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140)화 (140/151)

# 12.

“그것을 극복한 것은, 모든 것이 저 혼자 만든 감옥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언제고 로잘린이 도움을 청한다면 털어놓아야지 했던 이야기였다. 자신은 이미 거치며 극복했지만, 언젠가 라나가 걱정하던 대로 로잘린은 극복하지 못한 채로 자신이 만든 죄책감과 공포에 갇혀 있었으니까.

“아이는 나자마자 죽어 사라졌고, 어떠한 방식으로도 저를 붙들 수 없었어요. 그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아이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감정을 솔직히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워서 오랫동안 외면했다는 죄책감이 저를 붙잡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라나는 여전히 자신이 로잘린에게 보냈던 편지의 내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과 어미의 삶을 축약하여 보낸 것이었고, 로잘린이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하지 않기를 바랐으므로.

“폐하, 제가 두 번째로 보냈던 편지의 내용을 기억하십니까?”

라나의 물음에 로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삶의 형태는 다르고, 슬픔을 느끼는 시기도, 표현하는 방식도, 그 크기도 모두 다르기 마련입니다. 어리석은 어린 날의 저와 같이 그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시기만을 바랍니다.

일찍이 그리 말해 주었는데도, 로잘린은 과거의 라나와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어쩌면 제가 폐하를 만나게 된 것은 이런 순간을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라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로잘린이 어리석다 꾸짖지도, 제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심하게 여기지도, 그렇다고 마냥 가엾게 여기지도 않는 태도였다. 리리엔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진짜로 언니가 있었다면 이렇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을 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이제라도 마음껏 슬퍼하세요. 폐하께서 의식을 차리시거든 솔직하게 대화를 나누고 위로해 달라고 말씀하세요. 그리고 가엾은 공주님은 그만 마음에서 보내 주시면 됩니다. 제가 그랬듯, 누구나 아이는 잃을 수 있으니까요.”

라나는 얼마든지 그래도 된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날 아기씨에 대한 걱정은 미리 하지 마세요.”

지나치게 앞서 걱정하는, 로비엔과 아이와 관련된 문제에서만 겁쟁이가 되는 로잘린에게 충고하기까지 했다.

“태아는 모체의 상태에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폐하께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시면, 그 걱정처럼 될까 두렵습니다.”

“……라나.”

“그리고 또 누군가 아기씨를 해할까 두렵다고 하셨지요?”

라나가 그럴 리가 없다는 듯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제 궁 안에서 로잘린의 안위를 위협하는 세력은 없었다. 로비엔이 그 싹만 보여도 가만두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또다시 그러한 세력이 생겨난다 해도, 로비엔은 기어코 제 아내와 아이를 지킬 것이 분명했다.

왕은 사람을 홀릴 정도로 아름다운 미인이었으나 무르거나 멍청하지 않았다. 비슷한 이유로 아이를 무력하게 다시 잃는 경험은 하지 않으리라.

라나가 알고 있는 일이니, 로잘린은 더욱 잘 알고 있을 사실이었다.

“다음에 낳은 아이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첫아이가 생각나지는 않았나요?”

로잘린이 작은 목소리로 근원적인 거부감의 가장 밑바닥까지 끌어내 드러냈다. 마치 아이를 낳아서는 안 되는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 순간의 상처는 사라져도 상흔은 남으니까요.”

라나가 시원스레 수긍했다. 제 주인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경계로 털을 세운 고양이 같은 꼴을 했다.

“죽어 버린 아이와 같이하고 싶었던 일, 해 주고 싶었던 것들을 해 주며 둘째와 시간을 보냈어요. 상처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더라도, 두 번째 아이에게 아끼지 않고 모든 것을 퍼부어 주며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사는 건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그 아이와도 이렇게 시간을 보냈겠지, 하는 대리만족이 없었다고는 못 한다. 하지만 눈앞의 아이를 혼동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첫아이를 향한 미안함으로 시간을 흘려보내기에는, 둘째 아이가 너무도 사랑스러웠으니까요.”

