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1부터 시작하는 드래곤 라이프 131 화
32장 달빛 아래에 생긴 일곱 호랑 이의 그림자
해가 완전히 저물고 저녁이 되자 수많은 세력과 사람들이 각자의 자 리를 찾아갔다.
절벽과 절벽의 사이에 제국의 기사 단이 전열해 있었으며 마법사들을
절벽 위에서 ‘게이트’ 속에서 나올 무언가를 요격하기 위해 마법을 준 비하는 중이었고 성직자들은 사람들 이 다치지 않기를 바라며 기도를 하 였으며 클랜(용병)들은 자신의 가치 를 선보이기 위해 마음을 단단히 굳 혔다.
각자 다른 마음을 품고 있지만 그 들의 목표는 하나였다.
“……시간이 됐어요.”
안시르엘이 그렇게 말을 내뱉자 케 일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셀라임은 굳은 얼굴로 검은색의 돌을 만지작 댔다. 신성력을 잃은 그녀에게 있어 서,‘루블랑의 신전’에서 구한 이 아
이템은 유일하게 그녀가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물건이었다.
“후우. 나 참,사람들이 쓸데없이 정색 빨고 있으니까 괜시리 나도 긴 장되잖아. 엘링이,표정 좀 풀어.”
“으으. 지금이 그럴 때야?”
셀라임이 안시르엘에게 달려들며 말하자,그녀는 표정으로는 싫다고 말하면서 입술만큼은 웃고 있었다. 셀라임,그녀는 묘하게 주변 사람들 의 긴장을 풀어주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 재능은 아무나 가 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비록 신성력도 잃고 스킬마저도 사
용할 수 없는 반쯤 바보가 된 몸이 라지만 그녀는 언제나 가장 선두에 서 성직자들을 이끌었다. 그 누구도 그녀를 무시하지 않았다. 자신들보 다 약하다 해서 스킬을 사용할 수 없는 몸이라 해서 그녀가 약한 것은 아니었다.
셀라임은 강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 재능은,
‘절대 스킬(Skill)따위로는 흉내낼 수 없는 것이겠지.’
케일런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본다.
셀라임과 안시르엘을 비롯한,주변 에 서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누군가 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서천영이었 다. 이들 중 몇몇은 서천영과 그저 지나가다가 마주쳤을 뿐이기도 하고 던전을 다니다가 서천영에게 도움을 받은 이들이기도 했다. 넥스터만 이 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곳에는 12 개의 마탑과 거대규모의 클랜이 상 당수 모여 있다. 서천영과 직접 연 관된 적이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찾고 있었다.
‘오지 않은 건가……
회색 바위 마탑의 맥골라스 머치펭
은 익숙한 얼굴이 보여 그 여인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사방에 우락 부락한 근육질의 남자들밖에 없어 동료 마법사들이 만류했지만 그는 그들에게 친근감 가득한 얼굴을 내 보일 뿐이었다.
“간만에 뵙는군요.”
“오? 이야,너도 여기에 와 있었구 나?”
나이아가라 헬스장의 요하엔. 그리 고 그녀를 중심으로 한,스무 명 가 량의 무식한 근육 덩어리들. 근육 뿐만이 아니라 온몸에서 ‘투지’를 뿜어대고 있어서 어지간한 병사들조 차 겁을 지레 먹고 접근하기 꺼려했
지만 맥골라스 머치팽은 이들을 잘 안다. 항상 의리를 중시하고 따로 싸우는 것 같으면서도 팀원을 믿는 신뢰도가 매우 높았다. 서로를 목숨 처럼 끔찍히 아끼는 그들은 맥골라 스 머치팽의 눈에는 그야말로 정의 의 사도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나저나 메이지 서천영은 보셨습 니까?”
“없는 것 같아. 내가 여기 왔을 때 전부 뒤져봤거든.”
“그렇군요……
맥골라스가 묘하게 시무룩해지자 요하엔은 그의 등짝을 ‘아주 살짝’
철썩 때렸다.
퍽!
“커헉!”
“아하하! 뭘 그리 시무룩해! 우리 귀염둥이 없으니까 많이 속상한가 봐?”
“그,그런 건 아닙……
요하엔이 또 손바닥을 치켜들자 그 는 주변에 있던 다른 나이아가라 헬 스장 인원의 등 뒤에 훌쩍 숨어버렸 다.
