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1부터 시작하는 드래곤 라이프 069화
18장 용의 명상
흡혈귀들의 왕,피렌체가 새로 그 림을 전시하는 날이면 백성들은 그 호기심에 우르르 몰려와 구경 을 하곤 한다. 이것은 피렌체가 강 제한 것이 아닌 백성들이 아주 순 수하게 예술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흡혈귀들을 하나 로 단단히 뭉칠 수 있게 되는 계 기가 되었고 현재의 흡혈귀들의 도시가 완성되었다.
예술을 사랑하게 되는 피렌체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까. 그가 단 순히 꽃밭을 그려놓아도 백성들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왕을 찬양하곤 하는데 이번에 전시해놓은 그림을 구경하려 몰려든 백성들은 어째서 인지 수백이나 되는 군중들이 전 부 말없이 한참이나 그림을 멍하 니 바라보았다.
보통이라면 10분 정도 그림을 감 상하다가 비켜주는 것이 관례일
터인데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이 비켜주질 않아 하나 둘 씩 몰려들 어 결국 광장이 가득 찰 때까지도.
하지만 끝까지 반응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어떤 감수성 깊은 여인 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그것 은 순식간에 번져나가 마침내 대 부분의 백성들이 눈물샘을 활짝 열고 말았다.
“어흐흑,태어나서 이렇게나 아름 다운 그림을 볼 수 있다니……
“살아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우리들의 왕께서,우리들을 위해 이런 그림을 그려주셨어……!”
마침내는 피렌체를 찬양하며 소 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통에 난데 없이 소란이 일어날 정도였다. 그 들은 모두 예술가이다. 한참이나 그림을 바라보던 그들은 각자 저 그림을 조각하겠다거나 노래로 만 들겠다거나 시를 짓겠다며 돌아갔 고 아예 그곳에 눌러앉아 그림을 모작하는 자들도 생겨났다.
천영은 성벽에 걸터앉아,사과를 으적으적 씹으며 그 광경을 지켜 보았다. 왼손에 들려있던 두 개의 큐브는 스록스륵 소리를 내더니 하나로 합쳐진다. 벌써 세 개째의 큐브다. 어찌 된 게 하나를 얻을
때에도 쉽게쉽게 손에 들어오는 적이 없다.
“야 파트라슈. 이거 총 몇 개야?”
-글쎄? 이번에는 하도 많아서 나 도 세기가 힘들다.
“뭐야. 매번 큐브의 개수가 다르 단거야?”
-사실,딱히 분리해서 숨길 필요 도 없다. 가장 처음 이것을 만든 드래곤은 단 하나의 큐브를 그대 로 보존해두기도 했었다. 그 다음 세대부터 이것을 분리하기 시작해 서 그렇지.
하여튼 드래곤 선조들 때문에 지 금 천영이 이 개고생을 해야만 한 다는 뜻이었다.
“에휴…… 그냥 천천히 모을까
뭐 하러 급하게 모으는가. 어차피 성체가 되지도 못했는데. 게다가, 아직 눈에 띄게 영웅이 될 만한 재목도 없고 영웅이 등장할 만한 위기감도 없다. 영옹은 본인이 하 면 된다지만 위기가 없으면 영웅 도 쓸모가 없지 않은가?
-그건 모른다. 내 기억상,현재 의 그리픈은 모든 시대를 통틀어
서 가장 평화롭다.
“그럼 더더욱……
-그래서 모른다는 뜻이야. 평화 로울수록 사람들은 위기의식이 전 혀 없거든.
그 말에 천영은 어떤 재난 영화 가 생각났다. 해변가에서 뛰놀고 있는 젊은 남녀들. 빌딩에서 우아 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 그런 그들에게 경보가 울려 퍼진 다. 해일이 몰려온다며 지금 당장 대피하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전혀 듣지도 신경 쓰지도 않는다.
결과는 대부분이 죽는다.
“이해는 가지만……
잘 모르겠다. 그런 생각에 천영은 사과를 큼지막하게 베어 물었다. 성인이던 시절엔 크게 베어 물으 면 거의 사과의 절반이 떨어져 나 왔는데 지금은 성인 시절에 작게 베어 물 때와 간신히 비슷한 수준 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입안에 가 득 찬 만족도는 있다는 점이 참 신기했다.
툭.
누군가가 바로 천영의 옆쪽에 다 가와서 걸터앉았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자니,먼저 입을 연다.
“메이지 천영을 모델 삼아 그림을 그리니 백성들이 좋아하는군요.”
피렌체였다. 그는 어찐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요 며칠 동안은 하도 짜증 섞인 표정이 죽 어가는 얼굴이라 천영조차 그의 눈치를 살살 살피곤 했는데,왠지 어잿밤 천영 몰래 그림 하나를 더 그린 뒤로는 기분이 좋아진 상태 였다.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은 보셨습 니까?”
“음…… 아뇨.”
