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1부터 시작하는 드래곤 라이프 076화
대략,몇 시간 전.
눈꽃 마녀 설린의 탑 꼭대기.
천영은 그곳에 대자로 누워 숨을 헉헉대며 고르고 있었다. 온몸의 근육은 긴장이 풀린 탓인지 힘이 빠져버렸고 마나 또한 대부분을 소모해버려 더 이상 끌어올릴 힘 도 없었다. 드래곤으로 변신한 상 태에서 입었던 상처들은 대부분 인간으로 돌아왔음에도 남아있어
옷은 멀껑했지만 천영의 몸 곳곳 에는 상처가 남아있었다.
“으..,,
팔을 꿈틀거려 움직이려고 했지 만 어찐지 허벅지가 쓰라리다. 흰 색의 면바지가 붉게 물들어 있었 다. 눈꽃 마녀 설린이 사용하는 칼 날 마법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해 허벅지가 스쳤던 기억이 문득 떠 오른다. 그 상처가 물지 않고 있 는 모양이었다.
안쓰러운 모습으로 천영이 꿈틀 거리고 있자 파트라슈가 천영의 허벅지 부위를 살짝 뜯어서 치유 마법을 사용해주었다. 매번 쓸모가
없다고 구박만 하지만 천영과 함 께 다니면서 조금씩 성장한 파트 라슈는 천영에게 도움이 되는 여 러 가지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쓸모 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후,그래도 이겼네……
눈꽃 마녀 설린은 길고 긴 전투 끝에 마침내 천영에게 패배해 땅 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마지막에 그녀의 죽음을 확신한 천영은 그 대로 변신을 풀어버린 것이고. 정 말 천영보다도 경험도 앞서고 마 법 실력도 앞서는 굉장한 강자였
다. 오로지 드래곤이 사용할 수 있 는 용언에 의지해 그녀를 압도했 을 뿐 만약 입체 마법진마저 완성 하지 못했다면 상대조차 되지 않 고 패배했을 것이다.
싸음이 끝나자 네청은 탑의 꼭대 기로 날아서 올라와 안착했다. 그 러고선 사뿐히 걸어 천영에게 다 가가 무릎을 꿇고 앉아 그를 품에 껴안았다.
천영은 움찔 떨며 저항하려고 했 지만,이내 쌀쌀하게 몰아치던 차 가운 바람이 순식간에 따뜻해졌다 는 사실을 깨닫고서는 그대로 몸 을 맡겼다.
“후후,너는 정말로 대단하구나.”
“이래서 사기캐를 키워야 하는 거
죠
“응?”
“아닙니다.”
네청은 조심히 천영의 머리를 쓰 다듬었다. 정말로,보면 볼수록 매 력적이고 대단한 아이였다. 천영이 실질적으로 마법을 수련한 시간은 7년도 채 되지 않았고 드래곤이 된 시간은 1년도 되지 않았다. ‘경 험’과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만으 로 오로지 그것만으로 이만큼이나 성장했다는 소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청의 추측 상 거의 200년은 넘도록 살아온 눈꽃 마녀 설린을 이겼다는 사실 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천영이 죽 게 내버려둘 수는 없으므로 여차 할 땐 싸움에 끼어들기 위해 준비 하고 있던 네청은 천영이 간당간 당하게 싸움의 페이스를 조절하면 서도 절대로 자신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은 만들지 않는다는 것에 감 탄했다.
천영은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여 준비에 준비를 거듭해 최후의 패 를 항상 숨겨두고 있었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
직까지 천영이 사용하고 남은 마 법의 잔재가 남아있었다. 하늘에 보이는 먹구름은 절반쯤 날아가서 연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고 용언으로 추측되는 마법 문자들이 여전히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욱 네청의 시 선을 빼앗는 것은 역시 구체 형태 로 여전히 마녀의 탑 주변을 빙글 빙글 돌고 있는 마법진이었다.
정말로 신비로운 마법이 아닐 수 없었다. 이 거대한 공간을 둘러싸 둣 나선형으로 회전하는 수많은 마법진이 모이고 모여 마침내 구 체의 형태를 이루는 모습은 그야
말로 장관이었다.
눈꽃 마녀 설린은 저것에 의해 얼마나 곤욕을 치렀던가. 천 년이 나 살아온 네청조차도 설린을 상 대로는 본심을 꺼내야할 정도로 강적이었는데 네청이 보기엔 이제 막 첫걸음을 떼고 있는 서천영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서천영.”
“네?”
“나에게 시집오거라.”
“……장가는 생각해보죠.”
“후후,그것도 좋지.”
네청의 성별은 여성이다. 하지만 드래곤이 되는 순간 성별을 다시 한 번 선택할 수 있다. 용이 된다 는 것은 이전의 모든 모습을 버리 고 완전히 새롭고 다른 존재로 재 탄생을 한다는 의미. 네청은 어쩐 지 천영을 이대로 두고 싶지 않았 다.
‘그나저나,용이랑 용이 결혼한 사례도 있나?’
