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26)

5. Ever After2

"단테"

특수전사령부에 오래 재직한 단테의 촉은 아주 기민했다. 그는 현장의 모든 상황에서 마치 잘 훈련된 군견처럼 위험을 감지하고, 그에 걸맞은 신속한 대응을 보였다. 그것은 단테 베일리가 지휘하는 작전을 성공으로 이끄는 힘이 되었다.

하지만 평화로운 신혼집에서라면 그는 종종 긴장을 느슨하게 내려놓았다. 그럴때면 예민하게 벼려진 감도 풀어지곤 했다. 라파엘보다 출근 준비를 먼저 마친 그는 부름을 듣고 휴대폰에서 눈만 들어 올렸다.

"어, 왜?"

"이리 와 보세요!"

"왜 안 나오고 거기서 불러."

단테는 휴대폰을 군복 바지 주머니에 넣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방금 전까지도 부산스럽던 드레스룸이었다. 달콤한 신혼에 빠져 방심하고 있던 그는 라파엘의 무시무시한 기습을 눈치채지 못했다.

"헉......!"

드레스룸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는 폐를 두 배로 부풀릴 기세로 숨을 들이마셨다. 그곳엔 단테에게 사르르 눈웃음을 지으며 돌아보는 라파엘이 있었다.

"저 어떻습니까?"

가장 먼저 보인 건 하얗고 반듯한 이마였다. 라파엘은 보통 앞머리로 덮거나 반 정도만 넘기던 머리를 완전히 깔끔하게 뒤로 넘긴 모습이었다. 그것만 해도 충분히 신선한 변화인데, 거기다 평소보다 정제된 느낌의 정장을 입었다. 어두운색 슈트에 맞춰 채도가 낮은 타이, 거기에 커프스와 행커치프까지 다 갖춰 입었다.

지금 라파엘은 비유하자면, 수백 년간 이어져 내려온 귀족 가문의 젊은 주인 같은 모습이었다. 마치 집사로부터 오늘 저녁 정략결혼 상대와의 만남이 있다는 말을 듣고 미간을 짚으며 인상을 찌푸릴 것 같다. '후, 제길, 귀찮군. 이럴 때면 가문의 의무란 것도 지긋지긋해.......' 같은 대사를 하면서 말이다.

물론 라파엘은 정혼자와의 만남을 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이미 유부남이고, 아주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 끝에 결혼을 했으니까.

또한 두 사람은 싸늘한 정략 관계 대신 서로에게 애정이 과도할 정도로 흘러넘치는 신혼이었다. 그렇기에 라파엘은 '후, 제길, 귀찮군' 대신 배우자가 저를 얼마나 예뻐할지 기대에 찬 얼굴로 대답을 기다렸다.

"너......"

단테가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누가 이렇게 멋있으래."

"멋있습니까?"

라파엘은 단테의 반응을 다 봤으면서 꼭 한 번 더 들려 달란 듯이 되물었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로 단테가 장난으로도 아니라고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뭐야? 한동안 편하게 입고 다니더니 갑자기 왜 이렇게 각을 맞춰 차려입었어? 보자마자 깜짝 놀랐어.”

"저 오늘 중요한 외부 회의에 갑니다. 그래서, 좀 어른스럽게 입고 오라고 했습니다. 이따 비서실에서 여기에 더 해 만져 줄 겁니다. 이런 날은 화장도 조금 하고......."

"아하.”

이게 다가 아니라며 라파엘은 열심히 어필했다. 단테는 라파엘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어깨를 쓰다듬었다.

"중요한 회의 잘하고 오고, 이 모습만 봐도 잘할 것 같지만."

"네!"

그 뒤엔 손가락으로 가슴을 쿡 찍었다.

"퇴근 후에 이거 벗기는 건 내가 할 거야."

"......!"

라파엘은 부끄러운 척을 하며 뺨을 감싸더니 "좋아요..." 하고 수줍게 대답했다. 단테도 이제 저기에 반쯤은 내숭이 섞여 있단 걸 알았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떻겠는가. 그의 눈에 이렇게 예뻐 보이는데.

*

"베일리."

사무실 한쪽에서 단테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결혼과 함께 성이 바뀌었지만, 아직까진 그를 베일리 또는 헤인스워즈로 부르는 사람이 반반이었다. 이전 성을 부르는 사람 중 일부는 헷갈리거나 익숙해진 호칭을 바꾸기 귀찮아서였고, 또 일부는 단테보다 본부에 늦게 와 결혼 소식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지금 단테를 불러낸 2층 인재 개발 부서의 소령이 그랬다. 그는 바로 두 달 전, 이곳으로 인사발령을 왔다. 단테와 직급은 같지만 다섯 기수 선배이고, 같은 팀 바로 윗선임의 동기였다. 단테가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는 문 쪽을 턱짓했다.

“잠깐 좀 보자."

"알겠습니다."

"아, 그럼 나도 같이 가자."

단테를 따라 옆자리의 선임 테온 소령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함께 단테에게 볼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단테는 하던 일을 내려놓고 둘을 따라 나갔다.

"네가 청소년 학군단 출신이라고 했었지?"

"예, 그렇습니다.”

"그때 장학금도 받았었나?"

"생활비나 학비 등의 부분 지원받았습니다."

"일반적으로 JROTC 학생들에게 나오는 것 외에도 졸업 후 특수군 복무 조건으로 추가 지원받았고?"

"예, 그렇습니다.”

"거봐. 맞지. 내가 전에 둘이 식사하다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났거든."

단테의 정보를 넘겨준 이는 선임인 것 같았다. 딱히 대단한 비밀인 것도 아니니 말해도 상관은 없지만, 갑자기 십몇 년 전 일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되니 이유가 궁금해졌다. 물론 셋 중 가장 막내인 그는 끼어들지 못하고 뒤로 손만 맞잡고 있었다.

작전팀에서 팀장으로 일한 시간이 짧지 않은데도 사령부의 막내 생활은 금세 적응이 되었다. 바로 윗선임이 다섯 살 위이니 그 위론 훨씬 연차가 까마득해서도 있고, 팀의 리더로 어깨가 묵직했던 때보다 그가 책임져야 할 일이 훨씬 줄어든 편안함도 적응을 도왔다. 이곳에서의 단테는 아직까지 배우는 게 훨씬 더 많은 입장이었다.

헤인스워즈 가의 이름이 더해졌으니 확실히 노력해야겠다는 다짐도 있었다. 여기서 풋내기 소령 태를 벗으면 아마도 확실하게 엘리트 코스에 발을 들이게 될 것이다.

"장학금 받을 때 말이야. 그때 어땠나?"

음?.... 장학금을 받는 데에 어떤 특별한 감상이 필요한가? 단테는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대답했다.

"금전적 도움을 받은 것이니 물론 감사했습니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좀, 이랬으면 좋았겠다 싶었던 거 없어? 어떤 게 비효율적이어서 개선점이 필요하다든가. 특수전사령부랑 관련해 받은 지원 쪽에서 말해 주면 더 좋고."

아하. 단테는 그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이제 깨달을 수 있었다.

단테가 소속된 부서는 4층에서 국경지대 군수품 물류와 관련한 업무를 맡고 있다. 그리고 단테를 불러낸 포츠 소령은 2층 인재 개발 부서 내에서 청소년 학군단 운영 및 관리 업무를 맡고 있었다.

청소년 학군단에서 성적이 좋은 학생들은 다른 이들보다 높은 장학금을 받는 대신, 일정 기간 이상의 특수군 복무가 필수였다. 때문에 그런 아이들은 특수전사령부에서 종합적인 관리를 해 왔다. 이전에 단테가 그랬듯이.

단테는 좀 더 신중하게 기억을 더듬었다.

"생활비를 세분화해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릴 땐 어디에 우선적으로 돈을 써야 하는지 몰랐고, 빚이 있는 가정 친구들의 경우엔 장학금이 생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정으로 들어가는 일도 보았습니다."

"오오, 구체적으로 어떻게 세분화하면?"

"꼼꼼히 개입할 여력이 된다면 차라리 현물이 좋습니다. 신발, 옷, 운동 보조장비와 같은 물품을 직접 주고, 식비나 개인 용돈을 현금으로 지급하는 방향입니다. 그래야 어느 날 갑자기 예산이 삭감되거나 사라져도 타격이 적을 겁니다.”

잔인한 말이긴 하다만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보조금에 의존하는 것은 정말 좋지 않은 방향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해당 학생만을 위한다면, 학군단 선례에 남아 있는 '반드시 필요한 물건'을 주는 것이 나았다. 아무리 어른스럽다고 해도 어린 나이에 자신을 챙기는 법을 잘 모를 수밖에 없으니까.

