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1부터 시작하는 드래곤 라이프 047화
“그동안 잘 지냈어?”
그것이 한참을 고민하던 혜림이 처 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그럭저럭.”
천영의 그 대답을 듣고서 혜림은 여러 가지 하고 싶었던 말이 떠올랐 다. 흔한 소설이나 영화 속 주인공 들은 꼭 그런 말을 하지 않던가? ‘왜 우리를 그냥 두고 가버린 거
야?’,‘왜 다시 돌아오지 않은 거 야?’등등 왠지 내뱉는 순간 울음이 터져 나와야만 할 것 같은 그리움을 나타내는 재회의 대사들. 하지만 혜 림은 그런 말을 모두 삼켰다.
단지 ‘오랜만이야.’라고 웃으며 넘 긴다.
넥스트를 플레이하던 유저들이 300레벨을 서서히 달성하고 많은 사람들이 최종 단계의 레벨까지 도 달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당연하게도
그 중에서도 ‘급’이라는 것이 존재 했다. 같은 300레벨이라고 해서 똑 같은 300레벨인 것은 아니다.
유저들 간의 편차가 조금 심했는데 마법사의 경우엔 그게 특히나 조금 더 심했다.
끝없이 많은 마법 스킬들과 만랩을 달성하고 나서도 공부를 계속 해야 될 정도로 방대한 지식,거기에 마 법을 사용함에 있어서 수많은 경험 과 노하우,센스와 반응 속도,전략 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 을 갖춘 마법사는 절대 그리 흔하지 않았다.
렌디,케일런,이혜림은 그런 만랩
마법사들 중에서도 아주 특출한 존 재였다. 그들이 유명한 이유는 특별 한 마법을 가지고 있다거나,전설 속에 등장하는 마법을 배웠다거나, 사기적인 아이템을 가졌다거나,말 도 안 되는 힘을 지닌 종족으로의 탈태를 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RPG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 ‘컨 트롤’이 아주 뛰어났기 때문. 마법 사로서 정말 하기 힘든 전술과 묘기 를 보여주는 그들은 전 세계 사람들 과 수많은 랭커들이 감탄을 자아내 며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인정을 받 는 존재였다. 그런 명성은 현재 그 리픈으로 10만 명의 넥스터들이 넘
어온 지금까지도 유지가 되고 있었 다.
당장에 이 파티에만 천영과 케일 런,렌디,이혜림을 제외하고도 11 명의 마법사가 있었고 그들 전부가 200레벨을 넘긴 상태에다가 300레 벨을 넘긴 마법사도 4명이나 되었 다. 하지만 그런 300레벨을 넘는 마 법사들조차 케일런 둥의 존재는 우 러러봐야할 정도로 급이 다른 존재 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가 가지 않았 다. 넥스터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을 달리는 그 뛰어난 마법사 세 명이 어째서 저런 꼬맹이 하나를 극진하
게 모시고 있단 말인가?
‘저 꼬마 대체 누구야?’
‘너 넥스트 플레이할 때 본 적 있
어?’
‘아니 없는데.’
‘서천영? 난 들어본 적 있는데.’
‘어디서?’
‘까먹었어.’
루블랑의 신전,그 던전의 입구.
거대한 푸른색의 수정처럼 생긴 던 전의 입구 앞에 모여 있는 80명의
넥스터들은 모두 상위권을 달리고 있는 자들이다. 랭킹이 상위권일수 록 발이 넓고 귀가 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천영이라는 이름은 어디 서 들어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 도로 가물가물한 이름이었다. 천영 의 이름은 로드웰 마법전 이후로 서 서히 퍼지고 있다지만 이 세계는 지 구보다도 훨씬 넓었고 TV같은 방송 매체가 없었기 때문에 아직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해서 이번 던전을 공략할 때 는 8개로 나뉜 그룹의 마법사들이 함정을 해제하는 데에 주력해야 한 다고 생각한다. 천영, 네 생각엔 이
아이디어가 어떻다고 생각하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원정대장인 케일런은 원정 대원들 에게 ‘루블랑의 신전’에 대한 공략 법을 상세하게 설명하였고 그에 대 해 정보를 풀어나가면서 항상 서천 영에게 의견을 물었다. 마치 선생님 에게 의견을 묻는 학생처럼.
그 뿐만이 아니라 렌디와 이혜림의 태도조차 상상 이상이었다. 언제나 활기차고 발랄한 행동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던 렌디조차 서천영 앞에 서는 순진한 아이처럼 행동했고 사 람들에게 잘 표정을 짓지 않는 이혜 림도 서천영의 앞에만 서면 남들에
게 보이지 않는 미소를 마구 홀렸 다.
