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26)

2. Romantic Captain's Darling

한 번씩 아주 기분 좋은 우연이 찾아온다. 같은 집에서 생활을 공유하면 함께하는 시간에 비례해 행운은 더 빈번하게 나타났다.

대문 앞에 멈춰선 차의 창문이 내려갔다. 운전석에 탄 사람은 창문이 다 열리기도 전부터 밖으로 머리를 쑥 빼고 반갑게 웃었다.

“팀장님!”

퇴근해 귀가하던 단테 역시 그를 발견하고 걸음을 서둘러 다가갔다. 그리고 창밖으로 내민 머리를 쓰다듬었다.

“타이밍 좋네. 얼른 차 대고 들어와.”

“네에!”

라파엘은 눈을 접고 하얀 이를 보이며 활짝 웃었다. 차고로 들어가는 차가 들썩들썩 춤을 췄다.

그렇게 좋을까. 단테는 웃으며 대문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 앞 복도에서 잠시 기다리니 우당탕 소리와 함께 차고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단테는 펄쩍 달려든 라파엘을 받아 안았다. 가슴 위에 묵직한 무게가 얹어지고, 팔로 다 감싸지 못한 등에 양손이 놓였다.

“하루 종일 너무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라파엘처럼 살가운 표현은 어려운 단테는 한참 품 안에 그를 가둬두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 * *

헤어짐의 기간 8시 30분부터 19시까지. 대략 10시간 만의 상봉에 감격한 애인을 달래는 임무를 완수한 단테는 군복 상의를 풀며 드레스룸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때맞춰 울린 휴대폰을 확인하고 눈썹을 구부렸다.

하아. 짧은 한숨을 내쉰 그는 가던 방향을 돌렸다.

“라파엘, 랩탑 좀 써도 될까? 15분 정도면 돼.”

“아, 예. 당연합니다. 마음껏 쓰세요.”

라파엘 헤인스워즈, 단테의 동거인이자 서재에 있는 PC의 주인은 잠시 뒤 벌어질 미래를 알지 못하고 흔쾌히 허락했다.

단테가 서재로 들어간 사이 먼저 옷을 갈아입은 라파엘은 저녁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먼저 아침에 재워둔 고깃덩어리를 냉장고에서 꺼내고 야채를 잘랐다. 모양을 맞춰 예쁘게 잘라 보려 노력해도 단테가 숭덩숭덩 칼질한 것보다도 비뚤거렸다. 몇 달 집에서 살림을 해본 걸론 수년의 자취 경력을 따라잡긴 무리였다.

그래도 단테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맛있게 먹어줄 것을 알아 시무룩하지 않았다. 계속해 나머지 재료 손질을 이어갔다. 단테가 조리대 앞에 서 있는 뒷모습도 멋지고 섹시하지만, 역시 라파엘은 자신이 단테에게 무언갈 해주는 게 더 좋았다.

오늘 메뉴는 두툼한 스테이크와 구운 야채였다. 사실 두 사람의 식사는 헤인스워즈 집안의 영양사가 구성한 식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거기에 추가로 단테의 건강을 바라는 라파엘의 마음이 담뿍 들어갔다.

라파엘과 함께 살며 어느 정도 챙기기 시작했지만, 단테는 기본적으로 먹는 것에 무심했다. 꼬박꼬박 요리를 하는 지금도 본인보단 먹성 좋은 어린 애인을 챙기려는 게 컸다. 언젠가 한 번 자신이 집안 모임으로 자리를 비우고 돌아오니 그는 간식으로 사 둔 견과류로 식사를 대체한 적도 있었다. ‘너도 없는데 굳이 차려 먹을 필욘 없어서’가 이유였다.

그래서는 안 된다. 라파엘은 두 사람의 갈색 머리와 금발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오순도순 살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병마 없이 함께, 매일이 뜨거운 한평생을 보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건강이 필수이다. 둘 다 운동량은 충분하니 균형 잡힌 식사가 더해지면 완벽해질 것이다.

어린 신부는 원대한 꿈을 품고 고기 두 덩어리를 오븐에 넣었다. 더 큰 쪽이 단테의 몫이었다.

재료 준비를 마치고 시간을 확인해 보니 단테가 컴퓨터를 빌린 지 20분쯤 지나 있었다. 라파엘은 서재로 다가가 고개를 쓱 내밀었다. 방 안엔 군복 상의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고, 검은색 티셔츠 차림으로 앉아 있는 단테가 보였다.

“팀장님, 시간 조금 더 걸리십니까?”

“아, 어… 아니. 당장 해야 되는 건 다 마쳤어.”

“그래요?”

서재 밖에서 대기하던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라파엘은 여전히 단테에게 어서 나오라 손짓하기보단 먼저 성큼성큼 단테에게 다가가는 편이었다.

라파엘이 단테가 앉은 의자 옆으로 와 섰다. 그런데 모니터에서 라파엘에게로 옮겨진 시선이 약간 가늘었다.

“……하아. 야, 라파엘.”

“예. 왜 그러십니까?”

단테가 미간에서 힘을 풀지 않은 채 뒷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일부러 본 건 아닌데, 너 대체 뭘 검색해 보는 거야.”

“예? 검색이요?”

“컴퓨터에 검색 기록 남은 거. 네가 찾아본 것들이잖아. 안 볼 수가 없더라.”

단테가 화면을 가리켰다. 포털 사이트의 가운데 위치한 검색바 아래로, 무방비하게 방치된 라파엘의 호기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제도 군인 애인 데이트

30대 남자 군인 선물

군인이 좋아하는 체위

특별한 체위

단테의 신곡

단테 천사 이름

천사 이름 페티시

천사 이름 페로몬

30대 남자 선호 체위

남자 애인 많이 느끼게

라파엘의 눈동자가 변명을 찾아 또로록 굴러갔다. 그보다 단테가 허리에 손을 짚고 일어나는 게 빨랐다.

“내가 인터넷으로 연애 공부 하라 했어, 말라 했어. 천사 이름 페티시는 또 뭐야. 세상에 그딴 게 어디 있어.”

“아, 아니, 그냥. 단테를 보면 왠지 있을 법도 하고, 저도 알아두면 좋은 내용들… 흡.”

“어쭈.”

불길함을 느낀 라파엘이 양 뺨을 감싸며 뒤로 몸을 물렸다. 두 볼을 꼬집으려 했던 단테의 손은 허공만 움켜쥐었다. 단테는 흐트러짐 없이 바로 한 발을 내디뎌 라파엘의 볼을 추격했다.

땡―

바로 그 때 고기를 익히던 오븐이 완료 시간을 알렸다. 라파엘이 헤헤 어색하게 웃으며 부엌 방향을 가리켰다. 얼굴에 살았다는 안도가 가득했다.

“으이그.”

얄미운 애인을 뾰족하게 흘긴 단테는 서재 밖으로 나갔다. 라파엘은 랩탑을 얼른 덮고 단테를 따라갔다.

단테는 오븐을 열고 구워진 고기를 꺼내 프라이팬에 올렸다. 치이익 군침 도는 소리와 함께 팬에 두른 기름에 육즙이 배어났다. 이어 프라이팬의 남는 자리엔 라파엘이 썰어 둔 야채가 담겼다. 센 불에서 야채 표면이 함께 노릇하게 익어갔다.

“팀장님, 제가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네가 했잖아. 됐어. 금방 하니까 가서 앉아 있어.”

“금방 하시면 저 팀장님 뒤에서 끌어안고 있고 싶은…데…….”

“…….”

수작을 부리는 라파엘을 테이블 쪽으로 밀던 단테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라파엘은 미묘하게 찡그린 단테의 표정을 발견했다.

“단테?”

“…….”

“왜… 그러십니까?”

라파엘은 허리를 지분거리던 손을 슬그머니 치웠다. 단테는 잠시 침묵하다 알맞게 익어 따뜻한 김을 내는 요리들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냐. 일단 식사부터 하자.”

“예…….”

“음식 접시에 담아갈게. 테이블 준비해 줘.”

그는 단테에게 더 치대지 못하고 테이블로 향했다. 가는 내내 연녹색 눈동자가 단테를 불안하게 흘끔였다.

라파엘은 테이블 위 각자의 자리에 식기를 각 맞춰 배열했다. 한쪽의 조미료통도 어쩐지 거슬려 반듯하게 줄을 맞췄다. 군대에서도 이 정도로 칼각을 잰 적은 드물었을 것이다.

다시 단테를 보자 때마침 눈이 마주쳤다. 푸짐하게 채운 접시 두 개를 들고 다가오던 단테가 한쪽 입술을 씩 올렸다. 아… 기분 나빴던 게 아닌가. 라파엘은 잠시 철렁했던 심장을 제 자리에 돌려놓았다.

“잘 먹겠습니다.”

단테는 짧게 손을 모았다가 식사를 시작했다. 딱히 식전 기도를 하는 건 아니고, 그냥 몸에 밴 습관이라고 했다. 편한 장소에서 식사할 때만 나오는 행동임을 알게 된 날 라파엘은 상당히 흐뭇했었다.

단테의 접시 위에서 한입 크기로 잘린 고기가 입 안으로 들어갔다. 속눈썹 밑의 눈동자 색이 빛 아래 있을 때보다 더 짙어졌다. 갸름한 뺨을 몇 번 움직인 그는 물컵을 당겨와 목을 축였다. 그의 동작과 함께 각진 어깨가 움직였다.

단테가 입고 있는 상의는 활동성이 좋도록 몸에 조금 붙는 면 티셔츠였다. 그래서 옷 위로도 길고 깊은 빗장뼈의 윤곽이 다 보였다. 밖에선 군복 깃 때문에 가려져 있었지만, 티셔츠만 입으니 아슬아슬한 위치에 라파엘이 주말에 남긴 흔적도 몇 개가 보였다.

단테는 섹시하다.

하루에도 백몇 번쯤 한 생각을, 라파엘은 다시금 했다.

남자다운 목선은 식사를 넘길 때마다 꿀꺽 진동했다. 그 아래로 내려오면 근육의 굴곡을 따라 어느 곳은 팽팽하게, 어느 곳은 느슨하게 옷주름이 졌다. 그리고 가슴 쪽에… 아주 도드라지진 않아도 라파엘의 눈을 끌 수밖에 없는 요철이.

“이게.”

단테가 포크로 툭툭 테이블을 두드렸다.

“식사 앞에 두고 딴 걸 보며 입맛 다시고 있네.”

“앗, 아, 아니, 아닙니다. 입은 빵 먹느라 그런 겁니다.”

라파엘은 들고 있던 동그란 빵을 방패처럼 내밀었다. 단테가 코웃음을 쳤다.

“그 빵처럼 질근질근 씹어놓은 어딜 보고 있었겠지.”