요하엔은 싸음 직전 스스로의 긴장 을 풀기 위해서인지 자신들의 사람 들에게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것인
지 한참이나 웃었다.
황녀 벨레인은 절벽 아래,기사단 의 제일 선두에 서 있었다. 레이븐 은 그녀가 지휘관으로서 절벽 위에 위치해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끝까지 자신이 가장 선봉에 서야한다며 내려가 버렸다. 그녀는 마치 굳건한 철벽처럼 기사단과 함 께 우직하게 중앙을 지키고 있었다.
레이븐은 교황들의 뒤쪽에 서서 그 런 벨레인을 지켜보았다. 살짝 걱정 되긴 해도 그녀 나름대로 생각이 있 을 터이다. 레이븐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금색 별 마탑의 마법사 들이 게이트가 열리면 봉인진을 작
동시키기 위해 절벽 하나하나에 각 자 포진해 있었고 당장 레이븐의 뒤 쪽에는 2명의 마법사밖에 없었다.
서천영이 데려온 어리지만 굉장히 유망한 마법사 백하란과 영물에 가 까운 생명체 하성. 그리고 그들을 수호하듯 앞쪽에 서있는 백발의 여 인 백화연. 그들은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기다 리는 듯한 얼굴이었다. 특히 백화연 이라는 이름의 여인은 마치 어미 새 를 찾는 아기 새처럼 불안한 얼굴로 서천영을 하루 종일 기다렸다.
‘서천영…….,
하성의 말에 의하면 현재 서천영은
또 다른 게이트를 봉인하기 위해 단 신으로 무풍사막을 향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후로 감감무소식. 어떻 게 됐는지 서천영은 돌아오지 않았 고 삼대월식이 시작되기 직전인 지 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장소의 여러 사람들이 서천영을 기다린다. 서천영이 온다고 전황이 뒤바뀔까? 그건 모르는 일이다. 그 래도 만약 온다면 게이트의 봉인이 더욱 빨라질 수도 있겠지. 그 도움 은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을 것이 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기다린다.
‘묘한 매력을 가진 인물이지.’
레이븐은 말없이 절벽을 내려 본
‘다크룰의 규모가 어떨지는 몰라 도,모인 인원이 터무니없이 적군.’
분명 수만 명이라는 규모는 많았지 만 타차원이 열리는 것에 대응하기 엔 너무나도 부족했다. 역사 속에서 자주 언급되는 ‘천마전쟁’ 등의 규 모를 생각해보면 백만 혹은 천만 단 위가 거뜬히 넘는 대규모의 인원이 학살당하고 죽어나갔다고 한다. 그 에 비해 지금 이 자리에 모인 몇 만 정도는 애교 수준이리라.
‘시간이 너무 부족했어. 사흘 아니, 이틀이라도 시간이 더 충분했더라 면…….,
이만한 병력이 있음에도 도저히 안 심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곳곳 에서 지원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려오지만 과연 그들이 제때 도착 할 수 있을까.
현재 시각 오후 21시 35분.
삼대월식 시작 2분 전.
달이 서서히 겹쳐지는 것을 바라보 며,교황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예언대로라면 용이 내려와야만 하 는 신성스러운 날에 악마가 찾아온 다니. 가슴 아픈 일입니다,리우펠리 우스.”
“그렇군요.”
그들의 표정은 굳어있는 상태였다. 또한 교황 역시 리우펠리우스를 굳 이 비난하고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 사실 그는 리우펠리우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틀린 예언을 해버린 천 년 전의 시대를 살아갔던 용에게 말을 한 것이다. 어째서 예 언이 잘못되었는지. 차라리 용이 나 왔으면 좋았을 것을 왜 악마가 나오 도록 만들었는지.
허나 리우펠리우스는 대답하지 않 았다. 아직 예언은 시작되지 않았다.
그저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굳게 다져진 ‘신념’을 유지하며 믿을 뿐 이다.
하늘에서 용이 등장하는 것을.
현재 시각 오후 21시 37분.
찬란한 빛이 터져 나온다. 세 개의 보름달이 겹쳐지며 온 세상에 찬란 한 오로라를 흩뿌리기 시작했으며 그와 동시에 하늘에 금이 가기 시작 했다.
