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Merry angel Christmas
제도의 중심으로부터 벗어난 동북쪽 지구에는 주택 단지가 형성되어 있다. 시설은 남쪽 지구와 거의 비슷하지만, 집값은 약 8할 정도로 저렴했다.
이유는 가까이에 위치한 육군 제도 본부 때문이었다. 군사시설엔 어쩔 수 없이 훈련장이 포함되어 있고, 종종 긴급히 날아오는 헬기 소리나 총성 등의 소음이 발생했다. 시설이 최대한 산 쪽에 지어져 있다지만 여러 소리가 완전히 차단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달리 말하자면, 군부대의 일과가 끝날 시간에 퇴근해 귀가하며 상대적으로 저렴한 신혼집을 찾는 젊은 부부들에겐 충분히 메리트가 있는 선택이었다. 몇 년 전부터 그런 이들이 모여든 덕분에 나름대로 세련된 주거 도시가 형성되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진 동네는 붉은색과 초록색으로 꾸며지기 시작했다. 해가 지면 울타리에 감아둔 작은 전구에 불이 빛나고, 마당의 나무에도 집집마다 오너먼트를 걸었다.
다른 주민들과는 달리 ‘집값이 저렴해서’보다 ‘특수전사령부가 가까워서’ 이 동네를 선택한 어느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들 중 한 사람은 처음엔 크리스마스에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이 양손 가득 장식 도구들을 사 와 ‘사실 본가에서는 크리스마스를 한 번도 안 챙겨서….’라는 말을 하자, ‘성당에서 16년간 자란 사람의 솜씨를 보여주마.’하며 동참했다.
그리하여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주말, 창문 옆의 커다란 나무 위에 사다리가 놓였다. 그걸 타고 올라간 남자는 꼭대기에 커다란 별을 달았다. 그리고 단단한 팔로 나무줄기를 타고 내려오며 여러 장식물들을 걸었다. 겨울이 찾아와 앙상해진 나무가 꽃이 핀 봄날 못지않게 화사해졌다.
마지막으로 대문에는 루돌프 인형과 리스가 걸렸다. 그 앞에 진짜 나무 썰매를 가져다 놓고 싶다는 과한 의견도 나왔지만, 제안자가 이마에 딱콩 한 대를 얻어맞으며 무산되었다.
화려해진 나무를 본 본 옆집 아이가 담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우리집에도, 하며 졸랐다. 그리하여 남자는 사다리를 들고 가 옆집 나무 꼭대기에도 별을 달았다. 기뻐하는 아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육군 기념품관에서 만든 머그컵 세트도 주었다. 만들어진 곳이 군대인지라 디자인은 좀 투박했지만, 그는 멋진 군인들이 쓰는 물건이라며 몹시 자연스레 동심을 지켰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팀장님은 너무 애들을 좋아합니다.”
“왜, 너도 육군 컵 가져다줘? ‘나는 제국의 힘, 국민의 용사 육군이다’라고 써 있는데.”
“…….”
애인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하던 그는 그것만큼은 싫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동네에 이사 온 지 두어 달쯤 된 두 사람. 종종 군복을 입는 고동색 머리의 남자와 그 옆의 금발 머리 남자는 이제 제법 낯익은 이웃이 되었다. 둘은 함께 보낼 휴일의 일정을 이야기하며 크리스마스가 무르익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 * *
라파엘은 잠의 경계에 빠져 있다가, 오늘이 무슨 날인지 깨닫고 눈을 번쩍 떴다. 오늘은 12월 초부터 고대하며 준비한 크리스마스였다!
어릴 적 산타의 존재를 알고 맞이한 최초의 크리스마스 이후 이렇게 설레며 일어나 본 적은 처음이었다. 다섯 살의 그 날은 머리맡에 선물이 없어 울다가 가족들로부터 산타는 허구의 존재라는 사실을 배워버린 날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산타를 믿지 않아도, 산타보다 더 꿈같은 연인이 함께하는 첫 크리스마스였다. 오늘을 상상하며 그간 얼마나 설렜는지 모른다.
둘은 오늘만큼은 연인에게 모든 시간을 다 쏟기로 약속했다. 단테는 연말의 업무를 야근까지 불사하며 전부 쳐냈고, 라파엘도 단테를 위해 전날 미리 맛있는 음식도 준비해두고 몰래 선물도 사두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크리스마스가 그렇게 좋아?’하던 단테의 기분도 어젯밤만큼은 조금 들떠 보였다.
물론 단테의 몇 배는 신이 난 라파엘에겐 오늘의 구체적 계획이 분 단위로 짜여 있었다. 먼저 단테가 눈을 뜨면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멋있게 말을 한다.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미소를 보여준 뒤 모닝 키스를 나누고…. 마주 보고 앉아 식사를 하고…. 중간에 야릇한 기류가 올라오지 않을 수 없다는 평이 자자한 멜로영화를 보고…. 단테가 자신의 몸을 만지며 뽀뽀를 한다……!
여기까지 상상한 라파엘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발끝을 조금 동동 굴렀다. 24살의 크리스마스는 벌써부터 더없이 완벽한 크리스마스였다.
“일어났어?”
옆자리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결에 가라앉은 목소리가 벌써부터 섹시했다. 라파엘은 미리 세워둔 아침 계획을 시작했다. 그는 옆자리의 단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네, 팀장님. 메리 크,”
“라파엘…….”
단테가 라파엘을 불렀다. 라파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쩐지… 크리스마스라서 그런가, 애인이 더 섹시… 아, 아니 야해 보였다. 눈가나 입술이 평소보다 조금 발긋한 게.
“으음.”
그가 낮게 신음하며 스스로의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라파엘의 목울대가 꿀꺽 울렸다. 조금… 야한 계획이 분명 있긴 했지만 그건 저녁부터였는데. 라파엘은 평범한 선물 상자를 열었더니 끈팬티가 나온 기분이 되었다. 여, 역시 강직한 군인은 상대가 작전을 순탄히 수행하도록 가만 놔두지 않는다. 라파엘은 애써 침착하며 계획을 약간 변형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라파엘이 단테의 뺨을 감쌌다. 평소 라파엘의 체온이 높은 편이라 단테의 어딜 만져도 시원하거나 미지근하게 느껴졌는데 오늘은 좀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평소라면 웃어주었을 단테가 오늘은 멍하니 라파엘을 바라봤다. 조금 이상하면서도 도톰하게 앞으로 나온 입술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야했다.
라파엘은 정신을 다잡고 단테의 약점 003번인 눈웃음을 사르르 지으며 다가갔다. 이렇게 웃고 있을 때 단테가 키스를 거부한 횟수는 손에 꼽았다. 그가 세운 아침 작전이 다시 실행되었다.
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선 색이 짙은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생생히 비쳐서 좋았다. 이불 안에서 라파엘과 단테의 몸도 점점 밀착했다. 라파엘의 입술이 따끈한 것에 닿았다.
그러나 닿은 건 기대했던 말랑함과 촉촉함이 아니라, 조금 거칠고 면적도 코 아래를 다 덮을 만큼 큰 것이었다. 손으로 라파엘의 입을 막은 단테가 파리하게 미소 지었다.
“라피, 미안.”
라파엘은 그제야 잠결에 잠긴 것과는 목소리가 좀 다르단 걸 눈치챘다.
“나… 그거 온 것 같아.”
단테 베일리는 기본적으로 체력이 좋으며, 수년간 단련된 신체 역시 튼튼했다. 또한 한때 특수부대를 지휘했던 팀장답게 담이 컸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침착한 그의 정신력은 많은 팀원들의 지지대였다. 작전지에서 그는 단 한 순간도 팀원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 그런 완벽한 요소들을 모두 갖춘 사람이 있을 리가. 겉으로 드러나지만 않을 뿐 조금씩 쌓인 질병, 상황에 대한 스트레스 등은 계속 몸에 남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단테의 경우 한 번에 모든 누적치가 몰아서 터지곤 했다. 마치 지금처럼.
이전에는 보통 긴 훈련이나 파병 뒤에 병이 찾아오곤 했는데, 이번엔 아마 근무 환경의 급격한 변화, 갑작스레 닥쳤던 성당의 사고 등이 스트레스의 원인으로 작용한 듯싶었다.
침대에 바로 누워 있는 단테의 입술에서 뜨거운 숨이 샜다. 물수건 바로 아래 눈동자가 침대 가에 앉아 있는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어쩌지. 크리스마스 잔뜩 기대했을 텐데.”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팀장님 아프신 게 훨씬 더 문제입니다. 열이 잘 안 내립니다. 오늘 병원도 안 열 텐데.”
그나마 집 안에 물건을 채울 시기에 상비약이라도 가득 사둬 다행이었다. 속상한 얼굴로 뺨에 손등을 대어 본 라파엘이 조금 흘러내린 물수건을 이마에 똑바로 올려주었다.
아픈 호흡을 뱉던 입가에 미소가 올라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애인을 너무 잘 뒀어.”
살짝 고개를 돌리자 젖은 머리카락이 바스락거렸다.
