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1부터 시작하는 드래곤 라이프 016화
천영이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쓰 러진 뒤로부터 하룻밤이 훌쩍 지난 이후였다.
해가 중천에 떠있는 것으로 보아 점심은 이미 훌쩍 지나있었다. 몽롱 한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천영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업혀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깨어 나고 보니 낯선 천장이 반겨주고 백 의의 여의사가 기다려준다는 전개까
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설마 업혀있 을 줄은 몰랐기에 절로 한숨이 나왔 다. 이 무슨 민폐 덩어리란 말인가.
“으음……
몸을 꿈틀대며 얼굴을 들자 천영을 업고 있던 검은 머리의 여인이 고개 를 살짝 돌렸다. 천영을 마주 볼 수 는 없었겠지만 최대한 보려고 노력 을 하는 모양새였다.
“정신이 드니?”
“헉.”
이럴 수가. 설마 여자한테 업혀있 을 줄이야. 천영은 더욱 더 쪽팔림 이 몰려왔다. 남자로써 정신을 잃은
여자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안아주 지는 못할망정 업혀서 다니고 있다 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 내려주세요.”
“그래? 더 업혀있어도 괜찮은데.”
“아뇨,제가 죄송해서요.”
“……으음. 좋았는데 아쉽네.”
“네?”
검은 머리의 여인은 살짝 무릎을 굽혀 천영을 내려놓았다. 천영이 깨 어난 것을 안 원정대원들은 강가를 따라서 가던 와중에도 호기심 가득 한 시선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 런 시선들이 상당히 부담스러웠기에
천영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가 순간 머리가 떵하고 울려 와 중심을 잃는 바람에 툭,누군가 와 부딪혔다. 고개를 돌려보자 안시 르엘이 생긋 웃으며 천영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몸은 괜찮아?”
“죽을 것 같아.”
“멀쩡한 모양이네. 이게 몇 개로 보여?”
안시르엘이 뜬금없이 손가락 두 개 를 펼쳐 보이며 묻자 천영은 뚱한 말투로 대답했다.
“58 개.”
“혁! 큰일이야.”
“마이너스 56개.”
“오빠가 맞을 짓을 골라 해서 큰일 이야.”
그녀의 장난을 대충 넘겨버린 천영 은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나 얼마나 잔 거야?”
“엄청 오래.”
“어휴.”
대화를 하던 와중에 그제야 천영은 자신의 옷차림이 상당히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얀색의 스키니 진에 흰색과 베이지색이 섞인 털 코
트를 입고 있었고 목에는 줄무늬 목 도리도 하나 둘러져 있었다. 마찬가 지로 베이지색에 동그란 방울이 장 식으로 달린 종아리 전체를 덮는 부 츠를 신고 있었는데 상당히 착용감 이 괜찮았다. 웬만한 명품 신발들보 다도 훨씬 더.
“이건……
“자벤 아저씨가 선물해주신 거야.”
“그,그래?”
천영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는 호 의라는 것에 당황했다. 사회생활을 할 때에도 천영이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거나 뒤떨어지면 언제나 버림을
받을 뿐이었고 넥스트를 플레이 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천영이 조금만 잘못하면 바로 지적이 날아왔다. 장 비가 박살났다고 암만 말해봐야 알 아서 수리 도구를 챙겨오지 그랬냐 며 한 소리를 들을 뿐이었다.
헌데 지금은 상처 입고 쓰러졌더니 치료를 해준 것에도 모자라 반나절 이나 그를 업고 다닌 사람도 있었 고,심지어는 장비를 입혀주기도 했 다. 갑작스레 이런 호의를 받게 되 니 꽤나 당황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천영은 슬쩍 옆쪽을 돌아보았다. 기억 속에 남아있던 자벤이라는 남
자가 무뚝뚝한 얼굴로 앞만 바라보 며 걸어가고 있었다. 천영은 슬쩍 그에게 다가가 옷자락을 잡았다.
“응?”
“저기, 옷 감사합니다……
“아,옷 말이냐? 뭐…… 내 딸내미 랑 또래처럼 보여서 그냥 넘어갈 수 가 없더라고. 옷도 선물해 줬으니까 또 어디 가서 쓰러지진 말아라.”
“물론이죠.”