“지, 질근질근은 안 했습니다…….”

“…….”

“그냥, 팀장님 몸에 흔적이 야해 보여서 조금 보고 있었, ……?”

단테의 눈썹이 별안간 확 찌푸려졌다. 그의 눈동자가 라파엘을 떠나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싸늘한 표정을 목격한 라파엘의 변명도 뚝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단테……?”

“아니다. 음흉한 눈 내리고 마저 먹자.”

“옙.”

라파엘은 고개를 아래로 푹 숙여 음식을 입에 넣는 데에만 집중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단테가 자신의 행동들을 웃으며 봐줄 기분이 아닌 모양이었다.

얌전히 식사만 하자고 마음먹은 라파엘의 눈앞으로 뼈가 도드라진 손마디며 팔목, 소매를 살짝 걷은 팔뚝이 오고 갔다. 그게 정면으로 보는 것보다 더 감질맛 나 자꾸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리고 이 각도면 눈동자를 위로 굴렸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게 가슴일 수밖에 없었다.

라파엘의 눈동자는 어느새 눈 아래쪽 신경이 당길 정도로 위를 향해 있었다. 입으로는 밍밍한 줄도 모른 채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맨 빵을 씹으며.

“아, 진짜.”

단테가 한숨과 함께 들고 있던 나이프를 탁 내려놓았다. 앗, 라파엘은 황급히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런데 단테는 마치지 않은 식사를 두고 아예 자리에서 일어났다.

“팀장님?”

“아까부터 한두 번도 아니고 거슬리게.”

“어, 어…….”

싸늘한 목소리를 듣고 라파엘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주한 건 찌푸려지다 못해 짜증이 가득 어린 단테의 표정이었다.

“티, 팀장님, 기분 나쁘셨,”

“마저 식사해. 내가 나갈 테니까.”

“……예?”

농담이 아닌 듯 단테는 겉옷조차 걸치지 않고 그대로 현관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라파엘이 그를 따라 몸을 일으키는 순간 현관문이 닫혔다. 쾅 소리와 함께 라파엘의 심장도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내가 너무 심했나? 너, 너무 변태 같고 노골적이었나? 사실 단테가 관대하게 넘어가 준 줄 알았던 검색 내용도 좀, 변태 같긴 했다.

그렇지만 자신은 검색 능력이 별로 없어서 사실 대단한 건 못 봤다. 이건 사실이었다!

라파엘은 문득 애인이 몸만 바라는 것 같을 때 권태기가 온다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니야. 나는 팀장님 몸뿐만 아니라 다 좋은데…….’

지금 혼자 항변해봐야 아무 소용없었다. 단테는 이미 화가 나서 나가버린 뒤니까. 라파엘은 단테가 나가버린 뒤 한 뼘도 움직이지 못한 몸을 간신히 움직여 자리를 박찼다.

“단테에…….”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온 얼굴이 이미 울상이었다. 개미만 한 목소리로 간절하게 부르며 주변을 둘러보자, 울타리의 모서리 진 곳에 단테가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었다.

혹시 저기에 나를 파묻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가.

더더욱 서러운 얼굴이 된 라파엘이 싹싹 빌 각오를 굳히고 그에게 다가갔다.

“티, 팀장님, 저, 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아니, 죄송합니다. 이제 절대 안 그럴……!”

“라파엘.”

라파엘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가 말했다.

“조용히 이리 와 봐.”

라파엘은 종종걸음을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옆에 서자, 단테가 라파엘을 파묻을 곳, 아니, 잔디 위를 가리켰다.

야―옹.

양지바른 땅 위에는 이미 자리를 차지한 선객들이 있었다. 검은색, 노란색, 그리고 얼룩무늬의.

라파엘의 눈이 빠르게 끔뻑였다.

“……고양이…네요?”

“응. 여기 고양이 문이 있었어. 원래도 사람 손 타던 녀석들인가 봐. 도망치질 않네.”

고양이들의 등 뒤 담벼락 아래쪽에는 작은 동물이 드나들 법한 문이 나 있었다. 그곳을 통해 들어온 고양이들은 제집 침실인 양 잔디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단테에게 턱을 긁힌 고양이가 가르릉 울었다. 단테 역시 조금 전 싸늘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부드럽게 웃었다.

“아까부터 내내 밖에서 부스럭거리기에 누가 쓰레기라도 던져 넣나 했지. 그런데 얘네들이었네.”

“……아, 아아. 그럼, 그래서 계속 밖을 노려보셨습니까?”

“음? 넌 몰랐어?”

“예. 저는 못 들었습니다.”

“이거 훈련을 잘못 받았네. 사수가 누구야. 데리고 와.”

“여기…….”

라파엘이 단테의 옷깃을 잡았다. 단테가 라파엘을 보며 씩 웃었다. 그 미소에 별다른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평소의 단테와 똑같았다. 정말로 바깥에서 나는 소리가 거슬려서 불쾌해했고, 라파엘에게 짜증을 드러낸 것도 똑같이 밖의 이상한 소리를 들었으리라 생각해 그런 것이었다.

하아아. 라파엘은 무너지듯 옆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얼룩 고양이가 놀라 털을 바짝 세웠다가 단테의 손등 뒤로 물러섰다.

“저 팀장님이 화나신 줄 알았습니다.”

“화는 났지. 우리 집 마당에 이상한 짓 하는 사람인 줄 알았을 땐.”

“아니 그거 말고, 저한테요…….”

“너한테? 왜?”

“…….”

“어이구, 혼자 또 무슨 생각을 했길래 이렇게 쪼그라들었어. 이리 와.”

단테가 시무룩한 라파엘의 뺨을 당겨 쪽 하고 입술을 댔다.

“내가 화났는데 이런 거 해줄 사람은 아니잖아?”

“네에…….”

라파엘의 콧등이 들썩였다. 이제야 완전히 마음을 놓은 라파엘이 제일 큰 치즈 고양이의 몸통 쪽으로 손을 뻗어 보았다. 손끝만 닿은 조심스러운 행동이라 고양이는 흘끔 쳐다보고 말 뿐이었다.

반면 단테가 턱을 긁어주던 검은 고양이는 아예 하얀 배를 내놓고 신나게 쓰다듬어지며 가르릉거렸다. 단테의 입술이 조금 더 빙긋 위로 올라갔다.

한참 기분 좋게 울던 검은 고양이가 일어나자, 뒤이어 라파엘이 소심하게 쓰다듬던 치즈 고양이가 그를 버리고 단테 앞으로 갔다. 앞선 친구가 그랬듯 드러누운 고양이의 배도 골골 소리가 나도록 쓰다듬어졌다. 세 번째로 남아 있던 점박이 고양이마저 줄을 서듯 단테에게 다가왔다. 만족할 만큼 신나게 손길을 받은 고양이들은 하나씩 들어온 작은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마지막으로 점박이 고양이의 꽁지에 붙어 웅크린 커다란 덩치의 사람이 단테의 앞으로 종종 걸어왔다. 저도 똑같이 쓰다듬어달란 듯 내밀어진 금빛 머리통을 보고 단테는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고양이인 척하는 거야?”

차마 야옹 소리까지 낼 뻔뻔함은 없으므로 라파엘은 단테의 품에 머리만 들이밀었다. 으이그, 웃음 담긴 타박 뒤로 라파엘의 양 얼굴이 원하는 만큼 쓰다듬어졌다. 어느새 멀찍이서 들리는 고양이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둘은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맞다, 식사 다 안 했지…….”

쓸쓸히 남겨져 식어간 음식들을 보며 단테가 탄식했다. 테이블 앞에서 이걸 어쩐다, 하는 얼굴로 서 있는 단테의 등이 와락 끌어안겼다. 범인은 테이블을 보자 조금 전의 서러웠던 철렁함이 떠오른 라파엘이었다.

라파엘은 단테의 허리를 단단하게 끌어안고 그의 목에 뺨을 문질렀다. 단테는 팔을 뒤로 넘겨 바짝 밀착한 사람의 등을 토닥였다.

“왜 또 낑낑거려.”

“저 진짜 팀장님 화나신 줄 알고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아십니까.”

“그러니까 내가 왜 너한테 화가 나. 뭐 잘못했어?”

“제가 팀장님 몸 자꾸 쳐다보고…… 이상한 거 검색한 기록 들켰잖습니까.”

“너만 내 몸 보겠냐. 나도 네 애인인데 네 몸 봐. 그걸로 화내면 양심이 없지. 검색도 뭐, 황당하긴 해도 화낼 일은 아니잖아?”

라파엘이 고개를 더욱 폭 묻었다. 단테를 뒤에서 꽉 안은 힘도 평소보다 세졌다.

“내가 너한테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하지 무작정 나가버리진 않아. 조금만 화내도 펑펑 우는 사람 두고 어떻게 그래.”

“안 웁니다.”

목덜미에 푹 파묻힌 입술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티끌만큼도 신빙성이 없는 거짓말이었다.

“오해할 만한 행동 한 건 미안해. 하지만 너도 내가 이상하다 싶으면 눈치 보기 전에 먼저 물어 봐. 나만 우리 애인 사이로 생각하고, 넌 여태 나 상관으로 대하는 거 아니지?”

“아닙니다. 절대…. 단테는 제 애인입니다!”

어떻게 애인 사이가 됐는데!

“알겠으면, 인터넷에서 쓸데없는 거 찾아보지 말고 고양이 먹이나 검색해 봐. 아까 걔네 내일 또 올지도 모르잖아.”

“아, 옙.”

라파엘은 단테를 안은 그대로 휴대폰을 두 사람 앞에 꺼냈다. 단테는 라파엘에게 기대 검색 결과를 보았다.

“잠깐만. 이거 열어 보자.”

단테의 손끝이 화면을 조작했고, 라파엘은 주도권을 내어준 대신 고개를 어깨 위로 더 깊이 들이밀었다.

“고양이 사료가 있으면 좋고… 아니면 삶은 닭고기……. 물그릇이랑 담요.”

중얼거리며 화면을 스크롤하던 손가락이 라파엘의 손가락과 닿았다. 두께는 비슷하지만 라파엘의 손 쪽이 단테보다 희고 긴 편이었다. 라파엘은 비켜주지 않고 단테의 손가락을 손끝으로 슬쩍 눌렀다. 간지러운 접촉이었다.

단테가 뒤를 돌아봤다. 까분다는 시선을 보내는데도 라파엘은 화면을 두드리던 손등을 아예 덮고 쓰다듬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죠. 천사님.”

“무슨 시험이요?”