본래 시간은 흐르고, 사람은 나아가야 하는 존재이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로잘린은 저보다 한참 더 앞서 있는 라나를 조금은 멍하게 응시했다. 사실 라나도 긴 시간에 걸쳐 얻었던 것이니만큼, 깨달음은 단번에 찾아들지 않았다. 다만, 저승과 이승은 닿아 있지 않고, 자신이 한 일은 무용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식사를 준비해 줘요.”

로잘린의 부탁에 라나가 환하게 웃었다. 제가 길게 늘어놓은 이야기에 감사 인사 한번 없어도,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처럼.

“즉시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라나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황급히 밖으로 나섰다. 이어 문밖에서 로잘린의 끼니를 준비하라 이르는 목소리와 거의 환호성을 지르는 마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멀어지는 두 목소리를 들으며 로잘린은 오랜만에 가볍게 웃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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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언이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로잘린을 향해 짧게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최근 로잘린이 식사를 챙기지 않는다고 아랫것들이 발을 동동 구르는 꼴을 여러 번 본 터라 밀리언도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로잘린의 뒤를 따라 들어온 시녀와 하녀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 보이는 것을 보니, 오늘은 제대로 섭식을 한 모양이었다.

“별일은 없었나요?”

“예.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로비엔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마당에 로잘린까지 흔들리면 안 될 일이었다. 밀리언은 감정변화를 크게 드러내지 않고 능숙하게 뒷수습에 나서는 로잘린이 얼마나 단단한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그 남편에 그 아내라고, 둘이 아주 똑같은 유형의 사람이라는 사실도.

“의회는 어떻던가요?”

“아무래도 의회의 구성원인 길버트가 왕을 해하려 했다는 데에서 적잖은 파장이 있습니다.”

로잘린이 어깨에 걸치고 있던 숄을 의자 등받이에 걸쳐 두며 로비엔의 침대 근처로 사부작사부작 걸어갔다.

로잘린은 첫날의 충격 이후로는 밀리언에게도 최대한 무던한 낯을 가장하고 있었다. 분명 속은 말이 아닐 테지만,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

‘비께선 강하지만 약해. 그리고 그 사람을 안아 줄 수 있는 유일한 품이 나라는 사실은 제법 즐거운 일이고.’

밀리언은 언젠가 로비엔이 즐거운 얼굴로 말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안식처라는 사실은 흘려듣기엔 무척이나 아름다운 말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한 발만 잘못 들여도 비극으로 향하는 항해일 수 있었다.

만일 그 소중한 사람이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밀리언은 머리를 작게 흔들어 끔찍한 가정을 털어 냈다. 상상도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럴 테죠. 의회의 입김도 조금 줄었겠군요.”

의회 내 공화주의자들의 소리도 작아졌다. 온건한 자건 과격한 자건, 왕을 시해하려던 자들이 줄줄이 잡혀 들어간 때에 입을 잘못 놀렸다간 같이 골로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였다.

“그렇습니다.”

“밀레스를 이용해서 계속 은근히 압박해요. 적어도 폐하께서 눈을 뜨실 때까진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고정석이 되어 버린 로비엔의 침대 옆 의자에 앉으며, 로잘린이 명령했다. 그녀의 시선은 숲속에서 곤히 잠든 공주처럼 잠이 든 로비엔에게 계속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왕실 소식지는, 말씀하신 대로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 시선이 잠깐이나마 밀리언에게 돌아온 것은 왕실 소식지를 언급했을 때였다. 왕실 소식지를 발행하는 기관의 기념식에서 로비엔이 다쳤다는 사실은 끔찍했지만, 앞으로 그들을 지켜 줄 것 역시 왕실 소식지였다.

“미리 가능한 한 많이 인쇄해 둬요. 폐하께서 의식을 찾는 즉시 전국에 뿌릴 수 있도록.”