“고마워. 지난봄에도 그렇고, 입원했을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
“떠올려 보니까 내가 꽤 손이 많이 가는 애인이네.”
이 정도 전문성도 없는 간호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단테는 매번 극진한 간호라도 받은 것처럼 고마워하고, 미안해했다. 그게 얼마나 오랫동안 아픈 날을 혼자 앓았는지 말해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렸다.
“좀 더 주무세요.”
“……응.”
눈을 감았던 단테가 금세 도로 눈을 떴다.
“서너 시간 정도 지나면 좀 나아질 테니까 영화 보고, 케이크 자르자.”
“아무 신경 쓰지 마시고, 지금은 그냥 푹 쉬시는 것만 생각하세요. 오늘 제가 팀장님 침대에서 못 일어나게 할 겁니다.”
“왜. 나도 너랑 크리스마스 보내고 싶은데.”
단테가 이불 속에서 손을 꺼내 라파엘의 팔을 만지작거렸다. 라파엘은 잠시 심장이 덜컹였다. 아파서 파리해진 단테에게선 평소 보이던 단단함이 많이 사라져 있었다. 교제하는 사이가 되자 단테는 전에 아팠을 때보다 더 벽을 내려놓고 라파엘에게 기댔다. 그게 정말 견딜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그래도, 라파엘은 지금만큼은 자신이 어른이 되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는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안 돼요. 저는 아픈 팀장님이랑은 안 놀 겁니다.”
“치사하다.”
단테가 눈을 감고 웃었다. 라파엘은 도로 단테의 손을 이불 안에 넣고 어깨까지 꼼꼼히 이불을 덮어주었다.
“라피.”
“예.”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드라이에이징 고기 안 먹고 싶어. 스튜 사지 마.”
“……알겠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두 사람의 입에서 터지듯 짧은 웃음이 나왔다.
“주무세요. 여기 있겠습니다.”
라파엘은 단테의 눈가를 덮었다. 손을 치우려는 듯 이불이 잠깐 들썩였지만 단테는 도로 팔을 내려놓았다. 손바닥 아래에서 속눈썹이 스쳤다. 그렇게 잠시. 단테의 가슴이 천천히 오르내렸다.
눈을 감은 단테는 어느새 잠에 빠져들었다.
전에 아플 때도 느꼈지만, 단테는 몸이 아플 때면 수면시간이 극도로 늘어났다. 마치 몸의 기능을 우선 정지하고 회복에 집중하겠다는 것처럼. 오래 아플 수 없다는 압박감이 몸도 채찍질을 하는 건가 여겨지기도 했다. 실제로 단테는 그렇게 하루를 내리 자고 나면 거짓말처럼 나았으니까.
이제까지 살아오며 단테에게 큰 불행이나 결핍은 없었다. 친부모가 없는 상황에서 그는 가장 이상적인 보호자를 만났고, 그 아래에서 훌륭하게 자랐다.
그러나 자신만을 향한 애정을 받아본 적 역시 없었다. 맨 처음 그가 라파엘이 내주는 모든 걸 부담스러워했던 것도 무언가를 받아 본 경험이 적어서였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단테는 자신보다 작은 동생들 앞에 커다란 담장처럼 서 있었다. 라파엘이 기억하는 대부분의 시간에서 그는 단단한 사람이었다. 연인 사이가 된 지금도 단테는 누구보다 다정하고 강하게 라파엘을 지탱해주었다.
그러다 보니 역시.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사람이 한 번씩 약해질 때마다 속상한 마음이 배로 컸다. 그걸 제대로 아프다고 칭얼거리지도 못하는 모습은 더더욱.
라파엘은 단테가 완전히 잠든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침실 문은 닫지 않고 열어두었다. 혹시나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져 앓더라도 단테는 큰 소리를 내지 않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라파엘은 현관 옆에 놓인 두 개의 캐리어를 보았다. 늦가을 무렵부터 이런저런 사정으로 여행이 미뤄져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것이었다.
크리스마스에 여행을 갈까도 했지만, 어딜 가나 인파가 몰릴 것 같아 결국 집에서 보내는 걸 선택했다.
그럼 사람이 없는 프라이빗 비치나 제가 가진 섬으로 가면 되지 않을까요? 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러나 알콩달콩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으므로 굳이 언급하진 않았다. 단테는 헤인스워즈 가 상속자를 두고 돈을 너무 많이 썼다며 혼내거나, 취준생이라며 걱정을 하기도 했으니까……. 아버지가 결혼하는 즉시 1순위 상속자 명단에 단테의 이름을 올리겠다고 한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놀랄지 모르겠다.
라파엘은 서재로 들어갔다. 오늘 단테와 함께 계획한 일들은 무산된 것 같으니 그가 자는 동안 잠시 업무를 볼 생각이었다. 헤인스워즈 재단의 창립도 이제 거의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재능 있는 청소년들에게 기회를 넓혀 줄 재단.
가끔 단테가 어릴 적 스포츠로 진로를 선택할 기회가 있었다면 어떨까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스스로는 군인이 적성에 맞다고 했지만, 그건 성격이 좋고 신체능력이 좋은 이상 당연한 결과였다. 그가 가진 능력치면 군이 아니라도 어디서든 빛을 발했을 것이다.
특수부대에서도 손에 꼽히는 솜씨였으니 사격을 했다면 세계 신기록을 몇 번이나 갈아치웠을 거고, 몸이 날랜 편이니 축구나 야구 같은 구기를 해도 성공했을 것이다. 어느 집단에 있든 그는 에이스였겠지.
하지만 그랬으면 그와 자신이 선후배 사이로 만났을 일도 사라졌을 것이다. 그게 단테가 스포츠 스타가 되는 미래를 상상으로만 만족하는 이유였다.
라파엘은 책상 앞에 앉아 랩탑을 열었다. 전날 보던 서류가 화면에 떠올랐다.
화면 속 내용의 대부분은 단테를 떠올리며 고민하고, 조사하고, 자문을 받아 만들어 간 것이었다. 까만 글씨를 눈에 담던 중 라파엘의 머릿속에 짧게 생각이 스쳤다. 단테가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 자신과 만났다면 어땠을까, 하고.
한참 서류를 넘기던 라파엘은 찌뿌둥한 어깨를 풀며 화면에 뜬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세 시간 정도가 지나 있었다. 그는 랩탑의 화면을 탁 닫았다. 슬슬 단테가 깨어났을… 거라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는데, 주변이 이상했다.
그가 랩탑을 놓아둔 책상이 좌우로 몹시 길어졌다. 그의 양옆으론 학생처럼 보이는 이들이 자리를 한 칸씩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긴 책상은 그가 앉아 있는 것 하나만이 아니었다. 앞뒤로 같은 크기의 책상이 줄을 맞춰 배치되어 있고, 마찬가지로 학생들이 그 앞에 앉아 책을 보거나 랩탑을 두드렸다.
“……어?”
공간 역시 서재와는 비할 수 없을 만큼 광활했다. 그가 알던 서재보다 천장이 월등히 높고, 면적은 온 집을 합친 것 이상으로 컸다. 그리고 책상들 옆으로는 커다란 책장 수십 개가 보였다.
이거… 꼭.
도서관 같은 풍경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느 대학교의…….
“야, 헤인스워즈.”
그 때, 옆 사람이 그의 팔을 툭 찔렀다. 라파엘의 사관학교 동기였다.
“과제 다 했냐?”
“과제?”
“……그냥 배 째라고 덮어버린 거야……?”
동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바람이나 쐬고 돌아오자며 밖을 가리켰다.
동기가 입은 옷은 사관 생도복이었다. 그리고 얼떨결에 그를 따라 나온 라파엘 자신의 옷도…… 마찬가지였다.
……어, 어? 라파엘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으윽, 토 나와……. 저걸 언제 다 채우지.”
“……분량 다 안 채워도 돼. 졸업 심사에 거의 반영 안 되거든. 너무 대충해올까 봐 겁만 주신 거야.”
기억 속에 아직 선명히 남아 있는 사관학교의 복도에 서서 라파엘은 멍하니 대답했다.
“진짜? 넌 그런 정보를 어떻게 알……만 하구나! 야이씨, 고맙다.”
신이 나 주먹을 불끈 쥐는 바람에 동기가 들고 있던 캔이 우그러졌다. 그의 손목에 음료수가 왈칵 샜다.
으악! 소리친 그는 좀 닦고 오겠다며 화장실로 갔다. 옷소매를 다 버리고도 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그는 미래에 소대장이 되어서도 저렇게 덤벙대서, 보다못해 챙겨주던 부사관과 눈이 맞아 사귀게 된다.
라파엘은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사관학교 마지막 학년일 때로 돌아와 있었다.
사관학교 시절에도 그는 헤인스워즈라는 이름값 때문에 1, 2, 3학년이 비교적 힘들었고, 4학년 때가 그나마 편하긴 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오고 싶을 만큼 즐거운 시간이었냐 하면 그건 딱히 아니었다.
