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1부터 시작하는 드래곤 라이프 044화
11장 만날 수 없어,만나고 싶은데
‘와인은 분위기로 마시는 거야.’
서천영은 언제나 그런 소리를 하곤 했다. 그는 맛을 전혀 따지지 않았 다. 그와 함께 와인 전문집에 가게 되면 언제나 싸구려 와인을 마시게 된다. 비싼 와인과 싸구려 와인의
차이점을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혜림은 분위기라는 단어를 생각 하며 ‘레드 불라리스 1090 라벨’을 한 모금 들이켰다. 병째로 들이키기 엔 너무나도 비싼 와인이었지만 애 초에 그녀는 맛을 느끼기 위해 와인 을 마시지 않는다. 술이 원체 강한 편인 혜림은 이런 와인 조금 마신다 고 취하지 않는다. 그저 분위기에 취하기 위해. 그런 느낌으로.
그런 그녀를 못마땅하다는 표정으 로 쳐다보던 늙은 노파는 창구에다 가 손가락을 빼꼼 내밀어서 지폐 몇 장을 가져갔다. 원래도 손님이 없는
정보상이지만 그녀가 와인 병을 들 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겨대고 있 으면 지나가던 거지도 지레 겁을 먹 고 도망가 버려서 장사가 잘 되지 않는다.
“망할년아. 네가 말한 인상착의가 얼마나 흔한 줄 알아?”
한 달이다. 이혜림이 노파에게 같 은 의뢰를 반복해서 넣은 기간. 짧 다면 짧지만 신뢰가 생명인 정보상 으로서는 이런 의미도 없고 쓸데없 는 일에 많은 인력을 소모해야만 한 다는 사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 다. 그래서 정보상은 혜림에게 호의 를 품고 있지 않았다.
“왜 못 찾는 거죠?”
혜림이 비싸디 비싼 와인을 한 번 에 들이켠 다음 그 병을 옆쪽에 집 어던지며 말하자 노파가 의자에 등 을 기대며 포기한 목소리로 말했다.
“20대 후반,흑색의 갑옷,180cm의 키,검은 눈동자,5클래스로 추정되 는 마법사. 참 흔하다면 흔하고,흔 하지 않다면 흔하지 않지.”
흑색의 갑옷을 입고,180cm의 키를 가진 남자는 이 대륙에서 정말 흔하 다. 5클래스의 마법사도 흔하진 않 지만 꽤나 많은 숫자가 있는 편이 다. 하지만 그 두 개의 특징이 합쳐
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서천영이라고? 동부에 이런 이름 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기 나 하는 거냐? 내가 만약 동부 출 신이었으면 진작 네년은 나한테 뒈 졌어.”
노파가 그렇게 말하자 이혜림은 침 울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 는 이곳뿐만이 아니라 13군데나 되 는 정보상에다가 서천영의 정보를 의뢰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 역시 그녀가 말해주는 인상착의와 들어맞 는 남자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아,그러고 보니.”
반쯤 실망한 혜림이 말없이 돌아가 려는 순간 노파가 그녀를 붙잡았다.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찾긴 했단 말이지. 근데 네년이 말한 서 천영과 인상착의는 전혀 달라. 마법 사라는 사실만 빼고는.”
노파의 그 말에 혜림의 무뚝뚝한 표정에 이채가 서렸다.
“그게 누구죠?”
“금색 별 마탑의 마법사,서천영. 마법 실력만 보자면 최소한 5클래스 이상일 것이라고 하더군.”
“금색 별 마탑? 거기 절대 보통의 마법사가 들어갈 수 없을 텐데
“그래서 특이하단 거지. 너희 넥스 트 출신 마법사들은 속 빈 강정이라 고 등급만 높지 아주 엉터리라며? 근데 그 마법사는 금색 별 마탑주가 직접 찾아가서 섭외를 했을 정도로 뭔가 뛰어난 점이 있는 모양이야. 끌끌끌,아주 흥미로운 인물이라 조 금 조사를 해두긴 했지.”