라파엘이 능청스럽게 되물었다. 둥글어진 두 시선 사이에 뜨끈한 기류가 흘렀다. 라파엘이 티셔츠 안으로 슬금슬금 손을 넣었다. 손끝이 배의 굴곡을 따라 톡, 톡 한 칸씩 위로 올라왔다. 단테가 짓궂게 수위 섞인 농담만 던져도 파드득 놀라던 라파엘은 이제 이런 분위기도 즐길 줄 알게 되었다.

“손, 어디까지 올라오게, 하아…….”

말리는 단테를 모르는 척, 라파엘은 손바닥으로 가슴을 덮고 어깨에 뺨을 기댔다. 주무르듯 가볍게 쥐었다 펴는 손 아래에서 유두가 자극당했다. 이쯤 되면 단테도 열기가 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 돼. 내일 평일이야. 우리 출근해.”

결국 단테가 단호하게 손목을 끌어내렸다.

“한두 번 하고 말 거면 안 하는 게 나아. 너 또 잠 못 잔다.”

두 사람의 섹스 기피 사유는 다른 커플들과 조금 달랐다. 정사를 치룬 여파가 힘들어서가 아니라, 다음 날이 평일이면 수면시간의 문제로 욕심껏 몸을 섞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럼 적당히 자제해서 하면 되지 않을까, 라고 단테도 처음엔 생각했다. 하지만 어중간한 섹스는 마른 땅에 물 한 잔을 붓는 격이었다. 욕구는 손톱만큼 채워졌는데, 갈증은 이전의 배로 남아 다음 날이 더 괴로워졌다. 특히 사랑과 혈기가 펄펄 넘치는 라파엘에게는 더욱 그랬다.

그러므로 해소시키지 못할 불을 붙이느니 차라리 아예 안 하는 게 나았다.

“너 전에 졸라서 한 번 했을 때, 그 다음 날에 아주 넋 빼놓고 있었다는 거 다 들었어. 절대 안 돼.”

“예? 누가 그랬습니까?”

“가브리엘 포트만 비서님. 집에 무슨 일 있냐 물어보시더라.”

“넋 놓은 적 없는데… 그런데, 둘이 언제 또 친해지셨습니까? 역시 이름이 천사라……!”

“아니라니까. 친해지긴 뭘 친해져. 헤인스워즈 변호사님이 너 정신 못 차리면 나한테 이르라고 비서실에 내 번호 줬고, 그분이 대표로 전화하신 거지.”

“아, 누나는 진짜.”

“주말에 하자. 대신 주말에 실컷 해. 알겠지?”

라파엘은 뚱한 얼굴로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단테는 엉덩이를 토닥여 마저 달래주곤, 식은 접시를 옮겨 프라이팬에 다시 불을 켰다. 쪼르르 쫓아온 라파엘은 더 이상 손장난을 하진 않는 대신 찰싹 붙어 있었다.

그의 핑계를 대긴 했지만 단테도 전날 몸을 섞으면 집중력이 많이 떨어지긴 했다. 무엇보다 라파엘과 본격적으로 몸을 섞으려면 이제 단테도 어느 정도는 각오를 다져야 했다.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한 그는 더 이상 예전의 병아리가 아니었다.

매주 금요일 저녁 식사 후부터 토요일 자정이 좀 넘을 때까지. 그리고 토요일 밤부터 일요일 어슴푸레한 새벽까지가 둘의 절제 없는 시간이었다.

시간의 절댓값으로만 치면 토요일에서 일요일 사이 섹스가 훨씬 길었다. 하지만 체력 소모 정도는 양일이 거의 비슷했다. 금요일 저녁에는 닷새를 참은 라파엘이 단테에게 거칠게 파고들며 몰아붙이고, 토요일 밤에는 피부 위에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온몸을 하나하나 애무하며 몸을 섞는다.

어느 쪽이든 단테에게는 ‘그 어리숙하던 녀석이 이제 아주…….’ 할 만한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금요일 저녁은 약 24시간 뒤였다.

떠올리니 애써 가라앉힌 열기가 다시 올라왔다. 안 돼. 여기선 연상이 먼저 정신을 차려야 했다. 단테는 등 뒤의 라파엘을 흘끔 보고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아까 고양이 말인데. 너나 나나 퇴근 후에 들어오니 닭을 삶아 준비해주긴 어렵고, 내일 집에 오는 길에 마트 들렀다 오자. 장 볼 겸, 사료 담아오게.”

“예. 그럼 제가 사령부로 마중 가겠습니다.”

“아냐. 오지 마. 너 저번에 기다리다가 사람들 나오니까 숨고 그랬잖아. 따지고 보면 전 직장인데 불편할 거 내가 그동안 생각 못 했지. 그냥 마트에서 만나.”

“아, 아뇨. 그래서 숨은 게 아니라. 사실, ……아버지…가 보여서 그런 겁니다.”

“어? 왜? 너 아직도 각하와 화해 못 했어?”

“화해…랄 게 있나요. 그냥 아버지가 화 안 풀리신 거지.”

군인으로서 자부심이 가득한 총사령관이 복무기간을 반년도 못 채우고 군복을 벗은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건 단테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에 카밀라의 말로는 그도 전후사정을 듣고 이해를 했다고 했는데……. 설마 아직도 이어지고 있을 줄이야.

“신경 쓰지 마세요. 아버진 원래 저한테 엄하셨습니다.”

“…….”

“자존심 때문에 그러시는 거니, 시간 지나면 해결될 겁니다. 저도 크게 고민하는 일은 아니니까요.”

라파엘이 단테의 앞에 얼굴을 내밀었다. 빙긋 웃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래.”

다만 그에게 준 단테의 대답은 조금 무거웠다.

* * *

“베일리. 식사하러 가야지.”

“예. 알겠습니다.”

“맛있게 먹어라.”

상관이 단테의 등을 두드리고 지나갔다. 단테는 보던 것을 정리해 내려놓고, 옆자리의 선임과 함께 식당으로 이동했다. 선임은 전혀 모르겠지만, 매일 단테와 함께 업무를 보고 점심 식사를 같이한다는 이유로 라파엘의 불타는 질투의 대상이 된 사람이었다. 물론 단테와 그는 평범한 선후배 사이일 뿐이었다.

군대 역시 여느 조직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다. 전담하는 일과 그 분위기가 다를 수는 있으나, 보편적인 정서는 비슷했다.

예를 들어, 야근 없이 빠르게 퇴근하고 싶다든가.

아니면 식사 중엔 웬만하면 직급 차이가 큰 상사와는 마주하고 싶지 않다든가 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까마득히 높은 분들이 사방에 포진한 제도의 본부에서는 바로 그런 상관들과 만날 일이 너무도 많았다. 특히나, 그들에게 오찬·정찬 회의 등이 없는 날이라면 식당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라졌다.

그날이 오늘일 거라고 예상을 했다면, 지금 식당 안에 있는 인원의 절반 이상은 기꺼이 부대와 500m 정도 떨어진 음식점을 이용했을 것이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을 즈음, 식사 중이던 군인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경례할 일이 생겼다. 헤인스워즈 참모총장을 필두로 세 명의 장성급이 식당에 나타난 것이었다. 단테 역시 선임과 나누던 대화를 멈추고 일어났다.

“편히 앉아 마저 식사하게.”

경례를 받은 사령관이 군인들 사이를 지나가는 동안, 각 부서의 중간급 관리자들의 시선이 빠르게 회전했다. 그리고 작전과에서 가장 많은 시선을 받은 건 막내인 단테였다. 단테도 이 상황을 충분히 예상했다.

“예…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고생해라.”

선임이 속삭이며 팔꿈치를 툭 두드렸다.

아무도 장성급들의 테이블 주변으로 가고 싶지 않아 하더라도, 그들 주변 전체를 부자연스럽게 비워둘 수는 없다. 노골적으로 피하는 게 드러날 테니까.

그래서 보통 그 테이블 주변엔 똘똘한 막내 라인을 보내 앉히곤 했다. 어느 정도 재치는 있어 묻는 질문에 대답이 가능하고, 말이 헛나와도 어린 실수로 웃으며 넘어갈 수 있으니까.

그렇다 해도 사실상 최전방 끄트머리까지 몰린 자리이긴 했다.

장성급들의 바로 앞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 중 그나마 단테는 헤인스워즈 총사령관에 대한 면역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함께 불려온 다른 사람들은 허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기계처럼 팔을 움직여 식사했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소화제를 찾을 표정으로. 단테도 조용히, 하지만 신속하게 접시를 비워갔다.

“거기, 자네.”

제1급 요주의 테이블에서 들린 목소리에 모두의 눈썹 끝이 그 방향으로 향했다. 이어 그 방향은 목소리의 주인인 합참의장의 시선이 닿은 곳으로 다시 옮겨졌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단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몸을 곧게 세웠다.

“소령 단테 베일리.”

“오, 맞군. 테네시 역 테러를 막은 사위.”

다행히 ‘사위’라는 부분은 합참의장이 헤인스워즈 총사령관을 돌아보며 말해 주변으로 멀리 퍼지지 못했다. 그가 단테에게 손짓했다.

“이리 자리 옮겨 보게. 같이 얘기 한번 나눠보고 싶었는데 잘됐군.”

“영광입니다.”

단테는 같은 테이블에 모인 전우들로부터 애틋한 시선을 받으며 세 사람이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단테를 이곳으로 보낸 작전과의 상관들도 식사를 하다 말고 긴장한 얼굴로 이쪽을 주시했다.

단테는 세 명의 장군이 에워싼 자리에 접시를 내려놓고 조심스레 의자를 빼 앉았다. 면역이 되었다고는 했지만, 대놓고 이런 자리에 앉으니 허리가 뻣뻣이 굳었다. 단테를 흘끗 본 헤인스워즈 총사령관이 말했다.

“얘길 나눌 거면 일하는 시간에 빼 와서 부르든가, 아니면 비싼 거라도 사 먹이며 해야지. 고작 식당 점심 먹을 때 뭐 하는 건가.”

“벌써 사위 감싸나? 장래가 유망한 젊은 친구랑 잠깐 얘기 좀 하고 싶어 이러는 거 아니겠나.”

“젊은 친구들 저쪽에 잔뜩 있으니 저기 가운데로 가보게. 장군 셋이 새파란 소령 하나 둘러싸고 겁주면 보기 흉해.”

몇 마디가 더 오가고, 헤인스워즈 총사령관은 테이블에서 두 친구를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다른 젊은 군인들 사이의 빈자리에 앉는 만행을 저지르러 향했다.

“식사 들게.”

“예.”

그렇게 테이블에는 헤인스워즈 총사령관과 단테, 두 사람만이 남았다.

단테는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입 안이 말랐다. 이건 직급의 차이가 아니라, 어린 애인의 아버지 앞에 앉은 긴장이었다. 전날 라파엘에게서 아직 그가 언짢음이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직후라 마음도 묵직했다.