사실 천영은 그의 그림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워낙 천영을 여성스러운 분위기로 그려놓았기 때문. 하지만 피렌체의 마지막 그 림은 달랐다. 천영을 있는 그대로 의 모습으로 그려놓았다. 자유분방 한 그의 성격과 격식을 차리지 않 은 채 마구잡이로 뒤집혀 있는 복 장,가식 따위는 전혀 없는 미소와 제멋대로인 자세까지.
그 모든 것들을 피렌체는 정말 혼신의 힘을 기울여 담아냈지만 천영은 보지 않았다. 왠지 이전의 그림과 똑같을 것만 같았기 때문 이다.
“하하,그렇습니까. 하긴 본인이 보지 않아도,그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면서 피렌체 역시 사과를 하 나 꺼내들었다. 원래의 피렌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 성벽이라 는 위태로운 장소에 걸터앉아서, 장소에 맞지 않게 음식을 먹는 행 위였지만 어느덧 일주일이나 천영 을 관찰했던 덕분인지 그를 조금 닮고 말았다.
“백성들이 오해를 해서 곤란합니 다. 저 그림 속 주인공이 실존 인 물이라는 사실을 모르거든요.”
“왜요?”
“너무 아름다운 존재라,절대로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고 하더 군요. 저는 그저,있는 그대로를 따라 그렸을 뿐인데……
“……‘아름답다’보단,‘멋지다’라는 단어를 쓰는 사람은 없나요?”
“있긴 있었죠.”
“저,정말요?”
“예,배경이 멋지다고 하더군요.”
그럼 그렇지. 괜한 기대를 한 것 이 죄다. 천영은 한숨을 푹푹 쉬며
다리를 팔랑팔랑 흔들며 사과를 먹었다. 마지막에 사과 꼭지만 남 자,천영은 그것을 성벽 아래에 있 는 풀숲에 집어던졌다. 피렌체 역 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자신이 먹다가 남은 사과를 그곳 에다가 던져버렸다.
공적인 자리에서 언제나 철저하 고,냉정하고,고지식한 모습만을 보이던 피렌체가 이런 행동을 보 인다는 것은 아마 타인이 보면 입 이 쩍 벌어질만한 모습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유일한 목격자인 천영 과 파트라슈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곧 떠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죠 뭐. 저는 바쁘니까.”
거짓말이다. 사실 천영은 할 일이 없었다.
“……아쉽군요.”
그 뒤로 피렌체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지나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저,혹시……
“네?”
천영이 고개를 돌렸다. 흑색의 머 리카락이 찰랑이며 바람에 휘날리 는 모습을 바라본 피렌체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피린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곳 에서 머물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 었다. 하지만 그것은 모순된 일이 었다. 그는 자유로운 천영을 그리 고 싶었으나 이곳에 얽매이게 하 는 순간 그의 ‘자유로움’이라는 이 름의 아름다움은 빛을 바래게 된 다. 결국 그를 붙잡을 수는 없다.
“……아닙니다.”
싱겁게도 피렌체가 그렇게 말하 자 천영은 방긋 웃으며 일어났다.
“슬슬 갈 준비를 해야겠네요.”
“알겠습니다. 저도 그냥 보낼 수
는 없으니 마중 준비는 해야겠군 요.”
그렇게 말하며,피렌체 역시 일어 났다. 천영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이상한 요청을 할까 조마조마 했는데 다행이도 그런 것은 없었다.
‘그리고 로비탄도 여기서 머물겠 다고 했고……
같이 지낸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 만 작별 인사를 해야 할 때다.
감동의 눈물 쇼라던가 그런 건 당연히도 없다. 짧은 시간 내에 상 당히 친해졌다고는 해도 그들의 성격상 그저 ‘다음에 만나면 술이 나 한 잔 하자’라는 느낌으로 쿨하 게 헤어졌다.
로비탄은 ‘갈렌타의 해적’을 조금 더 연습해오라며 게임 세트를 천 영에게 선물해주었다.
피렌체는 천영이 그려져 있는 작 은 액자 형태의 그림 한 점을 선 물해줬는데 뭔가 본인이라기엔 만 화 속 여주인공처럼 생겨서 그저 어색하게 고맙다고 인사만을 건네 고 인벤토리에 넣어버렸다.
“로비탄이 없으니 조용하구나.”
“그러게요.”
한적한 비행정에서 바람을 쐬며 네청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언제나 이런 높은 곳에 올라와,아래를 내 려다보길 좋아했다. 명상에 큰 도 움이 된다면서.
“너는 명상을 해본 적이 없느냐?” “네…… 음. 딱히요.”
“신기한 일이구나. 마법사라면 응 당 명상을 통해 수행을 해야 하거
느 ”
“그게 정상인가요?”
“명상을 하고 말고에 있어서 정상 은 없다. 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정 상은 아니다. 그저 네가 조금 남다 를 뿐이지.”
그게 비정상이란 거 아닌가. 천영 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굳 이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흠,명상이라.”
-선조 드래곤들도 명상을 자주 하곤 했었다. 오래 사는 종족일수 록 심신이 깨끗해야한다면서 말이 지.