어쨌든 주변에 보이는 건 학교의 풍경이 맞았다. 심지어 졸업까지 반년은 더 남은 것 같은 봄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꿈이야…….”
크리스마스의 서프라이즈라면 차라리 단테와 함께하던 수습 시절을 보여주지. 단테가 없는 시간은 이제 의미가 없는데 말이다. 꿈에서 깨기 위해 뺨을 꼬집어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 때, 라파엘의 뒤에 있는 자판기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라파엘은 옆으로 슥 비켜서 주었다.
“아.”
약간 헐렁한 생도복을 입은 학생이 그를 돌아보았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
그리고 라파엘은 입가에 대고 있던 캔을 툭 떨어뜨렸다. 안에 들어있던 약간의 내용물과 함께 캔이 바닥을 굴렀다.
그가 아는 모습보다 짧은 고동색 머리카락, 둥그렇고 똘망똘망한 갈색 눈동자, 뺨에 도톰하게 붙어 있는 젖살과 그 위에 떠오른 홍조.
라파엘은 그의 명찰을 살폈다. D.베일리. 그 글자가 믿을 수 없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 * *
‘시, 신입생?’
‘예……, 그렇습니다.’
‘우와, 와, 우와아……. 우와! 우와아아!’
라파엘은 몇 시간 전의 자신을 떠올리며 베개에 다시 한번 머리를 박았다.
“라파엘 헤인스워즈, 죽자…….”
세상에 그런 멍청한 선배가 어디 또 있을까. 어색한 웃음과 함께 뒷걸음질 치던 어린 단테의 모습이 선했다. 단테가 겁에 질린 줄도 모르고, 손을 씻으러 간 동기가 나올 때까지 단테를 빙글빙글 돌며 관찰을 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동기가 왜 신입생을 괴롭히냐며 타박을 해 멈출 수 있었다.
“난 쓰레기야…….”
“과제 제출 못 했냐?”
“아니. A+일걸…….”
“이 새끼 한 대만 쳐도 될까.”
교수가 좋아할 답과 채점 결과를 이미 알고 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그를 제외한 룸메이트 셋이 축 처진 라파엘에게 베개를 던졌다. 라파엘은 반응도 없이 뒤집어진 진저 쿠키처럼 침대에 누워 있었다.
생각할수록 너무너무 창피하고 억울했다. 스무 살의 단테에게 꿈에서라도 멋진 첫인상을 남길 수 있는 기회였는데!
‘안녕, 후배님. 목말라서 왔니? 하나 사줄 테니 골라 봐. 나는 라피 선배라고 부르면 돼.’
하는 연상. 얼마나 멋있단 말인가.
그러나 라파엘은 어버버 있다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도망치듯 돌아가는 단테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자판기 앞에서 만난 것까지 모든 상황이 완벽…….
잠깐, 자판기?
“헉!”
“아씨, 깜짝이야.”
라파엘이 몸을 벌떡 일으켜 친구 중 하나가 화들짝 놀랐다. 이때까지 라파엘의 곁에 남은 친구들은 다 헤인스워즈라는 가문에 구애받지 않고 그를 친구로 여겨준 이들이었다.
라파엘은 동기들을 보며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뭐 사 먹으러 온 거겠지?”
“아, 뭐. 저녁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배고파?”
“아니, 신입생이 자판기 앞에 왔는데…. 아무튼. 뭐 사 먹으려고 했던 거겠지?”
“그렇겠지. 신입생이면 지금 한창 날씨 풀렸다고 뺑이 돌릴 때잖아. 쉬는 시간에 뭐라도 마시러 왔나 보지.”
“…….”
그 귀한 시간에, 단테는 라파엘을 만나 당황하는 바람에 아무것도 마시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라파엘도 1학년 때 받는 체력 훈련이 얼마나 고된지 알고 있었다. 밖에서 군사 훈련이라고는 전혀 알지도 못하고 살다가, 학교에 들어와 기초 체력을 바닥부터 갈아버리는 시기.
그런 애가 마실 걸 찾아 나왔는데 나는 방해나 하고…….
라파엘의 얼굴이 점점 희게 질렸다. 혼란스러워하던 라파엘은 곧 침대에서 우당탕 뛰어내렸다. 그리고 친구들의 “저 미친놈 오늘따라 왜 저래?”하는 소리를 들으며 기숙사 밖으로 뛰쳐나왔다.
오해는 오래 쌓아두는 게 아니다. 되돌릴 수 있을 때 당장 돌리는 게 맞다. 그의 걸음이 다급해졌다.
약 20분 뒤, 라파엘은 신입생 기숙사 앞에 서 있었다. 머릿속에 ‘지금 당장 해야 해!’라고 생각한 일을 우다다 해치우고 나서야 뒤늦게 헐레벌떡 뛰어온 자신의 꼴을 정돈할 수 있었다. 앞뒤 돌아보지 않는 이 버릇도 한때 단테의 밑에서 많이 고쳤었는데, 사관학교로 돌아오자 도로 생겨났다.
“헤인스워즈 선배님.”
등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어린 단테의 목소리는 그가 아는 것보다 조금 높았다. 하지만 그 특유의 어투만은 아주아주 익숙했다.
라파엘은 제게 쭈뼛거리며 다가오는 신입생을 보며 미소 지었다. 정말, 정말로 어린 단테였다. 아마도 이건 크리스마스날 빈 소원이 만들어준 꿈일 것이다.
하지만 막 성인이 된 단테가 설령 환상이라도.
“저…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소중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단테, 아니, 베일리. 이거.”
“아깐 죄송했습니다. 방해드리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마시라고… 응?”
동시에 나온 두 사람의 말은 온도가 완전히 달랐다. 고개를 푹 숙인 단테의 이마 앞에서 음료수를 가득 담은 봉투가 흔들렸다.
단테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반쯤만 들었다. 끔뻑이는 두 쌍의 눈이 서로를 마주 봤다.
“예……?”
“어……?”
라파엘은 단테가 한 착각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건 4학년에게 부름을 받은 신입생이 필연적으로 할 만한 오해였다. 그는 재빨리 사실을 정정했다.
“이, 이거 받아.”
그는 단테의 품에 커다란 봉투를 덥석 안겨주었다.
방금 전 매점을 급습한 라파엘은 우선 단테의 냉장고에서 본 적 있는 음료수들을 담았고, 찬 것만 마시면 배탈이 날 수 있으니 따뜻한 음료들도 추가로 담았다. 그리고 음료와 함께하면 좋을 것 같은 과자도 챙겼다. 넘치는 마음을 가득 담은 봉투는 터질 듯 빵빵하게 부풀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건 좀 많은 것 같습니다.”
“괜찮아. 다 먹어.”
“…….”
“룸메이트들이랑 나눠 먹어도 되고, 숨겨놓고 너 혼자 먹어도 돼.”
단테가 멍하니 봉투 안을 보다 라파엘을 올려다봤다. 그가 아는 단테보다 눈높이가 낮았다.
라파엘 본인도 사관학교에서 규칙적인 운동과 식사를 하며 키가 자랐었는데 단테도 마찬가지였나보다. 178, 9… 그 정도 될까. 단테에게 있는 어떤 단단함이 없는 말랑한 신입생이라 더 작아 보이기도 했다.
“이걸 제게 주러 오신 겁니까?”
“어, 응. 아까 나 때문에 음료수 못 마셨잖아.”
“아… 그것 때문에.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는데…….”
“선배가 후배 먹을 걸 뺏고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아, 지금의 말은 좀 단테를 따라 한 태가 났다. 그, 그럼 기왕 한 김에… 라파엘은 슬그머니 단테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고동색 머리 위에 손이 닿았다. 머리카락이 짧아서 조금 까슬한 느낌이 났다. 그는 손가락 사이를 겨우 삐져나올 정도의 머리카락 사이를 쓱쓱 쓰다듬었다.
우와아. 라파엘은 손바닥에서 시작된 전율이 온몸으로 울려 퍼지는 듯했다.
“맛있게 먹고, 내일 훈련도 잘 받아.”
“…….”
“나, 나 갈게!”
“선배님!”
단테가 라파엘을 불렀다. 그리고 봉투 안을 급히 뒤적여 캔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드시면서 가세요. 4학년 기숙사까지 멀 텐데.”
“아…….”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스무 살의 단테가 그에게 처음으로 미소를 보여주었다. 아직 빠지지 않은 젖살이 위로 볼록 솟았다. 단테의 얼굴에 쑥스러움이 올라왔다. 그는 꾸벅 인사하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라파엘은 그 자리에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손 안에 든 것을 보았다. 가장 유명한 브랜드의 콜라. 그와는 다른 단테가 마찬가지로 라파엘에게 처음 사준 음료수였다.
