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1부터 시작하는 드래곤 라이프 006화
왜 여태까지 사냥만으로 경험치를 올릴 생각을 했던 것일까.
너무 안일했다.
천영은 새빨갛게 충혈된 눈을 부릅 뜨고선 억지로 책을 읽었다.
드래곤으로써의 생활을 한지 이틀 째. 사냥으로 레벨을 4까지 올리고 모르는 인간 세 명을 구해냈다. 그 뒤로 책을 얻었고 폐허로 돌아와 그
것들을 풀어낸 다음 읽기 시작한 것 이 9시간 전. 그는 밤이 새도록 책 을 읽었다.
물론 이 설명만 듣자면 천영이 천 하의 애독가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 만 사실은 살짝 달랐다.
“더럽게 재미없네!”
책은 상당히 재미없었다. 예상대로 였다. 하지만 그 내용은 이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상당히 유익 했다.
차원 그리픈,그러니까 인간들이 ‘그리픈 대륙’이라고 부르는 이곳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책을 읽는
것이 가장 빠르고 손쉬운 방법이었 다.
천영은 각종 쓸데없는 책들과 나름 의 정보가 담긴 책들을 읽으며 이 그리픈 대륙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양 의 경험치를 얻을 수 있었다.
[레벨 업!]
밤새도록 책을 읽은 결과 레벨이 세 단계나 올라 7이 되었다. 하루 종일 보스 급 짐승을 잡아서 간신히 1레벨을 올린 것에 비해 책을 읽는
행위는 상당히 심플하고 편하면서도 간단하게 레벨을 올릴 수 있었다. 게다가 아직 데이브가 준 책의 1/10도 읽지 못한 상태였다.
데이브가 준 책들 중에서는 역사책 이나 마법에 관한 이론과 논리에 대 한 책도 있었으며 ‘삶은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에서 끝나는가?’같은 철학적인 책도 있었고 ‘그녀는 방앗 간에서 과연 무엇을 원했을까?’같은 19금 소설책도 있었다.
천영은 벌써 5권 째 책을 독파한 뒤 다음의 책을 읽었다. 제목을 보 는 순간 표정이 움찔했다.
[옆집 _누나가_샤워하는_동안_l.txt]
“뭐야 이건.”
그러나 불평도 잠시 책을 펼치는 순간 모든 불만이 깡그리 날아가고 말았다.
천영은 신세계를 경험했다. 이건, 황홀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어찌 하여 인간에게 이런 위대한 묘사력 을 부여하여 이렇게나 상상력을 고 통스럽게 만드는지 신을 원망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 소설은 감히 평론하는 것조차 송구스러울 정도로 굉장했다. 그는 드래곤이 된 팔을 부들부들 떨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데이브,너 이 자식……
다음에 만나면 남자로써 좋은 친구 가 될 수 있겠어!
천영은 정신없이 그 소설을 읽어 내려갔고 점심이 될 때쯤에서야 정 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쉽네……
마침 중요한 장면에서 끊기고 말았 다. 2권에서 더 이어지는 모양.
천영은 남아있는 책들을 모조리 뒤 져보았지만 2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짧게 탄식했다. 이 명작을 더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고통스 러웠다. 하지만 참아야했다. 살아남
아서 언젠가는 이 책의 후속작을 읽 어야만 했기에 경험치를 위해 그 소 설의 여운을 뒤로 하고 다음의 책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3시간 쯤 지났을까 천영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책장은 바람에 휘날려 스스로 넘어 갔고 작고 여린 드래곤은 마침내 머 리를 바닥에 뉘여 잠에 빠져들었다.
누가 보아도 무방비한 그 상태에 작은 새들이 날아와 천영의 옆에 앉 아 부리로 콕콕 쪼아댔지만 깨어나 지 않았다. 너무나도 깊은 잠에 빠 져든 탓이다.
드래곤이라는 존재는 강한 능력을 타고난 대신 잠이 많은 종족이었다.
이후로 천영이 다시 깨어났을 때에 는 저녁이 거의 다 되었을 때의 시 간이었다. 부스스한 눈가를 문지르 며 깨어난 그는 읽다 만 책을 쳐다 보았다.
‘계속 책을 읽는 것도 못할 짓이 네.’
애초에 그는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경험치란 사냥으로 올리는 것. 그런 사고방식이 틀어박힌 천영 에게 있어서 아무리 책이 효율이 좋 다고 쳐도 연독률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직 책은 많이 남아 있으니까, 사냥이랑 병행해야겠어.’
천영은 몸을 일으켰다. 역시 가만 히 앉아서 책만 읽는 것은 몸이 근 질거렸다. 직접 움직여주지 않으면 감이 사라질지도 몰랐다.