“너는?”
-훗,나는 그딴 거 안 해도 괜찮
아. 난 무지 굉장하거든.
“잘나서 부럽다.”
천영은 네청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위로 올린 채,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고 있었다.
‘하얀색 드레스만 입으면 완전 에 어컨 광고구만.’
하지만 저 자세가 무려 천 년 묵 은 이무기의 명상이란다. 어찐지 천 년이나 살았다고 하니,그녀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가슴에 다르게 와닿았다.
천영은 그녀를 따라 하기로 했다.
‘어디보자 갑판에 팔을 걸쳐놓고,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본 채로…….,
그렇게 그녀를 따라 하기 위해 팔을 걸치려고 했으나 그것의 위 치가 생각보다 높다는 사실을 깨 닫고 말았다.
천영은 껑껑대며 몸을 기대기 위 해 애쓰다가 결국 발꿈치를 들고 서야 간신히 네청의 자세를 따라 할 수 있었다.
“젠장.”
그냥 그만두기로 했다. 절대 자세 가 문제가 아니다. 그저 명상이 하 기 싫었을 뿐이다. 그렇게 자기위
로를 하며 천영은 몸을 돌려 등을 기대었다. 슬슬 완전히 봄이 되었 기 때문일까 은은한 바람이 기분 이 좋았다.
그는 눈을 감고 바람을 만끽했다. 그저 그것이 좋아서 아무런 의미 도 없이 그런 행동을 취했을 뿐이 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눈을 감고 그렇게 자연을 만끽하고 있자니 의식이 점점 더 멀어졌다. 마치 허 공에 둥둥 떠서 헤엄을 치는 것만 같은 느낌으로. 바람이 더욱 선명 하게 느껴진다. 냄새가 맡아진다, 공기의 색이 보인다. 그런 착각이 들었다.
마나를 움직이지 않고도 하늘을 날수 있을 것만 같았고 이대로 눈을 감고 영원한 잠에 빠져버릴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의식의 흐름 속에서,뭔가가 보였다.
검은색의 거대한 동체, 금색의 뿔,새하얀 줄무늬.
그것은 드래곤이었다.
5m 남짓 되는 천영의 본체와는 다르게 거의 50m가 넘어가는 아 니 어쩌면 그보다도 거대할 수도 있는 그런 거구의 드래곤이 얌전 히 앉아서 천영을 내려다보고 있
천영과 드래곤은 서로 대화를 나 누지 않았다. 그저 눈을 마주치고 서로를 바라본다. 누구냐는 의문, 어떻게 나를 만나러 왔느냐는 의 문,나 말고도 또 다른 드래곤이 있었던가,하는 그런 의문.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지만 천영은 질 문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입을 열 수가 없었다. 열 수가 없는 걸 까? 아니다. 그냥 그러기 싫었다. 그저 이렇게 가만히 바라보고 싶 었다.
이윽고 의식의 파도가 점차 거세 지더니,잔잔한 호숫가 위에 물방 울이 하나 뚝 떨어진 것처럼 드래 곤의 모습이 흩어져서 사라졌다.
천영은 눈을 떴다. 그의 눈에서 어찐지 금빛의 안광이 새어나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네청이 흐뭇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용다워. 처음 하는 것 치 고는 명상에 쉽게 빠져드는구나.”
이런 게 명상이라는 걸까. 천영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할았다. 참으
로 오묘한 기분이었다. 팔을 슬쩍 들어 올려 마나의 흐름을 손목에 감쌌다. 그러자 작은 회오리가 요 동친다. 이곳에 오기까지 수면을 3시간도 취하지 않았는데 어쩐지 정신이 말끔해지고 마나의 흐름이 더욱 자연스럽게 변했다.
-그래,주인이 조금씩 드래곤답 게 변하는구만. 어휴,지금도 여전 히 약해빠지긴 했지만.
"야,나 그래도 꽤 강한 편이거
든?"
그러자 파트라슈가 코웃음을 쳤 다.
-주인은 아직 한참 부족해. 이전 세대의 드래곤들은 그 몸체가 하 늘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했고 숨 결 한 번에 왕국의 수도가 멸망할 정도로 강력했어. 마족의 군세가 그 존재 하나 때문에 감히 이곳에 넘어오지 못할 정도로 그 위엄은 대단했다고.
그러면서 덧붙인다.
-그리고 나는 그런 드래곤들을 보좌하는 정령이었지!
"그래,결국 네 자랑이구나. 네 똥 굵다."
-나는 대변을 보지 않는다.
"대신 입으로 똥 싸고 있잖아."
흠,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파트 라슈가 어깨를 으쪽하며 고개를 갸웃했지만 천영은 더 이상 설명 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입을 다물었다.
“……그보다도 어쩐지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왠지 모르게 이 곳에 접근하는 사람은 없어도,슬 쩍슬쩍 이쪽을 바라보며 저들끼리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늘어나 있었 다.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