"또, 또 다른 문제점은 없었나?"

"장학금 신청 절차 중에 경제 수준을 보고하는 과정을 힘들어한단 이야기도 들어 보았습니다. 집안의 가난을 조사하고 증명하는 일이잖습니까."

"아아, 맞아. 그쪽은 다른 데서도 문제가 되는 편이지. 지원 사각지대를 줄이는 게 최선이겠지만, 그만큼의 인력을 만들기도 어려워. 그래, 그것도 말하는 게 좋겠다. 저쪽에서도 이 정도 대비는 되어 있겠지만...."

혼자 뭐라 중얼거리던 그는 단테를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단테는 이번에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베일리.”

"예."

"오늘 바쁜 일 있냐? 오늘까지 반드시 처리해야 하는 일이라든가."

“그렇진 않습니다.”

않습니다만... 무슨 일이신지....... 라는 물음을 삼키고 단테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대령님께 바로 말씀드려야겠다. 너희 둘이 있어서 다행이지 뭐냐. 사실, 다음 학기부터 청소년 학군단을 지원하기로 한 장학재단과 오늘 협의가 있거든. 그래도 기존에 청소년 학군단을 거쳐 장학금 수혜를 받은 적 있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가 이것저것 요구할 때 좀 더 면이 서겠지."

“아, 그래서 추천한 것도 맞는데, 다른 이유는 우리 베일리 소령이 이젠 헤인......"

"알아, 알아. 네 맞후임님 똘똘하고 상황 파악 빠른 거. 말 몇 마디 안 들어 봐도 딱 네 말대로네. 그럼 난 협력 요청 보내고, 준비하러 간다! 이따 봐!"

그것도 그렇지만... 하는 이후의 말은 결국 전달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단테는 오늘 타 부서의 협력 요청을 받아 예정에 없던 출장을 나가게 될 것 같았다.

그거야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단테는 어쩐지 다른 예감이 들었다.

장학재단, 높은 사람, 중요한 회의, 그리고 오늘 아침 유난히 힘준 누군가...가 어쩐지 하나로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역시 감이 완전히 죽진 않았군.

단테는 신혼집 밖에선 충분히 예리하게 발휘되는 자신의 속을 확인할 수 있었다. 2층에서 날아온 지원 요청은 단테의 상관으로부터 어렵지 않게 승낙이 됐다.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청소년 학군단을 거친 부서의 맞선임, 테온 소령과 함께 회의 장소로 이동했다.

해당 부서원이 아닌 단테는 앞쪽의 회의 테이블이 아닌 그 뒤에 따로 마련된 자리를 받았다. 회의 테이블은 재단측에서 나온 대표와 그 측근들, 그리고 군에서도 해당 부서의 중심인물들을 위한 자리였다. 연차가 적은 부서원들이나 객원인 단테와 테온은 그곳에 끼지 못했다. 둘이 해야 할 일은 회의 중 아주 이상한 소리가 나오면 짚어내는 역할 정도였다.

그렇게 뒤쪽 자리로 간 덕분에 전면의 현수막이 더 한눈에 잘 들어왔다.

<헤인스워즈 재단 지원 - JROTC 인력양성 프로그램>

......여기 내가 있어도 괜찮은 건가, 하는 의문이 뒤늦게 들었지만, 이제 와 빠질 수도 없었다.

이윽고 상대측이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회의실의 군인들은 문 앞에 일렬로 섰다.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헤인스워즈 재단 측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입장했다.

가장 먼저 열린 문 안쪽을 디딘 건, 재단 설립부터 몇 년째 헤인스워즈 이사의 측근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브리엘 포트만 비서였다.

그는 드센 군인들에게 초장부터 기 싸움으로 밀리지 않겠다는 듯 딱딱하고 사무적인 얼굴로 입장했다. 군인과는 상성이 나빠 보이는 은테안경 속 까칠한 시선이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훑었다. 날카로운 시선 뒤 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과연, 작지 않은 규모의 프로젝트인 데다가 '헤인스워즈'가 연관된 만큼 연배가 있는 중진들이 자리에 나왔다. 하나같이 굵직한 경력이 엿보이는 얼굴들 속에, 저 끝에 선 소령이 그나마 가장 젊........

"......?!"

일렬로 선 군인들의 가장 끝, 아마도 가장 직위와 연차가 낮은 군인, 본래라면 이 회의에서 별 신경도 쓰지 않을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가브리엘의 눈동자를 가장 떨리게 만들었다.

저 사람이 어째서 여기에!

가브리엘의 머리가 아직 이 돌발사태에 대한 대책을 내놓지 못했을 때, 그의 뒤를 이어 오늘 회의의 주역이 들어왔다. 그는 '이미 반쯤 망했군....' 하고 다가올 위기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헉......!"

"......"

예상대로, 등 뒤에서 여과 없는 감탄이 들렸다. 그나마 다행히, 너무 놀란 나머지 다른 말을 잇지 못한 듯했다.

헤인스워즈 이사는 객관적으로 좋은 리더였다. 젊은 나이에 걸맞게 의지와 열의도 강하고, 그러면서도 한때 현장에 있던 군인답게 상황 파악과 변화의 수용이 빨랐다. 족벌 경영 형태로 재단을 받은 로열패밀리임에도 가문을 업고 직원들을 함부로 대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타인에게 아주 깔끔하고 정중한 편이었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사업 상대를 만날 때만큼은 자신이 상류층으로 자랐다는 사실을 아낌없이 보여 주었다. 어떤 시비에도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대처해 결국엔 상대를 제압했다. 어리지만 몹시 듬직한 상사라는 건 그를 보좌하는 대부분이 느껴 본 감상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면모가 일시에 와장창 깨지는 상대가 있었다. 바로 그의 배우자였다.

물론 그의 배우자는 무척 사람 좋고, 거기다 대단한 업적을 가진 훌륭한 군인이었다. 하지만 헤인스워즈 이사 비서실에 있어, 그는 본인이 의도치 않은 초대형 요주의 인물이었다.

라파엘 헤인스워즈는 배우자에게 애정이 넘치다 못해 헌신적이다. 회사 이사실 문 앞에 팻말 대신 <애처가의 방>이라 붙여놓아도 분명 모두 수긍할 것이다.

그게 흔히 하는 인위적인 사랑꾼 흉내라면, 그의 일과 대부분에 밀착해 있는 노련한 비서들이 눈치채지 못할 리없었다. 하지만 라파엘은 진짜였다. 배우자를 사랑하는 다정한 남편 정도가 아니라, 아주 좋아 죽고 못 견뎠다.

그는 배우자와 관련해선 앞뒤 가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뛰쳐나가거나, 냉철한 얼굴에서 또르르 눈물이 떨어져 내리는 사람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그의 모든 기준은 배우자에게로 가파르게 기울었다.

"단테다. 비서님, 팀장님이에요."

"......예, 그렇군요."

"회의 장소 사령부로 잡은 직원분 상 드리세요. 너무 잘하셨네요........"

지금처럼.

잘하긴 뭘 잘했단 말인가. 한참 장소를 두고 기 싸움을 하다가 결국 져서 물러난 것인데.

그의 이사님은 마중 나온 사람의 안내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던 목소리가 어느새 잔뜩 상기되었다. 등 뒤에서 들리는 그의 호흡도 빨라졌다.

완벽하게 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에 초대형 요주의 인물이 있을 줄은 몰랐다. 배우자에 한해선 존경스러운 이성이 무너져 내리는 라파엘이었다. 심지어 아직도 종종 가브리엘에게 개명할 생각 없냐는 헛소리를 하는 사람이니.......

가브리엘은 제 나름대로 라파엘을 가리며 섰다.

일렬로 서 있는 군인 중, 단테는 반대쪽 끝에 있었다. 하지만 키가 크고 훤칠한 데다 자주 보았던 얼굴이다 보니 여러가지 의미로 그가 가장 눈에 띄었다. 물론 상사인 라파엘은 다른 의미로 이미 나머지가 흐릿해지고 한 곳만 보이고 있을 것이다.

그때였다. 단테 헤인스워즈 소령이 몰래 턱을 두드리며 신호를 주었다. 턱? 단테의 시선이 이어 라파엘을 흘끔 가리켰다. 가브리엘은 뒤를 돌아 입을 떡 벌린 라파엘의 얼굴을 확인하고 신호의 의미를 알아챘다. 그리고 얼굴에 묻은 먼지를 닦는 척, 젊고 냉철한 이사님의 턱을 닫아 주었다. 단테가 그제야 약간 안도한 얼굴을 했다.

라파엘은 맨 앞의 사람과 인사를 나눴다. 그는 허리를 가볍게 숙이고, 상대는 손날을 이마에 붙여 경례를 했다.