세이지는 더 불안한 마음을 감추기 가 힘들었다. 쥐뿔도 없는 꼬맹이라 고 생각해서 힘껏 무시하던 게 바로 얼마 전인데 원정 대장인 케일런조 차 저렇게 극진한 자세로 서천영이 라는 아이를 데리고 있으니 괜히 가 슴이 졸여왔다.
‘젠장,저 꼬맹이 대체 정체가 뭐 야?’
한술 더 떠서 언제나 케일런을 보 좌하는 회색 머리의 여인,네란 또 한 서천영이 와인 병을 꺼내들자 준 비했다는 둣이 품에서 와인 잔을 그
에게 건넨다. 비록 그는 고개를 저 으며 거절했지만 네란은 천영이 무 슨 행동을 하던 칼같이 반응을 해서 대응을 해주는데다가 알렉트로트 또 한 근육을 꿈틀대며 사람 좋은 얼굴 로 천영을 살갑게 대하니 점점 더 심상치 않은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형님,한 대 피우십니까?”
“아니,야. 너도 좀 끊으라고.”
알렉트로트가 담배를 들고 슬금슬 금 다가왔지만 천영은 그것을 매몰 차게 거절했다. 거대한 양손 도끼를 들고 파괴적인 모습만을 보이던 알 렉트로트가 꼬리 내린 강아지처럼
행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로 궁금해 죽겠다는 사람들이 가득 생겼지만 그들은 따로 설명하 지 않았다.
다만 누구냐는 질문에는 그저 ‘우 리보다 뛰어난 마법사’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물론 천영은 그 부분에서 양심이 굉장히 찔려왔지만.
천영은 분명히 그들에게 자신의 레 벨을 밝혔다. 현재 본인의 레벨은 125밖에 되지 않으며 300레벨을 넘 은 너희들에 비해 훨씬 약할 것이라 고. 그러자 그들은 레벨이 무슨 상 관이냐며 전혀 신경을 쓰고 있지 않
으니 오히려 천영이 더 답답할 노릇 이었다.
“……아저씨, 언제부터 그런 꼬마 가 된 거야?”
혜림의 입에서 아저씨라는 정겨운 소리가 나오자 천영은 피식 웃음을 홀렸다. 천영과 혜림의 나이 차이는 5살이다. 처음 만났을 때가 4년 전 이었고 당시의 천영은 24세에 혜림 은 19세였다. 그녀는 천영에게 언제 나 아저씨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그 이유는 ‘나는 10대고 아저씨는 20대 니까.’였지만 결국 천영은 혜림이 20살이 되기 이전에 홀연히 사라지 는 바람에 오빠라는 호칭을 들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제는 말한다.
“야,너도 이제 20대인데 오빠라고 부르는 편이 낫지 않겠어?”
그 즉시 혜림의 표정에서 ‘이 아저 씨 양심이…….’라는 표정이 되었고 천영은 그것을 보자마자 똥 씹은 얼 굴이 되었다. 렌디는 천영에게 다가 와 몰래 귓속말을 했다.
“형,그거지? 시스템 설정 속에 숨 겨져 있다는 그거. ‘캐릭터 커스터 마이징’을 발견해버린 거지?”
“……뭔 개소리야 너는 또.”
“그렇잖아! 그게 아니면 형이 갑자 기 키 작은 꼬마가 된 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어.”
렌디,케일런,이혜림이 서천영과 함께 한 시간은 대략 1년이 조금 되지 않는다. 그러한 시간 동안 같 이 지내면서 그들은 단 한 번도 갑 옷을 벗은 서천영을 본 적이 없었 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키가 180 cm는 가볍게 넘는 덩치에 남자라는 사실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자그마한 모습으로 등장하니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케일런은 ‘천영은 원래부터 저런 모습이었지만 숨기고 다녔다.’라는 쪽으로 생각하는 느낌이었으며 렌디 는 ‘불의의 사고로 천영의 모습이 크게 바뀌었다.’라는 쪽으로 추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전부 천영이 자세 하게 설명하지 않은 탓이었다.
“혹시 던전의 진행 방식에 대해 질 문 있는 사람 있습니까.”
케일런이 원정 대원들에게 묻자 몇 몇 사람들이 던전에 대해 질문을 하 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고난이도의 던전인 만큼 안전에 유의하려는 사 람들이 꽤나 있었고 그룹을 나누는 데에 있어서 불만이 있는 사람도 꽤
있는 모양이었다.