라파엘의 입가가 저절로 위로 올라갔다. 자신이 왜 이렇게 웃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온 얼굴이 들썩거렸다. 그는 콜라 캔을 들고 뒤돌아 전력 질주로 달렸다. 초봄의 찬바람이 뺨에 스치는데도 얼굴은 점점 뜨거워지기만 했다. 백 미터도 채 뛰지 않았는데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꿈에서 깰 때 이 콜라도 같이 돌아갔으면 좋겠다. 이번에야말로 단테에게 들키지 않고 고이 보관해둘 것이다. 이건 정말로 용기가 나는 명약이 틀림없었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는데 팔다리를 가만히 둘 수 없어 한밤중에 교정을 달리게 하니 말이다.
“단테 귀여워! 완전 귀여워! 아! 크리스마스 최고!”
라파엘은 포효하듯 외쳤다.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 * *
봄이 무르익었다. 라파엘이 살아온 시간 중 가장 포슬포슬하게 빛나는 봄이었다.
단테를 생각하면 식사를 하다가도, 교정을 걷다가도 실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올라간 입꼬리는 하루 종일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31살의 단테는 세상에서 제일 섹시했고, 20살의 단테는 세상에 있는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작은 단테를 볼 때면, 덥석 끌어안아 볼록한 볼을 쪽쪽거리고 싶은 마음과 침착하고 멋진 선배가 되고 싶은 마음이 다퉜다. 그래도 아직까진 멋진 선배의 욕심 쪽이 더 우세했다.
그렇다고 단테의 학창 시절을 볼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언제 이 꿈이 깰 줄 알고 멀찍이서 쿨한 척이나 하겠는가.
그러므로 그는 오늘도 저학년 훈련장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이건 스토킹이 아니었다. 스토킹은 음침하게 숨어서 쫓아다니는 것이다. 하지만 라파엘은 몰래 쳐다보는 게 아니라, 눈이 마주치면 과자랑 음료수를 사주겠다는 의지를 품고 따라다니는 것이었다. 그러는 겸사겸사 단테의 많은 모습을 눈에 담을 뿐이었다.
그리고 단테는 마치 운명에 이끌린 것처럼 기둥 뒤의 라파엘을 찾아냈다.
“헤인스워즈 선배님.”
훈련을 막 마친 단테가 그를 부르며 다가왔다. 숨이 찬지 어제보다 뺨이 더 발긋했다. 앳된 단테에게 선배님이라고 불리자 또다시 배 속이 간질간질해졌다. 라파엘은 활짝 웃으며 그의 앞으로 냉큼 나왔다.
“응, 베일리. 왜?”
저, 어…. 단테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혹시 저를 보러 오신 건가 해서…….”
“앗, 맞아. 어떻게 알았어?”
“모를 수가 없는데……, 아,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사실 용건보다는 학교생활을 훔쳐보는 게 주요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먼저 물어봐준다면 이것저것 알고 싶은 게 많긴 했다. 그중에서도.
“베일리, 내일 주말인데 뭐 해?”
“내일은 아마 기숙사에서 쉴 것 같습니다.”
라파엘이 눈을 번쩍 빛냈다.
“기숙사 식당 맛없지 않아? 내일 점심 사줄까?”
“예? 제게… 말입니까?”
“내가 그때 음료수 못 마시게 했잖아. 그러니까 맛있는 거 사줄게.”
“그건 이미 다른 과자와 음료수 사주시지 않았습니까.”
“다른 것도 더 많이 사주면 좋지!”
원한다면 음료수 공장이라도, 아니, 자신 몫의 유산을 미리 당겨 받아 회사를 사줄 수도 있다. 그러니 뭐든 말만 했으면 좋겠다. 라파엘이 한창 방방 뛰고 있을 때, 단테의 뒤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헤인스워즈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다가온 사람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라파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 단테가 1학년이니까 저 사람은 2학년이구나.
라파엘의 앞에 빙글빙글 웃으며 다가온 건 데릭슨 에프런이었다. 그가 단테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단테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었다.
“2학년 데릭슨 에프런입니다. 혹시 이게 선배님께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습니까? 많이 못 배운 신입생이라 그렇습니다. 제가 잘 가르치겠습니다.”
“…….”
“그런데 주말에 식사… 그런 얘기를 하시던데. 선배님의 격이 맞는 상대와 가시는 건……. 혹시나 후배가 뭔가 실수를 저지를까 봐 걱정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속이 빤히 보이는 말이었다. 데릭슨은 후배를 위하는 척하며 깎아내리고 라파엘 앞에 자신만 내세웠다. 기수가 바뀐 뒤에도 하는 행동은 똑같았다.
아직 어린 단테는 표정을 능숙하게 감추지 못했다. 얼굴에 불편함과 약간의 수치심이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한 기수 아래 후배의 입장이라 데릭슨을 어떻게 할 수는 없어 보였다. 라파엘의 미간이 모였다.
“……넌 뭐야?”
싸늘한 목소리에도 단테를 대신해 감정이 실렸다.
데릭슨은 어? 하고 당황했다가 “아, 제가 이름을 말씀 안 드렸습니까? 저는 에프런 가의…….”하고 덧붙이려 했다. 그 전에 라파엘이 말을 막았다.
“대화 중 불쑥 끼어든 불쾌한 사람 이름까지 기억하고 싶진 않은데. 아는 사이에도 무례한 일을, 일면식도 없는 후배에게 당할 줄은 몰랐군.”
단테가 라파엘을 올려다보며 눈을 끔뻑였다. 그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온도와 말투였다.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겠지. 더 할 말 있어?”
“아, 아닙니다.”
그제야 단테의 어깨에서 손이 떨어졌다. 데릭슨은 라파엘에게 빠르게 인사를 한 후 왔던 길로 돌아갔다. 그러나 근처를 벗어나는 순간 휙 몸을 돌려 단테를 험악하게 노려봤다.
저 자식이 예쁜 단테에게 또……! 라파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바로 앞에 있는 단테를 의식하며 내려놓았다.
어쩌면, 1학년 단테의 앞에 자신이 4학년으로 나타난 것도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라파엘은 일부러 들으란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귀여운 후배 단테야! 내일 시간 있다는 거지? 내가 꼭! 너만! 맛있는 거 사줄게. 식사까지 사주고 싶은 특별한 후배는 네가 처음이야! 한 시까지 정문 앞에서 보자!”
적어도 자신이 선배로 있는 이상, 단테가 괴롭힘을 당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라파엘은 얼떨떨하게 아,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단테를 보았다. 저 똘망똘망한 눈동자만 보면 배 속이 간질거리는데, 그런 느낌이 들 때마다 양심도 같이 따끔거렸다. 라파엘은 단테의 머리를 슬쩍 쓰다듬었다.
단테가 시선을 위로 모아 정수리 위에 얹어진 라파엘의 손을 올려다봤다. 옅은 분홍색 입술이 자그맣게 벌어졌다. 꼭 고동색 털과 까만 눈동자를 가진 강아지 같다……! 단테가 왜 자꾸 자신을 새끼강아지라 불렀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 감상과 동시에 쿡쿡 찔리던 양심이 바위로 후려친 것처럼 아파왔다.
“단테, 그, 그럼 내일 보자. 훈련하느라 고생했어. 저녁 맛있게 먹고 잘 자. 힘들더라도 스트레칭 꼭 해!”
“예? 아, 안녕히 가십시오, 선배님.”
라파엘은 새빨개진 뺨과, 양심과는 달리 기립을 시도하는 무언가를 가리기 위해 척척척척 걸어 나갔다. 그 바람에 저도 모르게 단테를 이름으로 불렀으며, 단테가 그에 조금 놀랐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 * *
다음 날, 라파엘은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나와, 15분 일찍 나온 단테와 만났다. 그리고 학교 주변 피자 가게 중 가장 맛있는 곳으로 함께 이동했다.
메뉴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단테가 라파엘을 데리고 간 첫 식당도 피자 가게였기 때문이었다. 무심한 누구누구 소령과는 달리, 라파엘은 이런 데에도 모두 의미를 부여할 만큼 섬세했다.
“잘 먹겠습니다.”
“응. 먹고 싶은 거 더 주문해도 돼.”
라파엘은 샐러드도 피자도 듬뿍 담아 단테의 앞에 놓아주었다.
단테가 피자를 들어 올려 입술을 벌리고 끄트머리를 베어 물었다. 흰 치즈 위에 윗입술이 꾹 눌리며 치즈가 늘어났다. 이어 살짝 드러난 앞니가 질근 치즈를 끊었다.
세 번 정도 뺨을 오물거린 단테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맛있나 봐…….
어른이 된 단테에게선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라파엘은 오늘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만, 피자를 다섯 판은 먹은 것처럼 흐뭇하게 배가 불렀다.
라파엘이 피자 위 치즈처럼 녹아내린 미소로 단테를 보고만 있자 단테는 먹던 것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라파엘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접시에 샐러드와 피자를 담아 그에게 주었다.
라파엘은 팔불출처럼 굴지 않겠다고 많은 다짐을 하고 왔다. 하지만 얼굴 근육이 자꾸 들썩였다. 머릿속에선 이걸 먹을까, 집에 가져가 박제를 할까 고민했다.
“선배님도 드십시오.”
