달 드릴 사항은.”

비서실장이 자신의 뒤에 선 두 사람을 가리켰다.

“행사 중엔 기본적으로 제가 수행비서로 있지만, 상황에 따라 자리를 비울 수도 있습니다. 그 경우 여기 킴과 포트만이 이사님 곁을 보좌할 겁니다.”

비서실장이 자신과 함께 온 두 사람을 하나씩 소개했다. 킴은 이지적인 이미지의 여비서, 포트만은 서글서글한 느낌의 남비서였다. 라파엘은 둘 앞으로 나서며 싱긋 웃었다.

“반갑습니다. 그리고 입사하자마자 힘든 일 시켜서 미안합니다. 라파엘 헤인스워즈입니다. 오늘 잘 부탁해요.”

앞으로 손을 내밀면서 라파엘은 방금 한 말이 누군가의 말투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애 가장 멋진 상관이 부하를 대할 때의 말투였다. 라파엘은 한때 사수였던 그를 따라 해, 이제 자신이 이끌게 된 사람들에게 말을 건넸다.

“제이드 킴입니다.”

맞잡은 손이 가볍게 흔들리고 놓아졌다. 라파엘의 동작에서 사회초년생의 미숙함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약혼자로부터는 [아이고 내 새끼, 못 본 사이 얼굴이 홀쭉해졌네. 취임식 준비하느라 힘들었나 보다. 오늘 집에 가자마자 이틀 밀린 만큼 예뻐해줄게] 라는 메시지를 받아내고 싶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여유롭고 당당해야 했다.

라파엘은 그 옆의 남비서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가브리엘 포트만입니다.”

“음……?”

그리고 악수하지 않은 왼손을 움찔했다.

“성함이 가브리엘…이시군요.”

“아… 예. 이사님과 같은 천사 이름입니다.”

“하, 하……. 그거 참 우연이네요. 이런 우연이…….”

두 손이 바로 직전보다 뻣뻣하게 떨어졌다.

“이사님, 이제 슬슬 회장으로 나가셔야 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라파엘은 먼저 문밖으로 발을 디뎠다. 그렇게 대여섯 걸음을 가다 휙 뒤를 돌았다.

“여러분.”

이라고 부르면서 시선은 가브리엘 한 사람에게만 가 있었다.

“혹시나 오늘 행사 도중 누군가가 세상에 다시없을 것처럼 멋져 보이거나, 심장이 이유 없이 급격히 뛰거나, 그 사람 몸 주변에 빛이 나는 것처럼 보이는 증상이 있을 경우, 심각한 병이니 즉시 시선을 돌리고 퇴근하십시오.”

“예……?”

“예?”

“꼭 명심하세요. 절대 그 사람을 오래 쳐다봐서는 안 됩니다.”

비서실장과 두 비서 모두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라파엘은 몹시 진심이었다.

아니, 여기도, 여기에도 있다니!

“헤인스워즈 재단은 직원들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아시겠죠? 포트만 씨.”

“……아, 예. 알겠습니다.”

라파엘은 콧김을 흥 뿜으며 다시 앞으로 몸을 돌렸다. 뒷모습은 너무나 태연하게 걷고 있어 아무도 몰랐지만, 입술이 약간 앞으로 비죽 튀어나왔다.

* * *

“와…….”

단테는 광장 옆 대로변에 위풍당당 자리한 건물 앞에서 입을 떡 벌렸다. 7층짜리 건물의 유리벽이 파란 하늘을 찬란하게 반사했다.

행사가 있음을 알리듯 건물 앞에는 짧은 레드카펫이 깔려 있고, 양옆으로 경호원, 비서진이 서 있었다. 단테는 투박한 서류 가방 안에서 그것과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가죽 편지 봉투를 꺼냈다. 오늘 있을 행사의 외빈 초대장이었다.

초대장을 확인시켜주자 비서 한 명이 정중하게 안쪽을 가리켰다. 연회장이 있는 7층까진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했다. 잠시 이런 곳에서 테러가 발생했을 시의 행동강령을 떠올리다가 머릿속을 휙휙 털었다. 이게 다 직업병 때문이었다.

이미 행사가 시작을 해, 그는 뒤쪽에 위치한 문으로 안내를 받았다.

연회장 내부는 가장 앞의 단상에 켜진 조명만을 남기고 어둑하게 소등되어 있었다. 한 손엔 가방, 한 손엔 커다란 꽃다발을 든 짐 많은 초대객은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연회장의 맨 뒤쪽 벽에 기대어 섰다.