왜 나는 저 사람이랑 같은 파티가 아니냐,왜 나는 이쪽 그룹에 붙었 느냐. 하지만 케일런은 능숙한 말솜 씨로 그들을 하나하나 전부 설득시 켰다. 결국엔 자신의 의견 쪽으로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도록 만들었 다.
‘처음 봤을 땐 어리바리 까는 초짜 였는데.’
그 바뀐 모습을 보며 천영은 새삼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사실을 깨달 았다. 기본적인 주문을 외우는 법은 커녕 파티를 맺는 법조차 몰라서 허 둥대던 케일런의 모습을 과연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정말 기본적인 게임 시스템조차 하나도 알고 있는 게 없었던 케일런을 하나부터 열까 지 전부 가르친 것이 천영이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던전의 내부에 진입하는 순간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그리픈의 수 많은 학자와 과학자,마법사들이 수 천 년 동안 던전의 정체에 대해 밝 혀내려고 부지런히 애를 쓴 모양이 지만 그럼에도 이 차원의 연결점에
대해 밝혀진 것은 거의 없었다. 다 만 이곳은 그리픈의 주민들에게 있 어서 아주 위험한 ‘함정’이었으며 반 년 전 이곳으로 건너온 넥스트들 에게 있어서는 ‘기회의 땅’이라는 것이었다.
루블랑의 신전은 새하얀 공간이었 다. 허공에 둥그런 거대한 신전 바 닥이 둥둥 떠 있었으며 그 위에 기 둥이 세워져 있었고 또다시 그 위에 다른 동그란 장판이 있었다. 그 뿐 만이 아니라 새하얀 공간에는 크고 작은 네모난 박스 같은 것이 더돌아 다녔는데 그것의 표면에는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저기,너 혹시 몇 살이니?”
원정 대원들은 천영에게 지대한 관 심을 보였다. 로열 네임드인 셸라임 이나 안시르엘과 함께하는 파티원이 라는 이유나 케일런의 존중을 받는 존재라는 이유는 둘째 치고 그 외모 가 너무 화려하게 빛나기 때문이다.
긴 머리칼을 찰랑거리며 세상의 모 든 추악한 것들을 아름답게 정화시 켜버릴 것만 같은 눈동자를 가진 천 영의 첫인상은 대부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호감’이라는 것을 아주 쉽 게 이끌어 내었다.
“스물여덟.”
“에이,거짓말 하면 못 써.”
“저기요. 제가 댁보다 공기밥만 1,〇〇〇그릇은 더 먹었거든요.”
“응?”
“거기에 라면은 300봉지,계란 후 라이는 700장.”
당연하게도 그 성격이 생김새대로 따라가라는 법은 없었다. 천영은 자 신에게 자꾸만 귀찮게 달라붙어서 ‘몇 살이니?’ ‘혹시 성별이……‘케 일런 씨와는 무슨 사이니?’ 등등의 질문을 하는 것들을 능숙하게 쳐내 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레벨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은 없었다. 케일런의 존중을 받 는 순간부터 천영은 이미 어느 부분 에서 대단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고 레벨의 넥스터에게 레벨을 묻는 것 은 친한 사이가 아닌 이상 예의가 아니었으니까. 단지 천영이 금색 별 마탑의 마법사라는 사실만큼은 대부 분이 알고 있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세이지는 뒤 에서 입을 꾹 다물고 천영을 노려보 고 있었다.
‘금색 별 마탑의 마법사라고? 저런 꼬맹이가?’
말도 안 돼. 대체 어떻게? 그녀는 수많은 의문에 꼬리를 달고 그것을 또다시 물고 늘어지며 새로운 의문 을 낳았다. 어떻게 케일런과 아는 사이인가. 똑같은 300레벨의 마법사 인데 왜? 나는 못 받는 ‘마법사로서 의 대우’를 저딴 꼬맹이가 받고 있 느냐. 또한 그들은 어째서 천영에게 ‘자신들보다 뛰어난 마법사’라고 소 개를 했는가.
“여기서부터 8개의 구역으로 나뉩 니다. 8개의 그룹이 각 방에 들어가 서 그곳의 마법을 해석한 다음 함정 을 해제해야 다음 스테이지로 진행
이 가능하죠.”
네란의 추가 설명에 원정 대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80명가 량의 인원은 10명씩 해서 총 8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각의 그 룹에는 총 2명씩 마법사가 배분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원정대의 마법사 는 총 15명으로 당연하게도 하나의 그룹에는 1명의 마법사밖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케일런은 아주 당연하게도 1명의 마법사만 들어가는 그룹에 서 천영을 배치했다. ‘이곳에 있는 어 떤 마법사보다 혼자 있을 때 가장 믿음직스럽다.’라는 것이 이유였다.
