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1부터 시작하는 드래곤 라이프 189화
쩔그럭.
이른 오전부터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청량하게 고막을 자극한다. 베킴은 대장간이 오픈하기 전,미리 미리 진열대의 세팅을 마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이 ‘포유황 대장 간’의 가장 막내인 베킴은 다른 대 장장이들이 기상하기 전 발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으하암,베킴. 아침부터 열심히구
온통 근육질의 대장장이 한 명이 졸린 눈으로 2층에서 내려왔다. 아 무래도 밤샘 작업을 한 모양인지 몰 골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베킴은 저 선배 대장장이의 저런 모습조차 존경스러웠다. 죽을 때까지 무기를 만드는 것이 꿈인 베킴에게 있어서, 무려 포유황 항구에서 가장 커다란 대장간인 포유황 대장간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나 다름없 었다.
“하하, 저는 기술이 부족해서 도옴 이 안 되니 이런 거라도 열심히 해 야죠.”
“크하핫! 내가 너처럼 젊었을 때도 그렇게 열심히 했었지!”
아침부터 칭찬을 받으니 괜히 기분 이 좋아진다.
“그나저나 가게 문은 벌써 열어둔 건가?”
“예,오늘은 북쪽 크림테리오 산맥 으로 원정을 나갔던 원정대가 복귀 하는 날이거든요. 미리 가게 문을 열어두고 예약 번호를 나눠주려고 일단은 오픈해뒀어요.”
“오,좋은데. 너처럼 날랜 신참이 들어와서 아주 좋구먼!”
베킴은 비록 이곳에 들어온 지 얼
마 되지도 않은 신참이지만 눈치가 굉장히 빨라서 대장간에 조금씩 도 움이 되고 있었다. 선임 대장장이는 하품을 하며 베킴을 칭찬하다가 진 열대를 슬쩍 둘러보았다. 포유황 대 장간의 마스터 대장장이,루크렉의 무기와 갑옷들이 아름답게 진열되어 있었다.
정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지간 한 용병들과 대장장이들은 침을 질 질 홀릴 정도로 대단한 명품들이었 다.
선임 대장장이는 베킴의 어깨를 툭 툭 치고서 밖으로 나가기 위해 복도 를 지나쳤다. 그리고 우뚝 멈춰 선
다.
“베킴. 문에다가 마법 알림장치 달 아놓지 않았었나?”
“예? 그랬죠. 지금도 작동 중일 텐 데요.”
책상 위에 있는 마법 알림기가 초 록색 불빛으로 번쩍였다. 포유황 대 장간처럼 규모가 큰 가게는 손님이 들락날락할 때 카운터에서 손님을 볼 수가 없었으므로 이런 식으로 알 림을 설치해놓는다.
“그럼,저 꼬마는 누구야?”
“예?”
베킴은 당황하여 선임 대장장이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당황한다. 분명 가게를 오 픈한 뒤 알림은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는데 웬 열댓쯤 되어 보이는 소 년이 구석에 쪼그려 앉은 채 갑옷을 만지작대고 있었다.
“이거 원 참,알람이 고장났나보네
요.”
“허허. 뭐,대낮부터 도둑이 들리는 없겠지만. 어쨌든 저 꼬맹이나 내보 내.”
아무리 손님을 가리지 않는다지만 그것은 성인에 한정되었을 뿐 꼬마 손님은 받지 않는다. 이곳에 있는
무구의 대부분은 성인의 몸에 맞춰 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 문에 베킴은 꼬마를 보며 피식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구석에 앉은 채 자신의 머리보다도 2배는 더 커다란 투구를 쓴 채로 자신의 머리를 만지 작대는 꼴은 꽤나 우스꽝스러웠다.
“꼬마야,여긴 네가 살 만한 물건 이 없단다. 돌아가라.”
그러자 투구를 쓴 채로 그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이거 ‘강철의 제국 파노 라마 시리즈 일곱 번째’ 맞지?”
“어,그걸 어떻게 알았니?”
