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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1부터 시작하는 드래곤 라이프-55화 (54/219)

레벨1부터 시작하는 드래곤 라이프 055화

에니안은 큐브를 손바닥 위에 얹어 놓은 채 물었다.

“너는 이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 냐?”

천영은 고민도 하지 않고 답했다.

“드래곤 육아용 장난감?”

그러자 에니안은 살짝 웃음을 홀리 더니 고개를 저었다.

“틀렸다. 이 ‘용의 큐브’는 여러 시

대를 거치며 드래곤이 만들었으며 드래곤이 고쳤고,드래곤이 재수정 했으며,드래곤이 설정해놓은 일종 의 목적지를 가리키는 ‘표지판’이자 ‘선물,이다.”

“네?”

“드래곤에게는 하나의 약속이 주어 진다. 이것은 반드시 이행하지 않아 도 되지만 이행하게 되어있으며 거 부할 권리가 있지만 반드시 승낙하 게 된다.”

“……뭐죠 그게.”

에니안은 큐브를 허공에 던져버렸 다. 그 직후 큐브가 사락사락 돌아

가더니 스스로의 모습을 재정립하기 시작했다. 글자가 정렬하고 마법진 의 구성이 뒤바뀌더니 큐브는 점점 처음 봤을 때의 그 크기로 커졌고 마침내 내부가 개방되었다.

화아악!

빛을 뿜어대며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한 큐브는 이전번처럼 천영에게 어떤 숲을 비춰주었다.

구름조차 뚫고 솟아오른 거대한 나 무들,초록빛을 은은하게 띈 요정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빛줄기 사이로 보이는 자그마한 여인. 배꼽 아래에 용문신이 새겨진 그 여인은 저번과는 달리 눈을 꼭 감은 채 고

요히 잠들어 있었다.

“그곳이 어딘지 알겠느냐?”

천영은 분명 이 숲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인데도 불구하고 에니안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 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말이 끊어짐과 동시에 천영 은 그 숲을 하늘에서 내려다볼 수 있었다. 마치 머릿속에 내비게이션 이 새겨지는 것처럼 그곳에 대해 자 연히 깨닫게 되었다.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나발카 평원……?’

머릿속에 난생 처음 보는 장소가 떠올랐다. 이윽고 공간이 서서히 접 히기 시작하고 숲이 완전히 사라지 자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다시 닫히 기 시작하는 큐브가 시야에 들어왔 다. 그제야 천영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지만 지잉 하고 머리가 울리자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으으,두통이야.”

“원래 처음엔 조금 힘들다고 하더 구나.”

에니안은 드래곤이 아님에도 불구 하고 골드 드래곤을 스승으로 두었 기 때문인지 드래곤인 천영보다도

훨씬 드래곤에 대해 잘 알고 있었 다. 천영이 껑껑대다가 정신을 차리 자 에니안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 다.

“그곳이 네 첫 번째 목적지이다. 용을 수호하는 정령을 찾아서 데리 고 나머지의 큐브를 찾는 것이 네가 할 일이다.”

“……네? 큐브가 더 있어요?”

“물론이다.”

큐브의 개수는 여러 개 그리고 그 것들은 드래곤들이 한 세대의 영웅 들이 임무를 끝마치고 사라지면 알 맞은 개수로 나눠서 세계 여기저기

에 흩어놓는다고 한다. 드래곤이 아 닌 다른 이들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그들만의 강력한 마법을 이용해 봉 인해서.

에니안은 두꺼운 책을 하나 꺼내들 었다. 그곳에는 ‘사가 (SAGA)•라는 재미없는 제목이 적혀 있었지만 상 당히 오래되어 보여 절대로 평범한 책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 다.

“예로부터 드래곤이라는 존재는 이 세계뿐만이 아니라 여러 세계를 떠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세계의 •구원 자、i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는 방 식은 제각각 달랐다. 너희 지구에서

는 어땠지?”

지구에는 용이 없다. 하지만 아주 먼 과거에 전설 속 영물로 용이 살 아 숨 쉬었다는 이야기는 많이 전해 져 내려온다. 만약 에니안의 말이 맞는다면 수많은 세계를 떠돌던 드 래곤 중 하나가 지구에 와서 아주 오래 전 그들을 구원하고 사라졌다 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다.

천영은 지구에서 용이 상징하는 것 을 떠올렸다.

“지구에서는 용이 왕을 선택했습니 다.”

“그렇구나.”