자벤이 ‘딸내미랑 또래’라는 말을 할 때에는 순간 자신의 나이는 27 이라며 밝힐까 했지만 관뒀다. 괜히 분위기를 초치고 싶지는 않았으니
“흥,저런 꼬맹이를 꼭 데리고 다 녀야 돼?”
“그만해 아슬리. 아직 어린애야.”
“어린애면 뭐? 지금 우리가 놀러가 는 것도 아니고 민폐잖아.”
“그렇다고 두고 갈 수도 없잖아?”
“누가 뭐래? 그냥 그렇다는 거지.”
천영은 자신을 저격하는 듯한 대화 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원정 대장으로 추정되는 갑옷 차림 의 남자와 붉은색의 로브를 입은 젊 은 여자가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대충 보건데 둘의 사이는 그럭저럭 팀원으로써 가까워 보이지 만 막 친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천영은 아슬리라는 여자의 말을 듣 고 마침 잘 됐다 싶은 마음에 입을 열었다.
“맞아요…… 저는 도움도 안 되고 민폐만 끼칠 뿐이에요. 여기에 같이 있을 자격이 없어요. 그만 가볼게
요.”
그러자 다른 원정 대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사래를 쳤다.
“안 돼! 어딜 가려고! 여기가 얼마 나 위험한지 알고나 하는 소리야?”
“너 여기 오기 전에도 엔트떼에 습 격당했다며.”
“혼자 있다가는 정말 크게 다칠지 도 모른다?”
“맞아. 저 여자가 하는 말은 무시 해. 누가 널 민폐라고 생각한다고?”
“오히려 칙칙했던 분위기도 살아나 고 좋은 걸?”
그러면서 원정대원들은 은연중에 아슬리를 힘껏 째려보았다. 대놓고 쳐다보며 입에다가 작게 욕을 담는 사람도 있었고 은근슬쩍 째려보면서 눈치를 주는 사람도 있었다. 졸지에 사람들의 눈치를 받게 된 아슬리는
울상을 지었다.
“아니,내가 뭐 잘못한 것도 아니
고……
셀라임은 그런 천영의 모습을 가만 히 지켜보더니 혼자 고개를 끄덕이 고선 납득했다.
‘과연 역시 27살이라는 말은 거짓 말이 아니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분위기를 휘어잡는 방법이라는 건 가. 배워야겠어.’
하지만 천영은 아무 생각 없이 말 을 뱉었을 뿐이었다.
‘아니,나 진짜 혼자 레덕슨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방금 전까지 천영을 업고 있던 여 자는 아예 그의 한쪽 손을 꽉 잡았 다.
“이제부터는 언니랑 같이 다니자.”
꽤나 좋지 못한 결과였다.
대략 1시간 정도를 이 원정대원들 과 같이 있다 보니 대강적인 성격은 파악할 수 있었다. 일단 이 원정대 는 너무 급조된 나머지 서로에 대해
잘 아는 부분이 없었다.
일단은 ‘위대한 여행자’라는 타이 틀을 얻었을 정도이니 특출한 뭔가 가 있는 모양이었지만 그것과는 별 개로 팀워크는 전혀 맞지 않았다. 애초에 조합이 탱커가 2명밖에 없고 힐러가 3명밖에 없는 것은 좀 심각 한 문제이다.
50명이나 되는 원정대이면 최소한 1명의 탱커가 10명을 담당할 정도 는 되어야 하는데 그 정도도 안 된 다면 밸런스가 심각하게 무너진다.
‘뭐,그건 원정 대장이 알아서 하 겠지.’
천영은 원정 대원들과 이야기를 하 면서 자신의 나이를 은근슬쩍 밝혔 다.
“저 사실 27살이에요.”
“응,나는 사실 신선이야.”
“이 꼬맹이가 농담도 잘해. 언니는 사실 여신이란다.”
“진짠데……
나이를 안 믿어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안시르엘과 셀라임은 드래곤 의 모습을 한 천영을 보았기에 ‘드 래곤이 되었고 원래 만렙이었던 레 벨이 초기화가 되어서 겉모습이 꼬 맹이로 바뀌었다.’라는 비상식적인
이야기를 믿어는 주겠다만.