마주 앉은 총사령관이 단테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바로 옆 건물에 있다는 얘긴 진작 들었는데 내가 먼저 한번 부를 걸 그랬군. 현장에서 건너왔으니 적응이 쉽지 않았겠어. 일은 할 만한가?”

“예,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배워나가고 있습니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군.”

단테는 잠시 망설이다 말을 꺼냈다.

“……라파엘도 잘 지냅니다.”

“그놈 소식은 내 알 바가 아니네.”

슬쩍 꺼내 본 이름이 칼로 자른 것처럼 숭덩 차단됐다. 단테를 격려할 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화해를 못 했다더니 역시…….

“각하.”

단테는 속으로 짧게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라파엘이 군을 그만둔 건 아시다시피 저 때문입니다.”

“라파엘 녀석이 그렇게 말했나?”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아닌 걸세. 나도 그렇게 생각지 않고. 그놈은 제 분을 못 이겨 앞뒤 분간 못 하고 사고 친 거야.”

“각하, 그 사건은…….”

말을 덧붙이려는 단테보다 총사령관의 말이 더 빨랐다.

“자네가 내게 하려는 말이, 내 아들의 교제 상대로서 할 말이면 자네의 입을 통해 사죄나 변명을 듣고 싶진 않네. 아니면 육군 소령으로서 할 말인가?”

단테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대답했다.

“……둘 다입니다.”

주변에서 ‘저 녀석은 뭔데 육군 꼭대기와 저렇게 긴 대화를 하나,’ 하는 시선이 모였다. 단테를 이쪽으로 보낸 상관들도 조금 불안한 표정이 되었다.

그들을 볼 겨를이 없는 단테는 땀이 맺힌 손바닥을 허벅지에 문질렀다. 총사령관은 단테를 빤히 보다가 어디 해보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파엘을 보면 그에게 걸었을 각하의 기대가 짐작이 갑니다. 저 역시 사수였을 때 그를 보며 군인에게 이상적인 조건과 능력을 두루 갖췄다 생각했습니다.”

“겉보기에 멀쩡하고 힘만 좋으면 뭐 하나. 속이 물러 터진걸.”

군대와 안 어울리는 성격인 걸 알고는 계셨군……. 단테는 어제도 자신이 잠시 서늘한 태도를 보였다고 해서 안절부절못하던 라파엘을 떠올렸다.

“라파엘의 행동은 무모했지만, 그 덕에 저는 빨리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부족하나마 각하께서 가지셨던 기대에 책임을 함께 지고 싶습니다.”

“음.”

“……제가 여기서 지금까지보다 몇 배로 더 노력하겠습니다. 만족하실 만한 성과를 내 위로 올라가 라파엘의 자리를 대신하겠습니다.”

그래도 아마 친아들을 대신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때 그 일의 책임을 라파엘에게만 씌우는 건 부당했다.

“그러니, 자네를 보며 만족을 하고 라파엘 놈은 좀 봐달라고?”

“예.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청탁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라파엘이 새로 하는 일도 응원해주셨으면 합니다.”

말을 마치고 나니 어쩐지 허무맹랑한 꿈을 발표한 기분이었다. 육군 참모총장 앞에서 새파랗게 어린 소령이 뻗대는 꼴이라 생각하니 더 얼굴이 달아올랐다.

“…….”

하지만 진심으로 라파엘이 그 일로 인해 가족을 포함, 아무것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단테와 잠시 눈을 마주하고 있던 총장이 쯧, 하며 혀를 찼다. 그래도 마음에 차지 않는 말은 아니었는지, 조금 전보다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자네는 아직도 자네 뒤에 매달린 못 미더운 놈이 취향인가?”

단테는 라파엘을 떠올렸다. 단테에, 하며 그렁그렁해진 눈동자가 가장 먼저 그려졌다.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뿐이었다.

“예. 여전히 지켜주고 싶은 연하가 취향입니다.”

또. 그가 말을 이었다.

“못 미덥지 않습니다. 라파엘은 제게 단 한 번도 확신을 주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교제하며 단 한 번도 그의 마음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애정만큼 감정이 넘쳐나는 애인은 못 미더운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모습이야말로 완벽한 신뢰를 주었다.

“제가 반한 사람도 그런 우직하고 강단 있는 면이 있습니다.”

하긴, 이전에 몇 번을 거절해도 잠시 시무룩했다가 벌떡 일어나 다시 달려오곤 하던 녀석이었다. 겉모습은 물렁해도 아마 심지는 단테보다 굳건할 것이다.

“그렇군.”

조금 뒤 총장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보였다.

됐다……. 단테는 그제야 뻣뻣하게 굳은 어깨에서 힘을 풀 수 있었다.

잠시 틈 뒤에 총사령관이 말했다.

“워낙 청렴한 사람이라 몰랐겠지만, 자네를 제도로 부르게 된 데에는 내 의견이 어느 정도 들어갔네.”

솔직히 알고 있었다. 청렴결백이 눈치가 없다는 것과 같은 의미는 아니니까.

“하지만 어떤 이해관계도 없이 군인으로서의 모습만을 보고 정했던 걸세. 자네는 라파엘보다 배는 훌륭한 군인이니 그놈을 대신한다 생각할 필요 없네. 자네는 자네대로 지금처럼 훌륭히 군 생활 하며 올라가게. 부탁한 라파엘의 일은 내 따로 재고해 보도록 하지.”

“……예, 감사드립니다.”

“아, 물론 헤인스워즈 가의 사위가 되어 올라가면 더 좋을 걸세.”

단테는 그의 앞에서 처음으로 미소를 보였다. 그 뒤 말없이 식사가 이어졌지만 마음은 조금 편안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편하게 식사를 했느냐면, 그건 아니었지만.

이윽고 식사를 마친 총장을 따라 단테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단테에게 손을 내밀었다.

“현 육군참모총장으로도, 그리고 헤인스워즈 가문 대표로서도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크네.”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식당에서의 짧은 대화는 다행히 순조롭게 마무리가 되었다. 단테는 총사령관의 손을 잡으며 악수를 했다.

“아, 참. 그리고 자네 팬 페이지 회원으로서도.”

단테의 눈이 빠르게 끔뻑였다.

……예?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 가르쳐 주지 그랬나. 젊은이들 문화엔 문외한이라, 카밀라가 도와줘서 우리 부부도 겨우 가입했지 뭔가. 자네 활약도 칭찬하고, 요즘 세대 문화도 알고 아주 일석이조야.”

팬…. 우리 부부…. 가입…. 머릿속이 이해를 거부하는 문장을 겨우 맞췄다. 그리고 숨을 왈칵 들이마셨다.

그걸, 거기, 아니, 대체 왜!

“흠, 사실 오늘 단둘이 식사를 한 것도 사심이 약간은 담겨 있었네. 내 회원 레벨이 오르기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 더 열심히 해보겠네.”

“가, 감사… 합…….”

머릿속이 올해 최고치를 찍은 쪽팔림을 견디지 못하고 까맣게 뒤덮였다. 한참 뒤 그 끄트머리를 겨우 걷어내고서야 그는 이를 꾹 악물며 생각했다.

라파엘, 오늘도 뽀얀 볼을 5cm는 늘여줄 것이다.

* * *

미디어의 흐름은 빠르고, 사람들은 늘 새로운 관심거리를 찾아 이동한다. 제국을 떠들썩하게 달군 사건도 며칠이면 새로운 화제들에게 뉴스의 첫 번째 소식 자리를 내어주곤 했다.

지난가을, 온 포털 사이트와 뉴스를 장식한 테러 사건 역시 마찬가지였다. 테러 진압의 주역이었던 특수부대 소속 대위가 잠시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이후 미디어에 별다른 등장이 없자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그가 무사히 생존해 나온 영상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 때 세워진 팬 페이지의 활기도 일 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며 사그라들었다.

그리하여 팬 페이지 게시판지기, 라파엘 헤인스워즈(회원ID:그의강아지)가 품은 운영자 자리의 탈환 및 사이트 폐쇄라는 혁명의 꿈 역시 점점 다가왔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상황은 그의 생각과 다소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팬 페이지를 찾아올 정도로 단테에게 매력을 느낀 이들은 역시 취향도 그쪽과 맞닿아 있는 걸까.

어느 순간 그의 팬 페이지는…… 군인 애인을 가진 사람들의 온라인 모임 장소로 변해갔다.

[남친 수습 마치고 오늘 배치 나왔어요! 51사단 소대장으로 간다는데 잘 간 건가요?^^]

“아, 저런.”

라파엘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흘렀다. 하필 신임 소위가 51사단이라니. 당분간 주말을 포함해 남자친구는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많은 위로를 주는 게…….

[저 여기에 질문하는 게 맞나요? 특수전교육단 초급반 외박 잘리기도 하는지 여쭤봅니다. 2주째 못 보고 있어요.]

“음……?”

초급반은 금, 토, 일은 거의 무조건 내보내며 만에 하나 비상사태로 한 주가 잘리더라도 그 다음 주는 나가야 맞다. 이건 뭔가 좀 이상하다. 추궁을 해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애인 오랜만에 만났는데 등에 큰 멍 들어있네요… 훈련하다 다쳤대요… 씩 웃는데 멋있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함…]

“……후우.”

라파엘은 콧대를 붙잡아 슬픔을 참고, 익명의 공감 버튼을 눌렀다. 단테도 간혹 벗은 몸을 볼 때 전에 없던 잔상처가 하나씩 생겨 있을 때가 있었다. 깜짝 놀라 이게 뭐냐고 물으면 별거 아니라고만 하고…….

그래, 이런 교류의 장은 얼마든지 좋았다. 하지만 요즘 그의 신경을 거스르는 게시물들은 따로 있었다.

[베일리 대위보다 멋진 그 사람♥ 이번에 중위로 진급했어요 한창 때이긴 한가 봐요 남친이 대위님보다 잘생겨 보임♥]

“누굴, 누굴 비교해!”

마우스를 움켜쥔 손등에 핏줄이 뿌득 돋았다.

단테는 이 나라에서, 아니 지구상에서 제일 멋지고, 잘생겼다. 조각 같은 외면과, 강하지만 섬세한 내면이 모두 미의 이데아를 이룩한 완벽한 사람이다. 그 무결한 남자의 애인은 식식 뿜는 콧김으로 분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제 이 정도 위기는 거뜬했다. 이곳이 생긴 초기에는 단테의 사진을 남자친구 사진인 양 배경화면으로 해뒀다느니, 단테 같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느니 하는 글들도 많았다.

라파엘은 그 모든 시간을 장하게 견뎌내고 총괄운영자 바로 아랫자리까지 올라갔다. 도중에 뛰쳐나와 ‘내가 단테 애인이다!’하고 외치고 싶은 마음을 몇 번이나 눌러야 했는지.