“아, 응……! 고마워.”
단테가 간절히 바라봐 라파엘은 결국 피자를 입 안에 넣었다. 장담컨대, 황실 셰프가 만든 피자도 지금 이 피자보다 맛있지 않을 것이다.
식사를 하다 보니 라파엘은 어떤 문제에 직면했다. 무슨 말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라파엘이야 말없이 보고만 있어도 행복하지만, 단테는 드문드문 어색한 기색을 비쳤다.
“맛있어?”
“예, 맛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응… 편하게 많이 먹어.”
그렇게 대화는 짧게 끊어졌다.
보통 처음으로 같이 밥을 먹은 선후배 사이에는 어떤 대화를 해야 할까. 특히나 단테는 겉으론 담담해 보여도 속사정이 많아 더 조심스러웠다. 괜히 가족이나 집안 이야기로 흘러가면 곤란해할 것이다. 그러니 무난하고, 대답이 어렵지 않은 화제를…….
라파엘은 새삼 잔뜩 얼어 있던 자신을 앞에 두고 부드럽게 대화를 주도했던 단테의 노련함과 어른스러움을 실감했다. 또한 ‘그만큼 나 말고 다른 후배들에게도 피자를 사주신 건가…….’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그는 머릿속을 더듬은 끝에 단테가 건넸던 말 중에서 적절한 질문을 찾을 수 있었다.
“단테, 훈련은 어때?”
“괜찮습니다.”
4학년 선배와의 식사 속에 긴장하고 있던 단테에게서 즉각적인 답이 튀어나왔다. 라파엘은 질문을 조금 더 늘였다.
“이렇게 몸 혹사시키는 거 처음일 텐데, 많이 힘들지?”
“아니오, 처음이 아닙니다. ……실은 제가 청소년 학군단 출신입니다. 동기들은 힘들어하는데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아, 맞다. 그러면 다른 신입생들보다야 여유롭긴 할 것이다. 그게 꼭 좋기만 한 건 아니겠지만.
“네가 청소년 학군단 출신인 거, 학년 초반에는 대놓고 물어보지 않는 한 숨기는 게 좋을 거야. 괜히 시범을 보이라느니 하며 귀찮은 일이 생기거든.”
뿐만 아니라 귀족 출신들로부터 아니꼬운 시선을 받기도 할 것이다. 유일하게 제도에 위치한 제1사관학교를 그네들이 다니던 명문 고등학교의 연장선쯤으로 아는 사람들은 제법 많았다. 별거 아닌 내용이지만, 단테가 조금이라도 편한 학교생활을 하기를 바랐다.
“아…. 주의하겠습니다. 잘난 체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앗, 나한테는 말해도 상관없어. 당연히 나는 비밀 지켜줄게. 자랑이어도 돼! 아니, 많이 해! 사실 나는 멋지다고 생각했어!”
라파엘은 후두둑 말을 쏟아내고 나서야 우렁차게 커진 목소리를 막았다. 그리고 놀랐을 단테를 살폈다. 그런데… 단테는 그를 보며 설핏 입술을 올리고 있었다. 라파엘이 어, 하는 사이 바로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가렸다.
“흠, 죄, 죄송합니다.”
곧 표정이 도로 갈무리되었다. 그러나 웃음기가 약간은 남아 있었다. 그걸 눈치챈 라파엘의 표정도 조금 전의 단테처럼 부드럽게 풀렸다.
“학교생활 하면서 힘든 일은 없어?”
“어디에 있든 힘든 일은 있긴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재미있습니다.”
“힘든 일 있으면 꼭 나한테 말해줘. 내가 뭐든 도와줄게.”
단테가 라파엘을 빤히 보았다. 두 사람이 처음 정면으로 얼굴을 마주했다. 고동색 눈동자에서 맑은 구슬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저, 헤인스워즈 선배님.”
“응.”
“선배님은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십니까?”
라파엘이 테이블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괴었다.
“그냥,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는 것 같아서.”
“아닐걸요? 아니… 아닐 겁니다. 저 되게 시골에서 왔습니다. 선배님은 한 번도 안 가보셨을 곳입니다.”
“응? 왜 난 시골에 안 가봤을 거라 생각해?”
“그야, 음…….”
라파엘은 살짝 긴장한 채 단테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설마 내가 데릭슨처럼 귀족주의에 찌든 사람으로 보였던 걸까.
가까워진 라파엘의 얼굴을 보고 있던 단테의 귀 끝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 그가 우물쭈물 말을 꺼냈다.
“서, 선배님은 꼭 커다란 성에 사는 왕자님 같으시니까요.”
그리고 그 표정, 말, 행동에 라파엘은 심장을 얻어맞았다. 예기치 못한 공격이 훨씬 당황스러운 법이었다. 무, 뭐, 뭐……! 라파엘은 거울을 보지 않아도 자신의 얼굴이 새빨갈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내, 내가?”
“예. 처음 봤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
어떻게 식사를 마무리했는지도 모르겠다. 무지갯빛이 된 머릿속에 구름과 꽃잎이 둥둥 떠다니더니, 어느새 기숙사 방이었다. 침대에 납작 엎드린 라파엘은 두 주먹으로 침대를 마구 두드렸다.
“단테 베일리, 연하 킬러인 줄 알았더니 연상의 마음도 막… 막……!”
그 얼굴로 눈을 사르르 접고, 고개를 기울이고,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면서.
‘라파엘 선배님은 제 왕자님 같아요.’
라고 하면 녹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정신없는 상태에서 들어 약간 왜곡이 된 것 같긴 하지만, 그걸 인지하지 못할 만큼 행복했다.
라파엘은 한참을 버둥거리다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그러고는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메시지를 썼다. 심장이 뛰다 못해 숨이 가쁜 와중에도 충실히 번호를 딴 자신을 칭찬해야 마땅했다.
[단테, 내일은 뭐 해?]
[아, 선배님. 잘 들어가셨습니까. 저 내일은 여자친구 만납니다.]
대류권 바깥까지 날아갔던 라파엘의 기분이 순식간에 사관학교의 지하 훈련장까지 곤두박질쳤다.
* * *
라파엘은 그 뒤 며칠을 모닥불에 잘못 던져 넣은 감자같이 지냈다. 즉 새카맣게 탄 상태였다는 의미였다. 지금이라도 당장 단테에게 달려가서,
‘너는 미래에 일곱 살이나 어린 내 동정과 순정을 다 가져가!’
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눈물과 함께 참아야 했다. 그러는 사이 속은 억지로 틀어 막힌 환풍구처럼 더욱 그을려 갔다.
도서관에 앉아 있던 라파엘은 뒤척이던 두꺼운 명단을 툭 내려놓았다. 그리고 책상에 주르륵 머리를 기댔다. 당연한 일이지만 사수로 배정이 가능한 사람 중에 단테는 없었다. 아니, 단테 베일리라는 이름을 가진 군인 자체가 없었다. 그는 그저 사관학교 신입생일 뿐이었다.
즉 이대로 졸업을 한 뒤에는 보송보송한 단테도 못 보고, 어른 단테도 못 보고, 누군지 모를 사수 밑으로 들어가서 수습 기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미래가 이보다 암담할 수는 없었다. 단테를 볼 수 없다면 벽에 머리를 박아서라도 꿈에서 깨는 게 나았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신입생 단테를 다시 마주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리온이나 안젤라에게 드문드문 들은 이야기로, 단테가 무척 인기가 많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건 그를 조금만 지켜보아도 충분히 예상이 갔다.
단테는 누구에게나 선을 지키지만, 그 안에서의 모습이 상대로 하여금 선을 넘어서게 만들 만큼 멋지고 다정했다. 라파엘이 어느새 그를 향해 달려가도록 만든 매력은 저 혼자만 느낀 것이 아닐 것이다.
어쨌든 그는 마지막엔 라파엘 헤인스워즈를 선택한다. 결국 승자는, 제국 제일의 멋진 남자를 쟁취하는 건 자신이었다!
……지금의 단테로부터 11년 뒤에는 말이다.
애인 사이가 되기 전의 과거는 어쩔 수 있는 게 아니고, 이런 질투도 부당했다. 하지만 마치 애인의 바람을 목격한 것처럼 서러웠다.
그 때문에 라파엘은 며칠 신입생 공간을 맴돌던 스토킹… 아니, 원거리 산책도 멈췄고, 콜라도 다른 브랜드만 사 먹었다. 멋진 선배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결심과 다른 행동이 한심했다. 하지만 지금 단테를 만났다간 있는 대로 서운한 티를 낼 것 같아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그러나 학교라는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며 마주치지 않기란 무리였다.
“헤인스워즈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아…… 단테, 안녕.”
못 본 사이 단테는 머리카락이 조금 자라 있었다. 그리고 계속된 훈련 때문에 피부도 약간 탔다. 아직 키는 작지만, 그가 아는 단테의 모습과 좀 더 가까워졌다. 라파엘을 보고 전처럼 바짝 어는 게 아니라 엷은 미소를 지어 주는 것까지도.
