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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1부터 시작하는 드래곤 라이프-65화 (64/219)

레벨1부터 시작하는 드래곤 라이프 065화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을 햇빛이 걷어내는 시간,여명이 찾아오면 네청은 자연스럽게 눈을 뜬다.

깜빡 긴 속눈썹이 어색한 듯 네 청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스르르 몸을 일으켰다. 문득 걸치 고 있는 게 얇은 속옷 한 장 뿐이 란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가디건 을 하나 찾아서 어깨에 걸쳤다.

손을 쥐락펴락 해본다. 인간의 모

습으로 이렇게 오랫동안 지내본 게 얼마만이던가. 그녀는 지난 백 년 동안은 거의 타인과의 만남을 꺼려했다. 스스로의 일에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창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가 조용 히 눈을 감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남들이 보면 그저 바람을 쐬는 듯 한 네청의 이 자세는 무려 천 년 묵은 이무기가 명상을 하는 자세 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제 자세 같은 것들은 무의미했다. 자세 그 자체에 의미가 담겨있다고는 하지 만 그녀의 본체는 이무기. 인간이 아닌 그녀에게 있어서는 크게 와

닿지 않는 것. 오히려 자연스러운 그 자세 그대로 있는 것이 가장 좋았다.

명상을 통해 얻는 것은 무엇일까.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네청은 명상을 일종의 청소라고 생각한다. 생물체에게 있는 기본적 인 욕망을 모조리 청소해버리는 것. 식욕,성욕,수면욕,금전욕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그리고,네청 은 그러한 청소를 지금 이 순간 아주 깨끗이 해놓은 상태였다.

그녀는 새하얀 도화지 그 자체였 다. 너무나도 순수하고 너무나도 맑고 깨끗했으며 누군가 먹물을

떨어뜨리며 오염을 시키려고 발악 을 해도 그마저도 정화해버릴 그 런 여인. 하지만 그런 네청에게도 한 가지 지우지 못한 욕망이 있었 다.

용에 대한 그런 욕망.

네청은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였 다. 용이 되는 것 하나만을 바라보 고 모든 것을 버렸다.

그러다 문득 네청은 천영을 생각 해냈다. 영물들 중에서도 가장 순 수하고,가장 강력하며,가장 아름 답고,가장 신비로운 존재인 용이 된 아이. 그 예상대로 천영이 가진 기운은 너무나도 깨끗하여 도화지

에 가까운 네청조차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을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금욕과는 거 리가 멀었다. 밤이 되면 와인을 꺼 내 벌컥벌컥 들이켜고 지나가다가 누군가 시비를 걸면 바로 화를 내 며 달려드는데다가 잠도 뒤죽박죽 으로 자며 일이 없는 날에는 10시 간이 넘도록 침대에서 나오지 않 은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네청은 그것이 옳지 않 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드래곤이 왜 저래? 같은 불순한 생각 따위 는 품지 않는다. 그것이 당연하다

고 생각한다. 그녀가 꿈에도 그리 던 경지. 바로 용이 된 아이니까.

예로부터 용이 되는 방법은 정말 무수히도 많았고 무수히도 많은 사람들이 실패했다. 한 시대에 단 하나의 드래곤이 존재했을 정도로 그만큼이나 용이라는 존재는 위대 한 존재이다. 태어나는 순간까지 고행을 받았을 수도 있다,전생에 지옥에서 몇 천 년간 굴렀던 용사 일 수도 있고 혹은 남들이 절대 해내지 못할 어이가 없는 시련을 끝없는 노력으로 마침내 성공시켰 을 수도 있다.

모른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

떻게 해서 용이 될 수 있었는지. 하지만 천영은 용이고,네청은 용 이 되지 못했다. 네청은 그것이 천 영과 자신의 차이라고 생각했고 또한 그 차이는 굉장히 크다고 생 각했다. 그녀는 천영이 부러웠다.