“…….”

스크롤을 죽죽 내리던 라파엘은 책상에 지그시 턱을 괴었다.

그래도 이제 애인 자랑 삼매경이 되어버린 게시판에 한 번쯤은… 한 번쯤은, 그도 글을 올려보고 싶었다. 그리고 글의 주인공을 이 안에서 가장 멋진 애인으로 등극시켜, 단테보다 멋진 사람은 없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다.

골똘히 고민하던 라파엘은 커서를 옮겼다. 이사실 책상에 단정하게 앉은 자세와 걸맞는 진중한 표정이었다.

[세상에 하나뿐인 내 애인 자랑합니다♥]

작성자 : 그의강아지

특수전사령부에 재직 중인 애인을 둔 20대 중반 남자입니다. 애인이 저보다 연상이며, 동성 커플입니다.

처음 만날 때부터 제가 먼저 반해 쫓아다녔고, 사귄 지 이제 반년쯤 되었습니다.

사실 그전에도 애인은 절 많이 귀여워했습니다.

애인은 연상의 여유와, 특전사의 강인한 분위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애인보다 제 키가 더 큰데도 애인이 훨씬 듬직합니다.

저번에 절 아무렇지 않게 번쩍번쩍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작년에 제가 잠깐 백수가 됐을 땐 걱정 말라고, 평생 먹여 살려 주겠다고 했는데, 그 모습이 너무 멋지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제가 연하라 기대기도 하고, 애인 앞에서 울 때도 많은데 늘 어른스럽게 달래줍니다.

요새는 감수성이 더 풍부해졌는지 애인의 사소한 행동에도 감동을 받아 자꾸 눈물이 터집니다. 그러면 애인이 거칠거칠한 손으로 얼굴 감싸고 눈물 닦아주는데, 그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애인과 예쁜 사랑 하고 싶습니다.^^ 응원해주세요.

↳ MissU : 군인 애인이 있으셔선가 ~ 말투가 꼭 군인 같으세요 ~ 옮았나 ~ ? 앞날에 행복이 있을 거예요 ~ ~ ^ ^ *

↳ 8사단우리애 : 오 강아지님도 군인 애인 있으셨어요? 애인 분 진짜 스윗하네요. 내남친 좀 보고 배워라

↳ 영상100번 : 님은 애교 많은 타입이고, 애인은 그거 잘 받아주는 타입인 듯. 잘 만났음.

그다음으로 달린 댓글도 다들 사랑을 응원해주었다.

팬 페이지의 용도는 거의 변질됐어도, 단테의 팬페이지에 (익명이지만)그의 애인인 걸 자랑하는 글을 올리니 얄미운 여우짓을 한 기분이었다. 라파엘은 찔리는 얼굴로 사이트 창을 내리고 다시 일에 집중했다.

그러나 오늘도 그의 하루는 단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행복과 함께 욕심도 커져 갔다.

물론 오랫동안 동경하며 짝사랑한 사람과 동거하는 지금의 생활은 황홀할 정도로 기쁘다. 하지만 늘 조급한 자신과 뭘 해도 여유로운 애인과의 성격 차를 느낄 때면 종종 갈증이 났다.

단테가 자신을 사랑하는 걸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아주 많이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 또한 사그라들질 않았다.

가끔은, 한 번씩은 라파엘도 단테가 깜짝 놀랄 만한 일을 해주고 싶었다. 자신보다 7년을 더 산 그도 해보지 못한 일을 함께하고 싶다, 그에게 아주 특별하고 하나뿐인 일들을 잔뜩 만들고 싶다.

그래서 ‘이런 건 어떻게 알았어?’, ‘나도 처음이야.’ 같은 반응을 듣고 싶었다.

“…….”

몇 시간동안 멍하니 화면을 두드리다 보니 일이 어영부영 마무리가 되어갔다. 새로운 일들이 아버지의 심술 때문에 뒤로 밀려 당분간은 업무가 많지 않았다.

퇴근까지 잠시 생긴 짬 동안, 라파엘은 또 단테를 생각하며 화면을 보았다.

보고 싶다.

역시 마중을 나가야겠다. 단테도 자신이 이런 부분에서 말을 안 듣는단 건 예상했을 것이다.

* * *

[라피, 정말 미안.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고 돌아갈게.]

[기다리지 말고 집에 먼저 돌아가서 저녁 먹어. 나도 업무 처리하며 간단히 해결할 것 같아.]

아…….

라파엘은 아쉬움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표정으로 답장을 입력했다.

[괜찮습니다. 그럼 마트는 저 혼자 다녀올게요.]

그리고 2분쯤 뒤, 미안함이 듬뿍 담긴 답장이 왔다.

[내일은 주말이지? 이따 보자. 예쁜 내 새끼.]

“…….”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걸 알아도, 핸들 위로 시무룩하게 몸이 쳐졌다. 일찍 출발한 보람도 없이 자동차는 터덜터덜 단테가 있을 건물 앞을 떠났다.

“너무 바쁜 거 아닌가.”

적응기가 지나면 괜찮아질 것 같더니, 어젠 집에 와서까지 확인해야 할 게 있었고 오늘은 야근이었다.

단테가 제도로 발령이 났을 때 라파엘은 이제 그가 더 이상 현장에 나가지 않게 되어 잘됐다고 좋아했다. 그런데 막상 보니 매달 출장은 출장대로 가고, 책상 업무까지 산더미였다.

다행히 지금 단테의 주변에 데릭슨 에프런처럼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조직 생활에다가, 또 진급과 가장 가까운 부서다 보니 어느 정도 사람 간 문제는 있는 것 같았다. 본인의 ‘괜찮다’는 역치가 높아 그걸 동거하는 애인 앞에서조차 내색 않고 있는 것도 문제였다.

마트에 들러 고양이 사료, 식사 재료 등을 싣고 쓸쓸하게 집에 도착하자 원래 퇴근 시간에서 두 시간쯤 지난 시간이었다. 대문 밖 우체통엔 광고지가 그대로 들어있고, 아침부터 비어 있던 집 안에도 불이 꺼진 채였다. 일부러 느릿하게 장을 봤는데도 단테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보다.

라파엘은 사 온 물건들을 집 안에 옮겨놓은 뒤 사료를 납작한 접시에 덜어 마당의 고양이 문 앞에 놓았다. 그 앞에서 잠시 기다려 봤지만 전날 이 시간쯤 찾아왔던 고양이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마당을 서성이던 그는 다시 대문 밖으로 나와 담에 기대섰다.

해가 저물어 가는데도 공기에서 훈기가 느껴졌다. 작년에 그가 단테의 밑에서 막 수습을 마쳤을 즈음이 이맘때였다. 단테는 연회장에서 보낸 밤을 여전히 술김의 실수였다 말하지만, 라파엘은 이제 운명이라고 여겼다.

그 일이 아니었어도 자신은 단테를 사랑했을 것이다. 다만 용기가 부족했던 스물네 살의 자신이 그에게 다가가는 속도는 현저히 느려졌겠지. 또한 단테가 자신을 위해 아버지 앞에 섰던 그 순간의 감동과 더 커져버린 마음 역시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라파엘은 단테를 기다리며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잠깐 휴대폰을 보지 않은 사이 알람이 쌓여 있었다.

“음? ……아아.”

뭔가 했더니 아까 팬 페이지에 올린 게시글에 새 댓글이 달렸다는 표시였다. 충동적으로 올렸던 글을 생각하니 어쩐지 조금 민망해졌다.

대부분의 댓글이 연애를 응원한다는 뉘앙스였다. 하긴 여기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그런데, 스크롤을 내리던 라파엘의 눈썹이 움찔 구부러졌다.

↳ 제국의기상 : 덩치큰.사내가 왜 질질짜나. 애인에게 어울리는.듬직한. 성격이 되게. 내가 아는.어떤 놈닮아서.하는 말.

뭐야?

이 사이트는 이용자의 연령대가 비교적 젊은 편이었다. 단테 또래의 군인 애인을 둔 사람들이 찾아오다 보니 2030커뮤니티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런데 이 말투는 연령대가 좀…….

라파엘은 눈을 부릅뜨고 답댓글을 적었다.

↳↳ 그의강아지(작성자) : 애인은 제가 우는 모습도 귀엽고 좋다 합니다^^

단테는 가끔 자신이 눈물을 뚝뚝 훔치는 모습을 보고 ‘와씨, 저 얼굴은 반칙…….’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물론 그 스스로도 단테 앞에선 눈물을 줄이고 싶긴 하지만, 이런 조언을 들어서는 아니었다.

그렇게 입력 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새로 답댓글이 달렸다.

↳↳↳ 제국의기상 : 군인은우직하고강단있는 사람 좋아하네. 내가아는 제일 젊은 군인이.그랬음. 강직한 기상이 강건한.육체를 만든다는.는 말 모르나.?

“으으!”

20년도 전에 개정된 육군 표어의 등장에 라파엘은 몸서리를 쳤다. 「강직한 기상이 강건한 육체를 만든다.」 어릴 때 아버지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했던 말이었다. 자신이야 그런 환경 때문에 잊지 못하고 있다 해도, 이걸 기억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그런 사람이 아는 가장 젊은 군인이라 봐야 40대는 되었을 것이다. 어딜 이런 꼰대 아저씨가 단테랑 내 사이를 두고!

라파엘의 부릅뜬 눈이 휴대폰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 그의강아지(작성자) : 저와 애인은 서로간의 애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깊은 감정 교류를 나누고 있으며, 둘 다 몸과 마음 모두 튼튼합니다. 우리 사이가 얼마나┃

“라피.”

“헉!”

팔이 툭 두드려져 라파엘의 어깨가 번쩍 솟았다.

“뭘 그렇게 집중해서 보고 있어?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아, 티, 팀장님 오셨습니까.”

“응. 집 안에 있지 왜 나와 있어. 오래 기다렸어?”

“팀장님 금방 오실 것 같아서요. 얼마 안 기다렸습니다.”

“춥겠다. 들어가자.”

단테가 라파엘의 손을 잡아끌었다.

“평소엔 따끈따끈하더니만 오늘은 미지근하네. 바람 부는 데 서서 휴대폰 보니까 그렇지.”

“정말 안 춥습니다. 폰도 얼마 안 봤습니다.”

“혹시 일하는 중이었어?”

“아닙니다. 그냥 음, 이것저것…… 보고 있었습니다.”

“…….”

집 문이 열리고, 드디어 어둑한 집 안에 불이 켜졌다. 단테는 애인의 얼굴을 살피다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 라피.”

“예.”

“……너, 그때, 그. 폭파.”

폭파? 라파엘이 눈이 휘둥그레져선 단테를 돌아봤다.