“금번 협력 프로젝트 책임자 하워드 레이너 대령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라파엘 헤인스워즈입니다.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라파엘은 한 명씩 악수를 하면서 지나갔다. 단테의 오른쪽 여섯 번째에 있는 사람, 다섯 번째 오른쪽에 있는 사람... 네 번째 사람.... 그렇게 점점 가까워지고 마침내 라파엘이 단테 앞에 섰다.

"잘 부탁드립니다."

공적인 자리니 대놓고 아는 척까진 않겠지만, 티를 낼 줄 알았더니 의외로 침착하게 인사를 했다. 가브리엘은 성장한 이사의 모습에 조금쯤 뿌듯해졌다.

하지만 단테는 바로 앞에 선 사람의 눈을 마주하며 어휴... 하는 한숨을 삼켜야 했다. 마주 잡은 손, 단테의 손에 가려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 방향에서 라파엘의 엄지가 자신의 손등에 열심히 하트를 그렸기 때문이었다.

"소령님께선 굉장히 미남이시네요."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겐 가벼운 농담 정도로 들렸겠지만, 단테는 손을 꾹 쥐어 '혼난다.'라는 의사를 정확히 밝혔다. 라파엘이 깨갱 하듯 물러났다.

주요 회의 참여 인원이 회의 테이블에 둘러앉고, 나머지는 뒤쪽에 마련된 책상에 앉았다. 단테를 포함한 다섯 명의 군인, 그리고 노트북을 가져와 펼친 재단 측 직원 셋이 뒷자리를 채웠다.

라파엘은 비서와 짧게 귓속말로 대화를 나누더니 휴대폰을 두드렸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회의에 대한 지시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곧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린 단테만이 그게 아닌 걸 알았다.

[단테 여기서 만날 줄 몰랐어요♡♡♡]

[앗 혹시 이거 서프라이즈입니까?]

[오랜만에 단테 군복 입고 일하는 모습 봐서 너무너무 좋아요♡♡♡]

단테는 주변을 살피며 짧게 답을 쳤다.

[나도 몰랐어오늘 아침에 갑자기 결정]

눈치를 보며 몰래 보내야 하는 터라 단테의 답은 조금 엉망이었다. 단테의 답장을 본 라파엘이 집중하는 척 서류를 위로 들어 얼굴을 묻었다. 단테도 볼 안쪽을 꾹 물어 웃음을 참았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혼부부에겐 이 조차도 꽤 간지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단테는 라파엘과 눈이 마주쳤다. 일하는 중이라 더는 안 된다고 작게 고개를 저었다. 라파엘은 알겠다며 눈웃음을 지었다. 회의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은 시작이 제법 즐거웠다.

회의 분위기가 만들어지자 헤인스워즈 재단 직원 중 한 명이 일어나 설명을 시작했다.

*

점심시간이 되자 회의는 칼같이 멈추었다. 회의 중 분위기는 유한 편이었으나 작은 부분들의 조율에도 의견이 상당히 많이 오갔다.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아 서로간에도 잠시 정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야, 베일리 데려오길 잘했다. 아까 딱 적절했어."

뭔가 조금 의아하다 싶었을 때 단테는 같이 온 선임에게 넌지시 말을 전했다. 선임, 테온 소령은 단테에게 쪽지에 간략하게 써서 정리해 달라 말했고, 그건 앞에 있는 그의 동기 포츠 소령에게 전달이 되었다.

"너는 그런 게 있는 줄 어떻게 알았냐? 8년 전에 사라진 제도라 난 생각도 못 했는데, 딱 맞게 그걸 받아 본 녀석이 있어서 다행이지."

"거봐. 내가 분명히 도움 될 거라 했잖아."

그야 단테는 학생 때 받을 수 있는 장학금이란 장학금은 다 뒤져 봐야 했던 상황이었으니까. 그래도 옛날 기억을 떠올려 도움이 되었으니 다행이었다.

"맞아. 이 녀석이 확실히 도움 된다고 한 게 이런거였네. 우리 부서로 데려가고 싶을정도로 전문가야. 요새 생긴 정책도 은근히 많이 알고 있더라."

"아니 그 이유가 다가 아니라니까. 지금 여기 와 있는 사람이 얘랑......"

"아, 안다. 알아. 그거 아니더라도 네 후임님 똘똘하고 눈치 빨라서 도움 된다는 거. 이제 밥 먹으면서 얘기 좀 듣자."

음? 음......? 단테와, 단테의 결혼식에 초대받아 왔던 선임은 미묘한 시선 교환을 했다. 지금이라도 이 안에 부부가 있다고 알려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단테를 선임이 팔꿈치로 툭 두드렸다.

“그냥 말해 주지 마라. 지금 회의 때문에 바짝 얼어선 들을 생각도 없어 보인다."

"예......"

하긴 딱히 알아 둬야 할 만큼 중요한 내용도 아니고, 아마 다른 군인들 중엔 라파엘이 단테와 결혼한 사이인 걸 아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저 앞까지 분주히 갔던 포츠 소령은 또 허둥지둥 둘의 앞으로 돌아왔다.

"베일리, 이거 자료 요청 좀 해 줘라. 점심시간 안에만 내려오면 된다 해."

"예, 알겠습니다.”

"야, 넌 왜 의견 듣자고 불러온 다른 부서 애한테 일을 시켜?"

단테와 같은 팀인 선임이 못마땅한 목소리로 나섰다.

"손이 없어서 그래. 내가 우리 부서 누구한테 말하겠냐. 온 지 이제 두 달 됐는데, 부탁 좀 하자."

“전 괜찮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나 참.......”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종이에 죽죽 표시한 부분들을 정리해 요청하고, 연락이 오면 받아오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따지자면 선임이 불평한 대로, 같은 직급 소령인 단테가 여기서 잡일을 지시받을 처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군대라는 조직을 생각하면 이 정도면 정중한 부탁이었다.

단테는 2층으로 올라가 받은 명령을 해결하고 나와 복도를 걸었다. 점심시간이라 다들 빠져나간 복도는 한산했다. 그제서야 참았던 웃음을 짧게 터뜨렸다.

회의실을 나오는 순간부터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테이블에 멋지게 앉아 있던 라파엘의 모습이었다.

어린 남편은 집에선 볼 수 없는 딱딱한 표정으로 상대와 기싸움을 하기도 하고, 눈짓과 손짓으로 보좌진들에게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날카로운 질문이 들어오면 직접 대답해 분위기의 과열을 막았고, 상대가 머뭇거린다 싶으면 불쑥 한 발 다가갔다. 상대의 의견 중 이상한 점이 보일 땐 "잠깐.” 하며 회의를 끊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헤인스워즈 재단 측 사람들은 물론이고 군부 인사들까지 라파엘에게 집중했다. 라파엘은 확실하게 회의 테이블의 중심점에 있었다.

"꽤 멋있네.”

그런 라파엘의 모습을 보며 상당히 다양한 감상이 들었지만, 역시 이게 가장 컸다. 정말 멋있었다.

오늘 회의에 나온 몇 가지 안건들은 단테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 집에서 라파엘이 프레젠테이션 연습을 할 때면 앞에 앉아 들어 주곤 했던 내용이 중간중간 담겼기 때문이었다. 연습 땐 마냥 귀엽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내내 웃으며 들었다. 그걸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하니 느낌이 이렇게나 달라질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서로 익숙한 건 출근 전의 모습이지, 실제로 일을 하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농담처럼 '잘하고 있나? 이사 역할 제대로 하고 있겠지?'라고 말하곤 했는데,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아침에 자랑하듯 보여 준 정장은 그 모습에 맞춰 배는 더 멋져 보였고 말이다.

"아."

다시 회의실로 돌아가려던 단테는 계단 앞에서 라파엘과 마주쳤다. 벽에 기대 서 있던 라파엘이 몸을 일으켰다.

라파엘은 얼굴에 반가움이 가득했지만, 늘 넘치게 표출하던 그 감정을 어색하게 내리눌렀다. 단테를 보고 활짝 웃고 싶은 입술이 씰룩였다.

단테도 마음 같아선 직장에서 예상치 못하게 만난 상황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누가 지나갈지 모르는 상황이라 편하게 아는 척을 하기가 조심스러웠다. 그렇기에 라파엘도 냅다 '팀장님!' 또는 '단테!'하고부르며 달려들지 않는 것이겠지.

"원칙대로 하겠습니다."

미미하게 웃으며 라파엘의 앞에 선 단테는 손을 올려 경례를 했다. 라파엘이 저도 모르게 마주 경례를 하려다 "앗.” 하고 손을 멈췄다. 군대에 와서, 군복을 입은 단테를 보니 잊은 줄 알았던 습관이 다시 튀어나오려 했다. 라파엘은 손을 내리고 머쓱하게 물었다.