애는 낳을 수 있는 건가? 천영이 그런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구름이 서서히 걷히며 햇살이 서서히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사막에 꽁꽁 숨어서 날씨를 조
작하던 마녀가 모습을 감춰버리니 원래의 날씨로 점차 돌아오는 모 양이었다.
“이 탑의 동력이 정지되었구나. 아마 일 년 이내로 사막의 날씨는 원래대로 돌아오겠어.”
“흐음……
천영은 조용히 눈을 감고 탑의 마나를 느꼈다. 모습을 감추던 차 폐막이나 날씨를 조작하던 천영의 수준으로도 이해하기 힘들었던 대 마법진 또한 완전히 힘을 잃었다. 그렇다고 해서 날씨가 한 번에 바 뀌지는 않는다. 서서히 조금씩 바 뀌겠지.
햇살을 받으며 천영은 가만히 눈 을 감았다. 천영이 상처 입고 힘들 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까 자연 이 요동치며 그의 몸에 힘을 불어 넣었다. 따스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살랑살랑 그의 머리카락을 휘날렸 고 대지의 기운이 탑을 뚫고 옥상 까지 올라왔으며 어전지 건조해진 공기가 갑작스레 조금 촉촉해졌다. 체력이 조금씩, 조금씩 차는 것을 느끼며 천영은 힘겹게 자리를 일 으켰다.
“조금은 쉬는 것이 좋지 않겠느 냐.”
“에휴,그러고는 싶은데 망할 후
임이 아직 일을 못 끝낸 것 같아 서.”
정확히 말하면 후임 후보였지만.
탑의 중앙에 천천히 걸어가 그저 평범하게 양반 다리를 취한 다음 목걸이를 꺼냈다. 백하란에게 주었 던 목걸이와 연결되어있는 별 볼 일 없는 목걸이였다. 그저 상대 쪽 에서 신호를 보내면 위치를 파악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도의.
하지만 그 정도로 충분했다. 천영 은 자연의 기운을 조금씩 조금씩 끌어올려 스스로의 마나를 회복시 켰다. 그러면서도 마치 장인이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듯 마법진을
서서히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선 하나였으나 그것은 이내 원이 되었고 그곳에는 수많은 용언이 새겨지기 시작했으며 종래에는 탑 전체를 감출 정도가 되었다.
천영은 조금도 힘들어하는 기색 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천영의 주변을 둘러싼 자연의 기운을 이 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마 나를 끌어올리려면 높은 집중력이 필요한데다가 그것을 느낄 수 있 는 정도의 경지가 되어야 하고 또 한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려 자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 금 천영에게는 남는 것이 시간이
이윽고 3시간에 걸쳐 마법진 하 나가 간신히 완성되었다. 이 마법 의 정체는 간단하게도 그저 상대 방이 보낸 좌표로 장거리 텔레포 트를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마법이 었다.
그에 네청은 입을 살짝 벌리고 감탄하고 말았다. 인간들은 텔레포 트 마법을 한 번 사용하기 위해 얼마나 수많은 마정석을 끌어 모 으고 도구를 가져다가 설치하고 얼마나 오랜 기간에 걸쳐 마법 좌 표를 수정하던가.
천영은 그 과정을 모두 생략한
채 단 세 시간 만에 텔레포트 마 법진을 완성하였다. 비록 사정거리 도 짧고 상대방이 좌표를 보내줘 야 하는데다가 일회용이지만 그것 만으로도 이미 인간의 상식을 뛰 어넘은 마법이었다.
‘과연,드래곤이군.’
탑의 주변을 나선형으로 마치 행 성을 둘러싼 위성처럼 회전하는 저것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응응거리고 있었다.
천영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또 다른 마법진을 하나씩 하나씩 짜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전투에 도움이 될 만한 마법을. 도착했을
때 어떤 상황일지는 모른다. 아군 이 모두 전멸 위기일까? 아니면 공격을 해야 할 상황일까? 모른다. 천영은 그런 추리 따위, 생각하기 도 싫었다. 그러므로 간단하게 결 정한다.
둘 다 준비한다.
‘어택 홀딩기와 파티 보호기 정도 면 괜찮겠지…….,
하나의 마법진에 두 개의 마법을 넣는다. 언뜻 보면 미친짓이지만 드래곤의 마법이기에 가능했다.
마법진이 서서히 그려지고 새하 얗고 노란빛을 은은하게 띄고 있
는 구체가 또다시 완성된다. 여기 까지 걸린 시간은 또다시 4시간. 아무리 천영이라도,함부로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위력이 뛰어나고 엄청난 집중력과 마나를 소모해야 만 했다. 이것을 만들고 나서는 천 영조차도 조금 식은땀을 홀릴 정 도로,굉장히 지친 상태였다.
거기에서 끝내지 않고 마법진을 꼼꼼히 보수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여 수정을 끝마치자 천영은 눈을 떴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네청을 돌아본다. 그녀는 살포시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가있을게요.” “그래.”