“테네시 테러 말씀하시는 겁니까? 혹시 무슨 폭발 후유증이라도 나타나셨습니까?”

“아니, 그거 말고 네가 저번에.”

내 패, 팬 페이지… 폭파… 시켜준다며. 왜 여태 못했어……. 너희 아버지가 거기 가입했다고……. 단테는 그 사연을 차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추론해보건대 라파엘도 아직 가입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사실 아까 얼핏 본 휴대폰 화면도 게시판 모양이었다.

“저번에요?”

라파엘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고개를 기웃했다. 그리고 라파엘은 어제도 이렇게 무구한 강아지인 척을 하다가 ‘남자 애인 많이 느끼게’를 포함한 검색 기록을 들켰다.

생각해 볼수록…… 이 녀석 너무 네트워크 속 세상에 물든 거 아니야?

“그때 있잖아. 잠깐 싸운 날 차에서 네가 말한……. 아, 그러고 보니 너. 그날도 이상한 거 찾아보고 와서 현관에서 나 들어 올리고 막 휘저었지!”

“제가 팀장님을 언제 휘저었습니까? 맨날 팀장님 손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건 저인데. 억울합니다!”

라파엘이 변호사가 법정에서 책상을 치듯 드레스룸의 스위치를 탁 눌렀다. 벽과 라파엘 사이에 짓눌려 숨도 못 쉬고 헐떡였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허리가 울리건만, 그 당사자가 어깨를 잔뜩 올리고 항변하자 좀 어이가 없어졌다.

“아주 날 갈아 마실 기세였는데 억울하긴 뭘 억울해.”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그, 그때 그 자세는 특별한 체위 순위 상위권에 있던 건데…….”

“뭐 그런 순위가 다 있어? 그런 거 보지 말라니까.”

단테와 라파엘은 투닥이면서도 자연스레 행거 앞에 나란히 서서 군복과 정장의 단추, 퍼스너 등을 풀었다.

“이것 봐. 아무리 봐도 너 인터넷 의존도가 너무 높아. 좀 끊어. 아니, 이제 금지야. 인터넷으로 또 처음 보는 체위 같은 거 배워왔다 싶으면 섹스 하다가도 뚝 끊고 나갈 거야.”

“예에?”

크게 여섯 칸으로 나뉜 옷장 중 출입문과 가장 가까운 쪽은 단테의 외출복 칸이었다. 새벽에 긴급 연락을 받고 나갈 상황을 대비해, 드레스룸을 열고 손을 뻗으면 닿는 곳이 군복과 정복의 자리였다. 단테가 막 벗은 군복도 그 자리에 걸렸다.

그 옆 칸은 라파엘의 외출복이 차지했다. 짙은 회색, 감색 등의 깔끔한 정장이 주였다. 라파엘도 겉옷은 벗어 걸고, 셔츠, 양말 등은 빨래 바구니에 담았다.

라파엘이 편한 티셔츠에 머리를 쑥 통과시키며 외쳤다.

“저, 저는 그럼 공부를 어디서 합니까?”

“공부 그만해도 돼. 너 이제 처음 할 때처럼 헤매는 거 아니잖아.”

“그래도… 더 잘 알면…….”

“우리가 벌써 매너리즘 온 것도 아니고. 뭐, 나랑 하는 데 부족하다 느낀 적 있었어?”

“아닙니다. 그건, 아니지만.”

옷을 다 갈아입고 나니 깔끔하게 넘겨져 있던 라파엘의 머리 모양이 약간 흐트러졌다. ‘헤인스워즈 이사님’보다 조금 어려진 라파엘이 억울한 눈으로 단테를 봤다.

“단테는, 뭐든 경험이 많지만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단 말입니다……. 전 단테에게도 특별한 경험을 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니 이게 맞나 고민할 수밖에 없고.”

“나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그러다 진짜 이상한 거면 어떡합니까! 막, 제가 너무 파렴치한 상상을 했다든가. 호불호가 있는 행위는 차라리 대중적인 시선을 보고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습니까?”

“그…….”

그런…가? 말을 들어보니 또 묘하게 설득이 된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라파엘은 좀 인터넷에 무분별하게 노출된 감이 없지 않다. 드레스룸에서 나온 단테는 침실에 멈춰 섰다. 라파엘이 그를 성큼성큼 쫓아왔다.

금요일 저녁 시간. 두 사람이 평일 내내 고대하며 꾹꾹 참았던 걸 터뜨리는 날이었다. 어이없는 내용으로 입씨름을 하다가도 침대를 옆에 두고 마주 서니 흥분이 슬쩍 허벅지를 감으며 올라왔다. 라파엘도 같은 생각인지 뜨끈해진 뒷목을 쓰다듬었다.

“……아, 알았어. 그럼 최근에 가장 해보고 싶다 생각한 거 말해 봐. 뭘 말해도 화 안 낼 테니까.”

“정말이십니까?”

“어. 한 입으로 두말 안 해.”

당당히 대답은 했지만 눈썹을 들썩이는 라파엘을 앞에 두니 슬쩍 불안해졌다. 뭘 말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나.

조금 더 기다린 끝에 라파엘이 우렁차게 선언했다. 눈을 꽉 감고 두 주먹까지 불끈 쥐며.

“다, 단테가, 제 셔츠 입어줬으면 좋겠습니다!”

음. 절절한 바람을 들은 단테는 우선 손을 굽혀 입가에 대었다. 그리고 눈동자가 천장을 한 바퀴 훑을 시간 동안 답변을 정제했다.

“……동저, 아니, 음. 클래식하네.”

열심히 검색했는데 이 수준이면 좀 더 내버려 둬도 되려나.

“동정 같다고 하려고 하셨죠?!”

“어유, 그럴 리가. 얼른 가서 내가 입었으면 하는 셔츠 골라와 봐.”

“…….”

뭔가 이상하다고 꿍얼거리면서도 라파엘은 드레스룸으로 종종 걸어갔다. 열심히 부스럭거리더니 가지고 온 건 검은색 셔츠였다. 여기서는 또 클래식함이 깨졌다.

라파엘이 옷을 골라오는 사이 상의를 벗어 내려놓은 단테는 바로 셔츠를 몸에 걸쳤다.

“약간 자존심 상하는데.”

단추를 다 채운 그가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남은 어깨선을 보고 말했다. 품도 살짝 펄럭일 수 있을 만큼 남았다.

“정석은 알몸에 애인 셔츠 한 장만 걸치는 거겠지?”

단테는 입고 있던 하의를 끌어 내렸다. 그리고 다리를 한쪽씩 빼며 생각했다. 어린 애인 달래주려고 별걸 다 해본다.

바지와 속옷을 발끝으로 밀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라파엘의 표정을 본 그는, 두 팔을 벌리며 피식 웃었다.

“자, 덮쳐.”

“단테, 당신은, 진짜……!”

라파엘이 쑥 가까워지고, 이어 단테의 무릎이 꺾이며 라파엘의 몸에 떠밀려 뒤로 기울어졌다. 침대에 쓰러진 몸 위로 묵직한 무게가 내려앉았다. 단테는 그걸 가뿐히 받아냈다.

“하아…….”

유일하게 풀려 있는 가장 상단의 단추를 헤치고 라파엘이 얼굴을 묻었다. 목덜미의 살갗이 입 안으로 따끔하게 빨려 들어갔다. 팔꿈치를 세워 침대 위로 주춤주춤 올라가는 단테를 따라 라파엘도 그의 위를 덮은 채 움직였다.

서로의 몸이 주는 흥분을 익히 아는 애인 사이에 열기가 고였다. 단테는 협탁으로 손을 뻗어 손에 닿는 대로 아무렇게나 붙잡아 침대에 내려놓았다.

“이제 또 뭐 해볼까? 다 말해봐.”

“저는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창의력도 별로 없습니다…….”

“끝도 없는 체력이 있으니 별 상관없지 않나.”

고집쟁이는 별로 납득한 표정이 아니었다. 대체 뭘 보다가 특별한 섹스… 이런 거에 꽂혔는지 모르겠다.

“엄한 데서 내가 좋아하는 체위 찾지 말고 지금 그냥 해. 뭐가 있을까……. 묶을래?”

이 정도는 특별한 걸 하고 싶을 때 이벤트성으로 괜찮지.

“묶어요?”

“손목이라든가… 못 움직이게.”

단테는 머리 위로 손목을 포개 예시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라파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왜… 그런 짓을 합니까? 팀장님 혹시 절 쓰다듬어주기 싫으십니까? 그래서……?”

“아니, 결론이 왜 그래. 이게 날 못 움직이게 해서 꼴리… 됐다. 다른 거 하자. 착한 내 강아지.”

역시 둘 중 머릿속이 더 불건전한 건 아직까진 단테 쪽인 모양이었다. 단테가 라파엘의 두 뺨을 감싸고 부볐다. 라파엘이 입술을 비죽였다.

“착한 강아지 하기 싫습니다.”

“그럼?”

“……치, 침대에선 맹견.”

“그래… 요새 그런 거 봤구나, 읏.”

라파엘의 몸이 파고드는 만큼 다리가 벌어졌다. 위는 옷을 입고 있는데 아래만 휑한 게 기분이 조금 미묘했다. 맨다리 사이로 아직 벗지 않은 라파엘의 옷이 닿는 기분도.

“하아…….”

누운 채 골반이 위로 말려 올라가자 셔츠가 들춰졌다. 크고 따끈한 손이 배를 밀어 올리듯 쓰다듬으며 올라와 가슴을 쥐었다. 허겁지겁 달려들던 때와는 다른 애무였다.

“단테……, 저 또 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전에 저한테 해주셨던 것처럼, 저도, 단테 거 입으로 해주고 싶어요.”

“빨고 싶다는 거지?”

“네. 그, 그거.”

라파엘이 쑥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테는 그 북슬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다 해 봐라, 해 봐.”

“예.”

라파엘은 단테의 위에서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댔다. 두 손이 단테의 허벅지를 눌러 공간을 열고 반쯤 선 성기를 쥐었다.

“아…….”

분홍색 입술 사이로 나온 혀가 성기에 닿았다. 혀의 체온은 성기의 온도보다 더 높았다. 단테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혀로 서툴게 성기 윤곽을 따라 그린 라파엘은 곧 턱을 벌려 반 정도를 입에 담았다.

“후우, 읏…….”

단테의 입에서 나오는 호흡이 뜨거워졌다. 그가 한 손으로 라파엘의 머리를 짚었다. 귀 바로 위쪽의 조금 짧은 머리카락 사이가 쓰다듬어졌다.

“조금만, 세게. 응…….”

명령을 듣자마자 라파엘이 냉큼 볼을 조였다. 단테가 입술에 미소를 그린 채로 눈을 감았다. 몸을 지탱한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단테, 기분, 좋아요?”