“저는 소령님...이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예. 헤인스워즈 이사님."

라파엘의 입술에서 결국 참지 못하고 바람 소리가 된 작은 웃음이 새 나왔다.

"이쪽으로 가시는 걸 봐서, 혹시나 여기 있으면 필 수 있을까 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심부름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심부름이요?"

단테가? 누굴 시키는 게 아니라 심부름을 한다고요? 물론 단테는 팀장일 때도 심부름 같은 걸 잘 시키는 타입은 아니긴 했다. 의아해하는 라파엘에게 단테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제가 여기서 연차가 제일 낮습니다."

"어? 아, 그러시군요......음, 신기합니다......”

신기하긴 뭘, 단테는 저의 모습을 한가득 담은 연녹색 눈동자를 보았다. 이렇게 잠시라도 얼굴을 봐서 좋은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라파엘이 먼저 돌아서긴 어려울 테니, 그가 먼저 대화를 마무리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아뇨. 저, 잠시만요. 소령님."

"예."

"괜찮으시면 점심 식사 같이 하시겠습니까?"

라파엘이 배시시 뺨을 부풀렸다. 이 말을 하기 위해 기다렸나 보다.

군복과 정장을 입고 밖에서 하는 식사도 특별한 경험이 되긴 하겠다만, 단테에겐 거절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회의장에 계시던 분들이 모두 상관이셔서 혼자 빠지긴 어렵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그렇겠군요.”

"예"

"그럼 저녁 식사는 어떠십니까?"

라파엘이 연녹색 눈을 예쁘게 감았다 떴다.

“꼭 같이 해 주셨으면 합니다."

눈가에 슬쩍 미소가 걸려 있었다. 부부가 아닌, 공적 상황으로 만난 지금이 낯설면서도 묘하게 설렌다는 감정이 다 드러났다. 꼭 역할극을 하는 기분이 드는 건 단테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테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씩 입꼬리를 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나 말고 누구랑 먹으려 했습니까?"

훅 튀어나온 말에 라파엘이 눈을 크게 떴다.

"헤인스워즈 이사님의 오늘 퇴근 이후 시간은 제 겁니다."

"......물론이에요."

라파엘이 기쁘게 미소 지었다. 조금 전 회의실에서의 딱딱한 라파엘에게선 볼 수 없던 온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같은 옷을 입은 같은 사람이지만, 이 모습은 단테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다.

"소령님, 하나만 더 여쭤보고 싶습니다."

"예, 뭡니까?"

"오늘 회의 내용 어떠셨습니까?"

회의는 사전에 들은 대로 청소년 학군단 학생 중 성적이 좋은 학생에 대한 우수 장학금,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주는 보조 장학금을 다뤘다. 짧게 고민하는 사이 라파엘의 눈에는 긴장의 빛이 어렸다.

"제가 담당은 아니어서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지만.... 한때 장학금을 받았던 입장에서, 기획 안에 담긴 섬세한 배려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많은 고심을 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말을 들은 라파엘이 아.... 하며 고개를 약간 숙였다. 귓가가 벌써 불긋해지기 시작했다. 입가를 주체하기 어려웠는지 손등으로 입술 앞을 살짝 가렸다.

"잘 해내서 감동을 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는데."

"......"

"그 말씀을 들으니 무척 기쁘고 뿌듯합니다. 정말로요.....아주 열심히 했거든요."

라파엘의 손이 슬그머니 단테에게 뻗어져 가만히 소매 끝을 잡았다. 단테는 '아, 이거 괜찮나?' 싶었지만 이 정도는 그냥 두었다. 손목이 아주 약간 당겨지는 느낌밖에 들지 않는 접촉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솜털이 닿은 듯 간지러웠다.

저벅-

그 때,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거리는 좀 떨어져 있지만 단테는 자세를 다시 바로 세웠다. 라파엘도 얼른 손을 떼어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네에......."

라파엘이 미련이 남는 얼굴로 대답했다. 단테도 옅은 미소와 함께 그를 스쳐 지나갔다.

오전의 회의가 지지부진했다면 점심시간의 분위기가 축 가라앉았겠지만, 함께 식사를 하는 이들의 기분은 제법 좋은 편이었다.

헤인스워즈 재단은 이득을 재기보다는 일시적으론 손해가 나더라도 최대한 많은 지원을 제안했다. 군으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긴 했다. 그들이 지원하는 만큼 학생들은 더 좋은 환경에서 훈련을 진행할 수 있고, 군의 예산 역시 줄어들 수 있으니까.

"좋은 일이긴 합니다만, 적당히 조절할 필요는 있습니다. 헤인스워즈 재단과 너무 파격적인 거래가 오고 가면 나중에 물꼬를 틀지 모르는 다른 지원 단체가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 말도 맞긴 하지만, 헤인스워즈라는 군부 명가의 이름을 걸고 주는 나름의 기부 명목도 있을 것 같아. 전 총사령관님 혈육이기도 하고......"

"군과 하는 단일 프로젝트가 아니라, 큰 사업 계획 안에 이번 프로젝트가 들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임관했을 때부터 현장을 뛰었고, 책상 앞보다 몸을 움직이는 일이 더 많았던 단테에겐 아직 이런 회의는 생소했다. 제도의 사령부에서 이뤄지는 논의는 당장 눈앞의 전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고 대비하는 작전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 범위는 몇 년 뒤가 되기도 하고, 가끔은 10년, 20년, 다음 세대까지를 건너보기도 했다.

단테는 이제 겨우 30대 초반의 소령이니 앞으로 몇 번쯤은 현장직을 다시 맡게 될 것이다. 그때라면 아무것도 몰랐던 이전과는 달리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나서 돌아오면 현장 경험으로 인해 깨달은 일이 더 많아질 것이고.

앞으로 훌쩍 나아간 라파엘을 보고 나자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욕이 들었다.

식사와 정리를 마치고 회의 재개까지 약간 여유가 남아 있었다. 회의실은 이어질 회의를 준비하기 위해 오가는 사람들로 어수선해졌다. 그 틈을 타 단테는 휴대폰을 열어 보았다.

라파엘에게 연락이 와 있었다.

[오늘 단테 너무 멋있습니다. 못 참고 말 걸고 손잡아서 죄송해요.......]

[그리고 저녁은 꼭 팀장님이랑 먹을 겁니다!]

라파엘은 식사를 하러 나가선 아직 자리에 돌아오지 않았다. 단테는 주변 상황을 살피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시작 전에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어어, 다녀와.”

회의실을 나온 단테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건물을 나와 인적이 드문 주차장 방향으로 갔다.

그는 담벼락 옆에 서서 라파엘에게 전화를 걸었다.

- 단, 아, 아니, 소령님!

라파엘은 신호가 울릴 틈도 없이 곧장 받았다. 조금 전에 감춰야 했던 반가움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걸 보아 지금은 혼자 있는 모양이다.

"식사 다했어?"

- 예. 통화 가능하신 겁니까?

"응. 잠깐 밖으로 나왔어, 주차장 쪽. 주변에 사람 없으니 편하게 말해도 돼."

- 주차장이요? 아.... 어?

라파엘의 목소리가 끊겼다. 왜 그러느냐고 묻는데 대답 대신 지잉- 하는 소리가 났다.

- 단테, 오른쪽으로 돌아서 보세요. 건물 반대 방향으로 주시된 검은 차 보이세요? 네, 거기. 

지시대로 고개를 돌려 보니 라파엘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 저 보여요?

"응, 보인다.”

단테는 전화를 끊고 얼른 그 방향으로 갔다. 라파엘은 혼자 뒷좌석에 타고 있었다. 문을 열기도 전에 라파엘이 옆으로 비켜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 그를 부르기 위해 활짝 열었던 창문은 단테가 타자마자 얼른 닫혀 밖으로부터 둘의 모습을 가렸다.

"하아. 남편 얼굴 한번 편히 보는 게 이렇게 힘들 일이냐."

단테가 이제야 긴장이 풀린 얼굴로 등받이에 풀썩 기댔다.

"손."

라파엘의 앞에 단테의 손바닥이 내밀어졌다. 라파엘은 의아해하면서도 그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단테가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껴 손을 단단히 잡았다.

"아까 못 잡았잖아."

"맞습니다!"

라파엘은 동의하며 손가락을 굽혀 손등을 감싸고 꾹 힘을 주었다. 단테의 눈치를 슬쩍 본 그는, 아까 악수할 때 그랬던 것처럼 엄지로 손등 위에 하트를 그렸다. 이번엔 단테도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었다.

"왜 여기 혼자 있었어?"