이혜림은 그 말을 듣고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가 알기론 넥스트 에서 건너온 마법사들 중에서 금색 별 마탑의 마탑주가 직접 관심을 가 질 정도로 특이한 마법을 구사하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서천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 니! 동명이인이 많았던 넥스트라고 는 하지만 5클래스 이상의 실력을 가진 마법사 서천영이 흔해봐야 얼 마나 흔하겠는가.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는 다르게 노 파는 별로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입을 연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내가 왜 안 알려줬겠어? 너 같이 귀찮은 년을 떼어버릴 수 있는 정보인데.”
“그게 무슨……
“연령 10세에서 12세로 추정. 키는
130cm가량 갑옷은 입지 않았음. 약 간 웨이브진 흑색의 긴 생머리에 흰 색의 브릿지 한 줄. 금색 눈동자. 그리고……
노파는 잠시 뜸들이더니 입을 열었 다.
“추정 성별은 여성이다.”
“..<?,,
이혜림이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자 노파는 어깨를 한 번 으쑥하더니 물 컵을 집었다. 마실 생각은 딱히 없 지만 목을 축이고 싶은 마음이 조금 생겨버린 탓이다.
“그 이름은 남자의 이름인데……
“그건 고정관념일 뿐이지.”
노파는 결국 물을 들이켜고 말았 다. 평소에 말수가 적던 이혜림인데 더욱 침울해진 표정을 짓고 있자 본 인도 입맛이 씁쓸해지고 말았다.
이혜림은 살짝 혼란스러운 상태였 다. 그녀가 알기로 서천영이라는 이 름을 가지고 5클래스 즉 300레벨을 달성했을 정도의 실력자는 단 한 명 밖에 없었다. 갑옷 하나를 걸치고 언제나 고독하게 넥스트를 방황하던 사내.
그런데 또 다른 넥스트 출신 서천 영이라니. 그것도 기존의 서천영과
는 전혀 다른 이미지로 나이도 절반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어린데다가 성별도 여자로 추정되고 심지어는 혼자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던 서천 영과는 다르게 금색 별 마탑에 소속 해 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군요.”
“그래,그래서 말 안 했어.”
하지만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 서도 뭔가 이끌리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이 느낌을 이해할 수 없었 다. 전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는 서천영이지만 어째선지 꼭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어쩌 면 단순한 호기심일지도 모른다.
“•……혹시 그 서천영의 행선지를 알 수 있습니까?”
“물어볼 줄 알았다. 보기 싫은 얼 굴 하나 떼어버린 다는 생각으로 공 짜로 알려주지. ‘요네 라칼타’에 있 는 비행정을 탈 예정이라고 한다. 빨리 가보는 게 좋을 거야. 언제 탑 승하는지 까지는 우리도 모르니까.”
“감사합니다.”
이혜림이 짧게 목례를 하고 그대로 바람처럼 모습을 감췄다.
노파는 가만히 앉아서 그녀가 사라 진 자리를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일 어나 주전자를 찾았다. 그 눈가에는
작지만 위험한 호기심이 어렸다. 왠 지 흥미로운 일이 생길 것 같은 느 낌이 들었다.
“넥스터 최초의 6클래스 마법사와 금색 별의 천재 마법사가 만난다면 참 재밌을 것 같단 말이지……
대략 반 년 전 그리픈으로 막 건 너온 넥스터들이 원정대를 꾸려 사 냥하기 위해 덤벼들었다가 모조리 학살당했을 때 유일하게 생존해서 돌아온 마법사,이혜림. 그녀는 그 사건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 어서 자세한 정보가 존재하지 않았 다. 다만 정보상들의 취미 중 하나 는 돌아다니는 정보를 가지고 이야
기를 짜깁기 하는 것.
‘저 여자는 다른 넥스터에 비해 너 무 압도적인 성장 속도를 가지고 있 어. 그때의 사건 때문이겠지.’