연회장 가장 앞엔 단상이 있고, 그 아래로 참관객들을 위한 원형 테이블이 간격을 맞춰 놓여 있었다. 커다란 글씨로 「헤인스워즈 재단 창립식 및 임원 취임식」이라 쓰여 있었고, 엄숙한 행사명과 달리 분위기는 발랄한 편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라파엘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가장 앞의 테이블에 앉아 있기도 했지만, 어디에 있든 그의 모습을 단테가 바로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사진보다 더 어른스럽게 보이는 라파엘의 왼손엔 단테와 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선배.”

단테의 어깨가 툭 두드려졌다. 안젤라가 그의 옆자리에 섰다.

“좀 늦었네요. 하긴 막힐 시간이지.”

“아, 앤지. 응? 뭐야, 정장이네.”

“왜요?”

“너도 정복 입고 올 줄 알았지. 동지 생겼다고 좋아했단 말이야. 이거 혼자 입기는 좀 쪽팔리잖아.”

“총사령관 각하며 다른 장성급 분들 오실 거 알면서 군대 옷 입는 바보가 어디 있어요. 종일 경례하게?”

“……아.”

“선배는 예외겠지만요.”

장군의 사위시니까. 안젤라가 놀림을 담아 씨익 웃었다.

“사위는 계급 없냐. 나 아직도 본부 작전과에선 말단 막내야.”

“선배랑 막내라는 말 진짜 안 어울려요. 우리 팀원들도 다 그러더라.”

“숨겨왔던 갖은 애교 잘 부리며 귀여움받고 있다고 전해줘.”

“선배 얘긴 아닌 것 같은데…….”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식순이 한 번 지나갔다. 이사장의 축사가 있겠다는 사회자의 안내가 들리고, 라파엘과 같은 테이블에 있던 사람이 일어나 단상 위로 올라갔다. 참관객들을 따라 안젤라와 단테도 박수를 쳤다.

“헤인스워즈 재단 이사장 셀린 헤인스워즈입니다.”

한 자 한 자 힘을 주지 않아도 내용이 귀에 꽂혔다. 라파엘의 머리와 비슷한 색의 금발, 연녹색 눈동자까지. 핏줄인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저 사람이 라파엘이 종종 말했던 고모님인가보다.

연설이 이어지던 중 단테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단테, 어디쯤 오세요?]

라파엘이 보낸 메시지였다. 단테는 고개를 들어 앞쪽 테이블을 보았다. 라파엘이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제 거의 마무리 될 것 같습니다. 혹시 아직 근처 못 오셨다면 집으로 바로 가서 쉬고 계세요. 저도 금방 가겠습니다.]

단테는 피식 웃었다. 메시지로는 태연한 척을 하지만, 저기 자판을 치고 있는 옆얼굴에선 시무룩함이 그대로 보였다.

“어이구, 귀엽긴.”

“…….”

보나 마나 뻔해 안젤라는 저만 타격을 입을 ‘누가요?’라는 질문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선배는 쟤가 그렇게 귀여워요?”

“나한텐 일곱 살 연하 애인이니 더 귀엽지.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너도 쟤 수습 때 꽤 예뻐했던 거 알아.”

“팀 막내로선 그렇죠. 나이에 비해 순수한 면이 있는 것도 맞기는 한데.”

대상이 단테가 되면 그 순수함이 지나치게 맹목적으로 변하기도 했다.

“……뭐, 선배가 조련을 잘하기도 했죠.”

“야, 조련이라니까 어감이 좀.”

단테가 어이없이 웃었다.

안젤라는 해리스 집안의 정보망으로 라파엘이 공공연하게 에프런과 척을 진 걸 알았다. 이대로면 조만간 데릭슨이 단테의 앞에 무릎을 꿇고 싹싹 비는 모습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행보였다.

물론 그 모든 일은 내심 통쾌하기도 했다. 안젤라 역시 기수라는 권력 때문에 언짢은 일을 꽤 당한 사람이니까. 또 후배를 나름대로 응원하는 입장에서 그 사실을 단테에게 숨겨줄 의리 정도는 있었다.

앞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취임사를 마친 이사장이 하객들에게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고 내려왔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름을 불린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이름이 나오기도 전부터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단테의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

라파엘이 단상 위로 올라가 빛 아래에 섰다. 낮은 목소리로 꺼낸 인사말이 스피커를 타고 또렷하게 흘러나왔다.