다른 사람들은 천영의 드래곤 폼을 보지 못했기에 믿는 것이 불가능했 다. 그렇다고 이 원정 대원들에게 신뢰를 주겠다고 드래곤의 모습을 보였다가 괜히 뒤통수를 맞고 혹 갈 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쉽사리 변신 을 할 수도 없었다. 결국 천영은 당 분간 나이에 관해서는 조용히 있기 로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별까지 여 자로 묻혀가는 것은 질색이었다. 그 래서 결국 남자라는 말을 꺼내자 역 시나 믿지 않았지만 천영은 끝까지 자신이 남자라고 우겼다.
“제가 어딜 봐서 여자처럼 생겼단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머리카락을 질끈 묶 고 뒤로 넘기자 소녀가 아닌 소년티 를 언뜻 보이는 느낌이 들기도 했 다.
원정 대원들은 천영이 이렇게까지 하며 하도 주장을 해대기에 결국 어 쩔 수 없이 믿는 눈치였다.
“너 그렇게 생겨서 남자라니. 얼마 나 여자들한테 원망 받으려고.”
“나중에 이 머리도 자를 거예요.”
“아까운데……
어느 정도 성별에 대해서는 수긍하 자 천영은 속으로 안도했다. 하도 중성적으로 생긴 얼굴이라 아예 머 리카락을 잘라내면서까지 설득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정도만 해서 믿어주는 것은 다행이라고 볼 수 있었다.
“오빠,근데 진짜 남자 맞아?”
셀라임이 슬쩍 다가와서 묻자 천영 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너까지 그럴래? 너 내가 원래 누 구였는지 알았다며.”
“아니,그건 아닌데……
그녀는 말꼬리를 흐리면서 천영의
몸을 슬쩍 흠쳐봤다.
“아까 옷 갈아입힐 때 보니까. 그…… 그게 없……
“그만.”
“드래곤은 중성이라 그런 거야. 오 케이?”
“흠. 일단은 믿어줄게.”
“‘일단은’이 아니야. 그냥 그렇게 알고 있어.”
천영의 그 확고한 말에 셀라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뭔가 찝찝하다 는 듯 머리를 배배 꼬았다.
“또 뭐가 문젠데?”
“오빠,일단은 남자든 여자든 둘째 치고 어린애 모습이잖아?”
“응.”
“근데 계속 내가 오빠라고 부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
그제야 천영은 셀라임이 어째서 오 빠라는 단어를 말할 때만 유독 작게 속삭이듯 말하는지 깨달았다.
남들이 보기에 20대 초반의 셀라 임이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것 같 은 생김새의 천영에게 오빠라고 하 는 것은 상당히 이상하게 보일 것이 었다.
“그럼 내가 누나라고 부를까?” “남들이 볼 때만.”
“크흑.”
정말 이런 꼬맹이의 모습이 돼서 좋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조 금 예쁘장하다는 점만 빼고는. 아니, 심지어 그 예쁘장한 얼굴조차 여자 로 오해 받아서 굉장히 기분이 상했 다.
천영은 상당히 마초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고 스스로가 상당히 사 나이 중의 사나이라고 생각을 하며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천영은 이 모든 고통을 인내하고
감내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꾹 참 았다. 조만간이다. 레벨이 조금만 더 오르면 이런 오해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성체가 되는 조건 레벨이 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 300은 넘겨야 할 것이고 운이 좋지 않을 경우 500레벨을 찍어야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성인의 모습을 할 수 있으니까 그때까지만 참기로 했 다.
“그나저나 너,무슨 문어 잡으러 간다지 않았어? 그건 어떻게 된 거 야?”
“응? 우리 지금 크라켄 잡으러 가
는 중이야. 말 안 했나?”
“뭐? 크라켄을 왜 산에서 잡아?”
천영의 목소리가 조금 커지자 옆에 서 걷고 있던 자밴의 조수 벡한스가 대신 대답했다.
“뭐 못 믿는 것도 당연하겠지. 우 리도 처음 봤을 땐 깜짝 놀랐다니 까? 크라켄이 갑자기 해안가에 상륙 해서 강을 타고 막 올라가더라고. 우리끼리는 별명도 지어놨어. 연어 문어라고.”
“……강을 타고 올라갔다고요?”