용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어 떻게 보일까?

만물을 꿰뚫는다는,지혜로운 눈 으로.

용의 입으로 세상을 말하면 어떤 느낌일까?

뭐든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용의 입으로.

네청은 눈을 떴다. 어느덧 동이 떠오르고 있었다. 세상이 밝아지면 네청의 명상도 끝난다. 그녀는 조 용히 안으로 들어왔다. 살짝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바람이 새어 들어 왔다. 그 덕분에 침대에 널브러져 자고 있는 천영의 머리카락이 살 짝 휘날렸다.

조용히 그의 곁으로 가 의자를 끌고 와 앉는다. 바로 앞에서 누군 가가 자신을 빤히 쳐다본다는 사 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영은 세 상물정 모르고 자고 있었다. 깨어 있을 땐 누구보다 거친 언행과 행

동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종잡을 수 없는 아이이건만 이렇게 자고 있으니 상처 입은 천사가 요람에 내려와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용이라는 존재가 인 간의 형태를 취하게 되면 그 시대 에 맞게 어느 곳에 가더라도 누가 보더라도 호감을 사게끔 만드는 미형을 취하게 된다.

지금 천영의 모습은,그 누가 보 더라도 자연스럽게 심장의 이끌림 을 받는 외모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미(美)라는 것에 큰 관심 이 없는 네청조차 순간 홀리게 만

드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온몸에는 붕대와 밴드가 칭 칭 감겨져 있었다. 전날 네청과의 싸음에 크게 다친 천영은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이런식으로 치료를 해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그의 상처는 벌써 거의 다 치료된 상태였다.

‘용의 수면이라는 건가…… 하룻 밤 자고 일어나면 자연으로 모든 상처를 치유해버린다는……

네청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검지로 그의 입술을 살짝 어루만 진다. 분홍빛의 촉촉한 앙증맞은

그 입술이 그녀의 손가락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모양이 남는다. 너 무나도 여리고 연약한 피부였다. 그 다음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과연 용안(龍顔)이로구나.’

네청의 외모 또한 인간들의 기준 으로 보자면 혼이 쏙 빠지도록 아 름다운 것이었지만 천영은 그보다 도 훨씬 더 사람들을 사로잡는 마 력이 있었다.

네청은 홀린 듯 그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다가 목덜미까지 손을 뻗 었을 무렵 간신히 정신을 잡을 수 있었다.

‘상당히…… 위험하다.’

그의 매력이 그런 무방비함이. 천 영의 장점이자 단점은 스스로의 외모를 하찮게 평가한다는 것이고 그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라가 뒤흔들릴 만큼이나 위험한 저 외모를 무기로 쓰지 않 는 것은 매우 다행이나 지금처럼 천영이 약해지고 무방비한 상태일 때 이렇게 세상물정 모르고 잠을 취하고 있으면 그 누구라도 마음 이 혹해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무엇에 혹했던 건가?’

네청은 스스로에 대해 또다시 의 문을 품고 말았다. 그녀는 모든 욕 망을 버렸다. 하지만 단 하나 버리 지 못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용’에 대한 갈망. 그렇다면 지금 그녀가 천영에게 홀린 것은 ‘용에 대한 갈망’인가? 아니면 ‘용 이 되고 싶은 것에 대한 갈망’인 가?

‘알 수가 없구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생각을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네 청은 소리를 내지 않고 베란다 밖 으로 사라졌고 잠시 뒤 천영이 부 스스한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

멍하니 하품을 쩍쩍 하며 침대 위에서 허벅지를 벅벅 긁어대고 있자 파트라슈도 함께 깨어났다. 천영은 파트라슈를 보며 말했다.

“야,나 오늘 운수대통이야.”

-무슨 일 있었나?

“응,용꿈 꿨어.”

_주인이 용인데 그게 무슨 개소 린가.

“아니,그니까. 꿈에서 내가 나왔 다고. 그럼 용꿈 아니냐?”