안젤라와 낮게 나누던 대화도 사라지고, 단테는 그의 모습에 집중했다. 몇 년을 함께한 안젤라도 단테의 이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부드럽게 풀어진 눈가에 라파엘 못지않은 맹목적인 감정이 어려 있었다.

“……잘하네.”

단상 앞에 선 라파엘은 힘 있는 목소리로 취임사를 이어 갔다. 사실 저 내용은 단테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집에서 같이 있는 시간에 몇 번이나 연습하고, 어떻게 해야 멋지게 보일까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다 웃기도 했던 것이었다.

지금 라파엘은 그의 기대보다 훨씬 더 멋진 모습이었다.

그는 단단해진 채로 사람들 앞에 서 있었다. 단테는 입술 안으로 벅참을 꾹 눌러냈다. 수없이 외운 문장을 실수하지 않고 이어가는 목소리가 사랑스러웠다. 단테는 길게 이어진 박수에 그 심정을 담았다.

막내 임원인 라파엘의 순서가 마지막이었는지 회장 안에 불이 밝혀졌다. 사회자가 이상으로 준비된 모든 행사를 마무리하겠다고 말했다. 단테는 휴대폰을 열어보았다.

[행사 벌써 끝났습니다 T_T… 아쉽습니다. 단테, 어디예요?]

서운한 표현을 거의 않는 라파엘이 이렇게 말했다는 건 정말로 방금 전의 그 모습을 꽤 보여주고 싶었다는 의미였다. 안젤라가 화면을 흘끔 봤다가 물었다.

“선배 여기 도착했다고 말 안 했어요?”

“어. 우리 요새 서로 서프라이즈 해주는 재미 들렸거든.”

아, 괜히 물어봤어. 또 당했어. 그런 표정을 지은 안젤라에게 웃어 보이며 단테가 벽에 기대어 둔 서류 가방을 챙겼다.

“난 라파엘에게 가볼게. 다음에 보자. 우리 집에도 한번 놀러 오고.”

“알겠어요. 빨리 가 봐요. 나름 오늘의 주인공인데 울리지 말고.”

단테와 안젤라는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단테가 멀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가 안젤라의 옆으로 쑥 다가왔다.

“팀장님.”

“너도 와 있었어?”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올해 안젤라가 새로 사수를 맡은 후배 섀넌이 싱긋 웃었다.

“그런데 왜 진작 아는 척 안 했어? 아, 단테 선배 피하느라?”

“……저분이 저한텐 구름 너머에 있는 분이라고요.”

하긴, 아무리 싹싹하고 붙임성 좋은 성격이어도 신임 소위가 본부의 소령을 마주하는 건 꽤나 마음이 묵직한 일일 것이다. ‘저 선배 그런 사람 아니야.’ 해도 별로 먹히지 않을 기수 차이이기도 했다.

“알겠다. 선배 갔으니 이제 재미있게 놀아.”

안젤라는 벽에서 몸을 떼 회장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 뒤를 후배가 졸졸 쫓았다.

“왜 따라와?”

“팀장님은 왜 혼자 가십니까? 저 돌봐주셔야죠.”

“너 여기 내 후배로 온 게 아니라 너네 집안 대표로 온 거잖아.”

“그래도 팀장님이 사수 아니신 거 아니고, 제가 후배 아닌 것도 아니잖습니까.”

“또 무슨 엉뚱한…….”

“같이 가요, 팀장님.”

처음엔 하도 바짝 얼어붙은 깍듯한 모습이어서 몰랐는데, 섀넌은 라파엘보다 좀 더 맹랑한 구석이 있는 후배였다. 단테는 거기에 대고 ‘앤지 너 옛날엔 더했어’라는 평을 준 적이 있었다.

결국 안젤라는 따라오는 후배를 데리고 걸어갔다.

‘아, 얘를 언제 다 키우지…….’

1년 전 라파엘을 보는 단테의 심정이 딱 지금 같았을 것 같다.

* * *

수많은 시선이 연설자에게 향했다. 그 시선은 단상에서 내려와서도 계속되었다. 대부분이 그를 평가하고, 뜯어먹을 듯 관찰하는 눈빛이었다. 이곳은 군과는 또 다른 형태의 정글이었다. 하지만 그가 처음 사관학교에 발을 디뎠을 때와 지금은 각오가 달랐다. 버티자, 가 아닌, 해내자는 마음이었다.