“하아… 새롭네.”

서툰데, 꼭 라파엘답게 서툴러서 더 흥분이 됐다. 성기를 입으로 자극하는 건 자신이면서 라파엘은 단테보다 더 크게 어깨를 움찔였다. 단테의 엄지손가락이 옆얼굴과 귓불을 쓸었다.

단테의 아랫배를 더 저릿하게 하는 건, 라파엘이 예전에 단테가 펠라치오를 해줄 때 했던 행동들을 그대로 따라 한다는 것이었다. 성기를 쥔 손으로 뿌리 쪽을 애무한다든가, 한쪽 볼에 꾹 누른다든가.

“읏, 하아.”

단테의 다리 사이에서 츄욱, 춥, 하는 외설스러운 소리가 났다. 한 번씩 단테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고, 라파엘은 벌써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이거 연습, 같은 거 한 건 아니지?”

라파엘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조금 의기양양해져 고개를 더 깊이 묻었다. 얘는 거부감도 없나. 사귀는 사이라도 타인의 성기를 빠는데 이렇게까지 주저함이 없어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라파엘은 거부감은커녕 성기를 핥으면서도 착실히 흥분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그의 트레이닝 팬츠 가운데가 어느샌가부터 불룩 솟아 있었다. 단테의 머릿속에 짓궂은 생각이 스쳤다.

“우웅!”

성기를 문 채로 라파엘이 화들짝 놀랐다. 그 바람에 앞니가 살짝 성기에 닿았다. 휘둥그레진 눈동자가 단테를 올려다봤다. 단테는 웃으며 다시 발끝으로 라파엘의 다리 사이를 꾹 눌렀다.

“다, 다… 흐, 테.”

“새로운 거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발가락과 발볼 사이가 오므라들며 성기를 꾹 조였다. 단테의 허벅지를 짚고 있던 팔이 움찔 진동과 함께 무너졌다.

“이거, 너, 너무 이상합니다. 읏……!”

라파엘이 단테의 허벅지에 기대 헐떡였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다리 사이에 뜨거운 숨이 쏟아졌다. 단테의 배에도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빨아 줘. 해준다고, 하… 했잖아. 나도, 읏, 많이 흥분했어.”

라파엘의 성기도 바짝 기립했지만 단테 역시 성기가 완전히 부풀어 있었다. 라파엘은 단테의 허벅지에 손끝을 세웠다. 능청스러운 표정의 단테를 올려다본 그가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뺨을 세게 조였다.

“흐읏!”

단테의 허리가 앞으로 쏟아지듯 굽혀졌다. 그는 눈앞에서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널찍한 어깨를 쥐었다. 라파엘의 등을 덮은 티셔츠에 깊게 구김이 졌다.

“아, 좋아. 라피. 하아……!”

트레이닝 팬츠와 단테의 발바닥 사이에서 질척한 소리가 났다. 숨이 막힌 목을 꿀떡이며 뿌리까지 입에 머금자 라파엘의 코가 아랫배를 쿡 눌렀다.

라파엘이 단테의 다리 사이로 손을 옮겼다. 엉덩이와 아래 깔린 시트 틈새를 비집어 들어온 손은 아직 마른 채인 입구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어쭈. 하… 손버릇을 잘못 들였어.”

“…….”

“거기 박고 싶으면, 읏, 내가 갈 때까지 싸지 말고 이대로 세워 둬야 해. 알겠지? 먼저 빨아준다 한 건 너니까.”

발바닥이 라파엘의 허벅지를 꾹 눌렀다. 그 방향으로 수납되어 있는 성기가 압박됐다. 단테의 고간에 박힌 머리가 우으으! 신음소리를 냈다. 흥분을 참는 허벅지의 단단한 굴곡이 바지 위에 그대로 드러났다.

“읏…….”

라파엘이 볼에 가득 힘을 주었다. 입 안의 빈 공간이 완전히 사라지고 성기가 강하게 흡입되었다.

그와 함께 기어코 손가락 하나가 입구를 뻑뻑하게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간 미미한 성장을 이룬 펠라치오에 비해 월등하게 실력이 는 건 이 손가락 기술이었다. 손끝이 단테가 느끼는 지점을 정확히 찾아 짓눌렀다. 흐윽! 단테의 입에서 처음으로 울먹이는 소리가 나온 것과 동시에 허리가 위로 튀어 올랐다.

“하아… 아, 잘하, 네……. 아…….”

단테가 라파엘의 머리를 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 위에 핏줄이 돋았다.

“하, 나 갈 것 같은데, 싫으면 입 떼…… 아!”

단테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라파엘이 필사적으로 단테의 다리 사이에 달라붙었기 때문이었다. 아, 아, 아……! 라파엘의 등 위로 신음이 쏟아졌다.

“흐!”

결국 단테는 라파엘의 머리를 쥔 채 그의 입 안에 사정했다. 허리가 덜컹이며 흔들리고 아랫배를 무겁게 올리는 고양감이 찾아왔다.

“아, 흣, 으윽, 아……!”

사정을 마친 탈력감이 찾아와 눈을 감고 등을 들썩였다. 그러나 숨을 다 고르기도 전에 라파엘이 숙이고 있던 몸을 세웠다. 앙다물어진 입술이 꿀꺽 울렸다. 그와 함께 단테의 어깨가 뒤로 세게 밀렸다.

“참았습니다!”

라파엘이 울부짖듯이 외쳤다.

“저, 참았, 흐, 사, 사정, 안 했으니까, 삽입하게 해주세요!”

어찌나 필사적인지 눈가가 그렁그렁했다. 사정감을 참으며 다리 사이에 매달려 있던 모습을 떠올리자 단테는 따끔한 죄책감을 느꼈다. 장난처럼 한 말 때문에 꽤 필사적이었던 모양이다.

“단테에…….”

“알겠어. 미안해, 미안해.”

“참은 상, 주셔야 합니다.”

라파엘이 단테의 위로 올라오는 사이 단테는 바지와 속옷을 내려 애타게 괴롭힘 당하던 성기를 꺼내주었다. 주변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지만, 말한 대로 용케 사정은 하지 않았다.

“뒤로 해야겠다. 아무래도.”

저 정도로 커진 걸 바로 삽입하려면 정상위로는 절대 무리였다. 그는 라파엘에게 젤이 담긴 튜브를 던졌다. 라파엘이 허겁지겁 손바닥에 젤을 짜내고, 반쯤 몸을 돌린 단테의 허리를 당겼다.

“으, 읏……, 아, 으응, 흣.”

젖은 손이 예상보다 더 거칠게 안을 헤집었다. 안 그래도 마음 급한 금요일 밤의 녀석을 이렇게 긁어놨으니 오랜만에 오싹한 긴장이 찾아왔다.

등을 보이고 엎드린 단테의 뒤로 라파엘이 바짝 밀착했다. 헐거운 사이즈의 셔츠 밑단이 등선을 타고 밀려 올라갔다.

“아……!”

성기에 묻은 젤이 입구 안쪽을 적시고 틈을 벌렸다. 단테가 숨을 크게 뱉어 몸이 이완되는 틈을 라파엘은 놓치지 않았다. 두 손으로 단단히 잡은 골반이 뒤로 세게 당겨졌다. 그리고 라파엘은 그 반대 방향으로 허리를 내리꽂았다.

“허억……!”

“아, 흐아, 단테.”

엉덩이 살집이 커다란 손에 반죽처럼 세게 쥐어 벌어졌다. 시간을 들여 풀어주지 않아 입구가 평소보다 더 팽팽해진 기분이었다. 그 틈으로 라파엘이 계속해 커다란 성기를 쑤셔 넣었다.

“으읏… 아, 하으, 흣.”

“아, 단테, 너무, 흐, 좋습니다. 흐으……!”

내벽 안을 휘저은 성기가 기어코 좁디좁은 틈을 헤쳐나갔다. 조여져 있던 안쪽이 벌어진 감각에 적응하기도 전에 성기가 그 자리를 거칠게 문질렀다.

“단테, 힘 풀어주세요. 저, 여기까지 들어가고, 싶습니다.”

라파엘이 단테의 배꼽 아래를 짚었다. 성기 끝이 안쪽의 어느 곳을 집중적으로 찔렀다. 아! 그때마다 단테의 입에서 더 젖은 신음이 나왔다. 단테는 조금 전 했던 생각을 정정했다. 라파엘이 손가락 기술보다 더 는 건 따로 있었다.

“거기, 아, 윽! 하아, 너무 느껴서, 힘, 못 풀겠으니까, 흐, 네가 직접, 세게, 열어 봐.”

라파엘을 또 한 번 자극하며 단테는 스스로가 쾌락에 중독된 사람처럼 느껴졌다. 목덜미에 쏟아진 뜨거운 숨결에 또다시 몸이 오싹해졌다.

단테의 위를 커다란 상체가 완전히 덮었다. 그의 머리 옆에 하얗고 커다란 손바닥이 기둥처럼 박혔다. 어깨선이 남는 셔츠 뒤로, 이 셔츠를 꽉 채울 것 같은 널찍한 어깨가 보였다.

“하읏, 아흐윽……!”

허벅지와 허벅지가 철썩 부딪치며 내벽이 거칠게 문질러졌다. 몸도, 안쪽도 그와 마주 닿은 자리마다 뜨겁지 않은 곳이 없었다.

허리의 반동으로 진입한 성기가 단테가 흥분하는 지점을 하나도 빠짐없이 긁어냈다. 상체가 무너져 엉덩이만 치켜든 자세를 수치스러워할 틈도 없이 쾌감의 파도가 몰아쳤다.

“아, 라파엘, 흐아, 안에, 흣!”

단테도 이제 흥분을 참기 어려웠다. 두 손이 저도 모르게 성기나 유두 등을 쥐며 성감을 쫓았다. 라파엘이 허리를 세게 부딪칠 때마다 안쪽 깊은 곳이 경련했다. 그곳에서 짙게 터진 감각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거칠게 단테를 휘젓는 라파엘이 등 뒤에 바짝 밀착했다.

“흐, 좋아요. 단테, 아, 하아, 너무, 읏, 흑.”

아이고, 우네.

흥분해 단테의 안을 파헤치는 와중에도 라파엘의 눈물샘은 부지런했다.

그가 한 팔로 단테를 터질 듯 세게 안았다. 단테는 녹아버릴 듯한 체온에 둘러싸였다. 그와 함께 안이 완전히 열리고, 커다란 성기가 깊은 곳을 헤집었다.

“단테, 단테.”

이것 봐. 이런데 어떻게 라파엘의 애정을 못 믿겠어.