렌디와 이혜림조차 별 이의를 제기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천영이 속해있는 그룹의 임시 리더 를 맡은 셀라임 또한 ‘문제없음’이 라고 말하자 오히려 다른 마법사들 이 떠들썩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어린애인데……
“대체 뭘 믿고 그러시는 겁니까?”
“금색 별 마탑이 대단하다고는 하 지만…… 레벨이 조금 낮다고 들었 는데.”
그들의 불평을 들은 케일런은 이마 를 찌푸렸다. 혹시나 서천영이 기분 나빠할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천영은.
‘그래! 잘 하고 있어! 난 혼자 가 기 싫다고! 다른 마법사랑 배치해 줘!’
라며 속으로 그들을 응원하고 있었 다. 왜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이렇 게까지 신뢰하는지 당최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천영은 스스로를 믿지 못 했다.
“아뇨,한 번 믿어보죠.”
천영은 자신을 믿어보자는 말이 들 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세이지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은
채 서있었다.
‘아니,저 미친년이 왜? 이제 와서 뜬금없이……
그는 썩어 들어가는 표정을 지었지 만 세이지는 그 의견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케일런은 세이지의 말에 고개를 끄 덕이고선 더 이상의 반론은 받지 않 겠다고 딱 잘라서 말한 뒤 그룹대로 인원을 나눠버렸다.
“언니,무슨 생각이야?”
혜이지의 질문에 세이지는 작게 소 근 거렸다.
“이거 기회야. 우리가 저 서천영이
라는 놈보다 빨리 룸을 뚫고 나오면 우리가 더 유능하다는 것을 증명하 는 거잖아?”
“……그러네.”
세이지의 그룹에는 그녀가 미리 섭 외해온 유능한 마법사가 한 명 더 있었다. 그 마법사 역시 300레벨을 넘긴 마법사로서 상당히 뛰어난 인 재였다.
케일런,렌디,이혜림은 각자 200 레벨의 마법사와 같은 그룹에 들어 가게 되었으니 현재 300레벨의 마 법사가 두 명이나 배정된 그룹은 세 이지의 그룹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단 최대한 서천영보다 빠르게 룸을 공략하는 거야.’
그것은 어찌 보면 자존심 싸움이었 다. 그녀는 이번 던전을 공략하면서 뭐든 간에 서천영보다 뛰어난 성과 를 내보일 작정이었다. 서천영이 거 품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 수 있도 록 또는 알고 보니 세이지가 더 뛰 어난 마법사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출발합시다.”
케일런의 말이 떨어지자 천영은 죽 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슬렁어슬렁 자신의 그룹을 이끌고 배정된 룸으
로 향했다.
세이지는 허겁지겁 자신들의 파티 원을 데리고 룸 안에 입장했다.
[퀴즈의 달인 루블랑의 장난!]
[고뇌의 방에 입장하였습니다.]
[루블랑은 언제나 퀴즈에 대해 고 뇌하는 것을 즐겨했다고 합니다.]
[그의 의도를 파악하라!]
귓가에 울리는 메시지를 깔끔하게 무시한 세이지는 즉시 룸을 눈으로 스캔했다. 대량 20평 정도 되는 작
은 방이었지만 그곳에는 수많은 구 슬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그리 고 그 주변에는 빛으로 새겨진 마법 진이 사방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힌트도,찬스도 없다.
그저 주어진 형태만을 보고 룸의 ‘열쇠’를 가동시키는 법을 찾아내야 만 했다. 물론 그 과정이 평범하게 문제를 푸는 형태라면 별 문제가 없 겠지만 이곳이 던전이라는 점도 생 각해야만 했다.
[Lv. 309 물음표 박스]
띠용,띠용.
바닥에 스프링이 달린 작은 상자가 벽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몬스 터가 둥장한 즉시 탱커가 앞으로 전 진 하고 궁수들은 활시위를 당겼다. 원래라면 마법사들 역시 캐스팅을 해야만 했지만 그들은 이 방에 새겨 진 마법에 대해 파악을 시작해야 했 기 때문에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 다.
띠용,푸슝!
상자 안에서는 주먹이 튀어나오거 나,불덩어리가 튀어나오거나 또는 독가스가 뿜어져 나오는 등의 다양
한 마법이 내장되어 있었다. 상자의 수가 워낙 많고 크기가 작아서 처리 하기도 골치 아픈데 한번 마법을 사 용한 박스는 모습을 감춰버리니 여 간 짜증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모조리 무시한 세 이지는 노트를 꺼내서 마법진을 적 어 넣었다.