슬슬 지성이 어느 정도 있는 몬스 터들이 불을 피워 야영을 준비할 시 간. 천영에게 있어서 사냥에 가장 적합한 시간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천영이 데이브에게서 받은 책을 모 두 읽는 데에는 2주라는 시간이 필 요했다.
대략 100권에 달하는 책들이었지 만 하루 종일 책만 붙잡고 있을 수 는 없으므로 천영은 따로 시간을 정 했다.
오전,오후에는 독서. 저녁에는 사 냥,새벽에는 취침. 그런 생활을 2 주 동안 반복하니 마침내 100권이 넘는 책들을 모조리 독파할 수 있었 다.
앞서 이야기 했지만 애초에 천영은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학교에
다닐 때에도 교과서만 보면 잠에 빠 져들었고 소설은 보는 순간 어지럼 증이 몰려올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드래곤이 된 이후로는 달랐다.
글을 읽는 즉시 내용이 머릿속에 파고들었고 단어가 정렬되었으며 얻 은 정보에 대해 추측과 정렬,판독 을 했고 뇌의 구석에다가 완벽하게 필터링 된 정보를 저장했다.
인간일 때와는 달리 드래곤이 된 천영은 지식이라는 것에 대해 많은 갈증을 느꼈다. 이 100권이 넘는 책 을 읽고 나서도 부족하다고 느낄 정 도였다.
천영은 마지막으로 읽은 책을 인벤
토리에 집어넣고 상태창을 열었다.
[상태창]
이름 : 서천영
Lv. 21 클래스 • 一
직업 : -
세력 :
종족 : 드래곤
나이 : 21(27)
성별 : 無
칭호 : 위대한 여행자
HP : 1034/1034 MP :
11980/11980
힘 : 91 체력 : 109 민첩 : 79 지 력 : 267
정신력 : 1000
잔여 스텟 : -
상세정보 ▼
어린 드래곤의 신체는 피부가 나무 처럼 단단하며,이빨과 발톱이 바위 처럼 튼튼합니다.
드래곤의 레벨은 나이와 동일합니 다.
성체가 되지 못한 어린 드래곤은
경험치를 얻는 것으로 나이(레벨)을 올릴 수 있습니다.
레벨을 임의로 을리는 과정은 나이 를 강제로 먹는 행위와 똑같기 때문 에 보통보다 많은 경험치를 요구합 니다.
성체가 될 경우 더 이상 경험치를 통해 성장을 할 수 없습니다.
드래곤에게는 성별이 존재하지 않 습니다.
성체가 될 경우 성별을 임의로 정 할 수 있습니다.
드래곤의 스랫은 성장을 할 때마다 자동으로 분배됩니다.
드래곤은 클래스를 가질 수 없으나 해당 클래스의 스킬을 배울 수는 있 습니다.
레벨은 순식간에 올라 21이 되었 다. 사냥을 해서 얻은 경험치도 꽤 나 쌓였지만 그보다도 독서로 인한 경험치가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되었 다. 만약 책이 없었다면 아직까지도 레벨은 10에서 간당간당 했을 것이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지막 책 을 덮는 순간 천영의 눈에는 갈증이 어렸다.
‘더 읽고 싶어.’
그는 하루라도 빨리 휴먼 폼을 사 용하고 싶었다. 인간은 사회의 동물.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가야만 한다. 헌데 천영은 벌써 2주나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를 하지 않은 채 혼 자서 몬스터들을 학살하며 책만을 접하며 지내고 있었다. 애초에 지구 에서도 사람들과 큰 관계를 갖지 않 았고 넥스트를 플레이할 때에도 다 른 유저들과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았 지만 그럼에도 아예 인간을 만나지 않는다는 것은 꽤나 심심하고 외로 운 일이었다.
인간의 모습을 한다면 그 모든 것 들은 해결될 일이다.
데매스 오크 부족의 족장의 목을 무심하게 베어낸 뒤 천영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서서히 지고 있었다. 슬슬 저 녁 시간이고 밥을 먹을 시간이다. 그의 끼니는 언제나 원시 부족이 피 워 놓은 불에다가 고기를 구워서 먹 거나 물고기를 생으로 잡아먹는 것 으로 때웠다. 물론 상당히 맛은 없 었지만 그렇게라도 배를 채울 수밖 에 없었다.
천영은 어떠한 고민을 했다.
‘인간들의 마을에 몰래 숨어들
까……?’