"오후 회의 내용 자료 보고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좀 바뀔 거라 군에는 비밀로 혼자 나와 봐야 합니다."

"그런 말을 나한테 해도 돼?"

"팀장님께도 뭔지 안 보여드릴 거라 괜찮습니다."

"어쭈."

라파엘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서류를 뒤로 감췄다. 어차피 단테도 볼 생각은 없었다. 자신은 회의의 주체가 아니니 지금 보나 이따 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그건 둘째치고,

"내 새끼, 너무 멋있던데, 누구 남편이 이렇게 잘생기고 능력도 있어?"

"단테 헤인스워즈 소령님만의 남자예요........"

라파엘이 어깨를 배배 꼬며 꼼질꼼질 엉덩이를 움직여 단테에게 달라붙었다. 유난히 예쁘게 차려입은 라파엘이 또 유난히 예쁘게 애교를 부렸다. 단테로서는 정말 당해낼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단테에게 라파엘의 얼굴이 그렇게 좋냐고 묻겠지만, 단테는 외모에만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 아니었다. 벌써 몇 년을 봤는데, 저 얼굴은 이미 적응을 마쳤다. 아직도 그에게 허우적거리는 건 저 깜찍한 애교와 요망한 말들 때문이 더 컸다.

"그래, 내 거지.”

깍지 낀 채로 들어 올린 손이 라파엘의 턱을 쓰다듬었다. 라파엘이 간지럽게 몸을 움츠렸다. 뒤이어 그가 뺨을 비비며 얼굴을 단테에게 가까이 붙였다. 푸흐흐 새 나오는 숨이 뺨에 닿을 만큼.

"......"

"......"

눈빛만 스쳐도 전기가 오른다는 신혼부부의 시선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눈을 쳐다봤다.

"이거... 썬팅 괜찮아?"

"예. 밖에서 안쪽 그림자도 안 보입니다."

"소리는."

"방음 기능도 확실하게 해놨습니다. 노래 부르지 않는 이상 밖에 안 들립니다."

"좋아.”

단테는 뒤로 손을 뻗어 들어온 차 문의 잠금을 걸었다.

톡, 소리가 나기 무섭게 라파엘이 단테의 위로 몸을 숙였다. 단테의 몸이 창문 쪽으로 점점 기울었다. 입술이 맞닿았다. 시간이 부족한 걸 두 사람 모두 알아 급하게 입술을 누르고 서로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후으........”

라파엘이 단테의 군복 위로 가슴을 넓게 꾹 쥐었다. 아직 손깍지를 놓지 않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단테의 뒤통수가 창문 턱에 기대어졌다.

라파엘은 입을 살짝 벌려 단테의 입술을 덮고, 입 안쪽 살로 입술을 쓰다듬었다. 그게 꼭, 차마 덮칠 수는 없어 발톱을 숨긴 손으로 쓰다듬기만 하는 사자의 손짓 같았다. 라파엘이 사자라면 동화에 나오는 겁쟁이 사자가 아닐까 싶지만......

"하아......."

키스는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금세 끝이 났다. 30초가 겨우 됐을까. 둘은 벌어진 입술을 아쉽게 닫으면서도 입술을 떼지 않고 붙인 채 감은 눈을 떴다. 그대로 마주 닿은 입술이 위로 올라가 미소를 지었다.

"완전 사내 연애 하는 기분이다. 막상 너 군인일 땐 떨어져 있느라 아무것도 못 했는데."

"저도 그건 많이 아쉽습니다. 하지만 제가 군복 입고는 절대 이렇게 못 했을 테니까......."

둘 다 군인이면 지금 휴식이 뭔가, 상관을 따라 아주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시선을 한 번씩 스치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잠깐 손을 잡는 즐거움은 있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몸에 남은 약간의 아쉬움은 키스를 마친 뒤 서로를 숨 막히게 끌어안고 있는 것으로 갈무리를 했다.

"생각해보니 너 이사님으로 일하는 모습을 제대로 본 건 처음이더라고, 너무 좋았어.”

"다행입니다. 걱정했는데."

라파엘은 단테를 일으키고, 운전석으로 손을 뻗어 에어컨을 켰다. 차 안의 열기가 불어온 찬바람에 날려 흩어졌다. 라파엘보다 먼저 들어가야 하는 단테는 룸미러를 보며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했다. 이 정도면 별다른 티는 안 날것이다. 제 자리가 뒤쪽이기도 하고.

열 오른 뺨을 조금 더 식힐 예정인 라파엘은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사실 단테는 귀여웠습니다."

"뭐?"

"다른 분들이 나이가 많으셔서도 있지만, 단테 정말 거기서 가장 어린 것 같았어요.”

"그야 당연하지. 네가 같이 앉아 있던 분들이랑 나랑 차이가 몇 년인데, 거의 20기수 가까이 차이 날걸."

"예. 그래서 이제 혼자 최전방에 서 계시지 않아도 되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

단테는 웃으며 라파엘의 귀 앞쪽을 툭 쓰다듬었다. 얼마 전 머리를 깔끔하게 다듬은 데다가 오늘 완전히 뒤로 넘기기까지 하니 이 주변은 보드라운 잔머리만 몇 가닥이 남아 있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이런 촉각들이 전부 손에 오래도록 남았다.

하지만 성실한 단테 헤인스워즈 소령은 신혼의 달콤한 시간 와중에도 손목을 들어 올려 시간을 확인해야 했다.

역시 즐거운 시간은 빨리 지나간다. 겨우 뽀뽀 한 번 한 것 같은데, 벌써 시간이 10분 가까이 지나 있었다.

"최후방에 서는 막내는 눈치 보여서 이제 가 봐야겠다. 퇴근하고 보자."

"예, 저랑 저녁 식사 꼭 같이하셔야 합니다. 헤인스워즈 소령님."

"뭐 드시고 싶은지 생각해 두십시오. 헤인스워즈 이사님."

둘 사이에 남은 웃음소리는 차 문이 닫히며 겨우 거둬졌다. 단테는 주차장을 걸어가며 열심히 표정 관리를 해, 건물 앞에 도착하기 전에서야 웃음기를 지울 수 있었다.

다시 회의실에 도착했을 때도 시간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헤인스워즈 재단 측은 계속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고, 군 측도 아직 반 정도는 자리가 비어 있었다.

단테가 다시 자리에 앉자, 선임이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

"어이, 후임님."

“예.”

"다 들었어. 헤인스워즈 이사랑 같이 차에 탔다면서?"

"어떻게 아셨습니까?"

"너 나가고 바로 담배 피우러 나갔다가 봤다. 이거 이거 로비, 아니면 협박이라도 받고 온 거 아니야?"

단테와 라파엘이 부부 사이란 걸 아는 테온 소령의 얼굴엔 장난기가 걸려 있었다. 단테도 가볍게 응수했다.

"헤인스워즈 이사가 철저하게도 제 배우자까지 납치해 와 차에 태워뒀더군요."

"그래서 뭐래?"

"요구사항을 들어 주지 않으면 저녁밥은 없답니다.”

"거 무시무시한 말이네."

크크큭, 그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둘의 대화를 들은 포츠 소령이 앞자리에서 홱 고개를 돌렸다.

"뭐야, 그딴 일이 있었어? 넌 그걸 곧이곧대로 따라가서 당했어?"

아...... 농담을 다큐멘터리로 받아들인 사람 덕에 둘의 웃음은 서먹해졌다.

"와, 이거 문제네. 고고한 척은 있는 대로 다 해놓고 뒤에선 제일 만만해 보이는 소령을 데려가서 수작질을, 읍."

"좀 닥쳐 봐.....이놈이 일부러는 아니고 오해로 인한 거야. 알지?"

"예. 뭐....."

선임은 재빨리 손을 날려 당사자 앞에서 배우자의 욕을 하는 사태만은 막았다. 이건 아무리 수직 사회인 군대라도 위아래가 없을 일이니까.

"왜! 넌 후임이 당했다는데 자존심도 안 상하냐. 이런 건 정식으로 항의해야지."

"항의하긴 뭘 해. 여기까지 듣고도 눈치를 못 챘냐. 얘 성이 헤인스워즈로 바뀐 지가 언젠데."

"어? 뭐? 진짜? 헤인스워즈 집안 사람이랑 결혼했어?"

"예에......"

둘이 티격태격 주고받는 공방 가운데 낀 단테는 식은땀을 한줄기 흘리며 주변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아직 어수선한 분위기라 말단들의 이 소동이 퍼져나가진 않았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빨리 밝히고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반년 전에 결혼했습니다."

"아, 어쩐지. 아까 너 데려오는 문서 보낼 때 성이 좀 이상하다 싶었어. 바빠서 제대로 보진 못했는데, 그게 헤인스워즈였단 말이야?"