강철의 제국 시리즈 갑옷은 일부 매니악 층만 아는 것으로 포유황 대 장장이의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특 히 그 일곱 번째 시리즈는 마스터 대장장이 루크렉이 더 이상 만드는 것을 거부하여 그 희소성이 굉장히 높았다. 원래는 강철의 제국 시리즈 는 전부 전 세계로 흩어져 있었지 만,얼마 전 창고에 박혀있던 것 하 나를 우연찮게 발견하여 베킴이 허 락을 맡고 꺼내놓았다.
“크으,직접 써보니 질감이 죽이네. 폭신폭신하면서,답답하지도 않고. 시야도 확 트여있어. 게다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은데……
“그래,굉장하지? 사람들은 겉멋만 따져가면서 ‘M-1914 천사의 방패’ 만 고집한단 말이지!”
“에헤이. 천사의 방패 시리즈는 갑 옷의 ‘기’자도 모르는 놈들이나 좋 아하지. 진짜 갑옷을 사랑하는 사나 이라면 무릇 ‘철혈’ 시리즈를 쓰는 법!”
“그래! 네가 뭘 좀 아네! 역시 철 혈 시리즈가 인생 최고의…… 가 아 니라. 이 꼬맹이가!”
베킴은 소년의 대화에 휘둘릴 뻔했 다는 사실에 황급히 주제를 돌렸다. 그는 소년의 머리에 두 손을 얹었
다.
“어쨌든 투구나 벗어.”
“어? 이거…… 으악!”
퉁!
머리에 비해 헐렁했던 투구는 너무 나도 쉽게 벗겨졌고,덕분에 베킴과 소년 모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설마 이렇게 쉽게 빠질 줄 몰랐던 베킴은 엉덩이보다 먼저 투구를 양 팔로 보호한 채 신음을 홀렸다.
“끄윽, 엉덩이야…… 야,꼬맹아. 괜찮……
소년을 향해 괜찮냐고 말하려는 순 간,베킴은 헛숨을 들이켰다. 투구
속에 들어있던 얼굴이,상상조차 하 지 못했던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 문이다. 베킴이 입을 쩍 벌린 채 경 악하고 있을 때 천영은 엉덩이를 쓰 다듬으며 일어났다.
“아이고,다 늙어서 이제 허리도 아프네.”
그의 나이도 슬슬 서른줄을 바라보 고 있었다. 물론 신체 능력과 두뇌 회전 속도는 늙으면 늙을수록 더욱 활발해지는 드래곤이기에 오히려 전 성기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는 나 이의 앞자리수가 ‘3’이 되는 것이 영 거슬렸다.
“여,여자였냐?”
목소리가 보이쉬한 탓에 영락없이 소년인 줄로만 알았는데,막상 뚜껑 을 벗기고 보니 웬 천사 하나가 들 어있었다. 별 기대도 하지 않고 선 물상자를 깠더니 안에서 금은보화가 들어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남잔데……
천영은 한숨을 푹 쉰 다음 베킴이 들고있던 투구를 획 낚아챘다.
“야,그건……
“살게. 얼마야?”
“그거 엄청 비싸다구. 강철의 제국 시리즈의 가격을 갑옷 매니아라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그리 말하며 베킴이 손을 쭉 내뻗 자,천영은 투구를 양팔로 감싼 채 옆구리로 획 숨겼다.
“알고 하는 소리야. 나 돈 많아.”
“……그래,뭐. 많아 보이긴 한다 만.”
척 보아도 알 수 있을 만큼 천영 에게는 귀티가 흘렀다. 패션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꽤 대단한 디 자이너가 디자인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검은색 외
투라든가,희고 고운 살결이라든가. 고된 일을 한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누군가가 본다면 그저 귀족 가의 자제라고 오해할 법 했다.
베킴 역시 천영이 어딘가의 부잣집 아들내미쯤 되는가보다 싶었다.
“무슨 일이야?”
“아,선배님. 요 꼬맹이가 강철의 제국 일곱 번째 시리즈를 산다고 해 서요.”
“응?”
선임 대장장이는 천영을 빤히 쳐다 보았다. 천영 역시 그와 눈을 마주 했다.