-흠…… 그럴싸한데. 그럼 우리 복권이나 긁으러 갈까?

“으흐흐.”

- 크헤헤.

“갑시다.”

천영이 그런 이야기를 꺼낸 시간 은 점심쯤이었다.

네청은 천영이 마구잡이로 고기 를 뜯어먹는 것을 지켜보다가 난 데없이 그런 말을 꺼냈지만 이해

를 단번에 할 수 있었다.

“드디어 가는 것이냐?”

“네.”

천영은 여전히 낡은 책 하나를 들고 있었다. 그곳에는 아주 옛 시 절에 만들어져서 현대에 이르러선 아는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로 드 문 게임 ‘갈렌타의 해적’이라는 것 에 대해 적혀 있었다. 정말 보기 드문 책이었지만 천영은 금색 별 마탑의 마법사. 크게 가치도 없이 오래되기만 한 이런 서적을 챙겨 나오기는 정말로 쉬웠다.

-대략 위치는 알아왔다 주인. 이

쪽에서 북문으로 나간 다음 오솔 길을 따라 걸어가면,작은 언덕이 있어. 거기에 오두막집이 있다.

파트라슈의 말을 따라,도시를 빠 져나가서 조금 걷자 바로 오두막 집이 나왔다. 솔직히 말해서,영물 이 살 것 같은 집은 아니었다. 많 이 낡고 오래 된데다 주변에는 나 무를 패어놓은 장작과 도끼가 널 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나무에 의 해 햇빛이 가려져 우중충한 분위 기를 연출했다.

그는 발소리를 최대한 내지 않고 걸어서 오두막집에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살짝만 건드렸을 뿐인

데,문짝이 박살날 것만 같은 느낌 이라 천영은 순간 가슴이 찔끔했 다.

“들어와라.”

안쪽에서 낮은 톤의 남자 목소리 가 들려왔다. 천영은 문을 살짝 열 고 들어갔다. 안쪽에는 유비탄처럼 새하얀 피부를 가졌지만 그래도 혈색이 돌고 있어 생기가 있는 얼 굴을 가진 마찬가지로 흡혈귀로 추정되는 사내가 사과를 씹어 먹 고 있었다.

그는 생각보다도 훨씬 젊은 모습

이었기에 천영은 정말 장본인이 맞는지 의심할 뻔했으나 그에게서 풍겨지는 기운이 거의 네청의 것 과도 비슷하단 것을 알아챘다.

‘엄청나네…… 영물이란 다 이런 건가.’

영물,아이러니하게도 흡혈귀 그 러나 신선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 남자. 로비탄은 천영을 슬쩍 훌어보더니 눈을 감았다.

“좋은 냄새가 나는군. 드래곤인 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그래…… 네청. 너도 오랜만이

그 말에 천영은 살짝 놀랐다. 설 마 둘이 아는 사이였을 줄은 몰랐 다. 네청은 고개만 살짝 끄덕일 뿐 별 말을 하지는 않았다. 로비탄은 그런 네청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 다.

“네청,네가 용이 되면 주겠다고 가지고 있던 물건이다. 근데 이런 꼬맹이를 데리고 오다니……

로비탄은 한껏 실망한 표정을 지 었다. 그러면서도 천영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이,그를 무시 하는 발언을 하면서도 천 년 만에 등장한 용에 대해서 호기심이 가

득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는 냉정했다.

그는 있는 힘껏 자신의 기운을 풀었다. 천영을 짓누르기 위해 자 신에 대해 겁을 먹게 만들어 그냥 돌려보내기 위해.

“돌아가라. 너는 아직 너무 어리 다. 용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 로군. 너는 지금 당장 내가 목덜미 를 물어서 내 마음대로 종속시킬 수 있을 정도로 약하다. 좀 더 나 이를 먹고 와라. 몇 백 년 정도는 여유롭게 기다려주도록 하지.”