"예. 라파엘 헤인스워즈 이사가......."

"그럼 뭐냐, 저 헤인스워즈 이사랑 아는 사이야? 배우자 친척?"

음......

결국 가까이 앉아 있던 주변마저 '쟤 뭐라는 거야...?' 하는 시선을 보내왔다. 포츠 소령만 모르는 의문의 민망한 분위기가 퍼졌다.

“소령님, 사실"

"너는 좀, 사람 말 끊지 말고, 말을 입 밖으로 내기 전에 생각 좀 해라. 헤인스워즈 이사가 얘 배우자야."

단테 대신 선임이 그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설명해 주었다.

"......어?"

"헤인스워즈 이사랑, 우리 소령이랑 결혼한 사이라고, 지금 부부가 한자리에 있던 거다."

뭐? 진짜? 뭐? 진짜? 소리는 내지 못하고 커다랗게 뜨여지기만 한 눈에 그런 글자가 쓰여져 있는 것 같았다. 단테는 겸연쩍게 웃기만 했다.

"뭐, 뭐야! 왜 진작 말을 안 했어?"

"죄송합니다. 딱히 중요한 내용은 아닌 것 같아 말씀드려야 한다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

"뭘 미안해, 자식아. 너도 오늘 갑자기 불려와서 마주친건데, 야, 그리고 나도, 얘도 아침부터 몇 번이나 말하려고 했다. 얘 추천한 이유가 따로 있다고, 그러니까 내가 전부터 자기 말만 하는 습관 고치라고 했지."

선임은 계속해 단테에게 비난이 갈 만한 일들을 차단해 주었다. 단테는 결국 그 배려를 감사히 받아들였다. 라파엘이 말했던, 전방에서 한발 물러나 있는 모습이란 게 실감이 확 나기도 했다.

"어, 그렇군.... 맞아.... 내가 제대로 안 들은 거니 미안할 건 없고......"

포츠 소령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단테를 보는 그의 시선이 묘하게 달라졌다. 편하게 아랫사람으로 대하던 태도에서 조금은 말과 행동을 하기 전에 머뭇거림이 생겼다.

"저기, 그러면, 헤인스워즈 측에 뭔가 다른 생각 있는지는 아나? 아까 식사하면서 말 나왔잖아. 왜 이렇게 퍼주려고... 아니, 적극적으로 손익 신경 안 쓰고 후원하려고 하는지.......”

"본인이 JROTC 환경 개선에 관심이 많아, 전부터 계속 고민을 해 온 건 사실입니다. 당장은 손실이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결국 메꿔질 계획이지 않습니까. 속셈이 따로 있진 않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하긴 배우자가 바로 앞에 앉아 있는데 뭔 꿍꿍이속이 있진 않겠지. 아, 어쩌면 후원사업도 네가 있어서........ 아, 아무튼 알겠다.”

그는 앞으로 가서 자신의 상관들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그들의 시선이 단테에게 향한 걸 보니 '사실 저 녀석이 헤인스워즈 이사와 부부사이였답니다.' 하는 이야기를 전한 것 같았다.

하지만, 상관들은 아마 '그걸 이제 알았나?', '여태 몰랐어? 그래서 데려온 거 아니야?' 하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아무렴 전직 참모총장의 사위인데, 외부에서 발령받아 온 그와 같은 케이스가 아니라면 사령부에 오래 있던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겠지.

“쟤가 원래 좀 눈치가 없어. 그래도 나쁜 뜻은 없을 거다. 인성은 착하고.... 여기 온 지 얼마 안 돼서 잘해 보려다 저러는 거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단테가 선임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그는 머쓱한 얼굴로 자리에 돌아와 단테를 몇 번 더 흘끔였다. 학창시절에 악의적으로 못되게 굴었던 선배들과 그가 다른 건 알았다. 그래도 이렇게 되어 버리니 조금은 불편해진 게 사실이었다.

뭐, 건물 층수도 다르고 부서 간 하는 일도 완전히 다르니 오늘 이후 더 얽힐 일은 없을 것이다.

점심시간이 끝날 때를 딱 맞춰 헤인스워즈 재단 측의 사람들도 자리에 착석했다. 라파엘은 다시 정돈을 받았는지 단테가 마지막으로 본 것보다 말끔한 모습이었다.

라파엘은 들어오며 단테와 눈을 마주했다. 나름 본인은 티를 내지 않겠다고 금세 고개를 돌렸지만, 이 안에서 방금 둘에 대한 이야기가 지나간지라 모두 둘의 아이 컨택을 눈치채고 말았다.

라파엘은 자리에 앉아 군 측 인사들과 식사 잘하셨냐는 등의 가벼운 이야기로 회의의 시작을 띄웠다. 단테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정면을 응시하다가, 다른 이들의 시선이 흩어질 때쯤 미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좋냐?"

하지만 옆자리 선임에겐 역시 들킬 수밖에 없었다. 장난스러운 질문이 던져졌다. 단테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뭐... 저 조그마한 게 열심히 하는 모습이 귀엽지 않습니까."

"......조그마해? 아, 원근법으로?"

이 위치에서 라파엘은 딱 한 뼘만 하게 보이긴 했다. 하지만 옆에 앉은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커서 조그마하다는... 느낌은... 전혀... 조금도 들지 않지만, 옆 사람의 표정을 보아하니 나름대로 진심인 것 같았다.

"좋을 때다.......”

그래, 한창 신혼이지. 그는 고개만 좌우로 절레절레 저었다.

오후 회의가 재개되고, 이번에 자리에서 일어난 건 라파엘이었다. 그래서 차 안에서 연습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전에 발표를 직원이 맡고 라파엘이 토론을 이어갔다면, 이번 안건은 발표까지 라파엘이 직접 맡았다.

그는 스크린 앞으로 갔다. 단테와 얼굴이 정면으로 마주하는 위치였다. 아무 대본도 없이 그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회의실 안에 한참 힘이 들어간 목소리가 이어졌다. 발표가 끝난 후에도 그는 자리를 지키고 서서 군 관계자들이 던진 질문을 받았다. 대표 격인 라파엘이 앞으로 나온 만큼, 군에서도 책임자인 대령이 마이크를 많이 잡았다.

대화를 주고받던 라파엘이 한 손을 꾹 쥐었다.

“예상보다 파격적인 재단의 제안에 놀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건 아닐까 의심하실 수도 있겠지요.”

회의장 안에 감도는 분위기를 정확히 찌른 말이었다. 그 말대로 군은 다소 얼떨떨했다. 분명 구체적으로 좋은 제안이다만, 어째서 이 정도 제안을 하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단테보다 외부 일정을 나갈 일이 많은 선임이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허, 오전에 무슨 생각인가 싶게 만들었던 게 다 작전이었나 보네."

"그렇습니까......?"

"어. 저것도 다 협상 기술이겠지, 뭐."

라파엘이 아버지뻘인 군인들 앞에서 꽤나 포커페이스를 잘 유지하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뭐만 하면 표정에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던 이전의 그를 떠올리며 단테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재단으로서는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는 상황이 맞습니다. 헤인스워즈 재단에게 현재 금전적 이득보다 필요한건 성공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가능한 한 큰 규모의."

새로 맡은 사업에 대한 포부인 걸까. 젊은 이사다운 패기라 생각했던 것은 다음 말을 듣고 바뀌었다.

"많은 성공 사례가 쌓여야, 정말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친구들이 다가올 때 망설이지 않을 겁니다. 재단의 조사 결과 가장 도움이 필요한 친구들이 섣불리 손을 뻗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그 도움에 섣불리 기대지 못하고 확실한 선택만을 하는 것입니다."

.....아. 단테가 어렴풋이 느꼈던 것이 라파엘의 말 안에 모두 담겨 있었다. 그의 말은 계속해 이어졌다.

"안심하고 많은 선택지를 바라볼 수 있게 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건 성공적인 선례들이겠지요. 그게 이 프로젝트에서 헤인스워즈 재단이 가장 우선하는 것입니다."

"......"

아마 헤인스워즈 재단도 많은 조사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단테는 라파엘이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저 내용들이 어디서 나온 건지 어렴풋이 느껴졌다.

이어 재단이 약속한 건 분기별로 필요한 금액의 장학금 지급, 청소년 학군단과 군사대학, 경찰대학과의 협약을 통해 이루어질 진학에 따른 구체적인 지원이었다. 재단의 수익은 지원받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그 안에서 많은 인재들이 태어날수록 늘어난다. 라파엘은 그러한 비전까지 말하고 설명을 마쳤다.

사이에 이야기가 더 오갔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알 사람은 다 아니까, 한마디 들어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라파엘의 이야기를 듣고 잠시 생각하던 대령이 뒤쪽 책상을 돌아보았다.