아주 작은 검은색의 실선. 그것은 마치 이불을 찢는 것처럼 아주 간단 히도 공간을 만들어 내어 이윽고 불 길한 기운을 뚝뚝 떨어뜨린다.
“삼대월식이 시작되었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달콤한 꿈 을 지니고 있을 삼대월식(근大月飯)
과 함께 가장 끔찍한 악몽이 시작되 었다.
묘한 세계였다.
다른 차원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이동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벌 렁거렸다. 이런 세계가 있을 것이라 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천영은 멍하니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푸른색의 얼음으로 가득했 다. 아니,푸른색이 과연 맞은 것일
까. 그렇게 느끼는 것뿐이 아닌가. 푸른‘색’이란 애초에 파란색을 띠고 있는 빛이 반사되어서 안구에 도달 해야만 보일 뿐이다. 하지만 이 공 간에는 빛이라는 것이 아예 없었다.
-아니,빛조차도 얼어붙어있어.
과학적으로,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 하지만 ‘상식’이라는 것이 산산조각 부서지는 그런 세계.
천영은 입을 벌리지 않았다. 극한 의 냉기가 입 속으로 전해져 들어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입을 벌리고 말고는 상관없이 이미 그리
픈의 평범한 생명체라면 단 1초도 버티지 못하고 꽁꽁 얼어붙어서 동 사해버릴 정도로 압도적인 추위가 천영을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이상한 일이다. 체감 상으로는 영하 100도 또는 200도. 또는 300도. 감히 숫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냉기가 휘몰아 치는데 천영은 전혀 춥지 않았다. 아니,분명 차갑다는 것은 느끼는데 추워서 덜덜 떨리지는 않았다.
-드래곤의 또 다른 명칭은 ‘차원 여행자’라고도 하지. 어느 차원에 가도 살아갈 수 있도록 뛰어난 적응 력을 가졌어. 물론 아무리 주인이라
도 견디기 힘든 차원은 분명히 있 다. 이 차원 또한 그런 차원에 속하 겠지만 많이 약한 편이야. 단순한 추위 따위로는 드래곤을 괴롭힐 수 없거든.
파트라슈가 그렇게 말해주기는 했 지만 천영은 몸이 서서히 얼어붙는 감각을 느꼈다. 춥지는 않지만 옴직 이기가 힘들었다.
-주인이 아직 어려서 그래.
말없이 얼어붙은 세계를 방랑한다. 천영은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 을 하나하나 세밀히 관찰했다. 사방
에 얼음 송곳 같은 것들이 작아졌다 가 커다래졌다가 하면서 가시를 쑥 쑥 뽑아내고 있었다. 아름다운 하늘 색의 크리스탈이 액체로 변하는가 하면 갑자기 꽁꽁 얼어붙기도 했다.
점액질의 뭔가가 옆을 스쳐지나가 더니 갑작스레 큼지막하게 부풀어 올라 고드름을 내뿜더니 사라지기도 했고 거대하고 둥그런 무언가가 무 리지어서 어디론가 이동하기도 했 다.
이곳은 또 다른 차원. 얼어붙은 세 계.
-……사실 나도 다른 차원에 와본 적은 몇 번 없거든. 언제나 그리픈
에만 머물러야 하는 입장이리서. 그 래도 알 수는 있어. 여긴…….
주변을 슬쩍 둘러보던 파트라슈는, 이내 말했다.
-드래곤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평 화로워.
전쟁,분노,욕심,근심 따위는 하 나도 없는 세계. 저기 날아가고 있 는 얼음 덩어리가 실은 이곳에 서식 하고 있는 생명체일지도 모른다. 단 지 천영은 성대를 통해 음성을 내뱉 는 방식으로 대화하는 방법밖에는 몰랐다. 저런 무기질의 생명체와 대 화하는 법을 몰랐기에 서로간의 대 화가 통하지 않을 뿐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추측이다. 맞을 수도 있 고,아닐 수도 있다.
‘그래도…… 여긴 마나가 상당히 풍부해.’
사충계에서도 느꼈지만 어느 차원 이나 마나는 존재하는 것 같았다.
"하긴 마나를 이용하는 드래곤이 차원 여행을 하려면 그 정도는 당연 한 사실인가.’
-그렇지.