“뭐…… 강철의 제국 시리즈는 사 실 관상용에 가까우니까 말이지. 수 집욕이 있는 사람이 사가는 거야, 별 문제는 없겠지.”
“그러시데.”
“후……
결국 베킴은 천영에게 강철의 제국 시리즈를 판매하는 수밖에 없었다.
“스텔라아우렘에서 왔다고?” “응,거기가 내 집이야.”
“거기,금색 별 마탑이라는 데가 있는 곳 아니던가?”
포유황 항구는 워낙 대륙의 끄트머 리에 위치했기 때문에 잘 모를 법도 했다. 게다가,이곳 인구의 대부분은 이종족이다. 인간의 비율이 적은 만 큼,금색 별 마탑의 이름이 많이 위 축되는 장소였다.
“상당히 멀리서 왔네.”
천영은 품에 강철의 제국 일곱 번 째 시리즈의 투구를 껴안은 채 뭐가 그리도 좋은지 방실방실 웃었다.
처음엔 저런 꼬마한테 갑옷을 판매 하는 것이 영 못마땅했던 베킴도,
천영이 저렇게까지 좋아하자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오히려 저렇게까지 좋아해주는 손님이 구매 해준 덕분에 뭔가 이유 모를 뿌듯함 이 생겨났다.
“여긴 뭐 때문에 온 거야?”
어차피 원정대 복귀까지 시간도 좀 있어서 지금 당장은 손님도 없겠다, 베킴은 이 작고 어린 손님에게 호기 심이 생겼다.
“카나라시움에 가려고.”
“카나라시움? 흠,그러고 보니 요 며칠 하이 엘프 누님들이 안 보이는 데.”
베킴은 입맛을 찜쩝 다셨다. 하이 엘프는 어딜 가도 절대 흔히 볼 수 있는 종족이 아니었다. 그들은 종족 그 자체로 서열을 따져서 인간을 평 민이라고 치면,하이 엘프는 귀족 등급일 것이다.
하이 엘프는 인간보다 수명이 훨씬 길었으며 빼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 었고 또한 신체 능력이 월등히 좋은 데다가 자연과의 교감 능력이 뛰어 났고 지력 또한 굉장히 뛰어나서 굉 장한 마법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모든 면에서 인간보다 우월한,그야 말로 상위의 존재들.
다만,그들이 인간보다 뒤떨어지는
게 있다면…….
‘욕심의 부재라고 했던가.’
그들은 욕심이 없었다.
세상이 어떻게 발전했는가. 지구가 어떻게 발전했는가. 그리픈의 중앙 대륙이 어떻게 발전했는가.
인간들의 덕택이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욕심을 위해 발전해왔다.
더욱 편안하게 살기 위해,더욱 강 해지기 위해,더욱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기 위해,더욱 아름다운 세상 을 위해.
하지만 엘프 종족에게는 욕심이 없 었다. 그렇기 때문에,이 대륙의 지 배자가 될 수 없었다.
“응? 꼬맹이,카나라시움에 간다고 했나?”
선임 대장장이가 커피 한 잔을 홀 짝이며 말했다.
“문제라도 있나요?”
“그러게. 나는 잘 모르지만,하여튼 있는 것 같긴 한데……
“왜요?”
“얼마 전부터 하이 엘프들이 안 보 이기 시작했거든.”
“아,맞아요. 이 앞 카페에 매일 아침 찾아오던 그 아가씨도 안 보이 던데요.”
베킴이 그리 중얼거리자 선임 대장 장이가 그의 등을 후려쳤다.
“여자는 그만 밝혀 이놈아!”
“크윽,그냥 구경만 했다구요!”
“아무튼. 카나라시움은 현재 다른 종족의 출입이 아예 제한되어있어.”
“예?”
그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란 말인가.
“카나라시움 내부에 무슨 일이 터
지면,그들은 그렇게 모든 것을 봉 쇄해. 저들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 결하려 들지.”
“뭐,이해는 갑니다만. 자존심 높은 하이 엘프 아니겠습니까?”
선임 대장장이와 베킴이 말을 주고 받는다. 천영은 창백해진 얼굴로 투 구의 깃부분을 만지작댔다.