"헤인스워즈 소령.”

“소령 단테 헤인스워즈."

상관의 부름을 들은 단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자네가 하는 평가나 질문이 가장 날카롭게 들리지 않겠나. 해 보게.”

군 인사들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반면, 라파엘을 포함한 헤인스워즈 재단의 사람들은 실제로 단테가 언급되자 오늘 중 가장 긴장한 모습이었다.

"이사님의 말씀을 듣는 내내, 과거에 제가 장학금이 필요했을 때도 이런 제도가 있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절실한 사람에게 무엇보다 유혹적으로 들릴 이야기입니다."

단테는 뒤로 모은 손을 꾹 쥐었다. 회의실이 조금 밝아졌다. 앞쪽에 집중되도록 켜놓은 불을, 상황을 보고 눈치 좋게 뒤쪽 자리에도 켠 것이었다. 그러나 빛이 있건 없건 라파엘이 집중한 대상은 바뀌지 않았다.

"헤인스워즈 이사님께서는 사례를 통해 확신을 주신다고 하셨지만, 지금 재단은 그처럼 분명히 내세울 수 있는 증거가 없으니 구두로 된 다짐이나마 듣고 싶습니다."

"다짐이라면, 어떤......"

"말씀하신 정책이 얼마나 지속이 가능하겠습니까?"

그가 말한 '가장 절실했을 때', 그때의 단테는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겠는 서류들 앞에서 한참 끙끙거린 적이 많았다. 학교 선생님이나 교관이 소개해 준 곳이라면 그도 어느 정도 믿고 신청을 했는데, 그런 대중적인 단체는 지원 대상 안에 들기가 너무 빡빡했다.

그리고 장학금을 받아서도,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돈이니 당장에 꼭 필요한 것을 하자는 방향으로 사용처를 정하곤 했다. 그리고 당시 그의 1순위는 자기 자신이 아니었다. 학교와 학군단이라는 단체로부터 어느 정도의 의식주를 지급받는 그는, 받은 것들을 성당으로 보냈다.

그때 왜 어머니가 정색을 하고 그것들을 다시 그에게 돌려주었는지, 왜 다시는 이러지 말라며 혼이 났는지 그는 다소 늦게 깨달았다.

단테는 이르게 사회로 나와야 했다. 환경도 그랬지만, 스스로를 내몬 면도 있었다. 어릴 때 생겨난 습관은 다소 오래 이어져, 라파엘을 만나기 전까지도 그는 누군가에게 기대기를 조심스러워했고, 대신 혼자 힘으로 헤쳐 나가고자 했다.

그런 단테에게 누군가를 의지하는 법을 가르친 라파엘이니, 이 질문에 대한 대답도 완벽하게 해낼 것이다.

"지금 이 형태 그대로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라파엘이 씩 미소 지었다.

"금방 바뀔 겁니다.”

엥? 황당한 대답을 듣고 라파엘에게 시선이 몰렸다.

“이건 초기 모델이고, 저희가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도 보완점은 발견될 겁니다. 당연히 차차 고쳐나갈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기존 학생들에게는 충분한 설명을 하고, 더 좋은 방향으로 간다고 약속할 것입니다. 시류에 맞게, 개인 사정에 맞게 변화를 거쳐야만 더 오래 유지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소령님 질문대로 포부를 말씀드리자면."

단단한 목소리로 그가 말을 이었다.

“재단에 손을 뻗은 그 누구라도 성장 과정이 아프지 않을때까지 지속하겠습니다."

"......"

".....제가 설불리 이 말을 번복할 수 없는 이유를, 아실 분들은 다 아시겠지요."

라파엘이 단테를 바로 응시했다.

그 앞에서 날아온 온기가, 이 앞에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마음속에 일어난 부드러운 파문이 조금 전부터 끊이질 않았다. 기분 나쁜 울렁임은 아니었다. 따뜻한 물이 어느새 어깨까지 흠뻑 차오르고, 잠긴 물속에서 두근거리는 고동이 계속해서 다가오는 파동과 섞여들었다.

너는 내게 미래에 대한 기대를 알려주고

또 내 과거까지 보듬어 주는구나.

라파엘이 세심하게 살펴 적용한 요소들, 가장 절실한 사람을 우선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그들에게 확신을 주겠다는 목표가 누굴 향했는지, 단테만큼은 결코 모를 수가 없었다.

"질문은 이상입니다.”

단테는 입술을 위로 조금 올렸다. 회의의 막바지이니 이 정도 반응은 보여도 괜찮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 인사에 단테는 진심을 꾹 담았다.

*

"날카로운 질문을 하랬더니, 이건 배우자 더 띄워 주기만 한 거 아니야?"

"그래 보였습니까? 전 나름대로 핵심 질문이라 생각했습니다."

단테가 던진 질문과 그에 대한 답으로 회의는 아주 훈훈한 마무리가 지어졌다. 애초에 대령도 그럴 의도로 그를 지목했을 것이다.

단테를 포함한 소령들은 회의실에 조금 더 남아 자리를 정리하고 나왔다. 찌뿌둥한 허리를 펴 올려다본 하늘엔 약간 주홍빛이 섞여 있었다. 오전에 회의에 불려갔는데, 어느덧 일과시간이 저물어 갔다.

“소령님."

건물 밖을 나오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라파엘이 다가왔다.

건물 밖인 데다가, 아까 대령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단테와 라파엘의 사이를 소개하기까지 했으니까 이 정도 아는 척은 괜찮을 것이다. 단테는 라파엘에게 눈짓했다. 라파엘이 방긋 미소 지었다. 회의장과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본 테온 소령이 어이없단 소리를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파엘은 단테 앞에 섰다.

"이제 댁으로 돌아가십니까?"

“아니오. 저는 다른 팀에 파견된거라, 부서로 복귀해 업무 마무리하고 인사드리고 가야 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함께 퇴근하는 낭만적인 상상을 한 것 같은데, 안타깝지만 그러기엔 단테의 본부에서의 연차가 조금 많이 모자랐다.

그 때, 프로젝트 책임자인 대령이 분위기를 보았는지 저쪽에서 외쳤다.

"헤인스워즈 소령! 그냥 여기서 바로 들어가 봐!"

단테는 그 방향을 보며 뒤로 손을 모았다.

"아닙니다. 배려 감사드립니다. 복귀했다가 보고드리고 돌아가겠습니다."

"됐어, 됐어, 4층엔 내가 말해 둘 테니까! 오늘 큰 활약 했는데 가 봐야지."

상관의 지나친 배려를 받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그 배려를 두 번이나 기절하는 건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단테는 흘끔 옆을 보았다. 그동안 잘했으니 오늘 하루쯤이야 뭐, 괜찮을 것이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단테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래그래, 얼른 가 봐."

이 분위기대로라면 별일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선임이 "그럼 나도 간다.” 하며 다른 이들의 뒤를 따라갔다.

단테는 상관들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조금 더 서 있었다. 차에 탄 그들이 멀어지고 나서야 꼿꼿하게 세운 허리에서 힘을 풀었다.

"후우.......”

남은 긴장까지 바닥에 다 내던진 듯한 시원한 한숨이었다. 이어 그는 아침에 드레스룸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때처럼 눈을 빛내는 라파엘의 앞에 섰다. 단테의 얼굴에도 많은 상관들 앞에선 지을 수 없던 표정이 올라왔다.

"그럼 이사님,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좋습... 앗, 운전 제가 하겠습니다."

"됐습니다. 저는 종일 앉아 있기만 해서."

결국 단테가 운전석에 앉고, 라파엘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단테가 척 내민 손 위에 라파엘이 키를 내려놓았다.

"단테"

"예"

"......고마워요."

"뭐가 말입니까?"

"알고 계시잖아요. 마지막 질문이요."

단테는 대답 없이 시동을 걸었다. 사실 마지막은 라파엘이 황당한 농담으로 시작해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것까지 대답을 미리 외워뒀던 답변이었다. 또한, 단테가 집에서 라파엘이 연습하는 모습을 미리 보았던 것이기도 했다.

“결국 잘 해낸 건 이사님이시잖습니까."

하늘에 푸른색과 붉은색이 반씩 섞였다. 라파엘도 지금 꼭 그런 기분이었다. 옆에서 느껴지는 그의 온기와 애정이 따스했다가도, 그에 반응하는 자신의 감정이 너무 격해 두려웠다. 지금도 심장이 아플 정도로 뛰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완벽하고 다정한 건 이런 부작용이 있었다. 평생을 약속한 뒤에도, 짝사랑할 때의 심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저 정말로 오늘 어땠어요?"