라파엘의 심장은 주인에 대한 지조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는 늘 라파엘의 의지보다 단테가 보이는 행동들에 먼저 반응했다. 이번에도 어린 단테의 자연스러운 미소를 보자마자 가슴이 쿵쿵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 두근거림이 오늘은 조금 아팠다.
“오랜만입니다. 식사한 뒤로 자주 뵙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게. 좀 바빴어.”
“아…. 그러셨습니까.”
너는 잘 지냈어? 나와 연락 없는 동안 여자친구와는 계속 연락했어? 여자친구랑 그날 뭐 했어……? 라파엘은 움찔거리는 입술을 애써 닫았다. 앞으로 뻗고 싶은 손도 꾹 쥐어 막았다.
“그럼… 다음에 보자.”
“……예, 선배님.”
라파엘은 그렇게 단테의 앞에서 벗어났다. 돌아서는 걸음마다 미련이 뚝뚝 떨어졌다.
그냥 우린 지금부터 사귀면 안 될까. 그 여자친구에게 찾아가서 두툼한 돈 봉투를 주며 내 미래 애인과 헤어져! 한다든가……. 어차피 꿈속이라도 단테를 곤란하게 할 짓은 못 한다는 걸 알면서 부질없는 상상만 계속됐다.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던 라파엘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나 뭐 하고 있는 거야…….”
지금처럼 어린 단테를 떠올리며 재단을 세우자고 결심했으면서, 겨우 이딴 일로 단테를 피하다니. 청소년기의 단테에게 사귀는 사람이 있다 한들 그를 돕지 않았을 것도 아니고.
라파엘은 왔던 길로 몸을 돌렸다. 이미 단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간 방향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골목을 돌려던 라파엘의 발이 어떤 소리를 듣고 멈칫했다.
“이것 봐. 그렇게 친한 척하더니만 결국 내쳐졌잖아? 이제 와 정신 차리고 네 출신 조사라도 해본 거 아냐? 그러게 내가 주제 파악하랬지?”
“……그런 사실 없습니다. 헤인스워즈 선배님은 그런 분 아닙니다.”
단테의 목소리가 확연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를 비웃는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헤인스워즈? 헤인스워즈가 네 입에서 나오는 게 가당키나 한 이름인 줄 알아?”
“…….”
일전의 그게 끝이 아니란 걸 왜 간과했을까.
어른 단테는 라파엘을 처음 만날 때부터 데릭슨에게 어느 정도 의연해져 있었다. 그 시기엔 직위가 같아져 단테도 어느 정도 선에서 무시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년 차이로 기수가 나뉘는 사관학교 시절은 졸업할 때까지 위계가 계속된다.
라파엘은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걸어갔다. 단테는 네 명의 2학년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한 명이 먼저 라파엘을 발견했다. 그가 옆 사람을 팔꿈치로 찔렀고, 나머지도 전부 라파엘을 돌아봤다. 놀란 눈의 단테도 함께.
“이게 무슨 짓이야.”
라파엘은 2학년 사이를 헤치고 단테를 잡아끌었다. 그를 등 뒤로 감추며 나머지 네 사람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헤인스워즈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후배에게 군기 잡을 일이 있어서…….”
“내가 아무 소리도 못 듣고 여기 왔다고 생각해? 군기 잡는데 왜 내 이름이 나와.”
“아, 그건.”
한 명의 시선이 라파엘의 오른쪽 어깨 옆으로 향했다. 라파엘은 그 팔을 뒤로 뻗어 등 뒤에서 나오려 한 단테를 감싸듯 막았다. 누가 봐도 라파엘이 이쪽 편을 들자 다른 넷은 혼란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선배님, 착오가 있으신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그 중 데릭슨이 분한 얼굴로 나섰다.
“저 새끼가 뭐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올 주제가 안 되는 놈입니다. 제1사관학교는 옛날부터 선배님이나 저희 같은 학생들이 오는 곳 아닙니까.”
그가 불쾌한 일을 설명하듯 인상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4, 5사관학교 정도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시설에서 자란 게 벼슬이라고, 사회 배려계층으로 학비 한 푼 안 내고 같은 동문 소리 듣기는 억울하지 않습니까.”
“입학 성적 우수자 장학금이라고 말했잖습니까!”
등 뒤에서 억울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스무 살의 어린 얼굴이 일그러진 자존심을 숨기지 못하고 구겨져 있었다. 어른이 된 단테라면 비웃음과 함께 받아칠 수 있는 말이었지만, 그 여유를 갖기까지 그는 수없이 깎여나갔던 모양이다.
“단테.”
라파엘은 단테의 두 손을 잡아 들었다. 그리고 양쪽 귀를 손바닥으로 누르게 했다. 라파엘의 큰 손은 그 두 손 위를 덮었다.
“가만히 있어. 괜찮아.”
수습 기간 중 현장에서 위험한 상황이 닥쳤을 때, 라파엘이 부상을 입었을 때, 심지어 가족과 오해가 있을 때도 단테는 이렇게 말하며 앞으로 나서주었다. 단테가 그때 자신이 느꼈던 안도의 반만이라도 느끼길 바랐다.
라파엘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보다 나이가 많은 건 이래서 좋은 일이었다. 학년, 키, 집안을 포함해 단테를 지켜줄 수 있는 게 더 늘어났다.
다시는 단테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면 그들이 가장 명예로워하면서도 가장 두려워하는 것으로 협박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건 단테에게 또다시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단테의 귀를 꽉 막은 채 라파엘이 몸을 반쯤 돌렸다.
“네 논리대로면, 너와 동문이 되기 싫은 다른 선배에게 같은 짓을 당해도 할 말은 없겠네. 나도 이딴 저열한 짓을 하는 사람들을 후배로 두고 싶진 않아.”
“헤인스워즈 선,”
“그래도 상관없겠지.”
“……아닙니다.”
억울한 얼굴이었지만, 대답은 고분고분했다. 단테의 앞에서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가 그를 더 화나게 했다.
“어린 후배를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몰아가면서, 쓸데없이 영웅 심리나 우월감 같은 거나 채우고 있고.”
라파엘이 움직이려는 단테의 손을 다시금 꾹 눌렀다. 눈이 마주치자 보여준 미소는 다시 데릭슨을 향하자마자 사라졌다.
“또다시 단테를 건드리는 게 눈에 보이면, 난 너희의 앞으로 남은 군 생활로 복수를 대신할 거다.”
저들도 귀족인 만큼, 이게 단순한 협박이라 여길 정도로 멍청하진 않을 것이다.
“내가 졸업하면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 단테가 너희에게 바로 한 기수 아래 후배인 것처럼, 지금 3학년은 내 아랫기수 후배야.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헤인스워즈 이름으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직접 보고 싶거든 어디 계속해 봐.”
라파엘은 데릭슨을 노려보며 분명히 말했다.
“꺼져. 다시는 단테 앞에 나타나지 마.”
그리고 단테의 손목을 잡아끌어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 순간 깎일 대로 깎여나간 미소가 익숙한 다른 단테가 떠올랐다. 안쓰러움과 분노가 턱에 꽉 힘을 주게 했다. 한편으로 그를 지켜냈다는 만족감과, 작은 몸을 등 뒤에 감출 때의 충족감이 움켜쥔 손바닥 안에서 비틀렸다.
인적이 드문 곳까지 오자, 뒤에서 이끌려 오던 단테의 걸음이 먼저 멈췄다. 라파엘은 그제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며 뒤를 돌았다.
“아, 미안. 많이 놀랐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단테는 덤덤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라파엘은 저렇게 푹 숙여진 고개를 본 기억이 있었다. 그보다 조금 더 성숙한 단테에게서였다.
“왜 울 줄도 몰라. 바보같이.”
“…….”
단테는 이때부터 똑같았던 모양이다. 라파엘은 단테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머리카락이 포슬포슬 흩어졌다. 충분히 쓰다듬고는 뺨을 감싸 아래를 향한 고개를 들게 했다.
“헤인스워즈 선배님.”
그가 꽉 물고 있던 입술을 놓고 말했다.
“저, 차석으로 입학했습니다. 수석 못한 건, 제가, 키가 조금 모자라서 그런 겁니다. ……진짜 장학금입니다.”
“응. 대단하다. 여기 매해 실력 쟁쟁한 사람들이 들어오는데. 나도 입학 성적은 10등 안에도 못 들었거든.”
“…….”
“재능도 있고, 열심히 노력도 했다는 의미겠지.”
울컥한 감정이 어리기 무섭게 단테가 손등으로 얼굴을 가렸다. 반대쪽 손끝이 허벅지를 파고들어 감정의 일렁임을 멈추려 했다. 정말 우는 방법도 몰랐다.
라파엘은 한 발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등을 감싸 당겼다. 단테가 품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 아무도 없어.”
키가 작은 단테의 얼굴은 어깨가 아니라 가슴에 닿았다.
“내가 가려줄 테니까 하고 싶은 거 다 해. 비밀로 해줄게.”