“아뇨,그건 제 물건입니다. 마땅 히 용의 물건이니,제가 지금 받아

가도록 하겠습니다.”

“말귀를 못 알아먹는 어린 드래곤 이군. 너는 아직 이것을 제대로 다 루지도 못할 것이다.”

로비탄의 그 말에 천영은 피식 웃었다.

“그걸 어찌 아십니까? 용은 접니 다.”

“홈.”

로비탄은 풀어내고 있던 기운을 더욱 강하게 내뿜었다. 이것에 노 출되면 일정 경지에 이르지 못한 생명체들은 모두 입에 거품을 물 고 기절하기 마련이다.

드래곤이니 당연히 그 정도는 아 니더라도 적어도 겁을 먹을 줄은 알았는데 전혀 굴하지 않은 표정 으로 천영은 오히려 두 눈을 똑바 로 뜨고 로비탄을 노려보았다. 그 리고 로비탄은 천영의 눈동자에서 마치 회오리를 치는 듯한 무형의 기운을 느낄 수가 있었다.

‘어려도 드래곤은 드래곤이라 이 건가.,

자신의 기운을 모조리 유연하게 흡수해버리는 것에도 모자라 역으 로 기운을 발산해버릴 줄이야. 로 비탄은 기운을 순식간에 거둬들였 다. 한 번 실패한 것에 대해 큰 미

련을 갖지 않는다.

“좋다. 그럼 내 제자 유비탄에게 서 나를 이기는 방법에 대해 들었 겠지.”

로비탄은 그렇게 말하며 ‘갈렌타 의 해적’을 꺼냈다. 생긴 것은 장 기판과 비슷했으나 그 크기가 3배 나 되었고 말 또한 상당히 종류가 많고 다양하여 한 번에 꺼내기가 힘들 정도였다.

천영은 그것을 묵묵히 지켜보다 가 로비탄의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이 게임을 아주 좋아해.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알겠나?”

천영은 로비탄의 두 눈동자에서 이글거리는 감정을 읽을 수 있었 다. 그는 다짜고짜 게임을 신청해 서 ‘나를 이기면 건네주마.’ 따위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로비탄 이라는 사내는 어떤 이유에선지 이 갈렌타의 해적이라는 게임에 목숨을 걸 정도로 진지했다.

“알고 있습니다.”

“좋아,시작하지.”

그렇게 말하며 로비탄은 자신의 말을 판 위에 늘여놓았다. 일방적 인 게임과는 달리 자신의 말을 한 번에 모두 꺼낼 수가 없다. 특정

말은 적의 장수를 잡아야만 꺼낼 수가 있고 어떤 것은 자신의 말을 한 군데에 모아야만 소환할 수가 있다. 적을 잡아먹으면 그곳에 자 신의 말을 이동시킬 수도 있고 특 정 포지션을 만들면 그것을 함락 할 수도 있다.

룰이 정말 많고 다양하며 그 어 떤 게임보다도 전략적인 이 게임 은 갈렌타를 호령했던 해적들의 혼이 담겨있는 게임이라고 볼 수 있었다.

“선을 양보하겠다.”

가장 먼저 천영이 말을 움직인다. 하급의 졸개를 앞으로 한 칸 움직

였을 뿐이지만,로비탄은 눈썹을 꿈틀대며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 다.

‘이 녀석…… 유비탄에게 제대로 된 룰을 듣지도 않고 왔군.’

만약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올 일 이 있으면 이 갈렌타의 게임을 그 것도 바로 본인 로비탄을 이기는 법을 똑똑히 가르쳐주라고 유비탄 에게 말을 전해뒀었다.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로비탄에게 이기는 법을 한참이나 공부해서 도전해왔고 자 신에 대한 공략법을 숙지하고 있 는 지혜로운 자들에게서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 로비탄은 만족감을

느꼈다. 이 시대에 와서 이 게임에 대해 아는 자들이 없으니 룰뿐만 이 아니라 자신을 이기는 법까지 도 가르쳐 줘야 싸음이 되니까.