노파는 주전자에 들어있던 다 식은 차를 컵에다가 쪼르륵 따르고서는 한 입도 입술에 묻히지 않은 채 내 려놓았다. 감정 표현이 서툴지만 그 래도 뭔가를 향한 열망 하나만큼은 뚜렷했던 이혜림이 과연 서천영을 찾을 수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에 자 신의 부하들에게 지령을 전달하기 위함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 세상이 얼마나 넓은데…… 그렇게 쉽게 만날 수 있
으려나.”
“어른,세 장이요.”
이혜림은 자신의 앞쪽에 줄을 서있 던 조그만 꼬맹이가 어른용 티켓 세 장을 주문하자 고개를 갸웃했다. 모 자를 머리에 깊게 늘러 쓴,베이지 색이 섞인 새하얀 코트를 입은 저 꼬맹이는 목소리로 보나 얼굴의 형 태로 보나 어른으로 보이지는 않았 기 때문이다.
‘티켓 구매 심부름이라도 온 건
하지만 그녀의 추측이 틀렸는지 그 소년은 종업원의 표정이 굳어지자 급하게 주문을 수정했다.
“어른 두 장,……어린이 한 장.”
이윽고 돈을 지불한 다음 티켓을 받아든 소년은 허겁지겁 자리에서 벗어났다. 자신의 차례가 되자 이혜 림은 어른용 티켓 한 장을 주문한 다음 주변을 살펴보았다.
‘검은 생머리에 흰색의 브릿지…… 그런 머리칼을 가진 여자아이는 없 는데.’
애초에 이 지역은 관광지로도 꽤나
유명했기에 수많은 젊은 부부가 10 살 남짓한 자신의 자식들을 데리고 다니고 있었다. 다양한 머리색을 가 진 그 어린 소년,소녀들은 대부분 이 부모님과 함께하고는 있었지만 몇몇 아이들은 부모님과 떨어져서 개별 행동을 하고 있는 바람에 그녀 가 원하는 인물을 찾기란 꽤나 어려 운 일이었다.
심지어는 모자를 쓴 아이들도 꽤나 많아서 더욱 골치가 아파왔다.
‘금색 별 마탑의 특징인 금색 손목 시계를 찾을 수 있다면 편하겠지.’
하지만 그것 역시 절대로 쉬운 일 은 아니다. 늦겨울,한창 추울 날씨.
손목은 물론이요 손 전체를 의류로 꽁꽁 뒤덮는 계절이기에 손목을 일 일이 살펴보기란 꽤나 힘든 일이었 다.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은 했 던 터라 이혜림은 크게 실망하지 않 았다. 노파가 알려준 서천영이라는 마법사가 언제 어느 방향으로 어떤 비행정을 타고 출발할지에 대해 전 혀 아는 것도 없이 무작정 찾아왔으 니 만날 수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 한 일이었다.
그래도 미약한 희망을 품고 이혜림 은 ‘위호’행 비행정의 티켓을 구매 했다. 지금은 사람이 많이 살지 않
는 지역이라 그리픈의 주민들은 그 곳에 갈 일이 별로 없겠지만 던전이 라면 안달이 나는 넥스터들이 최근 이곳을 향하고 있다는 말이 있기 때 문이다.
던전,루블랑의 신전.
최초 발견자가 공략을 진행하다 말 고 도중에 포기한 다음,반 년 뒤에 다시 인원을 모집하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알려진 곳. 상당히 레벨 제 한이 높았다는 정보가 있어서 많은 넥스터들이 충분히 준비를 한 다음 위호로 모여들고 있다고 한다.
이혜림이 생각하기에 서천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마법사 소녀가 이곳
에 온 이유라면 하나밖에 없다고 생 각한다. 그녀 역시 넥스터니까,던전 공략 보상에 관심이 있던 것은 아닐 까? 그렇다면 비록 이곳에서 만나지 는 못해도 위호에 도착하게 되면 만 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결 국 직접 찾아가보기로 결심했다.
“위호 행 비행정 곧 출발합니다!”