천영의 목에 걸려있던 작은 구체 에서 빛이 반짝인다. 백하란이 급 한 상황이 되어 지푸라기라도 잡 는 심정으로 천영이 건네준 목걸 이에 마나를 부여한 것이다.
천영은 말했다. 목걸이에는 그 어 떤 대단한 마법도 인챈트 되어있 지 않다고. 드라마처럼 대단한 마 법이 등장하는 것은 생각하지 말 라고.
그랬다. 그것은 대단한 마법이 아 니었다. 단지 좌표를 전송하는 정
도의 그런 마법이었다.
그저 서천영이 직접 등장할 뿐인,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은 그저 그 런 마법이었다.
루만은,이 상황을 기적이라고 표 현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천사가 강림 했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였다.
하늘이 열렸다. 그렇게밖엔 표현
할 수가 없었다. 온 세상을 뒤덮고 있던 먹구름이 딱 가오레쉬의 바 로 위에 멈췄다. 그리고 그곳에 떠 있는 작은 소년의 위쪽에 있는 구 름만 걷혀져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정말로 찬란하 고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온다.
이 상황에 누구보다도 냉정해야 할 루만이 넋을 잃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아름답다는 말이 입 밖으 로 흘러나왔다.
새하얀 깃털이 휘날리며 빛의 기 둥과 빛의 사슬,빛의 창이 가오레 쉬의 몸을 완전히 봉쇄한다. 가오 레쉬가 힘껏 포효를 하려고 했지
만 그마저도 저지당했다.
“맙소사……
루만이 입을 열어 뭐라고 말하려 는 순간,하늘에 둥둥 떠 있던 정 체불명의 소년이 살짝 손짓을 했 다. 그러자 파앙! 소리와 함께 빛 이 조금 온화하게 뿜어지더니 아 름답고 신비로운 깃털이 사방으로 퍼져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작은 새가 되어 동료들의 머리 위에 내 려 앉았다.
그 하얀 새는 상처를 물어뜯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상처가 사라지며 피가 아물기 시작했고 정신을 잃 었던 동료들에게는 아름다운 목소
리로 지저귀더니 깨어나게 했다. 지독한 상처를 입었던 동료들에게 는 수많은 참새가 달라붙었고 기 절했던 원정 대원들은 마침내 서 서히 몸을 일으켰다.
“이,이게 무슨……
마법사들이 입을 쩍 벌리고 그것 을 지켜보았다. 검은색 머리칼의 소년 혹은 소녀로도 보이는 아이 의 몸을 중심으로 나선형으로 회 전하는 저 마법진들을 보라. 상식 적으로 불가능한 그 마법의 향연 에 마법사들을 할 말을 잃었다. 눈 으로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 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을 지경이었
다.
“……저건 서천영인가.”
누군가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궁 수 클래스인 덕분에 그의 팔목에 착용되어 있던 금색 별 마탑의 시 계를 알아볼 수 있었다.
루만은 무릎을 꿇고 털썩 주저앉 고 말았다. 어쩐지 긴장이 탁 풀려 버리고 말았다.
“하하……
백하란은 멍한 얼굴로 서천영을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어제 보았던 서천영보다 아주 살짝이지만 성숙 해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직전에 보았을 땐 마치 천사나 여 신을 본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지 만 어쩐지 서천영은 그런 느낌보 다는 훨씬 더 무겁다는 느낌을 주 고 있었다.
비유하자면 소년에서 더욱 자라 청년 그보다도 더 아이를 어르고 보살펴주는 인자한 노인처럼. 그런 느낌을 주고 있었다.
백하란은 서천영이 자신에게 건 넸던 말을 기억해냈다.
‘두 개의 전혀 다른 속성을 하나 의 마법에 섞는 걸 어떻게 생각 해?’
백하란은 답했다. 불가능하다고.
그리고 지금 서천영은 마치 백하 란을 가르치기 위해서라는 것처럼 자신이 말했던 것을 실제로 보여 주고 있었다.
하나의 마법진에 공격과 방어라 는 모순 된 두 개의 마법을 섞은 채 이 위기 상황에 기적처럼 등장 한 것이다.
서천영이 미소를 짓는다. 그러자 어째선지 세상이 더욱 더 밝게 빛 나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드냐?”
가오레쉬가 팔을 높게 치켜들었
다. 정말로 분노한 듯이 서천영을 단 일격에 없애버리겠다는 것처럼. 하지만 서천영은 그런 상황에도 아랑곳 않고 미소를 유지한 채 말 했다.
“집에 가자. 네 누나가 기다리겠 다.”
그리고 그렇게 말한 순간,서천영 이 팔을 높게 치켜들었다.
직후 온 세상이 새하얗게 물들었 다. 소리가 점점 사라지고 시야가 좁아지는 그 와중에도 백하란은 마지막 순간까지 눈을 감지 않았 다. 최후의 최후까지 마침내는 천 영의 열은 미소만이 남을 때까지
그날 원정에 참여했던 이들은 입을 모아 말하곤 했다. 마치 신의 사자가 이 땅에 강림했었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