하지만 유비탄에게서 로비탄을 이기는 법을 듣는다고 해서 숭산 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로비탄은 벌써 몇 백 년이나 갈 렌타의 해적을 즐겨하던 사람이었 다. 그보다도 이것을 잘 하는 사람 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툭,툭.

그들은 말없이 자신의 말을 움직 이기만 했다. 로비탄은 시작부터

이 게임이 상당히 지루했다. 턱을 괴인 채 천영이 움직이는 말을 하 나씩 하나씩 잡아먹었다.

‘뭐가 용이라는 거냐. 지나가던 모기만도 못하군.’

그렇게 생각하며 슬쩍 천영을 쳐 다보았다. 아직까지도 천영에게는 별다른 표정변화가 느껴지지 않았 다. 이 게임에 미련이 없는 것인 지,아니면 자신이 시작부터 완벽 하게 말리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 는 것인지. 아무래도 좋았다. 로비 탄은 이 지루한 게임을 잽싸게 끝 내고 어서 쫓아내자고 마음을 먹 었다.

조금 강하게 말을 움직인다. 그러 자 천영의 필드에 있던 장수 2명 과 졸개 하나가 쓸려나갔다. 로비 탄은 벌써부터 히든카드를 5개나 꺼낸 채였고,반대로 천영은 자신 의 장수가 모조리 죽어나가 히든 카드를 꺼낼 수 있을지 가망성조 차 희미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천영의 움직임이 이상했 다. 말을 공격적으로 움직이는 것 이 아니라 마치 게임의 진행 따위 는 관심도 없다는 듯 이상한 곳으 로 이동시켰다. 한창 싸우기 좋은 위치에 있는 장수를 외딴 섬에 보

내버린다든가,왕을 구석으로 보내 버린다든가, 여왕을 적진에 돌진시 켜 죽인다든가.

로비탄은 슬슬 천영이 이 게임을 이기는 것을 포기했나보다며 그렇 게 생각하고 끝내려고 했지만 뭔 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천영의 말이 너무나도 기묘하게 자신을 공격하는 척 하면서 살짝살짝 비 껴가는 모습이 너무 익숙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잠깐. 그럴 리가 없는데.’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면서 도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말을 움직였다. 섬에다가 자신의

병사를 풀어놓고,성벽 위에 궁병 들을 세워놓는다. 로비탄이 가진 기마병만 벌써 10명이고,이제 자 신의 배라고도 할 수 있는 히든카 드를 뽑게 되면,게임이 끝난다고 볼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로비탄은 천영의 다음 움 직임을 읽자마자 눈을 부릅떴다.

‘설마……

두근.

멈춰있던 가슴이 떨렸다. 로비탄 은 이 룰에 대해 아는 자가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이미 몇 백 년도 더 전에,이 게임이 막

개발되었을 때 너무 난해하고 복 잡하다며 사라져버린 룰. 그렇기에 유비탄에게 조차 가르쳐주지 않아 최근 500년은 제대로 해보지도 못 한,그런 룰.

‘이 애송이... 갈렌타의 점령전

룰에 대해 알고 있다고?’

이런 게임을 이기는 법은 간단하 다. 왕을 잡아 죽이는 것. 하지만 실제의 전쟁과 비교해보자. 굳이 왕을 잡지 않아도 그들의 성을 모 조리 점령하면 전쟁에서 승리한다. 이 갈렌타의 해적은 실제로 있었 던 전쟁 갈렌타 해전을 본따 만든 게임이다. 그리고 그 게임의 본질

은 실제 역사에서 적의 수장을 따 는 것이 아닌 모든 해전에서 승리 하여 점령을 하는 것으로 전쟁에 서 승리한 것을 중점으로 두고 있 었다.