에니안은 책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리픈에서 드래곤이 이 수많은 생명체를 구원하는 법은 한 가지였 다. ‘희망’을 상징하는 존재를 만들 어내는 것. 온갖 시대를 거치며 초 인,신에게 선택받은 자,히어로,초 월자,용사 등등의 이름으로 불렸지 만 나는 리오폰드 3세를 지칭했던 ‘영웅’이라는 단어가 가장 마음에 들더군.”

“이번 세대의 드래곤인 너는 언젠 가 나타날 영웅과 반드시 마주할 것 이다. 그를 돕는 것도,돕지 않는

것도 네 선택이다. 그리고 이 큐브 는 언젠가 그 영웅과 마주했을 때 그를 도울 수 있게 해주는 큰 선물 이 되겠지. 그래…… 너희 ‘지구인’ 들 기준으로는 ‘아이템’이라는 단어 가 어울리겠구나.”

천영은 에니안이 아이템이라는 단 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에 새삼 놀 라지 않았다. 그는 큐브를 만지작거 리며 물었다.

“이 큐브를 모아서 영웅을 만난 다 음 건네주는 게 약속이라는 소리인 가요?”

“그래,아주 까마득하게 오래 전부 터 이 그리픈이라는 세계는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며 에니안은 오랜 시간 에 걸쳐 수많은 행성과 차원의 경계 가 허물어지는 시기가 온다고 했다. 어딘가에 혼란이 발생하면 ‘특정 축 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인원들이 차원을 건너서 이동한다고 한다.

“……근데 그 영웅은 대체 어떻게 찾죠?”

“그건 나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후보는 잔뜩 있지 않느냐?”

위대한 여행자. 천영은 그 타이틀 을 생각해냈다.

생각해보면 고작 탈태에 성공했다

고 위대한 여행자라는 타이틀을 얻 게 된 사람은 없었다.

천영은 그저 드래곤으로의 탈태가 굉장히 비범해서 얻게 된 줄로만 알 았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 타이틀을 얻었던 조건을 생각하면 약간 다른 케이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넥스트에는 300레벨을 달성한 사 람이 굉장히 많았다. 하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위대한 여행자 타이틀을 보유하지 못했다. 그것을 얻는 조건 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저 소녀 NPC를 보호하기 위해 목숨 바쳐 싸우다 죽었더니 위대한 여행자를 얻었다는 사람도 있었고 마을을 위

협하던 악마를 대규모로 레이드했더 니 그 원정대의 모두에게 위대한 여 행자 타이틀이 들어가기도 했다.

혼자서 몬스터를 대량학살을 했던 업적은 분명히 위대할 만 했으나 그 유저에게는 타이틀이 들어가지 않았 고 그 옆에서 고작 퀘스트 몬스터를 한 마리 처치했더니 위대한 여행자 가 들어왔다는 사례도 있었다. 도저 히 정체를 알 수 없는 타이틀.

입수 방법도 불명, 능력치도 제로. 이슈거리가 될 만한 것이 되지 못하 는,그런 느낌으로. 결국 사람들에게 서서히 잊혀 가던 그 타이틀을 천영 이 마지막으로 얻는 순간 10만 명

의 인원이 모조리 그리픈으로 소환 되었다. 마치 위대한 여행자 99,999 명이 천영이 드래곤으로 탈태하는 것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하지만 그들 역시 후보일 뿐이다. 내 스승이셨던 레가로스님께서는 나 를 영웅 후보로 키우기 위해 제자로 들이셨다.”

“네?”

그녀는 어쩐지 씁쓸한 표정을 지었 다.

“내 마음이 너무나도 연약한 탓에 그러지 못했지. 결국 리오폰드 3세 가 영웅이 되었고 한 시대를 호령하

였다.”

에니안은 ‘사가’를 쓰다듬었다. 그 곳에는,리오폰드 3세의 일대기가 적혀있다고 그녀가 말했다.

“너도 마찬가지다. 무조건적으로 지구에서 넘어온 인물들이 아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영웅’이 될 만한 재목들에게 자연스레 이끌리게 된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마주쳤을 수도 있다. 정의롭거나 지배욕이 있 거나 혹은 그저 무지막지하게 강하 거나.”

천영은 몇몇 사람을 떠올렸다. 정 의롭지는 못하지만 넥스터들 중에서 도 상당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칼’이나 카페에서 마주쳤던 ‘맥골라 스 머치팽’과 지금은 홀연히 모습을 감춰버린 ‘예런’이라던가.

그 밖에도 천영이 알지 못하는 사 이에 더 많은 인물들을 마주했을 수 도 있다. 혹시 모른다. 케일런이나 이혜림,셀라임 또한 그 후보에 들 어갈지도.

그래도 의문점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그럼 지구,그러니까 ‘넥스트’라는 게임에서 저희가 넘어온 게 운명이 라는 말인가요?”