“이건 ‘유제나-제나의 알파 함수의 연속적 해석’이야. 문제는 레드 코 어인데…… 옐로우 포인트부터 블랙 박스까지 닿는 지점이 없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표 준형 마법 방정식을 적용시켜보세 요. M-12 마법 함수와 ‘예주하 세
번째 이론’이 맞는 것 같습니다.”
“마법진에 13차 곡선이 포함돼 있 어. 이둘러 곡선의 무한 덮개를 적 용해야 될 것 같은데……
“안 됩니다. 반대쪽으로 넘어가게 되면 해답이 ‘유한’으로 나와요.”
“젠장.”
그녀는 지구에 있었을 때부터 명문 대에 다닐 정도로 상당히 머리가 뛰 어났다. 그리고 파트너로 데려온 마 법사인 ‘제이케이’ 또한 같은 학교 의 후배였다. 전 세계에서 제일 머 리가 뛰어난 사람들만이 다닌다는 학교에 재학 중이던 그녀와 제이케
이였으니 머리가 굴러가는 속도 또 한 굉장히 빨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법이 라는 학문은 굉장히 어려웠다. 마법 공식을 하나하나 대입시다보니 시간 은 점점 지체되었고,그럴수록 탱커 가 더욱 앓는 소리를 내었다.
“크,크옥. 세이지 님! 하,한 번만 광역기를 부탁드립니다!”
마법사의 강점은 이런 다수의 몬스 터를 상대로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마법사의 힘이 필요할 때였지만 세이지는 그
들에게 마법적인 지원을 해줄 여유 가 없었다. 벌써 시간이 30분이나 흘러버렸다. 지금쯤 다른 쪽은 벌써 해석을 끝마쳤을지도 모르는 일. 마 법을 캐스팅 하겠다고 시간을 허비 할 수는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으윽!”
점점 탱커가 지쳐가고 궁수들도 가 지고 있던 활을 무리해서 써버리는 바람에 기(氣)로 이루어진 화살을 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파티원들은 점점 더 지쳐만 갔지만 세이지는 그들을 도와줄 생각이 없 었다.
조금만 더,이것을 해석하기만 하 면.
점차 몬스터들의 공격이 거세지고 시간이 흐르자 등장하는 숫자도 많 아졌다.
체력이 깎일 대로 깎인 탱커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물러나자 하는 수 없이 근거리 딜러들이 나서서 전 방을 방어했지만 특별한 방어 스킬 이 없는 그들로서도 무리였다. 결국 힐러의 신성력이 바닥나는 순간 파 티원 한 명이 상처를 입고 쓰러지고 말았다.
“크억!”
비록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자칫 방 심하다간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 하는 수 없이 그를 뒤로 보내 고 아직 다 회복하지 못한 탱커가 또다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세이지는 그 순간에도 마법의 해석 을 멈추지 않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차근차근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을 총 동원해서.
두쿵,쿠구구구구.
그리고 마침내 룸에 설치되어 있던 퀴즈를 모조리 해석하자 ‘열쇠’가 반응을 하기 시작했다. 빛을 내며 반짝이던 구체와 마법진이 깜빡거리
며 형태를 바꿔나가기 시작한 것이 다. 거의 1시간에 걸친 학문과의 싸 움. 세이지와 제이케이가 식은땀을 뻘뻘 홀리며 바닥에 주저앉자 다른 파티원들 역시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벽에 기대었다.
“하하,이거 생각보다 힘든데……
탱커가 중얼거리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은근 슬쩍 세이지의 눈치를 살폈다. 솔직 히 말해서 세이지가 도중도중 마법 으로 지원을 해주었다면 해석이 조 금 오래 걸릴지는 몰라도 안정적으 로 던전을 공략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하지
만 세이지는 이렇게 빨리 룸을 공략 했다는 사실에만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다.
‘후우,좋아. 이 정도면 그래도 빠 른 편이지……
세이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다시 중앙 으로 나가서 휴식을 취하는 편이 낫 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조심스 레 출구의 문을 밀어서 열었다. 룸 의 열쇠가 가동된 탓인지 문은 별 저항도 없이 열렸다.
‘좋았어. 내가 일등……
반쯤 신난 얼굴로 세이지는 고요한
중앙을 향해 문을 열고 나아갔다. 그리고 그 순간 볼 수 있었다.
이미 한참 전에 룸의 공략을 끝마 친 것인지 단 한 명도 다친 기색 없이 평온한 상태로 바닥에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10명가량의 인 원들과 그 사이에서 과자를 으적으 적 씹어 먹고 있는 천영의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