‘이렇게 어린 꼬맹이가 고작 50 년도 살지 못했으면서 이 룰을 안 단 말이냐…….,

로비탄은 그제야 천영에 대한 생 각을 달리했다. 천영은 이 게임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던 것이 아 니다.

천영은 유비탄에게서 로비탄을 이기는 법을 들었다. 그러나 그것 을 무시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로비탄을 이기는 법’이지 ‘로비탄 을 설득하는 법’이 아니었다. 로비 탄을 이기는 법을 아무리 공부해 봐야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뻔한 일이다. 아무리 뛰 어난 자라도 그것이 설령 드래곤 이라고 해도 이 짧은 시간 내에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천영은 애초에 게임을 이기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로비 탄이 원하는 것을 생각했다. 그가 왜 이 게임을 하고 있느냐. 왜 미 련을 가지고 갈렌타의 해적이라는 게임을 도전자들에게 요구하느냐.

“동쪽 섬,‘푸할라의 여인’은 이제

제껍니다.”

“그래? ‘태양의 빛은 언제나 눈부 시다’는 내꺼다. 내가 더 좋은 거 야.”

“가지십쇼. 어차피 이쪽 땅은 제 가 다 먹었습니다.”

로비탄은 간만에 흥분했다. 얼마 만에 이 제대로 된 룰으로 게임을 해보는가.

천영은 이 게임에 대한 경험이 너무나도 적었다. 그저 책에 적혀 있던,‘이런 식으로 진행하면 된 다.’정도의 수준밖에 읽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최대한 자신의 강점

을 살렸다. 드래곤으로서 많은 생 각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조금 더 냉정하고 침착하게 생각할 수 있 다는 점을. 심지어는 과거에 플레 이 했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지 구에 있을 때 수도 없이 즐겼던 그 기억들까지 모조리 꺼내서.

결과만 이야기하자.

천영은 패배했다. 그것도 깔끔하 게 너무나도 완벽하게 모든 땅을 잡아먹혀서. 하지만 그는 패배에 큰 미련을 갖지 않았다. 마지막 순 간 왕의 목이 따이는 순간 천영은 패배를 선언했고 로비탄은 정말 보기 드물게도 살짝 즐겁다는 둣

이 휘파람을 불었다.

‘……정말 신기한 일이군.’

네청은 로비탄과 알고 지낸지 500년이 넘었다. 그리고 네청은 로비탄을 약간 꺼려하는 편이었다.

로비탄은 너무 고지식하고 자기 중심적이며 남들에 대한 이해심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고 타인을 심하게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네청은 로비탄이 이 게임 을 하는 것을 수도 없이 많이 지 켜보지 않았던가.

여태껏 로비탄이 저런 얼굴로 게 임을 하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정말로 순수하게 게임을 즐기는 듯한 얼굴로. 마치 어린애가 된 것 처럼.

“후후,어떠냐. 내가 이겼어. 너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지.”

“역시 이기기 힘들군요. 하지만 즐거운 게임이었습니다. 이렇게 대 단한 게임을 사람들이 몰라보다 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지! 나도 너무 짜증난단 말 이지. 후우,미련한 인간들이 이 게임에 대해 알아보고 널리 퍼트 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천영은 웃는 얼굴로 로비탄의 말

에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 다. 때로는 그의 말에 로비탄이 방 끗 웃는 얼굴로 마구 폭소를 터뜨 렸고 때론 천영이 웃기도 했다.

이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단 하 나 로비탄이 이 게임을 무지하게 사랑한다는 것. 단지 그것뿐이다.

‘……저 고지식한 놈이 좋아하는 것을 금방도 파악했군.’

로비탄은 어느 사이 그저 자신과 게임을 한 판 해줬다는 이유만으 로 천영에게 홀딱 빠져 있었다.

천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아저씨 천성 한국인이군. 집

으로 데려가서 스타크래프트 시키 면 잘 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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