“정확히는 만들어진 운명이지. 더

욱 강한 인연을 갖기 위해,내가 모 르는 누군가 다른 차원 여기저기에 ‘입구’를 만들어 놓았다. 너희가 말 하는 넥스트는 그 입구 중 하나일 것이다.”

“……이 게임 시스템이 누군가가 만들었다구요? 그렇다고 하기엔 너 무 사기인데……

하지만 에니안은 고개를 갸웃하며 의문을 표했다.

“그게 ‘사기’라는 단어를 쓸 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의문이구나. 명백 하게 한계가 정해진 강함을 빠른 시 간 내에 습득할 뿐인,고작 그 정도 의 서포트를 해주는 ‘축복’이지 않

만 레벨을 뜻하는 것이겠지. 천영 은 300레벨에서 만 레벨이 확장되 어,더 높은 단계로 넥스터들이 성 장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한계는 500까지이다. 지구인들 은 그 한계를 맞이하게 되면 더 이 상 ‘경험치’와 ‘레벨’이라는 편리한 시스템을 이용해 성장할 수 없다. 마치 어린애에게 젓가락질을 가르치 듯 너희들의 체력과 마나를 수치로 표시해주는 것도 거기까지다. 그 벽 을 뚫기 위해서는 스스로 ‘깨달음’

을 얻는 수밖에 없는데 편하게 성장 한 너희 지구인들이 그 벽을 뚫기란 절대로 쉽지 않을 것이다. 오직 선 택받은 ‘축복’ 따위가 없었더라도 그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자들만이 뛰어넘을 수 있겠 지.”

500레벨이 한계치라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어째서 에니안이 그런 것을 알고 있는지,그것을 왜 축복 이라고 부르는지,알 수는 없었으나 천영은 지금 이 순간 어떠한 한 가 지를 떠올리고 말았다.

‘500도 사기 아니야……? 이 아줌

마 대체 레벨이 몇이야?’

레벨 500을 그저 애송이로 보는 듯한 그녀의 말투에 솔직히 천영은 질리고 말았다. 하지만 어쨌든 넥스 터들이 받은 축복이 사기인 것은 분 명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영웅을 찾아 큐브를 완성해서 건네주어 영 옹을 만드는 것이 드래곤의 운명이 라고 한다.

천영은 만렙에 대해 생각했다.

‘500레벨이 되는 순간 나는 성체에 서 벗어나. 그 이후로는 나이를 먹 음으로써 성장이 가능하다고 했는 데……

그렇다면 천영은 그저 500레벨을 달성한 뒤 한 살을 더 먹는 것으로 그 한계를 돌파할 수 있다는 의미였 다.

‘레벨을 초기화 해가면서 드래곤이 된 것도 썩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 네……

비록 지금은 남들에 비해 레벨도 낮고 약했지만 먼 미래에 가면 그들 을 뛰어넘을 강함을 갖게 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천영은 번뜩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 는 에니안을 조심스레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 이 영웅의 후보가 될 수도 있고 위 대한 여행자는 특히나 강한 후보라 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저 역시 그 후보가 될 수도 있단 소리 아닙니까?”

요컨대 천영의 생각은 그랬다. 큐 브를 기껏 힘들게 모았는데 왜 남에 게 넘겨줘야 하는가? 내가 그냥 영 옹 해버리고 내가 그 아이템 가져버 리면 그만 아닌가? 천영의 그 말에 에니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 사례가 없지는 않았다.

전란의 시대를 살아가던 드래곤 중 한 분께서는 도저히 인재가 없자 스 스로 큐브를 뒤집어 까버리고서는 직접 검과 방패를 들고 전장에 나서 기도 했지. 스스로가 ‘승리의 상징’ 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빛을 밝혀줬 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기도 한 다.”

“오우.”

천영은 그녀의 말을 듣고 눈빛이 반짝반짝 해졌다. 영웅이고 뭐고 다 모르겠고. 그냥 다 가져버리겠다는 그의 심정을 알았는지 에니안은 그 를 귀엽다는 듯 쳐다보았다.

“과연 어리구나. 영웅들이 얼마나

드래곤에게 자석처럼 이끌리는지, 너는 아직 모르는 모양이다.”

“후후, 상관없습니다. 모조리 쳐내 고 제가 가질 겁니다.”

에니안은 그런 천영을 보며 부드럽 게 웃었다. 어디 네 마음대로 해보 라는 듯이. 그게 네 뜻대로 될 것 같느냐는 그런 느낌으로.

‘영웅들이 드래곤의 마음을 홈치기 위해 얼마나 아름다운 노력을 하는 지 아직 모르는 모양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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