그녀가 비행정에 탑승하자마자 안 내인이 비행정 앞에 서서 소리를 지 르자 수많은 사람들이 허겁지겁 비 행정에 탑승하기 시작했다.
혜림은 검은색 로브를 여민 다음 고개를 돌렸다. 비행정 몇 대가 주 차되어있는 가파른 절벽 바깥쪽. 상
당히 높은 지형인 이곳은 마치 세상 을 아래로 두고 내려다보는 듯한 느 낌을 주곤 했다. 험하고 거친 살구 색의 산맥이 발아래에 펼쳐져있는 데다가 안개가 잔뜩 끼어있는 모습 은 자연의 웅장함을 느끼게 해준다.
혜림은 품에서 와인 한 병을 꺼냈 다. 눈으로 보고 정한 다음 꺼낸 것 이 아니기에 아무거나 잡혀져 나오 지만 그럼에도 꽤나 비싼 와인이었 다. 그녀는 코르크 마개를 염력으로 딴 다음 그것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는데 옆쪽에서 누군가가 다가오 는 기척이 느껴졌다.
“어,혹시……
조심스레 다가온 누군가가 입을 열 자 이혜림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는 아주 익숙하고 친숙한 여자가 서 있었다. 성기사,셀라임이었다.
“역시,혜림 언니 맞네! 안녕!”
“셀라임이구나. 오랜만이야.”
덤석!
갑작스레 달려들어 혜림을 끌어안 은 셀라임은 펄쩍펄쩍 뛰면서 기뻐 하는 티를 마구마구 냈다. 낯선 장 소에서 친하게 지내던 이를 만난다 는 것은 정말로 드물기 때문이었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내가 그래도 성기사인데 건강 빼 면 시체지!”
징그립게 달라붙는 셀라임을 톡 떼 어버린 혜림은 아주 희미하게 미소 를 지었다. 넥스트에서 같이 게임을 할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동생을 만 나자 차갑게 식었던 마음이 조금은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나저나 언니 복장 많이 바뀌었 네. 예전엔 전투용 장비 하나만 고 집해서 입고 다녔잖아.”
“옛날 일이지. 이곳에선 옷도 일일 이 세탁해줘야 해서 전투용 장비만 계속 입고 다닐 수는 없잖아.”
“그건 그렇지. 나도 그렇고 엘링이 도 요새는 그냥 평상복 입고 다녀.”
그렇게 말하며 셀라임은 지금 본인 이 입은 옷이 그 유명한 마티아 공 방 장인들의 수제작 작품이라며 마 구 자랑을 해댔다. 그 모습이 너무 나도 익숙하고 그립던 것이라 혜림 의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그나저나 언니,이곳에 넘어와서 레벨 업은 많이 했어?”
혜림은 그 질문에 표정이 살짝 굳 었다. 셀라임은 그 표정을 보고선 별로 좋지 못한 질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지 못한 일이 있던 건가?’
그녀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나는 꽤 레벨 업 많이 했거든. 지 금 315레벨이야. 게다가 이것 봐 라.”
셀라임은 품속에서 흰색의 명찰 같 은 것을 꺼내들었다. 그곳에는 그녀 의 사진과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신분증도 만들었다! 언니는? 마탑 에 들어갔겠지? 넥스트에서는 엄청 유명한 마법사였잖아.”
“나는…… 마법사 자격증만 따놓고 마탑에 들어가진 않았어.”
“그래? 마법사는 마탑에 소속되지 않으려면 다른 클랜이나 직장이 있 어야한다고 들었는데.”
하지만 별로 흥미가 생길만한 주제 는 아니여서 셀라임은 다른 질문으 로 넘어갔다.
“그러고 보니 이 비행정에 탄 걸 보니 언니도 루블랑의 신전 공략하 러 가는 거야?”
“아니,누굴 좀 찾고 있거든.”
“그랭? 누구 찾는데?”
그 질문에 이혜림은 아주 작게 미 소를 그렸다.
나한테 마법을 가르쳐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