라파엘의 몸에 닿은 손바닥은 처음엔 그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점점 안으로 굽으며 그의 옷깃을 쥐었다.
단테는 항상 다른 사람의 앞에 서 있었다. 얼굴을 가릴 곳이 없어서 울지 못했던 것처럼, 그는 어깨를 떨기 시작했다.
“흐, 끅, 흐윽…….”
라파엘의 품에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단테의 울음이 라파엘의 가슴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단테가 그랬던 것처럼, 라파엘의 손이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조용히 서러움을 내려놓던 단테가 말했다.
“……너무, 흐, 힘들어…….”
또 이 한마디를 못 해서 그렇게 앓았나 보다. 라파엘은 단테를 놓지 않고 계속 안아주었다.
그렇게 두 시간 뒤, 벤치에는 눈가가 퉁퉁 부은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선배님은 왜 우셨습니까.”
“……나는 원래 눈물 많아.”
10분쯤 눈물을 쏟는 단테를 보다가 라파엘도 결국 울음이 터졌다. 그 울음이 멈추질 않아 어느 순간부터는 단테가 라파엘을 달래주었다. 선배님, 울지 마세요……. 탈수 오시겠습니다……. 아니 이러다 진짜 쓰러지시겠는데……. 하는 걱정을 받고 나서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단테의 눈물은 라파엘보다 먼저 그쳤다. 두 시간 중에 단테는 20분 정도를 울었고, 나머지는…… 그랬다.
“헤인스워즈 선배님.”
“응.”
“저 운 것도 오랜만이었지만 누구에게 안겨본 것도 오랜만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위안이 되었다면 다행이긴 한데…. 라파엘은 코를 훌쩍거리고는 웅얼거렸다.
“왜 안겨본 게 오랜만이야. 너 여자친구 있잖아.”
말을 뱉고도 잠시 후회했다. 하지만 사귀는 사람이 있는데 왜 안기지도 못 했냐고 묻고는 싶었다. 그리고 어떤 대답이 나오든 의연하게 대처하자고 생각했다.
“아, 그게. 헤어졌습니다.”
방금 한 생각은 취소였다. 이렇게 의연하지 못하고 기분이 좋을 수가.
단테가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 전에 여자친구 만난다고 메시지 드린 날에 차였습니다.”
“왜? 아니… 어쩌다가?”
“그냥 제가 사귀기 전에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었나 봅니다. 너무 무심해서 질렸다고 했습니다.”
“……그렇구나. 사람 보는 눈이 없네. 알고 보면 되게 다정한데.”
“예?”
단테는 황당하게 웃으며 라파엘을 봤다. 라파엘은 자신의 말에 전혀 거리낌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선배님이야말로 너무 다정하시고…….”
단테의 시선이 물기가 어려 짙어진 금색 속눈썹, 그 아래 연녹색 눈동자에 머물렀다. 그러다 콧날을 타고 스륵 입술로 내려갔다.
라파엘은 울면 입술이 약간 도톰하게 붓는다. 그래서 종종 단테에게 붕어 눈에 붕어 입이 되었다고 놀림 받기도 했다. 그 뒤에 그는 꼭 입술을 따뜻하게 덮어주었다.
여기 있는 작은 단테도 입술을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라파엘은 혀를 빼 아랫입술을 살짝 핥았다. 단테의 시선이 화닥닥 다시 눈동자로 올라왔다. 그리고 다시 멍하니 얼굴을 쳐다봤다.
그런 단테의 변화를 캐치한 라파엘은 아, 혹시? 하고 생각했다. 그는 단테의 약점 003번을 사용해 봤다. 눈가가 사르르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거의 즉시, 라파엘을 바라보던 단테의 뺨이 붉어졌다.
오.
단테와 이런저런 연애사를 거친 라파엘은 깨달은 바가 있었다. 바로 단테가 자신의 어리광이나 얼굴에 약하다는 것을. 그래서 단테의 약점 001번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내는 끙끙 앓는 소리이고, 002번은 아련하게 바라보며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단테…….”
그러니까 이렇게.
단테는 바람 소리가 그대로 다 들릴 만큼 크게 코로 숨을 들이마시더니, 그 두 배의 소리를 내며 숨을 내뱉었다. 눈도 두 배로 휘둥그레졌다.
“나 너무 울었나 봐…, 어지러운데, 허벅지 좀 베고 누워도 돼?”
“예?!”
스무 살 단테의 반응은 너무나 순진했다. 라파엘은 눈을 감으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른인 단테라면 지금쯤 피식 웃으며 수작 부리지 말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단테는,
“예……, 그, 그럼 누우십시오.”
자세를 바로 세우며 허벅지를 내주었다. 라파엘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냉큼 머리를 기댔다.
어느새 짙은 색이 된 하늘에 어슴푸레한 달이 보였다. 봄을 맞아 새잎으로 풍성해진 나무 그림자가 하늘 귀퉁이를 가렸다. 그리고 고개를 조금 돌리자 단테가 보였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볼살이 더 귀여웠다.
“선배님, 기분 좋으십니까?”
“응? 어… 조금? 어떻게 알았어?”
“해피 배 쓰다듬어줄 때 나던 골골 소리가…… 아니, 그냥 웃고 계셔서 여쭤봤습니다.”
“……해피가 누군데?”
“음, 멋진 녀석입니다.”
사람이라는 거짓말은 안 하는군…. 그래도 이만큼이나 거리가 가까워졌으면 됐다. 라파엘은 손을 뻗어 단테의 턱에 하얗게 남은 눈물 자국을 문질렀다.
“앞으로는 힘든 일 하나도 없이 무럭무럭 자라. 알겠지?”
“……선배님이 할아버지도 아니고.”
“산타 할아버지라고 생각해도 좋으니 남은 반년 동안 내게 많이 기대. 절대 혼자 아프지 말고.”
라파엘은 그 말속에 나름대로의 다짐도 담았다. 이 꿈이 얼마나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계산하지 말고 모든 순간을 단테를 위해 쓰자. 그래야 꿈에서 깨어나 진짜 그의 단테를 만났을 때 뿌듯하게 끌어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날부터 라파엘의 목표는 졸업 전까지 단테의 순탄한 학교생활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단테에게 위협이 가지 않도록 한 기수 아래 후배에게 말을 전해 두고,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교수에게 찾아갔다.
‘헤인스워즈 가에서 미래의 인재로 특히 주시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라는 말을 흘려주니 그의 눈빛이 바로 변했다. 물론 단테는 지금 교수의 얼굴에 떠오른 기대치를 충족시키고도 남을 원석이었다. 일찍 발견되어 소중히 갈고닦아진다면 더욱 빛이 날 것이다.
또한 헤인스워즈 가를 통해 출처를 숨기고 단테의 성당을 도왔다. 어른 단테였다면 라파엘이 한 행동을 추적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단테는 무리였다. 그러니 그저 선물 같은 일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 주의 주말이 지나고 만난 단테의 표정이 조금 밝았다.
물론 단테 본인에게도 끊임없이 다가갔다. 한번 단테에게 달려간 경험이 있으니 두 번째는 더 기쁜 일이었다. 이전보다 더 조심스럽게, 하지만 망설임 없이 거리를 좁혔다.
라파엘의 행동만큼 단테는 그에게 미소를 점점 더 허락해주었다.
그리고.
“단테!”
“선배님, 오셨습니까.”
단테가 반갑게 뒤를 돌았다. 라파엘은 얼른 다리를 더 재촉해 단테의 앞에 섰다.
“뛰어오지 마시라니까요. 졸업 얼마 안 남았는데 후배들 앞에서 너무 유한 모습만 보여주십니다.”
“반가워서 그랬어…….”
“어제도 1학년 기숙사 찾아오셨으면서 그렇게 반가우십니까.”
“응, 보고 싶었어.”
단테에게 툭하면 찾아가자, 처음엔 주춤거리던 그도 옆에 있는 라파엘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여겼다. 상대가 챙겨줘야 할 후배가 아닌 선배여서인지 속마음을 내보이는 속도도 더 빨랐다.
다만, 처음엔 이쪽이 좀 듬직한 역할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본래 라파엘과 단테의 관계와 비슷해졌다.
라파엘을 보고 있던 단테가 피식 웃으며 까치발을 들었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 라파엘의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해주었다. 연상이 된 보람이 조금 없어진 것 같지만 이것도 나쁘진 않았다.
라파엘이 그에게 찰싹 붙어 있다는 소문이 돌자 단테에게는 더 이상 데릭슨 같은 놈들이 꼬이진 않았다. 대신,
“어휴, 저 선배 또 왔어. 또.”
“슈스터 후배님, 너 너무 막 나가는데.”
“선배에 비하겠어요.”
단테의 주변 인물들에게는 의도치 않게 허술한 모습을 여러 번 보였다. 특히 선배일 땐 그나마 단테의 반의반 정도는 멋있던 리온은 후배가 되자 상당히 얄미워졌다.