‘젠장…… 여기까지 오는데 일주일 넘게 걸렸는데…….,
텔레포트 게이트와 비행정을 골고 루 이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주일이 나 걸렸다. 그렇다는 뜻은,이대로 돌아가 봐야 2주라는 시간을 그냥
허비하는 의미가 된다.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 아무튼 저 상태로 문 틀어막고 있을 땐 그냥 접근 안 하는 게 나아. 하이 엘프 나리들 뿔나면 무섭거든. 끌끌.”
엄지를 씹으며 천영이 고민하고 있 자 베킴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손백 을 쳤다.
“아,그러고 보니 가끔 예외가 있 긴 하더라. 금색 별 마탑의 일부 마 법사들은 출입을 하더라고.”
“금색 별 마탑이?”
“응,근데 그 마법사도 인간은 아 닌 것 같긴 했어.”
“어떻게 생겼는데요?”
“어…… 하여튼…… 남자였어. 키 도 크고. 몰라.”
금색 별 마탑에는 오히려 인간 마 법사가 더 적은 편이라 누군지 유추 하기는 힘들었다.
‘생각해보면,금색 별 마탑은 어쨌 든 전 종족 공통으로 신뢰도가 어느 정도는 있을 텐데……
아마,하이 엘프들은 자신들이 해 결하기 힘든 일이 생기면 금색 별 마탑에게 의뢰를 하는 모양이다. 레 이븐이 워낙 발 빠르게 전 세계를
활보하며 수많은 종족들과의 우호적 인 관계를 구축해놓은 덕분에,하이 엘프들 역시 조금이나마 문을 열어 주는 모양.
그것은 천영에게 있어서 꽤나 희소 식이었다.
-그리고 하이 엘프라면 주인이 굳 이 금색 별 마탑의 마법사가 아니라 도 반겨줄 거다.
“왜?”
-용이잖아. 그들은 신수를 숭상하 거든. 용은 신수들 중에서 가장 고 귀한 존재이지.
“생각해보니 그러네.”
굳이 졸 필요가 없었다.
“거기까지 가는 비행정은 있어요?”
“못 갈 걸? 근처에 가면 결계가 가로막거든. 자연석의 결계라던가. 마법도 아니라서 골 때리는 결계라 더라.”
“그건 상관없는데…… 아,혹시 거 리가 멀다거나?”
“멀진 않아. 비행정으로 가면 1시 간 안에 도착해. 하이 엘프들은 ‘하 이 그리핀’이라는 날개 달린 생물을 길들여서 타고 다니더라.”
그러니까 즉,날아가도 무난하다는 의미. 천영의 얼굴이 환해졌다.
“왜? 타고 갈 것이라도 있어?”
“네,여기로 오기로 했거든요.”
“그게 무슨……
휘이잉!
갑작스레,대장간 바깥쪽이 요란스 러워졌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 리가 들려온다. 베킴은 상체를 살짝 들어서 가게 바깥을 쳐다보았다. 천 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투구를 옆구 리에 낀 채 손을 흔들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어…… 어?”
문이 열리자,그것이 모습을 드러
새하얀 갈기,반짝이는 뿔, 현명한 눈동자.
신비로운 생명체,유니콘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와,천영의 곁에 안착했다. 그는 유니콘의 등 위로 가볍게 올라탔다. 그 장면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워, 감히 감탄사조차 내뱉을 수가 없었 다.
히히힘!
살짝 바람결이 사방으로 퍼져나가 더니 유니콘은 천영을 태운 채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베킴을 비롯해 사
람들은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느새,유니콘은 태양을 따라 저 하늘 너머로 사라진 뒤였다.
구름 사이를 질주하며,천영은 하 성의 등짝을 세게 후려쳤다.
“왜 이제 와? 또 여자 꼬시느라 늦었지?”
“아,아니. 오다가 그게…… 그래! UFO에 납치당했어!”
“뒤진다,진짜.”
절벽 너머에서 유니콘 한 마리의 절규가 울려 퍼졌지만 그 누구도 듣 지 못했다고 한다.