몸을 섞는 동안 더욱 짙게 쏟아져 내리는 감정을 느끼면 이전보다 더욱 고양감이 차올랐다. 자신을 간절히 원하는 애인만큼 마음속에 뿌듯함과 안도를 주는 건 없을 것이다.

“라피.”

“네. 네, 단테.”

라파엘이 목덜미에 얼굴을 문지르며 애타게 대답했다. 오래 참은 만큼 단테보다 절정이 빨리 다가오는 듯했다.

단테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싸고 속삭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기분이 몹시 고조되어 주는 특별한 선물이었다.

“아, 단테, 저도요, 저도, 아, 아……!”

단테는 배 속에 뜨거운 것이 퍼져나가는 걸 느끼며 눈을 꽉 감았다. 아랫배가 순식간에 묵직해졌다.

둘은 잠시간 숨을 들썩였다. 잠시 뒤 단테가 어깨를 돌리며 입을 맞췄다.

“응…….”

라파엘이 묵직하게 누르고 있던 몸을 물려주어 단테는 몸을 돌리고 라파엘을 마주 봤다. 연녹색 눈동자가 나른하게 퍼져 있는 게, 이럴 때면 어린애 티가 완전히 가시곤 했다.

“내 새끼, 오늘 아주 격하던데. 애인 허리를 잘라먹으려 들더라.”

“좋아서, 흥분해서 그랬습니다…….”

“알아. 잘했어.”

단테도 자신보다 큰 덩치와 완력으로 묵직하게 몰아붙여지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처음엔 신선한 경험이던 게 이제는 익숙해진 탓이었다.

“더 할 거지?”

“……예.”

고개가 얼른 끄덕였다. 그래, 오늘은 금요일이니까.

“또 특별하게 해? 엎드릴까?”

“아, 어…….”

라파엘이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단테가 자신의 셔츠를 헐겁게 입은 것도, 그의 성기를 핥으며 바, 발로 자극을 당한 것도, 뒤에서 그를 꽉 끌어안고 삽입한 것도 다 좋았지만, 역시 섹스는…….

“아니오, 이제 평소처럼 저도 많이 만져주세요.”

단테의 두 손길을 느끼고, 그의 얼굴을 보며 하는 게 좋았다.

그의 대답을 들은 단테가 쿡쿡 웃었다. 상대를 귀여워하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래, 예쁜 내 새끼.”

볼이 가볍게 꼬집혔다. 라파엘이 상의를 벗어 던졌다. 하얗게 드러난 몸 위로 그가 바라던 단테의 손이 닿았다.

“혹시나 또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다음번에 해 봐. 검색 전에 나한테 물어보고.”

다음번…….

자연스레 기약된 이다음이라는 말이 미소를 불러일으켰다. 라파엘의 마음속에 내내 걸려 있던 어떤 조바심이 서서히 풀려났다.

“예, 팀장님.”

달려든 라파엘을 단테가 받아주었다. 주말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 *

지잉―

머리맡에 둔 휴대폰이 울렸다. 새벽 늦게 잠이 든 라파엘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주말 이 시간에 누구지? 하며 화면을 보니 의외의 인물이 떠 있었다. 라파엘은 잠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라파엘입니다.”

―이제 일어난 거냐?

라파엘은 협탁 위의 작은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아홉 시. 주말인 걸 감안하면 ‘이제’라는 수식은 어울리지 않지만, 매일 일곱 시에 체조를 하지 않으면 세상이 멸망하는 줄 아는 아버지에겐 늦은 시간일 것이다.

단테도 자신을 깨우지 않고 홀로 사라져 있었다. 아마 거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거나, 가벼운 조깅을 하는 중이겠지.

―이제 책상 앞에만 붙어 있게 되었으니 신체 보강에 더 신경 쓰진 못할망정.

“예. 관리 주의하고 있습니다.”

체력이 떨어져 밤에 단테보다 먼저 지치는 건 라파엘로서도 절대 안 될 일이었다. 라파엘도 나름대로 근력운동과 유산소는 쉬지 않고 하고 있었으며, 몸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단테와 같이 먹지 않을 땐 단백질 위주의 식사만 하는 편이었다.

그나저나 아버지 성격상… 지금 같은 냉전 중엔 용건만 툭 던지고 끊을 게 분명한데 뭐라 자꾸 이상한 소리를 이어갔다.

―집이냐?

“예.”

―헤인스워즈 직계란 놈이 얹혀살기나 하고 말이야. 쯧.

예에. 순둥하기만 했던 아들은 일생일대의 사고를 친 뒤론 아버지의 말을 어느 정도 흘려들을 줄도 알게 되었다. ‘화가 났을 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의 순위가 바뀐 뒤로 생긴 변화였다.

―결혼 전엔 소령이 살 곳을 마련했으니, 결혼 후에 살 집은 네가 해 가라. 땅은 서쪽이나 남쪽에서 목 좋은 곳으로 알아보라 했고, 사령부 출퇴근 불편하지 않게 차도 몇 대 봐 놨다.

“……아버지가 사주시려고요?”

―그럼 내가 그것도 못 할까! 네 앞이 아니라 사위 이름으로 갈 거다!

왜 갑자기 호통이시람. 라파엘은 눈썹을 구부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손끝 자국과 키스 마크가 남은 등을 타고 이불이 부스스 흘러내렸다. 가운을 걸치고 단테를 찾아 침실을 나서려던 차에 총사령관이 말했다.

―소령과 함께 오늘이나 내일쯤 저녁에 방문해라.

“팀장님 주말까지 상관 만나게 하지 마십시오. 하실 말씀 있으시면 그냥 제게 하세요.”

―아들놈보다 든든한 사위 쉬는 날에 간부 식당보다 좋은 밥 먹여주려 그런다! 오는 김에 그때 내 검토가 필요하느니 어쩌니 했던 서류 들고나 와 보든가!

총사령관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라파엘은 뒷머리를 머쓱하게 긁적였다.

아버지가, 군대를 때려친 아들이 도움이 필요하다 한들 친절하게 불러줄 사람은 아니었다. 갑자기 바뀐 태도의 원인으로 짐작되는 건 아마도…….

라파엘은 거실로 나왔다. 마당이 다 보이는 커다란 창밖에 담장을 향해 서 있는 단테가 보였다. 담 너머에는 옆집에 사는 아이와 아빠가 있었다.

군인이라는 직업에 꽤 동경심을 가지고 있는 아이는 담에 매달려 단테를 향해 눈을 빛냈다. 창문가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니 어렴풋이 대화 소리가 들렸다.

“그 녀석들 아침, 점심, 저녁으로 집집마다 찾아가서 잘 얻어먹어요.”

“그저께 아침에는 우리 집 왔어요!”

“그래? 저녁엔 우리 집에 왔었는데. 그럼 찾아오지 않는 날이 있다 해서 크게 걱정할 건 없겠습니다.”

“네. 그냥 동네에서 다 같이 키우는 아이들이에요. 어쩌다 사료 놓아둔 곳에서 소리 들리면 오늘은 우리 집이 간택 받은 날이려니 하죠.”

“간택이요? 완전히 하렘 돌아다니는 술탄 팔자네요.”

단테가 유쾌하게 웃었다. 세 사람의 대화 주제는 고양이인 것 같았다.

이윽고 대화가 마무리되고, 단테는 인사를 나눈 뒤 몸을 돌렸다. 편한 옷차림에 군화가 아닌 운동화를 꺾어 신은 그가 이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한 손에는 전날 사료가 담겨 있던 빈 그릇이 들려 있었다.

“좋은 아침. 우리 어제 간택 받았어.”

“단테.”

라파엘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단테는 흘끔 뒤를 돌아 옆집 이웃이 집에 들어간 걸 확인하곤 라파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라파엘은 두 눈을 스륵 감았다.

“어제 감상을 못 듣고 잠들었네. 어땠어.”

“좋았습니다…….”

라파엘이 수줍게 뺨을 붉혔다.

“검색으로 보던 것보다 실제가 더 흥분됐던 것 같아?”

응? 라파엘은 고개를 기웃했다.

“검색하면서도 흥분이 되어야 합니까?”

“그럼 무슨 생각을 하는데?”

“물리적으로 가능한 자세인지, 단테에게 무리가 가지 않을지, 거부감이 있진 않을지 시뮬레이션을 합니다. 단테 없이 혼자 상상만 하는 게 딱히 흥분이 되진 않습니다…….”

그건 단테와 좀 더 행복하기 위한 자료일 뿐이었다. 실제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는 단테와 비교가 될 리가. 단테와 함께 먹을 식사 메뉴를 검색한다고 배가 불러지는 게 아니듯이 말이다.

그 대신 단테와 함께하면 모든 감흥이 배가 되어 돌아온다. 그로부터 밀려온 파도는 늘 벅찼다. “뭘 그렇게까지 열심히 공부해.”라는 말에 자신 있게 “저는 단테 앞에서 항상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단테는 좋았습니까?”

“응. 뭐, 나도 좋았지.”

“다행입니다……. 제게 단테랑 비교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다음엔 더 잘하겠습니다.”

“…….”

단테가 슬그머니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 그런 부분까지 헌신적이냐는 중얼거림과 함께 목덜미가 긁적여졌다.

“……너답다. 더 뭐라 할 수가 없네. 내가 졌다.”

이어 한숨 쉬듯 웃음이 나왔다.

라파엘도 영문은 모르겠지만 그를 따라 미소 지었다. 전날 침대에서 어떤 말을 속삭일 때의 표정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한 주간 완전히 특별하거나 커다란 사건도 아닌 일들이 수도 없이 지나갔다. 그 시간 동안 둘은 계속 함께였다.

그리고 이제부터 주말에 할 모든 일과에도 서로가 있을 것이다. 빈 그릇에 다시 사료를 채워 고양이를 기다리고,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며 아버지의 말을 전하고, 저녁엔 시간을 내 헤인스워즈 본가에 다녀오고.

이제부터 이어질 모든 일과의 시작은 단테가 아무 구김 없이 웃는 모습에서부터였다.

“커피 머신 좀 눌러놔 줘. 고양이 밥 새로 채워주고 들어갈게.”

“예.”

라파엘은 문득 그냥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재빨리 부엌으로 가서 그가 부탁한 대로 커피를 내렸다. 그러나 머그잔을 아래에 두기만 한 채 곧장 현관으로 몸을 돌렸다. 단테가 문을 열고 들어오기 전에 그 앞에 서 있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와락 안김으로써, 이어질 주말의 기록 안에 진한 포옹으로 시작한 아침을 새겨 넣을 것이다.

↳↳↳↳↳ 그의강아지(작성자) : 또, 저는 제가 우는 것 이상으로 애인 매일 안아줍니다. 앞으로도 평생 그럴 겁니다.

↳↳↳↳↳↳ 제국의기상 : 그래잘해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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