자벤의 조수가 해준 말에 천영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천영은
경험치를 올리기 위해 닥치는 대로 수많은 책을 읽었던 경력이 있고 그 중에서도 상당히 그의 호기심을 자 극했던 것들인 몬스터 도감은 벌써 수십 권이나 독파했다. 그리고 그 모든 몬스터 도감에서 꼭 빠지지 않 고 등장하는 종류인 대형 몬스터 항 목에는 항상 크라켄이 당당히 자리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크라켄의 특징 또한 하 도 봤기에 지겨울 정도로 달달 외우 고 있었다. 천영이 이해가 안 된다 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근데요…… 크라켄이 산을 오르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지 않나요? 죽을
때가 다가와서 스스로 묘지를 정하 러 가는 거잖아요.”
“뭐?”
“응?”
“뭐라고?”
셀라임과 자밴,벡한스 뿐만이 아 니라 그의 목소리를 조용히 듣고 있 던 다른 원정 대원들 또한 반응을 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앞서 걷고 있던 네오발에게까지 전달이 되었 다.
네오발은 천영이 해준 이야기를 다 른 원정 대원에게 전해 듣더니 고개 를 한 번 끄덕이고선 천영에게 다가
왔다.
“네가 지금 한 말이 사실이니?”
“네,책에서 읽었어요.”
“홈……
네오발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천영의 말을 곱씹었다. 아무래도 어 린애가 툭 내뱉은 한 마디에 뭔가를 결정하기는 애매했기 때문이다. 결 국 네오발은 리슬류를 불러왔다.
“이 꼬마가 해준 말이 사실입니 까?”
“응? 그,그게……
리슬류는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
다. 이 꼬맹이 역시 넥스터라는 이 야기를 듣고 별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는데 설마 이곳의 상식을 알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런 식 으로 방해를 할 줄이야. 천영을 살 짝 노려보던 리슬류는 어색하게 웃 음을 홀렸다.
“그래,뭐…… 그런 이야기도 있긴 하지. 하지만 이 경우는 조금 다르 다네. 전에 내가 말했지 않은가? 크 라켄이 얼마 전에 마을 하나를 습격 했다고.”
“그랬죠.”
사실 리슬류가 유인을 해서 해안가 에 있던 작은 마을을 습격했던 것이
지만 이렇게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 을 줄은 몰랐기에 그 스스로도 내심 만족스러워 했다.
“이 크라켄은 상당히 광폭화 되어 있어. 보통의 크라켄과는 달라. 거 기,꼬마야. 크라켄ㄴ이 무덤을 찾는 것을 실제로 본 적이 있니?”
“……아뇨.”
“나는 옛날에 몇 번 본 적이 있어. 그래서 알고 있지. 이번 경우는 많 이 달라. 위험한 상태란 말이다.”
하지만 천영은 얼굴을 찡그렸다. 이해가 잘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책에 쓰여 있던 걸요. 크
라켄은 죽기 전까지는 절대 지상에 올라오지 않는다고.”
“어허,이 꼬마가 또 책을 들먹거 리는데 그런 건 믿을 만한 게 못 된단다. 지금 당장 이 원정대 분들 이 쫓고 있는 크라켄만 해도 모르겠 니?”
천영은 이 대화가 자신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리슬류라는 남자는 우 선 현지인이다. 게다가 40대 중반. 즉 어른이다. 그에 비해 천영은 지 구에서 살다 온 10살 남짓한 꼬맹 이에 불과하고 알고 있는 얕은 지식
이라고 해봐야 책에서 봤다는 것을 말할 뿐 제대로 된 증거를 제시할 수가 없었다.
이런 표면적인 상황 때문에 리슬류 는 단순히 ‘어른으로써 어린 아이에 게 타이르는 듯한 말투.’를 구사하 는 것만으로도 대화에서 완벽하게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결국 대화하기를 포기했다. 지금 더 이상의 반박을 해봐야 건방진 꼬 맹이가 괜한 자존심을 세우며 백백 대는 것으로 보일 뿐이라는 것을 깨 달았다. 그래도 이 대화를 통해 천 영이 모든 면에서 패배를 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한 가지의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으니까.
‘저 리슬류라는 남자 굉장히 수상 해.’
아무래도 이 원정대와 함께 하면서 예의주시할 대상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