마나가 아예 동나버려 텅 비어버린 드래곤 하트를 느끼며 천영은 조금 씩 호흡을 했다. 드래곤의 신체는 호홉을 하지 않아도 괜찮지만,지금
하는 호흡은 공기를 빨아들이는 행 위가 아닌 마나를 보충하는 행위였 다.
이곳에 들어온 직후 게이트를 닫는 것에 모든 힘을 때려 박은 바람에 현재 잔여 마나량이 터무니없이 부 족했다. 지금 갑작스레 습격이라도 당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정도로.
하지만 이 차원의 그 어떤 물체도, 그 어떤 생명체도 천영을 공격하지 않았다.
처음엔 기분 탓인 줄 알았다.
‘나를 피해가는 것 같은데?’
마치 천영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것처럼,두려워하는 것처 럼. 생명체인지 아닌지 알 수조차 없는 것들이 10m남짓 하는 거대한 드래곤의 신체를 비켜가고 있었다.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지?’
-성체 드래곤은…… 아마 차원 게 이트를 여는 것이 가능할 거야. 물 론, 아무 때나 열지는 못하겠지. 나 도 자세히는 몰라. 그 방법은 드래 곤이 스스로 깨우치고 또한 때가 되 면 알아서 사용한 다음 사라지거든. 그 누구도 나에게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어.
‘……그럼 지금 당장은 빠져나갈 방법이 없단 소리네?’
-그렇,겠지?
천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주변을 둘러본다. 드래곤의 뛰어난 시력으 로,가시거리를 최대한 확장시켜본 다. 사방이 온통 크리스털과 기묘한 액체,고드름,얼음 덩어리로 가득했 다. 땅도 없고,하늘도 없으며,빛과 어둠조차 얼려버리는 세계.
-주인이 지금 몇 살이지?
‘250일 거야.’
-그럼 250년만 한숨 푹 쉬자. 500 세가 되어 성체가 되면 차원 게이트 를 열 수 있잖아.
‘……개소리를 아무렇게나 하는 걸
보니 역시 네 이름은 파트라슈가 어 울려.’
-흠?
그의 지적에 파트라슈가 이해가 가 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파트라슈나 드래곤에게 있어서 250 년이랑 그저 스쳐지나가는 짧은 세 월일 뿐이었다. 너무나도 기나긴 세 월을 살아가는 바람에 지친 드래곤 은 결국 마지막 순간 영원한 수면에 빠져드는 방법을 택하기도 했다.
-주인,아직까지도 자각이 너무 부 족하다. 주인은 드래곤이고 그에 걸 맞는 행동을 해야 해.
정말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기 에,천영은 이해하기가 싫었다. 의도 치 않게 찾아온 차원에서 의도치 않 게 250년을 버티고 돌아간다면? 그 땐,지금 천영이 알던 사람이 단 한 명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별’이나 다름없었다. -이별도 익숙해져야 한다.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오는 순간 이니까. 영원의 순간을 사는 불멸자 란 항상 그런 존재다. 이별을 감내 하고,받아들일 줄 알고,또한 기억
의 저편에 묻을 줄 알아야 한다. 드 래곤에게 망각의 축복은 허용되지 않아. 이별이 슬프다면 그것과 관련 된 모든 것들을 스스로 기억의 도서 관에 자물쇠로 틀어막아서 잠가야만 하지.
그녀의 말이 타당했다. 천영은 앞 으로 얼마나 더 살아갈 수 있을지 어떤 세계를 헤쳐 나갈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파트라슈와도 언젠가는 이별 을 하겠지. 드래곤이기에 셀 수도 없이 기나긴 세월을 사는 존재이기 에 반드시 그리픈을 떠나는 날도 찾 아올 것이다. 그럼 그리픈의 모든
것들과 이별을 해야만 할 것이다. 파트라슈는 그리픈에 종속되어 찾아 오는 드래곤들을 수호하고 안내해주 는 정령이었고 천영은 언젠가는 떠 나가야만 하는 방랑객이니까.
파트라슈가 어두운 표정으로 그리 말하자 천영이 문득 웃었다. 천영은 오래토록 그리픈에서 살 생각이다. 벌써부터 이별이니 뭐니 오지도 않 은 미래를 이야기하는 파트라슈를 보며 천영은 입꼬리를 씩 올린다.