그래서 그는 늘 이렇게 단테에게 확신을 갈구하곤 했다. 24살의 라파엘을 반하게 했던 장난스러운 미소가 씩 올라왔다.

"아주 훌륭하셨습니다. 상당히 감동적이었습니다."

"아아, 그거 이제 그만하고......."

이사님, 소령님, 하고 부르며 장난치던 것도 좋지만, 딱 거기까지만이었다. 역시 '라피' 하고 다정하게 불러 주는게 가장 좋았다.

"열심히 했더라.”

주차된 차가 자리에서 빠져나오고, 담장을 통과했다. 이제 정말 헤인스워즈 이사와 헤인스워즈 소령의 일과는 끝이 났다.

"내 어림짐작은 닿지도 못할 만큼 네가 해온 게 많다고 느꼈어. 그리고 든든했어."

"든든이요?"

"전에 리온에게 너랑 사귀는 거 들킨 날, 리온이 너 뒷배로 쓰라 한 적 있었거든. 그때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 했단 말이야. 병아리 같은 녀석한테 어떻게 기대냐고, 그런데 오늘 보니까 백이 되는 것 같아. 덕분에 조기 퇴근도 해 보고"

"그건 좋은 감상이지만, 팀장님은 제가 아니라 저희 아버지를 뒤에 세워놔도 뒷배로 활용 못 하실 거 압니다."

"......너, 신혼여행 때부터 묘하게 한 번씩 말로 찌른다?"

라파엘이 도르륵 눈동자를 옆으로 돌렸다. 자기가 한 말 중 틀린 말은 없다는 표시였다. 참 나. 단테가 혀를 찼다.

"나 정도면 나름 편하게 지내고 있는 거지."

라파엘은 지금도 단테를 무척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뭘 하든 '팀장님이 옳아요. 다 좋아요.' 하던 시절에서 조금 벗어났기도 했다. 그 증거로 라파엘은 헹,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단테가 무슨....... 조금 더 편하고, 가진거 다 누리며 사셔도 괜찮습니다. 그러니 가끔은 갑질도 하면서 지내십시오. 솔직히 말해서 군에서 누가 감히 전 육군참모총장 사위를 막 대합니까."

"......육군참모총장님 아들도 내 밑에서 잘 굴렀는데."

“저는 아버지가 가서 구르라고 뻥뻥 걷어차 내보낸거였고, 단테는 아버지가 얼마나 아끼시는데요. 또 저는 쥐뿔도 없는 애송이, 팀장님은 대규모 테러 사건을 막은 영웅이시잖습니까. 큰소리 떵떵 치며 군 생활 할 요건이 다 모여있는데, 사서 고생하고 답답하게 사는 사람도 단테밖에 없을 겁니다."

아휴, 아휴, 라파엘이 들으란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잔소리가 다소 많이 길었다. 이 자식이.......

"그래서, 갑질을 하고 살라고?"

“팀장님이 최선을 다해 갑질하셔도 별거 아닐 테니 꼭 하십시오."

핸들을 잡은 두 손에 뿌득 힘이 들어갔다.

"하, 좋아. 오늘부터 각방이야. 넘어오기만 해 봐. 말로 두들겨 맞아 서러우니 갑질 좀 해 보자."

"으아아 저한테 말고요!"

군에서! 군에서만요! 라파엘이 허둥지둥 말을 주위 담는 사이, 두 사람의 신혼집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단테는 라파엘의 어깨를 쿡 두드렸다.

"필요한 때가 오면 쓸게, 나도 바보는 아니야."

"압니다. 단테 현명한 사람인 거."

그리고, 어쩌면 단테가 가고 있는 방식이 실제론 가장 현명한 방법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가끔은 너무 현명한 것보단 차라리 편안하셨으면 해요."

"나도 알아. 네가 나보다 날 더 아끼는 거."

차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둑해진 골목에 어느덧 가로등이 하나씩 불을 밝혔다. 둘은 차 문을 열고 안에서 내렸다.

조수석에서 내린 사람이 먼저 현관으로 가 센서등 불을 밝혀 놓고, 운전석에서 내린 사람을 기다렸다. 둘 다 현관 앞에 서면 열쇠로 문을 열고 함께 안으로 들어간다.

서로의 일과시간에 생긴 갑작스러운 만남은 낯설었지만, 퇴근길에 함께한 기억은 수없이 많아 과정이 익숙했다.

불 꺼진 집에 스위치가 켜졌다. 집 안에 아침에 둘이 떠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단테가 라파엘을 기다리며 깔고 앉아 있어 조금 흐트러진 소파 블랭킷, 개수대에 넣어두기만 한 커피잔 두 개, 그리고 닫는 것을 깜빡해 활짝 열려 있는 드레스룸의 문까지.

자연스럽게 군복 단추를 풀며 그곳으로 들어가려던 단테를 라파엘이 붙잡았다.

"팀장님, 저희 사진 남길까요? 오늘 밖에서 만난 거 기념해서.”

"응? 그래, 좋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라파엘은 달려와 찰싹 달라붙었다. 카메라 어플이 켜진 휴대폰이 긴 팔에 들려 멀리 뻗어졌다. 씩 웃는 평범한 셀카로 시작한 사진은 '소령이랑 이사가 만난 것처럼 근엄하게 찍어야지.' 하는 말에 굳은 표정이 되어 찍은 셀카로 변했다.

"어어, 그 각도, 좋아."

그러다 테이블에 휴대폰을 세워 타이머를 맞춰 놓은 채 둘이 평화 회담을 하듯 악수하는 사진이 되었고, 나중엔 라파엘이 멋지게 발표하듯 서 있고, 단테가 기특하단 얼굴로 열심히 박수를 치는 장면도 앨범에 담겼다.

어느덧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어둑해진 시간이 찾아왔다. 평소 둘이 편한 옷을 입고 식사를 마친 뒤 TV 프로그램을 보던 시간, 두 사람은 눈물이 맺히게 웃고 소파 위를 뒹굴었다. 이렇게 큰 소리로 배가 아프게 웃어본 것도 오랜만이었다. 원인은 라파엘의 사진첩에 남은 표정이 이상하게 찍힌 사진들 몇 장이었다.

한참 장난을 친 끝에 라파엘은 가장 처음에 둘이 얼굴을 맞대고 웃으며 찍은 사진을 배경화면으로 바꾸었다.

"아, 재미있었다."

"저도요."

웃느라 기력이 다 빠진 둘은 집에 도착한 모습 그대로 옷도 못 갈아입고 소파에 널브러졌다.

"저희 또 오늘처럼 만날 일이 있을까요?"

"한 번 있었던 일이 두 번 없으리란 건 없지."

여러 가지 우연이 겹쳐야 하겠지만, 이번에도 그런 우연을 품고 만나지 않았던가.

"라파엘 네가 국가적인 행사에 참여하게 되면 내가 의전 경호를 한다든가."

"헉, 진짜, 진짜로 좋습니다. 팀장님 경호 슈트 입은 모습!"

라파엘의 머릿속에 몸에 맞는 검은 정장을 위아래로 입고 인이어에 손을 얹은 단테의 모습이 떠올랐다. 새카만 슈트는 단테의 잘록한 허리와 길게 뻗은 다리를 더 부각시켜 줄 것이다. 오늘처럼 공적인 자리에선 멋진 단테를 감상하고, 밤이 무르익어 사적인 시간엔 경호원님과 ......

"의전 대우를 받을 곳까지 올라갈 자신은 있고?"

하지만 특수전사령부가 단테급의 베테랑을 경호로 붙여 줄 정도면 좀 더 굵직한 인물이 되어야 했다. 그 위치는 아마도 보통 높은 자리는 아닐 것이다. 막 시작한 재단의 어린 이사는 어림도 없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아, 아니면 팀장님 별 다실 때 제가 축하하러 가는 겁니다."

"그것도 좋네. 그건... 내가 좀 많이 열심히 살아야겠고."

이쪽 역시 장군이 되려면 까마득한 건 마찬가지였다. 배울 내용도 수두룩했고, 앞으로 남은 연차며, 더 쌓아야 할 실적.......

그 시간을 나아가는 과정 속에, 매일 퇴근하고 오는 길, 가끔은 멀리 출장을 다녀오는 길, 힘든 일과를 보내고 오는 길 모두 끝에는 라파엘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마주한 라파엘 역시 단테를 만나기 위해 힘껏 달려온 모습일 것이다.

라파엘은 단테에게 미래에 대한 기대와 기쁨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단테는 라파엘에게 그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었다.

마주 보며 웃는 커다란 웨딩사진 액자 아래에서, 둘은 그때와 비슷한 표정으로 함께 있었다.

로맨틱 캡틴 달링 외전2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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