라파엘은 자신이 보낸 메시지 위의 아쉽다는 글자를 지우개로 지우듯 쓰다듬었다. 하지만 이미 전송된 메시지 속 단어는 지울 수 없었다. 게다가 단테가 이미 확인을 했다.

어른스럽게 꾸며낸 모습은 단테에게 가장 보여주고 싶은 것이었다. 하지만 일부러도 아닌 급작스러운 출장 때문에 늦은 사람에게 부릴 투정은 아니었다. 그가 미안해할 걸 알면서…. 역시 괜히 보냈다.

빠르게 자리를 정리하고 바로 집으로 가야겠다. 그리고 단테를 맞이할 것이다.

단테는 추운 바깥에서 불 켜진 집 안으로 들어올 때 녹아내리듯 부드러운 미소를 짓곤 했다. 그런 그를 꽉 끌어안으면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보고 싶었다는 투정에 대한 답으로 평소보다 많은 표정을 허락해준다.

라파엘은 그 순간마다 자신이 단테의 안에 깊숙이 들어갔음을 실감했다. 그는 벽을 넘어 단테에게 완전히 소속되었다.

지금 출발해도 집을 따뜻하게 데울 시간까지는 무리겠지만, 귀가한 그를 마중 나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라파엘은 마지막으로 인사를 남길 사람들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누군가를 마주했다.

라파엘의 두 팔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입술이 위로 올라갔다.

“……팀장님.”

단테가 부름에 대한 대답 대신 꽃다발을 살짝 흔들었다.

조금 전 가브리엘에게 주의를 줬던 것처럼, 세상에 다시없을 것처럼 멋진 사람이 눈앞에 서 있었다. 심장이 급격히 뛰었으며, 주변에 빛이 났다.

처음 마주했던 날처럼 단테도 그를 보며 마주 웃어주었다. 라파엘의 눈에 다른 건 아무것도 없이 한 사람만이 담겼다.

라파엘은 늘 그랬듯 성큼성큼 단테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이번엔 단테도 그에 못지않은 속도로 다가왔다. 7기수 아래의 얼굴도 모르던 타인, 귀여운 수습, 더 깊은 관계를 나누게 된 후배, 마지막으로 지금. 라파엘의 지난 시간들이 가까워지는 걸음 속에 묻어났다.

“언제 오셨습니까?”

“음 30분쯤 됐나?”

“왔다고 말도 안 해주시고.”

콧등을 들썩이는 라파엘의 앞에 단테가 꽃다발을 내밀었다.

“감명 깊은 취임사였습니다. 헤인스워즈 이사님.”

라파엘이 두 손으로 꽃을 받아들었다. 어느새 두 사람의 연애의 상징이 된 그 꽃이었다.

“……저 연습한 만큼 잘했습니까?”

“아니.”

깜짝 놀라 눈을 든 라파엘을 향해 단테가 씩 미소 지었다.

“내가 본 모습 중에 가장 멋있었어. 연습할 때보다 훨씬 더 잘했어.”

라파엘의 귓가가 붉어졌다. 그는 참지 못하고 팔을 뻗어 단테를 와락 끌어안았다.

“왜 이렇게 로맨틱하십니까…….”

“네가 이렇게 만들었잖아.”

단테가 라파엘에게 안긴 채 익숙하게 허리를 토닥였다.

단테의 정복 때문에 아마 다들 감동의 재회를 한 군인쯤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 덕에 라파엘은 사람들 앞에서 그의 로맨틱한 캡틴을 가득 끌어안고 있을 수 있었다.

열렬한 구애를 뜻하는 꽃이 흐드러졌다. 꽃다발에서 꽃잎 몇 장이 떨어져 내렸다. 단테가 내디딜 걸음에, 그리고 라파엘이 앞으로 나아갈 길에 축복처럼 뿌려졌다.

꾹 눌러 참았지만, 라파엘에게서 결국 자그마한 울먹임이 새어 나왔다. 단테는 푸스스 웃음을 터뜨리며 잘 정돈된 머리 위를 쓰다듬었다.

라파엘은 단테에게 감은 팔을 더 세게 붙잡았다. 단테 역시 그가 불안하지 않을 만큼 강한 힘으로 라파엘을 안아주었다. 라파엘이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전부 함께해줄 단단한 품이었다.

열렬한 구애의 끝에 라파엘은 영원의 약속을 피워냈다.

로맨틱 캡틴 달링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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