‘근데 이걸 어쩌나.’
-응?
‘겁나 어처구니없잖아. 차원 게이
트 좀 닫으려고 잠깐 들어온 건데 다시 못 돌아가면 말이나 돼? 누가 들으면 쪽팔려서 얼굴도 못 들고 다 니겠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 겠는데 난 아직 별로 준비를 하지 않았어.’
게임을 시작할 때도 모두가 준비 버튼을 눌러야만 시작한다. 천영은 이별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타의에 의한 이별은 이별이 아니다. 다시 찾아가면 될 뿐이다.
‘강 존나 여기저기 뒤지고 다니지
뭐. 어딘가에는 방법이 있지 않겠 어?’
천영이 그렇게 말하자 파트라슈는 잠시 멍한 얼굴로 그의 눈동자를 쳐 다보더니 이내 본인도 개구쟁이 같 은 미소를 짓는다.
-그렇군! 그럼 빨리 돌아가자. 여 긴 너무 추워!
‘그래!’
•그렇게 호기롭게 의욕을 다짐
한지 고작 3시간밖에 지나지 않았 다.
“야,250년 정도는 뭐 영원을 살아 가는 존재들에게 있어서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한 순간일 뿐이라며.”
-그렇,지?
“근데 난 왜 고작 3시간 싸돌아다 녔다고 존나 힘드냐? 뒤질 것 같네 진짜……
이곳에 슬슬 적응을 시작한 천영은 입을 열어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 다. 사실 진작 눈치는 채고 있었지 만 무서워서 입을 열지 못했을 뿐이 다.
“지겹다. 어딜 봐도 다 똑같은 광 경이야.”
분명 아름다운 세계이긴 했으나 그 것도 몇 시간이고 계속 바라보면 질 린다.
천영은 반쯤 죽은 눈동자로 이곳을 둥실 떠다니며 헤댔다. 하늘을 나는 원리는 바람을 조종하는 것. 사실상 이곳은 대기조차도 얼어붙은 상태였 기에 그저 무중력 속을 헤엄치는 것 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밤과 낮의 구분이 없는 세계에서 천영이 여전히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하고 멍하니 유영하고 있을 때, ‘거대한 벽’이 움직였다.
“……응?”
잘못 본 것이 아니다. 틀림없이 새 파란 벽이 움직인 것만 같았다.
천영은 정신없이 그곳으로 날아갔 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 다는 생각에.
그리고 그곳에서 복근을 보았다.
-응?
뭔가 이상한 것 같지만,정말 복근 이었다. 왕(£)자가 아주 인상적인 섹시하고 달달해 보이는 복근. 그것 을 멍하니 응시하던 천영은 이내 고
개를 든다.
이번에는 탄탄한 가슴 근육 그리고 근육이 잘 잡혀있는 어깨 그 위로 푸른 눈동자를 가진 푸른 생명체의 얼굴이 천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것은 천영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비록 눈동자는 없는 모양 이지만 고개를 살짝 내리고 있었으 니까. 천영은 말없이 그 존재와 눈 을 마주쳤다.
그 생명체는 에베레스트 산이 살아 움직인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 을 정도로 거대했다.
정적.
불쾌한 침묵.
결국 천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물론 인사가 통할 리가 없다. 애초 에 이곳에는 대기가 없다. 소리가 전달되지 않는다.
파트라슈는 그저 천영과 연결이 되 어있기 때문에 대화가 통할 뿐이다. 그런 사실을 새삼 깨달은 천영은 대 화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는 법은 천영이 아닌 상대방이 먼저 찾아낸 모양이 었다. 그 존재는 천영의 말을 한참 이나 해석하더니 이내 본인도 천영
을 흉내 내어 ‘목소리’를 내었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군요.”
반갑지 않은 손님이라니. 설마 이 얼음 거인이 악의라도 품으면 어쩌 나 싶어 천영은 찔끔 했지만 그것은 딱히 천영을 해할 생각이 없는 모양 이었다.
“하지만 반갑기도 하군요.”
그러면서 거인이 말한다.
“본인,빙제(氷帝)가 지배하는 세 계. 빙제현(氷帝現)에 온 것을 환영 하오,용이시여.”
그러면서 빙제라고 자칭한 거인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