왕은 피습을 당해 쓰러졌지만, 모두 이겨 내고 의식을 되찾았다. 시해를 주도한 극단적인 공화주의자와 공범은 모두 색출해 냈으며 엄중한 법의 처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 왕실은 여전히 굳건하다는 내용이 미리 인쇄해 둔 왕실 소식지의 골자였다.

가능한 한 빨리, 언제든지 발화할 수 있는 혼란을 가라앉히려는 의도였다.

“명 받들겠습니다.”

밀리언이 순순히 로잘린의 명에 따랐다. 로잘린의 욕심은 정말로 보가트 상단과 로비엔뿐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상기하면서.

“나가 봐요. 혼자 쉬고 싶으니.”

밀리언이 피곤한 기색의 로잘린을 발견하고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로잘린은 라나와 마리까지 모두 묶어 밖으로 내몰았다. 아무리 없는 척해도 머무르는 인기척은 불편했다.

모두가 사라지고 로비엔과 로잘린만 남은 침실 안, 표표히 떠도는 숨소리 위로 따스한 햇볕이 내려앉았다. 그림 같은 평화였다.

“모든 게 다 정리되어 가고 있어요, 폐하.”

그가 일어나서 잡다한 일로 골머리를 앓지 않기를 바랐다. 깨어난 뒤에는 오로지 몸의 회복을 위해서만 힘쓰기를 바랐다. 로잘린은 그 때문에 로비엔이 쓰러져 황망한 가운데에도 할 일을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모든 일이 진정되고, 그에 대한 여론이 동정과 애정이 대다수인 지금에 이르러 있었다. 로잘린의 극악한 트라우마 역시 회복을 시작하고 있었다.

“폐하께서만 눈을 뜨시면, 모든 게 완벽해질 거예요.”

로잘린이 애정을 갈구하는 어린애처럼 커다랗고 따뜻한 그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저를 쓰다듬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저를 혼자 두지 않으실 거죠?”

눈을 떠야지. 당신은 이처럼 나를 홀로 두지 말아야지.

“이제 조금 무서워져요.”

로잘린이 속삭였다. 그러면 그가 무의식 속에서도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 걸 아는 사람처럼.

애타는 눈빛이 간신히 숨만 쉬고 있는 사내의 얼굴에 머물렀다. 며칠째 침대만 지키고 누운 사내의 얼굴에는 다소 초췌한 기색이 비쳤지만 그래도 아름다웠다.

“……!”

그 순간이었다. 로잘린은 제가 구명줄처럼 손에 쥔 로비엔의 커다란 손이 움찔하는 기색을 느꼈다. 따뜻하게 온기가 돌기는 해도 며칠 내내 조금도 움직이지 않던 손이었는데, 그 손끝이 움직였다.

로잘린이 저도 모르게 입을 작게 벌리고, 로비엔의 얼굴을 간절하게 응시했다. 분명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었던 것을 아는데, 억겁 같았다.

환기를 위해 열어 둔 격자 창문 너머로 바람이 불어와, 끈으로 묶어 정리해 둔 침대의 휘장을 흔들었다. 그 순간, 꽃잎처럼 나풀거리는 천의 끄트머리처럼 로비엔의 속눈썹이 흔들렸다.

“폐하.”

로비엔을 부르는 말끝이 볼품없이 떨렸다.

머리카락 색과 같은 속눈썹 사이로 물빛 눈동자가 유려하게 드러났다. 로잘린은 눈이 부신 듯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습관처럼 그의 눈동자에 배어드는 다정함을 발견했다. 로잘린이 그의 손을 붙들고 침대에 머리를 묻은 채,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울지 말라니까.”

어둠뿐이었던 시커먼 통로에서 로잘린을 찾아 헤매는 동안, 마음이 쓰였던 것은 그것뿐이었다고 속삭이는 사내를 보고 울음을 참을 길은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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