라파엘은 조금의 아쉬움도 남기지 않고 마음껏 단테의 어린 시절을 소중히 아껴주었다. 알고 있는 것이 더 많은 만큼, 단테를 몰래 돕는 것도 수월했다.
꿈은 한순간도 지루한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고, 4학년의 시간은 짧았다.
무르익은 여름의 끝에서 라파엘은 졸업을 맞이했다.
* * *
“졸업하기 싫어……. 지금이라도 사고 쳐서 유급할까.”
―안 됩니다. 또 이상한 소리 하십니다.
“너는 내가 가는데 아쉽지 않아?”
―……연락 자주 하고, 학교 밖에서도 만나면 되지 않습니까. 늦으시겠습니다. 이따 뵙겠습니다.
누가 단테 아니랄까 봐, 라파엘의 공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칼 같았다.
사관학교의 졸업식은 곧 정식으로 장교 직위를 다는 임관식이었다. 짙은 색의 정복을 입은 졸업생도들이 사열대 앞에 입장했다. 그 뒤에는 선배들의 임관식을 빛내기 위해 화려한 예복을 차려입은 재교생도들이 섰다.
모든 행사가 마무리되자 대열이 흩어지고, 졸업생도들 앞에는 각기 임관을 축하하러 온 지인들이 모여들었다. 라파엘의 앞에도 붉은 상의와 흰 바지, 장식용 검을 찬 단테가 다가왔다. 쭈뼛쭈뼛 걸어오는 단테의 두 손은 등 뒤로 모아져 있었다.
단테는 정복 차림의 라파엘을 보다가 등 뒤에 숨긴 것을 내밀었다.
“……졸업 축하드립니다.”
“나 주려고 가져온 거야? 고마워.”
작은 꽃다발이었다. 덩치가 큰 라파엘이 받아들자 더 작아 보였지만, 여기까지 조심히 들고 왔다는 걸 보여주듯 포장에 구겨짐 한 점 없었다. 가장 어린 학년은 행사에서 이것저것 할 일도 많았을 텐데 최대한 예쁜 꽃다발을 주려 한 노력이 보였다.
단테는 늘 이렇게 직접적인 것보다는 사소한 행동 속에 마음을 담는 편이었다. 그래서 이 다정함을 겪어본 사람은 헤어나오기가 어려웠다.
“많이 보고 싶을 것 같습니다. 선배님 덕분에 학교생활이 더 많이 즐거웠습니다.”
“……다행이다. 앞으로도 계속 그랬으면 좋겠어.”
이 모든 게 꿈이어서 다음 날 전부 사라질지언정, 단테에게 한순간이라도 더 행복을 주고 싶었다. 그리고 어떤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면, 이 웃음이 그가 아는 단테에게까지 이어졌으면 좋겠다.
“단테, 행복해. 많이 웃어. 넌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미래에 나를 닮은 후배가 찾아오면 조금만 빨리 마음을 열어줘.
라파엘은 단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쩐지 이게 마지막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조금 높아진 위치에서 손바닥이 흔들렸다.
단테가 앞으로 나아갈 11년에 아마 자신은 없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 힘든 일을 헤쳐나가고 존경받는 선임이, 그리고 손꼽히는 실력의 팀장이 될 것이다. 그 과정이 본래 단테가 겪었던 것보다는 덜 힘겹기를 바랐다.
무엇보다 다치지 말고. 아주 조금도 아프지 않기를.
“……선배님, 또 우십니까?”
후배의 앞이라 꾹 눌러 참았던 눈물이 결국 일렁였다. 라파엘은 고개를 저으며 눈을 비볐다. 눈물을 다 닦아냈지만,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단테의 모습이 흐리게 보였다.
라파엘은 부연 인영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단테.”
가까이 다가온 단테가 고개를 기웃하다 “응.”하고 대답했다.
“사실, 말 안 한 게 있는데, 나 너 좋아해. 많이 좋아해…….”
11년 뒤에나 만나게 될 사람이지만, 도저히 말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앞이 흐릿해서 단테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볼 수가 없었다. 다만 따뜻한 두 손이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단테가 라파엘에게 이마를 툭 부딪쳤다.
“나도. 내 새끼.”
“……어?”
라파엘의 눈이 빠르게 끔뻑였다. 속눈썹에 맺혀 있던 눈물이 툭툭 떨어지며 시야가 다시 선명해졌다. 사관학교 교정이었던 장소가… 두 팔 너비만 한 책상 하나, 그 위의 랩탑과 크리스마스라고 꾸며 놓은 미니 트리가 놓인 서재로 바뀌었다.
그리고 불쑥 어른스러워진 단테가 미소 지었다.
“잘 잤어?”
* * *
따끈한 손이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훑었다. 시야가 돌아와 다시 본 단테는 책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왜 여기서 자고 있어. 졸리면 침대로 와서 같이 자지.”
그는 얼굴선도 갸름하고 시선이나 표정도 여유로웠다. 학생 시절보다 머리가 좀 더 길고, 어깨나 팔도 훨씬 단단했다. 그리고, 애인 사이가 된 라파엘을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다가온 손가락이 잠기운이 남아 끔뻑거리는 눈가를 문질렀다. 라파엘을 잠시 보고 있던 단테는 허리를 숙였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 쪽, 따뜻한 것이 닿았다.
“키스도 받았으니 이제 그만 잠에서 깨어나시죠.”
“단테…….”
꿈과의 경계가 스르륵 무너져 내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윤곽이 완벽히 드러났다. 라파엘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쑥쑥 자라 어른이 된 단테에게 꼭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이제 안 아파?”
“음.”
작은 단테와 똑같이 그의 눈썹도 들썩였다. 그는 한 손은 자신의 이마에, 다른 한 손은 라파엘의 이마에 짚었다.
“거의 내린 것 같아. 몸 아픈 것도 많이 가셨고.”
“아…….”
“늦었지만 저녁 먹고, 트리 장식 켜고, 촛불 불자.”
단테가 걸터앉아 있던 책상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둑어둑해진 방 안의 불을 켰다. 라파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뒷모습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뻗어 그를 와락 품으로 당겼다.
“단테에.”
“응. 라피.”
라파엘은 있는 힘껏 그의 옆얼굴에 뺨을 비볐다. 역시 듬직하게 버텨 서는 선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꿈속에서 이렇게 하고 싶은 걸 몇 번이나 참았는지 모르겠다.
“어리광이야?”
“크리스마스 선물 받는 겁니다.”
“겨우 이걸로?”
라파엘은 단테에게 매달려 서재 밖으로 나왔다. 평소라면 단테의 든든함을 믿고 조금 더 무게를 실어 기댔겠지만, 오늘은 그가 아프므로 닿아 있기만 했다. 단테가 자신의 어깨 위로 내밀어진 뺨을 톡톡 두드렸다.
“뭐 선물로 받고 싶은 거 있어?”
“음…… 단테 어릴 적 사진이요.”
“너 스토킹 아직 안 끝났구나.”
라파엘은 그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깊게 들이마시며 웃었다. 이번엔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일어나 그의 시간 일부를 훔쳐볼 수 있었지만, 그 외에도 보지 못한 단테의 모습을 많이 알고 싶었다.
“성당에 좀 남아 있으려나. 어머니께 물어볼게. 사관학교 신입생 때 찍은 사진은 있었던 것 같다.”
“저 그거 완전 갖고 싶습니다! 진짜 귀여울 것 같습니다!”
“너만 할까.”
단테는 피식 웃었지만 라파엘은 사진에서 느껴질 귀여움을 확신할 수 있었다. 못내 느껴질 사랑스러움까지도.
“아.”
집 안의 어딘가를 본 단테가 짧게 감탄했다.
“라파엘.”
“네에.”
“메리 크리스마스.”
그가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하늘에서 하얀 눈송이가 사락사락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검푸른 색으로 변한 겨울밤에 흰 장식들이 더해졌다.
단테는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열자 함박눈이 쏟아지는 풍경이 선명해졌다. 단테가 꾸민 트리 꼭대기의 별에는 어느새 소복이 흰 이불이 덮여 있었다. 단테의 등에 붙어 있는 라파엘은 그를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단테.”
태어나 처음 기념한 크리스마스는 세상에서 가장 멋있고, 다정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였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혼자 아프지 않으며, 다시는 아픈 일이 생기지 않도록 자신이 막아줄 사람이었다.
“단테는 무슨 선물이 받고 싶습니까?”
온 하늘이 그의 첫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듯 눈을 뿌렸다. 라파엘의 품에 안겨 그 모습을 보는 단테가 기분 좋게 웃었다.
“내 선물로는.”
단테가 고개를 돌려 어깨 위의 그와 눈을 마주했다.
“우리가 만나기 전의 시간보다, 만난 이후의 시간이 훨씬 더 길어질 때까지 같이 있어 줘.”
라파엘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닿은 곳에서부터 포근한 온기가 피어올랐다.
온 세상이 하얗게 빛나고, 함께 있는 시간은 벅찼다. 지금만큼은 세상 모든 것이 그를 위해 지어진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 선물은 이 순간으로 모든 게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