드래곤이 된 이후로 계속 느낀 것 이지만,사냥으로 얻는 경험치는 상 당히 적었다. 성장이 더뎠다. 드래곤 이라는 존재가 왜 현명하고 깊은 사 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막강한 마 법을 구사하고 있는지 이해가 갈 정 도로 지식에 대한 갈망은 너무나도 뚜렷했다.
천영의 경우에는 그저 경험치를 얻 고 싶다는 욕망에 비롯한 것이었지 만,이 또한 드래곤이 됨으로써 어 떠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농후 했다.
해가 지면 독서를 하는 시간이 돌
아온다. 이 그리픈이 온 이후로 2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독서를 해왔 다. 폐허에 앉아서 외롭게 책장을 넘기며 지식을 쌓았지만 그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애초에 데이브가 준 책의 양은 상당히 적었고 천영의 독 서 속도는 상당히 빨랐기 때문이다.
천영은 어떤 갈림길이 눈앞에 놓인 것처럼 보였다. 안전을 위해 더 이 상 책에 의지하지 않고 사냥만으로 경험치를 올려 휴먼 폼을 완성한 뒤 인간들의 마을에 내려갈 것인가 아 니면 몰래 숨어들어서 독서를 해서 휴먼 폼을 빠르게 습득할 것인가.
해가 완전히 지고 달이 하늘에 드 리우자 천영은 하늘을 날았다. 항구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등대 빛이 반사되는 검은색의 바닷가는 아름답 기 그지없었다.
밤이 되었음에도 도시의 불은 전혀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밝게 도로는 가로등에 의해 환하게 빛나 고 있었고 건물들 역시 눈부신 조명 이 흘러나왔다.
천영이 숨어들 길은 없어보였지만 그의 눈에는 어떤 건물이 똑똑하게 비춰졌다.
‘레덕슨 대도서관.’
대략 4층 정도로 되어 보이는 갈 색의 건물은 아직까지 안쪽에서 희 미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이 미 손님을 모두 내보냈는지 인기척 이 드물었다.
천영은 그곳까지 날아가 지붕에 안 착했다. 창틀에 슬쩍 몸을 내린 다 음 내부를 들여다본다.
수많은 서적들이 책장에 꽂혀있었 다. 주인도 없고 이곳의 시민이라면 누구라도 읽을 수 있는 그런 책들. 그러나 지금은 저녁이기 때문에 문 을 닫고 불을 모조리 끈 상태였다. 밤에도 모든 물체를 환하게 볼 수 있는 드래곤의 시각으로는 전혀 문
제가 없다.
“……조금만.”
천영은 슬쩍 도서관 안쪽으로 몸을 들였다. 돌아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른 인간들에게 들키면 분 명히 좋지 않을 꼴을 당할 것이 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영은 독 서에 대한 갈증을 도저히 무시할 수 가 없었다.
결국 그는 책 몇 권을 빼낸다. 별 로 재미도 없어 보이는 철학 책이 다. 제목 또한 ‘엄마가 좋아? 아빠 가 좋아? 선택해!’같은 쓸데없는 고 민을 하게 만드는 것이지만 아무래 도 좋았다. 그저 글을 읽는 것만으
로도 경험치가 오르기 때문이었다.
처음 몇 권은 인벤토리 안에 보관 해서 몰래 빠져나오곤 했다. 새벽 시간인데다가 사람들이 잘 출입하지 않아 손바닥만한 작은 생명체인 드 래곤이 범죄를 저지르기엔 아주 적 당한 장소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천영은 책을 홈치러 왔다가 자신도 모르게 어떤 책에 홀리고 말았다.
‘그 영응을 탄생시킨 드래곤에 대 하여.’
책의 제목에는 드래곤이 들어가 있 었다. 심지어 그것뿐만이 아니라 그
책의 주변에는 드래곤에 관한 책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천영은 급격히 솟아오르는 호기심 을 참지 못하고 그것을 가지고 빠져 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책을 펼쳐들었다.
그렇게 천영은 정신없이 책에 빠져 들었고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다.
본래 책을 조금 살펴보더라도 천영 은 아침이 되기 이전에 정신을 차리 고 하늘을 날아 자신의 거처로 돌아 간다. 이 도서관은 저녁에 아무도 출입을 하지 않았다. 천영의 짧은 경험에 의하면 그랬다. 그것은 천영 에게 있어서 좋은 징조였다. 남들
몰래 독서를 할 수 있다는 것. 저녁 이 되면 아무도 출입을 하지 않는다 는 점. 그러한 짧은 정보만을 믿고 천영은 일주일 내내 이 도서관에 출 근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이 많이 둔해졌 을 것이다. 저도 모르게 밤을 꼬박 세워가며 드래곤에 관한 서적을 읽 고 있는데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걸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